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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여순사건 이후 선무공작을 중심으로 본 지리산지구의 빨치산 진압(任松子/순천대)

연구논문


1. 머리말
2. 강경진압작전과 선무공작의 배합
3. 선무공작의 한계와 문제점
4. 맺음말


요약
여순사건 이후 지리산 지역의 빨치산 활동을 다룬 연구는 빈약할뿐더러 선무공작
에 대한 연구는 아예 없는 실정이다. 따라서 이 논문은 여순사건 이후 빨치산 진압을
위해 정부군과 경찰이 작전의 일환으로 전개한 선무공작 활동을 중점적으로 살펴보
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여순사건 이후 반군 진압에서 강경일변도의 진압방침이 변화했던 시기는 1948년
12월 중순 이후부터였다. 그리고 1949년 1~2월에 빨치산 출몰이 잦은 지역을
중심으로 선무공작을 실시하였다. 1949년 3월과 1949년 9월에 설치된 지리산지구
전투사령부에서도 빨치산 진압작전과 더불어 선무공작을 강화하였다. 따라서 1950
년 2월에 동계토벌작전이 완료되기까지 강경진압작전과 더불어 선무공작을 어떠한
방식으로 전개해 나갔는지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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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무공작은 어느 정도 실적을 거두어 빨치산 세력이 극도로 축소되었지만 여러
가지 문제를 발생시켰다. 선무공작 과정에서 귀순자에게 관대한 아량을 베풀겠다는
약속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정부와 군에 대한 불신을 키우는 요소로 작용했는데,
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검토하였다.


: 선무공작, 여순사건, 빨치산, 게릴라, 지리산, 귀순


1. 머리말
빨치산은 일제강점기 민족해방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었으며, 해방 후에는
1946년 10월항쟁 뒤 야산대 형태로 활동하였다. 여순사건 이후 반군의 지리산
입산과 빨치산 활동으로 본격적인 무장투쟁이 전개되었다. 유격대의 활동 지역
으로는 지리산과 호남 유격전구 외에 강릉·삼척을 중심으로 한 태백산 유격전
구, 대구 주둔 6연대 일부 병력이 입산하여 형성된 영남 유격전구, 4·3항쟁이
유격투쟁으로 전환되어 만들어진 제주도 유격전구 등이 있었다. 이러한 유격전
구 가운데 지리산 유격전구는 유격대의 총본산으로 알려졌다.1) 지리산 유격전
구는 전남 구례, 전북 남원, 경남 하동·산청·함양 등에 걸쳐 있었으며, 인근
산악과 중소도시에도 영향을 미쳤다.
정부군과 반군과의 교전은 오랜 동안 지속되었다. 정부군은 경찰과 합세하여
강경진압작전과 함께 진압작전의 일환으로 선무공작을 실시하였다. 선무공작
은 심리전의 한 형태이다. 보통, 평시나 전시를 막론하고 군사적 목적을 달성하
기 위한 긴요한 방법으로 심리전을 구사했으며, 심리전은 목적이나 운용에
따라 전략·작전·전술·선무심리전으로 구분할 수 있다.2) 선무공작은 적대세력
의 전의 상실이나 귀순, 투항을 유도하기 위한 하나의 전술로서, 적대세력의
심리를 유효적절하게 이용하는 것이 관건이다. 교전지역이나 그 인접 지역의


1) 전남일보 광주전남현대사기획위원회, ��광주전남현대사��, 실천문학사, 1991, 178
쪽.
2) 이윤규, 「6·25전쟁과 심리전 ‘들리지 않던 총성, 종이폭탄! 삐라’를 중심으로」,
≪한국근현대미술사학≫ 21, 2010.12, 1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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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이 적대세력에 동조하는 것을 차단하여 적대세력을 고립시키는 것도 선무
공작의 성공 여부를 가름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지금까지 여순사건을 다룬 연구는 상당히 축적되어 왔으며, 지리산 지역의
빨치산 활동을 밝힌 연구도 몇 편 나왔다.3) 하지만 군경의 빨치산 진압작전을
중점적으로 다룬 연구도 빈약할뿐더러 선무공작에 대한 연구는 아예 없는 실정
이다. 이로 인해 일명 ‘구 빨치산’에 대한 정부와 군·경의 진압 양상을 온전히
살펴볼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기의 심리전이나 선무공작이 어떠한
역사적 과정을 거쳐 변화되었는지 그 양상을 고찰하기 어렵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연구사적 한계를 메우기 위한 목적에서 여순사건 이후
빨치산 진압을 위해 정부군과 경찰이 작전의 일환으로 전개한 선무공작 활동을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여순사건이 일어난 1948년 10월 이후부터 동계토
벌 시기(1949.10~1950.2)까지를 대상으로 지리산지구에서 활동한 반군 진압을
위한 군·경의 선무공작을 구체적으로 검토하고, 선무공작에서 나타난 한계와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선무공작의 범위를 순회강연이나 삐라 살포 등을
통해 적대세력을 귀순으로 유도하려 했던 공작활동에만 한정하지 않고, 지역민
을 대상으로 한 계몽선전이나 의료활동, 정보공작 등으로 확대하여 파악하고자
한다. 또한 적대세력을 위협하거나 고립시키면서 지역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실시한 ‘비민분리공작’도 선무공작 활동에 포함시킬 것이다.


2. 강경진압작전과 선무공작의 배합
1) 선무공작의 개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2개월 만에 여순사건이 일어났다. 이제 갓 출범한
정부는 군대 반란으로 치명상을 입게 된 것이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로버츠(William L. Roberts) 고문단장, 무초(John J. Muccio) 주한미대사 등은


3) 이에 대한 연구 성과는 임송자, 「지리산권 근현대사 연구 성과와 과제」, ≪南冥學
硏究≫ 53, 2017.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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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전속결 방침을 정했고, 곧바로 군은 광주 주둔 제5여단 사령부에 반란군토벌
전투사령부를 설치했다. 또한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 이범석은 10월 22일 「반란
군에 고함」이라는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그는 “천인공노할 죄과를 이미 범하였
고 또 아직도 범하는 중에 있다”, “그 반역적 죄상은 국법이 도저히 용서치
못하는 바이다”, “국가의 단죄는 필히 준열 엄격할 것이며 추호의 관용도 없을
것이다”라고 천명하면서 한시라도 급히 투항하라고 경고했다.4) 여수를 탈환한
후 이승만 대통령은 담화를 발표하여 “亂賊輩에 편입된 자는 소상한 증거를
따라서 일일이 治罪할 것이며, 無知愚氓으로 남의 선동에 끌려 범죄한 자는
법대로 처리할 것”이라고 밝혔다.5)
정부군의 진압방식이 일제강점기 만주군의 토벌방식을 답습할 것임은 여순
사건 초기부터 예고된 셈이었다. 만주군 간도특설대에서 활약한 인물들이 반란
군토벌전투사령부의 핵심이 되었기 때문이다. 간도특설대는 만주지역을 중심
으로 독립운동가를 색출하거나 항일무장단체를 탄압하기 위해 설립되어 1938
년부터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존속하였다.6) 여기서 활약한 김백일 중령은
제5여단장으로 임명되었으며, 백선엽 정보국장이 반군진압의 모든 업무를 총괄
하였다. 그리고 출동부대장으로 제3연대장 함준호 중령과 제12연대장 백인기
중령을 배제하고 부연대장인 송석하 소령과 백인엽 소령이 임명되었다.7) 이승
만 대통령의 담화와 이범석 국무총리의 포고문은 여순사건 진압과 재산 빨치산
의 진압작전에 강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으며, 반군 진압에 나선 군·경은 이를


4) ≪경향신문≫ 1948년 10월 24일자, 「叛軍에 告함 國務總理 李範奭 將軍의 叛亂軍
에 對한 投降 勸告文」; ≪서울신문≫ 1948년 10월 24일자, 「“白旗를 들고 歸順하
라” 李 國防長官, 叛亂軍에 布告」.
5) ≪경향신문≫ 1948년 10월 29일자, 「叛徒는 嚴重 處斷 良民은 煽動에 속지 말라.
叛亂事件에 大統領 談話」.
6) 간도특설대의 설립과 활동에 대해서는 김주용, 「만주지역 간도특설대의 설립과
활동」, ≪한일관계사연구≫ 31, 2008.12; 曺健, 「일제의 간도성 ‘朝鮮人特設部隊’
창설과 재만 조선인 동원(1938~1943)」, ≪한국근현대사연구≫ 49, 2009.6; 김
효순, ��간도특설대��, 서해문집, 2014 참조.
7) 佐佐木春隆, ��韓國戰秘史 建軍과 試鍊�� 上, 兵學史, 1983(6판), 334∼336쪽; 김춘
수, 「1946∼1953년 계엄의 전개와 성격」, 성균관대 박사학위논문, 64쪽. 김백일,
백선엽, 송석하는 모두 간도특설대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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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과옥조로 여겨 강압 일변도의 무차별적 진압작전을 전개하였다.
여순사건은 전남 동부 6군으로 빠르게 파급되었고 반군이 지리산을 중심으
로 근거지를 구축하여 장기항전에 돌입했기 때문에 조기 진압이 초미의 관심사
였다. 따라서 가용할 수 있는 군을 대규모로 동원했으며, 진압의 강도를 더욱
높여 무자비한 진압작전을 전개하였다. 제주 4·3사건 초기에 경찰이 진압의
주도권을 잡았고, 진압 방식을 놓고 한때 경찰과 경비대 사이에 갈등관계가
형성된 바 있었지만 여순사건에서는 초기부터 진압방식을 둘러싼 군경 사이의
갈등관계는 형성되지 않았다. 군은 전면에 등장하여 사건 진압에 나섰다. 계엄
령 발포는 군이 사건 진압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결정적인 힘이 되었다.
정부수립 후 1948년 8월 24일에 체결된 「과도기에 있어서 군사와 안전에
관한 잠정협정」에 따라 주한미군은 작전지휘권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순
사건 진압에 주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깊숙이 개입했다고 볼 수 있다.
여순사건 발생 직후 10월 20일 미 임시군사고문단장 로버츠(William H. S.
Roberts)가 회의를 소집하여 대책을 논의했는데, 이 회의를 주도한 것은 미
임시고문단이었다. 회의에서 미국인 군사고문단 장교를 대동하여 진압작전을
펼치기로 결정했으며, 반란군토벌사령부에서 경비대 고문 하우스만(James H.
Hausman)을 비롯하여 8명이 활동했다.8) 하우스만의 회고에 따르면, 미 군사고
문단은 반군 진압의 작전개념으로써 4F전술을 한국군에 하달했다고 한다. 4F전
술은 ‘찾아서-고정시킨 후-싸워서-끝낸다(Finding-Fixing-Fighting-Finishing)’는
단어의 첫 머리글자를 딴 용어로,9) 이는 강경진압에 중점을 둔 작전개념이었다.
여순사건 초기, 군경에 의해 선무공작이 실시되었다는 사실을 밝힐 수 있는
자료는 거의 없다. 계엄령 하에서의 무차별적인 진압만을 보여주는 자료가
대부분이다. 다만, 11월에 선무공작을 실시했다는 기록이 있다. 國防部 戰史編
纂委員會에서 펴낸 ��對非正規戰史(1945~1960)��에서는 제12연대 백인엽 소령
의 지휘로 전개된 구례전투(1948.11) 이후, 행정당국과 협조하여 민심수습과
선무공작을 병행했다고 기술하였다.10) 구례전투에서 반군을 격퇴하자 국군에
8) 김득중, ��‘빨갱이’의 탄생: 여순사건과 반공 국가의 형성��, 선인, 2009, 225∼226쪽.
9) 짐·하우스만, 정일화 공저,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美軍대위��, 한국문원, 1995,
1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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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주민들의 태도가 갑자기 달라졌으며, 진압군은 주민들과 대화를 통해
식량을 배급하면서 선무활동을 전개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기록은 백선엽의
��실록 지리산��에 등장한다. 백선엽은 제12연대가 선무공작에 힘을 기울이면서
마을 주위에 울타리를 쳐 반군들의 연락망을 끊고 습격에 대비했으며, 이러한
방식은 빨치산 진압작전의 모형이 되었다고 밝혔다.11) 여기에서 등장하는 선무
공작의 실체를 파악하려면 10월 하순부터 11월 동안의 구례 상황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구례지역은 정부군이 순천과 여수를 탈환한 이후 반군과 정부군이 집중적으
로 교전을 벌인 곳이었다. 반군의 공격이 대규모로 이루어진 곳이기도 하다.
순천에서 퇴각한 반군과 광양 백운산 근방 산악지역으로 퇴각한 반군이 섬진강
을 건너 지리산에 집결했기 때문에12) 구례는 10월 하순부터 11월 사이에 구례에
서 크고 작은 교전이 벌어졌다. 반군은 백운산, 지리산 지역과 구례 동쪽 지역에
주둔하여 활동하였고, 국방경비대는 이러한 지역에서 진압작전을 전개하였다.
10월 26일에 반군은 마을 외곽의 경찰서를 점령했다가 퇴각하였다.13) 10월
28~29일에는 구례군 토지면 문수리에서 정부군과 반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
으며,14) 제12연대와 경찰부대는 29일 오전에 구례군 토지면의 국민학교에 설치
된 인민군사령부를 기습하였다.15) 문수리 교전 이후 4~5백 명으로 추산되는
반군은 인민군사령부를 철거하고 70~80명의 소부대로 편재하여 낮에는 산간
밀림지대에 잠복하다가 밤이 되면 산간마을로 내려와 보급투쟁을 전개하였
다.16) G-2보고서에서는 31일에 300여 명의 반군들이 제3연대에 의해 포위된
바 있으며, 11월 1일~2일 사이에 교전이 벌어져 구례지역에서 반군 23명이
10) 國防部 戰史編纂委員會, ��對非正規戰史(1945~1960)��, 1988, 79~80쪽.
11) 白善燁, ��실록 지리산��, 고려원, 1992, 234~235쪽.
12) HQ USAFIK, G-2 PERIODIC REPORT, 1948.10.23, 10.25, 10.27, 10.28.
13) HQ USAFIK, G-2 WEEKlY SUMMARY, 1948.10.29.
14) HQ USAFIK, G-2 WEEKlY SUMMARY, 1948.11.5; ≪경향신문≫ 1948년
10월 31일자, 「叛將 “宋郁” 逮捕. 國防部 發表 第七號」.
15) ≪경향신문≫ 1948년 11월 2일자, 「敵 司令部를 襲擊 求禮 方面 戰果 內務部서
發表」.
16) ≪자유신문≫ 1948년 11월 4일자, 「南原에도 戒嚴令 叛軍의 遊擊戰에 對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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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해되었고 20명의 반군과 10명의 민간인을 체포했다고 기록하였다.17) 또한
11월 3일 밤에는 김지회가 지휘하는 반군이 구례의 지서를 습격하고, 간전국민
학교에 마련된 하사관교육대 숙소를 습격했다. 그리고 11월 14일에는 제12연대
장 백인기가 반군의 매복에 걸려 도주하다 자결하여 15일에 산동면 시상리
시랑마을에서 시신을 수습하게 되는 일도 벌어졌다.
11월 초순에는 제3연대 2대대장 조재미 대위가 지휘하는 부대에 의해 주민을
부역혐의로 몰아 학살이 자행되었다. 백인기 사후에도 산동마을을 비롯한 구례
지역의 여러 곳에서 군인들의 보복학살이 자행되었다.18) 구례에서 반군 우위라
는 전세가 역전된 시기는 11월 중순 무렵이라 할 수 있다. 11월 19일에 반군이
구례중앙국민학교에 주둔하고 있던 제12연대를 습격한 사건이 발생하여 연대
장 백인엽의 지휘하에 교전이 벌어졌다. G-2보고서는 11월 19일 구례를 습격한
반군과 교전을 벌여 반군 203명 사살, 37명 체포라는 대전과를 거둔 것으로
기술하였다.19) 그런데 여기서 “반군 203명 사살”에 주의할 점이 있다. 메릴은
“정부군의 토벌대가 민간인들을 공비라고 몰아쳐 대량 학살한 것이었음이 거의
확실하다”고 주장하였다.20)
이러한 사실로 보아 앞의 두 기록은 선무공작과 거리가 멀었다고 볼 수
있다. 군이 주둔하면서 민간인 학살이 자행됐으며, 민간인을 대량학살하고도
교전을 통해 반군이 사살된 것으로 보고했으므로, 이러한 분위기에서 지역민의
민심수습이나 선무공작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國防部 戰史編纂委員會와 백선
엽의 기록은 정부군이 무차별적인 진압만이 아니라 선무공작을 전개함으로써
민심수습에 노력했다는 일면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에서 사실을 왜곡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설령 진압군이 선무공작에 노력을 기울였다고 하더라도 이는 지역
민을 설복시켜 협력을 이끌어 내는 방식이 아니라 생명을 위협하여 공포와
좌절, 그리고 무력감을 심어주면서 펼친 극도의 강압적인 전술이었다. 11월
17) HQ USAFIK, G-2 PERIODIC REPORT, 1948.11.1, 11.2, 11.3.
18) 노영기, 「여순사건과 구례-여순사건 직후 군대의 주둔과 진압을 중심으로」,
≪사회와 역사≫ 68, 2005, 54~56쪽.
19) HQ USAFIK, G-2 PERIODIC REPORT, 1948.11.20, 11.22.
20) J. R. 메릴 지음, 신성환 옮김, ��침략인가 해방전쟁인가��, 과학과 사상, 1988,
236~2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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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순에 김태선 수도경찰청이 “과거에 잘 알지 못하고 공산주의에 가담한 자라
도 이 기회에 각성개과하면 … 선량한 동포로 취급할 방침”21)이라는 내용의
경고문을 발표하였고, 보름이 지난 12월 상순에도 “좌익계열들의 선동을 받어
본의가 아니고 黨에 가입하여 고민하는 자들에게는 자수전향의 기회를 주기위
하여 문호를 개방”하겠다고22) 포고문을 발표하였지만 반군과 연결된 지역민이
이를 그대로 신뢰하였을지도 의문이다.
여순사건 뒤 지리산으로 입산한 반군을 대상으로 군에서 강경진압 작전과
병행하여 선무공작을 전개하고자 방침을 전환한 시기는 1948년 12월 중순
무렵이었다. 12월 중순에 정부군은 빨치산을 대상으로 귀순을 촉구하는 전단을
살포하기로 결정하였으며,23) 12월 27일 지리산 지역에 전단이 뿌려졌다. “친애
하는 제4·14연대의 사병 제군”이라는 문구로 시작된 이 전단에서는 “동족살상
의 무기를 버리고”, “정의의 사도 대한 육군에 가담하라”고 촉구하였다. G-2보
고서에 따르면, 지리산 지역에 항공기로 2만장의 전단을 살포했는데, 반군의
귀순을 유도하는 데는 실패했다고 한다.24) 실제로 여순사건이 발생한 이래
군경의 강경진압작전 과정에서 동료 병사와 가족, 그리고 수많은 지역민이
희생당한 사실을 목도했던 반군이 선무공작에 의해 쉽사리 귀순을 선택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여순사건은 군의 권한을 무제한으로 확대시키고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계엄령이 선포된 지역에서 군의 권한은 문자 그대로 ‘무소불위’였다. 계엄사령
관이 해당 지역의 사법권과 행정권을 장악하여 민간사회를 통제했고, 검열제를
실시하여 여론을 독점하고 통제했다.25) 군의 권한이 무제한적인 것에 비례하여
계엄 실시 지역에서의 일반 민중은 참혹한 고통을 받았다. 빨치산 진압작전이
21) ≪경향신문≫ 1948년 11월 24일자, 「金 首都廳長 共産徒輩 甘言에 속지 말라.
反省轉向者는 包攝하겠다」.
22) ≪경향신문≫ 1948년 12월 9일자, 「金首都廳長 布告文 發表. 左翼 諸公 轉向의
機會는 왔다」.
23) ≪남조선민보≫ 1948년 12월 17일자, 「叛軍에 歸順傳單 今明間 撒布 豫定」.
24) HQ USAFIK, G-2 PERIODIC REPORT, 1948.1.7.
25) 魯永基, 「1945~50년 한국군의 형성과 성격」,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
문, 2008, 211~2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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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차별적으로 진행되면서 계엄지구의 지역민은 주거 불안과 생계의 위협을
받았다. 앞서 언급한 구례군 산동면에서 진압군이 다수의 민간인을 즉결처분한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진압을 명분으로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이고도 불법적
인 학살을 여러 곳에서 자행했다. 또한 정부와 언론이 합세하여 빨치산에 대한
비인간화 담론을 생산해 내고 적대적인 이미지를 구축했으며, 빨치산에게 숙식
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통비분자’로 규정하여 처단하기도 했다.
군·경이 주둔하는 지역에서는 전투후방 보급에 소요되는 경비를 마을사람에
게 할당했고, 여러 가지 명목으로 기부금을 강요하였다. ‘향토방위와 군경작전
협조’라는 명목으로 마을에서 여러 개의 단체가 조직되었으며, 이들 단체원이
자행하는 행위도 지역민으로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각지에서 결성된
시국대책위원회는 ‘불량분자’나 ‘좌익분자’, ‘반동분자’를 소탕한다는 명분으
로 집집을 돌면서 구타, 납치 등 불법적인 행태를 일삼았다. 계엄령 지대에서는
“국회의원도 소용이 없고 대통령도 소용없다”고 폭언하는 군인이 있을 정도
로26) 무법천지의 공포와 전율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1949년 신년에 들어서 군은 보다 본격적으로 선무공작을 펼치겠다는 방침을
세워나갔다. 1월 1일 제5여단장 김백일 대령은 “전과를 자각하고 자수하여
귀순하는 반도는 무장을 해제시키고 그 자리에서 돌려보내 적극 선무책을 쓰겠
으나 끝까지 반항하는 자는 추호의 용서가 없을 것”이라면서 선무공작의 방향
을 밝혔다.27) 이러한 방침 변화는 군뿐만 아니라 경찰이나 관에서도 동시에
일어났다. 1월 5일에 제8관구경찰청장 김병완은 “잘못을 느끼고 자수하는 자는
절대로 포옹”하겠다는 담화를 발표했으며,28) 관에서도 군·경의 선무활동을
적극 지원하겠다는 태세를 갖추어 나갔다. 이어서 계엄사령관 제5여단장 김백
일, 전남도지사 이남규, 제8관구 경찰청장 김병완의 공동명의로 포고문을 발표
하였다.29)
26) ��국회속기록�� 제2회 제14호, 1949.1.26.
27) ≪호남신문≫ 1949년 1월 4일자, 「戒嚴令은 不遠 解除. 宣撫에 注力·歸順叛徒를
包攝. 第5旅團長 金白一 大領 新年 所感 披瀝」.
28) ≪호남신문≫ 1949년 1월 7일자, 「殘徒 半數 以上 殲滅. 改悛 自首叛徒는 包攝
用意있다. 第 8管區 金 廳長 年頭方針 披瀝」.
29) ≪호남신문≫ 1949년 1월 9일자, 「歸順하면 抱擁方針. 戒嚴地區 司令官·知事·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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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군·경·관의 방침 변화는 첫째, 국회의 압력이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2월에 들어서 국회는 본격적으로 계엄지역에서 겪는 지역민의 고통을
호소하면서 계엄령 해제 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하였다. 12월 3일 서용길 의원은
계엄이 실시된 지 오래되었는데도 정부에서 국회에 보고조차 하지 않은 것을
문제 삼았으며, 12월 8일 이범석 국방부장관을 출석시킨 국회에서 또다시 계엄
령 해제를 거론하였다. 이날 국회는 계엄지역이나 소요지역의 출신 의원을
중심으로 선무반 파견을 가결하였다.30) 국회는 12월 21일부터 이듬해 1월 하순
까지 선무반으로 파견된 각 의원들의 귀환보고를 몇 차례에 걸쳐 진행하였다.31)
이러한 과정에서 국회의원 다수는 현지 실정을 보고하면서 계엄령 해제를 강경
하게 주장하였다. 일부 계엄령 해제를 반대하는 의원이 있었지만 계엄령 해제
주장은 대세를 이루었다.32) 이러한 국회의 압력에 대응하여 나온 것이 군·경·관
의 선무공작 방침이었다. 국회의 비판에 대응하고, 실추된 군의 위신을 회복하
고, 지역민으로부터 신뢰를 회복할 필요가 있어 선무공작을 실시하고자 방침을
세운 것이다.
둘째, 빨치산의 동태에 따른 대응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지리산지역에서
활동하던 빨치산은 겨울로 접어들면서 식량공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산중
에서 식량 확보가 어려워 이들은 20~30명, 많으면 70~80명씩 무리를 지어
전남북과 경상도 지역의 지리산 인근의 마을을 습격하여 생계를 해결하였다.
빨치산은 지리산 지역을 벗어나 순천, 보성, 벌교 등지에서도 빈번히 출현하였
다. 벌교와 순천에서 반군에 의한 파출소 습격, 철로 파괴, 전화선 절단 등이
빈번히 일어났고, 12월 17일~18일 사이에 전라남도 지역에서 반군의 습격으로
군, 경찰, 민간인 30여 명이 살해되는 사건도 벌어졌다.33) 따라서 순천, 광양,
보성, 벌교, 구례, 곡성 등지에서 반군을 고립시키기 위해 지역민을 대상으로
長 共同名義로 布告文을 發表」.
30) ��국회속기록�� 제1회 제124호, 1948.12.8.
31) ≪경향신문≫ 1948년 12월 22일자.
32) ��국회속기록�� 제2회 제13호, 1949.1.25; ��국회속기록�� 제2회 제14호, 1949.1.
26.
33) HQ USAFIK, G-2 PERIODIC REPORT, 1948.12.7, 12.9, 12.16, 12.17, 12.22,
12.27.
여순사건 이후 선무공작을 중심으로 본 지리산지구의 빨치산 진압 193
한 대민 계몽활동을 전개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극한상황에 몰려 있는 반군
을 대상으로 대적 선무공작을 전개할 경우 귀순자가 증가할 것으로 보았다.
셋째, 유엔에서의 한국정부 승인과 유엔한국위원단 입국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1948년 12월 12일 유엔 파리총회에서 대한민국정부를
승인했으며, 총회에서 가결된 결의에 따라 유엔한국위원단이 입국하게 되었다.
1949년 1월 30일에 사무국원 선발대 15명이 서울에 도착했으며, 이어서 중국,
프랑스, 인도, 필리핀 대표 등이 2월초에 입국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시기에
이승만 정부는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이는 강경진압작전을 완화하여
온건한 방식의 선무공작을 실시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군에서 귀순을 권유하는 포고문을 발표하고 대대적으로 선무공작을
실시하자 언론에서는 적극 환영하였다. ≪동아일보≫는 사설을 통해 “귀순권유
의 포고문이 너무 늦게 발포된 것은 적지 않은 유감”이며 “만시지탄”이라고
표명하면서 적절한 조처라고 환영하였다.34) 군·경의 선무공작 실적을 지나칠
정도로 추켜세우기 위한 목적에서였겠지만, 중앙일간지를 비롯한 지방일간지
도 1949년 1~2월의 기간 동안 현지에서 전개된 선무공작 활동을 자세히 보도하
여 사회적인 관심을 환기시켰다.
2) 군·경·관 합동의 선무공작 실시
군·경·관 합동의 선무공작은 선무공작대를 조직하여 실시하였다. 제5여단에
서는 1월 8일에 반도귀순촉진위원회 특별선무공작대(이하 특선공대)를 조직하
였고,35) 특선공대장으로 육군소령 이영규를 임명하였다. 특선공대는 먼저 ‘귀
순문’을 발표하는 것으로 활동을 개시하였다. 1월 12일, 제5여단 특선공대장
이영규 소령의 명의로 ‘귀순문’을 발표하였다.36) ‘귀순문’에는 귀순요령도 밝혀
34) ≪동아일보≫ 1949년 1월 20일자, 「(社說) 歸順 勸誘를 徹底히 하라」.
35) ≪동아일보≫ 1949년 2월 1일자, 「눈물겨운 軍警의 活動. 民心收拾이 急先務
災地 住民 負擔이 過重」.
36) ≪호남신문≫ 1949년 1월 14일자, 「疑訝를 버리고 歸順하라. 宣撫工作隊長 옛
戰友의 懇請文」.
194 한국근현대사연구 제81집 2017년 여름호
놓았는데, 이에 따르면 귀순자를 무기휴대 여부로 구분하여 귀순의 진위를
가리고자 하였다. 무기휴대자는 “즉시 무조건 석방”하겠다고 하면서도 무기를
휴대하지 않고 귀순하는 경우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따라서 무기를
휴대하지 않고 자수해 오는 자에 대해서는 모종의 절차를 밟은 후 처리하겠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특선공대는 군·경·관·민이 합작한 조직이다. 군 보도대, 도청 공보과, 경찰
홍보실, 각 청년단체 의용단, 군 후방부, 시국대책위원회, 국민회, 광주의대생,
육군병원, 도립병원 등에서 참여하였다. 그리고 특선공대 조직을 수색대와 계몽
대, 의무대로 편성하였다. 수색대는 반군의 잠복지 탐색과 색출 임무를, 계몽대
는 선무업무를 담당하였다. 그리고 광주의대생과 육군병원, 도립병원의 의료진
으로 구성된 의무대는 무료 진찰과 치료를 담당했다.
1월 15일부터 선무공작대의 현지 활동이 시작되었다. 이때 계엄사령관 제5사
단장 김백일 대령은 계엄 하의 민심안정, 귀순공작, 군경의용단의 불법행위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담화를 발표하였다.37) 담화에서 김백일은 “군 자체가
일반 국민의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점, 그리고 군경의용단의 불법행위가
일어나고 있는 점에 유감을 표명하면서 이를 시정하고 숙청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계엄지역에서 시행하고 있던 여행증명제를 곧 폐지할 것이라고 언명하
였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계엄령을 계속 유지할 것이며,38) 귀순공작이 완료되
면 즉시 폐지할 것이라고 밝힌 점이다.
주한미군 정보부는 사면 약속을 반군이 신뢰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선무공작이 성공을 거둘 것으로 기대되지 않는다고 평가하였다. 제5여단
제20연대장 위대선 중령은 투항하는 어떠한 공산주의자라도 사면위원회로 보
내질 것이라고 선언했으며, 이러한 내용의 전단을 육군 연락기를 동원하여
지리산 지역에 살포하였다.39)
37) ≪동아일보≫ 1949년 1월 18일자, 「全南 戒嚴令 當分間 繼續」.
38) 김백일은 1월 1일에 기자단과 회견하는 자리에서 전라남북도에서의 계엄령을
수일 내에 해제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로부터 8일이 지난 후 신년벽두의
말을 뒤집어 “계엄령은 작전상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고 하였다. ≪남조선민보≫
1949년 1월 13일자, 「戒嚴令 當分 繼續. 自首者는 包攝 第五旅團長 談話」.
39) HQ USAFIK, G-2 PERIODIC REPORT, 1949.1.15.
여순사건 이후 선무공작을 중심으로 본 지리산지구의 빨치산 진압 195
특선공대는 1월 15일부터 15일간 보성, 벌교, 광양 등 각지를 순회하면서
선무공작 활동을 펼쳤다. 지역을 구분하여 16~20일까지 보성, 21~25일까지
벌교, 26~29일까지 순천·광양에서 활동하는 것으로 계획하였으나40) 현지 사
정에 따라 일정이 조정되었을 가능성이 있다.41) 그런데 특선공대 활동에 수많은
지역민이 참여했다는 점이 주목되는데, 이는 아마도 특선공대 이름으로 지역민
을 동원하기 위해 압력을 행사했을 가능성이 높다.
군·경·관·민으로 조직된 특선공대의 활동과 별개로 경찰 조직 중심의 선무공
작 활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제8관구경찰청에서는 특선공대의 활동지역보다
범위를 넓혀 순천, 벌교, 보성, 장흥, 강진, 해남, 진도, 완도, 운암, 나주 등
10개 군을 순회했으며, 산간마을을 돌면서 선전과 계몽활동을 전개했다.42)
이러한 제8관구경찰청의 독자적인 활동은 경찰조직의 장점을 활용하여 선무공
작의 효과를 높이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경찰조직은 군 조직과 달리 군·읍·면에
경찰서와 지서가 있기 때문에 대민활동에 유리한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구례경
찰서에서도 귀순공작과 선무공작 활동을 전개하였다. 1월 24일부터 군청, 경찰,
국민회 간부 등으로 귀순공작대를 구성하여 각 면이나 읍을 순회하면서 사상
전환과 귀순을 촉구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43)
제2차 선무공작은 2월 중순부터 시작되었다. 제2차 특선공대는 제1차 때와
마찬가지로 군·경·관·민을 망라했으며, 구성인원은 200명이었다.44) 그리고 그
40) ≪동광신문≫ 1949년 1월 21일자, 「暗黑에서 光明으로 눈물어린 歸順者의 回顧
談. 金在禧 記者 宣撫工作隊 從軍記(1)」.
41) 특선공대가 현지에서 행한 구체적인 활동에 대해서는 ≪동아일보≫ 1949년 1월
21일자, 「第五師團 宣撫工作」; ≪군산신문≫ 1949년 1월 21일자, 「第五師團 宣
撫工作 開始」; ≪조선중앙일보≫ 1949년 1월 21일자, 「五師團서 宣撫工作 開始」;
≪동아일보≫ 1949년 1월 21일자, 「第五師團 宣撫工作」; ≪동광신문≫ 1949년
1월 22일자, 「叛暴徒 二九七名 歸順. 宣撫工作隊 繼續 凱歌」; ≪호남신문≫ 1949
년 1월 27일자, 「“歸順만이 사는 길” 呻吟하던 山村에 漸次 喜色」: ≪동광신문≫
1949년 1월 28일자, 「筏橋地區만 三六五名 宣撫工作隊에 歸順者는 陸續」; ≪동
광신문≫ 1949년 2월 1일자, 「가는 곳마다 大成果 宣撫隊 偉勳 남기고 凱旋」.
42) ≪동광신문≫ 1949년 1월 28일자, 「宣撫工作 成果 多大. 金 廳長 十個 郡 巡廻코
歸還」.
43) ≪호남신문≫ 1949년 1월 27일자, 「求禮警察署서도 宣撫工作을 推進」.
44) ≪동광신문≫ 1949년 2월 17일자, 「宣撫工作隊 二次로 ○○方面에. 趙孝錫 記者
196 한국근현대사연구 제81집 2017년 여름호
조직을 본부, 계몽부, 경호부, 군의부, 군악부, 보도대 등으로 편성하였다.45)
이는 수색대, 계몽대, 의무대로 조직되었던 1차 때와 비교하여 세분화되고 체계
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계몽대를 계몽부로, 의무대를 군의부로 바꾸었으며,
수색대를 없애고 경호부, 군악부, 보도대를 신설했다. 특선공대장 이영규 소령
이 여수 제15연대 부연대장으로 전임하게 되어 제2대 특선공대장으로 임대순
대위가 취임하였다.46)
제1차 때와 마찬가지로 지방을 순회하면서 활동을 전개하였다. 활동의 중심
지는 곡성과 구례지역이었다. 2월 17일 특선공대가 곡성에 도착하였고, 18일부
터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이어서 삼기면(19일), 석곡면(20일), 목사동면(21
일)에서47) 활동했으며, 이후 26일까지는 구례 지역에서 선무공작 활동을 전개
하였다. 선무공작대는 선무활동과 더불어 진압작전을 병행하기도 했다.48)
3) 선무공작의 다각화
정부군은 빨치산 진압의 호기가 겨울철인데도 1948년 12월부터 1949년 1~2
월 사이에 대규모의 공세적인 작전을 펼치지는 않았다.49) 정부군이 공세를
從軍」; ≪동광신문≫ 1949년 2월 18일자, 「大擧 歸順 豫想 二次 宣撫工作 展開」.
≪동광신문≫ 1949년 2월 17일자는 제2차 특별선무공작대는 120명으로 편성되
었다고 보도하였으나, 공작대장 임대순이 출발 직전의 담화에서는 200명으로
편성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45) ≪동광신문≫ 1949년 2월 17일자, 「宣撫工作隊 二次로 ○○방면에 本社 趙孝錫
記者 從軍」; ≪동광신문≫ 1949년 2월 18일자, 「大擧 歸順 豫想. 二次 宣撫工作
展開」.
46) ≪호남신문≫ 1949년 2월 13일자, 「宣撫工作隊長에 任大淳 大尉 就任」.
47) ≪동광신문≫ 1949년 3월 1일자, 「宣撫와 作戰을 倂行 特宣隊의 成果 多大」.
48) 이러한 예는 20일 곡성 석곡면에서의 활동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동광신문≫ 1949년 3월 1일자, 「宣撫와 作戰을 倂行 特宣隊의 成果 多大」
참고.
49) G-2보고서는 반군에 대한 진압작전은 소규모로 전개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백선엽은 “병사들의 훈련 상태, 보급 능력 등으로 보아 군 스스로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대규모의 공세적인 작전을 펼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하
였다. HQ USAFIK, G-2 PERIODIC REPORT, 1948.12.7; 白善燁, ��실록 지리
산��, 239~241쪽.
여순사건 이후 선무공작을 중심으로 본 지리산지구의 빨치산 진압 197
늦추자 빨치산은 산악지역 마을을 대상으로 정치공작을 활발히 전개했으며,
1949년 봄에 이르러서 무장활동을 재개하였다.50) 이러한 상황에서 육군본부는
1949년 3월 1일을 기하여 적극적인 공세로 전환시켰다. 부대 배치를 새롭게
정비하고 빨치산 진압작전을 강화하기 위해 남북으로 나뉘어 있던 호남방면전
투사령부를 지리산지구와 호남지구로 구분했다. 지리산지구전투사령부(이하
지전사)는 남원에, 호남지구전투사령부는 광주에 사령부를 두었으며, 사령관으
로 정일권과 원용덕을 각각 임명하였다. 지전사 예하에 작전부대로 6개 보병대
대와 5개 전투경찰중대, 1개 독립유격대가 배속되었으며, 이들 부대가 지리산
일대에서 빨치산 진압작전에 나섰다.51) 지전사 사령관 정일권이 작전에서 중점
을 둔 사항은 ① 평화적으로 항복하는 반군에 대한 사면, ② 민간인 재교육,
③ 민간인을 괴롭히는 육군 요원에 대한 엄격한 징계, ④ 반군에 대한 계획적인
색출 작전, ⑤ 반군 지도자 김지회 체포 등이었다. ①, ②, ③항은 선무공작
관련 작전이었다. 강경진압과 함께 선무공작을 채택한 정일권 사령관의 이러한
계획에 대해 주한미군 정보부는 작전의 정치적 효과와 반군의 급속한 근절을
위해 현명하게 대처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했다.52)
이 시기에는 지역민에 대한 정보공작 강화, 빨치산 유격대 ‘완전 소탕’ 등을
목표로 삼고, 김지회와 홍순석의 주력부대를 반격하는데 집중하였다.53) 지전사
는 빨치산 진압 작전을 3단계로 구분하여 실시하였다. 제1단계는 3월 초순에
부대를 남원·구례·화개장·하동·진주·산청지역에 분산배치하여 작전을 실시하
였다. 제2단계는 3월 11일부터 노고단·반야봉·천왕봉 일대를 중심으로 지리산
맥의 남과 북을 순차적으로 이동하면서 작전을 펼쳤다. 제3단계는 3월 16일부터
50) 白善燁, ��실록 지리산��, 239~241쪽.
51) 國防部 戰史編纂委員會, ��對非正規戰史(1945~1960)��, 81~82쪽. 孔國鎭, ��한
老兵의 哀歡��, 원민, 2001, 60쪽. 지리산전투사령부 예하 3연대 2대대(조재미
대위)를 구례군 산동에, 3연대 3대대(한웅진 대위)를 거창에, 5연대 3대대(임익
순 대위)를 산청에, 9연대 3대대(이철원 대위)를 화개장에, 19연대 1개 대대를
진주에, 서울유격대(김용주 소령)를 남원군 운봉면 마천에 배치하였다.
52) HQ USAFIK, G-2 PERIODIC REPORT, 1949.3.23.
53) ≪호남신문≫ 1949년 3월 12일자, 「金智會 指揮 叛徒 主力部隊와 智異山麓서
交戰中. 叛徒 130名 死亡 完全 殲滅도 在邇」.
198 한국근현대사연구 제81집 2017년 여름호
거창·함양 등지로 부대를 이동시켜 작전을 전개하였다.54) 이러한 작전기간
동안 지전사 예하 각 부대는 지리산 자락 주요 마을에 포진하여 주민들을
대상으로 정보수집활동을 전개하였다.55)
지전사에서 작전참모로 활약했던 공국진에 따르면, 지리산지구 평정계획에
서 비민분리작업을 主로 하고 군사작전을 從으로 하였다. 일부 병력과 행정기관
을 동원하여 비민분리공작을 추진하여 반군의 糧道와 정보원을 차단했으며,
민통선 설치, 외딴 가옥과 ‘부락’의 강제철거, 통행증 발급, 민심수습공작 등을
실시하였다.56) 지리산지구에서 언제부터 소개작전이 시작되었으며, ‘집단부락’
을 축조하였는지 아직 자세히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제주 4·3항쟁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1948년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이 내린 포고령을 계기로 소개작
전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경험이 지리산지역에도 영향을 미쳐
주민을 강제로 이주시키고 ‘집단부락’과 방어시설을 구축했으며, 주민 감시와
통제를 위해 양민증을 발급했고, 민보단을 강화했으며, 보갑제를 실시하였다.57)
지전사의 토벌작전은 성공을 거두었다. 4월 9일에는 남원군 산내면 반선리에
서 반군 총사령관 홍순석이 사살당했으며, 참모장 김지회는 중상을 입고 토벌대
에 쫓기다가 반선리에서 생을 마감하였다.58) 홍순석은 1948년 12월에 사망했다
는 증언이 있으며, 14연대 반란을 주도했던 지창수는 1948년 말에서 1949년
3월 이전에 사망했거나 사로잡혔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에 따라 1949년 4월에
이르러 14연대 출신의 초기 지도부가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59) 군에서는
54) 國防部 戰史編纂委員會, ��對非正規戰史(1945~1960)��, 83~84쪽.
55) 白善燁, ��실록 지리산��, 250쪽.
56) 孔國鎭, ��한 老兵의 哀歡��, 62~63쪽.
57) 김은희, 「제주 4·3전략촌의 형성과 성격」, 제주대학교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05, 9~13, 20~28쪽.
58) HQ USAFIK, G-2 PERIODIC REPORT, 1949.4.11, 4.27; ≪경향신문≫ 1949
년 4월 12일자, 「智異山 叛亂輩 主力 撲滅. 蔡參謀總長 特別發表」; ≪서울신문≫
1949년 4월 12일자, 「叛徒 總司令 射殺. 蔡少將, 智異山地區 戰果 發表」; ≪호남
신문≫ 1949년 4월 12일자, 「智異山 叛徒 總司令 洪淳錫과 金智會 妻 射殺. 蔡秉
德 參謀總長 特別發表」; ≪동아일보≫ 1949년 4월 13일자, 「叛徒 洪淳錫과 金智
會 妻를 射殺」; 이태, ��여순병란�� 하권, 청산, 1994, 108~110쪽. 언론에서는
조경순이 사살되었다고 보도하였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뒤에 생포되었다.
59) 이선아, 「여순사건 이후 빨치산 활동과 그 영향」, ≪역사연구≫ 20, 2011.6,
여순사건 이후 선무공작을 중심으로 본 지리산지구의 빨치산 진압 199
반군 진압이 일단락된 것으로 보고 5월 9일 지전사를 해체하였다.60) 이후 호남
지구 진압작전은 제5사단 예하 제15연대(순천), 제20연대(광주), 제3연대(남원)
에서 수행했으며, 경남 북부지역 함양군과 산청군에서는 제23연대 제1대대와
8월 하순 진주에 주둔한 해병대 부대가 담당하였다.61)
지역을 순회하면서 실시했던 선무공작은 지전사 설치 후 한동안 실시되지
않다가 4월 6일부터 재개되었다. 그런데 이때는 특선공대가 사라지고, 기구를
대폭 축소하여 22명으로 구성되는 선무반으로 편성하였다. 그리고 그 활동은
이 당시 빨치산 출몰이 빈번한 지역인 함양을 비롯하여 산청, 하동, 거창, 합천
등지에서 전개하였다.62)
이 시기에는 선무공작을 체계화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1948년 11월(혹은
12월)에 국방부 산하에 설치된 정훈국은 1949년 3월에 이르러 육군본부로 이관
되었는데,63) 이때 정훈국에서 제1기 정훈장교 62명을 선발하여 양성하였으며,
이들 정훈장교들을 지리산과 태백산지구로 파견하여 선무공작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정훈장교는 대내공작과 더불어 군민합작이라는 대외공작을 목표로
방송, 보도, 강연, 전시 등 정훈공작을 전개하였다.64) 이러한 사실만을 보아도
186~187쪽.
60) HQ USAFIK, G-2 PERIODIC REPORT, 1949.5.9.
61) 이들 부대는 빨치산과 지역주민과의 연계를 차단하기 위해 선무공작을 실시하였
으며, 해병 진주부대는 주민계몽을 위한 순회강연, 영화상영, 농번기 대민지원
등을 실시하였다. 孔國鎭, ��한 老兵의 哀歡��, 75쪽; 國防部 戰史編纂委員會, ��對非
正規戰史(1945~1960)��, 96~99쪽.
62) ≪민주중보≫ 1949년 4월 7일자, 「叛亂地區에 宣撫班」; ≪동광신문≫ 1949년
4월 17일자, 「躊躇말고 歸順하라! 宣撫工作 大講演會」. 선무공작대 제3차 활동을
마친 후 4월 16일에 귀순촉진위원회 위원장 원용덕 준장, 이남규 지사, 김병완
경찰국장, 임대순 선무공작대장 등이 참가한 가운데 선무대회를 개최하였다.
63) 김지훈, 「창군기 한국군 政訓의 도입과 성격」, 연세대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16, 21쪽. 이범석 국방장관은 군 내부의 사상통일과 반공정신 함양을 목적으
로 하는 정훈공작 추진을 강조하였으며, 국방부 산하에 정치국을 설치하려는
구상을 하였다. 그 결과 1948년 11월 29일 국방부에 정훈국을 설치하기로 하였
고, 12월 7일 「국방부 직제」에 의해 정식으로 창설되었다. 국방부 정훈국은 1949
년 3월에 이르러 육군본부로 이관되었으며 1949년 5월 14일에는 육군본부 정훈
국을 정훈감실로 개편하였다.
64) 大韓民國 國防部 政訓局 戰史編纂會 編, ��韓國戰亂 一年誌��, 1951, A51~A52쪽.
200 한국근현대사연구 제81집 2017년 여름호
군에서는 선무공작의 중요성을 지속적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이를 체계화하
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육군본부 작전교육국에서는 3월 10일에 ��政工典範(草案)��을 제작하여
정훈공작을 체계적으로 실시하고자 하였다.65) ��정공전범(초안)��은 크게 「강령」
과 「평시공작」, 「전시공작」으로 구성되었다. 「평시공작」에서는 정훈공작의 기
구와 활동, 부대 훈련, 민중공작, 선전 등을 다루었으며, 그리고 「전시공작」에서
는 전투 전, 전투 중, 전투 후의 정훈공작원 임무를 제시하였다. ��정공전범(초
안)��에 따라 교육·훈련을 받은 정훈공작원은 이후 선무공작에서 일정 정도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지리산지구 전투사령관 정일권이 반군의 중심인물인 김지회와 홍순석을 제
거하고 조경순을 생포하는 등 무훈을 세울 수 있었던 것도 선무공작이 주효했기
때문이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지리산지구 전투사령부 예하의 각 부대는 주민들
을 대상으로 활발한 정보수집 활동을 벌였는데 정보수집 활동은 당연히 대민
선무공작과 병행하여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정보수집 활동, 대민
선무공작을 바탕으로 정보망이 가동되었으며, 여기에 반군 지휘부가 걸려들었
던 것이다.
한편 대한무의촌이동자선시료단(이하 대한시료단)은 선무공작대(이하 선공
대)를 구성하여 활동에 나섰다. 대한시료단은 무의촌 시료와 선무공작을 목적으
로 김대식이 중심이 되어 1949년 2월에 조직되었다. 대한시료단의 선공대는
전속의사와 간호사, 제5육군병원 의사, 간호장교, 그리고 의대생과 일간기자
등 30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4~5월 동안 함양, 산청, 하동 등지에서 순회
진료와 병행하여 선무활동을 전개하였다.66)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특선공대에 의료반이 포함되어 무료진료 활동을
벌였으나 이는 특선공대의 일원으로 포함되어 부차적으로 전개된 것으로 볼
65) 國防部 陸軍本府 作戰敎育局, ��政工典範(草案)��, 兵學硏究社, 1949. ��政工典範(草
案)��은 1942년 국민당 군사위원회 정치부에서 펴낸 ��政工典範草案��을 모방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김지훈, 「창군기 한국군 政訓의 도입과 성격」 참고.
66) ≪민주중보≫ 1949년 4월 14일자, 「宣撫工作隊 一行 30名 出發」; ≪민주중보≫
1949년 5월 3일자, 「第二次 無醫村民施療行 物心兩面의 宣撫工作 成果 期待」.
여순사건 이후 선무공작을 중심으로 본 지리산지구의 빨치산 진압 201
수 있다. 그런데 대한시료단의 선공대 활동은 지리산권에서 집중적으로 무료진
료 행위를 했다는 점에서 특선공대의 활동과 차이가 있다. 또한 대한시료단은
7월부터는 제103여단과 결합하였다. 대한시료단장이 제103여단 선무공작대장
으로 임명되어 활동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무료진료 행위에 중점을 둔 선무공
작이었다.
4) 군·경 합동의 진압 작전과 선무공작의 강화
유격투쟁은 전남북, 경남북 산악지대에서 산발적으로 전개되었으나 1949년
7월에 이르러 보다 조직적이고 대규모로 전개하기 위해 유격대를 통합하여
인민유격대로 편성하였다. 각 지구별로 3개 병단이 편성되었다. 오대산지구는
제1병단, 지리산지구는 제2병단, 태백산지구는 제3병단이었다. 지리산지구의
제2병단 밑에는 제6연대, 제7연대, 제8연대, 제9연대가 있었다.67) 조직을 개편
한 후 인민유격대와 3개 병단, 그리고 각 지방의 야산대는 관공서가 밀집되어
있는 도시 또는 경찰서, 군사령부 등을 정면공격하는 이른바 ‘아성(牙城)공격’이
라는 전술을 채택했다.68)
이러한 상황에서 7월 22일 육군본부 정보국장 백선엽 대령이 제5사단장에
취임함으로써69) 반군에 대한 강도 높은 진압이 예고되었다. 육군본부 정보국장
으로 있던 그는 여순사건 이후 숙군을 진행하는 부서의 최고 책임자로 있었다.70)
제5사단의 작전지역은 호남·지리산지구였는데, 백선엽은 취임 제1성으로 “사
태 수습에 적극적이고 철저한 방침으로 임하겠다. 공비 반란도배는 물론이요
67) 김남식, ��남로당 연구�� I, 돌베개, 1984, 412~413쪽. 제6연대는 지리산에 본거
를 두고 산청군, 함양군, 구례 북부, 남원군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제7연대의
사령부는 백운산에 있었고, 활동지역은 순천 남부, 곡성 북부, 하동, 광양, 구례
남부였다. 제8연대는 조계산에 본거를 두었으며, 공작지역은 순창군, 화순군,
곡성 남부, 순천 북부였다. 제9연대는 덕유산을 중심으로 무주, 장수, 거창군
일대에서 활동했다.
68) 김남식, ��남로당 연구�� I, 417쪽.
69) 白善燁, ��실록 지리산��, 275쪽.
70) 魯永基, 「1945~50년 한국군의 형성과 성격」, 1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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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라도 대한민국에 위반한 일체의 요소를 소탕”할 것이며, 지금까지의 미온
적 대책을 완전히 포기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71)
또한 이 시기에도 ‘집단부락’ 축조는 계속되었다. 내무부는 군·경과 긴밀한
연계 하에 ‘비민분리’원칙을 적용하여 지리산 부근 일대에 산재한 마을들을
소개하고 ‘집단부락’을 축조하였다.72) 집단부락은 50호 이상 100호 미만으로
그 주위에 높은 담을 쌓아 만든 것으로 주야로 경비를 하여 빨치산의 보급투쟁
을 차단하려는 목적에서 세워진 것인데, 여기서도 선무공작을 실시하였다.
지리산지구에서 강경진압 태세를 갖추고 있던 상황에서 빨치산은 8·15를
전후하여 공세를 강화하였다. 지리산권 외에도 전남의 영광, 화순, 순천, 무안,
함평 등에서 빨치산들이 지서를 습격하거나 마을에 출현하여 군·경과 교전이
벌어지는 상황이 지속되었다.73) 또한 철도 파괴, 전선 절단 등의 사건이 하루에
도 4, 5건씩 발생하기도 했다.74) 이리하여 전남 각지의 촌락에 있는 지서는
성벽과 같은 방탄벽을 설치했으며, 심산의 지서원들은 대낮에도 변장을 하고
다녀야 할 정도로 반군의 산발적인 저항이 계속되었다.75) 9월 16에는 전남도당
내 백운산 특수지구당 유격대장 박종하가 지휘하는 빨치산이 광양경찰서를
습격함으로써 군·경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기도 했다.76) 9월 22일에도 무장한
반군 40명이 하동에 출현하였다.77) 8월부터 10월에 이르기까지 빨치산은 수백
명을 동원하여 대규모의 공세를 강화했지만, 이러한 공세로 인해 커다란 손실을
감당해야만 했다.78) 10월 27일에는 지리산에서 출동한 200명의 반군에 의해
71) ≪동광신문≫ 1949년 8월 3일자, 「白 師團長 昨日 着任. 全南事態 完拾에 新布石!」.
72) ≪서울신문≫ 1949년 8월 8일자, 「暴徒 夜襲 防止에 智異山麓에 ‘集團部落’을
築造」.
73) ≪경향신문≫ 1949년 8월 18일자, 「날뛰는 叛徒들 全南 各地 出沒」.
74) ≪경향신문≫ 1949년 8월 26일자, 「叛徒들이 鐵道를 破壞 八·一五를 契機 蠢動」
75) ≪경향신문≫ 1949년 8월 21일자, 「直視하라! 地方의 苦悶相. 共匪殲滅 時急
吏道刷新도 必須條件」.
76) HQ USMAGIK, G-2 PERIODIC REPORT, 1949.9.19; 이선아, 「여순사건 이후
빨치산 활동과 그 영향」, 190쪽; 白善燁, ��실록 지리산��, 286~287쪽.
77) HQ USMAGIK, G-2 PERIODIC REPORT, 1949.9.22.
78) “The Ambassador in Korea (Muccio) to the Secretary of State,” Foreign relation
of the United States, 1949.10.13.
여순사건 이후 선무공작을 중심으로 본 지리산지구의 빨치산 진압 203
진주시와 진주 주둔 해군 대대가 공격을 받기도 했다. 반군이 도시 중심부를
점령하려는 대담한 작전을 펼칠 것인데, 미 군사고문단 정보부는 이러한 반군의
공격을 “잘 계획되고 조정”된 것으로 평가하였다.79)
9월 22일 정부는 군·경수뇌회의를 개최하였다. 김효석 내무장관, 신성모
국방장관, 장경근 내무차관, 채병덕 총참모장, 정일권 참모부장, 이호 치안국장
등 군·경 수뇌가 내무장관실에서 회합하여 군·경 합동으로 지리산지구 토벌작
전을 단행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육군본부는 9월 28일에 지리산지구전
투사령부(이하 지전사)를 남원에 설치하고 사령관에 김백일 대령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치안국도 지리산지구 전투경찰대를 남원에 설치했으며 최치환 총경을
사령관에 임명하였다.80)
지전사가 설치된 후, 강경진압과 함께 선무공작 활동이 강화되었다. 지전사
는 10월 15일에 지리산지구치안회의를 개최하였다. 여기에 전남, 전북, 경남의
도지사와 지리산 주변 11개 군의 군수가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 11개 군에
치안위원회를 설치하고 의용호국대를 조직할 것을 결의하였다.81) 이러한 결의
에 따라 11개 군에 치안위원회가 설치되었고, 의용호국대가 각 마을에 조직되었
다.82) 의용호국대는 ① 16세 이상 50세 이하의 남녀와 18세 이상 20세 이하의
독신여자로 조직되었으며, ② 향촌보위에 복무할 의무를 부여받았으며, ③ 장비
는 낫, 망치, 죽창, 구식 병기, 칼, 검 등으로 무장하였고, 필요에 따라 군 장비의
일부를 대여받았다.83) 대원들은 糧道 차단과 소개부락 계몽 등을 담당하였다.84)
79) HQ USMAGIK, G-2 PERIODIC REPORT, 1949.11.3.
80) 陸本情報參謀部, ��共匪沿革��, 1971, 240쪽; 陸軍本部, ��共匪討伐史��, 白樺社,
1954, 30쪽; 國防部 戰史編纂委員會, ��對非正規戰史(1945~1960)��, 103쪽.
81) ≪경향신문≫ 1949년 10월 13일자, 「智異山共匪에 最後의 鐵槌. 周邊 11個郡을
網羅 義勇護國隊 編成코 軍과 共同作戰」; ≪경향신문≫ 1949년 10월 19일자,
「部落組織은 完全히 粉碎. 軍은 消極 積極 兩面作戰. 智異山共匪 掃蕩 決定的
段階에」.
82) ≪경향신문≫ 1949년 10월 22일자, 「智異山 綜合報告. 大部分이 歸順을 熱望.
掃蕩의 關鍵은 部落組織 破壞에」. 치안위원회 위원장은 각 군의 군수나 서장이
맡았으며, 군사·행정·치안·국민·자위 등 5개 위원부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전투
사령부에서는 장교를 선발하여 특별교육을 실시한 후 각 군 치안위원회 민사연
락원으로 파견하였다.
83) ≪동아일보≫ 1949년 10월 25일자, 「政治 7, 軍事 3이 指標. 智異山 現地報告」.
204 한국근현대사연구 제81집 2017년 여름호
또한 제5사단에서는 공군부대의 지원을 받아 “赤狗輩를 박멸 소탕”하자는 내용
의 삐라를 비행기로 살포하였다.85)
또한 지전사는 1949년 10월 30일부터 3단계에 걸쳐 작전을 전개했다. 제1단
계 작전(1949.10.30~11.30)은 기본공작기로 설정하고 빨치산의 근거지와 주변
마을을 대상으로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때 정보수집, 계몽선전공작, 국민조직
강화, 선무공작 등을 병행했다. 이러한 지전사의 활동에 보조를 맞춰 제5사단에
서도 귀순·선무공작을 전개했으며,86) 반군들을 향한 투항권고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들어라! 매국노 김일성, 박헌영 徒輩에 속아 촌락 심산에서 헤매이는
불상한 동포들이여!”로 시작되는 11월 1일자 제5사단장 백선엽 대령 명의의
투항권고문은 귀순자의 생명과 재산은 “본관이 절대보장”하겠으니 각성하고
회개하여 귀순하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87) 또한 제5사단의 투항권고문 살포
에 호응하여 광주지방검찰청에서는 11월 1일부터 7일까지 1주일간을 ‘자수
주간’으로 정하고, “공산사상에 일시 오도되었던 자들 특히 반국가적 범죄
혐의자로 도피 중 혹은 당국의 수배 중에 있는 자”가 자수한다면 관대히 처분하
겠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하였다.88)
제2단계 작전(12.1~12.15)은 전투공세기로 정하고 군·경 합동으로 빨치산
은거지역을 목표로 대대적인 포위와 수색작전을 단행하였다. 이때 선무공작의
일환으로 일반 관민의 통행을 제한하였다. 지전사 사령관 김백일은 전투지구
내 군·경을 제외한 일반 관민의 통행제한을 12월 25일부터 실시한다는 포고문
을 발표하였다. 이때 통행제한 지구로 설정된 지역은 남원군, 구례군, 함양군
석복·함양·유림·마천·휴천·수동면, 산청군 생초·오부·산청·신안·삼장·단성·금
84) ≪경향신문≫ 1949년 10월 21일자, 「共匪의 ‘아지트’ 白雲山 一帶에서 完全히
撲滅. 秋收 앞두고 歸順者 續出」.
85) ≪호남신문≫ 1949년 10월 20일자, 「共匪를 必滅하자! 第5師團서 飛機로 삐라
撒布」.
86) 白善燁, ��실록 지리산��, 292쪽.
87) ≪호남신문≫ 1949년 11월 3일자, 「飢寒에 우는 暴徒여 覺醒하라. 하루바삐
삶의 길 擇하도록. 步兵 第5師團長 暴徒投降 勸告文 發表」.
88) ≪호남신문≫ 1949년 11월 3일자, 「自首하면 寬大處分. 1日부터 7日間 共系自首
週間. 金 檢事長 談」.
여순사건 이후 선무공작을 중심으로 본 지리산지구의 빨치산 진압 205
서·시천면, 하동군 청암·악양·화개면 등이었다.89) 일반 관민은 각 거주 지역에
서 100m를 이탈하지 못하도록 제한한 것이다. 그리고 제3단계 작전(1949.12.15
~1950.2.28)은 복구기로 정하고 지역 내의 농촌 재건사업을 추진하면서 민심수
습에 치중하였다. 그리고 이재민에 대한 원호사업과 사상선도 활동을 전개하였
다.90) 아울러 12월 25일부터 지리산을 중심으로 산청, 구례, 남원, 무주, 함양
등에서 내한연습작전을 겸하여 대규모의 작전을 펼쳤다.91) 지리산 내 12개의
마을을 포위하고 반군의 보급루트를 차단하고 공군과 연계하여 유격전을 감행
한 것이다.
백선엽은 “49년의 동계 토벌은 지리산지구, 호남지구를 합해 사살 365명,
생포 187명, 귀순 4,964명이라는 전과를 올리고 50년 3월에 막을 내렸다”고
밝혔다.92) 5,000여 명에 이를 정도로 귀순 실적을 올린 것을 전적으로 정부와
군·경의 선무공작 활동이 만들어낸 성과로 볼 수는 없다. 군·경의 강경진압이라
는 상황에서 ‘굶어죽고, 얼어죽고, 맞아죽는다’는 극한의 산중 생활을 벗어나려
는 욕망이 작용하여 귀순의 길에 오른 경우도 상당수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동계토벌작전과 선무공작이 상당한 실적을 거두어 빨치산 세력이
극도로 축소된 것은 사실이다. 반군은 동계토벌작전이 끝난 후 해빙기에 들어서
각지에 산재한 유격대를 추슬러 소규모의 부대를 편성하여 활동을 재개했지만
거의 회생이 불가능한 상태에 처해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역전시킨 계기는
한국전쟁 발발이었다.
89) ≪자유신문≫ 1949년 12월 30일자, 「智異山 戰鬪地區 內에 一般通行을 制限.
違反者는 無條件 射殺」.
90) 陸本情報參謀部, ��共匪沿革��, 240쪽; 國防部 戰史編纂委員會, ��對非正規戰史
(1945~1960)��, 104~105쪽; 陸軍本部, ��共匪討伐史��, 29~30쪽.
91) ≪동아일보≫ 1949년 12월 31일자, 「空陸 呼應한 立體戰. 智異山地區 掃蕩戰
開始」; ≪자유신문≫ 1949년 12월 31일자, 「零下 40度의 銀嶺 헤치고 國軍 耐寒
演習作戰, 千三百餘里의 大包圍網 完成」.
92) 白善燁, ��실록 지리산��, 294쪽.
206 한국근현대사연구 제81집 2017년 여름호
3. 선무공작의 한계와 문제점
여순사건을 수습하기 위해서 군경은 강경진압작전과 더불어 선무공작을 활
용하였다. 선무공작은 무력 사용 전과 후, 그리고 무력 사용 중에도 적절히
실시해야만 소기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그리고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할
사항은 선무공작 대상자에 대해 인내심을 발휘하여 설득하고 협조를 구하는
것이다. 선무공작에서 전제가 되어야 할 것은 신뢰감 형성이다. 그러나 진압
주체의 군경은 공작대상자에 대한 신뢰감 형성에 소홀했고, 설득과 협조보다는
무자비한 강경진압을 능사로 삼았다.
‘항쟁’이나 ‘반란’의 원인을 규명하여 이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여주기보다
는 발생 원인을 호도함과 동시에 무자비한 방식을 동원하여 단숨에 사건을
수습하려했기 때문에 여순사건이 장기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왜 상당수의
지역민이 ‘항쟁’이나 ‘반란’에 가담하여 주체세력과 뜻을 같이하게 되었는가?
이에 대해 주목하지 않고, 단순히 무지몽매한 자들이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에
현혹된 것으로 단정했으며, 더욱이 이들을 반란의 주체세력과 함께 제거되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하였다.
여순사건 수습에서 선무공작보다는 강도 높은 무자비한 진압작전을 펼쳤으
며, 진압의 주도권은 군이 행사하였다. 1948년 12월 중순 무렵에 이르러 선무공
작을 적극적으로 실시하고자 했으며, 12월 하순에 귀순을 촉구하는 전단을
살포함으로써 대적 선무공작을 실시하였다. 선무공작은 그다지 성과를 내지
못했지만, 이듬해 1월에 이르러 보다 구체적으로 무기를 휴대하고 귀순하는
자에게는 군에서 포용할 것이며, 사면위원회를 통한 무조건 석방을 약속함으로
써 귀순실적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특선공대를 조직하여 빨치산 출몰이 잦은
지역을 중심으로 순회하면서 지역민을 대상으로 계몽활동을 벌이고, 의료봉사
를 실시한 것도 지역민을 반군으로부터 분리시키려는 하나의 전술이었다.
1949년 1~2월의 특선공대의 활동 이후 선무공작은 보다 다각화되었으며,
체계화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정훈장교를 양성하기도 했다. 3월에 설치된
지전사의 작전이 소기의 성과를 거둔 것도 대민 선무공작이 주효했기 때문이다.
10월 중순, 주한미대사 무초가 국무부에 빨치산이 “두려움과 혐오감을 가진
여순사건 이후 선무공작을 중심으로 본 지리산지구의 빨치산 진압 207
지역민들의 충성을 얻을 수 있었다는 징후는 없다”고 보고할 정도로93) 빨치산
과 지역민의 연계망은 차단되거나 점차 좁혀지고 있었다. 이는 어느 정도 군경
의 대민 선무공작이 효력을 발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군경의 선무공
작은 여러 가지 문제를 파생시켰다.
첫째, 귀순자 처리과정에서 문제가 드러났다. 애초에 제5여단장 김백일 대령
이 선무공작과 귀순문제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귀순자에게는 조직원교화소를
통한 훈련과 감화교육을 실시하고, 귀순대책위원회 심사를 거쳐 석방할 것이라
고 밝혔다. 그런데 특선공대의 활동으로 귀순자가 증가하고 있었고, 또 수시로
귀순자가 속출했기 때문에 교화소 증설과 교육을 실시할 인원 증원이 필수적이
었다. 하지만 재정적인 이유로 교화소를 증설하거나 교육인원을 늘리지 못했다.
따라서 선무공작에서 내세웠던 귀순자에 대한 취급요령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며, 이는 곧 정부와 군에 대한 불신을 키우는 요소로 작용했
을 것이다.
둘째, 귀순자에게 ‘관대한 아량’을 베풀고, ‘무조건 석방’할 것이며, ‘귀순증
을 발부하여 신분을 보증’하겠다고 강조하였지만 사실 무죄석방이라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3월 28일 경찰국장 김병완은 담화문에서 “귀순자 취급에
왕왕 그릇된 일이 있었던 모양인데 차후로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철저히
단속하겠다”고 밝혔는데,94) 이는 ‘무조건 석방’이라는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다
는 단적인 증거이다. 5월 상순, 국회에서 전남 일대의 민정조사반으로 파견된
신성균 의원과 김교중 의원이 호남지구전투사령부 원용덕 준장과 회견하는
자리에서 “귀순자를 사살한다고 악선전되는 수가 있는데 한 사람을 죽이면
10명이 생긴다”고95) 언급했으며, 10월 5일 국회 본회의에서 정광호 의원은
“귀화한 사람 가운데에도 역시 귀화를 시켜가지고 그 전죄를 추궁해서 형을
집행”하고96) 있다고 발언한 것을 보아도 귀순자에 대한 ‘무조건 석방’이라는
93) “The Ambassador in Korea (Muccio) to the Secretary of State,” Foreign relation
of the United States, 1949.10.13.
94) ≪동광신문≫ 1949년 3월 29일자, 「脫線者는 嚴罰 金 警察局長 義勇團 問題
言及」.
95) ≪동광신문≫ 1949년 5월 10일자, 「썩은 마디는 자를박게. 元 司令官 國會調査班
對談」.
208 한국근현대사연구 제81집 2017년 여름호
언사는 지켜지지 않았다. 선무공작을 믿은 제주도민의 대다수가 총살당하거나
군형무소에 보내진 사실이 있는데, 이러한 행태는 제주도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따라서 군에 의해 귀순자가 사살당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귀순자 대다수가 군법재판에 회부되었을 가능성도 크다.97)
셋째, 선무공작을 실시하면서 그동안 군경이 자행한 행태를 시인하고, 이를
시정하겠다고 약속하였지만 이것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산청지역구 국회의원인 강기문이 1949년 2월, 9월에 지리산지구를 시찰한 후
국회에 보고한 내용을 통해서 알 수 있다.98) 계엄사령관 명의로 발표한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은 군·경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고, 지역민의 안위를 확보
하면서 빨치산을 귀순시키겠다는 선무공작의 취지를 뒤엎는 것이었다. 또한
군·경에 대한 지역민의 공포와 원망, 불신과 반감을 높이는 것이기도 했다.
넷째, 지리산지구에서 빨치산과 주민의 연계를 차단하기 위해 마을을 소개하
고 ‘집단부락’을 축조한 것도 문제가 많았다. 집단이주는 주민을 보호하고 빨치
산을 고립시킨다는 명목으로 실시된 것인데, 이것이 성공하려면 주민들의 반발
을 예상하여 충분한 설득과 함께 생활대책과 시설 마련이 전제가 되어야 했다.99)
그런데 단기간에 무리하게 소개가 이루어져 지역민의 원성을 샀다. 주민들을
강제로 집단이주시켰으며, 생활대책과 시설에 대한 사전대책 없이 ‘집단부락’
을 축조했으며, ‘통비부락’이라는 이유로 마을을 통째로 소각하기도 했다.100)
뒷날 백선엽은 1949년 제5사단장 시절의 가을에 보성군 문덕면 한천마을이
불타고 있는 것을 목격했는데 이는 ‘통비부락’이라는 구실로 군에 의해 자행된
것이라고 회고했다.101) 이러한 마을소각은 문덕면 한천마을에서만 일어난 것이
96) ��국회속기록�� 제5회 제14호, 1949.10.5.
97) 제주도에서 선무공작을 믿고 하산한 주민들 중 1,600명이 총살당하거나 각 형무
소로 보내졌다고 하는데, 이러한 행태는 제주도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허은, 「냉전분단시대 ‘對遊擊隊國家’의 등장」, 449쪽.
98) 임송자, 「총선거와 의정활동으로 본 지리산지구의 산청 지역과 지역민(1948~
1955년)」, ≪한국민족운동사연구≫ 88, 2016.9, 221~223쪽.
99) 林東源, ��革命戰爭과 對共戰略-게릴라戰을 中心으로��, 良書閣, 1967, 270쪽.
100) 군의 소개작전으로 인한 지역민의 피해상에 대해서는 이선아, 「여순사건 이후
빨치산 활동과 그 영향」, 197~200쪽 참조.
101) 白善燁, ��실록 지리산��, 고려원, 1992, 52~53쪽.
여순사건 이후 선무공작을 중심으로 본 지리산지구의 빨치산 진압 209
아니라 곳곳에서 자행됐다. 빨치산으로부터 민간인 지원을 차단, 고립시키려는
이러한 작전은 대량의 민간인학살로 이어지기도 했으며, 무리한 소개작전에
반발한 주민이 입산하여 빨치산이 되기도 했다. 국회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심각히 여기고 소개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 10월에 현지조사를 단행하기도 했
다.102) 치안국 자료에 따르면, 지리산지역에서 강제로 소개당한 산간 거주민은
남원 4,555명(859호), 광양 9,329명(1,694호), 구례 12,492명(2,570호), 곡성
18,129명(3,478호), 하동 7,698명(1,240호), 함양 17,786명(3,772호), 산청 12,582
명(2,363호), 거창 2,134명(477호) 등 상당수에 이르렀다.103)
4. 맺음말
제주도 파병 거부의 정당성, 친일경찰에 대한 반감, 미군정기 이래 누적된
모순구조 등으로 지역민은 삽시간에 14연대 반군에 합세했으므로 여순사건
발발 이후의 사태 수습을 위해서는 진압작전에서 선무공작을 적절하게 배합하
는 것이 관건이었다. 그러나 여순사건 직후 구례에 주둔한 제3연대, 제12연대의
행태에서 볼 수 있듯이 군은 지역민을 설복시켜 협력을 이끌어 내는 방식이
아니라 민간인을 대량 학살했으며, 생명을 위협하여 공포와 좌절, 그리고 무력
감을 심어주면서 극도의 강압적인 전술을 구사했다.
12월 중순에 이르러 군은 반군을 대상으로 강경진압작전과 병행하여 선무공
작을 전개하고자 방침을 전환시켰다. 이러한 변화는 국회의 압력, 빨치산 동태
에 따른 대응, 유엔의 한국정부 승인과 유엔한국위원단 입국 등이 작용한 것으
로 볼 수 있다. 이리하여 12월 하순에 반군의 귀순을 촉구하는 전단이 살포되었
지만 반군은 강경진압작전에 따른 엄청난 희생을 목도했기에 쉽사리 이를 신뢰
하지는 않았다.
1949년 1월에 이르러 보다 구체적인 선무공작이 전개되었다. 순천, 보성,
벌교, 광양, 구례, 곡성 등 빨치산 출몰이 잦은 지역을 순회하면서 지역민을
102) ��국회속기록�� 제5회 제27호, 1949.10.29.
103) 김남식, ��남로당 연구�� I, 425쪽.
210 한국근현대사연구 제81집 2017년 여름호
대상으로 계몽활동을 벌이고, 의료봉사를 실시하여 지역민을 반군으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반군에 대하여 귀순을 촉구하는 활동도
전개되었다. 또한 지전사의 3단계 진압작전과 함께 선무공작을 다각화, 체계화
하고자 했다. 선무공작을 담당할 정훈장교 양성이나 정보 수집을 위한 대민
선무공작 병행, 비민분리를 위한 집단부락 축조, 무료진료 행위에 중점을 둔
선무공작 등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전술은 어느 정도 실적을 거두었고, 14연대
반군의 초기 지도부를 와해시키는데도 일정한 역할을 했다.
1949년 7월에 유격대 세력은 인민유격대로 편성되어, 각 지구별 3개 병단으
로 조직되어 대규모 공세를 취하였다. 지리산지구의 제2병단도 8·15를 전후하
여 ‘아성공격’이라는 전술아래 대대적으로 활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상황 아래
서 1949년 7월에 백선엽이 제5사단장에 취임하고 9월 28일에 지리산지구전투
사령부를 설치하면서 선무공작 활동이 강화됐다. ‘집단부락’을 축조하고, 여기
의 주민을 대상으로 선무공작을 실시했으며, 치안위원회를 설치하고 의용호국
대를 조직하여 선무공작을 담당하게 했다. 그리고 1949년 10월 30일부터 이듬
해 2월 28일까지 지전사의 동계토벌작전이 전개되었다. 이때 정보수집, 계몽선
전, 국민조직 강화 등 선무공작이 강화됐고, 선무공작의 일환으로 집단부락
축조가 계속되었으며, 일반 관민의 통행을 제한하는 조치가 행해졌다.
동계토벌작전과 선무공작이 상당한 실적을 거두어 빨치산 세력은 극도로
축소되었다. 그렇지만 군경의 선무공작은 여러 가지 문제를 파생시켰다. 귀순자
처리요령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정부와 군에 대한 불신을 키우는 요소로
작용했다. 귀순자에게 관대한 아량을 베풀고 무죄석방하겠다는 약속도 지켜지
지 않았다. 제주도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군에 의해 대다수의 귀순자가 사살당
하거나 군법재판에 회부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그동안 군경이 자행한
행태를 시정하겠다는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다. 선무공작의 효과를 높이려면
군·경·관의 비행을 시정함으로써 지역민심을 수습하는데 역점을 두어야 했으나
군·경·관의 비행은 끊이지 않았다. 생활대책과 시설에 대한 사전대책 없이
무리하게 소개작전을 펼치고 ‘집단부락’을 축조함으로써 대다수 지역민의 원성
을 샀으며, 선무공작의 일환으로 각지에 조직된 의용호국대도 선무공작에서
부작용을 일으켰다.
여순사건 이후 선무공작을 중심으로 본 지리산지구의 빨치산 진압 211
애초에 제주 4·3항쟁 진압 방식과 선무공작의 경험이 여순사건 이후 반군
진압과 선무공작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고, 제주 4·3에서의 선무공작을 간략하
게 다루려고 하였다. 그러나 제주 4·3 진압과정의 선무공작을 보다 분석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필요에 따라 이를 차후의 과제로 미룬다.
[투고일: 4월 30일, 심사완료일: 6월 1일, 게재확정일: 6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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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 이후 선무공작을 중심으로 본 지리산지구의 빨치산 진압 213
Keywords: placation activities, Yosun Incident, partisan, guerrilla, Mt. Jiri,
surrender
Suppression of Partisans in Mt. Jiri District
: Focusing on Placation Maneuver after Yosun Incident
YIM Song-ja
The number of studies on partisan activities in Mt. Jiri district after Yosun
incident was not abundant. Even research of placation maneuver was not produced
yet. Therefore, this paper is intended to investigate the placation maneuver, which
was carried out by the army and the police, as the part of campaign to suppress
the partisans after the Yosun incident.
It was mid-December of 1948 when emphatic policy to suppress rebels changed
since the Yosun incident. The placation maneuver was carried out in the area
where the partisans frequently appeared from January to February of 1949. The
combat command of Mt. Jiri district established in March and September of 1949
reinforced the placation maneuver with the suppressing partisans, accordingly I
examined how the placation maneuver went with the strong suppression by the
end of mop-up campaign in 1950 February.
The placation maneuver worked to a certain degree to cut down the number
of the partisan force extremely, but it caused much trouble. The promise that
surrenderers should be treated with generosity was not kept enough. It yielded
distrust of the government and army. This study also discussed that matter
specifical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