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2. 王辰關l期嚴IJf專習
3. F武藝諸諸離짧賣衛의 擬”
4. 맺음말
1. 머리말
王辰樓亂이 발발한 이후 조선의 병사들은 短兵기법에 능숙하지 못해,
일본 병사들을 대적하는 것을 힘들어했고, 이로 인해 조선 내에서도 短
兵技藝를 익히고자 하는 노력들이 나타났다. 그런 단병무예 중의 하나가
優劍이다. 宣祖는 왜검을 降優들을 통해 교육할 것을 명하는데, 反優정
서로 인해 그 시행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전쟁의 승리를 위해
서는 적의 기예도 배워야한다는 현실상황으로 인해 검술에 능한 降擾를
통해 왜검교습이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이 당시 왜검교습은 施手와 殺手등을 미리 양성하기 위해 설치한 兒
100 우리춤 연구 【제 3 집】
童隊에서 전문적으로 교습되었는데, 그 모습은 힘每君 2년(1 610) 에 편
찬된 『武藝諸讀離觀集』의 「像劍諸」에서 찾아볼 수 있다 11무예제보번
역속집』의 왜검이 『무예도보통지』의 왜검과 어떤 관련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있긴 하지만,1) 임진왜란 시기에 왜검이 어떻게 교습되
었는지에 대해서는 그동안 살펴보지 않았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임진왜란기 아동대를 중심으로 항왜들의 존재와
그들의 왜검교협l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아울러,-Jf.찌每君代 편찬된 『무
예제보번역속집』을 통해 임진왜란기 왜검이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이 과정을 거친다면 임진왜란기 항왜와 왜
검에 대한 조선인들의 이중적인 인식과 함께 이 당시 왜검이 갖는 특징
에 대해 살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2. 王辰↑委亂期樓뤘j傳習
正祖14년(1 790) 에 편찬된 『武藝圖識변志』에는 土由流· 運힘流 • 千柳
流·柳織의 4종의 왜검법이 기재되어 있으며, 아울러 交戰이 실려 있
다. 이 중 4종의 검법은 金體乾이 關宗흩n位年(1 674) 부터 숙종 5년
(1679) 3월 사이에 擾館에 숨어 들어가 왜검술을 익히고, 숙종 8년에는
사행을 따라 일본에 갔다가 4종류 혹은 8종류의 검보를 얻어 온 후 전
파한 것이다 2) 그런데 11무예도보통지』에는 『武藝諸諸離戰훌集』에 대한
1) u"무예제보번역속집』의 왜검과관련해서는김영호의 r U"무여1제보번역속집』의 왜검과 『무
예도보통지』의 왜검, 교전의 비교.J(H무예도보통지』를 통해 본 한일간의 무예교류:.n.
2002. 24반무예협회)와 최복규의 r U"武龜蟲聽힘 면찬의 歷史的배경과 武廳융J •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2003에서 개략적으로 다루고 있다.
2) 김체건이 전한검술은세월이 흐르면서 運카流만세의 i훨威없이 그대로전습되었고,
나머지는 『해도보통지』가 편찬되기 전에 전체 혹은 일부가 失|뿔되어 명칭만 전해
지는 과정을 겪기도 하였다(허인욱金體웹 『鍵鍵밤騙志』에 실린 驗IjJ. U"체육
사학회지.D 11. 2003).
[Provider:earticle] Download by IP 114.207.181.34 at Monday, August 12, 2019 9:48 AM
www.earticle.net
王辰像홉L期 朝활의 樓劍敎育과 『武훌훌諸講빼譯續集』의 왜검 101
언급이 기재되어 있지 않아, 兩書사이에는 관련성을 찾기 어렵다. 양서
에 수록되어 있는 왜검도 또한 연관성을 찾기가 어렵다.
『무예제보번역속집』의 왜검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서는 먼저 임진왜란
기 왜검교습에 대해 살펴봐야 한다. 임진왜란을 거치며 조선에서는 단병
전술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었으며, 항왜들로부터 왜검 교습이 이루어
졌기 때문이다.
먼저 If'武藝圖諸通志』의 「技藝質疑」의 서술 내용을 보자.
오직 우리나라에는 해외에 치우쳐 있어 예로부터 전해오는 것이 다만 련
失한 가지 뿐이니 검, 창 등에 이르러서는 한갓 그 器機만 있고 도리어 그
익혀 쓰는 법은 없다 ..... 그러므로 왜군과 대진할 때 왜군이 갑자기 죽기를
각오하고 돌진하면 우리 군사는 비록 창을 잡고 칼을 차고 있더라도 칼은 칼
집에서 뽑을 틈이 없고, 창은 겨루어 보지도 못하고 속수무책인 상태로 적의
칼날에 꺾여버리니, 이는 모두 검과 창을 익히는 법이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
이다 3)
왜적과 대적한 조선 군사가 칼을 써 보지도 못할 정도였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단병접전에서 일본병사들에게 조선병사들이 상대가 되지 않
았던 것이다. 이에 조선 정부는 전쟁이 다소 소강 상태에 들어가자 일본
군의 조총 전술을 활용하기 위해 포수 수백 인을 양성하였으며, 동시에
명 군대가 사용한 『紅激新書』의 여러 화포와 근접전의 전법을 본격적으
로 익히기 시작한 것이다. 이울러 明군대에서 敎師를 지원받아 각종 화
포와 f驗” 사용법을 익히게 하기도 하였다.4) 이런 노력의 하나로 왜병
의 검술까지도 익히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 점은 다음 기록을 통해
확인할수 있다.
3) r武觀範聽료 卷首技藝質疑..1.
4) 顧〈九조선후기 短兵觸뼈 추이와 『武觀擬힘의 성격醫觀靜B 91.
2001. PP.359-360.
[Provider:earticle] Download by IP 114.207.181.34 at Monday, August 12, 2019 9:48 AM
www.earticle.net
102 우리춤 연구 【제 3 집 >
비변λ까 아뢰기를, “이번에 생포한 왜적은 중국 조정의 사람이 보았을 뿐
만 아니라 강 건너편의 f多參將까지도 알고 있으니, 홉따닮軍使司에 포로를 바
쳐야 할 듯합니q. ..... "하니, (상이) 답하기를, “생포한 왜인 포로를 바치는
일은 군졸이어서 죽인다 해도 도움될 것이 없고 포로로 바친다 해도 이익될
것이 없다. 나의 의견에는 統蘭제조와 放E힘하는 방법 및 적정을 상세히 따
져 묻고 또 혹 했l觸을 아는 재1 거든 배워서 익히게 하면 어떻겠는가. 다시
의논뼈 조처하라’ 하였다. 회계하기를, “동참징어 생포한 왜인을 보려 하기
에 어제 보내주었더니 그대로 억류시키고 돌려보내지 않고 있는데 이는 기
필코 選東에 알리과 함에서일 것이니 형편상 중지시킬 수 없습니다. 왜인
을 돌려보내도록 로文을 지어 보내소서” 하니, 上이 쫓았다 5)
宣祖25년(1 592) 왜인에게서 총통제작과 방포하는 법과 아울러 검술
을 아는 자가 있으면 배워 익히도록 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는 것
이다. 물론 이때는 왜검술을 배우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 수반되었다기
보다는 의견을 내놓는 정도의 소극적인 태도로 보인다. 하지만, 적의 기
술이라도 전쟁에 효율적인 기술을 습득하려고 하는 실용적인 측면을 살
필 수는 있다. 왜검을 익히게 하자는 宣祖의 생각은 선조 27년 (1594) 2
월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降樓는 우리 종족도 아닌데 城中에 함께 거처하게 함
은 미안하므로 혹 威興• 鏡城• 寧慶등지로 보내어 그들로 동얘금 搬힘를
교련케 히는 것이 무방하겠습니다만, 원은 龍山쩌師將 金友뿔의 手下에 소
속시켜 화포 • 懶둥의 일을 가르치게 챔시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 왜인은 바로 포수로서 그 방포히는 법이 귀신처럼 빨라 견줄 데가 없으
며 또한 刀橋등의 법을 꽤나 잘 이해하니 , 럼l懷購l藍에 소속시켜 급료를 주
어 전습케 하되 부득이한 연후에 후속조치를 취히는 것이 옳다. 지나치게 의
심할 필요가 없다. 영웅의 수단이 어찌 이와 같은가’ 하였다 6)
5) u"宣祖實錄』卷31, 화H. 25年10月辛표
6) Ii"宣福廳』卷48, 宣祖27年2月벚寅.
[Provider:earticle] Download by IP 114.207.181.34 at Monday, August 12, 2019 9:48 AM
www.earticle.net
王辰像亂期朝활의 優劍敎育과 『武훌훌諸講빼譯續集』의 왜검 103
비변사에서 降優와 함께 城中에 거처히는 것에 대한 위험을 거론하자,
선조는 항왜가 화포 • 염초 및 칼과 창의 사용법을 잘 아니 訓練都藍에
소속시켜 급료를 주어 전습하게 하자고 하고 있는 것이다. 적이었던 항
왜들에 대한 믿음이 완전하지 못했음을 말해주는데, 왜검술 등이 전장에
서 유용한 것이었다고 조선 정부가 인식했다하더라도 항왜에 의한 조선
내에서의 왜검술 전습이 이루어지는데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항왜의 기예에 대한 논의는 같은 해 7월 康子에 이루어지는데, 이 과
정에서 왜검술에 대한 언급도 보인다. 다음 기록을 통해 보자.
{廳慶司가 뺨하여 아뢰기를, ‘降懷가운데 *驗l봐 鳥統에 능하고 염초를 달
일 줄 이는 지는 머물러 두라는 일로 여러 번 下敎하셨는데 먼저 온 47인
중에는 오직 也Jlt己만이 했l발 쓰고 염초를 달일 줄 압니다. 그를 의당 머물
러 두어야 하지만 이제 李榮白의 말을 들으니 왜인 일행은 이 왜인이 아니면
형세가 거느리기 어렵다고 하므로 그로 하여금 거느리고 가게하고 영백이
올 때 도로 데리고 오라는 뜻을 이미 분부하였습니다” 하였다 7)
선조가 비변사에서 항왜 가운데 창검과 조총 등의 재주가 있는 자를
머물러 두라는 명을 내리고 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기록은 也
매己라는 검술에 능한 항왜의 존재를 알려주긴 하지만, 降擾의 제어가
쉽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5일 후인 같은 달 을사의 기록을 보면, 선조는 왜검술의 교습을 긍정
적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상이) 전교하기를, “왜인이 투항해 왔으니 후하게 보살피지 않을 수 없
다. 외방으로 보낼 자는 빨리 내려보내고 그 중에 머물러 둘 만한 지는 서울
에 머물러 두고 軍職을 제수하여 統과 했|딸 주조하거나 검술을 가르치거나
7) r화轉錄』 卷53. 宣祖27年7月康子.
[Provider:earticle] Download by IP 114.207.181.34 at Monday, August 12, 2019 9:48 AM
www.earticle.net
104 우리춤 연구 【제 3 집】
염초를 달이게 하라. 참으로 그 #物힘을 터득할 수 있다면 적국의 기술은 곧
우리의 기술이다. 왜적이라 히여 그 기술을 싫어하고 익히는 일을 게을리 하
지말고 착실히 할 것을 비변사셰 이르라” 하였다 8)
선조는 왜인에게 군직을 제수하여 총과 검을 주조하게 하고 검술을 가
르치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선조는 적의 기술이라 하여 그 기술을 싫어
하지 말 것을 주문하면서 익히는 것 또한 게을리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이는 아무리 전쟁을 일으킨 왜적의 기술이라 하여도 전쟁에 이기
기 위해서는 적국의 기술도 곧 우리의 기술로 만들어야만 하는 절박한
사정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왜인의 기술들을 배우려고 하는 것
은 근접전에서의 전투 기술을 보완하려는 목적과 적의 특기인 검술을 몸
에 익혀, 군사들로 익숙하게 하려는 목적 때문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왜검의 교습이 빠르게 진행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이는 2일
후인 같은 해 8월 T未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먼저 온 降優38명을 趙敵을 시켜 재주를 시험하니
鳥統을 쏘아 맞춘 자는 平{않 · 山如文두 사람뿐이고 그 나머지는 모두 맞
추지 못하였습니다. 그 맞춘 자들도 우리나라 施手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니
이 왜인들은 마땅히 무리를 나누어 북도로 보내야 합니다. 다만 먼저 평안도
로 간 왜인은 모두 司勇의 告身을 주었고 조총으로 쏘아 맞춘 자들은 司正의
고선을 주었으니 지금도 전례대로 해서 그들의 마음을 위안시켜야 합니다.
그 중에 要時之老• 信蘇足音• 훌予X 등 세 왜인은 t싫짧벼 굽는 법을 조금 알
고 있으니 이 왜인은 우선 서울에 머물게 히여 衣食을 후히 주고 염초를 굽
게 해서 그 재능을 시험히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에) 답하기를, “그
중 沙古愁械• 幹乃飛활iJf. 幹老愁械• 照音妙牛는 칼을 잘 써서 우리나라 殺
手를 보고 얘1들 놀이와 같다고 하였고, 古沙老文은 칼과 총을 주조히는 법
을 안다 히는데, 이들 왜인을 어찌하여 머물러 두고 전에 내린 전교에 의하
여 배우고 익히게 하지 않는가. 배우려고 하지 않아서인가. 그렇다면 그만이
다. 또 그들이 가지고 있는 칼을 왜 값을 후하게 주고 사들여서 그들의 무기
8) r宣祖實錄』卷53, 宣祖27年7月ζB.
[Provider:earticle] Download by IP 114.207.181.34 at Monday, August 12, 2019 9:48 AM
www.earticle.net
王辰優亂期朝뺨의 優웠l澈育과 『武훌훌諸講빼譯續集』의 왜검 105
를 없애지 않는가’ 하였다 9)
조선에서는 항왜들의 기예를 심사하고, 그에 따라 적절한 곳에 배정하
고자 하였다. 항왜들 중 沙古愁械• 幹乃飛촬iJT. 幹老愁械• 照音妙牛등
은 조선 살수들을 보고 아이들 놀이와 같다고 하고 있을 정도로 검술에
능했음을 알 수 있다. 선조는 검술이 능한 항왜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검술을 배우지 않는 것에 대해 질책을 하고 있는데, 전에 하교한 대로
배우지 않고 있음을 책멍하는 것으로 봐서 선조가 앞서 왜검을 배울 것
을 지시했음을 알려준다.
13일 후인 宣祖27年8月康申기록을 보자.
비변사가 아뢰기를, “ ...... 劉擔兵이 서울에 있을 때 진법을 배우고 익히게
하면 참으로 좋긴 하나 다만 E랍와 殺手들이 근일에 배운 것은 바로 漸江의
전법인데 이제 만약 川兵의 진법까지 겸하여 배우게 한다면 혹시 폐彈~의 걸
음이 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兒童들을 얻을 수 있으면 뽑아서 배우게 히는
것도 좋을 텐데 사람 수가 적어 또한 아아들의 놀이와 같아져서 남의 비웃음
을 살까 걱정됩니다. 그러나 다시 훈련도감과 함께 의논해서 처리하겠습니
다. 왜인의 했IJ1;I'q.을 배우는 일은 근일에 일이 많아 거행하지 못하고 있습니
다. 그러나 항왜 중에서 검술에 능한 자가 있다면 도감으로 하여금 별도로
傳習하게 하십시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환대로 하라. j.折江의 진법은
마땅히 배워야 하지만 川兵의 진법을 아울러 배운다 하여 무엇이 해롭겠는
가. 이와 같이 하면 배우는 바가 넓게 될 것이다. 어찌 포복해서 돌아오는
지경에 이르렀는가. 川兵의 검술과 優A의 검술을 모두 배우지 않을 수 없으
니 속히 배울 만한 사람을 뽑아서 착실히 거행하게 랜t. 또 왜장의 투햄1
대한 일은 據兵이 써서 분부한 것을 보니 형편상 하기 어려울 것 같다. 왜장
이 어찌 즐겨 나오겠는가. 내 말과 같이 7낸의 官敎를 주고는 。휴을 정해
서 나올 때에 속히 올려보내면 자연 처리히는 길이 있을 것이다. 모두 참작
해서 시행하라’하였다 10)
9) u"宣禮鍵』卷54. 화且 27年8月丁未.
10) u"宣祖實錄』卷53. 宣祖27年8月康申.
[Provider:earticle] Download by IP 114.207.181.34 at Monday, August 12, 2019 9:48 AM
www.earticle.net
106 우리춤 연구 【제 3 집】
평양전투 때 漸江兵들의 활약상을 본 후 조선인 포수들을 절강병법에
따라 교련시키다가 절강병이 철수한 뒤 짧|淑£이 거느리는 四川兵이 주둔
하게 되자 다시 사천식 진법의 습득을 시도하는 것에 대해 비변λ까 일
관성이 없음을 논하는 내용이다. 이 언급 가운데, 왜검 전습에 대한 이
야기가 거론되고 있는 것이다.
당시 비변사의 언급을 보면, 왜검술 전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음
을 알 수 있는데, 비변사에서는 항왜 중에 검술에 능한 자가 있으면 훈
련도감으로 하여금 전습하게 하는 것에 대해, 선조의 의중을 묻고 있는
것이다. 선조는 이에 대해, 明漸江兵뿐만 아니라, 四川兵의 진법 그리
고 四川兵의 검술과 아울러 왜검술을 배우는 것은 조선에 해가 될 것이
없다고 하면서 왜검술 또한 훈련도좌에서 전습하라고 명을 내리고 있다.
하지만 같은 해 12월 康午기사를 보면, 왜검술 전습이 곧바로 시행되지
않았음을알수있다.
備도흡B로 이강1 를, “우리나라 습속은 남의 나라의 기예를 배우기를 좋아
하지 않고 더러는 도리어 비굴하게 여긴다. 왜인의 했l術은 대적할 자가 없
다. 전일 降像디수가 나왔을 때 그 중에 검술이 극히 묘한 자가 많이 있었
으므로 적합한 자를 뽑아 징수로 정히여 교습시키도록 별도로 한 대열을 만
들라고 傳敎를 하기도 하고 親敎를 하기도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끝
내 실시히지 않고 그 항왜들을 모두 흩어 보냈다. 원수의 왜적이 아직 물러
가지 않고 있는데 시속의 습관。1 이와 같으니 가히 한탄할 일이다. 지금 更
判(李德醫)이 도챔l 있으니 족히 그 일을 할 만하다. 별도로 한 장수를 뽑
고 兒童약간 명을 가려 뽑아 한 隊을 만들어서 (힘繹兒童若千A 作寫-隊)
왜인의 검술을 익히되 주야로 권장하여 그 묘법을 완전히 터득한다면, 이는
적국의 기예가 바로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인데, 어찌 유익하지 않겠는가. 훈
련도감에 이르라” 하였다 11)
선조가 검술에 능한 降優중 적합한 자를 뽑아 장수로 정하여 교습시키
11) r宣f龍鍵』卷53 宣祖27年12月康午.
[Provider:earticle] Download by IP 114.207.181.34 at Monday, August 12, 2019 9:48 AM
www.earticle.net
:E辰像亂期朝*¥의 像웠I澈育과 『武훌諸體빼譯續集』의 왜검 107
도록 별도로 한 隊를 만들라고 傳敎를 하기도 하고, 親敎를 하기도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끝내 실시하지 않고 그 항왜들을 모두 흩어
보냈다고 하면서, 왜적이 아직 물러가지 않고 있는데 타국의 기예를 배
우는 것을 비굴하게 여기는 조선의 습속을 한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는 조선이 문회적인 수준이 우위에 있다고 여기고 있던 일본의 기예를
배우는 것에 대한 반감이 매우 컸고, 이로 인해 선조가 전교와 친교를
여러 차례 했음에도 왜검술이 널리 전습되지 못했음을 알려준다.
이 기록을 좀 더 살펴보면, 兒童약간 명을 가려 뽑아 한 隊을 만들어
서(妙擇兒童若千A 作寫一隊) 왜인의 검술의 묘법을 터득한다면, 적국의 기
예가 조선의 것이 된다고 하면서 훈련도챔1 이르라고 하고 있어 , 이 때
부터 본격적으로 아동에 대한 왜검교육01 01 루어졌을 것임을 말해준다.
물론, 아동의 왜검교육은 앞서 언급한 宣祖27年8月康申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兒童들을 뽑아서 배우게 하는 것도 좋겠지만 o써들의
놀이와 같아져서 남의 비웃음을 살까 걱정된다고 하면서 훈련도감과 의
논해 처리하겠다는 서술이 있기 때문이다 12) 아동에 대한 검술 교육을
이때부터 고려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아동대를 설치한 이유는 尹根壽
의 언급 중에 포수와 殺手를 양성하는 兒童隊는 그 의도가 뒷날의 급할
때 쓰기 위한 것이라고 하고 있어 13) 그 설치 의도를 알 수 있다. 하지
만 본격적인 시행은 구체적으로 一隊를 설치하려고 하는 宣祖27年12
月康午이후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선조가 왜검 전습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음을 살펴봤는데, 이는 다음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12) 節且27년 6월 기록을 보면, 宣페且가 R닮手가 짧t할 때 。똥들이 많은 이유를 묻자,
沈뿐讓~1 童子로서 뽑힌 자가 15여 인인데 기술을 전수하여 완성시킬 생각이므로 兒
劃隊라 이름히여 해체동꺼 않고 있다(0"宣祖實錄』 卷52, 화따 27年6月쫓西)고 대
답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검술 교습은 아니지만, 이동대 설치가 이 시기에 있었음을
알수있다.
13) 0"前體鍵』卷82. 宣祖29年11 月辛표
[Provider:earticle] Download by IP 114.207.181.34 at Monday, August 12, 2019 9:48 AM
www.earticle.net
108 우리춤 연구 【제 3 집】
上이 聊完에 敎하여 말하기를, “降樓呂*文을 각별히 후대랜}고 전날에
전교하였는데, 실행하는지 모르겠다. 요사이 듣건대, 이 자가 병이 났다가
차도가 있다고 히는데 이는 보통 왜인이 아니다. 대우를 후하거l 하지 않01선
안 된다. 그리고 그도 진력하기를 원하니, 마땅히 한 뼈官을 차출, 兒童수
십 명을 뽑아 전적으로 依文에게 맡겨 교습시키고, 李榮白과 山所手로 좌편
과 우편을 섬아 모든 試才에 서로 승부를 겨루게 하고 등급을 매겨 논상한다
면 저들은 이기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장차 많은 날이 되지 않아 전습이 성취
될 것이다. 이 같은 일을 어찌 유의뼈 하지 않는가. 만약 아동의 급료가
곤란하다고 한다면 긴요치 않은 사람으로서 급료를 받는 자가 많고, 또 射手
같은 데에 쓸데없이 번잡하고 2댐구레한 자가 많이 끼어 있으니, 이 같은
사람들을 도태시키고 그 급료로써 지급하도록 훈련도감에 말하라” 하였
다 14)
선조 28년(1 595) 6월 경신에 선조는 왜검에 능한 呂減文에 대한 후한
대우나 병세에 대한 염려와 아울러 왜검술을 전문적으로 배우는 兒童隊
를 두고 있으며, 이 아동대에 주는 급료 급여가 원활치 않으면 射手등
의 쓸데없는 자들을 도태시키고 그 급료를 지급하라고 할 정도로 왜검술
교습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 기록은 당시 呂짧文과 山所手라는 검술
에 능한 항왜의 존재를 알려주며, 李榮白이라는 조선인으로 왜검에 능한
이의 존재를 알려준다.
이 기록을 좀 더 살펴보면, 여여문에게 왜검교습을 담당하게 하고, 이
들을 李榮白과 山所手가 책임을 맡았음을 알 수 있으며, 이들을 좌우 邊
으로 나누어 대결을 시켜 실력향상을 도모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이는
선조 27년(1 594) 2월에 훈련도좌에서 明i折판핏의 기예를 전습15) 한 것
보다 10개월 여 정도 늦어지긴 했지만, 왜검술이 조선군내에 이미 보급
되기 시작했음을 말해준다.
선조가 질문한 여여문의 병세와 급료문제에 대해서는 2일 후인 같은
14) ~宣祖實錄』卷64. 宣祖잃年 6月康申.
15) ~武觀圖識변캘띠 , 兵技總鼓
[Provider:earticle] Download by IP 114.207.181.34 at Monday, August 12, 2019 9:48 AM
www.earticle.net
王辰優亂期朝활의 優웠l敵育과 『武훌훌諸講뼈譯續集』의 왜검 109
달 王맛에 훈련도캠~l서 보고하고 있어 참조가 된다.
훈련도감(離是調 柳成龍提調휩聽 · 金醒· 趙敬)이 回햄배 이강1
를, “여여문은 지난번에 다방면으로 치료하여 이제 이미 회복되었습니다만,
다시 上의 하교대로 특별히 더 후대하겠습니다. 그리고 兒盧隊를 다시 뽑는
일은 도김에서도 수를 늘려 모집하려 했는데 급료를 지급하기가 어려웠습니
다. 아동 중에 鋼뼈 익숙한 :A}를 뽑아 도감이 때때로 謝함으로써 그중
우수한 자를 선발히여 논상하면 비록 대오를 편성하여 급료를 지급하지 않
더라도 저절로 흥기되어 학습하는 자가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그 때문에 어
제 모아 놓고 시재하니 아동 50여 명 중에 入格者가 19명이나 되었으므로
도김에서 음식물을 주어 격려하였습니다. 이제 上의 하교를 받들어 이 아동
들로써 따로 한 부대를 만들어 거느리게 하고, 여여문에게 전적으로 맡겨 학
습시키는 한편 편을 갈라 시재함으로써 승부에 따라 상벌을 주는 것이 마땅
합니다. 射手중에 용렬하고 잡스러운 자는 근일에 지주 시재하여 많이 도태
되었고, 정원 2백 명 내에 편입된 사람은 감원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
아동 수십 명에게 한 때에 지급하는 급료는 겨우 7홉이니 경비는 대단하지
않습니다.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형편에 따라 글을 적절히 처리히여 지급하
게 하는 것이 무방할 듯합니다’ 하였다. 上이 행배 이라를, “아훤 대로
하라. 그 50여 명의 이동 및 入格아동 19명의 良購• 姓名· 年歲를 아울러
써서 아뢰라. 또 2백 명에 편입된 사수는 활쏘기를 시험하여 아뢰라’ 하였
다 16)
宣祖28年6月王成의 기록을 보면, 선조의 물음에 대해 훈련도햄1
서 여여문의 병세 회복과 아동대의 급료지급에 대해 해당 관청에서 형편
에 따라 적절하게 처리하면 된다는 보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기록은
아동대를 새로 뽑는데, 50명인 지원했으며, 그 중 19명이 시재에 합격
했음을 알려준다.8일 후인 같은 달 康午에도 아동대 운영 문제에 대해
서 보고를 하고 있다.
16) w'화R實錄』 卷64. 宣祖잃年 6月王렷.
[Provider:earticle] Download by IP 114.207.181.34 at Monday, August 12, 2019 9:48 AM
www.earticle.net
110 우리춤 연구 【제 3 집]
t이 교하여 말하기를, “兒童施• 殺手隊의 良購• 성명 · 나이를 아울러 써
서 아뢰라’ 하니, 훈련도김이 계허여 아뢰기를, “五숍뼈 아동이 50여 명인
데, 試才에 入格한 자는 19명이었으나 아직 入格못한 지들 중에도 뽑을 만
한 아동이 많았으므로 다시 모아 시재하니, 觸팎 학습에 합당한 자가 16명
이었습니다. 전후에 뽑은 것을 통계하면 35명으로 李榮白뼈의 아동의 수에
필적합니다. 이것으로 1雄를 만들고 따로 뼈官을 차출하여 呂j女文에게 嚴”
을 배우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새 부대의 아동은 대오 편성이나 호령하는
사이에 반드시 그 규제를 잘 알지 못할 것이니, 이영백 초의 정원 외에 했l術
학습이 이미 숙달된 4명을 새 부대에 옮겨 속하게 하고 뽑힌 35명중에서 다
시 정밀히 가려 4명을 감원함으로써 隊를 만드는 것도 타당합니다. 뽑힌 아
동의 投處와 니어를 아울러 써서 。}럽니다” 하니, 상이 이라를, “50여 명
이라고했으니, 이 單子외의 사람도아울러 그이름을써서 한單子를만들
어 일시에 와서 바치라’ 하였다 17)
훈련도쐐서 새롭게 아동대를 뽑기 위한 試才에서 入格한 1차 19명,
2차 16명 등 총 35명의 제반사항과 아동대 운영에 관한 의견을 제시하
고 있다. 시재를 통해 35인이 입격했는데, 이영백 초의 아동 수와 비슷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초관을 차출하여 여여문으로 하여금 가트폐도록
하게 하면서, 이동대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이영백의 초에서 4인을 받아
들이고, 4인을 감원하여 1雄를 구성하려고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앞
서 이영백과 산소우가 左右邊을 맞는다고 했으므로 적어도 선조 28년
당시 아동대의 한 변의 정원이 35명 정도이고, 총 70명 정도의 인원으
로 이동대가 이미 구성되어 있었고, 이후에는 1雄가 늘어 100여 명 정
도의 아동대가 존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울러, 5部즉, 漢陽내의
아이들이 아동대 시재에 응시했다고 하는 점에서 검술이 널리 수련되고
있음도알수있다.
선조 28년 (1595) 7월 파子 기록을 보면, 왜검 전습에 상당한 성과가
있었던 것으로보인다.
17) D"화隨錄』 卷64, 宣祖잃年6月 康午.
[Provider:earticle] Download by IP 114.207.181.34 at Monday, August 12, 2019 9:48 AM
www.earticle.net
王辰像亂期朝활의 樓劍敎育과 『武훌諸講빼譯鷹集』의 왜검 111
전교하여 행}기를, “兒童隊들의 연습한 바를 시험해 보니 성취된 자가 많
이 있다. 山所佑(降優의 이름인데 했l術로써 아동대를 훈련시킨 자이다)의 훈
련시킨 노고가 없지 않으니, 熟馬한 필을 주어 그의 마음을 위로하라’고 하
였다 18)
선조가 아동대들의 왜검술을 시험해 보고 만족해하며 아동대를 훈련
시킨 산소위1 게 숙마 한 필을 하사하였다고 하기 때문이다. 이는 이후
왜검술이 조선 내에 널리 전파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아동대는 선조 29년(1 596) 11월 尹根壽가 환란이 눈앞에 있고
전투를 하는 군사의 양식도 모자라므로, 아동들까지 양식을 대줄 수 없
으므로 임시로 폐지해야 한다고 하는 견해가 있음을 언급하며, 이 말이
조리가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고 하고 있어 이 시기에 이동대의 폐지
가 논의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
아동대 외에 왜검술은 임진왜란때 일본에 잡혀갔다가 이후 쇄환된 이
들에 의해서도 전파되었을 가능성을 찾아볼 수 있다. 먼저, 鄭希得의 『海
上錄』을살펴보자.
王辰· 쫓E 연간에 우리나라 사람이 많이 어린 에로서 집혀가서 이제
장성한 나이로 精勇하고 彈l별하기가 본시 왜놈보다 나은데, 정유년 재침 때
이들 중에 적을 따라온 자가 무척 많았지만, 본국으로 도망해온 자는 적고,
적국으로 도로 들어간 자는 많았습니다 ..... 우리니라 남자로서 전후에 잡혀
온 자가 批웹를 익히고, 했l術도 익히며, 冊輯도 익히고 달리기도 익혀서 강
장하고 용맹하기가 진짜 왜놈보다도 나으니 비록 우리나라에서 10년 동안
훈련해도 이러한 정예는 쉽게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제 만일 모조리 찾
아 모으면 무려 3-4만 명은 되겠고, 늙고 약한 여자는 그 수가 갑절이나
될 것입니다 2이
18) r節購錄』卷64. 宣祖28年7月벚子.
19) r節題錄』卷82. 宣祖29年11 月辛표
2이 『海土錄』卷1. 自願優람劃盛山日封縮.
[Provider:earticle] Download by IP 114.207.181.34 at Monday, August 12, 2019 9:48 AM
www.earticle.net
112 우리춤 연구 【제 3 집】
정희득은 선조 40년 (1607) 에 回答觀I隨使로 일본에 다녀왔는데, 이
때 6천여 명을 쇄환하였다고 한다. 포로로 잡힌 조선인들 중에 왜검을
익힌자들도 쇄환되었을 것임을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 기록
만으로 조선 내에 포로로 잡혀 왜검을 익힌 자들이 얼마나 쇄환됐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조선에서 지속적으로 왜검에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엿볼 수는 있다. 포로로 잡혀갔던 자들이 조선에서 왜검 전수에 일익을
담당했을 것임은 다음 기록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備局에서 兵費*',庸李廷龜가 조목별로 진술한 짧體5目을 가지고 계하여
이르기를, “ ....... 武學出身의 새로 뽑은 자들은 속오랜l 편입시키지 말고 별
도의 부대로 만들며, 私h랍 · 山R. 才A과 日本에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온
자로서 E힘『마 • 했l術에 능한 자들도 별도의 부대로 만들어 그들의 戶投을 감
면해 주고 항상 조련하게 할 것이라 하였다 2 1)
이 사료는 仁祖5년(1 627) 의 기록으로, 선조에서 인조대로 이어지면
서 지속적으로 왜검에 대해 관심이 지속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특히 일
본에 포로로 잡혀갔다 돌이온 자로서 검술에 능한 자들로 별도의 부대를
만들고 그들을 조련하게 하려는 시도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임진왜
란 이후 조선 내에 왜검술의 전습이 보편화되었을 가능성을 살필 수 있
는것이다.
이상으로 임진왜란기 왜검교협l 대해 살펴봤는데, 조선에 항복해 온
왜인들 중 검술에 능한 也l1tB. 沙古愁폈 · 幹乃飛雲所• 幹老愁械· 照音
妙牛· 呂뚫文 · 山所予등과 왜검에 능한 조선인 李榮白의 존재를 알 수
있으며, 특히 여여문과 산소우가 왜검교습에 전적으로 종사했음을 알 수
있었다. 후일의 포수와 살수를 양성하기 위해 설치된 아동대를 통한 왜
검 교습은 宣祖27年12 月康午이후에 본격적으로 행해졌으나, 선조
29년 (1596) 11월경에 아동대 폐지 논의가 이루어진 것으로 봐서, 이후
21) r.↑그祖實錄』 卷16.1=祖5年4월 困辰
[Provider:earticle] Download by IP 114.207.181.34 at Monday, August 12, 2019 9:48 AM
www.earticle.net
王辰優홉L期 朝활의 優劍敎育과 『武훌훌諸錯獅譯續集』의 왜검 113
왜검교습도 일정 부분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설치초기에는 각
35명 정도로 좌우 邊으로 나누어 실력향상을 도모하였으며, 이후에는 1
기를 더 설치해 왜검에 능한 이들의 %랭에 주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당시 왜검술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지는데, 이 당시 왜
검술은 광해군 2년 (1610) 에 편찬된 『무예제보번역속집』의 왜검보와 큰
차이가 없었을 것으로 보이므로 다음 장에서는 『무예제보번역속집』에 실
린 왜검보를 통해 살펴보자.
3. Ir武藝諸릅離續輔集』 의 f委햇j
임진왜란기 降樓들이 가르친 왜검술이 어떤 형태였는지는 『선조실록』
의 기록을 통해서는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하지만,-]디每君 2년(161 0)
에 崔超南(1 559-1619) 에 의해 편찬된 『武藝諸諸織購賣衛의 擾했M앓를
통해 당시 모습을 추정해볼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임진왜란이 끝난
때로부터 10여 년 정도 후에 편찬되었기 때문에 기법 상에 있어 큰 차
이가 없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선조 31년(1 598) 년 뢰!練都藍의 郞官인 한교는 11*많健H書』를 저본으로
삼아, 댁處홉J (t購), r牌諸J(購牌), r第諸J (~,臨), r長權홉J ,銀諸J (鏡銀) ,
「했IJ諸」로 나누어 『武藝諸諸』를 편찬하였다. 그리고 최기남이 여기에 빠
진 大泰• 備月刀· 鋼홈 · 優劍등의 기법을 포함뼈 광해군 2년 편찬한
것이 『무예제보번역속집』이다. 이 諸들은 단 시간에 이루어진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씩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22) 이 점은 선조 37년(1 604)
12월 辛西에 『奉諸』가 독립된 서적으로 간행되는 것을 통해서 추정해
볼 수 있다 23) 최기남은 『무예제보』가 실제보다 2년 뒤인 康子年, 즉
22) 羅k一r lr'효違鍵識重표의 武훌훌震權購~ 91. 2001. p.389.
23) Ir'宣파E廳뚫』 卷182. 宣祖37年12月辛西.
[Provider:earticle] Download by IP 114.207.181.34 at Monday, August 12, 2019 9:48 AM
www.earticle.net
114 우리춤 연구 【제 3 집】
선조 33년(1600) 에 간행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어, 24) 그 이전에는 다른
무예서가 간행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이는 선조 37년 12월 신유 기록
에도 『무예제보번역속집』에 실린 무예 기법에 관한 서적 간행 사실이 기
록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따라서 優劍諸도 『권보』 간행
이후에 편찬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선조 28년
(1595) 까지는 여여문이나 산소우 등 몇 명의 항왜를 중심으로 왜검 교습
을 전담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적어도 이 때까지는 교습할 수 있는 諸
형태로 체계화되지 못했음을 말해주고, 이보다 3년 뒤에 『무예제보』가
간행되고 있어 왜검을 보 형태로 간행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즉, 왜검이 구체적으로 체계화되는 것은 선조 37년 12월 이
후일 것으로보인다.
『무예제보번역속집』의 왜검의 가장 큰 특징은 2인이 서로 부딪혀가며
검술을 익히는 형태로 되어 있다는 것인데, 구체적으로 몸의 이동과 타
격부위를 제시하고 있다 25) 2인이 부딪혀가며 검술을 익히는 형태는 『무
예도보통지』의 ‘交戰에서도 그 형태를 찾아볼 수 있다.
『무예제보번역속집』의 왜검은 『무예도보통지』의 교전과 달리 각 勢의
명칭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중복되지 않게 『무예제보번역속집』의 勢名을
정리하면, 進輔搬· 向輔購· 下接· 仙A奉盤· 持했樹戰 · 齊眉· 龍擊
虎擺·돼搬·右F搬. 1敵·向돼搬.*鍵搬·廳IJf禮i 이다. 이 세
들을 최기남은 『總廠書』의 왜검과 비교뼈 47까로 나누고 있다. 진
전살적 • 향전살적 · 지검대적은 왜검도의 第1 圖에, 제미살 • 선인봉반 •
용나호확은 제 2도에, 적수세 • 하접세 · 좌우방적세 • 향상방적세 ? 초퇴방
적세는 제4도에, 무검사적세는 제 5도와 유사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
어 26) 참고가 된다. 제 1도에 포함 세들은 내려 베며 공격승}는 형태를
24) D"武靈諸諸離蕭賣集』股文.
25) 김영호 r D"무예제보번역속집』의 왜검과 『무예도보통지』의 왜검, 교전의 비교 n무
예도보통지』를 통해 본 한일간의 무예교류:n .24반무예협회. 2002. p.73.
26) D"武轉購載廳』新書驗l圖.
[Provider:earticle] Download by IP 114.207.181.34 at Monday, August 12, 2019 9:48 AM
www.earticle.net
王辰像亂期朝활의 像劍敎育과 『武훌훌諸講빼譯續集』의 왜검 115
취하고 있으며 , 제 2도에 포함된 세들은 검날이 위를 향하여 들어올려 겨
누거나, 혹은 막거나 공격하는 형태를, 제 3도에 속하는 세들은 검날이
앞쪽을 향한 채로 막는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If무예도보통지』 왜검에도 세명이 없는 것은 아니다. 土由流에
藏했|團進-鐵Ij三進, 運光流에 千利-避9-山時雨水獅냐縣, 千柳碼는
初度手」藏했!團進-藏했I[三進 등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중 藏했隔進 • 藏
했IE進 등의 일반적으로 붙일 수 있는 勢名을 빼면, 千利· 훤T. 山時
雨· 水鴻L、. 훼牌*. 初度手등이 있는데If무예제보번역속집』의 세명과
별 관련은 없어 보인다 27)
그런데 앞서 언급한 『무예제보번역속집』 왜검조의 세명들은 『무예제
보』의 「根諸」나 혹은 「劍諸」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명칭들이어서 참조
가 된다If무예제보』를 보면 「곤보」에 적수 • 선인봉반 • 제미살 • 히접長
#홈諸」에 적수검보」에 견적출검 • 지검대적 · 좌(우)방적 · 향상방적 • 초
퇴방적 · 진적살적 등의 동일한 명칭이 찾아지는 것이다. 왜검이지만, 중
국식 세명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더군다나 적수나 선인봉반,
하접 등의 동작은사용하는무기만달랐지 동작의 형태가비슷하게 보인
다. 따라서 중국 검술의 영향이나 봉술의 영향도 고려해 볼 수도 있어
보인다.
하지만, 후일 『무예도보통지』의 「雙手刀」로 정리되는 『무예제보』의 「검
보」에 교전의 형태가 기재되어 있지 않는다는 점에서 중국식 검술 교습
의 영향으로 보기는 어려워 보인다If무예도보통지』에서도 교전은 왜검
과 관련지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교전 형태의 검술교습은 중국 무술의
영향이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것이다. 이는 『무예제보번역속집』의
저본이 된 『기효신서』의 「왜검도」도 교전형태로 되어 있는 걸 고려하면,
교전 형태의 교습은 중국 검술보다는 일본 검술의 영향이라고 봐야 할
27) ["무예도보통지』의 4종의 왜검법이 關宗代김체건에 의해 전해진 것이라는 데서, 어
떤 관련을 맺기는 어려워 보인다.
[Provider:earticle] Download by IP 114.207.181.34 at Monday, August 12, 2019 9:48 AM
www.earticle.net
116 우리춤 연구 【제 3 집】
듯하다.
그렇다면, 중국식 세명이 그림과 함께 기재되어 있는 이유는 무엇일
까. 먼저, 세명이 존재하지 않았고 편찬과정에서 삽입되었을 가능성을
살필 수 있다. 그 점은 『기효신서』 왜검도에 명칭 없이 第一, 第二등의
순서만 기재되어 있는 것에서 추정해 볼 수 있다. 또 關宗代김체건에
의해 전해진 이후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4종의 왜검에는 세명이 존재
하지만, 교전에는 세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도 세명이 원래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한다If'무예도보통지』의 왜검에는 수구심이나
산시우 등의 세명이 부분부분 망설된 채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교전
에도 세명이 존재했다면, 완벽게 남아 있지 않더라도 세명이 기재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전에는 본래부터 세명이 존재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식 세명이 붙은 이유는 당시 이미 무예 전습이 중국 무예 중심으
로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데서 시사점을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즉, 조
선 병사들은 이미 중국식 세명에 익숙해져 있으며, 훈련의 효율을 높이
기 위해 중국 검법이나, 곤법 등에서 비슷한 동작의 세명을 빌려와 붙였
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또 중국식 세명이 붙은 원인의
하나로 앞서 언급했듯이, 선조가 타국의 기예를 배우는 것을 비굴하게
여기는 조선의 습속을 한탄하고 있는 데서도 그 살펴볼 수 있을 것 같
다. 즉, 일본의 기예를 배우는 것에 대한 반감이 작용했던 탓에 일본의
검술을 익히지만, 중국식 세명을 붙여 일본식 검법임을 희석시키꼬} 한
편찬자의 의도도 반영되었을 수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
가능성보다는 앞서 교육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그러했을 가능성이 높
아보이긴 한다.
[Provider:earticle] Download by IP 114.207.181.34 at Monday, August 12, 2019 9:48 AM
www.earticle.net
王辰像亂期朝활의 像劍敎育과 『武훌훌諸諸빼譯續集』의 왜검 117
4. 맺음말
이상으로 임진왜란기 왜검 교습과 『무예제보번역속집』의 왜검에 대해
살펴봤는데, 그 과정에서 조선에 항복해 온 왜인들 중 검술에 능한 也때
已· 沙古愁械· 幹乃飛활iJf. 幹老愁械· 照音妙牛· 呂짧文 . LlJFfr手등과 왜
검에 능한 조선인 李榮白의 존재를 알 수 있었다. 특히 여여문과 산소우
가 아동들의 왜검교습에 종사했음을 알 수 있었다. 후일의 포수와 살수
를 양성하기 위해 설치된 아동대를 통한 왜검 교습은 宣祖27年12月
康午이후에 본격적으로 행해졌으나, 선조 29년 (1596) 11월경에 아동대
폐지 논의가 이루어진 것으로 봐서, 이후 왜검교협l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설치초기에는 각 35명 정도로 좌우 邊으로 나누
어 실력향상을 도모하였으며, 이후에는 171를 더 설치해 왜검에 능한 이
들의 양성에 주력하였다.
항왜들로부터 전습한 왜검은 이후 광해군대에 편찬된 『무예제보번역
속집』에 수록된 것으로 보인다 11무예제보번역속집』의 왜검은 구체적으
로 몸의 이동과 타격부위를 제시하며 .2인이 서로 부딪혀가며 검술을 익
히는 형태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무예도보통지』의 ‘交戰’ 형
태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무예제보번역속집』 왜검에는 『무예도보통지』와 달리 중국식 세명이
붙어 있는데, 이는 조선 병사들이 이미 중국식 세명에 익숙해져 있으므
로, 훈련의 효율을 높이기 위한 방법으로 중국 검법이나, 곤법 등에서
비슷한 동작의 세명을 빌려왔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 일
본의 기예를 배우는 것에 대한 반감01 사회 보편적으로 퍼져 있었을 것
이다. 따라서 중국식 세명을 붙인 것은 일본에서 유래된 검법이라는 점
을 희석시키과 한 뾰도 어느 정도 반영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 논문투고일자 : 2006. 10. 31. / 심시일자 : 2006. 11. 23. / 심사완료일자 : 12.6.
[Provider:earticle] Download by IP 114.207.181.34 at Monday, August 12, 2019 9:48 AM
www.earticle.net
118 우리춤 연구 【제 3 집 >
• 참고문헌
『武觀範聽힘 (2에이, 민속원.
『武靈諸諸離職廳A (1999), 계명대학교 출판부.
『宣禮銀(1986) . 국사편찬위원회.
["{그祖廳옳~(1986). 국시편찬위원회.
『海많A. 민족문화추진위원회. 1977.
김영호(2002). r["뼈제보번역속집』의 왜검과 『뼈도보통지』의 왜검, 교전의 l:Il교」, 『『무예도
보통지』를 통해 본 한일샘 무예교류~. 24반무예협회.
歡〈一(2001). r["武觀鍵購표의 武醫:J. ["醫難擺91.
顧dti2(01). r조선후기 短兵觸뼈 추이와 『武觀靈聽표의 성격 J. 離購~ 91.
최복규(2003). r[":武觀範聽웹 편찬의 歷뾰성 배경과 鍵觀J.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허인욱(2003). r金體웹 『武觀藍聽표에 실린 嚴't ["체육λ}학회지.! 11.
[Provider:earticle] Download by IP 114.207.181.34 at Monday, August 12, 2019 9:48 AM
www.earticle.net
王辰優亂期朝i¥의 優劍敎育과 『武훌훌諸홉홉빼譯續集』의 왜검 119
l 국푼초록 l
主辰優亂期朝蘇의 懷웠l敵育과 『武藝諸講햄譯續集』의 왜검
허인욱
임진왜란기 조선에 항복해 온 왜인들 중 검술에 능한 也매己 · 沙古愁
械· 幹乃飛활9í-. 幹老愁械• 照音妙牛• 呂供文• 山所手등이 있었으며, 이
들 중 여여문과 산소우는 아동들의 왜검교습에 종사하였다. 후일의 포수
와 살수를 양성하기 위해 설치된 이동대를 통한 왜검 교습은 宣祖27年
12月康午이후에 본격적으로 행해졌으나, 선조 29년(1 596) 11월경에
아동대 폐지 논의가 01 루어진 것으로 봐서, 이후 왜검교혐1 영향을 미
쳤을 것으로 보인다. 설치초기에는 각 35명 정도로 좌우 邊으로 나누어
실력향상을 도모하였으며, 이후에는 171 를 더 설치해 왜검에 능한 이들
의 양성에 주력하였다.
항왜들로부터 전습한 왜검은 이후 『무예제보번역속집』에 수록되었는
데 IF무예제보번역속집』의 왜검은 구체적으로 몸의 이동과 타격부위를
제시하며, 2인이 서로 부딪혀가며 검술을 익히는 형태라는 특징을 지니
고 있어 IF무예도보통지』에 수록된 왜검보다는 교전과 가깝다는 것을 알
려준다 IF무예제보번역속집』 왜검에는 『무예도보통지』와 달리 중국식 세
명이 붙어 있는데, 이는 조선 병사들이 이미 중국식 세명에 익숙해져 있
으므로, 훈련의 효율을 높이기 위한 방법으로 중국 검법이나, 곤법 등에
서 비슷한 동작의 세명을 빌려왔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기예를 배우는 것에 대한 반감01 사회 보면적으로 퍼져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중국식 세명을 붙인 것은 일본에서 유래된 검법이라는
점을 희석시키그l자 한 의도도 어느 정도 반영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Provider:earticle] Download by IP 114.207.181.34 at Monday, August 12, 2019 9:48 AM
www.earticle.net
120 우리춤 연구 【제 3 집】
l 주제어 : 왜검 • 무예제보번역속집 • 무예도보통지, 아동대 • 항왜 • 여여문 • 산소
우·이영백
[Provider:earticle] Download by IP 114.207.181.34 at Monday, August 12, 2019 9:48 AM
www.earticle.net
王辰像홉L期 朝활의 優劍敎育과 『武훌諸講훌빼譯續集』의 왜검 121
I AIJstract I
πle Wae-geom(優劍) in the
Muyejebobeonyeoksokjip(韓諸講햄譯續集)
during the ]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Heo, In-Uk*
The Wae-얽XJ(優劍 J햄I않 ~p) in the Muy며뻐:>beonye없아예ir(꿇擬講빼譯
續흉상 was 파rOdUG어 fromJ햄ne똥 sol네앉S 야m 뼈d been s뼈nitted in Joe없i朝활) 뼈핑
the Ja앵nese invasion ci Korea 띠 1592. Jm;없1 was or맹i생 야뚱 와oowas 뼈isted 벼s
해10 t에없ted S\\Ordrmnship. 뼈 야웠1 inst따t려 바mJ解ne똥 S\\Ordma빼úp by 삼r
Japmese 501diers 빼 뼈d b:줬1 submitted in Joeseon 와닙 앙lC Korean 501,뼈 얘U 뼈d been
mlSt앉ed the J:뼈I뚱se~κ>rdma빼úp. 깐ús 뼈s CatRd The Waε'-geαn to be record혀 inthe
Mψ며어뼈)(l}'l빼뼈ip.
m 야lC way 버atbe 뼈edwi삼1 practicir핑, 야lC Wae-g∞,mm 안leM껴ebolx째1뼈싫여ip
압 s따퍼.af to the 찌r여야i交觸 삼l31l 야lCWi짧흉:om in the Muyedotα엠i(武훨뭘鐵廳:). The
Wru:• geoms se(혐? in the Muy며랴lObeOnY뼈생예ip was nam려 inthe 며inese style. It was
따rowed from the 뼈lCr rmrtial art 빼ch carre from Q따lese. there are t\\{) 뼈었용; (1)
Kor없n 501네ers 빠eady are accustOII벼 to the chinese style. 50 it was nam:닝 야t 배inese
style ror 야acticir핑 the 뼈H 얹si1y. (2) 삼lCre are 빼-j햄I뚱sen때ir핑 in the Jeæeon after the
J햄nese invasiα1 ci Korea in 1592 양않때ly. 50 need to let down 뼈t 없ir핑 for
야actiα핑 J야li311eSe S\\Or,야뻐해ip.
I 1엠Rαd: TheWi짧얽XJ(戰11 J聊I앓 sv.url따빼i야 • The Muy며뼈Xxm.}'I빼뼈ip
(武훌諸講흙續훌훌잉 • The Wae-geoms se(했 • the Muyechtα, 엠i(武훌圖講通志)
* kangwon university / heoin따‘ @y.따lOO.CO.kr
[Provider
'전쟁군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한미동맹에서의 자주와 동맹의 딜레마 분석/朴 輝 洛.국민대 (0) | 2019.11.11 |
|---|---|
| 1910년대 중반 조선 주둔 일본군 군영 배치계획과 軍營 유치운동의 양상/이성민.건국대 (0) | 2019.10.23 |
| 高句麗와 隋 唐전쟁의 성격에 관한 해석 -정체성과 관련하여- /尹 明 喆(동국대) (0) | 2019.07.29 |
| 여순사건 이후 선무공작을 중심으로 본 지리산지구의 빨치산 진압(任松子/순천대) (0) | 2019.07.29 |
| 일본 陸軍省 자료에 드러난 러일전쟁 開戰의 실상(曺健/고려대) (0) | 2019.07.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