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 론
20세기 말을 넘어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일개 지역문명이 아닌 인류문명 혹은 지구문명의 패러다임이 질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또한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는 세계질서, 특히 동아시아질서가 숨 돌릴 틈도 없이 급격하게 재편되고 있다. 이러한 거대한 혼돈과 불확실성의 시대 속에서 역사학은 현실분석의 유효한 틀을 제공하고, 미래의 진행방향을 제시해주는 지표의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
역사학은 문제가 무엇(what)이고, 왜(why) 그렇게 되는가를 알아야 하며, 그리고 어떻게(how) 해결하는가 하는 방법론을 추구하고, 제시하는 것도 중요한 사명이다. 역사학이야말로 경험과 사실과 실험을 바탕으로 한 학문이다. 이미 검증한 사건을 수단으로 삼음으로서 숱한 역사과정 속에서 실패율이 비교적 적은 해결모델을 제시할 수 있다. 때문에 역사학은 과거를 연구대상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는 未來學'이다. 시대의 전환기에 새로운 역사학이 출현한다든가, 새로운 관점으로 역사서들을 再敍述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우리 역사학은 역사의 전환기, 질서의 재편기라는 시대마다 기본적인 자기역할을 하지 못했다. 특히 근대 역사학은 객관과 실증이라는 미명을 앞세우고 시대의 붕괴와 인간의 몰락을 도외시 했다. 문자기록에 충실하지 않았던 역사, 문자기록을 강제적으로 상실당한 역사를 문자기록에, 그것도 非我의 기록이나 역사서에 의존해서만 역사연구를 하고 과거를 복원하고 더구나 그들의 삶을 복원하고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객관과 실증이란 객관이란 특정한 사관이나 특정한 정치이념, 특정한 배후세력과 시대적 상황에 의해 왜곡돼지 않고 편견없이 사실 그대로를 보는 것이다. 현재의 한국역사학은 과거의 전통, 특히 근대역사학의 체질을 답습하여 교훈을 찾는 것이라는 안이한 사고 속에 안주하면서 이 시대에 지향해야 할 역사학의 역할, 연구방법론의 모색, 대안의 제시 등에 관해서 자기역할을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인식하지도 못하고 있다.
필자는 일본역사교과서 왜곡사건이 일어났을 때 과거의 제국일본이 역사를 정치경제적인 목적에 걸맞게 역사를 왜곡한 것(半島史觀, 滿鮮史觀, 南方文化論)과 동일하게 중국 또한 自國史 중심으로 재편할 것이며, 현재도 왜곡이 정도가 더 심하다고 쓴 바 있다. 지식인일반 , 특히 역사학자들은 마치 과거 일제 시대 반도 내의 역사학처럼 현실상황에 대한 무지와 안이한 인식태도, 지적교만에 빠져 있다가 이제야 강력한 중국의 힘과 시스템, 치밀한 구상에 현실감을 느끼기 시작했다.(깨달은 정도는 아직 아니다.) 그리고 동북공정에서 보이듯 역사를 적극적으로 무기로 삼는 현실에 허를 찔려 당황해하고 있다. 그런데도 역사인식이 결여돼있고, 지적 토대가 허약한 비전문가들이 이 사건의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일종의 정서적 접근을 추진하거나, 안이한 미완성의 지적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거기다가 소수를 중심으로 대응시스템을 독점하려는 행태마저 보이고 있다.
필자가 그동안 몇몇 저서들과 논문들, 기타 글들에서 밝혔듯이 향후 몇 년 안( 2010년 직전)에 우리의 운명을 결정지을 기본태도와 軸들이 형성된다. 우리와 중국지역, 일본지역, 러시아의 연해주를 포함한 주변지역들은 총체적으로 팽팽하게 경쟁체재에 돌입할 것이고, 그 과정 속에서 행위의 명분을 획득하고, 효율적인 방략을 찾을 목적으로 역사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질 것은 명약관화하고, 그 일환이 동북공정이다. 그러므로 동북공정은 좁은 의미의 역사전쟁이고, 나아가서는 한시적일 가능성이 짙지만 넓은 의미의 역사전쟁이다. 우리 역사학은 연구와 대응태세는 물론 그 외적인 면에서도 다양한 인식과 방략을 모색하고 구사하는 총체적인 대응을 해야 한다. 그 가운데 하나는 일본이나 중국에서 빌어온 동아시아론이 아니라 우리식의, 미래지향적인, 역사적 진실에 입각한 동아시아 역사담론을 모색하고 전개해야하는 것이다. 아울러 금기시 되었거나 소홀히 했던 사관의 설정을 적극적으로 시도해야 한다. 물론 과거의 것에 대한 變形이나 類似性을 탈피하여 다양한 관점에서, 그리고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시대정신에 걸 맞는 해석의 모델들을 찾아야 한다.
이미 여러차례 언급하였고, 본고에서 다시 반복하듯이 동북공정은 단순한 역사의 왜곡으로 인한 자존심차원이나 역사의 진실여부에 관한 논쟁을 넘어서는 역사학 외적인 작업이다. 추후에 전개될 정치질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면 가장 중요한 내용 가운데 하나가 바로 고구려와 수 당간의 전쟁에 대한 해석과 주장이다. 결국 그 전쟁의 결과를 통해서 현재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동아시아의 기본질서가 재편되었고, 그러한 과정은 향후 중국정부가 전개하고 싶은 신질서를 구축하는데 대한 방략과 명분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동아시아 통일전략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감지되고 있다.
이 전쟁의 성격과 과정, 의미에 관해서는 동아시아 각 국에서 그동안 많은 연구와 견해들이 있었다. 특히 고구려와 수 당간의 전쟁에 관해서는 단재 신채호가 본격적으로 연구하였다. 근래에는 소위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과 관련하여 많은 학자들이 이 전쟁을 언급하였다. 필자는 이 논문의 2장에서는 고구려와 隋 唐 간에 벌어진 전쟁이 동북공정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를 알기 위하여 먼저 동북공정의 본질에 대해서 간단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그동안 유사한 주제를 갖고 여러번의 발표를 했으므로 본고의 논리전개와 깊은 관련이 없는 부분이나 각주들은 상세하게 서술하지 않았다. 3장에서는 전쟁의 성격에 관한 중국측, 주로 동북공정의 주장에 대해 열거하고, 4장에서는 그동안 필자가 전개해온 이 전쟁의 성격, 즉 배경과 발발, 그 결과와 의미에 대해서 본고의 주제와 연관지으면서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4절은 사론적인 성격이 강한 글이다. 필자는 이 전쟁을 동아시아 질서재편과정에서 발생한 동아시아 혹은 동아지중해 국제 대전으로 규정하고, 고수전쟁 고당전쟁 삼국통일전쟁을 繼起性계기을 지닌 약 70여 년 간 지속된 하나의 전쟁으로 파악하고 있다.
2. 동북공정의 歷史學 外的인 배경
현 중국정부의 고구려영토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은 唐이 중국의 통일을 이룩했다는 주장에서 표현된다. 그리고 통일에는 대대적인 군사력을 사용했다는 일종의 선동 내지 협박을 암시하고 있다. 劉厚生은 앞에 인용한 문건에서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우리는 변강사 연구와 현실을 긴밀히 연결시키는 우량한 전통을 발양하여 중화민족의 애국주의 정신을 발양하여야 한다. 주변국가와의 화목한 우호관계를 증진하기 위하여, 조국의 신성한 영토와 영해의 안정을 보위하고, 국가와 민족의 존엄과 근본이익을 지키기 위하여 우리들은 반드시 변강사 연구를 강화시켜야 한다."라고 하여 역사와 중화국가주의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명료하게 알려준다.
동북공정영도소조 부조장인 全哲洙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동북의 변강문제는 학술문제뿐만 아니라 국가영토 국가영역 국가주권의 정치문제이다. 변강이라는 지역문제가 아니라 중국전체의 지역문제이다." 이는 한마디로 동북공정이 정치적인 사업이고, 국가주권과 관련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한국의 일부에서는 동북공정을 역사 문제, 특히 고구려 문제에 국한시켜 보려 한다. 하지만 보다 거시적인 시각을 갖고, 복합적인 관점으로 그들의 목적을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분석해야 할 것이다.
동북공정은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목적을 지니고 추진 진행하고 있다.
첫째, 동북공정은 고구려 유적 유물을 유네스코에 중국 측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데, 전략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목적이 있다. 둘째, 동북공정은 '新中華 帝國主義'를 실현시키기 위한 명분축적 작업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공산주의 체제는 중화제국주의를 확대시키는 명분과 시스템 그리고 힘을 제공하여 결국에는 중원을 중심으로 주변의 소수민족의 영토와 독립을 앗아갔다. 공산주의체제를 포기해가는 현재의 북경정권은 주민과 주변지역들을 완전하게 지배하고, 중화민족 또는 중화문명에 대한 정체성 확립이 시급한 시점에서 과거 역사를 재정리하고 재편해, 명분을 획득할 필요가 있다.
셋째, 동북공정은 주변 국가들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고, 특히 만주 지역에 대한 한국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중국정부는 현재에 이르러 보다 결속력이 강화된 남북한 혹은 통일한국(요원하지만)이 만주지역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하거나 영향력을 강화시킬 가능성(희박하지만)에 대하여 우려하고 있다. 동북공정의 주요한 주체인 동북사범대학의 劉厚生의 말은 보다 솔직하다. 그는 "--朝韓학자들은 고구려와 지금 조선반도의 승계관계를 제멋대로 선전하고 고구려가 생활하던 지구는 그들의 故土라 하고 중국의 동북지구에 대한 역사주권을 극력 부정한다. "만주(동북지구)는 자고로 우리선조의 땅"이고, "장백산은 우리조상의 성산이다"고 헛소리를 치고 있으며 공공연히 북방영토를 수복하자고 제출하고 있다. 이는 조선반도에서 일어난 중조관계사의 일종 비학술화된 경향으로서 우리의 주의를 불러일으킨다."라고 하였다. 실제로 만주지역에서 각종 형태의 경쟁과 충돌이 발생하고, 이 경쟁에 일본 러시아 심지어 미국까지 끼어들 경우에 중국은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된다. 그러므로 만주지역 내부에 대한 지배력을 한층 강화시켜 조선족 및 기타세력의 움직임을 차단하고, 주변 분쟁지역의 주민들과 연고가 있는 국가들에게도 일종의 경고 멧세지를 보내는 것이다.
넷째, 동북공정은 향후 中華中心의 동아시아 혹은 아시아공동체를 구성하기 위한 전단계의 정지작업일 수 있다. 향후 동아시아는 공동체를 지향하고 실현시킬 가능성이 높다. 세계사적인 현실로 미루어, 이러한 공동체는 정치, 군사적 영토보다 문화 영토 그리고 경제 영토 개념이 적용될 가능성이 크다. 만주 지역은 자원생산지로서의 가치 외에 일종의 경제적 허브(herb)가 될 수 있는 지정학적인 환경을 갖추고 있다. 東北亞 經濟共同體든, 滿洲經濟圈이든 이곳은 모든 것이 몰려들 수밖에 없고, 만약 남북한의 계획대로 TCR과 TSR까지 연결되면 모든 도로망이 몰려들면서 동아시아 교통의 중심지가 된다. 대륙과 황해와 동해가 만나는 곳이자, 대륙경제권과 황해경제권, 동해경제권이 만나는 곳이다. 만주 지역은 地政學的, 地經學的, 地文化的으로 매우 다양하고 역사적으로 예민한 지역으로서 다가올 세계 질서 혹은 동아시아 질서 속에서 모든 나라의 힘이 충돌할 가능성이 높은 지역이다. 특히 한민족이 통일을 이루게 된다면, 엄청난 지각 변동이 일어날 것은 필연적이다.
다섯째, 동북공정은 역사의 탈취를 통해서 한민족의 정체성을 약화시키며, 추후 한민족을 자국의 문화권에 편입시키려는 정지작업의 목적을 지니고 있다. 인류의 일반적인 역사과정이 말해주듯이 역사적 집단이 계승성과 정통성으로 채워진 정체성을 상실하면 사회와 역사의 발전에 왜곡이 생기고, 내부의 인간들은 自由意志를 포기한 채 非主體的인 삶을 살아가게 한다. 당연히 그 사회는 生命力과 진실을 잃어버리게 되고 인간성은 오염되며, 끝내는 다른 집단과의 경쟁에서 패배할 가능성이 높다. 일본이 우리에게 적용한 식민사관은 이러한 기능과 유효성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동북공정에서 고구려를 중요한 목표로 삼은 것은 고구려 자체가 정체성과 자의식이 강한 나라였고, 중국에 대한 상대적인 우위를 점한 경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도 살아서 기능을 하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한편 동북공정에는 간도 문제와 함께 연해주 문제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중국정부는 이러한 목적 외에도 다목적 포석을 깔고 동북공정을 진행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심각하게 나타나는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문제점, 내부 계급모순의 심화에 따른 사회불안 등을 애국주의를 발양시켜 무마시키려는 부수적인 효과도 기대하고 있다. 그런데 동북공정의 추진을 국제적 요인에 비중을 두고, 중국 측의 당위성을 인정하자는 견해도 있다. '유라시아 질서체'라는 큰 맥락에서, 즉 미국 중심의 세계화 과정에서 살아남기 위한 동아시아 전략의 일종으로 보자는 논리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을 지나치게 역사외적 그리고 정치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필자의 주장에 비약이 있다고 견해도 있다. 단순한 역사의 왜곡을 세계사적인 문제로까지 확산시키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현재의 상황은 근대로 넘어오는 20세기 전후의 동아시아 역사가 전개되는 과정과 유사하다. 특히 일본이 조선을 합병하고, 이어 만주와 중국으로 점차 침략을 확대해 가는 과정과 거의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기 전, 이미 조선을 병합해야하는 당위성을 역사 연구를 통해 찾아서 그들만의 논리를 만들었다. 다루이 토호키치(樽井藤吉)는 '興亞論'을 내세웠고, '大東國'을 세워 청에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은 이어 만주를 침략하기 직전인 1931년에는 일본·조선·만주·중국·몽골의 다섯 민족이 서로 화합해야 하고, 일본과 만주가 블록을 결성해야 한다는 '日滿 블록'을 주장하였다. 이 무렵에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만선사관을 연구하고 주장하였으며, 발해사 연구에 열을 올렸다. 우리 역사학계가 그동안 고구려사는 물론 발해사 연구에 관심을 두지 않은 현상에 대하여 누군가가 대신이라도 변명할 필요가 있다.
일본은 1933년에는 중국을 합한 '日滿支 블록'으로 확대시켰으며, 1938년에 中日戰爭을 일으키자 이제는 일본·만주국·중국이 주도하여 '동아 신질서'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1940년에 이른바 "大東亞共榮圈"을 주장했다. 결국 '三國共榮論'과 '아시아 連帶論'을 거쳐 결국 일본 제국주의의 확대와 대동아공영권으로 발전해 결국 아시아의 비극을 가져온 것이다. 소위 '大아시아주의 (Pan-Asianism)'는 제국주의의 일본적 형태일 뿐으로서 아시아를 식민화 시키려는 의도였다.
이렇게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여 식민지화 하면서 이른바 반도사관이 주체가 된 식민사관을 비롯해 이러한 역사논리를 계속해서 만들어 낼 때 젊은 조선의 역사학자들도 참여하여 결과적으로는 沒역사적이고, 투항적인 인식을 드러냈다. 물론 이 때 일본 지식인들의 움직임을 간파한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역사 연구를 통해 방어 논리를 찾았고, 활발한 저술 작업을 펼쳤다. 특히 만주에서 독립전쟁을 벌이면서 연구에 매진하였다. 그런데 그들의 연구업적과 존재를 근대역사학계가 인정하지 않을 뿐이다.
3. 동북공정에서 규정한 이 전쟁의 성격
중국의 동북공정에 관한 최근 견해와 주장들은 몇 가지로 요약 될 수 있다. 특히 고구려사를 왜곡한 부분에 대한 총체적인 자료 정리는 고구려연구회의 서길수 교수가 처음으로 시도했고, 필자는 이 정리와 자료조사 등을 토대로 몇 차례에 걸친 논문을 발표했다. 그 후에 알려진 내용들은 대부분이 비슷하다. 그 가운데 본고의 주제이며, 향후 보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중국의 의도와 관련된 것은 고구려와 수 당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 대한 성격규정이다. 즉 수나라와 당나라가 고구려와 전쟁을 벌인 것은 내부에서 일어난 국내전이고, 통일전쟁이었다는 논리이다.
郭沫若이 주관한 『中國史稿』에서는 고구려와 수당왕조 간의 관계를 "조공관계"로 놓고 있다. 范文瀾의 『中國通史』에서는 고구려와 수당의 전쟁을 논할 때에 수당왕조를 "침략"의 일방으로 하였다. 특히 근래에 들어서 동북공정과 관련하여 성격을 보다 더 중국적으로 규정하는 등의 연구물들이 양산되고 있다.
이러한 연구들에서 지향하는 중국인들의 이 전쟁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몇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우리가 삼국통일전쟁을 신라가 주도하여 성공적으로 끝난 국내전쟁적인 시각으로 보듯이, 이 전쟁 또한 중국 내부의 국내전쟁으로 본다. 결국 고구려를 중국지역에서 명멸하였고, 또 지배를 받았던 다른 종족내지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소수지방정권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 점에서 중국의 대다수의 학자들은 이미 일치한 의견을 가지게 되었다.
둘째, 중국의 통일정권이 수립되었다고 본다. 당은 중국의 역사에서 가장 강력했고, 오래 지속한 나라이다. 그런데 오랜만에 중국지역을 통일한 수를 이어 당은 못다 한 부분인 주변국가들을 정복하면서 결국은 고구려를 멸망시켜 통일사업을 완료했다는 주장이다. 劉炬는 당태종이 수행한 東征(고구려 침공)의 정치적인 목적을 논하면서, 그것이 통일중국임을 주장하고 있다.
고수 고당 전쟁에 관한 이 같은 성격규정을 목적으로 삼고,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중국학자들은 대체로 두 가지 논리를 만들고 있다.
첫째, 고구려의 영토는 역사적으로 중국의 영토였다는 논리이다.
우선 몇 사람의 주장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張博泉은 1985년 낸 {동북지방사고}에서 "수·당과 고구려의 전쟁은 통일적 다민족의 중앙집권국가가 요동의 군현을 수복하기 위해 진행한 전쟁이지 본국 통치계급이 영토확장을 위해서 침략전쟁을 일으킨 것은 아니다."고 해서 고구려의 중국 귀속을 강하게 강조하고 있다. 楊秀祖는 정벌의 원인을 몇 개의 입장으로 정리하면서 "고구려국토는 한조의 현토 요동 낙랑의 3군고지이다. 한조 이래로 역대 중원정권의 고유국토였으므로 수조에게서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라고 주장하였다. 고구려의 紇升骨城, 尉那巖城, 丸都城, 平壤城, 長安城이 고구려의 都城으로 되었는데, 이는 결국 玄 , 樂浪, 臨屯, 眞番 등 漢四郡이 관할하는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고구려사에 대한 자기식의 해석을 근거로 이러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즉 '고구려 정권은 西漢시기 玄 郡 고구려현 경내에 있는 변강민족이 세운 지방정권이다. 민족구성은 비록 來源이 다양하지만 모두 서한시기 동북변강지역에서 살았던 민족이며, 또한 周나라 시기에 중앙왕조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고, 서한시기에 이르러서는 서한의 현토군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서한왕조의 유효한 관할을 받았다. 즉 고구려 정권 건립초기의 서한은 고구려를 구체적으로 직접관리하였다. --당나라가 수나라를 이어 부단히 군대를 일으켜 고구려를 통일하려하는 원인 중의 하나는 고구려의 활동지역이 일찍부터 전대에 의해 통치되던 지역이기 때문이었다고 하여 그 전쟁이 국내전일 뿐만 아니라 통일전쟁임을 주장하고 있다.
중국학자들이 삼고 있는 역사적인 근거는 위에서 열거한 중국의 사료들과 함께 이를 수용한 삼국사기 등이다. 裴矩는 수에서 黃門侍郞이라는 벼슬을 했고, 對高句麗戰의 정당성을 煬帝에게 적극 권장했었다. 그는 "고려의 땅은 원래 고죽국(孤竹國)의 것이다. 주나라 때 이 땅을 기자(箕子)에게 봉해주었다. 한나라 때 삼군으로 되었다. 진(晋)나라 때에도 요동을 통치하였다. 그런데 이제는 불신(不臣)해서 따로 외역(外域)되니 선제(先帝)가 몹시 미워하시어 오래 전부터 정벌하려 하였다." 라고 하여 침략의 명분을 옛 땅 수복에서 찾고 있다.
후에 唐나라의 高祖는 7년에 신하들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이때 裴矩 蘊彦博 등은 다음과 같은 답변을 하였다. 즉 '요동의 땅은 周代의 箕子國이요, 漢代의 玄 郡입니다.---'라는 내용이다. 또 고구려는 "원래 중국의 땅인데 莫離支가 그 주인을 살해하니 내가 스스로 다스려야겠다."(『新唐書 · 東夷高驪列傳』)라는 내용도 있다.
당태종의 조서를 갖고 고구려에 온 이현장은 연개소문에게 '요동의 여러 성은 본래 중국의 군현이었다'고 하였다. 또 당태종은 자국에서 전쟁 직전에 '요동은 과거에 중국땅이었다'(遼東故中國地)라고 하였다. 하지만 고구려는 조선과 부여를 명분상으로 계승하였으며, 종족 및 영토 또한 계승하였다.
둘째, 고구려는 대대로 중국에 조공을 받치는 등 신속관계에 있었다는 논리이다.
張博泉은 {동북역대강역사}에서 고구려가 대를 이어 중국정권의 蕃國이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1989년 孫進己 王綿厚 馮永謙의 공저인 {동북역사지리}2권에서 당과 고구려는 초기 5년간 전쟁을 지속했지만, 나머지 45년은 고구려가 주로 당나라에 신하로서 예속되어 있었고 당나라의 藩屬으로 존재하였다."고 하였다. 薛虹·李澍田의 {중국동북통사}는 "남북조가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고구려의 번속 관계는 二重臣屬關係로 남조에게 신하로 칭하고 북조에게도 신하로 칭했다. …" 라고 하였으며, 이어 "고구려가 망하자 당나라가 요동군을 수복하였다"고 주장하였다.
楊昭全이 관계한 {중조변계사}에서는 "고구려는 처음부터 끝까지 중국에 예속하였으며, 한나라부터 당나라까지 역대 중원왕조가 관할한 소수 지방정권이다"고 주장하였다. 楊秀祖는 정벌의 원인을 몇 개의 입장에서 정리하면서, 수조의 통치 집단입장에서는 고구려는 번속국이었다. 군신관계를 유지하고, ---수는 무력으로 이를 실현한 것이 라고 하였다. 張韜 또한 '영양왕이 번국의 예를 잃었기 때문에 ----'라는 기록을 인용하면서 동일하게 주장하고 있다. 馬大正 등이 편찬한 {古代中國高句麗歷史叢論}에서도 역시 고구려와 수왕조는 신속관계에 있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중국인들은 이러한 주장을 사료를 열거하는 정도를 넘어서 고구려의 자발성이란 표현으로 정당화 시키고 있다. 즉 고구려는 우리나라 역대의 중앙왕조와 臣屬관계를 유지해 왔고 "중국"밖에서 自絶하지 않았다. "일곱 세기란 기나긴 기간에 역대 중국왕조와 밀접한 신속관계를 유지해 왔다. 『通典 · 高句麗傳』에서 "東晋, 宋나라부터 齊, 梁, 後魏, 後周 까지 고구려의 국왕이 모두 남북 兩朝의 관직을 받았다." 심지어는 "중국"밖에서 自絶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나라가 고구려를 통일한 후에도 많은 고구려 사람이 조국의 통일을 지키기 위해 큰 공을 세웠고 청사에 이름을 남겼다. 예컨대 泉男生, 高仙芝, 王毛仲, 王思禮, 李正己 등이 있다.라고 하여 역사를 의도된 방향으로 끌고 가고 있다.
이들의 공통적인 주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국내 정세의 영향을 받아 역대 왕조는 고구려에 대한 관리를 직접에서 간접으로, 또 다시 간접에서 직접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겪었다. 즉 동한과 西漢왕조는 직접적으로 관리했고, 삼국, 동진, 서진, 남북조시대 등 혼란한 시기에는 신속관계를 유지했으며, 수당왕조는 직접적인 관리를 원했다. 결국 관리방식은 다르지만 모두 고구려의 활동 구역이 중국의 고유한 영토라고 생각하였다는 주장이다. 이는 해당시대의 沒역사적이거나 비현실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한 안이하고 잘못된 해석이 타국의 역사왜곡작업에 어떻게 빌미가 되는 지를 한국사연구자들에게 알려주는 연구방식이다.
그런데 중국학자들은 고구려를 침공한 사실과 성격에 대하여 실제적인 원인도 들고 있다. 楊秀祖는 수가 고구려를 정벌한 원인을 열거하면서 '수는 오랫동안 계속되었던 전란과 할거국면을 철저하게 결속하고 경제가 신속하게 발전하였다.--동북에서 두나라 간의 모순은 점점 첨예화되었고, 전쟁은 불가피하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물론 수는 소수민족지방정권에게 '按撫'위주의 방침을 채택하였다.고 하면서 전쟁의 원인을 고구려에게 돌리고 있다. 이어 '고구려의 국력이 발전하고 군사역량이 강대해지는 것에 우려했고, 전쟁을 벌여서 고구려의 영향을 약화시켰다.'고 하였고, 또 수나라 내부의 계급모순과 계급투쟁이 점점 첨예하게 되었고, 그래서 고구려와의 전쟁을 유발되었다고 국내적인 요인도 거론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동북공정과 직접 관련이 없는 학자들에게서도 나타나고 있다. 즉 '唐朝는 천하질서를 실현하기 위하여 한반도에서 구원을 기다리는 신라를 멸망의 운명에서 구원하고자 하였다. 때문에 ---德(禮)의 수단으로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최종적으로 병(형)의 방식인 군사를 동원하여 고구려를 정벌하였던 것이다.' 라는 견해 등이다.
중국학자들이 삼고 있는 역사적인 근거는 『舊唐書』『新唐書』등 正史의 『高句驪傳』, 혹 『고려전』, 記, 傳, 志 중에 있는 기록이다. 그 외에도 『魏略』『翰苑』『唐會要』『資治通鑒』『通典』『通志』『文獻通考』『太平御覽』『冊府元龜』『太平 宇記』『十六國春秋』『括地志』『高僧傳』,『續高僧傳』등 중국사료들과 함께 이를 수용한 삼국사기 등이다.
4. 이 전쟁의 성격 검토-그 동안의 필자주장을 중심으로
고구려와 隋 唐간에 벌어진 전쟁뿐 만 아니라 관계의 모든 성격을 규정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은 바로 책봉과 조공으로 나타나는 현상 혹은 관계에 대한 해석이다. 이 부분의 대한 방어 혹은 극복의 세부적인 논리는 필자의 능력을 벗어나고 있다. 다만 몇 사람들이 연구를 시도했듯이 동아시아질서 및 고구려를 비롯한 한민족질서를 다른 시각에서 해석하고 구축하는 일이 적극적으로 필요함을 말하고 싶다. 현실적인 관계의 실상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인정하며, 각개 개별단위의 독자성과 고유성을 찾아내고 의미부여하는 인식이 필요하다.
필자는 이 전쟁의 성격과 고구려의 의미에 대해서 이미 여러차례 언급한바 있다. 형식과 명분으로 치장된 질서에 대한 기록과 내용을 토대로 한 재해석이 아닌 국제관계의 현실적인 측면과 실제로 전개되는 상황을 고려하고, 전쟁의 궁극적인 목적을 당시 모든 구성국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한 세계질서의 재편과정으로 보았다. 그러니까 양대 질서의 대결, 양대 문명의 충돌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였다. 또 이 전쟁이 벌어진 역사영역을 '東亞地中海'라는 틀로 설정하였음으로 '동아지중해 국제대전'으로 부르고 있다. 따라서 고수전쟁 고당전쟁 그리고 소위 삼국통일전쟁을 각각 별개의 전쟁이 아니라 단계적으로 연속성을 지닌 하나의 전쟁으로 보았으며, 이 전쟁에 참여한 모든 국가와 종족들의 관련성을 언급하였다. 그리고 전쟁의 진행을 배경 계기 과정 결과 의미의 단계별로 구분하여 이해하므로써 이 전쟁이 隋 唐이라는 소위 중국세력의 일방적인 의도와 행위가 아니었음을 밝혔다. 아울러 전쟁의 과정을 통해서 최소한 고수, 고당전쟁에서는 승자가 중국세력이 아니었음을 명확하게 하였다. 필자는 이러한 논리를 전개하고, 결과를 도출하는데, 최후승자의 기록인 중국의 사서와 삼국사기의 기록을 액면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국제관계의 현실적인 상황 속에서 이해하고 재구성하였음을 밝힌다. 결국 현실이라는 경험이 있고 나서야 그것을 기록한 사료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1) 국제대전의 발발, 高隋전쟁
남조국가인 陳이 589년에 신흥국가인 隋에게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자 고구려의 정책은 守拒之策으로 결정된다. 이는 수에게 심각한 경계심을 촉발시켰다. 文帝는 분노하여 장문의 글을 보내어, '직접 兵을 발하여 공격할 수도 있으니, 마음을 비우고 의혹을 품지 말고 다시 생각을 바꾸라'하고 종용하였다. 적대적으로 대하지 말라고 협박하는 것이다. 이후에 高句麗와 隋의 관계는 사신이 오고가는 등 형식적으로는 원만한 관계를 가진 것으로 보여진다. 592년 3월에 陽王이 즉위하자 수는 高句麗王으로 封하고, 고구려는 이에 감사하는 사신을 보낸다. 이 행위를 두고 중국과 일본인들은 고구려가 신속관계 혹은 책봉체제에 속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양국은 곧 적대관계로 발전하였고, 고구려가 598년에 요서지방을 先攻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수가 4차례에 걸친 대규모 침공을 단행하였으나 대패하였고, 이것이 중요한 요인이 되어 순식간에 멸망하고 말았다.
이 전쟁의 성격을 종합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남북조시대 후기의 국제정세는 중국의 北朝, 突厥, 高句麗, 契丹 등의 북방세력과 南朝, 百濟, 新羅, 倭 등의 남방세력이 多元的인 勢力均衡狀態를 유지하고 있었다. 미묘한 均衡상태와 긴장관계가 감도는 東亞의 국제정세와 황해 해양의 비교적 안정된 상태는 6세기말에 이르러 변화가 발생하였다. 隋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면서 세력균형은 여지없이 깨어지고, 역학관계의 기본구도가 붕괴되었다. 이제는 교섭하는 주체의 성격과 관계가 없이 주변국가들이 南北朝를 대상으로 펼쳤던 對中 등거리외교는 그 가능성이 완전히 봉쇄되었다. 오히려 이젠 통일된 중국이 능동적으로 주변세력의 葛藤을 이용하고 조장하면서 외교상의 이익을 취하는 시대가 도래하였다. 즉 수백 년 동안 지속되어 왔던 등거리 외교의 대상과 형태가 변화하였다.
동아시아 외교환경의 변화는 신질서의 중심축이며, 지각변동의 진앙지인 수나라로 하여금 능동적인 정책을 취하게 하였다. 수나라는 그 동안 명분으로 존속해 오던 중화질서의 개념을 현실적으로 실현코자 했다. 다시 말해서 이전의 국가들이 추구해왔던 명분과 관념을 탈피하고 실질적으로 중국중심의 국제질서를 구축하고자 했다.이러한 국제질서의 재편과 관계를 맺으면서 자연스럽게 황해연안의 질서에도 變動이 일어났다.
한편 고구려는 동아질서의 중심부에서 후퇴하므로써 국제적 위상의 저하를 가져왔고, 한민족잘서에서의 견고한 패자지위가 도전받게 되었다. 오랫동안 해양활동과 多核(重)放射狀外交를 활용해서 동아질서의 중심축을 차지하고 있었던 고구려는 국내정책은 물론 대외정책에 대한 전면적인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고구려와 수 간의 정치 군사적인 갈등을 중심으로 재편을 시작하던 동아질서는 결국 신라와 백제가 수와 연결되었고, 백제는 왜· 수와 연결되었으며, 왜는 역시 백제 및 수와 연결되었다. 그리고 북방의 돌궐 및 契丹 등은 결코 고구려에 도움을 주지 못했으며, 오히려 부분적으로 수에 연결되었다. 수는 주변종족들의 도움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고구려는 해양활동 능력의 약화로 인하여 수를 배후에서 견제하거나 대륙과 황해에서 四面包圍하는 외교정책을 수립할 수가 없었고, 역으로 포위당한 채 對隋戰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전쟁은 고구려의 승리로 끝이 났고, 수는 질서재편작업에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그 후유증으로 멸망에 이르는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다.
이 전쟁은 598년 고구려의 遼西地方 선공으로 시작되어 614년 수나라가 멸망하기 1년 전까지 16년간에 걸쳐 일어난 대전쟁이다. 그러나 교전 당사국들 간 만의 전쟁이 아니라 동아지중해의 전면적인 질서재편을 목적으로 거의 모든 국가와 종족들이 직접 간접으로 참여한 국제대전이었다. 질서재편에는 해양적 성격이 강하게 작용하였고, 외교교섭에서도 해양활동능력에 영향을 받았다. 또한 전쟁의 과정에서 새로운 전략이 사용되었고, 다양한 전술이 개발·보급되었다. 특히 해양을 활용한 군대와 군수물자의 조직적인 운반이 있었고, 수군활동을 이용한 수륙양면 공격과 상륙작전에 의한 후방기습 등 전선개념의 변화와 함께 대규모 전쟁이 시도되었다. 고구려가 승리한 요인 가운데 중요한 하나는 황해를 건너 평양성으로 직공한 수의 해양상륙작전을 방어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 전쟁을 계기로 동아시아의 역학관계가 복잡해졌으며, 각국들은 동아지중해의 중요성을 더욱 인식하였다. 결국 이 전쟁의 기본구도는 고·당전쟁을 중간단계로 하여 삼국통일전쟁으로 이어짐으로써 동아지중해의 질서재편이라는 단초를 낳았다.
2) 국제대전의 과정, 高唐전쟁
고 당간에 벌어진 전쟁은 고수전쟁을 이어 벌어진 계승전적인 성격이 강했다. 唐은 隋를 이었다는 계승성으로 인하여 출발부터 두 가지의 부담을 안게 되었다. 첫째, 당나라의 건국에는 수나라가 멸망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고구려의 승리가 副次的인 要因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둘째, 수나라가 추진하던 中華中心으로 國際秩序를 再編하려는 상황은 당에 이르러서도 변화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당이 계속해서 정복사업을 벌이는 것은 북방의 위협을 제거한다는 방어적인 목적을 넘어서, 自己中心의 확고한 질서를 만들기 위한 적극적인 정책으로 전환하였음을 의미한다. 唐太宗이 자임한 '皇帝天可汗'이란 用語는 東아시아에서 통합된 南北 두 世界의 최고 군주라는 이념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이 같은 일련의 시책들을 펼친 저의는 동아시아의 覇權을 장악하기 위하여 고구려를 비롯한 주변국가들을 정복하려는 것이다. 당은 첫 단계로 돌궐 등 北方勢力의 일부를 세력권 안에 편입시키고, 다음 단계로 고구려 등 동아지중해 세력의 편입을 시도하면서, 계속 다른 지역 역시 세력권 안에 편입시키고자 노력하였다.
당은 고구려와의 중간에 있었던 契丹과 奚를 복속하여 고구려를 포위하게 되었다. 실제로 당태종은 長孫無忌와의 대화에서 거란과 말갈을 동원해서 고구려를 칠 것을 말하고 있다. 또한 당에 속한 말갈을 이용하여 고구려에 속한 말갈을 치도록 하는 이른바 '以唐之靺鞨制高句麗之靺鞨'하는 태도를 가졌다.이 전쟁이 국제대전 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당태종은 고구려와의 1차 전쟁 후인 정관 21년인 647년에 鐵勒의 여러 部에 六都督部 七州의 州를 설치하여 기미정책을 시행하였다.이것은 당시 唐, 그리고 唐太宗이 지닌 東亞的 世界觀이 어떠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전체적으로는 동아시아의 종주권을 장악하고, 군사적으로 패자가 되려는 것이다. 즉 군사적으로는 북방을 제압하면서 방어망을 튼튼하게 구축하고, 그를 위해서는 북방의 遊牧民族을 포위하는 대응전선을 구축하는 것이다. 또한 경제적인 이득을 얻기 위해서는 서쪽으로 西域地域 高昌國 吐藩 등의 지배권을 확실히 하는 한편, 남방교역을 활성화시키고, 동쪽으로는 군사적인 경쟁상대인 고구려를 붕괴시키면서 안전하게 교역권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 전쟁이 국제대전이었음은 왜가 참여 한데서도 나타나고 있다. {新唐書}에 의하면 당의 고종은 왜에게 신라를 위하여 출병할 것을 명령하였던 사실이 있다. 이러한 관계는 이미 632년에 당의 사신인 高表仁이 요청하였고, 이를 蘇我氏 정권이 거절했다는 견해도 있다.
그런데 1차 공격에서 참패를 하고 그토록 후회를 했던 唐太宗은 왜 죽을 때까지 2회에 걸쳐 바다를 건넌 공격을 감행하였을까? 그것은 직접적으로는 영토를 확대하려는 정복욕과 친정군이 실패한데 대한 수치심을 떨치고 복수전을 펴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거시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 전쟁은 국제질서의 재편과 동아지중해의 장악을 둘러싸고 고구려와 통일중국과의 갈등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新秩序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동아시아의 海上權을 확보하는 일은 정치 군사적인 이익 외에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이익을 동시에 가져다주는 일이었다. 특히 고구려는 황해중부 이북에서 활동하면서 당의 新秩序 構築에 강력하게 제동을 걸 수 있는 해양력과 군사적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 전쟁은 그 후에도 659년까지도 계속되었다. 수와 당이 交替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시간적인 연속성의 문제, 동일한 영토를 차지하고 있다는 공간적인 계승성의 문제 등은 두 전쟁의 계기적 측면을 이해하는 표면적인 조건이다. 그 외에도 고수전쟁이 국지전이 아니라 국제질서의 再編을 놓고 벌어진 東아시아의 大戰이었다는 國際秩序의 측면과 未完으로 끝났다는 사실, 고당전쟁이 끝난 후에도 고구려와 당간의 갈등이 여전히 再現된 전후의 상황 등은 두 전쟁 사이에 契機性이 강했음을 보여준다. 당나라는 이 전쟁에서 패배하므로써 당나라 주도의 東亞秩序 재편작업에는 차질이 생겼다. 군사적인 실패는 정치 외교적인 우위의 차질 역시 수반하므로 당은 정치적 권위의 상실로 이어졌다.
3) 국제대전의 完結-소위 삼국통일전쟁
삼국통일전쟁은 일반적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간의 力學關係에서 빚어지고, 고구려와 백제의 壓迫을 받게 된 신라가 唐의 세력을 유도하여 통일을 이룩하게 된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앞 장들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전쟁은 고구려와 통일중국이 동아시아의 종주권과 교역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질서재편전쟁이었고, 당시 대부분의 종족과 나라들이 직접 간접으로 참여한 국제대전이었다. 따라서 이 전쟁은 1단계가 598년 고구려가 수나라를 선공하면서 시작하여 수나라의 멸망까지 이어진 고수전쟁이었고, 다시 2단계는 고구려와 당간의 전쟁으로 계승되어 645년에 전쟁이 일어난 이후부터 659년까지 간헐적으로 계속된 고당전쟁이다. 그리고 3단계는 완결로서 660년에 신라가 개입하면서 한반도 전체는 물론 일본열도의 왜국이 직접 참여하여 격돌을 벌인 국제대전이었다.
전쟁의 진행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고구려는 당과 和 戰 양면책을 추진했다. 645년의 戰鬪에서 승리한 이후에 고구려는 646년, 647년, 648년, 652년, 656년에 계속해서 당나라에 사자를 보내면서 관계를 개선하는 일에 노력을 기울였으며, 한편으로는 당나라의 침입에 맞서 전투를 과감하게 벌여 승리를 쟁취했다. 그런데 648년 이후부터 660년까지는 사실상 전투가 비교적 뜸해져서 두 나라 사이에는 정책이 변화한 조짐이 보인다.
백제는 거의 마지막까지 당과 友好的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였으나 고구려와 동맹하는 일은 본격적으로 추진하지 못했다. 高句麗와 唐 사이의 전쟁을 양국 간의 대결로만 인식하였을 뿐, 역학관계의 변화를 목적으로 한 東亞秩序의 대결로, 백제도 말려 들어갈 것이라고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때문에 백제는 무방비 상태에서 허를 찔려 갑작스레 멸망하였다. 고구려는 말갈을 거느린 채 당·신라를 적대국으로 하였고, 백제와 왜는 직 간접으로 군사적인 연결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당은 신라와 동서로 연합하고, 돌궐·거란·말갈의 일부 등을 거느리고 전쟁을 주도하였다.
왜는 국제질서의 진앙부에서 떨어진 변방의 국가였으므로 고구려와 당의 전쟁이 동아전체를 둘러싼 질서재편 과정의 산물임을 인식하지 못했다. 또한 백제의 멸망을 전후한 시기의 대외관계도 一貫性을 결여한 듯한 모습을 보인다. 백제의 돌연한 멸망은 왜에게 심각한 충격을 주었다. 당과 신라가 동맹을 맺고 전면적인 질서재편을 시도할 경우에는 왜국의 운명이 매우 위태로웠다. 한편 고구려와 왜의 관계는 긴밀하지 못했다. 나당군에게 적극적인 공동대응을 하지 못했다. 백제의 부흥전쟁이 실패한 후에 왜가 당 신라와 교섭을 가진 사실은 이미 왜로서는 고구려와 동맹관계를 맺는 것보다는 현실적인 당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데에 역점을 두었을 가능성이 크다.
왜 조정의 적극적인 참여는 삼국통일전쟁이 단순한 한반도 내의 3국간 전쟁이 아니라 東亞의 秩序를 재편하기 위한 국제전이고, 해양전적인 성격도 띠고 있음을 두려움 속에서 절실하게 이해한 것이다. 즉 왜는 해양에서 新秩序가 구축되었음을 확인하고, 그 對備策을 강구한 것이다. 또한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에 신라와 당의 싸움이 계속되었다는 사실은 이 전쟁이 질서재편의 측면이 강하다는 논거를 더욱 보강해 준다. 이렇게 삼국통일전쟁은 고구려 백제 신라 당 그리고 왜 및 주변 종족까지 참전한 동아시아 최대의 國際大戰이었다.
이 전쟁에서 주체세력은 主導權을 행사하고 攻擊的 입장을 취한 중국세력과 防禦戰을 펴면서 질서를 유지 내지 변화시키고자 하였던 고구려이었다. 나머지 東西北의 여러 국가들과 종족들은 간접적으로 참여하거나 외교적인 관계조정역할에 불과했다. 여기에 한반도의 질서를 재조정하려는 백제와 신라가 작용하였고, 당이 황해를 건너, 신라와 협공하여 백제를 쓰러뜨리고 고구려를 남북에서 협공하므로써 소위 삼국통일전쟁으로 성격이 변화하고 확대되었다. 결과적으로 이 전쟁은 고구려 백제 왜를 잇는 남북세력과 당과 신라를 연결하는 동서세력이 해양을 매개로 이루어진 해양십자형질서이고, 나머지 주변국과 종족들은 國家的 利益을 계산하여 보조적으로 전쟁에 동원되었다.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에도 전쟁은 지속되어 676년까지 신라와 당군, 더 엄밀하게 표현하면 신라를 주축으로 한 한민족연합군과 당군 간에 전쟁이 벌어졌다. 당은 백제에 웅진도독부, 신라에 계림도독부, 그리고 고구려에 안동대도호부를 설치하였다. 이는 이 전쟁이 당으로서는 자국이 추진하고, 국제질서의 재편전략을 목표로 수립되고 주도된 국제전쟁이었음을 반영한다.
高隋戰爭은 동아지중해 국제대전의 勃發, 십 수 년간 지속된 高唐戰爭은 그 過程, 그리고 소위 三國統一戰爭은 대단원의 完結이 된다. 이 전쟁의 결과로 동아시아에는 현재까지 지속되는 민족적 성격을 띤 기본질서가 수립되었다. 즉 통일중국인 唐, 한민족 국가인 신라 및 발해의 성립, 그리고 신흥국가인 일본의 탄생과 발전이다.
4) 전쟁의 역사적 의미
소위 삼국통일과정을 포함한 이 국제대전에 대하여 다양한 평가들이 있었다.
신라로서는 백제를 정벌하기 위한 復讐戰의 성격도 있었다는 견해들도 있으나, 통일의식이 있었으며, 결과적으로는 신라 自力에 의한 통일이란 측면에 비중을 둔 긍정적인 시각들이다. 변태섭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인은 다른 이민족과는 구분되는 동질성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이는 당나라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즉 당고종은 651년에 백제의 의자왕에게 국서를 보냈는데, 그 내용에 ' 海東三國' ' 三韓之氓'이라는 표현을 하였다는 것을 그 한 근거로 삼고 있다. 아울러 '三韓一家' '一統三韓' 등 신라측의 기록에 남아있는 문구 등을 열거하고 있다. 그러나 앞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전쟁은 역사 東아시아, 특히 해양을 매개로 한 동아지중해 질서의 개편을 노리는 질서대결의 측면이 강했다. 따라서 결과와 의미 또한 그러한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전쟁으로 인하여 동아시아에는 새로운 질서가 수립되었다. 발해의 성립으로 인한 남북국시대가 도래했고, 중국지역은 명실 공히 唐이라는 안정된 통일국가를 상당한 기간(적어도 중국사 속에서는)동안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독자적인 질서로서 일본국가가 탄생하였다. 이로서 적어도 현재의 한국지역 중국지역 일본지역을 토대로 한 동아시아의 기본질서가 수립되었으며, 이 3 지역은 각각 독자적인 민족국가로서 발전해왔다. 한편 해양이란 틀 속에서는 동아시아의 해양(東亞地中海)은 개방과 공유의 장이 되었으며, 이에 따라 국제관계의 형태가 달라지고, 문화가 질적으로 성숙하였다. 동아시아의 3 지역은 결국 해양을 매개로 삼아 교섭과 교역을 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에 따라 발해와 신라는 각각의 해양영역을 이용하면서 국제적인 지위를 향상시켜갔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기본질서는 당의 강력한 구심력을 중심으로 하여 재편되었으며, 정치력 군사력 문화력 등의 여러 면에서 서에도 동으로 이동하는 '一進性'의 경향을 띄우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 국제대전의 중요한 한쪽인 고구려와 백제 신라 등은 어떻게 변했을까? 즉 이 3국가를 계승한 우리에게는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일단 고구려의 멸망으로 인하여 영토의 축소와 상실이 생겼다.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했으나, 정치 군사력이란 면에서 능력이 축소되었었고, 당 신라 일본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듯이 국제적인 위치는 현격하게 약화되었다. 주민의 구성에도 변화가 생겨 적지않은 인구가 고구려의 영역에서 이탈하는 등 중추세력이 약화되었다. 그에 따라 필연적으로 고구려의 강한 통제력 안에 있었거나, 국가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던 말갈 거란 등 북방종족들이 우리역사에서 점차 떨어져 나가는 계기가 되었고, 결국 후대에는 오히려 우리를 압박하는 세력과 공간으로 변모하였다. 또한 대륙을 상실하고 한반도에 고착되는 하나의 계기로 작용하였다. 고구려의 멸망은 동아시아에서 차지한 우리의 위치에도 결정적인 한계를 지워주었다.
필자는 고구려의 건국과 발전을 조선계승성과 연관시켜 설명한 바가 있다. 또한 고구려가 발전하고 성공한 원인을 대륙과 해양을 모두 장악한 동아지중해 中核調整役割을 효율적으로 수행한 결과라고 다양한 형태의 연구성과를 통해서 밝힌바가 있다. 북방세력들과 중국지역의 세력들과는 생존을 건 대결과 갈등을 벌이고, 한편 부여 및 남쪽의 백제 신라 가야 등과는 발전과 통일을 목표로 한 경쟁을 하였다. 특히 발전기에는 국제질서의 변화를 능동적으로 주도하여 강국이 될 수 있었는데, 필자는 이를 '東亞地中海(EastAsian-mediterranean-sea) 中核調整論'으로 설정하고, 현재 및 미래발전의 모델로 삼고 있다.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에 발해와 신라가 분점하여 나름대로 역할을 수행했지만, 동아시아에서 적극적인 중핵조정역할을 상실하고, 대륙과 해양을 통일적으로 운영하는 海陸的인 역사활동을 효율적으로 수행 할 수 없었다. 정치적으로는 재분단과 남북국시대의 성립이 이루어졌지만, 반면에 중국지역, 일본과는 분명하게 다른 역사공동체 의식은 더욱 강해진 것 같다.
한편 고구려의 멸망은 동아시아 문화 및 우리문화의 성격과 질에도 큰 변화를 초래했다. 강력한 정치적 실체의 소멸이란 단순한 영토의 상실, 혹은 토지나 인민의 손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필자가 몇 편의 글에서 언급하였듯이 고구려는 독특한 문화를 창조하고 영위하여 왔다. 그것은 한반도 북부와 소위 만주 일대라는 독특한 자연환경과 다수의 종족들,그리고 고구려인들의 독특한 세계관으로 형성된 것이었다. 고구려영역은 해양과 대륙이 만나고, 농경과 유목과 해양이 모인 문화적인 공간이었다. 중국지역의 문화, 북방문화와는 다른, 그러면서도 많은 것을 포괄한 문화였다. 고구려는 강한 자의식을 바탕으로 한 정체성을 지녔으면서도, 동아시아 여러지역과 이어지는 보편성을 지닌 문화를 만들어낸 특이한 나라이다.
그러한 고구려라는 문화주체가 사라짐으로 인하여 강한 정치력과 군사력, 패권의식으로 뒷받침된 강력한 구심력을 지닌 중국문화에 대응하거나 충격, 자극을 줄 수 있는 문화적 공간으로서 만주일대의 역할과 위치가 현저하게 약화되었다. 이는 결국 동아시아의 문화적인 패권주의(중화주의)를 더욱 강화시켰고, 한편으로는 동아시아문화의 역동성과 다양성이 약화되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문화적인 충격은 당연히 우리역사에도 가해졌다. 백제 신라와는 또 다른 성격의 고구려문화가 성격이 불완전하게 계승되었으며, 기형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고구려문화의 특성인 천손으로서의 강한 정체성, 역동적이고 자유로운 세계관이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또한 신라는 소위 삼국통일을 이룩한 이후에 삼한일가 일통삼한 등의 용어에서 보이듯, 또 기타 정책과 종교 등에서 보이듯 전쟁의 후유증을 최소화 시키려고 노력했으나 동족의식에 심각한 분열이 생겼던 것 같다.
5. 제언과 맺음말
역사학은 해석학의 측면이 있음을 이미 몇 차례 밝힌바가 있다. 역사는 그 자체가 生命을 지닌 존재이다. 생명체들의 생명운동이 곧 역사이기 때문에 그러하고, 구성원들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운동하기 때문이다. 역사학의 연구대상인 그 시대의 생명체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위하여 운동하고, 자신들의 입장에서 삶을 解析하고 運用한다. 그들의 눈으로, 마음으로 그 시대와 소위 歷史像을 보고 해석하는 것이 역사학의 기본자세이고, 인간으로서의 도리이다. 그러므로 역사학이 해야 할 기능 가운데 하나는 먼저 잊혀진 진실, 잃어버린 존재에 대한 身元을 복원하는 일이다. 즉 역사적인 위치를 復權시켜주는 일이다.
필자는 이 전쟁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특히 역사학외적인 의도가 심한 동북공정과 관련하여 미처 언급하지 못한 몇 가지를 제언하고자 한다.
우리역사학은 지나치게 사료에 얽매이는 경향이 심하다. 사료는 해석의 결과물 가운데에서도 일부일 뿐이지 전체가 아니다. 사료를 갖지 않은 훌륭한 집단과 의미있는 문화도 많다. 사료를 자연에게, 적에게 탈취당한 집단은 더더욱 많다. 승자가 패자에 대하여 쓴 기록만을 갖고 패자의 역사를 규명한다는 것은 비겁한 행위이며, 지독히도 제국주의적인 발상이고, 식민지적인 인식이다. 다양하고 치밀한 연구방법론을 계발해야 한다. 그래서 학제간의 연구가 필요하고, 역사의 현장에 다가서는 행동주의가 필요하다.
역사의 본질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알고, 진실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연구하는 이론들과 해석모델을 계발해야 한다. 남이 구축한 이론은 참고로 삼을 뿐이지, 典範이 될 수는 없다. 특히 고구려처럼 멸망한 역사, 강한 역사, 다양성의 역사, 아직도 존재를 강하게 과시하고, 비아의 공격대상이 되고 있는 역사는 바라보고, 재단할 수 있는 다양한 틀, 즉 사관이 필요하다.
본고의 주제인 高隋전쟁, 高唐전쟁, 三國統一전쟁은 좀더 거시적이고, 범공간적인 관점에서 해석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동아시아 혹은 동아지중해라는 모델 속에서 이 전쟁의 성격을 규명했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범아시아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역사학이란 현미경을 들이대며 들춰내는 微視的인 관점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망원경을 들이대면서 한 시각이나 한 느낌으로 보는 巨視的인 태도도 필요하다.
이 전쟁의 원인과 배경 가운데 하나로서 사회경제적인 측면에 대해서 보다 치밀하고 구체적으로 규명할 필요가 있다. 특히 대륙과 육지에서 동시에 이루어진 교역의 실상과 그 영향력 등에 대해서 사료의 나열을 넘어서는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필자는 선행 연구성과의 도움을 받아가며 이러한 시각을 어느 정도 적용해서 논문을 발표하였지만 아마추어적인 발언일 뿐이다. 이는 경제학자 혹은 경제사학자들의 본격적인 도움 혹은 공동연구를 통해야 가능하다고 판단한다.
또한 이 전쟁을 문명간의 경쟁이나 충돌이라는 시각에서 볼 필요도 있다. 전쟁이란, 특히 이질적인 집단들 간의 대규모의 국제전쟁이란 정치 경제적인 측면 외에 또 다른 요인이 작용한다. 인간이 사회화를 지향하고, 유형화를 추가하는 이상 이질적인 집단의 동거란 불가피하다. 이러한 이질성은 공존과 상생의 불가피한 조건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충돌의 직접적 혹은 간접적인 요인이 된다. 각 문명간의 갈등과 충돌은 인류역사에 남겨진 드물지 않은 유산이다.
집단이 존재하고 있는 공간과 시간은 정치 경제 문화 등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고구려와 중국세력간의 대결을 여러 각도에서 규명해볼 수 있다. 지역적으로는 東方과 西方 北方의 삼각관계, 국체로는 조선(韓)과 漢의 계승성관계. 문명의 주체로는 東夷와 中華의 관계, 문명의 성격으로는 移動性(mobility)와 定着性(stability) 등 다양한 코드가 있다. 중국의 史書에서 언급한 것처럼 고구려의 신앙은 중국의 그것과 다른 점이 많았으므로 신앙의 차이 또한 갈등과 충돌이 요소로서 작용했을 것이다. 그 외에도 다양한 요인이 있었을 것이다. 또 하나 이 전쟁의 기본성격을 규명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정체성의 대결이라는 입장에서 살펴보는 방법이다. 필자는 동북공정의 목표 가운데 하나로 정체성의 훼손을 거론하였다. 전 근대사회에서 집단의 정체성이란 매우 의미가 크다. 현실성 여부와는 무관하게 의미를 강조하는 경우도 많고, 행위의 명분으로 차용한 많다. 특히 고구려와 수 당간의 전쟁은 더욱 그러한 측면이 많다. 남겨진 사료에는 중국 측의 입장과 행위만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고구려인들에게도 正體性이란 매우 중요했다. 현재 남아있는 사료에 근거하더라도 최소한 전성기에 해당하는 시대에는 天孫으로서 自意識이 매우 강했고, 조선 계승을 완수했다는 자기완성(re-foundation) 의식이 높았던 것 같다. 문화 또한 질적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고구려적인 정체성이 계승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벽화를 통해서 그러한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중화적 세계관을 관철하려는 수 당 제국에게 이것은 또 하나 타도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아울러 통일의 성격에 대해서도 종족적통일, 문화적통일, 정치영토적통일, 정신적 종교적통일, 경제적 통일 등 등 좀 다양한 각도에서 접근하여 총체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고대의 역사상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육지와 해양이란 두 가지 관점에서 동시에 접근해 들어가는 '海陸史觀'이 필요하다. 즉 대륙과 반도 해양을 하나의 통일된 역사단위로 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또한 우리역사를 통일적인 인식과 공동체의식의 강화를 위한 과정으로 해석하는 시각이 필요하다. 우리역사학에서는 첫 출발부터 분단된 상태로 인식하면서 先行국가인 조선과 그 이후 국가들 간의 계승성을 적극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왜 등을 하나의 역사체에서 출발한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 명쾌하지 않다. 우리역사에 편입되었던 영역과 그 속에 살았던 종족 내지 주민들, 향유했던 문화에 대해서 연관성을 지닌 통일적인 역사체로서 접근해볼 필요가 있다. 이제는 미시적이고 각론적인 연구방식과 함께 동시에 총체적으로 거시적으로 파악하면서 상호보완해야 역사상의 본질에 더욱 정확하게 접근할 수 있다.
일본은 과거에 '日韓一域論'을 거쳐 '滿鮮史觀'을 만들어냈다. 중국은 최근에 동북공정 작업을 통해서 고구려 전 기간 동안의 역사를 자국사로 편입하고 있다. 그리고 그 직전에는 소위 '一史兩用'이라고 하여 고구려역사를 평양천도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중국과 한국 각각의 역사라는 논리도 구사하였다. 이러한 분리논리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우리역사를 해륙사관으로 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지역적이었던 우리 역사를 統一的으로 이해할 뿐 아니라, 自體의 完結性과 復原力을 지닌 유기체로서의 우리역사를 파악하면서 母秩序인 조선의 계승성을 주장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민족국가 혹은 민족역사 혹은 민족문화 등을 설정하면서 '系統化 作業'을 원활하게 추진할 수 있다. 또한 중국문명과는 동일하지 않으면서도 유사하고, 상호존중하고 교호하면서도 다른 독특한 문명권의 설정이 가능하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대륙에 부수적인 반도적 존재가 아니며 역사발전도 주변부가 아닌 중핵에서 자율적으로 진행시켜 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고구려는 우리역사에서 이러한 중핵역할을 가장 잘 실천한 나라였음을 확인하면서 중국의 전통적인 역사인식 및 동북공정을 극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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