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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1910년대 중반 조선 주둔 일본군 군영 배치계획과 軍營 유치운동의 양상/이성민.건국대

1910년대 중반 조선 주둔 일본군 군영 배치계획과 軍營 유치운동의 양상


李敏聖*

1. 머리말
2. 조선 주둔 일본군 상주사단 설치안
승인과 육군의 조사활동
3. 군영 유치운동의 촉발과 지역별 양상
3. 군영 유치운동의 촉발과 지역별 양상
4. 지역 간 경쟁의 심화와 제19·20사단
의 배치지역 확정
5. 맺음말


요약
본 글은 1915년 조선 주둔 일본군 상주사단의 군영 배치지역 선정과 지역사
회의 군영 유치운동의 양상에 대해 검토하였다. 1915년 6월 일본 제국의회는
상주사단 설치안을 승인하고, 육군은 군영 배치지역의 조사를 추진하였다.
한편 재조일본인과 일부 조선인은 각지에서 군영 유치운동을 전개하였다.
재조일본인은 운동을 결성하고 주도하여, 청원서를 작성하고 육군성에 제출하
였다. 공직자와 직접 면담을 하는 곳도 있었다. 청원서는 각 지역의 이점을
강조하고, 일본의 침략·식민통치가 ‘발전’을 가져왔다고 미화하였다.
점차 운동양상은 지역적·계층적으로 확장했다. 지역 간 경쟁의식을 드러내는
경우도 나타났다. 토지를 기부하겠다는 조건을 추가하거나, 다른 지역의 운동을
비판하는 예도 빈발했다. 공직자도 관여하였다. 총독부는 유치운동이 통치에



* 건국대학교 사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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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를 낳을 수 있다고 우려하였다. 이에 육군 측에 협조를 요청했으나, 육군은
대구·함흥의 유치운동을 일부 수용하였다. 그 결과 8월 초 군영의 배치지역이
정해졌으나, 대전에서 유치탈락에 따른 시위가 일어났다. 이에 총독과 육군성이
재차 협의하였다. 결국, 대구에 배치할 연대병력 중에서 1개 대대를 대전에
분산 배치하기로 확정했다.
주제어: 1910년대, 일본군, 지역사회, 조선 주둔 일본군, 유치운동, 청원


1. 머리말
조선 주둔 일본군은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었던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기구
였으며 식민지 시기 조선통치를 담당한 식민기구였다. 식민지 시기 조선 주둔
일본군의 명칭은 운영방식에 따라 다르게 불리었으며, 1910년대 초에는 ‘朝鮮
駐箚軍’이라는 이름으로 약 2년을 주기로 일본 본토의 병력이 한반도에 교대·주
둔하며 운용되었다.1)
일본육군은 조선에 ‘주차군’ 대신 상주하는 사단 병력을 배치하고자 계획하
였다. 그리고 1915년 6월 제36회 제국의회는 상주사단 설치에 필요한 예산안을
가결하였다. 이후 육군 당국은 상주화 계획의 일환으로서 군영의 설치를 위한
조사 작업을 추진하였다. 즉, 1915년은 조선주차군이 상주사단으로 재편되는
과정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조선 지역사회에서는 재조일본인(在朝
日本人)을 중심으로 ‘군영 유치운동’이 전개되었다.
조선 주둔 일본군의 상주화 과정은 육군의 대륙침략, 그리고 일본 정치계의
갈등이라는 맥락에서 주목받았다. 일본의 군부와 정당은 군비 확장이라는 측면
에서 견해 차이를 가지고 있었고, 그 결과 다이쇼 정변(大正政變)이라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후 육군은 정계에서 우위를 점하여 대륙정책을 적극적으로


1) 조선 주둔 일본군은 ‘韓國駐箚軍’, ‘조선주차군’ 등의 명칭으로 운영되었으며
1918년부터 일본군은 ‘朝鮮軍’으로 개칭되었다. 본 글에서 검토하는 시기에 공식
명칭은 ‘조선주차군’이었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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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진할 수 있게 되었고, 상주사단을 설치할 수 있었다. 이외에도 국내의 의병운
동 소멸로 인한 대륙진출, 러시아·중국 등 국제정세의 대응책, ‘주차군’ 운용의
문제점 해결, 육군 내부의 장교 진급 문제 및 파벌문제 등이 상주사단의 설치배
경으로 언급되었다. 1916년부터 1921년까지 이어졌던 조선군의 편성과정을
정리한 연구도 있었다.2)
한편 1915년 6월 이후 일본군 상주사단을 조선에 설치하는 과정, 그리고
지역사회의 군영 유치운동에 관한 연구는 비교적 소략하게 언급되었다. 재조일
본인 오이케 츄스케(大池忠助)의 활동, 주차헌병대 사령관 다치바나 고이치로
(立化小一郞)의 일기연구에서는 군영 유치운동의 단편적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
다.3) 청일·러일전쟁 이후 육군의 군비증강에 따라 군용지 확보가 이루어졌고,
육군에 대응하여 일본 지역사회에서 군영을 유치하려는 집단이 있었다는 사실
을 정리한 연구도 있다.4)
선행연구는 조선 주둔 일본군이 상주화하는 과정을 단선적 적용으로 바라보
았다는 측면에서 재고할 필요가 있다. 식민정책은 조선 사회에 단선적으로
적용되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정치·사회·경제의 제분
야에서 식민통치를 통해 자신의 이권을 실현하려는 세력의 활동이 있었다.5)


2) 임종국, ��日本軍의 朝鮮侵略史Ⅰ��, 일월서각, 1989, 230~248쪽; 강창일, 「조선
침략과 지배의 물리적 기반 조선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한일역사공동
연구위원회, 2005; 戶部良一, 「조선주둔 일본군의 실상: 치안·방위·제국」, ≪한일
역사공동연구보고서≫, 2005; 신주백, 「1910年代 日帝의 朝鮮統治와 朝鮮駐屯
日本軍: ‘朝鮮軍’과 憲兵警察制度를 중심으로」, ≪한국사연구≫109, 2000; 신주
백, 「제4장 한반도에서의 일본군 역사(1904~1945)」, 송연옥·김영 편저, ��군대와
성폭력: 한반도의 20세기��, 선인, 2012; 유한철, 「일제 한국주차군의 한국 침략과
정과 조직」,≪한국독립운동사연구≫ 6, 1992; 조건, ��전시 총동원체제기 조선 주
둔 일본군의 조선인 통제와 동원��, 동국대학교 박사논문, 2015; 荒川章二, ��帝國支
配の最前線: 植民地 (地域のなかの軍隊) 7��, 吉川弘文館, 2015.
3) 전성현, 「식민자와 조선 - 일제시기 大池忠助의 지역성과 ‘식민자’로서의 위상」,
≪한국민족문화≫ 49, 2013; 이형식, 「조선헌병대사령관 다치바나 고이치로와
‘무단통치’」, 정병욱 편, ��일기를 통해 본 전통과 근대, 식민지와 국가��, 소명출판,
2013, 224~260쪽.
4) 荒川章二, ��軍用地と都市·民衆��, 山川出版社, 2007; 松下孝昭, ��軍隊を誘致せよ:
陸海軍と都市形成��, 2013.
5) 우치다 준이 지적한 바와 같이, 1910년대 조선총독부는 武斷統治 방침을 내세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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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일본 정부, 총독부와 함께 식민통치체제를 구성한 식민권력의 일원이었
다. 일본의 식민통치체제는 단선적인 식민권력의 이식이 아니라, 다양한 세력의
정치·경제적 욕망이 교차하면서 형성·운영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1915년
상주사단의 군영 배치지역 선정과 유치운동 세력의 활동에 대해 상세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본 글은 1915년 조선 주둔 일본군 상주사단의 설치계획으로서 군영의 배치지
역이 결정되는 과정을 밝히고자 한다. 특히 여기에 개입하였던 세력의 활동을
밝히고, 그 과정에서 총독부와 일본육군, 유치운동 세력 간의 입장 차이를
검토할 것이다. 정책의 시행을 둘러싼 다양한 이해관계의 검토는, 식민통치체제
의 형성과정을 여러모로 보여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군의 상주화에서
병력의 배치지역이 결정되는 과정의 일면도 밝힐 수 있다고 생각된다.6)
이를 위해 일본 防衛硏究所가 소장하고 있는 자료 중에 육군의 공문서철에
해당하는 ��陸軍省大日記��, 특히 ��大日記乙輯��를 검토할 것이다. ��大日記乙
輯��는 공문서 중에 기지구축·토지수용·군영공사 등에 관한 자료가 주를 이루는
문서군이다.7) 그 중 「朝鮮兵営敷地に関する件」은 1915년 군영배치에 대해서
통치의 “Central player”였지만, 통치의 유일한 행위자는 아니었다. 이러한 관점에
서 최근 김백영·기유정·이형식·마츠다 도시히코(松田利彦) 등 식민권력을 구성한
다양한 주체의 이해관계를 드러내기 위한 연구를 제출했다. 선행연구는 대부분
1920년대 이후를 다루고 있다(기유정, ��일본인 식민사회의 정치활동과 ‘조선주
의’에 관한 연구 – 1936년 이전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박사논문,
2011; 김백영, ��지배와 공간: 식민지도시 경성과 제국 일본��, 문학과지성사, 2009;
이형식 편, ��제국과 식민지의 주변인: 재조일본인의 역사적 전개��, 보고사, 2013;
Uchida Jun, Brokers of Empire: Japanese Settler Colonialism in Korea, 1876~1945,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2011; 松田利彦, 陳姃湲 編, ��地域社会から見る
帝国日本と植民地: 朝鮮·台湾·満洲��, 思文閣出版, 2013 등 참조).


6) 다만, 군영 배치지역을 선정하는 데에는 일본육군의 군사적 판단이 주가 되었으
며, 군영 유치운동의 전개가 군의 전략을 본질적으로 바꿀 수는 없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7) 일본 방위연구소 소장 조선 관계 사료의 성격에 관해서는 황선익, 「일본 防衛硏究
所 소장 조선 주둔 일본군 관계 사료의 구성과 성격-‘滿洲-朝鮮’史料群을 중심으
로」, ≪한국민족운동사연구≫83, 2015; 「일본의 무력 강점과 한국주차군 -≪陸
軍省大日記≫ 중 軍事機密大日記와 密大日記를 중심으로」, ≪한반도 주둔 일본군
관계사료 토대연구팀 제1차년도 콜로키엄 발표문: 일본의 군사적 침략과 한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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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총독, 육군 대신 등이 주고받은 電報를 담고 있으며, 당시 지역사회의
군영 유치운동 주도집단이 작성한 청원서도 포함되어 있다. 이외에 신문자료를
이용하여 주도집단의 양상을 구체적으로 확인하여 군영 배치를 둘러싼 총독부·
군영 유치운동 집단 등의 입장을 확인하고, 주도집단의 구성과 활동을 검토할
것이다.


2. 조선 주둔 일본군 상주사단 설치안 승인과 육군의 조사
활동
1) 조선 내 상주사단 설치안 통과
1910년 일본은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었으며, 같은 해 조선에 상주사단을
설치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상주사단
설치를 계획하고 추진했다.8) 데라우치의 주장은 「제국국방방침」에 근거했다.
「제국국방방침」은 일본육군이 가상적국에 대비하기 위해 평시에는 25사단,
전시에는 50사단 규모의 병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규정이었다. 이후 육군은
단계적인 사단 증설계획을 실현하고자 시도하였고, 제17·18사단의 증설에 이어
1910년 이후 조선에 제19·20사단을 설치할 계획을 세웠다.
1912년 일본 육군성 軍務局은 「二個師團增設理由書」를 작성했는데, 육군성
의 조선사단 설치명분을 담고 있다.9) 명분은 러시아가 군사적인 목적으로 “시베
차군(1875~1910년)≫,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한반도 주둔 일본군 관계사료 토대
연구팀, 2017를 참조. 한편, 아시아역사자료센터(アジア歷史資料センター)는 ��大
日記乙輯��은 ��大日記甲輯�� 외의 내용에 관한 보통문서 및 그에 관한 왕복문서가
편철되어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大日記乙輯��의 내용은 크게 4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본 글에서 다룰 「朝鮮兵営敷地に関する件」은 ‘제2류’에 해당하는 문서
로, 土地·建物·兵器·衣糧·馬匹·獣医材料·運輸·通信器材·図書·物品·経費·寄付 등
에 관한 내용이 범주에 들어간다.


8) 조명철, 「上原 육군대신의 사퇴와 사단증설문제」, ≪史叢≫ 71, 2010, 348쪽;
마츠다 도시히코(松田利彦), 「日本陸軍의 中國大陸侵略政策과 朝鮮, 1910~1915
年」, ≪韓國文化≫31,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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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아 철도 복선의 부설, 흑룡 철도의 신설, 만주·몽고·시베리아에 있는 여러
하천 항로의 개설”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육군은 “러시아의 이러한 행위는
반드시 일본에 대해 침략적인 복수전을 계획”하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중국
에서 발생한 정변 이후 일본 정부의 위엄과 명령이 이 지역에 미치지 않게
되었”다는 점도 이유였다.
그러나 상주사단 증설계획은 실현되기 어려웠다. 일본 정부의 예산이 충분하
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치르며 막대한 전쟁비용을
소모했고, 전시에 불어난 군 예산이 한 해 정부 예산의 30%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10) 육군도 재정적 문제를 인지하였다. 그들은 “1910년 이후 조선에
2개 사단을 상설”하려고 했지만 “제국의 재정 상태는 여전히 그 실행을 허락지
않았”다고 하였다.11) 일본의 여론도 상주사단 설치계획을 비판하였으며, 정당
은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긴축재정을 실현코자 했다.
일본육군의 상주사단 계획과 정당의 긴축재정 계획은 정치적인 논란을 불러
일으켰고, 내각이 연달아 붕괴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 결과 육군은 정치적
논란을 일으켰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는 1913
년 樞密院 의장 사표를 제출하였고, 가츠라 타로(桂太郞)는 내각에서 물러나야
했다.12) 우가키 카즈시게(宇垣一成)는 자신의 회고에서 자신과 함께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가 “閑職”으로 물러났다고 기억했다.13) 다나카는 1912년 軍務
局長에서 물러나 보병 제2여단장을 맡았다. 데라우치도 조선군 사단의 증설을


9)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 C14061034000 2個師団増設理由書 同所
要額調 大1.12.23(防衛省防衛研究所)」; 北岡伸一, ��日本陸軍と大陸政策 -
1906~1918��, 126~127쪽.
10) 1907년 일본의 군 예산은 총 예산의 32.9%를 차지했다. 총 예산의 1/3에 해당하
는 군 예산의 비중은 1912년에도 정부예산의 33.6%을 차지했다(Drea, Edward
J, Japan’s Imperial Army: its rise and fall, 1853~1945,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9, p.130).
11)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 C14061034000 2個師団増設理由書 同
所要額調 大1. 12. 23(防衛省防衛研究所)」.
12) 마츠다 도시히코(松田利彦), 「日本陸軍의 中國大陸侵略政策과 朝鮮, 1910~1915
年」, 238쪽.
13) ��宇垣一成日記��1, みすず書房, 1968, 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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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해 권위를 휘두르려고 한다는 비판을 받았다.14)
1914년 6월 일본육군은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 내각의 구성을 계기로
다시 상주사단 설치를 실현하려고 시도했다. 그리고 1914년 6월 22일 오쿠마
총리대신은 육군의 주장을 받아들여 防務會議를 설립했다. 일본군부의 군비
확장문제를 공개적으로 토론하여 국방·외교·재정의 조화를 꾀하겠다는 이유였
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방무회의는 일본군부의 군비 확장을 일방적으로 관철하
기 위한 제도에 불과했다.15)
이후 1914년 10월 방무회의가 개최되었고, 여기서 일본군 상주사단의 설치
계획이 통과되었다. 제국의회의 예산안 통과가 남은 상황이었다. 1914년 12월
제35회 일본 제국의회에서 상주사단 설치예산이 附議되었다. 정우회를 중심으
로 한 반대정당은 내각불신임을 결의하여 예산안을 부결시켰고, 총리대신은
의회를 해산하여 맞대응했다. 1915년 3월 25일 의회의 해산에 따라서 제12회
중의원 총선거가 치러졌다. 그 결과 정부 지지 정당이었던 立憲同志會 153석,
오쿠마 백작 후원회(大隈伯後援會)가 12석 등을 얻어 의회의 우위를 점했다.
제36회 제국의회가 개원하였고, 육군대신은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일본이
‘동양의 평화’를 확보하기 위해 병력 증강이 필요하므로 상주사단이 필요하다
고 발언했다. 병력교대에 드는 비용문제가 발생하고, 비상시에 군 병력의 동원·
관리가 쉽지 않다는 이유도 제시했다. 제국의회에서는 러시아와 일본의 관계가
개선되었고, 조선지역의 군사적 중요성이 하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상주사단을
조선에 설치해야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질의가 있었다. 육군대신은 상주사단의
설치는 국가 간 외교협상을 위한 방편이라고 답변했다.16) 우가키는 ‘二個師團增
設主張の意見書’에서 對중국 정책을 위해서 일본군 상주사단을 조선에 설치하


14) ≪東京朝日新聞≫, 1912년 8월 29일자, 「朝鮮總督の要求」.
15) 방무회의에는 내각총리대신이 의장으로 참여하고, 외무대신과 대장대신, 육군대
신과 해군대신, 참모총장과 해군군령부장이 참여하기로 규정되었다. 방무회의의
구성원 중 절반 이상은 군부 측 인물로서, 제33회 제국의회에서 하야시 키로쿠
(林毅陸)와 쿠보타 유즈루(久保田讓)는 “군인 독점”이 있을 수 있다고 비판한
바 있었다[帝国議会会議録検索システム(http://teikokugikai-i.ndl.go.jp/) 제33회
제국의회 회의록].
16) ‘帝国議会会議録検索システム’ 제36회 제국의회 회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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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는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었다. 당시 일본육군은 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중국 정부를 군사적으로 압박하고, 불평등조약을 강요하여 대륙침략을 전개하
고 있었다.17) 조선주차군의 출병계획도 검토되었다.18) 결국 일본군 상주사단
설치계획은 제국의회 중의원에서 232대 131로 통과했으며, 6월 9일 귀족원에서
결정되었다.


2) 일본군 참모본부의 조사원 파견
일본육군은 상주사단의 조선 내 배치지역을 확정하는 실무에 착수하였다.
군 당국은 상주사단의 설치 소식이 조선 사회에 알려지는 것을 경계했다. 군영
의 배치계획이 알려질 경우, 토지 가격이 폭등하여 군영 배치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19) 즉, 육군의 군용지 확보를 기회로 활용하여
경제적으로 이윤을 얻으려는 세력이 나타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과거 청일·러
일전쟁 이후 육군은 일본 국내의 군용지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같은 문제를
겪어온 바 있었다. 육군은 병비증가에 따라 지역에 군영을 설치하려고 계획하였
으며, 토지를 매수하여 군용지를 확보하였다. 그리고 일본 지역사회에서는 군용


17) 최근 1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하여 러시아와 일본의 관계에 관하여 다양한 연구가
제출되었다. 이에 관해서는 Eduard Baryshev와 Peter berton 등의 연구를 참조
(석화정, 「러일 비밀협약과 러시아의 몽골정책」, ��군사��92, 국방부 군사편찬연구
소, 2014; Baryshev, Eduard, 「The Issue of Armaments Supply in
Russo-Japanese Relations during the First World War (August 1914 – March
1917)」, ��北東アジア研究��第25号, 島根県立大学, 2014; Baryshev, Eduard, The
General Hermonius Mission to Japan, Acta Slavica Iaponica, Tomus 30,
p.21~42 등).
18) 제1차 세계대전 시기, 중국의 원세개와 일본정부 사이에 21개조 요구조항에
관한 교섭이 시작되자 육군의 지도자들은 군사적 위협을 통해 중국문제를 해결
하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일본육군의 대륙침략정책과 상주사단의 설
치문제에 대해서는 마츠다 도시히코(松田利彦), 「日本陸軍의 中國大陸侵略政策
과 朝鮮, 1910~1915年」, 243~250쪽 참조.
19)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03022374700、密大日記 大正4年 4
冊の内 1(防衛省防衛研究所)」; 이형식, 「조선헌병대사령관 다치바나 고이치로
와 ‘무단통치’」, 2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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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매수정책에 대응한 다양한 반응이 일어났다. 그중에서는 지역에 군영이
설치됨에 따른 부수적 이익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도 있었다. 토지소유자가
높은 매입가격을 요구하거나, 업자가 토지를 앞서 買占하여 지가상승을 조장하
는 때도 있었다. 후자의 경우는 지역에서 유치실패에 대해 두려움으로 인해
원만하게 해결되는 예도 있었지만, 높은 토지 가격이 원인이 되어 부대의 배치
가 조정되는 예도 있었다.20) 당시 육군 당국자는 사단이나 여단·연대 등의
배치는 ‘유치운동’과 관계가 없다고 공언하면서도, 지방의 경쟁심을 이용하여
토지를 기부하거나 건축비를 받는다고 이야기되었다.21)
1915년 조선지역의 군영 배치과정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나타났다. 1915년
6월 중순 ≪朝鮮新聞≫은 조선주차헌병대사령관 다치바나 고이치로(立花小一
郞)와 조선주차군사령관 이구치 세이고(井口省吾)에게 상주사단 군영의 배치지
역에 대한 전망을 물었다. 조선 지역사회에서 군영의 배치에 많은 관심이 있다
는 사실도 전했다. 이구치는 정확한 답변을 피했으나, 개인의 생각을 전제로
군영이 조선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배치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다치바나는
유치운동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면서 군영의 배치가 軍略에 따라서 결정될 예정
이라고 말하였다.22) 군영 유치운동과 군영 배치는 무관하다는 공식적 입장과
함께, 조선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부대가 배치될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공직자의
입장은 군 당국의 기본적인 입장을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1915년 6월 22일 참모본부 제1부장 오노 미노부(尾野実信) 소장이 파견되었
다. 재조일본인 간행 신문도 소장이 조선에서 군영배치에 관한 조사 임무를
가지고 조선에 왔다고 보도하였다. 상세한 이동 시간과 장소도 보도하였다.
소장의 조사경로는 육군이 구상하고 있었던 군영 배치를 간접적으로 드러내
준다고 생각된다. 또한, 신문의 상세한 보도는 재조일본인 사회가 군영배치에


20) 松下孝昭, 「過熱する誘致運動: 土地買収をめぐる紛議」, ��軍隊を誘致せよ: 陸海軍
と都市形成��, 2013, 75~81쪽.
21) 松下孝昭, 「日露戦後の兵営誘致運動: 強硬な陸軍の姿勢」, ��軍隊を誘致せよ: 陸海
軍と都市形成��, 2013, 113~115쪽.
22) ≪朝鮮新聞≫, 1915년 6월 11일자, 「增師解決後の諸問題, 世人に聽かんと欲する
所: 立花將軍は斯く語れり」; ≪朝鮮新聞≫, 1915년 6월 21일자, 「井口省吾 軍司
令官 船中談 (上)」.
148 한국근현대사연구 제83집 2017년 겨울호


적지 않은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신문의 보도를 중심으로 구성한 오노 소장의 조사 경로 및 일정은 다음과
같다. 오노 소장은 군영 배치를 위한 실지조사를 위해 조선에 약 2주간 머무르기
로 했다. 소장은 6월 22일 만주에서 경성에 도착하였다. 그는 경성에 머무르다가
원산을 거쳐 북부의 위수지를 시찰하고, 다시 경성으로 돌아와 진해를 돌아본
뒤에 동경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23) 중국에서 조선을 거쳐 동경으로 향하는
일정이었다.
오노 소장의 시찰 지역은 조선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상대적으
로 조선 남부지역에서는 많지 않은 지역을 방문했다. 구체적으로 조선 북부지역
에서는 원산을 경유하여 청진, 나남, 회령, 함흥, 웅기 순으로 시찰을 진행하였
다. 웅기에서 원산으로 돌아온 후에는 경성을 통해 조선 남부지역으로 향했다.
남부에서는 대구를 경유하여 마산, 진해, 부산에 머물렀으며 ‘關釜連絡船’을
타고 동경으로 돌아갔다.24)


3. 군영 유치운동의 촉발과 지역별 양상
1915년 6월 일본 제국의회에서 상주사단 설치안이 승인됨에 따라, 군영
배치지역 선정을 위한 조사가 시작되었다. 조선에서는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하여 중앙의 정책에 대응하기 위한 움직임이 나타났다. 특히 지역사회의 유력자
를 중심으로 한 ‘군영 유치운동’이 표면화되었다. 본 장은 1915년 6월경을
전후로 하여 전개되었던 군영 유치운동의 진행과정을 상세히 밝히고자 한다.25)


23) ≪釜山日報≫, 1915년 6월 24일자, 「尾野少將視察」.
24) ≪每日申報≫, 1915년 6월 18일자, 「小野部長來鮮, 師團設置地視察乎」; ≪朝鮮新
聞≫, 1915년 6월 18일자, 「尾野少將北鮮行」; ≪朝鮮新聞≫, 1915년 6월 22일
자, 「尾野少將大連發」; ≪朝鮮新聞≫, 1915년 6월 23일자, 「尾野少將入京」; ≪朝
鮮新聞≫, 1915년 6월 24일자, 「尾野少將視察日程」; ≪朝鮮新聞≫, 1915년 7월
8일자, 「尾野少將(釜山)」; ≪東京朝日新聞≫, 1915년 7월 6일자, 「尾野少将帰京」;
≪釜山日報≫, 1915년 7월 7일자, 「尾野實信陸軍少將來釜; ≪釜山日報≫, 1915
년 7월 7일자, 「尾野少將の來釜期」.
1910년대 중반 조선 주둔 일본군 군영 배치계획과 軍營 유치운동의 양상 149


1915년 조선 지역사회의 군영 유치운동이 확인되는 시기는 4월 전후였으며,
주도집단의 구성원은 재조일본인이 중심이었다. 1915년 4월 21일 대구 상업회
의소에서 임시총회가 개최되었으며, 대구에 旅團의 설치를 요구하기로 결의하
였다. 나카에 고로헤이(中江五郞平)와 7명의 상업회의소 회원이 참여하였다.26)
4월 27일 오후 6시에는 평양 거주 일본인이 대동관에 모였다. 그들은 평양에
육군 1개 사단을 설치해달라고 요청하기로 결의했으며, 청원서를 작성하여
총독부를 경유해 육군성에 전달하기로 합의했다.27)
5월 21일에는 대전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모여 군영 설치문제를 토의했다.
대전 거주 일본인은 육군이 대전에 1개 連隊를 배치하는 것을 “당국 기정의
방침”이라고 낙관했다고 한다. 이유는 육군이 대전에 이미 약 20만 평의 군용지
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28) 육군이 대전에 보유하고 있었던 토지는
178,395평으로 확인된다. ≪朝鮮師團營舍建築史≫는 “사단증설 이전에 대전의
旣設 군용지가 178,395평”이며, 이 군용지는 1911년에 매수했다고 기록하였
다.29) 1911년 조선주차군사령부는 대전에 20만평의 군용지를 매수하여 여단
혹은 연대병력을 배치하려고 계획했으나, 대전에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인천
거주 일본인이 10배에 가까운 토지가격을 요구하였다. 大田居留民會 總代 와타
나베(渡邊)와 거류민회 평의원 7명은 이러한 토지가격을 부담하여 문제를 해결


25)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03011921500、大日記乙輯大正13年
(防衛省防衛研究所). 본 자료는 1915년 상주사단 군영의 조선 내 배치지역 선정
을 둘러싼 전보·청원서 등이 포함되어 있다. 별도로 출처를 표기한 신문자료를
제외하고, 유치운동에 관하여 본문에 사용하고 있는 대부분의 전보·청원서·보고
서는 본 자료에 함께 묶여 있는 것이다. 본 자료를 출처로 하는 경우에는 이하와
같이 ‘세부문서명, 송·수신처, 작성일자, 마이크로 필름의 페이지 숫자’를 표기할
것이다.
26) 1915년 8월 조선주차헌병대는 대구에서 발생한 유치운동의 전모를 조사하여
육군성에 보고했다. 신문자료를 제외한 대구지역의 유치운동 상황에 대해서는
본 자료를 주로 참조하였다. 「朝憲密警 第132號: 大邱住民兵營設置運動に關する
件」, 朝鮮駐箚憲兵隊司令官 → 陸軍次官, 1915.08.04, 1980~2026.
27) ≪每日申報≫, 1915년 4월 29일자, 「師團增設과 民會」.
28) 「朝憲密警 第154號: 大田人民兵營設置請願運動に關する件」, 立花小一郎 → 陸軍
大臣, 1915. 9. 3, 2186.
29) 朝鮮軍經理部, ≪朝鮮師團營舍建築史≫, 1923, 22쪽.
150 한국근현대사연구 제83집 2017년 겨울호


했다.30) 다시 말해, 대전에 거주하는 일본인은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에 여단·연
대의 유치를 기대하면서 약 20만평에 달하는 군용지 매수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1915년 4월 대전 거주 일본인 측에서 “大邱人士”가 대전에 설치 예정인 군영을
끌어오려고 하는 운동을 시작했으므로 그것에 대응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31)
상술한 1915년 6월 이전 지역사회의 유치운동에서는 몇 가지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첫 번째, 재조선일본인이 유치운동의 주도세력이었다. 재조일본인
세력이 일찍이 운동을 주도하게 되었던 연유는 일본사회에서의 직·간접적인
배경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먼저, 주지하다시피 일본에서는 군비확장을 계기로
지역사회에서 이권을 얻기 위해 군영 유치운동이 빈번하게 발생했기 때문이었
다. 더욱 직접적인 배경은 1915년 3월 25일에 시행되었던 제12회 중의원 총선거
의 결과에 영향을 받았다고 판단된다. 총선거 결과 정부지지 정당이 우위를
점하였고, 따라서 상주사단의 설치가 실현될 것이라고 기대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소식을 접할 수 있었던 재조일본인이 4월경부터 운동을 주도하
였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운동의 일환으로 청원서를 작성하여 육군성에 전달
하였으며, 그 중간에는 조선총독부가 있었다. 세 번째, 지역에 따라 유치를
요구하는 부대의 규모가 달랐다. 평양은 사단, 대구는 여단, 대전은 여단·연대
설치를 기대했다. 마지막으로 대전 거주 일본인 세력은 대구지역의 군영 유치운
동에 경쟁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1915년 6월 이후에는 다양한 지역에서 유치운동이 발생하고 심화하는 양상
이 나타났다. 각 지역의 상황은 개별적으로 전개되었다. 먼저 대전은 ‘大田共進
會’를 중심으로 여단을 유치하기 위해 움직이기로 결의하였으며, 필요한 토지
전부를 기부하는 방안을 논의하였다. 6월 5일 부산에서는 군영의 설치가 지역의
장래에 지대한 영향을 줄 것이라고 예상하며 그에 관해 협의회를 조직했다.32)


30) 田中麗水, ≪(朝鮮)大田發展誌≫, 發行者不明, 1917, 122쪽; 국학자료원 편, ≪韓
國近代史資料叢書 2: 全鮮商業會議所 發達史≫, 국학자료원, 1999, 502~503쪽;
송규진, 「일제강점 초기 ‘식민도시’ 대전의 형성과정에 관한 연구: 일본인의 활
동을 중심으로」, ≪아세아연구≫ 45-2, 2002, 210~213쪽.
31) 「朝憲密警 第154號: 大田人民兵營設置請願運動に關する件」, 立花小一郎 → 陸軍
大臣, 1915. 9. 3, 2186.
1910년대 중반 조선 주둔 일본군 군영 배치계획과 軍營 유치운동의 양상 151


협의회에는 府協議會, 學校組合, 商業會議所 회원, 신문기자 등 부산 거주 일본
인과 조선인 총 5~60명이 협의회에 참가하였으며, 1개 연대 설치 청원을 결의
했다. 그리고 10명의 위원을 뽑아 청원운동을 일임했다. 각 위원은 와카마츠
우사부로(若松兎三郞) 부윤代理 사토(佐藤) 사무관, 사사키(佐佐木) 경상남도
도장관 대리 사사키(佐佐木) 내무부장, 마에다(前田) 경무부장과 만나 연대 설치
를 청원했다.33)
6월 6일 대구 지역에서는 상업회의소가 주도하여 부협의원과 학교조합의원,
상업회의소의원이 ‘旅團設置期成會’를 조직했다. 대구부에 거주하는 일본인·
조선인 유지도 모임에 참여하였다. 그중 15명이 추천을 받아 기성회 회원으로
참여했다. 유지는 대구부 주민을 대상으로 회원·회비모집을 맡았다. 회비는
부민을 등급별로 나누어 거두기로 했다. 6월 7일 회칙을 정하고, 임원을 선출했
으며 청원서 초안을 작성했다. 회장은 나카에 고로헤이(中江五郞平), 부회장은
사카이 만지로(堺萬次郞)와 함께 李一雨가 맡았다. 上京위원은 이와세 시즈카
(岩瀨靜)·오쿠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였다. 조선인 鄭在學, 李英勉, 李炳學,
徐丙朝, 朴基敦, 李根雨, 裵○植, 鄭海鵬, 李善汝, 玄炅運, 徐丙春, 李章雨, 徐佑淳,
馬錫龍, 金承勳, 李英勉 등도 운동에 참여했다.34) 이들은 대부분 대구부에 거주
하는 상공업자·관료 출신이었다.
6월 9일 대구 상경위원은 경성을 방문하여 조선총독·정무총감·헌병대사령


32) ≪釜山日報≫, 1915년 6월 4일자, 「各地通信: 大田」; ≪釜山日報≫, 1915년 6월
5일자, 「師團增設と協議: 釜山商業會議所に於て」.
33) 협의회의 발기인은 가시이 겐타로(香雄源太郞), 사카다 후미키치(坂田文吉), 하자
마 후사타로(迫間房太郞), 도요타 도미타로(豊田福太郞), 다나카 히데지로(田中秀
次郞), 고치야마 시나노스케(河內山品之助), 다케시다 요시타카(竹下佳隆) 등이었
다. 발기인 외에 오토 후쿠사부로(大戶復三郞), 미츠후지 다스쿠(光藤介), 아쿠타
카와 타다시(芥川正)가 참여하여 협의회 위원을 구성하였다(≪釜山日報≫, 1915
년 6월 6일자, 「聯隊設置請願協議: 委員十名に一任す」; ≪釜山日報≫, 1915년
6월 6일자, 「請願委員の運動: 慶南道各官憲より始む」).
34) 헌병대 보고에 따르면, 기성회는 회장·부회장·간사·평의원·실행위원으로 구성되
었다. 대구의 상업회의소, 학교조합, 부협의회와 대구부의 공직자 모두가 청원에
가담하였으며, 유력자·자산가 대부분이 참여했다고 보고하였다(「朝憲密警 第
132號: 大邱住民兵營設置運動に關する件」, 朝鮮駐箚憲兵隊司令官 → 陸軍次官,
1915.08.04, 1980~2026).
152 한국근현대사연구 제83집 2017년 겨울호


관·군 참모장에게 청원서 초안을 전달했다. 총독은 대구가 위수지로 선정될
가능성이 높으며, 선정에 따라 예산도 추가로 배정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다만 청원서 초안에 토지기부에 대한 약속을 지적했다. 해당 내용이 없어도
선정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조언이었다.35) 11일에는 헌병대사령관을 만나
대구에 여단사령부 설치를 건의하기도 했다.36)
부산에서는 ‘聯隊設置問題委員會’를 조직하고, 청원서 초안을 작성하였다.
부산 유치운동을 위임받았던 10명의 위원에서 10명을 추가로 추천하였다. 토지
기부에 관한 사항도 결의하였으며, 위원회는 총독과 조선주차군사령관에게
청원서를 전달하기로 했다. 10명의 추가 위원 중에서는 조선인 李圭直, 朴泳吉,
李圭正이 포함되었다.37)
6월 11일 전라남도 광주와 함경남도 함흥에서도 군영을 유치하기 위해 조직
을 구성하였다. 광주에서는 ‘軍營設置期成會’를 조직했다. 회장은 마츠다 도쿠
지로(松田德次郞), 부회장은 金衡玉이 맡았다. 함흥에서는 데라모토 고타로(寺
本幸太郞)가 대표를 맡았다. 조선인은 高敬必·盧潤稷이 참여하였다.38)
광주·함흥의 주도집단이 작성한 청원서는 일본의 한반도 침략과 식민통치를
통해 지역발전이 가능했다고 미화하였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군영의 설치가
필요하다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즉, 식민주의적 발전 논리를 내세웠다. 일본군
이 광주 일대에서 동학농민운동을 탄압했고, 러일전쟁 시기 일본군 13사단이
함흥에 주둔했기 때문에 지역발전이 가능했다는 주장이었다. 군영의 배치도
지역발전을 위해 필요하다고 서술하였다. 토지를 기부하겠다는 약속도 포함하
였다. 광주와 함흥의 청원서는 총독부를 거쳐 내무성과 육군성으로 발송되었다.
35) 「朝憲密警 第132號: 大邱住民兵營設置運動に關する件」, 朝鮮駐箚憲兵隊司令官
→ 陸軍次官, 1915.08.04, 1997; ≪東京朝日新聞≫, 1915년 6월 14일자, 「朝鮮
特電: 連隊に敷地寄附」.
36) 이형식, 「조선헌병대사령관 다치바나 고이치로와 ‘무단통치’」, 287쪽.
37) ≪釜山日報≫, 1915년 6월 10일자, 「聯隊設置請願委員會: 請願方法に關する協
議」; ≪釜山日報≫, 1915년 6월 11일자, 「聯隊設置請願の會合: 請願委員を增
加し, 請願書の起草成る」; ≪釜山日報≫, 1915년 6월 11일자, 「聯隊設置請願
書調印」.
38) 「送付: 請願書」, 朝鮮總督府 → 陸軍省, 1915. 6. 12, 2308~2313; 「送付: 軍營設
置に關する請願書」, 朝鮮總督府 → 內務省, 1915. 6. 2○, 2078~2087.
1910년대 중반 조선 주둔 일본군 군영 배치계획과 軍營 유치운동의 양상 153
광주에서는 기성회 회장과 이마이 기요시(今井潔) 상공회장, 조선인 2명이 로비
를 위해 경성 방문계획을 세우기도 했다.39)
일본·조선의 신문은 유치운동을 보도하였으며 군영 배치지역에 대해 다양
하게 전망하였다. 대부분의 보도는 조선사단의 위수지가 아직 결정되지 않았
다는 내용과 함께, 그 후보지에 대하여 언급하는 경우도 있었다.40) 한편 ≪釜山
日報≫는 6월 15일자로 “신설사단의 위수지”에 대한 전망을 게재했는데, 여기
서는 군영 배치지역에 대한 전망과 그 이유를 상세하게 밝혀놓아 주목된다.
먼저, 용산과 나남에는 사단의 사령부가 설치될 가능성이 높고, 여단 이하
규모의 군영에 관해서는 의견이 각기 달라서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또한 육군은 토지를 매수하는 비용으로 “겨우 10만 원을 計上”하였
다는 점을 지적했다. 육군성의 토지매수비 책정을 통하여, 상주사단의 병력배
치가 기존 '조선주차군'의 병력배치와 큰 차이가 나지 않을 것임을 전망했던
것이다. 따라서 북부는 원산·함흥·회령, 남부는 대전, 평양, 의주로서, 기존
군영이 배치된 지역이 유지될 것으로 보도하였으며, 그 이유로는 “지형교통
기타 조선 兵舍가 현존하는 점”을 꼽았다.41) 육군성이 상주화 관련 토지매수비
를 “겨우 10만원” 책정하였다는 보도는 사실이었다. ≪朝鮮師團營舍建築史≫
에는 이와 관련되어 있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사단증설에 따라서
토지매수 및 조사에 관하여 大正4년 8월 20일 經建丙 第331號로써, 육군성
경리국장으로부터 조선군 경리부장에게 다음과 같이 통지”했다고 적었다. 그
내용으로는 “사단증설에 따라서 본년도 예산에 계상한 토지매수비 ‘金拾萬貳
千圓’ 목표[目途]로 좌기 각항과 함께 매수의 조사를 진행”한다고 하였다. 즉,
육군성은 조선에 상주사단을 설치하기 위해 토지매수비로 102,000원을 책정
39) ≪釜山日報≫, 1915년 6월 16일자, 「各地通信: 軍營地設置運動」.
40) ≪東京朝日新聞≫, 1915년 6월 12일자, 「増師配備方法」; ≪朝鮮新聞≫, 1915년
6월 12일자, 「東京特電: 增師設立と本年の建設: 師團は龍山羅南に內定」; ≪朝鮮
新聞≫, 1915년 6월 13일자; ≪每日申報≫, 1915년 6월 13일자, 「東京特電: 新師
團の編成 大正五年度完成の內容: 增設師團衛戍地」; ≪神戶新聞≫, 1915년 6월
13일자, 「朝鮮師團敷地」; ≪朝鮮新聞≫, 1915년 6월 14일자, 「增師着手の順序」;
≪朝鮮新聞≫, 1915년 6월 19일자, 「東京特電: 師團の新設地」.
41) ≪釜山日報≫, 1915년 6월 15일자, 「新設師團の衛戍地: 議論區區にて未決定」.
154 한국근현대사연구 제83집 2017년 겨울호
하였다.42)
언론은 지역 간 유치운동의 경쟁을 유발하였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운동의
지역적 범위가 전라도 지역까지 확대되었다. 신문에서는 전라남도의 나주에서
유치운동이 일어나고 있으므로 “光州人士의 분발이 필요”하다고 보도하였다.
이후 광주지역은 청원서를 제출하고, 시가지 동북부 방면으로 실지조사에 나섰
다. 기성회 회장, 부회장이 경성에 가서 유치운동을 벌이기로 하는 계획도
세웠다.43)
6월 15일 전주, 16일 나주, 20일 정읍에서도 잇달아 청원서가 작성되었다.44)
대표자는 각각 이노우에 쇼타로(井上正太郞), 오카(大賀忠潤), 니시오 모토키치
(西尾元吉)였다. 나주에서는 조선인도 서명에 참여했다.45) 청원서에서는 전라
도 지역의 자연·교통 분야의 강점을 다루었다. 특히 지역의 역사를 강조하면서
식민주의적인 발전논리를 재차 강조하였다. 일본군의 동학농민운동의 탄압과
일본인 이주가 지역의 발전을 이끌었다는 주장이었다.
6월 14일 대구에서는 府尹 다케자키 로쿠지로(竹崎六次郎)까지 직접 가담하
여 지역발전을 명분으로 총독부·육군 당국과 접촉하였다. 부윤이 지역사회의
유치운동에 참여하였다는 점이 주목된다. 그는 위수지로서 대구의 이점을 강조
했다. 만약 여단 설치지역에서 제외된다면 지역사회의 발전이 어려워질 것이라
는 주장도 하였다. 6월 15일, 23일 대구의 운동원 오쿠라, ‘여단설치기성회’
회장 나카에가 도쿄를 직접 방문하여 육군성을 대상으로 로비활동을 개시하기
도 했다.46)
42) 朝鮮軍經理部, ≪朝鮮師團營舍建築史≫, 1923, 1쪽.
43) ≪朝鮮新聞≫, 1915년 6월 12일자, 「光州より」; ≪朝鮮新聞≫, 1915년 6월 17일
자, 「兵營設置期成會(光州)」.
44) 「請願書」, 全羅道 全州 學校組合管理者 井上正太郞 → 陸軍大臣, 1915.6.14,
1781~1789; 「兵營設置請願の件(羅州)」, 朝鮮總督 → 陸軍大臣, 1915. 06. 26,
1816~1829; 「請願書」, 1915. 06. 20, 1830~1856.
45) 金炳斗, 金宗鐵, 金容圭, 孫有學, 寄斗鉉, 朴正業, 金鐘大, 吳璟厚, 孫鍾達, 鄭德重,
昇鳳運, 정읍에서는 朴箕哲, 朴濟炫, 朴興奎, 金箕東.
46) 「送付: 副申」, 朝鮮總督府 → 陸軍省, 1915.06.15, 2090~2094; 「電報」, 大邱旅團
設置期成會 → 陸軍大臣, 2027; ≪東京朝日新聞≫, 1915년 6월 24일자, 「旅團設
置請願員東上」.
1910년대 중반 조선 주둔 일본군 군영 배치계획과 軍營 유치운동의 양상 155
한편 6월 23일 경성에서는 대구의 유치운동에 중요한 면담이 진행되었다.
참석자는 대구부윤, 와타나베(渡邊) 대구상업회의소 서기장, 오노 미노부 소장
이었다. 약속된 일정은 아니었다. 대구부윤이 공무상 경성을 방문하면서, 와타
나베(渡邊)와 함께 군영 유치를 위해 활동할 예정이었다. 6월 말은 오노 소장이
조선에 도착하여 경성에 머무르고 있었던 때였다. 이에 대구의 유치운동 집단의
일정과 맞물리게 되었단 것이었다.47)
그러나 오노 소장은 대구 지역을 군영의 배치지역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도쿄로 떠났던 오쿠라, 나카에도 7월 1일 같은 소식을 전했다. 참모본부 나카가
와(中川) 과장, 육군성 오시마 겐이치(大島建一) 육군차관은 두 사람에게 대구에
병영이 설치될 희망이 없고, 대구는 애초에 사단증설[增師]과 관계가 없었다고
이야기했다.48)
6월 29일 전주에서는 ‘군영설치운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군영설치운동위
원회’에는 전주 거주 일본인과 29명의 조선인이 참석하였다. 회의에서는 전주
의 군영 유치운동을 점검하고, 경성과 도쿄에 파견할 운동원으로 이노우에
쇼타로(井上正太郞)와 시바타 가네카츠(柴田兼克)를 선출했다. 필요한 경비는
“內鮮人有志”가 공동부담하기로 했다.49)
전주지역 주도집단이 작성한 청원서에서는 다른 지역에 대한 경쟁의식이
반영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6월 29일 작성되었던 청원서는 지난
6월 15일의 청원서와 다른 내용이 채워졌다. 그 중 주목되는 점은 다른 유치운동
집단을 비판하는 내용이 추가되었다는 점이었다. 청원서는 군영의 배치가 국가
의 방위와 관련되어 있기에 운동 여하에 따라 결정되지 않아야하기 한다고
주장하였다. 정부와 군 당국의 입장을 전반부에 내세웠던 것이다. 다만, 전주는
예외라고 주장하면서 “육군 要部”의 인사로부터 위수지로 인정받았다는 이유
47) 「朝憲密警 第132號: 大邱住民兵營設置運動に關する件」, 朝鮮駐箚憲兵隊司令官
→ 陸軍次官, 1915.08.04, 1999.
48) 「朝憲密警 第132號: 大邱住民兵營設置運動に關する件」, 朝鮮駐箚憲兵隊司令官
→ 陸軍次官, 1915.08.04, 1999~2000.
49) 두 사람은 7월 3일 출발하여, 총독부·군사령부의 요직자와 면담을 가졌다. 7월
9일에는 전주에서 보고회를 가진 뒤, 같은 날 도쿄로 떠났다[≪朝鮮新聞≫, 1915
년 7월 2일자, 「軍營設置運動(全州)」].
156 한국근현대사연구 제83집 2017년 겨울호
를 잇달아 서술하였다. 토지기부에 대한 약속도 추가되었다. 게다가 청원서에
포함되어 있는 서명의 분량이 늘어났으며, 구체적으로는 전주 거주 조선인
유력자의 이름이 추가되었다. 앞서 작성되었던 청원서는 대표자 이노우에 쇼타
로(井上正太郞)의 이름만 표기되었으나, 6월 말에는 일본인 50명과 조선인의
서명이 포함되었다.50)
1915년 7월 초에는 함경도 북청, 경기도 수원에서 군영의 유치를 위한 청원서
가 작성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운동의 양상이 전국적으로 확대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 개별적으로 전개되었던 유치운동이 근본적으로 식민주의적
발전논리를 공유했다는 점도 보인다. 청원서의 내용에서 공통적으로 일본군
침략과 주둔, 총독부의 식민통치로 지역이 발전하였기 때문에 군영의 유치가
필요하다고 서술하였기 때문이다.51)
7월 6일 함흥에서는 여단의 설치를 조건으로 부지 10만 평을 제공하겠다고
육군성에 전보를 보내기에 이르렀다. 이에 앞서 함흥지역의 주도집단은 6월
23일 1평에 10전 이하로 토지매수에 응하겠다고 전보를 보낸 바 있었다.52)
함흥에서는 낮은 가격 선에서 토지매수를 받아들이기로 했지만, 다른 지역의
토지기부에 영향을 받아 직접 10만 평의 토지기부를 약속하게 되었다고 생각
된다.
7월 중순에는 경기도 영등포에서도 위수지 선정을 요청했다. 영등포는 경성
에 인접한 지역으로, 군영이 배치될 가능성이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영등포의 주도집단이 작성한 청원서는 이러한 현실적 판단이 반영되었다는
점에서 눈에 띈다. 청원서는 지역의 상황을 고려했을 때 대규모 부대를 배치하
50) 조선인은 金性珪, 辛泰斌, 鄭碩謨, 白樂倫, 李康元이 서명했다(「朝鮮全羅北道全州
聯隊設置請願書」, 井上正太郞 → 陸軍次官, 1869~1896).
51) 북청의 대표자는 츠보쿠라 니조(坪倉二三)였다. 수원 대표자는 곤도 도라노스케
(近藤虎之助)였고 미야나가 이쿠타로(宮永幾太郞), 朴丗陽이 副대표였다(「軍營設
置請願書」, 坪倉二三 → 朝鮮總督, 1915.07.01; 「軍營設置請願書」, 坪倉二三 →
陸軍大臣, 1915.07.02; 「送付: 兵營設置請願書」, 朝鮮總督府 → 陸軍省,
1908~1920).
52) 「電報」, 請願委員長 寺本幸太郞 → 陸軍大臣, 1915.6.23, 2050; 「電報」, 軍營期成
會委員長(咸興)寺本幸太郞 → 陸軍大臣, 1915.07.06, 2046.
1910년대 중반 조선 주둔 일본군 군영 배치계획과 軍營 유치운동의 양상 157
기는 힘들지만, “지방민의 정성[至情]을 참작”하여 사단에 부속하는 特科의
한 군영이라도 설치해주기를 요청했다. 이는 영등포와 가까운 경성에 설치될
부대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영등포 대표자는 오츠카 소자부로(大塚宗三
郞)였으며, 일본인 34명과 함께 조선인 李昌云, 李廷植, 金重日, 崔○三, 金○善
이 서명했다. 필요한 부지는 지방민이 응분 헌납하겠다고 공언했다.53)
정리하면, 1915년 재조선일본인을 중심으로 시작된 군영 유치운동은 지역에
거주하는 일부 조선인까지 포괄하고, 지역적으로 확장하는 양상을 띠었다. 각
지역의 주도집단은 개별적으로 운동을 진행하였지만 몇 가지 측면에서 공통적
인 부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먼저, 유치운동에 참여한 조선인은 일본인과
지역적·경제적 이해관계를 공유했으며, 나아가 식민주의적 발전논리를 공유했
다고 생각된다. 유치운동의 주도집단이 작성한 청원서는 일본군과 조선총독부
의 한반도 침략, 식민통치가 지역의 발전을 가져왔기 때문에 상주사단 군영의
배치가 필요하다는 논리를 내세웠기 때문이었다. 군영 유치운동은 지역의 ‘발
전’을 이유로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통치를 합리화하는 식민주의적 논리로 진행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지역사회의 재조일본인과 일부 조선인으로
구성되었던 운동의 주도집단은 청원서를 작성하거나 공직자와 직접 접촉하였
다. 청원서를 작성하는 경우에 총독부를 거쳐서 육군성으로 보냈다. 면담을
하는 경우에는 대체로 식민지 조선의 공직자를 대상으로 하였다. 대구는 일찍이
부윤이 가담하였다는 점, 총독부를 경유하지 않고 육군성과 직접 접촉하였다는
점이 주목된다. 지역 간의 경쟁양상이 점차 심화되었고, 그것이 각각의 운동양
상에도 영향을 주었다는 공통점도 있었다.
4. 지역 간 경쟁의 심화와 제19·20사단의 배치지역 확정
1915년 6월을 전후하여 조선 지역사회에서는 재조일본인과 조선인 유력자를
중심으로 군영 유치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지역적으로
53) 「兵營設置に關する陳情書送付の件」, 寺內正毅 → 岡市之助, 1915.07.17,
1897~1907.
158 한국근현대사연구 제83집 2017년 겨울호
확장하는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7월 초에는 어느 지역의 주도집단도 가시적
성과를 거두지는 못한 상황이었다. 본 장에서는 군영 유치운동의 양상이 격화하
고, 조선총독부와 일본육군의 입장이 교차하면서, 조선에 일본군 제19·20사단
의 군영 배치지역이 결정되는 과정을 검토할 것이다.
1915년 7월 4일 대구지역에 거주하는 일본인 나카에, 오쿠라가 경성을 방문
하여 유치운동을 재차 시도하였다. 두 사람은 총독과 총무국장, 주차군 참모장,
오노 소장을 만나 면담을 했다. 그런데 면담에서 후루미 군 참모장은 육군이
대전에 보유하고 있는 규모만큼 토지를 기부할 때는 대구에 군영의 설치가
가능할 것이라는 요지로 발언하였다. 참모장은 오시마 겐이치 육군차관 등
당국의 입장도 같다고 확인시켜주었다.54)
1915년 7월 5일 ≪도쿄아사히신문(東京朝日新聞)≫은 일본육군의 조선 내
군영 배치계획을 보도했다.55) 아사히신문은 보도내용이 오노 소장의 조사결과
에 대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오노 소장은 육군 내부의 추가적인 심의작업이
필요하다고 반박했다. 조사한 내용 자체는 사실이었으나, 추가심의가 필요하다
는 이야기였다. 이후 조선 내 발행 신문에서도 군영 배치계획을 보도하였다.56)
<표 1>은 7월 5일 아사히신문이 보도한 내용을 표로 정리한 것이다. 조선
지역사회의 군영 유치운동의 영향력은 크지 않았지만, 대구가 군영 배치지역
으로 대두했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6월 말에서 7월 초 오노 소장은 일본군
상주사단의 위수지 선정을 위해 조사를 진행하고 총독부·일본군 공직자와도
의견을 교환하였다. 그 결과 대구가 남부지역의 군영 배치지역으로 고려되었
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확정된 사안은 아니었다. 앞서, 육군당국은 육군
54) 「大邱住民兵營設置運動に關する件」, 朝鮮駐箚憲兵隊司令官 → 陸軍次官,
1915.08.04.
55) ≪東京朝日新聞≫, 1915년 7월 5일자, 「新設二個師団配置」; ≪朝鮮新聞≫, 1915
년 7월 10일자, 「東京特電: 新設師團配置確定期」; ≪朝鮮新聞≫, 1915년 7월 10
일자, 「新設師團 - 近近配置確定發表」.
56) 조선신문은 제37여단을 제27여단이라고 표기했다(≪朝鮮新聞≫, 1915년 7월
6일자, 「東京特電: 朝鮮新設師團設置地: 第19師團及第20師團」; ≪朝鮮新聞≫,
1915년 7월 10일자, 「東京特電: 新設師團配置確定期」; ≪朝鮮新聞≫, 1915년
7월 10일자, 「新設師團 - 近近配置確定發表」; ≪每日申報≫, 1915년 7월 9일자,
「師團設置地未定」).
1910년대 중반 조선 주둔 일본군 군영 배치계획과 軍營 유치운동의 양상 159
사단 여단 예하 부대 위수지
제19사단
(용산)
보병
제37여단
(용산)
보병
제73연대
기병
제27연대
야포병
제25연대
공병
제19대대
용산
보병
제74연대
대구
보병
제38여단
(평양)
보병
제75연대
평양
보병
제76연대
의주
제20사단
(나남)
보병
제39여단
(나남)
보병
제77연대
기병
제28연대
야포병
제26연대
공병
제20대대
나남
보병
제80연대
함흥
보병
제40여단
(원산)
보병
제78연대
회령
보병
제79연대
원산
<표 1> 신설 2개사단 배치계획(1915. 7. 5.)
이 대전에 보유하고 있는 군용지만큼의 토지기부가 선결되어야 한다고 밝힌
바 있었다. 따라서 오노 소장도 추가 심의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하게 되었던
것이다.
7월 8일 밤 대전에서는 1,000여명의 주민이 모여 시위를 했다. 대전이 군영
배치지역에서 배제되었다는 사실에 항의하기 위해서였다.57) 대전이 아닌 대구
가 위수지로 선정되었다는 사실이 지역사회의 불만을 한층 격화시켰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미 4월 초부터 대전의 유력자는 대구의 군영 유치운동이 대전
군영의 이전을 가져올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주차헌병대 보고에 따르면, 대전의 주민은 위수지 선정에 대해 낙관하고 있었
다. 언론도 이러한 판단을 부추겼다. 언론은 대전이 “南鮮의 유일한 여단사령부
57) ≪東京朝日新聞≫, 1915년 7월 9일자, 「本社朝鮮特電 太田市民失望」.
160 한국근현대사연구 제83집 2017년 겨울호
설치 예정지”라고 보도했다.58)
한편, 7월 8일 조선총독부는 육군성에 전보를 보내 유치운동을 비판하였다.
함흥에서 10만평에 달하는 토지를 기부하겠다고 약속한 데 이어, 군영 유치운동
이 과열되어 대전에서 시위까지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이는 총독이 6월 초부터
지역사회의 토지기부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내비쳤음에도 불구하고 일어
난 일이었다. 총독은 재조일본인이 병영설치熱에 빠져 있고, 이것이 조선인을
부추길 수 있다고 우려했으며, 육군 측이 유치운동에 대한 확실한 태도를 보여
야 한다고 주장했다. 군영의 배치가 토지제공 여부로 결정된다는 생각을 심어주
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유치운동이 국가의 위신에 해를 끼치고, 식민통치
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직접적인 비판도 있었다.59)
그러나 일본육군에게 토지기부는 상주사단의 군영 배치에서 고려사항 중
하나였다. 주지하다시피 군 당국은 군영 설치에 재정적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
였고, 조선군 상주화 과정에 편성한 토지매수비도 많지 않았다. 토지가격의
담합까지 우려했던 입장에서 지역사회의 유치운동은 예산을 절약할 수 있는
기회였다.
조선총독부가 지역사회의 유치운동에 부정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7월 9일
충청남도 도 장관 오하라 신조(小原新三)는 대전지역의 항의를 육군성에 알리고
여단·연대의 배치를 요청했다.60) 대구부윤과 같은 맥락에서 공직자가 지역사회
의 압력에 영향을 받아서 유치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던 것이다. 대전 유치운동의
주도집단은 나이토 우지오(內藤氏雄)를 대표로 하는 청원서도 작성하였다. 내용
은 여단·연대의 설치를 위해 이미 보유하고 있는 군용지 외에 추가로 여단사령
부와 장교 하사관 숙소용 후보지 다섯 군데를 표기하여 기존 時價보다 최소
15전에서 최대 30전 낮춘 가격에 제공하겠다는 약속이었다.61)
한편, 대구에서는 기성회를 중심으로 토지기부를 위한 절차에 돌입하였다.
7월 10일 토지헌납을 결의하고, 매수비용의 모집방법을 논의하여 15일 육군대
58) ≪朝鮮新聞≫, 1915년 6월 29일자, 「鐵道改良工事と大田新設旅團」.
59) 「電報」, 朝鮮總督 → 陸軍大臣, 1915. 7. 8, 2043~2045.
60) 「電報」, 忠淸南道長官 → 陸軍大臣, 2261.
61) 「請願書」, 內藤氏雄 → 陸軍大臣, 2236~2255.
1910년대 중반 조선 주둔 일본군 군영 배치계획과 軍營 유치운동의 양상 161
신과 참모총장에게 알렸다. 대구가 토지매입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리고, 이를
군영의 배치구상에 반영해달라는 요청이었다.62) 18일에는 오쿠라가 당국의
정확한 의향을 확인하기 위해 도쿄로 출발했다.
대구 기성회는 약 30,000엔을 모집하여, 병영부지 4만평, 연병장 5만 평,
사격장 3만 평, 병원 6천 평, 육군묘지 2천 평, 작업장 3천 평을 합하여 13만
1천 평의 토지를 매입하기로 계획했다. 모집대상은 대구부에 거주하는 주민과
체류자, 은행 등이었다. 비용은 크게 둘로 나누어, 1915년을 기준으로 대구부
市街地稅 18,304엔에서 일본인이 6할, 조선인이 4할을 맡고 特別戶別稅 12,000
엔에서 조선인이 6할, 일본인이 4할을 분담하기로 결정했다. 납입기간은 5개월
이었다. 그러나 “대구부 인구의 1/3에 해당하는 細民”에 대해서는 비용을 모집
하지 않기로 했다. 모집계획이 결정된 후, 여단설치기성회는 실행위원을 통해
대구부민과 접촉했다. 각 실행위원은 대구부민을 방문하고, 설득하여 계약서를
작성하여 계획을 실현했다.63) 7월 22일에는 기성회의 나카에, 미카지리(三ヶ尻
忠吾)가 주차헌병대 사령관 다치바나와 만나 위수지 선정문제로 면담하기도
했다.64)
일본육군은 조선주차헌병대를 통해 대구에서 토지기부를 위한 절차가 원활
하게 진행되고 있는지 조사에 나섰다. 그리고 7월 31일 기준 30,000엔 중에
25,923엔을 모았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조선인은 일본인보다 청원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으며, 25,923엔 중에서 3,523엔을 갹출하는 데 그쳤
다. 헌병대는 조선인 참여가 저조한 이유를 두 가지로 분석했다. 첫째는 유치운
동에 대한 경험 부족이었다. 조선인은 일본인과 달리, 국가권력에 대응하여
지역의 이권을 추구해본 경험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일본인에 대한
불신이었다. 조선인은 일본인이 주도하여 군영을 유치한다고 할지라도 그 이윤
대부분을 일본인이 가져가리라고 생각했다.
62) 「電報」, 大邱旅團設置期成會長 → 陸軍大臣, 2028.
63) 「大邱住民兵營設置運動に關する件」, 朝鮮駐箚憲兵隊司令官 → 陸軍次官,
1915.08.04. 이하 대구 기성회의 비용모집과 헌병대의 조사내용의 출처는 본
자료이다.
64) ≪釜山日報≫, 1915년 7월 25일자, 「立花總長と大邱兵營問題」.
162 한국근현대사연구 제83집 2017년 겨울호
결과적으로 헌병대는 대구에서 매입절차가 원활하게 진행 중이며, 비용모집
에 문제가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또한 대구가 물자제공, 군인의 건강 등의
조건을 보았을 때 대전을 포함한 기타 남부지방보다 낫다고 판단했다. 거리상으
로도 병사[兵員]의 입·퇴영, 군수품의 운송비 등을 고려한다면 부산과 가까운
대구가 대전보다 적당하다고 결론지었다. 병사와 군수품의 이동거리, 특히 부산
과의 거리가 중요한 판단기준이 되었다는 점은 조선군이 국내 항일운동 탄압이
후 대륙침략을 위한 병력으로 전환되는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는 주장을 방증한
다.65) 8월 4일 보고서는 육군성으로 송부되었다.
8월 5일 도쿄로 떠났던 대구의 운동원 오쿠라가 돌아와 대구의 청원이 효과
를 거두게 되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속단할 수 없기 때문에 주민을 대상으로
기부금 모집을 독려하자고 요청했다.66) 8월 초 상주사단의 군영배치는 사실상
결정되었다. 8월 11일 도쿄에 체류하고 있었던 다치바나 주차군사령관은 데라
우치에게 군영 배치계획이 완료되었으며, 함흥과 대구에 연대가 설치될 것이라
고 알렸다. 8월 13일 육군성은 광주·나주·정읍·전주·영등포·수원은 군영의 배
치지역에서 제외되었다는 사실을 통첩했다.67)
그러나 8월 초 대구에서는 운동원 3명을 도쿄에 추가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대구 ‘여단설치기성회’는 연대를 유치하는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던 것이다.
8월 14일 대구의 오쿠라, 기무라 다케타로(木村竹太郎), 朴基敦, 李英勉은 조선
주차군사령관 이구치를 방문하여 청원에 도움을 줄 것을 요청했다. 이구치는
행정절차 이외에 도움을 주기는 힘들다고 답변했다.68) 7월 8일 함흥에서도
병영부지 10만평을 무료로 제공하기로 결의한 후, 7월 19일과 20일에 각각
전보와 청원서를 보냈다. 청원서는 여단사령부를 설치해달라고 요구하였고,
이를 조건으로 국유지를 제외한 부지전부를 헌납하겠다는 내용을 서술하였다.
65) 신주백, 「1910年代 日帝의 朝鮮統治와 朝鮮駐屯 日本軍: ‘朝鮮軍’과 憲兵警察制
度를 중심으로」, 129~141쪽.
66) ≪朝鮮新聞≫, 1915년 8월 10일, 「大邱と兵營: 大邱期成會の運動經過報告」.
67) 「電報」, 朝鮮憲兵隊司令官 → 陸軍次官, 1867; 「朝鮮師團配置に關する件」,
1777~1780.
68) ≪朝鮮新聞≫, 1915년 8월 12일자, 「大邱通信: 兵營設置問題」; 이형식, 「조선헌
병대사령관 다치바나 고이치로와 ‘무단통치’」, 287쪽.
1910년대 중반 조선 주둔 일본군 군영 배치계획과 軍營 유치운동의 양상 163
그러나 대구와 함흥지역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육군은 여단이 아닌
연대의 설치만 가능하다고 답변했다. 7월 말 함흥의 청원서를 접수한 육군성은
8월 토지를 확실히 헌납할 수 있다면 보병연대를 함흥에 설치할 수 있으며,
陸軍營繕事務規程에 따라 서류를 첨부할 것을 통보했다.69) 대구도 마찬가지로
여단의 설치는 불가능했다.
8월 초 조선군 군영의 배치계획이 대체로 결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전의
유치운동 주도집단의 활동은 계속되었다. 8월 21일 대전에서는 청원운동 대표
자 나이토 우지오(內藤宇治雄)와 운동원 2명이 도쿄로 출발했다. 23일 부위원장
와타나베 간지(渡邊寛治)는 격문을 돌리고 6,000여명의 대전 주민을 모았다.
7월 초 1,000여 명이 모였던 것과 비교하면 대전의 청원운동이 격화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대전주민들의 적극적인 행동을 당부했으며, 자신들의 노력이
통하지 않는다면 총독에게 직접 호소하여 목적을 관철할 것이라고 결의했다.
그리고 10명의 總代를 선정하고, 24일 경성 방문을 계획했다.70)
22일 충청남도 도 장관은 또 다시 대전의 상황이 격렬해지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고, 적어도 연대를 존치해달라고 요청했다. 앞서 도 장관은 여단·연대의
설치를 요청했지만, 이후 상황이 변하였기 때문에 ‘연대의 존치’로 요구사항을
축소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71) 8월 24일 도 장관은 헌병대사령관과 만나
대전의 상황을 전했으며, 사령관은 총독부·주차군 관계자와 대전지역의 시위에
대한 방안을 모색했다.72)
8월 25일 조선 총독은 위수지 선정에 관해 육군성을 비판했다. “一地方民”의
청원으로 정책이 좌우된다면, 관헌의 위엄에 손해를 끼칠 것이며 장래에도
폐단을 불러올 것이라고 하였다. 데라우치는 육군성이 위수지 선정을 자신과
협의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현재 병력의 배치가 북부에 집중되어
69) 「兵營敷地獻納に關する件」, 陸軍次官 → 寺本幸太郞(朝鮮駐箚軍經理部 經由),
1915.8, 2029~2030.
70) ≪東京朝日新聞≫, 1915년 8월 23일자, 「本社朝鮮特電: 聯隊設置請願運動」; ≪東
京朝日新聞≫, 1915년 8월 26일자, 「本社朝鮮特電 大田市民大会」; ≪釜山日報≫,
1915년 8월 28일자, 「各地通信: 大田」.
71) 「電報」, 小原新三 → 陸軍大臣, 1915. 8. 22, 2231~2232.
72) 이형식, 「조선헌병대사령관 다치바나 고이치로와 ‘무단통치’」, 287쪽.
164 한국근현대사연구 제83집 2017년 겨울호
있으나, 남부에도 상당한 수비대가 필요하므로 구태여 대구에만 병력을 둘
필요는 없다고 조언했다.73) 조선주차군 참모장 후루미도 대전에 보병연대 주력
을 설치하고 대구에는 1개 대대를 두자고 제시했다.74)
일본육군은 총독과 군 참모장의 요청을 받아들여 병력배치를 조정했다. 대구
에 설치할 연대의 주력은 그대로 두되, 1개 대대를 대전에 분할 배치하는 계획이
었다.75) 육군당국은 대구와 대전에 대한 군영의 배치가 군사·토지 등의 필요로
이루어진 것일 뿐, 유력자의 운동 때문에 결정된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또한, 도쿄에 체류하고 있었던 대전지역 기성회 위원에게도 1개 대대를 배치하
기로 했음을 알렸다고 통보했다.76)
그러나 육군차관은 도쿄에 체류하는 대전의 운동원이 1개 대대의 배치에
만족하지 않고 있으며, “煽動電報”를 통해 지역사회의 항의시위를 촉구하는
“奸策”을 꾸미고 있다고 주차헌병대사령관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대전의 운동
원은 주민에게 보병연대의 주력을 가져올 수 있다고 거짓정보를 전했기 때문이
었다. 대전지역의 항의시위도 계속되었다.77) 8월 29일 충청남도 도 장관은
또 다시 육군성에 연대 혹은 2개 대대의 존치를 요청했다.78)
결국 대전의 시위를 진정시키기 위해 조선총독부·조선주차군 소속 공직자가
파견되었다. 오하라 도 장관, 야마가타(山形) 고등경찰과장은 지역민을 설득하
고, 군영 배치에 관한 문제를 자신들이 맡아 처리하겠다고 하였다. 또한 군영
대신 대동천의 개수, 대전천 護岸 공사, 시가지 수해 제거, 중학교 설치 등
지역발전을 위한 사업을 시행하겠다고 약속하였다.79)
73) 「電報」, 寺內正毅 → 岡市之助, 2056~2059.
74) 「南鮮地方兵營設置に關する件」, 朝鮮駐箚軍參謀長 → 陸軍次官 大島建一,
1915.08.26, 2203.
75) 「師團增設に關する件」, 陸軍大臣 → 朝鮮總督, 2053~2055.
76) 「電報」, 岡市之助 → 寺內正毅, 2153~2155.
77) 「大田兵營設置に關する件」, 陸軍次官 → 朝鮮駐箚憲兵隊司令官, 2168.
78) 「大田人民兵營設置請願運動に關する件」, 朝鮮駐箚憲兵隊司令官 → 陸軍大臣,
2186~2189; 「電報」, 小原新三 → 陸軍大臣, 1915.8.29, 2205~2208.
79) 그러나 유치운동을 위한 조직은 “문제의 해결까지 그대로 存立”하기로 결정하였
다(≪釜山日報≫, 1915년 9월 5일자, 「大田兵營問題: 請願運動一先ず中止」; 田中
麗水, ��(朝鮮)大田發展誌��, 發行者不明, 1917, 126쪽; 「大田發展總說」, ��韓國近代
1910년대 중반 조선 주둔 일본군 군영 배치계획과 軍營 유치운동의 양상 165
마지막으로 상주사단 군영배치를 둘러싼 논란이 마무리 되고, 8월 31일 일본
육군은 육군 보병중좌 오쿠노 에타로(奥野英太郞)와 2등 주계(主計) 나카무라
다이조(中村大三)를 대구에 파견했다. 이들은 9월 4일까지 약 5일간 체류하며
부지(敷地)를 조사했으며, 병영의 위치를 검토하여 보고서를 작성했다.
병영부지 배치의 기준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로 대구부에 설비될 상수도
를 이용할 수 있는 위치여야 했다. 두 번째는 수해를 피할 수 있는 장소여야
했다. 마지막은 가능한 대구시가지 근처로서 교통이 편리해야 했고, 토목공사비
를 절약할 수 있어야 했다. 검토결과 대구부의 동·서 양측의 언덕은 수해에
취약하고 상수도를 이용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었다. 특히 대구부 동쪽에 위치
한 신천(新川)에서 나오는 수량에 의해 교통이 두절될 수 있었다. 서측은 대체로
암석지였기 때문에 건축상 불리하고, 토목공사비가 많이 들 것으로 판단되었다.
북측은 금호강(琴湖江) 범람의 우려가 예측되었다. 따라서 조사위원들은 대구부
의 남측에 병영을 설치하기로 결론 내렸다.80) 조사 결과에 따라 9월 17일 예정지
역에 토지를 소유한 사람과 계약을 진행했으며, 대구의 기성회를 중심으로
세부사항을 조절하였다. 총독은 부지 매수에 드는 비용을 경감할 방안을 고려하
겠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81)
결국, 1915년 12월 24일 육군성은 <표 2>와 같이 상주사단의 군영 배치지역
을 확정하였다. 1915년 조선 지역사회의 군영 유치운동은 재조일본인이 중심이
되었으나, 점차 계급적·지역적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조선인 유력자를 포괄하는
양식으로 전개되었다. 이들은 지역을 중심으로 총독부·육군성과 갈등·협력하
였다. 이 과정에서 군영의 배치에 일정부분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일본 육군이 가지고 있었던 군사전략이 기본이 되면서도, 함께 복수의 후보지가
대두하였을 때 예산 절약이라는 합리적 판단이 일부 반영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육군은 이러한 경우에도 군사적 판단, 즉 입·퇴영 문제, 군수품의
史資料叢書 2: 全鮮商工會議所 發達史��, 국학자료원, 1999, 503쪽).
80) 「朝經建密 第3號: 大邱兵營敷地獻納に關する件」, 朝鮮駐箚軍經理部長 井出治 →
陸軍次官 大島建一, 1915. 9. 7, 2121~2151.
81) ≪東京朝日新聞≫, 1915년 9월 21일자, 「本社朝鮮特電:軍隊営地内定」; ≪釜山日
報≫, 1915년 12월 25일자, 「大邱通信(23日支社發)」.
166 한국근현대사연구 제83집 2017년 겨울호
<표 2> 일본육군 제19사단·20사단 배치 확정안(1915. 12. 24.)
사단 여단 예하부대 위수지
제19사단
(나남)
보병
제37여단(
나남)
보병
제73연대
기병
제27연대
야포병
제25연대
나남
보병
제74연대
함흥
보병
제38여단(
회령)
보병
제75연대
공병
제19대대
회령
보병
제76연대
나남
제20사단
(용산)
보병
제39여단(
평양)
보병
제77연대
평양
보병
제78연대 기병
제28연대
야포병
제26연대
공병
제20대대
용산
보병
제40여단(
용산)
보병
제79연대
보병
제80연대
연대본부
제1대대 대구
제2대대
제3대대 대전
진해만 마산
* 괄호 안은 사령부 소재지.
** 大蔵省 印刷局, 「陸第17號: 陸軍常備團隊配備表 改正」, ��官報��第1020號, 1915.12.24;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A13100185900、陸軍常備団隊配備表中ヲ改正ス(国
立公文書館) 참조.
운송비 등의 ‘병참’에 대한 조사를 시행하여 결정에 반영하였다. 이에 부산과
거리가 가까운 대구가 대전보다 적당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지역사회의 유치운동은 개별적으로 시작하였으나, 점차 지역 간 경쟁이 심화
하는 양상을 보였다. 부윤·도 장관도 운동에 가담하였다. 일본육군은 지역사회
의 경쟁을 통해 군용지 확보를 원활히 진행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군영 유치운동에 개입하지 않았으나, 토지기부에 관하여 비판적인 입장을 피력
1910년대 중반 조선 주둔 일본군 군영 배치계획과 軍營 유치운동의 양상 167
하였다. 이후 주도집단 간의 경쟁이 격화되어 통치에 문제를 낳을 수 있다고
판단하자 육군과 입장을 조율하였다. 육군은 조선총독의 의견을 받아들였고,
대구에 연대를 배치하기로 한 계획을 일부 수정하여 1개 대대를 대전에 나누어
주둔하기로 결정했다.
5. 맺음말
일본은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고, 같은 해인 1910년 조선에 일본군 상주사
단을 설치할 계획을 세웠다. 재정적인 문제로 추진되지 못하였던 계획은, 1914
년 방무회의와 1915년 제36회 제국의회를 거쳐 현실화되었다. 일본육군은 상주
사단을 조선에 설치하기 위한 계획으로서 군영의 배치지역을 조사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조선 지역사회에서는 1915년 6월을 전후로 하여 재조일본
인을 중심으로 군영 유치운동이 일어났다.
일본육군은 군영의 배치는 기본적으로 군사전략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일본의 대륙침략정책이 진행되고 있는 시점에서, 조선군의 군영배
치 또한 남부보다는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조선에 파견된
조사원도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시찰을 진행하였다. 다만, 육군은 군용지를 확보
하는 데 있어서 재정적인 문제도 고려해야만 했다.
조선 지역사회에서는 군영 유치운동이 촉발하였다. 운동의 주도집단은 재조
일본인이었으며, 이후 일부 조선인이 협력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그들은 자신
의 거주지에 군영을 유치함으로써 경제적 효과를 기대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초기 대전과 대구, 평양에서 확인되는 군영 유치운동은 시간이 지나면서 수원,
영등포, 부산, 광주, 함흥, 나주, 전주, 정읍, 북청, 나남 등 다양한 지역으로
확장되었다.
각 지역의 운동은 개별적으로 진행되었으나 점차 다른 지역에 대한 경쟁의식
을 드러내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었다. 군영 설치에 필요한 토지를 기부하겠다
고 약속하는 지역도 적지 않았다. 각 지역에서 작성한 청원서는 일본군과 조선
총독부의 한반도 침략, 식민통치가 지역의 발전을 가져왔기 때문에 상주사단
168 한국근현대사연구 제83집 2017년 겨울호
군영의 배치가 필요하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조선총독부와 조선주차군, 그뿐만
아니라 일본 육군성에도 직접 방문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 총독은 군영 유치운동을 경계했다. 유치운동의 과열, 토지기부가 통치
에 문제를 낳을 수 있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대전지역에서는 유치운동이 시위로
격화되는 상황도 발생하였다. 대구는 부윤이 유치운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총독
은 대구의 토지기부를 비판한 바 있었으며, 나아가 함흥에서 10만 평에 달하는
토지를 기부하려고 약속하자 육군성에 직접 항의하는 뜻을 내비쳤다. 재조일본
인의 “병영설치열”이 조선인을 부추기지 말아야 하며, 토지의 제공이 군영
유치의 성패를 가른다고 인식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육군은 군용지
를 확보하는 데에 재정적 요인을 고려했고, 이 지점에서 군영 유치운동 세력과
의 이해관계가 맞물렸다. 그 결과 대구와 함흥의 토지기부가 수용되었으며
각각 13만 평, 10만 평의 토지를 기부하는 절차가 진행되었다.
육군 당국은 대외적으로 군영의 배치는 토지의 기부와 관련이 없다고 하였다.
실제로 유치운동에 참여한 대부분의 지역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8월 초
조선주차헌병대가 대구 지역의 유치운동에 관하여 내놓은 보고서는 경제적
측면에서 대구에서 토지를 기부하는 절차가 진행되고 있다는 상황을 보고하고,
한편으로는 군사적 측면에서의 판단을 확인하였다. 군사적 판단은 주로 입·퇴
영 문제, 군수품의 운송비 등의 병참에 관한 것이었으며, 그에 적합한 지역으로
부산과 거리가 가까운 대구가 대전보다 적당하다고 보고하였다.
8월 초 육군은 군영의 배치지역을 확정했으며, 조선 남부지역에서는 대구에
연대를 배치했다. 대전지역에서는 6천여 명에 달하는 항의시위가 일어났다.
충청남도 도 장관은 대전 주도집단의 요구를 총독부와 육군성에 전달하며 간접
적으로 운동에 관여하였다. 조선 총독과 조선주차군 군 참모장도 통치에 있어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하여 육군성에 대전의 의견을 전달했다.
한편 총독은 육군성이 총독부를 배제하고 지역유력자와 직접 군영설치 문제
를 논의했다는 점을 비판했다. 또한, 대구와 함께 대전에도 일부 병력을 배치해
야 한다고 요구했다. 조선총독부의 입장을 받아들인 육군 당국은 대구의 연대
일부를 대전에 분할 배치하기로 했다. 그 결과 조선 남부지역에는 대구에 연대
본부와 2개 대대, 대전에는 1개 대대가 분산 주둔하게 되었다.
1910년대 중반 조선 주둔 일본군 군영 배치계획과 軍營 유치운동의 양상 169
1915년 상주사단의 군영배치가 결정되는 과정에 육군과 총독부, 유치운동
세력의 이해관계가 단일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식민통치체제의 형성과 운영이
단일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특히 군영 배치계획에
대한 유치운동은 재조일본인과 조선인 유력자가 ‘지역’을 매개로 결탁하여
식민정책의 결정 과정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할 수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물론
이것이 저항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이권을 확보하기 위해서 지역발전을 명분으로 식민통치체제를 미화하고 합리
화하였으며, 적극적으로 체제의 일원으로 참여하였다.
[투고일: 11월 5일, 심사완료일: 12월 7일, 게재확정일: 12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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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중반 조선 주둔 일본군 군영 배치계획과 軍營 유치운동의 양상 171
Keywords: colonial authority, cooperation, Japanese military, lobby, petition
The Japanese Stationary Troop Disposition Plan and
Lobby for Military Camp in Colonial Korea during
the Early Japanese Imperial Rule
LEE Min-seong
Japanese troops in Korea was activated under the name ‘Choseon-Juchagun’
in 1910. And it reorganized their stationary form. In April 1915, lobbying for
military camps started in colonial Korea. Lobbying centered on the local elites.
Japanese residents in Korea took the lead in the initial lobbying. They wrote
and filed petitions with the Japan Department of the Army. In name of
"Development," each region contended to invite a military camp. The aspect of
lobbying gradually included the Korean elite internally, and widened to other
areas in colonial Korea externally. They also promised to donate land.
Terauchi Masatake tried to control lobbying. However, Japanese Army wanted
to save the budget. They granted a petition in Hamhung and Daegu, and decided
the deployment of regiments. But, protests began in Daejeon. Terauchi demanded
again the deployment of additional troops in Daejeon. In the end, Army divided
the regimental force in Daegu, and deployed a battalion of troops in Daeje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