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문제의 소재
한국사의 특성을 필자는 우리 고대 조상이 한반도 중심의 농경문화민족으로 정착하여 그 동안 세계 유수의 문화강국으로 커온 점을 들고자 한다. 또 고구려의 정체성은 고구려족이 한반도 중심의 농경정착에 후발로 참여해서 동아시아 대륙 해양을 아우른 막강한 문무 대국으로 발전한 점을 내세우려 한다.
이 점에서 삼국시대 남북 대표 세력의 경쟁은 한국사상 가장 활기찬 발전기를 가져왔으며 그 여세가 발해와 일본 고대국가의 형성으로 이어지고, 그 활력이 당대 세계 최고 경지의 대신라 불교문화를 성취시키기에 이르렀다고 본다.
근자 우리들은 이런 소중한 문화사상적 발전면을 등한시하고, 수천년 잘 일구어온 반도를 비하하면서까지 통일신라를 깎으려하며 형편상 놓친 땅에 집착하여 스스로 후진 약소화한 망국 이래의 혼미를 못 벗고 있다.
따라서 본고는 고구려의 정체성을 확인함으로써 먼저 한반도의 긍정평가와 전통문화의 놀라운 성숙 솜씨를 자긍심으로 회생시키고자 한다. 나아가 중, 일의 잘 못된 논리를 원천적으로 극복하면서 새 시대의 정체성 재정립에 이바지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제 다시 전통 저력을 발동하여 대망의 평화 통일을 달성하고 동서문물을 회통 대성시킬 책무와 기회는 우리에게 닥쳐왔다고 믿는다.
필자는 처음 사상사 쪽에서 고구려사에 접근한 까닭으로 1970년대 후반당시 선학들의 연구나 자료에 보이는 정체성에 관심이 많았다. 이에 2002년 고구려 남진 의의 논문과 관계 연구목록을 종합 정리하면서는 기대와 사명 속에 더 강렬하게 그 면을 내세우고자 노력했다. 결과는 한 세대를 거치고야 호전중이니 그나마 다행이라 할까.
어쨌든 본고는 정체성 확인을 위하여 관련 논고를 제한적으로 점검하는 외에 개별성과는 목록 제시에 그칠 수밖에 없겠다. 사실 고구려 정체성 규명에 있어 가령 박시형, 김석형, 이진희 등의 선구적 저작은 좋은 자료가 되고, 일본 佐伯有淸의 면밀하고 통렬한 자기 반성적 저술이나 여러 학자들의 빠른 성실 대응은 시사 받은 바가 컸다. 이에 비하여 우리 쪽은 예전 그대로이고 어느 면 소극적이었다.
1. 한국사와 고구려 정체성(韓半島의거 陸海아우른 문무大國) 논의
우리 민족이 지난 날 가장 힘쓰고 성공한 면은 무엇인가. 그것은 농경시대이래 한반도를 중심터전으로 삼아 그 개방성과 안정성을 적절히 조화 활용하면서 남북 大陸 海洋이 어울린 문화대국을 이루고 높은 문화지수를 올려 현재와 미래의 큰 가능성을 확보한 점이다. 더 말하면 선사시대에 북방 수렵 목축을 주로 하다가 일찍 온대 중앙에 진출하여 선진 문물을 일구고 이웃 문화를 잘 소화 섭취하여 한층 높은 단계의 전통문화를 계속 키워온 놀라운 솜씨이겠다. 거기에는 수천년래 고도의 농업생산력을 추구하여 벼농사 쌀 주식에 맛깔스러운 부식 문화를 차리며 자연친화에 심미감 넘치는 주거문화, 그리고 자유롭고 멋 덩이인 옷맵시와 놀이문화를 즐기면서 평화롭고 실속 있는 문화발전에 전심한 것이 기초가 되었다. 이리하여 세계 최고급의 전통문화유산을 많이 남기고 특출한 인쇄 기록문화를 자랑하는 지적 문화대국이 되기도 하였다. 또 역사상 고급 인력으로 짜인 문무 지도자들은 많이 높은 경지의 문화활력을 발휘하여 이웃 중국도 놀래는 수준에 올라서고, 전근대 일본을 문명화하는 결정적 주체가 되기도 하였으니 이는 그 동안에도 옳은 설정이었고 장차에도 바르게 내다본 추진이었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한국문화의 차원은 변두리 아닌 중심적, 세계적 보편성의 것이며 따라서 거란이나 몽골, 여진족과는 아주 다른 독자적이고 효과적인 발전을 해왔다고 볼 수 있다.
북에서 일어난 고구려족은 바로 이런 유형의 마지막 남진 정착을 하여 큰 발전을 본 대표적 예가 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중국사가들이 극성으로 고구려사를 그들 중국사의 일부로 파악하려 하고 일인들이 종래 이른바 '滿鮮史'의 부수적 역사발전으로 보아왔던 경향은 관점이 빗나가 사실과 다른 것이다. 그밖에 일부에서 고구려사를 대륙본위로만 보려는 것도 중심을 헛잡은 점에서 찬동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된다.
사실 고구려는 이미 기원전부터 부여에서 남하하여 구복을 채우려는 현실적 안정을 위하여 전쟁을 일삼았다. 그 가운데 점차 오늘의 함남 농수산 지역과 대동강 유역 농경지대에 손을 뻗치고 4세기 초엽 미천왕 때에는 황해도까지 남진하였던 것이다. 이 일대의 확보는 후대 고려 태조 때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한반도 제1의 전작중심 곡창 지대를 장악했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경위를 천하에 명시하고 있는 것이 대 호태왕 능비[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이다. 장수왕 갑인년(414)에 세워져, 지금도 그 웅자를 자랑하는 이 비는 태왕의 업적 실모를 가장 잘 전해준다. 알려진 바와 같이 비석에는 攻取한 성 64, 촌 1400을 들면서 남녘 한반도 중북부에 남진한 훈적이 유달리 중시되고 있다. 그런데 이 엄연한 사실이 기구한 국운 탓인지 아직도 후대 {삼국사기} 광개토왕 본기에 밀려 왕호도, 開土 실정도 애매한 채 광복을 기다리고 있는 듯 보인다.
우리는 그 동안 이 고구려의 남진이 실제로는 더 어려운 과업이고 실속이 커서 그것을 큰 공으로 받든 면을 외면해 왔다. 즉 안팎 경우 없이 대륙 석권의 비중을 너무 과대 오판한 것이다. 많이 돌아섰지만 작금에도 항간에 감성적인 북진 선호 경향이 매우 우세한 것은 그 만큼 쇠국의 잔영이 완고한 탓도 있겠거니와 아무래도 아직 속 깊은 문화 성숙이 덜 된 반증이며 새 시대에는 속히 넘어서야 할 감각 발상이라 할밖에 없다.
사실 고구려가 북방 민족 중 아주 독특하게 특히 4~5세기이래 본격적 온대 농경문화민족으로 성공한 면을 내세우지 않고는 본질적 정체성을 옳게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다. 고구려가 무에 뛰어난 것은 너무나 알려져서 새삼 거론할 필요도 없는 터이다. 문제는 문인데 당시로선 우선 농경사회 복판에 파고든 머리 트임이 신묘했다. 그래서 치열한 무력 공방 속에서도 선진 불교 유교 율령 기타 각종 문물 제도를 정비하는데 힘써 앞뒤 갖춘 성과를 올렸던 것이다. 이에 남북의 넓은 땅과 바다를 장악한 것 뿐 아니라 우리문화의 선구 내지 진수로 꼽히는 여러 결실을 거두기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고구려 연구는 당연히 南北 文武 內外를 겸해서 발전한 원래대로의 모습을 두루 파고 들어가, 양적으로 팽창한 상무 강국의 면과 아울러 질적 생산적 문화 대국으로의 진전을 온전하게 따져 보아야 할 줄 믿는다.
근자에 안휘준, 한영우 등이 이점을 일깨워주고, 몇몇 학자가 많은 생각을 촉구하는 주장을 하고 있어 음양으로 참고가 된다. 우선 「高句麗 文化의 性格과 位相 -古墳壁畵를 中心으로-」란 논고를 보자.
"고구려에 대한 국민들의 긍지와 애정은 매우 큰 반면에 이해는 지극히 한정되고 편향된 시각이 지배적이다. 즉, 군사대국이었던 사실만 알고 문화 선진국이었던 보다 중요한 사실은 간과하거나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점이 심각한 오해이자 편견이라 하겠다.
고구려는 동아시아의 많은 나라들 중 고분벽화를 가장 적극적으로, 그리고 제일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켰던 국가이다. 集安과 평양 지역의 수많은 고분들 중 80여기가 벽화분인데 그 속 벽화들은 고구려인 들의 기질과 嗜好, 창의성과 미의식, 우주관, 종교와 사상, 생활과 풍속, 복식과 꾸밈새, 과학기술과 건축, 외국 문화와의 교류 등등 실로 다양한 문화적 양상과 변천을 드러낸다. 고구려 문화의 독자적 특성과 국제적 보편성을 함께 보여 준다."
그리고는 고구려 벽화의 1. 記錄性과 史料性 2. 宗敎思想性 3. 科學技術性 4. 國際性을 들고 이어 고구려 고분벽화의 美的 特性으로 1. 力動性 2. 멋과 洗鍊性을 거론하면서 5세기 쌍영총의 기마 인물상과 세 여인상이 관심을 끈다고 극찬하고 있다.
또『다시 찾은 우리 역사』총설을 들추어 본다. (이하 부분 축약)
"삼국은 만주의 반농반목적인 종족(예맥족)이 한반도로 남하하여 토착민인 농업정착민(한족)들과 제휴하여 세운 나라들로서 그 후 한국 문화는 유목민과 농업정착민의 요소가 합쳐져 독특한 한국문화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한반도를 인간모습의 생명체로 보는 특이한 지리관을 가지고 살아 왔는데(풍수지리설) 천재지변이 비교적 적어 자연에 대해 낙천적이고 푸른 산, 맑은 물, 깨끗한 공기, 밝은 태양을 즐기면서 살아왔다. 춤과 노래를 즐기며 이런 유리한 생활조건으로 이웃의 부러움을 사고 모여들어 한반도는 인구 과밀지역으로 변해갔다." 이어 "열국시대를 거쳐 10세기 초 고려가 건국되면서 하나의 단일 왕조가 14세기 말과 20세기 초까지 1천년간 계속 되었다. 기원이후 2천년간 이민족에게 정복된 왕조가 없었다는 사실과 아울러 한국사의 특징과 한국인의 생명력을 이해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우리 고대사를 영광스런 시대로 보고 그 영광을 이어가겠다는 것은 전통을 중요시하는 法古주의요 강인한 역사 계승의식이다. 한국인의 끈질긴 생명력과 주체성이 여기서도 찾아진다. 그러나 외래문화를 수용함에는 왕성한 創新주의가 법고주의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한국인의 법고 창신 주의는 말을 바꾸면 주체와 개방의 결합이요 민족과 세계의 만남이요 조화요 구심력과 원심력의 균형이다. 우리의 좋은 전통을 사랑하면서 외국의 문물을 선별적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창신적인 자세를 말한다." 끝으로 "최근 100년에서 얻은 것은 물질이요 잃은 것은 인간 그 자체이다. 우리는 자존심으로 경쟁력을 키우고 도덕성으로 인류를 사랑해야 한다. 민족적 세계주의요 세계적 민족주의다. 우리의 전통적 가치관을 미래지향적으로 살려 보자는 것이다. 우리는 300년 주기의 르네상스시대를 다시 맞이하고 있다. 앞 15세기 세종시대와 18세기 정조시대의 영광이 21세기의 영광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라고 희망을 걸었다.
하영우의 이 긍정적 사론은 물론 정체성 파악에 유조하다고 보아 뽑은 것이지만, 한편 재고를 당부할 것도 있다. 우선 고대사에서 후기신라는 대신라로, 북의 발해 부흥과 동의 일본 건설은 함께 내세우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해양사의 윤명철은 근래에 고구려연구회에서 「高句麗와 隋唐 간의 전쟁에 대한 중국 '東北工程'의 시각」이란 논고를 발표하면서, 그 속에서 半島史觀의 굴레를 강조한 나머지 그의 탁견인 '海陸史觀'({高句麗 海洋史 硏究})의 주장을 넘어선 한반도 卑下적 논리를 편 바 있다. 소위 반도사관의 병폐는 반도 땅에서보다 반도사람, 특히 지도층이 중심을 노친 데서 찾아야 했는데 그렇지 못하였다. 이 결정적 과오는 주체가 쇠잔하여 역사상 스스로의 내외 발전도 가늠 질 못 하던 망국기 이래의 자국 폄하 의식에 연유한 것이다. 日帝 식민지사관 탓이라 하지만 자기모멸 의식이 빌미를 주게되고 아직도 이 민족적 고질이 강인한 터이니, 이런 마당에서는 중심이 되는 반도와 외연인 대륙 해양에의 발전을 두루 옳게 살피는 문화 사상사적 관조가 모자람을 문제삼는 것이 더욱 좋을 듯 느껴진다.
윤명철은 또『한국사학사 학보』 9집 글 결론에서
"결과적으로 반도로 축소되기 이전의 우리역사는 다양한 자연환경과 다양한 종족, 다양한 문화가 병존하는 광활한 대륙이라는 공간을 염두에 두고 해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문화현상을 규명할 때도 그러한 역사적인 경험과 환경을 전제로 삼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런데 이 관점은 고구려대제국의 여러 실정을 살피는데 유용할 것이지만 고구려의 질을 따지는 정체성 파악에는 오해의 가능성이 많다. 우선 '반도로 축소'되었다는 잘못된 반도사관에 윤박사 답지 않은 중대한 출발 착오가 있다. 대륙 해양의 중시와 성과는 고구려가 수행한 것처럼 반도에 중심 수도와 부도를 두고 동아시아를 석권하는데 기여하여 의미가 커진 것이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武에다 文까지 갖춘 강대국이 될 수 있었지만 대신라같은 문화대국으로 승화하기에는 시간, 공간과 人的 문화력 기타 여건이 모자란 한계가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유홍준은 중앙일보의 고구려고분 특집<2004. 1.30>에서 솔직하게 갈파하였다. "우리가 사대주의를 편 것은 따지고 보면 문명의 흐름에 낙오되지 않으려는 하나의 안간힘이고 슬기이며 술책이기도 했던 것이다. 우리는 항시 우리가 주변부문화에 놓였던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민족적 열등의식이 있다.---결국 우리는 압록강 이북의 땅을 <포기>했지만 그 대신 우리 민족은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당당한 지분율을 갖는 주주로 된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민족적 정체성이며 자랑이다. 중국은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쯤 되면 이진우(계명대 철학과)의 강력한 논조에 공감이 간다. 즉
"한 국가에 속해 있다는 것이 정치적인 문제라면 한 민족에 속해 있다는 것은 문화적인 사안이다. 한국인이 없다는 것은 한민족에 속한다는 감정적 연대감만이 존재하지, 우리의 정체성에 긍정적으로 기여하는 이성적 내용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전통과 역사로부터 문화적 활력을 얻고자 한다면 문화적 정체성에 관한 진정한 성찰이 있어야 한다.(최봉영은 서울 사계절 1997 간본에서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읽어 낼 수 있는 패러다임으로 의리와 정한의 구조를 제시했다)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문화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자긍심이 없으면 역사적으로 형성된 관계에 감정적으로 예속되어 있기는 하지만 정을 우리의 문화적 정체성을 구성하는 긍정적 요소로 당당하게 주장할 수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한국인은 엄밀한 의미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정이 계산적인 형식적인 서양과는 다른 인간적 사회 관계를 구성하는 원리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문화적 정체성을 갖춘 한국인으로서 거듭 날 수 있을 것이다. 정과 의를 결합시킴으로써 우리의 문화적 정체성을 확보하는 것이 한국인으로 존재한다는 것의 궁극적 의미이다.
'남'을 정의 관계를 통해-단순한 손님이라고 할지라도-님으로 만드는 것이 정이다. 남을 배척하는 정은 결코 한국적인 것이 아니다. 의의 정치와 정의 문화의 동질성을 회복하려는 것," 이라고.
물론 김정배의「고구려 역사의 정체성」이란 글은 민족사학적인 의미가 있다.즉
"고구려 역사의 정통성으로 고구려가 삼국시대의 한 축을 지닌 강대국가임은 광개토왕릉비가 단적으로 말해 준다. 고구려 역사는 후세에도 웅혼한 기상의 역사성이 승계되고 있다. {三國史記}나 {三國遺事}에서는 이러한 문제의식의 단서로 고구려 역사와 우리나라 역사의 정체성을 논할 때 다루어야 할 단군 및 고조선과를 잇는 역사의식이 보인다. 이어 다른 한국사서에서도 고구려 시조와 그 출발이 단군과 맥이 닿는 것으로 하고 있다. 신채호는 "輯安縣의 일람이 김부식의 고구려사를 만독 함보다 낫다"는 깊은 감회를 피력한 바 있다. 기왕의 문헌자료와 유적·유물들을 종합하면 역사전개의 활동성과 역사성의 중후함을 간파하게 되는 것이다.
고구려 발해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영토가 크면서 융성했던 나라들로 集安일원에 산재한 적석총과 광개토왕릉비는 우리나라 석조문화의 진수이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살아있는 생활사의 보고며 사서에는 없는 역사 자료의 집대성이다. 씨름은 여기 벽화에서 생생한 모습과 그 원류를 쉽게 찾을 수 있거니와 이러한 생활문화사는 고구려 문화가 중국의 한족문화와 얼마나 다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광개토왕릉비도 {三國史記}보다 3배 자세한 사면비로 크기와 내용에서 중국에도 없는 것이다. 태왕의 사방 정복사업이 일목요연하게 서술돼 있는 일급 자료다. 충주 중원고구려비는 버금가는 귀한 유물로 함께 고구려 정치사 연구와 서예사 연구에 다시없는 좋은 자료다. 우리가 이들 석조문화를 통해 느끼는 웅장 장대한 기풍은 역대 어느 시기에도 보기 힘든 유훈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우뚝 솟은 고구려의 힘은 밖으로 뻗어나간 대외진출과 정복 활동이 근간이 되었다. 대수·당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우리 역사상 전대미문의 대사건이며 쾌거이다. 이러한 고구려의 역사풍이 우리 국민들의 가슴속에 고이 간직되어 국난을 당할 때마다 고되고 험난한 위기를 극복하는 힘의 원천이 되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대외 정복과 국력의 힘이 고구려 역사만큼 강인한 인상을 주는 역사가 없다. 그러기에 고구려 석조문화는 이러한 역사가 투영된 조형물이며 개척정신의 상징으로 후대인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좋은 땅이 없어 열심히 농사지어도 식량이 부족한 고구려는 밖으로 적극 진출하며 국난 타개에 성공하였다.
고려가 거의 오백년간 국호를 고려라고 칭하였기 때문에 고구려 역사의 강건한 기상이 고려에 그대로 전승되었다. 또 고려는 발해를 형제국으로 인식하고 있어 고구려 역사가 발해로 승계되었음을 간접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하여 대륙에서 흥기한 고구려는 東明이 檀君의 아들이라는 표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넓은 의미에서 고조선의 역사를 이어 간 것으로 되어있다. 고구려의 역사적인 정체성은 이러한 관점에서 역사의 주류를 관통하고 있다.
고구려의 정체성은 신라의 一統三韓論에 밀려 역사의 무대에서 벗어난 듯 하지만 고구려의 멸망 후 발해가 건국하면서 역사가 전승되었다. 더구나 고려 태조가 고려를 건국하면서 국호를 고려라고 부른 것은 고구려의 정통을 승계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영문표기가 고려에서 비롯되었음은 고구려의 역사적 유훈이 깊게 베어 있다는 증거이다.
우리나라 역사문화의 유산 가운데 고구려의 석조문화는 웅혼한 기상의 상징이며, 대외 정복과 개척의지는 부족하고 제한적인 자연환경을 극복한 고구려인들의 강한 결집력을 의미한다."라고.
그러나 김한규 등의 반정체성 주장은 난감해 진다. 윤명철이 다룬 半島史觀문제도 포함되지만 정체성 문제는 사상사에서 중시된 탓에 위의 이진우「한국인이 없다. 한국문화의 정체성에 관한 철학적 성찰」를 접하게 되고 곁들여 탁석산의『한국의 정체성』이란 저서나 김용만,『고구려의 발견: 새로 쓰는 고구려 문명사』(바다출판사, 1999)에 대한 서평도 보게 된다. 그가 근대 역사학계에서 '새로 쓰는' 바람이 불고 있음을 비판한 것은 그렇다 치고 ''더욱 우려되는 바는 고구려를 우리 역사의 일부로 여기는 것이다."라고 역설을 편다. 탁석산은 또 "이 점 김한규의『한중관계사 1』『한중관계사Ⅱ』(아르케, 1999)에서 고구려와 발해는 한국이나 중국이 아닌 요동이라는 제3의 존재에 속한다는 주장에 동의한다."하면서 "우리의 주체성을 드높이기 위해서 역사를 왜곡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어 "또 이도학이 쓴『새로 쓰는 백제사』(푸른역사, 1997)도 이런 유형의 저술로 보이는데, 부제가 '동방의 로마제국 백제사의 복원'이다.'' 라고 한것을 개탄한 대목에 이르면 아무리 비역사가라 하더라도 막말로 공언할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리고 요동사에 관하여 김한규는 문학과지성사 간본(2004)에서 "중국 사학계가 오늘날 그들의 영토위에서 이루어진 모든 역사는 중국사라는 관점에서 연구하고, 한국 사학계에서는 오늘날 '韓민족'을 형성한 모든 민족적 성분을 한국사의 주체로 인식하는 민족사의 관점에서 한국사를 연구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한국'은 대동강 이남이고 '중국'도 요서 지역을 넘지 못했으므로 '고구려'는 바로 '요동'이라는 제3의 영역에서 건립된 국가였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송호정(교원대 교수)은 요동 공동체가 종족별로 독자적 언어를 사용한 사실과 단일한 역사공동체로서의 자의식을 가졌던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하고 김기봉(경기대 교수)은 역사가 시간, 공간, 인간이라는 3요소로 이뤄진다고 할 때 요동사에는 '요동'이라는 공간밖에 없는 것 아닌가. 역사란 결국 기억하고자하는 사람들의 것이게 마련이므로 한국과 중국이라는 실체를 떠난 요동사에 실효성이 있는지 의문이다. 라고 하였거니와 필자 역시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나라는 전대 근대를 막론, 정치 경제적 명분과 노력으로 성장 발전하고 문화 사상적 정상 성숙으로 정체성을 이루며 역사와 민족 속에 위상을 정립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김한규의 저작은 공들인 업적임에는 틀림없으나 당장 요동사의 요건이 독자 문화의 성숙을 동반하지 못한 한 지역의 역사라는 기본적 한계에 부딪치게 되니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고
또 신형식은『고구려사』제1장 서론에서 "결국 왕의 정벌의 주목적은 곧 '남방경영'에 있다. 따라서 옥수수 중심의 고구려인을 '쌀 중심의 생활패턴'으로 바꾸려는 일대 식생활혁명 정책일 수도 있으며, 실질적인 농경문화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더구나 기존의 내륙수로의 활용방식으로부터 황해 진출을 통해 황해 해상권 확보 및 동아시아 세력의 재편을 주도하려는 웅대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고 하여 우리의 남진 발전론을 옳게 취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실제로 지배한 지역이 주로 한반도 쪽에 치중됨으로써 광활한 만주지역을 방기한 것은 고구려사의 치명적인 한계라고 생각된다."고 물러서고 있으니 이는 근대 팽창주의 관점으로 돌아가는 논리이다. 모두 들 5세기 당시 고구려왕이 '만주의 주인공' 생각보다 한반도 남부지역 확보를 위한 국토개척과 순례에 나선 질적 성숙을 왜 외면만 하려 드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고구려는 중국측이 주장하는 소수민족이 세운 지방정권이나 할거정권이 결코 아니었다. 고구려는 끝까지 3성 6부 같은 중국의 정치제도를 받아들인 일이 없이 독자적인 권력구조를 유지하였던 것이다.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면 수·당이 백만 대군을 동원하여 자신이 속국을 정벌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4세기까지 북방에서 활발한 기동력과 우세한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중국(후연·위·전연)의 동진을 막으면서 요동지방을 기반으로 만주의 주인공으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이어 5세기에는 중국 남북조의 북위와 외교관계를 맺어 중국과 세력균형을 이루어, 남북으로 영토를 넓혀 동아시아의 패자로 군림케 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고구려는 정책의 방향을 5세기 이후에는 남방진출에 두어 평양천도(427)를 단행하였다."고 나가다가 또 "그러나 평양천도로 일부 남녘의 영토는 확장되었다 해도, 건전한 고구려의 기질이 약화되고, 남부지방의 풍부한 농업생산력 확보에 치중함으로써 현실안주에 만족하여 넓은 만주의 영토를 방기하게 됨과 동시에 수·당의 모험적 공격을 초래한 역사의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
따라서 장안성 이동(586)이후에는 국가경영의 수도편중으로 무모한 귀족의 갈등만 조장하게 됨으로써 강국으로서의 이미지는 없어지고 말았다. 결국 평양성 천도는 고구려가 반도국가로 전락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고구려 쇠퇴의 단초가 된 역사적 과오를 남기게 되었다.
그러나 고구려인들은 주요 군사요지에 성곽을 쌓아 중국에 맞섰으며 낙천적인 생활방식으로 불리한 환경을 극복할 수 있었고, 짙은 내세관을 무덤벽화로 나타냄으로써 현실과 내세를 함께 살았던 것이다. 특히 다양한 무덤벽화 속에서는 중원문화와는 다른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전통을 남겨 산해경에서 볼 수 있는 동방 문화유산을 남겼으며, 중국·서역문화까지 수용하는 한편, 그 문화를 백제·신라·일본에까지 전파시켰던 것이다.
결국 고구려는 군사적인 강국인 동시에 문화대국이었으므로 한국판 '로마제국'이었다. 고조선의 전통뿐 아니라 중원문화·서역문화까지 수용하여 민족문화의 큰 줄기를 마련했던 것이다. 고구려는 힘으로 당당하게 중국에 맞섰을 뿐 아니라,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통해 영생한 것처럼, 고구려는 고분벽화를 통해 영생할 수 있었다." 라고하여 남진 정착으로 인한 문화 발전을 내세우면서도 결국 북진 팽창주의에 기운 듯 하다.
공석구는 이 책에 대한 서평에서 이 핵심 논리에 대한 평가를 보류하였으나 필자는 어쩔 수없이 언급해 둔다. 고구려가 좋은 조건 획득 후 그 차원의 새 정책과 문화 구축에 미급해서 쇠망한 것이지, 북방 실지나 반도국가 전락으로 거듭 몰고 가는 관점은 아쉽지만 큰 착오라고. 가령 단적인 예 한 가지만 보자. 신라 불승 들의 경우와는 정반대로 승랑은 중원으로, 혜량은 신라로, 보덕은 백제를 거쳐 역시 신라로, 혜자 혜관 등은 일본으로 빠져나가고 마는 고구려 불교의 내면적 약점은 당대 최고 지성계의 난맥상이라는 점에서 결코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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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근현대 한국의 고구려 연구경향과 정체성 추이
특히 90년대이래 '아! 고구려'라는 이벤트가 도하의 언론을 들끓게 하고 전후하여 고구려 연구 열기가 고조되면서 학문적으로도 신진 박사학위논문이 연이어 나오게 되었다. 이 가운데 고구려의 정치·사회·외교 문제 등에 대한 개별적 연구가 촉진되고, 광개토(호태)왕릉비 고분벽화 영역고찰 외에 국가체제 산성과 방어체계 등 연구가 본격화되었다.
먼저 태왕비문 연구는 1884년에 일본 군부 밀정 장교가 탁본을 가져간 이래 일본에서 한반도 남부지배설로 이용되면서 성황을 이루었다.
한국은 1950, 60년대에 정인보의 고구려 주어 해석이 알려지고 북한 박시형 김석형이 보완·정리하여 '일본열도분국론'으로까지 발전한 한참 뒤 80년대가 다 되어서야 학문 업적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즉 정인보 이진희를 이어 천관우의 일련의 정복기사 해석이 나오고 필자의 남진 발전론 견해가 제시되었다. 그 후 비문의 조작여부, 신묘년기사문제, 그리고 천하관, 수묘인 검토와 정복지역의 위치비정 등이 대세를 이루며 발론되었다.
이리하여 얼마동안 이형구·박진석 등의 소위 신묘년기사 해석 등 자구해석이 성하였으나, 그 후 비문조작보다 비문의 구조해석 등에 새 견해들이 잇대어 나왔다. 즉 비문 속의 세계관·수묘제·왜의 실체 등 연구가 구체적으로 진전되고 새로 수묘인조의 국연(감독자)과 간연(수비와 청소 등 잡일)의 구별 등과 이도학의 피정복민의 이원화 정책설이 주장되기도 하였다.
근래 고구려 남진 관계 유물 유적이 남한 각처에서 발견 조사되고 있다. 그 압권은 한국에서의 고구려사 연구에 새로운 전기를 맞게 한 '중원고구려비'의 발견이다. 이 비는 1979년 충주시(당시 중원군)가금면 용정리(입석마을)에서 정영호의 정력적 답사와 조사로 찾아진 것이다. 높이 1.35m의 키에 700여자가 판독된 이 비는 고구려왕이 신라왕에게 의복을 내리고 백제고립을 도모한 회맹의 경위를 전한다. 1차적 보고는 단국대『사학지』13(1979)에 집약되었는데 최근 한 중 일 전공 학자가 모여 더 정밀 검토를 한 끝에『중원고구려비 연구』(『고구려연구』10, 2000)라는 대논문집을 내놓아 큰 보탬이 되고 있다.
이러한 고구려 연구 진전은 몇몇 기관과 전공자의 책 출간으로 이어져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다. 먼저 백산 학회는 1966년에 창립되었는데 창립 당시 회장 김상기가 "백산흑수는 상고이래 동이족의 활동무대로 상징적인 명칭"이라고 밝힌 바와 같이 "만주 및 그 부근 지역과 우리민족의 유구한 역사 관계"를 연구하는 목적의 민간 학술 연구 단체였다.(책임 편집 유봉영, 현 회장 신형식) 그 동안 학보를 68호나 냈는데 거기에 고구려 관계 논고가 40편 내외 발표되고 고고 역사 논저는 여러 책이 편간되였다.
근자 1996년 7월에는 백산학회 창립 30주년 기념으로 "한민족의 성장과 영역"이라는 주제의 학술회의를 열고 또『한민족의 대륙 관계사』를 편집 출판하였다. 이어 1997년 11월에는 사단법인 해외 한민족연구소와 함께 '한민족의 북방영토의식과 간도 영유권문제의 학술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이것을『한국의 북방영토』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이 회의는 한국 학계의 간도 영유권 문제에 관한 최초의 공개 학술 회의로서 당시 학계와 사회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또 최근에는 고구려 국내성 천도 2000주년 기념으로 국제 학술 대회를 개최하고 발표논문을 『신형식 박사 정년기념논총』(고구려·발해사의 복원) 백산학보 67호, 2003 특집으로 출간했다. 여기에는 고구려사를 둘러싼 한중간의 전쟁 시말, 고구려사의 재탐구, 발해사의 재조명 등 여러 논문을 함께 싣고 있다.
다음 고구려연구회는(사단법인전 명칭은 고구려연구소)는 1994년 6월 24일 서길수 등이 창립하였다. 이래 고구려연구회의 10년간 발자취를 보면 신라, 백제의 경우와 같은 대학 등의 배경도 없이 고군분투한 가운데 업적이 매우 혁혁하였다.
10년동안 학술논문집『고구려연구』를 별표와 같이
꾸며내고, 논문이 258편이나 발표되었다. 신진학자
가 더 많이 참여하여 어려운 상황에서 높은 성과를
올린 것은 서회장 일가의 희생적 노력 덕도 있었다.
특히 거창한 학술대회와 두툼한 특집 보고서는 다소
생경한 데가 있으나마 두고두고 학계에 큰 기여를 할 것이다 .
외국 학계에서도 현재 한국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활약하고 있는 고구려 연구단체로 평가되며 학술총서 발간이나 현지 답사 조사 발굴에도 괄목할 성과를 계속 내고 있다. 또 지난 10년간 고구려 연구의 국제화와 학제간 연구 활성화에 중점을 두고 창립한 해부터 매년 국제학술대회를 열었다. 지금까지 160명이 넘는 각국의 학자들이 학술대회에서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역사학자는 물론 정치, 경제, 화학, 지질, 건축, 천문, 음악, 미술, 복식, 식품같은 다양한 학문 분야가 참가하여 학제간의 종합적인 연구가 진행되었다.
·연구 방법에서나 연구영역에서도 새로운 경향들이 나타나 자연과학을 응용하거나 각종 현지 답사 내지 국가를 뛰어넘는 협력과 공동 연구를 더욱 중요시하였다. 또 학자들만이 아니라 널리 노소 시민들의 큰 호응 속에 '고구려·발해 문화대학' 등 각가지 행사가 계속 열려 '90년대에 와서 고구려를 연구하는 붐이 일어나는데 많은 기여를 하였다. 더욱 중국과 북한 사학계의 연구성과를 대량 번역하여 출판 소개하며 고구려의 역사문화재, 고고자료 전시회의 개최와 대형 도록 들을 출판하였다.
한국고대사학회(2003,4년 회장 이문기)는 1987년 대구에서 창립되어(초대회장 노중국) 전국 조직으로 확대되었는데 근 20년 사이에 발표회가 79회, 회지가 34집 발간되었다. 신라사가 월등 많고 다음이 백제사이며 고구려사는 매우 적어 30여편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금년에는 특별히 고구려 학술 세미나가 개최되고 특집 특대호(『고구려의 역사와 문화유산』 한국고대사학회, 2004.)도 출간되었다.
한편 개별 저작활동을 보면 먼저 노태돈의 저서는 고구려 사회 구성체인 부의 성립시기와 실체를 비롯하여 그 구조와 정치제도, 고구려의 천하관, 그리고 5∼6세기 고구려의 대외관계 등 고구려사 성격 파악에 큰 도움을 주었다. 다만 부체제론은 반론도 있지만 고대국가의 성립 변천과정 등 정치사 연구에 활력소가 되어 임기환 등의 새 성과물도 나왔다.
다음 필자 등의『고구려 남진경영사의 연구』는 1995년 백산자료원에서 출판되었는데 박성봉 5편을 비롯 공석구 이도학과 신형식 서영대 윤명철 등 학자들이 고구려의 남진발전문제에 대하여 쓴 15편 연구론문을 수록한 것이다. 신형식도 이 책에 대하여 제목에서 보듯이 남방경영과정을 중심으로 한 연구성과만을 정리한 것이다.라고 하였지만 필자로서는 고구려 정체성과 직결되는 남진 본의를 제대로 밝히려는 의도가 미진한 듯 아쉽게 생각된다. 그 점에서 최근 고구려연구회가『廣開土太王과 高句麗南進政策』을 주제로 구리시후원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한 것은 퍽 좋은 기회가 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서두 논문으로「好太王 高句麗南進政策의 意義」를 발표하고(고구려연구회 편,『廣開土太王과 高句麗南進政策』서울 : 學硏文化社, 2002),「廣開土(好太)王 硏究文獻 綜合目錄」을 동서와 합간하는 등 공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 남진 의의의 논문과 관계 연구목록 등은 세월을 두고 활용 평가되기를 기대해 본다.
또 국사편찬위원회의『한국사』5(고구려)는 이호영(전쟁사) 말고는 공석구·임기환·김현숙·여호규 등 신진학자들이 정치, 경제, 사회 각 분야를 분담 서술하였다. 무엇보다 고고학과 문헌과의 접목을 통해 '구려'의 문제, 나부체제의 성립과 국가성립과정, 그리고 고구려의 통치조직에 대한 새로운 연구성과를 반영한 것은 고구려사에 큰 진전이었다.
다시 이옥은『고구려 민족형성과 사회』를 보완하여 동학들과 손잡고 쉽게 풀어『고구려 연구』를 저술하였다. 서병국·김용만 등은 시세에 맞추어 각각 왕조사와 함께 고구려인의 삶과 문화를 구체적으로 정리하였다. 연세대와 백산학회의『고구려사연구』는 각각『동방학지』와『백산학보』에 실었던 논문을 모은 것이라 좀 산만한 편이다. 따라서 이들 책들은 고구려사의 특성이나 체계적 이해에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다. 노태돈의『고구려사 연구』는 문화부분이 빠져 속권이 기대되며, 『고구려제국사』와 『고구려의 발견』은 연구사적 연결이 더 요구되었다. 『아! 고구려』는 현지답사를 토대로 미디아의 이벤트에 성공하고, 공석구의『고구려 영역확장사 연구』와 이인철의『고구려의 대외정복연구』는 대외 팽창을 착실히 밝혔는데 대내 정체성과의 연계 등 종합고찰이 기다려진다.
이런 가운데 신세대 연구자를 중심으로 고구려정치사 연구가 많이 진전되어 고구려 초기국가인 '구려국'문제와 나부체제 등에 여러 성과가 나왔다. 임기환은 초기의 정치사 연구에서 연구 시각을 달리하는 부체제론과 조기 집권체제론의 입장이 중기와 후기의 정치사 연구에까지 확장되고 있지 않다고 보았다. 부체제를 정치체제의 한 단계로 설정하는 입장에서는 이후의 중앙 집권적 정치 체제로의 전환과 그 배경을 추구해 갔지만, 초기 집권 체제론의 입장에서는 초기와 중·후기의 정치 체제의 차별성에 별로 주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렇듯 정치사의 기초가 아직 허약한 것은 현재까지의 연구 동향이 시기별로 제 각각이기 때문이다. 특히, 집권적 지배 체제가 완성된 중기의 이해가 부족하여 전 시기의 시기 구분기준을 설정하기 어렵다. 중앙 집권제도는 후대에도 나오므로 역사적 단계성을 잘 잡아내야 의미가 있다. 부체제와 상대적으로 비교하면 그 역사성이 분명하겠지만, 그럴수록 구체적인 집권 체제 실상을 밝혀야 그 단계화를 통해 고대적 집권 체제의 특질을 부각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초기 정치사에 집중된 연구는 빨리 벗어나야 한다.
다음 고구려가 '民皆土着'한 후의 변화 양상은 다각도로 연구가 필요한데 이는 국가 멸망으로 그 경험과 특질 등이 잘 이어지지 못했다. 이에 임기환은 "특히, 고구려 사회가 갖는 유목 사회적 요소나 다종족 구성의 측면, 정복 국가로서 제국적 통치 질서, 정치·문화의 국제성 등의 측면은 후기에 사료의 정리 과정에서 그 성격이 제대로 반영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고 하여 고구려 정치사 관련 사료해석에 새로운 방법론의 모색을 토로하였는데 여기에는 국망 탓만이 아니라 가령 '新集' 같은 후기 史觀의 변화를 읽어냄으로써 기본적으로 국정을 옳게 파악하는 노력도 필요하리라고 본다.
그 외 고구려 초기의 권력구조와 통치체제에 대한 구체적 분석으로 가, 국상, 군신회의 등에 대한 연구가 있다. 이로써 나부체제가 태조왕때 본격화되고 그 대표자인 沛者들의 제가회의가 나타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뒤를 이은 군신회의(귀족회의)는 왕권의 강화에 따라 권한이 축소되었고, 국상제의 성장과 대대로의 등장에 따라 고구려는 귀족연립으로 갔으며, 지방제도는 성중심의 군사적 운영의 특징을 나타냈다. 그런데 초기의 대보와 그 국상으로의 변화는 백제(좌평)·신라(상대등과 병부령)에도 있어 한국고대사의 독특한 관직으로 생각할 수 있으므로 면밀한 비교를 통하여 삼국의 특수성과 보편성을 잡아낼 수 있겠다.
한편, 고구려의 대외관계 연구는 고구려사 해명에 큰 비중을 갖는다. 이용범의「고구려의 성장과 철」(『백산학보』1, 1966)은 고구려 초기사 해명에 실마리를 제공하여 요동반도 진출에 큰 의미를 부여하였다. 근자 북한 사가들은 문자명왕때 고구려가 평해·영덕 등 동해안 일대까지 장악하여 백제 신라를 한반도 3분의 1속에 몰아 부쳤다 하고, 신형식은 이 전성기의 고구려 강역을 40만㎢ 정도로 보면서 북측이 내세운 최대영토와 비교하였다. 그런데 북측이 고구려 남진을 들어 삼국통일을 거의 다 이룬 적극적 노력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제 땅 영역만이 아니라 사람 통일을 위한 內的 정비 상황 등 사회 문화적 접근 검토가 소망스럽게 느껴진다. 또 신교수는 고구려가 4세기 이전에는 주로 북방진출(대중국과의 항쟁)을 하다가 5세기 이후는 이러한 북방경계를 바탕으로 농경지 확장 내지는 서해제해권을 위한 남방진출이 중심이 되었다고 하고 있는데 이 대목은 어느 쪽이 바탕이 되었는지 좀 더 검토가 있어야 할 듯하다. 그리고 고대사의 영역(강역)은 근대사에 있어서의 통치권이 행사되는 국경을 전제로 한 영토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은 농업 집약지대와 군사행정지역의 구분과 더불어 북진 팽창주의에서 명심할 지적이다.
4∼5세기 이후, 고구려가 만주보다 한반도의 주역으로 활동하게 됨에 따라 평양천도의 새 조명, 고구려의 탄력적인 외교정책, 고구려의 해양진출과 광개토호태왕의 남진정책의 의미 등이 새롭게 정리되었다.
특히 서영대의「고구려 평양 천도의 동기」는 왕권강화수단이라는 신설을 내세웠고, 윤명철의 일련의 해양활동연구는 바다를 중시한 이론을 제기하였다. 그리고 고구려가 서역·북위 등과 통하여 불상·벽화·건축 등에 변화가 생긴 것이 밝혀졌다. 노태돈은 고구려가 북방의 강자로 군림할 수 있는 탄력적인 의미를 명분과 실리, 세력균형과 字小사대라는 양 측면으로 설명하였다. 그러면서도 필자의 고구려 남진 의의는 끝내 부각되지 못한 듯하다.
어쨌든 고구려는 남진에 따라 삼국간의 상쟁과 교류도 활발하게 되고, 잦은 전쟁에 따른 주민이동과 문물유통으로 피차의 사회적·문화적 동질성을 두텁게 하는 계기도 마련된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고구려의 남진 정착 후 일단의 국가적 성격의 변화를 주목해 볼일이다. 종래의 불안정한 국가 발전에서 인구집약적 농경정착적 성격이 고구려 사회에 깊게 쌓이면서 국내성시대와는 다른 국가 발전이 나타나게 된 것으로 짐작된다. 북위의 이오(李敖)가 장수왕 23년(435) 평양을 방문하고 쓴 보고기록에 벌써 [民戶參倍於前魏時](민호삼배어전위시),[民皆土着](민개토착)이라고 한 실상(三國志 魏書 高句麗傳)은 그와 같은 변화를 족히 예견케 한다.
여기서 고구려 정체성 문제의 추이를 더듬어 보도록 하겠다.
사람이 나서 여러 조건 속에 자라고 경험을 쌓아 나가 10대 초에 철이 들면 일생 그 나름의 언어와 관습 등 특성을 유지하며 살아간다. 나라의 경우도 일정한 초창기를 거친 후에 특성이 잡히고, 성장 발전하면서 정체성이 조정, 확립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을 고구려에 대입하면 1세기 태조왕때 특성이 서고 4세기 미천왕∼소수림왕기에 조정되어 5세기에 정체성이 확립된 것으로 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경과나 경위는 당시 금석 자료나 삼국지 삼국사기 등의 문헌 기록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짐작된다. 무엇보다 호태왕비나 중원고구려비 그리고 모두루묘지 등이 고구려국의 위상을 확실히 보여준다. 즉 한반도 북부 농업국으로 천손족의 나라이며, 독자적 천하의 중심국으로서 이웃을 질서 세우고 자주, 자존으로 발전한 것을 과시한다. 이러한 의식은 소수림왕 무렵 정리되고 호태왕비에 명기되어 내려오게 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중시할 것은 호태왕비의 경우 북 석권의 활약상보다 '以道興治'등 문치와 남진 포용을 부각시키고 평안호태왕이 빠진 '광개토경'만 내세우는 武 편중적 표현은 안 보이는 점이다. 바로 5세기 당시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것이 발해, 고려로 내려오면서 외세와의 대결도 있고 해서 거대 강국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식이 강조되고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이르면 영락대왕의 왕호가 '호태'는 떨어지고 '광개토'로만 기록되게 되었다. 요 금 원의 침해를 거듭 입은 당연한 귀결이고 정체성 규정도 따라서 현실화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동안 이런 면에의 주의나 고찰은 거의 없었던 것이 문제라면 문제이겠다. 그사이 통일신라에서는 고구려, 백제와 한 집이 되었다 해서 '合三韓'의 기록이 남아있고, 다시 조선조에 와서는 고구려의 기원설 정통론 등이 전개되다가 신경준의 '南自南 北自北'설이나 북학파의 북국 중시론도 나오게 되었다. 한편 고구려를 군사강국보다 문화국임을 부각시키려. 이종휘는 저서『東史』에 고구려의 예문지, 율력지, 천문지, 형법지 등을 두기도 하였으니 북 편향성 강조는 좀 더 후대의 일인 것이다. 즉 구한말 일제하 국운 비색시기에 민족사학자들이 제기하고 보상심리의 확산으로 작금애도 퍼져 있는 실정이다. 이리하여 고구려사는 한국사의 일부로서 추호도 의심 없이 그 위상을 지키며 내려온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필자는 고구려의 특성을 4세기 한반도 적극 진출에서 찾게 되고 5세기 호태왕비 등 금석문을 통하여 남진정착으로 가닥을 추려 정체성의 확립을 잡게 되었다. 그러므로 필자의 남진론은 소위 북진론의 대립방향설정의 차원이 아니라 평양천도를 통하여 고구려의 운명을 한반도의거 농경생활 위주로 확정지우는 엄청난 결단으로 보는 것이다. 여기서 7세기 국망까지 평양이 수도인 기간은 그 이전 집안기의 절반밖에 되지 않지만 고구려 정체성의 확립 면에서 더 큰 의미 부여를 하고자 한다.
사실 5세기 전후 그 화려한 북방 재패기에도 수도는 고사하고 부수도도 황해도 경기도로 반도 깊숙히 파고들어 두었다. 500년 수도 집안도 만주 한복판 아닌 좀 더 아늑한 압록강변에 있었다. 이는 방어문제 만이 아니라 농경상 북보다 남을 선호한 자연 순리에 연유한 것임에 틀림없다. 이렇게 보면 남진 발전기는 3백 수십년에 달하며 호태왕비의 남진 중시 경위도 이런 맥락에서만 옳게 풀리고, 여기에 정체성과 그 확립기를 잡아 조금도 무리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동안의 조건 때문에 고구려는 독특한 남북 병립의 문화발전도 이루고 남족 백제 신라로 동쪽 일본으로 큰 영향 작용을 수행하였지만 그 이상의 대신라같은 새 차원의 문화 정리와 승화는 끝내 이루지 못한 듯하다.
이에 신형식 :『고구려사』의 누차의 章末(이미 서장에서도 되풀이된)논설을 들어 보이고 논평을 가함으로써 고구려 정체성 논의를 단락지어야 하겠다.
신교수는 여러 논고를 종합하여 말한다. "무엇보다도 고구려는 군사적 강국으로만 설명될 수 없는 문화적·정신적 능력을 지닌 '역사의 주인으로서 창의력과 자유의식을 갖고 있었던'나라였다. 따라서 고구려의 정신과 창조적 에너지는 어떤 특성을 갖고 있으며, 중국의 동아시아 질서에 대응한 당당한 민족의 정체성의 본질 구명이 우선 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고구려사 연구상의 당위론을 폈는데 이는 크나큰 사관의 한 변화로서 필자 소론과 일치하는 주장을 보는 재미가 각별할 수밖에 없다.
"특히 4세기 이후 고구려의 적극적인 남진정책은 농경지 확대를 통해, 남방의 농경문화에 대한 욕구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남방경영은 병역과 군량미의 확보라는 차원에서도 필요하였으며, 동시에 고구려 사회의 탈북방적 내지는 탈유목적 성격이 강화된 것이다. 동시에 장수왕, 광개토대왕의 남방진출은 황해의 제해권장악으로 가능할 수 있었으나, 6세기 이후 동아지중해의 질서를 주도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남방문제를 신라에게 넘겨주게 되는, 고구려사의 한계점을 보여주게 되었다."고 하여 그런 대로 객관성이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다양한 문화충돌의 극복방법이 모색되어 사냥·놀이·가무 등으로 국민적 융합과 단속, 단결을 꾀하는 한편, 때로는 국민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이 강행되었고, 국민적 관심을 밖으로 돌려 그것을 하나로 묶을 수 있도록 중국과 전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결국 고구려는 다부족국가의 문제점을 귀족연립정치로 유지하였고 독재정치로 극복하려 했다. 그러나 외족방어를 통한 국민적 공감대 형성의 기도는 수·당과의 장기간 전쟁에 따른 무리한 출혈로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새 수도 경영에 의한 야심찬 집권전제화 계획을 세웠으나, 연개소문 세력의 독주에 따른 귀족연립정치의 한계와 내분, 그리고 나당연합군에 의한 계속적인 공격으로 고구려는 자신의 적자를 갖지 못하고 횡사하였다." 고 하여 주춤거림을 보인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5세기 이후 국가의 기본 정책 방향을 지나치게 남방경영에 치중함으로써 결국 광활한 북방영토를 방기하고 만 과오를 남기게 되었다. 이러한 고구려의 남진정책은 수·당의 침략을 가능케 하여 고구려에 큰 위기를 가져온 결과가 되었다. 그러나 고구려는 유목·내륙 위주의 북방문화와 농경·해양 위주의 남방문화라는 이중적인 문화복합을 조정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역사적 한계를 넘지 못하고 말았다. 이러한 현상은 고구려벽화의 주제가 4세기 이전에는 사냥·씨름·수박등 상무적 특징이 중심이었으나, 5세기 전반기 이후의 벽화에는 이들이 줄어들고 가무·행렬도나 상상의 동물인 사신도가 중심이 되고 있음에도 나타나 있다.
평양 천도 이후 고구려는 결국 남방진출에 역점을 둠으로써 초기의 전투적 습성이 약화되면서 고구려 사회의 전반적인 변화상이 두드러졌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문화충돌의 어려움을 정치적으로 해결하려는 무모한 독재정치의 강행은 이완된 고구려인의 정신문화를 옛날로 되돌릴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고구려의 평양천도는 결과적으로 국가 쇠퇴의 단초와 반도국가로 전락하게 되는 역사적 과오를 남기게 되었다."(동 서 403~4면 맺음말 )고 책 대미 결어에서도 다시 거듭 강조하여 위 첫 번 째에 든 긍정적 사론은 사라져 버린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교수의 서상의 주장은 남진 실상을 반쯤은 인정하고 정체성도 문제삼고 나선 점에서 한국사학계의 일대 진전이라고 하겠다. 다만 그 근본 논리가 남진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데서 필자와 의견이 갈린다. 이미 본고 서두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고구려는 한반도 중심의 농경정착에 후발로 참여해서 동아시아 대륙 해양을 아우른 막강한 문무 대국으로 발전한 가운데서도 그 차원의 새 정책과 문화 구축에는 미급해서 결국 쇠망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실정을 북방 실지나 반도국가 전락으로 되풀이 몰고 가는 것은 당당하고 강대한 본질을 외양에서만 찾아온 근래의 오랜 관습적 오판이라 할밖에 없다. 거듭 말하거니와 아무리 고구려라 해도 대신라 같은 문화대국으로 승화하기에는 시간, 공간과 人的 文化力 기타 여건이 모자란 한계가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가령 신라 불승 들의 경우와는 정반대로 고구려 고승 승랑은 중원으로, 혜량은 신라로, 보덕은 후백제로, 혜자 혜관 등은 일본으로 빠져나가고 마는 고구려 불교의 내면적 혼란은 당대 최고 지성계의 난맥상이라는 점에서 결코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닌 것이다.
맺음--고구려 연구사의 반성과 정체성 재정립문제
이상에서 확인한 것처럼 우리민족은 한반도 내에서의 장단점을 대처 활용하면서 그 결과가 바로 文化 중점적 발전으로 이어졌던 것 같다. 정치와 경제도 그 문화발전을 위하는 방향에 초점을 맞추고 노력하였을 때가 전성시대였고, 그 반대는 늘 침체의 시기였다. 그리하여 지난 날 우리의 전체적인 文化度가 매우 높았던 것은 다 전통적인 문화존중의 결과라 할 것이다. 그러기에 같은 무인정권이면서도 日本과 달리 고려 최씨정권의 수령이 令公이라 자칭하고 文士우대, 도자기나 금속활자, 책 출판 등 문화정책을 힘쓴 것도 당시 저변의 문화분위기를 확인케 하는 것이다. 또 우리 先人들은 늘 못 배우면 가문이 끝장난다고 확신하는 버릇을 견지하여 오늘의 지극한 교육열로 이어진 것도 특기할 만한 일이었다.
총체적으로 우리의 역사를 이해함에 있어 먼저 우리 민족이 초 대국 중국 및 막강국 알본과의 대치상황에서 뛰어난 소질과 노력으로 민족과 국토를 지키고 가꾸어 온 점, 그 중에서도 최상급의 문화적 대결 속에서 독자적인 문화전통을 이루어 나온 점을 자랑스러워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고대 이래의 문화계발의 역사적 의미가 매우 고조될 수밖에 없거니와 문화 우위적 사고방식을 옳게 계승하여 바람직한 정치·경제적 노력과 더불어 민족의 훨씬 많은 내면적 능력을 계발하는 길이야말로 당면한 민족적 발전을 기약하는 첩경이 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 동안의 역사 전개과정에서 실증되고 있듯이 경제나 정치적 발전이 문화적 차원으로 수렴·승화되지 않으면 무의미한 것으로 멈추어지고 말았던 것을 명심해야 하겠다.
오늘도 처져 있는 우리 문화력의 침체는 조선 후기 實學 운동이 학문이상을 넘지 못하고 더욱 새 시대에의 주체적 세력기반도 형성되지 않아 근대로의 전환에 실패한데까지 올라간다. 즉 크나큰 잘못은 당시 정치·경제의 실세들이 새 시대의 문화 운동 사상에 어두워 이를 통일 승화하는 참다운 근대화 운동으로 전개하지 못한 데 연유한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일제의 정치·경제적 침략아래 역사상 처음으로 문화력에서도 참패의 늪에 빠진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문화의 창조능력, 새 문화 건설 능력이 역사발전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새삼 통감하게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해방후 60년이 다된 오늘에서도 서구문명의 토착화가 많이 진행된 듯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내면적 의식과 알찬 결실을 동반하는 문화적 토착화가 아직 요원한 느낌이다. 참다운 토착화가 없는 이식문화의 단계에서는 양적 확대는 가능하지만 질적 전환을 동반하는 근본 변화는 되기 어렵다. 보다 본질적인 서양문화의 흡수와 동양문화의 재창조를 위해서는 모든 정치 경제 사회 활동이 문화적 단계에서 새롭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당장의 정체성 검토 사업도 이점에 유의해야 하거니와 일체의 활동이 창조적인 의미를 갖도록 하자면 근원적으로 문화사회의 건설 이념과 그 확산 실천이 따라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구체적으로는 무엇보다 새 과학문화의 바탕이 되는 기초 공부가 철저히 요망된다. 그리하여 전세계적 우주적 의식의 확대와 핵심적 첨단 기초과학의 통달이 필수 불가결하겠다. 또 밑자리의 옳고 바른 구축을 위해서는 전통문화를 제대로 이해할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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