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 리 말
주지하는 바와 같이, 최근 중국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전략적 지위"를 지니고 있는 중국 동북지역의 역사에 대한 왜곡을 바로잡는다는 기치 하에 이른바 '東北工程'이란 대규모 연구 프로젝트를 발족시켰고, 그 일환으로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편입하려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물론 고구려가 중국의 일부라는 시각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수나라 때 裴矩는 "高麗之地 本孤竹國也 周代以之封于箕子 漢世分爲三郡 晉氏亦統遼東"이라 했고, 金毓 은 1941년에 출판된 『東北通史』에서 "고구려는 중국 동북의 소수민족이며 고구려 국가는 성립에서 멸망 때까지 중원왕조의 일개 지방정권"이라 했다. 그러나 이번처럼 국가적 차원의 조직적인 움직임은 없었다.
그 동안 한국에서는 고구려사가 한국사의 한 부분이란 사실에 대해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그런 만큼 '東北工程'이 준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를 계기로 고구려사가 한국사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연구가 없었던 점은 반성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반성 위에서 해야할 첫 번째 작업은 고구려의 정체성 내지 역사 귀속이란 문제의식 하에서 기존 사료를 재검토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알려진 사료라 할지라도 관점이나 문제의식에 따라 새로운 사실을 도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국의 것도, 중국의 것도 아닌 사료가 보다 객관적일 수 있다. 예컨대 732년에 건립된 突厥의 『闕特勤碑文』 같은 것이 그것인데, 여기서는 6세기 후반 돌궐왕국을 창건한 土門可汗과 室點密可汗이 죽었을 때 조문사를 파견한 나라로 "bukli(=고구려)와 함께 漢人·"purum(=동로마) 등을 들고 있다. 따라서 돌궐인들은 고구려와 중국인을 분명히 구별했다고 하겠다. 나아가 고구려를 중국이나 동로마제국 보다 앞서 언급했다는 사실은 고구려의 위치를 얼마나 높이 평가했는지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러나 고구려에 대한 제 3국의 자료는 많지 않다. 따라서 고구려의 정체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로 한국과 중국의 사료를 검토할 수밖에 없는데, 여기서는 한국측 사료들을 통해 이 문제에 접근하고자 한다.
중국도 그러하지만, 전통시대 한국의 역사서들은 사실을 충실히 전하는 것 보다, 역사를 거울로 여겨 사실의 褒貶, 즉 사실의 가치평가에 더 많은 비중을 둔다. 그래서 역사의 재구성을 위한 사료로서는 부족함이 있지만, 역사를 어떻게 보았는가라는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좋은 사료가 될 수 있다. 고구려의 정체성도 역사인식의 문제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여기서도 주로 전통시대 한국 사서들을 통해 고구려의 정체성 문제에 접근해 보고자 한다.
1. 고구려 당시의 자국 인식
고구려 당시에 고구려인 스스로가 그린 自國像이 있었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한국에서의 고구려의 정체성을 논의할 때, 우선 고구려 당시의 자국 인식을 살피는 것이 순서이겠다.
고구려 당시의 자국 인식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는 고구려인이 남긴 금석문들이 있다. 이 중 5세기의 금석문에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있다.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郞 剖卵降世 生而有聖(『廣開土王陵碑』)
河泊之孫 日月之子 鄒牟聖王 元出北夫餘 天下四方知此國郡最聖鄕?(『牟頭婁墓誌』)
이상의 자료들은 모두 고구려 시조 추모왕이 하늘의 신과 하백이란 수신의 혈통을 이은 존재임을 전하고 있다. 그래서 시조는 태어나면서부터 신성했고, 이러한 시조에 의해 창건되었기 때문에 고구려는 천하 사방이 인정하는 가장 신성한 국가라는 것이다.
또 『광개토왕릉비』에서는 "顧命世子儒留王 以道興治 大朱留王紹承基業 還至十七世孫國 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 했다. 이것은 신성한 시조의 혈통을 이어받은 후계자들이 계속 고구려를 통치한다는 것이며, 따라서 고구려의 신성국가로서의 전통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신성국가라는 관념은 고구려로 하여금 주변의 국가나 종족과 차원이 다르다는 의식을 가져다주었다. 역시 5세기의 금석문인 『중원고구려비』에서는 신라를 '東夷'라 한 것은 이러한 사실을 반영한다. 그리고 신라를 동쪽의 夷라 한 것은 고구려를 기준으로 한 방위관념이다. 또 『광개토왕릉비』에서는 부여를 북부여와 동부여로 구분하고 있는데, 이 경우의 북과 동도 고구려를 기준으로 구분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렇다고 할 때 이러한 사실들은 고구려가 스스로를 세계의 중심으로 여겼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는 주변의 국가와 종족을 이끌어 가는 종주국으로 자처했다.
永樂 6年 殘主困逼 獻出男女生口一千人 細布千匹 王自誓 從今以後 永爲奴客… 永樂9年 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광개토왕릉비』)
여기서 영락 6년(396)의 기사는 고구려의 공격에 굴복하여 백제왕이 영원히 노객이 되겠다고 맹세한 사실을 전하는 것이며, 영락 9년(399)의 기사는 왜의 침공을 당한 신라왕이 노객을 자처하면서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한 사실을 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노객이란 표현은 『모두루묘지』에도 나온다. 즉 모루루가 자신을 고구려왕의 노객이라 한 것이다. 따라서 노객은 비천한 신하라는 의미 정도가 되겠으며, 고구려는 종주국으로서 백제와 신라를 신하로 거느린 국가로 자처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고구려는 여러 국가나 종족들로 이루어진 세계의 중심의 신성국가로서, 이들을 통치한다고 스스로를 인식했다. 다시 말해서 고구려는 독자적 천하를 상정했고, 그 중심에 자신을 위치시켰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언급해두고 넘어가야할 기사가 있다. 『삼국사기』 권 18, 고구려본기 6, 광개토왕 17년조에는 "遣使北燕 且敍宗族 北燕王雲遣使李拔報之 雲祖父高和 句麗之支屬 自云高陽氏之苗裔 故以高爲氏"란 기사가 그것이다. 이에 의하면 고구려에는 왕실이 중국의 전설적 제왕 頊 高陽氏의 후손이란 전승이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기사를 분석해 보면, 전반부는 『資治通鑑』 114, 晉紀 36, 安帝 義熙 4년 3월조, 후반부는『晉書』권 124, 慕容雲載記를 轉寫한 것이다. 그리고 『晉書』의 기록은 慕容雲(=高雲)의 집안이 後燕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씨란 성을 高陽氏(= 頊)와 연결시켰음을 전하는 것이며, 고구려 자체에서 이러한 전승이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資治通鑑』의 기사도 북연의 모용운이 원래 고구려 출신으로 고씨이기 때문에 宗親으로서의 우의를 다졌다는 것이며, 같은 고양씨의 자손이기에 우의를 다졌다는 것은 아니다. 결국 이 기사도 고구려의 독자적 천하관과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2. 통일신라시대의 고구려사 인식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 고지의 대부분을 차지한 것은 발해이다. 따라서 발해에도 나름대로 고구려 인식이 있었다고 하겠지만, 한국 사료에는 이를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 없다. 대신 일본 사료에는 관련 기사가 보인다. 예컨대 발해가 일본으로 보낸 국서에 발해 2대 무왕이 "復高麗之舊居 有扶餘之遺俗"이라 했다든지, 제 3대 문왕이 스스로를 "高麗國王大欽武"라 한 것이 그것인데, 이를 통해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로 자처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장본인의 하나가 신라이지만, 신라의 고구려 인식을 알려주는 자료도 별로 없다. 그런데 신라에서는 반도 통일을 "合三韓"으로 표현한 사례들이 있다. 7세기 후반, 즉 신라의 반도 통일 직후에 건립된 것으로 짐작되는 『淸州 雲泉洞寺蹟碑』에서 "合三韓而廣地"라 한 것이나, 경문왕 12년(872)에 제작된 『皇龍寺刹柱本紀』에서 "果合三韓"이라 한 것이 그것이다.
삼한이란 원래 마한·진한·변한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경우의 삼한은 마한·진한·변한이 아님은 물론이며, 오히려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을 뜻할 가능성이 크다. 실제 통일신라시대의 崔致遠은 삼국과 삼한을 연결시켜 이해하였다. 즉 그는 마한=고구려, 변한=백제, 진한=신라라고 한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신라의 통일을 "合三韓"이라 한 것도 어색하지 않다.
진한 계통의 신라에서 고구려를 마한이라 했다면, 같은 韓으로서 신라와 고구려의 동질성을 상당 부분 인정했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고 할 때 통일신라에서는 고구려를 같은 韓으로서 동질성을 가졌다가, 마침내 흡수되어 신라의 일부를 구성한 국가로 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고구려가 발해를 통해 계속되고 있다는 인식도 있었다. 예컨대 최치원은 발해를 고구려의 殘孼(남은 무리)들이 태백산 북방에 세운 나라라고 했다. 따라서 통일신라시대에는 고구려를 마한 계통으로 신라에 흡수되었다는 인식과 발해로 이어졌다는 인식이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3. 고려시대의 고구려사 인식
통일신라시대와는 달리 고려시대에는 고구려의 역사가 자국사의 일부라는 인식이 확고해진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점은 고구려·백제·신라를 통칭하는 '삼국'이란 표현이 고려시대부터 사용된 사실이다. 삼국이란 말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미상이다. 그러나 大覺國師 義天(1055∼110)의 시 「孤大山景福寺飛來方丈禮普德和尙影」에 인용된『海東三國史』란 서명으로 미루어, 11세기 이전부터 사용되었던 것은 확실하다.
이처럼 고구려·백제·신라가 삼국으로 묶여질 수 있었던 것은 이들 국가가 함께 고려의 先行王朝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완성 후 인종에게 바친 「進三國史記表」에서 김부식이 신라·고구려·백제를 '吾邦'이라 한 것은 이러한 사실을 반영한다. 이에 따라 삼국의 역사는 자국사가 되며, 고려 이전의 역사를 취급한 사서 이름에 『海東三國史』(=『舊三國史』)·『三國史記』·『三國遺事』처럼, 삼국을 冠稱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된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있어서 고구려는 단순한 선행왕조가 아니었다. 즉 고려는 바로 고구려를 계승한 왕조로 인식되었다. 고구려 계승의식은 弓裔에게서 이미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궁예가 901년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고려라 했다는 사실이나, 고씨를 칭했다는 사실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또 궁예란 이름을 '弓의 후예'로 풀이될 수 있다면, 여기에도 善射者를 뜻하는 주몽의 후예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궁예의 고구려 계승의식은 일시적인 것이었다고 판단된다. 왜냐하면 904년에 국호를 고려 대신 摩震으로 고쳤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고구려 계승의식은 고려 일대를 통해 꾸준히 이어지고 강조된다. 이러한 사실을 단적으로 반영하는 것이 고려라는 국호의 사용이다. 즉 고려에서는 국호부터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임을 표방한 것이다.
또 성종 12년(993) 고구려의 고지를 되찾는다는 명분으로 침입한 거란의 蕭遜寧과 담판을 벌리면서, 徐熙가 한 말 역시 고려의 고구려 계승의식을 잘 보여준다. 이때 서희가 "我國卽高句麗之舊也 故號高麗 都平壤"라고 한 것이 그것인데, 결국 소손녕은 이를 인정하고 철군하였으며, 나아가 고려는 고구려의 고지인 강동 6주를 차지하게 된다.
이밖에 태조 이래로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을 중시했으며, 평양에 고구려 시조 동명왕사당을 두고 국가적 차원에서 致祭한 사실 등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나아가 고려를 고구려와 동일시했던 기록도 보인다. 즉 『고려사』 권 113, 崔瑩傳에서 "당태종이 本國을 정벌하였으나 本國은 승병 3만을 동원하여 격파했다"는 최영의 말이 그것인데, 여기서는 고구려를 본국이라고까지 했다.
이규보의 「동명왕편」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자임은 외국으로부터도 인정을 받는다. 앞서 언급한 거란의 강동 6주 반환도 이를 인정한 바탕 위에서 나온 것이지만, 이밖에도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 보낸 국서에 이러한 사실은 여러 번 확인된다.
* 태조 16년(933) 3월 신사, 後唐이 태조를 책봉하는 조서에서 주몽이 개국한 상서를 이어 군 장이 되었다고 했다.(『고려사』 권 2)
* 문종 19년(1065) 4월 계사, 遼가 보낸 冊文에서 그대는 주몽의 작위를 이었고라 했다(『고려 사』 권 8)
* 공민왕 22년(1373) 7월 임자, 明 宣諭文에서 당 태종이 그대를 정벌해서 실패했으나, 그 후 당고종은 그대의 나라를 모조리 멸망시켰다고 했다.(『고려사』 권 44)
* 우왕 5년(1379) 3월, 明이 고려의 배신을 질책하면서, 옛날 漢代에 高氏가 爵을 잃으매 광무 제가 그 왕호를 회복시켰는데도 돌아서서 변방 侵寇했고, 당을 배반하다가 부자가 포로되고 族姓이 滅絶되었던 배신의 전력을 거론했다.(『고려사』 권 134, 열전 47)
* 창왕 즉위년(1388), 明은 中書省 咨文을 통해 고려를 협박하면서 중국의 역대 왕조가 고구 려를 공격한 사실들을 열거했다(『고려사』 권 137, 열전 50)
또 인종 원년(1123) 송나라 사신단의 일원으로 고려에 온 徐兢도 『고려도경』에서 고려를 고구려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고 있다.
나아가 고려 후기에는 고구려와 고조선과의 관련성이 주목되기 시작한다. 그 이전 고려 전기의 『구삼국사』와 『삼국사기』에서는 북부여(해모수) 고구려의 계승에 그쳤다. 그러나 몽고의 침입으로 단군의 역사적 위치가 새롭게 부각되면서, 단군과 고구려를 연결하는 시도가 나타난다. 예컨대 『삼국유사』에서 고구려의 시조 주몽을 단군의 아들이라 한 것이라든지, 『제왕운기』에서 고구려를 단군의 후예라 한 것이 그것이다.
고려시대에 편찬된 사서들은 고구려사 인식의 기본적인 틀을 제공하였다. 고려 이전에 편찬된 사서들에서는 고구려사에 대해 여러 異說이 있었다. 예컨대 歷年에 대해서는 900년설·800년설·700년설 등이 있었고, 王系에 대해서도 異傳들이 있었다. 그러나『삼국사기』를 비롯한 고려시대 사서에서 고구려의 왕계와 역년을 28왕 704년으로 규정된 이래, 고려·조선을 막론하고 거의 모든 사서들이 이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고구려사 인식에도 혼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고구려의 초기 중심지 문제이다.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의 초기 도읍지 卒本=紇升骨城을 '玄 郡之界', 두 번째 도읍지인 國內城을 압록강 이북이라 했다. 즉 고구려의 발상지는 만주라는 것이다. 그리고 『삼국유사』도 역시 이러한 설을 따랐다. 그렇지만 고려시대에는 고구려가 평양에서 시작되었다는 설도 만만치 않았다. 예컨대 崔滋의 「三都賦」·이승휴의 『제왕운기』가 바로 이러한 입장을 취했다. 심지어 『해동고승전』에서는 고구려 초기 수도에 창건했던 省門寺와 伊弗蘭寺는 개성의 興國寺와 興福寺의 전신이라고 하여, 마치 고구려의 초기 도읍지가 개성에 있었다는 암시를 주기도 한다. 이처럼 고구려가 한반도에서 건국되었다는 설이 언제부터 대두한 것인지는 미상이다. 그런데 성종 때 成州의 별호를 松讓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므로 늦어도 고려 초에는 이미 이러한 견해가 성립되어 있었다고 하겠다.
인종 4년 12월 계유, 금에 보내는 表文; 고구려의 본지는 遼山(『고려사』 15)
또 삼한과 삼국의 계승관계에 대해서도 이설이 있었으니, 마한은 고구려가 아니라 백제와 연결된다는 견해가 나왔으며, 이를 『삼국유사』는 비판하고 최치원의 설을 지지하기도 했다.
이렇듯 고려시대는 고구려사가 한국사의 일부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며, 일부 이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고구려사 이해의 기본틀도 마련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句高麗; 『해동고승전』
반란군 崔光秀 서경에서 반란 句高麗興復兵馬使를 칭함(『고려사』121, 열전 34, 충의 鄭 )
4. 조선시대의 고구려사 인식
조선시대에는 官撰·私撰을 막론하고 한국고대사 관련 저술들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이들 사서는 예외 없이 고구려사를 한국사의 일부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사 인식은 사서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우선 삼한과 삼국의 연결에 대해 최치원의 견해를 따르는 입장이 있는가하면, 이를 비판하는 입장도 있었다. 최치원의 설에 대한 비판은 權近(1352∼1409)에 의해 제기되었는데, 그는 마한=고구려 대신 마한=백제이며, 고구려는 변한과 연결된다고 했다. 그래서 吳澐(1540∼1617)의 『東史纂要』 등에서는 권근의 설을 지지했는데 반해, 『東國輿地勝覽』·柳希齡(1480∼1552)의 『標題音註東國史略』 같은 데서는 여전히 최치원의 설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韓百謙(1552∼1640)의 『東國地理志』를 통해 일단락된다. 즉 한백겸은 옛날 우리 나라의 역사는 남북이 별개로 전개되었는데(南自南 北自北), 북쪽은 3조선에서 고구려로 이어지고, 삼한은 한강 이남에 위치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한이든 변한이든 삼한을 고구려와 연결짓는 것이 무의미하게 되고, 이후 이 문제에 대한 논란은 거의 사라지는 것 같다.
둘째, 고려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고구려의 초기 중심지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었다. 즉 평양 일대에 있었다는 견해와 만주에서 성립된 국가로 보는 견해가 있었다. 이 중에서 전자를 대표하는 것이 성종 17년(1484)에 완성된 『東國輿地勝覽』이니, 여기서는 평양 일대에 동명왕 유적(麒麟窟, 朝天石, 通漢橋, 靑雲橋, 白雲橋, 東明王陵, 殷山縣 天聖山의 麟馬 자국)이 산재해 있다고 했고, 동명왕에게 병합된 松讓國이 成川都護府에, 黃龍國이 龍岡縣에 있었다고 했다. 또 朴祥(1474∼1530)의 『東國史略』·柳希齡의 『標題音註東國史略』에서는 고구려 최초의 도읍지가 성천, 동명왕에게 정복당한 荇人國은 삼척이라 했다.
이렇듯 고구려를 평양 중심의 반도국가로 보려는 데 대해, 이를 부인하면서 만주에서 성립된 국가로 보는 견해도 있었다. 이러한 견해는 李詹(1345∼1405)의 「高句麗」·權擥(1416∼1465)의 『應製詩註』부터 확인되며, 마침내 17세기 경 이후에는 대세를 장악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에서도 만주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견해가 나뉘어진다. 즉 초기 중심지인 卒本·國內城·丸都城 위치 비정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었다. 졸본에 대해서는 현도군 지역설(許穆의 『東事』)·압록강 서북설(洪汝河의 『東國通鑑提綱』)·興京설(한백겸의 『동국지리지』)·안정복의 『東史綱目』)·廢閭延郡 隔江之地설(丁若鏞의 『我邦彊域考』) 등이 있다. 또 국내성에 대해서는 義州설(朴祥의 『東國史略』·한백겸의 『동국지리지』,
理山府 강북의 兀刺山城설(안정복의 『동사강목』)·강계부 만포진 隔江之地설(한진서의 『海東繹史』·丁若鏞의 『我邦疆域考』) 등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러나 만주설 내부의 문제들은 해결되지 못한 채, 다음 시기로 이월된다.
셋째, 정통론에 입각하여 삼국 중 어느 국가를 정통국가로 보느냐에 대한 이견이 있었다 정통론은 洪汝河(1620∼1674)의 『東國通鑑提綱』에서 시작되는데, 여기서 홍여하는 신라를 정통으로 보았다. 이에 반해 李種徽(1731∼1786) 같은 학자는 단군-기자-마한의 정통이 고구려로 이어진다고 했다. 그러나 안정복의 『동사강목』·홍만종(1643∼1725)의 『東國歷代總目』에서는 삼국시대를 정통이 없는 無統의 시기로 보았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고대사 관련 저술이 몇 종류 있었지만, 사료의 절대량이 늘어난 것은 아니었다. 즉 이들 사서는 기존 사료를 토대로 한 것이며, 새로운 사료의 개발이 거의 없었다. 그 결과 고구려사의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기왕의 그것과 크게 다른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고구려사를 새롭게 이해하려는 시도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우선 韓致奫(1765∼1814)은 『海東繹史』에서는 중국 사료의 적극적 이용을 통해 사료의 한계를 극복해보려 했으며, 나아가 고구려의 기원을 周나라 초기로 올려보고 있다. 또 李種徽(1731∼1786)는 동명왕과 대적한 송양왕을 神明王이라 하고 그 무덤을 祥原郡 王塚에 비정했는데, 그 근거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추측하자면 민간전승을 사료로 도입한 것이 아닌가 한다.
또 고구려를 군사 강국으로 문화국가임을 부각시키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이종휘가 『동사』에서 「高句麗藝文志」·「高句麗律曆志」·「高句麗天文志」·「高句麗刑法志」 등을 둔 것은 이러한 사실을 반영한다.
이렇듯 조선시대에는 고구려사 인식이 일치된 것은 아니었지만, 모든 고대사 사서들이 고구려사를 취급했으며, 나아가 그것이 한국사의 일부임에 대해 추호도 의심함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이종휘의 경우는 고구려를 한국사의 중심[主族]에 놓았고, 이것이 후대 민족사학에 미친 영향은 상당한 것이었다.
맺 음 말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의 사료들은 한결같이 고구려를 한국사의 일부로 취급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사의 主族으로까지 보았다. 오늘날 한국학계의 고구려사 인식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할 때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권이며, 고구려사는 중국사의 일부라는 중국학계의 견해는 韓國史書 및 한국학계의 고구려 인식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견의 제시는 학문의 발전을 위해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논거 제시가 충분하지 않다면, 주장이 설득력을 가질 수 없음은 물론, 그 底意까지 의심받지 않을 수 없다. 예컨대 고구려는 殷商族의 국가라는 주장도 그 중 하나가 아닌가 한다.
고구려=은상족설은 고구려가 부여에서 기원했다는 한국사서의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설의 중요한 근거로 고구려의 종교와 건국신화가 제시되고 있다. 먼저 종교 방면에서는 고구려가 靈星을 숭배했는데, 영성은 은상족이 숭배하던 별이므로, 고구려는 은상족이란 논리이다. 또 신화 방면에서는 주몽신화에 보이는 卵生설화요소·棄兒신화요소 등은 殷의 契·周의 后稷신화의 아류라는 것이다.
다행히 영성에 대한 주장은 중국 자체에서 비판된 바 있지만, 신화 방면에서는 아직 별다른 비판이 없는 것 같다. 이를 위해서는 별도의 글이 필요하겠지만, 여기서는 다만 신화를 보는 시각의 문제를 지적하는데 그치겠다.
고구려의 건국신화에는 類利가 기둥 밑에 감추어둔 검을 찾아서 아버지 주몽을 찾아가는 내용이 있다. 그런데 이와 흡사한 내용이 중국의 『搜神記』 등에 보이는 干將·莫邪설화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고구려의 유리 전승은 중국의 干將·莫邪설화의 영향 내지 전파로 단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유사한 전승이 『플루타크 영웅전』에서도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스 아테네의 건설자 Theseus신화가 그것으로, 그는 돌 밑에 숨겨진 칼과 샌달을 찾아내어 아버지 Aegeus를 만났다는 것이다. 나는 신화와 비슷하다. 뿐만 아니라 난생신화나 기아신화도 세계적인 분포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중국에서 찾아볼 수 있는 요소가 고구려에 보인다고 해서, 곧 중국의 영향으로 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물론 신화를 통해 문화의 전파나 영향관계를 파악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중국과의 단순 비교가 아닌 세계를 염두에 둔 폭넓은 시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 신화나 종교를 비롯한 문화 방면의 연구에서는 중국이 비록 정치적으로는 하나의 單一體일지 몰라도, 문화적으로도 과연 단일한 것인가라는 점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여지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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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北方民族史에서 본 高句麗의 正體性 -鮮卑, 契丹, 柔然을 중심으로- / 姜 仙(淑明女大) (0) | 2019.07.29 |
| 한국의 硏究史를 통해서 본 高句麗 正體性 문제/ 朴 性 鳳(慶北大) (0) | 2019.07.29 |
| 祭儀를 通해서 본 高句麗의 正體性 /박 승 범(단국대) (0) | 2019.07.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