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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三國史記』러시아어 번역본과 고구려 정체성/ 박 미하일 N.모스크바대학교 공훈교수/한국학국제센터 소장


 金富軾(김부식, 1075-1151)을 비롯한 사관(史官)들에 의해 1145년에 편찬된 『三國史記(삼국사기)』는 한국 문화의 현존 역사 기록물 중에서 가장 오래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사상(韓國史上)에서도 탁월한 작품으로 인정되고 있다. 『三國史記』에는 구체적 사건과 관련된 史實(사실)에 대한 照明(조명)이 정통적인 유교 이념의 입장에서 평가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三國史記』는 한국 초기사(初期史) 연구에 있어 마치 고대 루시 역사인 네스또르([年代記])나 고대 중국과 변방 국사에 있어 중국 역사학의 아버지 격인 사마천의 『史記』와 대등한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한국에서의 역사 편찬은 『三國史記』 등장 훨씬 이전인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시대에 이미 시작되었다. 『三國史記』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4 세기 말엽에 고구려 『유기 (留記)』와  백제의 『서기(書記)』에서 최초의  연대기가 편찬되었었고, 신라에서는 545 년에 국사(國史) 편찬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  뒤를 이어 고구려에서 『留記』를 바탕으로 『新集』(600년)이라는 명칭하에 『약사(略史)』가 마련되었으며, 백제에서『백제본기』『백제신찬(百濟新撰)』과 같은 역사서가 있었으나, 이들 모두는 『三國史記』가 편찬할 당시에는 이미 보존되어 있지 않았다. 『三國史記』의 저자 김부식이 7세기 백제와 고구려를 패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한 신라에서 만들어진 역사작품을 주로 활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연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김부식이 주로 폭넓게 활용한 신라측 주요 사료는 『삼한고기](三韓古記』 『해동고기(海東古記)』 『신라고사(新羅古事)』 김대문 저작 『고승전(高僧傳)』 『화랑세기(花郞世紀』 『계림잡전](鷄林雜傳』,그리고 최치원의 저작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 『최치원문집(崔致遠文集)』이다. 김부식은 신라 저작 자료를 중국 王朝史(왕조사)와 그 외 중국 저자들의 작품에서 전하는 내용과 대조했다. 이규보 (李奎報 13세기)가 전하는 바에 비추어 볼 때, 김부식이 『三國史記』를 저술하기 전에 이른바 『구삼국사](舊三國史)』가  존재했는데, 원문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 작품에 가해진 삭감과 개작의 성격을 알 수 없다. 김부식의 『三國史記』 최종판에서는 전형적인 중국 왕조사의 표준을 받아들여 다음과 같은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즉,「本紀」 「年表」 「雜志」 「列傳」 등 전체 50 권 가운데서 12 권 (1-12)은 「신라본기」, 10 권(13-22)은 「고구려본기」. 6권(23-28)은 「백제본기」, 3권(29-31)은 「연표」, 9권(32-40)은 「잡지」, 10권(41-50)은 「열전」으로 이루어져 있다.
『三國史記』의 러시아 번역본은 다음 3부로 즉 1부에「신라본기」(1-12)  2부에 「고구려본기」와 「백제본기」 「연표」(13-31권), 3부에 「잡지」와 「열전」(32-50)을 싣기로 구상되었다. 이 구상을 실현한다는 것은 절대로 쉬운 작업이 아니었으며, 주 번역자이자 러시아어판 창안자인 필자는 거의 한 평생을 이 작업을 위해 바쳤다. 러시아 번역본의 1권은 1959년에 출간되었으나, 1980년대 초반에 마무리 된 2권 원고는 출판에 따른 재정적 곤란으로 거의 15년간 설합속에서 잠을 자다가 마침내 한국국제교류재단(Korea Foundation)의 재정 후원을 받게 되면서 [삼국사기] 러시아어 번역본 2권이 출간되었고, 다음 삼권 준비와 출판될 수 있게 되었다. 3권은 2002년에 출간되었다.   
『三國史記』 러시아어 번역본에 따른 오랜 작업은 소련과 러시아에 있어서의 한국학과 동양학발전의 한 현상으로 간주할 수 있다. 첫째,『三國史記』러시아어 번역본은 유럽어 중의 하나인 러시아어로 번역됨으로써 외국어로의 유일한 번역본이 되었다. 둘째 한국 학자들이 수행한 원문의 역사, 진위에 대한 연구와 현대 한국어로 된 『三國史記』번역 작업(이병도 교수가 그 창시자임), 그리고 현재까지 실제로 북한과 남한에서 같이 수행한 작업들은 『三國史記』러시아 번역본의 주석을 다는데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셋째, 애초에 [동양인민 문헌작품](동양학 문헌 출판사)이라는 대규모 시리즈물의 하나로 제1호 [삼국사기] 1권 初刊(초간)은 극동 여러 국가들의 유사한 역사서의 출간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1972년부터 중국 연대기의 아버지 격인 사마천의 「史記」의 러시아어 번역본의 출판이 착수되었고, 최근 10년간에는 고대 일본의 역사서인 『고지끼(古事記)』와 『일본서기』의 러시아어 번역본이 출간되었다. 마침내 거의 1천년간 한국사의 기본사료인 『三國史記』러시아어 번역과 출간 작업은 한국학 젊은 세대에게 초기 한국사 연구에 대한 관심을 북돋아주었을 뿐 아니라 이와 더불어 이 문제를 다루는 일정한 연구학과 형성에도 기여했다. 『三國史記』 1, 2권의 번역, 주해, 연구를 필자 단독으로 수행했지만 3권의 번역과 출간은 내 동료와 후학이 공동으로 비교적 단기간에 수행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三國史記』번역에 과거 참여한 바 있는꼰쩨비치 L.R. 박사, 뜨로쩨비치 A.F. 박사와 함께 3권 번역 작업에 처음으로 내 제자들 -역사학 독또르 (대박사) 자릴가시노바 R.Sh., 역사학 독또르 볼꼬브 S.V. 역사학 깐디다뜨 (Ph.D.) 찌호노프 V.M.과 역사학 깐디다뜨 (Ph.D.) 솔로비요프 A.V.이 참여했다.
三國史記(삼국사기) 러시아어 번역은 처음부터 러시아 한국학계에서 한국사의 가장 중요한 학문적인 문제를 풀어나가는 일과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아직 일본 식민지 시대, 특히 30년대 초부터 조선의 진보적인 역사가들(사회경제학파)은 한국사를 마르크스의 사회-경제 체제 이론에 기초한 세계사의 보편적 발전법칙 속에서 해명하려는 입장을 추구했다.
1933년 일본 도오쿄(東京)에서 백남운의 저서가 출간되었는데, 저자는 그 저서에서 보편적인 역사 발전법칙에 조건 지워진 독자적인 역사 경로를 거쳤으며, 원시공동체 씨족제도의 가장 초기 단계이며, 이 초기단계는 세 호전적인 국가(고구려 백제 신라)의 계급사회로 교체되었고,『三國史記』는 노예가 사회 생산노동의 기본적인 부담을 지는 노예제 시대였다」고 강조했다. 백남운의 견해에 따르면, 씨족 국가 시기의 노예는 부족의 집단소유였지만 삼국시대에 들어서서 사적 노예 소유로 바뀜으로써 사회 경제체제의 토대가 되었고, 이러한 노예 소유제 觀點(관점)은 1945년 조선 해방 이후 초기 수년간에도 일반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북한의 한길언, 이응수, 도유호와 그 밖의 역사가들은 백남운의 사상을 支持(지지)했다. 하지만 북한 학문연구가 점차로 발전됨에 따라 三國時期 경제제도의 성격에 대한 백남운의 견해가 올바른지에 대해 의심하는 여러 역사가들이 등장했다. 가장 근거 있는 論駁(논박)은 『역사과학』지에 잇따라 실린 김광진의 논문을 통해 제시되었다. 김광진은 원시공산제가 해체된 후, 곧바로 봉건사회로 이행함으로써 노예제가 형성될 만한 조건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았다. 김광진의 견해는 적지 않은 북한 역사가들의 지지를 얻었으며, 따라서 북한 과학아카데미 역사연구소가 주관한 학술토론(1956년 10월말 11월초) 기간에 북한 역사가 가운데 삼국의 노예제 성격 개념 옹호자(백남운 도유호 임건상 이능식 등)와 봉건제 개념 옹호자(김광진 전석담 노종환 김세익 등) 그리고 또한 한국 내 초기 삼국의 본질을 다르게 파악하는 학자들이 각각 나타났다. 『三國史記』러시아어 번역작업은 우리로 하여금 위와 같은 학술 논쟁 속으로 끌어들였다.
『新羅本紀』 연구를 통해 우리는 기원전 1 세기 이전에 삼국이 발생한 것처럼 주장하는 옛 한국 사가들의 관점을 비판적으로 再考(재고)할 수 있었다. 우리의 見解(견해)로는, 만일 고구려와 백제에서 국가제도 형성이 서기 4세기 중반에 마무리되었다면, 신라에서 이 과정은 5 세기와 6세기 초까지 지속되어 6 세기 전반기 내내 다양하게 중앙 집권화한 국가기구가 형성되었으며, 이 국가는 한반도 남동부를 지배하고 나아가 나머지 두 나라 (고구려와 백제)와 전체 영토에 대한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투쟁에 돌입했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사회 경제제도를 둘러싼 논쟁에서 우리는 삼국이 노예제 사회였다고 보는 역사가들의 論據(논거)를 그리고 무엇보다도 백남운 학설 창시자들의 견해를 객관적으로 檢討(검토)하려고 노력했다.
백남운은 씨족국가인 진한시기 (노예들이 공동체 집단소유로서 생산에 2차적인 역할을 했던 시기)에도 아직껏 노예 존속을 확인하며, 호전적인 국가들의 다음 단계에서 노예제가 경제적인 면에서 확고히 자리 잡았다고 여겼다. 우리가 보기엔, 백남운은 삼국의 경제제도를 연구하면서, 비단 노예제 뿐 아니라 다른 사회경제 우클라드(구조)도 총체적인 경제관계 내에 존재했음에도, 단지 노예제 우클라드를 찾아내고 제시하는 데만 모든 노력을 기울인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바로 이 테제는 사실에 근거한 설득력 있는 증거를 요구함에도, 백남운의 집중적인 관심을 보인 노예제 우클라드는 생산관계 체제에서 지배적인 우클라드화 하였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마치 신라에 노예제 토대가 존재한 것을 입증하는 논거들 가운데서 백남운은 『三國史記』에서 신라의 전쟁 기간 중 전쟁포로를 사로잡았다는 내용을 인용했다. 그럼에도, 『三國史記』어디에도 전쟁포로의 이후 운명(즉, 이들이 노예로 활용되었는지)에 대해 전해지는 바가 없다. 노예제 존속과 백남운이 예로 든 기근 시 아동 매매나 이웃 국가 출신 귀화민 수용사실에 대한 내용도 입증할 수가 없다. 노예가 왕실과 관청의 토지, 賜田(사전)과 食邑(식읍)으로 下賜(하사)된 토지에서 농사일에 광범위하게 활용되었다는 백남운의 주장 또한 1차 史料(사료)로 뒤받침 되지 않고 있다. 관수공업 -비단과 모직, 장식품과 무기-에서 노예의 노동력의 광범위한 활용 선언도 구체적 사료로 입증되지 않았다. 백남운이 예로 들고 있는 『新唐書』에  나오는 구절 "新羅宰相家不絶祿 奴?三千人 甲兵 牛馬猪稱之 牧畜 海中之山 須食乃射"(신라재상의 집에 하사품이 끊이질 않는다.  3천 젊은 노예들, 갑병, 소, 말, 돼지는 그에게 권위를 만들어낸다. 가축들은 바다 가운데 섬에 있는 산에서 풀을 뜯고 식사를 위해 고기가 필요할 때 활을 쏘아 이 가축들을 잡는다)라고 한 것을 신라 지배계급의 다수 노예 소유가 존재했음에 대한 유일하게 사실일 듯한 증거로 제시했다. 바로 『新唐書(신당서)』의 이 구절이야말로 백남운이 사회생산 관계의 기초로서 노예제라는 전면적인 결론을 내리는 근거로서 기여했다. 그럼에도 이 유일한 인용조차 비난의 여지가 없다고 할 수 없다. 왜냐 하면 다음 단어 사용의 정확성에 있어 일정한 의심을 그 안에서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즉 奴?(젊은 노예들)이라는 단어를 甲兵(갑병)-갑옷 입은 병사-이라는 단어 앞에 사용했다면 「젊은 노예들이 신라 재상의 다수의 從者(종자 수행원)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을지) 아무래도 이는 甲兵(갑병)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 奴?(노동)이라는 단어는 弩幢(노당)이라는 다른 단어의 誤記(오기)이거나 줄임 말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弩幢(노당)은 幢(기, 깃발)의 범주에 속하는 군대의 명칭(삼국사기 제40권 관직 기술 참조할 것이 여기에는 모든 군대가 나열되어 있다)을 의미하는데, 여기서 幢(당)은 돌을 날리는 무기병인 노당 (弩幢), 성채 함락을 위해 사다리를 타고 위로 공격하는 병사인 雲梯幢 (운제당), 돌격부대 병사인 衝幢(충당)과 투석병인 石投幢(석투당)이 각각 포함된 부대에 대한 通稱(통칭)으로 사용되었다. 이런 내용을 고려하여, 『新唐書』의 인용구를 다음과 같이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즉, "新羅宰相家不絶祿 弩幢三千人 甲兵 牛馬猪稱之 牧畜 海中之山 須食乃射"(신라재상의 집에 하사품이 끊이질 않는다 (즉 관직은 세습되어 대대로 이어진다). 弩幢(노당) 출신의 3천인 甲兵(갑병)과 또한 소  말 돼지와 같은 가축은 그에게 권위를 만들어낸다. 가축들은 바다 가운데 섬에 있는 산에서 풀을 뜯고...).
백남운의 신라사회에서 노예노동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테제에만 관심을 제기하지만, 우리는 선행 공동체의 집단소유와 연관된 토지의 국가소유가 존재했으며, 또한 토지의 국가소유 하에서 국유지를 경작하며 국가로부터 착취를 당한 농민들이 농업에서 막대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백남운의 주장이 지닌 진실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백남운의 이런 확신은 신라와 다른 초기 국가들에서 노예제 생산방식 우세라는 주 테제와 矛盾(모순)되지 않을 수 없다. 삼국시기 노예제의 존속 테제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즉, 국가 토지소유와 자유농민 개개인에 대한 국가 착취에 기초한 생산방식을 노예제로 간주할 수 없다. 우리의 연구에 따르면, 신라(고구려와 백제와 마찬가지로)의 국토 확장은 (봉건적인 성격을 본질적으로 내포한 국가 토지소유의 성립과정이며, 이는 종속적인 농민착취가 바로 국가 토지소유의 실현형태이기 때문이다).인근 영토를 복속시키는 과정에서, 그 국가의 주나 구로 편입된 새로 병합된 토지의 국가소유가 확립되었을 뿐만 아니라, 물론 어느 정도 노예노동 적용이 배제되지 않는 다양한 대규모 토지 소유 형태들(田莊 食邑 등)이 발생했다. 그럼에도 국가 토지소유 하에서 조세 의무를 지닌 농민의 착취가 가장 중요한 국가 토지소유의 실현형태였다. 신라의 예를 통해, 국가 토지 소유제도의 확립과 더불어 두 가지 전자본주의적(봉건주의적) 지대(地代)형태 -생산물 지대와 부역 지대-가 출현했다. 생산물 지대는 국가 내의 지배계급이 착복하는 租(조)와 調(조) 및 庸(용) 세 형태로 존재했다. 농민부역(庸)은 성채, 관개시설, 궁전 등을 건축하는데 폭넓게 활용되었으나, 생산 활동 자체에 있어서는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다.
국가권력의 근본기능은 지배계급이 직접생산자의 잉여생산물을 지대세 형태로 획득을 보장하는데 있었다. 이에 따라 국가는 농민에게 농업종사를 강요하는 勸農(권농) 정책을 실시했다. 특권 평민 노예로 사회계층 구분은 한 반도의 봉건주의 발생과 수립시기에 특징적으로 나타난 계급관계를 반영한다.
『三國史記』연구와 번역이 가져온 주요 결과는 한국 초기국가들의 봉건주의적 제관계의 발생과 수립의 주요 특징들에 대해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 과정의 본질은 새로 나타난 국가들간의 침략전쟁이 진행되면서 이웃 공동체 주민을 服屬(복속)시키고 이 공동체 토지를 피지배민으로부터 공물(貢物 지대 세) 수납을 보장해 주는 승자의 전체 국가소유로(주나 구, 군현의 형태로) 전환했다는 데 있다. 국가 토지 소유제도의 틀 속에서 대토지소유(급여와 분여지 형태로)가 점차 성립되었는데, 이는 조금 늦게 (신라의 삼국통일 후) 계속 확대됨에 따라 중앙집권화 된 국가의 기초를 뒤흔들고 통일신라의 봉건적 분열을 야기하는 요인이 되었다.
『三國史記』사실자료에 기초해 내린 이런 결론들의 진실성 여부는 사료로서 이 책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이는 바로 『三國史記』의  번역과 더불어 이 책이 한국사학사의 발전에  있어 차지하는 위치, 특히 근현대의 한국사학사에서 이 책에 대한 평가를 반드시 연구해야 만했던 마땅한 이유가 된다..
『三國史記』는 12세기 중반 고려의 유교적인 지배귀족의 정치 및 이념을 반영하는 역사 저작으로 그 뒤를 이은(불교나 다른) 역사학에서 매우 부적절한 평가를 받았다. 이에 따라 『三國史記』는 진정한 의미를 드러내는 계속적인 연구를 아직도 필요로 한다.
『三國史記』는 역사가 신채호 (1880-1936)로부터 아주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신채호는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한국독립 투쟁시기 민족사학의 대표자였다. 신채호의 견해에 따르면, 『三國史記』는 灰色的(회색적)이며 비독립적인 저작으로 事大思想(사대사상)에 철저히 耽溺(탐닉)된 저자는 한국사를 다만 중국 왕조사에서 「東夷傳(동의전)」의 주해로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즉, 김부식은 단군에서 출발한 역사적 승계노선, 그리고 화랑을 전례적인 종교로 각각 왜곡했으며, 유교적 규범과 선전과 관련된 사건들을 극찬하고, 사대주의 사상에 모순되며 고려의 자유정신을 표현하는 것은 무엇이든 역사에서 지워버렸으며, 따라서 『三國史記』는 문화사로서도, 정치사로서도 그 어떤 가치도 전혀 지니지 않는다] 하였지만 현대 한국 역사가들 (고병익, 이기백, 이우성, 천관우 등)은 김부식에 대한 보다 차분하고 신중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고병익의 연구에서 매우 오랜 (거의 천년에 달하는) 시기의 한국사에 관한 기본 사료로서『三國史記』가 지닌 커다란 의미가 드러났다. 중세는 물론 근대 저자들이 저마다 펼친 비판적인 평가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고병익은 『三國史記』저자의 유교이념과 사대주의 신봉이 저작에서 역사 서슬상의 성격 자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즉, 그 역사 서술은 높은 수준의 객관성과 공정성을 보인다. 내가 보기에, 『三國史記』원문은 전체적으로 이런 결론을 확인해 준다.
고구려 정체를 해명하는데는 고구려인의 종족적 (인종적) 기원에 대한 문제인데 고구려족은 옛날부터 한족(漢族)과 다른 예맥족 계통의 동의족(東夷) 하나였다는 연구 결론을 고 李玉 교수님 『高句麗 民族 刑成과 社會』란 ("교보문고", 1984) 저서에 잘 실려 있음을 소개하면서 동의감을 표하는 바이다.
또 아주 귀중하고 복잡한 문제는 고구려 국가 성격과 그 형성 시기에 대한 것이다. 『三國史記』에는 기원전 37년부터 그 나라가 패망한 668년까지 고구려 (중국 사서에는 고려) 국가가 존재한 것처럼 기록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왕국이 걸어온 길과 그 나라의 성격이 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데 대해서는 강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고구려는 정치적 조직체로서 기원1세기에 중국 사서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때에 한나라는 고구려 영주에게 왕의 칭호를 주기도 하고 다시 빼앗기도 했다. 왕의 칭호가 발생한 것으로 보아 고구려가 그때에 진실한 국가 체제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점도 있다.
『三國史記』는 고구려사 정체를 확연하게 나타내는데 중요한 사료로 되고 있다. 그 저자 김부식은 자기 시대의 역사적 제한성을 지니고 있었던 역사가로서 역사에 대한 개념과 분석에 들어가 우리의 역사관과는 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역사를 왜곡하거나 없는 사실을 꺼집어 넣은 것은 없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왜냐하면 김부식의 원측은 역사를 옳게 전해야만 그것이 사람들 행동의 모범이 될 있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三國史記』는 삼국의 역사를 서술하면서 각 나라의 최고(最古) (시초)사를 신화나 전설로 대신했기 때문에 그 것을 진실한 역사로 보기는 어렵다. 동명왕(주몽), 온조왕, 박혁거세 등 시조는 다 역사적 인물이 아니고 신화적 인격으로 봐야 할 것이다. 고구려사에서 나오는 첫 역사 인물은 궁왕(宮王, 『三國史記』에는 태조대왕, 太祖大王)이었기 때문에 그 때부터 고구려사가 기록된 사료에 의존하기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왕이나 그와 비슷한 군주의 칭호가 발생하였다 해서 그 사회(나라)에서 이미 국가 제도가 성립되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이러한 칭호는 다 중국에서 수여 받은 것이고 고구려의 사회 정치 발전의 결과를 반영한 것이라고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고구려 발전의 특징은 항상 중국제국들의 군사적 강압하에서 진행된 것이다. 그래서 군대의 공고화하는 그 나라의 필수적 의무가 되였다. 그러나 외부의 침략을 잘 격퇴하기 위해서는 그 사회의 내부적 단결이 필요했기 때문에 고구려 사회에서는 계급 분화 과정은 서서히 진행되였고 원시 부족 사회의 유습과 기관은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三國志 東夷傳』을 보면 3세기 전반기에도 고구려에는 군사 민주주의 시대의 주요기관이던 민중대회(동맹, 東盟)가 나라의 중요 문제를 결의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계급 국가의 불가결의 관료 기구와 기타 정치사상 제도도 점차적으로 수립되여서 그 국가 제도 완성의 역사적 과정은 4세기 후반까지  계속되었다는 것은 『三國史記』고구려 본기에서 볼 수 있다.
5-6세기의 고구려는 강대국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신흥 중국제국 (수, 당)들은 그 것을 허용하지 않기 위하여 대전쟁을 오랫동안 벌여서 고구려를 멸망 시켜서 그 나라는 삼국통일의 사명을 실행하지 못하게 했다.
어떤 역사가들 의견과는 달리 김부식은 유교적 사대주의 사상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 것을 위하여 역사를 왜곡한 바는 보이지 않는다. 이를 논거할 한 가지 예로는 고구려 본기에 실린 고구려의 수나라에 반항한 역사를 참조할 수있다 (『三國史記』, 러문 번역 본, 3권, 1995, 페이지 102-107).
이러하여 고구려의 영웅적 항쟁사는 민족 유산에서 가장 진귀한 보물로 영원히 민족 정신을 고취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