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성 재 43)* *
<국문초록>
본고는 金萬重이 南海 謫所에서 『三國志演義』를 비롯한 통속소설
에서 독자에게 감동을 주는 힘이 문학이라고 하였고, 『東坡志林』에
서는 통속소설을 짓는 까닭이라고 언급하였다. 이러한 배경이 그가 蘇
東坡를 同一化樣相이라는 점에서 모종의 연속성을 갖는다는 전제 하에
『서포만필』 소재 일화를 통해 그의 소설 성립의 배경에 대한 전후사
정을 살펴본 것이다.
『西浦漫筆』은 김만중이 남해적소에서 저술한 에세이 모음집이다.
* https://doi.org/10.14381/NMH.2016.52.11.30.
** 경상대학교 국어국문학과(고전문학) 박사과정. carp126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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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2 -
『서포만필』은 서포소설의 컨텍스트를 파악하는 측면에서나, 텍스트
와 컨텍스트 사이의 상호연관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신빙할 만한
일차적인 자료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서포만필』 탐구는 서포소설의
해석 시각을 새롭게 마련하는 데에도 중요한 참조사항이 되리라 생각
한다.
필자가 원전을 독파해본 결과, 서포가 남해적소에서 저술한 유배문
학이 소동파가 海南島에서 남긴 유배문학과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
으며, 일정부분 차이점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할 수 있었다. 이는
『서포만필』 분석을 거쳐 김만중이 소동파를 동일화한 양상을 통하여
서포소설 성립배경 과정을 일화 관련 기사를 분석하였다.
분석결과 김만중은 『서포만필』 하권에서 소동파 관련 일화 기사를
통하여 漢詩 창작만을 고집하던 종전의 양식에서 탈피하여, 소설 창작
의 효용론을 주장하였다. 그러한 사유의 특징이 결국 남해적소에서 서
포소설 창작의 모태가 되었음을 추론했다.
【주제어】 소동파, 김만중, 『西浦漫筆』, 『東坡志林』, 『삼국지연의』, 소설효
용론, 통속소설, 逸話.
西浦小說 성립의 배경 연구 •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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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들어가는 말
서포 김만중의 문학은 한국문학사에서 그만한 가치와 위상으로 국내
외 학자에 의하여 중시ᆞ연구되어 왔다. 그만큼 서포의 문학사적 비중
은 크고 그에 관한 연구는 매우 중요하다. 이에 따라 서포와 그의 문학
에 대한 연구는 많은 성과물이 축적되어 있다. 그의 소설 두 작품은
서포의 문학을 대변할 뿐만 아니라, 민족문학・고전소설을 대표하는
세계적 수준과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이에 국내외 학자들이 서포소설
작품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런 연구 작업이 소기의 성과를 얻기 위해서는 서포소설에
대한 이제까지의 선행연구들이 취했던 거시적인 입장에서의 접근과는
달리하여 남해 적소에서 작가가 직접 기록한 평론집 『서포만필』을
〈차 례〉
Ⅰ. 들어가는 말
Ⅱ. 『太夫人行狀拾遺錄』과 소동파 同一視 내용
Ⅲ. 金萬重, 蘇東坡 경도와 그 일체감 표현
1. 金萬重이 소동파를 흠모한 배경에 대하여
2. 『西浦漫筆』 소재 蘇東坡 관련 逸話
3. 詩話를 통해 본 소동파 同一化樣相
Ⅳ.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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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로 하여 본격적으로 다룰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할 때, 비로소
가능해지리라 본다. 이제 그 연구방향과 방법론을 새롭게 조정할 필요
성이 절실해질 따름이다.
서포가 남해 적소에서 썼다는 『서포만필』 하권에 담긴 문학세계와
서포가 소동파를 흠모하여 그 일체감이 소설화하게 된 전변ᆞ양상과
그 의미를 고찰하고자 한다.
소동파는 고통스런 유배생활에서도 절망으로 마치지 않고 그 고통을
문학으로 승화시키어 불후의 명작들을 남겼다. 또한 그는 정치적인 파
란에 의해 최남단 해남도로 유배되어, 고도에서 생활하면서 문학작품
을 창작하여 역경 속에서도 진지한 인생태도로 고매한 사상으로 ‘환경
이 곤궁할수록 더욱 훌륭한 작품을 창작’해낼 수 있었다.
필자가 『서포만필』 원전을 독파해본 결과, 서포가 남해적소에서
저술한 유배문학이 소동파가 해남도에서 남긴 유배문학과 깊은 연관성
을 지니고 있으며, 일정부분 김만중이 소동파를 동일화한 양상44)을
간파할 수 있다.45)
그간 서포와 서포문학에 관한 논의는 적층을 이루어 오면서, 시각과
관점에 따라 양립하기 어려울 정도의 해석 편차를 드러내기에 이르렀
다. 이러한 문제점은 최근에 발표된 논문46)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44) 동일화한 양상이란 한 인물을 대상으로 설정하여 그 인물의 행적, 문학, 위인 등
을 스승으로 삼아 배우고 닮고자 하는 것을 의미한다.
45) 박성재(2015), 『김만중 소설과 남해 용문사』 참조.
46) 신재홍, 「김만중의 유배생활과 우울증, 그리고 『구운몽』 창작」, 한국고소설
학회, 제112차, 2016.(프린트판. pp.1~2.) “작품(『九雲夢』) 자체의 분석에 앞
서 고려해야 할 것은 작품의 창작 동기와 배경이다. 김만중 작가론이나 『구운
몽』 작품론에서 주목할 점은 김만중이 평안도 선천의 유배지에서 『구운몽』을
지었다는 사실이다. 가벼운 벌로 변방에 왔다가 얼마 후 중앙으로 복귀하는 유배
가 아니라 자기가 속한 정파의 몰락과 가족사의 불행을 동반하여 어떠한 희망도
찾기 힘든 유배라는 점이 『구운몽』의 창작 배경을 이룬다.”라고 기술하였다.
이어지는 논거를 보면, “그런데 극한의 절망 속에서 지어진 소설 『구운몽』은
오히려 여유롭고 유머가 넘치며 모든 인물이 조화를 이루는 세계를 펼쳐 보인다.
창작 배경과 작품 세계 사이의 이와 같은 모순 관계가 『구운몽』을 이해하는 중
요한 지점이 된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논의를 좀 더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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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작품 해석의 편차를 줄이기 위해서는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
한 정합적인 기준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해석의 정당성
은 일차적으로 텍스트와 컨텍스트47)의 정확한 파악과 텍스트와 컨텍
스트 사이의 상호연관성에 관한 바른 이해로부터 출발한다. 따라서
『서포만필』의 탐구는 서포소설의 정확한 해석 시각을 마련하는 데에
도 중요한 참조사항이 되리라 생각한다.
우선 텍스트를 『서포만필』로 정하고 면밀히 검토하여 핵심적 실마
리를 설정하고 그것을 몇 가지로 분류하여 분석하려 한다. 그리하여
서포가 남해 적소에서 소설을 창작할 수 있었던 몇 가지 일화와 그
일화에 관통하는 질서의 핵심과 그 핵심 가운데 소동파를 흠모하여
일체감을 표현했던 근거는 무엇이며, 또 서포소설의 성립 배경과 저작
시기를 변증하는데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를 규명하려 한다.
본고에서는 서포소설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남해와 『구운몽』의
창작 배경과 성립에 대해 그 실체와 의미는 무엇인가48)를 밝혀보고자
완하기 위해서는 김만중이 남해 적소에서 蘇東坡를 흠모하여 同㊀化한 樣相과
『서포만필』 하권에 담긴 詩ㆍ逸話 그리고 『三國志演義』를 비롯한 『東坡志
林』에서 통속소설의 효용론을 주장했던 根據를 서포문학의 연구과제로 설정해
야 할 것으로 판단한다.
47)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의미범주에 대하여 다양한 견해들이 제출되어 있으나, 근
래 ‘문학지식의 교육’과 관련하여 가장 명쾌하게 내린 경우를 유수열의 논문
[「문학지식의 교육적 구도」, 『국어교육학연구』 25, 국어교육학회, 2006.]
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는 텍스트 개념을 중심에 두고 지식의 산출 영역을 기준
으로/텍스트 지식[본문 자체에 대한 앎을 뜻한다. 작품의 일부나 전체를 원문대
로 혹은 약간 변형된 수준으로 되고 있는 경우와 어려운 단어의 뜻이나 고전물의
어석을 알고 있는 경우를 가르킨다]/ 콘텍스트 지식[작품의 창작, 연행, 전승 등
작품의 존재 방식이나 문학적 관습, 작가와 독자 등 작품의 향유에 참여한 주체,
창작동기와 효용 등에 대한 지식을 비롯한 문학사적 사실에 관련된 지식]/ 메타
텍스트 지식[작품의 내재적 요소를 설명할 때 동원되는 전문적인 용어의 개념
등에 대한 지식]으로 나누고 있다. 모든 경우에 일률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으나,
고전시가의 분석에 일관성을 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분야의 연구와 교육에 도
움 되는 바가 크다.(조규익, 「텍스트 地平의 확대」, 한어문교육 제22집,
pp.13~14.) 이 분류를 바탕으로 하면서, 편의에 따라 필자의 생각을 덧붙이고자
한다.
48) 본고는 필자가 최근의 연구사를 검토하여 논점의 추이를 개괄적으로 추적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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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이는 서포소설의 창작연대를 밝혀내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자료가 될 것이며, 또한 사상적 배경과 지정학적 배경을 규명해
줄 수 있는 중요한 단서49)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Ⅱ. 『太夫人行狀拾遺錄』과 소동파 同一視 내용
서포가 소동파를 흠모한 까닭은 자신의 사상이나 기질, 세상을 살아
가는 태도가 대체로 비슷했기 때문이다. 서포는 동파를 인생의 선배이
자 동반자, 존경하는 스승, 때로는 친구로 여겼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소동파의 인간됨, 그의 훌륭한 글은 그의 삶에서 비롯된다
고 인식하여, 윤부인은 자식 교육에 최선의 노력을 다했던 것이다.
여기서 서포가 소동파를 닮고자 했다는 문헌적 근거로 『서포만필』
서문과 행장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김만중의 종손 김춘택이 쓴 『서포만필』 서문에
선생(西浦)의 문장이 高雅하고 秀潔함은 천부적인 자질에서 나옴이요,
또 변화유전하는 태도가 廬陵과 眉山에 접근한 바 있음은 비단 그 운치 있
는 말씨가 古人의 경지를 따라갔고 今世를 초월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학
문이 깊고 또 큼이 있기 때문이다.50)
한 자료이다. 이하의 논의는 다음의 논문을 주로 참조하여 정리한 것이다.
金炳國(1988), 「九雲夢 著作時期 辨證」, 韓國學報, 第51輯, ㊀志社.
우쾌제(1996), 「서포 소설과 남해」, 애산학보 19集.
김만중 저, 심경호 역(2010), 『서포만필』, 문학동네.
李昌龍(1985), 「朝鮮朝 詩話에 投影된 蘇東坡」, 동방비교연구회, 『동방문비
교연구총서』 1권.
박성재(2015), 『김만중 소설과 남해 용문사』, 엠-애드.
49) 金戊祚(1976), 『西浦硏究』, 亞成出版社, pp.78~84.
薛盛璟(1976), 「九雲夢의 構造的 硏究(Ⅳ)」-空間的 背景과 南海의 口傳素材-,
陶南 趙潤濟博士 古稀紀念論叢, 螢雪出版社.
50) “先生之文, 高雅秀潔, 得之於天, 又善爲俯仰流轉之態度, 有近於廬陵眉山者, 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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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7 -
라고 기록하였다. 이어지는 글에서 선생은 “높은 수준의 문장과 아울
러 박학다식하시니 비록 古人보다 뛰어났다 하더라도 불가함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구양수와 소동파에 접근한 바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은 서포의 행적을 기술한 『태부인행장습유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서포는 소동파의 행적과 사상에서 자신과의 일치점을 발견하고 있
다. 이는 윤부인이 두 아들에 대해서는 소동파 형제처럼 문장과 학덕이
뛰어나기를 원했다고 하는 기록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또 김만중의 조카 竹泉 金鎭圭(1658~1716)는 그의 『태부인행장
습유록』에서는 윤부인이 구양수의 어머니가 절개를 지켜 아들을 가르
쳤던 일을 평소 즐겨 말하였다고 한 사실과 행장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행장이란 죽은 이의 살았을 때 행적을 적은 글, 그러니까 전기
에 속하는 글을 일컫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서포가문 행장이란 김서
포 가문 중에 죽은 이의 행적을 기록한 글이란 뜻이 되겠다.
그 중에서도 「貞敬夫人海平尹氏行狀」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서포
김만중이 돌아가신 어머니의 언행을 기록한 역어체 추념문이고, 「태
부인행장습유록」은 서포의 둘째 조카 김진규가 그 할머니인 윤씨의
언행을 다시 말하면 삼촌인 서포가 쓴 행장에서 빠뜨린 부분을 보유한
것이다. 그러기에 서포가 이 피맺힌 행장을 쓴 것은 죽기 2년 전인
(1690) 8月, 귀양살이 땅 남해에서였다. 이 해는 그의 어머니가 73세
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것이다.
김만중이 「尹氏夫人行狀」을 집필한 동기가 바로 윤부인의 언행과
인품을 길이 후손에게 전하여 후손으로 하여금 훌륭한 할머니의 본을
받아 광산 김씨가의 며느리로서 또는 타문의 종부로서 생활할 때에
항상 윤부인의 언행을 마음에 새겨 부도를 다하라는데 그 목적이 있다
不特其韻語之躡古人跨今世而己, 而乃其學之淹博, 又有大焉.”(金萬重, 『서포만
필』, 일지사, 1987,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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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볼 수 있다.
윤부인이 남편도 없이 어려운 살림을 꾸려나가며 아들 형제를 훌륭
하게 키웠는데, 윤부인은 이 때 자신의 롤모델로 구양수의 모친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拾遺錄』에서는 윤부인이 구양수의 어머니가
절개를 지켜 아들을 가르쳤던 일과 소동파 형제의 인간됨과 학문에
탄식하여 평소 즐겨 말하였다고 한 사실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송백헌 교수도
貞惠翁主의 슬하에서 법도에 어긋남이 없이 嚴한 婦道를 닦았고, 西浦家
門으로 출가 후에는 더더욱 婦德 婦言 婦容 婦功을 두루 갖춘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의 人品은 후대 뭇 여성들의 龜鑑이 되었던 것이다.51)
라고 평했으니 실로 윤부인은 언행과 효성과 글씨에도 능필이었다.
그 예문에 보면,
선고[鎭龜] 어려서 고로오 밋글시 닉히시 조비 획을 가쳐
겨시더니 만년의 소려 닐너 「데아비 글시 부인 회시
되 필법이 능히 져 다」 오시더라 조비 샹 구양공 모의 졀을 직희여
들 친 일을 깃거 일라시고 종파형데 어질믈 탄식야
「 두 아들이 잇시니 그 아다오미 고인과 믈 원노라」 시더
라.(『太夫人行狀拾遺錄』)
라고 하였으니 윤부인의 손자 鎭龜에게 瑞石이 이르기를 「네 아비
글시 부인 화시듸 필법이 능히 져다」하였으니 윤부인의 필체
와 필법이 상당한 경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윤부인은 송대
구양수의 모부인 절행을 효칙으로 삼고 부도를 다 했으며 또 두 아들에
대해서는 소동파 형제처럼 문장과 학덕이 뛰어나기를 원했다고 하니
윤부인의 절행과 자식에의 기대를 알 수 있었다.
51) 宋百憲, 「西浦家 行狀文學硏究」, 語文學 第34輯 참고.
西浦小說 성립의 배경 연구 •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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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들 행장문학은 작자가 西浦, 竹泉, 北軒 등 서포문학의 작자
내지 그와 관련 깊은 당대인물 들이다. 그러니 행장내용과 인물들은
필경 서포문학연구에 어떤 방향을 제시해주는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근거를 바탕으로 김만중의 일생을 통하여 본 소동파에 대한
자기 동일시 내용을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삶에 대한 자기 동일시에서 서포는 소동파의 유배생활에 대하
여 남에게 자신의 절개를 내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과 맞지
않아서 직언한 것이며, 그의 삶에 대한 태도는 세속의 형식과 권위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이 처한 적소의 상황에 따라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이라고 표명하고 있다. 서포는 비록 세 번째 적소에서는 정치적으
로 실의하였을 때 살아서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을 하였으나, 소동파와
자신이 처한 시대적 환경이 다르므로 자신은 소동파처럼 퇴은할 수
없는 처지임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서포는 자신의 불평한 마음을
전원 속에서 자기 성품대로 자유롭게 지내는 소동파의 시와 행적을
통하여 정신적 위안을 삼았을 것이다.
둘째, 남해 적소에서 서포는 자신과 유사한 처지를 겪은 소동파가
직접 밭을 경작하면서 자연의 조화가 하나가 되려는 ‘無爲自然’의 태도
를 본받아 자신도 그러하고자 노력하였고, “꿈속을 헤매다 몽롱한 가운
데 깨어보니 확실히 알겠네. 이는 바로 소동파가 나의 전생이다.”52)라
고 쓰면서 자신을 연명과 동일시 여겼을 것이다.
셋째, 김만중은 남해 적소에서도 소식의 시와 글을 가까이 했음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있다. 그 자료는 서포가 남해 유배지에서 썼다는
‘落木’ 시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넷째, 서포는 생의 마지막 남해 적소에서 다시는 살아서 나갈 수 없다
52) “오직 연명이, 전생이라네.”(只淵明, 是前生) (「江城子」(夢中了了醉中醒))라
고 하였는데 은퇴의 원망이 그의 이 시기의 정신적 자주가 되었다.(薛瑞生, 『東
坡詞編年箋證』, 권2, p.328; 鄒同慶・王宗堂, 『蘇軾詞編年校注』, p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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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처지에서 소동파를 흠모했을 것이다. 특히 만년으로 접어드는 시기
에 이르러 더욱 절실하게 도연명과 소동파의 인생을 흠모하게 되었고,
도연명의 모든 시에 화작을 하였으며, “나는 연명이요, 연명은 나다.(我
卽淵明 淵明卽我也)”라고 하며 자신을 도연명과 동일시 여겼다고 할
수 있다.
다섯째, 서포는 남해 적소에서 몽매간에도 잊을 수 없는 어머니를
그리워하면서 몸부림치는 모습이 훤하다. 그래서 서포는 사친시 ‘集中
應缺海南詩’를 읊었다. 여기에서 왜 남해시라고 하지 않고 해남시라고
했을까?
이는 소동파가 남쪽으로 유배[南遷]가는 지명이 해남이었기 때문에
해남시로 표기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가원은 「구운몽평고」에서
“思親詩에서 ‘思親語’에 대해서는 絶筆이었음을 말함이다.”라고 하면
서, “‘思親語’는 시에서만 국한될 것이 아니고, 소설이나 또는 爾餘의
작품에도 적용될 것이다.”라고 언급하였다.
이 시의 결구 ‘集中應缺海南詩’는 서포의 어떤 결심을 집약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바로 「海南詩」 이것은 어머니에게 바치는 『구운
몽』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어머니를 그리워하다 견딜 수 없는
심회에서 『구운몽』은 출발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1992년에 『서포연보』가 발표되면서 『구운몽』은 선천작
으로 굳어지는 것으로 되어 있다. 우리가 『서포연보』를 잘 분석해
보면 꼭 그렇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본고에서 『서포만필』과 『서포집』을 통해서 본 김만중이 소동파
를 동일시했던 양상의 일화ᆞ시화를 항목별로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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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金萬重, 蘇東坡 경도와 그 일체감 표현
1. 金萬重이 소동파를 흠모한 배경에 대하여
먼저 김만중의 문학론에 대해 논의하려면 그의 문학론이 갖는 역사
적・문화적 측면을 먼저 검토해야 한다. 지금까지 주된 논의의 흐름을
보면, 조동일은 김만중의 사상이 지닌 개방적・상대주의적 관점을 중
시하고 그 연장선에서 그의 문학론에 접근하고 있으며, 우응순은 김만
중이 주자학에 대한 비판의 논거로 불교를 채택했으며, 그 결과 주자학
에 고착되지 않고 사유의 다양성, 상대성을 바탕으로 개성적 문학론을
펼칠 수 있었다고 했다.53) 윤호진은 김만중의 문학론을 “김만중의 국
문문학옹호론은 우리의 언어와 운율 등에 대한 깊은 인식을 통해 우리
문학의 진정한 가치를 인정한 것”54)이라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그러나 이미 김선기의 지적도 있었지만,55) 자국어 시가 옹호론을
중심으로 삼는 김만중의 문학론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제대로 규명
되지 못했다. 이는 일차적으로 수필 식으로 써 내려간 저술 방식과 그의
발언 내용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가 소략하다는 이유가 한 몫을 하였을
것이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중국문학과의 관련 문제에 대한 관심
의 결여56)에서 기인된다고 언급한 바 있다.
53) 禹應順, 「金萬重의 文學態度와 文學論의 性格」, 丁奎福 외, 『金萬重文學硏
究』, 國學資料院, 1993, p.24.
54) 윤호진(1982), 「김만중 문학론 연구」, 한국학대학원 석사논문, p.49.
55) “서포의 우리말 시가 옹호론은 지명도에 비해 그것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제
대로 풀어 밝혔다고 볼 수 없다. 그 가장 큰 요인은 서포의 발언 내용이 지나치게
소략하다는 데 있다.”(김선기, 「西浦 金萬重의 우리말 시가 옹호론」,(史在東
편, 『西浦文學의 새로운 탐구』, 중앙인문사, 2000, pp.60~61.)
56) 金元中, 「중국문학에 대한 서포 김만중의 자주적 감식안」, 史在東 편, 『西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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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기는 “김만중이 중국 문학 작품에 대한 제가의 견해에 대해 나름
대로 논의를 편 것은 그가 제시하고자 하는 문학론의 대전제에 대한
보조적인 책략으로 삼았을 개연성이 크다. 그 당시 한문학의 모태로
삼았던 중국 문학에 일차적으로 의지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며, 중국의
빼어난 작품으로부터 논의의 실마리를 찾아내려는 노력이 선행되지 않
으면 안 되는 현실을 그는 깊이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서포라는 작가가 본래의 자리에 돌아가는 데는 『서포만필』이 가장
유력한 통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서포만필』은 지극히 사적이고
내밀한 성찰의 양식이라는 점과 그리고 민감한 촉수를 내밀어 자기가
남해 적소에서 숨 쉬고 있었던 당대의 인간과 사회를 진단하는 점에서
『서포만필』은 서포가 서 있었던 자리와 그 주제적인 관심 축을 이해
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 줄 수 있다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본고에서는 특별히 소동파의 인물론에 초점을 두고, 서포가 적소에
서 소설을 창작할 수 있게 했던 동인이 무엇이었는지 『서포만필』에
서 그 면모를 살피기로 한다.
서포는 처음에 남해도 유배지가 더 이상 갈 길이 없는 막다른 곳에
있는 절망적인 격절 상황이라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이 섬을 벗어나고 싶어 했다. 그렇지만 어찌할 수 없이 생활환경, 경제
적 문제, 그리고 교우 등이 모두 열악한 환경조건에서 살아나가야 했다.
남해 적소에서 3년 동안의 유배생활은 고뇌의 주체가 이제는 극복의
주체가 되어야 했다. 이에 발상을 전환하였는데, 이러한 전환은 유배의
고통을 초탈심경으로 승화시키게 하였을 것이다. 김만중은 남해 적소
에서 성리학의 본질적 문제에 대해 고민하다보니 성리학이 가지고 있
는 사상체계와 범주로서는 현실세계에서 해명할 수 없는 영역을 발견
하였다. 그 결과 거시적 차원의 초월적 측면은 순천 영취산인 印成 스님
과의 교유로 불교소설문학을 통해 제시하였다.
金萬重의 文學과 思想 그 文化史的 位相』, 중앙인문사, 2005, pp.4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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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소동파는 말년 해남도 유배시절 열악한 생활환경에서 삶과
죽음의 문제에 직면했을 경우 발상을 어떻게 전환했을까? 그 당시의
정황과 ‘朝雲’의 일화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소동파는 ‘문자옥’ 사건으로, 사형 판결로 오인한 그는 절명시를 쓴
뒤 죽음을 기다렸다. 죽음 앞에 선 최초의 중대한 좌절이었다. 삶과
죽음의 문제를 직면했던 동파는 그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세상의 일은 한 바탕 꿈이니, 인생은 얼마나 처량하던가.”
감옥에 구금된 지 136일, 가을에 들어갔다가 이듬해 봄, 출옥되었다.
죽음에서 생환한 그는 점차 ‘無常’과 ‘空幻’의 뜻을 되새기며 생각을
불교 쪽으로 기울였다.
특히, 소동파가 적소에서 ‘朝雲’을 기념하여 ‘六如亭’을 지었다. 이는
김만중이 『구운몽』을 창작하면서 大乘佛敎의 대표적인 경전 중의
하나인 『금강경』이 직접적인 소재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일화라고 할 수 있다. 그 일화를 살피기로 한다.
소동파는 원풍3년(1080) 정월 초하루, 동파는 황주로 좌천되었다.
친구의 도움으로 한 뙤기 버려진 땅을 일구어 개간하고 씨를 뿌렸다.
이 땅을 동파(東坡 동쪽 언덕)라 이름을 짓고 스스로 동파거사라고
자호했다. 그는 경제적으로 쪼들렸으나 모처럼 ‘朝雲’과 함께 유배지에
서 한가한 나날을 보냈다. 朝雲은 소동파의 부인이다. 항주에서 몸종으
로 사들였는데 당시 그녀의 나이 겨우 12살이었다. 그는 蘇부인의 시종
에서 첩으로 승격한 총명하고 아름다운 그녀는 귀양지마다 소동파를
동행했다. 동파는 만년의 귀양생활에 조운이 함께 동반해 준 데 대한
감사와 우의를 시로써 찬미했다. 시에서는 “…내일은 단오절, 그대에게
난꽃으로 꽃다발을 만들어 달아 주고, 내 멋진 시 한수 구상하리. 훌륭
한 시 한 수 찾아내어 그대 치마 주름 위에 쓰리”라던 지아비였다.
그러나 朝雲은 혜주에 도착한 다음 말라리아에 걸려 34세의 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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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로 죽고 말았다. 풍호의 산기슭에다 매장하고 그녀가 죽은 뒤 다시
는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한다. 소동파는 그녀를 기념하여 ‘六如
亭’을 지었다. 여기서 ‘六如’란 『금강경』의 ‘일체의 유위법은 꿈과 같
고, 허깨비 같고, 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번갯불 같다’는
것이다. 그는 朝雲을 기념하는 詞에서 ‘높은 情은 새벽 구름의 空함을
따라 갔노라’고 적고 있다.
서포가 유배지에서 저술한 『구운몽』은 儒家의 세계를 긍정으로
묘사하면서도 결국은 佛家에 충실한 입장을 취했다. 특히 두 사람은
유배지에서 스스로 ‘居士’라고 自號했다. 서포는 그의 문집인 『서포
집』을 중심으로 그 일상적 생활과 명분 있는 처신을 살펴본다면, 그는
물론 유가적 범주를 벗어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남해적소에서 집필한
『서포만필』이나 그의 소설을 주축으로 그의 내면생활과 종교사상을
추구해 본다면, 그는 당대의 거사로 정통적 불학자, 선학에 능통한 선
객, 희대의 불교문학자 내지 포교법사로서 그 위치를 확보57)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는 ‘西浦居士’를 자처하면서 『維摩經』에 심취하여
유마거사의 경지를 지향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는 『서포만필』을
통하여 불교에 대한 전문적인 안목을 보이고, 나아가 노골적으로 불교
우위론과 불법옹호론까지 펼쳤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서포는 불교소설 『구운몽』에서는 2처 6첩과 『금강경』을
소재로 했다. 소동파는 첩 ‘朝雲’을 기념하기 위해 ‘六如亭’을 지으면서
『금강경』 4句偈를 표출했다.
이러한 의식의 한 단면은 『서포만필』에서 유학자에게 불교가 기여
할 수 있다는 언급에서 확인할 수 있다.
朱子는 東坡의 竹石圖를 칭찬하여 바람과 우박을 능가하고 서리와 눈보
라를 이겨냈다는 말은 가히 장하다 하겠다. 韓昌黎가 주공ᆞ공자에게서 터
57) 史在東(2005), 「서포 김만중의 문학세계」, 『西浦 金萬重의 文學과 思想 그
文化史的 位相』, 중앙인문사,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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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한 바가 어찌 동파만 같지 못하겠는가마는 潮州에서의 애처로운 호소가
크게 사람들을 불만 시킨 것은, 생각건대 불교에 대한 학식이 없었기 때문
이다.(『서포만필』)
서포는 남해 적소에서 “朱子는 東坡의 竹石圖58)를 칭찬하여 바람과
우박을 능가하고 서리와 눈보라를 이겨냈다는 말이 가히 장하다.”라고
소동파를 칭찬하였다. 심지어는 “유학자에게 불교에 대한 학식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혹평하였다.
당시 소동파는 東晉과 宋의 교체기 은일시인 도연명을 흠모하는 하
나의 대상인물을 설정하여 그와 닮고자 노력하였다. 이는 ‘동일화양상’
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소동파는 인생의 중반기 이후 줄곧, 전원에
돌아가 자연과 융화되며 술과 벗 삼아 사는 도연명의 인품과 시풍을
흠모하였다. 해남도에서 소동파의 도연명에의 동일화는 和陶詩(도연
명시의 운에 맞추어 지은 시)로 구체화되어, 도연명에의 연모를 극대화
시키고 있다. 이 외에 「歸去來集字十首」 등 도처에서 이러한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소동파는 도연명과 더불어 柳宗元을 숭배하고 배우는 자세도 표현되
어 있다. 그는 “몸에 『도연명집』을 가지고 다니며 울적함을 풀었으니,
바로 이에 힘입은 것이다(隨行有陶淵明集, 陶瀉伊鬱, 正賴此耳)”(「答
程全父推官」)라고 하였다. 후에 또 해남도에서 黎子雲에게서 『柳宗
元文集』을 빌렸다.(許凱, 『彦周詩話』) 그는 이 두 권의 책을 「남방
에 옮겨 가서의 두 벗(南遷二友)로 삼고 있다.(「與程全父書」)59)
그런데, 김만중도 적소에서 소동파처럼 시를 쓰면서 그 시의 말미에
서 ‘남방에 옮겨 가서의 두 벗(南遷二友)’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증
58) 주희의 『회암집』 권84에 수록된 「진광택 집안 소장의 동파 죽석도에 대한
발문(跋陳光澤家藏東坡竹石」에 나온다. “동파 노인의 빼어나고 늦게 시드는 지
조와 강건하고 흔들리지 않는 자태는 竹君石友와 거의 비슷하다. 100대 이후에
이 그림을 보는 사람도 여전히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東坡老人, 英秀後凋之
操, 堅確不移之姿, 竹君石友庶幾似之, 百世之下觀此畵者, 尙可想見也).”
59) 王水照, 『蘇軾』,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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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로서는 ‘謫裏相隨無二友’란 시 끝에 “東坡號陶韋集爲南遷二友, 소동
파는 『陶淵明集』과 『韋蘇州集』을 두 벗이라 일컬었다.”라고 註하
였다는 점이다. 이는 서포 김만중이 남해 적소에서 기록한 ‘南遷’과 소
동파가 해남적소에서 서술한 ‘南遷’은 동일화양상의 일면이라 할 수
있다.
김만중의 『서포만필』은 남해 유배지에서 완성한 평론집이다. 특히
하권은 남해 유배지에서 집필했다. 『서포만필』에는 대개 15개소 정
도 출현하는데 蘇東坡의 인품, 성격, 학문, 생활 전반에 관계되는 것이
대부분이고, 상대적으로 시인이나 문장가에 대한 내용은 아주 적고 직
접 작품에 대한 언급은 한 번밖에 출현하지 않았다.60)
『동파지림』은 소동파가 적거시절에 손이 가는대로 쓴 것으로 원래
는 저작이 아니었는데, 후인들이 그것을 집록하여 ‘手澤’이라고 이름
붙였다. 『동파지림』에서 드러나는 소동파의 사회에 대한 관심은 정
치적 포부가 꺾여 우울함과 분노에 시달리는 관료의 모습으로 나타나
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자신의 생활과 인생을 관찰하고 평론하며
기록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후세에 전하고자 하는 문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소동파의 적거 시기는 그를 상당히 위축시키기도 하였지만 문학가로
서 그의 개성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던 계기로 작용하였다. 황주시기
의 그의 인생관은 ‘人生如夢’의 네 글자로 개괄되며 그의 많은 詩나
詞에서 이러한 情調가 발견되는데, 그의 이러한 생각은 그의 인생 후반
기까지 지속되었다.
중국 북송의 소동파가 東晉과 宋의 교체기의 저명한 은일시인인 도
연명을 인생과 문학을 흠모하여 자신의 모범으로 삼았듯이, 서포는 소
동파의 행적과 사상에서 자신과의 일치점을 발견하고 있다. 서포는 남
해에 유배 온 후 더욱 동파에게 관심을 가지고 경도하게 된다.
60) 李昌龍(1985), 「朝鮮朝 詩話에 投影된 蘇東坡」, 동방비교연구회, 『동방문학
비교연구총서』 1권, pp.689~69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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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동파 詩文이 갖고 있는 독특한 像에 대해서, 서포는 그의 『서포만
필』 하권에서,
東坡의 詩文은 마치 가을 조수가 일어나 모든 냇물이 거꾸로 흐르고 사나
운 바람이 일어나 온갖 구멍이 성난 듯 부르짖는 것 같고, 또 淮陰侯가 하루
아침 나절도 다 들이지 않고 超 나라 20萬 大軍을 쳐부순 것과 같다.61)
라고 하여 그 호방하고 광달한 풍격을 비유를 써서 표현하고 있다.
소동파는 일찍이 맹자의 문장을 배운 것이 사실이나 南豊은 순경의 문장
을 배웠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요컨대 모두 재주가 비슷하여 그렇게
된 것이다.62)
이는 서포가 평소 시나 문장의 한문학 작품에서 한글 소설로 변용ᆞ
전이 과정의 정도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서포는 『서포만필』 하권에서 소동파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많은
지면을 할애하였으나 詩나 문장에 관계되는 이야기보다는 인품이나
학문, 성격과 생활 등에 대한 내용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서포가 남해 적소에서 소동파를 동일시했던 양상의 일단이라고
할 수 있으며, 『拾遺錄』에서는 윤부인이 구양수의 어머니가 절개를
지켜 아들을 가르쳤던 일과 소동파 형제의 인간됨과 학문에 탄식하여
61) "東坡如秋潮生而百川倒流, 厲風作而萬竅怒號. 又如淮陰侯不崇朝而破趙二十萬
衆.”(『서포만필』, 같은 책, p.332.) 윤호진은 “창조적 수용이란 외래의 문화를
수용하여 자신의 것으로 새롭게 창출해 내는 형태이다. 말하자면, 기존의 문화유
산에 새로운 요소를 합성함으로써 다양한 문화를 창조해 가는 과정이다. 따라서
창조적 수용에 의해 이루어진 문학작품은 수용 작품의 전이과정과 변용정도를
확인할 수 있는 직접적인 자료로서, 중국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한국
한문학의 경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라 정의하고 있다.(尹浩鎭, 「韓國
漢文學의 東坡受容樣相」, 嶺南中國語文學會, 『中國語文學』, 제12집.)
62) "曾文似荀卿, 蘇文似孟子. 蓋荀文豐博有委致, 孟文簡直有鋒銳. 二子之於文, 亦
然. 坡固嘗學孟子, 而南豐不聞其學荀卿, 要之皆才相近耳"(金昌協, 『農巖集』권
34, 「雜識, 外篇」, 影印標點 韓國文集叢刊162, 민족문화추진회, 1996, p.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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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즐겨 말하였다고 한 사실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2. 『西浦漫筆』 소재 蘇東坡 관련 逸話
2.1. 서포소설 창작 동기에 대한 새로운 관점
逸話(ancedote, unpublished)는 세상에 알려져 있지 않은 이야기나
正傳에서 빠진 이야기이다. 일화는 그 내용이 대중의 추앙을 받던 역사
적 인물들의 언행을 이야기하므로 사실성을 지니며, 인물의 알려지지
않은 일을 요점만 전승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 묘사가 간단명료하다.
일화는 처음에는 도덕적인 것으로 출발하여 점차 오락적인 것으로 바
꾸어짐에 따라 진지하던 일화가 익살스런 일화로 바꾸어지는 경향도
생긴다.
『서포만필』 소재 일화 중 「洪純彦逸話」에 대한 고찰은 몇 차례
있었다. 그러나 『서포만필』 소재 소동파와 관련된 일화가 서포소설
로 전변ᆞ양상과 의미에 대한 고찰은 찾기가 어렵다. 이런 방면에 대한
고찰은 서포가 남해 유배지에서 자필로 직접 기록했다는 『서포만필』
이 지니고 있는 문학성과 사실성의 일면을 찾아내는 작업이 되리라
생각된다.
지금까지는 『구운몽』과 같은 뛰어난 작품이 유배지에서 어떤 소설
사적 전통에서 아니면 어떤 주요 요인을 기반으로 하여 창작될 수 있었
는가에 대한 기존 설명은 충분치 않다. 오히려 뛰어난 작가는 새로운
장르의 작품을 창작함으로써 소설사적 흐름을 선도한다는 말이 가장
유효한 설명이 되었거나, 기존의 연구 성과를 중언부언하며, 작자미상
의 새로운 자료 출현과 관련된 논의는 아직도 선명한 이해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였다. 이는 다소 엉뚱한 연구 결과를 낳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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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논의는 서포 김만중이 소설 창작과 관련된 새로운 연구 방향
이 설정될 필요가 있음을 뜻한다. 서포소설 창작과 관련 기왕의 논의들
이 뭔가 중요한 요인을 고려하지 못하였으며, 그것은 외부요인이 아니
라, 국내소설사 내부의 요인이 아닌가를 반성・고구해야 한다고 생각
된다. 물론 『구운몽』의 창작적 전통과 관련된 기왕의 연구들이 중국
소설과의 비교 연구를 전적으로 방기했던 것은 아니다. 다양한 측면에
서 연구 성과를 축적함으로써63) 이후 진행될 서포소설 연구의 밑거름
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기왕의 논의는 삽화나 모티프의 비교에 중점을
두고 있어 『구운몽』의 창작과 관련된 종합적 설명의 틀을 제시하진
못했다.
그러나 당시 김만중이 남해 적소 생활에서 저술했던 평론집 『서포
만필』은 서포소설과 어떤 관련성이 있는가를 새로운 시각에서 정치하
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본고에서는 먼저 김만중이 『서포만필』을 통해 본 소동파와 관련된
이항복 일화 측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김만중은 李恒福(1556~1618)의 시조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은 평
을 가했다.
63) 『구운몽』 관련 비교 문학적 연구는 이가원, 현창하, 김무조, 정규복, 전성운
등에 의해 이루어 졌다. 이가원은 『이견지(夷堅志)』, 『삼국지연의』의 반사곡
고사(盤蛇谷故事), 『유의전(柳毅傳)』의 용녀고사(龍女故事)를 비롯한 20여 편
의 중국소설을 제시하여 『구운몽』과의 관련성을 밝혔고, (이가원, 「『九雲夢
評攷』」, 『구운몽』, 덕기출판사, 1955.) 현창하는 『삼국지연의』, 『유의
전』, 『앵도청의』, 『남가태수전』, 『서유기』 등이 『구운몽』과 관련된다
고 했다.(현창하, 「『九雲夢硏究』」, 『현대문학』, 8권 5호, 1962.) 김무조는
『침중기』, 『사몽기(四夢記)』, 『앵도청의(櫻桃靑衣)』 등이 『구운몽』과
유사하다고 했다.(김무조, 『서포소설연구』, 형설출판사, 1974.) 정규복은 『구
운몽』과 중국소설의 관련성을 다각도로 고찰하여 비교 문학적 연구 성과를 종
합하는 한편, 새롭게 『서유기』의 이중구조(二重構造), 삼교혼합(三敎混合)에
불교주류사상(佛敎主流思想), 환생설화(還生說話), 승풍등공설화(乘風騰空說話)
와 『왕유전(王維傳)』 등이 관련됨을 밝혔다.(정규복, 『구운몽연구』, 고려대
출판부, 1987.) (전성운, 「『九雲夢』과 염정소설」, 『한・중 소설 대비의 지
평』, 보고사, 2005, pp.6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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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沙 李公이 北靑으로 유배될 때 鐵嶺을 지나면서 철령 宿雲詞를 지었다.
그 詞에, ‘孤臣寃淚를비삼아 띄웠다가, 님 계신 九重深處에 뿌려볼까 하노
라’라는 말을 하였다. 하루는 광해군이 후정에서 잔치를 벌이고 놀 때, 궁녀
가 이 詞를 노래 부르는 자가 있었다. 광해군이 「아주 새로운 소리인데, 어
디서 들었는가?」라고 물으니, 그 대답에 「서울에서 전하여 불려지는데
李某의 작이라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광해군은 그것을 다시 부르게 시키
어 듣고는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다. 시가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음이 이와
같았다. 광해군 같은 사람도 어찌 더불어 善政을 할 만하지 못하겠는가?
鄭錦南이 李公을 따라 북쪽으로 갔을 때, 이공의 謫中事를 아주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이 노인의 淮海와 같은 기상을 후인이 생각해볼 수 있을 듯하
다. 요즈음 듣건대 공의 자손들이 그것이 너무 豪放하여 儒者의 기상 같지
가 않다고 하며, 많이 刪改하였다고 한다. 또한 탄식할 일이다.64)
子瞻이 표주박을 지고 다니며 노래했던 일은 정녕 伊川이 배안에서 꼿꼿
하게 앉아 있었음과는 같지 않다. 그러나 符嶠輩로 하여금 이들을 따라 본
받게 한다면, 伊川은 갑자기 될 수 없겠지만, 어찌 또한 子瞻과 더불어 지냄
까지 놓치지 않겠는가?65)
김만중은 시의 호소력을 크게 신뢰한 사람이다. 실제로 宮娥가 당시
광해군 앞에서 시조를 노래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김만중 스스로도
숙종의 잘못을 직언으로 규탄하다가 선천과 남해로 유배되었으니, 이
항복의 시조는 김만중에게 더욱 절실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소동파
가 표주박을 지고 노래했다는 일’의 언급은 예사롭지 않다. 즉, “‘內翰의
옛날 부귀가 한바탕 춘몽이었습니다 그려’라고 했다. 동파가 그러하다
고 여겼다. 마을 사람들은 이 노파를 ‘春夢婆’라고 불렀다.”라고 했다.
64) 『서포만필』, 같은 책, pp.372~373. 白沙李公之竄北靑, 行過鐵嶺作鐵嶺宿雲
詞,有詞得; 孤臣宠淚作行雨,往漏九重宮闕. 之語. ㊀日光海主遊宴後庭, 宮娥有
唱是詞者. 主曰 ;大是新聲, 何 處得來? 對曰; 都下傳唱云, 是李某所作. 主使之復
歌, 悽然泣下. 時之能感人如此. 然若光海者, 亦豈不可與爲善哉? 鄭錦南從李公于
北, 記公譲中事甚悉,此老淮海之氣, 後人猶可想見也. 比聞公之子孫嫌其過於豪
放, 不似儒者氣象, 多有所刪改云, 亦可歎也.
65) 『서포만필』, 같은 책, pp.372~373. 子瞻之負瓢行歌, 固不如伊川之危坐舟中,
然使符嶠輩從而遷就之, 則伊川猝不可得, 豈不并與子瞻而失之乎?
西浦小說 성립의 배경 연구 •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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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대목은 김만중이 남해적소에서 소동파를 동일화한 양상의 일단
이라 하겠다.
『구운몽』은 그야말로 꿈이다. 정치적 목적이 수포로 돌아가자 서
포는 이제까지 자신이 꿈꾸어 오던 人生의 富貴榮華를 一場春夢으로
축약해 본 것이다. 이것은 한 인간의 일생을 살아오면서 생에 마지막
이 세상에 남기는 유서와 같은 것이다. 『구운몽』은 서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목적했던 모든 것이 이제는 소생할 길이 전혀 없다는 결정적
시기에 제작되었다. 이 시기가 바로 남해 囹圄때였다.
조동일은 서포가 소설이 필요하다는 자각을 하였고, 소설을 택하
지 않으면 안 되었던 사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파악하였다.
西浦는 『구운몽』과 『사씨남정기』같은 국문소설을 지었다. 歌詞
와 時調를 되풀이 하지 않고 소설을 택한 것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철의 시대는 가사와 시조가 중요한 의의를 가졌지만 자기의 시대에
는 소설이 필요하다는 데 대한 자각이 있었으므로 장르를 바꾸었을
것이다.66)
이와 같이 서포소설의 성립배경과 창작 시기, 동기를 고구하려면 남
해적소에서 집필했던 『서포만필』 일화나 『서포집』 소재 시화를
정치하게 연구하지 않으면 그 해답은 얻기 어렵다.
또한, 『동파전집』에 수록된 「동파선생연보」에 다음과 같은 흥미
로운 기록이 있다.
“趙德麟의 『侯鯖錄』을 보니, 거기에 이러한 일화가 있다. 동파 노인이
창화에 있을 적에 한 번은 큰 표주박을 메고 밭길을 걸으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노래 부른 것은 대개 초편(哨遍, 詞牌의 이름)이었다. 들밥을 인
일흔 먹은 노파가 말하기를, ‘內翰의 옛날 부귀가 한바탕 춘몽이었습니다
66) 趙東㊀(1979), 『韓國文學思想史試論』, 知識産業社,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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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려’라고 했다. 동파가 그러하다고 여겼다. 마을 사람들은 이 노파를 春夢
婆 라고 불렀다. 하루는 동파가 잔득 술을 먹고 홀로 걸어가면서 子雲 등 여
러 黎氏 들의 집들을 두루 돌아다녔는데, 이런 시를 지었다. ‘符林秀才의 풍
류를 어찌할 수 있으리? 발그런 얼굴은 다 없어지고 귀밑머리는 허옇게 변
했구나. 예전에는 동쪽 이웃 여인이 베틀의 북을 던지고 응하러 오느라 힘
들도록 하였는데, 이제는 단선(團扇, 둥근 부채)을 교환하려 했다가 春夢
婆만을 만났네.’ 이 날 老符秀才를 다시 보았더니, 이 춘몽파의 실상을 말했
다. 이 몇 가지 일들은 모두 선생인 원방에 유배 갔을 적의 일화이다.67)
위의 인용문은 필자의 최대 관심사라고 할 수 있는 ‘『서포만필』을
통해 본 김만중과 소동파’의 핵심 주제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기록은 김만중의 문집인 『서포집』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의 평론집 『서포만필』 하권에서도 소설 작품에 대해 공감
상황을 자세하게 서술한 경우는 찾을 수 없으나, 소동파를 동일시한
양상 가운데 이항복 일화를 통하여 표출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서포는 白沙의 단가가 광해군까지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동을 주었
다고 하여 시가의 감동력을 매우 주시하고 있다.68) 그리고 백사 후손들
은 백사의 호방한 기상이 녹아 사람을 감동시킨 시가를 유가적이지
못하다고 하여 많이 고친 일에 대해 통탄했다.
한편 南九萬의 『藥泉集』 권27에는 「白沙獻議手草跋」이라는 글
에서, 이항복의 「철령가」에 대해 언급했다.
몇 해 전에 나는 북쪽 함관령(咸關嶺)에 올랐는데 그곳은 선생이 廢母論
에 반대하는 의론을 바친 뒤에 유배 가다가 지나가신 곳이다. 북쪽 사람들
은 아직도 선생이 이 재를 넘을 때 슬픔을 나타낸 노래를 구전(口傳)했는
67) “按趙德麟侯鯖錄云: 東坡老人在昌化, 嘗負大瓢行歌田畝間, 所歌者蓋哨遍也, 饁
婦年七十云: ‘內翰昔日富貴, ㊀場春夢.’ 坡然之. 里人呼此媼爲春夢婆. 坡㊀日被
酒獨行, 遍至子雲諸黎之舍, 作詩云: ‘符老風流可奈何? 朱顔減盡鬢絲多. 投梭每因
東鄰女, 換扇惟逢春夢婆.’ 是日復見老符秀才, 言此春夢婆之實也.凡此數事, 皆先
生海外之逸事也.”(김만중 저, 심경호 역, 『서포만필』, 문학동네, 2010, p.608.)
68) 丁奎福(1982), 「金萬重論」, 『韓國文學作家論』, 형설출판사, p.33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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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지금에 이르러 들어보아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흐를 정도이다.
초나라 사람 굴원의 글에 ‘뜬구름에 말 부치기를 원한다’는 것과 표현은 같
으나 담긴 뜻은 더욱 간절하니, 이 노래가 삼강오륜을 더욱 든든하게 한 것
이 어찌 獻議보다 못하겠는가? 비록 그렇지만 가사가 우리말인지라 한문
으로 전하는 경우처럼 오래갈 수가 없다. (중략) 그래서 이 글과 함께 써서
士成 李時顯에게 주어 선생의 手草帖 말미에 붙이도록 한다.”69)
김만중은 남구만과 호형호제했던 막역한 사이였다. 두 사람은 남해
적소에서 용문사를 배경으로 한 시와 글을 남겼으며, 먼저 유배 왔던
남구만과 얼마든지 중국문화의 서적을 주고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남구만은 「철령가」에 대해 기술하면서 ‘굴원의 글’에서 “뜬구름
에 말 부치기를 원한다” 그리고 말미의 글에서 “이 詞는 표현 문자가
비록 소박하지만 말뜻은 참으로 선생에게서 나왔기에, 전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언급했다.
남구만도 ‘굴원의 글’에서 “뜬 구름에 부치기를 원한다”라고 언급한
것은, 김만중과 같은 심상에서 ‘굴원주의’ 쪽으로 기울이게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약천은 남해 용문사 대웅전에서 사람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남해의 특산물인 ‘柚子’를 읊으면서 자신의 마음을 의탁하기도 했다.
먼저 약천은 첫 번째 수에서 8월에 남해 유자를 먹고 임금과 굴원을
떠올렸으니, 이는 연군지정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즉 “숲 아래에서
소자처럼 먼저 먹음 부끄럽고(林下愧先蘇子食) 영 땅 가운데 屈平 스
승에게 멀리 견주노라(郢中遙擬屈平師)”라는 구절에서 소자는 소동파
를 가리킨다. 그 시를 읽도록 한다.
팔월에 유자를 먹으니 아직도 푸르므로 學生 河漳 朴殷輅에게 써서 보여
주다.
69) 이항복의 노래는 『약천집(藥泉集)』 1권의 「번방곡(翻方曲)」에도 실려 있
다. 「번방곡」은 정몽주의 시조 「단심가(丹心歌)」를 비롯하여 모두 11수의
노래를 한시로 번역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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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月南州秋事遲 팔월이라 남쪽 고을에 가을이 늦게 찾아오니
海山珍果尙靑皮 산해의 진귀한 과일 아직도 껍질이 푸르구나
還能簌簌噴香霧 역시 풍성하게 향기를 내뿜고
已看盈盈孕嫩肌 차곡차곡 연한 살이 가득히 찼다오
林下愧先蘇子食 숲 아래에서 소자처럼 먼저 먹음 부끄럽고
郢中遙擬屈平師 영 땅 가운데 굴평 스승에게 멀리 견주노라
因玆更欲求人物 이로 인하여 다시 인물을 구하려 하노니
誰是區生未學時 그 누가 區生이 아직 배우지 않을 때인고.
소동파의 「食柑詩」70)에 “한 쌍의 비단 보자기로 진귀한 물건 나누
어 주지 않았는데, 숲 아래에서 먼저 맛보니 쫓겨난 신하 부끄럽네.(一
雙羅帖未分珍, 林下先嘗怪逐臣)”라고 하였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남해 적소에서 남구만과 김만중이 ‘굴원주
의’관련 기사를 계속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설성경은 “김만중도 굴
원처럼 나라에서 추방된 귀양나그네이다”라고 파악하고 있다. 또 ‘굴원
주의’ 정신이 갖는 의미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굴원의 삶에서 알 수 있듯이 동아시아 문학사에서 굴원의 정신은 면면
한 애국정신으로 문학 속에서 살아있는 중요한 의식이다. 특히 조선 후기
의 정치와 문학의 역사에서 굴원의 정신은 억울하게 유배 받은 충신의 호
소라는 의미에서 거듭 주목 받았다. 여기서는 이것을 ‘굴원주의’라 명명하
기로 한다. 이 개념은 정치적 유배 속에 있었던 김만중이 어떤 정신 상황에
70)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 육적(陸績)이 여섯 살 때 원술(袁術)을 뵙고는 그가 주는
귤을 보고 품에 넣고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드린 고사(古事)와 소동파의 식감시
(食柑詩)에 “한 쌍의 비단 보자기로 진귀한 물건 나누어 주지 않았는데, 숲 아래
에서 먼저 맛보니 쫓겨난 신하 부끄럽네.(㊀雙羅帖未分珍, 林下先嘗怪逐臣)”라
고 한말, 그리고 양양(襄陽) 이형(李衡)이 가족 몰래 무릉(武陵) 용양주(龍陽洲)
에 귤나무 천 그루를 심어 놓고 아들에게 “나에게 나무하인[木奴] 천 명이 있으
니, 너의 의식(衣食)에 아무 걱정이 없다.”고 이른 고사에서 인용하여 유배문학
시편(詩篇)을 완성하였다. 또 『본초강목(本草綱目)』에서 “과일 중에 아름다운
것은 운몽(雲夢)의 유자가 있고, 귤은 바로 동정(洞庭)에서 생산되는 것을 으뜸
으로 친다.”하였으니, 이는 아마도 『구운몽』의 창작 배경과 관계가 있는 것으
로 생각된다. (거제시민뉴스: http//www.geojesiminnews co.kr), 2014.11.17.
고영화선생의 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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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구운몽을 창작하였는지 이해하는데 매우 유효하다고 생각된다.”71)
이러한 ‘굴원주의’ 정신의 사실적 논거는 『구운몽』의 창작시기를
확정 짓는 바로메타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서포만필』 하권에서 소동파 관련 일화와 기사를 집중적으
로 언급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 일화나 기사 내용이 점차적으로 심화
된다는 점, 김만중이 남해적소에서 소동파의 『동파지림』을 인용하면
서 소설 효용론을 주장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김만중
이 평론집인 『서포만필』 하권에서 李恒福을 언급하면서, 소동파 일
화와 관련된 기사를 기록했다는 사실은 서포가 소설을 배태할 수 있었
던 하나의 동인으로 작용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게다가 당시 정충신이
엮은 『백사북천일록』을 李恒福의 자손들이 개편하려 했으므로 서포
는 이 글을 지어 개작과 刪節의 잘못을 지적한 것이다.
위의 인용문은 『서포만필』 하권 164장 가운데 142장에 기록된
내용이다. 이러한 글의 기록순서와 내용들을 살펴보면, 김만중이 소동
파와 관련된 책은 거의 섭렵한 후에 그를 비평하여 평론한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논의는 서포소설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한 새로운
연구 방향과 방법론으로 보다 새로운 탐색 작업이라고 생각된다.
지금까지 김만중이 왜 사씨남정기를 지었는가에 대한 논의는 논자
를 막론하고 대부분 일치해 왔다. 즉 숙종이 본부인인 인현왕후 민씨를
폐위하고 장희빈을 왕후로 삼은 일을 비판하면서 그 잘못을 일깨우기
위해 지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씨남정기는 목적소설의 하나로 인
식되었다.
이런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된 까닭은 李圭景(1788-1856)의 오주
연문장전산고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기록 때문이었다.
71) 설성경(2002), 「서포문학의 초월적 세계」, 『남해관련 서포문학의 재조명』,
서포김만중선생기념사업회, pp.6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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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이와 같은데, 우리 동방의 사람 것이라면 (내가) 기량이 옅고 재주
가 짧아 여항에 유행하는 것들을 두루 살필 수 없었다. 다만 서포 김만중이
짓고, 다소 의의가 있는 구운몽과 북헌 김춘택이 지은 사씨남정기가 있
다. 속설에 따르면, 구운몽은 김만중이 유배 갔을 때 대부인의 근심을 덜
고자 하룻밤 만에 지었다 하고, 사씨남정기는 김춘택이 숙종이 인현왕후
민씨를 폐위했기 때문에 임금의 마음을 깨우치려고 지었다 한다.72)
이처럼 김만중73)이 숙종의 잘못을 깨우치기 위해 지어졌다는 기록
이 나온다. 그런데 몇몇 연구자들에 의해 김만중의 이런 목적성은 사리
에 맞지 않다는 점을 들어 의문을 제기했다.74)
그렇다면 문제는 이 소설의 창작 동기는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김만
중이 무료하여 여가를 보내고자 창작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유배를
와 정치적 위기에 처한 김만중이 그런 단순한 이유로 사씨남정기를
남해적소에서 창작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필자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구운몽 성립의 배경은 서포가 남해적
소에서 李恒福 일화를 기록하면서 소동파 일화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
이다. 즉 사씨남정기 내용에도 보면 사씨가 쫓겨나 떠돌다가 당도하
여 자살을 생각하던 장소가 ‘懷沙亭’, ‘굴원’이 바위를 안고 물로 뛰어든
곳으로 설정된 것도 이런 가정을 뒷받침한다.75)
이와 같은 일화의 관점이 서포소설 구성상 영향과 함께 창작동기
가 된다면, 김만중의 평론집 『서포만필』 소재 일화와 『서포집』에
실린 시화도 그 가운데 하나라고 지적할 수 있다.
72) 李圭景, 五洲衍文長箋散藁 詩文篇/論文類-小說 「小說辨證說」 : 如此小說
我東人則量淺才短 亦不能領略閭巷間流行者 只有九雲夢 西浦金萬重所撰 稍有意
義·南征記 北軒金春澤所著 世傳西浦竄荒時 爲大夫人銷愁 ㊀夜製之 北軒則爲肅
廟仁顯王后閔氏巽位 欲悟聖心而製者云.
73) 본문에서는 작자가 김만중이 아니라 북헌 김춘택으로 나오는데, 김춘택이 사
씨남정기를 국역했기 때문에 이런 오류가 생긴 듯하다.
74) 사씨남정기를 현대역한 류준경도 이 책의 해설에서 같은 의문을 제기하고 있
다. 사씨남정기(류준경 옮김, 문학동네, 한국고전문학전집 17, 2014,
pp.430-432.).
75) 사씨남정기 위의 책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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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통속소설의 효용론과 그 전변 양상
서포는 남해적소에서 『동파지림』을 인용하면서 통속소설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그것이 지어진 의의를 공개적으로 물은 최초의 인물
이라고 할 수 있다.
『東坡志林』76)에 이르기를, 「골목집에서 아이들이 천박하고 용렬하
여 그 집이 골치가 아프면, 돈을 주어 모여서 옛날이야기를 듣게 한다. 三國
의 일을 이야기할 때 劉玄德이 패한다는 말을 들으면, 아이들은 찡그리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曹操가 패한다고 하면, 기뻐서 즐겁다고 소리치기
도 한다.」라고 하였다.77)
위의 글은 소설과 역사의 차이에 대한 서포의 명확한 인식을 보여준
다. 그는 소설의 효용적 가치를 역사보다 우위에 두고 있다.
통속소설이라는 용어는 서포가 사용하기 전에 명나라의 소설가가
이름을 붙인 것이다. 또 그가, “철부지 아이들이라고 하더라도 삼국지
연의의 유비가 패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얼굴을 찡그리고 눈물을 흘리
며, 조조가 패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기뻐하며 쾌재를 부른다,”라고 서
술한 부분은 송나라 학자의 글을 인용한 것으로 서포의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에 이어서, “이것이 나관중의 연의소설에서 비롯되었는가?”
라고 묻고는, “지금 사람들을 모아놓고 진수의 삼국지나 사마광의 자
치통감을 강설해도 눈물을 흘린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통속소
설을 짓는 이유이다.”라고 한 것은 틀림없는 서포 자신의 말이다.
서포가 통속소설의 양식을 빌려서, 부녀자들의 남편과 지식인 엘리
트 남성들이 입신출세하는 이상적인 형상을 중국을 무대로 빌려 그리
76) 宋나라 蘇軾이 찬한 책으로 東坡手澤이라고도 한다. 宋 元祐, 紹聖 년간에 작
자가 친히 겪은 일이나, 명신들의 업적, 조정의 교화, 지리, 夢幻이나 幽怪, 神遷
伎術 등을 적고 있으며, 그밖에 작자 자신이 귀양살이에서 느끼는 고통과 힘든
생활을 서술하고 있다.
77) 서포만필, pp.385~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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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서, 동시에 그녀들이 마음의 편안을 위해 바랬던 불교에의 귀의심을
작품화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大谷森繁의 이런 통속소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변화는 서포소설 작품의 성립배경 이해에 새로운 관점
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검토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大谷森繁은 구운몽은 당대 사회를 관통하고 있던 남성문화로서의 유
교적 세계관과 여성문화로서의 불교적 세계관을 소설적으로 결합ᆞ승화
시킨 작품으로, 오락성을 주로 하고 거기에 교훈성을 가미하여 지어진 조
선왕조시대 최초의 통속소설이다.78)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위의 인용문은 구운몽 창작과 관련된 새로운 연구 방향이 설정될
필요성이 있음을 뜻한다. 특히 당시 중국소설과 구운몽은 어떤 관련
성이 있는가를 새로운 시각으로 따져볼 필요가 있다. 예컨대 구운몽
에 나타난 전쟁장면의 전개와 여타 사건 구성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볼
수 있으나 구체적인 대응양상을 찾기는 어렵다. 그러나 전쟁사건 서술
에서 구운몽의 盤蛇谷 이야기에는 삼국지연의의 제갈공명 남만정
벌 이야기 중 啞泉, 滅泉, 黑泉, 柔泉 이야기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여타의 八夫人結義兄弟 이야기도 삼국지연의의 桃園結義 장면을 습
용했다. 특히 구운몽의 제문은 삼국지연의의 제문을 활용하여 부
연한 것이다. 다만 숭배의 대상이 ‘天皇后土’에서 ‘南海觀音菩薩’로 변
용된 것은 구운몽의 불교적 주제와 관련하여 작자의 창의가 발휘된
것으로 여겨진다.
기타 서포의 삼국지 평설에서 거론되지 않았으나 형식면에서, ‘화설,
각설’ 등의 용어사용 및 回章分句 방식은 김만중 시기 이전의 소설들에
서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삼국지연의의 형식적 특성에서 영향을 받
은 것으로 보인다.
78) 오오타니 모리시게(大谷森繁)(1985), 朝鮮後期 小說讀者 硏究, 고려대학교민
족문화연구소, pp.422~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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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에서 살펴보았듯이, 김만중이 삼국지연의와 구운몽에
서 습용ᆞ변용하고 차용했다는 자료 내용은 서포만필 하권에서도
동파지림을 인용하면서, “이것이 통속소설을 짓는 까닭이다.”라고 언
급한 대목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3. 詩話를 통해 본 소동파 同一化樣相
서포가 남해 적소에서 문학작품으로 남긴 시와 소설 등에 대한 연구
가 어느 정도의 윤곽이 드러나기는 하다. 그러나 너무 소략하고 분명치
못한 점이 아직은 많은데 이러한 요인 중의 하나는 작자인 서포가 유배
지에서의 생활과 그가 남긴 한시를 번역하면서 작품의 전체를 보지
못하고 어느 한 문장에 갇혀있기 때문에 작품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는 데에 원인이 있다고 하겠다.
소동파 시는 상당수의 조선조 문인에게 관심과 애호의 대상이었다.
문인들은 소동파에 심취되었으며, 소동파와 같고자 하였다. 나아가 자
신들의 시에서 소동파 시를 창조적으로 수용하기도 했다.
조선조 문단의 사조로 보면 고려조의 전례에 이어 전기에는 여전히
소동파를 숭상하는 풍조가 이어졌고, 중기에는 杜甫를 위시한 唐詩를
숭상하였으며, 후기에는 다시 문학과 문화의 방면에서 소동파를 재조
명하는 열풍이 불었다. 조선 후기 소동파 열풍은 고려 중후기, 조선
초ᆞ중기에 걸쳐 맥맥히 흘러온 전통이 소동파를 중시하는 청대의 문
예사조와 접맥하여 일어난 새로운 문화현상이다.
긍정적 평가의 경우, 소동파 시가 “神의 경지”에 들어갔으며, 또 소동
파 시가 “詩로써 禪을 담론하여 禪法을 깨우쳤다.”고 하였다. 부정적
평가의 경우, 소동파 시에는 “典故 사용이 과다하며, 불교 용어를 많이
사용하여 새롭고 기이함에 힘썼으나 시격이 어떠한지는 모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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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절충적 평가의 경우, 소동파 시가 “기상이 광활하고 격조가
다채로워 두보의 법도를 체득하였으나 전고 인용이 너무 많아 지나치
게 화려한 단점이 있다.”고 하였다.79)
본고에서 『서포집』 소재 소동파와 연관하여 창작된 유배시를 중심
으로, 그 선행 연구를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재론하면서 서포가 남해
적소생활에서 소동파와 관련된 시가 서포의 삶과 시 세계에 미친 영향
의 한 단면을 구명해 보기로 한다.
서포 김만중이 『구운몽』을 창작할 기미를, 그가 남해 적소에서 썼
다는 『서포집』 소재 소동파 관련 시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그 첫 번째 시를 읽도록 한다.
落木
落木無邊下遠山 낙엽이 한도 없이 먼 산에서 떨어지는데
一年秋事已闌珊 한 해의 가을일도 시들어 가는 구나.
乾坤定向南溟盡 하늘과 땅은 남명을 향해 사라질 판이고
鴻鷹虛從北地還 기러기 떼는 하릴없이 북녘으로 돌아가네.
自笑新篇餘舊習 새로 지은 글에도 옛 버릇이 남아 절로 웃으니
不妨時菊映衰顔 마침 핀 국화에 늙은 얼굴을 드리운들 어떠리.
相隨案上眉山集 책상에 얹힌 眉山集80)을 서로 따르지만
嶺海風流可許攀 영해의 풍류를 따라잡을 수 있겠는가?81)
이러한 사실을 볼 때, 남해 유배시절에 썼다는 시 「落木」 중에서
“책상에 얹힌 眉山集을 서로 따르지만”에서 알 수 있듯이 서포는 자신
의 일상생활에서도 평소 흠모해 마지않던 소동파을 점점 닮아가고 있
음을 이 시에서 짐작할 수 있다.
79) 曺圭百, 「조선조 문인의 소동파시 수용과 평가」, 대동문화연구 제91집.
p.153.
80) 『西浦集』 詩, 임종욱 옮김, p.404. 여기서 眉山集은 송나라 때 문인 소식을 일
컫는 말로, 그가 사천 眉山 사람이기 때문에 이렇게 불린다. 미산집은 소식의 문
집을 말한다. 소식은 말년에 중국 남방의 絶島 海南島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81) 『西浦集』, 같은 책, 권4. 「落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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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서포가 유배라는 상황을 통하여 겪었던 그 당시의 남해 적소
생활사를 추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인생 만년 절해의 고도에서 유배생
활은 한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절박한 심적 상황에 이르게 하고
또 그러한 심경의 토로가 시와 소설로 형상화된다는 생각과 함께 작품
의 창작연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잣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위의 작품에서 알 수 있듯이 서포가 남해 유배시절에 썼다는
「落木」에서 그가 “책상에 얹힌 『미산집』을 서로 따르지만”을 표출
했다는 의미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두 번째 시를 읽도록 한다.
李統制忠烈祠 이통제 충렬사
在南海縣北露梁口 남해현 북쪽 노량 입구에
有尤齋先生所譔碑. 우재선생이 지은 비가 있다.
統制領戈舡 통제께서 과강을 지휘하시니
偏師鏖強敵 편사들도 굳센 적을 무찔렀지.
信義擾漢將 신의로운 자세는 중국의 장수를 동요시켰고
威聲慴關白 위세와 명성은 관백을 두렵게 했네.
妖氛已褰豁 요사스런 기운이 모습을 환하게 드러냈고
大星俄芒赤 대성은 어느새 흐릿하고 붉게 변했네.
共嗟諸葛忠 모주 제갈공명의 충성심을 감탄했지만
而無汾陽福 곽분양이 누렸던 복은 없었지.
功名古難居 공명의 위치는 참으로 머물기 어려우니
臣子甘殉國 신하는 나라 위해 죽는 일을 달게 여겼네.
蕩蕩露梁口 넓고 넓구나 노량의 입구여
風濤成霹靂 바람과 파도도 거센데 벼락마저 몰아치네.
魚龍畏簡書 어룡도 문서나 편지를 전하기 두려워하고
蛇鳥留陣磧 뱀과 새조차 머물면서 서덜에 진을 쳤네.
廟宇從民望 묘우는 백성들의 희망을 좇았고
香祝降毅魄 향축은 굳센 혼백에게 내렸지.
靈風翼兩旗 신령한 바람은 두 깃발을 펄럭이고
簫鼓喧阡陌 피리와 북소리는 논밭에서 떠들썩하네.
似聞鐵馬聲 철마의 내달리는 소리 들릴 듯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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往往陰雨夕 때때로 음우가 저녁 무렵에 내리네.
淸時澤畔纍 맑을 때에도 해안가에 갇혀 있었더니
日星礙叢棘 해와 별도 가시덤불에 막혀 있었지.
跬步阻趨蹌 느릿느릿 걷자니 추창을 막았고
九歌聲轉激 구가 소리는 울려 더욱 격렬하구나.
片石星斗文 조각돌에는 북두성 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想見苔蘇蝕 이끼나 차조기가 파먹은 것인가 여겼다네.
拳然生楚愴 주먹을 불끈 쥐니 슬픈 마음이 울러나는데
不待拭遺墨 남은 글씨를 어루만질 필요도 없구나.
-山谷詩曰 “經行東坡眠食地 拂拭寶墨生楚愴.” (황산곡의 시에 “소동파
가 자고 먹던 길을 지나가니, 귀한 글씨를 어루만지니 슬픈 마음이 일어나
네.”82)라고 했다.83)
위의 詩 말미에 황산곡의 시에(山谷詩曰) “소동파가 자고 먹던 길을
지나다가, 귀한 글씨를 어루만지니 슬픈 마음이 일어나네.(經行東坡眠
食地 拂拭寶墨生楚愴)”가 실려 있다.
이는 소동파가 유배생활 속에서도 자신과 유사한 처지의 역사 속
인물들의 행적을 통하여 자신을 위로 했듯이, 서포 자신도 위안을 삼고
자 했으며, 그의 진솔한 삶의 태도를 닮고자 했을 것이다.
세 번째 시를 읽도록 한다.
82) 서포가 남해적소에 도착하기 전에 노량 충렬사에서 비문을 보고 시를 쓰면서
소동파와 관련지어 ‘山谷詩曰 經行東坡眠食地 拂拭寶墨生楚愴’라고 주를 달았으
며, 그의 시 「次普光僧雪洞韻乞佛書」 끝부분에서 ‘東坡號陶韋集爲南遷二友’라
고 주를 달아 놓았다. 서포가 남해적소에서 시를 쓰면서 그 말미에 소동파를 언
급하는 있으며, 남해 적소에서 썼다는 『서포만필』 하권에서 『東坡志林』을
인용하면서, 통속소설의 효용론을 주장하고 있다.
83) 山谷詩曰 經行東坡眠食地 拂拭寶墨生楚愴, 『서포집』, 권1.
“李統制忠烈祠 在南海縣北露梁口 有尤齋先生所譔碑. 統制領戈舡 偏師鏖強敵 信義
擾漢將 威聲慴關白 妖氛已褰豁 大星俄芒赤 共嗟諸葛忠 而無汾陽福 功名古難居
臣子甘殉國 蕩蕩露梁口 風濤成霹靂 魚龍畏簡書 蛇鳥留陣磧 廟宇從民望 香祝降
毅魄 靈風翼兩旗 簫鼓喧阡陌 似聞鐵馬聲 往往陰雨夕 淸時澤畔纍 日星礙叢棘 跬
步阻趨蹌 九歌聲轉激 片石星斗文 想見苔蘇蝕 拳然生楚愴 不待拭遺墨 山谷詩曰
經行東坡眠食地 拂拭寶墨生楚愴.”
西浦小說 성립의 배경 연구 •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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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荒 남쪽 황량한 변방에서
西塞經年謫 서쪽 변방에서 해를 넘겨 유배를 사니
南荒白首囚 남쪽 황량한 땅에 머리 희끗한 죄수가 있네.
灰心慵攬鏡 다 식은 마음84)이라 거울 보기도 질렸고
血泣怳乘桴 피눈물을 흘리며 멍하니 마룻대에 올랐네.
落日鄕書斷 해는 저무는데 고향 소식은 끊겼고
淸秋旅雁愁 맑은 가을날 떠나는 기러기에 근심이 이네.
向來忠孝願 이제까지 충성하고 효도하기 소원이었는데
衰謝恐長休 쇠약해져 길이 길게 될까 두렵구나.
위의 시는 서포가 남해 적소에서 소동파를 동일한 심상에서 쓴
시라고 할 수 있겠다. 소동파는 해남도 남황에서 “마음은 이미 재가
된 나무와 같고, 몸은 매이지 않은 배와 같구나”라는 시를 지었다. 이는
서포가 남해 적소에서 소동파를 ‘동일화한 양상’에서 위안을 삼고자
했으며, 그의 진솔한 삶의 태도를 닮고자 했을 것이다.
네 번째 시를 읽도록 한다.
次普光僧雪泂韻乞佛書 보광사의 스님 설형의 운에 차운하면서 불경을
부탁하노라
客懷蕭瑟易成哀 나그네 회포 쓸쓸하여 쉽게 슬퍼지는데
雪擁柴荊午未開 눈에 사립문은 막혀 한낮에도 닫혀 있네.
謫裏相隨無二友 귀양살이에 함께 해줄 두 친구도 없으니
須君遠寄貝書來 모름지기 그대는 멀리서 불경을 보내주구려.
東坡號陶韋集爲南遷二友(동파가 陶潛의 도연명집과 韋應物의 韋蘇
州集을 일컬어 남쪽으로 쫓겨났을 때의 두 친구라 불렀다.)
84) 다 식은 마음[灰心] : 회심(灰心)은 깨달은 마음. 외물(外物)에 구애(拘碍)되지
않고 마른 나무와 같이 적막하고 불이 꺼진 재와 같은 마음. [莊子·齊物論] 形固
可使如槁木 而心固可使如死灰乎. 소동파는 懷才不遇의 세상에 살면서 연이어 다
가온 역경에 대해 끝까지 굴복하지 않는 절개, 곤궁한 환경에서도 삶에 대한 열
망으로 “마음은 이미 재가 된 나무와 같고, 몸은 매이지 않은 배와 같구나. 너 자
신에게 평생의 功業을 묻는다면 바로 황주ㆍ혜주ㆍ담주의 유배생활이라 하겠네
(心似已灰之木,身如不系之舟. 問汝平生功業, 黃州惠州儋州).”라는 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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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포가 시를 쓰면서 ‘東坡號陶韋集爲南遷二友’라고 주를 달아놓았
다. 이러한 몇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언급되어 있는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서포집』 권6에 실려 있는 「구월이십오일적중작」
바로 다음에는 선천의 명찰인 보광사의 중 雪洞에 次韻하여 불서를
빌려달라고 한 시 「次普光僧雪洞韻乞佛書」가 실려 있다. 여기서 ‘普
光寺’와 ‘南遷二友’가 문제가 될 것 같다. 선천에 있는 보광사를 말함인
지, 남해의 ‘보광사’인지 재검토 평가되어져야 할 것이다. 이는 『구운
몽』의 창작지를 선명하게 밝힐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 시를 읽도록 한다.
其二
北風蕭蕭吹竹林 북풍이 하염없이 대나무 숲으로 부는데
今朝憶我兩阿咸 오늘 아침엔 문득 두 조카85)가 생각나는구나.
自我南遷汝心苦 내 남쪽으로 쫓겨나면서 너희들 마음 괴롭더니
何知汝亦海天南 너희들도 바다 남쪽에 있을 줄 어찌 알았겠느냐?
風濤滔天不可越 바람에 이른 파도가 하늘로 넘쳐 건너갈 수 없으니
六月曾無一書札 여섯 달 동안 소식을 담은 편지 한 장 없구나.
我今病瘴日昏昏 내 지금 병들어 날마다 혼미해 가니
死去誰收江邊骨 죽어 떠나면 누가 강가의 뼈를 거둬줄까?(2)
위의 작품은 김만중이 남해 용문산과 관련된 시 「南海謫舍有古木竹
林有感于心作詩」에서도 소동파와 관련된 구절이 보인다.
여기서 서포는 선천 유배에서 방환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다시 남해
로 적거생활[南遷]을 하게 된 자신의 현재적 처지와 심경을 토로하면
서 ‘조카’를 우회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이 시에서 소동파를 흠모하고 있는 대목은 ‘南遷’과 ‘조카’를 동시에
85) 조카[阿咸] : 아함(阿咸)은 삼국시대 위(魏)나라 때 완적(阮籍)의 조카 완함(阮
咸)을 일컫는 말. 재명(才名)이 있었다. 나중에는 조카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蘇軾·和子由除夜元日省宿致齋2] 朝回兩袖天香滿 頭上銀幡笑阿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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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고 있다. 여기서 조카[阿咸]은 삼국시대 魏나라 때 阮籍의 조카
阮咸을 일컫는 말이다. 나중에는 조카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蘇軾·
和子由除夜元日省宿致齋2] 朝回兩袖天香滿頭上銀幡笑阿咸.86)
여섯 번째 시를 읽도록 한다.
在南海聞兩侄配絶島 남해에서 두 조카가 절도로 유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蒼茫三島海雲邊 푸르고 아득하게 세 섬이 바다 구름 끝에 있어
方丈蓬瀛近接聯 방장과 봉래, 영주가 가까이 잇닿아 있구나.
叔姪弟兄分占遍 숙부와 조카 형제가 두루 나누어 차지하고 있으니
可能人望似神仙 사람들이 보고는 신선 같다 할만도 하겠네.
위의 작품에서도 ‘두 조카’를 표출하고 있다. 서포가 남해에 유배되어
얼마 되지 않아 서포의 조카들 또한 여러 섬에 나뉘어 유배되었다. 자신
이 남해로 방축된 것에 대해 그토록 상심해 하던 두 조카가 생각난다고
토로하고 있다.
소동파가 둘째 조카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周紫芝의 『竹坡詩話』
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동파는 일찍이 조카에게 보내는 편지에
서, ‘무릇 글이라고 하는 것은 젊었을 때는 모름지기 기상이 빼어나고
채색이 현란해야 한다. 그리하여 늙을수록 점점 익어 가며 평담하게
되는 것이다’(凡文字, 少小時須令氣象崢嶸, 采色絢爛, 漸老漸熟, 乃造
平淡, 其實不是平淡87)라고 하였다.” ‘絢爛’한 가운데서 ‘平淡’함이 나오
는 것이지, 오로지 ‘枯淡’한 것은 아니다. 이것이 바로 소동파가 만년에
도달한 예술적 경지라고 할 수 있다.
김만중이 선천적소에서 남해적소로 이배된 자신의 처지가 마치 소동
파가 해남으로 유배되었던 처지와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소동
파의 파란만장한 삶이 김만중의 삶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86) 김만중, 『西浦集』 詩, 임종욱 옮김, p.215. 참조.
87) 「둘째 조카에게 1수」(與二郞姪㊀首), 『소식문집』, p.2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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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맺음말
이상에서 서포소설 성립의 배경에 대해 『서포만필』 소재 소동파
관련 일화와 시화를 통하여 고찰해 보았다. 『서포만필』에는 종래의
서포소설 연구에서 논의되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을 밝혀내거나, 미흡
한 연구결과의 첨보적 작업에 필요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자료
에 힘입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김만중이 남해적소에서 소동파를 동일시한 양상과 『서포만필』 소
재 일화ᆞ시화와 관련된 기사가 서포소설의 소재원으로 밀접한 영향
관계에 있음을 밝혔다.
이에 우선 김만중이 남해적소에서 소동파를 동일화한 양상의 근거
자료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拾遺錄』에 그 근거 자료가 나타난다. 즉, 『습유록』에서는
윤부인이 구양수의 어머니가 절개를 지켜 아들을 가르쳤던 일과 소동
파 형제의 인간됨과 학문에 탄식하여 평소 즐겨 말하였다고 한 사실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둘째, 남해 유배시절에 썼다는 시 「落木」 중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책상에 얹힌 眉山集을 서로 따르지만”에서 알 수 있듯이 서포는
자신의 일상생활에서도 평소 흠모해 마지않던 소동파을 점점 닮아가고
있음을 이 시에서 짐작할 수 있다.
셋째, 남해 ‘충렬사’를 배경으로 지은 시 말미에 기록한 내용에서 찾
을 수 있다. 즉, 황산곡의 시에(山谷詩曰) “소동파가 자고 먹던 길을
지나다가, 귀한 글씨를 어루만지니 슬픈 마음이 일어나네.(經行東坡眠
食地 拂拭寶墨生楚愴)”가 실려 있다.
다음으로 『서포만필』 소재 소동파 관련 李恒福 일화 가운데 서포소
설 『구운몽』과 『사씨남정기』와 관련된 언급에서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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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서포만필』과 『동파전집』에 수록된 「동파선생연보」 소
재 趙德麟의 『侯鯖錄』에서 ‘소동파가 표주박을 지고 노래했다’는 기
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즉, “內翰의 옛날 부귀가 한바탕 춘몽이었습니
다. 동파가 그러하다고 여겼다. 마을 사람들은 이 노파를 ‘春夢婆’라고
불렀다.”라고 했다. 이러한 대목은 김만중이 남해 적소에서 『구운몽』
을 창작했다는 기미를 엿볼 수 있다.
둘째, 『서포만필』 소재 소동파 관련 일화 가운데 『사씨남정기』
와 관련된 ‘屈原’ 모티프가 언급되어 있다. 즉, 남구만의 『약천집』
권27에는 「白沙獻議手草跋」이라는 글에서, 李恒福의 「철령가」에
대해 언급했다. 李恒福의 「철령가」에 대한 일화들은 유배지에서 실
재했던 謫中事를 아주 자세하게 기록하였다는 사실이 『사씨남정기』
의 얼개를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는 점, 충신이 모함을 받아 억울하
게 유배를 당해 고통과 방황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굴원’ 모티프를
빌려왔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소동파 동일화 양상이 구운몽의 성립 배경으로 이행된
과정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구운몽에는 전쟁장면의 전개와 여타 사건 구성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볼 수 있으나 구체적인 대응양상을 찾기는 어렵다. 그러나 전쟁
사건 서술에서 구운몽의 盤蛇谷 이야기에는 삼국지연의의 제갈공
명 남만정벌 이야기가 반영되어 있다. 여타의 八夫人結義兄弟 이야기
도 삼국지연의의 桃園結義 장면을 습용했다. 특히 구운몽의 제문
은 삼국지연의의 제문을 활용하여 부연한 것이다. 다만 숭배의 대상
이 ‘天皇后土’에서 ‘南海觀音菩薩’로 변용된 것은 구운몽의 불교적
주제와 관련하여 작자의 창의가 발휘된 것으로 여겨진다.
둘째, 서포의 삼국지 평설에서 거론되지 않았으나 형식면에서, ‘화설,
각설’ 등의 용어사용 및 回章分句 방식은 김만중 시기 이전의 소설들에
서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삼국지연의의 형식적 특성에서 영향을 받
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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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논지를 정리해 보면, 西浦小說 成立의 背景은 『西浦漫筆』
과 『西浦集』 소재 逸話와 詩話에 나타난 ‘蘇東坡 同一化樣相’과 ‘통속
소설의 효용론을 주장한 배경’을 도외시 하고는 言及될 수 없다. 그리고
『사씨남정기』와 『구운몽』은 대비 연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
면 자연적으로 그 창작 시기와 동기는 南海作으로 歸納될 것이다.
투 고 일 : 2016년 11월 08일
심사기일 : 2016년 11월 19일〜12월 13일
게재확정 : 2016년 12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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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浦小說 성립의 배경 연구 • 121
- 121 -
<abstract>
A Study on the Formative Background of Kim
ManJung's Novels
Park, Sung-jae
(Gyeongsang National University)
The objective of the present work paper is to study So Dong-pa
(蘇東坡)'s an aspect of identification and focus on Kim Man-jung(金
萬重)'s anecdotes in 『Seopomanpil (西浦漫筆)』. Kim Man-jung in
his exile life at Nam-hae referred to literature as the power to touch
the heart of the audience in popular novels coming from
『Samkukgiyeunyee(三國志演義)』. In 『Dongpajirim(東坡志林)』,
special mention was made of the reason for the popular novel. He
tried to look like So Dong-pa(蘇東坡). In terms of the aspect of
identification, these anecdotes in 『Seopomanpil(西浦漫筆)』
should be required for having a certain continuity. Though this, I will
look at all the details about how to constitute this novel.
『Seopomanpil(西浦漫筆)』 is a collection of essays written in
Kim Man-jung's exile at Nam-hae. It is the most reliable primary
material, which catch not only the context of his novels but also the
correlation between their text and context. In this study, the quest
for 『Seopomanpil(西浦漫筆)』 can be analyzed by giving a whole
new perspective on his nov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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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he one hand, the literatures in exile at Nma-hae of Kim
Man-jung are associated with those at Haenamdo(海南島) of So
Dong-pa. The other hand, the literary world of Kim Manjung has
something unique. An Analysis on 『Seopomanpil(西浦漫筆)』
shows that Kim Man-jung has had So Dong-pa's an aspect of
identification related to anecdotes.
The results of this study indicate that Kim Man-jung escaped
from a previous style that adhered to the only creation of the
Chinese poem on the second volume of 『Seopomanpil(西浦漫筆)』.
Kim Manjung asserted the usefulness of writing novels. In the end,
such causes can lead to an inference based on writing novels in his
exile life at Nam-hae.
key words : Kim Man-jung(金萬重), So Dong-pa(蘇東坡), 『Seopomanpil(西浦
漫筆)』, anecdote(逸話), 『Dongpajirim(東坡志林)』, 『Samkukgiyeunyee
(三國志演義)』, usefulness of nov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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