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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수필

혜화동/이경림

혜화동이라 했습니다

성당이 있는 로터리를 돌아 약간 언덕진 골목을 올라 첫 번째 전봇대에서 꺾으라 했습니다

삼간초가라 했습니다 조금만 걸어가면 혜화 국민학교가 있다 했습니다

열 살이라 했습니다 엄마를 태운 꽃상여가 집을 나간 게 

그게 뭔지 몰랐다 했습니다

마루기둥 붙잡고 폴작거리며 무슨 노랜가 불렀다고, 어머니……

정신 맑을 때 들려주신 이야깁니다


오랜 심장병에 지친 어머니 일흔 조금 넘어 정신 흐려 지셨습니다

멀쩡하다가 한순간 정신 줄 놓으실 때

'미안하지만 혜화동 우리 집에 좀 데려다 주세요'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딸에게 공손히 부탁하셨습니다

'혜화동에 누가 사는데요?' 

'울 엄마도 오빠도 동생도……’

그 애절한 눈빛……한 번도 못 들어준 나는, 그녀에게 모르는 사람 맞습니다

밥벌이 가는 몇 시간 도우미에게 맡겨진 어머니, 나를 가르켜

‘쉿, 저 여자 조심하세요 저 여자 내 지갑을 자꾸 훔쳐가요’

무서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고 합니다

‘뭘 잘못하셔서 어머니에게 점수를 잃으셨어요?’

재미있다는 듯 깔깔대는 도우미 앞에서 문득 소름 돋는 날 있었습니다

생각하니 나 평생 그녀의 지갑 훔치며 살았습니다

그 낡은 지갑에는 더 훔칠 게 없어 종래는 혼까지 훔쳤습니다


어느 날입니다

밥벌이 갔다 오는 내게 도우미 아주머니가 전화했습니다

‘급한 일이 생겨 지금 빨리 가봐야 하는데 30분쯤 혼자 계시면 안될까요?’

하도 사정하기에……그러라고……

그 30분, 어머니가 사라지셨습니다 영하의 추위에 잠옷 차림으로

봄나들이 가득 날아가셨습니다

놀라 묻는 내게 아파트 경비가 말했습니다

‘아, 아까 그 할머니요? 못 보던 할머닌데……

집이 혜화동이라고 그러기에 길 잃은 할머닌가 해서 112에 신고했지요’


엄마 ―― 엄마 ――

아이처럼 부르며 파출소로 달렸습니다

아아, 거기 연분홍 꽃무늬 잠옷 화사하게 걸치고 잔뜩 겁에 질린 어머니

새파랗게 언 입술을 실룩이며 울음 터트렸습니다


‘저 사람들 우리 집이 혜화동이라고 아무리 말해도 안 믿어요 아주머니,

미안하지만 혜화동 우리 엄마한테 좀 데려다 주세요’


추위와 두려움으로 오그라져 한 줌도 안되는 어머니를, 아니 나를

업고 돌아오던 그밤,

골목마다 전봇대는 수도 없는데

가도 가도 혜화동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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