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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수필

몸이 큰 여자 / 문정희


저 넓은 보리밭을 갈아엎어 
해마다 튼튼한 보리를 기르고 
산돼지 같은 남자와 씨름하듯 사랑을 하여 
알토란 아이를 낳아 젖을 물리는 
탐스런 여자의 허리 속에 살아 있는 불 
저울과 줄자의 눈금이 잴 수 있을까 
참기름 비벼 맘껏 입 벌려 상추쌈을 먹는 
야성의 핏줄 선명한 
뱃가죽 속의 고향 노래를 
젖가슴에 뽀얗게 솟아나는 젖샘을 
어느 눈금으로 잴 수 있을까

 

몸은 원래 그 자체의 음악을 가지고 있지* 
식사 때마다 밥알을 세고 양상추의 무게를 달고 
그리고 규격 줄자 앞에 한 줄로 줄을 서는 
도시 여자들의 몸에는 없는 
비옥한 밭이랑의 
왕성한 산욕(産慾)과 사랑의 노래가

 

몸을 자신을 태우고 다니는 말로 전락시킨 
상인의 술책 속에 
짧은 수명의 유행 상품이 된 시대의 미인들이 
둔부의 규격과 매끄러운 다리를 채찍질하며 
뜻없이 시들어가는 이 거리에 
나는 한 마리 산돼지를 방목하고 싶다 
몸이 큰 천연 밀림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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