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비꽃 /정태중
보라
이 두 자의 한 단어
무엇을 보라는 보라
색채의 하나 보라
키 낮은 제비꽃을 보는데 보랏빛이다
그러고는
내 친구 딸 아이의 이름이
보라라는 것이 문득 생각난다
유심히 단어 찾기에 몰두하는데
보라 보다는
눈보라
물보라 같은 명사가 이채롭다
이들은 분명 아름다운 자유다
휘몰아치거나
사방으로 흩어지는
그러면서도 아프기도 하다
보랏빛 꽃이 포근한 봄날이다
보라, 보라. 넋 놓고 있는데
꽃보라 한 아름
바람 없이도 가슴에 핀다.
제비꽃 날다 /조연수
날개가 없는 자들은 등을 펴지 않았다
그럴 때면 고개 숙인 보라가 슬쩍 웃음을 흘리며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눈치 채지 못한 얼룩처럼 시리게
써보지 못한 모자가 구름을 따라 흘러간 건 어제였다
그 구름이 다시 돌아와 신지 않은 신발을 신고 떠나버린 건
순전히 보라를 떠 올린 바람 때문이겠다
이제 저 구름이 몰고 간 모자와 신발은
언덕을 넘어 허름한 담벼락 아래 뿌리를 내릴 것이다
아직 읽지 않은 기록들을 빨아 먹으며 자랄 것이다
납작하게 엎드린 등을 세워 바람을 맞는 동안
흐릿해진 눈동자 담벼락에 기댄다
날개를 펴지 않은 얼룩이 아직 파릇한 기운을 불러들이고
보라를 따라 가는 발목이 울컥 뛰어오른다
뛰어오른 자리마다 고개 숙인 보라가 들썩 거린다
제비꽃 /양문규
눈물도 꽃 피우는가
영국동 여여산방 블로크 담장 아래
시멘트 포장길 딱, 깨트리고
그 사이 제비꽃 피었다
한겨울 꽁꽁 얼어붙었던
검붉은 눈물 한꺼번에 터진 것일까
경우 없는 중생과 대화 안 한다
눈물 없는 천태산 어린 중
경우 있는 앉은뱅이 설법
진눈깨비 속에서 눈살 찌푸리며 절뚝인다
봄은 봄만으로도 황홀한데
천둥 우레처럼 터지는 제비꽃
지나치다 문득 한 줌 눈물 훔친다
제비꽃 하고 친구 /김지숙
신작로에 나란히
한낮에 키작은 제비꽃
몸뚱어리가 너무 작아
햇살도 버거운지
때로는 얼굴이 일그러지네요
이슬비가 살살 내려주면
꽃망울이 윙크를 하며
봄비가 후두두 뿌려주면
꽃망울이 정신을 잃어 버리네요
허지만 있지요
나는
보라색을 상자속에 보관중인걸
그런데
창가에 두고두고 보다가
내 마음을 도둑 맞아서는
눈병이 나서 안대 중...
제비꽃 /박명숙
보랏빛 사연을
소녀가 다소곳이 앉아
기억을 뒤척입니다
한장 한장 펼쳐보는
추억의 사진첩에
가난한 행복이 소복이 핍니다
아직도 초가집 앞마당에
보랏빛 낡은 사연, 소녀는 이 봄날을
그리움이라고 받아씁니다
제비꽃 /오경옥
키를 낮추어야 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가까이 다가가서
눈빛을 주고 마음을 주어야 다가오는 것들
살아가는 법에 서툴고
사랑받고 사랑하는 법에 서툰 망설임
원치 않는 말과 몸부림에
하나 둘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보내고 나서야
애틋한 눈길만 보내는
가슴 속의 하고픈 이야기가
하롱하롱 멍울진,
가까이 다가가야 비로소 마음을 주는
작은 몸짓의 꽃!
제비꽃 /하은혜
좀 더 낮은 자리에
살포시 피어나
여린 봄바람에 흔들리는
연보랏빛의 수줍은 너
가까이 다가가고픈
애틋한 마음을 부르는
너에게
무릎을 꿇는다
온통 세상을 하얗게 점령한
벚꽃의 위세 앞에서도
꿇지 않았던
무릎을...
제비꽃사랑 /김희영
살포시 고개를 치켜들고
앙증맞은 자태로
양지쪽 돌담장 옆 길목에
수줍게 서 있는
보랏빛 고운 색깔의
키 작은 들꽃
가신 임 마음잡아
나를 뒤돌아 봐 주세요
수줍어 고깔 쓰고
비바람 견디며
가냘픈 몸짓으로 피어나는
어여쁜 자태
겸손을 배운
눈높이 낮출 줄 아는
햇살 양지 녘
가냘픈 향기로
꼿꼿하게 허리 펴고
사람들이 외면한 채
지나쳐버려도
길가 돌 틈 사이에서
얼굴 붉혀 웃고 있다.
노랑 제비꽃 /반칠환
노랑제비꽃 하나가 피기 위해
숲이 통째로 필요하다
우주가 통째로 필요하다
지구는 통째로 제비꽃 화분이다
어느 슬픔이 제비꽃을 낳았나 /곽도경
누가
눈물 떨구어
흙 속에 묻었나
누가
그 슬픔
빠져나오지 못하게
시멘트를 덮었나
단단한 바닥
틈서리 밀어내며 올라온
눈물 그렁그렁한
그 아이
눈 속에 핀 제비꽃 /안정순
깊은 밤
문풍지의 파리한 몸짓
날 부르는 것 같아
허둥지둥 나선 걸음 채비도 없이
단속곳에 졸졸졸
해님을 따라다니며
주저앉은 자리 애처롭다
애타는 그리움이야
너만 못지않으련만
흰 눈에 선걸음 어이할꼬
하얀 눈에 발이 묶여
오도 가도 못한 채
문설주에 찾아든 살바람이
야속하기만 하구나!
제비꽃 /美共 엄도열
삼월 삼짇날
강남 간 제비는
날개 속 숨겨둔
봄바람 데리고
남쪽 먼바다를 건너
아티스 찾아날아든다
겨우네 바라만 보던 제비꽃 하나
다 해어진 삼베옷 입고
긴 겨울을 오돌오돌 떨며
기다렸으리
실오라기 풀어진 빛바랜 검불 헤집고
삐쭉이 고개를 내밀어 보이니
봄 햇살 미소에 수줍은 듯
고개숙여 바라보네
맞선보는 자리가 어색한듯
제비꽃/(신석종·시인, 1958-)
좋아요
보고만 있는데도
눈물 나려고 합니다
예뻐서요
가녀린 여인이
한복을 입은 것 같은
그런 청초함이 보여요
이 작은 꽃에서요
몇 걸음 위에
진달래랑 생강나무꽃도
숨죽인 채 아까부터
여기만 보고 있어요
말 한마디 못 하고
마음에 품고 있나봐요
연보라 이 꽃을요
사랑이겠지요
+ 제비꽃/ (심시인)
내 고향 지새울
시오리 수로 둑길에
고개 숙여 수줍게 핀 꽃
멱감고 오돌오돌 떨던
순이 입술 같아
살포시 입 맞추고 싶던 꽃
+ 제비꽃·1 /(나태주·시인, 1945-)
그대 떠난 자리에
나 혼자 남아
쓸쓸한 날
제비꽃이 피었습니다
다른 날보다 더 예쁘게
피었습니다.
(나태주·시인, 1945-)
+ 제비꽃·2/ (나태주·시인, 1945-)
아직도 나를 기다려
고개 숙인 철부지 소녀.
+ 노랑제비꽃/(목필균·교사 시인)
누구의 눈길이
그리웠을까
지나던 길
눈길만 주어도
여린 꽃잎
노랗게
흔들린다
누구의 얼굴을
기다렸을까
지나던 길
곱다만 하여도
여린 가슴
파랗게
두근거린다
+ 제비꽃/ (임명자·시인, 경기도 김포 출생)
네 부드러운 입술 위로
구름이 지나간다
구름 속엔
내 어릴 적 고향마을
골목이 누워 있고
나는 또래들과 어울려
숨바꼭질을 한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제비꽃 작은 잎새 위
구름 떠 있고
구름 속엔 보랏빛 꿈꾸던 얼굴이
아직까지 숨어 있다
+ 제비꽃/(이생진·시인, 1929-)
이 봄에
북한산 제비꽃이 없었던들
나는 누구하고 놀았을까
아무도 놀자고 하지 않는 이 봄
그 때문에 날이 갈수록
사람이 싫어지는 병에 걸렸다
작은 제비꽃
이 꽃을 잊으면서 시름시름 앓았다
새삼 널 찾아온 것은 비인간적이다만
널 다시 알고부터 나아지는 병
이 봄에 네가 없었던들 나는 약국에서
쓰디쓴 알약만 삼켰을 거다
+ 제비꽃 연가/(이해인·수녀 시인, 1945-)
나를 받아주십시오
헤프지 않는 나의 웃음
아껴 둔 나의 향기
모두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이 가까이 오셔야
나는 겨우 고개를 들어 웃을 수 있고
감추어진 향기도 향기인 것을 압니다
당신이 가까이 오셔야
내 작은 가슴속에
하늘이 출렁일 수 있고
내가 앉은 이 세상은
아름다운 집이 됩니다
담담한 세월을 뜨겁게 안고 사는 나는
가장 작은 꽃이지만
가장 큰 기쁨을 키워드리는
사랑 꽃이 되겠습니다
당신의 삶을 온통 봄빛으로 채우기 위해
어둠 밑으로 뿌리내린 나
비 오는 날에도 노래를 멈추지 않는
작은 시인이 되겠습니다
나를 받아 주십시오.
+ 제비꽃/(정연복·시인, 1957-)
끝없이 너른
봄의 들판에서 나는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도 않지만
날 좋아하는 사람들은
기어코 나를 찾아낸다.
나를 좋아하니까
나를 정말 보고 싶으니까
연보랏빛 내 작은 몸이
눈에 번쩍 들어오는 거다.
이렇게 나를 아끼고
사랑해주는 이들이 있어
크고 잘난 다른
봄꽃들이 하나도 안 부러운
나는 올 봄도 한철
기쁘게 살다 갈 것이다.
+ 제비꽃 /(조말현·교사 시인, 1955-)
좋은 땅 기름진 곳 모두다 버려 두고
하필이면 자갈길에 뿌리를 내렸구나.
보랏빛 활짝 타올라 망울망울 피었네.
마침표 같은 씨앗 주머니에 담아 두고
바람이 불어오면 아낌없이 나눠주네.
꽃말도 아름다워라 사랑이라 하더래.
+ 제비꽃에 대한 단상 /(최영희·시인)
이름도 많구나
제비꽃, 오랑캐꽃, 병아리 꽃
그리고 장수 꽃, 외 나물, 씨름 꽃
때로는 예쁘다
때로는 오랑캐다
말, 말, 말 많은 세상
보일 듯 말 듯
키가 작아 더욱 가여운 제비꽃아
세상 사람들 입방아가 싫어
여기 산밑 길섶, 풀숲에
숨어서 피었구나
싫기도 하겠지
깊은 산중
올망졸망
진보랏빛, 네 얼굴
너의 눈이 눈물로 글썽 하구나
내 오늘은 너의 마음 아픈 이야기
한 소절 듣고 가련다.
(최영희·시인)
+ 제비꽃 /(양전형·시인, 제주도 출생)
울고 싶었구나
동긋이 핀 눈망울에 초롱초롱 자줏빛 이슬
너 곧 울겠구나
내 사랑 잃던 날
오늘처럼
야트막한 오름까지 먹장구름 앉았음을
누가 일러주더냐
그때 내 안에 내리던
하염없는 장맛비가 생각나
너 금방
왈칵 울고 말겠구나
+ 제비꽃 /(김귀녀·시인, 1947-)
제비꽃이 피었다
여럿 모여 가족이 되었다
가만가만 살펴보니
하늘도
땅도
햇볕도
온통 꽃 웃음
넘어가는 서쪽 해까지
꽃 속에 모여있다
요즘은 나도
마음을 못 잡는데 놀러나 가볼까
먹구름도 말간 눈을 뜨고 지나간다
+ 제비꽃에 대하여/(안도현·시인, 1961-)
제비꽃을 알아도 봄은 오고
제비꽃을 몰라도 봄은 간다
제비꽃에 대해 알기 위해서
따로 책을 뒤적여 공부할 필요는 없지
연인과 들길을 걸을 때 잊지 않는다면
발견할 수 있을 거야
그래, 허리를 낮출 줄 아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거야 자줏빛이지
자줏빛을 톡 한번 건드려봐
흔들리지? 그건 관심이 있다는 뜻이야
사랑이란 그런 거야
사랑이란 그런 거야
봄은,
제비꽃을 모르는 사람을 기억하지 않지만
제비꽃을 아는 사람 앞으로는
그냥 가는 법이 없단다
그 사람 앞에는
제비꽃 한 포기를 피워두고 가거든
참 이상하지?
해마다 잊지 않고 피워두고 가거든
+ 제비꽃 곁에서/(김선광·시인)
나의 사랑은 들꽃과 같았으면 좋겠다.
자주자주 새로운 아침과 저녁을 맞이하면서
곱게 지는 법을 아는 풀꽃이었으면 좋겠다.
긴 사랑의 끝이 오히려 남루할 때가 있나니
키 낮은 풀꽃 뒤에 숨길 수 없는 큰 몸을 하고
파란 입술의 제비꽃아.
나는 얼마를 더 부끄러워하면 되겠느냐.
내 탐욕의 발목을 주저앉히는 바람이 일어
깊이 허리 눕히는 풀잎 곁에서
내 쓰러졌다가 허심의 몸으로 일어서야겠다
제비꽃
겨우내 두른 누더기 벗고
얼음이 풀린 냇물에
멱감은 해가
풀빛 싱싱한 미소를
풀어 놓는다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볕 바른 냇가에
얼굴 내비치던
남보라 꽃댕기 땋은
해맑은 애송이는
올해도 고개 내밀어
웃고 있다
나 어릴 적 짝사랑하던
보라빛 원피스 차려입은
앙증맞은 계집애
닮은 제비꽃.
+ 제비꽃 /(김윤자·시인, 1953-)
이른 봄 들녘 끝자리
행인의 눈에 띌까
보랏빛 수줍음 물들이어
가슴 열어 핀 꽃
꽃병에 꽂혀 본 적
화단에 심겨 본 적
없이
봄꽃이라 불리는
그 한마디에
마음 열어 핀 꽃
꽃송이 작으니
키라도 컸으면
줄기 짧으니
잎이라도 넓었으면
작음에
숨어 숨어 참빛 발하는
보랏빛 겸손
+ 노랑 제비꽃 /(목필균·교사 시인, 1954-)
목마른 세상
노랗게 응고시킨 채
숲 속 바위틈에 고개 숙여
명상에 잠겨있는 너
가슴에 이는 조용한 울림
나도 너이고 싶다
+ 제비꽃반지 /(김순진·시인, 1961-)
송아지 맬 말뚝 박을
땅 한 평 없던 그집 아이는
보석들이 지천으로 깔린 들에서
까만 사파이어 눈동자로
보라색 제비꽃 루비반지를
곁눈질로 끼워주었다
땟국물 목걸이 건 그 아이 손등엔
이명래고약 시계가 돌고 있었다
+ 제비꽃 편지 /(안도현·시인, 1961-)
제비꽃이 하도 예쁘게 피었기에
화분에 담아 한번 키워보려고 했지요
뿌리가 아프지 않게 조심조심 삽으로 떠다가
물도 듬뿍 주고 창틀에 놓았지요
그 가는 허리로 버티기 힘들었을까요
세상이 무거워서요
한 시간도 못되어 시드는 것이었지요
나는 금세 실망하고 말았지만
가만 생각해보니 그럴 것도 없었어요
시들 때는 시들 줄 알아야 꽃인 것이지요
그래서
좋다
시들어라, 하고 그대로 두었지요
(안도현·시인, 1961-)
+ 제비꽃의 노래 /(고증식·교사 시인, 1959-)
그대 길목에 핀 나는
한 송이 외로운 들꽃이어요
바람 한 줄기에도 몸을 꺾어
보랏빛 가녀린 울음을 흩날리지만
어김없이 돌아와 다시 그 자릴 지키는
변치 않는 그대 그리움이어요
날 바라보는 당신의 눈길은
세월 따라
그대의 마음 따라 흔들리지만
보셔요 올해도 이렇게 불 밝혀선
여린 손길과 수줍은 나의 눈길
언제라도 다녀가셔요
힘겨운 그대의 작은 어깨가
봄 햇살 한 줌 품지 못하고 흔들릴 때도
아시잖아요
그대 눈길에 달려와 피었다가
그대 더운 숨결에 말없이 녹아드는
나는 한 떨기 제비꽃인 걸요
변치 않는 당신의 사랑인 걸요
+ 제비꽃 /백수인·(전남 장흥)
해맑은 눈망울, 고운 뺨,
진보랏빛 스웨터.
긴 머리 날리며
포로롱 포로롱
농협창고 뒷골목으로 사라진 소녀
성도 이름도 알 수 없었지만
그 검은 눈그리매 가슴에 박혀
봄날 오후 행여나 하고
창고 앞 다리 난간에 앉아 기다리면
휘파람새만 휘이 휘이익
살구꽃 환한 하늘로 날아올랐지.
세월이 아득하게 지난 뒤, 어느 봄날
무등산 자락 팔각정 오르는 골짜기
길섶에서 문득 만난 얼굴
말을 붙일까 망설이다
물끄러미 바라만보며 지나친 사람
그날 밤
인터넷 검색창에
"진보랏빛 소녀"라고 치자
예쁜 그 소녀의 사진과 함께 이런 문구가 떴다.
"경상남도 삼천포시 노산공원 부근에
살고 있는 제비꽃입니다."
(백수인·시인, 전남 장흥 출생)
+ 제비꽃 머리핀 /(공광규·시인, 1960-)
산자락 묏등에 제비꽃 한 송이 피었는데
누군가 꽂아준 머리꽃핀이어요
죽어서도 머리에 꽃핀을 꽂고 있다니
살아서는 어지간이나 머리핀을 좋아했나 봐요
제비꽃 머리핀이 어울릴만한
이생의 사람 하나를 생각하고 있는데
멀리서 찻물 끓이며 지나는 솔바람이
연두색 신갈나무 새잎을 흔들고 있어요
진달래는 얼굴처럼 붉고
산벚꽃나무가 환하게 등불을 켜고 있어요
유용기(시인/한국문학세상)
주 5일제 근무 연휴란
내게는 빛 좋은 개살구
유난히 찌뿌듯한 주말 아침
출근하기 싫은데 비까지 내린다.
우산도 없이 집을 나섰다
대문 옆 장지 붓이 아래 핀 제비꽃
언제부터 이곳에 살았을까
수줍은 인사를 하듯 살랑거린다!
우리 예쁜 늦둥이 막내딸처럼
하루를 반기어 하얗게 피어난 제비꽃
아침 햇살 손에 잡아 등불처럼 걸어놓고
새로 돋아나듯 연둣빛 팔 벌려 인사한다!
시와 제비꽃
― 제비꽃 여인숙
이정록 글
겨울이 저물고 봄이 찾아올 무렵, 우리 집 둘레로 온갖 봄꽃이 핍니다. 봄까지꽃이 피고, 코딱지나물꽃이 피며, 냉이꽃에 꽃다지꽃에 갓꽃이랑 유채꽃이랑 곰밤부리꽃이랑 아기자기하게 어우러집니다. 그런데, 이들 봄꽃은 한겨울에도 피어나기 일쑤이고, 겨울을 앞둔 늦가을에도 피어납니다.
우리 집 마당하고 뒤꼍 곳곳에서 피는 제비꽃을 살피니, 이월에도 삼월에도 사월에도 피지만, 여름에도 한 차례 피고 지기도 하고, 구월과 시월과 십일월에도 피고 집니다. 그리고, 십이월과 일월에도 피고 집니다. 다만, 한 포기 사이에서 다달이 피고 지지는 않고, 한 포기 사이에서 해마다 두 차례씩 꽃하고 씨앗을 봅니다. 이 씩씩하면서 앙증맞도록 작은 꽃송이를 바라보는 동안 ‘보랏빛’이라는 빛깔을 ‘제비꽃빛’으로도 가리키면 더없이 곱겠네 하고 느껴요.
주걱은 / 생을 마친 나무의 혀다 / 나무라면, 나도 / 주걱으로 마무리되고 싶다 / 나를 패서 나로 지은 / 그 뼈저린 밥솥에 온몸을 묻고 / 눈물 흘려보는 것 (주걱)
고목이 쓰러진 뒤에 / 보았다, 까치집 속에 / 옷걸이가 박혀 있었다 / 빨래집게 같은 까치의 부리가 / 바람을 가르며 끌어올렸으리라 (아름다운 녹)
이정록 님이 빚은 시집 《제비꽃 여인숙》(민음사,2001)을 읽습니다. 어른이 읽는 시도, 어린이가 읽는 시도, 또 어린이가 읽을 동화도 쓰는 이정록 님이 서른 한복판 나이를 가로지를 무렵 내놓은 시집입니다. 이제 쉰 살 나이를 지나가는 이정록 님인데, 서른다섯 살 무렵 바라보는 서른다섯이라는 나이하고, 쉰 살 무렵 바라보는 서른다섯이라는 나이는 서로 어떻게 다를까요. 앞으로 예순 살이나 일흔 살에 이르면, 서른다섯이라는 나이는 어떻게 돌아볼 만할까요.
요구르트 빈 병에 작은 풀꽃을 심으려고) 밭두둑에 나가 제비꽃 옆에 앉았다) 나잇살이나 먹었는지 꽃대도 제법이고, 뿌리도 여러 가닥이다) 그런데 아니, 뿌리 사이에 굼벵이 한 마리 모로 누워 있다) 아기부처님처럼 주무시고 있다 (제비꽃 아래)
우리한테는 모든 나이가 꼭 한 번씩입니다. 서른다섯 살도 한 번이고, 마흔다섯 살이나 쉰다섯 살도 한 번입니다. 스물다섯 살하고 열다섯 살도 오직 한 번뿐이지요. 그래서 이러한 나이를 거치는 동안 느끼거나 겪을 수 있는 삶도 오직 한 번뿐입니다.
때로는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한 한때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슬픔과 괴로움이 얼룩지는 한때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바보스러울 수 있고, 때로는 훌륭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웃음꽃이요, 때로는 눈물꽃일 수 있어요. 어떤 모습이든 우리는 저마다 꼭 한 번 누리는 ‘나이’를 거치면서 차근차근 자랍니다.
아이도 자라고 어른도 자라지요. 아이뿐 아니라 어른도 몸이랑 마음이 함께 자라지요. 아이는 키가 크고 몸이 불어납니다. 어른은 키나 몸이 더 불지 않는다고 여길 만한데, 힘살이나 아귀힘이나 굳은살이나 여러 가지 모습이 새롭게 바뀌거나 거듭나요.
올해 나는 서른일곱이 되었다 이제 나는 무엇과 무엇으로 딱히 가르지 않는다 덤덤해졌다 내 아랫배처럼 두루뭉실해졌다 시도 때도 없이 두 아이의 이름이 섞이고 어머니와 아내가 섞이고 새끼토끼들의 고모와 이모가 섞이고 풀과 나무와 땔감이 섞이고 귀여운 토끼와 토끼탕이 섞이고 (토끼)
시집 《제비꽃 여인숙》을 쓴 이정록 님이 읊은 서른일곱이 된 나이를 돌아봅니다. 아이들이 토끼처럼 자라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는 눈빛을 헤아립니다. 이제 이 토끼 같은 아이들은 어떤 숨결로 이곳에 설까요. 토끼 같은 아이들은 어느덧 어른이 되어 ‘새로운 토끼’를 찾는 사랑을 꿈꿀까요.
아침에 감알을 썰어 아이들한테 건네면, 아이들은 “고맙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사랑해.” 하고 감알을 보며 외칩니다. 나도 감 한 알을 집어서 함께 먹습니다. 나는 한 알을 먹고 아이들은 두 알씩 먹습니다. 나는 한 알로도 넉넉한데, 아이들은 두 알로도 모자랍니다. 다 먹고 더 달라 하면 더 줍니다. 몸뚱이로 보자면 어른인 내가 훨씬 크고 힘도 세지만, 먹고 싶은 밥그릇으로 대자면 아이들도 어른 못지않습니다.
아마 이러한 삶은 스스로 누리지 않는다면 모를 만합니다. 스스로 아이를 낳고, 스스로 아이를 사랑하면서, 스스로 꿈을 새로 낳으면서, 스스로 내가 나를 사랑하는 길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누나하고 부르면 / 내 가슴속에 / 붉은풍금새 한 마리 /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린다 (붉은풍금새)
새벽 이슬에 / 손마디가 / 부드러워지기 때문이다 (새벽 이슬)
아침 낮 저녁으로 뒤꼍으로 오르면 십일월이 무르익는 요즈음은 유자 익는 냄새가 물씬 퍼집니다. 고닥 뒤꼍에 설 뿐이지만 내 코는 유자 냄새를 큼큼 맡으면서 즐겁습니다.
봄에 뒤꼍에 서면 매화꽃 내음이 가득 퍼집니다. 매화꽃이 질 무렵에는 모과꽃 내음이 고루 퍼지고, 여름으로 접어들 무렵에는 찔레꽃이랑 감꽃이 온몸을 따사로이 어루만져 줍니다.
철마다 다른 꽃과 열매가 철마다 다른 숨결로 스며듭니다. 철마다 다른 풀과 꽃이 돋으면서 철마다 새로운 노래와 이야기가 퍼집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면 이 아이들은 꼭 한 번 지나가는 한 살 두 살 다섯 살 여섯 살 모두 새로운 모습입니다. 아홉 살 열 살도, 열네 살 열다섯 살도 새로운 몸짓이에요. 어른한테도 서른일곱 살이랑 마흔일곱 살이란 그야말로 새로우면서 재미난 삶자락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머니는 목이 부러진 / 내 알루미늄 숟가락을 버리지 않으셨다 / 부뚜막 작은 간장종지 아래에다 놔두셨는데 / 따뜻해서 갖고 놀기도 좋았다 눈두덩에도 대보고 / 배꼽 뚜껑을 만들기도 했다 / 둥근 조각칼처럼 생겼던 손잡이는 / 아끼기까지 하셨다 고구마나 감자를 삶을 때 / 외길로 둟고 간 벌레의 길을 파내시는 데 / 제격이었기 때문이었다 (목이 부러진 숟가락)
시 한 줄을 읽으면서 노래 한 가락을 읊습니다. 시 두 줄을 읽으면서 노래 두 가락을 읊습니다. 아이들은 아이들 나름대로 사랑을 짓고, 아이에서 어른으로 자라는 사람들은 이러한 삶결대로 새로운 사랑을 짓습니다.
이정록 님을 낳은 어머님이 건사한 ‘목이 부러진 숟가락’은 어떠한 사랑이었을까요. 언뜻 보자면 그냥 ‘목이 부러진 숟가락’이지만, 이 숟가락으로 밥을 먹고 노래를 부르고 무럭무럭 자란 오랜 이야기가 깃든 노래주머니일 수 있습니다. 쓰레기통에 던지면 쓰레기이지만, 살강에 가만히 얹으면 알뜰살뜰 누리는 살림살이 가운데 하나입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 먼 길, 내 책가방 속에는 / 돌멩이 가득했다 (돌의 이마를 짚다)
삶을 노래하기에 시 한 줄입니다. 삶을 꿈꾸기에 시 두 줄입니다. 삶을 사랑하기에 시 석 줄입니다. 삶을 노래하지 못하면 시가 태어나지 못하고, 삶을 꿈꾸지 않으면 시가 자라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 시를 씁니다. 아픔도 시로 쓰고 슬픔도 시로 쓸 뿐 아니라, 기쁨과 보람과 자랑과 꿈과 이야기와 웃음 모두 시로 씁니다.
오늘도 아침에 마당 한쪽에 쪼그려앉아서 제비꽃을 들여다봅니다. 어제그제 찬비가 내려서 마당 한쪽 제비꽃은 꽃송이를 야무지게 닫습니다. 꽃송이를 벌린 제비꽃도 곱고, 꽃송이를 꼭 닫은 제비꽃도 곱습니다. 우리는 모두 고운 숨결로 어깨동무를 하는 사람입니다. 4348.11.9.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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