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구 박사 -컬럼-
북한
공산당의 불법 남침으로 야기된 6•25전쟁이 일어난 지 꼭 71주년이 되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요즘 학생들의 대부분은 한국이 북침을 했다고 믿고 있다. 전교조의 활동으로 교과서도 그리 만들고, 교실에서도 그렇게 가르친다고 들었다. 북의 선전 선동을 자유대한민국에서 그대로 받아쓰고, 공산당의 선전을 마치 교리처럼 생각하고, 젊은이들에게 주입하려고 안달하고 있다. 그래서 요즘에 반공을 말하면 영락없이 수구 꼴통보수로 몰리고 꼰대로 취급 받기 일수이다. 반면에 평화를 말하고 이념과 사상을 초월해서 우리민족끼리를 부르짖는 사람들을 통 큰 지도자로, 열린 지도자로, 열린 지성인으로 대우 받는다. 그들은 6•25때 공산당이 대구를 거쳐 부산까지 점령하지 못해서 공산통일을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하여 못내 아쉽게 생각하고 있다. 하기는 북쪽은 6•25전쟁 후에 끊임없이 붉은 사상교육을 다그쳐 왔지만, 한국은 자유방임에 빠져서, 지금 서울에 인공기가 걸려도 잡아가는 기관이 없다. 이는 결국 세작들의 집요한 공작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언론, 예술까지 모두 장악했기 때문이다.
6•25는 김일성이 대한민국을 적화하기 위해서, 주일 새벽, 휴일에 모두가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군인들은 모두가 주말 휴가를 얻어 간 사이를 이용해서, 소련제 탱크를 앞세워 3•8선을 넘어 쳐들어 왔다. 자유대한 민국을 세운지 꼭 2년 만이었다. 국방도 허술했고, 나라도 정돈되지 않은 틈을 타서 한국을 공산화 하기 위해서 벌인 천인공노할 북한 공산당의 작품이었다. 우리나라는 자다가 쇠망치로 얻어 맞은 꼴이었다. 북한 공산당은 잘 훈련된 인민군과 탱크, 비행기를 앞세워 파죽지세로 낙동강 전선까지 밀고 왔고, 수 많은 피난민 행렬은 남으로 남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때 나도 그 피난민중의 하나였다. 내가 초등학교 학생이었으니 꼭 10살이었다. 부모와 형제들을 따라 내게 맞는 짐을 지고, 포항의 송도로 피난 가서 가족들과 합심해서 방공호를 팠다. 밤이 되자 피아간 총알의 불꽃이 장관이었고, 폭격기가 쉼 없이 퍼부었다. 한 밤인데도 비행기의 폭격으로 인해 대낮처럼 밝았다. 머리위로 박격포가 터졌고, 그 파편들로 인해 금방 사람들이 쓰러지고, 피를 흘리며 넘어지는 것을 눈으로 늘 보았다. 전쟁은 참으로 비극이고 비참했다.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었고, 영산강으로 피난민들이 한꺼번에 보트를 타고 가다 전복되어 죽은 사람들이 지금도 눈 앞에 선하다. 내가 다니던 포항남부초등학교는 불탔고, 우리집도 잿더미가 되었다. 인민군들이 포항을 점령하자 우리는 그렇게 정처 없이 남으로 남으로 피난대열에 끼여 남의 집 헛간에 자기도 하고, 간간이 군인들이 먹는 주먹밥을 얻어 먹기도 했다. 나는 본래 병약해서 피난 중에 전염병인 이질과 호열자(콜레라)등을 앓았지만, 기적적으로 살아 남았고, 울산 방어진까지 가는 동안 우리가족은 미군 부대에서 나온 성냥을 칼로 두 쪽으로 나누어 팔면서 겨우 연명을 해왔다. 3개월 후에 울산 방어진에서 포항으로 다시 돌아오니 포항제일교회만 온전히 보전되어 있고, 나머지는 말 그대로 도시는 초토화, 쑥대밭이 되어있었고, 폭격으로 인해 거대한 웅덩이가 여기 저기에 있었다. 집은 폭격으로 없어지고, 거리에는 시체들이 치워지지 않고 널려 있었다.
6.25 전쟁 중 다부동 전투의 승리를 감사해서 미군, 유엔군, 한국군을 위한 기념 손수건
6•25전쟁에서 공산군을 막아낸 것은 바로 그 유명한「다부동 전투」에서였다. 공산군 곧 인민군은 숫자나 화력 면에서 우세했기에, 아군이 다부동 전투에서 밀려나면 대구가 무너지고, 대구가 무너지면 김해평야를 거쳐 임시수도 부산이 점령될 위기였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우리나라는 김일성의 꿈이 이루어져 공산주의 나라가 될 뻔 했다. 그때 우리군과 유엔군은 결사항전으로 피의 계곡을 이루면서까지 다부동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다부동 전투는 피아간에 시체의 산을 이루었고, 피의 강이 흐르고 있었다.
무엇보다 1950년 8월 13일~30일간의 다부동 전투를 승리를 이끈 부대는 사단장 백선엽 장군이 이끄는 1사단이었다. 세계전사에 보기 드문 전쟁으로, 10여차례 고지를 뺏고, 뺏기는 전투였다. 그 후 유엔군이 합세했고,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백선엽 장군은 일본에 있던 맥아더 장군의 지원을 받아 적군지역에 융단폭격을 해서 인민군을 무력화시켰고, 대구를 지키고, 그 후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 작전’으로 전세를 바꾸어, 인민군을 3•8선 이북으로 몰아냈다. 그리고 서울을 수복하고, 평양을 탈환했고, 계속 북진하여 압록강까지 가서 통일을 바로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 국군은 중국 공산당의 인해전술로 꿈에 그리던 남북통일을 놓쳤다. 중국 공산당은 지난 70년간 우리에게 단 한 번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우리의 주 적이다. 그자들은 지금도 한국에 또 다른 인해전술로 모여 들어, 정치와 경제와 언론에 간여하고, 여론몰이를 하고 선거에 개입하는 등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다부동 전투의 영웅은 백선엽 장군이고, 그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건져낸 군인 중에 군인이었다. 이러한 그가 100수를 하고 죽자 현충원에 그를 안장하려는데, 백수 건달로 있다가 자기 아버지의 덕으로 국회의원이 된 김 아무게 의원은 그를 친일파로 몰아, 현충원에 묻히는 것은 불가하다고 입에 거품을 물었다. 그자들은 김일성이 적화통일을 못한 것이 그리도 아쉬었던 모양이다. 고(故) 백선엽 장군이 친일파라면 대한민국 모든 국민은 친일파이다.
당시에 한국의 모든 사람들은 나라를 잃고, 일본의 황국신민이 되어 모두가 신사참배를 했고, 모두가 애국헌금으로 일본에 비행기를 헌납했다. 국민 모두가 놋 그릇을 바치고 일본을 위해 부역을 했었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순교한 주기철, 손양원 목사, 박관준 장로, 산 순교자인 한상동, 손명복, 이인재 목사 등 50여명과 신사참배를 피해 해외로 망명간 박형룡, 박윤선 박사등을 제외하면 사실 모든 사람들, 모든 교회 지도자들은 친일파였다.
지금 와서 친북파는 괜찮고 친일파는 처단한다는 이중적 잣대로 몰고 가는 것이 오늘의 상황이다. 6•25, 70주년을 맞이하면서 말끝마다 이승만을 물고 늘어지고, 미국과 유엔군을 문제 삼는 사람들이 지금도 정권의 실세이자 평화통일의 견인차라고 한다.
나는 지금, 70년 전에 6•25 전쟁 당시, 이 땅에 유엔군으로 와서 참전했던 미국 군목 사이몬(Simon)이 차고 있던 그 십자가를 양복 왼쪽에 패용하고 있다. 그리고 다부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대구를 지켜낸, 미군과 유엔군과 한국군이 너무너무 고마워서 대구시민이 직접 만든 조그마한 기념품 손수건을 이번 달부터 가지고 다닌다. 결코 6•25을 잊지 말자는 뜻이다.
그 기념품 손수건에는, “Thank you UN Army, 1951 Taegu Korea”라는 글과 성조기와 윤엔기와 태극기가 함께 그려져 있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북쪽의 눈치를 보며, 김정은을 달래기에 온 힘을 쏟았으나 6월 16일, 북은 공동 남북연락사무소를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하고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과 독기를 품고 있다. 6•25가 일어 난지 70년이 지났지만 달라진 것은 없다.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 만세!
오늘도 건강하시고 중공우한폐렴에 조심하시고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코람데어
雜學淺識(잡학천식)
21년 6월 25일
6.25 이야기
6.25는 6.25사변, 한국전쟁. Korean War 등 다양하게 불리고 있으나 우리 정부(국방부)의 공식 명칭은 6.25전쟁이다
KBS만 한국전쟁이라고 쓴다
ㅡ피해는 참혹한데 얻은 건 없고
선전포고 없었고 종전도 아닌 휴전, 시작도 끝도 애매했던 전쟁.
거기다 2차대전과 월남전에 비해
6.25관련(헐리우드)영화가 거의 없어 '잊혀진 전쟁'이라고도 한다
ㅡ피아 불문 사망자가 불명확하며 군인과 민간인 250만~ 300만이 사망 또는 실종된 것으로 추정
북한군 사망 29만 실종 12만
중국군 사망 18만 실종 2만
한국군 사망 15만 실종 13만
유엔군 사망 3.8만 실종 6천 명이 통계되어 있다
ㅡ2차 대전(44년)때 5성 장군이 된 6.25 총사령관 맥아더.
트루먼 대통령과의 갈등과 중공군 서울 점령(1.4후퇴)책임으로 51년 4월 만71세로 해임되었다.
역대 미 5성 장군 9명 중 전쟁 중에 해임은 맥아더가 유일하다.
연설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 는 미군 군가의 한 구절이다. 84세에 세상을 떴다
ㅡ중공군과의 백병전에서 가장 잘 싸운 군대는 태국군으로 '작은 호랑이' 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백병전에서는 태국 무에타이가 태권도보다 쎈가 보다
미군 제외하고 가장 늦은 72년에 철수했고 포천 산정호수 가는 길에 '타일랜드 참전기념비'가 있다
ㅡ프랑스군의 대대장은 2차대전 끝나고 중장 예편한 장군이었다
6.25참전을 자원해서 대대장 계급인 중령으로 현역 복귀한 별종 군인이다. 그래도 모두가 대대장님 대신 장군님으로 호칭했다
ㅡ필리핀과 에디오피아는 당나라 군대 같아서, 한국 도착후 미군이 전면적으로 재무장시키고 훈련도 상당기간 다시 시켰다.
독자적인 전투는 없었고 미군 배속으로 싸웠다
ㅡ영국을 모국으로 하는 카나다 호주 뉴질랜드 룩셈부르크 벨기에 등 6개 나라는 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영연방 사단을 편성해
전투에 임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영국은 명실상부 막강 대영제국이었다
ㅡ미군은 흑백 인종 갈등이 심해,
전투 중 백인 보호 차원에서 흑인들만 따로 연대급으로 편성 전투했다. 흑인의 백인부대 배속은 전쟁끝난 54년부터이다
ㅡ일본 유학중이던 한국 학생들 거의가 학도병으로 참전했고 일본인들도 70명이 참전했는데 미군 배속으로 싸웠다
ㅡ인류 최초 달 착륙, 암스트롱은 미 해군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했고
피델 라모스 필리핀 12대 대통령은 보병장교로 참전했다
ㅡ60년 64년 올림픽 마라톤에서 연속 금메달을 딴 맨발의 마라토너 아베베도 에디오피아 보병으로 참전했다
ㅡ'귀신잡는해병' 이라는 한국 해병의 별칭은 6.25전쟁 미 종군 여기자의 기사 송고 제목에서 유래했다
ㅡ휴전협정 소식을 각 부대에 전보(모스부호)로 처음 알린 사람은 전국노래자랑의 송해다. 당시 전보병으로 근무했다
ㅡ소련도 공군 위주로 2만 6천 명 참전했는데 3차 대전으로의 확전을 우려해서 미국이 모른척 했다. 소련이 발표한 6.25전쟁 소련군 사망자는 299명이다
ㅡ6.25에 직간접으로 참전한 국가는 실제 전투 참가 20개 국, 의료 지원 5개 국, 물자 지원 20개 국 등 40여 개 국이 싸운 메머드급 세계 대전이었다
ㅡ터키에서는 '한국은 형제국' 인식이 매우 강해 군대 파견이 늦어지자 고교생들이 데모를 했다
(북한은 소련 위성국으로 생각 남한을 지원했다)
미 영 카나다 다음으로 많은 병력이 참전했는데 한국에 이슬람교를 처음 전파하기도 했다
ㅡ쿠바한테도 물자 도움 받고 당시 정신이 없던 장개석 대만 정부한테도 쌀 4만 톤을 받았다
ㅡ미군 주둔으로 음식이 하나 생겨났다, 부대찌개다.
북방식(의정부)과 남방식(송탄)이 있는데 국물이 약간 차이가 난다
불편한 역사가 만든 음식이라도 입에는 맞을 수 있다
ㅡ워커힐 호텔은
미8군 사령관 월튼 워커 중장의 이름을 따 지은 것이다
워커는 의정부~문산 도로에서 한국 군용 트럭과 부딪혀 숨졌다
그 곳이 미군 탱크 훈련중에 숨진 미선 효선의 사고지점과 거의 같다니 소름끼친다
ㅡ워커 아들도 대위로 한국전 참전했고 육군 대장까지 승진했다 주한미군 철수 적극 반대하다가 카터 대통령에게 짤렸다
부자간에 한국을 위해 헌신했다
ㅡ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책임과 의무를 실천했던 사람들이 수 없이 많았던 전쟁, 잊혀진 전쟁,
6.25는 그랬다. 그땐 그랬다
또 다른 각도에서의 6.25는
'잊을 수 없는 생생 6.25 전쟁사' (정명복)를 보면 도움이 된다
☆전투는 군인이 했지만 전쟁은 국민이 했음을 알게 된다☆
6.25, 71주년, 오늘은 주먹밥 대신 부대찌개를 먹어보자
남방식이던 북방식이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