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2. 사서의 시험에 대한 비판적 논의
3. 시제 출제의 한계 – 중복 출제 양상을 중심으로
4. 답안 작성의 한계 – 유사 답안을 중심으로
5. 결론
<한국어초록>
본 논문은 조선 후기 생원시(生員試)의 위상 저하를 보여주는 여러 현상 가운데, 시
험 자체의 내재적 요소인 시험 문제와 답변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 생원시의
주요 과목인 사서의(四書疑) 시험의 문답을 대상으로 정하고 이 시험의 문답에서 도
출되는 문제점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사서의 시험은 논어·맹자·대학·중용의
사서(四書) 가운데 보이는 내용상의 의문점에 대해 논리적으로 서술하여 답변하는 과
목으로, 조선 전(全)시기 동안 실시되는 내내 한정적인 시제와 쓸모없는 문제 출제,
전사(傳寫)의 심각함 등이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실제 사서의 시제와 답안을 살펴
본 결과, 시제의 경우 순조대 이후 중복 출제 문제가 급격히 증가하였으며 이는 정조
대부터 간행된 시제집과 과문집의 편찬이 영향을 준 것으로 파악하였다. 답안의 경우
요지(要旨)와 구성 방식이 동일한 유사 답안과 더 나아가 전사가 심각하게 의심되는
답안이 다수 존재하여, 모범 답안집의 공유와 동접(同接)의 답안을 베끼는 행태가 빚어낸 결과임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생원시 문답의 한계점은 조선 후기 문란했던 과장(科場)의 분위기와 더불어 생원시의 위상 저하를 앞당긴 요인이면서 동시에 몰락한 생원시의 위상을 대변해주는 현상이기도 하였다.
주제어 : 과거(科擧), 생원시(生員試), 사서의(四書疑), 시제(試題), 답안(答案), 중복
출제, 전사(傳寫)
1. 서론
과거 시험은 크게 경학의 이해도를 시험하는 명경업(明經業)과 글쓰
기 능력을 평가하는 제술업(製述業)으로 나뉠 수 있다. 이러한 양대
분류로 인해 명경업은 고려 시대에 처음 과거가 도입된 후 조선 시대에
폐지 될 때까지 전(全)시기 동안 언뜻 제술업과 그 어깨를 나란히 한
것처럼 보인다. 조선 초기 성종대에는 강경만으로 초시와 복시(覆試)의
합격자를 선발하여 전시로 진출시키는 명경과(明經科) 규정이 마련1)되
어 제술에 능하지 못한 경학 인재를 우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경학위
본(經學爲本)의 이념을 내세워 말기(末技)인 문장보다는 경학을 중시
했던 당대의 분위기는 사신 접대 등 문장력이 뛰어난 선비를 필요로
하는 시대적 상황2)을 맞이하면서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즉 조선 초기를
제외하고는, 명경은 실상 제술 시험에 가려 그리 중시되지 않았던 듯하
다. 진사시는 부활과 폐지를 거듭하다가 1453년에 과거 제도가 안정화
되면서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조선 중기가 되면서 어느덧 생원시보다
1) 성종실록 98권, 성종 9년 11월 23일 경진 4번째 기사 ; 11월 25일 임오 2번째 기사 등
2) 「중종실록」 41권, 중종 15년(1520) 11월 18일 기사. “經學爲本, 而詞章則末, 然明年
若文臣天使出來, 則館伴雖自當之, 然他文臣可以助之, 詞章不可不重也.”
<조선 후기 과거( 科擧) 생원시( 生員試) 문답의 한계점 고찰 397
그 위상이 높아지게 되었다. 이처럼 사장(詞章)을 중시하고 명경을 천시
하는 당대 분위기에 대해 조선 후기의 학자인 명고(鳴皐) 서형수(徐瀅
修, 1749-1824)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하였다.
송(宋)나라 말에 이르기를, “향을 사르며 진사(進士)를 취하고 눈을 부릅떠
명경(明經)을 대한다.”고 하였습니다. 왕오(王鏊)는 〈제과의(制科議)〉에서
말하기를, “명경은 바름에 가까운데도 선비들 가운데 변변치 못한 자들이 하
며, 사부(詞賦)는 부염(浮艶)에 가까운데도 선비들 가운데 뛰어난 자들이 일
삼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보건대 문사(文詞)를 귀하게 여기
고 명경을 천시하는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닙니다.3)
조선 후기로 넘어오면서 청대의 고증학이 유입되고 실용적인 학문의
유행 속에서 윤휴(尹鑴, 1617-1680)와 박세당(朴世堂, 1629-1703) 등
일부 학자들을 위시하여 주자의 해석에서 벗어난 자신만의 경학관을
정립하려는 시도가 생겨났다. 그러나 과거에서의 경학 시험은 폐쇄성과
한계성으로 인해 더더욱 그 자리가 좁아지게 된다. 이는 곧 소과 생원시
의 급격한 위상 저하로 이어지게 되는데, 급기야 늙은 선비를 생원이라
고 일컫게 되면서 생원시에 합격한 사람도 자기 자신을 진사라고 칭하
는 경우가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4)
지금까지 생원시의 위상 저하와 관련한 논의는 주로 제도적인 측면에
서 진행되었다. 생원시는 본래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을 부여하는 것을
3) 승정원일기 정조 8년(1784) 3월 21일 기사. “宋語曰, 焚香取進士, 瞋目待明經.
王鏊制科議曰, 明經雖近正, 而士之拙者爲之, 詞賦雖近浮艶, 而士之高明者爲之. 由
此觀之, 貴文詞而賤明經, 非今斯今.”
4) 송준호, 「李朝 生員進士試의 硏究」(대한민국 국회도서관, 1970), 29-30쪽.398 Journal of Korean Cul ture 45 / 2019.5.31.
목적으로 실시한 시험이었으나, 실제 과거 시험의 문과 합격자 가운데
유학(幼學)의 신분으로 합격한 자의 비중이 조선 초기인 15세기에
10~20% 정도였다가 조선 후기 70%를 가까이 치솟았다. 법전 규정상에
서는 생원과 진사가 일정한 성균관 수학 기간을 거친 이후에 문과에
응시할 수 있었으나, 실제 제도의 운영에서는 일정한 성균관 수학 기간
만을 기준으로 하였으며, 이마저도 16세기에 이르면 성균관 뿐만 아니
라 사학(四學)이나 도회(都會) 등의 출석 증빙을 통해서도 문과 응시가
가능했던 것이다.5) 소과에 합격하여 생원 및 진사의 칭호를 부여받는다
하더라도 이것이 곧 관직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소과에 도전한 유생들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였
는데, 초시(初試)와 복시(覆試)에서 모두 생원시보다 진사시의 응시자
가 많아 진사시의 경쟁률이 더 높음이 확인6)되었다. 위의 연구들은 문과
응시 자격시험으로의 기능이 유명무실해지고 진사시에 밀려 그 위상이
추락한 조선 후기 생원시의 실태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시험의 양 주체인 시관(試官)과 거자(擧子)들은 시험 주관 및 합격
염원이라는 각자의 입장에서 생원시를 맞이하였다. 시관의 부패와 사전
거래7), 거자들의 공동 제술 행위8) 등 사료(史料)와 개인 문집 등을 통해
드러난 과장의 부정행위는 비단 생원시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다만,
임금이 직접 시제를 출제하거나 몸소 시험장에 나오는 친시(親試)의
5) 소순규, 「朝鮮前期 幼學의 大科 급제에 대한 검토」(고려사학회 70집, 2018)
6) 김경용, 「조선후기 경(京)·향(鄕) 유생의 생원·진사 진출실태 비교연구 - 1846년 식년
감시를 중심으로 - 」(한국교육사학 40집, 2018)
7) 이규필, 「18-19세기 과거제 문란과 부정행위 - 무명자집의 사례를 중심으로」(한문고
전연구 27집, 2013)
8) 김동석, 「과거 시험의 공동 제술에 대한 연구」(고문서연구 47집, 2015)
가능성이 있는 문과와는 달리 시관들에 의해 문제가 출제되는 소과 시
험은 시험장의 관리 감독이나 시험을 대하는 태도의 측면에서 분명 차
이가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 조선 후기의 난잡했던 과장의 상황 또한
생원시의 위상을 더욱 악화시키는 데 일조하였다.
필자는 이러한 생원시의 위상 저하를 보여주는 여러 요인에 대해
제도적 측면 외에 시험 자체의 내재적 측면에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 판단하였고, 이를 생원시의 실제 문답 속에서 도출해 보고자 한다.
시관이 출제한 시제와 거자들이 작성한 답안의 실례를 살펴보고 이에
존재하는 문제점을 고찰해본다면, 당대 생원시의 실체에 더욱 가깝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조선 전(全) 시기 동안 생원시의 주요
과목이었던 사서의(四書疑) 시험에 주목하였다.
사서의란 논어·맹자·대학·중용의 사서(四書) 가운데 한 가
지 책 혹은 두 가지 이상의 책에서 보이는 내용상의 의문점에 대해 논리
적으로 서술하여 답변하는 것이다. 소과(小科) 생원시와 식년·증광 대과
(大科) 초시의 초장(初場)에서 시험 보았던 과목으로, 과문육체(科文六
體)라 불리는 의·의·시·부·표·책(疑·義·詩·賦·表·策)의 하나이다. 고려 시
대의 명경과에서 치러진 경의(經義) 시험이 조선 시대로 넘어오면서
사서의와 오경의(五經義)로 나뉘게 되었으며, 이후 1894년 과거 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존속했던 시험9)이다.
9) 사서의 과목에 관한 연구는 이래종, 「疑義의 形式과 그 特性」(大同漢文學 39집,
2013), 윤선영, 「正祖代 四書疑 試題 小考」(泰東古典硏究 38집, 2016), 「순조~철
종대 科擧 四書疑 시제 출제 경향 연구」(奎章閣 51집, 2017), 「조선 시대 科擧
四書疑 試文 一考」(漢文學論集 50집, 2018) 등에 자세하다.
조선 후기 생원시 문답의 한계점을 고찰하는 데 있어 사서의 과목이
적절한 대상이 되는 이유는 사서의 시험의 시제가 사서 안에서 출제되
므로 그 범위가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사서의는 중국 경의(經
義) 과목의 영향을 받아 조선에서 독자적인 제도로 재탄생되었으나, 주
자의 주석을 중심으로 답안을 작성하라는 경의 과목의 규식(規式)10)은
그대로 조선에 전해졌다. 그 결과 사서의 답안이 대전본 주석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작성된 점 등에 근거하여 이 과목의 문답이 조선
후기 생원시가 가진 내재적 한계점에 대해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자료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본고에서는 시권(試券), 과문집, 개인 문집 등에서 필자가 수집·정리
한 사서의 시제와 답안을 대상으로 하여, 생원시 문답11)의 측면에서
각기 보이는 한계점에 대해 궁구해보도록 한다. 이를 위해 사서의 과목
을 향한 당대 지식인들의 비판적 논의들을 우선 살펴본 후, 이러한 한계
점이 실제로 사서의 문답 속에서 발현되는지 그 실례를 들어 구체적으
로 고찰해보도록 하겠다.
2. 사서의 시험에 대한 비판적 논의
소과 생원시에서 치러진 과목은 사서의와 오경의(五經義) 두 편이며,
10) 明史 권70, “四書主朱子集注, 易主程傳·朱子本義, 書主蔡氏傳及古注疏, 詩主朱
子集傳. 春秋主左氏·公羊· 穀梁三傳及胡安國·張洽傳, 禮記主古注疏. 永樂間頒四書
五經大全, 廢注疏不用, 其后春秋亦不用張洽傳, 禮記只用陳澔集說.”
11) 본 논문에서 대상으로 삼은 것은 소과 생원시에서 출제된 사서의 문답이나, 사서의
시험은 대과 초시의 초장에서도 실시되어 비록 소량이나마 대과 초시의 자료가 남아
있다. 본고에서는 생원시에서의 문답을 우선으로 논의를 펼치되, 중복 출제 경향 등의
일부 논의에서 대과의 자료도 근거로 보충하였음을 밝혀둔다.
문과 초시의 초장에서는 사서의와 오경의, 논(論) 가운데 2편을 뽑아
시험 보았다. 영조대 이후에는 사서를 중시하는 당대 분위기와 사서의
를 원편(原篇)으로 작성하고 오경의는 비편(備篇)으로 대충 흘려 쓰는
관행12)으로 인하여 오경의를 폐지하고 사서의 1편과 논 1편을 시험 보
았다. 사서의는 영조대에 이르러 문과 초시 과목에서 제외된 오경의와
는 달리 조선의 전(全) 시기 동안 대과 초시 및 소과의 필수 과목으로
출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험의 목적과 방식, 존폐에 관하여
조선 초기부터 끊임없는 의견들이 오갔다. 여기에서는 사서의 시험이
실시되는 동안 생겨났던 비판적인 논의들에 대해 시제와 답안의 측면으
로 나누어 살펴보도록 한다.
1) 한정적인 시제 출제 범위와 쓸모없는 문제 양산
조선 중기로 넘어오면서 사서의 시제에 관한 폐단들이 논의되기 시작
한다. 과거 시험의 시제는 당대 사회의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기 때문에
시관들은 시제 출제에 매우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시제를 출제하
는 데 있어 금기로 여겨지는 사항들이 여럿 있었는데, 이미 다른 시험에
나온 문제, 명나라와 관계되는 사안, 당대의 일을 비방하는 내용 등을
출제해서는 안 되었다.13) 이를 어길 시에 시관은 파면을 면치 못하였다.
이처럼 과거 시험의 시제는 엄격한 규정 속에서 출제되었으나 당대의
문신들은 사서의 시제에서 도출된 여러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이
는 주로 한정적인 시제 출제 범위와 관련한 것이었다. 인용문을 통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12) 이성무, 한국의 과거 제도(한국학술정보(주), 2004), 258-261쪽.
13) 조좌호, 「學制와 科擧制」한국사 10, (국사편찬위원회, 1974) 166쪽.402 Journal of Korean Cul ture 45 / 2019.5.31.
지금 과거에 응시하는 자들은 각기 모범 답안의 형식으로 만들어놓은 문
장이 있어 그것이 쌓여 책을 이룰 정도이다. 시권을 바쳐 지우(知遇)를 기다
리는 부류들은 대부분 오래전에 지어 둔 것으로써 그 뜻을 이루니 대개 그
시제가 넓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또 법을 고쳐 오경과 사서를 합한 구서(九
書)에서 번갈아 시제를 낸다면, 글재주 없는 선비들은 반드시 조금 군색할
것이다.14)
사서오경의 대문(大文)은 한정이 있고, 개국 후 2백 년 동안 서울과 팔도의
초시(初試)·복시(覆試) 및 유생의 사사로운 과작(科作)은 천억뿐만이 아니다.
시제는 한정되어 있는데 그 쓰임은 무한하므로 올해 출제한 문제가 혹 다음
해에 나오기도 하고, 서울에서 출제한 문제가 혹 외방에서 나오기도 하며, 유
생이 사사로이 지은 시제가 또한 국시(國試)에서 나올 수 있다.15)
위 인용문들은 사서의 시험의 시제 출제 범위가 한정적이라는 것에
대한 의견이다. 이에 대해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은 사서의
와 오경의 문제를 따로 내지 말고 합하여 하나의 문제를 낸다면 시제의
범위가 조금은 넓어져 글재주가 없는 선비들은 곤혹스러워 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인조대에 오경의 시험을 한 경에 하나씩 출제하던 것을
오경에서 한 문제로 내게끔 한 것16)과 같은 맥락으로, 사서와 오경을
합쳐 9서에서 한 문제를 낸다면 출제 범위가 넓지 않음에서 오는 한계점
14) 李瀷, 성호사설 권12, 「인사문(人事門)」, ‘六經義四書疑’ “今之應舉者, 各有體裁,
積成卷秩. 如進卷待遇之類, 多以宿作逞志, 盖以命題不廣故也. 若又改法合九書迭
爲題, 無文之士, 亦必少窘矣.”
15) 「명종실록」 권14, 명종 8년(1553) 6월 9일 갑신 1번째 기사. “四書五經之大文有限,
而開國將至二百年矣. 京中八道初試會試及儒生私作, 不啻千億, 而以有限之題, 供
無限之用, 故今年所出之題, 或出於後年, 京中所出之題, 或出於外方, 儒生私作之
題, 亦出於國試.”
16) 경국대전 ; 「인조실록」 권28, 인조 11년 7월 13일 계묘 1번째 기사
을 조금이나마 보완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한정적인 시제 출제 범위
는 시제의 중복 출제로 직결되는 문제이다. 당대의 문신들은 이러한
중복 출제에 대해 어쩔 수 없다 여기면서도 이에 관한 자구책을 끊임없
이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서의 시제가 한정적이라는 점으로 인해 야기된 또 다른 논의는 시관
들이 문제 출제만을 위해 쓸모없는 문제를 양산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란은 과거 시험장에서 출제된 의제(疑題)와 같다. 시관은 본래
심오한 의심이 없는데도 응시자들이 한갓 여러 설을 써 내릴 따름이니, 아
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17)
감시의 복시(覆試)를 치를 때 사서의 시제를 들으니, “묻노라. 논어에서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에게 몇 년의 수명을 빌려주어 마침내 주역을 배
울 수 있다면 큰 허물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고, 다음 장에서 ‘공자께서
평소 말씀하신 것은 시서(詩書)와 예(禮)를 행하는 것이었다.’라고 하였으니,
공자께서 전후의 말이 같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문제였다. 이는 해
당 구절 안에서도 말이 되지 않으니, 이른바 시관이 문제를 제대로 출제할
줄은 모르면서 사욕만 부릴 줄 안다는 말이다. 이것이 무슨 모양이란 말인가!
진실로 이웃 나라가 알게 해서는 안 될 일이라 하겠다.18)
위는 조선 후기의 문신인 김이안(金履安, 1722-1791)이 유헌주(柳憲
17) 三山齋集 권5, 「答兪擎汝」, “此等論難, 只似科塲疑題. 主司本無深疑, 擧子徒費
閒說, 未見所益耳.”
18) 無名子集 12책, 「後科說(三)·試官不知出題」, “監試覆試時聞疑題, 曰‘問. 子曰,
假我數年, 卒以學易, 可以無大過矣.’ 其下章曰, ‘子所雅言, 詩書執禮.’ 前後之言不
同, 何歟? 此可謂當句內不成說也, 所謂試官不知出題, 只知行私, 是甚模㨾, 眞所謂
不可使聞於鄰國也.”
柱)에게 준 편지에서, 논어의 “如有周公之才之美, 使驕且吝, 其餘
不足觀也已.” 구절의 교(驕)자와 린(吝)자의 의미에 대해 두 글자를 억
지로 나누어 의미를 분류할 수 없음을 설명하며 이는 마치 과장의 사서
의 시제와 같다고 한 말이다. 위 구절을 예로 들고 교(驕)자와 린(吝)자
의 의미 차이에 대해 묻는 것이 바로 사서의 시제의 전형적인 방식으로,
시관이 심오한 의심이 없음에도 쓸데없는 문제를 억지로 만드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아래는 무명자(無名子) 윤기(尹愭, 1741-1826)가 자신
의 문집에서 1814년에 실제 출제된 문제를 예시로 들며 시관이 문제를
제대로 출제할 줄 모르는 것으로 옆 나라에서 이를 알게 하면 안 될
정도로 부끄러울 따름이라고 가차 없이 비판한 내용이다. 특히 윤기는
문장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윤기가 말한 ‘말이 안 되는
문장’이라는 것의 의미가 정확히 어떠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는
당시 시험에 참여하여 3등 27위로 입격한 유생 안윤직(安允直, 1786-?)
의 답안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다. 안윤직은 부자께서 주역을
배우지 않아도 이미 허물이 없으나, 주역을 배운 후에 허물이 없을
것이라 여긴 것은 성인이 스스로를 낮추고 겸손하게 한 말이며, 다른
사람들을 힘쓰도록 면려한 말일 따름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말의 함의
를 읽지 못하고 그저 시서예(詩書禮)만을 말했으니 전후의 말이 다르다
고 여기는 것은 성인의 가르침을 견강부회한 것으로 이러한 의문을 가
져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19) 윤기가 의미한 바도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2) 전사(傳寫)의 문제
과거 제도의 여러 문제점에 대해 논할 때, 가장 많이 지적되었던 부분
19) 臨軒功令 20책, <安允直의 답안(1814)><조선 후기 과거( 科擧) 생원시( 生員試) 문답의 한계점 고찰 405
이 바로 베껴 쓰는 문제, 즉 전사(傳寫)의 행태가 심각하다는 것이다.
1818년(순조 18) 성균관 사성(司成) 이형하(李瀅夏)는 과거 제도의 8가
지 폐단이라는 이른바 ‘과거팔폐(科擧八弊)’를 지어 상소문을 올렸다.
그 가운데 첫 번째로 말한 남이 대신 글을 지어주거나 대신 써주는 차술
차서(借述借書)20)가 이에 해당한다. 이는 사서의 역시 예외가 아니었는
데, 선조대부터 문제가 제기되어 광해군 때에 집중적으로 논의21)되었
다.
박안현(朴顏賢)이 이르기를, “사서의(四書疑)는 과거의 극심한 폐단입니
다. 한 사람이 글을 지으면 열 사람이 그것을 베껴 쓰고 모든 과장(科場)의
글이 우르르 따라하여 취사선택이 어려우니 이 시험은 마땅히 폐지해야 할
듯합니다.”22)
병란 이후부터 무릇 선비 되는 자들이 오로지 고문을 표절하는 데에만 힘
쓰고 독서를 전혀 하지 않습니다. 사서(四書)는 바로 초학자의 첫걸음인데
그 문호(門戶)를 알지 못하는 자가 많으며 심지어 생원시에서는 사서의를 지
을 수 있는 자가 거의 없습니다. 한 사람이 답안을 지으면 백 사람이 그것을
베끼니 목을 빼고 엿보면서 이리저리 돌려가며 베끼기를 마치 하리(下吏)들
이 조보(朝報)를 서로 전하듯이 합니다.23)
20) 순조실록 21권, 순조 18년(1818) 5월 29일 병인 4번째 기사. “若言其爲弊之目,
則曰借述借書之無忌也, 隨從挾冊之狼藉也, 入門之蹂躪也, 呈券之紛遝也, 外場之
書入也, 赫蹄之公行也, 吏卒之換面出入也, 字軸之恣意幻弄也.”
21) 「선조실록」 193권, 선조 38년(1605) 11월 3일 계유 1번째 기사; 「광해군일기[정초
본]」 24권, 광해 2년(1610) 1월 11일 무자 6번째 기사; 「광해군일기[중초본]」 45권,
광해 3년(1611) 9월 21일 정사 2번째 기사; 「광해군일기[중초본]」 59권, 광해 4년(161
2) 11월 19일 기유 2번째 기사 등에 자세하다.
22) 위 기사(1605).
23) 위 기사(1612)
위 인용문은 사서의 시험의 전사 문제가 심각함을 보여준다. 선조(宣
祖)는 이에 대해 각기 자신의 의사대로 짓는데도 저절로 같아지는 것인
지, 글을 서로 베껴 같아지는 것인지에 대해 물었고, 신하들은 글을 베끼
기 때문에 같아지는 문제임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해결책
으로 일어서서 답안을 작성하지 못하게끔 하자 유사한 문장이 없어졌다
고 하였다.24) 사서의 과목 자체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고시와 감독 방식
의 변화로 해결할 수 있음을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방식은 그다지 효과를 보지 못했던 듯하다. 전사의
폐해는 병란을 치른 후에 더욱 심하게 나타남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풍습이 생긴 기본적인 이유는 제의(製疑)할 줄 아는 자가 극히 적었기
때문이다. 병란 후 극심한 혼란 속에서 그 폐해가 극에 달하게 되자
과장에는 의심판(疑心板)이 등장하게 된다. 의심판이란, 사서의 의문점
을 해득한 사람 또는 그것을 적어놓은 책을 일컫는 말로 과장에서 조금
이라도 사서의에 능통해 보이는 자가 나타나면 거자들이 “아무개 접(接)
이 의심판이 있다.”라고 말하여 우르르 그에게 몰려가 과장이 어수선하
여 저자나 다름이 없었다고 한다.25)
전사 문제는 사서의 과목을 폐지하고 다른 과목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여론을 불러일으키게 되었으며, 조선 중기의 학자 이수광(李睟光,
1563-1628)은 지봉유설에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견을 밝혔다.
유생들이 책을 읽지 않는 폐해가 오늘날보다 더 심한 적이 없으니 다른 사
24) 위 기사(1605).
25) 위 기사(1611).
람의 작품을 표절하여 요행으로 합격하는 것을 능사로 여긴다. 사서의 과목
에 이르러서는 불과 몇 사람도 안 되는 작자가 쓴 글을 과장에서 모두 베끼
어 제출하며 혹 몇 글자를 가감하거나 혹 한 글자도 고치지 않고 그대로 사
용하니 마치 베끼어 등록을 만드는 것과 같다. 시관들 또한 이러한 사실을
밝히려고 하지 않으며 합격 인원을 채우기가 힘들다는 이유로 이처럼 뽑고
있다. 그러므로 서로 다투어가며 더욱 나쁜 짓을 행하고 이에 폐습은 금지할
수가 없게 되었다. 논자들은 마땅히 사서의 과목을 없애고 논(論)으로 이를
대신해야 한다고 여기고 혹자는 생원·진사시에서 모두 시부(詩賦)로 시취하
고 사서의를 없애야 한다고 여긴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정해진 것이 없으니,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알지 못하겠다. 하지만 선비들의 폐습을 먼저 바로잡
지 않으면 아마 소용이 없을 것이다.26)
당대 지식인의 눈에 비친 사서의 과목의 폐해를 서술한 부분이다.
이수광은 이외에도 지봉유설에서 사서의 과목에 대한 부정적인 시
각27)을 여러 차례 나타낸 바 있다. 이러한 의견은 이수광 개인만의 생각
은 아니었으며, 조선왕조실록 등에 나타난 여러 기사들을 통해서도
드러나는 바이다. 이러한 사서의 과목의 폐지 여론에 대해, 예조에서는
다음과 같이 회계(回啓)하였다.
사서의는 베껴 쓰는 폐단이 비록 심하기는 하지만, 지방의 응시자들 가운
26) 이수광, 芝峯類說 권4, 「官職部」, “儒生不讀書之弊, 未有甚於今日, 以剽竊他人
之作, 僥倖得捷爲能事. 至於四書疑, 則作者不滿數人, 而擧場皆謄出. 或加減數字,
或不改一字而用之, 如書寫謄錄之爲. 試官亦眩於考覈, 且不可闕額, 因而取之. 故爭
相效尤, 遂成弊習, 不可禁止. 議者以爲宜罷四書疑, 以論代之, 或以爲生進皆取詩賦
而罷四書疑議. 久不定, 未知何者爲善, 然不先正士習, 則恐無益也.”
27) 이수광, 위의 책 권8, 「文章部一」, “我國科文中四書疑體式, 極是無謂. 嘗見中朝書
籍中有四書疑一篇, 乃胡元時淅江鄕試之作也, 與今科場所製文字如一. 我國科文之
弊, 蓋源於此.”
데 화려한 문장을 짓는 데는 부족해도 문리에 뛰어난 자가 종종 합격하는 일
이 있으니, 참으로 폐지할 수는 없습니다. 반정 이후에는 시험관이 베낀 답안
을 자못 잘 분별해내고 참신한 글을 뽑았기 때문에 응시자들이 서로의 답안
을 베끼는 폐단이 이미 2, 3할은 줄었습니다.28)
비록 사서의에 전사의 폐단이 있으나, 경국대전에 명시된 생원시의
과목을 함부로 없앨 수 없으며, 이는 시관의 안목과 노력으로 해결 가능
한 문제임을 밝혔다. 시관이 된 자가 부화뇌동하는 자들을 잘 살피고,
이치와 뜻이 통하는 문장을 뽑는다면 반드시 이 시험을 통해 인재를
얻을 수 있고 많은 선비들이 이에 권면될 것이라 여긴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관리 주체의 노력으로 조선 후기에는 전사의 문제가 해결되
었을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조선 후기로 갈수록 전사의 문제는 더욱더 심해
졌으며, 관리 주체와 응시자와의 부당한 거래 등이 횡행하며 공정한
경쟁이라는 과거 시험의 취지가 완전히 무색해졌다. 여기에 문과의 예
비 단계라는 소과 제도의 유지 명분까지 흔들리며29) 생원시는 점차 시
험의 동력을 잃어갔다.
28) 「인조실록」 26권, 인조 10년(1632) 5월 19일 병진 1번째 기사. “四書疑則謄竊之弊
雖甚, 而外方擧子, 短於辭華, 而優於文理者, 往往由此得售, 固不可廢. 反正以來,
考官頗能辨其謄寫, 取其新體, 故擧子謄寫之弊, 已減十之二三.”
29) 영조대 이후로 생·진시는 문과의 응시자격으로의 수단보다는 지방사회에서 양반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한 자격증 정도로 활용되었다. 조좌호, 한국과거제도사연구(범
우사, 1996), 153-157쪽.
3. 시제 출제의 한계 – 중복 출제 양상을 중심으로
여기에서는 생원시 시제의 한계점으로 지적되었던 한정적인 시제 출
제 범위가 실제 중복 출제의 양상으로 드러나는지를 사서의 시제의 예
시를 들어 살펴보고자 한다. 시제 출제의 엄격한 규정에 대해서는 앞
장에서 전술하였다. 이 가운데 시제의 중복 출제에 관한 사안은 시제
출제를 명하는 임금과 시험에 응시하는 거자들 모두에게 상당히 예민한
부분이었다. 이는 1560년 두 군데의 과장에서 나온 문제가 같은 이유를
묻고 다르게 할 것을 명한 일, 1617년 부(賦)와 표(表)의 시제를 제판(題
板)에 걸자, ‘향시에서 일찍이 출제되었던 제목이다.’고 하면서, 유생들
이 시제를 거듭 고치기를 청한 일, 1669년 대사헌 조복양(趙復陽)이
정시(庭試)에서 시제를 중복되게 출제한 일로 탄핵을 입은 일30) 등의
여러 사건을 통해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시제의 중복 출제는 사서의만의 문제는 아니었으나, 사서의는 다른
과목에 비해 중복 출제가 더욱 빈번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사서(四
書)의 경문은 범위가 한정되어 있지만, 시관들은 매 식년 및 증광시가
설행되는 해마다 최소 한성시 6문제(생진시 초·복시와 문과 초시의 일·
이소) + 향시 10여 문제 이상을 출제해야 했다. 그 가운데 시험으로
낼 만한 가치가 있고 선유들 사이에서 논란이 있어 기술할 내용이 풍부
하면서도 채점하기 용이한 구절을 찾다 보면 더욱더 그 범위는 좁아졌
고, 비슷한 문제가 계속해서 출제되는 현상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중복 출제는 순조대 이후로 급격히 증가하여 사실상 19세기 이
30) 「현종개수실록」 20권, 현종 10년(1669) 2월 26일 기축 2번째 기사; 「광해군일기(중
초본)」 117권, 광해 9년(1617) 7월 19일 신사 3번째 기사; 「명종실록」 26권, 명종
15년(1560) 9월 10일 계유 1번째 기사
후의 문제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는 시제집의 간행 및 조선 말기 과거
제도의 기강 등과 연관이 있어 여러 가지 상황을 종합적으로 살펴보아
야 한다.
이를 위해 사서의 시제 가운데 중복 출제로 여겨지는 여러 시제들을
살펴보고 이 시제들이 중복 출제된 과정과 그 경향에 대해 분석해보도
록 한다. 여기서 말하는 중복 출제 문제라는 것은 넓은 범위에서는 같은
구절을 인용하고 질문의 요지가 같은 ‘유사 문제’를 일컬으며, 좁은 범위
에서는 한두 글자의 출입만 있을 뿐, 이전에 출제된 문제를 그대로 베낀
것으로 확정할 수 있는 동일 문제를 의미한다. 필자가 수집한 800여
개의 사서의 시제 가운데 중복 출제 문제군으로 엮을 수 있는 시제들은
총 43군 150여 문제였다. 이는 크게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차례대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1) 같은 시험에 출제된 시제가 비슷한 경우
조선 시대의 시관은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고 세분화되어 있었는데,
담당 직무에 따라 고시관(考試官)과 감시관(監試官), 차비관(差備官)
으로 나눌 수 있다. 고시관은 시제의 출제 및 고권(考券), 과차, 방방(放
榜) 등 해당 과거 시험의 책임자를 말하는데 상시관(上試官)이라고도
한다. 시제는 시관들이 이른 새벽에 한자리에 모여 결정하였는데, 각자
자신 앞에 놓인 책자를 고열(考閱)하여 서로 의논한 뒤 출제하였다고
한다. 시관 1명의 단독 출제가 아닌, 여러 시관들이 의논하여 함께 출제
하는 이러한 방식은 일소와 이소의 시험 문제가 겹치지 않도록 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시험도 아닌 같은
시험 내에서 동일 문제가 출제된 경우가 더러 있어 그 예시를 살펴보고
자 한다.
◎ 問. 夫子謂, “令尹子文, 忠矣”, 問其仁曰, “未知, 焉得仁”, 又謂, “陳文
子, 淸矣”, 問其仁曰, “未知, 焉得仁”. 忠者當無不仁, 淸者當無不仁矣. 旣許
其忠, 而不許其仁, 旣許其淸, 而不許其忠者, 何歟? 忠者·淸者不得爲仁, 則
比干之忠·伯夷之淸, 亦不得爲仁歟?
<式年監試覆試一所(1798)>
◎ 問. “子張問令尹子文曰, 忠矣”, 曰, “仁矣乎?”, 曰, “未知, 焉得仁”. 忠
者, 宜無不仁, 而旣許其忠, 不許其仁者, 何歟? 子張又問陳文子, 子曰“淸
矣”, 曰 “仁矣乎?” 曰, “未知, 焉得仁”. 淸者宜無不仁, 而旣許其淸, 不許其
仁者, 何歟? 忠者不得爲仁, 則比干之忠, 亦不得爲仁歟? 淸者不得爲仁, 則
伯夷之淸, 亦不得爲仁歟? <式年監試覆試二所(1798)>31)
위는 1798년 식년감시 복시의 일소와 이소에 같은 문제가 출제된 경우
이다. 이 문제는 논어「공야장(公冶長)」에서 영윤자문(令尹子文)과
진문자(陳文子)의 사람됨을 각기 충성스럽고[忠] 청렴하다[淸]으로 표
현한 구절을 인용하여 출제하였다. 충성스럽고 청렴하다고 말하였으나
인(仁)까지는 허여하지 않은 이유와, 비간(比干)과 백이(伯夷) 등 인하
다고 허여한 인물과의 비교 등을 질문하였다. 위 문제는 인용 방식 등에
서 차이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같은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 시험은
같은 날 동시에 치러지는 것이었기 때문에 시관이 새로운 문제를 만들
고자 하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점 외에 사실상 큰 문제가 될 것은 없어
보인다. 이는 1777년 증광감시 초시에서 함경남도와 북도가 모두 논어
의 ‘賢賢易色章’에서 출제한 것32) 등 향시에서도 자주 보이는 현상이
31) 崇禎三戊午式司馬榜目 附錄412 Journal of Korean Cul ture 45 / 2019.5.31.
다. 조선 시대 과거제에서는 분소법(分所法)의 시행으로 같은 시험에서
시제가 달라 거자들의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는 지적이 있었다. 이로
인해 일소와 이소 혹은 남도와 북도의 문제를 비슷한 수준으로 출제하
고자 한 시관들의 의지로 만들어낸 결과인지, 그저 우연의 일치인지는
알 수 없다. 예시를 하나 더 살펴보도록 하겠다.
◎ 問. 中庸不偏不倚
<增廣監試初試二所(1891)>
◎ 問. 中庸 (中庸篇題曰, 中者不偏不倚, 無過不及之名. 先儒曰, 不偏不
倚者, 中之體也, 無過不及者, 中之用也. 用何工夫, 可以立中之體, 做何工
夫, 可以立中之用歟?)
<增廣監試覆試二所(1891)>33)
위는 같은 시험의 초시와 복시에서 유사한 문제가 출제된 경우이다.
이 시험의 시제는 上之卽祚二十九年辛卯慶科增廣司馬榜目에서
모두 위와 같이 생략하고 있어, 자세한 시제를 알기 어렵고 다만 ‘不偏
不倚’라는 핵심어만을 가늠할 뿐이다. 그런데 이 시험에서 3등 63위로
입격한 신구희(申九熙, 1831-?)의 시권을 살펴보면 ‘問云云’ 아래에 작
은 글씨로 시제를 기록하고 있어 복시 이소의 시제가 괄호 안에 서술된
문장임을 알 수 있다. 이 시제 역시 중용의 不偏不倚장에 대한 질문이
었음이 확인된다. 이 시험의 초시 시행 날짜는 2월 27일이었으며, 복시
는 5월 22일에 치러졌다. 약 3개월 간의 시간적 간격을 두고 치러진
다음 단계의 시험에서 초시 때와 동일 구절에서 문제가 나왔다는 것은,
32) 京外題錄 小科題.
33) 上之卽祚二十九年辛卯慶科增廣司馬榜目 附錄, <1891년 申九熙 시권>(국사편
찬위원회 제공)<조선 후기 과거( 科擧) 생원시( 生員試) 문답의 한계점 고찰 413
위의 예시와는 또 다른 문제점이 야기될 수 있다. 복시로 진출한 100여
명의 유생들은 각기 초시에서 일소 또는 이소에 속하여 시험을 보았을
텐데, 이소에서 시험 보았던 유생들은 초시에서 이미 써 낸 질문을 복시
에서 다시 맞닥뜨린 상황이 된 것이다. 이는 일소에서 시험을 보았던
유생들과 형평성에 있어서도 어긋날 수 있다. 관리 체계가 완전히 무너
진 과거 시험 폐지 직전의 어지러운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2) 정조대 경연에서 언급된 후 중복 출제된 경우
경전에 대해 말하기를 고기 먹는 것만큼이나 즐긴다34)고 말하던 정조
는 자신의 학문적 호기심과 문신들의 학문 수준 진작을 위해 초계문신
제를 시행했다. 초계문신으로 선발되어 정조와 함께 경연에 참여했던
당대의 각신(閣臣)들은 이미 1780년부터 과거의 시관으로 자주 임명35)
되어 임금을 도와 과거를 주관하였다. 호학군주였던 정조와 최고 수준
의 문신들이 토론했던 내용은 당대의 군주가 공인한 경문의 주요 현안
이라는 점에서 당대 학자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였다. 시관이 된
문신들은 자연스럽게 경연의 내용을 떠올렸을 것이며, 이를 참고하여
과거 시험 시제를 만들었다.36) 여기에서는 정조가 경연에서 문신들과
토론한 이후 유사한 시제가 출제되어 그 후 계속해서 중복 출제된 문제
34) 홍재전서 권122, 「魯論夏箋」, 自序. “予嗜於談經, 若芻豢之悅也.”
35) 김문식, 조선 후기 경학 사상 연구(일조각, 1996), 38쪽.
36) 이는 1781년(정조 5)의 경연에 참여하였던 초계문신 이시수(李時秀, 1745-1821)
등이 1801년 증광문과 초시의 시관이 되어 경연 당시 정조의 질문을 참고하여 시제로
출제한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홍재전서에 실린 당대 경연에서의 물음은 “此章病痛,
當於何看之? 先儒以四有所, 爲心在之病, 視不見·聽不聞·食不知味, 爲心不在之病,
在亦病, 不在亦病, 則在不在之外, 有何得其正之道耶?”이며, 1801년 증광문과초시
에 출제된 문제는 “問. 大學正心章四有所, 先儒以爲心在之病, 視不見·聽不聞·食不
知味, 先儒以爲心不在之病, 在亦病, 不在亦病, 則如何用工, 方謂心得其正歟?”이다.
.
들에 대해 예시를 들어보고자 한다.
◎ 此章所謂其淵其天, 非特如之而已, 則比之上章所謂如天如淵, 似可差
殊看, 而上章與此章皆論天道, 則又豈有差殊之可論乎? 然語類則有表裏觀
之訓, 章句則但曰非特如之云云, 而表裏之意, 不少槪見者, 何也?
<홍재전서「경사강의」·중용(一)(1781)>
◎ 問. 中庸三十一章曰, “溥博如天, 淵泉如淵.” 三十二章曰, “淵淵其淵,
浩浩其天.” 朱子釋之曰, ‘其淵其天, 則非特如之而已.’ 然則如天如淵上面,
又有其淵其天, 一等地位耶? 如天如淵, 乃是說至聖之德, 則至聖之外, 宜無
一毫可以加者, 而今曰非特如之而已者, 何歟? 且前章先天而後淵, 後章先淵
而後天, 亦有深義之可言歟?
<平安道增廣監試初試(1803), 安東都會增廣監試初試(1813), 式年監試初
試(1828)등 출제>37)
위 문제는 중용의 두 구절에서 하늘[天]과 연못[淵]에 대해 ‘같다
[如]’고 한 것과 ‘그것이다[其]’라고 표현을 달리한 이유와, 이에 대한
주자의 주석, 天과 淵의 선후 순서 차이 등에 대해 질문한 것이다. 정조
는 1781년 경연에서 여러 신하들과 이에 대해 토론하였는데, 초계문신
김재찬(金載瓚, 1746-1827)은 이에 대해 ‘如天如淵’은 지성(至聖)의 덕
이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써 말한 것이고, ‘其天其淵’은 지성(至誠)의
도가 안에 차 있는 것으로써 말한 차이점이 있다38)고 하였다. 이외에도
37) 臨軒功令 66책(1803), 臨軒功令 20책(1813), 崇禎紀元後四戊子式司馬榜目
附錄(1828)
38) 홍재전서「경사강의」 17, 중용(一), “載瓚對. 如天如淵, 以至聖之德見於外者言也,
其天其淵, 以至誠之道實於內者言也. 見於外, 故人見其盛德之如天如淵, 實於內, 故
自家裏面眞箇是其天其淵. 此則朱子已言之, 而語類所云表裏觀者, 蓋以此也. 章句
則單釋兩其字之義, 故但云非特如之, 而表裏之意, 亦自包得矣.”
많은 학자들이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무명자 윤기는
자신의 문집에서 ‘같다[如]’라고 하는 것은 성인이 천지와 나란히 비견
되는 것을 뜻하는 말이고, ‘그것이다[其]’ 한 것은 천지와 하나가 된
것임을 말하였다.39) 명고 서형수는 ‘如天如淵’은 사람들이 성인을 바라
보는 까닭이요, ‘其天其淵’은 성인께서 스스로 아는 것이니 그 천심에
다름이 있다40)고 하였다. 다산 정약용은 如자를 비유하다[況之也]의
의미로, 其자를 곧 그것이다[卽之也]의 의미로 풀이41)하였다. 이 두 글
자의 차이에 관한 의문점은 주자가 장구에서 ‘其淵其天은 그저 같은
정도일 뿐이 아니다.’라고 말한 데서 유래한다. 그리고 어류에서는
이 두 구절에 대해 표리(表裏)로 보아야 한다42)고 하였다. 거자들은
또한 주자의 설에 대해 당연히 숙지했으며, 답안에서 이를 언급하였
다.43) 이처럼 여러 선유들이 관심을 가지고 토론한 문제는 시관들에게
도 관심사였을 것이며 이는 1803년 사서의 시제로 출제된 후 계속해서
중복 출제되었다.
39) 無名子集文稿 책7, “上章曰溥博如天, 淵泉如淵, 此章曰淵淵其淵, 浩浩其天, 謂
之如, 則猶是聖人與天地相比並, 而謂之其, 則與天地爲一矣. 此章句所以釋之以非
特如之而已者也.”
40) 明臯全集 권18, 講義, “臣瀅修對曰, 上章, 卽小德之川流, 此章, 卽大德之敦化,
故同是天道, 而朱子有表裡觀之訓, 如天如淵, 人之所以觀聖人也, 其天其淵, 聖人之
所以自知也. 聖人之自知, 與人之觀聖人, 豈無淺深之別耶? 故曰非特如之而已.”
41) 與猶堂全書 제2집, 經集 권4, 中庸講義補, “臣對曰. 如者, 況之也, 其者, 卽之也.
其語意雖有深淺, 上節之至聖, 此節之至誠, 恐無大小之層級, 又何必差殊看乎? 語類
云外人觀其表, 但見其如天如淵, 自家裏面, 卻眞箇是其天其淵, 此說果精矣.”
42) 中庸章句大全(下), “至聖至誠, 只是以表裏, 至聖是其徳之發見乎外者, 故人見
之, 但見其溥博如天淵泉如淵, 見而民莫不敬, 言而民莫不信. 至凡有血氣者, 莫不尊
親, 此其見於外者. 如此至誠, 則是那裏面骨子, 經綸大經立大本知化育此三句, 便是
骨子, 那箇聰明睿知, 却是這裏發出, 去至誠處, 非聖人不自知, 至聖則外人只見得到
這處.”
43) 臨軒功令 20책, <朴時寅의 답안(1813)> 등
◎ 自立至不踰矩, 皆以十年爲差, 而惟志學至立年, 則以十五年爲差. 此是
志學之始, 故進德之工, 比他爲難而然歟?”
<홍재전서 권122, 「魯論夏箋」(1794)>
◎ 問. “子曰, 吾十有五而志于學.” 十五以前, 所事者何? 三十而立, 至七
十不踰矩, 皆間以十年, 獨於志學與立, 間以十五年, 其義何居?
<平安淸北增廣監試初試(1805), 江原道式年監試初試(1819), 全羅右道式
年監試初試(1840), 式年監試初試(1882), 式年監試初試(1885) 등 출제> 44)
논어에서 부자께서 덕을 진전시킨 순서를 서술한 구절이다. 자신의
이른바 진덕지서(進德之序)에 대해 15세의 지학(志學)과 30세의 이립
(而立)은 15년 단위로 기술하였는데, 40세의 불혹부터 50, 60, 70세까지
는 각기 10년 단위로 설명했음에 주목했다. 이는 정조가 초계문신 서준
보(徐俊輔, 1770-1856)와 함께 논어에 대해 토론한 「노론하전(魯論
夏箋)」에서 처음 언급되는데, 정조는 이에 대해 15살 때에 학문에 처음
뜻을 두기 때문에 덕에 나아가는 공부가 다른 때보다 어려워서 그런
것이 아닌가라고 여겼다. 이 문제는 10여 년 후인 1805년 평안도 청북
(淸北)에서 출제되었는데 당시의 시관은 서유망(徐有望, 1766-1813) 이
었다. 서유망은 서준보와 본관이 같고 서준보의 아버지인 서유린(徐有
隣)과 같은 항렬자를 쓰고 있어 이들이 같은 집안사람임을 알 수 있다.
이 문제는 임헌공령 66책에 1805년의 시제가 처음 기록된 이후 주로
향시에서 출제되다가 1882년 한성시에 출제되었고 3년 뒤인 바로 다음
시험에서 동일 문제가 또 한 번 출제되었다. 바로 이전 시험에서 출제된
44) 臨軒功令 66책(1805), 臨軒功令 4책(중도본)(1819), 科題各體(奎7299)(184
0), 崇禎紀元後五壬午式司馬榜目 附錄(1882), 崇禎紀元後五乙酉慶科增廣司馬
榜目 附錄(1885).
문제를 다시 출제하는 행위는 문란해질 대로 문란해진 조선 말기의 상
황을 일면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3) 시제집에 기록된 향시 시제를 참고한 경우
생원시 입격자 명단을 기록한 사마방목에는 부록(附錄) 부분에 시
험의 시제를 기록하고 있다. 시제는 후대로 갈수록 부록에 더욱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사서의 시제가 초시와 복시에 모두 안정적으로 기록
된 것은 영조대 이후이다. 그 후 시제만을 기록한 시제집이 본격적으로
간행되기 시작한 것은 정조대부터이다. 전술하였듯이, 시제의 중복 출
제는 금기시되는 사항이었고, 정조 또한 이를 우려하여 시제집을 간행
하도록 명하였다.45) 그렇다면 과연 시제집의 간행으로 중복 출제 문제
가 사라졌을까?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정조대 이후에 출제된 문
제에 주목해 본 결과 정조대 내에서는 중복으로 출제된 문제가 거의
보이지 않아 정조의 관심과 사회적 분위기가 어느 정도 작용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순조대 이후로 다시 중복으로 출제되는 문제들이
생겨났고, 이러한 문제들은 순조대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앞서 정조대의 경연에서 언급되었던 문제들에 대해 살펴보았고,
여기에서는 순조대 향시에 처음 보이는 문제들을 대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순조대는 시제집 과제각체(科題各體)46), 과문집 임헌공령(臨軒
功令)47) 등 과문집이 활발하게 간행되기 시작한 시점이다. 특히 충청
45) 정조대 시제집 간행에 대해서는 박현순, 「정조의 臨軒題叢 편찬과 御題 出題」(奎
章閣 48집, 2016) 참고.
46) 科題各體는 1822-1833년, 1835-1848년의 시제를 기록한 시제집으로 현재 서울대
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되어 있다. (소장기호 : 奎6989, 奎7299)
좌도연기도회감시과작(忠淸左道燕岐都會監試科作) 등의 향시 관련
과문집은 유독 순조대에 집중적으로 간행되어, 순조대는 가장 많은 사
서의 향시 시제가 보존된 시기48)이다. 그 이전에는 유사한 문제가 없었
다가, 순조대 이후로 급격히 증가한 중복 출제 문제의 출현은 과문집
간행으로 인한 시제의 안정적인 기록이 오히려 중복 출제의 원인으로
작용하지 않았나 하는 의심이 들게 한다. 이와 관련한 예시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 問. 子曰,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知之爲知之, 可謂知之
也, 而不知爲不知, 亦可謂知之歟?
<黃海道增廣監試初試(1803)>
◎ 問. “子曰,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知之則固謂知之, 而不知
之亦謂是知, 何歟?
<慶尙左道式年監試初試(1816)>
◎ 問. 子曰, “誨女知之乎!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知之爲知,
固可謂知, 而不知爲不知, 亦可謂知者, 何也? 且以不知爲不知, 則聖人無乃
使人安於不知耶?
<忠淸左道式年監試初試(1840)> 49)
위 문제는 논어「위정」에서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知之爲知之] 모
르는 것을 모른다[不知爲不知]고 하는 것 역시 앎이라고 한 구절에 대
47) 臨軒功令은 1803년부터 1874년까지의 시제와 모범 답안을 수록한 과문집으로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과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48) 순조대 간행된 시제집과 과문집에 대해서는 윤선영, 위 논문(2017) 참고
49) 臨軒功令 66책(1803), 臨軒功令 20책(1816), 科題各體(奎7299)(1840)
해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는 것은 앎이라고 이를만
하지만,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또한 앎이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해 묻고 있다. 논어정의(論語正義)에서는 이에 대해 “부자께서 자
로가 성질이 강하여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고 우기기를 좋아한다고 여
겼기 때문에 그를 억제하신 것이다.”라고 풀이하였다. 이 문제는 임헌
공령 66책에 처음 기록된 후 꾸준히 출제되었으며 式年監試初試
(1846)와, 忠淸右道式年監試初試(1865)에도 유사 문제50)가 출제되었
다.
◎ 問. “子貢曰, 學不厭, 智也, 敎不倦, 仁也.” 此則先知而後仁也. 中庸曰,
“成己仁也, 成物知也.” 此則先仁而後知也, 其故何歟? 學與成己同, 敎與性
物同, 謂知·謂仁之不同, 亦何歟?
<江原道式年監試初試(1814)>
◎ 問. 中庸曰, “成己仁也, 成物知也”, 此則先仁, 而後知也. “子貢曰, 學不
厭, 知也, 敎不倦, 仁也.” 此則先知而後仁也, 其義之不同何歟? 學所以成己
敎所以成物, 學與成己同也, 敎與成物一也. 子思謂仁, 而子貢謂知, 子思謂
知, 而子貢謂仁者, 亦何歟?
<式年監試覆試(1846)>
◎ 問. “子貢曰, 學不厭, 智也, 敎不倦, 仁也”, 此則先知而後仁. 中庸曰,
“成己仁也, 成物知也”, 此則先仁而後知, 何歟? 學所以成己也, 敎所以成物
也. 學與成己同也, 而子貢謂知, 而子思謂仁, 敎與成物一也, 而子貢謂仁, 而
子思謂知, 何歟? <增廣監試覆試(1848)>
50) 崇禎紀元後四丙午式司馬榜目 附錄(1846), 未詳 試券(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소
장기호 : 한古文古朝51-다26-76)(1865)420 Journal of Korean Cul ture 45 / 2019.5.31.
◎ 問. 子貢曰, “學不厭, 智也, 敎不倦, 仁也.” 中庸曰, “成己仁也, 成物知
也.” 子貢則知先於仁, 子思則仁先於知, 何歟? 學不厭便是成己之事, 而謂之
和, 敎不倦便是成物之事, 而謂之仁, 聖賢之論不同, 亦何歟?
<式年監試覆試(1882)> 51)
위는 1814년 강원도에서 출제된 향시 시제가 후에 복시 시제로 출제된
것이다. 처음 이 문제가 기록된 것은 임헌공령 20책으로, 맹자와
중용에서 仁과 知의 선후 관계가 다른 이유를 묻고 있다. 위 문제의
두 개념어를 체용(體用)의 관점으로 분속하여 비교한 설은 정조를 비롯
하여 여러 학자들 사이에서 언급되었으나, 仁과 知의 언급 선후 관계만
을 비교하여 학설을 펼친 경우는 거의 없다. 이 문제는 1814년 처음
출제된 후 어느 정도 간격을 두고 1846년에 다시 출제되었는데, 1846년
식년시에서 출제된 문제가 2년 만인 1848년 증광시에서 인용 순서만
바꾸어 또다시 출제되었던 점 등을 볼 때 순조대에서 시작된 중복 출제
의 경향이 후대로 갈수록 그 정도가 더욱 심해짐을 알 수 있다.
위의 시제들이 순조대 이후에 중복으로 출제되었다고 해서 이를 시제
집의 간행 때문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다만 생각해 볼 것은 정조대
이전까지는 문과 혹은 한성시의 시제로 출제되었던 문제들이 주로 추후
중복 출제의 대상이 된 것과 달리, 정조대 이후로는 향시에서 처음 출제
된 시제들이 후에 한성시 및 문과 시제로 중복출제되는 경향이 생기게
된 것52)이다. 이러한 경향은 순조대 이후에 본격적으로 증가하는데 이
51) 臨軒功令 20책(1814), 崇禎紀元後四丙午式司馬榜目 附錄(1846), 崇禎紀元
後四戊申增廣司馬榜目 附錄(1848), 崇禎紀元後五壬午式司馬榜目 附錄(1882)
52) 향시에서 처음 출제된 시제가 추후 중복 출제 문제가 된 경우는 정조대부터 시작하여
순조대 이후에 본격적으로 보이는 현상으로, 정조 이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경향이
다. 전술한 중복 출제 문제군(총 43군) 가운데, 정조대 이후 중복 출제 문제가 시작된
는 한성시 시제만을 기록해오던 그 전 시대와는 달리 정조대부터 과문
집을 통해 향시 시제까지 기록된 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여겨진다.
이때부터 기록된 향시 시제는 정조 당시에는 사회적 분위기와 맞물려
시관들이 차마 그대로 베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후 정조대를 지나
순조대에 이르러 조금씩 시제 출제에 대한 기강이 해이해지고, 더이상
새로운 문제를 만들기가 힘에 부치던 시관들이 시제집을 통해 전대의
시제를 참고하여 출제한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런 점에 있어 방목 등에
드러나는 한성시 시제보다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향시 시제를 참고
하는 것이 중복 출제의 혐의를 조금이나마 늦추는 방법이라고 여긴
듯하다.
4) 기타
과거 시험에 사서의가 출제된 500여 년간 연도를 아울러 꾸준히 출제
된 시제들이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중복 출제에 있어 특정 경향성을
보인다기보다는 문제로 출제하기 좋아 시관들이 선호했고, 과거 시험
대비 참고서 또는 초집류(抄集類) 서적 등의 범람으로 유생들의 대비가
쉬워 출제자와 응시자 모두에게 유명했던 사서의 시험 단골 문제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오랜 기간동안 계속해서 출제되었던 문제들은 어느
정도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는 특정 시기, 시종 등에 구애받
지 않고 여러 차례 계속해서 출제된 문제들이 어떠한 요소들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 예시를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것은 32군이었다. 이 중 가장 처음의 문제가 한성시 시제인 것은 총 12군, 향시 시제인
것은 총 20군이다. 정조대 이후 시관들의 문제 출제에 있어 향시 시제가 참고 대상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422 Journal of Korean Cul ture 45 / 2019.5.31.
◎ 問. 孟子曰, “人皆可以爲堯舜” 堯舜之後, 更無堯舜者, 何耶?
<旬課(1633년 전후), 未詳(1660년 전후), 咸鏡北道式年文科初試
(1846) 등 출제> 53)
◎ 問. 孟子曰, “其爲氣也, 至大至剛, 以直養而無害, 則塞于天地之間.” 一
人之氣, 果能塞乎天地之大歟? <式年監試初試(1657), 式年文科初試(1840),
향시 추정(1867) 등 출제> 54)
첫 번째 문제는 맹자에서 누구나 요순이 될 수 있는데 요순의 뒤에
더 이상 요순과 같은 자가 나오지 않는 이유에 대해 질문한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문제는 역시 맹자에서 호연지기(浩然之氣)의 속성이
지극히 크고 강하여 천지 사이에 가득 차게 된다는 구절에 대해 한 명의
기운으로 과연 천지에 가득찰 수 있는지에 대해 질문한 것이다. 이 두
가지 질문은 글자의 출입도 거의 없는 완전히 같은 문제가 계속해서
출제된 것으로, 문제가 간단하면서도 경문 자체에서 의문점을 찾기 좋
은 경우라 하겠다. 이는 거자들로부터 다양한 답을 기대할 수 있고 출제
에 용이하여 시관들이 선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 問. “孟子曰, 權然後知輕重, 度然後知長短. 物皆然, 心爲甚.” 物則有輕
重長短, 固可以權度, 而度之心無輕重, 則何以權之? 心無長短, 則何以度之?
願聞其說.
<增廣文科初試(1809)>
53) 四友堂集 권4, 「疑」 (1633년 전후), 白野集 권3, (1660년 전후), 科題各體(奎72
99)(1846)
54) 丁酉式年司馬榜目 附錄(1657), 科題各體(奎7299)(1840), 林守柱 시권(국사편찬
위원회 제공)(1867)
◎ 問. “孟子曰, 權然後知輕重, 度然後知長短. 物皆然, 心爲甚.” 物則有輕
重長短, 固可以權度, 心無輕重, 則何以權之? 心無長短, 則何以度之? 願聞
其說.
<咸鏡北道式年監試初試(1819)>
◎ 問. “孟子曰, 權然後知輕重, 度然後知長短.” 物之輕重長短, 以權度度
之, 心之輕重長短, 以何物度之歟?
<全羅左道式年監試初試(1822)>
◎ 問. 孟子曰, “權然後知輕重, 度然後知長短. 物皆然, 心爲甚.” 物之輕
重, 長則以權度度之, 而至於心之輕重, 長短則以何物度之歟?
<咸境南道式年監試初試(1828)>55)
위 문제는 맹자의 한 구절을 인용하고 물(物)과 심(心)에 대해 대비
하여 질문한 것으로 순조대에서만 4번이나 출제되었던 문제이다. 그런
데 이 문제가 처음 1809년에 증광문과의 초시에서 출제된 후 두 번째
문제가 출제된 과정이 흥미롭다. 崇禎四己卯式司馬榜目을 살펴보
면 1819년 함경북도의 시관은 임존상(任存常, 1772-?)으로 그는 당시
정6품 관직인 수찬과 검토관을 역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이력을
살펴보면, 그는 1798년 진사시에 입격한 후 1809년 증광시 문과에 을과
2위로 최종 합격하였다. 그가 자신이 응시하였던 증광시 문과에서의
시제와 10년 후 시관이 되어서 참여한 시험의 시제가 동일한 것이다.
1809년의 단회방목인 崇禎三己巳冬元子誕降慶科別試增廣文武科
殿試榜目을 보면 위에 기록한 사서의 시제 및 을과 7인에 속한 거자로
55) 崇禎三己巳冬元子誕降慶科別試增廣文武科殿試榜目 附錄(1809), 臨軒功令 4
책(중도본)(1819), 臨軒功令4책(중도본) (1822), 科題各體(奎6989)(1828)
서의 그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과거 응시자가 입격 후 시관이 되어
자신이 풀었던 문제를 그대로 출제한 특이한 경우라고 하겠다.
이 문제는 표면적으로 보았을 때 대비되는 부분이 있으며, 이 구절에
대해 언급한 주자 등 유명 주석가의 설56)이 있어 거자들이 답안을 작성
하기에도 편리했을 것이다. 즉 문제로 출제하기도 좋고 채점하기도 쉬
운 경우여서 시관들이 자주 출제했던 문제 유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단골 문제들은 조선 후기 시제집 간행 및 예상 문제 모음집의 유행이라
는 시대적 상황을 만나 더욱 활발하게 중복 출제되었다.
위에서 총 4가지 유형으로 사서의 시제의 중복 출제의 경향성을 논하
였다. 종합적으로 볼 때 중복 출제는 논어·맹자보다는 아무래도 대
학·중용이 더욱 심하였고, 한성시보다는 향시에서 자주 보였다. 정조
이전에는 중복으로 출제된 문제의 수가 적었으며 그 유사 정도가 심하
지 않았다. 정조대를 기점으로 하여 잠시 중복되는 문제가 없어지는
듯하였지만, 순조대 이후부터 기존에 출제된 문제가 다시 출제되는 경
우가 많았다. 순조대 이후의 중복 출제 문제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정조대 경연에서 문신들과 토론한 이후 그 문제가 계속해서
출제되거나 그전까지는 볼 수 없다가 순조대에 치러진 향시에서 한 번
출제된 후 계속해서 출제되는 경우로 나눌 수 있었다. 이 두 가지 경우는
모두 시제집과 과문집의 간행이라는 배경이 자리하고 있다. 정조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제집과 과문집의 간행은 본래 중복 출제를 금하기
위한 목적이었으나, 순조대 이후 중복 출제되는 경우가 급격히 증가한
56) 孟子集註大全 권1, “物之輕重長短, 人所難齊, 必以權度度之而後可見. 若心之應
物, 則其輕重長短之難齊, 而不可不度以本然之權度, 又有甚於物者.”
점, 대부분의 중복 출제 경향과 반대로 향시에 출제된 후 한성시 등에서
베껴 출제한 경우들이 생겨난 점으로 볼 때 오히려 후대 시관들의 참고
서 역할을 하게 된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이는 안정적인 시제
기록이라는 시제집 간행의 또 다른 목적에는 충분히 부합하는 정황이기
도 하여, 시제집 간행 결과의 명암을 한 번에 보여주는 결과라 하겠다.
후대로 갈수록 중복 출제 경향이 심해지는 것은 한정된 텍스트 안에서
규정화된 문제를 계속해서 출제해야 하는 당대의 시스템 속에서 일견
당연해 보인다. 그리고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여겨 시관들이 계속
해서 그 문제를 반복 출제한 것일 수도 있다. 따라서 이러한 중복 출제
행위를 반드시 문제적 현상으로 바라봐야만 하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
할 수 있다. 다만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시관의 고심한 흔적이 엿보이는
참신한 문제들도 종종 출제57)되어 거자들에게 경각심을 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중요도가 높은 문제라 계속해서 출제한다 해도 이를 한 글자의
출입도 없이 그대로 기존의 문제를 베껴 내는 것이 과연 시관의 임무로
타당한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이를 시기적인 한계점
으로만 여기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이며, 생원시 시제를 대하는 시관들
의 자세 및 조선 후기 과거 시험의 문란 등과 더욱 관계가 깊다고 하겠다.
57) 예컨대, 사서 가운데 식물이 표현된 구절을 각기 하나씩 예로 들어 출제한 1804년
평안북도 식년 감시 초시 문제 <問. 魯論唐棣之華, 鄒傳牛山之木, 中庸執柯伐柯,
大學淇澳綠竹, 皆以植物而言之, 各有取譬之可言者歟?>(臨軒功令 66책)나 네 책
의 가장 첫 장과 마지막 장의 개념어에 착안하여 출제한 1840년 함경북도 식년 감시
초시 문제 <問. 論語末章曰, “不知命, 無以爲君子”, 中庸首章曰, “天命之謂性”, 命
之義同歟異歟? 大學末章曰, “以義爲利”, 孟子首章曰, “何必曰利”, 利之義同歟異
歟? 願聞其說.>(科題各體(奎7299)) 등이다.
4. 답안 작성의 한계 – 유사 답안을 중심으로
과거 시험의 답안을 작성함에 있어 전사(傳寫)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은 앞서 이수광의 지봉유설 등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에 의해 제기
된 비판적 논의를 통해 잘 알 수 있었다. 여기에서는 실제 과장에서
작성된 과거시험 답안의 예시를 통해 전사의 문제가 실제 사실과 어느
정도 부합하는지 알아보도록 한다. 필자가 정리한 400여 편의 사서의
답안58) 가운데 같은 문제에 대한 서로 다른 답안은 약 42군 130여 편이
있다. 이 중 답안의 요지, 답안 구성 순서, 특정 주석의 인용 등에서
공통점을 보이는 유사 답안은 30여 편, 이를 넘어서서 완전히 베낀 흔적
이 확인되는 전사 답안은 8편 정도가 있었다. 이에 아래의 예시들을
통해 전사 문제의 실제적 면모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1) 유사한 답안 예시
◎ 問. 孔子曰, “四十而不惑”, 孟子曰, “四十不動心”. 不惑不動, 亦有造詣
淺深之可言歟? 雖以聖賢, 生知安行之姿, 必待四十然後, 不惑不動何歟? 孔
子則四十而後, 有知天命·耳順·不踰矩之次第, 而不動心後進德之序, 抑有可
言者歟?
<式年監試覆試(1822)>59)에 대해
위 문제는 1822년 식년감시 복시에서 출제된 것으로 논어의 불혹
(不惑)과 맹자의 부동심(不動心)에 관하여 차이점이 있는지를 질문
58) 필자가 대상으로 하는 400여 편의 답아은 시권에 약 120편, 과문집에 약 250편,
문집에 35편 정도 수록되어 있다. 시대별로는 조선 전기 및 중기(광해군 이전)까지
약 25편, 후기(인조~헌종)에 약 250편, 말기(철종 이후)에 130여 편 정도가 지어졌다.
59) 崇禎四壬午式司馬榜目 附錄
한 것이다. 이와 유사한 문제가 1801년 증광감시 복시에도 출제되었다.
이에 대해 1801년 1등 4위로 입격한 유생 안이룡(安爾龍, 1764-?)의
시권, 1822년의 생원시 장원인 김종휴(金宗烋, 1783-1866)와 1등 5위로
입격한 이은순(李殷淳, 1790-?)의 답안을 비교해 볼 수 있었다. 세 명
답안의 일부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안이룡】 중용에는 자성명(自誠明)과 자명성(自明誠)의 가르침이 있
는데 선유께서는 자성명이 부자(夫子)의 불혹에 해당하며, 자명성은 맹자의
부동심에 해당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부자의 불혹과 맹자의 부동심이 진
실로 한 가지 일이며, 성이명(誠而明)과 명이성(明而誠)의 차이만 있을 따름
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아! 지견(知見)이 명철하여 막히는 바가 없는 것
이 부자의 불혹이요, 마음을 다하고 성(性)을 알아 의심할 바가 없는 것이 맹
자의 부동심입니다. 그런즉 그 불혹은 부동심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
다. 덕이 확립되고 도가 밝아짐이 곧 부자의 불혹으로 저는 그 성실함을 말
미암아 밝아짐을 아는 것이고, 도가 밝아지고 덕이 확립됨은 곧 맹자의 부동
심으로 저는 그 밝음을 말미암아 성실해짐을 아는 것입니다. 불혹과 부동은
비록 그 같고 다름을 논할 수 없으나 자성(自誠)과 자명(自明)은 어찌 그 지
위(地位)에 차별이 없겠습니까? … 하략 …60)
【김종휴】 불혹과 부동은 비록 커다란 분기점은 없으나, 불혹은 이 뜻을
앎이 비교적 많으니 생지(生知)의 일이요, 이른바 자성명(自誠明)이 이것입
60) <安爾龍의 시권(1801)> (한국고문서자료관 제공), “中庸有自誠明自明誠之訓, 而
先儒以自誠明當之以夫子之不惑, 以自明誠當之以孟子之不動心. 是知夫子之不惑,
亞聖之不動心, 固是一事, 亦不無誠而明·明而誠之差異耳. 噫! 知明見澈無所滯碍者,
夫子之不惑也. 盡心知性無所疑懼者, 亞聖之不動心也. 則是知其不惑即是不動心之
謂也. 而德立而道明, 則夫子之不惑, 吾知其自誠而明也. 道明而德立, 則亞聖之不動
心, 吾知其自明而誠也. 不惑與不動, 雖無同異之可論, 而自誠與自明, 豈無地位之差
別乎?”
니다. 부동은 이 뜻을 행함이 비교적 중요하니 면행(勉行)의 일이요, 이른바
자명성(自明誠)이 이것입니다. 서른 살에 뜻이 서게 된 후 덕이 확립되고 도
가 밝아지며, 말을 잘 알고 기(氣)를 기르게 된 이후 도가 밝아지고 덕이 서
게 되니 여기에서 그 조예(造詣)에 얕고 깊음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
나 서른 살 이전에 이미 불혹의 체단(體段)을 갖춘 자가 바로 부자이니, 부자
께서 반드시 마흔 살이 되기를 기다려서야 부동에 이르렀다고 할 수는 없습
니다. 비록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마흔 살이라고 일컬음은 성덕(成德)의 경
계를 대강 말씀하신 것이니, 마흔 살 이전에 부동심(不動心)의 경지가 없었
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즉 겨우 심(心)자 한 글자에서 부동과 불혹이 다
름을 볼 수 있으니 비록 성인(聖人)과 현인(賢人)에 구별이 있으나 그 성공
함에 미치어서는 한결같음이 아니겠습니까? … 하략 … 61)
【이은순】 주부자동이고(朱夫子同異攷)에서 말하기를, 불혹과 부동은
바로 중용의 성즉명(誠則明)·명즉성(明則誠)과 같다고 하였으니, 이는 어째
서이겠습니까? 불혹은 덕이 확립되고 도가 밝아져 사물의 이치에 의심할 바
가 없는 것을 이르는 것이니, 이것이 중용의 이른바 성이명(誠而明)이 아
니겠습니까? 부동은 도가 밝아지고 덕이 확립되어 상당한 지위에 오른 즈음
에도 두려울 바가 없는 것이니, 이것이 중용의 이른바 명이성(明而誠)이
아니겠습니까? 사물의 이치에 미혹되지 않아 의심나고 막히는 바가 없으니
지식이 밝히지 못하는 것이 없어 절로 마음이 요동하지 않게 됩니다. 상당한
지위에 오른 즈음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아 두려운 바가 없으니 이치가 밝
지 않음이 없어 또한 미혹되지 않게 됩니다. 그런즉 공자와 맹자의 지위는
61) 임헌공령 권4(중도본), <金宗烋의 답안(1822)>, “不惑與不動, 雖若無大段分界,
而不惑者知這意較多, 生知之事也, 所謂自誠明, 是也. 不動者行這意較重, 勉行之事
也, 所謂自明誠, 是也. 三十而立之後, 德立而道明, 知言養氣之後, 道明而德立, 則此
可見造詣之不無淺深, 而三十之前, 已具不惑底體段者, 夫子也. 不可謂夫子之必待
四十不動, 而雖以亞聖言之, 其言四十只是大綱說成德境界, 而不可謂四十之前, 便
無不動心這地位也. 然則纔下一心字可見不動之異於不惑, 而雖有聖賢之別, 及其成
功, 則一者非耶?”
천심(淺深)으로 말할 수 있으나, 불혹과 부동은 절로 한결같은 공효(功效)인
것입니다.62)
세 명의 답안에서 모두 불혹과 부동심의 의미를 설명하며 중용의
성명장(誠明章)과 연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중용의 구절과 연관시킨
것은, 호병문(胡炳文)의 설에서 불혹·부동심을 각기 誠而明·明而誠이
라고 한 구절63)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리고 불혹을 ‘德立而道明’, ‘自誠
明’으로, 부동심을 ‘道明而德立’, ‘自明誠’으로 풀이하였는데, ‘德立道
明’은 맹자집주대전에서 부동심을 ‘道明德立’으로 설명한 주자의
설64)에서 차용한 것이다. 세 명의 답안은 전개 방식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일 뿐, 그 요지와 입론의 근거가 모두 동일하였다. 다른 예시를 몇
개 더 살펴보도록 하겠다.
◎ 問. 論語曰, “無友不如己者” 然則勝於己者, 豈肯與我友之歟?
<忠淸右道式年監試初試(1858)>65)에 대해
위 문제는 1858년 향시(충청우도)에서 출제된 것으로, 논어의 “자신
62) 임헌공령 권4(중도본), <李殷淳의 답안(1822)>, “朱夫子同異攷曰, 不惑不動, 政
如中庸之誠則明明則誠, 何則? 不惑者謂德立道明, 無所疑於事物之理也, 此非中庸
所謂誠而明者乎? 不動者謂道明德立, 無所懼於履滿之際也, 此非中庸所謂明而誠者
乎? 不惑於事物之理, 而無所疑滯, 則知無不明而自不動矣. 不動於履滿之際, 而無所
疑懼, 則理無不明而亦不惑矣. 夫然則孔孟地位雖有淺深之可言, 而不惑不動自是一
般功效也.”
63) 맹자집주대전 권3, “雲峰胡氏曰, 孔子四十而不惑, 在三十而立, 立而道明, 誠而
明者也. 孟子所以四十不動心者, 先知言而後養氣, 道明而後徳立, 明而誠者也.”
64) 맹자집주대전 권3, “四十彊仕, 君子道明徳立之時, 孔子四十而不惑, 亦不動心之
謂.”
65) 臨軒功令 60책430
보다 못한 자와 벗하지 말라.”는 구절을 인용하고 나보다 못한 자와
벗하지 말아야 한다면 반대로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 기꺼이 나와 벗을
하려고 하겠는지에 대해 질문한 것이다. 이에 대해 임헌공령 60책에
수록된 유생 소수일(蘇洙一)의 답안,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박희원
(朴喜元), 이용근(李龍根)의 시권 총 세 명의 답안을 비교해 볼 수 있었
다. 그 결과 이 세 사람은 모두 주역「몽괘(蒙卦)」의 괘사인 “非我求童
蒙, 童蒙求我”이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자신의 논지를 펼쳤는데, 답안에
는 우연의 일치인지 모두 “童蒙求我, 非我求童蒙”이라고 순서를 바꾸
어 인용하고 있다. 문집 등 다른 곳에서 주역의 이 구절을 ‘無友不如己
者’와 연관하여 서술한 내용은 사애(沙厓) 민주현(閔胄顯, 1808~1882)
의 문집에 실린 간략한 기록 외에 보이지 않는다. ‘無友不如己’장 자체
에 관해서는 학계에서 활발하게 논의되었으나, 이를 주역의 특정 구
절과 연관하여 서술하면서 또한 순서를 바꾸어 인용한 것은 이 답안들
외에 찾아볼 수 없었다.
◎ 問. 中庸體用之書也. 第一章曰, “治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第二章
曰, “君子中庸”, 以中和中庸, 分屬於體用, 則何者爲體, 何者爲用歟? 以中庸
二字, 分屬於體用, 則何者爲體, 何者爲用歟?
<式年監試初試(1876)> 66)에 대해
위 문제는 1876년 식년감시 초시에서 출제된 것으로 중용의 1장과
2장의 구절에 나오는 中和와 中庸, 그리고 중용에서 中자와 庸자가
각기 체와 용 가운데 어디로 분속되는 지에 관해 질문한 것이다. 이에
대해 임헌공령 23책에 수록되어 있는 유생 이기석(李基奭), 최창진
66) 崇禎紀元後五丙子式司馬榜目 附錄
(崔昌晉), 김달수(金達秀)의 답안을 살펴볼 수 있었다. 이 세 편의 답안
은 시관의 질문에 차례대로 답안을 작성하였는데, 모두 中和를 體로,
中庸을 用으로 보았으며 중용 가운데서는 庸자를 체로, 中자를 용으로
보았다. 중화와 중용의 분속에 대해서는 중화를 性情으로 중용을 德行
(또는 行事)으로 구분하여 설명하였고, 內外와 靜動으로도 구분하여
덧붙였다. 중용에서의 중자와 용자에 대해서는 용자를 未發之體로, 중
자를 已發之用으로 설명하였으며 중자를 正道로 용자를 定理(正理)로
구분한 정자의 설을 인용하였다. 세 편의 답안 가운데 최창진의 경우는
중화에서의 중자와 중용에서의 중자를 나누어 추가적으로 설명한 부분
이 있어 나머지 두 답안에 비해서는 조금 더 구체적인 논의를 펼쳤다.
다만, 세 편의 답안은 각 개념어의 체용 분속과 이를 위한 보충 설명에서
모두 주자와 정자의 설을 인용하여 구성함으로써, 새로운 견해나 논리
가 전혀 없는 평범한 답안에 머물렀다.
위에서 동일 시제에 대한 유사 답안의 예시를 살펴보았다. 이처럼 여
러 거자가 유사한 답안을 작성하는 현상은 같은 연도에 보았던 시험에
서 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동일 시제라 할지라도 연도가 20-30년 이상
차이 나는 답안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는 두 가지 경우로 유추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위 사람들이 과장에서 동접(同接)에 속하여 답안
을 작성하였을 가능성이다. 접(接)이란 여러 응시자들이 하나의 팀을
이루어 서로 상의하에 공동으로 답안을 제술하는 행위를 말한다. 이러
한 공동 제술 행위는 이미 조선 초기에서부터 종종 일어났으며, 17세기
이후에는 매우 보편적인 풍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한 팀을
이루어 각기 일정 부분을 지어 서로 교환하여 상부상조하거나, 여러
동접들의 구절을 따다 모아 한 편을 짓는 일67) 등은 조선 후기로 갈수록
더욱 심하게 자행되었다.
두 번째로, 당대 유행했던 모범 답안집의 공유를 들 수 있다. 같은
대지, 유사한 전개 방식, 특정 주석의 인용(변용) 등은 당대에 거자들이
참고하던 모범 답안집이 분명 존재했고, 이것이 답안 작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실제로 과거 시험의 준비
를 위해 거자들은 기존의 모범 답안을 참고하여 끊임없이 글쓰기 연습
을 했다. 과거 시험 대비 참고서는 중국과 조선의 과문을 모은 간행본
과문선집(科文選集)과 우수 답안이나 습작을 모은 필사본 과문초집(科
文抄集), 개인의 과작과 습작을 모은 필사본 과문사집(科文私集) 등으
로 구별할 수 있다.68) 안정적인 합격을 지향했던 거자들은 다양한 경로
를 통해 전래된 여러 종류의 참고서를 통해 선조들이 정리해 놓은 모범
답안을 달달 외워 거침없이 써내려갔을 것이다. 다만 이처럼 유사한
답안들은 초시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어 다음 단계의 시험으로 진출했다
할지라도 거기까지가 한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유사 답안을 작
성한 거자들 가운데 문과 최종 합격자가 거의 없을뿐더러, 최상위권
성적을 받은 답안들은 이러한 혐의를 거의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모범 답안 공유로 인한 유사 답안들의 범람은 거자들의 전반적인
경학 학습 수준이 낮아졌음을 대변하는 현상이라고 분석할 수도 있지만,
최상위권에 속하는 거자들의 실력까지 끌어내린 정도는 아니었다고 보
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67) 조선 시대 과거 시험의 공동 제술 행위에 관련한 설명은 김동석, 위 논문(2015)
125-128쪽 참고
68) 과거 시험 참고서의 전반적인 사항은 박현순, 「조선 시대 과거 수험서」(한국문화
제69집, 2015), 206-207면 참고. 사서의 시험과 관련한 참고서는 윤선영, 위논문(201
8), 16-18쪽 참고
2) 전사(傳寫)가 의심되는 경우
◎ 問. 中庸名篇, 本取時中之中, 而所以能時中者, 盖有未發之中在也. 性
道敎固爲中庸之綱領, 而知仁勇又爲中庸由行. 博學也, 明誠也, 皆所以深造
中庸之域, 而要之莫不由於本然之性也. 分而言之, 則有大德小德之別, 而亦
不越乎中字上說去也. 中是一也, 而有未發之中, 時中之中, 不偏不倚, 是未
發之中以心論者也, 無過不及, 卽時中之中以事論者也. 亦各言其體用, 而至
於二氣五常之所賦, 與萬殊一本之互推, 互推原實具時中之中, 未發之中, 必
有分開指的之義, 願聞其說.
<式年監試覆試, 1870> 69)에 대해
위 문제는 1870년 식년감시 복시에서 출제된 것으로 중용에서의
中자의 의미와 이를 時中之中과 未發之中으로 나누어 설명한 뜻에 대
해 포괄적으로 질문한 것이다. 이에 대해 임헌공령 71책에는 유생
이병응(李秉應), 정신영(鄭臣永), 안치영(安致英) 3명의 답안이 수록되
어 있으며 한국고문서자료관에서 동일 시험의 임강호(任康鎬)와 임기
호(任起鎬)의 시권을 제공하고 있어 총 5편의 답안을 비교해 볼 수 있었
다. 이 5편의 답은 모두 未發을 性之體로, 時中을 性之用으로 분속하여
설명하고 주자의 설 등 여러 주석들을 인용하여 비슷한 답안을 작성하
였다. 이 가운데 임강호와 임기호의 답안은 유사함을 넘어 전사의 문제
가 심각하게 의심되는 바, 이 두 답안을 비교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任康鎬의 답안】
(상략) … 先究乎本文所言之理, 推玩乎註疏所釋之旨, 然後有以知此章之
義, 何以明其然也? 此章垂訓, 各有歸趣, 而本文旣着此一句, 則其義不難可
69) 崇禎紀元後四庚午式司馬榜目 附錄434 Journal of Korean Cul ture 45 / 2019.5.31.
知矣. 註疏旣如彼明白, 則其義推此可見矣. 是以先儒所論此義者雖多, 而胡
氏之說, 以發上蔡未發之旨, 而多失於太偏, 故未免有意圓語滯之病也. 陳氏
之論, 欲以矯雲峯未盡之弊, 而或失於太高, 故不免有好爲苟難之病也. 及觀
朱夫子答黃直卿書, 明白簡約, 切近確實, 發前人所未發之旨, 擴先賢所未論
之意, 而可以辨破乎千古之疑案矣. 然而今之自托於聖經賢傳之間者, 或合
爲一串而說將去, 則又矛而不相貫, 或分爲兩項而推將來, 則散亂而不可別,
或盡刪要語, 而遂與本文相違, 或妄言微奧, 而全失用意所在, 茫茫蕩蕩, 都
沒着落 歸宿之處矣. 苟或執一說而廢一說, 遽以爲的確之論, 則政如盲人之
模象, 執其耳者謂之如箕, 執其鼻者謂之如杵矣. 烏得免破碎經題以犯不韙
之罪耶? 由是觀之, 則今日明證之道, 反求乎本章立言之旨, 然後聖賢垂訓昭
然, 如日星之炳, 怳然若綱維之擧矣. 夫如是則此章這說不啻切要, 而今日 主
司所問, 無乃試愚生而發耶? 吁! 謹對.
【任起鎬의 답안】
(상략) … 先究乎本文所言之理, 推玩乎註疏所釋之旨, 然後有以知此章之
義, 何以明其然也? 此章垂訓, 各有歸趣, 而本文旣着此一句, 則其義不難可
知矣. 註疏旣如彼明白, 則其義推此可見矣. 是以先儒所論此義者雖多, 而胡
氏之說, 以發上蔡未發之旨, 而多失於太偏, 故未免有意圓語滯之病也. 陳氏
之論, 欲以矯雲峯未盡之弊, 而或失於太高, 故不免有好爲苟難之病也. 及觀
朱夫子答黃直卿書, 明白簡約, 切近確實, 發前人所未發之旨, 擴先賢所未論
之意, 而可以辨破乎千古之疑案矣. 然而今之自托於聖經賢傳之間者, 或合
爲一串而說將去, 則又矛而不相貫, 或分爲兩項而推將來, 則散亂而不可別,
或盡刪要語, 而遂與本文相違, 或妄言微奧, 而全失用意所在, 茫茫蕩蕩, 都
沒着落歸宿之處矣. 苟或執一說而廢一說, 遽以爲的確之論, 則政如盲人之
模象, 執其耳者謂之如箕, 執其鼻者謂之如杵矣. 烏得免破碎經題以犯不韙
之罪耶? 由是觀之, 則今日明證之道, 反求乎本章立言之旨, 然後聖賢垂訓昭
然, 如日星之炳, 怳然若綱維之擧矣. 夫如是故朱夫子於此章之下, 釋之甚詳,
而其義不啻切要, 則愚也不必多辨, 而主司旣問之以如此, 則何致疑於其間
也哉? 吁! 謹對.
<1870년 식년감시 복시의 임강호(좌)와 임기호(우)의 시권 일부, 한국고문서자료관
제공>
임강호와 임기호는 본관이 모두 풍천(風泉)이며, 같은 항렬자를 쓰고
있어 두 사람이 같은 집안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위 두 답안은 밑줄
친 부분을 제외하고는 거의 동일하게 작성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이 경우
같은 집안에서 함께 공부한 두 사람이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모범 답안
을 공유하여 외워 써낸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몇 글자를 제외하
고 거의 같은 답안일 정도라면, 이는 두 사람이 과장에서 동접을 이루어
함께 지었을 것으로 보는 편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 問. 朱夫子釋南方之强, 南方風氣柔弱, 釋北方之强曰, 此方風氣剛勁,
夫陽强陰柔, 理之常也. 南屬於陽, 而謂以風氣柔弱, 此方屬陰, 而謂以風氣
剛勁, 何歟?
<增廣監試初試(1874)> 70)에 대해
위와 비슷한 경우를 보여주는 예시 한 편을 더 보도록 하겠다. 이는
1874년 증광감시 초시 이소에서 치러진 시험으로, 자로가 공자에게 강
(强)에 대해 물은 논어의 한 구절에 대해 각기 남방과 북방의 풍기를
각기 설명한 주자의 설에 대해 물은 것이다. 이에 대해 임헌공령 74책
에는 황대구(黃戴九)와 황학구(黃鶴九) 두 사람의 답안을 수록하고 있
다. 두 사람은 모두 평해 황씨 가문으로 같은 항렬자를 쓰는 사촌지간으
로 보인다. 답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黃戴九의 답안】
對. 於戲! 陰陽之體用, 互爲剛柔, 故南北之剛柔, 所以相反, 何者? 陽剛陰
柔, 雖理之常也. 而體强而用柔者, 南方之陽也. 體柔而用强者, 北方之陰也.
然則南北之剛柔以言乎風氣之大槪, 而南方之人稟得南方之寬柔矣. 北方之
人稟得北方之剛勁矣. 試而易象觀之, 南方之离二陽爲體一陰爲用, 而剛中
有柔, 則南方屬於陽, 而其實剛於體而柔於用也, 此方之坎二陰爲體一陽爲
用, 而柔中有剛, 則北方屬於陰, 而其實柔於體而剛於用矣. 南方之寬柔, 北
方之剛勁, 固其宜矣. 朱夫子之訓釋於章句者, 亦可謂得其旨矣. 蓋嘗論之.
子路問强, 而夫子必曰, 南方之强·北方之强云爾, 則當日垂訓, 分明有陰陽體
用寬柔, 而有是南北之分矣, 何以明其然也? 天地定位育, 有南有北, 而南是
70) 臨軒功令 74책, 崇禎紀元後五甲戌增廣別試司馬榜目 附錄에 기록된 시제는
“問. 中庸第十章言, 南柔北强, 而南北以土地屬陰陽, 則南屬於陽, 北屬於陰, 陽强陰
柔, 是理之常也. 今反謂之陰强陽柔, 何歟?”로 임헌공령과는 조금 차이가 있으나
문제의 요지는 동일하다.<조선 후기 과거( 科擧) 생원시( 生員試) 문답의 한계점 고찰 437
陽方也, 北是陰方也. 夫如是故, 陽之體剛用柔, 陰之體柔用剛, 則陰陽不易
之正理, 而居於南方者, 不得不寬柔也, 居於北方者, 亦不得不剛勁也. 於乎!
南方之火, 屬於陽也而根於地 … (하략)
【黃鶴九의 답안】
對. 於戲! 陰陽之體用互換, 故南北之剛柔相反, 何者? 陽剛陰柔, 雖理之
常也. 而體强而用柔者, 南方之陽也. 體柔而用剛者, 北方之陰也. 然則南北
之剛柔以言乎風氣之大槪, 而南方之人稟得南方之寬柔矣. 北方之人稟得北
方之剛勁矣. 試以易象觀之, 南方之离二陽爲體一陰爲用, 而剛中有柔, 則南
方屬於陽, 而其實剛於體而柔於用也, 此方之坎二陰爲體一陽爲用, 而柔中
有剛, 則北方屬於陰, 而其實柔於體而剛於用矣. 由此觀之, 則南方之寬柔,
北方之剛勁, 固其宜矣. … (중략) … 蓋嘗論之. 子路問强, 而夫子必曰, 南方
之强·北方之强云爾, 則當日垂訓, 分明有陰陽體用寬柔, 而有是南北之分, 何
以明其然也? 天地定位育, 有南有北, 而南是陽方也, 北是陰方也. 夫如是故,
陽之體剛用柔, 陰之體柔用剛, 則陰陽不易之正理, 而居於南方者, 不得不寬
柔也, 居於北方者, 亦不得不剛勁也. 嗚呼! 南方之火, 屬於陽也而根於地, …
(하략)
1874년 외에도 다른 연도에 이와 유사한 문제가 출제되어 다른 거자들
의 답안도 비교해 볼 수 있었다. 이들 또한 남방과 북방의 강함에 대해
주로 체용설 → 주역 팔괘 중 이괘(離卦)와 감괘(坎卦)로 비유 → 사시
중 여름과 겨울로 비유 등의 동일 패턴으로 답안을 작성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71) 그런데, 황대구와 황학구의 답안은 같은 대지를 표명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밑줄 친 부분을 제외하고는 거의 동일함을 알 수 있다.
71) 臨軒功令 66책, <鄭老㤠의 답안(1804)> ; 臨軒功令 20책, <李翼遠의 답안(1814)>
황학구의 답안 가운데 중략으로 처리한 부분 또한 황대구 답안의 후반
부에 있는 부분과 동일하다. 결론적으로 두 답안은 몇 개의 어조사, 몇몇
문장의 유무, 단락의 순서 등을 제외하면 거의 같은 답안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유사하였다.
위 네 편의 답안들은 각기 次下, 次下, 次中, 次下의 성적을 받았으며
네 사람 모두 끝내 생원시에 입격하지 못했다. 초시에서 좋은 성적을
받고 복시에 진출했을 것이나, 복시에서는 이러한 요행이 통하지 않았
던 듯하다. 이 작품들이 비록 초시의 답안이기는 하나, 향시도 아닌 한성
시에서 이처럼 유사한 답안들이 나란히 과문의 모범으로 선정되어 과문
집 임헌공령에 수록되었다는 것은 사서의 과목의 한계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양상은 과거 응시자 수가 급격히 늘어
나는 조선 후기에서 말기로 갈수록 더욱 심해졌다.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 과장에서 이미 널리 퍼진 모범 답안을 외워 써낸 다수의 유사 답안
과 동접에서 거벽(巨擘)의 작품을 공동으로 베껴 써낸 답안들은, 당시
소과 시험의 채점·관리의 여러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줌과 동시에
이 답안들이 과연 거자의 진실한 생각을 담아내었는가 하는 의구심을
들게 한다.
5. 결론
지금까지 사서의 과목에 출제된 시제와 거자들이 작성한 실제 답안의
예시를 통해 조선 시대 생원시에 드러난 한계점에 대해 궁구해보았다.
그 결과 당대 문인들에 의해 지적되었던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중복
출제와 유사 답안의 범람이라는 결과로 실제 도출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시제의 중복 출제는 한성시보다 향시에서 빈번하게 일어났으며,
유사 답안은 복시보다는 초시에서 더욱 뚜렷하게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사서의 시제 가운데는 글자의 출입 없이 완전히 같은 문제가 중복
출제된 경우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으며, 몇 글자의 출입과 표현만
다를 뿐 동일 구절을 인용하고 요지가 같은 질문이 상당히 많았다. 물론
완전히 참신한 문제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선유들에게 활발히 논의되었
고 이미 모범 답안들이 어느 정도 정립된 질문들이었다. 선유들 사이에
서 논란이 된 구절 등은 당연히 출제 빈도가 높았으며, 이러한 문제들이
주로 중복 출제의 대상이 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를 위한 문제,
즉 특별히 중요한 이치를 시사한다기보다는 출제에 적절한 문제 또한
적지 않았으며, 거자들 또한 이러한 문제 위주로 이 과목을 대비했다고
보는 편이 더 합당할 것이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상위권 거자들의 과차가 점차 떨어져 합격분기점
인 삼하(三下)에 미치지 못하는 성적으로도 장원에 급제하는 일72) 등이
생겨났으며, 모범 답안 공유 등으로 인해 요지가 유사한 답안들이 속출
하게 되었다. 급기야 어떤 작품의 경우는 몇 글자를 제외한 답안의 모든
부분이 똑같아 전사의 문제가 심각하게 의심되기도 하였다. 합격을 위
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을 여러 응시생들이 만들어낸 비정상적
인 현상이 어지러운 당대 상황을 만나 더더욱 생명력 없는 글만을 양산
하게 되는 씁쓸한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72) 1859년 증광 감시에서 전영만(全永萬)과 이철주(李哲周)가 次上의 과차를 받았음에
도 불구하고 각기 장원과 1등 2위로 입격한 사실이 있다.
이러한 여러 한계점으로 인해 조선 초기부터 생원시 시험에 대한 비판
들이 쏟아졌고, 사서의 과목을 폐지해야 한다는 의견이 빈번하게 제기
되었다. 그러나 선대의 제도를 함부로 없앨 수 없다는 소극적인 방어
여론과 과제(科制)의 규범을 변경한다 하더라도 선비들의 행습을 개혁
하지 않는다면 이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인식73) 때문에 생원시
는 그 위상은 경시된 채 명맥만을 유지하게 된 셈이다. 생원시의 문답에
서 도출되는 한계점은 생원시의 위상 저하를 앞당긴 요인이면서 동시에
몰락한 생원시의 위상을 대변해주는 현상이기도 하였다. 본고에서는
생원시의 또 다른 과목인 오경의(五經義)에 대해서는 다루지 못하였다.
이를 아울러 분석한다면 조선 후기 생원시의 내면에 대해 더욱 가까이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후일의 연구로 남겨둔다.
73) 「광해군일기[정초본]」 25권, 광해 2년(1610) 2월 7일 계축 2번째 기사
[참고문헌]
1. 원전·문집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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科題各體,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奎6989), (奎7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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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史, 宋 黎靖德 등 編, 四庫全書
孟子, 保景文化史,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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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祖, 弘齋全書, 한국문집총간 262~267집, 민족문화추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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朱熹, 四書大全, 宋 黎靖德 등 編, 四庫全書
, 朱子語類, 宋 黎靖德 등 編, 四庫全書
2. 논문 및 저서
김경용, 「조선 후기 경(京)·향(鄕) 유생의 생원·진사 진출 실태 비교 연구 - 1846년
식년 감시를 중심으로 - 」, 한국교육사학 40집, 2018.
김동석, 「과거 시험의 공동 제술에 대한 연구」, 고문서연구 47집, 2015.
김문식, 조선 후기 경학 사상 연구, 일조각, 1996.
金諍 著 김효민 옮김, 중국 과거 문화사, 도서출판 동아시아,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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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study on question and answer’s limitation of saengwon(生員)
civil service examination in late Joseon period
– Focused on Saseoui (四書疑) Exam –
74) Yoon, Sun Young*
This paper focused on question and answer’s limitation of Saseoui Exam(四書
疑, Questioning on the Four Books) about saengwon(生員) civil service
examination’s lowered status in late Joseon period. For this purpose, consider
every kind of collections of questions and answer sheet of Saseoui examination.
Saseoui is major subject of saengwonsi and appeared to be aimed at understand
overall point in the confucian classics, well-read in the context of the day and
real story and historical facts. But this exam pointed out many problems such
like setting useless or repetitious question, copy leader’s answer sheets during
Joseon Dynasty. As a result repetitious questions appeared more frequently in
local exams than in the capital city, scarcely during the reign of King Sunjo—the
successor of King Jeongjo—yet frequently during the late Joseon period. In
addition, during there reign, also found many similar answer sheets. This
phenomenon make status of saengwon(生員) civil service examination low
earlier, at the same time show reduced status of this exam. Future analysis the
study have to supplement Ogyungyi(五經義, another subject of saengwonsi,
questioning on the five classics) test questions and answer sheets.
Key words : civil service examination, saengwonsi(生員試, a preliminary
examination), Saseoui (四書疑, Questioning on the Four Books), test
questions, answer sheets, set repetitious question, copy leader’s answer
sheets.
* Researcher,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bacaaltto@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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