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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기억과 망각의 서사로서의 만주 배경 17세기 전쟁 소재 역사소설 읽기- 최척전(崔陟傳) ․ 강로전(姜虜傳) ․ 김영철전(金英哲傳) 을 중심으로-/이민희.강원대



차 례
1.머리말
2.17세기 전쟁 소재 역사소설에 나타난 기억과 망각
3.17세기 전쟁 소재 역사소설에 나타난 기억과 망각의 존재 양상
4.17세기 전쟁 소재 역사소설에 나타난 비의도적 기억과 망각
5.맺음말


국문초록
17세기 초 만주 일대에서 후금과 명,그리고 조선이 군사적으로 충돌했
다.이때 강홍립의 군대가 명나라 군을 지원하기 위해 출정했다가 후금에
투항한 소위 ‘심하(沈河)의 원정’이 일어났다.동아시아 국제정세의 변화 속
에서 백성들은 전란의 고통과 이산의 슬픔을 처절히 맛보았고,그러한 체험
담이 17세기 전쟁 소재 역사소설 작품에 고스란히 투영되어 나타났다.그
대표적인 작품이 최척전(崔陟傳)․ 강로전(姜虜傳)․ 김영철전(金英哲傳)
등이다.본고에서는 이 세 작품에 담긴 전란 서사 속 고통과 분노의 시선을
의도성 문제로 접근해 보고자 했다.
이를 위해 17세기 전쟁 소재 역사소설에 나타난 기억과 망각의 존재양상
을 크게 네 가지로 나눠 살펴보았다.즉,(가)서사에서 의도적으로 기억해

낸 역사(체험담/이념적 변형),(나)서사에서 의도적으로 망각시킨 역사(시
대․사회에 대한 불만과 비판),(다)서사에서 의도하지 않았지만 기억된 역
사(리얼리티 획득을 통한 자료의 간접적 복원),(라)서사에서 의도하지 않았
지만 망각된 역사(상상․서사적 독법이 요구되는 사건․사실)등으로 대별
해 작품에 투영한 서사의 진실 문제를 다루고자 했다.이 중 의도하지 않았
지만 기억되거나(다)망각된(라)역사와 리얼리티는 작품의 새로운 의미와
가치 창출이 가능한 것으로 새로운 독법을 요한다고 보았다.그리고 서사
속 의도된 기억과 망각의 주체는 개인적,또는 집단적일 수 있지만,비의도
적 요소는 작가의 영역을 벗어난 것으로 독자의 소관이라 보았다.이는 분
명 역사가가 역사적 사건을 바라보고 재구성하는 시각과는 다른 접근 방식
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후대에 특정 사회가,작가와 독자가,그 전란을 기억해 내고 싶어하거나
망각하고 싶어하는 방향으로 역사적 인물과 사건의 의미와 이미지를 결정
짓고 그것에 따라 서사라는 겉모습을 만들어 내면,그것이 결국 하나의 실
체요 진실인 양 바뀌기 쉽다.이러한 사고(의식)의 균열 지점이 이전과 현저
히 다르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 바로 17세기였고,특별히 명․청 교체기에
만주를 중심으로 한 ‘심하의 원정’과 포로 생활기를 다룬 전쟁 소재 역사소
설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고 보았다.


주제어:17세기 전쟁 소재 역사소설, 만주, 「최척전」, 「강로전」, 「김영철전」,
기억의 서사, 망각의 서사, 의도성, 비의도성, 전란, 이산, 팔기군제


1.머리말
16세기말~17세기 초에 일어난 임란과 병란,심하(沈河)원정 등의 역사적
전란 이후로 고소설사에서 ‘전쟁 소재 역사소설’이 다수 등장했다.1)이 ‘전


     1)고소설에서 전쟁(전란)을 소재로 한 작품이 적지 않다.이들은 전쟁(전란)이 중요한 서사
구조를 이루는 역사 군담소설 또는 창작 군담소설도 그러하고,가정소설,애정 전기소설,
몽유록계 소설 등에서도 전쟁 모티프를 하나의 서사 축으로 삼은 작품들이 다수 등장했
다.그리고 이에 따라 이러한 소설을 향유하는 새로운 독자층도 생겨났다.역사 또는 창
작 군담소설은 여성독자 외에 남성 독자들을 소설 읽기의 주체로 만들어 놓았고,여성영
웅소설 또는 여장군계 소설처럼 남성 대비 여성 우위 내지 동등의 작품군을 산출하는 기
폭제가 되기도 했다.특별히 임란과 병란 이후에 등장한 전쟁 소재 역사소설은 실기 문학
으로서 현실을 바라보는 시야와 세계관의 변화를 담아내면서 시대상을 읽어내는 통로 역
할을 하기에 충분하다고 하겠다

쟁 소재 역사소설’에는 전에 없던 고통과 슬픔을 전 국민이 직간접적으로
체험한 후 갖게 된 ‘불쾌’한 감정과 심리가 다양한 형태로 대거 투영되어
나타났다.소위 ‘불쾌로부터의 심리적 도주’라 할 서사적 내용을 작품에다
담아냄으로써 이전,또는 동시대 소설 작품과의 차이를 분명히 하고 있다.
세계를 관념적이고 비현실적으로 그려내던 기존의 관점과 달리 현실적 세
계를 사실적이며 구체적 형태로 표현해 내려는 의식이 작품 속에 고스란히
표출되기 시작한 것이다.특별히 17세기에 나타난 전쟁 소재 역사소설은 역
사의식과 역사적 진실 부분에 관한 한,동시대의 여느 소설과 두드러진 차
이를 보이는 바,그 차별적 태도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억과 망각의 문제
에서 더욱 첨예하게 드러난다.이는 사회 구성원들이,또는 개인이 전란에
대해 그려내고 싶은 의식적 지향과 그 형상화 수위,그리고 서사 전략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즉,다른 소설들과 달리 전란의 고통과 그 치유의 한
방편으로서 찾아낸 의식의 공고화와 삭제라는 양날의 칼을 전쟁 소재 역사
소설에서 본격적으로 생산해 내고 있는 것이다.최척전(崔陟傳)․ 김영철전
(金英哲傳)․ 강로전(姜虜傳)․ 배시황전 등이 대표적이다.
문제는 이러한 17세기 전쟁 소재 역사소설이 작가의 직접적 체험의 소산
이 아니라는 점이다.비록 작가도 전란을 직간접적으로 체험했다지만,작품
속 구체적 사건과 체험담은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다.자전적 소설이 아닌,
자신의 간접적 판단과 타인의 기록물이나 관련 정보의 습득을 통해 ‘재구
성’해 낸 서사물이다.다시 말해,타자가 경험한 ‘사건’의 기억을 재구성하
고 나누어 가진 결과인 것이다.그렇다면 타자가 경험한 ‘사건’의 기억을 서
사를 통해 나눠 갖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소설
속에서 구현 가능한 것인가?
내가 직접 경험한 사건이 아닌 이상,과거의 사건을 누군가가 완벽하게
재현․표상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
간은 계속해서 욕망을 분출시키려 한다.사건 외부의 시점에서 과거의 폭력
.
적인 사건을 가능한 한 완벽하게 재현․표상하려는 리얼리즘적 욕망에 기
초해 수많은 서사 문학을 생산해 내려 하기 때문이다.본고에서 다루고자
하는 최척전(崔陟傳)․ 강로전(姜虜傳)․ 김영철전(金英哲傳) 등도 바로 이
러한 서사 욕망에 기초해 나타난 전후(戰後)작품의 성격이 강한 자품들이
다.2)이들 작품은 전쟁(전란)을 주된 서사 축으로 삼되,실제 일어났던 역사
적 사건 또는 실존인물을 매개로 창작된,소위 ‘전쟁 소재 역사소설’3)에 해
당한다.그리고 17세기 ‘전쟁 소재 역사소설’중 만주를 배경으로 조선군의
심하(沈河)전투와 이와 관련된 인물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점 또한 공
통적이다.특별히 강로전(姜虜傳)․ 김영철전(金英哲傳)은 만주를 배경으로
한 역사적 사건과 관련 인물에 관한 이야기가 주종을 이루고 있는 데다 두
작품 공히 ‘전계 소설’로서 장르적 성격 또한 유사하기 때문에 비교 대상으
로 적합하다.4)
본고는 바로 500여 년 전에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서 벌어졌던 전란과 이


      2) 최척전 은 조위한(趙緯韓,1567~1649)이 1621(辛酉)년에, 강로전 은 권칙(權侙,1599~
1667)이 1630(庚午)년에,김영철전 은 홍세태(洪世泰,1653~1725)가 17세기 말,또는 18세
기 초에 창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 중 김영철전 은 홍세태의 문집인 유하집(柳下
集) 수록본으로 기존의 어떤 선행 이본을 대폭 축약한 것이다.그런데 최근에 김영철전
원작 계열의 필사본이 발견된 만큼,이 이본을 통해 김영철전 의 작품세계를 분석해야
할 것이다.그러나 본고에서는 이본 연구가 목적이 아닌 바,새 발굴 김영철전 을 직접
다루지 않고 기존에 소개된 홍세태 축약본을 가지고 논의를 하려 한다.김영철전 은 정
확한 창작 시기는 알 수 없지만,홍세태가 1725년에 죽었고 작품에서 김영철은 1683년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으므로 그 사이 시기에 쓰인 작품으로 추정할 수 있다.(박희병,1990,
17세기 동아시아의 전란과 민중의 삶:<김영철전>의 분석 김학성․최원식 외, 한국
근대문학사의 쟁점 ,창비,27쪽 참조)
      3)‘전쟁 소재 역사소설’의 범주와 개념에 관해서는 이민희,2008, 전쟁 소재 역사소설에서
의 만남과 이산의 주체와 타자 국문학연구 17,8~9쪽에서 한 차례 상론을 펼친 바,각
주 2)~5)번을 참고할 것.
     4)조위한(趙緯韓,1567~1649)이 지은 최척전 (1621)은 기본적으로 애정 전기(傳奇)전통이
강한 작품으로 최척과 그의 아내 옥영,그리고 자식들과의 이산과 극적 재회를 중심적으
로 다루고 있다.그러나 작품 후반부에는 명과 후금의 전쟁,그리고 조선군의 심하(沈河)
원정이 다뤄지고 있어 강로전 과 김영철전 과 오버랩되는 부분이 적지 않다.최척전
이 역사와 사건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기보다 낭만적으로,또는 문학적으로 바라보려는 성
향이 강한 애정 전기소설에 해당한다면,강로전 과 김영철전 은 사서(史書)의 전(傳)형
식에 따라 특정 인물을 입전시킨 전계 소설이다.따라서 최척전 이 다른 두 작품에 비해
친연성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으나,작품 후반부에 조선군의 심하(沈河)원정이라는 역사
적 사건을 공통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 세 작품을 함께 다루기로 한다.


산의 기억을 서사화한 전쟁 소재 역사소설 세 작품을 중심으로 소위 서사
속 ‘기억과 망각’의 문제를 오늘날 어떻게 공유할 수 있으며,당시 작품 속
주인공들의 ‘민족’의식이 과연 어떤 의미망으로 체화되고 있었는지를 고구
하는 데 목적이 있다.


2.17세기 전쟁 소재 역사소설에 나타난 기억과 망각

논의를 위해 먼저 최척전 과 강로전 ,그리고 김영철전 의 작품 내용
부터 소개하기로 하자.세 작품은 공히 17세기 전반기에 명․청 교체라는
국제 질서의 재편을 둘러싸고 명나라․청나라․조선이 벌인 전쟁,즉 조선
군의 심하(沈河)원정을 주된 서사축으로 삼고 있는 작품들이다.창작 시기
가 앞서는 작품부터 차례대로 개관하기로 한다.
최척전 은 최척과 그의 가족이 수차례의 전란 속에 이산과 극적인 만남
을 거듭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남원 서문 밖 만복사 동쪽에 거주하던
최척은 임진왜란 당시 어렵사리 옥영과의 혼인에 성공한다.그러나 정유재
란 때 왜구가 남원을 쳐들어오자 지리산 연곡으로 피신했다가 가족들이 왜
구에게 납치되는 바람에 헤어지고 만다.최척은 남원 금석교에서 만난 명나
라 장수 여유문을 따라 중국 요흥으로 가 살게 되고,옥영은 왜적 돈우에게
붙잡혀 일본 나고야로 가게 된다.최척은 중국인 친구 송우와 함께 장사꾼
이 되어 베트남으로 장사하러 갔다가 베트남 항구에서 아내 옥영과 극적으
로 재회를 한다.그 후 둘은 중국 항주에 와 생활하게 되고,거기서 아들을
낳고 산다.그러나 시간이 흘러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최
척이 종군하게 되어 부부는 다시 헤어진다.최척은 요양으로 갔다가 거기서
후금의 포로가 되지만,다행히 조선군 포로로 잡혀 있던 큰 아들 몽석과 해
후하게 된다.이후 두 사람이 함께 탈출해 조선으로 돌아온다.은진 땅에서
는 둘째아들의 중국인 사돈 진위경을 만나 등창을 치료받고 살아난다.중국
에서 살던 옥영은 둘째 아들과 며느리 홍도와 함께 배를 마련해 등주와 내
주,청주와 제주,순천을 거쳐 마침내 고향 남원에 안착한다.이산한 지 30
년 만에 다시 온 가족이 재회한 것인데,남원 주포에서 작가가 최척을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듣고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며 작품은 끝이 난다.
한편, 강로전 은 1618년에 누르하치가 일어나 명나라를 치자 명나라의
요청에 응해 조선군의 도원수로 출정한 강홍립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다.
강홍립은 가능한 한 시간을 끌며 요동의 상황을 살펴 행동하라는 광해군의
밀지를 받고 명나라와 후금의 싸움을 관망하다 결국 후금에 투항한다.그리
고 8년 간 후금의 포로로 지내다가 정묘호란 때 후금의 선봉장이 되어 조선
을 쳐들어오고,결국 조선에서 매국노라는 비난을 받으며 살다가 병사하고
만다.이는 역사적 인물로서의 강홍립을 부정적으로 그린 것으로,역사에서
평가하는 것과 작품 속 강홍립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다.무엇보다 강로
전 은 조선군의 심하(沈河)원정과 8년간의 포로생활,그리고 1627년에 후금
이 조선을 침략한 정묘호란을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어 사료적 가치
마저 지닌 작품이라 할 수 있다.더욱이 주인공을 오랑캐에게 항복하고 목
숨까지 구걸한 부정적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최초의 작품이라는 점에
서도 의미가 있다.도원수가 당시 정세를 교묘히 이용하다가 후금에 투항해
어떻게 목숨을 보전하려 했는지,또한 오랑캐의 장수가 되어 어떻게 고국을
배신하고 침략을 주도했는지를 비판적 시각에서 자세히 서술해 놓았다.그
런데 강로전 의 작가는 서얼 출신의 권칙(權侙)이다.따라서 작품 말미에
‘비천한 사람은 오히려 주인을 배반하지 않는데 역적은 도리어 의관세족(衣
冠世族)에서 나온다’며 문벌세족에 대한 비판을 노골적으로 표명하고 있는
데서 작가의 신분과 그에 따른 문제의식이 여실히 투영되어 있음을 간과해
서는 안 된다.더욱이 권칙은 강홍립 휘하에 있다가 그가 후금에 투항하자
몰래 도망쳐 살아 난 경험까지 있었다.따라서 전란의 역사적 진실을 그 누
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작품 내용에 신뢰를 얻을 만하다.그러나 강
로전 에서는 요동 정벌의 실패를 강홍립 개인의 문제로만 돌리고 있어 과
기억과 망각의 서사로서의 만주 배경 17세기 전쟁 소재 역사소설 읽기 215
연 그 평가가 객관적이거나 순수하다고 할 수 있을 지 의문스럽다.
김영철전 은 명과 후금 사이의 전쟁을 배경으로,아무런 이해관계도 없
던 민초 김영철이 19세에 종군하여 60세에 군역을 지며 힘겹게 살다 죽어
간 파란만장한 삶을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이다.영철은 만주로 출정할 때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 반드시 살아 돌아오라는 조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
해,비록 후금의 장수 아라나(阿羅那)의 은혜를 입어 목숨을 건졌음에도 불구
하고 그를 배반하고 건주(建州)에서 도망쳐 등주(登州)에 가 가정을 꾸리고 살
다가 결국 조선에 돌아온다.그러나 그 뒤로도 세 차례나 더 종군하게 되고,
그 때마다 후금의 장수 아라나와의 관계에 얽혀 후금으로 다시 끌려가게 되
는데,상관이 몸값을 대신 지불함으로써 간신히 풀려 날 수 있었다.그러나
몸값으로 지불한 속량채를 갚느라 마지막에는 가산마저 다 날리고,급기야
늙어서까지 군역을 벗지 못해 네 아들과 함께 산성을 지키다가 일생을 마치
고 만다.비록 김영철전 에서는 김영철이 겪은 포로생활과 가족이산의 고
통이 주된 서사축을 이루고 있다지만,그 과정에서 강로전 이 구현하고 있
는 서사와 겹치거나 유사한 모습이 여럿 있어 두 작품의 관련성이 흥미롭
다.5) 김영철전 의 작가 홍세태 역시 중인 신분으로 그가 김영철의 파란만
장한 삶의 질곡에 관심을 갖고 안타깝게 죽어 간 영철을 위로하고,당대 사
회를 비판하려 했던 저의(底意)마저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세 작품이 우리에게 더욱 흥미롭게 다가오는 이유 중 하
나는 전쟁의 참상을 통해 인간을 사물화하는 폭력의 문제를 보여주려 하기


     5)예컨대,조선군으로 종군해 있던 왜인 300명을 강홍립이 누르하치에게 바치자 왜인들이
누르하치에게 검술을 선보인다는 명분을 내세워 그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는데,이 계획
이 누설되는 바람에 왜인 전원이 사살되고 만 사건이 김영철전 과 강로전 에서 자세히
다뤄지고 있다.그 사건 후에 조선의 양반 출신 장교들이 반역할 여지가 있다 하여 손이
곱고 용모와 복장이 준수한 자 400여 명을 따로 뽑아 내 참수를 당한 사실도 김영철전
과 강로전 에서 공통적으로 다뤄지고 있다.다만 김영철전 에서는 이 사건으로 영철의
종조부인 김영화는 죽임을 당했지만 아라나 장수가 자신의 동생과 얼굴이 닮았다며 영철
은 죽이지 않고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 살게 되는 것으로 처리되고 있고,강로전 에서는
강홍립의 심복이었던 이민환․박난영․이일원 등 10여 명만 목숨을 건지게 되는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이처럼 두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다뤄지고 있는 역사적 사건의 서사적 의
미를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보다 오히려 현실적 인간의 재현을 추구하되,고통과 동정을 넘어선 이념적
존재를 탄생시키려는 성향이 강하다는 점에 있다.예컨대,이 세 작품에서
는 전쟁이라는 폭력적 상황 속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던져져 이유
없이 무의미하게 죽어가거나 고통당한 자들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들은
대의(大義)를 위해 죽었다”는 식의 거짓된 의미를 뒤집어씌우는 기만적 서사
를 보여줌으로써 사건을 경험한 ‘타자’의 목소리를 억압하고 왜곡하며 봉쇄
하는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드러내는 장기가 있다는 것이다.6)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서사의 내용이 사건의 본질이고 진실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듦
으로써 사건 내부의 진실에 다가가는 길을 아예 차단시켜 버리고 말기도 한
다는 것이다.이런 경우를 두고,소위 ‘망각의 폭력’이라 부를 수 있겠는데,
이 망각의 폭력은 과거 사건에 대한 기억의 흔적을 지우는 데 적잖은 역할
을 수행함으로써 타자가 경험한 폭력적․문제적 사건에 대한 공유를 가로
막는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그리하여 민족 내지 집단의 욕망이 개인으로서
의 타자를 침묵하게 만들고 그들이 경험한 사건을 자의적으로 재현․표상
하게 만든다.
세 작품 속에는 동일 사건,또는 비슷한 역사적 체험을 서로 다른 관점과
내용으로 기억해내고 있는 것이 여럿 있다.이에 우선 동일한 사건과 상황
을 어떤 관점에서 서사화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일로부터 전란을 기억해
내고 재구성해내는 메커니즘의 문제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기미년(1619)에 누르하치가 요양에 쳐들어가 여러 고을을 연이어 함락
시키며 명나라 군사들을 대거 살상했다.이에 명나라 황제가 진노하여 중
국 전역의 병사를 일으켜 토벌하고자 했다.소주(蘇州)출신의 오세영(吳
世英)이란 사람이 교유격[명나라 무신 교일기(喬一琦)]의 천총(千摠)으로
있었는데,일찍이 여유문을 통해서 최척이 재주 많고 용맹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리하여 최척을 서기(書記)로 삼아 군중에 두었다.7)


     6)오카 마리․김병구,2004, 기억․서사 ,소명출판,5쪽.
     7)박희병․정길수,2007,최척전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돌베개,46쪽.이하 최척전 ․
  강로전 ․ 김영철전 의 번역문은 이 책에 의거한 것으로,이후에는 작품명과 쪽수만을
밝히기로 한다.그리고 인용문에 제시한 숫자 은 최척전 , 는 강로전 , 은 김영
철전 을 가리킨다

만력 무오년(1618)에 건주의 오랑캐가 명나라와 원수가 되더니 군대를
일으켜 명나라를 침공하여 요양 지역의 몇 개 진을 연거푸 함락시켰다.
명나라 황제가 진노하여 천하의 군사를 움직여 토벌하게 했다.(…중략…)
정예 병사 2만 명을 선발하여 요양으로 출정시키면서 원수의 막중한 임
무를 맡길 사람을 조정 신하들 중에서 천거하게 하니,문무의 명망 있는
자들이 모두 강홍립을 추천했다.이에 강홍립을 원수로 임명하고,평안병
사 김경서를 부원수로 삼았다.8)
 무오년(1618)명나라에서 대군을 일으켜 건주의 오랑캐를 도벌하러 나
서며 우리나라에 병력 지원을 요구하자,우리 측에서는 강홍립을 도원수
로,김경서를 부원수로 삼아 2만 군사를 이끌고 가게 하였다.영철은 종
조부 김영화(金永和)와 함께 좌영장 김응하의 예하 부대원이 되어 선봉에
섰다.이때 영철의 나이 열아홉 살로,아직 혼인하지 않은 처지였다.(…
중략…)출발하기에 이르러 조부 김영가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네가
돌아오지 못하면 우리 집안은 대가 끊긴다.”영철이 말했다.“꼭 돌아올
겁니다.”9)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주인공들이 전쟁에 참여하게 되
는 과정을 그려놓은 대목이다.전체적으로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
다.다만 후금이 요양을 쳐들어온 것이 최척전 에서는 기미년(1619)이라 했
지만,다른 두 작품에서는 무오년(1618)으로 적고 있다.10)또한 주인공들의
출정 이유와 명분이 제시되어 있지 않지만, 과 에서는 주인공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부각되고 있는 반면, 에서는 전쟁에 나갈 수밖에 없는 불
가항력적인 측면이 기조를 이루고 있다.이는 신분의 차이에서 오는 차이이


    8) 강로전 ,96~97쪽.
    9) 김영철전 ,69~70쪽.
   10)역사상 누르하치는 1618년(무오년)에 ‘七大恨’을 내걸고 명나라의 무순성을 선제공격한
다.생각지도 못한 공격과 패배에 놀란 명나라 조정은 1919년 3월 조선의 원정군까지 포
함해 십 수 만의 대군을 파병했으나 사르후[蕯爾滸]전투에서 대패하고 만다.(임계순,
2000, 淸史-만주족이 통치한 중국 ,신서원,26~27쪽 참조)


면서 서술자가 주인공을 바라보는 기본 입장에 차이가 있음을 짐작케 하는
것이기도 하다.공통점이라면 주인공들이 전쟁에 나갈 수 있었던 명분을 합
리화하는 방향에서 역사 속 인물로 구체화시키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그러
나 이는 서술자가 임의로 재구성한 것이지 실존 인물인 당사자들의 논리와
명분 그 자체는 아니다.11)
 요양에 도착하여 수백 리 오랑캐 땅을 지나,조선의 군대와 나란히 우
모채에 진을 쳤다.하지만 명나라 장수가 후금의 군대를 얕본 탓에 대패
하고 말았다.누르하치는 명나라 군사들을 남김없이 죽인 반면,ⓐ조선
군사들은 한편으로 위협하고 한편으로 어르면서 단 한 사람도 살상하지
않았다.12)
 기일이 되어 좌영의 군사들이 먼저 영마전에 도착했다.명나라 군대는
이미 집결해 있었다.김응하가 명나라 도독 유정을 찾아갔다.(…중략…)
이튿날 행군을 시작하매 두 나라의 병사들이 긴 대오를 이루었다.사흘을
행군하여 우모령에 이르렀다.(…중략…)20리를 가서 부차성에 이르렀다.
(…중략…)명나라 군대가 함성을 지르며 달려 들어가 저마다 흩어져 마
을을 초토화시켰는데,그 과정에서 군대의 대오가 무너져 버렸다.이때
귀영가의 3만 철기병이 갑자기 산골짜기 사이에서 튀어나와 공격하니 명
나라 군대는 일시에 궤멸되고 말았다.(…중략…)ⓐ홍립은 즉시 중영과
우영에 명령을 내려,병사들을 모두 산꼭대기로 올려 보내 진을 치고 승
부를 관망하게 했다.13)
 기미년(1619)봄 2월,강홍립이 군대를 이끌고 강을 건너 영마전(景馬
田)에서 명나라 군대와 합류했고,함께 우모령을 넘어 10여 개의 보루를
격파하고 승세를 타 전진하였다.명나라 군대가 맨 앞에서 서고 우리 군
대의 좌영(左營)이 그 다음,중영(中營)이 또 그 다음에 섰으며,우영(右營)
이 맨 뒤의 후군이 되었다.누르하치는 정예병 수만 명을 아들 귀영가에
게 주어 명나라 군대를 격파하게 하였다.마침내 오랑캐가 우리 좌영을


11)실제로 주인공들의 출정 이유가 본문에 밝혀 놓은 것 그대로일 수도 있다.그러나 그것
은 인간으로서 전쟁 참여시 느끼는 두려움,공포심,가족과의 이별 등 여러 개인적 사정
과 환경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는 것이라 일방적이고 맹목적이라 할 것이다.
12) 최척전 ,47~48쪽.
13) 강로전 ,101쪽 ;103쪽 ;108쪽.
기억과 망각의 서사로서의 만주 배경 17세기 전쟁 소재 역사소설 읽기 219


치고 들어와 전투가 시작되었다.(…중략…)ⓐ강홍립이 주머니에서 밀지
를 꺼내 보여주자,김경서는 기운이 꺾여 감히 다시 말을 하지 못했다.결
국 김응하는 전사하고,강홍립과 김경서는 오랑캐에게 투항했다.14)
명나라군과 조선군 연합군이 후금과 전투를 치르다가 패하게 되는 과정
을 그린 부분이다.전투와 관련한 사건 전개 과정과 개요 제시 부분은 세
작품 모두 유사하다.그러나 구체적 진술에서는 차이가 있다.최척전 에서
는 ⓐ처럼 조선 군사를 누르하치가 위협하고 한편으로 어르면서 아무도 죽
이지 않았다고 했다.그러나 김영철전 과 강로전 에서는 강홍립이 왕의
밀지를 받고,일부러 투항하거나 전투에 소극적이었던 탓에 섬멸당하지 않
은 것으로 그리고 있다.이 사건의 진위 여부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문제임
에도 불구하고 서술자에 의해 선택적으로 (혹은 잘못된 사실을 사실로 인식
하고)그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15)이렇듯 작품에서 재구성해 내고 있는
기억의 상이성은 역사적 사건의 한복판에 위치했던 개인에 대한 평가와 묘


14) 김영철전 ,70~71쪽.
15)만약 두 작품이 사실에 입각해 비교적 충실히 서사로 재구성해냈다고 한다면,두 작품이
오버랩 되는 비율이 꽤나 높은 만큼,주인공인 김영철과 강홍립,그리고 주변 인물인 이
민환 등은 같은 장소에서 같은 경험을 한 동시적 인물이라 할 것이다.그리고 이들 작품
은 각기 다른 관점에서 전란과 이산의 현실을 그려나가다가 유사한 자료를 참고했거나
비슷한 내용을 직접 듣고 적었기 때문에 교집합 관계를 보이는 내용들이 중첩적으로 나
타나고 있다고 할 것이다.그러나 본고에서는 작품별로 이본에 따른 기억과 망각의 상이
성 문제라든가,텍스트 자체의 성격이나 맥락에 관한 변별성 문제까지는 구체적으로 다
루지 않기로 한다.세 작품이 가능하기 위해 작가가 갖고 있던 지식이 어디서 왔으며,
어떤 선행 텍스트 내지 동시대 텍스트를 보았는지까지 살피는 작업이 중요하다,그러나
논의가 방만해질 수 있는 관계로 여기서는 세 작품만으로 한정해 다루기로 한다.
그리고 역사소설에서 사실을 가려내려면,당연히 역사 기록과 대조해 보는 작업이 일차
적으로 요구된다.예컨대,자암(紫巖)이민환(1573~1649)이 지은 책중일록(柵中日錄) 과
 건주견문록(建州聞見錄) 에는 그가 1618년 46세에 심하 전역(深河戰役)에 종사관으로
참여하였다가 후금의 포로가 되어 17개월 동안 책중(柵中)에서 구금생활을 한 일과 조선
으로 돌아온 이야기와 비교하는 것이 필요하다.심하 원정은 자암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 하겠는데,이와 관련하여 자암이 남긴 글 중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
이 책중일록 과 건주문견록 이다. 책중일록 은 1618년 4월 명나라의 징병에서부터
1620년 7월 압록강을 건너 만포에 도착할 때까지 심하 전역의 시말을 기록한 일기에서
역사적 사실을 직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안세현,2008,자암 이민환의 <柵中日錄>
과 <建州聞見錄>에 대하여 동방한문학 34,179~217쪽 참조)
220 만주연구 제 11집


사 부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교유격은 패잔병 10여 명을 이끌고 조선 군영에 들어가 조선 병사의
옷을 달라고 애걸했다.조선의 원수(元帥)강홍립은 옷을 주어 죽음을 면
하게 하려 했으나,종사관 이민환은 누르하치의 뜻을 거슬렀다가 훗날 문
제가 될 것이 두려워 그 옷을 빼앗고 명나라 병사들을 붙잡아 적진으로
보냈다.최척은 본래 조선 사람이므로 혼란한 틈을 타 조선 군대 속에 숨
어 들어가 홀로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그러나 강홍립이 후금에 항복하
면서 최척 역시 조선 병사들과 함께 후금 군대에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
고 말았다.16)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실존 인물인 강홍립(姜弘立,1560~1627)과 이민환
(李民寏,1573~1649)17)에 대한 평가다. 최척전 ( )에서는 명나라 장수 교유
격이 전투에서 패한 후 잔병 10명을 이끌고 조선 군영에 와 옷을 달라고 했
을 때,강홍립은 옷을 주어 생명을 구하려 한 반면,이민환은 누르하치의 후
환이 두려운 나마저 준 옷을 빼앗고 오히려 그들을 적진에 보냈다고 했다.
그리고 이때 명나라 군사 신분으로 있었던 최척은 그 사실을 미리 알아차리
고는 조선군대로 몰래 숨어 들어가 화를 면할 수 있었다고 했다.그런데 문
제는 에서 강홍립을 긍정적 인물로,이민환을 부정적 인물로 서술하고 있
는 것과 다른 평가를 에서 내리고 있다는 데 있다.
 홍립은 즉시 중영과 우영에 명령을 내려,병사들을 모두 산꼭대기로
올려 보내 진을 치고 승부를 관망하게 했다.이윽고 교유격이 패잔병 10
여 명과 함께 중영(=강홍립,김경서가 이끌던 진영,인용자 주)에 이르러
명나라 군대가 전멸했다고 했다.(…중략…)홍립이 떠나며 말했다.“교유
격 등 십수 명이 우리 진중에 있는데,오랑캐가 이를 알면 필시 강화하는


   16) 최척전 ,48쪽.
   17)이민환은 평안도 관찰사로 있던 1618년에 강홍립의 막하로 출전했다가 후금의 포로가
되어 17개월 동안 갇혀 있었지만,1620년에 석방되어 돌아온 인물이다.현재 이민환이
포로 생활동안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건주견문록(建州見聞錄) 이 남아 있다.


일이 틀어지게 될 것이다.”마침내 이들을 결박하여 오랑캐 진영으로 보
내게 했다.교유격이 하늘을 우러러 장탄식하며 말했다.“조선과 같은 예
의의 나라에서 오랑캐에게 항복하는 치욕을 달게 받아들이고,심지어 황
제가 보낸 장수를 묶어 오랑캐에게 바치기까지 할 줄이야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너무도 심하구나!”그리고는 비단을 찢어 집에 보내는 편지를
적어 허리띠에 묶은 뒤 칼 위에 엎어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18)
강로전 에서는 이민환이 이 대목과 관련해 어떤 행동을 보였는지 서술
해 놓은 부분이 없다.19)그러나 적어도 후금에 패한 명나라 장수 교유격과
십 수 명의 군인들을 후금에게 갖다 바치는 일을 주도한 인물이 강홍립이었
음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이는 앞의 최척전 에서 강홍립을 긍정적 인물
로 서술한 부분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이어서 주목을 요한다.동일 사건에
대한 평가가 두 작품에서 상이하게 그려지고 있다20)는 점에서 역사란 허구
와 상통하며,기억하고 싶은 내용대로 서사화될 수 있는 여지가 있음을 깨
달을 수 있다.한 사건에 리얼리티를 부여해 사실적으로 그려낸 서사문학에
서,비록 소설이 갖는 허구적 속성을 십분 인정한다 할지라도,그 어떤 작품
이 진짜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 것인가라는 사실 자체보다도 서사가 충분
히 임의로 조작 가능하며,그로 인해 등장인물에 대한 선입견과 부정적 이
미지 형성이 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 한 가지 더 흥미로운 사실은 이민환을 부정적으로 서술한 최
척전 을 이민환의 형인 이민성(李民宬,1570~1629)이 읽고 최척전 에 대한


   18) 강로전 ,108~109쪽 ;112쪽.
   19) 강로전 에서 이후에 누르하치를 해하려던 왜인 300명을 처벌한 후 누르하치가 반란의
위험을 느낀 나머지 ‘양반 장교’를 참수할 때,강홍립의 심복이었던 10여 명만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이때 살아남은 이들 중에 이민환이 언급되고 있는 바,작품에서는 이민
환을 강홍립과 한 통속의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20)그러나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까지 항상 열어 둘 필요가 있다.예컨대 
이 담고 있는 내용은 교유격의 신병처리 문제로 강홍립과 김경서가 의견을 교환하는 논
의 과정이라면, 는 그런 논의를 다 마친 후에 그 결정에 따라 강홍립이 총사령관의 자
격으로 내린 명령일 수 있다는 것이다.따라서 둘은 서로 상치되는 것처럼 보이지만,다
른 각도에서 보면 전혀 상치되지 않는 두 개의 기록,특히 두 개의 단계를 보완해주는
기록으로 볼 수 있다는 점까지 고려해야 할 것이다.


평을 <제최척전(題崔陟傳)>이라는 시로 나타낸 것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당
연히 이민성의 시에서는 자기 동생을 부정적으로 그린 최척전 을 긍정적
으로 평가할 리 만무하다.아니,이민성은 최척전 이 허구임을 부각시키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글쓴이에게 지옥에나 떨어지라고까지 한다.동시대의
인물인 이민성이 이제 막 항간에 유통되던 최척전 을 접하고 이것을 어떻
게 바라보고 있었는지 가늠해 볼 수 있는 자료로서 유용하다.


    기괴하다, 최척전 이여! 怪哉崔陟傳
   누가 지은 것인지 알지 못한다네.(…중략…) 不知誰所作
   최척이 교유격의 휘하에 있다가 陟云喬標下
   다른 사람과 함께 도망쳤다고 한다면 與他走回別
   그 행적이 새롭고 기이하여 闕跡旣新異
    마땅히 널리 알려졌을 것이나 宜播遠耳目
    어찌하여 이 전이 나와서야 奚暇此傳出
    비로소 그 전말을 알게 된 것이란 말인가? 始獲其顚末
    더욱이 남원 땅에는 況聞帶方郡
   원래 다시 돌아온 이가 없다 하니 原無還人物
   혹자는 말하기를 얘깃거리는 되겠지만 或云資話柄
   반드시 사실로 믿기는 어렵다고 하네.(…중략…) 未必憑事實
  붓 끝은 칼이나 창끝보다 심하니 筆端甚鋒鏑
   비유컨대,짐승을 잡아 회를 치는 자가 譬如屠膾子
   도마 위에서 마음대로 고기를 써는 것과 같은 법. 刀几恣臠斮
  비록 민첩하게 솜씨를 뽐내더라도 雖快手敏妙
  죽은 자의 고통은 말로 할 수 없다네. 死者痛楚極
  입전한 뜻을 살펴보니 觀其立傳意
  부처에게 아첨하는 데 있도다. 乃在於佞佛
  부처를 과연 믿는다면 佛果如可信
  응당 무간지옥에나 떨어지리라. 應墮無間獄21)


21)이민성,1994,<題崔陟傳> 敬亭集 卷4,경인문화사,323~325쪽.


이 시는 이민성의 문집 경정집(敬亭集) 에 실려 있는데,최척전 의 작가
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했다.오늘날 최척전 은 조위한(趙緯韓,1567~1649)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이 시를 쓸 때만 해도 작가에 대한 정보를 구체
적으로 갖고 있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문제는 여기서 이민성이 역사적
사실로서의 동생 이민환의 공과(功過)에 대한 평가가 최척전 을 통해 ‘만들
어지고’있음을 지적하고 있다는 점이다.“어찌하여 이 전이 나와서야 비로
소 그 전말을 알게 된 것이란 말인가?(奚暇此傳出,始獲其顚末)”라며 최척전
에서의 서사가 사실에 근거하기보다 누군가의 입맛에 맞게 기억해내고 조
작해낸 것임을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그러면서 최척전 을 쓴 이가 아무리
“민첩하게 솜씨를 뽐내듯이”리얼리티를 보여주고자 했다 할지라도 “죽은 자
의 고통”을 온전히 전달하기는 어렵다는 점까지 지적하고 있다.더욱이 최
척전 의 창작 의도와 관련해 “부처에게 아첨하는 데 있다”고 하여 불교라
는 종교적 힘,즉 장육불의 인도와 도움 하에 주인공의 운명과 역사적 부침
이 해결되었다는 종교적 믿음에서 작품이 만들어졌다고 보았다.이는 최척
전 이라는 작품이 실재와 다르게,종교적 신념과 관점에 의해 허구화되고,
역사와 현실이 재구성되었다고 비판하고 있는 것의 다름 아니다.이미 동시
대부터 서사의 기억이 사실,또는 진실과 달리 왜곡되거나 다른 방향으로
망각될 여지를 인지하고 있었음을 잘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이런 관점에서
본다면,특별히 전란의 고통과 슬픔,비극적 참상,그리고 그에 따른 연민
내지 동정의 시선은 실재적인 것이 아닌,특정 사회와 시대의 독자를 위해
상상력으로 창조되거나 재구성,또는 망각될 여지가 충분하다는 것을 여실
히 알아차릴 수 있다.
전쟁 소재 역사소설에서는 이런 전란의 기억을 더욱 그럴 듯하게 조작해
내고,고통과 동정의 미학을 기묘하게 얽어내는 서사장치가 더욱 강력하게
동원하고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그것은 전쟁(전란)으로 인한 이해관계,
갈등 국면이 일상의 생활에서 맞닥뜨리는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첨예
한 문제로 확대,적용될 개연성을 담보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리고 이런 속

성이야말로 17세기 전쟁 소재 한문 역사소설이 보여주는 장르적 특성이라
보아도 될 것이다.세 작품 공히 서사의 진실성 문제를,리얼리티의 서사화
를 위해 서술자가 아닌 제 3자로부터 들은 이야기라는 점을 밝혀 독자에게
사실임을 믿도록 호소하고 있는 데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이것은 바로 서
술자와 독자 사이에 보이지 않는 진실게임과도 같다.
 내가 남원 주포에 우거하고 있을 때,최척이 나를 찾아와 위와 같이
자신이 겪은 일을 말해 주고는 그 전말을 기록하여 사라지지 않게 해 달
라고 청했다.최척의 요청을 사양하지 못하여 대략 그 줄거리만을 들어
기록했다.22)(최척전 )
 나는 일찍이 강홍립이 선왕의 구신(舊臣)이면서도 그 은의를 돌아보지
않은 점을 애통히 여겼다.(…중략…)그러나 나는 그의 행적을 대략 들었
을 뿐 자세히 알지는 못했었다.내가 서쪽으로 묘향산에 갔다가 노승(老
僧)한 사람을 만났는데,(…중략…)계속 물었더니 노승은 이렇게 말했다.
“제가 어렸을 때 산과 물을 좋아하여 진기한 풍경을 두루 찾아다니던 중
에 금강산의 한 절에서 강홍립을 만났습니다,처음 보자마자 서로 친해져
서 강홍립의 서기(書記)일을 맡아 잠시도 그 곁을 떠난 적이 없었지요.
무오년(1618)이후 저는 후금을 치러 가는 군대에 끼어 온갖 고생과 위험
을 두루 맛보았습니다.강홍립이 죽자 저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지금
에 이른 것입니다.”(…중략…)이윽고 노승은 무오년(1618)부터 정묘년
(1627)까지 일어났던 일의 전말을 하나하나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으니,
내가 지금까지 강홍립에 관해 기록한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노승은 또
이렇게 말했다.“(…중략…)이제 캐물으시기에 저도 모르게 실토하여 이
일이 제 입에서 나와 그대의 귀로 들어가고 말았군요.부디 가벼이 퍼뜨
리지 말아 주십시오!”23)(강로전 )
 외사씨는 말한다.“영철은 오랑캐를 정벌하러 갔다가 오랑캐 땅에 억
류되었고 달아나 중국에 가서 살았다.두 곳에서 모두 처자식을 두고 살
았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마침내 고국으로 돌아왔으니,그 의지가 어찌
그리 매서운지!그가 겪은 일 또한 기이하다고 할 만하다.(…중략…)늙


   22) 최척전 ,66쪽.
   23) 강로전 ,154~155쪽.

어서도 성 지키는 일을 하다가 끝내 가난 속에서 울적한 마음을 품은 채
죽고 말았으니,이 어찌 천하의 충성스런 선비를 격려하는 방법이란 말인
가?나는 영철의 일이 잊혀져 세상에 드러나지 않음을 슬퍼하여 이 전(傳)
을 지어 후인에게 보임으로써 우리나라에 김영철이란 사람이 있었음을
알리고자 한다.24)(김영철전 )
세 작품 모두 남에게서 듣거나 기이한 사정을 알게 되어 ‘전달자’노릇을
하고자 썼다고 했다.25)그러나 서술자의 전달 태도는 사뭇 다르다.서술자
는 소설 내용의 진위 여부는 순전히 최초의 증언자(발화자)에 달려 있지,전
달자일 뿐인 서술자와는 무관하다는 식으로 능청을 떨고 있는 셈이다.그것
이 설령 진실로 들은 것을 옮겨 적은 것일지라도,또는 들은 내용이 진짜
전부 사실일지라도,글로써 재화(再話)되는 시점에서부터 역사적 사실은 더
이상 실제이자 진실이 아닌,기억의 서사로 변질되고 만다.이때 최척이나
김영철,강홍립의 삶이 참으로 기이하고 믿기 어려울 만한 이야기인데,그
럼에도 불구하고 과장과 허구의 소산으로 치부해 버리지 못하는 근본 이유
는 전란이라는 집단적 체험과 기억이 동일한 의미로 재구성되고 있기 때문
이다.즉,한 나라(민족)의 위난(危難)이 사실이자 현실임을 기억하고 싶은 욕
망이,또 다른 한편으로 망각하고 싶은 욕망이 곧 소설을 매개로 대타화(對
他化)하고 있기 때문이다.여기서 소설의 대사회학적 생동성을 엿볼 수 있고,
소설이라는 서사가 지닌 본질적 존립 기반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전란이 소설을 남기는 원리와도 관계가 깊다.즉,과거의 체험을 ‘회
상적으로 이야기’하는 증인의 이야기 자체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후적인’사건과 관련이 깊기 때문이
다.그것은 서술자에게 심각한 의미가 없던 과거의 어떤 경험(타자의 특수한
체험)이 그것을 기억하게 하는 훗날의 어떤 사건(예컨대,최척과 서술자와의 만남


   24) 김영철전 ,91쪽.
   25)작품 말미에 전달자 노릇을 하며 서술자(작가)의 평결이나 논찬을 삽입시키는 형식은
‘전(傳)’글쓰기의 일반적 형식을 차용한 것이지만,이것이 허구적 성격을 강화시키는 서
사 장치로 적극 활용되기도 했다.

과 대화)에 의해 또 다른 트라우마(trauma)의 특질을 얻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
다.그러므로 서술자가 기억하는 행위 자체는 과거의 사건에 트라우마의 특
질을 부여하는 사후적인 사건과 같다.그래서 과거 사건에 대한 기억과 인
상은 과거의 기억과 인상 그대로 남아 있지 않고,일종의 변형과 변화의 이
행 과정을 거치게 된다.기억은 과거의 단순한 축적이 아니라 기억하려는
사람의 고유한 ‘의도’일 뿐이며,현재 상태에서 ‘떠올라’과거에 경험한 일
로 여겨질 뿐이다.이런 측면에서 독자가 지면을 통해 만나게 되는 사건과
사실은 바로 서술자에 의한 사후적 사건이자 사실인 것이나 마찬가지다.
독자는 사실 전란이 옳고 타당한 사건이었나를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동아시아에서 벌어진,아니 만주 지역에서 벌어진,새로운 새판 짜기의 역
사를 평가하고 싶어하지도 않는다.그것은 역사가의 소관일 뿐,소설의 독
자는,작가는 그 사건을,삶 자체를 어떻게 기억하고 싶은가?라는 욕망에
충실하고 싶은 것뿐이다.따라서 ‘과거에 그랬다’라는 사실 판단보다도 ‘그
래서 어떻다’라는 가치 판단과 입장 표명에 관심이 많다.전쟁 소재 역사소
설에서는 그러한 작가와 독자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마법을 가지고 있다.
현실이 고통스럽다는 사실 판단보다도 그 고통을 동정하거나 환상과 상상
을 결부시켜 현실(사실)과 다른 제 3자적 입장을 취하려 한다.그것이 17세
기 전쟁 소재 소설이 창작되고,기억되고,읽히던 하나의 원리였다.

3.17세기 전쟁 소재 역사소설에 나타난 기억과 망각의 존재 양상

그렇다면 세 작품에서 기억과 망각이 존재하는 양상은 어떠한가?현실에
서 체험은 망각되어 버리거나 부정확하게 기억되기 쉽다.따라서 망각은 기
억과 상반된 현상이 아니라 오히려 기억의 다른 형태라고도 말할 수 있다.
기억되지 않는 부분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인간 정신 속에서 어떤 다른 형
기억과 망각의 서사로서의 만주 배경 17세기 전쟁 소재 역사소설 읽기 227
태로 잔존하기 때문이다.게다가 ‘망각’은 한편으로 기억해내고 싶지 않은,
‘기억에 대한 심리적 거부’의 성향을 띠기도 한다.따라서 기억뿐 아니라 망
각도 실은 목적적으로 재구성되기 쉬우며,이런 속성이 서사에서도 의도적
으로 재현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서사에 기억과
망각이 존재하는 양상은 다음의 네 가지로 크게 나눠 볼 수 있다.


<표 1> 서사에 나타난 기억과 망각의 존재 양상26)
기억
의도

(가)의도된
(조작된)기억
(다)
비의도적 기억 비의
( 도성 나)
의도된 망각
(라)비의도적 망각
망각
(가)서사에서 의도적으로 기억해 낸 역사-체험담 /이념적 변형
(나)서사에서 의도적으로 망각시킨 역사-시대․사회에 대한 불만과
비판
(다)서사에서 의도하지 않았지만 기억된 역사-리얼리티 획득을 통한
자료의 간접적 복원
(라)서사에서 의도하지 않았지만 망각된 역사-상상․서사적 독법이
요구되는 사건․사실27)
위 표에서 (가)는 서술자가 힘써 나타내고자 하는 것과 관련된다.세 작품
의 경우,이산보다는 극적 만남에,이색적 체험담보다는 고향으로의 회귀
(또는 효의 실천,가족애,고국 문제 등)에,개인적 감정 표출보다는 국가적
이념 순응(나라에 대한 충성을 요하는 군역,배반 문제 등)을 애써 끄집어내려는

      26)이 표는 필자가 직접 작성한 것이다.
      27)우리는 방에 있던 일상의 물건을 치웠을 때,그것이 없어졌는지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그러나 새로운 물건이 들어오거나 재배치될 때,그것은 쉽게 눈에 띄거나 기억되기 쉽
다.이처럼 망각하고 있는 내용(사실,대상)이 무엇이었는지 역사에서 찾아내기란 쉽지
않지만,서술 내용이나 관련 배경과 문맥을 고려해 미루어 복원 가능한 것도 있다.


시선이 감지된다.이에 반해 (나)는 전쟁으로 인한 이산과 고통의 기억을
‘동정’의 시선 표출을 통해 다분히 목적적으로 은폐시키려 한 망각의 서사
에 해당한다.28)
사실 17세기 전쟁 소재 역사소설을 좀 더 깊이 있게 들여다볼 수 있는 코
드는 바로 고통과 동정 (또는 분노)의 문제이다.상기 세 작품은 전란을 소
재로 하면서 주인공들의 파란만장한 삶을 리얼하게 그려내고 있는 탓에 주
인공들의 삶을 따라가며 읽다보면,그가 비록 부정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할
지라도,삶이 어찌 그다지 고단할 수 있을까라는 평가로부터 주인공의 처지
와 태도에 한편으로 분개하기도 하고 한탄하기도 한다.이런 독자 반응의
기저엔 주인공에 대한 동정 내지 분노가 크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이
로 볼 때,작가가 말하고 (기억하고)싶었던 것은 고통 그 자체보다는 ‘고통
의 서사’에 있으며,독자들이 어떤 시선을 갖도록 할 것인가에 더 관심이
많았다고 할 것이다.이때 독자들의 시선이란 다름 아닌 ‘동정 내지 분노’이
다.29)
세 작품에서 동정 내지 분노의 시선은 서술자의 태도에서도 감지된다.예
컨대,사건의 전말을 기록하여 사라지지 않게 해달라는 최척의 요청을 차마
사양하지 못해 기록했다거나(최척전 )충성스런 선비를 격려하는 방법이라
여겨 영철의 일을 전으로 짓는다거나(김영철전 )강홍립이 선왕의 은의를 돌
아보지 않는 점을 애통히 여겨 글을 짓는다(강로전 )고 한 것에서 잘 나타나
있다.30)이러한 서술자의 시선에서 소설이 기억하고 싶어 하고,망각하고
싶어 하는 욕망의 내용과 실체가 의도적일 수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따라서 동정 내지 분노의 감정은 결국 전란과 고통에 대한 의도된 기억


      28)이때 망각은 기억의 다른 면이라는 시각을 견지해야 이에 대한 설명이 가능하다.
      29)고통은 기본적으로 상처 ‘입거나’‘당하는’수동적 성격이 강한 만큼,비판․증오․애정
보다 동정의 시선으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려는 성향이 강하다.흔히 동정(同情,
sympathy)은 일상적으로 연민(憐憫,pity),또는 공감(共感,empathy)과 자주 섞어 쓰고 있
는 데다 분야에 따라,개인에 따라 호환되는 경우도 달라,이들을 쉽게 구별해 설명하
기 어렵다(손유경,2008, 고통과 동정 ,역사비평사,15쪽).
      30)주 22)~24)의 인용문들을 참고할 것.


과 망각에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즉,임란과 심하(沈河)원정,그리고 병
란 등을 체험한 조선 사회에서는 이런 전쟁의 참상을 전쟁 소재 역사소설을
매개로 고발하고는 있지만 인간을 사물화하는 폭력의 문제를 다루기보다
오히려 현실적 인간의 재현을 추구하되,고통과 동정 내지 분노를 넘어선
이념적 존재를 탄생시키려는 성향이 강했다고 할 것이다.


4.17세기 전쟁 소재 역사소설에 나타난 비의도적 기억과 망각

정작 필자가 관심 갖는 것은 (가)와 (나)보다 (다)와 (라)의 경우이다.서사
에서 의도적으로 기억하거나 망각하고자 했던 사실보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기억하거나 망각하게 된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전쟁 소재 역사소설을 읽어
내는 중요한 독법 중 하나라고 보기 때문이다.(다)에 해당하는 것은 예컨대,
작품 속에서 언급된 팔기군과 민족 관련 의식이다.작품에서는 팔기군과 만
주족의 통치 체제의 단면이 드러나 있지만,정작 서술자는 그것 자체에는
별반 관심이 없어 보인다.그러나 그러한 제도와 만주족(누르하치,홍타이지
등)의 말을 빌려 그들의 대타적 의식이 어떠한지,소위 주변 민족에 대한 의
식이 어떠한지 읽어낼 수 있다.일본인 병사들의 무술 시범도 팔기군에서
주로 행하던 의례 중 하나였음을 보여주는,의도하지 않은 기억들이라 하겠
다.이에 관해서는 후술하기로 한다.
그러나 (라)의 경우,후대인의 입장에서 과거에 무엇이 사실로 있었는데
서사에서 부재하게 되었거나 소홀하게 다뤄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
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그러나 우리는 서사에서 그려지지 않은,이러한
역사까지 읽어야 한다.이것이 ‘역사가 아닌 서사’를 통해 읽어야 하는 한
가지 독해법이기도 하다.서사 속에 투영된 개인적․일상적 모습을 통해 공
식적 기록에서 사라졌거나 불분명한 역사와 사실을,오히려 망각된 역사적
사실과 그 의미를 발견할 수도 있다.그것이야말로 인간과 세계를 보다 충
실히 이해하는 방편이 된다.
앞서 언급했듯이,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역사에 대한 기억이자 재구성
의 결과이지 실제 사실과 다를 수 있다.중요한 건 역사에 대한 인식과 기
억의 내용이 실제 역사와 맞닿는 부분이 있느냐 하는 것과 어떻게 만나고
있느냐 하는 데 있다.우리 모두의 기억은 파편화된 역사에 불과하다.근대
사에서 ‘만주’하면 ‘독립운동 무대’라는 ‘사건’자체를 떠올리는 것처럼 서
사상의 공간과 지명은 ‘사건’의 메타포가 되기 쉽다.독자 입장에서는 임란
과 심하(沈河)원정,병란 이후 조선은 물론 중국과 일본,그리고 요동 지역
이라는 공간을 전란과 이산,그리고 고통으로 점철된 상상의 지리이자 ‘그
들의’공간으로 인식하기 쉽다.그리고 그 공간은 전란과 헤어짐,또는 폭력
의 기억을 담보한 공간으로 오랫동안 자리 잡기 쉽다.세 작품에서 보여주
는 서사 공간이란 지명만 언급될 뿐,실제 그 장소에 대한 구체적 부연 설
명이나 공간 묘사는 없다.적어도 장소(공간)에 대한 관심이나 애정을 표명
하거나 구체적 묘사 또는 설명을 가한 부분은 찾을 수 없다.언급된 장소가
서사를 활성화하고 분위기를 고양시키는 배경적 성격을 지니지 못하고,다
만 사건 전개의 개연성을 부여하려는 단순 소재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사건이 벌어지는 공간에 대한 의식 표출보다 사건 그 자체에 대한 관
심이 더 컸기 때문으로 보인다.31)이로 볼 때,작가의 공간관은 여전히 막연
하고 관념적이어서 주인공이 지나가거나 머물렀던 장소에 어떤 특별한 의
미를 부여하기 어렵다.외형적 체험 공간은 동아시아 전체로 확대되었지만,
그 공간에 대한 특별하고도 세세한 기억은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 세 작품 속 공간에는 자의적으로 친숙한 ‘자기들
의’공간(조선)과 그 공간 건너편에 있는 ‘그들의’공간(중국,일본,만주 등)을
마음속으로 이름 붙여 구별 짓는 ‘상상의 공간’이 잘 포착되지 않는다.수평

    31)소설은 스토리(시간적 구성)와 플롯(인과적 구성)의 절묘한 배합 서사라 할 수 있다.그렇
다면 전쟁 소재 역사소설은 공간의 이동(변화)을 통해 사건의 전개와 시간적 흐름을 보
여주려는 경향이 강한,스토리 중심의 서사라 할 것이다.

적 세계로서의 지리적 관념의 확대 국면은 감지되지만,조선과 중국,일본
과 베트남,만주족이 발흥한 건주 지역 등을 제도적,정신적 경계에 의해 구
획하려는 우열의 층위는 보이지 않는다.32)이것이 서사 공간에 대한 ‘망각
된 기억’,즉 ‘비의도적 망각’의 한 단면이라 할 수 있다.이에 관한 예는 작
품에서 더 찾아낼 수 있다.
반면,비록 의도하지 않았지만,역사상의 특정 사건(대상)을 기억해 내고
있는 (다)의 예로,후금(청나라)의 통치 체제로 내세웠던 ‘팔기군’제도와 그
운영 체계에 관한 것을 들 수 있다.강로전 에서는 강홍립을 비롯한 왜인
들의 항복과 만주족 장수들의 이민족 수용 정책이 작품 속에서 간헐적으로
묘사되고 있는데,이것은 만주족의 고유한 군사행정 조직인 팔기군(팔기제)
의 실체를 이해하는 하나의 자료로 활용 가능하다.
 누르하치는 어느 날 건주성에서 큰 잔치를 베풀고 팔기군의 대장을
모두 모이게 했다.대장들이 모두 비단옷을 입고 서쪽에 나란히 벌여 있
었다.홍립은 그 위에 앉고,김경서는 그 아래에 앉았다.33)
인용문은 강홍립이 팔기군의 대장으로 누르하치의 연회에 참석한 장면
묘사의 일부다.여기서 ‘팔기군’이란 ‘팔기군제’를 염두에 둔 것으로,소위
만주족의 군사적․사회적․경제적․정치적 기능을 결합시킨 복합 행정조
직을 의미한다.34)이 팔기군제는 역사적으로 1644년에 만주족이 청나라를
세우기 전인 약 40년 동안 군사력을 동원하고 여러 집단을 관리,감독하는
포괄적인 우산조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만주족이 청나라를 세우는 토대를
이룬 조직체계로서 이것은 향후 만주족이 한족에 동화되지 않고 자신들의

    32)그렇다고 해서 작품 속 공간 묘사나 이해가 실제적 장소에 대한 정확한 재현으로 나타
났다는 것도 아니다.여전히 서술자가 기억하고 싶은 장소는 실제적 장소 그 자체보다
인식 상에,머릿속에 남아 있는 관념적 상상 속 장소를 기억해 내고,이를 재구성하려는
성향이 강하다고 할 것이다.
    33) 강로전 ,117쪽.
    34)마크 C.엘리엇․이훈․김선민,2009, 만주족의 청제국 ,푸른역사,86~87쪽.

정체성을 유지하며 청나라를 이끌어나가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35)문제
는 이 팔기에 병사,관리,노예 등도 포함되었고,만주족은 물론이려니와 몽
골족,변경의 한족,그리고 조선인까지 포함되었으며,심지어 남녀노소 및
유능자와 무능자까지 받아들였다는 점이다.즉,새로 흥기하던 청나라가 이
민족과 여러 계층에 대한 유연한 포용정책으로 군사력과 행정력을 키워나
간,만주족 고유의 조직체계가 바로 팔기군제인 것이다.그래서 이 팔기군
제에 의해 무리를 이끌고 투항한 자와 포로들의 경우 한족 위주의 한군에
소속시켰다.36)
이로 본다면,강홍립이 조선의 군사들을 이끌고 누르하치에게 투항한 후,
그가 팔기군의 대장 자격으로 높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는 강로전 의 서술
대목은 강홍립 일행이 당시 만주족의 팔기군제에 포함되었을 가능성을 열
어놓게 만들어준다.이는 강홍립이 단순히 후금에 투항한 후 8년 간 포로생
활을 하다가 조선을 공격했다는 관점이 아니라,8년이란 긴 기간 동안 적절
한 대접을 받으며 후금의 일원으로 있었고 그 결과 정묘호란 때 선봉에 서
서 조선을 쳐들어올 수 있었음을 추단케 하는 예라 할 것이다.37)그렇다면
이것은 서술자가 기억과 재생을 목적에서 서술한 것이 아닌,의도하지 않았
지만 기억된(그려진)역사요 사실이라 할 것이다.그리고 이러한 기억의 잔상

      35)위의 책,5~529쪽.마크 엘리엇은 만주족이 한족에 동화된 것이 아니라 적응과 문화변용
을 통해 300년 간 자기 정체성을 유지해 나갔다는 소위 ‘신청사(新淸史)’를 주장한 대표
적 학자이다.그는 만주족이 청나라를 세운 후 한족에 동화되지 않고 자기 정체성을 유
지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만주족 고유의 ‘팔기군제’에 있다고 보았다.
     36)예를 들어,18세기 초에 팔기 중 한군에 속했던 김덕순(金德純)이란 이가 다음과 같이 기
록한 것이 있다.“각 기(旗)는 3부분으로 나뉘었다.본래 누르하치를 따른 부락은……만
주(부분)를 구성했다.막북(漠北)에서 온 활 쏘는 사람들은 몽골(부분)을 이루었다.요인
(遼人)이었던,옛 명나라의 지휘사(指揮使)의 자손으로 무리를 이끌고 투항한 자와 포로들
은 한군(부분)에 소속되었다.”(金德純,1720, 旗軍志 제2권 ;마크 C.엘리엇,위의 책,
89~90쪽에서 재인용.)
    37)즉,누르하치의 다민족,다문화 포용정책의 일환으로 마련한 국가 통치체제의 중추인 팔
기군제 형성기에 강홍립과 그의 군사들이 그 편제 속에 포함된 사정을 짐작케 하는 대
목이라 하겠다.그러나 1626년에 죽은 누르하치 이전에 팔기군제가 확립된 것도 아니고,
팔기군 내 조선인이 일부 있었지만,강홍립 일행이 바로 그들이었다고 할 만한 증거는
아직 없다.

은 강홍립이 단순히 조선을 배신하고 청에 투항한 것이 아니라,투항한 자
들에게 기회를 주고 이들을 자기 조직의 일원으로 동화시키려 한 팔기군제
수용한 결과일 수 있다는 새로운 독법 가능성을 시사한다.
 홍타이지는 손을 들어 남쪽을 가리켜 보이더니 이렇게 말했다.‘영철
은 본래 조선 사람인데,8년 동안은 우리 백성이었고,6년 동안은 등주 백
성이었다가 이제 다시 조선 백성이 되었다.조선 백성 또한 우리 백성이
다.더구나 큰 아들이 군중에 있고 작은아들은 우리 건주에 있으니,부자
가 모두 우리 백성인 셈이다.저 등주라고 해서 어찌 우리 백성이 될 수
없겠느냐?내가 천하를 얻음이 이로부터 시작되리니,이 사람이 온 것이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느냐?38)
만주족이 운영한 팔기제의 성격과 그 통치방식을 염두에 둔다면,위의 김
영철전 에서 홍타이지가 영철을 포용하려는 태도나 강로전 에서 누르하치
가 강홍립에게 대하는 태도나 평가 역시,의도된 것이지만,허위(虛僞)가 아
닌 사실(史實)의 측면에서 바라볼 여지가 있다고 하겠다.39)
원래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과 그들의 조상인 여진족은 국가 수립 이전부
터 조선과 오랜 세월 마주하며 살아왔다.그 과정에서 때로 갈등하기도 했
지만,때로 혼융하며 지내왔다.세 작품에서 청나라인40)들이 조선인의 절대
적 적대자나 악인으로 그려지고 있지 않다는 점도 유의해야 할 부분이다.
어떤 면에서 주인공들이 만난 청나라인(중국인)의 반응은 너와 나,중화와 오
랑캐의 구분이 없는,동아시아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주문하고 있다고
하겠다.41)

     38) 김영철전 ,88쪽.
     39)‘사실(事實)’의 반대어,또는 대립어는 ‘허구(虛構)’가 아닌 ‘허위(虛僞)’이다.
     40)이는 만주족뿐 아니라 한족(명나라인),그리고 일본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41)이 밖에도 최척전 에서의 여유문(余有文),돈우(頓于),송우(宋佑), 김영철전 의 전유년
(田有年),아라나(阿羅那),홍타이지, 강로전 의 누르하치,홍타이지 등이 기본적으로 조
선인 주인공에게 적대적이지 않는 외국인으로 그려지고 있다.물론 이들이 조선인을 배
타적으로 보지 않는 이유와 태도의 층위는 각각 조금씩 다르다 할 것이다.

이럴 경우,‘민족이란 무엇인가?’를 다시금 되묻게 된다.즉,역사적 오류
라고까지도 말할 수 있는 ‘망각’이 민족 창출의 근본적인 요소가 된다고 말
할 수 있을까?전란을 체험한 16세기말~17세기 초에 가지고 있었던 ‘민족’
의식과 ‘조국’의식이란 과연 어떤 형태의 것인가?오늘날 근대인의 시각에
서 말하는 민족주의란 ‘우리’와 ‘타자’를 구분 짓고 타자를 배제함으로써 우
리의 일상 의식을 ‘조국’이라는 경계 안에 귀속시키려는 문화적 실천 행위
일체를 일컫는 말의 다름 아니다.따라서 민족주의의 욕망으로 인해 침묵당
한 타자의 고통스런 삶은 선명한 언어로 표현되지 못하고,우리는 그들의
몸짓과 표정 등을 통해 흔적으로만 ‘감지’하고 ‘추측’하며 ‘동정’할 뿐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 고통스러운 흔적의 서사에 대한 우리의 이해 방
식과 태도에 있다.적어도 이것을 이해하려면 민족주의의 미망을 벗어난 지
점,즉 조국이라는 명분에 귀속되지 않고,오히려 거기에 귀속될 수 없는 자
연인적 삶의 위치에 서서 돌아볼 수 있을 때,비로소 그 작업이 의미 있는
실천이 될 수 있다.
전쟁 소재 역사소설에서는 이러한 민족주의 입장에서의 민족의식과 그
구성원의 의미를 기억하거나 망각하려 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 중요하다.이
를 중세적 민족의식이라 말할 수 있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실상은 만주
족이 여러 주변 민족을 동화하거나 흡수,변형시키려 팔기군에 적극 편입시
킨 일처럼 나와 너,조선족과 만주족을 주체와 타자로 인식하지 않았거나
그 인식 지점이 근대인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난다는 사실에 유의해
야만 할 것이다.
또 하나,(다)처럼 의도하지 않았지만 기억된(그려진)역사 중에 팔기군의
무술 시범과 훈련이 있다.조선군으로 종군해 있던 왜인 300명을 강홍립이
누르하치에게 바치자 왜인들이 누르하치에게 검술을 선보인다는 명분을 내
세워 그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는데,이 계획이 누설되는 바람에 왜인 전원
이 사살되고 만 사건이 김영철전 과 강로전 에서 자세히 다뤄지고 있다.
기억과 망각의 서사로서의 만주 배경 17세기 전쟁 소재 역사소설 읽기 235
 당초에 홍립은 조선에 항복한 왜인(倭人)300명을 친위군으로 삼아 늘
자신의 군막 앞을 지키게 하고 있었는데,이날 누르하치에게 이들을 추천하
며 이렇게 말했다.“제 군막을 지키는 300명의 왜인 병사들은 몸이 날래고
용감무쌍할 뿐 아니라 검술 또한 천하제일입니다.주군께서 쓰시도록 바치
고자 합니다.”누르하치가 몹시 기뻐하며 즉시 명령을 내렸다.“내일 대궐
안뜰에서 왜인들의 검술을 보고 싶다.”(…중략…)시범 도중에 왜인 세 명
이 누르하치를 노려보더니 드디어 칼춤을 추며 달려들었다.그러나 팔기
군 병사들의 창이 일제히 날아오니 중과부적인지라,왜인 세 명은 그만
창에 맞아 죽었다.바깥뜰에 있던 나머지 왜인들 역시 모두 창검에 찔려
죽고 말았다.오랑캐들도 칼에 베여 죽은 자가 500여 명이나 되어 뜰 안
가득 시체가 쌓였다.42)
 강홍립은 출정할 때 임진왜란 당시 우리나라에 투항한 왜인 300명을
뽑아 종군하게 했는데,이때에 이르러 누르하치에게 이들을 바쳤다.누
르하치가 몹시 기뻐하며 이튿날 열병(閱兵)하기로 했다.이에 왜인들은
누르하치를 암살하고 강홍립을 붙잡아 조선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는데,
그날 밤 계획이 누설되는 바람에 왜인 전원이 사살되고 말았다.우리 병
사들은 이를 보고 모두들 분개해 마지않았다.43)
두 작품에서 모두 강홍립 예하 군사들이었던 왜인 300명이 누르하치 앞
에서 검술 시범,또는 열병을 해 보이는 장면이 등장한다.그런데 강로전
에 비해 김영철전 이 동일 사건을 소략하게 제시하고 있는데,아마도 후대
에 지어진 김영철전 이 강로전 을 요약적으로 기술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강홍립 부대는 이미 팔기군에 소속되어 있었던 바,이렇듯 타민족 군사들이
팔기군 내에서 무술 시범과 열병식을 거행하는 일은 조직 내 결속을 다지고
충성심을 보여주기 위해 실제로 팔기군 내에서 종종 거행되던 하나의 의식
이었다.역사에서는 이를 자세히 기록해 놓고 있지 않지만,오히려 소설 작
품에서 그 구체적 시연 과정과 모습이 기억되고 재구성되고 있다.
그런데 300명의 왜인 군사들은 조선에 충성을 다하려던 이들로서,그들

     42) 강로전 ,120,122쪽.
     43) 김영철전 ,71쪽.

이 누르하치를 암살하려 했던 적극성에 있어서는 조선 군사들의 적개심과
별반 차이가 없다.44)그러나 이들의 암살 음모는 결국 발각되고,모두 몰사
하고 만다.이때 강로전 에서는 이들이 팔기군 병사들에 의해 진압 당했는
데,왜인 300명 외에 다른 오랑캐들까지 포함된 500여 명이나 죽었다고 했
다.45)이로 보건대,단순히 왜인 300명만 암살 시도에 연루된 것이 아니라
그 밖에 다른 소수 민족도 이에 동참했거나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저간의 사
정까지 짐작해 볼 수 있다.아니면 적어도 암살 시도가 실패하고 팔기군에
의해 진압당하는 과정에서 즉흥적으로 쿠데타를 시도하다가 함께 죽어간
이들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이런 일련의 팔기군 내 소요 사태는 아직
팔기군 제도가 온전히 정착하지 못했던 초기 사정을 짐작케 한다.또한 편
성된 구성원 중에 반발하거나 불만을 가진 세력들이 누르하치 암살과 저항
을 시도했다는 것 따위를 뒷받침해 주는 훌륭한 서사적 기억이라 하겠다.
이로 볼 때,이들 작품에서 그리고 있는 서사엔 오늘날 독자의 눈에 잘 포
착되지 않는,의도적으로 기억된 것이 아닌,또 다른 사실,아니 역사의 진
실이 숨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44)작품에 등장하는 일본인 병사들은 조선에 투항하거나 귀순한 ‘항왜(降倭)’를 가리킨다.
임란 이후 항왜는 조선군에 편입돼 전투에 참여하거나 정보원으로 활약하기도 하고,조
총이나 화약 제조법 등을 전수하기도 했는데,남다른 용맹과 충성심을 보인 이들이 많았
다.고전 서사에서는 항왜가 각종 전쟁에 참여해 전공을 세우고 충성을 보이는 것으로
그리고 있는데,이는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했던 인물을 부각시키기 위한 목적이 강했다.
강홍립 휘하의 항왜들이 후금에 투항하는 것에 끝까지 저항하다가 전원 죽임을 당했다
는 이야기가 사서(史書)가 아닌 강로전 과 김영철전 에서 자세히 다뤄지고 있는데,전
설과 서사적 허구로만 취급할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의 기억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본다.고전 서사 속 항왜 관련 기존 연구로는 권혁래,2007, 16~17세기 동
아시아적 경험과 기억으로서의 일본인 형상:조선후기 역사소설을 대상으로 열상고전
연구 26,31~59쪽 ;서신혜,2009,고전 서사 속 항왜의 형상화 양상에 대한 연구 동
양고전연구 37,161~188쪽을 참고할 것.
       45)역사적 사료에서는 항왜 300명에 대한 학살 사건이 발견되지 않는다.다만 이민환이 쓴
 책중일록 에서 이와 유사한 기록이 보인다.당시 조선군 1만 2천 명 중에 8천 명은 죽
거나 실종되었고,약 4천 명 정도가 포로가 되었다.그런데 어느 날 조선군 포로들 중 양
반(군관과 병사)몇 명이 캠프에서 탈출해 도망갔는데,여진 부락에 들어가 부녀를 겁탁
하고 살해,도주한 일이 벌어졌다.그러나 이들은 끝내 잡히지 않았고,이에 대한 분풀이
로 포로 중에서 양반 출신으로 보이는 자 약 400명을 처형해 버린 이야기가 나온다.작
품 본문에서 항왜 3백 명 학살 서사는 혹 이 사건을 토대로 미화시킨 것일 수도 있다.

5.맺음말

이상의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면 이러하다.서사 속 고통과 동정의 시선에
는 의도성이 강하다.그러나 작품에 구현된 장소(공간)나 제도 자체에 대한
기억과 망각은 의도적이지 않으면서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기제
로 우리에게 다가오기 쉽다.의도된 기억과 망각의 주체는 개인적이기도 하
고 집단적일 수 있지만,비의도적 요소는 작가의 영역을 벗어난 것으로 주체
의 성격이나 문학 텍스트의 갈래와 관련시켜 이해할 수 있다.이는 분명 역
사가가 역사적 사건을 바라보고 재구성하는 시각과는 다른 접근 방식이다.
여기서 하나만 더 언급하고 논의를 마치고자 한다.세 작품의 공통점 중
하나는 고통을 당하는 주체(주인공)의 의식은 감지되지만,고통을 주는 자(대
상)는 분명히 제시되어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아니 고통의 원인자가 있다
하더라도 심각하지 않고 구체적이지 않아 그 존재감이 와 닿지 않는다.즉,
고통당하는 이는 많지만,정작 고통 제공의 원인자에 대한 처벌이나 대상자
에 대한 증오,저주의 감정은 선명히 드러나 있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여전
히 불철저하다.그러나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다만 그것이 구체적 인간이
아닌 운명 또는 역사적 사건(전란,전쟁)이라는 두루 뭉실한 대상으로서의 타
자 의식인 것이다.이처럼 고통을 준 주체에 대한 자각이 여전히 어렴풋한
상태에 머문 것이 이 세 작품들이다.46)이후 이 타자 의식이,비록 정도의
문제일 수 있겠는데,구체적 자각 하에 표출되어 나타난 것이 이후 소설사

      46)기본적으로 세 작품에서는 명군에 대한 호의적 입장이 드러나 있지만,그렇다고 후금에
대한 적대감이 노골적으로 서술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즉,누가 주적(主敵)이라는 의식
이 분명하지 않고,누구를 증오하거나 미워할 대상이라는 시선이나 암시조차 찾아보기
어렵다.이는 갈등 대상을 선명히 부각시켜 서술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최척
전 과 김영철전 의 경우,근본적으로 서술자가 인물 간 갈등 국면을 문제 제기하고 그
의미를 찾아내려 하기보다 극적 체험담과 기이한 이산과 재회 구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
기 때문이다.그나마 강로전 에서는 최척전 과 달리 강홍립을 매국노로 몰며,그를 동
정하는 시선이 강하게 감지되고,김영철전 에서는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 김영철
의 파란만장한 삶 자체뿐 아니라 김영철에 대한 사회와 국가의 처신과 대우에 대한 불
만 토로가 참신하게 다가온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에서 발견되는 궤적이다.
누구나 타자를 통해서만 진정한 자아를 발견할 수 있다는 자각.47)이런
의식이 정립되어야 억압 받는 자뿐이 아니라 억압하는 자의 문제까지 심오
하게 생각할 수 있게 된다.그래야 억압하는 자(타자)를 비판할 지,동정할
지,아니면 용서할 지도 깨달을 수 있다.그래야 상황에 맞는 옷을 입을 줄
알게 된다.후대에 전쟁을 기억해 내고,또한 망각하고자 하는 기제 속에는
그 작가가,독자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그 사회가 어떤 모습이고 싶은
지 이미지를 결정하고,그것에 따라 서사라는 겉모습을 만들어 내게 되고,
결국 그것이 하나의 실체가 되고 만 것이다.이러한 사고(의식)의 균열 지점
이 이전과 현저하게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 바로 17세기였고,
특별히 명․청 교체기에 만주를 중심으로 한 전투와 관련한 사건을 다룬
전쟁 소재 역사소설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이다.



      47)분명한 것은 ‘타자’와 ‘차이’에 관한 개념이 17세기에도 오늘날처럼 현저했던 것은 아니
라는 점이다.20세기 들어서야 자신의 욕망,또는 고유한 자신의 내면을 긍정하고,이를
표현하게 되면서 타자와의 차이를 경험하게 된 측면이 강하다.다만 이런 타자 의식의
단초를 17세기 전쟁 소재 역사소설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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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망각의 서사로서의 만주 배경 17세기 전쟁 소재 역사소설 읽기-최척전(崔陟傳)․강로전(姜虜傳)․김영철전(金英哲傳) 을 중심으로-.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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