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 록
본 논문은 영미권의 정보 동맹 파이브 아이즈와 관련하여 그간 크게 주목받지 않았던 ‘파이브 아이즈의 역사’를 다음의 두 가 지 차원에서 새롭게 분석해보고자 했다. 첫째, 파이브 아이즈는 영 국과 미국의 정보 체계가 결합하고 그것이 확장되는 과정에서 형성 되었다기보다는 평화적 세력전이의 과정 속에서 정보 동맹의 ‘무게(2022. 12.) 중심’이 옮겨가는 과정에 가까웠다. 즉, 파이브 아이즈 동맹 형성의 역사는 ‘결합의 역사’라기보다는 ‘갈등과 그 반작용의 역사’로서, 기 존 영연방 중심의 정보 공유 체제가 미국 중심의 정보 동맹으로 옮 겨가는 과정으로 해석해볼 수 있다. 둘째, 영연방 소속 국가들이 영국의 정보 통제 하에서 벗어나 미 국과 단독으로 정보 협정을 맺게 되는 과정에는 “어떤 국가가 몇 년 도에 추가적으로 합류했다” 정도의 단순한 설명만으로는 충분히 담 을 수 없는 복잡다단한 정치적 배경과 의도가 숨어있었다. 특히 그 전환점에 핵심이 되었던 캐나다는 파이브 아이즈의 형성에 중요한 발걸음을 내딛은 국가였다. 당시 캐나다는 영국으로부터 미국의 정 보를 공유 받을 수 있었고, 미국도 영국을 통해 캐나다의 정보를 공 유 받을 수 있었는데 왜 두 국가는 굳이 별도의 단독 정보협정을 맺게 되었던 것일까? 본 논문은 이 질문을 근간으로 하여 당시 영 미 간의 갈등과 캐나다라는 중견 국가가 내린 판단 및 외교 전략을 분석해보았다. 이러한 분석은 향후 파이브 아이즈의 참여, 혹은 협 력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현재의 우리나라에 다양한 시사점을 던져 주리라 생각된다.
주제어 : 파이브 아이즈, 정보 동맹, 브루사 협정, 영국-미국 정보 협정, 롤스로이스 사건, 영연방 신호정보 기구, 캐나다-미국 정보 협정
1. 서 론
2021년 8월 2일 미국의 하원 군사위원회에서는 매년 국방 정 책의 방향을 설정하고 그에 따른 예산을 승인하는 ‘국방수권법안 (National Defense Authorization Act, 이하 NDAA)1)’에 흥미 로운 조항을 하나 포함시켜 의결하였다. 그것은 바로 반세기 이 상 지속되어 온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간의 정보 동맹 ‘파이브 아이즈(Five Eyes)’에 한국, 일본, 인도, 독일을 추가 적으로 포함시킬 것을 검토하겠다는 것이었다.2) 하지만 그 이후 상원과 하원 군사위원회 지도부가 국방수권법안(NDAA) 최종안 을 합의하는 과정에서 이 조항은 삭제되었고, 2021년 12월 27일 바이든 대통령이 수정된 최종안에 서명하면서 해당 제안을 검토 한 결과는 알 수 없게 되었다.3)
1) 수권법안(Authorization bill)이란 행정부에서 예산 배정을 받을 수 있도록 의회 가 부여하는 법적 근거를 의미한다. 이때 수권법안은 하원과 상원의 상임 위원 회에서 작성 및 검토하고 양원에서 해당 법안을 모두 통과시키면 대통령이 서명 하여 그 법안에 효력을 부여한다. 수권법안이 제정되고 나면 이어서 세출 법안 (Appropriation bill) 제정 과정이 이어지는데, 세출 법안까지 제정이 완료되고 나 면 본격적인 예산 배정이 이루어진다. Walter J. Oleszek et al eds., Congressional Procedures and the Policy Process (Washington, D.C.: CQ Press, 2016), pp. 47-50.
2) 이 조항의 구체적인 내용은 네 개의 새로운 국가를 기존 다섯 국가의 정보 동맹 체제에 추가했을 때 얻게 될 이점과 그에 반해 나타날 문제점 등을 국가정보국장 이 평가하고, 이에 대해 2022년 5월 20일까지 의회에 보고서를 제출하라는 것이 었다.
3) 박수현, 「바이든, 912조 규모 국방수권법안 서명…‘주한미군 하한선’ 결국 뺐다」, 조선일보 2022. 12. 28.
다만 미 하원 청문회 등에서 한국, 일본 등을 파이브 아이즈에 포함시킬 것을 거론하는 목소리가 여전히 나타나고 있다는 점,4) 그리고 미국의 언론에 서도 파이브 아이즈의 확장 가능성에 꾸준히 주목하고 있다 는 점에서 이 문제는 언제든 미국 내에서 다시 고려될 수 있 는 사안이라 볼 수 있다.5) 한편 미국의 이러한 움직임에 상응하여 최근 국내에서 파이 브 아이즈에 대한 새로운 기류가 형성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 볼 만하다. 2022년 5월에 취임한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 후 보 시절부터 파이브 아이즈와의 협력에 긍정적인 입장을 보 였고,6) 최근 임명된 신임 국가정보원장 역시 그러한 기조 에 발맞추어 청문회에서부터 파이브 아이즈와 적극 협력 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바 있다.7)
이런 분위기 속에서 국내의 파이브 아이즈에 대한 관심은 전례 없이 뜨거운 상황이다. 이전까지 국내 언론에서는 파이브 아이즈를 2013년 에드워드 스노든(Edward Joseph Snowden, 1983~ )의 폭로사건이나,8) 2018∼2020년 화웨이(Huawei)의 제재 문제와9) 같이 서방 국가들과 관련된 ‘국제 뉴스’ 정도로만 다뤄왔다.
4) 박동정, 「미 하원 군사위 청문회서 ‘파이브 아이즈’ 한국·일본으로 확대 문제 거 론」, V. O. A. (2022. 4. 28.).
5) Tara Copp, “‘Nine Eyes’? Bill Would Look at Adding Four Countries to Intel-Sharing Pact,” Defense One (2021. 11. 2.); Tom Rogan, “Five Eyes? Nine Eyes? Try Four Eyes,” Washington Examiner (2021. 11. 8.); Pete McKenzie, “New Zealand Deal May Put Japan Closer to 'Five Eyes' Intelligence Alliance,” New York Times (2022. 4. 22.).
6) 박준상, 「윤석열, “북한 비핵화 위해 국제 공조 주도…남북미 상시회담도 가능”」, 이투데이 (2021. 11. 12.).
7) 이희수, 「김규현, “파이브 아이즈 협력 추진”」, 매일경제 (2022. 5. 25.).
8) 최희진, 「아시아 내 호주대사관, 미국 도청기지 역할했다」, 경향신문 (2013. 10. 31.).
9) 안승섭, 「美, 화웨이 퇴출공조 균열?…英 이어 뉴질랜드도 이상기류(종합)」, 연 합뉴스 (2019. 2. 19.).
하지만 미 하원 군사위원회의 제안 이후에는 다수의 언론 매체에서 향후 우리나라가 파이브 아이즈에 대해 어떤 입장과 태도를 취하게 될 것인지를 본격적으로 논의하며 대중의 이목을 한껏 집중시키고 있는 상황이다.
가. 기존 논의 검토
아쉬운 점은 위에서 살펴본 정치적 기류 변화나 국내의 관심도 증가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국내에는 파이브 아이즈라는 정보 동맹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볼 만한 학술 연구가 손에 꼽힐 정 도로 부족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 소수의 연구들도 파이브 아 이즈 자체에 대해 주목하기보다는 그와 관련된 최근의 국제 정치 적 이슈에 대해 주로 다루고 있어 파이브 아이즈의 형성과정이나 소속 국가들의 태도 및 정체성 변화와 같은 역사적 차원의 고 찰은 살펴보기가 어렵다.10) 이러한 상황은 해외로 눈을 돌려봐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해외 에서도 아직까지 파이브 아이즈 자체에 대해 주목한 연구는 많 지 않으며, 특히 파이브 아이즈가 언제부터, 어떤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는지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는 연구는 드문 편이다. 이 는 파이브 아이즈라는 정보 동맹이 공개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시점이 얼마 되지 않았고, 그 이후에도 관련 자료들이 기밀 상 태로 유지되어 거의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주제에 접근하 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2010년대 이후 파이 브 아이즈 국가들에서 일부 자료들을 기밀 해제하면서 각국 정 보기관의 역사를 살펴보려는 차원에서 파이브 아이즈와 관련된 역사적 차원의 분석들이 서서히 이뤄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 중 파이브 아이즈의 역사를 살펴봄에 있어 가장 주목해볼 만한 연구라고 한다면 2019년 코리 플루크(Corey Pfluke)가 발표한 「파이브 아이즈 동맹의 역사: 개혁과 추가의 가능성」 (“A History of the Five Eyes Alliance: Possibility for Reform and Additions”)11)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논문은 제목 자체부터가 ‘파이브 아이즈의 역사’를 거론하고 있는 만큼 다른 연구들보다는 상대적으로 많은 분량의 역사적 고 찰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도 전체 14페이지 중 4페이 지 정도만을 할당한 것에 불과하고, 나머지 내용은 향후 어 떤 국가들이 이 동맹에 추가적으로 참여하게 될 것인지를 검토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역사’ 그 자체에 큰 비 중을 두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특히 여기서 언급되는 파이 브 아이즈의 역사는 ‘영미 정보협정(UKUSA Agreement)’을 중심으로 영국과 미국의 입장만을 대변하는 데에 그쳐 캐나 다, 호주, 뉴질랜드 등이 어떤 배경과 의도로 해당 동맹에 참여하게 되었는지는 거의 다루고 있지 않다.12)
10) 국내의 파이브 아이즈 관련 연구로는 유인태, 오정현 등의 연구를 꼽을 수 있 다. 이들의 연구는 ‘화웨이 사태’ 등과 같은 비교적 최근의 문제를 다루며 파이 브 아이즈 국가들의 최신 동향에 대한 이해에 상당한 도움을 준다. 다만 이 논 문들은 파이브 아이즈를 중심으로 한 국제 정치 차원의 분석에 주로 집중하고 있어 파이브 아이즈의 역사나 정체성 변화 등과 같은 내용은 많이 다루고 있지 않다. 유인태, 「캐나다 사이버 안보와 중견국 외교: 화웨이 사례에서 나타난 안 보와 경제·통상의 딜레마 속에서」, 문화와 정치 제6권 2호 (2019), pp. 263-298; 유인태, 「디지털 패권 경쟁 속에서 중견국 연대 외교의 갈림길: 화웨 이 사례에서 보는 파이브 아이즈의 연대와 일탈」, 동서연구 제33권 2호 (2021), pp. 5-31; 오정현, 「미국의 정보동맹과 유럽의 네트워크 전략」, 국방 연구 제63권 1호 (2020), pp. 117-140.
11) Corey Pfluke, “A History of the Five Eyes Alliance: Possibility for Reform and Additions,” Comparative Strategy, Vol. 38, No. 4 (2019), pp. 302-315.
12) Pfluke, “A History of the Five Eyes Alliance,” pp. 302-305.
13) Jeffrey T. Richelson and Desmond Ball, The Ties That Bind: Intelligence Cooperation between the UKUSA Countries - the United Kingdom,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Canada, Australia and New Zealand (London: Unwin Hyman Ltd., 1990[1985]).
이와 같은 시각은 영미 간의 정보 동맹을 다룬 저명한 저 서, 결속하는 유대(The Ties That Bind, 1985)13)에 기본적으로 깔린, ‘서구 정보 동맹의 발전사’를 보는 시각과 매우 유사하다. 냉전 시기, 그리고 그 이후에도 오랫동안 영국과 미 국 중심의 정보 동맹이 서방 세계의 정보 활동을 좌우해 왔기 에 파이브 아이즈와 같은 정보 동맹 역시도 자연스럽게 영미 정보협정을 중심으로 파악하게 된 것이다.14)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파이브 아이즈를 단지 영국과 미국의 결합으로만 판단 하고 그 이후 부속 국가들이 해당 동맹에 추가 합류했다는 식 의 주장으로 역사를 정리해버릴 가능성이 크다. 현재 해당 정 보동맹이 분명 ‘파이브 아이즈’라는 다국적 조직체로 평가받고 있고, 심지어 그 동맹의 중심국인 미국에서 동맹의 추가적인 확장 가능성까지 고려하고 있는 이 시점에 그와 같이 단순화 된 설명만으로는 파이브 아이즈의 정체성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특히 ‘중견국’15)으로 분류되는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는 단지 두 강대국의 결합만을 살펴볼 것이 아니라 캐나다, 호주,뉴질랜드와 같은 중견국들이 어떤 정치적 배경으로 인해 파이 브 아이즈에 가입하게 되었고, 이후 동맹 내에서 어떠한 입장 과 태도를 견지해왔는지를 좀 더 심도 있게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14) 이러한 시각은 심지어 캐나다를 중심으로 다루며 캐나다와 파이브 아이즈와의 관계를 조명한 논문에서도 유사하게 살펴볼 수 있다. 제임스 콕스는 아래 논문 에서 파이브 아이즈가 제2차 세계대전 중 영미 간의 정보 협력에서 비롯되었다 고 보고 있다. James Cox, “Canada and the Five Eyes Intelligence Community,” Canadian Defence and Foreign Affairs Institute Working Group Papers (2012), p. 5.
15) 중견국이라는 개념은 국제정치 전문 저서나 전문 학술지에 소개되기 시작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며, 학자들 사이에 서로 공감하고 동의하는 명확한 정의 또한 확립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이는 여러 학자들이 중견국 개념을 심도 있게 정의하기보다는 사례 연구 형태로 중견국 역할을 수행한 국가들을 소개하고 그 사례를 바탕으로 ‘중견국가군’을 정립하려는 노력을 주로 해왔기 때문이다. 본고 에서는 그러한 여러 연구들 가운데 김우상이 제시한 중견국의 정의인 “‘뜻을 같 이하는(like-minded)’ 여러 국가들과 함께 다자주의 외교를 통해 주요 지역적, 국제적 사안에 관해 입장을 표명하고 의지를 관철시키려는 노력을 하는 국가”를 참고하고자 한다. 김우상, 「대한민국의 중견국 공공외교」, 정치정보연구 제16 권 1호 (2013), pp. 333-334.
나. 문제 제기 및 연구 목적
본 논문은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파이브 아이즈와 관련된 국제 조약들, 파이브 아이즈 관련 언론 기사, 그리고 관련 국 가들의 정보기관에 대한 최신 연구 등을 복합적으로 검토하며 파이브 아이즈의 역사를 다음의 두 가지 차원에서 새롭게 분석 해보고자 한다. 첫째, 파이브 아이즈의 역사는 영국과 미국의 정보 체계가 결합하고 그것이 확장되는 과정이라기보다는 평화 적 세력전이의 과정 속에서 정보 동맹의 ‘무게 중심’이 옮겨가 는 과정에 가까웠다. 지금껏 여러 연구들이나 언론 매체에서는 파이브 아이즈의 역사를 언급할 때 영국과 미국이 정보 협정을 맺은 후 나머지 세 국가가 순차적으로 합류했다는 식의 설명만 을 반복해왔다. 하지만 그 실상은 미국을 제외한 나머지 국 가들은 모두 이미 ‘영연방(commonwealth)’16)에 소속되어 있던 국가들로서 영국과는 그 이전부터 긴밀한 정보 공유 관계를 맺고 있던 상황이었다.
16) ‘커먼웰스(commonwealth)’는 원래 ‘공공의 부’라는 의미로서 공화국을 뜻하는 라틴어 ‘res publica’대신 사용된 용어이다. 이 말은 16세기 이후 한 나라를 구 성하는 인민의 총체 또는 인민의 정치체, 구체적으로는 공화국과 동의어가 되었 다. 크롬웰 당시 영국 헌정을 커먼웰스라고 불렀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용례에서 공동의 이해를 지닌 집단이나 단체 또는 조직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였는데, 이를테면 이 시기에 신성한 ‘기독교 국가들의 연합(hole commonwealth of all christendom)’이라는 표현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런 점에 서 보면 오늘날 ‘커먼웰스’라는 표현은 국가연합이라는 의미에 좀 더 가깝다. 다 만 본고에서는 국내에 영국의 ‘commonwealth’가 ‘영연방’이라는 용어로 굳어져 통용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영연방’으로 칭하고자 한다. 석영달, 「필립 머피 (Philip Murphy)의 역사학적 여정: 제2차 세계대전 후 영국과 영연방의 관계 속 에서」, 영국 연구 제40호 (2018. 12.), p. 330; 이영석, 「제국의 유산- ‘영연방’의 과거와 현재, 1880-2000」, 영국연구 25호 (2011. 6.), p. 237; 원태준, 「‘트루도 딜레마’에 대한 영국의 외교적 대응 1968-1974」, 서양사론 123호 (2014), p. 281.
이런 점에서 파이브 아이즈 동맹 형성의 역사는 ‘결합의 역사’라기보다는 ‘갈등과 그 반 작용의 역사’로서, 평화적 세력전이의 과정에서 기존 영연방 중심의 정보 공유 체제가 미국 중심의 정보 동맹으로 옮겨 가는 과정으로 해석해볼 수 있다. 둘째, 영연방 소속 국가들이 영국의 정보 통제하에서 벗어나 미국과 단독으로 정보 협정을 맺게 되는 과정에는 “어떤 국가가 몇 년도에 추가적으로 합류했다” 정도의 단순한 설명만으로는 충분히 담을 수 없는 복잡다단한 정치적 배경과 의도가 숨어있 었다. 특히 그 전환점에 핵심이 되었던 캐나다는 파이브 아이즈 의 형성에 중요한 발걸음을 내딛은 국가였다. 당시 캐나다는 영 국으로부터 미국의 정보를 공유받을 수 있었고, 미국도 영국을 통해 캐나다의 정보를 공유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두 국가는 왜 굳이 별도의 단독 정보협정을 맺게 되었던 것일 까? 본 논문은 이 질문을 근간으로 하여 당시 영미 간의 갈등과 캐나다라는 중견 국가가 내린 판단 및 외교 전략을 분석해볼 것 이다. 이러한 분석은 향후 파이브 아이즈의 참여, 혹은 협력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현재의 우리나라에 다양한 시사점을 던져주 리라 생각된다.
2. 파이브 아이즈 정보동맹의 태동 : 제2차 세계대전 중 영미간 협력
파이브 아이즈의 역사에 대해 제대로 살펴보려면 무엇보다 어느 시점부터의 정보 동맹, 혹은 정보 협력부터 논의의 대상 으로 고려할 것인가를 먼저 결정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흥미 로운 부분은 지금껏 파이브 아이즈를 다루었던 여러 언론 및 학술 자료들이 그것의 기원을 제각기 다른 시점으로 설정하곤 했다는 점이다. 이는 정보 협력의 수준이나 참여국의 범위 등 을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에 따라 그 기원을 조금씩 달리 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17)
17) Jason Dittmer, “Everyday Diplomacy: UKUSA Intelligence Cooperation and Geopolitical Assemblages,” Annals of the Association of American Geographers, Vol. 105, No. 3 (2015), p. 609.
이 장에서는 일반적으로 학계 에서 통용되는 파이브 아이즈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영미 정보협정(UKUSA Agreement)’의 역사적 배경을 처음부터 짚어가면서 언제부터 그러한 정보 동맹의 개념이 형성되었 는지를 추적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정보 교류의 관점에서 당시 영미 간의 관계와 영연방 국가들과의 연결성 등에 대해 분석해볼 것이다.
가.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 전후 영미 간 군사 협력
보통 영국과 미국 간 정보 교류의 출발점을 논의할 때 가장 많이 거론되는 시점은 바로 ‘대서양 헌장(Atlantic Charter, 1941)’ 발표 전후의 시점과 미국의 암호 해독가들이 영국의 블 레츨리 파크(Bletchley Park)를 방문한 시점일 것이다. 이 두 시점은 각각 ‘양국 간의 군사적 협력이 논의되기 시작한 시점’ 이라는 점과 ‘실질적인 정보 교류가 이뤄지기 시작한 시점’이라 는 점에서 모두 의미가 있다. 먼저 대서양 헌장이 발표되기 직 전의 상황을 살펴보면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 진행 중이던 유 럽에서는 1940년 6월 프랑스가 독일에게 수도 파리를 점령당 하고 정전협정을 맺게 되면서 영국 홀로 독일에 대항해야 했던 상황이었다.18) 1940년 5월 영국의 수상으로 취임했던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1874-1965)은 취임한 지 약 한 달 만에 국가의 존립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 고, 그는 미국이 적극적인 지원에 나서는 것에 유일한 희망 을 걸고 있었다. 당시 미국은 국내 경제 위기에 초점을 맞 추고 대외적으로는 엄격한 고립주의를 고수하던 상황이었으 나, 미국의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1882-1945)는 유럽과 일본의 파시즘이 전 세 계에 위세를 떨치게 되면 그것이 장차 미국의 안보와 이익 에도 큰 위협이 되리라 판단하였다. 1940년 9월 미국이 50 척의 구축함을 영국으로 인도하는 협정을 맺고,19) 국방 예산도 대폭 늘리고자 했던 것은 루스벨트의 확고한 의지와 판단 아래 미국이 할 수 있는 나름의 대응을 고민한 결과였 다.20)
18) Hughues Canuel, “French Aspirations and Anglo-Saxon Suspicions: France, Signals Intelligence and the UKUSA Agreement at the Dawn of the Cold War,” Journal of Intelligence History, Vol. 12, No. 1 (2013), p. 80.
19) 이 협정은 ‘구축함 대 기지 협정(Destroyers-for-bases deal)’으로 서반구에 있는 영국의 영토에 미국 해군이 기지 사용을 허락받는 조건으로 50척의 구형 구축함을 영국 해군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Steven High, “The Racial Politics of Criminal Jurisdiction in the Aftermath of the Anglo-American ‘Destroyers-for-Bases’ Deal, 1940–50,” The Journal of Imperial and Commonwealth History, Vol. 32, No. 3 (2004), p. 77; 볼프강 크리거 지음, 이미옥 옮김, 비밀정보기관의 역사: 파라오부터 NSA까지 (서울: 에코리브르, 2021), p. 298.
20) Canuel, “French Aspirations and Anglo-Saxon Suspicions,” p. 80.
이후 루스벨트는 의회를 설득하여 1941년 3월 11일 무기 대여법(Lend-Lease Act)21)을 통과시켜 영국에 막대한 군수 물자를 지원했으며, 4월에는 그린란드(Greenland)에 병력을 배치하고 7월에는 아이슬란드에서 영국군의 주둔 임무를 인 계받으며 좀 더 실질적으로 전쟁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41년 8월 9일부터 8월 12일까지 처칠과 루스벨트는 뉴펀 들랜드 자치령(Dominion of Newfoundland, 현 캐나다 뉴펀 들랜드 주) 아젠셔 해군 기지(Naval Station Argentia)에서 영국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H.M.S. Prince of Wales)에 승선하여 역사적인 회담을 갖게 되었다.22)
21) 2차 세계대전 중 1941년과 1945년 사이에 미국이 영국, 소련, 중국, 프랑스와 기타 연합국 측에 방대한 금액과 물량으로 군수품을 공급할 것을 정한 미국의 법규이며 미국은 그 대가로 군사 기지 사용권을 받았다. 이로써 1차 대전 이후 해외 불간섭 정책을 고수하던 미국은 간섭 정책으로 전환했다. 존 루이스 개디 스 지음, 정철·강규형 옮김, 냉전의 역사: 거래, 스파이, 거짓말, 그리고 진실 (서울: 에코리브르, 2014), p. 20.
22) Canuel, “French Aspirations and Anglo-Saxon Suspicions,” p. 80.
다만 여기서 이 회담 자체를 영미 간 정보 교류의 시작점이 라고 평가하기는 어려운데 그 이유는 이 회담의 결과로 발표된 대서양 헌장에 ‘정보 교류’와 같은 구체적인 내용은 담겨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영국과 미국이 공동으로 추축국 (Axis powers)에 반대한다는 선언과 자유와 민주주의 수호, 영토 확장을 위한 무력 사용의 포기, 영구적인 안전 보장과 같 은 공동의 비전 정도가 담겨있었다. 이 선언은 정치, 문화, 사 회적으로 유사한 뿌리에 기반을 둔 두 강대국이 전례 없는 협력을 선포하는 것이었으나, 이것을 처칠이 간절히 기대했던 미 국의 공식적인 선전포고나 군사적 지원 약속으로 보기는 어 려웠다.23) 그렇기 때문에 이 시점 부근에서 파이브 아이즈의 기원을 찾 고자 한다면 대서양 헌장이라는 공식적인 결과물보다는 그것의 선포 전·후로 물밑에서 조율되었던 영미 간의 군사 협력에 좀 더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당시 미국에 만연하던 고립주의와는 별개로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부터 군사 분야에서는 이미 영 미 간의 협력이 지속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전간기의 군축 협 약 이후부터 미국은 일본의 중국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전쟁 계 획을 수립했고, 그 전쟁 계획과 관련된 협력을 위해 해군 연락 장교를 영국으로 파견하였다. 그리고 1940년 8월에는 좀 더 대 규모의 군사 대표단이 런던을 방문하여 ‘영미 군비 표준화 위원 회(Anglo-American Standardization of Arms Committee)’ 를 열어 양국이 보유한 무기와 전략 등에 대해 논하기도 했다. 이러한 군사 분야에서의 접촉은 향후 영국과 미국 간에 좀 더 정례적이고 광범위한 수준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상기시켰 다. 그 결과 1941년 1월 29일부터 3월 27일까지 각국의 군사 대표단이 워싱턴에서 비밀리에 만나 첫 ‘미-영 대화(AmericanBritish Conversations)’를 갖게 되었다.24)
23) Canuel, “French Aspirations and Anglo-Saxon Suspicions,” p. 81.
24) Mark Skinner Watson, Chief of Staff: Prewar Plans and Preparations (Washington: Center of Military History, 1991), pp. 115-123, 370-373; Canuel, “French Aspirations and Anglo-Saxon Suspicions,” p. 81.
약 두 달에 걸친 이 회담은 양국 간의 군사적 협력에 중요한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었다. ‘미-영 대화’ 의 첫 알파벳 글자를 딴 ‘ABC-1 계획(ABC-1 Plan)’은 향후 양 국이 독일 및 일본에 맞서는 데에 적극 협력할 것을 합의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25) 여기서 정보 동맹의 관점에서 주 목해볼 부분은 해당 계획의 조항 중에 지속적이고 광범위한 정보 연락을 위해 영국과 미국이 서로의 수도에 각각 사절단 을 파견하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는 점이다. 그뿐만 아니 라 미국 측에서 필요시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와 개별적으로 연락 장교를 교환하겠다고 제안했다는 점은 특히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이는 미국 측에서 정보 교류를 위해 영연방 국 가들에게 먼저 손을 내민 최초의 사례라는 점과, 향후 미국이 영연방 국가들과 단독으로 정보 협정을 맺을 수 있다는 가능 성을 내비췄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다. 즉, 당시 ‘미영 대화’는 향후 5개국 정보 동맹의 가능성을 담고 있었던 파 이브 아이즈 역사의 태동과 같은 계기라고 볼 수 있었다.26) 이 군사 회담에서 조율되었던 여러 사안들은 이후 1941년 12 월 7일 진주만 기습으로 인해 미국이 본격적으로 제2차 세계대 전에 참전하게 되면서 점차 현실화되었다. 루스벨트와 처칠은 1941년 12월 22일부터 1942년 1월 14일까지 워싱턴에서 열린 첫 전시 회의, ‘아카디아 컨퍼런스(Arcadia Conference)’에서 양국 간의 군사적 협력을 공식화했다.27)
25) ABC-1 계획에서 영국과 미국은 대서양 및 유럽지역이 전쟁의 결정적인 전장 (decisive theater)이라는 점에 대해 합의했으며, 독일을 상대로 한 전쟁에 모든 전력을 집중시키고 만일 일본이 전쟁에 참여한다면 태평양 지역에서 방어적인 태세를 갖출 것을 명시하였다. 조재원, 「다수의 위협에 대한 정책결정자들의 인 식과정 분석: 1933-1941년 미국의 ‘선 독일 후 일본’ 원칙의 사례」, 미국학 제36권 1호 (2013), p. 146.
26) Watson, Chief of Staff, p. 378; Canuel, “French Aspirations and AngloSaxon Suspicions,” p. 81.
27) Maurice Matloff and Edwin M. Snell, Strategic Planning for Coalition Warfare 1941-1942 (Washington: Center for Military History, 1990), pp. 97-119.
다만 이 시점까지는 아직 양국이 군사적 협력의 ‘대전략’을 논의하던 단계였으므로 그 협력에 있어 양국의 정보기관이 구체적으로 어떤 역 할을 할 것인지, 혹은 그 협력 관계가 얼마나 긴밀한 정보 교류로 확대될 것인지 등에 대해서는 깊이 있게 논의하지 않 았다.28) 나.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 전후 영미 간 정보 협력 사실 처칠이 아카디아 컨퍼런스를 위해 워싱턴에 도착했을 무 렵까지만 하더라도 영국은 정보 수집 능력의 측면에서 미국을 훨씬 앞서 있었다. 영국은 폴란드와 프랑스가 독일의 암호 체 계 이니그마(ENIGMA)29)를 깨뜨리기 위해 했던 노력과 경 험을 거의 그대로 습득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30) 미국이 참전하기 전 약 2년간의 전쟁 기간 동안 엄청난 양의 암호를 분석하면서 막대한 인력 및 기술 자원을 결집시키고 있었다.
25) ABC-1 계획에서 영국과 미국은 대서양 및 유럽지역이 전쟁의 결정적인 전장 (decisive theater)이라는 점에 대해 합의했으며, 독일을 상대로 한 전쟁에 모든 전력을 집중시키고 만일 일본이 전쟁에 참여한다면 태평양 지역에서 방어적인 태세를 갖출 것을 명시하였다. 조재원, 「다수의 위협에 대한 정책결정자들의 인 식과정 분석: 1933-1941년 미국의 ‘선 독일 후 일본’ 원칙의 사례」, 미국학 제36권 1호 (2013), p. 146.
26) Watson, Chief of Staff, p. 378; Canuel, “French Aspirations and AngloSaxon Suspicions,” p. 81.
27) Maurice Matloff and Edwin M. Snell, Strategic Planning for Coalition Warfare 1941-1942 (Washington: Center for Military History, 1990), pp. 97-119.
그 결과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을 결정했을 무렵에는 영국 블레츨리 파크(Bletchley Park)의 정부 암호학교(the Government Code and Cypher School, 이하 GC&CS)31)가 암호 해독 분야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확립하고 있었다.32)
31) 1919년 영국 해군의 암호 부대 Room 40와 육군의 암호기구 MI-8의 일부 인 원이 정부 암호학교에 통합되었는데 학교가 공식적으로 발표한 기능은 전 정부 부처에서 사용되고 있는 신호법과 암호에 대한 보안과 그 대책을 조언하고 지원 하는 것이었다. 물론 공표되지는 않았지만 학교의 기능에는 외국 정부의 통신을 도청하여 획득된 통신문을 해독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Christopher Andrew, Secret Service: The Making of the British Intelligence Community (London: Heinemenn, 1985), pp. 259-260; 박영일 엮음, 강대국의 정보기구 (서울: 현대문예사, 1994), pp. 19-20.
32) 워싱턴에서 브루사 협정(BRUSA Agreement)이 체결될 때 미국 육군의 선임 암호분석관 세 명으로 구성된 대표단은 영국 블레츨리 파크의 신호정보 기관에 서 6주의 실태조사 임무를 한창 수행 중이었다. 이때 대표단에서 가장 경험이 많고 유명한 암호 전문가 윌리엄 프리드먼(William Friedman)은 블레츨리에 체 류하는 동안 영국의 정보 출처와 다양성이 미국 측보다 훨씬 더 나았다는 평가 를 남겼다. Canuel, “French Aspirations and Anglo-Saxon Suspicions,” p. 82; 크리스토퍼 앤드루, 스파이 세계사, p. 231.
하지만 독일의 이니그마가 시간이 거듭할수록 발전하고 진화 하여 단지 영국만의 정보 역량으로는 더 이상 공략할 수 없는 수준에까지 이르자 영국은 정보 분야에서도 미국의 지원을 기대 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 역시도 진주만 기습 이후 본격적으로 전쟁에 참전하게 되자 정보 분야에서 영국이 축적한 경험과 지 식이 절실히 필요했다. 하지만 아직 양국 간의 굳건한 신뢰 관 계가 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서로의 모든 기밀이나 역량을 완 전히 공개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과연 영국과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어떤 단계를 거쳐 긴밀한 정보 협력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던 것일까? 사실 양국 간의 소소한 수준의 정보 교류는 정보기관 간의 공 식적인 협정이 맺어지기 이전부터 물밑에서 점진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1940년 9월 5일 영국 정부의 지시를 받은 육군 첩보부 장 케네스 스트롱 소장(Major-General Sir Kenneth Strong) 은 미국 측에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암호 및 해독 관련 정보를 공유할 의사가 있는지를 문의했다. 미 해군과 달리 미 육군 측은 호의적인 답변을 보내왔는데 이때까지는 양측 모두 도청 내용 을 교환하는 정도로만 정보를 공유할 생각이었다.33) 하지만 양국의 정보 담당 부서 간 긴 협상이 이뤄진 끝에 1941년 2월 미국의 육·해군 소속의 암호 전문가 4명이 10주 동안 영국의 블레츨리 파크에 방문하면서 두 국가 간의 정보 교 류는 급진전을 보였다. 영국 측은 몇몇 도청 및 암호 해독소를 보여주며 그간 축적된 영국의 암호 해독 능력과 실제 전쟁 중 정보 활용 사례 등에 대해 소개했다. 이에 상응하여 미국 대표 단은 일본의 암호 기계 및 일본 해군 암호 등에 대한 자료를 제공했는데,34) 미국 측의 첩보 능력을 확인한 영국 정보 담 당자들은 수집된 정보를 번역, 해독할 인력이 부족했던 싱가 포르 도청소에서 양국 간의 합작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에 1941년 6월 양국은 싱가포르와 필리핀 주재 미군 사령부 간, 그리고 싱가포르와 미국 태평양 함대 간 일본 관련 첩보의 공유를 합의했다.35)
33) 리첼슨, 거의 모든 스파이의 역사: 20세기의 그림자, p. 82.
34) 여기서 미국 대표단은 일본의 암호 기계 퍼플(PURPLE)을 영국의 암호 해독가 들에게 전달했다. Richelson and Ball, The Ties That Bind, p. 1.
35) Canuel, “French Aspirations and Anglo-Saxon Suspicions,” p. 82; 리첼슨, 거의 모든 스파이의 역사: 20세기의 그림자, pp. 236-237.
이런 점에서 미국 측의 블레츨리 파크 방문은 양국의 정보 담당 부서 간 교류의 물꼬를 튼 계기이 자, 향후 긴밀하게 이뤄질 정보 협력의 첫걸음이라 볼 수 있 었다. 이후 1941년 8월 10일부터는 영국 정부 암호학교(GC&CS)의 대표단이 약 한 달 동안 미국과 캐나다를 방문하여 각국의 암호 분석 책임자들과 좀 더 심도 있는 정보 협력에 대해 논의했다. 그 결과 1942년 3월 미국-영국-캐나다 간 특별 회담이 워싱턴 에서 개최되었는데 여기에서는 세 국가 간 도청 및 방향 탐지(Direction Finding)36) 작전의 통합 체제를 구축하고, 향후 첩보 작전의 지휘를 어떤 거점들에서 수행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다.37) 다만 이 시기까지 논의되었던 도청이나 방향 탐지 정도의 정 보 공유는 암호 분석과 같은 높은 수준의 정보 협력이라 말하기 는 어려웠다. 그러한 좀 더 긴밀한 협력은 1942년 9월 영국과 미국이 해군 협정을 통해 독일의 이니그마 암호 해독에 본격적 으로 뛰어들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시 영국의 정보 관계자 들은 점차 발전해가는 독일 해군의 이니그마 암호 체계를 해독 하기 위해서는 그 복잡성에 걸맞은 암호 해독 기계가 다수 필요 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당시에 그러한 암호 해독 기계를 충분 히 제작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국가는 미국뿐이었다. 이에 영국 정부 암호학교(GC&CS)의 총책임자 에드워드 트래비스 (Edward Travis)는 워싱턴을 방문하여 미국 해군 통신 첩보부 (OP-20-G)와 향후 이니그마 해독을 위해 어떻게 협력할 것인 지에 대해 논의했다.38) 그 결과 1942년 10월 2일 최초의 영미 해군 간 통신정보 협 정인 홀든 협정(Holden Agreement)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은 영국 해군이 미국 해군에 이니그마 해독을 위한 울트라(ULTRA) 정보를 제공하고, 미국은 암호 해독 기계의 제작 및 일본 통 신문에서 나온 첩보를 제공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39)
36) 도청 수신기(interceptor receiver)나 보조 장비에 고도의 지향성 안테나 전시기 를 설치하여 적의 무선 주파수 방사 방향을 알아내는 행위를 뜻한다. 국방기술진 흥연구소, 「방향 탐지」, 국방과학기술용어사전 (URL: http://dtims.dtaq.re.kr: 8070/search/detail/term.do?tmnl_id=T0005228, 접속일시: 2020. 7. 10. 22:00).
37) 리첼슨, 거의 모든 스파이의 역사: 20세기의 그림자, p. 237.
38) 리첼슨, 거의 모든 스파이의 역사: 20세기의 그림자, p. 238.
39) 리첼슨, 거의 모든 스파이의 역사: 20세기의 그림자, p. 238.
이 협정은 미국이 공식적으로 연락 장교를 런던의 블레츨리 파크에 파견하여 상주하도록 했다는 점에서 양국 간 정보 교류 의 ‘공식화 및 상설화’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40) 이러한 해군 간 통신정보 협정은 이후 영국 정부 암호학교 (GC&CS)와 미국 육군 정보참모부(G-2) 간의 또 다른 협정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영국 측에서는 미국 육군이 블레츨리 파크에 대표단을 상주시키면 정보를 공유하겠다는 제안을 했고, 1943년 4월 미국 육군은 특별 고위 대표단을 영국에 파견하기로 했다. 이후 1943년 5월 17일 워싱턴에서 블레츨리 파크의 수장 에드워 드 트래비스와 미 육군 정보참모부(G-2)의 수장 조지 스트롱 (George Strong)이 극비 협정에 서명하였고 이 협정은 영미 양 국의 육군 암호 분석관 간의 협업을 공식화하고 크게 확대했다. 이 트래비스-스트롱 협정(Travis-Strong Agreement)이 바로 향후 영미 정보협정의 근간이라고 알려진 ‘브루사 협정(BRUSA Agreement)’이었다.41)
40) Ralph Erskine, “The Holden Agreement on Naval SIGINT: The First BRUSA?,” Intelligence and National Security, Vol. 14, No. 2 (1999), pp. 187- 197; Canuel, “French Aspirations and Anglo-Saxon Suspicions,” p. 82.
41) 브루사 협정이라는 명칭은 당시 25세였던 훗날의 영국 정보기관의 수장 해리 힌슬리(Harry Hinsley)가 만들었다. 힌슬리는 아직 케임브리지대 역사학과 학부 생이었을 때 대전이 발발하자마자 블레츨리 파크에 채용된 직원이었다. 그는 미 국인들이 약칭을 좋아한다고 믿으며 브루사 협정이라는 명칭을 만들었지만 ‘브 루사(BRUSA)’에서 영국(Britain)을 미국(USA) 앞에 놓은 것이 반감을 일으킬 지 모른다고 걱정하기도 했다. 크리스토퍼 앤드루, 스파이 세계사, p. 231; 리 첼슨, 거의 모든 스파이의 역사: 20세기의 그림자, p. 239.
이 협약을 통해 양국은 추축국의 육군, 공군, 그리고 첩보 기 관의 통신 암호를 해독하여 생산한 모든 특수 정보(Special intelligence)를 교환 및 전파할 것을 합의하였다. 또한 직접 마 주하고 있는 상대에 따라 일본의 육군 및 공군 암호 해독은 미 국이 책임지고, 독일과 이탈리아의 육군 및 공군 암호 해독은 영국이 책임지기로 결정했다.42) 그리고 이 협정에서도 마찬 가지로 무엇보다 중요했던 부분은 영국 블레츨리 파크의 정 부 암호학교(GC&CS)와 미국 버지니아 주 알링턴 홀 (Arlington Hall)에 있는 신호 정보부(U.S. Signal Intelligence Service) 간에 서로 파견단을 지속 교환하기로 합의했다는 점 이다.43) 이처럼 양국의 해군 및 육군 간 정보 협정이 공식화되며 제2 차 세계대전 중 두 국가의 정보 협력은 매우 긴밀하게 이뤄졌 다. 먼저 독일의 잠수함을 상대했던 대서양 전투에서는 그 이전 까지 해독이 어려웠던 이니그마 암호를 두 국가가 협력하여 해 독해내기 시작했다. 또한 런던, 워싱턴, 오타와에 있는 U보트 추적 기관들이 직접적인 신호 연결을 통해 매우 긴밀하게 소통 하면서 남은 전쟁 기간 동안 ‘사실상의 단일 조직’처럼 기능 하였고 그 결과 U보트 추적에서 상당한 성과를 올리기도 했 다.44)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잘 알려진 오버로드 작전(Operation Overlord) 이전에 독일을 기만하기 위해 실시했던 민스민트 (MINCEMEAT) 공작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영미 정보 당국 의 협력 가운데 백미라고 볼 수 있었다.45)
42) National Security Agency, “UKUSA Agreement Release,” p. 1.
43) 크리스토퍼 앤드루, 스파이 세계사, pp. 232-233.
44) 크리스토퍼 앤드루, 스파이 세계사, pp. 229-230.
45) 영국의 전시 정보 활동에 대한 공식 역사를 저술한 해리 힌슬리(Harry Hinsley)는 전쟁 중 울트라(ULTRA) 정보의 기여가 없었다면 1944년 6월의 상 륙작전은 아마 1946년까지 미뤄졌을지도 모른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F. H. Hinsely and Alan Stripp eds., Codebreaker: The Inside Story of Bletchley Park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3), p. 12.
민스미트 공작의 토대는 런던의 한 병원에서 시신을 구해 연합작전본부장 루 이 마운트배튼(Louis Mountbatten) 중장의 부관 제복을 입힌 다음, 아이젠하워가 서문을 쓴 매뉴얼을 포함한 여러 가짜 극 비문서를 서류가방에 담아 품게 하여 잠수함으로 스페인 해 안에 버리고 오는 것이었다. 이 작전의 결과로 독일군 측은 가짜 문서를 입수하여 연합군이 허스키(HUSKEY) 작전이라 는 암호명으로 그리스 상륙을 계획하고 있다고 판단하였으며, 영미 연합군은 울트라 해독물에 의해 그 기만이 성공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더블 크로스 시스템(Double cross system)이라 불렸던 그러한 정보 기만 작전은 오버로드 작전 직전에도 독일이 상륙 지점을 오인하도록 포티튜드 (FORTITUDE)46)라는 코드 네임으로 다시 한 번 시도되었고 그것 역시 큰 성공을 거뒀다.47)
46) 연합군의 주된 상륙지점이 노르망디가 아닌 파 드 칼레라고 기만했던 작전을 의미한다.
이 작전 역시 울트라 정보에 많은 도움을 받아 진행되었다. Christopher Andrew, “The Making of the Anglo-American SIGINT Alliance,” in Hayden B. Peake and Samuel Halpern eds., In the Name of Intelligence: Essays in Honor of Walter Pforzheimer (Washington, D.C.: NIBC Press, 1994), p. 95.
47) 7월 연합군의 공격이 그리스가 아니라 시칠리아를 향했을 때도 독일 사람들은 ‘민스미트’ 문서가 진짜임을 의심하지 않았으며 연합군의 계획이 변경되었다고 결론을 지었다. 크리스토퍼 앤드루, 스파이 세계사, pp. 245-246, 254.
이 당시 미국 전략 정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s, 이 하 OSS)의 방첩 부서 ‘X-2’의 한 장교는 그러한 기만 작전 가 운데 이뤄졌던 영미 정보 기관 간의 협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기도 했다. 아무리 동맹국일지라도 모든 비밀 파일과 그 출처에 접 근할 수 있는 완전한 권한을 부여하고, 비밀을 다루는 방 법과 절차에 대한 정보도 온전히 공개하며, 조직 및 작전 의 체계와 인원까지 공개하는 일은 전례가 없고 기대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이것은 간단히 말하면 세계에서 가장 경험이 많고 효율적이며, 가장 신중히 보호되는 보안 시스 템의 내밀한 비밀을 공개하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영국인 들은 그 모든 것을 허용했다. 이 사실은 대단한 의미를 갖 는 것으로서 단지 이익의 교환이라는 관점만으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48)
48) Unpublished X-2 history, Box 2, RG 226, NAW, Christopher Andrew, The Secret World: A History of Intelligence (London: Penguin Books, 2019), p. 616에서 재인용.
이처럼 전쟁 중 영미 간의 정보 협력은 거의 한 국가의 정보 기관이 기능하는 것처럼 긴밀하게 이뤄졌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전쟁 중의 협력은 각국이 당장에 마주했던 여러 급박한 상황과 추축국을 상대하기 위한 절대적 필요에 의해 실시된 것으로 전 쟁 이후 상황이 변화했을 때에도 그대로 유지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전쟁 이후 아주 잠시 동안의 평화와 곧 이어진 냉전이 라는 역사적 흐름 속에서 서방 세계에서는 어떠한 정보 협력과 동맹 형성의 노력이 나타났던 것일까? 그리고 그러한 노력의 배 경에는 어떠한 복잡한 속사정과 의도들이 깔려있었을까?
3. 제2차 세계대전 후 영미 정보 관계의 변화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을 전후로 영국과 미국은 서로 간의 관계 와 향후 국제 질서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 두 국가는 큰 정치적 격변을 겪고 있었는데 먼저 내부적으로는 전 쟁 동안 양국 간의 긴밀한 협력을 주도했던 영국의 처칠과 미국 의 루스벨트가 최고 정책 결정자의 자리에서 내려오면서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양국 정상 간의 끈끈한 관계는 기대하기가 어려웠다.49) 그리고 외부적으로는 1939년 이전까지만 하더 라도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던 소비에트 연방(Soviet Union, 이하 소련)이 고도로 무장한 군사 강국이 되어 전후 의 국제 질서 형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자 했다. 제2차 세 계대전 이후 소련은 모든 주요 국제기구와 국제 협상 과정에 개입하면서 서방측의 입장이나 계획과는 상관없이 자신들의 이익을 강하게 요구하곤 했다. 예를 들어 종전 후 북부 이란 에서의 병력 철수 지연이나 튀르키예 해협 장악을 위한 영토 의 할양 요구, 지중해 동부의 해군기지 확보 시도 등은 소련 이 더 이상 영국과 미국의 동맹국이 아니라 언제든 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수 있는 강력한 경쟁국이 되었음을 잘 보여주었다.50) 여기서 흥미로운 부분은 이와 같은 소련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서방 세계의 중심 국가라 할 수 있었던 영국과 미국이 더욱 긴밀히 협력하기보다는 서로를 신뢰할 수 없도록 만드는 ‘대립의 상황’을 여러 차례 만들었다는 점이 다.51)
49) 1945년 4월 12일 루스벨트가 사망하자 그보다는 경험도 부족하고 정보에 도 어두웠던 해리 트루먼 부통령이 자리를 이어 받았으며, 그로부터 3개월 뒤 처칠이 총선에서 뜻밖의 패배로 수상 직에서 물러나게 되자 지도력이 그보다 훨씬 떨어지는 노동당의 당수 클레멘트 애틀리(Clement Attlee)가 뒤를 잇게 되었다. 개디스, 냉전의 역사, p. 25.
50) 영국과 미국은 소련의 여러 요구를 거절하고 소련군이 북부 이란을 계속 점령 하고 있는 문제를 1946년 초 국제연합(UN) 안전보장이사회에 상정하며 단호하 게 대응했다. 하지만 이런 대응은 스탈린에게 전시 협력의 전통에 호소함으로써 기대할 수 있었던 이익이 한계에 달했다는 것을 알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개 디스, 냉전의 역사, pp. 47-49.
51) Martin Rudner, “Britain Betwixt and Between: UK SIGINT Alliance Strategy’s Transatlantic and European Connections,” Intelligence & National Security, Vol. 19, No. 4 (2004), p. 572.
이 장에서는 두 국가가 종전 이후 어떠한 이해관계를 놓고 정보 협력을 이어갔으며,52) 그 협력이 어떤 사건을 통 해 위기를 맞이하게 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53)
52) 크리거, 비밀정보기관의 역사, p. 372.
53) 크리거, 비밀정보기관의 역사, pp. 376-377.
54) Rudner, “Britain Betwixt and Between,” pp. 572-573.
55) 이 무렵 정부 암호학교는 단순 암호 탐지 및 해독 업무뿐만 아니라 완전한 신 호정보 기관으로 탈바꿈하여 향후 영국의 정보기관으로 기능할 준비를 갖췄으며, 1946년에는 기관의 이름도 정부 통신 본부(the Government Communications Headquarters, GCHQ)로 개칭하였다. Stephen Dorril, MI6: Inside the Covert World of HYer Majesty’s Secret Intelligence Service (New York: A Touchstone Book, 2002[2000]), p. 56; Rudner, “Britain Betwixt and Between,” p. 572.
가. 1946년 영미 정보 협정의 시작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영국과 미국은 국제 질서의 주 도권을 놓고 서로 다른 계획과 야망을 갖고 있었다. 영국에서는 당연히 오랫동안 지켜온 패권국의 지위를 내려놓고 싶지 않았 고, 미국의 입장에서는 양차 대전을 겪으며 명실공히 패권국의 지위에 올라섰음을 느끼며 대외적으로도 그것을 명확히 하고자 했다. 다만 이런 동상이몽 속에서도 전쟁 중에 두 국가가 경험 했던 정보 협력의 시너지는 결코 놓을 수가 없는 것이었는데, 소련의 부상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영국이 가진 전 세계의 군사 거점과 미국의 풍부한 자원 간의 결합이 필수적이라 여겨졌 기 때문이다.54) 이와 같은 판단에서 영국의 정부 암호학교55)와 해군 정보 부의 대표단이 1945년 4월 말 워싱턴에 방문하여 미국의 정 보 관계자들과 향후 정보 협력에 대해 논의했다. 양측이 전쟁 을 겪으며 서로의 장점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결합되었을 때 누릴 수 있는 효과에 대해 충분히 경험하였기 때문에 협력을 위한 논의는 물 흐르듯 이어졌다. 그 결과 1945년 9월 영국 의 대표단이 워싱턴에 재방문하여 정식 협정 체결에 대해 논 의하였다.56) 이 협정은 이전의 ‘군사’ 협정들과는 달리 ‘국가’ 차원에서 이뤄지는 공식 협정이 될 것이었으며, 평화 시기에 도 양국이 정보의 수집 및 처리, 그리고 그 결과물까지 모두 공유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영국의 협상단은 캐나다 및 호주의 정보 당국에도 이 정보 협정에 참여할 것을 요구 하였는데 이때 해당 국가들의 지위는 ‘영국의 보호 하에서’ 협정에 참여하는 형식이었다.57) 이와 같은 협상의 결과로 탄생한 것이 바로 1946년 3월의 영 미 통신 정보 협정(British-U.S. Communication Intelligence Agreement)이다. 이 협정은 초기에는 앞서 1943년에 맺어진 양 국 육군 정보부 간의 협정처럼 ‘브루사 협정(BRUSA Agreement)’ 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1952년에 그 명칭을 ‘UKUSA 협정(UKUSA Agreement)’으로 개칭하면서 과거의 협 정과 구분하게 되었다. 이 1946년의 브루사 협정, 즉 훗날의 UKUSA 협정은 그간 영국과 미국의 정보 당국 간에 맺어진 그 어떤 정보 협정들보다 우선하여 적용되었다. 이런 점에서 UKUSA 협정은 향후 양국 간의 정보 협력 관계를 규정지은 문서라고 볼 수 있었다.58)
56) 이 시기 미국에서는 트루먼 대통령이 전시의 전략 정보국(OSS)을 폐지하고 그 조직을 나누어 국무부와 국방부 산하에 두면서 평화 시기의 정보 업무에 있어 미 육군과 해군의 협력, 그리고 영국과의 협력에 대해 지시하였다. Christopher Andrew, “The Growth of the Australian Intelligence Community and the Anglo-American Connection,” Intelligence and National Security, Vol. 4, No. 2 (1989), p. 223.
57) Rudner, “Britain Betwixt and Between,” p. 573.
58) National Archives, HW 80/4 “British-U.S. Communication Intelligence Agreement” (5 March 1946), p. 7.
이 협정의 조항 중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협정의 주체를 설정 하는 부분이다. 협정의 1번 조항은 이 협정이 미국의 모든 정보 기구를 대표하는 정부-육군-해군 통신 정보 위원회(the StateArmy-Navy Communication Intelligence Board, 이하 STANCIB) 와 영 제국의 모든 정보 기구 및 외교부, 해군부, 육군부, 공군 부를 대표하는 런던 신호정보 위원회(the London Signal Intelligence Board) 간의 협정임을 명시하고 있다. 여기서 주 목할 부분은 영 제국의 경계를 명확하게 ‘자치령을 제외한 모든 영국 영토’라고 명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부분만 보면 이 협 정이 영국의 자치령 국가들, 즉 영연방에 소속된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은 제외한 채 영국과 미국, 단 두 국가만의 협력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59) 하지만 협정의 세부 내용을 다루는 3번 조항부터는 협정의 주 체가 다소 모호하게 표현된 부분들이 하나둘 나타난다. 먼저 3번 조항은 이 협정을 통해 양국이 제각기 수집한 ‘외국의(foreign)’ 통신 정보를 제한 없이 교환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데, 여기서 ‘외국’은 단지 영국과 미국을 제외한 모든 국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연방 국가들(the British Commonwealth Nations)’ 까지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을 의미한다. 즉, 이 조항은 영연방 국가들을 ‘외국’이 아닌 이 협정과 밀접하게 연결된 또 다른 주체 국가로 보고 있는 것이다.60) 이는 5번 조항에서 협정의 양 당사자가 통신 정보와 관련된 모든 주제에 대한 ‘제3자’와의 행위를 금한다고 명시하는 부분에 서도 마찬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여기서 제3자는 미국과 영국, 그리고 ‘영국의 자치령 국가들’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라고 정 의되어 있다.61)
59) National Archives, HW 80/4 “British-U.S. Communication Intelligence Agreement,” p. 2.
60) National Archives, HW 80/4 “British-U.S. Communication Intelligence Agreement,” p. 3
61) National Archives, HW 80/4 “British-U.S. Communication Intelligence Agreement,” p. 3.
6번 조항은 아예 ‘자치령들(The Dominions)’ 이라는 제목으로 앞서 언급한 자치령 국가들과 이 협정 간의 모호한 관계에 대해 좀 더 세밀하게 규정하고 있다. 특히 6 번 조항은 당시 영국과 미국이 영연방 국가들과 어떠한 정보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지 유추해볼 수 있는 단서를 제 공해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6. 자치령들 a) 자치령들은 이 협정의 당사국은 아니지만 제3자로 고려되지도 않는다. b) 런던 신호정보 위원회는 자치령의 정보 기관과 어떤 협정을 맺거나 제안된 협정이 있을 경우 미국에 그것을 계속 통보한다. c) 미국 정보 통신 위원회(STANCIB)는 런던 신호정보 위원회를 통하거나 그곳의 사전 승인을 받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캐나다 이외의 자치령 국가 들과 어떠한 협정도 체결하지 않는다. d) 미국 정보 통신 위원회(STANCIB)는 캐나다와 관련 해서도 런던 신호정보 위원회의 의견을 먼저 구하지 않고서는 그곳의 어떤 기관과도 협정을 맺지 않는다.62)
62) National Archives, HW 80/4 “British-U.S. Communication Intelligence Agreement,” pp. 5-6.
6번 조항에서 먼저 a)항은 앞서 살펴본 다른 조항들에서도 충 분히 짐작이 가능한 것으로 이 협정에서 자치령들이 갖는 특별 한 지위를 설명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b), c), d)항인데 b)항 의 경우 영국이 개별적으로 자치령의 정보 기관과 별도의 협정 을 맺을 때에는 특별한 제약이 없으며 미국에 통보만 해주면 된 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하지만 c)항을 살펴보면 미국은 영국을 경유하거나 영국 측의 승인을 먼저 받지 않고서는 캐나다 이외 의 어떤 자치령 국가들과도 별도의 협정을 체결할 수가 없다. 심지어 d)항은 그러한 캐나다조차도 영국의 의견을 먼저 구하지 않고서는 미국과 협정을 맺을 수 없음을 의미하고 있다. 즉, 이 협정의 6번 조항은 자치령 국가들에 대한 영국의 확실한 통제권 을 보장하면서 미국이 영국의 허락 없이는 자치령 국가들에게 함부로 접근조차 하지 못하도록 규정하였다. 이런 점에서 1946년의 영미 통신 정보 협정은 향후 파이브 아 이즈를 예고하듯 그에 해당하는 다섯 개의 국가를 거론하고 있 긴 하지만, 여전히 캐나다와 호주, 뉴질랜드의 독립적인 참여는 제약하며 오히려 그들에 대한 영국의 통제와 지위를 확고하게 보장해주고 있었다. 그렇다면 영국과 미국을 제외한 나머지 세 국가, 특히 예외 조항처럼 별도로 언급되기까지 했던 캐나다의 독립적인 참여는 어떤 계기를 통해 이뤄진 것일까? 나. 변화의 계기 : 롤스로이스 사건 1946년 협정을 통해 캐나다를 비롯한 호주, 뉴질랜드 등의 자 치령들이 간접적으로나마 미국과 정보 협력 관계를 맺게 되자 영국에서는 이전까지 그들의 통제하에 두었던 자치령들이 미국 의 영향력에 넘어가지 않도록 단속하는 데에 상당한 관심과 노 력을 기울였다. 앞서 살펴본 협정에서 자치령과 미국 간의 직접 적인 교류를 제한했던 여러 조항들은 바로 그러한 영국의 의도 를 잘 반영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영국의 의도는 1946년 협정 체결 직전인 1946년 2월 22일부터 협정 체결 직후인 3월 8일까지 런던에서 개최된 영연 방 신호정보 컨퍼런스(Commonwealth SIGINT Conference) 에서도 잘 살펴볼 수 있다.63) 당시 영국의 정보 기구들 중 핵 심이라 할 수 있었던 정부 통신 본부(the Government Communications Headquarters, 이하 GCHQ)64)는 미국과의 협정 이전에 자치령들의 정보 기구를 불러모아 미국과의 협 정 내용을 논의하며 자치령 정보 기구의 지위를 규정하고 향 후 정보 협력에 대해 논의하고자 했다.
63) Kurt F. Jensen, Cautious Beginnings: Canadian Foreign Intelligence, 1939-51 (Vancouver: UBC Press, 2008), pp. 130-137.
64) 1946년 정부 암호학교가 정부 통신 본부(the Government Communications Headquarters, GCHQ)로 개칭되었다. 본고의 각주 61)을 함께 참조. Rudner, “Britain Betwixt and Between,” p. 572.
특히 영국은 이 컨퍼 런스를 통해 영연방의 정보 수집 역량을 결집시켜 정보의 연 결성과 그것을 통한 시너지를 도모하고자 했다. 이는 영국이 주도하는 영연방 신호정보 네트워크를 공고히 구축하여 향후 정보 동맹 내에서도 미국보다 한 발 앞선 위치를 유지하려는 포부가 담긴 것이었다. 물론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영국이 처 했던 어려운 상황들을 고려한다면 그러한 야망은 달성이 쉽 지 않아 보였으나 해당 컨퍼런스가 영연방 정보 기구 간에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었다.65) 그런데 이 지점에서 좀 더 주목해봐야 할 부분은 당시 영 국이 소위 ‘구 영연방(Old Commonwealth)’66)이라 불리는 캐 나다, 호주, 뉴질랜드와 정보 네트워크를 구축한 배경에 ‘정보 분야에서의 우위’ 외에도 또 다른 정치적 이유가 깔려있었다 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전쟁 중 그렇게나 긴밀히 협력했던 미국과의 갈등 때문이었다.67)
65) Martin Rudner, “Canada’s Communications Security Establishment from Cold War to Globalization,” Intelligence & National Security, Vol. 16, No. 1 (2001), p. 108; Jensen, Cautious Beginnings, pp. 130-137.
66) 구 영연방(Old Commonwealth)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영연방 국가가 되었 고, 또 주로 백인으로 구성된 부유한 국가들을 지칭한다. 구 영연방에는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이 포함된다. 이에 대칭되는 신 영연방(New Commonwealth) 은 1960-70년대에 영연방에 편입된 나라들로서, 여기에 속한 국가 대부분은 아 시아, 아프리카, 카리브 해 등지에 있는 비백인 위주로 구성된 약소국이자 영 제국의 옛 식민지였던 나라들을 주로 지칭한다. 석영달, 「필립 머피의 역사학 적 여정」, p. 347; 박은재, 「영국 노동당 정부(1964-70)의 이민-인종정책」, 영국 연구 제26호 (2011. 12.), p. 264. 67) Rudner, “Canada’s Communications Security Establishment from Cold War to Globalization,” p. 108.
여기서 말하는 영미 간의 갈등이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영국과 미국이 소련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되었던 ‘롤스로이스 사건 (Rolls-Royce Affair)’을 의미한다. 이 사건은 단지 국제 정 치 구도에 대한 양국의 시각 차이 정도만을 보여주었던 것이 아니라, 평화적 세력전이 과정에서 두 국가 간의 본격적인 정 치·경제적 대립이 발생할 경우 이전까지 긴밀했던 협력 관계에까지 균열이 일어날 수 있음을 잘 보여준 사건이었다.68) 이 사건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영국에서 당시로서는 별 문제 가 될 것 같지 않았던 사소한 결정 하나를 내리면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바로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영국이 발전시켜 온 항공 분야의 기술을 해외로 수출하며 대외 무역에서의 이익을 얻 고자 했던 결정이었다.69)
68) 실제로 이 시기 미국은 영국과의 정보 협력 관계를 ‘검토(under review)’ 단계 로 변경하며, ‘정보 출처’, ‘정보 획득 방법’, ‘암호화 및 암호 장치와 관련된 정 보’에 대한 추가 공개를 중단하는 등 사실상 정보 공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 는 모든 부분에 제한을 걸며 대응에 나섰다. Stephen Dorril, MI6: Inside the Covert World of Her Majesty’s Secret Intelligence Service (New York: Touchstone, 2002), p. 56.
69) 종전 후 영국의 경제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고 특히 대외 수출을 통해 국제 수 지를 개선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이 전쟁을 통해 발전시켜 온, 세 계적으로 독보적인 수준의 제트 엔진 기술은 좋은 수출 대상으로 여겨졌다. Jeffrey A. Engel, “The Surly Bonds: American Cold War Constraints on British Aviation,” Enterprise & Society, Vol. 6, Iss. 1 (2005), pp. 7-8.
영국의 항공 제작부(the Ministry of Aircraft Production)와 공군부(the Air Ministry)는 전쟁이 끝났기에 그들이 보유하고 있던 전시 장비와 설비 중 더 이상의 보안이 불필요한 것들을 보안 분류에서 해제하고자 했다. 이때 그 보안 해제 작업은 여러 유관 부서들이 협력하 여 꾸리는 기술 분류 위원회(Technical Grading Committee) 의 통제하에 진행되어야 했는데, 전쟁 후의 복잡한 조직 재구 성 과정에서 해당 위원회의 구성은 몇 달씩이나 지연되었다. 이에 그 지연 기간 동안 항공 기술 중 몇몇 항목들은 항공 제작부와 공군부만의 협의를 통해 먼저 보안 분류에서 해제 되기도 했다.70) 이 과정에서 1945년 12월 21일 바로 그 문제의 사건, 롤스로 이스의 넨(the Nene) 엔진과 더원트(the Derwent) 엔진이 공 개 리스트(Open list)에 등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공군 부를 비롯하여 해당 결정 과정에 참여했던 부서들은 이것을 단 지 ‘정보 공개’ 정도의 의미로만 이해했으나, 실제로 이 결정은 단지 엔진에 대한 정보를 언론 등에 제공하는 수준만을 의미하 는 것이 아니었다. 해당 엔진들을 공개 리스트에 등재했다는 것은 이제 완성된 엔진을 타국에 판매할 수 있으며, 또 그것을 상업 용도로 생산할 수 있는 허가권까지 판매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71) 그랬기 때문에 당시 항공 엔진 발전을 선도하던 영국의 기업 롤스로이스(Rolls-Royce)는 자연스럽게 여러 국가들과 엔 진 판매 및 기술 이전을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72)
70) Joan Beaumont, “Trade, Strategy, and Foreign Policy in Conflict: The Rolls-Royce Affair, 1946-1947,” The International History Review, Vol. 2, No. 4 (1980), pp. 603-604.
71) Beaumont, “Trade, Strategy, and Foreign Policy in Conflict,” p. 604.
72) 롤스로이스는 1946년 5월까지 스위스, 캐나다, 프랑스, 중국 등의 국가와 엔진 수출 및 생산 허가권 판매 계약을 진행했다. Engel, “The Surly Bonds,” p. 12.
이에 엔 진의 공개 리스트 등재 후 불과 한 달이 지나지 않은 시점 에 중국 정부에서 넨 엔진 및 더원트 엔진의 생산 허가를 놓고 롤스로이스와 협상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와 거의 동 시에 동일한 조건의 허가권을 놓고 프랑스의 기업 이스파노 수이자(Hispano Suiza)가 프랑스 정부를 대리하여 롤스로이 스와 협상을 진행했다. 다만 이 두 협상까지는 이미 중국의 기술자들이 롤스로이스에서 터빈 엔진 개발을 위해 함께 일하고 있었다는 점과 당시 영국의 정책 자체가 프랑스의 군사력 재건을 돕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안보적 측면이나 정치 적 측면에서 큰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73) 하지만 1946년 3월 6일 소련 측에서 롤스로이스에 항공 엔진 의 생산 허가권을 요청했을 때에는 그 사정이 좀 달랐다. 이 시 기는 종전 후 소련이 조약을 어기면서까지 북부 이란에서 병력 을 철수하지 않아 영국과 미국이 상당한 불만을 갖고 있던 시점이었다.74) 그뿐만 아니라 독일에서도 동독과 서독의 분 리를 놓고 영미와 소련의 갈등이 첨예하였다. 이런 점에서 소 련에 최신 항공 엔진을 판매하는 것은 향후 영국에 잠재적인 위협이 될 수도 있었기에 국가 안보의 측면에서 결코 적절한 선택이라 볼 수 없었다.75)
그뿐만 아니라 소련에 민간 기업을 통해 군사 장비를 판매 하는 것은 영국 합동 참모 본부의 정보 통제 방침에도 맞지 않았다. 종전 무렵부터 영국 합참은 소련 측에서 비슷한 수준 의 정보를 상응하여 제공하지 않을 경우 영국 측에서도 먼저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었다. 게다가 1945년 11월부터는 소련에 군사 장비 판매와 관련된 정보 공 개에 있어 가장 낮은 수준의 보안 등급만을 부여해놓은 상 태였다.76)
73) Beaumont, “Trade, Strategy, and Foreign Policy in Conflict,” p. 604.
74) 소련은 1942년 1월 영국-소련-이란 조약에서 규정한 ‘종전 후 6개월 후 철수’ 를 따르지 않고 북부 이란에서의 철군을 거부했다. 이 철수는 1946년 5월에서 야 비로소 이뤄졌다. Beaumont, “Trade, Strategy, and Foreign Policy in Conflict,” p. 605.
75) 당시 영국 공군부에서는 소련의 가스 터빈 엔진 기술이 영국보다 5년 정도 뒤 쳐져 있으나, 만약 완성된 넨 엔진과 더원트 엔진이 소련에 공급된다면 그 격차 가 3년으로 줄어들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엔진 생산 허가권과 생산 노하우 등이 함께 전달된다면 그 격차는 1년으로까지 줄어들 것이라고 판단했다. Beaumont, “Trade, Strategy, and Foreign Policy in Conflict,” p. 605.
76) 당시 소련은 C등급 분류(category C)에 놓여있었는데 C등급 국가는 어떤 기밀 정보도 제공 받을 수 없었다. Beaumont, “Trade, Strategy, and Foreign Policy in Conflict,” p. 606.
그러나 문제는 해당 항공 엔진들이 그러한 낮은 보안 등급의 국가들도 얼마든지 접근이 가능한 ‘공개 리스트’에 올라가 있었 다는 점이었다. 항공 엔진과 관련된 정보는 더 이상 기밀 정보 도 아니었고, 소련과 같은 보안 등급에 놓여있던 중국에게도 이 미 판매가 허가되었기에 소련에만 판매를 금지할 명분이 없었 다. 게다가 영국에서 이 기술을 소련에 직접적으로 팔지 않더라 도 프랑스나 중국을 경유하여 소련으로 넘어갈 가능성은 매 우 농후해 보였다.77) 결국 소련에 항공 엔진을 판매하지 않 으려면 기존에 프랑스, 중국 등과 맺은 계약까지 모두 파기해 야 했는데, 그렇게 되어 영국이 항공 산업 분야에서 손을 떼 게 된다면 그 공백은 금세 미국이 차지하고 영국은 국제 수 지에서 상당한 손해를 볼 것이 자명해 보였다.78) 이러한 딜레마적 상황에서 결국 영국은 1946년 9월 말 소련 에 롤스로이스의 가스 터빈 엔진을 판매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영국 노동당 정부의 수상 클레멘트 애틀리(Clement Richard Attlee, 1883-1967)는 영국의 어려운 경제 사정과 수출의 필 요성, 그리고 소련 측의 불합리한 차별에 대한 문제 제기 등을 숙려한 끝에 생산 허가권은 판매하지 않되 완성된 엔진은 판매를 허가한다는 절충안을 선택했다.79)
77) Beaumont, “Trade, Strategy, and Foreign Policy in Conflict,” p. 606.
78) 냉전 초기 영국과 미국의 항공 산업을 둘러싼 경쟁은 불과 얼마 전까지 모든 정보를 공유하던 동맹국 간의 경쟁이라 보기 어려울 정도로 치열하였다. 특히 영국의 입장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영국이 보유하고 있던 근소한 기 술력의 우위가 곧 미국의 우월한 생산력과 자원으로 인해 뒤집히게 되어 미국에 게 압도당할 것을 크게 우려하고 있었다. Engel, “The Surly Bonds,” pp. 2-3; Beaumont, “Trade, Strategy, and Foreign Policy in Conflict,” p. 607.
79) 당시 영국 노동당 정부 내에서도 이 제트 엔진 판매에 대해서는 찬반 대립이 심하였다. 군사 분야의 관계자들은 이 결정이 향후 영국의 안보를 위협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판매 자체를 완전히 금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경제 분야의 관계자들은 공개 리스트의 품목을 갑자기 판매 금지한다면 영국의 대외 신뢰도가 급격히 추락할 뿐만 아니라 향후 가장 가치 있는 산업이 될 항공 산 업의 이익을 포기하는 결정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Engel, “The Surly Bonds,” pp. 14-15
이는 소련 측에서 완성된 엔진을 분석하여 자체 설계에 이르는 데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는 오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80)
80) Engel, “The Surly Bonds,” pp. 14-15.
그리 고 이 결정은 이후 소련이 추가적인 제트 엔진 판매를 요구 했을 때에도 영국이 거부할 수 없는 전례가 되었고, 결국 1947년 2월까지 영국은 소련에 수십 대의 제트 엔진 판매 를 허가하게 되었다.81)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종전 직후부터 영국보다 훨씬 더 적 대적인 시선으로 소련을 바라보았던 미국의 입장에서는 이와 같은 결정이 결코 용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미국은 소련이 영국에 제트 엔진 구매를 요청했다는 사실과 영국이 이를 즉 각 거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불과 얼마 전에 맺은 영국과의 정보 협정이 갖는 의미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 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1946년 협정’이 맺어진지 불과 한 달 이 채 지나지 않았던 4월 경에 미국 측에서 영국과의 향후 정보 협력에 대해 다시 ‘검토(under review)’해보겠다는 의 견을 표명한 것은 본격적인 갈등의 서막이라 할 수 있었 다.82)
81) Beaumont, “Trade, Strategy, and Foreign Policy in Conflict,” p. 610.
82) Bradley F. Smith, The ULTRA-MAGIC DEALS – And the Most Secret Special Relationship, 1940-1946 (Novato: Presidio Press, 1993), p. 220.
4. 영미 간의 갈등과 정보 동맹의 중심 이동
가. 영연방 신호정보 기구의 출범
1946년 9월 영국은 미국의 불편한 심기 표명에도 불구하고 소련에 제트 엔진 판매를 강행했다. 이는 향후 미국과의 정보 협력 관계, 혹은 더 나아가 넓은 차원의 주도권 다툼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라 볼 수 있었다. 특히 정보 협력의 측면에서는 영국이 제2차 세계대전부터 이 시점까 지 정보의 수집 및 처리 능력에서 미국보다 항상 한발 앞서 있 었다는 자신감이 상당 부분 작용했을 가능성도 높다. 이런 여러 상황을 방증해주는 사건이 바로 1947년 초 영연방 신호정보 기 구(Commonwealth Sigint Organization, 이하 CSO)의 출범이 었다.83) 영국은 소련에 롤스로이스와의 계약을 허락한 후 몇 달 지 나지 않은 시점에 다시 한 번 영연방 정보 기구들을 소집하여 1946년 말부터 1947년 초 사이에 영연방 신호정보 기구(CSO) 의 출범에 대해 논의했다. 이는 1946년 2~3월 간 실시했던 영연방 신호정보 컨퍼런스보다 좀 더 발전된 형태의 ‘상설 조 직’을 형성하려는 시도였다. 그 결과 영국의 주도 하에 1947년 영연방 신호정보 기구 협정이 체결되며 영연방 정보 기구들 로만 구성된 공식적인 연합 조직이 만들어지게 되었다.84)
83) Jensen, Cautious Beginnings, p. 169.
84) Rudner, “Britain Betwixt and Between,” p. 574; Jensen, Cautious Beginnings, p. 169.
이와 같은 영국의 영연방 신호정보 기구(CSO)의 창설은 미 국에서 영국과의 정보 협력 관계를 다시 ‘검토’하겠다는 불 만어린 표현을 전달했을 때 그에 대항하듯 영연방 정보 조 직의 위세를 과시하는 효과가 있었다. 영연방 소속 국가들 이 보유했던 주요 군사 거점은 종전 후에도 여전히 전 세계 에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한 핵심적인 기반으로 기능했고, 영국이 이들 국가에 대한 통제권을 쥐고 있는 한 그러한 우 위는 흔들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 다만 여기에는 한 가지 변수가 남아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1946년 협정에서 미국이 선제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여지가 있 었던 캐나다의 존재였다. 과연 캐나다와 미국은 어떠한 이해관 계와 정치적 계산을 바탕으로 기존의 정보 동맹에 변화를 초래 했던 것일까? 나. 미국-캐나다 간의 정보 협정 사실 냉전 시기 캐나다와 미국 간의 정보 협력 논의에 대해서 는 관련 자료들이 오랫동안 비밀 상태로 유지되어 있었기에 학 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가 없었고 자연스레 학계에서는 거의 연구된 바가 없었다.85)
85) 본 논문에서 소개한 웨슬리 와크(Wesley Wark)의 연구 이전까지 캐나다와 파 이브 아이즈를 함께 다룬 연구는 제임스 콕스(James Cox)의 논문을 제외하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콕스의 논문은 캐나다가 어떻게 파이브 아이즈에 참여하게 되었는지를 자세하기 다루기보다는 파이브 아이즈의 개설적인 소개에 좀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James Cox, “Canada and the Five Eyes Intelligence Community,” Canadian Defence and Foreign Affairs Institute Working Group Papers (2012), pp. 1-13.
하지만 최근 웨슬리 와크(Wesley Wark)가 캐나다 정보 기구의 공식 역사 저술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비밀 자료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고, 해당 자료들을 통해 「캐나다-미국 협정으로 가는 길(“The Road to CANUSA”)」86)이라는 충실한 분석이 담긴 연구를 발표하며 이 주제에 대한 새로운 고찰을 전해주고 있다.87) 먼저 와크는 캐나다와 미국 간의 정보 협력에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두 가지 있다고 보았다. 먼저 그 첫 번째는 “왜 미국에서 캐나다와 그렇게 관대한 신호정보 협정을 맺게 되었는가?”이며,88) 두 번째는 “왜 캐나다 정부는 영국으로부터 독립적인 지위와 신호정보 주권을 확보하는 데에 그렇게 결연한 의지를 보였는가?”이다.89)
86) Wesley Wark, “The Road to CANUSA: how Canadian Signals intelligence won its independence and helped create the Five Eyes,” Intelligence and National Security, Vol. 35, No. 1 (2020).
87) Wark, “The Road to CANUSA,” pp. 20-21.
88) 이 신호정보 협정은 캐나다에게 훨씬 유리한 협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캐나다 측에서는 미국으로부터 필요한 정보를 요구, 획득할 수 있었던 반면 미국 측은 국익에 결부된 사항에 대해 일반적인 수준의 통고를 받는 정도에 그쳤다. Wark, “The Road to CANUSA,” p. 22.
89) Wark, “The Road to CANUSA,” p. 22.
와크의 논문에서 다소 아 쉬운 부분은 논문 내용이 전반적으로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명확한 답을 들을 수 없다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와크는 캐나다-미국 협정을 캐나다 정보 당국의 생존 노력이 결실을 맺은 ‘캐나다 측의 승리’라고 평가한다. 이 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별다른 역할과 기능을 하지 못해 존폐의 기로에 서 있던 캐나다의 정보 기관이 존재의 의미를 증명하기 위해 미국과의 단독 정보협정을 추진했고 이것이 곧 협정의 체결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특히나 ‘어차피 영국으로 부터 이미 미국의 정보를 받고 있어 크게 아쉬울 것이 없다’라 는 캐나다의 호기로운 입장 표명이 미국과의 협상에서 공세적 태도를 취하는 전략으로 작용했다는 해석은 상당히 흥미롭다.90)
다만 이러한 분석은 와크가 개운하게 답하지 않았던 첫 번째 질문과 결부해볼 경우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 주장 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를 앞서 살펴본 영미 간의 갈등과 연결시켜 보 면 어떨까? 즉, 미국이 단지 ‘관대했기’ 때문에 이 협정의 체 결을 결정한 것이 아니라, 영연방을 기반으로 한 영국의 정 보 공동체에 균열을 내려고 했을 경우를 고려해볼 필요가 있 다는 것이다. 사실 캐나다와 미국 간의 협상에서 그 주도 권은 분명 미국 측에 있었다.91) 비록 캐나다가 이미 확보 된 ‘영국으로부터의 정보 공유’을 내세우며 당당한 태도를 취하고자 했지만, 그것은 미국도 마찬가지였으며 무엇보 다 캐나다와 정보 협정을 맺었을 때 미국이 직접적으로 누릴 수 있는 이익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캐나다에서 1947년 초부터 미국에 단독 정보 협정을 제안했지만92) 미국에서는 영국과의 정치적인 문제를 야기하지 않기 위 해 그것을 계속 미루다가 한참 후에서야 구체적인 협정 논의에 관심을 보였다는 점은 이를 방증해준다.
90) Wark, “The Road to CANUSA,” pp. 23-29.
91) Wark, “The Road to CANUSA,” p. 26.
92) Wark, “The Road to CANUSA,” pp. 25-26.
미국은 1947년 초반까지 기존의 정보 동맹 체제에 변화를 야기 하는 것에 대해 조심스러운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볼 점은 그러한 미국의 태도 변화가 1947년 말 에서 1948년 초에 이르렀을 때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는 점이다. 1947년 말 미국은 1946년 4월에 제기했던 단순한 유감 표명보 다 훨씬 더 강한 불만과 항의를 영국에 제기했다. 이때 미국은 영국이 소련과의 엔진 판매를 지속할 경우 향후 모든 기술적인 협력을 보류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뿐만 아니라 미국은 영 국과 맺은 통신 정보 협정을 파기하지는 않지만 향후 미국 정보 의 출처, 획득 방법, 암호 및 암호 장비와 관계된 모든 정보 를 영국에 공개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명하기도 했다.93) 그 리고 이러한 결정들을 내리고 난 직후인 1948년 초부터 캐나 다-미국 협정 논의가 급물살을 타면서 1949년의 조약 체결 로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미국이 캐나다와의 협정을 과감하게 결 정한 데에는 비단 롤스로이스 사건으로 인한 소련과의 문제 뿐 만 아니라, 1947년 영국이 미국을 배제한 채로 영연방 신호정보 기구를 출범시켜 서방의 정보 동맹 체제에서 다시금 통제력과 우위를 확인하고자 했던 부분과 무관하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영국이 미국의 불만어린 항의에 대응하여 결집시키고자 했던 영 연방 국가들 중 캐나다는 국력으로나 지정학적 위치로나 가장 핵심적인 국가라 볼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영국은 캐나다가 미국과의 단독 협정을 맺으며 미국에 힘을 실어주는 것에 크게 동의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다만 여기서 문제는 1946년 협정 에 명시한 대로 미국이 캐나다와 단독 협정을 맺기 전에 영국에 먼저 허가를 구하는 절차를 진행했을 때 과연 영국에서 당당히 ‘반대’ 의사를 표명할 수 있는가의 문제였다. 사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은 영연방 국가들에 대한 통제 력을 유지하기 위해 더 이상 많은 자원이나 노력을 투자할 여력 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종전 이후 영국은 영연방과의 관계에 서 왕실이나 국가의 위신이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며 항상 방 어적인 정책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94)
93) Smith, The ULTRA-MAGIC DEALS, p. 220.
94) 석영달, 「필립 머피(Philip Murphy)의 역사학적 여정: 제2차 세계대전 후 영국 과 영연방의 관계 변화 속에서」, 영국연구 제40호 (2018), pp. 336-337.
이런 맥락에서 캐나다가 미국과의 정보 동맹에 대해 의견을 구했을 때 영국에서는 쉽게 반대 의사를 표명하기가 어려웠다. 만약 영연방 국가 중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캐나다가 영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정보 동맹을 체결하게 된다면 영연방 내에서 영국의 위신과 존재감은 급격히 추락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반면 제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자치령이 아닌, 한 국가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주권의 확대를 추구해왔던 캐나다의 입장에 서는 영국의 입지가 흔들리고 있던 이 시점이 더없이 좋은 기회 로 여겨졌을 것이다. 이때를 틈타 영국과의 우호적 관계는 그대 로 유지하면서 정보 주권은 가져오고, 여기에 더해 미국과도 손 잡게 된다면 캐나다로서는 더 바랄 것 없는 외교적 성공을 거두 게 되는 것이었다. 결국 캐나다는 영국에 미국과의 단독 정보 협정 의사를 전했 고, 영국은 그에 대해 “언급할 것이 없다(No comment)”라는 대답으로 나름의 불만을 표시했다.95)
95) Wark, “The Road to CANUSA,” p. 27.
하지만 그것은 명목상 반대 의견은 아니었으므로 캐나다와 미국 간 협정 체결에 아무런 법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즉, 이 시기 캐나다와 미국이 체결한 단독 정보 협정은 영국이 더 이상 영연방 국가 들에 대해 과거와 같은 통제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이제 미국이 원한다면 언제든 영연방 국가 들과 단독으로 정보 협정을 맺어 영국의 영향력을 축소시킬 수 있음을 확인한 사건이었다.
5. 결 론
흔히 미국과 영국, 그리고 영연방 국가들 간의 견고한 정보 동맹이라고 알려진 파이브 아이즈는 단지 ‘우호적 관계’를 바탕 으로 맺어진 동맹이라 보기에는 좀 더 복잡미묘한 역사적 배경 을 갖고 있었다. 파이브 아이즈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었던 제2 차 세계대전기 영미 간의 정보 협력은 기본적으로 국가 간의 필 요와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으며, 종전 이후의 협력 역 시 소련이라는 공통된 적대 세력이 존재했기에 자연스럽게 이어 진 것이었다. 그리고 1940년대 후반에 연속적으로 나타난 롤스로이스 사 건, 영연방 신호정보 기구의 출범, 캐나다-미국 간의 단독 정 보 협정 등은 그러한 협력 관계가 언제든 각국의 정치·경제적 이해관계나 국가 지도부의 판단 등에 따라 변화를 맞이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비록 미국의 강한 반발에 못이겨 영국이 미국 측의 요구를 수용하면서 정보 협력의 단절로까지는 이어 지지 않았지만 당시에 나타난 갈등과 반작용의 역사는 현재의 국제 정세를 이해함에 있어서도 상당히 유의미한 시사점을 전 해준다. 최근 미중 패권 경쟁 속에서 화웨이 사태와 관련하여 영국이 보여준 모호한 입장은 롤스로이스 사건을 다시금 떠오르게 한 다. 2020년 영국이 5G 통신장비 업체로 화웨이를 선정하고, 미 국 측에서는 영국과의 정보 공유 중지까지 거론하며 강력히 반 발했던 사건은 1940년대에 나타났던 양상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96) 이번에도 미국의 강한 반발로 인해 영국이 한발 물 러서는 모양새였으나 향후 미중 패권 경쟁의 흐름에 따라, 혹 은 영국이 스스로 인식하는 자국의 지위와 잠재력에 따라 언 젠가는 다른 판단을 내리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뿐만 아니라 1940년대 후반 영미 간의 갈등 속 캐나다의 행 보는 강대국 간의 갈등 혹은, 세력전이의 상황 속에서 중견국이 할 수 있는 역할과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 었다. 롤스로이스 사건과 영연방 신호정보 기구의 출범 등은 동 맹 이론의 대가인 스티븐 월트(Stephen M. Walt)가 언급했던 ‘동맹이 해체될 수 있는 원인’에 해당하는 상황이었다. 롤스로이 스 사건은 “동맹국이 참여국의 의무 이행 의지나 능력에 의문을 갖게되는 경우”로 볼 수 있고, 영연방 신호정보기구의 출범은 “동맹 참여국이 다른 수단으로 국가이익을 보호할 수 있는 경우”로 볼 수 있다.97)
96) 이광영, 「60년간 지속한 서방 정보교류협정 균열? 英, 5G 통신장비 업체로 화 웨이 선정」, IT Chosun (2020. 1. 29.).
97) Stephen M. Walt, “Why Alliances Endure or Collapse,” Survival, Vol. 39, No. 1 (1997), p. 163.
만약 캐나다에서 이런 국제 정세의 변화를 꿰뚫어보고 영미 간의 정보 동맹이 느슨해진 상황을 틈타 미국과의 협정 체결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라면 그것 은 원하는 바를 쉽게 얻을 수 있는 순간을 잘 포착한 외교적 승리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와 같은 고찰은 현재 미중 갈등 상황 속에서 파이브 아이즈 가입에 대한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는 우리나라의 입장에 서도 되새겨볼만 하다. 미국과는 긴밀한 동맹을, 중국과는 경제 적 교류를 지속하고자 하는 우리나라의 입장은 과거의 캐나다보 다 훨씬 더 현명한 판단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다. 이런 점에서 최근 미국, 영국, 호주 간에 맺어진 오커스(AUKUS) 동맹은 우리가 참고할 만한 좋은 기출 문제가 될 수 있다. 파이브 아이즈 소속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한때는 중국과 다윈항(Port Darwin) 조차(租借) 협약을 맺고, 이제는 미국으로부터 핵추진 잠수함 기 술까지 얻어낸 호주의 광폭 외교 행보는 차후의 연구 과제로 살 펴보고자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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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Between Solidarity and Laxity in Alliance: The Implications of the History of the ‘Five Eyes’ Intelligence Alliance
Song, Min-seon, Seok, Yeong-dal
This paper attempted to analyze the history of the Five Eyes, an intelligence alliance(Australia, Canada, New Zealand, the United Kingdom, and the United States) in the following two dimensions. First, the Five Eyes was more of a process of shifting the ‘center of gravity’ of the western intelligence alliance, rather than being formed in the process of combining and expanding the British and American intelligence systems. In other words, the history of forming the Five Eyes Alliance is not a ‘history of unity,’ but a ‘history of conflict and its reaction.’ It would be interpreted as a process of moving the existing Commonwealth-centered intelligence system to the U.S.-centered intelligence alliance. Second, the process of Commonwealth countries breaking away from British intelligence control and signing an intelligence agreement with the United States alone contained complex political backgrounds and intentions. It could not be sufficiently accounted by simple explanations such as ‘some additional countries joined the alliance in a few years.’ Particularly, Canada, which played a main role at the turning point, was the country that took the most important step in the formation of the Five Eyes. At that time, Canada was able to share the U.S. intelligence with Britain, and the U.S. was able to share Canadian intelligence with Britain. If so, why did two countries have to sign the independent intelligence agreement? Based on this question, this paper analyzed the conflict between the United Kingdom and the United www.dbpia.co.kr 222 |軍史 第125號(2022. 12.) States at the time and the judgment and diplomatic strategy made by Canada. This analysis is expected to give various implications to Republic of Korea, which is agonizing over the participation or cooperation of the Five Eyes in the future.
Keywords : Five Eyes, Intelligence Alliance, BRUSA Agreement, UKUSA Agreement, Rolls-Royce Affairs, Commonwealth Sigint Organizaion, CANSUA Agreement
(원고투고일 : 2022. 10. 7, 심사수정일 : 2022. 11. 9, 게재확정일 : 2022. 11.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