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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야기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카르페 디엠(Carpe Diem)! - 전도서 이해의 열쇠로서의 죽음에 대한 고찰 -/구자용.총신대

 

1. 들어가는 말

전도서 1장 1절 “예루살렘 왕 다윗의 아들 코헬렛의 말씀이다”를 이 책의 제목으로 본다면, 독자들이 듣게 되는 전도자의 첫 외침은 2절 lb,h' lKoh; ~ylib'h] lbeh]…~ylib'h] lbeh] (하벨 하발림 ... 하벨 하발림 하콜 하벨/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대로 12장 9-14절을 전도서의 후기 로 본다면,1) 전도자의 마지막 말 역시 lb,h' lKoh;…~ylib'h] lbeh](하벨 하바림 ... 하콜 하발림/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임을 알게 된다. 전도서의 처음과 마지 막에 만들어진 이 수미쌍관구조가 의도하는 바는 곧 전도서의 모토(motto)인2) ‘모 든 것의 헛됨’이다.

1) 이와 같이 전 12:9ff를 전도서의 후기로 보는 일반적인 견해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입장도 있다. 이에 관해서 는 현창학, 「구약 지혜서 연구」 (수원: 합신대학원출판부, 2009), 157의 각주 40)을 참조하라.

2) L. Schwienhorst-Schönberger, “Kohelet: Stand und Perspektiven der Forschung”, L. SchwienhorstSchönberger(ed.), Das Buch Kohelet: Studien zur Struktur, Geschichte, Rezeption und Theologie (BZAW 254; Berlin/New York: Walter de Gruyter, 1997), 5와 12.

전도서 전체를 집약한 이 관념이 던지는 바는 과연 무엇인가?

전도서의 첫 질문인 3절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슨 유익 이 있는가?”는 인간의 유익이 무엇인지, 그가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를 통 해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으며, 한층 더 깊은 사고를 요구한다. 그러나 대개의 독자들은 이 깊이 있는 사고의 장에 참여하지 못한다. 깊어져야할 사고의 흐름은 프롤로그격인 1장의 ‘우주의 노래’3)(4-11절)를 넘어 3절에서 제기된 첫 질 문의 답인 13절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고생하도록 주신 것, 즉 [r" !y:n>[i(이너 얀 라아/악한 장사)는 에둘러 말한 대답에 이르기 전에 길을 잃고 만다. 조금 더 나아간다면 3장의 ‘때의 노래’4)(1-8절)를 지나, 7장의 ‘죽는 날’과 ‘초상집’ 그리 고 ‘슬픔’에 대한 상념과 12장의 젊은이들에게 주어지는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선포에 이르기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그 과정에서 전도자의 또 다른 강렬한 외 침인 삶에 대한 기쁨과 적극적인 삶의 자세에 대한 요청에도 귀 기울일 가능성이 있는가? 전도서는 조금 어렵고 난해한 책으로서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전도서에 대한 괴리감이 비단 개인들에게만 한정되어 있지 않 다는 사실이다. 뤼디거 룩스(Rüdiger Lux)는 교회 공동체와 예배가 전도서를 외면 하자, 전도서는 교회를 떠나 문학가와 철학자들에게로 가버렸고, 심지어는 요한 브람스의 ‘엄숙한 노래들’(Ernste Gesänge)과 또 록그룹의 영화음악에까지 그 입 지를 넓히고 그들 가운데서 혼령처럼 떠돌며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고 한다.5)

3) 전도서에 첫 번째로 등장하는 시문(Gedicht)을 통칭하는 한글 표현이 없으므로 필자는 이 표현을 제안한 다. 이 표현은 N. Lohfink가 전도서의 회문(回文)적 전체구조(die palindromische Gesamtkonstuktion)에서 1:4- 11을 “Kosmologie(Gedicht)”로 표현한 것과 L. Schwienhorst-Schönberger가 동일한 부분을 “das Gedicht über den Kosmos”로 지칭한 것에서 착안하였다. N. Lohfink, Kohelet (NEB; Würtzburg: Echter, 1980), 10과 L. Schwienhorst-Schönberger, Kohelet (HThK.AT; Freiburg/Basel/Wien: Herder, 2004), 157을 참조하라.

4) 전도서에서 비교적 가장 유명한 시문(Gedicht)을 통칭할 표현으로 이 표현을 제안한다. 이 표현은 L. Schwienhorst-Schönberger가 3:1-9을 “das Gedicht über die Zeit”로 지칭한 것에서 착안하였다. L. Schwienhorst-Schönberger, 윗글 (2004), 245를 참조하라.

5) R. Lux, Die Weisen Israels: Meister der Sprache - Lehrer des Volkes - Quelle des Lebens, (Leipzig: Evangelische Verlagsanstalt, 1992), 163-164. 우리나라에도 전도서는 대중가요의 가사로 채용되어 불리고 있 다. 전도서 1장이 노래로 만들어져 불리는 예로, 하동진의 ‘인생은 바람’(작사, 작곡: 허만생, 2011)을 들 수 있다.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나 땅은 영원히 있으며

해는 떴다가 지고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누나.

바람은 이리 불고 저리 불다 불던 곳으로 돌아가며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흘러가나 바다를 채우지 못하리라.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안누나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으랴.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네.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안누나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으랴.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네.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네.)

이 논문은 전도서의 사상들을 일일이 드러내고 설명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 지는 않다. 하지만 적어도 큰 축을 이루는 두 중심 사상을 살펴보고, 그것이 표면 적으로는 서로 모순 되는 듯하지만 무엇을 통해서 어떻게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제목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 두 중심 사상은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와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사상을 연결하여 현실에서의 삶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뿐 아니라, 모토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자세에 대해서도 근거를 갖게 하는 것이 ‘인간에게 있어 결정적인 죽음’ 개념이다. 이러한 ‘죽음’ 개념이 어떻게 서술되고 있는지를 살펴 보기 위해 연구 범위를 전도서의 틀을 이루고 있는 모토(1:2와 12:8)와 그 안쪽에 서 다시 앞과 뒤를 싸고 있는 두 개의 노래(1:[3]4-11과 11:9-12:7)6), 그리고 전도서 1-3장으로 제한하고자 한다. 그 이유는 전도서 1-3장이 전도서의 앞뒤를 감싸는 틀의 한 부분을 이루기도 하지만 동시에 전도서 사상의 주제도입부(propositio)로 서의 역할7)을 하므로 이 부분에서 전도서 사상의 전체적인 그림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6) 전도서의 마지막 노래에 대한 범위 설정에 관하여 아래 각주 15)를 참조하라.

7) L. Schwienhorst-Schönberger는 전도서의 전체 구조를 4단계, 즉 propositio(1:1-3:22), explicatio(4:1-6:9), refutatio(6:10-17), applicatio(9:1-12:8)로 보며, 특히 1:1-3:22에서는 ‘왕의 트라베스티’를 전도서 사상의 핵심으 로 보는데, 필자는 이 견해를 지지한다. L. Schwienhorst-Schönberger, 윗글 (2004), 137을 참조하라.

2. 전도서를 이루고 있는 두 사상적 축

철학자 프란츠 쿠췌라(Franz Kutschera)8)는 신학자들의 전도서 연구를 크게 죽음으로 인해 비롯된 삶의 허무함을 적극적으로 대변하는 경향9)과 삶의 기쁨 을 적극적으로 대변하는 경향10)의 두 흐름 속에서 파악한다.11) 그리고 그 자신 은 삶과 죽음이라는 상반된 두 개념을 ‘죽음을 직면한 채 살아가는 삶’(Leben im Angesicht des Todes)으로써 조합하고자 시도한다. 그에 의하면 전도서의 한 사상 적 축을 이루는 삶은 그 자체에서가 아니라 또 다른 축인 죽음을 통해서 강화된 다는 것이다.12)

8) F. Kutschera, “Kohelet: Leben im Angesicht des Todes”, L. Schwienhorst-Schönberger(ed.), Das Buch Kohelet: Studien zur Struktur, Geschichte, Rezeption und Theologie (BZAW 254; Berlin/New York: Walter de Gruyter, 1997).

9) F. Kutschera는 대표적인 학자로서 D. Michel과 A. Lauha를 든다. D. Michel, Qohelet (EdF 258; Darmstadt: WBG, 1988), 82-107 또는 A. Lauha, Kohelet (BKAT XIX; Neukirchen-Vluyn: Neukirchener Verlag, 1978), 16을 참조하라.

10) 대표적인 학자로 N. Lohfink 또는 L. Schwienhorst-Schönberger를 든다. N. Lohfink, 윗글, 6과 L. Schwienhorst-Schönberger, 윗글 (2004), 69-82를 참조하라.

11) F. Kutschera, 윗글, 363과 L. Schwienhorst-Schönberger, 윗글 (2004), 69를 참조하라.

12) F. Kutschera, 윗글, 363-364.

그러나 철학자적인 그의 놀라운 통찰은 전도서 본문 연구를 통해 보다 확실히 증명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이 두 개념은 어떻게 조화롭게 이해 될 수 있는가?

1) 전도서의 한 축: 인간에게 결정적인 죽음

전도서를 전체적으로 조망하기 위해서는 먼저 바깥 틀을 이루는 모토(1:2과 12:8)인 ‘모든 것의 헛됨’에 대한 선포13)에 주목해야 한다.

13) 많은 주석가들이 이 두 구절을 1:1과 12:9이하와 같이 전도서의 후기로 보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들이 제시하는 두 가지의 근거는 첫째, 전도서 전체의 주인공인 전도자가 1:12-12:7과는 달리 3인칭으로 표현되 었다는 것과 둘째, 절대적 복수형인 ~ylib'h](하발림/헛됨)이 1:12-12:7에는 5:6에 단 한번 발견된다는 것이다. 첫 번째 근거는 ‘(그) 전도자가 말하기를’이란 표현 외에는 적용되지 않으며, 두 번째 근거 또한 전도서의 다른 본문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lb,h,(헤벨/헛됨)이란 단어를 모토 또는 표제어에도 그대로 사용하는 것 보 다는 절대적인 복수형을 사용한 최상급의 강조형인 ~ylib'h] lbeh(하벨 하발림/헛되고 헛됨)으로 표현한 것 으로 볼 수 있으므로 전혀 문제가 없다고 판단된다. 그러므로 이 두 구절을 후대에 추가된 것으로 볼 이유 가 없다. 이에 관해 L. Schwienhorst-Schönberger, 윗글 (2004), 143-144를 참조하라.

12장 8절이 전도서를 마무리하는 차원의 선포라고 한다면, 그에 반해 1장 2절은 앞으로 전개될 사상이 아직 구체화되기 전의 일방적 선포에 해당한다. 이것은 전도서를 첫 대면하는 독 자에게 의도된 것이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마지막 선포에까지 이른 독자에게 제 공되는 해석의 틀로 볼 수 있다. 이제 이 선포는 1장 3절에서 ~d"a'l' !Art.YI-hm;(마 이트론 라아담/인간에게 무슨 유익이 있는가)라는 물음을 지나 ‘우주의 노래’(4-11절)로 전개된다.

3절의 이 질 문은 3장 9절에 또다시 등장하는데, 이로써 1-3장을 하나의 의미 구조 하에 묶는 일차적 역할14)을 함과 동시에, 바로 이어지는 ‘우주의 노래’ 뿐 아니라 1장 12절 이하의 ‘왕의 트라베스티’에 까지 연관된다.

14) L. Schwienhorst-Schönberger는 1-3장의 구조를 아래와 같이 제시한다. 1:3 유익에 대한 질문 1:4-11 우주의 노래 } 지혜자로서의 전도자 1:12-2:26 왕의 트라베스티 : 왕으로서의 전도자 3:1-8 때의 노래 3:9 유익에 대한 질문 } 지혜자로서의 전도자 이에 관해 L. Schwienhorst-Schönberger, 윗글 (2004), 137, 149를 참조하라. 그러나 면밀히 살펴보면, 1:3 과 3:9의 “유익이 무엇인가”의 질문은 의미상 거의 동일한 질문임에는 틀림없으나, 표현상의 일치를 주 장하기는 어렵다.

특히 우주의 노래와의 연관성은 먼저 구조적으로 3절의 의문부사인 -hm;(마-/무엇)이 비록 동일한 기능의 의문부사 는 아니지만 9절의 V,-hm;(마-쉐/~것)에 다시 등장하며, 3b절과 9b절이 동일하게 vm,V'h; tx;T;(타하트 핫샤메쉬/해 아래서)로 종결된다는 사실에서 확인되며, 어휘 적인 면에 있어서도 3절의 ~d"a'l'(라아담/인간에게)이 4절의 rAD(도르/세대)와 8a 절의 vyai(이쉬/사람), 8b절의 !yI[;(아인/눈)과 !z(여게임/피곤함)에 연결되며, vm,V'h; tx;T;(타하트 핫샤메쉬/해 아래서)가 5절에 두 번 언급된 vm,V,(쉐 메쉬/해)와 9b절의 vm,V'h; tx;T;(타하트 핫샤메쉬/해 아래서)로 연결됨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3절의 질문에 대한 답이 12b절에 직접적으로 제시 됨을 들 수 있다. 이어지는 ‘왕의 트라베스티’ 속의 상상 실험이 그 대답의 구체적 인 논증이라고 볼 때 1-3장은 확실히 하나의 의미 구조 하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인간의 유익이 무엇인가’의 질문에 대해 ‘우주의 노래’는 어떻게 답하 고 있는가? ‘우주의 노래’는 마치 대단한 오페라의 서곡과 같은 역할을 한다.

전 도서 사상의 핵심을 품고 있지만 그것을 아직 직접적으로는 드러내지 않는 이 시 문(Gedicht)은 전도자의 마지막 말(12:8)의 선포를 준비하고 분위기를 조성하는 또 다른 시문(Gedicht)인 ‘노화와 죽음의 노래’(11:9-12:7)15)와 역할 면에 있어서 연관 성을 가지며 전도서 전체를 감싸는 또 하나의 내부적 틀을 만들어 낸다.

15) 전도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시문(Gedicht)을 11:9-12:7로 제한하고, 그것을 ‘노화와 죽음의 노래’로 지칭하 기를 제안한다. 이 표현은 R. Lux가 비록 이 시문의 범위를 12:1-7로 보았으나, 그 이름을 “Lied vom Alter und vom Tod”로 지칭한 것에서 착안하였다. R. Lux, 윗글, 121을 참조하라.

전도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시 문의 범위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학자들 간의 여러 의견의 차이가 존재한다.

가장 최근에 전도서의 주석 을 펴낸 D. C. Fredericks는 11:1-12:8을 전도자의 마지막 연설로 보았다.

특히 그는 여기서 전도서의 초반부 (내 견해로 볼 때 1-3장)의 중요한 모티브들이 그대로 다시 등장한다고 보았다. 예를 들면, 자연의 움직임, 시간성, 삶의 기쁨과 허무함, 힘들지만 최선을 다해야 하는 고된 삶의 모습,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경외 등 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그는 11:1-12:8은 한 단위임을 증명하는 수사학적 요소들과 구조를 예기적 평행구조 (proleptic parallel structure)로도 잘 보여주고 있다. D. C. Fredericks/G. J. Wenham, Ecclesiastes & The Song of Songs (AOTC 16; Nottingham/Downers Grove: Apollos/InterVarsity Press, 2010), 231-233. 그러나 필자가 L. Schwienhorst-Schönberger를 따라서 1:(3)4-11과 대칭되는 마지막 시문으로서 11, 12장 전체가 아니라, 11:9- 12:7을 들고자 하는 이유는, 11:1-6은 내용 상 11:7-8 그리고 11:9 이하와 연결되지 않고, 또 11:7-8은 내용 상 11:9 이하와 정확히 일치하나 - A. Lauha는 같은 이유로 전도서의 마지막 시문이 11:7에서 시작되는 것으로 보았음 - 자체가 전도서를 마치는 시문에 속한다기 보다는 마지막 시문에 대한 요약적 도입으로 보는 것 이 나아 보이기 때문이다. 자세한 논의를 위해 A. Lauha, 윗글, 205-206과 L. Schwienhorst-Schönberger, 윗글 (2004), 515-516, 520을 참조하라.

ㅣ선포(1:2) / 분위기를 조성하는 시문(1:(3)4-11) ...... 분위기를 조성하는 시문(11:9-12:7) / 선포(12:8)ㅣ16)

16) F. Delitzsch도 전도서에 처음과 맨 나중에 등장하는 두 개의 시문을 각각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서곡”(einemalerische Ouvertüre)과 “한 폭의 그림과 같은 결말”(ein malerisches Finale)로 매우 적절하게 표현하다. F.Delitzsch, Biblischer Commentar über die Poetischen Bücher des Alten Testaments: Hoheslied und Koheleth (Bd.4; Leipzig: Dörffling und Franke, 1875), 195를 참조하라.

ㅣ헛됨 / ‘우주의 노래’ ‘노화와 죽음의 노래’/ 헛됨ㅣ

이 두 노래를 자세히 살펴보면, 거기서 어떤 비슷한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다. 그것은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인간에겐 결정적인 죽음의 그림자’이다. 이 죽음의 그림자는 1장 3절과 12장 7절에 대조적으로 제시된 공간적 개념 속 에도 이미 암시되어 있다. 1장 3절의 vm,V'h; tx;T(타하트 하샤메쉬/해 아래, ↓)로 부터 12장 7절의 #r<a'h'-l[;(알-하아레츠/땅 위, ↑)에 이르는 공간성은 위에 제시된 틀 속에 전개될 전도서 전체의 내용과 사상을 ‘이 땅 위의 인간 존재의 시작과 끝’으로 분명하게 제한한다. 그 인간 존재에게 주어질 !Art.YI(이트론/유익)은,ql,xe(헬레크/몫)와는 달리, 왠지 더위와 목마름이 연상되는 뜨거운 ‘해 아래서’ 인간이 부지런히 움직이며, 땀을 흘려서 자신의 손에 움켜쥘 무엇을 형상화한다.17)

이러한 서두의 인상은 전도자의 마지막 선포를 위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노화와죽음의 노래’(11:9-12:7)에 등장하는 인간의 모습,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자신의 영원한 집(무덤, 5b절)을 향해 힘겹게(5aα절) 발걸음을 옮기는 노인의 모습과미묘한 대조를 이룬다.

인간이 움켜쥐었던 손은 마치 금 그릇을 붙들고 있었던 은줄이 끊어지듯(6a절) 힘없이 펼쳐지고, 인간의 육체는 원래 그러했던 것 같이 먼지로서18) 흙(땅 위)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된다(7절).

17) !Art.YI(이트론/유익)은 인간이 계산할 수도 없고 또 주장할 수도 없으며 자신의 어떤 행위로 얻을 수 없

는 (누군가에 의해 주어진) 몫을 의미하는 ql,xe(헬레크/몫)와는 달리 인간의 행위를 통해 계산 가능한 범

위 내에서 도달하고 사용할 수 있는 ‘유익/획득’을 의미한다. 이에 관해 B. Willmes, Menschliches Schicksal

und ironische Weisheitskritik im Koheletbuch: Kohelets Ironie und die Grenzen der Exegese (BThSt 39;Neukirchen-Vluyn: Neukirchener Verlag, 2000),87의 각주 22 와 M. V. Fox, A Time to tear down and a Time와 M. V. Fox, A Time to tear down and a Time

to Build up: A Rereading of Ecclesiastes (Grand Rapids: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9),109-113을 참조하라.

18) 인간의 본질을 표현하는 히브리어 구문 hy"h'v,K.…rp'['h,(헤아파르 … 커쉐하야/그 먼지 … 존재했던 것 같이)에 유의하라.

무덤에 묻힌 인간에게는 의미 없는, 그의 존재의 경계 밖에 놓인, 그 순간에도 시간의 흐름은 그칠 줄 모르며 우물의 도구들(12:6b, 항아리, 바퀴)마저 쇠락의 늪으로 몰아간다. ‘거부할 수 없는 시간성을 가지고 인간을 대면하고 있는 죽음’ 앞에서 어느 누가 자신을 주장할 수 있을까?19)

19) “그러므로 죽음이 최종적인 결정권을 쥐고 있는 것 아닌가? 죽음이 거부할 수 없는 시간성을 가지고 인간 을 대면하므로 그것이 시간의 최종적인 비밀인가? 지금까지 그것에게서 모든 삶의 실험들과 또 상상의 실 험들이 수포로 돌아가지 않았던가? 만약 그것에 의해 지속이란 개념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과연 인간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R. Lux, 윗글, 122.

마지막 선포를 준비하는 전도자는 죽음의 이 엄중한 분위기에 오히려 인간이 창조되던 최초의 그 순간(창 2:7)을 접목시킨다.

그럼으로써 쇠락해져 가는 인간의 최종적 단계의 모습에 아이러니하게도 창조의 첫 순간에 대한 회상을 불러일으켜 대조시키며, 동시에 12장 1절의 #rAB-ta, rkoz>(처코르 에트-보레이카/“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라는 명령으 로 다시 돌아가는 구조를 만들어 낸다.

이 구조를 통해서 창조의 생동감과 인간의 쇠락함이 극명하게 대조된다.

2) 창조의 생동감과 인간의 쇠락함의 대조

창조의 생동감과 인간의 쇠락함의 대조는 특히 ‘노화와 죽음의 노래’ 전체에 잘 표현되어 있다.

‘노화와 죽음의 노래’는 청년에게 향한 여섯 개의 명령문인 xm ;f.(서마흐/즐거워하라), %L eh;(할레크/행하라), [d"(다아/알라), rs eh'(하세르/떠나 게 하라), rbe[]h;(하아베르/멀리하라), rkoz>(처코르/기억하라)가 언급된다. 이 여섯 개 의 명령문은 11장 9절과 12장 1절의 “너의 청년의 날들”로 한정된 때 안에서 청년의 생동감과 자신감 그리고 거침없음을 말하며 동시에 절제를 경고하고 있다. 그리고 절제의 근거로서 내면적으로는 하나님의 심판과 창조 행위가 제시되고, 겉으로 연 속되는 명령문 사이에서 눈에 띄는 형식으로 제시된 11장 10b절의 -yKi(키-/근거)절 이 제시된다. ‘심판과 창조의 하나님’에 대한 그리고 주변의 모든 명령문들과 구 별되는 -yKi(키-/근거)절 속의 “청년 너”(2인칭)에게만 한정된 lb,h' tWrx]V;h;w> tWdl. Y:h;(하얄두트 버하샤하루트 하벨/너의 청년기와 검음/검은 머리20)가 다 헛되다)라 는 일반적 진술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20) tWrx]V;(샤하루트)는 hendiadyoin으로 ‘검음’ 혹은 ‘검은 머리’로 번역할 수도 있고, ‘유년기’로도 번역할 수 있음. 이에 관해 L. Schwienhorst-Schönberger, 윗글 (2004), 521-522와 D. C. Fredericks/G. J. Wenham, 윗글, 229-230을 참조하라.

이것은 전도서 전체에 흐르는 두 가 지의 핵심적 사상과 모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이 취할 유일한 자세,

즉 하나님을 경외함이 서서히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은 아 닐까? -yKi(키-/근거)절은 “창조자를 기억하라”는 마지막 명령문(12:1a)을 끼고 “악한 날”로 정의되는 12장 1b절 이하로, 그리고 계속해서 창조자에 대해 또 한번 언급 하는 12장 7절까지 연결된다. “악한 날”21)은 11장 9절과 12장 1절의 “너의 젊음의 날”에 대조되는 개념이다. 이것이 여전히 생동감이 넘치는 때를 의미함에 반해, “악한 날”은 -al{ rv,a] d[;(아드 아쉐르 로-/~전에)라는 독특한 히브리어 표현을 통해 12장 2절의 ‘해의 어두워짐’과 ‘빛과 달과 별들(의 어두워짐)’22), ‘평범하지 않은 현상인 비 뒤의 구름의 몰려옴’23)과 6절의 끊어짐, 깨짐과 연결되어 쇠락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v, ~AYB;(바욤 쉐-/~한 날에)로 시작되는 3, 4a절은 그 “악 한 날”의 모습을 축약된 관계사 v,(쉐/~한 무엇)가 이끄는 문장 속에 표현하고 있 는데, 인간이 노화되는 과정을 집(집과 두짝열개)과 그 집 안팎의 사람들(집을 지 키는 자들, 강한 자들, 맷돌을 돌리는 여인들, 창으로 내다보는 여인들, 노래하는 모든 여인들)의 모습을 통해 표현한다. 쇠약해지는 ‘육체 속에 갇히게 되는 인간’ 의 모습24)은 왕성한 삶의 현장으로부터 점차적으로 ‘차단되고 격리되는 집’에 비 유된다. 특히 시끄러운 새의 소리와 잦아드는 맷돌소리의 대조25)는 귀가 어두워 지고, 이가 적어져서 씹는 소리조차 잦아드는 인간의 쇠락에 반하여 더욱 강해지 며 생동감 넘치는 자연의 소리를 돋보이게 한다.

21) 우리말 성경에는 “곤고한 날” 또는 “고생스러운 날” 등으로 번역됨.

22) 2절의 해와 빛의 구분은 특이한 표현임에는 틀림없다. C. G. Bartholomew는 이런 특이한 구분을 창 1장과 연결한다. C. G. Bartholomew, Ecclesiastes (BCOTWP;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9), 347을 참고하라. 이와 관련하여 여기에 묘사된 쇠락의 이미지는 창조 시의 해와 빛과 달과 별의 창조와 밝아짐에 대조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23) “그러므로 죽음이 최종적인 결정권을 쥐고 있는 것 아닌가? 죽음이 거부할 수 없는 시간성을 가지고 인간 을 대면하므로 그것이 시간의 최종적인 비밀인가? 지금까지 그것에게서 모든 삶의 실험들과 또 상상의 실 험들이 수포로 돌아가지 않았던가? 만약 그것에 의해 지속이란 개념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과연 인간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R. Lux, 윗글, 122.

24) R. Lux는 ‘집을 지키는 자들’은 ‘팔’을, ‘힘 있는 자들’은 ‘다리’를, ‘맷돌질 하는 자(여인네)들’은 ‘이’를, ‘창에서 (내다)보는 자들’은 ‘눈’을, ‘길거리 눈’ 혹은 ‘밖으로 향한 두 짝의 문’은 ‘귀’를 각각 표현한 것 으로 본다. R. Lux, 윗글, 122를 참조하라.

25) 4bβ절은 본문의 rAPCih; lAql. ~Wqy"w>(버야쿰 러콜 하치포르/그가 새 소리에/-를 위하여 일어나다? 번역상의 난제임)를 rAPCih; lAq wOl ~Wqy"w>(버야쿰 로 콜 하치포르/그에게 새소리가 (아마도 왕성하게) 일어나다?)로 읽 어야 한다. 4aβ절과 4bα절 그리고 4bβ절은 R. Lux의 해석(“새의 소리가 잦아들고”)과는 달리 T. Krüger 가 잘 보았듯이 “낮아짐-높아짐-낮아짐의 움직임”(eine Ab-, Auf- und Ab-Bewegung)으로 보는 것이 옳 다. 이에 관해 R. Lux, 윗글, 121과 T. Krüger, Kohelet (Prediger), (BK XIX Sonderband; Neukirchen-Vluyn: Neukirchener Verlag, 2000), 338-339를 참조하라.

이제 5절에는 애처롭게도 높은 곳을 두려워하고 길에서 놀라는 쇠약한 노인(5aα절)의 자신의 영원한 집(무덤)을 향해 가는 모습(5bβ절)이 묘사되는데 그것에 자연의 생장과 팽팽한 생명력(5aβ γ절)26)이 다시 한번 대조되어 묘사된다.

26) 자연을 상징하는 세 개의 대상과 거기에 연결된 각각의 동사들(‘만개한 편도나무’와 ‘배가 터질 만큼 먹 은 메뚜기’ 그리고 ‘터질 듯 속이 찬 풍조목 열매’)의 해석에는 어려움이 있다. 우리말 성경에 다른 의미 로 번역되어 있는 것은 바로 그 어려움에 기인한다. 예를 들면, 개역개정에는 살구나무, 메뚜기, 정욕(자연 의 대상이 아닌, 인간의 세계에 더 가까운 개념으로서)으로 번역되어 있고, 동사들도 메뚜기의 경우 짐이 됨, 그리고 정욕의 경우 그침의 의미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노화와 죽음의 노래’의 전체적인 구도가 자연 의 생동감이 인간의 쇠락함에 대비되는 것임을 고려할 때 위의 번역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관해 T. Krüger, 윗글, 338, R. Lux, 윗글, 121-122을 참고하라.

죽음의 엄중한 분위기 속에서 회상되는 인간 창조의 그 순간에, 그리고 여전한 자연 만물의 생명력에 대비되어 강조되는 인간의 쇠락함에 대한 경험은 조금은 다른 관점이나 전도서 첫 머리에 등장하는 ‘우주의 노래’에 이미 암시되고 있다.

3) 인간의 유한함과 그의 한계

‘우주의 노래’(1:4-11)에 교묘하게 숨겨진 사상은 ‘만물의 영원성과 인간의 한 계 사이의 대조’라고 할 수 있다. ‘우주의 노래’에는 먼저 (끊임없이) ‘가고 오는’ 세대(동적인 인간의 세계)와 영원히 서 있는 땅의 대비(4절)가 나타난다. 이 땅의 정적은 곧바로 움직임(순환)으로 전환된다. 해, 바람, 강(5-7절)의 끊임없는 순환 적 움직임은 영원히 이루어지는 개념으로 역시 ‘가고 옴’의 움직임을 갖으나 그 주체는 영원하지 못한 각 세대와 대조된다. 8aα절의 ~y[igEy> ~yrIb'D>h;-lK'(콜-하더바 림 여게임/모든 만물의 피곤함)은 위로 5-7절의 해, 바람, 강의 영원한 움직임뿐 아니라 4절의 땅과 세대, 그리고 3절의 사람과 사람의 모든 수고27)에까지도 연결 된다.

27) 특히 ~y[igEy>(여게임/피곤함)과 lmo[]Y:v, Alm'[]-lk'B.(버콜-아말로 쉐야아몰/그가 수고한 모든 수고에)의 연관성을 통하여. 이에 관해 T. Krüger, 윗글, 115를 참고하라.

즉 피곤함은 영원성과 동시에 그 영원성에 대한 인간의 한계성을 드러낸 다. 그러므로 ~yrIb'D>(더바림/말 또는 사건, 행위)을 ‘말’로 번역하면 8aα절은 오히 려 8aβb절에 언급된 사람의 세 가지 행위(말함, 봄, 들음)와 더욱 긴밀히 연결되 고, 세 번 연속되는 -al{(로-/부정어)를 통해 ‘인간 능력의 한계’를 구체적인 예로써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4-8절은, 인간(동적) ↔ 땅(정적) → 해/바람/강(동적) ⇒ 만물(피곤함)∥말(표현의 불가능) ≒ lOa +입/눈/귀(말함, 봄, 들음) 유한한 움직임 ↔ 영원한 정지 → 영원한 움직임 ⇒ 만물의 영원성(초월성)∥영원하지 못한 인간의 한계 ≒ 구체적 예들 의 구조적 배열을 통해 인간의 유한함과 그의 한계를 영원한 땅(해, 바람, 강)에 적절히 대조시키며 표현하고 있다. 이어지는 9-11절은 그 인간의 유한함과 한계 의 개념을 인간에겐 ‘새 것’과 ‘기억됨’이 없음을 통해 더욱 확장시킨다. 특히 9 절은 ‘해 아래서 새 것이 없음’을 땅(‘이미 존재했던 것, 그것이 존재하게 될 것’) 과 인간(‘이미 행해졌던 것, 그것이 다시 행해질 것’)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으로 표현하는데,28) 변하지 않는 땅에게는 당연한 것이나, 세대에서 세대로 변하는 인 간에겐 동일한 행위가 연속된다는 사실에서 그의 유한함이 더욱 두드러지게 된 다.

28) 이에 관해 T. Krüger, 윗글, 116을 참고하라.

그래서 10a절의 “보라 이것은 새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그것은 이미 영원 전에, 우리의 이전에 있었던 것이라”고 반박하며, 땅이란 무대 위에 한 세대만을 살고 없어지는 유한한 인간의 애절한 절규를 더욱 슬프게 한다. ‘우주의 노래’에 는 직접적인 죽음에 대한 언급이 없지만, 영원한 땅과의 대조를 통해 드러나는 유한한 인간의 모습과 어떤 것도 새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으며, 후대에 의해 기 억됨도 없는 그의 모습에서 인간이 피할 수 없는, 그에게는 결정적인 죽음이 역 시 암묵적으로 전제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4)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상상의 실험: 삶에 대한 혐오감

인간에게 결정적인 죽음에 대한 사상은 ‘왕의 트라베스티’(Königstravestie, 1:12-2:26)에도 배어 있다. ‘왕의 트라베스티’의 실제 주인공인 “나 전도자”는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예루살렘 왕”으로 가장을 한다.

그리고 인간에게 가능한 것은 무엇인가를 상상 실험을 통해 확인해 보고자 한다.29)

29) Königstravestie는 다른 말로 Königsfiktion이라고도 하는데,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것을 역사적이고 전기적 인 실제의 이야기로 보기보다는 문학적 허구 또는 상상의 산물로 본다.

인간에게 과연 영원히 지속될 기쁨/낙 이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전개될 상상의 실험에서 세상의 누구보다도 인간이 추구하고 또 이룰 수 있는 최 대한의 가능성을 가진 인물로서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만큼 적절한 인물은 찾아 볼 수 없다. 이에 관해, L. Schwienhorst-Schönberger, 윗글 (2004), 187을 참고하라.

왕으로서의 전도자가 마음을 써서 “연구하고 살핀” 첫 번째 대상은 “하늘 아래에서 행하여지는 (인간 의) 모든 행위”(13aβ절)30)이다. 14절에 반복되어 표현된 “해 아래서 행해지는 모든 것들”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라고 규정된다. 여기까지는 전도서의 모토(1:2)와 첫 질문(1:3)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이후의 초점은 인 간의 운명을 좌우하는 제 삼의 요소인 ‘하나님’에게 맞추어진다. 13b절은 aWh(후/ 그것)라는 지시대명사를 통해 “해 아래서 행해지는 모든 것들”은 [r" !y:n>[i(이너얀 라아/악한 장사)31)이며,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어 그것을 통해 고통 받게 한 것 으로 규정한다.32)

30) hf[]n: rv,a]-lk'(콜-아쉐르 나아세/되어진)는 1:9과 비교해 볼 때, 인간에 의해 되어지는 모든 행위임에 틀림 없다.

31) [r" !y:n>[i(이너얀 라아/괴로운 일)를 대개 ‘괴로운 것’ 또는 ‘괴로운 일’로 번역을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y:n>[i(이너얀)을 ‘장사’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이 번역을 통해 1:3의 !Art.YI(이트론/유익 또는 이익)과 연결지 을 수 있기 때문이다.

32) 13aβ절을 L. Schwienhorst-Schönberger는 3:10과 모순 됨을 근거로 전도자의 사상으로 보지 않고, ‘왕으 로 가장한 전도자’의 사상으로 본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로는 3:10절에 비록 [r'(라아/악한)가 누락되었지 만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어 그것을 통해 고통 받게 한 것”이라는 표현은 그대로 존재하며, 3:11의 ‘아름 다움’은 결코 고통이 전혀 배제된 아름다움이 아니라 시간의 체계, 그것도 제3자에 의해 ‘정해진’ 시간의 체계 속에서의 아름다움이므로 인간에게는 결코 언제나 아름답게 만은 보이지 않을 수도 있으므로 1:13aβ 와 3:10을 굳이 모순으로 볼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다. 이에 관해 L. Schwienhorst-Schönberger, 윗글 (2004), 185-7을 참조하라.

그리고 15절은 속담의 형식으로 표현된 ‘명시되지 않은 제3자에 의한 ‘구부러짐과 모자람’에 대한 표현과 lk;Wy-al{(로-유칼/~을 할 수 없음)을 통 해 ‘인간의 무능력과 한계’를 강조하고 있다.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실험의 대상인 지혜(1:16-18)와 기쁨(2:1-2)은 구체적인 근거가 제시되지 않은 채 각각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헛된” 것으로 규정된다.

왕으로서의 전도자의 실험은 2장 3-26절에서 더욱 심도 있게 설명된다.33)

33) L. Schwienhorst-Schönberger는 왕의 트라베스티의 구성을 아래와 같이 제시한다. 1:12-15 행위(실제) → 헛됨 1:16-18 지혜(이론) → 헛됨 2:1-2 기쁨(즐김) → 헛됨 2:3-11 행위 → 헛됨/유익 없음 2:12.13-127 지혜 → 헛됨/죽음 2:18-23 지혜/유업 → 헛됨/실망 2:24-26 기쁨 → 행복/하나님 성공적이지 못한 삶/헛됨 이에 관해 L. Schwienhorst-Schönberger, 윗글 (2004), 181을 참조하라.

인간 의 모든 행위의 결과, 특히 왕으로서의 인간이 추구하고 소유할 수 있는 모든 것 을 표현한 2장 10bγ절의 ylim'[]-lK'mi yqil.x,(헬키 미콜-아말리/나의 모든 수고로부터 비롯된 나의 몫)은 ‘헛된 것’,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그러므로 ‘해 아래에 유 익이 없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2장 11절은 1장 13b절을 거쳐서 1장 3절의 질문에 다시 한번 분명하게 대답을 제시한다. 1장 16-18절에 간단히 다뤄졌던 지혜에 대한 실험이 두 번째 설명에서는 좀 더 상세하게 다뤄진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어리석음 보다는 지혜에 대한 유익 이 있음(2:13)을 마치 빛이 어두움보다 유익함과 같이 인정한다. 눈이 머리에 있 어 멀리 앞날을 내다보는 능력을 지닌 지혜로운 사람과 어둠 속을 헤매며 살아가 는 어리석은 사람을 대조적으로 보여주는 해학적인 묘사34)인 2장 14a절은 지혜에 대한 유익에 대한 의심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지혜의 유익은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에게 ‘동일하게’ 닥치는 운명이 있다는 사실에서, 즉 “하나의 운명이 그들 모두에게”(2:14b) 임하는 모습에서 부정된다. 그 운명은 ‘죽음’이다. 이미 2장 12b절의 왕의 뒤에 오는 자가 행할 것인 WhWf[' rb'K.-rv,a](아 쉐르-커바르 아수후/이미 사람들이 이전에 행한)는 1장의 ‘우주의 노래’, 특히 9-10절의 표현들과 매우 유사함 보이고 있다. 2장 16절의 지혜로운 사람이나 어 리석은 사람이 모두 ‘영원히 기억됨이 없음’도 역시 ‘우주의 노래’(1:11)의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2장 17절의 왕으로서의 전도자의 실험에 대한 전 형적인 결론(괴로움, 헛됨, 바람을 잡으려는 것)에는 이제 또 하나의 새로운 개념 이 추가되는데, 그것은 바로 ‘삶에 대한 혐오’이다. 혐오35)에 대한 근거인 ‘해 아 래서’ 행해지는 일이 ‘나(전도자)’에게 ‘악한 것/괴로움’이라는 주장은 1장 13b절의 진술과 연결된다.36)

34) 해학적인 묘사는 아니지만 이 부분과 관련된 ‘지혜자의 죽음’의 예로써 삼하 17:23의 아히도벨이 제시되 기도 한다. 아히도벨은 다윗의 모사가였다가 후에 압살롬의 반역에 가담하였는데, 자신의 지혜로운 모략 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압살롬과 그의 추종자들, 그리고 곧 자신에게 다가올 죽음을 내다보고 스스로 목 숨을 끊는다. 더 자세한 것은 C.-Y. Ku, Weisheit in der Thronfolgegeschichte Davids: Eine literarkritische und literaturwissenschaftliche Untersuchung der Weisheitsdarstellung unter besonderer Berücksichtigung ihrer Ironisierung (KAANT 9; Kamen: hartmut spenner, 2009), 185-8을 참고하라. 지혜의 아이러니화에 관해서는 구자용, “삼하 11장 - 아이러니화된 왕의 지혜”, 「구약논단」 35집 (2010년 3월), 119-140을 참조.

35) J. L. Crenshaw, “The Shadow of Death in Qoheleth,” J. G. Gammie et al (eds.), Israelite Wisdom: Theological and literary Essays in Honor of Samuel Terrien, (Missoula u. a.: Scholars Press u. a., 1978), 206을 참고하라.

36) 2:21bβ도 참고하라.

 

삶에 대한 혐오감은 2장 18절에서 “나의 모든 노고”에 대한 혐오로 이어진다. 이 ‘노고’는 “해 아래서”란 표현을 통해서 역시 이전의 모든 진술과 연결되는데, 특히 1장 3절의 ‘유익’에 대한 질문에 깊이 관련이 된다. ‘나의 모든 노고에 대한 혐오’의 이유는 2장 18b, 19, 21, 22절에 잘 제시된다. 즉 나의 뒤에 있게 될 사람 혹은 수고하지 않은 사람에게 그것(나의 노고로 이룬 것)이 남겨지게 될 것인데, 그가 지혜자일지 또는 우매자일지 누가 알겠느냐는 것이다. 전도서에 종종 등장 하는 19절의 [:dEAy ymi(미 요데아/누가 알겠느냐)로 시작되는 수사적 의문37)과 함께 22절의 “인간에게 남게 될 것”에 대한 질문은 인간의 한계와 실망감을 잘 드러낸 다.

37) 3:21; 6:12; 8:1, 그리고 약간은 다른 맥락이나 8:4의 rm;ayO ymi(미 요마르/누가 말하겠는가)도 함께 고려할 수 있다.

23절의 평생의 수고에 고통과 슬픔만이 있고 심지어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 하는 인생의 모습은 두 번째 상상 실험의 결론적 선언인 aWh lb,h, hz<-~G:(감-제 헤 벨 후/이것 역시도 헛되다)의 배경적 그림으로 손색이 없다.

5)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새로운 가능성

마지막 ‘기쁨’에 대한 실험에는 지금까지의 지배적 사상이었던 ‘헛됨’, ‘바람 을 잡으려는 것’, ‘악/괴로움’에 대한 반전이 주어진다. 24절의 ~d"a'B' bAj(토브 바아담/사람에게 있어서 좋은)과 Alm'[]B; bAj(토브 바아말로/그의 하는 일에 있어 서 좋은)는 확실히 1장 13b절과 2장 17, 21b절에 대조되는 개념이다. 둘째는 “사람 에게 그가 먹고 마시고 그의 영혼으로 자신의 노고 가운데 좋은 것을 보게 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2:24a)에 bAj(토브/좋은)가 두 번 사용되었고, ayhi(히/ 그것)이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이다. 죽음의 그림자 아래에서 절망하 는 인간에게 열려질 새로운 가능성은 바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서 시작된 다. 이러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은 2장 26abαβ절에도 잘 표현되어 있다. 인간이 획득하고자 했던 그 대상들이었던 ‘지혜’와 ‘지식’, 그리고 ‘기쁨’(26a절)뿐만 아 니라 ‘모으고 쌓고자 하는’ 모든 노력의 대가(26bαβ절)까지도 하나님이 기뻐하 시는 사람에게 주신다. 여기의 aj,Axl;(라호테/죄인에게)와 ~yhil{a/h' ynEp.li bAjl.(러 토브 리프네 하엘로힘/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은 어떤 종교적인 죄를 범한 자와 선을 행한 자로 보기보다는 각각 ‘왕으로서의 전도자’ 같이 인간 자신의 노고로

무엇을 이루어 보려는 자와 하나님이 자신의 주권적인 선택으로 정한 자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38) 결국은 이 표현도 인간의 한계와 제한된 가능성에 대한 서 술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여전히 ‘왕의 트라베스티’의 맥락에 속해 있다고 할 수 있다. 25절의 수사적 질문은 이것을 입증한다. 25절은 지혜와 지식과 기쁨을 얻 기 위해 어느 누구 보다도 인간적인 모든 노력을 시도해 볼 수 있었던 가능성을 지닌 왕으로서의 전도자가 내린 결론으로서 24절의 의미를 강화해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39) 6) 삶을 강화하는 죽음 이제 우리는 마지막으로 3장을 살펴보려고 한다. 3장 1-8절의 ‘때의 노래’는 1 절의 표제어적 선언 이후 각각 대조되는 두 때로 짝지어진 열네 가지의 때의 쌍 을 소개한다. 이것은 거기에 언급된 바와 같이 하늘 아래에서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과 때를 의미한다.40) 하늘 아래의 이 모든 일에는 !m'z>(쳐만/기한) 과 t[e(에트/때)가 있다. ‘때의 노래’에 실제적으로 쓰이는 t[e(에트/때)외에 ‘때’ 를 의미하는 또 다른 단어인 !m'z>(쳐만/기한)이 언급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일반적 시간 개념으로서의 때를 나타내는 의미로 넓게 통용되는 t[e(에트/때)와는 달리 !m'z>(쳐만/기한)은 ‘고정된’ 혹은 ‘정해진’ 시간을 의미한다.41)

38) 그러므로 필자는 우리말 성경(개역 개정)의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로 수정할 것을 제안한다.

39) L. Schwienhorst-Schönberger, 윗글 (2004), 241: “Wenn schon der König zu der Einsicht gelangt, dass Glück nicht im Menschen selbst gründet, sondern aus der Hand Gottes stammt, um wie viel mehr muss dann jeder, der nicht so mächtig und so weise wie ein König ist, zu dieser Einsicht gelangen!” R. E. Murphy도 25절을 ‘왕의 트라베스티’의 맥락에 있음을 암시하는 마지막 단서로 보았다. 이에 관해 R. E. Murphy, Ecclesiastes (WBC 23A; Dallas: Nelson/Word Pub Group, 1992), 26을 참고하라.

40) 3:21; 6:12; 8:1, 그리고 약간은 다른 맥락이나 8:4의 rm;ayO ymi(미 요마르/누가 말하겠는가)도 함께 고려할 수 있다.

41) 대표적인 예로서 느헤미야 2:6bβ를 들 수 있는데, 이것은 후기 히브리어(느헤미야, 에스라)에 주로 사용되 는 아람어 차용어로서 막연한 때가 아닌, 시작과 끝이 있는, 정해진 기한을 의미한다. 이에 관해, G. A. Barton,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Book of Ecclesiastes (ICC; Edinburgh: T. & T. Clark, 1908/1971), 103 을 참고하라.

 

그러므로 하늘 아래 에서 펼쳐지는 인간의 모든 행위는 이러한 시간의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모든 행위들 중에서도 첫 번째로 등장하며 가장 중요한 때의 쌍으로 제시되는 것은 “출생과 죽음의 때”이다. ‘출생’과 ‘죽음’은 1장의 ‘한 세대의 옴과 한 세대의 감’을 연상시키며 인간의 유한함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42) 정해진 시간의 틀 속에 살아가는 인간이 “그의 노고를 통해 얻게 될 유익은 무 엇인가”라는 9절의 질문과 이것 역시 하나님이 사람에게 그것을 통해 고통당하 게 하신 장사라는 10절의 대답은 1장 3, 13b절과 문자적인 유사성을 통해 연결되 며 전도서의 ‘주제도입부’(1:1-3:22)의 틀을 형성한다.43) vm,V'h; tx;T; Alm'[]-lk'B. d'a'l !Art.YI-hm; 1:3 AB tAn[]l; ~d'a'h' ynEb.li ~yhil{a/ !t;n' [r !y:n>[i aWh ↓ ↓ 1:13b ↓ ↓ lme[' aWh rv,a]B; hf,A[h' !Art.YI-hm; 3:9 AB tAn[]l; ~d'a'h' ynEb.li ~yhil{a/ !t;n' rv,a] ! y'n>[ih'-ta, ytiyair' 3:10 이 틀 하에서 도입되는 전도서의 주제는 2장 24-26절을 제외하고는 대체적으 로 일치한다. ‘인간이 수고하는 그 수고의 유익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과 분명 한 대답인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고생하도록 주신 (악한) 장사’라는 것, 이 익을 남기지 못하므로 ‘악한 장사’라는 것이다. 그러나 3장 (10)11-15절은 위에서 본 ‘주제도입부’(1:1-3:22)의 틀에서 벗어나 는 듯한 그리고 다분히 2장 24-26절에 가까이 서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슈빈 호르스트-쉔베르거(L. Schwienhorst-Schöberger)는 3장 10-15절을 이러한 틀과 는 별도로 1인칭 단수 완료형(AK)인 세 개의 감각, 인식 동사(verba sentiendi et cogitandi)를 통해 다시 3개의 단락으로 구분하고 각 단락이 신학과 인간학, 그리 고 신학적 지평에서의 인간학을 제시한다고 보았다.44)

42) 이러한 연관성은 이 외에도 2:4,5의 ‘왕으로서의 전도자’의 상상적 실험에 언급된 [j'n:(나타/(무엇인가를) 심음)에서도 볼 수 있다. 즉 인간의 상상 가능한 모든 행위들에는 t[e(에트/때)로 표현된 정해진 규칙과 질 서가 있다.

43) 각주 6)과 L. Schwienhorst-Schönberger가 제시하는 전도서 1-3장의 ‘유익에 대한 질문 구조를 또한 참고 하라. L. Schwienhorst-Schönberger, 윗글 (2004), 248.

44) L. Schwienhorst-Schönberger, 윗글 (2004), 261-262를 보라.

3:10f: ytiyair"(라이티/“내가 보았다”) 창조의 문제: 신학 3:12f: yTi[.d:y"(야다티/“내가 알았다”) 인간의 행복의 문제: 인간학 3:14f: yTi[.d:y"(야다티/“내가 알았다”) 하나님의 행위의 완전하심과 인간 행위의 한계: 신학적 지평에서의 인간학 10절이 하나님의 창조신학을 말하는지 또는 인간학의 범주에 있는지에 대해서 는 모호함이 없지 않으나,45) 11절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제시하 고 있다. 이제까지 간접적으로 또는 함축적으로만 제시된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 와 질서들46)이 여기서 직접적이고 분명하게 언급된다.

45) Schwienhorst-Schönberger 자신도 3:10절과 연관지은 1:13b가 ‘왕으로서의 전도자’의 상상실험에서 인간 의 행위에 대한 첫 번째 상념(1:12-15)에 속하므로 거기서 단지 함축적인 의미에서만 창조신학을 말한다고 하였다. 이에 관해 L. Schwienhorst-Schönberger, 윗글 (2004), 192를 참고하라.

46) 영원한 땅과 만물의 법칙들(1:4b-8a), 인간에게 부과된 노고(1:13b; 3:10), 하나님의 절대성과 인간의 한계 (1:15),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으로 주시는 인간의 기쁨(2:24-26).

그것은,

1. ‘그(하나님)가 모든 것을 그(하나님)의 때에 맞추어 아름답게 만드셨다’는 것;

2. ‘그(하나님)가 그들(사람들)의 마음에 영원을 주셨다’는 것;

3. ‘단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파악하지 못하게 하셨다’는 것 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창세기 1장의 평가와 같이 확실히 아름답다. 그러나 이 아름다움은 인간에게 제한된 개념으로 적용된다.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의 마음에 부여된 영원의 개념도 유한한 인간에게 영원하신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 는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하지만, 그 개념은 동시에 인간이 그 틀 속에서 살아가 야할 시간 개념인 3장 2-8절의 t[e(에트/때)와는 차별되는, 인간에게는 초월적인 시간을 의미47)하므로, 결국 유한한 인간과 영원하신 하나님 간의 차이를 극명하 게 드러내 주는 역할만 할 뿐이다.

47) L. Schwienhorst-Schönberger, 윗글 (2004), 267-268을 참고하라.

그러므로 인간에게 주어진 ‘아름다움’과 ‘영 원’의 개념은 양면적 가치(ambivalence)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 꿰뚫어 볼 수 없음’은 창조로부터 인간에게 부여된 피할 수 없는 한계이다. 3장 12-13절은 위의 슈빈호르스트-쉔베르거의 단락 구분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인간의 행복에 대한 것이다. 2장 24절과 비교해 볼 때, 형식면에서 유사하고,48) 내용면에 있어서도 3장 12bα절에 x:Amf.li(리스모아흐/기뻐함)이 추가된 것과 2 장 24절의 ayhi ~yhil{a/h' dY:mi(미야드 하엘로힘 히/그것은 하나님의 손에서 나온 것) 이 ayhi ~yhil{a/ tT;m;(마타트 엘로힘 히/그것은 하나님의 선물)로 표현된 것, 즉 2장 26bγ절의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대해 헛되다는 평가가 사라졌다는 것 외에 는 큰 차이를 발견할 수가 없다.

48) 3:12f의 ...~g:w> ...-~ai yKi ... B. bAj !yae(에인 토브 버... 키 임-... 버감/~과 그리고 또한 ~함을 제외하고 ~보 다 나은 것이 없고)은 2:24의 ...yKi ...~G: ...B. bAj ...v, ...B. bAj-!yae(에인-토브 버... 쉐... 토브 버... 감.... 키.../~ 에 있어서 ~에게 (더) 좋은 것이 없고... ~이 좋으며, 이것 또한... 왜냐하면...)와 대체적으로 비슷한 비교 형식을 띄고 있다.

하나님의 선물은 사람이 살아가며 기뻐하며 좋 은 일을 행하는 것, 모든 사람이 먹고, 마시고, 그의 노고로부터 좋은 것을 보는 것이다. 여기서 ‘노고’는 3장 9절과 1장 3절의 질문에 직접적으로 연결되며, 동시 에 그 대답이 된다. ‘신학적 지평에서의 인간학’으로 제시되는 3장 14-15절에는 먼저 하나님의 행 하시는 모든 것의 영원하심이 제시되고, 그 행위에 무엇인가를 더하거나 뺄 수 없음(신학),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행하심은 그들(인간)이 그(하나님)를 두려워하 게 하려는 것(인간학)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15절은 하나님의 영원성에 대조 되는 인간의 한계를 1장 9-10절의 표현과 연관지으며 강조하고 있다. 3장 16-22절에는 새로운 사상이 도입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16b절은 악이 존 재하는 현실의 모습을 논하기 시작하는 4장, 특히 1-3절로 연결짓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매우 고통스러운 경험인 인간의 운명과 짐승의 운 명 사이에도 차이가 없음(3:19)은 2장 12-17절의 지혜자와 우매자의 운명이 죽음 에서 하나가 되듯, “둘 모두가 동일하게 죽게 되고”와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 감”을 통해 설명된다. 죽음 이후에 사람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땅 아 래로 가는지의 여부를 알 수 없음도 [:dEAy ymi(미 요데아/누가 알겠느냐)라는 독특 한 표현을 써서 반문(21절)하고 있다.

7)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카르페 디엠(Carpe diem)

전도서의 앞과 뒤의 틀 구조 하에서 교묘하게 어우러지고 있는 이 두 주제 사 이의 긴장감은 4장 이하에서도 동일하다. 전도자는 이제는 다분히 ‘해 아래 세 계’에서 펼쳐지는 삶의 모습들을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이 삶의 구체적인 예들은 여전히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의 삶의 모습이며, 그러므로 여전히 죽음에서 비롯되는 ‘모든 것의 헛됨’의 사상은 전도서 전체를 관통하며 흐르고 있다. 한편 5장 17-19절49)과 8장 15절, 그리고 9장 7-10절에 반복되어 강조되는 카르페 디엠 (carpe diem), 즉 기쁨과 즐김과 만족의 삶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그로부 터 주어지는 몫에 기반을 둔다. 창조로부터 설정된 영원하신 하나님과 영원하지 못한 인간의 관계성 속에서 의미를 갖는 이 하나님의 주권성은 둘 사이를 분명하 게 가르고 구분되게 하며, 인간에게 ‘결정적인 죽음’의 모티브와 더불어 하나님 께 대한 경외감을 갖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결론적으로 죽음은 하나님을 인간으 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분명하게 인식하게 만듦으로써 전도서의 서두와 말미 뿐 아니라 전도서 전체에서 핵심적인 두 사상인 메멘토 모리와 카르페 디엠을 연 결해 주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50)

49) 우리말 성경은 18-20절임.

50) 이에 관해 전도서 9장의 전체적인 구조와 맥락을 살펴보라. 차준희, "무덤에서 나온 지혜 : 전 9장의 주석 과 신학적 메시지", 「구약논단」 37집(2010년 9월), 196-214, 특히 214를 참조하라.

3. 나가는 말

전도서의 맨 바깥쪽의 틀을 이루는 모토(1:2과 12:8)와 한 겹 안쪽에 형성되어 있는 또 다른 틀인 두 개의 노래, 즉 ‘노화와 죽음의 노래’(11:9-12:7)와 ‘우주의 노래’(1:[3]4-11), 그리고 ‘왕의 트라베스티’(1:12-2:26)에서 인간의 행위와 지혜를 통해 기쁨을 얻으려는 시도는 ‘헛됨’ 혹은 ‘바람을 잡으려는 것’일 뿐이란 판단 의 근거는 인간이 이루어 놓은 것의 쇠락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자 신의 쇠락함에 있다.51)

51) F. Kutschera, 윗글, 370.

전도서를 감싸고 있는 틀에 서려 있는, 인간에게 결정적인 죽음의 그림자와 관련하여 제시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개념은 하나님의 절대적 인 주권과 영원하심이다. 특히 3장에서 명확하게 제시되는 하나님과 인간의 대비는 특히 ‘영원’의 개념에서 두드러진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인간 은 ‘영원에 대한 열망’을 가지나, 그것의 불가능함을 깨달음으로써 죽음에 대해 더욱 강화된 자각을 갖게 된다. 죽음 이외에 전도서의 다른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삶에 대한 기쁨’ 혹은 카르페 디엠(carpe diem)은 바로 이 자각에서 출발하는 것 이다.52) 인간의 능력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은 분명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이 고통 스러운 아픔조차도 인간에게 생명을 선사하시고, 그 가운데에 주어진 날들을 즐 기며 살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창조의 아름다움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53)

52) F. Kutschera, 윗글, 374.

53) R. Lux, 윗글, 85를 참고하라.

검색어: 죽음, 메멘토 모리, 카르페 디엠, 전도서, 왕의 트라베스티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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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Memento Mori, Carpe Diem! - Eine Untersuchung zum Tod als das Schlüsselwort zum Verständnis des Koheletbuches -

Cha-Yong Ku, Th.D Lecturer at Chongshin University Bonn University

Das Koheletbuch lässt zwei relevante Leitgedanken erkennen, nämlich memento mori sowie carpe diem, die anscheinend gegensätzlich stehen. Daher wird Kohelet allgemein als entweder ‘Künder der Nichtigkeit des Lebens’ oder ‘Künder der Lebensfreude’ betrachtet. In dieser Arbeit wird aber nach F. Kutschera versucht, die beiden Gedanken durch den Tod zusammenzubringen. Ferner wird das durch eine genauere Untersuchung des Textes untermauert. Das Koheletbuch wird zweifach gerahmt. Der äußere Rahmen besteht aus zwei Mottoversen (1:2; 12:8) von ‘Nichtigkeit von Allen’. Der innere Rahmen wird aus zwei Gedichten gebildet, die jeweils nach bzw. vor dem Motto eine eröffnende- u. schließende Stimmung macht.

Das Gedicht über den Kosmos (1:(3)4-11) stellt die Vergänglichkeit der Menschengeneration der Ewigkeit der immer bleibenden Erde gegenüber und bezieht sich daraus auf ‘memento mori’. Der Tod wird in dieser Stelle nicht explizit zur Wort gekommen, trotzdem wird die Nichtigkeit subtil aus dem Menschen definitiven Tod begründet. Beim Gedicht von Alter und Tod (11:9-12:7) wird der Tod dagegen bildhaft dargestellt und die Gegenüberstellung zwischen dem Verfall der Menschen und der Vitalität der anderen Geschöpfe ausgeprägt. Dabei wird die Unterschiedlichkeit zwischen den Menschen und seinem Schöpfer besonders in 12:7 eindeutig ausgedrückt. Der Mensch erkennt seine Begrenztheit durch den Tod. Alle seine Bemühungen nach Erfolg werden immer daran gescheitert. Aus diesem Grund kommt in der Königstravestie ein Hass auf das Leben zur Wort. Aber beim Koheletbuch dominiert keinesfalls solches Pessimismus. Der Aufruf zum tatkräftigen Handeln und zur Lebensfreude kommt als eine andere wichtige Gedanke dieses Buches schon in der Königstravestie vor. Überraschend haben die beiden Lebensverhältnisse ihre Ursprung gemeinsam im Tod. Der Tod lässt den Menschen nicht nur ihre Begrenztheit sondern auch die Souveränität Gottes erkennen, der den Menschen Leben und Lebensfreude schenkt. Das Leben im Angesicht des Todes heißt daher eine Art vom durch den Tod intensivierte Leben. Der Tod bringt auch die beiden Leitgedanken von memento mori und carpe diem im Koheletbuch subtil zusammen.

Key Words Tod Memento mori Carpe diem Kohelet/Prediger Salomo Königstravestie

■투고일: 2012년 1월 6일 ■심사일: 2012년 1월 28일 ■게제 확정일: 2012년 2월 2일

구약논단 제 18권 1호(통권 43집) 2012년 3월 31일

KCI_FI001650108.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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