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1. 서론
2. 일본의 한국철도 구상과 청일전쟁의 영향
3. 러일전쟁 이후 일본육군 중심의 한국철도계획
4. 결론
1. 서론
세계사적으로 철도는 전신, 증기선과 함께 19세기 이후 팽창 주의적 제국 체제를 형성하는 동맥이었다.
근대자본주의가 제국 주의를 만나 전지구적으로 확산하는 과정과 함께한 교통수단이 었다.
큰 규모의 자본 투자, 내륙과 해안을 연결하는 유통 혁신, 대량 고용 등 본격적인 산업자본주의는 철도와 함께 성장했다. 1)
하지만 전신과 증기선이 그러하듯이 철도 역시 단순히 경제적 인 면모만으로 세계사에 등장하지 않았다.
제국주의를 이끌어 간 교통기관이라는 점에서 철도가 가진 군사적 측면은 중요했 다.
특히 제국주의 국가가 식민지를 획득하고 그곳에서 이윤극 대화를 도모하는 과정에서 철도의 군사적 측면은 부각되었다. 가령 비용 대비 편익이 좋지 않더라도, 제국이 군사적으로 중요 하다고 판단하면 철도가 부설되었다.
프랑스가 중국침략의 교두 보를 마련하고자 부설했던 윈난철도나, 독일이 탄자니아에서 일 어난 독립운동인 마지마지 전쟁을 진압하기 위해 다르에스살람 (Dar es Salaam)-키고마(Kigoma) 간 철도 건설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2)
1) 에밀리 S. 로젠버그 편, 조행복·이순호 역, 하버드 C.H. 베크 세계사 5, 1870~ 1945 하나로 연결되는 세계, 민음사, 2018, 409~412쪽.
2) 윈난철도에 관해서는 정재현, 「윈난 철도의 건설과 프랑스 제국주의」, 고려대학교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10; Jean-François Rousseau, “An imperial railway failure: the Indochina–Yunnan railway, 1898–1941”, The Journal of Transport History 35, no. 1, 2014. 독일의 탄자니아 철도 건설은 Charis Enns·Brock Bersaglio, “On the Coloniality ofNewMega-Infrastructure Projects in East Africa”, Antipode 52, no 1, 2020.
그런데 제국주의 침략과 철도교통을 관련지어 생각할 때 다른 제국주의 국가에 비해 일본의 식민지 철도정책에서 보이는 특징 이 있다.
윈난철도를 제외하고 다른 제국주의 국가가 군사적 목 적을 우선순위에 두고 건설한 철도들은 대부분 국경 충돌이나, 내부 반란 진압이 목표였다.3)
이와 달리 일본이 한반도에 구축 한 철도망은 군사적 목표를 최우선에 둔 것 외에도, 그 군사적 목표가 외부 침략 즉, 식민지 확대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는 특 징을 갖고 있다.
이는 이 글에서 다룰 병참선으로서의 한반도 철도가 가진 특성을 집약적으로 설명해준다.
이를 이해하려면 20세기 초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이 목표로 했던 지향점부터 고민할 필요가 있다.
일본이 제국주의 침략을 본격화했던 20세기 초는 이미 전 지구가 제국들에 의해 남김없 이 분할된 상태로 주권을 가진 국가는 10개에 미치지 못했다. 4)
오히려 유럽의 제국들이 끊임없이 진행했던 식민지 확대가 19세 기 말, 동북아시아에 이르러 현상 유지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식 민지 확대가 식민본국의 경제적 이득에 도움을 주고 있는지, 식민지배의 비용보다 편익이 더 큰지에 대해 회의론이 커졌고,5) 전통적 의미의 제국이었던 중국을 특정 국가가 독점적으로 식민 지화하기 어려웠다는 점이 중첩되었기 때문이다.
3) 독일의 탄자니아 철도 건설 사례가 대표적인 내부 반란 진압용이고, 영국이 러시아 의 남하에 대응하고자 아프가니스탄 국경까지 건설한 철도 역시 국경 충돌을 방어 할 목적을 우선 고려한 철도 건설이었다(Ganeswar Nayak, “The Railways in Colonial South Asia”, The Railways in Colonial South Asia economy, ecology and culture, New York: Routledge, 3, 2021, pp. 21~22).
4) 전재성, 주권과 국제정치,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9, 27~28쪽.
5) 도널드 서순·유강은 역, 불안한 승리, 뿌리와 이파리, 2020, 696~705쪽.
이러한 상황에서 19세기의 패권국가였던 영국은 직접 지배가 어려워진 동북아시아를 경쟁자들, 특히 러시아가 독점하지 못하 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 방안으로 택한 방식이 영일동맹에 기초한 지역 내 제국주의 국가 일본의 육성이었다. 6)
일본으로서 는 서구 제국주의 국가가 직접 지배를 포기한 지역이 눈앞에 놓 여있었다.
게다가 패권국의 승인을 얻었기에 군비 확장의 명분 을 얻었고, 애초에 군부 세력의 성장이 근대화의 동력이었기에 대외 침략은 손쉬운 선택지였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일제가 구축한 한반도 철도망의 군사적 성격은 영일동맹으로 나아가던 청일·러일전쟁 시기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침략을 현실화한 최초의 전쟁이었고, 향후 만주·중국 침략과 러시아(소련)와의 경쟁으로 이어지는 일본의 대륙 침략에서 한반도의 역할을 확인하는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청일·러일전쟁에서의 병참선 운영 경험이 실제 일제의 한반도 철도 부설 및 운영 어떻게 직 간접적 관련성을 가지는가에 대해 살펴본 연구는 부족한 편이다.
선행연구에서는 시베리아횡단철도 건설에 대한 위기감으로 일본 이 한반도 철도부설권 장악에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점, 육군 세 력이 중심이 되어 군사적 목적에 부합하는 철도망 부설이 이루 어졌다는 점 등을 정치·외교사적 맥락에서 분석한 바 있다. 7)
하지만 실제 청일·러일전쟁과 직접적으로 연계해 한반도 철도 망 구축의 방향성, 우선순위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전쟁 당시의 병참선 운영을 분석한 연구가 선행될 필요가 있었다.
특히 일본군 이 최초로 해외에서 병참선을 구축했던 청일전쟁의 양상 분석이 중요했는데, 인천-용산 간 병참선 구축에 관한 연구8)가 제출된 이래 최근 청일전쟁 시기 일본육군의 한반도 병참 운영에 관한 구체적 연구가 이뤄졌다.
6) 박상현, 「식민주의와 동아시아 식민국가의 정치경제」, 사회와 역사 111, 2016, 31~32쪽.
7) 北岡伸一, 日本陸軍と大陸政策 1906-1918, 東京大學出版會, 1978; 小林道彦, 日本の大陸政策 1895-1914 : 桂太郞と後藤新平, 南窓社, 1996; 정재정, 일제침 략과 한국철도(1892~1945), 서울대학교출판부, 1999; 이노우에 유이치·석화정, 박양신 역, 동아시아 철도 국제관계사, 지식산업사, 2005.
8) 遠藤芳信, 「動員実施と1894年兵站体制構築」, 近代日本の戦争計画の成立, 桜井書 店, 2015.
이 연구를 통해 그동안 개설적으로만 이해되었던, 인천-용산, 부산-한성, 원산-한성 간 병참선 구축과 평양-진남포 간 경편철도 부설 등의 구체상이 밝혀졌다.9)
9) 魏晨光, 근대 일본 병참체제의 성립과 운영, 고려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23.
본고도 이 연구가 이뤄졌기 때문에 완성될 수 있었다는 점을 밝혀둔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과 선행연구의 분석을 바탕으로 본고에서 는 청일·러일전쟁을 전후 일본이 한반도 철도에 관해 단행한 정책적 조치들을 분석하고, 그 조치들이 전쟁을 전후로 겪은 변 화들에 집중한다.
나아가 실제 철도가 전쟁에서 병참선으로 활 용되지 못했다는 점에 주목해 러일전쟁 이후 일본육군이 만들었 던 한반도 철도 운영 방안과 실제로 이루어진 결과가 보여주는 양면성을 분석하고자 한다.
2. 일본의 한국철도 구상과 청일전쟁의 영향
가. 일본의 대러시아 위협 인식과 경부철도 선로 조사
메이지 유신 이후 제국주의 국가로 나아가고 있던 일본이 한 반도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벌였던 첫 번째 전쟁부터 그 배경 에 철도가 자리하고 있었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10)
10) 하라 아키라(原朗)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라는 명칭이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하 기 위해 벌인 전쟁이라는 점을 사라지게 만든다고 비판하며 각기 ‘제1차 조선전 쟁’, ‘제2차 조선전쟁’으로 부를 것을 제안했다(하라 아키라·김연옥 역, 청일· 러일전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 살림, 2015, 38~41쪽).
러시아 의 시베리아횡단철도 건설은 일본뿐 아니라 영국 등 동아시아 패권을 노렸던 제국주의 국가들의 위기감을 고조시켰다.
러시아는 1877~78년 러시아-튀르크 전쟁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1878년 베를린회의에서 영국 등 서유럽 제국들에 의해 발칸 반도, 오스 만 제국으로의 남진에 실패한다. 11)
이를 계기로 러시아는 방향을 바꿔 동아시아로의 진출을 도모했다.
다만, 시베리아를 넘어 우 랄산맥 동쪽으로 군사적 행동을 취하기 위해서는 유라시아 대륙 을 횡단하는 철도 건설이 필요했다.
전쟁과 제국주의 국가 간 대립의 결과였다. 당시 제해권 장악을 통해 세계자본주의의 패권국가로 군림했 던 영국으로서는 러시아만이 해상이 아닌 육로라는 지리적 차별 성을 매개로 영국 패권에 도전할 수 있었기에 민감하게 반응했 다.
특히 시베리아횡단철도 개통은 이러한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조치였다.
러시아의 육군을 동아시아로 단시일 안에 대량으로 동원할 수 있게 되는 데 반해, 영국의 해군력은 이에 대한 억제 력을 발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시베리아횡단철도 건 설은 영국·러시아 간 아프가니스탄 문제나 아시아의 기존 권익 문제까지 균열을 가할 수 있었다. 12)
이에 대응해 영국은 대외정책을 근본적으로 변경하였다.
핵심 은 영국 외교의 전통이었던 “영광스러운 고립”정책의 포기와 “동 맹정책”의 추진이었다.
시베리아횡단철도 건설에 자금을 제공한 프랑스와 러시아의 군사 협약(1892.08.18.)과 동맹조약 체결 (1894)도 영국의 대외정책 재검토를 촉구하게 했다. 13)
영국은 러프동맹과 시베리아횡단철도 건설에 대응할 동맹체제 구축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14)
11) 김현수, 「동방문제와 영국정치 1876~1878」, 사학지 38, 2006, 185~193쪽; 강 윤희, 「아르메니아 문제와 유럽 강대국 외교」, 러시아연구 28-2, 2018, 15~32쪽.
12) 야마무로 신이치·정재정 역, 러일전쟁의 세기, 2010, 64~66쪽.
13) 전홍찬, 「프랑스-러시아동맹 연구」, 국제정치연구 25-1, 2022, 5~11쪽.
14) 최덕규, 「청일전쟁과 고승호(高陞號)사건의 국제법(1894-1904)」, 군사 113, 2019, 99~100쪽.
러시아의 동아시아 진출은 인접 국가에도 위협으로 다가왔다.
특히 대륙침략을 통해 제국주의 국가로 발돋움하고자 했던 일본 이 향후 국제정치, 군사전략을 재편 즉, 전쟁을 도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1885년 유라시아 대륙을 관통하는 약 7,400㎞의 시베리 아횡단철도 부설 계획이 발표되고 3년 후인 1888년 1월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가 작성한 「군사의견서」에 이미 일본이 느 끼는 위협이 반영되어 있었다. 15)
야마가타는 「군사의견서」에서 영국·러시아 간 대립이 커지며 분쟁의 씨앗이 많아지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충돌 가능성이 높은 지역으로 아프가니스탄과 조선을 꼽았다.
그런데도 아직 양국 간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두 국가가 동양에서 전쟁을 치르 기 위한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인데, 그 준비가 바로 시베리 아횡단철도 건설이라고 보았다.
시베리아횡단철도가 완공되어 블 라디보스토크항까지 연결되면 병력 수송이 원활해지고, 부동항을 찾아 조선을 노리는 계기가 될 것이라 내다보면서, 러시아가 조 선 침략을 개시하는 날은 “동양에 일대 파란을 일으키는 날”이라 고 경계했다. 16)
물론 이 철도에 관해 무역, 공업 진흥의 관점에서 낙관론을 펼치는 경우도 있었다. 17)
15) 하라다 게이이치·최석완 역, 청일 러일 전쟁, 어문학사, 2011, 46~47쪽.
16) 大山梓 編, 「軍事意見書」(1888.01), 山縣有朋意見書, 原書房, 1966, 177~180쪽.
17) 하라다 게이이치, 앞의 책, 2011, 50~51쪽; 최덕규, 「동청철도와 러시아의 만주인 식(1894-1904)」, 만주연구 36, 2023, 42~44쪽.
그러나 일본 정부 내 여론은 강경론이 우세했다.
앞서 언급한 야마가타 아리토모뿐 아니라 1889년 12월 제1차 야마가타 내각의 외무대신으로 취임한 아오키 슈조(青木周 藏)도 러시아가 극동에서 부동항을 구하려 함에 따라 섬나라인 일본의 세력범위를 축소하고 외교활동을 견제함으로써 일본이 위기에 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시베리아횡단철도 건설의 군사적 중요성에 대항하는 군비 확장 노선을 지지했 다. 18)
배경에는 영국의 대러 견제 정책과 동맹체제 필요성 인식 이 존재했고, 반러 공동전선 동맹으로 나아갈 가능성에 양국이 호응해 가기 시작했다.
나아가 1890년 12월 6일 야마가타 아리토모 총리가 제1회 제국의회 시정 방침 연설에서 1889년 6월 오스트리아 빈대학 정치 경제학 교수였던 로렌츠 폰 슈타인에게서 배운 ‘주권선’과 ‘이익 선’ 개념을 사용해 ‘이익선’까지 보호하기 위한 군비 확장을 주장 하면서 청일전쟁의 단초는 만들어졌다. 19)
1891년 5월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이 시작되자, 일본은 이를 위협으로 인식했다.
요미우리 신문의 기자로 청일·러일전쟁기 국수주의, 국민주의 경 향의 대외경운동(對外硬運動) 20)에 앞장섰던 언론인 나카이 기타 로(中井喜太郎)도 1892년 조선특파원으로 파견된 후 작성한 논 설에서 시베리아횡단철도의 위협을 강조했다.21)
18) 하라다 게이이치, 앞의 책, 2011, 49~50쪽; 최덕규, 앞의 논문, 2019, 101~102쪽..
19) 하라다 게이이치, 위의 책, 2011, 78~79쪽; 가토 요코·윤현명, 이승혁 역, 그럼 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서해문집, 2018, 106~112쪽.
20) 대외경운동에 관해서는 酒田正敏, 近代日本における對外硬運動の研究, 東京大 學出版會, 1978.
21) 나카이 기타로에 관해서는 정애영, 「‘병합사안’을 통해 본 한국병한 인식」, 한일 관계사연구 27, 2007; 「러일전쟁 직후 일본의 간도조사와 지역구상」, 일본역사 연구 28, 2008.
그는 시베리아횡단철도가 현재 계획대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완성되더라도 공사를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즉, 블라디 보스토크는 빙결항(氷結港)이므로, 약 3개월간 선박이 들어올 수 없는데 러시아가 철도를 부설하면서 장기간 사용할 수 없는 항 구에 만족할 리가 없다는 설명이었다.
분명히 황해를 끼고 있는 항구나 함경도까지 철도를 연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따라서 일본은 반드시 부산에서 경성을 거쳐 인천으로 이어지는 철도를 부설해야 하고, 일본의 무역항도 하코다테(函館)나 마이즈루(舞 鶴)보다 한반도와 인접한 시모노세키(下関)나 모지(門司)에 집중 할 것을 주장했다. 22)
위기감이 고조되자 일본 정부는 한반도를 거쳐 만주까지 군사 수송을 원활히 하기 위한 종관철도 부설을 추진했다.23)
시베리 아횡단철도 건설에 대응한다는 명목이었다.
경부선뿐 아니라 강제병합 이전 한반도에 놓인 철도망은 대부분 청일·러일전쟁을 계기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군사적 목적이 농후했다.
물론 철도망을 군사적, 경제적, 정치적 노선 등으로 나누는 방 식은 타당한 해석이 아니다.
일단 놓이면 군사·경제는 물론 사 회·문화적으로도 활용되는 것이 철도이기 때문이다.
다만 비용 이 적게 드는 도로만으로 유지해도 됨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건 설비를 투자해 철도를 건설하는 지역과 노선이 있다면 지배권력 이 그곳을 중시하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1890~1910년까지 일본이 한반도의 특정 지역에 철도망을 급설해야 할 만큼 중요 했던 목적은 전쟁을 위한 군사적 목적뿐이었다. 첫 번째 조치는 철도선로 조사였다.
러시아가 시베리아횡단철 도 건설에 착수한 다음 해인 1892년 4월, 부산 주재 총영사 무로타 요시아야(室田義文)가 귀임하자 일본군 참모차장이었던 가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는 그에게 서울~부산 간 철도 부설을 위한 선로 측량 조사를 의뢰하였다.
가와카미 소로쿠는 무로타 요시아야에게 “일본은 장래 필연적으로 청나라와 전쟁을 해야 할 운명인데, 반드시 그 전에 조선에 철도를 부설해야 한다”고 말하며 조사를 의뢰하였다. 24)
22) 中井喜太郞, 「サイベリア大鉄道落成後の朝鮮と日本」, 讀賣新聞, 1892.09.26.
23) 경부철도 부설권 획득을 위한 일본 등 열강과 한국 정부의 대립에 대해서는 정재정, 일제침략과 한국철도(1892~1945), 서울대학교출판부, 1999, 31~50쪽.
24) 室田義文翁物語編纂委員 編, 室田義文翁譚, 常陽明治記念會, 1939, 183쪽.
무로타는 같은 해 10월에 측량을 마쳤다. 25)
25) 이노우에 유이치, 앞의 책, 2005, 99~100쪽.
<그림 1> : 생략 첨부 논문파일 참조
조사 결과를 보면 종래 경성-부산 간 교통망 중 서울(남대 문)-용인-죽산-청주-문의-상주-대구-밀양-삼랑진-부산진 노 선에 36개 역을 설치할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 26)
근간이 되었다 고 하는 종래 경성-부산 간 교통망은 3개 노선이었는데, 경상북도 동부 영주에서 죽령을 거쳐 충청북도 단양 부근으로 나아가 서울에 도달하는 동로(東路), 경상북도 김천에서 추풍령을 거쳐 충청북도 영동으로 나가 서울에 도달하는 서로(西路), 두 노선 사이에 경상북도 문경에서 조령 즉, 문경새재를 넘어 충청북도 괴산을 거쳐 서울로 향하는 중로(中路)가 그것이었다.
결국 소백산맥을 어떻게 넘어갈 것인지가 관건이었는데, 1892년 일본군이 의뢰한 선로 조사에서는 서로와 중로 사이인 문의와 상주 구간을 택했다.
보고서에도 기존 교통망 중 중로는 상주에서 북상해 함창, 문경을 거쳐 조령을 향하는데, 본 조사는 상주 에서 서쪽으로 나아가 보은, 문의로 나아가는 노선을 조사했다 고 밝혔다. 27)
이유는 상주-문경-충주에 이르는 구간에 넘어야 했던 조령의 험준함이었다. 28)
26) 정재정, 앞의 책, 1999, 51쪽.
27) 室田義文 → 陸奥宗光, 「自釜山至京城鐵道線路踏査報告書」, 京釜鐵道敷設一件附 京釜鐵道線路保護ノ爲メ巡査常派ノ件·京釜鐵道線路ニ沿ヒ我利權扶殖計畫ノ件第 一卷(外務省外交史料館 B04010886900), 1892.11.16.
28) 朝鮮總督府 鐵道局, 朝鮮鐵道史, 朝鮮總督府 鐵道局, 1915, 94~96쪽
이에 따라 보고서는 기존 교통망 중 중로에 해당하는 구간으로 올라가다가 상주에서 서쪽의 새로 운 노선을 채택하기로 결정했다.
나. 청일전쟁기 일본의 한반도 병참선 운영
무로타 요시아야는 측량을 마친 지도를 참모본부, 외무성에 제출했다.
그의 전기를 보면 이 지도가 청일전쟁에서 위력을 발휘해 일본군의 행동에 큰 편의를 제공했다고 서술했다. 29)
이 서술을 그대로 믿는다면,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위 보고서가 채택한 노선으로 병참선을 구축하고, 군사수송이 이루어졌어야 한다.
하 지만 부산-서울 간 병참선 설치와 일본군의 행군 양상은 보고서 와 차이를 보였다.
우선 청일전쟁 당시 부산-서울 간 병참선이 설치되어 일본 군의 행군이 이뤄졌던 1894년 7월까지 경부철도는 건설되지 못 했다.
따라서 도로망을 토대로 병참선이 설치되었고, 병사들은 행군을 통해 이동하였다.
물론 철도가 건설되지 않았더라도, 무로타가 제출한 노선대로 일본군의 행군이 이뤄졌다면 그의 보 고서가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청일전쟁 당 시 설치된 부산-서울 간 병참선은 위 보고서가 채택한 노선과 달랐다.
청일전쟁 당시 부산-서울 간의 육로 병참선은 부산-인천 간 해로를 이용할 수 없을 때의 ‘대안’이었다.
풍도해전에서 일본 해군이 제해권을 완벽하게 장악하지 못했기에 대본영은 해상수 송 리스크를 감수할 수 없었다.
따라서 대본영은 거리가 길고, 이른바 신작로도 깔리지 않은 전통적인 도로망뿐이었으나 부산서울 간 육로 병참선을 설치하는 ‘대안’을 추진하였다.
그런데 병참총감이 지정한 병참선로는 부산-대구-상주-문경 -충주를 거쳐 서울로 향하는 노선이었다.
앞서 무로타의 보고서의 기존 교통망 중 중로에 해당하고, 조선시대 간선도로 중 영 남대로를 그대로 답습하는 노선이었다.30)
29) 室田義文翁物語編纂委員 編, 室田義文翁譚, 常陽明治記念會, 1939, 187쪽.
30) 魏晨光, 근대 일본 병참체제의 성립과 운영, 고려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23, 146~147쪽.
조령 즉, 문경새재를 넘어야 해 험준하다고 평가한 구간을 포함하고 있었다.
영남대로는 조선시대에 경상도에서 충청도를 거쳐 경기 남동부로 올라가 한양까지 이어지는 가장 핵심적인 도로였다. 31)
그렇기에 상 대적으로 다른 교통로보다 도로 상태가 좋다고 판단했고, 낙동 강과 한강의 수운을 최대한 이용할 수 있는 곳이라는 판단이 병 참로 선택에 영향을 끼쳤다. 32)
또한 제1전신가설지대가 북쪽으로 가설했던 일본군용 전신선 루트와 일치하는 노선이었다.
참모본부가 부산에서 서울로 행군하는 부대에 배포했던 지도도 1892년 무로타가 제출한 보고서가 아닌 1894년 간행한 <부산항 부터 경성에 이르는 동로지>와 <부산항부터 경성에 이르는 서로 지> 그리고 <부산항부터 경성 중로에 이르는 연도지>였다. 33)
1892년 무로타가 제출한 보고서는 포함되지 않았던 것 같다.
철 도가 놓이지 않은 상황에서는 기존 도로망을 택하는 것이 비록 문경새재가 험하지만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군은 무더위까지 겹쳐 군수품이 담긴 짐수레는 물론 마필 의 통행도 어렵고, 고용한 조선인 인부들의 도망과 식량 부족까 지 겪으며 행군을 이어갔다.
그러한 와중에 조령을 넘는데 더욱 어려움을 겪었다.
문경새재에서 암석들 사이를 빠져나오며 행군 해야 했는데, 경사가 심한 바위를 넘는 도중에 말이 쓰러지는 사고까지 발생했다.
결국 행군하던 일본군 제5사단장 일행은 근 처에 있던 전신가설지대에게 도로 수선을 지시하여 후발 부대의 안전을 꾀해야 했다.
이처럼 중로를 따라 만든 병참선을 행군하 기 어렵다는 보고가 이어지자, 지휘관이었던 제5사단장은 보병 1개 대대만 중로를 이용하고 나머지 병력은 원산에 상륙시키겠 다고 대본영에 보고할 정도였다.
하지만 대본영은 서울로 빠르게 이동해야 하기에 이를 불허하였다. 34)
31) 朴相佾, 「小白山脈地域의 交通路와 遺蹟」, 국사관논총 16, 1990, 161~163쪽.
32) 조재곤, 조선인들의 청일전쟁, 푸른역사, 2024, 185~186쪽.
33) 조재곤, 앞의 책, 2024, 167쪽.
34) 魏晨光, 앞의 책, 2023, 150~155쪽.
결과적으로 가와카미 소로쿠 참모차장의 요청으로 무로타 요 시아야가 주도해 작성한 1892년 부산-서울 간 철도선로 측량 보고서는 2년 뒤 청일전쟁의 병참선 구축에 활용되지 못했다.
하지만 청일전쟁에서의 병참선 운용은 일본 육군이 한반도에 군 용철도 부설 필요성을 절감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후일 최초 의 조선총독이자 청일전쟁 직전에 운수통신장관에 임명되어 병 참을 책임졌던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이후 한반도와 만 주에 군사적 목적에 의한 철도 건설에 매우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35)
35) 이형식, 「조슈파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와 조선통치」, 역사와 담론 91, 2019, 29~30쪽. 이에 더해 데라우치는 1893년 3월 22일부터 철도회 의원으로 참 여했고, 의화단사건 이후에 철도회 의장에 임명되는 등 철도교통의 군사적 운영과 깊은 관련을 맺었다. 이후 대륙철도의 광궤식(표준궤를 의미함) 운영, 경부철도 속성을 위한 보조금 교부, 임시군용철도감부 편성, 압록강 철교 완공에도 영향을 끼 쳤다(黑田甲子郞 編纂, 元師寺內伯爵傳, 元帥寺內伯爵傳記編纂所, 1920, 424~427쪽).
이후 한반도 철도와 관련된 일본 육군의 대응은 전쟁 중에 수 행한 조치와 전쟁 이후의 정책으로 나눠서 살펴볼 수 있다.
전 쟁 중 수행한 조치는 병참선 운영을 위한 경편철도 부설과 경부 철도 노선의 제2차 답사였다.
먼저 경편철도 부설 필요성은 일 본군이 평양까지 북상한 후에도 인천에서 용산까지 병참선을 계 속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이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했다.
경 편철도 부설 필요성은 고다마 겐타로(児兒玉源太郎) 육군차관의 지시로 다케우치 세이사쿠(竹內正策) 혼성제9여단 병참감이 용산 -인천 간 도로 상황을 보고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1894년 9월 10일 작성된 다케우치 보고서는 경인 구간이 땔감과 식수가 매 우 부족하고 양화진의 나루터는 홍수가 나면 길이 물에 잠긴다 고 지적하며 “더코빌을 부설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강조했 다.
‘더코빌’은 경편철도의 모델 중 하나로 궤간이 일본의 협궤 (1,067㎜)의 절반에 불과한 5~600㎜였다.
육군성은 곧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11일에 고다마 차관은 다케우치에게 더코빌 경편철도를 경인 구간에 부설할 예정이니 도 로를 정찰한 후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15일에 정찰이 끝났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고다마는 곧바로 내무성, 체신성, 외무성 등 관 련 부처에 통치하고 협조를 요청했다.
고다마는 무쓰 무네미스 (陸奧宗光) 외무대신에게 경편철도를 놓는 이유를 경인 간 병참 선을 유지할 필요가 있고, 겨울에 한강이 결빙되면 군수품을 오로지 육로 운반에 의지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36)
무쓰 외무대신도 이를 수용해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재경성 특명 전권공사에게 경편철도 부설에 관해 조선 정부가 충분한 편의를 제공하도록 조치하라고 지시했다. 37)
그러나 평양전투가 끝나고 중요 전장이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시급한 병참선이 인천-용산 구간에서 진남포-평양 구간으로 변 경되었다.
그러자 병참총감을 겸임했던 가와카미 소로쿠는 10월 7일 고다마 차관에게 결빙기에도 급양을 유지하기 위해 진남포 에서 평양까지 경편철도 부설이 필요하다고 의견을 제시했다.
이 의견이 받아들여져 인천-용산 간 경편철도 건설을 위해 확보 한 자재를 평양-진남포 간 경편철도 건설에 사용하는 것으로 계 획을 변경했다.38)
조선에도 경편철도 부설 구간 변경을 알리도 록 했다. 39)
36) 魏晨光, 위의 책, 2023, 198~200쪽.
37) 陸奧宗光 → 大鳥圭介, 「機密送第六二號 京仁間 軍需品輸送 兵站線路 확보를 위 한 교섭 件」, 駐韓日本公使館記錄 2, 1894.09.17.
38) 김경남, 「1894~1910년 진남포 일본군병참기지 건설과 도시 형성의 특성」, 한일 관계사연구 71, 2021, 335~336쪽; 魏晨光, 앞의 책, 2023, 201~202쪽.
39) 陸奧宗光 → 大鳥圭介, 「南浦·馬馳浦와 平壤 간 도고빌 철도부설에 관한 조회」, 駐韓日本公使館記錄 2, 1894.10.10.
하지만 12월 중순까지 재료가 운송되지 않았고, 땅이 얼어붙 어서 공사가 중단되는 등 완공이 지연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일 본 육군은 서해안을 이용한 해상 운송도 5월까지 이용이 어렵 고, 짐꾼을 쓰는 것보다 모든 면에서 유리하기에 공사를 계속해 야 한다고 보았다.
그들은 전장이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진남포 에서 평양 그리고 의주까지 연결되는 병참선을 중시하고 있었 다.
일회성의 병참선을 위해 철도를 부설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결국 일본 육군은 1895년 2월 2일 진남포-평양 간 경편철도를 완공하였다.
물론 이 시기 일본의 주력군은 대부분 의주를 넘어 만주로 진입한 상황이었기에 완공된 경편철도가 실제로 활용되 지는 않았고, 예비 병참선으로만 유지되었다. 40)
하지만 이후 평 양-진남포 간 철도 부설이 빠르게 이뤄질 수 있었던 계기가 될 수 있었다.
평양-진남포 간 경편철도 부설이 전쟁 상황에서의 단기적 목 표를 위한 조치였다면, 경부철도 부설을 위해 두 번째로 진행한 선로 측량 답사는 장기적 목표를 위한 조치였다.
일본은 청일전 쟁이 진행 중이었던 1894년 11월 두 번째 경부철도 선로 측량 조사를 실시했다. 41)
주도한 세력은 육군성이었다.
조사도 ‘軍路 調査’라고 지칭할 만큼 군사적 목적에 부합하는 노선을 찾는 것 이 목적이었고, 전쟁 중에 주요 병참선으로 기능했던 인천-서울 구간 조사도 병행했다.42)
40) 魏晨光, 앞의 책, 2023, 202~203쪽.
41) 정재정, 앞의 책, 1999, 51~52쪽.
42) 西鄕從道 → 井上馨, 「京城·仁川·釜山間의 철도부설을 위한 軍路調査의 件-軍 路 조사 관련」, 駐韓日本公使館記錄 3, 1894.11.01. 74 | 軍史 第133號(2024. 12.)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혼란 상황이라 답사는 순조롭지 못했다.
조사대를 호위하 던 부대가 습격을 당하기도 했고, 동학 세력이 컸던 전라도, 충청도는 답사를 진행할 수 없었다. 43)
물론 일본군이 전라도 지역 까지 답사를 계획했다는 점은 역설적으로 경부철도 구간 이외에 도 철도 부설을 위한 선로 조사를 계획하고 있었다는 점을 방증 하는 언급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선정된 경부철도 2차 답사노선은 부산에서 대구까지는 1차 답사노선과 같으나 대구에서 상주가 아닌 인동-김산(현재 김천)44)에서 추풍령을 넘어 영동, 청주로 올라가 서울에 다다르는 경로였다. 45)
청일전쟁에서 병참선을 기존의 영 남대로를 답습해 구축하며 겪었던 문제들로 인해 일본 육군은 가능한 지형이 험하지 않은 곳을 찾고자 했다.
특히 소백산맥을 어디서 넘어야 할 것인가를 1차 답사 당시 채택했던 상주-보은 구간보다 험하지 않은 곳으로 고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일본 육군은 상주에서 보은으로 넘어가는 구간도 문경새재보다는 완만하지만, 여전히 난공사가 많을 것으로 예상되어 새롭게 추풍령을 횡단하는 구간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46)
43) 井上馨, 「京城·仁川·釜山間의 철도부설을 위한 軍路調査의 件-踏査要員 護衛兵 靑山附近에서 東徒 遭遇 擊退報告」, 駐韓日本公使館記錄 3, 1894.11.27; 朝鮮 總督府 鐵道局, 朝鮮鐵道史. 第1卷 : 創始時代, 朝鮮總督府 鐵道局, 1937, 255쪽. 44) 김산군(金山郡)은 1914년에 진행된 행정구역 개편에서 개령군(開寧郡), 지례군(知 禮郡) 및 성주군 신곡면(薪谷面)과 함께 김천군에 통폐합된 행정구역이다(「府郡廢 合ニ關スル件」, 府郡廢合關係書類(국가기록원 CJA0002546), 1913.08, 617쪽; 「第二号調査書 面ノ名稱 名稱ノ由來」, 面廢合關係書類(국가기록원 CJA0002552), 1913.12, 859~861쪽). 20세기 초반 김천의 행정구역 개편에 대해서는 이대화, 「20세기 초반 지방제도 개편의 목적과 추진과정」, 숭실사학 23, 2009.
45) 朝鮮總督府 鐵道局, 앞의 책, 1915, 96쪽.
46) 채택한 본선에 대한 비교선으로 청주에서 조령을 넘어 문경으로 나와 상주, 선산, 인동을 거쳐 대구에 이르는 노선과, 부산에서 경주를 거쳐 문경에 달하는 노선도 답사했다(朝鮮總督府 鐵道局, 앞의 책, 1937, 255쪽).
군의 병참선 구축, 군사수송의 원활한 운영을 철도부설의 최우선 목표로 삼 았던 군부에게 노선을 선정하는 기준은 서울 나아가 만주까지 최대한 빠르고 안전하게 다다를 수 있느냐 뿐이었다.
실제로 채택된 경부철도 노선도 위의 2차 답사노선과 1900년 3월에 일본 육군이 재차 주도해 실시했던 4차 답사노선에 가까운 형태로 확 정되어 부설되었다. 47)
47) 정재정, 앞의 책, 1999, 55~58쪽.
3. 러일전쟁 이후 일본육군 중심의 한국철도계획
가. 철도정책의 전환과 러일전쟁
그렇다면 청일전쟁 이후 한반도 철도와 관련해 육군을 중심으 로 한 일본 정부는 정책적으로 어떻게 대응했을까?
이 부분은 단지 한반도 철도에만 국한되는 정책으로 한정할 수 없다.
일본 정부는 향후 이어질 전쟁에서 신속한 병참선 운영을 위해서는 일본에서 만주까지 하나의 연결망으로 유기적인 움직임을 보여 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해당 사안에 대한 조치로 크게 세 가지를 언급할 수 있는데 첫 번째는 철도부대의 창설이다.
대본영은 청일전쟁 기간에 한반도에서 인부와 우마의 도주로 인 한 병참 기능의 마비가 반복적으로 발생하자, 병참 운영을 안정 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해로나 수로가 아닌 육로 병참선을 견고 하게 유지하는 데 있다고 결론내렸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철 도가 중요하다는 점을 청일전쟁이라는 실전을 통해 확인했다.
일본 육군의 수뇌부는 전쟁 막바지부터 철도부대에 관련된 법 안 제정에 착수했고, 1895년 5월 「임시 철도대 근무령」, 「임시 경편철도대 근무령」이 완성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전쟁이 끝난 후 같은 해 9월과 10월에 일본 육군에 의해 작성된 「육군 군비 확장안」에는 철도부대 신설이 포함되었다.
그 결과 1896년 3월 일본 육군은 철도대대의 평시편제를 확정했다.
철도부대 상설의 이유로 일본 육군은 시간 절약, 인마 인부의 현지 조달 어려움, 교통과 연락의 확실성 확보 그리고 유럽 각국이 평시에도 철도 부대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었다.
나아가 이번 전쟁에서 그 필요성을 느껴 임시로 1개 철도대를 편성하려 했지만 강화조 약으로 포기했다고 언급하면서 기술 습득을 위해서라도 개전 이 전부터 충원, 소집, 집중 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48)
일본 육 군이 군사적 목적으로 철도를 이용하기 위한 첫 번째 조치였다.
두 번째 조치는 일본에서 실행된 철도 국유화였다.
주지하다 시피 1905년까지 일본은 사설철도 노선이 관설철도 노선을 크게 상회하고 있었다.
따라서 1906년 3월 공포된 「철도국유법」을 통 해 일거에 17개 사설철도회사가 국유화된 것은 큰 사건이었다.
그만큼 일본의 철도 관료, 군부, 재계의 의견이 사설철도 주도에 서 국유론으로 기울었음을 의미하기도 했다.49)
군부의 철도 국유화에 대한 견해의 변화 과정을 살펴보면 청 일전쟁 이전까지 참모본부는
① 표준궤 혹은 광궤 채택,
② 간 선의 복선화
③ 해안에서 내륙으로의 간선 경로 변경을 우선시 했고, 철도 국유화를 시급하다고 판단하지 않았다.
그러나 군부 는 청일전쟁을 겪고 난 후 협궤로도 차량제조기술이 향상되어 궤간의 3배까지 적재량을 늘릴 수 있다는 점, 속도보다 전국적 인 수송 체계의 통일이 중요하다는 점 등을 이유로 궤간 개축보 다 국유화가 시급하다고 견해를 바꾸게 되었다.50)
48) 魏晨光, 앞의 책, 2023, 222~227쪽.
49) 일본의 철도국유화 조치에 관해서는 武知京三, 「日本鉄道史に関する一覚書 - 鉄 道国有化前後の動向 -」, 近畿大学短大論集 14-2, 1982; 松下孝昭, 近代日本 の鉄道政策-1890~1922年, 日本経済評論社, 2004; 老川慶喜, 「鉄道国有化の歴史 的過程について」, 立教経済学研究 58-4, 2005; 日本鉄道史-幕末・明治篇, 中央公論新社, 2014; 恩田睦, 「渋沢栄一の鉄道観と鉄道国有化政策」, 明大商學論 叢 106-4, 2024.
50) 老川慶喜, 위의 책, 2014, 190~191쪽.
외지에서의 전쟁을 통해 병참선 운영이 어렵다는 것을 확인한 군부의 의견 전환이었다.
이는 1906년 3월 철도 국유화에 이르는 계기가 되 었다. 또한 철도 국유법안과 동시에 제국의회에 제출된 경부철도 매수법안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일본 정부가 추진한 철도 국 유화의 최종 목표는 한반도와 만주까지의 철도 운영 일원화였다. 51
청일전쟁 이후 한반도 철도와 관련해 일본 육군이 주도한 정 책적 대응의 마지막은 직접 한반도에 군사적으로 필요한 철도를 부설하는 것이었다.
주지하다시피 강제병합 이전 일제에 의해 구축된 한반도 철도망의 핵심은 경부선과 경의선으로 일본에서 만주로 빠르게 직행할 수 있는 종관철도망이었다. 52)
그런데 이 외에도 최초의 철도망인 경인선과, 경부·경의선의 지선이었던 마산선(마산-삼랑진)과 평남선(평양-진남포)이 강제병합 이전에 다른 노선들에 비해 빠르게 완공되어 운영되었다.
이들 노선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청일전쟁 혹은 러일전쟁 기간에 일본군이 병참선 확보를 위해 경편철도를 부설했거나, 부설할 계획을 하 고 있던 구간이라는 점이었다.
평남선과 경인선은 앞서 언급했 듯이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병참선 확보를 위해 경편철도 부 설을 계획했거나, 부설을 시행한 구간이었고, 마산선은 일본이 러일전쟁 도발 직후 경편철도를 부설한 구간이었다.
우선 경인선은 러일전쟁이 발발한 시점에 유일하게 준공된 한 반도 철도였다.
부설권 획득을 위한 열강 간 대립이 치열했으나, 철도가 놓인 노선은 인천에서 용산까지 연결되는 동안 오류동을 거치는 등 청일전쟁 당시 병참선, 병참분견소를 설치했던 곳을 지나갔다.53)
51) 정재정, 앞의 책, 1999, 106~110쪽.
52) 경부철도와 경의철도의 부설권 대립, 부설과정과 한국인의 저항 등에 관해서는 정 재정, 앞의 책, 1999, 34~110쪽.
53) 遠藤芳信, 近代日本の戦争計劃の成立, 櫻井書店, 2015, 814쪽.
그리고 마산선은 일본이 러일전쟁을 도발한 직후 마산-삼랑진 구간을 경편철도로 부설해 경부선과 접속하도록 만들었다.
러일 전쟁 시기 일본 정부는 부설 중인 간선철도 경부선에 연결하는 지선 건설을 경계했다.
정확히 말하면 프랑스인이나 한국인 등 에게 지선 부설을 허가하는 것을 경계했다.54)
육군의 의도가 가 장 크게 반영된 조치였다.
1905년 7월 8일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총리 가쓰라 다로(桂太郎)에게 경부선과 경의선에 지 선 부설을 청원하는 한국인 또는 외국인을 불허할 것을 요구하 면서 해당 철도는 모두 “일본의 군사상의 요구”에 부합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었다. 55)
물론 일본육군의 필요에 따라 부설하는 지선이었던 마산선은 불허의 대상이 아니었다.
마산선은 일본 정부가 경부선, 경의선 등 주요 간선만큼 중요시한 철도였다.
러일전쟁 발발 후 한국에서의 정치·군사적 실권 및 경제 이권 확장을 도모한다는 「제국의 대한방침」의 실행지침으로 마련된 「대한시설강령」에도 마산삼랑진 간 철도 부설권 확보가 명시되어 있었다. 56)
그 이유는 진해만에 인접한 마산포는 한국 남단에서 가장 좋은 항만으로 군사 및 경제상 유용하다는 논리였다. 57)
54) 萩原 代理公使 → 小村壽太郞, 「京釜鐵道 支線을 충청·전라 양 도에 부설하는 건」, 駐韓日本公使館記錄 22, 1904.06.14.
55) 寺內正毅 → 桂太郞, 「(陸軍省 送達) 滿密發 第991號」, 朝鮮鐵道關係雜件(外務 省外交史料館 B04010942300), 1905.07.08.
56) 「대한시설강령」(1904)에 대해서는 한성민, 「‘韓國倂合’에 대한 일본의 정책적 일 관성 검토」, 한일관계사연구 72, 2021. 57) 小村壽太郞 → 林權助, 「일본 정부의 對韓 施政 방침 훈령 示達 건」, 駐韓日本 公使館記錄 22, 1904.07.08.
하지만 마산포를 철도로 연결하는 구상은 군사적 목적이 더 컸다.
본래 일본 군부는 부산보다 마산포가 군항으로 더 적절하 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게다가 러시아가 청일전쟁 시기부터 태평양 연안에서의 부동항 해군기지로 마산포를 조차하고자 했다.
러일전쟁이 발발한 이후 일본으로서는 마산포를 우선 확보할 필 요가 있었다.
게다가 러일전쟁이 시작되고 발틱함대가 동아시아 에 파견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해상의 군사 거점으로서의 마산포가 더욱 중요해졌다.58)
따라서 전쟁 중에도 마산선 부설 은 추진되었고, 경편철도가 아닌 표준궤 궤간을 채택해 경부선과 직접 연결하도록 결정해 1905년 5월 21일 준공하였다. 59)
평남선은 러일전쟁 중 추진했다가 선로 부설에 이르지 못했는데, 통감부가 일본 정부의 허가를 받아 1909년 9월부터 부설을 재개해 1910년 10월 16일 전 구간을 개통했다.
진남포는 청일전 쟁 이후 일본의 적극적인 요구로 1897년 7월 목포와 함께 개항 장이 되었다.
이후 진남포에는 각국 거류지회, 세관, 일본과 청 의 영사관 등이 개설되었다. 60)
그러나 무엇보다도 진남포의 중 요성이 부각된 계기는 앞서 언급했듯이 청일전쟁 당시 경편철도 를 부설해 병참선을 유지할 만큼 일본 육군에게 요충지로 인식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청일전쟁 당시 부설했던 경편철도를 근간으로 진남포에서 평양까지 철도를 부설하자는 주장은 설득 력을 얻고 있었다.
개항장임과 동시에 청일전쟁 당시부터 확인 된 군사적 요충지라는 명분이었다. 61)
58) 러시아의 마산포 획득 시도는 최덕규, 「러시아 해군성과 마산포(1894-1905)」, 「한 국시베리아학보 1, 1999; 이노우에 유이치, 앞의 책, 2005, 159~160쪽.
59) 한국철도문화재단 외, 앞의 책, 2019, 45쪽.
60) 이가연, 개항장 일본인 자본가 연구, 동아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6, 26~27쪽.
61) 染谷成章 → 林權助, 「北韓 지방에 日文 電信 개시 건과 平壤·鎭南浦 간을 연락 하고 철도 부설의 의의에 대한 上申」, 駐韓日本公使館記錄 22, 1904.10.27; 「平 壤·鎭南浦 철도에 관한 件」, 駐韓日本公使館記錄 22, 1905.07.01.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청일전쟁 이후 일본은 육군을 중 심으로 추후 한반도에서의 병참선 활용을 위한 철도정책을 다양하게 펼쳤다.
하지만 마지막 조치인 철도 부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1904년 2월 일본이 러일전쟁을 도발할 무렵 한반도에 준공된 철도망은 경인선뿐이었다. 62)
경부선·경의선은 물론, 마산 선·평남선도 부설 중이거나 계획만 세운 상황이었다.
경부선이 라도 급하게 부설하기 위해 1903년 12월 28일 가쓰라 내각은 칙령으로 「경부철도 조기 완성 명령」을 포고하고, 미착공된 구 간의 공사비를 특별보조의 형식으로 1년 한도의 국고보조를 지 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를 통해 시작된 공사는 1904년 3월부 터였고, 성현-부강, 영등포-초량 구간은 11월 10일에서야 개통할 수 있었다.
이때 일본군은 이미 남만주로 북상하고 있었다. 63)
결국 러일전쟁 개전 당시 육로 수송이 필요한 부대는 청일전 쟁 때와 마찬가지로 부산과 마산에서 도보 행군으로 서울까지 이동해야 했다.
중도에 인천 및 여순 해전에서 일본이 승리하며 황해의 제해권을 장악하자 해상수송을 통해 인천에 상륙하는 것 으로 변경되었다. 하지만 철도가 부설되지 않아 육로 수송에 어 려움을 겪는 상황은 청일전쟁 당시와 다르지 않았다. 64)
62) 이노우에 유이치, 앞의 책, 2005, 158쪽.
63) 黑田甲子郞 編纂, 앞의 책, 1920, 426~427쪽; 이노우에 유이치, 위의 책, 2005, 159~160쪽.
64) 黑田甲子郞 編纂, 위의 책, 1920, 261~262쪽.
한반도 철도망의 병참선 활용은 러일전쟁 시기에도 불가능했다.
주요 기반 시설로써 제국주의 침략의 첨병으로 철도와 함께 언급되는 전신은 청일·러일전쟁에 활용되면서 그 중요성이 커졌다면, 철 도는 오히려 전쟁에 활용되지 못하면서 일제가 필요를 절감하는 계기가 되었다.
통설적으로 이 시기까지를 한반도 철도망 구축의 역사에서 군 사적 목적이 크게 부각되는 시기라고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즉, 일본이 조선을 발판으로 대륙까지 침략하겠다는 목적 아래 경부·경의선의 부설권을 획득하고 속성으로 건설하는 과정까지만 군사적 목적이 다른 요소를 압도했던 시기로 이해한다.
조금 더 길게 보더라도 1910년대 경원선 호남선 등 주요 간선이 완공하 는 시기에 한정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일본육군 등 이른바 대륙침략을 통한 식민지 확대를 꿈꿔왔던 세력은 중국침략을 실제로 실행하기까지 한반도에 구 축한 철도·항만 등 교통인프라에 관한 군사적 우선순위를 포기 하지 않았다.
단지 시기별로 일본 내 정치권력의 중심이 어떤 세력인지에 따른 정책 강도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이는 대부 분의 제국주의 국가가 식민지에서 교통인프라를 구축할 때 식민 본국에 필요한 상품에 편중된 경제적 이윤 극대화에 집중했던 것과는 다소 다른 양상이었다. 65)
65) 박우현, 「일제시기 조선철도 건설의 성격에 관한 세계사적 검토」, 식민지적 근대 와 조선사회 1, 선인, 2024, 155~204쪽. 82
나. 만한철도경영에 관한 의견서 와 군사철도 구축
결국 러일전쟁 이후, 철도 건설로 이야기하면 경의선 속성 이 후에 일본의 한반도 철도정책이 보여주는 군사적 성격을 이해하 는 것이 더 중요하다.
1909년 9월 21일 일본육군 참모본부가 작 성한 「만한철도경영에 관한 의견서(滿韓鐵道經營二關スル意見書)」 (이하 의견서)는 러일전쟁 이후 일본육군의 대한반도·만주 철도 전략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자, 향후 실제로 진행된 한반도 철도망 구축 양상과 비교해 볼 수 있는 기준이 되는 자료이다.
참모본부가 작성한 의견서는 당시 육군대신이었던 데라우치 마 사타케에게 제출되었다.
의견서 앞에는 참모총장이 육군대신에게 우선 러일전쟁 후 러시아의 극동 경영이 활발해지면서 유럽과 아시아의 거리가 줄어 들고 있고, 만주와 한국에서의 철도망이 러시아에 대항할 중요 한 시설임과 동시에 일본군 승패의 관건이므로 이 의견서 내용 의 빠른 실행이 중요하다고 언급했다. 66)
러일전쟁에 승리했음에 도 여전히 일본군이 생각하는 가장 큰 위협은 러시아의 남하였 다.
시베리아횡단철도의 복선화 등 러시아의 극동 철도정책이 완성되면 하루에 34회의 직통열차가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 120사단에 달하는 대병력을 가진 러시아가 단시간에 군사수송을 성공시킬 수 있다는 것이 본 의견서 작성의 이유였다. 67)
의견서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군사적 목적을 주요 목표로 하 는 만주·한국 철도망 정비를 한반도 종관철도, 안봉선(안동-봉 천), 봉장선(봉천-장춘)을 일대 간선으로 설정하고, 나머지 노선 을 지선으로 두는 것부터 출발했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계획은 3기로 나눠서 제시했다.
그중 1기만 ‘시베리아횡단철도 복선화 준공 전까지’라는 기한이 제시되어 있었다.
1기 계획은
① 마산 기점의 한국 종관선 개축,
② 안봉선 개축,
③ 소가둔 (蘇家屯) 이북 ㈜남만주철도(이하 만철) 본선의 복선화,
④ 경성 -원산 철도 부설(경원선),
⑤ 경원-회령-청진 철도 부설(함경 선, 도문선)이었다.
2기 계획은
① 안봉선의 복선화,
② 한국 종관선의 복선화,
③ 원산-청진 철도 부설(함경선),
3기 계획은 평양-원산 철도 부설(평원선)이었다. 68)
66) 「滿韓鐵道經營二關スル意見書」, 陸軍一般史料-文庫-宮崎(防衛省防衛硏究所 文庫 -宮崎-41), 1909. 09.21, 157쪽. 67) 「滿韓鐵道經營二關スル意見書」, 위의 글, 1909.09.21, 166~167쪽.
68) 「滿韓鐵道經營二關スル意見書」, 위의 글, 1909.09.21, 170~172쪽.
이후 의견서는 한국의 종관철도망과 만철 노선을 주요 간선으 로 설정하는 이유부터 설명한다.
군의 전투력을 최대로 끌어올 리려면, 육상수송과 해상수송이 함께 해 단시일에 병력을 집중시킬 수 있어야 하고, 그럴 수 있으려면 해운력을 보조할 수 있는 육상교통기관 정비가 필수적이라는 주장이었다.
게다가 때에 따라 육상수송력이 더 중요해지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었다.
이는 한국 종관철도망부터 안동-봉천-장춘 간 만철 노선의 정비가 필요한 이유로 연결된다.
핵심은 제해권이었다.
즉, 제해권 장악 여부와 관계없이 일본에서 만주로 병력 수송을 원활하게 할 수 있는 루트가 필요하다는 논리였다.
러일전쟁 후 러시아가 해군 재건에 착수해 6~7년 뒤 황해와 동해의 재해권을 지금처럼 일본이 장악하고 있을지 장담할 수 없으니, 해상수송을 통해 대련으로 향해 거기서부터 만철 본선으로 장춘에 이르는 루트를 대체하는 육상수송루트가 필수적이라는 생각이었다.69)
또 하나의 이유는 해상수송에 의지해 황해를 거쳐 대련에 도 착한 후 장춘에 이르는 해상수송루트에 비해 한국 종관철도와 만철의 지선인 안봉선을 거쳐 장춘에 이르는 육상수송루트가 1일 수송능력이 더 우수하다는 판단이었다.
참모본부는 해상수송 루트로 군대와 군수품을 수송할 경우 1일 17열차(군대 13열차, 군수품 4열차), 6,800톤 수송이 가능하다고 계산하였다.
하지만 마산을 기점으로 하는 한국 종관철도를 개량해 활용하면 1일 37 열차(군대 28열차, 군수품 9열차), 14,800톤까지 수송할 수 있 다고 보았다.
즉, 마산 기점의 한국 종관철도가 대련 기점의 해 상수송보다 효율적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일본육군이 수세에 몰렸을 때도 제해권에 의지하지 않고 대응할 수 있는 기반이 된 다는 점도 강조하였다.
이러한 분석을 토대로 참모본부는 한국 종관철도를 군사수송에 적합한 수준까지 건설 및 개량해야 한다 는 주장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었다. 70)
69) 「滿韓鐵道經營二關スル意見書」, 위의 글, 1909.09.21, 173~177쪽.
70) 「滿韓鐵道經營二關スル意見書」, 위의 글, 1909.09.21, 179~183쪽. 84 | 軍史 第133號(2024. 12.)
의견서 주장의 골격에 해당하는 위 내용의 하위 개념으로 설 정된 사항이 1기 계획의
① 마산 기점의 한국 종관선 개축,
② 안봉선 개축,
③ 소가둔 이북 만철 본선의 복선화였다.
특히 1909년 현재 일본육군은 경부선을 한국철도의 주요 간선으로 설 정하면서도, 남부 종단항을 부산이 아닌 마산으로 상정하고 있 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러일전쟁 당시 마산선 부설 필요성을 제기했던 상황과 마찬가지로 육군은 부산은 방비가 곤란해 대군 을 양륙시키는 데 부적합하다고 보았다.
이에 반해 마산포는 이 미 해군이 군항을 건설하고 있는 진해만이 감싸고 있어 엄호가 가능한 지형이므로, 속히 항만 확충을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했 다.71)
마산선의 표준궤 개축과 마산항 수축은 일본육군의 군사 적 목적에서 부산항보다 중요한 부분이었다. 72)
이처럼 일본육군은 경부·경의선으로 설명되는, 이른바 한국 의 종관철도망을 군사수송에 적합한 수준으로 건설·개량을 진 행함과 동시에 함경북도로 향하는 경성-원산 철도, 두만강 일대 를 연결하는 경원-회령-청진 철도 건설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이유는 러시아와 가까운 함경북도에 반드시 일본군을 주둔시켜야 하는데, 지세가 험하고 물자가 부족해 신속하게 군 을 수송하기 위함이었다.
나아가 의견서는 북만주에서까지 러시 아의 영향력을 물리치고 장악하기 위한 발판으로 길림-회령 간 철도 즉 길회선 구축 필요성도 제시했다. 73)
71) 「滿韓鐵道經營二關スル意見書」, 앞의 글, 1909.09.21, 184~185쪽.
72) 이후에 일본이 중일전쟁을 도발하는 1930년대 후반에도 마산항은 부산항과 함께 일본군이 중점적으로 조선총독부 재정을 투입하고자 했던 항만으로 자리했다(박우 현, 「1930년대 중반 조선사업공채 발행과 교통망 구축의 불균형」, 한국사연구 201, 2023, 141~146쪽; 「1930년대 후반 조선사업공채 정책 변화와 전시(戰時) 인 프라 개발」, 역사와현실 132, 2024, 176~184쪽). 73) 「滿韓鐵道經營二關スル意見書」, 앞의 글, 1909.09.21, 188~193쪽.
건설과 관련해 마지막으로 제시된 노선이 평양-원산 간 철도였다.
의견서에 제시된 모든 노선이 어쨌든 조금이라도 남쪽에 서 북쪽을 향하는 노선이었던 것과 달리 평원선은 유일하게 동 서를 완벽히 횡단하는 노선이었다.
의견서는 만철 부속지 등 압록강 이북에 주둔할 일본군과 함경북도 두만강 주변에 주둔할 일본군 간 제2 연락선 역할로 작전을 지도하기 위한 철도망으로 평양-원산선이 필요하다고 서술하고 있다.
다만 다른 노선에 비해 시급하지 않으므로 3기 계획으로 배치한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74)
74) 「滿韓鐵道經營二關スル意見書」, 위의 글, 1909.09.21, 194쪽.
<그림 2> / <그림 3> : 생략 첨부 논문파일참조
의견서가 제시한 한국철도망 건설 및 개량안은 실제로 건설된 철도망과 어느 정도 일치할까?
그림 2와 그림 3을 비교하면 알 수 있듯이 건설이 필요하다고 언급된 경원선, 함경선, 도문선, 평원선 등은 모두 1910~30년대에 걸쳐 건설되었다.
물론 의견 서 상의 계획과 순서 면에서 차이가 있고, 기공 혹은 준공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예를 들어 강제병합 직후 경성-원산을 연결하는 경원선은 호남선과 함께 부설을 시작했지만, 경원-회령청진을 연결하는 함경선, 도문선은 준공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심지어 도문선은 1927년 실시한 조선철도12년계획에서야 신 설 노선으로 포함될 정도로 시간이 걸렸다.
설사 기공했더라도, 공황 등에 의한 일본 재정의 악화, 일본 내 정치 지형의 변화로 인해 식민지로의 자금조달이 어려워지면 서 의견서에 제시된 일본육군의 계획 실천을 어렵게 하는 경우 도 많았다.
특히 이른바 정당 세력과의 정치적 갈등이 치열해지 면서 군부 세력이 일본정치의 권력을 잡으면 한국철도망 건설 및 개량에 자금이 조달되는 현상도 확인할 수 있다. 75)
1914년에 기공했으나, 자금조달이 이뤄지지 않으면서 지연되고 있었던 함경선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일본경제의 호전과 철도확장을 통한 대륙침략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총리가 되면서 군비확장을 포함한 확장재정정책의 추진이 함께 이뤄 지면서 1918년부터 건설비가 대폭 늘어날 수 있었다. 76)
평원선은 1922년 내각과 제국의회에 부설을 승인받았으나, 오 랜 기간 완공무용론에 시달리다가, 일본이 중일전쟁을 도발하자 군사수송 측면에서 동서 횡단철도의 중요성이 갑자기 부각되면서 1941년에야 완공될 수 있었다. 77)
75) 특히 1926년 말 1927년 초 조선철도12년계획 추진 과정에서 헌정회 계열 주요 인사들의 조선철도 건설을 주장하는 움직임에서 잘 나타난다(浜口雄幸傳刊行會 編, 浜口雄幸傳, 浜口雄幸傳刊行會, 1931, 209~212쪽; 杉山伸也, 「金解禁論爭井上準之助と世界經濟」, 帝國日本の學知 第2卷 「帝國」の経済学, 岩波書店, 2006, 152쪽; 李炯植, 「戰前期における中央朝鮮協會の軌跡-その設立から宇垣總 督時代まで-」, 朝鮮學報 204, 2007, 107~115쪽).
76) 박우현, 「1910년대 조선사업공채 정책의 전개와 난맥상」, 한국근현대사연구 93, 2020, 106~111쪽.
77) 박우현, 「일제시기 평원선 부설과 횡단철도의 주변화(1904~1941)」, 한국문화 89, 2020, 211~232쪽.
의견서상 2기 계획에 속했던 한국 종관선의 복선화도 1936년에 2.26사건으로 군부가 정권을 장악하자 추진되었다.
일본은 물론 대만보다 조선철도의 복선화 는 상당히 늦어지고 있었는데, 군부의 정권 장악과 맞물리며 급 속도로 진행되었다.
물론 경부·경의선에 한정된 복선화였다. 78)
이처럼 의견서에 제시된 계획 실현 여부에 대한 평가는 양면 성을 이해하며 진행할 필요가 있다.
우선 참모본부의 계획이 모 두 실현되었다는 점에서 일제시기 조선철도가 일본의 대륙침략 을 위한 병참선 역할에 충실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이는 강제 병합 이후 조선철도에 관해 육군성·조선군과 조선총독부가 보 여주는 상대적으로 종속적인 관계를 통해서도 확인 가능하다는 점에서 타당한 평가라고 할 수 있다. 79)
78) 박우현, 「1930년대 중반 조선사업공채 발행과 교통망 구축의 불균형」, 한국사연 구 201, 2023, 144~146쪽.
79) 일례로 1925년 5월 조선철도의 조선총독부 철도국 직영이 재개된 후 조선군과 철 도국은 철도의 건설·개량, 차량, 수송 등을 군에 통보·협의하고, 선로 신설, 복 선화 개량, 군사수송 등은 사전 협의하기로 협정을 맺은 바 있다(參謀本府, 「朝鮮 鐵道關係事項に就テ總督府トノ連絡ニ關スル件」, 密大日記 大正14年 6冊の内第4 冊(防衛省防衛研究所 陸軍省-密大日記-T14-4-9), 1925.04.20.). 특히 군사수송 과 관련해서는 조선총독부 철도국에 군사수송위원회를 만들어 조선군사령부 소속 장교가 참여해 협의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林采成, 戦時経済と鉄道運営, 2005, 25~26쪽; 김상규, 조선 주둔 일본군의 대외 침략과 군사동원,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22, 123쪽). 또한 1933년 예산편성부터는 조선총독부 의 철도건설 및 개량비 예산책정 과정에 육군성이 직접 관여할 수 있도록 규정하 기까지 했다. 만주사변과 만주국 성립 이후의 정세를 반영한 조치였다(박우현, 「1930년대 초 조선총독부의 재정 위기와 제국의 차별적 대응」, 한국사학보 94, 2024, 136~138쪽).
하지만 의견서 상의 계획이 실현되는 데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고, 중단되거나 승인받지 못하는 시기가 길었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특히 해당 의견서가 작성된 시기는 육군세력이 일본내각의 중심에 있었다.
정치권력과 경제 상황이 군사 계획 혹은 철도·항만 등의 대형 인프라 구축에 끼치는 영향은 막대했다.
가깝게는 다이쇼 데모크라시 이후 일본 내 정치 지형 의 변화, 러일전쟁 이후 일본경제의 불황, 제1차 세계대전, 관동 대지진, 세계대공황까지 1910~20년대 일본의 정치·경제적 격 변은 계획의 안정적 실현을 어렵게 했다. 참모본부가 대륙침략 과 연계된 군사적 목적으로만 대규모 재정자금을 철도·항만 구 축에 조달할 수는 없었다.
특히 식민지의 철도·항만 구축에 조달되었던 조선사업공채와 관련된 모든 권한을 식민본국인 일본정부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 에 더욱더 일본의 정치·경제적 변화상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 다.
시기에 따라 일본정치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세력의 의사결 정에 휘둘렸고, 그 사이에 조선인, 나아가 조선 내 일본인 세력의 의사나, 조선의 경제적 상황 등이 고려될 여지는 크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의견서가 중요하게 제기한 내용인 이른바 ‘만한철도의 통일’ 즉, 만철과 한국철도를 군사적으로 신속하게 운용하 기 위해서는 하나의 기관에서 통일적으로 운용해야 한다고 강조 한 점도 실행 과정에서는 위와 같은 식민통치의 양상에 좌우될 수밖에 없었다. 80)
이 내용은 강제병합 이후 1911년 5월 참모본 부가 한 차례 더 작성해 육군대신과 조선총독을 겸하고 있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에게 제출한 「조선·만주의 철도경영방안(朝 鮮·滿州二於ケル鐵道經營方案)」에도 다시 한번 강조되고 있다. 81)
80) 「滿韓鐵道經營二關スル意見書」, 앞의 글, 1909.09.21, 204~205쪽.
81) 「朝鮮·滿州二於ケル鐵道經營方案」, 陸軍一般史料-文庫-宮崎(防衛省防衛硏究所 文庫-宮崎-49), 1911.05, 454~457쪽.
이는 1917년 7월 31일부터 실시된 조선철도의 만철 위탁경영으 로 실현되었다.
이 사안 역시 함경선 건설비 증가처럼 데라우치 내각에서 현실화되었다는 점과 1920년대로 들어서며 일본육군 중심의 대륙침략 시도가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조선총독부 직영 으로 환원되었다.
일제의 식민정책상 병참선으로서의 조선철도망 구축이 시기에 따라 유동적으로 진행되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4. 결론
본고는 청일·러일전쟁의 배경이 된 시베리아횡단철도 부설부 터 시작해, 전쟁이 한국철도망 구축의 방향성에 끼친 영향을 살 펴보았다.
한반도에 놓인 철도망이 남북을 연결하는 종관노선에 집중되었던 점은 현대 한국의 교통과 도시발달 방향을 결정했 다.
여전히 경부선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구간을 중심으로 도시 가 발달했고, 인구가 밀집했다.
그뿐만 아니라 현재 한국 사회가 가진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수도권 집중을 촉진하는 매개체로 작동했다.
물론 산업화를 매개로 철도가 발전했던 것은 대부분 국가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사안이고 정치·경제적 중심지로 집중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산업적 연계, 지역 내 발전 등을 고려하며 중심지를 향하는 철도만을 부설하 는 편향성을 드러내는 것은 경제적으로도 비효율적이었기에 중 심지를 거치지 않고 교류할 수 있는 지역철도 부설이 함께 진행 되었다.
철도의 순기능은 여러 지역을 연결해 다양한 사람과 물 자를 옮겨낼 수 있어야 발휘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국주의 국가 일본의 식민지 확대 즉, 대륙침략을 최 우선 목적으로 자금이 투자된 한반도 철도망 건설의 방향성은 다양성을 담보하지 못했다.
일본의 대륙침략이 본격적으로 진행 된 1930년대 말이 되면 한반도 남부에서 북부를 향하는 종관철 도망이 3개, 40년대 초에는 4개로 늘어났고, 군사수송을 위해 확장된 남부 항만도 4개로 늘어났다.
<참고문헌>
1.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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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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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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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 록
이 글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며 일본이 대륙 침략을 위해 한반도에 철도를 구축하는 과정과 계획을 분석했다.
일본은 러 시아에 대항한다는 명분으로 한반도에 철도를 부설했기에 처음부터 그 목적은 군사적 성격이 강했다.
게다가 일제는 청일전쟁과 러일전 쟁을 겪으면서 철도가 없는 상태로 병참체제를 구축하는 것은 불가 능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경부선과 경의선 부설뿐 아니라 러일전쟁 이후 일본육군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한반도 철도망 계획은 모두 병 참선 역할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었다.
실제로, 1909년 일본육군 참모 본부의 철도 계획은 향후 한반도에 실제로 건설된 철도망과 동일했 다.
이처럼 군사적 목적만을 최우선으로 고려한 철도망 구축은 현재 까지도 한국철도에 동서 간 연결성 부족이라는 문제를 남겼다.
주제어 : 일본 제국주의, 청일전쟁, 러일전쟁, 한국철도망, 병참선
〈Abstract〉
Expansion of the Korean Peninsula railroad network as a Japanese military supply line after the First Sino-Japanese War and Russo-Japanese War
Park, Woo-Hyun
This article analyzes the process and plans of Japan to build railroads on the Korean peninsula in order to invade the continent during the Sino-Japanese and Russo-Japanese wars. Japan built the railroad on the Korean peninsula in the name of countering Russia, so its purpose was military from the beginning. In addition, the Japanese realized from the First Sino-Japanese and Russo-Japanese wars that it was impossible to build a logistics system without railroads. As a result, not only the construction of the Gyeongbu Line and the Gyeongu Line, but also the plans for the Korean Peninsula Railway Network, which were centered on the Japanese Army after the Russo-Japanese War, gave priority to the role of logistics lines. In fact, the railway plan drawn up by the General Staff of the Japanese Army in 1909 was identical with the railway network that was eventually built on the Korean peninsula. This prioritization of the rail network for military purposes left behind a lack of east-west connectivity that remains a problem for Korea's railways to this day.
Keywords : Japanese imperialism, First Sino-Japanese War, Russo-Japanese War, Korean railroad network, supply lines
원고투고일 : 2024. 10. 4., 심사수정일 : 2024. 11. 14., 게재확정일 : 2024. 11. 29.
軍史 第133號(202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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