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 차 >
1. 서론
2. 에픽테토스의 프로하이레시스
3. 장자의 안명
4. 프로하이레시스와 안명 비교
5. 결론
1. 서론
에픽테토스는 스토아학파 후기 사상을 적나라하게 대변하는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동시에 노예 철학자로도 잘 알려져 있다.
장자는 전국(戰國) 중기에 노자 의 사상을 계승하여 도가철학의 시류에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새로운 지평을 열 었던 인물이다.
이 두 인물 사이에는 모종의 공통점이 산재하는 듯하다.
그 가운 데 필자가 주목하는 두 인물의 유의한 공통점은 에픽테토스와 장자 모두가 인간 의 자유를 무척 중시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에픽테토스를 떠올릴 때면 으레 함께 부상하는 타이틀, ‘왕보다 자유로운 노예’에도 십분 반영되어 있다.
장자 역시 마찬가지다.
장자의 첫 편명이기도 한 소요유(逍遙遊)에는 장자 의 자유로움에 대한 애착이 투사되어 있다.
대개의 저자는 자신에게 가장 중요하 다고 생각되는 가치를 서두로 견인하려는 경향성을 띠는 듯하다.
소요유에서 유 (遊)란 단순히 자유로운 상태에 그침이 아니라 자유로움을 만끽하며 그것에 노 닌다는 뜻이다.
물론 유(遊)가 단순히 아무런 목적 없이 노님을 뜻하진 않는다.
장자적 사유 안에서 유(遊)란 대(大)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1)
장자 「소요 유」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곤(鯤)과 붕(鵬)은 압도적인 대(大)의 상징이기도 하 다.
그래서 소요유의 주된 논의를, 자유가 아닌 ‘소대지변(小大之辨)’을 통한 소지(小知)의 문제점 지적과 대지(大知)의 역설로 보는 견해도 있다.2)
1) 장선아, 「장자(莊子)의 ‘유(遊)’ 사상을 통한 광기(狂氣)의 의미와 고찰」, 철학·사상·문화 제 31호, 동국대학교 동서사상연구소, 2019, 74쪽.
2) 김현수, 「莊子의 道와 나누어짐이 없는 세계」, 철학·사상·문화 제16호, 동국대학교 동서사상연 구소, 2013, 3쪽.
하지만 여전히 장자 철학 전반의 방점이 ‘자유의 추구’에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장자 「추수」에는 다음과 같은 우언(寓言)이 실려 있다.
초(楚)나라 임금의 대부(大夫) 두 사람이 복수(濮水)에서 한창 낚시를 즐기고 있던 장자를 찾아와 초나라의 정치를 부탁한다.
그러자 장자는 한 나라의 재상 노릇을 하며 온갖 구속에 얽매이는 것이 진흙탕 속에 꼬리를 끌고 다니는 거북의 자유로움만 못하다며 그들의 제안을 물리친다.
고대 로마에 ‘왕보다 자유로운 노예’ 에픽테 토스가 있었다면 비슷한 시기의 중원(中原)에서는 ‘재상보다 자유로운 거북이’ 장자가 활동했던 셈이다.
장자는 부자유(不自由)로 인해 어지러운 현실이 빚어내는 무도한 인간상의 비판을 통하여 궁극적 자유의 경계에서 노니는 이상적 인간상으로의 전환을 도모 했다.
장자의 첫 번째 편인 「소요유」가 궁극의 자유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이 상적 인간상과 궁극의 자유에 대한 장자의 입장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3)
장 자의 경우 자유와 관련한 여러 논문이 있는데, 대개 「소요유」를 위주로 한 것 들이라고 할 수 있다.4)
소요유의 정신과 안명론에 입각하여 장욱진(張旭鎭, 1917∼1990)의 회화를 고찰한 선행 연구5)가 있지만 이 경우는 특정 화가의 회 화적 특성으로부터 안명론적 사유와 소요유적 사유를 각각 발견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안명을 자유론의 관점에 주목하여 개진한 연구라고는 보기 어렵다.
에픽테토스와 장자가 모두 자유로움에 주목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에픽 테토스와 장자는 모두 본질로서의 자유를 효과적이며 능률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일련의 체계적인 방법론을 제시한다.
이는 두 인물의 사상적 흐름 가운데 특정 부분을 자유론이라고 칭할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에픽테토스의 자유론을 보 다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먼저 그가 사용하는 철학적 개념들에 대한 해석이 선행 되어야 한다.
에픽테토스는 동시대의 다른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소크라테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처럼 에픽테토스가 자신이 정신적 스승으로 삼았던 소크라테 스의 가르침을 토대로 고유한 사상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부상한 ‘프로하이레시스(prohairesis)’는 흥미로운 역사를 지닌 철학적 개념이다.
플라톤의 대화편에 등장하는 프로하이레시스는 훗날 아리스토텔레스가 개진 한 윤리학의 핵심 개념 가운데 하나로 정립된다.6)
3) 김현수, 「莊子哲學에서의 心石의 孤立과 疏通」, 철학·사상·문화 제2호, 동국대학교 동서사상 연구소, 2005, 173쪽.
4) 장자 「소요유」를 위주로 자유에 관한 논의를 개진한 선행 연구로는 고은강, 「소요유(逍遙遊)의 자유에 대한 소고 - 장자 「소요유」를 중심으로-」, 2016, 이종성, 「소요와 노닒 또는 걸림 없는 자유 –장자 ‘소요유’의 부정(否定)정신과 자유의식을 중심으로-」, 2013, 김지희, 「그리스인 조 르바에 나타난 카잔차키스와 장자의 삶에 대한 고찰: 소요유의 자유정신을 중심으로」, 2022 등을 들 수 있다.
5) 마승재, 「장자 사상을 통해 본 장욱진 회화 연구 - 안명론(安命論)과 소요유(逍遙遊)를 중심으로」, 동양예술 제48호, 한국동양예술학회, 2020, 153-175쪽.
6) 전헌상, 「아리스토텔레스와 에픽테토스 윤리학에서의 프로하이레시스 - ‘우리에게 달려있는 것’과 의 연관성을 중심으로」, 서양고전학연구, 한국서양고전학회, 2011, 123쪽.
하지만 ‘선택’이나 ‘의지’, ‘결의’ 등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의미를 포괄할 수 있는 이 개념은 아리스토텔레 스 이후 당대의 철학적 논의에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프로하이레시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에픽테토스에 이르기까지 수 세기에 걸쳐 주요한 철학적 개 념으로 대우받지 못하는 암흑기를 겪은 셈이다.
하지만 프로하이레시스는 에픽 테토스가 스토아철학자로서의 역할을 가장 활발하고도 충실하게 이행했던 기원 후 1세기 말부터 2세기 초반에 걸쳐 에픽테토스 철학 체계의 핵심 개념으로 자리 하게 되며 이로써 다시금 철학사의 전면으로 부상하게 된다.
장자 「인간세」, 「덕충부」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 ‘안지약명(安之若命)’이 란 표현은 ‘운명을 따라 편안히 지냄’을 의미한다.
‘안명(安命)’은 안지약명의 준말로 이 역시 ‘운명을 편안히 여김’ 정도의 뜻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장자 적 사유에서 안명이라는 철학적 개념에 부여되는 지위는 에픽테토스 철학에서의 프로하이레시스 개념에 비견될만큼 핵심적이다.
에픽테토스의 프로하이레시스와 장자의 안명은 두 인물의 자유론이 현실 세계에서 기능하는 범주로 성립될 수 있 는 토대를 마련한다.
이제까지의 프로하이레시스 개념에 관한 선행연구로는 에픽테토스의 프로하 이레시스 개념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프로하이레시스 개념을 윤리학적 관점에서 비교한 것(전헌상, 2011)7)이 있다.
또 엥케이리디온8)에 담긴 프로하이레시 의 가치가 이십오언(二十五言)이나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을 매개로 불 교나 유교, 혹은 그리스도교의 가치들과 비교된 바 있음을 드러낸 것(김상근, 2014)9)이 있다.
7) 전헌상은 「아리스토텔레스와 에픽테토스 윤리학에서의 프로하이레시스 - ‘우리에게 달려있는 것’ 과의 연관성을 중심으로」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에픽테토스의 철학적 개념 프로하이레시스를 그 차 이점에 주목하여 논구하고 있다(136-140쪽).
8) 이창우는 김재홍의 저서 엥케이리디온: 도덕에 관한 작은 책(2003)의 서평 「왕보다 자유로운 노예의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에서 엥케이리디온에는 이중적 의미가 담겨 있다고 소개한다. 첫째 는 문자적 의미로 ‘손 안에 있는 작은 것’이며 이로써 엥케이리디온은 소책자, 매뉴얼, 핸드북이라 는 뜻을 갖게 된다. 둘째는 소책자나 매뉴얼이라는 의미로부터 도출되는 입문서라는 뜻이다. 두 가지 의미를 합치면 엥케이리디온은 ‘입문적 소책자’란 뜻을 갖게 된다. 엥케이리디온의 저자는 에 픽테토스이므로 구체적으로 엥케이리디온은 ‘에픽테토스의 가르침에 대한 입문적 소책자’라는 뜻 이 된다(279쪽 참조).
9) 김상근은 「스토아철학과 명말(明末) 불교의 혼동 – 에픽테토스의 엥케이리디온을 二十五言으 로 번역했던 예수회선교사 마테오 리치의 선교 방식에 대한 의미론적 고찰」에서 그리스도교 복음을 자체적으로 수용하였던 중국인 사대부들의 사례를 다루고 있다. 저자는 마테오 리치가 쓴 마테오 리치의 중국견문록을 인용하며 마테오 리치의 친구이기도 하였던 풍응경(馮應京) 등이 마테오 리 치가 二十五言이란 이름으로 번역한 엥케이리디온을 접하고 에픽테토스의 사상이 불교나 유 학 등과 비교될 수 있는 소지에 관심을 보였다고 말하고 있다(86쪽 참조).
이를 통해 에픽테토스의 프로하이레시스가 동일한 층차에서 개 념적 차이를 조명받거나 스토아철학의 한 갈래로서 그리스도교나 불교, 유교의 철학과 비교된 적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프로하이레시스를 다각도에서 조명한 선행 연구는 더 있다.
하지만 이제까지 프로하이레시스를 도가철학과 비 교한 적은 없다.
이러한 까닭에 이 글에서 필자는 스토아철학의 고유성을 독특한 방식으로 함 축하고 있는 에픽테토스의 프로하이레시스 개념과 도가철학의 정수를 자신만의 언어로 승화시킨 장자의 안명 개념을 자유론적 관점에 입각하여 다소간의 공통점 과 차이점을 중심으로 관찰하고자 한다.
소크라테스적 전통에 입각하여 철학을 곧 삶에 관한 기술(hê peri bion technê)로 환치하였던 에픽테토스.
그리고 철학 을 삶의 지혜(知)로 여겼던 장자.
본 논문은 거시적 관점에서 이 두 인물의 사유 를 특정한 방식으로 연결해 볼 수 있는 가교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미시적으로는 의지를 지닌 한 인간이 일정한 삶의 태도를 통하여 어떻 게 실존적 자유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탐구할 것이다.
자유로운 상태의 지속을 위한 방법론으로서 과연 에픽테토스의 프로하이레시스와 장자의 안명은 어떠한 구체적 작용을 수반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이러한 작용의 기전 은 어떻게 비슷하거나 다른가 등의 철학적 문제가 본 논문을 통해 실용적으로 다 뤄질 수 있기를 십분 기대한다.
2. 에픽테토스의 프로하이레시스
기원후 50년경 프뤼기아 지방의 히에라폴리스에서 노예의 신분으로 출생한 에 픽테토스는 네로 치하의 로마에서 성장하였다.
황실 아래서 특정한 역할을 담당 하였던 자유인 에파프로디투스의 노예로 생활하였던 에픽테토스는 어려운 여건 임에도 불구, 당대에 스토아철학 연구에 박차를 가하였던 무소니우스 루푸스의 지도와 편달 하에 철학 공부에 몰입하였다.
이후 노예 신분으로부터 해방된 에픽 테토스는 로마에 머물며 철학을 가르쳤으나 서기 90년경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여러 철학자를 대상으로 대대적인 추방령을 내리자 이를 계기로 마흔을 즈음하여 아드리아해와 인접한 그리스 에페이로스의 신도시, 니코폴리스로 이주하였다.
니코폴리스에 학교를 건립하고 철학과 관련하여 체계적인 교육을 베풀었던 에픽 테토스는 그의 삶 전반에 걸쳐 정신적 지주의 역할을 담당하였던 소크라테스와 마찬가지로 출판을 목적으로 한 저술 등의 작업에는 몸소 참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의 수제자였던 아리아누스가 에픽테토스의 사상을 정리한 원고 담 화록(Diatribai)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전승되고 있다.
물론 본래 여덟 권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담화록 가운데 네 권만 남아있다.
담화록을 기술한 아리아누스는 담화록의 내용 가운데 에픽테토스의 핵심적 사상을 잘 대변하는 것 들을 분류, 취합하였고 이를 엥케이리디온(Encheiridion)이라는 저서로 편찬 하였다.
즉 엥케이리디온은 담화록에 당대의 대중들이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었 으면 좋겠다는 아리아누스의 바람이 담긴 담화록의 요약본이라고 간주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현재 에픽테토스의 사상을 지근에서 엿볼 수 있는 저서로는 담 화록과 엥케이리디온을 꼽을 수 있다.
에픽테토스의 주요한 철학적 관점은 엥케이리디온의 초장(初章)에서 중요 한 테마로서 등장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to epi hēmin)’ 개념이다.
이 개념은 에픽테토스적 사유의 전개에서 프로하이레시스 개념을 자 연스레 예인하는 근거로서 작용하므로 에픽테토스의 자유론을 논구함에 필수적 이다.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이란 곧 믿음, 충동, 욕구, 혐오 등 한 마디로 우리 자신이 행하는 모든 일을 말한다.
반면에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들이란 곧 육체, 소유물, 평판, 지위 등 한 마디로 우리 자신이 행하지 않는 모든 일을 의미한다.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은 본성적으로 자유롭고 훼방받지 않고 방 해받지 않지만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들은 무력하며 노예적이고 방해를 받으며 다른 것들에 예속된다.10)
10) Enchiridion 1.1, “Some things are in our control and others not. Things in our control are opinion, pursuit, desire, aversion, and in a word, whatever are our own actions. Things not in our control are body, property, reputation, command, and in a word, whatever are not our own actions. The things in our control are by nature free, unrestrained, unhindered; but those not in our control are weak, slavish, restrained, belonging to others.
이처럼 프로하이레시스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삶을 대하는 에픽테토 스의 기본 관점을 수용해야 한다.
삶의 매 순간 밀려닥치는 일련의 사태들을 에 픽테토스는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과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의 두 가지로서 구분하고 있다.
에픽테토스에 의하여 양분된 두 관점 가운데 ‘우리에게 달 려 있는 것’과 밀접하게 연관되는 것이 프로하이레시스다.
실상 에픽테토스 철학 에 있어 프로하이레시스는 중요하면서도 난해한 개념이다.
왜냐하면 프로하이레 시스는 맥락에 따라 도덕적 성격, 선택, 의지, 결의 등 중의적으로 옮겨질 수 있는 복합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프로하이레시스의 원의(原意)에 일대일의 관계로 정확하게 상응하 는 한 가지 번역어를 고정시켜 사용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왜냐하면 프로하이레시스를 어떤 표현으로 환치하더라도 그 의미에 편차가 발생함은 불가피하기 때 문이다.11)
11) 전헌상, 「아리스토텔레스와 에픽테토스 윤리학에서의 프로하이레시스 - ‘우리에게 달려있는 것’과 의 연관성을 중심으로」, 서양고전학연구, 한국서양고전학회, 2011, 123쪽.
이는 본고에서 필자가 ‘프로하이레시스’라는 음차를 그대로 하나의 개념으로서 제시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에픽테토스의 프로하이레시스는 크게 두 개의 영역으로 분류될 수 있다.
‘동 의(assent)’의 영역과 ‘충동-욕구(pursuit-desire)’의 영역이다.
에픽테토스가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과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들에 주목한 본질적 인 까닭은 결국 이것들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없는 상태에서 인간은 스스로 존재 함의 궁극적 목적, 즉 자유와 행복의 실현을 도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다수 스토아 철학자가 세상을 조명하는 방법과 에픽테토스의 관점이 그 결 을 완전히 합치시키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불일치는 어디까지나 에픽테토스라는 철학자의 사유법에 일말의 고유성을 부여할 뿐이며 에픽테토스를 스토아 철학자로 분류할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에픽테토스는 여전히 그 선두에서 스토아철학을 대변한다.
왜냐하면 에픽테토스의 ‘동의’와 ‘충동-욕구’에 관한 관점이 근본적으로는 초기 스토아학파의 영혼관에 입각하기 때문이다.
초기 스토아의 영혼론은 인간의 영혼이 다양한 방식으로 외부와 상호작용하며 이를 통해 결과적으로 외부세계, 즉 외물(外物)의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됨을 시사 했다.
에픽테토스는 영혼과 외물의 상호작용으로부터 비롯된 부산물을 ‘영혼 안 에서 발생하는 겪음(pathos en tē psychē)’이라 칭하며 ‘인상(phantasia)’이라 는 철학적 용어로 개념화했다.
즉 인상이란 외물로부터의 자극으로 인하여 인간 의 영혼에 찍힌 어떠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유체계 속에서 프로하이레시스는 외부세계와 인간의 영혼이 관계를 맺는 일종의 창구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것이다.
에픽테토스는 성숙한 인간의 조건이 다채로운 인상들과 결부된 외적 상황 가 운데서 반성적 태도를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보았다.
즉 어떤 사람이 시시 각각 외물로부터 밀어닥치는 ‘충동적 인상들(phantasiai hormētikai)’에 대하여 매 순간 충분한 반성적 태도를 유지할 수 있다면, 나아가 이러한 반성적 태도가 ‘동의’의 과정을 통해 외물로부터 비롯된 상황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수용할 수 있게끔 그를 원조한다면, 에픽테토스에게 이러한 기제를 작동시킬 수 있는 인간 은 성숙한 인간으로서 간주되는 것이다.
나아가 에픽테토스는 반성적 태도로부터 비롯된 동의로서의 수용, 그것이 발 생시키는 특정한 표상이 곧 무언가에 대한 믿음이 되고 욕구가 되며 또한 정서가 되고 태도가 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의 일부가 된다고 역설하였다.
이 러한 맥락에서 에픽테토스의 프로하이레시스 개념으로부터는 ‘의지’의 의미가 특별히 부각된다.
외물로부터 인간의 마음을 향해 밀어닥치는 표상들이 동의와 검토의 과정을 거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다름 아닌 프로하이레시스, 즉 선택하는 의지인 셈이다.
이런 점에서 에픽테토스의 프로하이레시스는 그 자신에 탑재 된 ‘동의’ 기능을 통하여 외물로부터 촉발된 인상을 특정한 정신적 믿음으로 끊 임없이 전환시킨다.
에픽테토스의 프로하이레시스 개념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실존적 자유와 연결 된다.
오랜 세월에 걸쳐 철저하게 노예의 신분을 경험하였던 에픽테토스에게 진 정한 의미에서의 ‘자유(eleutheria)’란 드러난 제도적 신분 등을 통해 규명될 수 있는, 즉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맥락에서 조명될 수 있는 속성의 것이 아니었다.
에픽테토스에게 있어 자유란 지혜로운 인간이 목표로 삼는 삶의 태도로서, 보다 본질적이며 높은 가치를 지니는 일종의 탁월성이었다.
즉 에픽테토스가 말하는 자유 개념은 전적으로 심리적이며 개별적인 태도로서만 치환될 수 있다.
주지하 듯 그는 자유로운 사람의 유의미한 특성을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자신이 원하 는 바대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기억하라.
네가 만일 본래 노예적인 것들을 자유로운 것으로 여기고 또한 다른 것에 속하는 것들을 너 자신의 것으로 상정한다면 너는 장차 장애에 부딪히게 될 것이며 통탄하게 될 것이고 매우 불안해질 것이며 신들과 인간들 모 두를 비난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네가 만일 오로지 너의 것이 될 것만을 너 자신 의 것으로 여기고 또한 실제로 그러하듯이 다른 사람에게 속하는 것을 다른 사람 의 것으로 여긴다면 어느 때에 어느 누구라도 너를 강요하거나 저지할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너는 그 누구도 비난하거나 힐난하지 않게 될 것이다.12)
이처럼 에픽테토스는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을 긍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 는 태도, 그리고 이러한 태도를 유지하고자 쉼 없이 노력하는 의지로서의 프로하 이레시스가 자유의 영역을 구성하는 핵심적 가치라는 데 동의하였다.
에픽테토 스에게 자유란 어떤 인간이 외물적 사태의 작용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갖게 되는 프로하이레시스를 통해 불행과 행복을 검증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인 셈이다.
이 영역에서 인간은 프로하이레시스라는 특별한 선택적 의지를 통하여 일절 방해받지 않는 자유와 어떠한 것에도 아첨하지 않는 위엄을 경험한다.
다시 말해 에픽테토스적 사유 안에서 모든 인간은 프로하이레시스를 통하여 주체성을 지닌 행위의 원천으로서 기능한다.
그리고 모든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 할 수 있는 방어기제가 자신의 내부에 있다는 사실을 체험한다.
종합하면 에픽테토스의 프로하이레시스는 특정한 활동의 영위를 가능하게 하 는 습성이나 능력을 포괄한다.
프로하이레시스는 인간의 어떠한 일반적이며 보 편적인 태도를 지칭하며 특히 자유의 영역에 입각할 땐 ‘인간의 정신적 본질 전 체(das ganze geistige Wesen des Menschen)’13) 혹은 ‘자주성의 원리 (principle of autonomy)’14) 등으로 규정되기도 한다.
에픽테토스에 따르면 프로하이레시스는 본성적으로 방해받지도 강제되지도 않는다.
12) Enchiridion 1.2, “Remember, then, that if you suppose that things which are slavish by nature are also free, and that what belongs to others is your own, then you will be hindered. You will lament, you will be disturbed, and you will find fault both with gods and men. But if you suppose that only to be your own which is your own, and what belongs to others such as it really is, then no one will ever compel you or restrain you. Furthermore, you will find fault with no one or accuse no one.
13) 전헌상이 「아리스토텔레스와 에픽테토스 윤리학에서의 프로하이레시스 - ‘우리에게 달려있는 것’ 과의 연관성을 중심으로」에서 인용한 Bonhöffer. A.의 프로하이레시스 정의를 참조하여 재인용함 (131쪽).
14) 전헌상이 「아리스토텔레스와 에픽테토스 윤리학에서의 프로하이레시스 - ‘우리에게 달려있는 것’ 과의 연관성을 중심으로」에서 인용한 Dobbin. R의 프로하이레시스 정의를 참조하여 재인용함 (131쪽).
다만 인간이 스스로에게 주어진 것들을 어떻게 여기고 믿고 욕구할 것인 가에 관여한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과 욕구의 토대 위에서 마주치는 충동적 인상 들에 어떻게 동의할 것인가, 결과적으로 어떠한 선택을 도출할 것인가, 선택으로 부터 어떠한 정서적 느낌을 갖게될 것인가 등을 총체적으로 대변한다.
즉 프로하이레시스는 인간의 고유한 행위 영역에 속하며 특별히 자유의 영역 을 주체적으로 구성하게 된다.
에픽테토스에게 어떤 인간이 자유롭냐 그렇지 못 하냐에 대한 판단은 전적으로 일체의 외물적 사태에 대한 그의 생각과 욕구와 선 택에 달려 있다.
이는 인간이 프로하이레시스로 나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에픽 테토스에게 프로하이레시스는 “너는 살도 머리카락도 아닌, 프로하이레시스다.
네가 만일 그것을 아름답게 간직한다면 너는 아름다운 사람이다.(담화록 3.1.)”라는 구절에 드러나 있듯, 인간의 순수한 의지로써 내면화되며 개별화되 는 인간적 자아에 다름없다.
그가 말하는 프로하이레시스는 단순히 무언가를 선택하고자 하는 의지를 초월 하여 이러한 의지를 아름답게 간직함으로써 지속시키고자 하는 특별한 선택, 다 시 말해 ‘자기 선택’을 의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에픽테토스의 프로하이레시 스는 존엄한 인간이 실존적 자유를 구현하기 위한 필수불가결의 요소로서 자리하 게 된다.
3. 장자의 안명
운명의 특징은 부득이(不得已)함에 있다.
부득이한 것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는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부득이함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고 둘째는 안 되는 줄 알지만 자기의 목표를 향해 가는 것이다.
후자는 공자의 방식으로서 ‘지명(知命)’에 해당하며 전자는 장자의 방식으로서 ‘안명(安命)’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안명은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을 편안하게 받아들인다는, ‘안시처순(安 時處順)’의 뜻을 함축하기도 한다.15)
대체로 장자내편은 장자 본인의 사상이며 외편과 잡편은 장자의 후학 및 도가학파의 사상들이 혼재되어 있음이 공인되어왔다.16)
15) 이택용, 「중국 선진(先秦)시대의 명론(命論) 연구 : 맹자와 장자를 중심으로」, 성균관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2012, 199쪽 참조.
16) 곡본령, 「莊子의 ‘明’에 대한 고찰」, 철학·사상·문화 제20호, 동국대학교 동서사상연구소, 2019, 60쪽.
장자 사상의 원형으로 여겨지는 장자내편은 ‘운명으로부터의 해방’에 문제의식을 집중한다.
그러므로 장자가 말하는 자유란 ‘이미 실존하는 인간에게 터무니없이 주어진 불행한 운명’ 의 제약으로부터의 자유가 주된 것이다.17)
이러한 까닭에 본고에서는 실존적 자 유와 본질로서의 자유의 경계를 초월하여 장자의 자유론을 고찰함에 안명 개념을 채택하는 바이다.
장자의 사상을 논구함에 핵심 주제어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하여도 큰 이견이 없을 철학적 개념 ‘안명(安命)’은 장자 「인간세」와 「덕충부」 에서 각각 한 차례씩 명시적으로 등장한다.
스스로 자기의 본래 마음을 섬기는 자는 자신의 목전에 어떠한 일이 닥쳐오든 (施乎前) 슬픔과 즐거움으로써 그것을 바꾸려 하지 않으며, 그런 일들이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알아서 마음 편히 운명을 따르니, 이게 덕의 지극함이다.18)
장자 「인간세」에는 제(齊)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될 운명적 사태 앞에서 임 무의 성패 여부와는 무관하게 필연적으로 우환(憂患)에 빠질 수밖에 없다며 스 스로의 딜레마적 처지를 비관하는 섭공(葉公) 자고(子固)19)가 등장한다.
그런 섭공 자고에게 던지는 공자의 조언을 통해 어찌할 수 없음, 즉 ‘명(命)’과 이를 편안히 여기는 마음, 곧 ‘덕(德)’의 관계가 조명된다.
어찌할 수 없음을 알아서 운명을 따라 편안하게 여기는 것은 오직 덕이 있는 사람만이 가능하다.20)
17) 이택용, 「중국 선진(先秦)시대의 명론(命論) 연구 : 맹자와 장자를 중심으로」, 성균관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2012, vi쪽 참조.
18) 장자, 「인간세」, “自事其心者, 哀樂不易施乎前, 知其不可奈何, 而安之若命, 德之至也.”
19) 성(姓)은 심(沈), 명(名)은 제량(諸梁)으로 초(楚)나라의 대부(大夫)를 지냈다. 그가 다스렸던 영지가 섭현(葉縣)이었으므로 섭공(葉公)이라 칭한다(안병근, 전호근 옮김, 역주 장자, 전통문 화연구회, 2004, 169쪽).
20) 장자, 「덕충부」, “知不可奈何, 而安之若命, 唯有德者能之.”
또 장자는 다리가 잘리는 형벌을 받아 불구가 된 신도가(申徒嘉)를 「덕충부」 에 등장시킴으로써 신도가의 입을 빌려 인간이 삶을 영위하며 맞닥뜨리는 사태들 중에는 어찌할 수 없는 속성의 것들이 존재함을 지적하고 있다.
나아가 장자는 그러한 것들을 편안하게 여길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덕(德)으로서 수용될 가치가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장자의 안명(安命) 개념을 철학적으로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선행되어야 할 것은 장자의 ‘물(物)’ 개념에 담긴 함의를 고찰하는 일이다.
장자 철학에 있 어 물(物)이란 문자적으로 사태(事態)와 가장 일치한다.
동양철학에서 물 개념 은 외적 개물(個物)이나 물건(物件)이라는 협의적 의미로부터 내외부의 만물 (萬物)이라는 광의적 의미에 이르기까지를 모두 포섭할 수 있다.
이러한 물 개념 이 장자의 사상에서는 마치 해안선을 향해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처럼 인간의 삶을 격동시키는 사태로서 구체화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장자가 사태의 변함을 우연의 산물로만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장자는 ‘일의 변화(事變)’와 함께 ‘명의 운행(命行)’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설령 명의 운행에서 명이 인격성을 지닌 신(神)이나 상제(上帝)의 의지를 의미 하거나 운명(運命) 혹은 천명(天命)을 포괄한다고 하더라도 사태의 변함에는 명 의 운행이라는 근거가 존재하게 된다.
이로써 장자가 사태가 변하는 데에는 반드 시 그러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이 있으며 그 필연성은 명에 의거한다고 여겼음을 유추할 수 있다.21)
장자는 다시 인간이라면 반드시 마주할 수밖에 없는 일련의 사태들을 ‘명적 (命的) 사태’와 ‘비명적(非命的) 사태’로 구별한다.
가능한 것은 할 수 있고 불가능한 것은 할 수 없다.
도(道)가 행해지면 이루어 지고 물(物)은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어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어찌하여 그렇게 되는가?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어찌하여 그렇게 되지 않는가?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지 않은 까닭에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다.22)
21) 김현수, 「莊子哲學에서 命의 必然性과 循自然의 境地」, 철학·사상·문화 제10호, 동서사상연 구소, 2010, 26쪽.
22) 장자, 「제물론」, “可乎可, 不可乎不可. 道行之而成, 物謂之而然. 惡乎然? 然於然. 惡乎不 然? 不然於不然.”
장자가 강조하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며 맞닥뜨리는 일련의 사태들이 지닌 성 격이다.
이 성격은 크게 둘로 구분되는데 그것이 ‘연어연(然於然)’과 ‘불연어불 연(不然於不然)’이다.
연어연이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냥 ‘그렇게 되도록 되어진 어떤 것’이며 불연어불연이란 역시 이유를 규명하기 어렵지만 그저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지 않은 어떤 것’이다.
나아가 장자는 연어연과 불연어불연의 속성을 띠는 모든 물(物), 즉 ‘연어연 적 사태’와 ‘불연어불연적 사태’를 종합하여 명적(命的) 사태로서 환치하고 있 다.
장자 철학에서 이 두 가지 유형의 사태는 모두 인간의 의지나 노력과는 무관 한 일종의 운명적 사태로서 간주되고 있다.
나아가 장자는 갖가지 우언들을 통하 여 명적 사태의 실제적 사례들을 제시하고 있다.
장석이 말했다. 그만두고 말하지 말게. 그것은 별 볼 일 없는 나무네. 그것으 로 배를 만들면 가라앉아버리네. 그것으로 관(棺)을 짜면 금방 썩어버리네. 그것 으로 그릇을 만들면 빨리 깨져버리네. 그것으로 문짝을 만들면 송진(松津)이 솟 아나네. 그것으로 기둥을 만들면 곧 좀이 먹네. 이것은 재목이 될 만한 나무가 못되네. 쓸만한 데가 없는 까닭에 그처럼 오래 살 수 있었던 것이야.23)
「인간세」에서 장자는 인간의 지각을 통하여 인식조차 하기 어려운 거대한 나 무의 형상들을 거듭 부상시킨다.
그리고 이 나무들이 그토록 거목(巨木)으로 자 라날 수 있었던 주요한 까닭을 조명한다.
장자는 거대한 나무들이 웅장하고 우람 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를 그들에게 속한 결점이나 하자로부터 발견한다.
그 리고 이로 인해 그것들이 결과적으로 사람들의 손에 벌목을 당하지 않았음에 주 목한다.
이는 장자가 말하는 무용지용(無用之用), 즉 ‘쓸모 없음의 쓸모 있음’ 의 대표적 사례다.
그중에서 한 손이나 두 손으로 잡을 만한 굵기의 것들은 원숭이 매어 놓을 말 뚝이 필요한 사람들이 잘라갔다.
서너 아름 되는 것들은 넓고 큰 집의 들보를 찾 던 사람들이 잘라갔다.
일고여덟 아름 되는 것들은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의 집에 서 관을 짜기 위한 재료를 구하던 사람들이 잘라갔다.
그러므로 그 나무들은 천 명을 다 누리지 못하고 중도에 도끼에 찍혀 요절했다.
이것이 재목된 것들의 환 난이다.24)
23) 장자, 「인간세」, “曰; 已矣, 勿言之矣. 散木也. 以爲舟, 則沈. 以爲棺槨, 則速腐. 以爲器, 則速毁. 以爲門戶, 則液樠. 以爲柱, 則蠹. 是不材之木也. 無所可用, 故能若是之壽.”
24) 장자, 「인간세」, “其拱把而上者, 求狙猴之杙者斬之. 三圍四圍, 求高名之麗者斬之. 七圍八 圍, 貴人富商之家, 求樿傍者斬之. 故未終其天年, 而中道之夭於斧斤. 此材之患也.”
장자는 그 무용함 때문에 거목으로 생장할 수 있었던 나무들의 대조적 사례로 특정한 쓸모, 즉 소용(所用)이 있었던 나무들을 등장시킨다.
장자는 이들이 천 수를 누릴 수 있었음에도 쓸모 때문에 스스로의 명(命)대로 다 살지 못했음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장자는 유용지해(有用之害), 곧 ‘쓸모 있음의 해로움’을 부각시키고 있다.
위의 우언 두 가지는 사태를 조망하는 관점에 따라 물(物)의 해석에 다양성을 부여할 수 있다는 믿음, 즉 관점주의를 내포하고 있다. 장자는 인간이 관점의 전 환을 적극적으로 도모하였을 때 일반적으로 좋은 것이라 여겨지는 유용함이 오히 려 해가 될 수도 있음을 역설한다.
반면 상식의 범주에서는 나쁜 것으로 수용되 기 쉬운 무용함이 도리어 유용한 가치를 창출할 수도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장자 철학의 또 다른 한 축을 형성하는 ‘제물(齊物)’적 관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제물이란 모든 물(物)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는 뜻이다.
장자 는 무용지용과 유용지해, 두 가지의 대립적 개념을 통하여 결국 유용함과 무용함 이 모두 연어연이나 불연어불연에 다름없을 수도 있음을 주장한다.
이러한 장자 의 사상에 인간의 삶을 대입시켜 확장하면 유용, 곧 세상에 쓰임을 받거나 무용, 즉 세상에 쓰임을 받지 못하는 것은 모두 명적 사태로 편입될 가능성이 생긴다는 장자의 생각을 십분 유추할 수 있다.
인기지리무순25)이 위나라 영공에게 유세하자 영공이 기뻐하였는데, 이후로 영공은 몸이 온전한 사람을 보면 오히려 목이 가늘고 길다고 느끼게 되었다.
옹 앙대영26)이 제나라 환공에게 유세하자 환공이 기뻐하였는데, 이후로 환공은 몸이 온전한 사람을 보면 오히려 목이 가늘고 길다고 느끼게 되었다.
25) 안병주, 전호근의 역주장자에 따르면 인기지리무순은 「덕충부」에 등장하는 가공의 인물로 선영 (宣潁)은 남화경해(南華經解)에서 ‘그 모든 일반적인 추한 형상을 총괄해서 호칭이 되게 한 것 (總其諸般醜形以爲之號)’이라 하였다. ‘인(闉)’은 구부러짐을 의미한다. ‘기(跂)’는 사지 혹은 손발을 의미하는 ‘지(肢)’의 가차자(假借字)로 최선(崔譔)이 이를 언자(偃者), 즉 절름발이로 풀 이한 것은 적절한 듯하다. ‘지리(支離)’는 사지가 지리멸렬함을 의미한다. 「인간세」에 등장하는 인물 ‘지리소(支離疏)’를 통해 지리(支離)한 모습을 유추할 수 있다. 「인간세」는 지리소를 ‘턱은 배꼽 아래 감춰지고 어깨가 머리보다 높이 위치해 있으며 뒤로 땋아 묶은 머리는 하늘로 치솟았고 오장(五臟)은 위쪽에 붙었으며 양 넓적다리는 겨드랑이에 와 있다(頤隱於齊, 肩高於頂, 會撮指 天, 五官在上, 兩髀爲脅)’고 묘사하고 있다. 나면도(羅勉道)는 지리를 ‘육체가 불온전한 모습 (形不全之貌)’으로 풀이했고 최선(崔譔)과 임희일(林希逸)은 이를 곱추(傴)로 보았다. ‘신(脤)’ 은 곧 ‘순(脣)’, 즉 입술과 같으므로 무신(無脤)은 임희일의 주해를 따라 언청이로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종합하면 인기지리무순(闉跂支離無脤)은 절름발이에 곱사등이에 언청이가 된다(238쪽 참조).
26) 안병주, 전호근의 역주장자에 따르면 옹앙대영은 「덕충부」에 등장하는 가공의 인물로 최선(崔 譔)과 이이(李頤) 등은 ‘옹(甕)’과 ‘앙(㼜)’을 ‘거대한 혹의 모양(大癭也)’이라 해석했다. 임운명 (林雲銘)은 ‘목 아래 난 혹이 마치 항아리와 같이 크다(項下生癭大如甕盎也)’고 풀이했다. 종합 하면 옹앙대영(甕㼜大癭)은 몸 어딘가에 항아리만한 큰 혹이 붙어 있는 사람이 된다(239쪽 참조).
그러므로 덕 (德)이 뛰어난 사람에게서 외형은 잊혀지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잊어야 할 것 은 잊지 않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고 있으니 이것을 일러 ‘진짜 잊음(誠忘)’ 이라고 한다.27)
「덕충부」에서 장자는 온전한 신체가 결여된 불구자, 즉 여러 유형의 장애인을 등장시키고 있다.
당대의 유력한 제후들이 추하기 그지없는 용모를 지녔던 인기 지리무순과 옹앙대영의 덕(德)에 매료되어 그들의 형상(形象)을 잊었다는 장자 의 연출은, 다시 장자의 주요한 철학적 테마인 ‘망(忘)’ 개념으로 귀결된다.
장 자는 「인간세」에서 소용(所用)과 무용(無用)을 조명했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신체의 온전함과 불온전함이 모두 연어연과 불연어불연의 영역으로 편입될 수 있 을 역설한다.
이를 통해 장자의 인식론에서는 ‘신체의 온전함(身全)’과 ‘신체의 불온전함(身不全)’ 역시도 모두 명적 사태로 포섭될 가능성이 생김을 확인할 수 있다.
죽고 사는 것은 명(命)이다. 밤과 낮이 일정하게 항상 그러한 것은 그저 하늘 의 그러함이다. 인간이 관여할 수 없는 그런 일들이 있는 것은 모두가 만물의 실 정인 것이다.28)
27) 장자, 「덕충부」, “闉跂支離無脤, 說衛靈公, 靈公說之. 而視全人, 其脰肩肩. 甕㼜大癭, 說 齊桓公, 桓公說之. 而視全人, 其脰肩肩. 故德有所長, 而形有所忘. 人不忘其所忘, 而忘其所 不忘, 此謂誠忘.”
28) 장자, 「대종사」, “死生, 命也. 其有夜旦之常, 天也. 人之有所不得與, 皆物之情也.”
명적 사태를 단적으로 규명하려는 장자의 사유는 「대종사」에서 삶과 죽음 역 시 명(命)으로 편입시키며 최고조에 달한다.
소용과 무용, 신체의 온전함과 신 체의 불온전함 문제를 초월하여 인간의 존재론적 본질까지를 명적 사태로 편입시 키고자 하는 장자의 시도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필자가 명적 사태의 대표적 실례로 제시한 세 가지, 즉 ‘소용⋅무용’과 ‘신체 의 온전함⋅불온전함’ 그리고 ‘삶⋅죽음’은 모두 장자의 생애 및 장자 당시의 시대상과 결부되어 있다.
물론 앞서 제시한 세 가지 명적 사태 가운데 ‘소용⋅무용’의 영역은 반드시 장자의 사적인 인정 욕망만을 반영하지는 않는다.
장자철학 에서 중시되는 ‘서로 상해하지 않음(不相傷害)’의 관점에서도 ‘소용⋅무용’은 얼마든지 조명될 수 있다.
하지만 흥망성쇠가 변화무쌍했던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시대를 살았던 장자 다.
비록 안명(安命)에 삶의 방점을 찍었던 그였다지만 독자적 사유를 통해 일가 (一家)를 형성하고 그로써 세태의 인정을 받고 싶다는 욕망이 아예 없었을 리는 만무하다.
만일 장자에게 이러한 욕구가 있었다면 그것은 「인간세」의 테마이기 도 한 소용⋅무용에 관한 고찰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또 장자 당시에는 죄인을 대상으로 코를 베는 의형(劓刑), 발꿈치를 베던 월 형(刖刑), 목을 베던 대벽(大辟), 거세의 궁형(宮刑) 그리고 신체 일부에 낙인 을 찍는 묵형(墨刑) 등 오형(五刑)이 성행하였다.
이러한 시류는 「덕충부」에서 장자가 신체의 온전함⋅불온전함의 문제에 천착하는 계기를 제공했을 것이라 추 측할 수 있다.
이러한 사유를 토대로 장자는 「대종사」에 이르러 명적 사태의 본 질적 양극단, 즉 삶⋅죽음에 활착하고 있다.
종합하면 장자는 인간이 삶을 영위하며 맞닥뜨리는 물(物)의 집합을 크게 명 적 사태와 비명적 사태로서 구분하였다.
그리고 이 가운데 명적 사태의 인식에 주목했다.
장자는 특히 명적 사태를 수용하는 인간의 태도를 집중적으로 궁구했 다.
장자가 제시하는 세 가지 대표적인 명적 사태의 외에도 인간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사태는 많다.
그것들은 다음과 같다.
중니가 대답했다. ‘죽음과 삶, 보존(흥성)과 망실(패망), 곤궁함과 영달함, 가 난함과 부유함, 현명함과 어리석음, 헐뜯음(비방)과 명예(기림), 배고픔과 목마 름, 추위와 더위 등은 사물(사정)의 변화이며 운명의 유행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밤낮으로 우리의 목전에서 서로 갈마들고 있는데, 인간의 지력으로는 그 시초(근 원)가 무엇인지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은 내적인 평온을 어지 럽히기에 부족한 것이며, 영부(마음)에 침입하도록 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29)
29) 장자, 「덕충부」, “仲尼曰: ‘死生存亡, 窮達貧富, 賢與不肖, 毀譽·饑渴·寒暑, 是事之變, 命 之行也; 日夜相代乎前, 而知不能規乎其始者也. 故不足以滑和, 不可入於靈府.’”
오랜 기간 장자의 안명론은 회의주의, 비관적 운명론 혹은 패배주의 등을 위시 한 공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러한 공격으로부터 비롯된 사상사적 긴장은 장자 철학 전반에 걸쳐 여전히 산재해 있다.
중요한 것은 장자가 명적 사태 와 비명적 사태를 구별하여 인식한 것처럼 이 두 가지 사태에 대처하는 이상적인 방법론 역시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연어연과 불연어불연의 명적 사태를 직면하여서는 그것을 최대한도로 편안하게 수용하고자 노력하는 덕(德)이 필요하다.
이를 일러 ‘수동적 안명의 덕’30)이라 한다.
그리고 인간의 역량이 작용할 소지가 있는 비명적 사태에 대하 여서는 적극적이며 주체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덕이 필요하다.
이를 일러 ‘능동적 안명의 덕’31)이라 한다.
물론 능동적 안명의 덕이 발휘되려면 이미 발생한 사태에 대한 수동적 안명의 덕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수동적 안명32)의 덕을 연역할 수 있는 논거가 능동적 안명의 덕으로부터 발견될 수 있다는 데 있다.
30) ‘수동적 안명의 덕’은 논자의 고유한 표현임을 밝힘.
31) ‘능동적 안명의 덕’은 논자의 고유한 표현임을 밝힘.
32) 장자의 안명론에서 안명 개념의 원의(原意)는 수동적 안명과 훨씬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는 것이 논자의 주장임을 밝힘.
어떤 인간에게 이제까지의 생각, 태도, 관점 등을 일정한 방향으로 선회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이 의지는 능동적 안명의 덕이다.
그 능동적 안명의 덕이 발휘되는 시점으로부터 수동적 안명의 덕 역시 기능하게 된다.
장자가 그의 안명론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상정하고자 했던 인간상은 실존적 자유인으로서 주체적이며 독립적으로 기능할 수 있는 존재다.
이러한 까닭에 장 자의 안명론은, 곧 그의 자유론으로도 수렴될 수 있다.
그리고 장자 자유론의 핵 심은 능동적 안명의 의지로 수동적 안명의 수월함을 꾸준히 확보함에 있다.
4. 프로하이레시스와 안명 비교
에픽테토스와 장자의 가장 유의한 공통점은 인간의 실존적 자유를 구속하는 원인이 물(物), 즉 사물이나 사태에 있지 않고 그것들을 수용하는 인간의 인식 방법에 있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일례로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다수 의 현대인들이 재물 등 물질적 가치나 평판이나 명예, 사회적 지위 등 추상적 가치들에 의해 내적 평화를 침해받는 경우를 자주 목도한다.
단적인 예시가 될 순 있겠으나 돈이 그 자체로 인간의 삶에 가할 수 있는 해악 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돈이 없는 사태33)와 그러한 사태로부터 비롯된 모종의 억압이다.
에픽테토스는 이러한 억압을 그의 철학적 개념 가운데 ‘정념(情念)’으로서 환치한다.34)
즉 에픽테토스에게 정념 을 제거하는 일은 곧 인간의 본질적 자유와 직결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장 자의 자유론은 에픽테토스의 그것과 맥을 같이한다.
장자 역시 안명(安命)의 자 세를 통하여 각양각색의 물(物)로부터 비롯되는 파토스, 그것을 편안한 성격으 로 전환하려는 시도가 인간의 실존적 자유를 보장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에픽테토스와 장자는 그들이 바람직한 가치로서 상정한 덕(德)을 조명하는 시선에서도 유사점을 보인다.
에픽테토스가 정념의 제거를 통한 ‘아파테이아(apatheia)’의 실현을 도모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장자는 관점의 전환으로 부터 비롯된 안명적 태도의 유지를 추구하였다.
그리고 두 철학자 모두 이러한 일들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 한 인간의 덕으로서 규명될 수 있음에 동의하였다.
에픽테토스에게 덕을 희구한다는 것은 자연을 따라 그것에 합치되는 삶을 욕 구한다는 것이며 그에게 자연에 부합하는 삶이란 인간이 스스로의 본성을 자연적 본성과 일치시키고자 노력함으로써 실현 가능한 것이다.
즉 에픽테토스 철학에 서 덕에 대한 희구는 프로하이레시스 및 자연과 일치하고자 하는 욕구에 다름없 다.
장자 역시 노자로부터 이어 온 도가 철학적 사유의 중핵이라고 보아도 무방 한 ‘무위자연(無爲自然)’ 개념을 통하여 ‘안명의 덕’이란 본성의 거스름, 즉 ‘인위(人爲)’가 소거된 무위와 자연스러움에 있음을 긍정한다.
이는 에픽테토스와 장자로만 국한할 수 없는 스토아학파와 도가(道家)의 사상 적 공통점이기도 하다.
물론 에픽테토스와 스토아학파에서 말하는 자연(自然)과 장자와 도가가 주목하는 자연을 개념적으로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으로서 파악하 는 일에는 일말의 비약이 존재할 수 있다.
코스모폴리탄적 사고에 의거한 에픽테 토스의 우주적이며 신적인 자연과 자연스러움(unaffected)의 수용에 기반한 장 자의 자연은 법칙성이나 주재성 등의 세부적인 문제에서 상이한 부분을 드러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33)
이러한 특정 사태는 장자 철학에서 모두 물(物)로 포섭될 수 있을 것이다. 34)
실제로 에픽테토스 등으로 대변되는 스토아철학의 핵심적 개념은 부동요, 무감동, 무정념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 ‘아파테이아(apatheia)’다.
아파테이아는 정념, 즉 파토스(pathos)가 없는 상태를 의미하며 이러한 맥락에서 정념이란 비단 에픽테토스에서뿐 아니라 스토아철학의 사상적 시류 전반 에 걸쳐 소거되어야 할 부적절한 가치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에픽테토스와 장자 모두, 프로하이레시스로의 일치와 안명적 태도에 대한 독립적이며 능동적인 인간의 주재성을 인정했다는 사실이 다.
에픽테토스와 장자 모두 덕(德)을 매개로 구현 가능한 도(道), 즉 자연적 본성과 인간 본성의 일치 및 조화를 중요하게 여겼다.
에픽테토스와 장자는 인간 본성에 대한 신뢰의 측면에서도 유사점을 지닌다.
에픽테토스 철학에서 존재로서의 인간은 그 최초의 고귀함과 관련된 일부 표징들 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지만 부패로부터는 스스로를 격리한다.
즉 에픽테토스는 인간의 본성을 지극히 정상적이면서도 구속이 전혀 필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긴 다.
이러한 전제는 인간을, 자긍심의 절정을 경험할 수 있으며 실존적 자유를 만 끽할 수 있는 존재로 상정한다.
이런 맥락에서 에픽테토스 철학의 요지는 완전하거나 혹은 매우 이상적인, 어떤 특정한 원형으로서의 지혜와 결부되지 않는다.
에픽테토스는 보편적인 인 간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 평범한 이들의 마음가짐을 향상시키는 데 치중했 다.
이런 점에서는 장자도 에픽테토스와 큰 차이를 드러내지 않는다.
장자가 말하는 ‘안명지덕(安命之德)’은 비단 성인이나 군자들만의 소관이라고 치부하 기 어렵다.
종합하면 에픽테토스와 장자는, 그들이 덕(德)으로서 간주한 프로하이레시스 와 안명의 능력이 존재론적으로 이미 확보되어 있음을 신뢰하였던 듯하며 모든 인간이 이러한 역량을 타고났음에 대한 믿음이 있었던 듯하다. 이는 곧 인간의 실존적 자유에 대한 에픽테토스와 장자의 낙관을 방증하기도 한다. 절대로 ‘나는 이것을 잃었다’는 등의 말을 하지 말라. 오히려 ‘나는 그것을 되돌려 주었다’고 말하라. 당신의 아이가 죽었는가? 이것은 되돌려준 것이다. 당 신의 아내가 죽었는가? 그녀는 되돌려진 것이다. 당신의 재산이 줄었는가? 그렇 다. 역시 이런 식으로 되돌려진 게 아니겠는가? (…) 그가 이것을 당신에게 주어 사용하게 하는 동안 그것을 잘 돌보라. 그러나 그것을 당신에게 속한 것으로 보 지 말라. 마치 한 여인숙에 묵는 여행자처럼 말이다.35)
35) Enchiridion 1.11, “Never say of anything, ‘I have lost it’; but, ‘I have returned it.’ Is your child dead? It is returned. Is your wife dead? She is returned. Is your estate taken away? Well, and is not that likewise returned? ... While he gives it to you to possess, take care of it; but don’t view it as your own, just as travelers view a hotel.”
이처럼 에픽테토스는 인간에게 관점의 전환을 통하여 선택적 의지의 탁월성을 확보하려는 시도, 즉 프로하이레시스로의 일치를 위한 노력이 필요함을 역설한 다.
동시에 ‘여인숙에 묵는 여행자’와 같은 삶의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장자의 처가 죽자 혜자가 조상(弔喪)을 갔다. 장자는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질그릇을 두드리며 노래를 하고 있었다. 혜자가 말했다. “그대와 살며 자식을 키 우고 함께 늙었네. 그런 부인이 죽었거늘 곡을 하지 않는 것도 모자라 동이를 두 드리며 노래까지 부르니 너무 심하지 않은가?” 장자가 말했다. “그렇지 않네. 아 내가 먼저 죽었을 땐 나라고 어찌 슬픔을 느끼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그 처음을 살펴보니 본시는 삶도 없었고 삶뿐만 아니라 형체도 없었고 형체뿐만 아니라 기 (氣)도 없었다네.”.36)
36) 장자, 「지락」, “莊子妻死, 惠子弔之. 莊子則方箕踞鼓盆而歌. 惠子曰; 與人居, 長子老身. 死不哭, 亦足矣, 又鼓盆而歌, 不亦甚乎? 莊子曰; 不然. 是其始死也, 我獨何能無槩然? 察其 始而本無生. 非徒無生也, 而本無形. 非徒無形也, 而本無氣.”
주지하듯 장자 철학의 ‘찰기시(察其始)’ 개념이 명시된 대목이다.
찰기시란 ‘그 처음을 살핀다’는 뜻이다.
아내의 죽음을 대하는 장자의 태도는 관점의 전환 을 통한 ‘안명의 덕’을 시사하고 있다.
장자는 상실과 허무 그리고 슬픔 등의 ‘파토스적 충격’을 야기하는 물(物), 즉 죽음이라는 명적 사태를 직면한다.
그 리고 이러한 사태를 찰기시의 방법론을 통해 본래의 상태, 곧 ‘무(無)로 되돌아 감’으로서 수용하고 있다.
이러한 장자적 사유에는 ‘세상은 여관과 같고 인생은 그곳을 잠시 머무는 나그 네에 다름없다’는 ‘역려과객(逆旅過客)’적 태도가 깃들어 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에픽테토스와 장자의 인식으로부터, 삶을 대하는 여행자적 자세와 본성으로의 회귀를 통한 프로하이레시스의 확보 및 안명적 태도의 추구라는 공통점을 추출할 수 있다.
또 물(物)을 대하는 역려과객적 관점, 그 함의로서의 자유로움 은 에픽테토스와 장자, 양자의 자유론을 철학적 명제로서 승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철학자의 과제를 이런 일로 생각한다.
즉 그는 자신의 의지를 발생하는 사건들에 맞춰야 한다.
그래서 일어나는 어떤 사건들 중에서도 우리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지만 일어난 것이 없도록 그리고 일어나지 않은 어 떤 사건들 중에서도 우리가 일어나기를 바랐지만 일어나지 않은 것이 없도록. 철학의 과제를 떠맡은 이들에게 일어나는 결과는 이것으로, 그들은 욕구에 있어서 좌절하는 법이 없고 그들이 회피하고자 했던 것에 잡히는 법도 없다.37)
에픽테토스는 스스로의 의지가 사태에 들어맞도록 조정하려는 노력을 통해 아 파테이아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앞서 2장에서 ‘인상’이란 ‘영혼 안 에서 발생하는 겪음’이라고 하였다.
에픽테토스는 인상들이 적절하게 사용될 수 있도록 연습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자아로의 발전적 변화를 도모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에픽테토스는 프로하이레시스의 영역 가운데 특히 ‘동의’ 부분에 주 목한다.
에픽테토스에게 인간과 프로하이레시스 간 일치는 인상에 대항하여 인 상을 사용하는 ‘동의’ 연습과 일맥상통한다.
인상과 인상의 대치는 과거의 프로 하이레시스와 미래의 프로하이레시스가 투쟁을 통해 조화를 이루어갈 수 있도 록38) 의지를 발휘하는 연습인 셈이다.
이희는 애(艾) 지방의 경계를 관장하는 관리의 딸이었다. 진(晉)나라에서 처 음 그 여자를 데려왔을 때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울어 옷깃을 눈물로 모두 적셨 다. 그러나 왕의 처소에 들어 임금과 큰 침대를 같이 쓰고 소와 돼지의 고기를 먹자 처음에 울었던 것을 후회하였다.39)
37) Discourses, 2.14, “And here we conceive the work of a philosopher to be something of this kind. He must adapt his wish to what is going on, so that neither any of the things which are taking place shall take place contrary to our wish, nor any of the things which do not take place shall not take place when we wish that they should. From this result is to those who have so arranged the work of philosophy, not to fall in the desire, nor to fall in with that which they would avoid.”
38) 원문에는 ‘프로하이레시스가 프로하이레시스를 강제함(prohairesin prohairesis ênagkasen)’으로 표기되어 있다.
39) 장자, 「제물론」, “麗之姬, 艾封人之子也. 晉國之始得之也, 涕泣沾襟. 及其至於王所, 與王 同筐牀, 食芻豢, 而後悔其泣也.” 182 철학·사상·문화 제44호
인용문에서 장자는 한 여성이 적국에 포로로 잡혀가는 상황을 설정한 후 그 여성의 심경 변화를 묘사하고 있다.
이 장면은 에픽테토스 철학의 관점에서는 프로하이레시스 내 ‘충동-욕구’의 영역에 머물렀던 특정한 인상이 다시 프로하이레시스 내 ‘동의’의 영역으로 자리를 옮겨가는 과정으로서 인식될 수 있다.
그리 고 이를 다시 장자적 언어로 옮기면 명적 사태를 마주하여 애초에 견지되었던 비 안명적 태도가 안명적 태도로서 전환되어가는 단계로도 이해될 수 있다.
물론 에픽테토스의 프로하이레시스가 철학적 연습을 전제로 하듯이 장자의 안 명에 정신적 훈련의 함의까지를 부여하는 것이 가능할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에 픽테토스와 장자 모두,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들과 명적 사태를 다루는 태도가 ‘동의’로서의 프로하이레시스와 안명에 기반할 때 인간은 좌절과 후회 등 노예됨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우리가 세상에 올 때 우리는 ‘정삼각형’이나 ‘2중 단검표’ 혹은 ‘½톤’ 등에 대한 자연적 개념(physei ennoia)을 갖지 않는다.
우리가 이러한 것들을 배우게 됨은 어떠한 체계적 학습의 전달에 따른 것이다.
이런 까닭에 이러한 것들을 모르 는 사람들은 스스로 이런 것들을 안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좋음과 나쁨, 아 름다움과 추함, 어울림과 어울리지 않음, 행복과 불행, 참됨과 그릇됨, 적절함과 부적절함,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하여서는 세상에 타고난 누구라도 왜 자연적 개념을 갖지 않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모두 이런 단어들을 사용하고 이 미 우리가 마음속에 가진 개념들을 개별적 상황에 적용시키고자 노력한다.
그 결 과 우리는 ‘그는 잘했다, 잘못했다’, ‘그는 해야 할 일을 했다, 하지 않았다’, ‘그 는 불행하다, 다행하다’, ‘그는 부당하다, 정당하다’고 가치평가한다.40)
40) Discourses, 2.11, “For we come into the world with no natural notion of a right-angled triangle, or of a diesis, or of a half tone; but we learn each of these things by a certain transmission according to art; and for this reason those who do not know them, do not think that they know them. But as to good and evil, and beautiful and ugly, and becoming and unbecoming, and happiness and misfortune, and proper and improper, and what we ought to do and what we ought not to do, whoever came into the world without having an innate idea of them? Wherefore we all use these names, and we endeavor to fit the preconceptions to the several cases thus; He has done well, he has not done well, he has done as he ought, not as he ought; he has been unfortunate, he has been fortunate; he is unjust, he is just.”
에픽테토스는 이와 같은 판단 문장들의 발화를 통하여 특정한 상황에서 가치 판단을 내리는 인간의 이성을 긍정하였다.
그 까닭은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 과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들을 정확하게 구분하는 것이 에픽테토스 사상 에서 정확한 가치판단의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이 자연적 개념들에 자신의 고유한 ‘의견(oiêsis)’을 덧붙이는 현상은 에픽테토스에게 필연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 평가가 과연 정확한가의 여부, 자연적 개념들이 개별적 사 태들에 잘 적용되었는가의 여부, 가치 평가의 주체인 프로하이레시스가 ‘동의’ 와 ‘충동-욕구’의 영역을 잘 분간했는가의 여부 등이 부수적으로 철학적 논제가 된다.
그러므로 유가(儒家)와 묵가(墨家) 간에 시비(是非)가 있게 되어 상대편이 그르다 하는 것을 이편에서는 옳다 하고 상대편이 옳다 하는 것은 이편에서 그르 다고 한다.41)
41) 장자, 「제물론」, “故有儒墨之是非, 以是其所非, 而非其所是.”
하지만 장자는 가치에 대한 평가와 관련하여서는 에픽테토스와 노선을 달리했 다.
장자는 언어로 구성된 문장들이 끊임없이 옳고 그름을 따지는 소모적인 논쟁 에만 이바지하게 될 가능성을 지적했다.
그리고 이러한 폐단이 결국 ‘주장을 위 한 주장’ 혹은 ‘비난을 위한 비난’으로만 귀결될 것을 경계했다.
에픽테토스 철 학에서 자연적 개념들이 가치판단을 견인하는 절차가 불가피한 것이라면 장자의 사상은 자연적 개념들까지도 관점에 따라 충분히 전환될 수 있는 상대적 가치로 서 수용되는 듯하다.
이렇듯 에픽테토스와 장자는 모두, 근본적으로 프로하이레시스와 안명이 인간 의 본성적 측면과 결부된다는 점에 동의했다.
또한 자유로운 인간이 마땅히 지녀 야 할 삶의 지혜가 ‘선택과 의지로서의 프로하이레시스’와 ‘안명’에 다름없다는 사실을 긍정했다.
그리고 그 구체적 방법론으로서 상황에 따라 관점의 각도를 융 통성 있게 조정할 수 있는 ‘역려과객’적 태도가 견지되어야 함에 일치된 입장을 보였다.
하지만 탁월한 프로하이레시스와 안명이 숙련을 통하여 형성되거나 계발될 수 있는 것인가, 가치평가나 가치판단이 프로하이레시스와 안명의 본질에 관계하게 되는 필연성이 있는가와 관련하여서는 양자의 입장이 일말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 다.
이와 관련하여 ‘시비호오(是非好惡)’, 즉 ‘옳고 그름과 좋고 나쁨’을 모두 상대적 가치로서 포괄하는 장자 철학의 태도를 가치판단의 배제로 볼 것인가 그 렇지 않으면 판단 자체를 소거하자는 ‘무판단(無判斷)’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는 향후에 논구할 주제로 남겨두고자 한다.
중요한 점은 이성을 동반한 가치 판단을 의무에 가까울 정도로 긍정했던 에픽 테토스와는 달리 장자는 판단적 사유 전반에 회의적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양 자 모두가 각자의 자유론에서 기본 전제를 형성하는 프로하이레시스와 안명에 모종의 결심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5. 결론
이 글에서 필자는 에픽테토스의 프로하이레시스와 장자의 안명에 담긴 철학적 함의를 자유론의 관점에서 발견하고자 하였다.
인간 세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 이 ‘운명(heimarmenē)’에 따라 결정되어 있다는 스토아학파의 주장은 도덕적 책임의 소재를 말살시킨다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장자 역시 운명을 비 관하게 함으로써 더 나은 경지로 도약하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를 말살시키다는 오명으로부터 줄곧 벗어날 수 없었다.
어쩌면 에픽테토스와 장자로부터 프로하 이레시스와 안명이라는 철학적 개념이 비슷한 양상을 띠며 대두된 것은 필연적 사태일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에픽테토스와 장자 모두 프로하이레시스와 안명 개념 없이 인간의 실존적 자유를 논구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에픽테토스는 인간의 자유가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과 ‘우리에게 달려 있 지 않은 것’들을 올바로 구분하기 위하여 이성을 동원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에픽테토스에게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과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들이 중요한 까닭은 그가 이것들에 대한 정확한 앎이 완전한 자유 상태와 행복 실현에 결정적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물론 에픽테토스는 자유 확보와 행복 추구의 본질 을 견인하는 프로하이레시스가 결코 강요되거나 방해받지 않는 속성의 것이라 역 설한다.
장자는 삶에서 시시각각 밀어닥치는 물(物)을 마주해야만 하는 인간이 사태를 수용하는 관점의 전환을 통하여 안명적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실존적 자유를 만 끽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나아가 그는 안명적 태도의 지속을 위하여 명적 사태들에 순응할 수 있는 지혜를 요청한다.
필자는 명적 사태에 대 한 ‘수동적 안명’과 비명적 사태에 대한 ‘능동적 안명’, 이 두 가지 태도의 적절 성이 핵심적인 지혜가 될 수 있으리라 추론한다.
재차 강조하지만, 이미 발생한 상황에 대한 능동적 안명의 발휘에는 수동적 안명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중 요한 점은 필자가 말하는 능동적 안명의 영역에는 에픽테토스가 강조했던 이성 역시도 개입할 여지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에픽테토스와 장자는 모두, 자연의 본성과 일치 및 조화를 이루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이 프로하이레시스와 안명으로서 개념화될 수 있다는 데 동의한다.
물론 에픽테토스와 장자가 인식한 자연(自然)이 개념적으로 완전하게 일치한다고 보 기는 어렵다.
하지만 양자의 자유론에 덕(德)을 능동적으로 실현하는 인간의 주 재성, 그것에 대한 믿음이 어느 정도 깃들어 있음은 분명하다.
나아가 에픽테토 스와 장자는 본성으로의 회귀를 통한 프로하이레시스의 확보 및 안명적 태도의 추구를 강조했다.
또한 양자 모두 ‘역려과객’적 삶의 태도가 필요함에 주목했다.
에픽테토스는 외물로부터 비롯되어 프로하이레시스 내 ‘충동-욕구’의 영역에 머물렀던 특정한 인상이 ‘동의’의 영역으로 자리를 옮겨가는 데 인간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장자 역시 비안명(非安命)적 태도의 안명적 태도로의 전환 에 자유를 향해 나아가려는 인간의 노력이 필요함을 긍정한다.
하지만 이러한 과 정에 연습이 개입할 소지, 즉 연습의 필요성과 연습이 끼치게 될 영향력 등에 대하여서는 입장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에픽테토스와 장자는 가치평가나 가치판단이 프로하이레시스와 안명에 관계 하게 되는 필연성에 대하여서도 간극을 드러낸다.
에픽테토스가 적극적으로 이 성을 동원하여 정확한 판단을 내려야 할 필요성에 주목했다면 장자는 판단 자체 의 소거, 즉 무판단을 이상적 방법론으로 보았던 듯하다.
하지만 에픽테토스와 장자는 모두, 프로하이레시스와 안명에 대한 인간의 주재성은 긍정하며 그들의 자유론을 개진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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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 자원
The Discourses by Epictetus - The Internet Classics Archive; http://classics.mit.edu/Epictetus/discourses.html (검색일자: 2023년 12월 05일) The Enchiridion by Epictetus - The Internet Classics Archive; http://classics.mit.edu/Epictetus/epicench.html (검색일자: 2023년 12월 05일)
【요약문】
본 논문의 목적은 에픽테토스와 장자의 철학적 개념인 ‘프로하이레시스’와 ‘안명’을 그 공통점과 차이점에 기반하여 비교하려는 데 있다.
스토아철학에서 대표적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에픽테토스와 노자의 명맥을 이어 도가(道家) 사상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장자, 이 둘의 인식론을 그들의 사유를 적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포섭되어야만 하는 두 가지 핵심 개념을 토대로 고찰하고자 한다. 특히 에픽테토스와 장자의 자유에 대한 인식, 즉 두 인물의 자유론이 본 논고의 테마로 기능하며 이와 관련한 미시적 논의들을 견인할 것이다.
【주제어】 스토아철학, 도가철학, 에픽테토스, 장자, 프로하이레시스, 안명, 자유론
Abstract
Liberal Discourse in Epictetus and Zhuangzi -Focusing on the Concept of Prohairesis and Anming
Gunn Jegal( Catholic University of Korea )
This study set out for the purpose of comparing the philosophical concepts of Epictetus’ Prohairesis and Zhuangzi’s Anming, based on some commonalities and differences. The epistemology of Epictetus who was one of the representative philosopher in Stoic philosophy and the theory of knowledge in Zhuanzi who inherited Laozi’s thoughts and extended a new horizon in Taoist ideology, will be contemplated based on two key concepts that must be incorporated, in order to understand their thoughts accurately. Especially, the perception about liberty in which Epictetus and Zhuangzi, in other word, the Liberal Discourse of both sides will function as the theme of this paper and will lead to micro-discussions related to their stance.
【Key words】 Stoic Philosophy, Taoism Philosophy, Epictetus, Zhuangzi, Prohairesis, Anming, Liberal Discourse
논문접수일: 2023.12.20. 논문심사기간: 2024.01.10.~01.25. 게재확정일: 2024.01.25.
철학·사상·문화 제4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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