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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야기

정신분열시대의 소통과 무의식-들뢰즈와 가타리의 정신분열분석을 중심으로-/오창호 .부경大

< 목 차 >

1. 문제의 제기

2. 소통과 의식, 무의식

3. 욕망하는 기계

4. 무의식의 정신병리: 신경증과 정신병

5. 정신분열증의 언어

6. 기관없는 신체에 이르는 길

7. 결론

 

 

1. 문제의 제기

 

기본적으로 소통을 주제로 논의하는 사람들은 소통 행위를 인간의 의식적인 행위로 전제한다.

말하는 자는 전하고자 하는 분명한 생각이 있을 것이고, 듣는 자는 전해 들은 내용의 분명한 뜻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것으로 그리고 이해 가능 할 것으로 가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 소통에 성공한다면 서로는 뜻이 통하여 오해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전제하에서 사람들은 소통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하 고 그러한 소통(疏通)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판단되었을 때 불통(不通)의 원인 을 화자나 청자에게 돌린다.

화자나 청자는 소통하려는 의지가 없거나, 소통의 구체적인 기술이 없거나, 아니면 소통의 내용에 대해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인 지적 능력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소통관을 잘 보여주는 것이 이른바 ‘의사소통능력(communicative competence)’이라는 개념이다.

델 하임즈(Dell Hymes)가 노엄 촘스키(Noam Chomsky)와의 논쟁에서 의사소통능력을 언어능력과 구분해서 내용을 해석하고 전달하며 상호 협의할 수 있는 능력으로 정의한 이후 많은 연구자들이 의사소통 능력을 개념 정의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또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들과 그것의 기 능에 대해 탐구하였다(장해순, 2003).

예컨대, 위만(Wiemann, 1977)은 의사 소통능력을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의사소통 행동들을 실행하는 능력’으 로 파악하였고, 루빈(Rubin, 1990)은 ‘자신을 유지, 성장, 번성시키기 위한 환 경과의 교호작용 능력’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리고 의사소통능력을 구성하는 요소에 대해 듀란(Duran, 1983)은 사회적 침착성(사회적 상황에서의 느긋한 감정), 사회적 경험(사회적 참여와 향유), 사 회적 확인(다른 사람의 사회적 이미지 유지), 적절한 노출, 명확한 표현(적절한 구문이나 문법의 사용), 위트 등의 6가지를 제시하였다.

또 시겔라(Cegala, 1981)는 의사소통능력의 인지적 차원을 강조하여 지각력, 반응력, 주의력 같은 요인을 제시하였다.

국내에서도 허경호(2003)는 자기노출, 역지사지(易地思 之), 사회적 긴장완화, 주장력, 집중력, 상호작용관리, 표현력, 지지, 즉시성, 효율성, 사회적 적절성, 조리성, 목표간파, 반응력, 잡음통제력 등을 제시하였 다.

이들은 이러한 의사소통능력을 신장시킴으로써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나아가 사회적 적응과 성공을 성취할 수 있다고 말한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정신분열분석을 중심으로 그러나 우리의 현실을 보았을 때 소통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오히려 매우 예외 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답 답해하고, 고통받고, 갈등한다.

소통이 강조되는 현실 자체가 그만큼 소통이 이 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하겠다.

존 그레이(John Gray)는 그의 유명한 책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에서 남성과 여성 간에 소통이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금성에서 사용하는 언어와 화성 에서 사용하는 언어에는 꼭 같은 어휘들이 존재하지만, 문제는 그 어휘들이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

 

는 것이다.

불통의 문제가 어떻게 성별의 문제에 국한되겠 는가?

세대, 노사, 국가, 여야 등등 도처에 불통의 문제가 자리하고 있고 어쩌면 인간 개개인이 모두 서로 다른 별에서 왔을 수도 있다.

그래서 노르베르트 볼츠(Norbert Bolz, 2000)는 극단적으로 대화를 통해 서 로 다른 두 사람이 일치에 도달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소통한다고 믿더라도 결국은 자기 방식대로 상대방을 이해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극단적으로 니콜라스 루만(Niklas Luhmann)은 우리는 소통할 수 없는 존재들이라고 선언하기도 한다(Norbert Bolz, 2000).

그런데 백번 양보해서 ‘우리는 서로가 소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사실 선언 이 우리의 현실적 삶에 어떤 도움이나 해결이 될 수 있을까?

사실 그 자체로는 아무런 전망이나 해법이 될 수 없다.

존 그레이는 여성과 남성의 다름에 대한 인식에서 역설적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만약 여성과 남성이 금성과 화성이라는 절대적으로 다른 별에서 온 존재라면 서로는 서로에게 외계인일 텐데, 이들이 서로의 다름을 인식한다는 가정 자체가 모순이 라 하겠다.

소통이 가능한가 혹은 불가능한가 하는 사실적 물음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 라 진정으로 우리에게 절실한 문제는 들뢰즈(Gilles Deleuze, 2000)가 제기했던 바 ‘이처럼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커뮤 니케이션을 할 것인가?’ 하는 실존적인 질문이다.

우리가 서로 다른 별에서 왔다 는 사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함께 지구별에서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당위가 복합된 현실에서 우리가 당면한 소통적 상황에서 어떤 돌파구를 제시할 수 있는 소통론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소통과 불통’이라는 이원적, 대립적 구도를 벗어나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일상적으로 행하는 상호작용의 다양한 양상을 소통 혹은 불통 으로 정의하는 것은 칸트(Kant)식으로 말하면 일종의 선험적 종합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소통이란 ‘막히지 아니하고 잘 통함’이라는 선험적 형식 (transcendental form) 구체적인 일상적 삶에서 인간의 감각기관에 의해 포착되 는 앎의 재료들, 즉 경험적 자료를 종합한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나 ‘막히지 않 고 잘 통함’이란 그야말로 선험적인 것으로 현실 속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하나 의 가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수학에서 하나(1)란 숫자가 현실 속에서 는 하나의 연필, 하나의 집, 하나의 국가, 하나의 지구 등등이 모두 가능한데, 그렇다고 연필, 집, 국가, 지구가 같은 것은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개념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상호작용의 어떤 밀도, 어떤 강도의 문제로서 소통 작용을 통해서 실천적으로 소통의 당사자들이 얼마나 변형과 변화가 이루어졌는 가 하는 감응적(affective) 접근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본 논문은 소통과 불통이라는 이원적 대립 구도 위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소통 론은 의식철학의 근본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사유활동에 주목하여 사유의 성격이나 원리 및 작용을 통해 인간의 행위를 이해하고자 하는 의식철학은 일찍이 데카르트(Descarte)에 의해 정초 되었고 칸트에 의해 완성된 이성주의 철학을 말한다.

의식철학자들은 이성을 지식이나 인식의 원천으로 받 아들일 뿐만 아니라 논리를 통해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는 태도를 취한다.

그러 나 이성주의는 세상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일반화하고자 할 뿐 아니라, 감정이나 가치, 윤리 등 비이성적인 요소를 배제하 는 문제가 있다.

게다가 인간은 자신의 내면에서 자신도 모르게 진행되는 정신활 동의 영역, 즉 무의식이 존재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최근에는 의식을 무의식 과 연관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커뮤니케이션 학계는 소통의 의식적 차원 에 대해서만 주목할 뿐 무의식의 영역에 대해서는 정당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무 의식의 영역을 고려하지 않은 소통론은 현대철학의 성과를 외면하는 것이고 아무 리 잘해도 결국 절름발이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본 논문은 무의식이라는 영 역에 주목하여 무의식에 대한 현대철학의 학문적 성과를 검토하는 가운데 무의식 의 구성과 작동원리, 그리고 무의식과 의식이 어떻게 소통에 관계되는지를 규명 하고자 한다.

의식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소통은 기본적으로 정보의 전달 혹은  공유를 가능하게 하고 잘하면 상대를 배려하고 공감하려는 노력을 통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세상에 대해 뿌리 깊게 불신하는 사람, 과대망상과 피해 망상에 빠진 사람, 원망과 적대감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의식 차원의 소통 노력은 아무런 효용이 없다.

이들에게는 의식적 차원이 아니라 감응적 차원에서의 어떤 긍정적인 변화의 계기를 마련해야 비로소 소통 가능성이 열린다고 볼 수 있다.

 

2. 소통과 의식, 무의식

 

일반적으로 소통이 어려운 이유는 우선, 어떤 언표(statement)가 일의적 (univocal)이지 않기 때문이다.

개별 단어도 명시적 의미와 함축적 의미가 있고, 문장도 맥락과 상황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말로 표현한다고 하지만 힘든 감정을 감추기 위해 말로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한 친구가 “난 괜찮아”라고 했을 때, 그 친구가 정말로 괜찮다는 의미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실제로는 문제가 있지만 그것을 표현하지 않으려고 하는 의도가 담긴 표현일 수도 있다.

또 분명하게 이해하고 동의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해’라고 허용하는 의미인지, 아니면 내가 걱정할까 봐 오히려 진심으로 나를 위해 하는 말인지 불분명하다.

이 말은 심지어 나를 위로해 달라는 신호일 수도 있고, 내 일을 거들어 달라는 요청일 수도 있다.

이것은 소통과정에 심리적 요인이 개입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마음이란 우리의 주관적인 내부의 경험으로, 기억, 지각, 사 고, 감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끊임없이 일어나는 의식의 흐름으로 정의된다.

마 음의 구성요소 중에서도 특히 감정은 외부 자극에 대한 즉각적인 내부반응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예컨대, 즐거움, 슬픔, 분노, 두려움 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

감정 은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할 뿐만 아니라 그 성질이 아주 미세하고 예민하기 때문 에 타인이 그것을 알아채기는 매우 어렵다.

그러나 심리적 요인은 기본적으로 의 식적 작용이기 때문에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 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말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마음을 숨김없이 표현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상대방의 입장에 서보려는 노력을 통해 공감 능력을 키움으 로써 소통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소통은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해서 그것으로 종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 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언어는 나의 마음을 전달하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나의 마음이라는 것도 그것의 정체에 대해 나 자신도 불확실 하다.

그래서 우리는 말해 놓고도 만족하지 못하고, 말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도 후회한다.

이렇게 삶이 지속되는 한 소통의 문제도 지속된다고 할 수 있는데, 그 것은 데리다(Derrida)가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가 소통을 위해 사용하는 언어기호는 끊임없이 대리 보충되면서 차연(differance)되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언 어의 의미작용의 연쇄 속에서 메시지의 의미는 궁극적으로 결정되어 있거나 확정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대체 가능한 언어해석으로부터 다른 해석으로 미 끄러질 뿐이다.

뿐만 아니라 정신분석학에서는 언어로 표명된 것은 근본적으로 식역하(識閾 下)의 무의식적 욕망이 현실화한 하나의 증상(symptom)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 한다.

예컨대 프로이트(S. Freud)는 인간의 정신구조를 빙산에 비유하면서 마치 빙산의 대부분이 수면 아래에 가려져 있는 것처럼 정신의 대부분은 의식의 표면 아래에 있는 무의식 영역에 속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 무의식의 영역은 인 간이 성장하면서 의식의 영역에 두기에는 너무 위협적이거나 고통스러운 생각, 감정, 기억, 경험, 충동 등이 억압된 결과 생겨난 수치심, 죄책감, 열등감, 상처 받은 경험, 성적 욕구, 공격적 욕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인간의 의식이란 이러한 무의식이 만들어내는 일종의 꿈의 극장으로 볼 수 있다 고 주장하였다.

또 다른 정신분석학자인 라깡(Lacan)은 주체가 태어나기 이전에도 이미 존재 하고 있던 대타자(the Other)의 목소리가 무의식을 구성한다고 주장하였다.

프 로이트의 무의식이 욕망의 개인심리적 구도에서 파악된다면, 라깡의 그것은 욕 망의 사회문화적 상징성의 구도에서 파악된다는 특징이 있다.

그는 아이가 오이 디푸스기를 거치는 과정에서 상징적 질서인 언어를 배우면서 유기체로서의 욕구 (need) 중에서 언어로 담아낼 수 없는 욕구가 의식의 심층 저변으로 억압되어 무의식적 욕망(desire)을 형성한다고 보았다.

라깡에게 있어 무의식은 기본적으로 언어로 대표되는 대타자의 목소리의 효과인 것이다.

이 대타자는 주체의 외부 에 있으면서 주체에게 요구하는 언어, 문화, 법, 규범 등의 상징적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이러한 대타자의 요구에 대해 비교적 잘 적응해서 인정과 승인 을 받게 되면 무의식이 형성되지 않지만, 적응에 실패해서 인정받지 못하고 거부되면 처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무의식을 형성하게 된다고 보았다.

이렇게 무의식이 어떻게 해서 형성되는지에 대해서는 학자에 따라 설명이 다 르지만, 그렇게 형성된 무의식은 결코 침묵에 잠겨있지 않다.

이렇게 형성된 무 의식은 그러나 꿈을 통해, 착오행위를 통해, 신경증 혹은 광기를 통해 위장된 모 습으로 도처에서 말하고 있다고 말한다.

즉, 소통과정에서 화자와 청자가 동원하 는 각종 표현들은 액면 그대로 수용 가능한 진실이라기보다는 무의식이 작용한 위장된 가면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에서는 무의식이 의식에 영 향을 주어 의식과 상호작용하면서 우리의 사고나 행동에 영향을 주는 다양한 양 상을 무의식의 역동(the dynamics of the unconscious)이라고 한다.

예컨대 프 로이트는 무의식적 욕망이 의식적으로 드러날 때 유사한 무의식적 내용이 하나의 꿈으로 표상되는 압축(condensation)의 메커니즘과 사회윤리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무의식적 내용이 검열을 피해 사소한 꿈으로 바뀌어 표상되는 치환 (displacement)의 메커니즘이 작동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인간 정신이 의식적 행위 역시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면, 일상적인 커뮤 니케이션을 포함하는 모든 커뮤니케이션 행위의 근저에는 무의식이 작용하고 있 다고 할 수 있다(조종혁, 2010. 314쪽).

기본적으로 정신분석학(psychoanalysis)은 무의식에 대해 부정적인 기조를 유 지하고 있다.

그것은 애초에 정신분석학의 출발이 히스테리(hysteria)나 신경증 (neurosis), 정신병(psychosis) 등 정신병리학적인 증상에 대한 치유의 과학으 로 탄생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프로이트는 신경증을 고치려면 무의 식 속에 눌려있던 감정을 자유연상을 통해 정상적 통로를 통해서 의식계(意識 界)로 방출함으로써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를 극복하면 된다는 이론을 세웠다.

그리고 라깡은 인간의 욕망, 또는 무의식이 언어라는 상징을 통해 나타난다고 주장하면서 언어란 틀 속에 억눌린 인간의 내면세계에 대한 해 부를 통해 궁극적으로는 안정된 주체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핵심적 인 계기가 되는 것이 역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이다.

즉,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 는 통로를 통해 언어라는 상징계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무난히 성공하게 되면 상 징계 안에서 안정과 적응을 도모하게 되지만, 실패하게 되면 정신적/사회적 부적 응의 문제를 겪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프로이트와 라깡의 이러한 관계에 대해 들뢰즈와 가타리(Deleuze & Guattari)는 프로이트가 인격적 개념으로 파악했던 가족구조(엄마-아빠)를 라깡은 구조적 기능(엄마의 기능, 아빠의 기능)으로 전환 시켰다고 말한다.

즉 라깡은 어머니의 인격에 대한 욕망을 거울 단계의 동일화 (identification)로, 아버지와의 동일화를 법과 언어 질서의 상징적 구별 (differentiation)로 대체했다는 것이다(이병창, 2008. 39쪽).

결국 정신적 치유의 과학으로서 정신분석학의 기본적 과제는 각종 정신증의 발생원인이 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작동방식을 규명하고 이에 대해 환자가 명확히 자각하도록 함으로서 궁극적으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것이 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들뢰즈와 가타리가 정신분석학에 대해 비판하는 지점이 바로 이 오이디푸스의 실체에 대한 것이다.

이 점은 그들의 저서 반-오이디푸 스라는 책의 제목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오이디푸스에 대한 그들의 비판의 핵 심은 오이디푸스가 아이들의 욕망이 아니라 어른들의 욕망이라는 것이다.

따라 서 오이디푸스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 억압이 만들어낸 허구(망상)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말한다.

 

“오이디푸스는 신경증의 어린 시절의 감정이기 이전 에 무엇보다도 먼저 편집병에 걸려 있는 어른의 관념이다.”(Deleuze & Guattari, 1983. p.274).

“오이디푸스는 어떤 욕망의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어른들의) 억압이 욕망과 관련해서 아이들에게 심어놓은 하나의 관념일 뿐이 다.”(Deleuze & Guattari, 1983. p.115).

 

따라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어른들의 망상적 허구물인 오이디 푸스의 가족 삼각형, 즉 “나–엄마–아빠 ‘의 구조를 해체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 들의 책인 안티-오이디푸스를 영문으로 번역했던 씸(Mark Seem)의 주장에 따르면, 들뢰즈와 가타리는 정신분석학에서 에고(ego)가 ‘인간 속의 지나치게 인간적인(all-too-human in mankind)’ 존재로 상정된 점에 주목하였다.

그들 은 니체의 입장을 따라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에고를 비판하면서 정신분 석학이 ‘인간 속의 비인간(nonhuman in man)’, 즉 에고의 의지(will), 힘 (forces), 그것의 변형과 형태변이에 주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연 대 인간’이라는 이항 대립적 구도 속에 사로잡힌 나머지 힘과 그것의 흐름, 즉 권력 (power)의 속성을 지각하는데 실패하여 에고를 어떤 전체적이고 단일적인 존재 로 이해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온순하고 순종적인 주체를 구성하는 결과를 낳았다 고 비판하였다(Deleuze & Guattari, 1983. p.xx).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러한 에고에 기반한 자아의 회복이나 주체의 구성은 가 능하지도 않을뿐더러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보았다.

자아가 회복됨으로써 정신병 이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아야말로 정신병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들 에 따르면 정신분석학은 근본적으로 문제를 잘 못 설정한 것이며 따라서 치유의 방법과 방향도 모두 잘 못 되었다.

그들은 마치 불교가 세속세계의 번뇌를 벗어 나기 위해서는 아상(我相)을 파괴하여 무아(無我)를 증득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과 매우 비슷하게 어떤 온전하고 단일한 자아를 깨부수고, 돌파하는 분열 (schiz)로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라깡식의 상상계와 상징계의 구분 이 오이디푸스적 구조의 출현을 가능케 하는 바, 이 굴레와 이 굴레가 초래한 죽을 것 같은 신경증으로부터 욕망의 다양체(multiplicity)를 해방해야 한다고 주 장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묻는다.

 

신경증 환자치고 심한 경우 정신분열증의 예후가 없는 사람이 있는가?

우리 중에 오이디푸스의 유치원의 울타리를 벗어나서 도착 된 토지에 드나들지 않는 자가 있는가?

우리 중에 욕망의 흐름 속에 있는 용암과 물을 느끼지 않는 자가 있는가?

우리 모두는 하나의 과정으로서 정신분열증을 알 고 있는 병자들이다.

정신분열자(schizo)는 무엇보다도 오이디푸스화되지 못한 사람이다.

분열자는 ‘아버지-어머니-나’라는 가족 삼각형에서 유래하는 문제들 에 골몰하는 곳이 아니라 어떤 다른 곳, 이들 문제를 넘어선 곳, 그 아래인 곳, 그리고 그 뒤에 있는 사람이다(Deleuze & Guattari, 1983. p.23).

 

그들은 정신 분열자에 대한 자신들의 이러한 작업을 정신분석(Psychoanlaysis)과 대비하여 분열분석(Schizoanalysis)이라고 명명하였다.

 

3. 욕망하는 기계

 

소통의 문제가 발생하는 지점은 여럿 있을 수 있다.

예컨대, 서로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 서로 소통하기 위해서는 외국어 번역의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라면 배움이라는 난제(crux)를 넘어야 할 것이다.

또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 사이 임에도 불구하고 전달하는 사람과 전달받은 사람 사이에서 그 내용에 착오가 생 긴 경우라면 정보이론이 말하는 이른바 소음(noise)이라는 난제를 넘어야 할 것 이다.

또 전달하는 사람과 전달받은 사람의 내용 사이에 착오가 없음에도 불구하 고 오해가 생기고 왜곡이 생기는 경우라면 두 사람 간의 심리적 불신이나 문화적 차이라는 난제를 넘어야 할 것이다.

사실상 지금 많은 소통이론들은 이러한 난제 들을 넘어서기 위해 그 난제들의 성격을 이해하고 그 난제들을 극복하는 해결책 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 주목하는 것은 지금까지의 난제들보다 훨씬 깊은 곳에 자 리 잡고 있으면서 지금까지의 난제를 때로는 출현시키고, 때로는 도착시키고, 때 로는 변형시키는 방식으로 도처에서 작용하고 있는 그런 난제, 즉 무의식이라는 난제이다.

사람들이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어 대화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데도 소통이 되지 않는 것을 우리는 일상적으로 본다.

그리고 어떤 문제가 있을 때 당사자가 아무리 해명을 해도 끝없이 의혹을 제기하면서 평행선을 달리는 경 우를 자주 목격한다.

불신 앞에서 사실은 무능력하며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않는다.

게다가 서로가 불신을 넘어 적대적 관계에 들어선 사람들 사이에서 는 이제 더 이상 말과 글은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상대를 공격하기 위한 무기가 되어버린다.

극단적인 경우 서로는 서로에 대해 도저히 소통이 불가능한 미친놈, 정신이상자라는 딱지를 붙이게 된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에 대해 모두 미친 사람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미친 사람과 정반대의 극점에 ‘정상의 사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오히려 폭력적인 태도일지도 모른다.

일찍이 푸코(M.P. Foucault. 1961)가 지 적했듯이, 서양의 역사에서 광인에 대한 인식은 시대의 에피스테메(episteme)에 따라 변해왔다.

르네상스 시대 광인의 행동은 유별나기는 해도 정상인과 크게 다 르지 않은 ‘특별한 사람’으로 여겨졌으나 고전주의 시대에는 광인을 이성이 결여 된 그래서 실업자나 건달, 혹은 범죄인과 더불어 사회 질서를 무너뜨릴 수도 있 는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되었다, 그리고 프랑스혁명 이후 근대세계에서는 인도주의 정신에 따라 치료를 받으면 정상인이 될 수 있는 ‘정신질환자’로 바뀌어 왔던 것이다. ‘강력한 적들을 물리치고 아름다운 귀부인과 결혼하는’ 꿈을 위해 위험천만한 모험을 떠나는 천방지축의 돈키호테(don Quijote)가 여행 중에 여기 저기서 심각한 민폐를 끼친 것은 물론 국가 체제에 저항하는 범죄를 저질렀음에 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를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환자로 취급함으로써 사회의 질서에서 교묘하게 배제하는 방법을 택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사실 우리는 모두 내면 깊숙한 곳에 나만의 돈키호테를 갖 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러한 돈키호테의 존재는 어떻게 보면 인간의 소통을 가로막는 큰 장애이지만 다르게 보면 모든 허위와 가식의 가면을 찢고 진솔하고 창조적인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큰 축복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대승기신론>에서 일심(一心)에 이문(二門), 즉 생멸문(生滅門)과 진여문(眞如門)이 있다고 이 야기하듯이 돈키호테의 존재는 우리를 천국으로도, 지옥으로도 인도할 수 있는 무규정적 존재이자 어떤 힘이다.

이것은 물질적 세계와 개인의 의식을 포함한 다 른 모든 것들을 (삶의) 의지(the will to live) 혹은 욕망의 표상으로 파악했던 쇼펜하우어(Schopenhauer)가 비합리적이고 맹목적인 힘(force)이라고 불렀던 존재, 일종의 잠재적 능력으로 스피노자(Spinoza)가 파악했던 역능(puissance) 이라는 존재, 혹은 니체(Nietzsche)가 권력의지(will to power)라고 불렀던 존 재라고 할 수 있다(Deleuze, 1983. p.85).1)

 

     1) 니체의 권력의지에서 권력과 의지의 관계는 마치 “의지가 권력을 원한다”(the will wanted power) 와 같이 의지가 의식적으로 어떤 권력을 원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권력은 의지의 발생적 요소 (genetic element)로 의지의 성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욕망의 주체도 욕망의 대상도 없는 이와 같은 욕망에 대해 이병창은 ‘그저 운동의 벡터만을 갖는 욕망’이라고 표현한다. 이병창, 「들뢰즈와 라깡, 실재계와 초자아」, 2008, 36쪽. 

 

들뢰즈와 가타리는 프로이트식으로 무의식을 욕망의 억압에 따라 형성된 것으 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를 움직이는 근본적인 힘으로 본 니체식으로 파 악한다.

그것은 무의식을 의식과 대립적인 개념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 에 앞서서 의식의 뿌리로 존재하면서 의식에 통일성을 주는 것으로 파악한다.

의 식이란 현재화한 기억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고, 현재화하지 않은 기억은 곧 무의 식이 된다.

무의식이란 의식을 다른 의식으로 변환시키는 욕망의 흐름,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자, 의식의 형태로 습관화되고 고착화된 사고방식을 넘어서 자유자재로 새로운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러한 무 의식을 표현하기 위해 ‘욕망하는 기계’(desiring-machine)라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었다.

이 용어는 의지(will) 혹은 권력의지(will to power)의 다른 표현인 욕망(desire)과 프로이드의 이드 혹은 리비도를 변형한 다른 표현인 기계 (machine)를 결합한 용어라고 할 수 있다.2)

 

    2) “id라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 모든 곳에는 기계(machines)가 작동하고 있다.” Gilles and Felix Guattari, Anti-Oedip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Mineneapolis: University of Minnessota Press, 1983, p.1. 

 

우선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을 어떤 결여(lack)와 연관해서 파악하는 입장을 비판한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욕망은 끝이 없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욕망을 어떤 소유, 취득과 관련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들은 말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현실적으로는 없는 무언가를 욕망한다면, 그것은 그것(fantasized object)이 있는 상태를 환상적으로 상상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그 러한 환상을 만들어내는 것이 결여의 본질이라는 것이다(Deleuze & Guattari, 1983, p.25).

 

결여는 언제나 이 현실 말고 다른 현실이 있는 것처럼 세상을 이 중화시킨다.

즉, 결여는 없는 것을 상상하지만 욕망은 현실적인 것을 원한다.

만 약 욕망이 비현실적인 것을 원한다면, 그것은 건강하고 진정한 욕망이라기보다 는 병들고 도착된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런 욕망은 기본적으로 모 든 존재를 근본적으로

“치유할 수 없는 부족한 존재”

“삶 자체가 될 수 없는 불구 적 존재”

로 보기 때문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욕망을 결여와 연관시켜 이해하는 입장에 반대하여 주창하 는 것은 욕망이 생산적이라는 입장(desiring-production)이다.

그들은 욕망은 도처에서 작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숨을 쉬고, 열을 내며, 먹는다. 그리 고 욕망은 짝을 지어 작동하면서 뭔가를 생산해 낸다.

마치 꽃이 달이 차고 이지 러짐에 따라 대기를 빨아들이듯, 아이의 입은 배가 차고 고픔에 따라 엄마의 가 슴에서 젖을 빨아들인다. 그런데 이와 같이 작용하는 욕망은 아이의 입이 있고, 엄마의 가슴이 있어, 이들이 짝으로 접촉하는 방식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아 이의 입이 엄마의 가슴으로부터 젖을 빨아들이면서 성장하지만, 그와 동시에 엄 마는 젖을 빨아들이는 아이의 입을 통해 엄마로서 성장하는 ‘생산의 과 정’(process of production) 속에 구분되지만 구별되지 않는 방식으로 입과 가슴 으로 존재한다.

이처럼 욕망에서는 생산이 일차적이고 입이나 가슴은 그러한 생산 과정의 부 분일 뿐 어떤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생산뿐만 아니라 분배나 소비도 모 두 생산이다.

게다가 들뢰즈와 가타리가 상정하는 욕망은 인간학적 의미를 넘어 선다.

그것은 상투적인 ‘인간 대 자연’이나 ‘사회 대 자연’과 같은 이분법에 가 로막히고 차단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 울타리를 가로지르면서 흐르는 과정이다.

다시 말해서 자연과 인간, 사회와 자연, 산업과 자연과 같은 구별이 전혀 없기 때문에 ‘자연의 인간적 본질’과 ‘인간의 자연적 본질’이 생산 혹은 산업이라는 형태 속에서 하나가 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리고 욕망은 어떤 종착지나 목표 를 가질 수도 없지만 무한히 영속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어떤 실체(entity)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흐름(flow) 위에서 생산되고 재생산되는 영구적 변 주의 우주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Deleuze & Guattari, 1983. p.5).

들뢰즈와 가타리는 인간과 자연을 회통하여 인간의 의식세계보다는 훨씬 깊은 곳에 자리하면서 도처에서 생산적으로 작용하는 욕망을 표현하기 위해서 인간학 적 의미가 깊게 배인 이드나 리비도보다는 기계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해서 “욕망은 기계다”(Desire is a machine)라고 선언한다(Deleuze & Guattari, 1983. p.26).

그들에 따르면 욕망하는 기계가 무의식의 깊은 밑바닥 에서 윙윙거리며 작동하고 있다.

그가 이렇게 욕망을 기계(desiring-machine)라 고 선언하는 것은 욕망을 인간의 관점에서 ‘아빠-엄마-나’라는 가족 삼각형의 오이디푸스적 구조(Oedipal sructure)의 문제로 파악하는 정신분석의 입장과 차 별하기 위한 것이다.

그들에 따르면 무의식은 욕망의 극장으로 볼 것이 아니라 욕망의 공장으로 보아야 한다.

그들이 이렇게 무의식을 기계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기계가 중단 혹 은 절단들의 체계로 정의될 수 있기 때문이다(Deleuze & Guattari, 1983. p.36).

모든 기계는 연속하는 물질적 흐름(질료)을 체취-절단(cutting-breaks) 하는 작용을 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연속하는 물질적 흐름’에는 물이나 공 기, 소리는 물론 사람의 신체에 흐르는 열이나 어떤 공간에 흐르는 분위기까지 포함되는 한 물질이 관념으로 소유하고 있는 순수한 연속성을 말한다.

예컨대 대 한민국이 연속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단순히 영토나 주권 그리고 국민만을 의미 하지 않고, 역사나 문화, 언어, 정신 따위가 모두 포함될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절단의 체계로서 한 기계는 다른 기계의 기계가 된 다.

다시 말해서 기계는 흐름을 생산한다고 여겨지는 다른 기계와 연결되어 있는 한에서만 흐름의 절단을 생산한다.

또 기계는 그것이 연결되어 있는 기계에 대해 서는 흐름의 절단이지만, 그것에 연결되어 있는 기계에 대해서는 흐름 자체 혹은 흐름의 생산이다.

게다가 연결의 극한에서 절단과 연결은 하나로 합쳐져서 ‘흐름 -절단’(breaks-flows)이 되는데, 그곳에서 욕망은 샘솟고 생산하는 활동과 생 산물은 접목된다.

무의식을 기계라고 부르는 두 번째 이유는 이 기계가 흐름의 순환적 과정에서 일종의 잉여가치(surplus value)를 떼어낸다는 점이다.3)

 

     3) 들뢰즈와 가타리는 코드의 잉여가치 창출 현상을 버틀러(Butler)의 다음과 같은 주장에서 차용하고 있다. 즉, 기계의 한 부분이 자신의 코드 속에 다른 기계의 코드 단편을 받아들여 이 다른 기계의 한 부분의 덕택으로 자기를 재생산하는 경우이다. 예컨대, 난초과 식물인 오르쉬드와 이것이 끌어 당기는 말벌 수컷의 경우, 오르쉬드는 그 꽃에 말벌 암컷의 모습과 냄새를 지님으로써 말벌 수컷을 불러들인다. Gilles and Felix Guattari, Anti-Oedip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Mineneapolis: University of Minnessota Press, 1983, p.285.

 

 

이것이 가능한 것은 모 든 기계에는 코드(code)가 끼어들어가 있고 저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 기관기계는 서로 다른 여러 흐름에 연결될 수 있는 코드를 가지고 있다.

입은 밥을 만나서 ‘먹는 입’이 될 수도 있지만 친구를 만나서 ‘말하는 입’이 될 수도 있고, 또 맑은 공기를 만나서 ‘숨 쉬는 입’ 등등이 될 수 있다.

욕망은 이렇게 기관 들로 하여금 여러 기능들 사이에서 망설이게 한다.

따라서 욕망하는 기계의 코드는 결코 기호와 의미가 일대일의 대응관계를 갖거나, 선형적인 특성을 갖는 언어기호 라기보다는 차라리 은어 혹은 열려 있고 다의적인 형성체를 닮았다고 말한다 (Deleuze & Guattari, 1983. p.39).

이렇게 해서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or)” 의 양자택일의 방식이 아니라 “이것이건 저것이건(Either...or...or)”의 거대한 이접적 종합(disjunctive synthesis)의 그물망이 생긴다.

기계는 이렇게 이탈-절 단(detachment-breaks)의 방식으로 이접적 종합의 그물망의 도처에서 분열 (schizzes)을 만들면서 새로운 흐름을 생산한다.

마지막으로 무의식을 기계라고 부르는 세 번째 이유는 욕망하는 기계의 작동 과 더불어 혹은 작동하고 난 후에야 주체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산된 주체는 흔히 생각하는 인격적 정체성을 갖는 주체가 아니라 단지 하나의 부분으 로서 기계의 주변부이자 흐름으로부터의 체취와 연쇄로부터의 이탈에 대응하는 그러한 부분으로서의 주체이다.

따라서 이 주체는 당연히 어떤 고정된 주체가 아 니라 매 상태를 거치면서 이 상태를 남김없이 소비하며 그리고 그 소비를 통해서 새롭게 태어나고 생산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매일 매일 변하는 존재이자 매 일 매일 새로워지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아(ego) 혹은 자기 동일성 (self-identity)이 있을 수 없는 주체이다.

이는 흐름과 절단이 접속하고 이접하는 배치 혹은 배열, 루빈스타인(D. Rubinstein, 2021)식의 표현으로는 열역학적 인 흐름과 정지의 별자리(constellation of thermodynamic stoppages and flows)가 생산해 내는 효과라고 할 수 있는데, 들뢰즈와 가타리는 기계의 이러한 절단을 잔여-절단(residual break)이라고 부른다.

 

4. 무의식의 정신병리: 신경증과 정신병

 

현대인들은 어떤 형태로든 어느 정도는 미쳐있는지도 모른다.

현재 자신의 모 습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불만족을 채우기 위해 또는 더 큰 성취를 위 해 기꺼이 살벌한 경쟁의 레이스에 뛰어든다.

경제적 형편에 불만인 사람들은 돈 에 미치고, 타인의 관심과 애정에 불만인 사람들은 사랑에 미치고, 타인의 인정 과 헌신에 불만인 사람들은 명예에 미치고, 타인의 복종과 지배에 불만인 사람들 은 권력에 미친 사람들이다.

불가(佛家)에서는 목이 말라 애타게 물을 찾듯이, 몹시 탐내어 집착하는 것을 갈애(渴愛)라고 한다.

갈애는 감관에 따라 보이는 것에 대한 갈애, 소리에 대한 갈애, 냄새에 대한 갈애, 맛에 대한 갈애, 감촉에 대한 갈애, 마음현상에 대한 갈애로 여섯으로 분류된다.

이에 따라 눈은 보고 싶 은 것만 보려고 하고, 귀는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고 하며, 코는 향기로운 것만 맡으려고 하고, 혀는 맛있는 음식만 맛보려고 하며, 몸은 부드러운 것만 감촉하 려고 하고, 마음은 지향하는 것만을 따라가려 한다.

사람들은 뭔가에 미치면 눈 도 귀도 마음도 멀게 되어 정상적인 판단력을 잃게 되는 일종의 분열증을 앓게 된다.

불가에서는 이 갈애가 모든 번뇌의 바탕이 되고 윤회를 반복하게 하는 원 인이라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현실세계의 살벌한 생존경쟁과 자기 이익에만 몰두한 나머지 서 로 약탈하고 약탈당하는 야만적인 전쟁상태를 경험하면서 사람들이 정의를 이야 기하고, 평등을 이야기하며, 인권을 이야기하는 것들이 모두 위선과 가식으로 느 껴지고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잡아먹으려 노리고 있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미친 사람이 있다.

루쉰의 <광인일기>의 주인공이 그러하다.

여기서 주 인공은 남들이 자기를 노려보고 수군대며, 자신을 험담하는 등 자기를 해치려는 음모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인간사회가 동물적인 식인사회라고 생각한 다.

현실 질서에 익숙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광인이 단지 피 해망상증 환자로 보일 뿐이다.

그러나 광인의 입장에서 보면 기성체제에 익숙한 사람들이야말로 미친 사람들이다.

그들이 하는 말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 는 것이 하나도 없다.

우리가 무의식적 주체 혹은 분열적 주체에 주목할 때, 흔히 우리가 의식적으로 하는 말과 행동은 그 자체로 어떤 확실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 아니라 분열적 주체의 어떤 상태를 보여주는 하나의 증상(symptom)으로 간주되어 야 한다.

일반적으로 증상이란 질병 또는 그 외의 다른 이유로 인해 환자의 신체 에 나타나는 다양한 상태 또는 느낌을 말한다.

예컨대 몸에 열이 있거나 기침을 할 때 그것은 병원체가 몸에 침투해 감염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상이 있 듯이, 소통 상황에서 하는 말이나 표현은 화자의 무의식 상태가 현실적으로 드러 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신체에 특이한 증상이 없을 때 그 사람은 건강하 다고 말하듯이 말이나 표현에 아무런 꾸밈이나 위선이 없이 진솔하고 자연스러울 때 그의 무의식은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신체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신체에 대한 특별한 의식이 없듯이, 무의식 이 건강한 사람은 무의식에 대한 특별한 의식이 없다. 예컨대 과거에 나의 욕망 이 부모에 의해 금기됨으로써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는 기억이나 발달 단계에서 공개적으로 처벌받고 치욕을 당했던 트라우마의 경험이 없는 것이다.

아니 정확 히 말하자면 그런 경험이 없었다기보다는 그런 경험으로부터 상처를 받지 않았고 더욱이 그것을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 과거란 기억해 야 할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두 번 다시 같은 역사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미래를 위한 각오와 교훈이다. 세상도 변했고 사람도 변했다.

이렇게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변하는 가운데 나 역시 변했다.

이렇게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모든 것들이 변하는 무상(無常)한 세상에서 고집할 것도 집착할 것도 없이 ‘지금-여기’에 집 중하여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무의식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살아오면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많은 상처를 받고 이를 하나하나 기억하고 또 그 상처에 따른 감정을 마음속에 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거대한 무 의식의 덩어리가 쌓이게 된다.

그리고 무의식이 의식에 미치는 힘의 정도에 따라 수많은 정리병리학적 증후들을 보이게 된다.

상대방에게 적의가 숨어 있다고 판 단하여 자신이 피해를 받을 것이라는 심각한 걱정이나 두려움으로 끊임없이 매사 를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는 편집증(paranoid)이나 막연한 타인을 기준으로 그 기준에 맞추려고 과도하게 집착함으로써 불안해하거나 우울해하고 공포를 느끼 는 신경증(neurosis),4) 그리고 망상과 환상에 사로잡혀 기괴한 행동을 하거나 현실감각을 상실하여 정상적인 사고와 행동을 할 수 없는 정신병(psychosis) 등 을 들 수 있다.

 

     4) 이러한 신경증에 대해 들뢰즈와 가타리는 세 가지 유형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공포증 환자 (phobic person)로서 이들은 항상 내가 다른 사람, 특히 부모를 실망시키지 않을까, 혹은 내가 부 족하고 뭘 못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스스로를 억제함으로써 공포자극에 노출되면 즉각 적으로 반응하는 불안심리이다. 둘째는 강박증 환자(obsessed person)로서 원하지 않는데도 어떤 

생각이나 충동, 장면이 침투적이고 반복적으로 떠올라 현저한 불안감이나 괴로움을 겪는다. 이로 말미암아 강박증 환자들은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게 되고, 사회적으로나 직업적으로 현저한 고통과 기능의 손상을 경함한다.셋째는 히스테리환자(hysterical person)로서 정신적, 심리적 갈 등으로 인해 발생하는 이상 성격을 의미한다. Gilles and Felix Guattari, Anti-Oedip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Mineneapolis: University of Minnessota Press, 1983, p.75.

 

그런데 전통적인 정신분석학, 특히 프로이트는 신경증과 정신병의 정신 과정 에 대해 이 둘은 근본적으로는 동일한 기제에 의한 서로 다른 두 양상으로 보았 다.

즉, 이 둘은 공통적으로 욕망의 차원(id)과 현실의 차원(ego) 그리고 규범적 차원(superego) 간의 구조화된 체계로 이루어진 인성(personality)이 ‘아버지어머니-나’라는 가족삼각형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형성 되는 서로 다른 두 양상이라는 것이다.

신경증은 자아가 현실의 요구에 복종하여 이드의 욕동을 언제라도 억제할 용의가 되어 있는 반면, 정신증에서 자아는 이드 의 지배하에 있으면서 현실의 요구와 단절하는 것을 개의치 않는다.

신경증은 리 비도가 오이디푸스의 금지를 만나 심리적으로 억제되면서도 그 억제된 내용이 왜 곡된 형태로(히스테리의 기억상실, 강방신경증적 취소) 되돌아오는 현상과 관련 이 있다.

반면 정신증은 대상 표상에 집중되었던 리비도를 철회하면서 현실감이 붕괴되는 것과 관련이 있는데, 잃어버린 현실감은 망상적 재구성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서 정신병자는 오이디푸스화를 감내하지 못하는 사람이고, 신경증환 자는 오이디푸스를 감내하고 심지어 오이디푸스화에 만족하고 또 오이디푸스 속 에서 진화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환언하면 신경증환자는 오이디푸스화가 각인된 사람이라면 정신증환자는 오이디푸스화가 각인되지 않은 사람이다 (Deleuze & Guattari, 1983. p.124).

정신증환자가 현실감을 상실하게 된 것은 오이디푸스의 강요에 의해서 자신의 자유로운 리비도의 흐름이 중단되었기 때문 이다.

가족 삼각형의 구조를 갖고 있는 오이디푸스는 ‘욕망하는 생산’에 작용하 여 스스로를 욕망의 등록 과정에 새기고, 거기에 자신의 발판을 슬그머니 마련함 으로써 생산력을 대규모로 거머쥐고, 욕망의 기계들을 특징짓는 연결과 중단들 전체를 자기 방식으로 옮겨놓고 재조직한다.

그런데 들뢰즈와 가타리는 신경증과 정신증에 대한 이러한 프로이트식의 구분과 설명을 비판한다.

프로이트는 마치 신경증을 오이디푸스 안의 장애로 그리고 정신 증을 오이디푸스 밖으로의 도주로 단순화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중요한 것은 오이디푸스를 중심으로 내적이냐, 외적이냐 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적 재생산(familial reproduction)과 욕망하는 생산(desiring-production)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인식하느냐 하는 것이다(Deleuze & Guattari, 1983. p.126).

그들에 따르면 가족은 욕망하는 생산에 이렇게도 저렇게도 작용할 수 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신경증과 정신병의 조직자가 될 수 없다고 본다.

그 것은 조직자의 역할을 수행하기보다는 단순한 하나의 유도자, 무관심이 그 특질 인 하나의 자극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가족은 치욕과 영광을 동시에 창조한 다.

가족의 이야기는 오이디푸스적 계보를 살리려는 노력을 표현하고 있지만, 또 한 비(非)오이디푸스적인 계보의 자유로운 앙진도 표현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 서 오이디푸스는 아무 소용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Deleuze & Guattari, 1983.p.126).

따라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모든 것이 신경증으로 혹은 정신병으로 전환될 수 있다고 말한다.

신경증에 대해 오이디푸스 안의 장애로 해석하는 것과 정신병에 대해 오이디푸스 밖으로의 도주로 설명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는 것이다.

신경 증과 정신증 사이에 본질적 차이란 없다.

왜냐하면 신경증이든 정신증이든 원인 은 ‘욕망하는 생산’이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를 파괴하거나 침몰시키는 정신병 적 전복이건, 오이디푸스를 구성하는 신경증적 반향이건, 궁극의 원인은 욕망하 는 생산이다(Deleuze & Guattari, 1983. p.127).

즉, 욕망하는 생산과 사회적 생산의 관계, 이 두 생산 사이의 체제의 차이나 갈등 그리고 욕망하는 생산이 사회적 생산 속에서 전개하는 공급의 양태들에서 파악되는 한에서의 욕망하는 생 산, 이것이 현실적인 요인이다(Deleuze & Guattari, 1983. p.129).

이런 점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그것이 도착증이건 신경증이건 아니면 정신병 이건 이 모두는 그 기초로서 정신분열증(schizophrenia)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정신분열증은 특히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처한 사회적 생산의 극한에서 발생하는 현대인의 병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Deleuze & Guattari, 1983. p.130).

그런데 정신분열자 자체는 마치 광기가 정신의 붕괴이 기도 하지만 또한 돌파이기도 한 것처럼 병적인 측면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인 측면도 가지고 있다.

정신분열자(schizo)는 기본적으로 탈코드화된 흐 름들을 장착하고 그 흐름이 기관없는 신체(body without organs)라는 사막을 가 로지르게 하는 사람이다.

이 사막에 그는 자신의 욕망하는 기계를 설치하고 활발 한 힘들의 끝없는 유출을 생산한다.5)

 

     5) 기관없는 신체, 욕망하는 기계, 그리고 유기체(주체)의 관계에 대해 이병창은 다음과 같이 표현한 다. “기관 없는 신체란 ‘욕망 기계’가 발생하기 이전의 상태이다. 이것은 무한하게 분할적인 생명 의 힘이 교차적으로 작동하면서 아무런 질서 없이 유동하는 상태이다. 이런 무수한 힘들의 적분을 통해 부분적으로 어떤 방향성을 지닌 힘들이 출현하면서 생산적 욕망의 상태 즉 욕망하는 기계가 출현한다. 이 힘들이 다시 또 서로 교차하면서 더욱 복합적인 상태를 만들면서 점차 더 통일된 어떤 유기체가 출현한다. 이 유기체에서 욕망의 힘은 하나의 중심적 주체를 지니고 통일된 대상을 향하 여 움직인다.” 이병창, 「들뢰즈와 라깡, 실재계와 초자아」, 2008, 45쪽.

 

정신분열자는 언제나 사회적 생산의 변두 리에서 개인적인 욕망의 생산을 서로 접선하면서 쫓아 버리는 관계를 유지하는 극한(limit), 분열(schiz)을 가로지르는 사람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런 정신 분열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정신분열자는 떠나는 법을 안다. 그는 출발하는 일을 마치 태어나고 죽은 일 처럼 단순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여행은 이상하게도 제자리에 서 움직이지 않는 여행이다. 그는 이 세계와 다른 세계에 대해 말하지 않으며, 또 이 세계와 다른 세계에서 오지도 않았다. 설령 그가 공간 속에서 자신을 이동 시킨다고 해도 그것은 이 자리에 새워져 있고 머물러 있는 욕망하는 기계 주위에 서 이루어지는 강밀한 여행(journey in intensity)이다. 왜냐하면 이 곳 사막은 우리의 세계에 의해 증식되는 새로운 대지이자 윙윙거리며 돌아가고 있는 기계이 기 때문이다. 정신분열자들은 유성들이 새로운 태양의 주위를 돌 듯이 이 기계 주변을 회전한다. 이 욕망의 사람들은 짜라투스트라(Zarathustra)를 닮았다.” (Deleuze & Guattari, 1983. p.131)

 

이 욕망의 한 쪽 끝에는 신경증이라는 막다른 골목이 가로막고 있는데, 여기에 는 오이디푸스화하는 아버지-어머니, 고국에의 귀환, 이국적인 영토의 도착, 마 약, 알콜, 심지어 낡은 파시즘의 꿈이 있다.

그러나 다른 쪽 끝에는 막다른 골목 과 가족 삼각형을 꿰뚫고, 탈코드화된 말의 흐름, 유동적이고 아주 끈적끈적한 리비도의 흐름이 저항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흐른다.

문법을 파괴하고, 합심해 서 시니피앙을 해체하며, 흐름으로서 무의미(non-sense)를 세우고, 모든 관계 에 다의성(polyvocity)이 달라붙어 계속해서 되돌아오는 일이 벌어진다.

이 경우 정신분열자의 언어는 더 이상 그것이 말하는 것, 심지어 언어를 의미 작용하는 어떤 것으로 만드는 것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움직이게 하고, 흐르게 하고, 폭발하게 하는, 즉 욕망에 의해 정의된다.

즉 언어는 하나의 목표가 아니라 과정이며, 더 이상 표현이 아니라 생산인 것이다(Deleuze & Guattari, 1983. p.133).

이러한 입장에 따라 들뢰즈와 가타리는 신경증과 정신병을 새롭게 정의한다.

신경증은 기본적으로 정신분열증의 벽, 혹은 극한의 돌파라는 도전에 직면하여 겁을 집어먹고 후퇴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정신분석학이 치 료되었다고 선언하듯이 시니피앙의 법률 아래 다시 떨어져 내려가, 거세의 각인을 받고 오이디푸스 속에서 삼각형화되어 기존의 사회적 질서와 가치에 순응하고 적 응하게 된다.

이렇게 적응하는데 실패한 신경증자들은 결국 정신분열증의 벽 혹 은 극한의 위치를 사회구성체의 내부의 (그들이 애써 창조적으로 힘쓰는) 사회적 생산 및 재생산과 (그들이 후퇴하여 기존의 노력을 적용하는데 만족하는) 가족적 재생산 사이로 이행시킨다.

즉, 오이디푸스가 그은 선의 영역 내부로 극한을 이 행하고 두 극 사이에 말려들어가 왔다갔다하기를 그치지 않는 것이 신경증이다. 한편 신경증이 정신분열증의 극한(limit)을 옮겨 자신의 조그만 식민지를 만들 려 하는 사람이라면, 정신병은 도착의 장소에서 정신분열증의 극한을 따라 설계 하고 설립한 좀 더 실제로 이국적인 처녀지, 인위적인 가정, 비밀스런 사회를 원 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이들은 오이디푸스의 가정용품은 물론 도착이 라는 조잡함과 탐미주의에 의해 병든 사람들로써, 정신분열증의 극한에 부딪히 면 튀어오르고, 때로는 극렬한 폭력으로 공격을 가한다.

이때 그들은 움직이지 않고, 침묵하고, ‘강밀도=0’인 기관 없는 신체로 후퇴한다.

이 신체 역시 하나 의 영토이기는 하나, 사막 같은 불모의 영토요, 그 위에서는 모든 욕망하는 생산 이 정지되고, 혹은 응고하여, 정지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 굳어버린 신체는 납처 럼 강물에 빠져 꼼짝 않는 거대한 하마들처럼 표면에 다시 떠오르지 않는다.

그 신체들은 신경증을 만들어내는 정신적 억압과 사회적 억제의 체계를 피하려고 도 리어 전력을 다하여 근원적인 억제에 자기들을 내맡겨버린 경우라고 할 수 있다 (1983. p.136).

 

5. 정신분열증의 언어

 

정신분열자가 하는 말은 말의 뜻을 가지고 이해하려고 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또 정신분열자가 하는 말은 그 말하는 사람의 입장으로 감정 이입을 해서 이해하려고 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정신분열자의 말은 기본적으 로 의사소통의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의 절박한 절규요 세상에 대한 외침이다.

불가의 선승들이 외치는 “할!”이요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면서 부르짖는 “응애!”이다.

노르웨이의 예술가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는 절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친구 둘과 함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해질녘이었고 나는 약간의 우울함을 느꼈다. 그때 갑자기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 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멈춰선 나는 죽을 것만 같은 피로감으로 난간에 기댔다. 그리고 핏빛 하늘에 걸친 불타는 듯한 구름과 암청색 도시가 있었다. 그때 자연 을 관통하는 그치지 않는 커다란 비명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또렷하게 말하는 것이 불가능한 모호한 유동체이면서 동시에 상대방의 고착된 의미체계에 지각변 동을 가능하게 하는 입 밖에 냄(utterance)이다.

정신분열자에게 말한다는 것은 곧 행동이다.

예컨대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발언은 ‘너에 대한 나의 감정이 사랑이다’는 관계 혹은 의미 규정의 문제가 아니 라 ‘지금-여기’에서 너와 나 라는 개체성이 기쁨이라는 감정 속에서 사라져 ‘나’ 와 ‘너’ 그리고 ‘사랑’이 하나가 되는 신비로운 경험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해서 정신분열자에게 발언이란 주어와 목적어 그리고 동사가 구문 론적으로 결합된 문장의 형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는 물론 영혼을 포 함한 전체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 구체적 사건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들뢰즈 와 가타리는 정신분열자의 언어의 기초단위는 명령어(order-word)라고 말한다.

예를 들면 아버지가 아들에게 ‘남의 물건을 훔치면 안 된다’고 이야기했을 때, 그것은 말의 뜻이나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물건을 훔치면 처벌할 것 이라는 지시를 내린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학교라는 기관은 교육하는 기관이기에 앞서 훈육하는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학교에서 많은 지식과 정보를 가르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내용이 정답이라는 것이고 따라서 학생은 선생의 지시에 따라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전 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학교를 하나의 강압적인 교육 기 계라고 부르면서 학교는 정보를 전달하는 기능을 하기보다는 아이들에게 문법이 가지고 있는 모든 이원적 토대를 내용으로 하는 기호계의 좌표를 강요하는 기능 을 한다고 말한다.

마치 맥클루언(McLuhan)이 메시지는 미디어가 수용자의 의식을 훔치기 위한 미끼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던 것처럼, 들뢰즈와 가타리도 먼저 정보라는 의미작용이 있고 이와 관련해서 명령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정보 는 지시로서의 명령이 송신되고 전송되고 준수되기 위해 필요한 최소치일 뿐이라 고 말한다(Deleuze & Guattari, 1987. p.76).

들뢰즈와 가타리는 명령어를 언표(statement)와 암묵적인 전제, 즉 오직 언표 속에서 실현되는 발화 행위(speech act)와의 관계라 부른다.

그런데 이 둘의 관 계가 일치되기보다는 내부적 혹은 내재적이라고 말하면서 오히려 좀 더 정확하 게는 중복(redundancy) 관계라고 말한다.

명령어 그 자체가 언표와 행위의 중 복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신문과 뉴스는 우리가 생각하고 기억하고 기대해야 할 것에 대해 말한다는 점에서 중복을 통해 작용한다.

따라서 언어를 포함한 매체 는 정보전달을 위한 것도 의사소통을 위한 것도 아니다(Deleuze & Guattari, 1987. p.79).

각각의 언표가 하나의 행위를 실현하고, 행위가 언표 속에서 실 현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한 언표에서 다른 언표로 전달하는 것이건 각 언표의 내부에서 전달하는 것이건 그것은 정보의 전달(communication of information)이 아니라 명령어의 전달(transmission of order-words)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정보이론 혹은 커뮤니케이션 이론과는 전 혀 다른 주장이 가능해 진다.

이른바 사이버네틱스 이론의 전통에서 정보이론의 가장 일반적인 도식은 원칙상 이상적인 최대치의 정보를 상정한다.

또한 이 도식 에서는 그 최대치가 잡음(noise)에 뒤덮여서는 안 되니 때문에 이론적 최대치를 감소시키는 단순한 제한 조건으로 중복을 본다.

그러나 들뢰즈와 가타리는 명령 어의 중복이 오히려 일차적인 것이고 정보란 명령어의 전달을 위한 단지 최소 조 건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Deleuze & Guattari, 1987. p.79).

그들에 따르 면, 중복은 정보의 의미생성(the signifiance of information)과 관련이 있는 주 파수(frequency)와 커뮤니케이션의 주관성(the subjectivity of communication) 과 관련이 있는 공명(resonance)이라는 두 개의 형식을 갖는다.

모든 물체가 서로 다른 소리를 내는 것은 물체마다 고유의 주파수(진동수)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나무와 돌의 소리가 다르고 큰 종과 작은 종의 소리가 다르며 사람도 사람마다 주파수가 다르기 때문에 각각의 소리를 낸다. 반 면 공명이란 특정 주파수에서 큰 진폭으로 진동하는 현상을 말한다.

고유 주파수와 같은 주파수의 외력이 전달되면 진폭이 크게 증가하고 서로 간에 에너지 교환 이 쉽게 이루어지게 되는데 이를 공명주파수(resonant frequency)라고 한다.

이 렇게 정보와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심지어 의미생성(signifiance)과 주체화 (subjectification)가 중복에 종속되어 있는 것은 명백하다.

우리는 정보와 커뮤 니케이션을 분리하기도 하고, 또 정보의 추상적 의미생성과 커뮤니케이션의 추 상적 주체화를 마음 속에 상상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그것이 언어의 일차적 형태 또는 암묵적인 형태라는 것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의미작용의 지배 로부터 독립한 의미생성이란 없으며, 기존 질서의 예속으로부터 독립한 주체화 는 없다.

이 두 가지 모두는 명령어가 갖는 본성 및 명령어의 전달에 의존하고 있다(Deleuze & Guattari, 1987. p.79).

그런데 이러한 명령어는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닌 만큼 통상적인 기표와 기 의의 관계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찍이 푸코(Foucault, 1970)가 감옥 을 ‘말(word)과 사물(thing)’의 관계에서 분석했듯이, 감옥(prison)이라는 말은 감옥이라는 사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감옥은 하나의 지층 위에 있는 내용의 형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학교, 병영, 병원, 공장 등등의 다른 내용의 형 식과 관계를 맺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감옥이라는 사물 혹은 형식은 “감옥”이라는 말과 결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범죄적 행위를 분류하고, 언명하고, 번역하고 심지어 저지르는 새로운 방식을 표현하는 “범죄의”, “범죄” 등 감옥과는 완전히 다른 말들 혹은 개념들과 결부되어 있다.

“범죄”는 “감옥”이라는 내용의 형식 (form of content)을 상호 전제하는 표현의 형식(form of expression)이다.

“범 죄”는 결코 감옥을 기의로 갖는 기표가 아니며, 기의도 아니다.

우리는 흔히 유죄와 무죄로 가르고 범죄의 개념 아래 이런저런 판례들을 동원 하여 판결을 내리지만, 정신분열자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행위는 특이한 것으로 판례라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같은 범죄라고 하더라도 상황의 불가 피성이나 범행의 잔인성 혹은 범행의 영향력 면에서 아주 미묘한 차이가 있다.

이러한 개별 사건의 특이성(singularities)을 무시하고 일반적인 범주에 따라 재 단될 때 정신분열자는 그 억울함과 부당함을 적절하게 표현할 언어를 찾을 수 없 기 때문에 맥락을 알 수 없는 뜻 모를 말을 횡설수설하면서 미끄러져 간다.

‘감 옥’이라는 내용의 형식을 특별히 범죄인에게만 해당되는 어떤 수용시설에만 적 용하는 것은 부당하다.

나에게는 이미 학교가 감옥이고, 직장이 감옥이고, 가정이 감옥이다.

‘범죄’라는 표현의 형식을 특별히 감옥에 감금되는 어떤 행위 에만 적용하는 것 역시 부당하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이미 직장에서, 국회에 서, 시장에서 사람들을 이용하고, 사기 치고, 위해를 가하는 범죄행위들이 발 생하고 있다. 한편, 들뢰즈와 가타리는 정신분열자의 말이 순수 개인적인 언표(statement) 가 아니라 집단적 혹은 사회적 언표행위(enunciation)라고 말한다.

즉 언표가 개 인화되고 언표행위가 주체화되는 것은 어떤 집단적 배치가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 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집단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들은 자유 간접화법(free indirect discourse)을 예로 들고 있다.

간접화법은 피전달부(被傳達部)를 전달 자의 말로 바꾸어 전달하는 화법으로 다른 사람이 말한 것을 자신의 말로 바꾸거 나, 자신의 말을 객관화⋅일반화하여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키는 방법이다.

그것 은 보고하는 언표와 보고된 언표가 중복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유 간접화법은 간 접화법을 더욱 극단으로 몰고 간 것으로서 작품속의 인물의 생각이나 말이 서술 자의 말과 겹쳐져 이중적 목소리로 서술되는 화법을 가리킨다.6)

 

    6) 자유간접화법의 간단한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직접화법 : He said, “I love her now.” 간접화법 : He said that he loved her then. 자유간접화법 : He loved her now. 자유간접화법의 또 다른 예는 영화가 보여주는 지각 이미지이다. 영화에서는 카메라의 눈이 가리키 는 시점에 따라 영화의 감독의 눈과 카메라 감독의 눈, 주인공의 눈, 관객의 눈 등이 대로는 주관적 시점으로 또 때로는 객관적 시점으로 자유롭게 이동한다. Deleuze Z., Cinema1:MovementImage.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1986, p.72. 

 

그 때문에 인물 의 말인지 서술자의 말인지 분간하기 어렵게 된다.

인물의 말과 생각이 서술자의 말과 생각과 이중화, 중복되면서 목소리들 간의 공명(共鳴)이 일어나는 것이다.

하나의 목소리에는 여러 목소리들이 현존한다(polyvocity).

푸르스트(Froust) 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샤를뤼스(Charlus)의 독백 속에는 여러 소 녀들의 재잘거림이, 하나의 언어 속에는 여러 언어들이, 한 낱말 안에는 여러 명 령어들이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언표행위의 이러한 특성을 한 마디로 집단적 배치물(collective assemblage)이라고 말한다(Deleuze & Guattari, 1987. p.80).

행위와 언표의 중복적인 복합물이라 할 수 있는 집단적 배치물은 내가 나의 목소리를 끄집어내는 목소리들의 무리와 같고 나의 고유명사를 취하는 중얼 거림과 같다.

그런데 집단적 배치물의 특별한 성격은 언표와 중복해서 명령어를 만드는 행위의 특성 때문이다.

이들 행위에 대해 들뢰즈와 가타리는

“특정 사회 에서 통용되고 있으며 이 사회의 신체들에 귀속되는 비물체적 변형(incorporeal transformation)들의 집합”

이라고 정의한다(1987. p.80).

예컨대 평화와 전쟁 은 서로 매우 다른 신체 상태이지만, 총동원령 선포는 신체의 비물체적이고 순간 적인 변형을 표현한다.

또 신체는 나이를 갖고 있으며 성숙하고 나이를 먹는다.

하지만 성년, 은퇴 같은 사회적으로 주어진 나이 범주는 특정 사회에서 신체에 즉각 귀속되는 비물체적 변형이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직접화법에서 말하는 “나”라는 말 자체가 명령어라고 한 다.

그것은 여러 부족들과 비밀스런 관용구들 속에서 나의 자아(my Self)라고 부르는 것을 뽑아낸 것으로서 굳이 표현하자면 분열증적 코기토(schizophrenic cogito)라고 할 수 있다.

이 코기토는 자기 의식을 명령어의 비물체적 변형으로 만들거나 혹은 간접화법의 결과로 만든다.

나의 직접화법이라는 것도 여기저기 서 나를 가로지르는 다른 세계 혹은 다른 행성에서 온 자유 간접화법이다.

그들 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많은 예술가나 작가들이 산 사람들이 죽은 이의 혼령 과 교류를 시도하는 교령회(交靈會)의 유혹에 빠지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 한다(1987.p.84).

정신분열자의 명령어를 다룰 수 있기 위해서는 엄청난 간접 화법으로 언어를 파악하는 소질이 되었건, 중복의 관계속에서 한 곡조 안에 다른 곡조를 넣어 노래할 수 있는 능력이 되었건, 종교의 방언 능력이 되었건, 배운적 없는 언어를 사용하는 능력이 되었건 무당과 같은 능력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6. 기관없는 신체에 이르는 길

 

자아의 붕괴는 그야말로 위기이자 기회이다.

자아를 포기한다는 것 혹은 놓아 버린다는 것은 의식의 마지막 의지처를 없애서 이제는 돌아갈 고향이 영원히 사 라지는 것과 같다. ‘나’라는 주체의 해체는 아상(我相)의 단단한 껍질을 깨고 나와서 자유롭게 유영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지만 의지할 수 있는 좌표도 없고 등대도 없는 망망대해에서 항로를 잃고 실종되는 위기가 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 에서 자아나 주체를 안전하게 그리고 견고하게 떠받치고 있던 의식의 지층, 논리 적 관계, 법과 제도의 질서에 안주하는 것은 차라리 차선(次善)의 선택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선택과 관계없이 최선(最善)의 길이 있다면, 언제까지 그에 수반되는 위기와 위험이 두려워서 그 길을 외면할 수 있을 것인가?

오직 우리 에게 요구되는 태도가 있다면 그것은 보다 조심스런 태도와 정교한 분석 그리고 중간에 포기하지 않는 확신과 불퇴전의 정신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정신분열의 신체가 위험에 처하게 된 몇 가지 양태와 더불어 자아의 붕괴가 곧바로 자아의 돌파로 이어지는 탈주의 초선형성을 그리는 길을 제시했다.

예컨대 우울증의 신체(hypochondriac body)는 코드에 의해 영토화된 생활세계의 위선과 부당함을 거부 혹은 저항하지만 그렇다고 대안 을 찾지 못한 가운데 자신의 무능력과 무기력으로 추락한 신체이다.

이로 인해 감정적으로 우울해지고 다양한 인지적, 정신적 증상을 일으킴으로써 일상적인 기능의 저하를 가져오는 건강하지 못한 신체이다.

또 편집증의 신체(paranoid body)는 에고가 붕괴되어 탈영토화한 흐름이 형성되었으나 그 붕괴된 자리에 새 로운 전제군주적 에고가 다시 들어서서 탈영토화된 흐름을 다시금 봉쇄하고 망상 을 분출하는 신체이다.

이 신체는 에고 중심성이 매우 강하여 기본적으로 타인을 불신한다. 타인의 경멸이나 비난 등에 대해 매우 예민하고, 질투심이나 자신이 감시당한다는 느낌 혹은 자신이 중상모략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느낌으로 피해 망상을 갖고 있는 신체이다.

심지어 마약을 한 신체(drugged body)도 있다.

이 신체의 대표적인 증상은 의도하지 않았는데 몸이 떨리는 현상이다.

약물을 복용하게 되면 근육이 비자발 적으로 수축과 이완을 반복해 온몸이 떨리게 되고, 또 중독되면 뇌의 화학시스템 에 변화가 생겨 판단력이나 기억력, 학습능력 등에 큰 손상을 입게 된다.

심해지 면 망상과 환청에 시달리게 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마약을 한 신체에 대해 일 종의 실험적 분열자라고 말한다(Deleuze & Guattari, 1987, p.150).

이들은

“인간의 신체는 창피할 정도로 비효율적이야. 먹는 입과 싸는 항문 대신에 먹고 싸는 것을 동시에 하는 하나의 다기능 구멍을 가지면 어떨까?”

하는 의욕을 한다.

그러나 이는 완전한 자기 파괴, 절대적 차가움에 기초한 매우 특수한 강밀도의 생산이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마조히스트의 신체(masochist body)도 있다. 이 신체는 신체를 구성하고 있는 개별 기관들이 작동하는 것을 멈추기 위해 목을 매달게 하고, 모 든 것이 전부 단단히 막혀 봉인되도록 꿰매게 하고, 기관들이 마치 피부에 딱 달라붙어 있기라고 한 것처럼 피부를 벗기고 비역질을 당하고 숨이 막히도록 한 다.

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이 신체를 단지 고통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은 매우 경박한 것이고, ‘기관 없는 신체(body without organs)’의 관점에서 신체 를 꿰매는 고통의 강밀도에 기초한 특수한 형태의 강밀한 생산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한다(Deleuze & Guattari, 1987, p.150).

정신분열의 신체가 이러한 위험에 대해 매우 주의 깊게 조심하면서 최선의 길 에 도달한다고 했을 때, 그 최선의 길이란 무엇인가? 들뢰즈와 가타리는 그것을 기관 없는 신체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말한다.

보는 눈, 호흡하는 폐, 먹는 입, 말하는 입, 생각하는 뇌, 듣는 귀 등등 이런 뻔하고 상투적인 고정 관념이 지겹지 않은가?

머리로 걷는다든가, 부비강으로 노래를 하고, 피부로 보 고, 배로 숨을 쉬는 것은 어떤가?

이런 말을 하면 정신분석학자는 “멈춰라! 다시 네 자아를 발견하라. 제정신을 차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할 때, 들뢰 즈와 가타리는 좀 더 가보자고 한다.

우리는 아직 우리의 자아를 충분히 해체하 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기관 없는 신체를 발견하지 못했다. 기관 없는 신체를 발견하는 것, 그리고 기관 없는 신체를 만드는 것, 이것은 생사가 달린 문제라고 말한다(Deleuze & Guattari, 1987. p.151).

기관 없는 신체, 그것은 오직 강밀도(intensities)에 의해서만 점유되고 서식 될 수 있는 방식으로 만들어져 있다고 한다.

오직 강밀도만이 지나가고 순환한 다. 그것은 환상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으며, 아무 것도 해석할 것이 없다. 기관 없는 신체는 강밀도들을 지나가게 하고 생산하며, 자체로 강렬하며 연장성이란 없는 내포적 공간(spatium) 안에 강밀도를 배분한다.

기관 없는 신체는 공간 (space)이 아니며, 공간 안에 있지도 않다. 그것은 특정한 정도로 – 생산된 강밀 도에 대응하는 정도로 – 공간을 점유하게 될 질료이다. 그것은 강밀하고, 형식을 부여받지 않았고, 지층화되지 않은 질료, 강밀한 모체, (생산의 모체로서) 강밀 도=0이다. 그러나 이 0에는 아무런 부정적인 것도 없으며, 부정적인 강밀도 따 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질료는 에너지와 똑 같다.

강밀도가 0에서 출발해서 커지면서 실재가 생산된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기관없는 신체를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지각하지 못하고, 기억하지도 못하지만 거미줄 꼭대기에 앉아서 강밀한 파장을 타고 그의 몸에 전해지는 미소한 진동을 감지하는 거미(Deleuze, 2000, p.182) 혹은 유기체의 확장과 기관들의 조직화 이전의, 지층형성 이전의 충만한 알(egg), 강밀한 알에 비유한다(Deleuze & Guattari, 1987, p.153).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렇게 강밀한 기관 없는 신체를 만드는 문제는 내적인 결 여로서 욕망을 경험하는 문제도 아니고 잉여가치를 생산하기 위해서 쾌락을 지연 하는 문제도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그것은 아무런 결여도 없는 욕망이 작동하는 곳이자 따라서 아무런 외부적인 혹은 초월적인 기준과 연결될 게 없는 내재적 장 (field of immanence)에 도달하는 것 또는 동양문명에서 말하는 도(Tao)를 터득 하는 행위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Deleuze & Guattari, 1987, p.157).

도 의 음양 원리에 따르면, 음의 에너지와 양의 에너지가 강밀한 회로를 형성하여 음의 에너지는 양의 에너지에게 빼앗기거나 양의 에너지에게 전달되고, 반대로 이렇게 해서 전달받은 양의 에너지는 이전보다 훨씬 더 타고난 것이 되어 역량이 배가된다.

이는 마치 궁정풍의 연예에서 둘 사이에 어떤 강밀한 에너지가 지나가 면서 더 이상 자아도 타자도 사라지게 되는 강밀한 고원(plateau)에 이르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이렇게 성취된 강밀한 고원은 고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고원으로 이어지면서 전개된다.

그런데 이러한 고원의 연속이 이루어지기 위해 서는 이 모든 고원을 포괄하는 하나의 전체적 고원을 상정할 수 있는데, 들뢰즈 와 가타리는 이것을 일관성의 평면(plane of consistency)이라고 부른다. 일관성 의 평면은 고원 자체가 하나의 극한인 만큼 당연히 이 또한 극한적 존재이다.

극한의 존재로서 일관성의 평면에서 ‘하나’와 ‘여럿’의 구도는 성립하지 않는다.

마치 ‘하나가 곧 여럿(一卽多)’인 화엄(華嚴)의 세계처럼 일관성의 평면은 순 수한 다양체로서 하나와 여럿이 통합된 기묘한 통일성이다. 이것은 어떠한 구조화 나 전체화를 기도하지 않고 차라리 철저히 탈영토화를 기도하기에 일관성을 특성 으로 하고 있고, 또 이것은 조직화, 유기체, 의미작용, 주체 등 모든 지층의 차원 을 납작하게 만들기에 평면이라고 할 수 있다(Deleuze & Guattari, 1987. p.90). 여기서 내재적 장을 채우는 정조는 기쁨((joy)이다.

외적으로 결핍된 것을 얻 었을 때 욕망이 느끼는 정조가 쾌락(pleasure)이라면 기쁨은 마치 자기 자신에 의해 자기를 바라보는 것을 통해서만 충족되는 욕망에 내재하는 정조이다. 쾌락 이 타자의 소비와 희생을 수반하는 자기 중심적인 정조라고 한다면 기쁨은 자기 를 이롭게 하면서 동시에 타자도 이롭게 하는데서 수반되는 정조이다.

기쁨은 어 떠한 결핍도, 어떠한 불가능성도 내포하지 않으며, 쾌락으로 측정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쾌락의 강도를 배분하고, 또 쾌락이 불안이나 치욕 혹은 죄책감으로 인 해 침해되는 것을 막아주는 것이 바로 기쁨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절대적 긍정성 혹은 순수성에 수반되는 쾌활함이요 춤추는 자만이 향유할 수 있는 가벼움이다.

 

7. 결론

 

어찌 보면 현대 사회는 순수성을 상실한 시대라고 할 수도 있다. 사람들이 너 무 교활해지고, 이해타산적이고, 음흉해지고, 전략적이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 을 유능하다고 하고 세상물정에 밝은 사회생활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사회생활을 무슨 전략게임을 하듯이 대의와 명분으로 깃발을 세우고 여러 세력들을 규합하여 나의 진영을 크게 만들고 상대의 약한 고리를 찾아내어 불신 과 갈등을 조장하여 상대진영을 무너뜨리는 생존게임으로 여긴다.

이런 전략게 임이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경제 분야나 정치 분야 뿐만 아니라 법정이나 학교 심지어 가정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가 제정신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이들은 마 치 광부가 탄광 속의 위험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먼저 갱도로 날려 보냈던 카나 리아와 같이 이 세상이 얼마나 타락했고 위험한지를 알아볼 수 있는 시금석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전략적으로 변했고 세상이 타락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소통의 상태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같은 현상에 대해서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 륜이라는 내로남불이 그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지만 자신의 유불리에 따라 그 리고 판세의 변화에 따라 자신의 말을 조변석개하듯이 뒤집는 일들이 모두 소통 이 타락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렇게 언행(言行)이 각기 따로 놀고 말의 신뢰가 상실된 상태에서는 진실한 소통이란 기대할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다.

이런 상황이라면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가 미친 사람으로 취급되지 않는 것 이 이상한 일일 것이다.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가 아니더라도 현대인들은 다양한 양태로 어느 정도는 미쳤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본 연구는 바로 이러한 소통의 현실을 적절하게 설명해줄 소통이론을 제시해보고자 하였다.

본 연구는 이러한 소통의 현실을 병리적인 것으로 보고 이를 치유하여 건강한 상태를 회복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진솔하고 행복한 소통의 가능성을 탐색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 인간의 정신세계, 특히 그 중에서도 무의식의 영역에 주목하여 그 무의식의 정신역동을 설명하고 있는 정신 분석학과 그에 대한 비판적인 대안이론으로 정신분열분석의 연구성과들을 검토 하였다.

그 내용을 간략하게 몇 마디로 요약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지만 핵심 적인 지점은 정신분석학이 에고를 치유의 최종 상태로 보았던 반면 정신분열분석 은 에고를 치유의 시작이자 병의 원인으로 보았다는 점이다.

이렇게 에고를 바라 보는 관점이 완전히 상반되기 때문에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던 무의식에 대 한 설명방식 역시 완전히 다르게 되었다.

정신분석학과 정신분열분석이 무의식 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표현이 극장과 공장이다.

오늘의 현실을 정신분열의 시대로 인식하고 있는 본 논문은 당연히 들뢰즈와 가타리의 정신분열분석론의 입장을 취하여 정신역동의 원리를 살펴보았다.

대표 적으로는 신경증과 정신병에 대한 정신분석학과 정신분열분석론의 대립이 있다.

기본적으로 정신역동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해명하는 정신분석학에서는 정신 병의 경우는 오이디푸스화를 감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갖게 되는 현실감 상실이 문제인 반면 신경증의 경우는 오이디푸스를 아주 힘겹게 감내하는 사람이 그 속 에서 느끼는 불안과 우울, 그리고 두려움이 문제이다.

그러나 정신역동에 있어서 오이디푸스는 문제의 원인이 아니라 하나의 자극으로 보는 정신분열분석론에서 는 신경증과 정신병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는 없이 그 기초로서 정신분열증을 갖 고 있다고 보았다.

신경증은 정신분열증이라는 극한에 직면하여 겁을 집어먹고 후퇴하여 자신의 조그만 식민지를 만들려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정신병은 정신분 열증의 극한을 따라 설계하고 설립한 좀 더 이국적인 처녀지, 비밀스런 사회를 원하는 사람들이라고 보았다.

한편 정신분열자들의 언어에 대한 들뢰즈와 가타리의 입장을 살펴보았다.

정 신분열자가 하는 말은 기본적으로 말의 뜻을 가지고 이해하려고 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고, 또 말하는 사람의 입장으로 감정 이입을 해서 이해하려고 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정신분열자가 하는 말은 기본적으로 의사소통의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절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정신분열자에게 언어는 하나의 명령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학교는 교육기관이 기에 앞서 훈육 기관이라고 할 수 있고, 신문과 뉴스는 정보를 전달하기에 앞서 우리가 생각하고 기억하고 기대해야 할 것에 대해 정해준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한 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관계를 보다 일반화해서 명령어는 언표와 암묵적인 전제가 중복의 관계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정신분열자에게 언표는 개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집단적, 사회적인 언표행위이고 또 이 언표행위는 주객의 관점 이 수시로 뒤바뀌는 자유 간접화법이기 때문에 하나의 목소리에 여러 목소리들이 현존한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들뢰즈와 가타리가 정신분열분석을 통해 무의식의 정신역동의 원 리를 해명하고 그러한 정신역동이 병리적으로 드러나는 몇 가지 사례도 분석하 고, 정신분열자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한 이론을 제시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지향하는 바는 이러한 탐구를 통해 건강하고 행복한 소통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 를 위해 들뢰즈와 가타리가 제시하는 것이 기관없는 신체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 이다.

그리고 이 기관없는 신체에 이르는 과정에서 만날 수 있는 여러 위험과 그 위험을 피하기 위한 방법론에 대한 것이다.

이것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들뢰즈 와 가타리는 강밀도라든가 내재적 장, 일관성의 평면 등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새로운 용어들을 등장시키고 있다.

그 표현이 생소하고 설명 방식이 다소 난해하 지만 핵심적 내용은 어떻게 우리가 자아를 깨부수고, 또 숨 쉬는 코 혹은 공부하 는 학교라는 식의 개념 혹은 고정관념을 깨어 주관과 객관, 인간과 자연, 아군과 적군과 같은 영토를 벗어난 그리고 그 영토 이전에 존재하는 일관성의 평면에 이 르는 이론과 방법론에 관한 것이다.

일관성의 평면, 연구자는 이를 동양문화에 속한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으로 바 꾼다면 열반(nirvana)이라고 부르고 싶다.

불교의 용어인 열반은 번뇌가 소멸된 상태 또는 완성된 깨달음의 세계를 의미한다.

다른 표현으로 적멸(寂滅), 해탈 (解脫), 원적(圓寂)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 상태는 불이 꺼진 상태를 이르는 말로 타오르는 번뇌의 불꽃을 지혜의 바람으로 불어 꺼서 모든 고뇌가 사라진 상 태를 말한다.

그리고 기관없는 신체에 대해서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동양사상의 도(道)와 같다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불교식으로 번역한다면 일심(一心)이라고 하고 싶다.

일심을 간단히 설명하는 것은 어렵지만, 흔히 망심(妄心)과 일심의 관계를 파도와 바다의 관계로 설명된다.

차별과 분별심은 망심으로써 그 본질은 바닷물이라는 무차별의 일심으로 고정된 경계나 틀로서는 파악될 수 없는 무엇이 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들뢰즈와 가타리의 정신분열분석론을 동양철학, 특히 마음분석이 전부라고 할 수 있는 불교철학과 통합해서 이해한다면 새로운 통찰을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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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문】

본 논문은 정신분열시대의 소통양식을 정신역동의 관점에서 이해하기 위한 이론적 작업이다.

특히, 들뢰즈와 가타리의 정신분열분석에 관한 논의를 중심으로 살펴보는 것이다.

소통에 관한 일반적인 논의가 주로 의식적 활동으로 초점을 맞추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무의식의 차원에 대한 논의가 뒷 받침되지 않는다면 소통론은 잘해야 절름발이 이해밖에 될 수 없다는 문제의식에서 이루어졌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정신분열분석의 독창성은 종전 프로이트 중심의 정신분석이론이 몇 가지 근본적인 논점의 오류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을 비판하면서 그에 대한 대안으로 정신분열분석이론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러한 작업의 출발은 정신분석이론이 치료의 성취라고 여기고 있는 ‘에고의 회복’을 정신분열분석이론을 오히려 문제의 시작으로 놓고 있다는 점이다.

즉, 통일되고 통합된 전체적 에고라는 상정이야 말로 그릇된 가정으로 사회적 억압을 정당화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분산되고 파편화되고 부분적인, 다시 말해 분열적인 신체를 출발로 해서 ‘기관없는 신체’에 도달함으로써 자유롭고 창의적인 삶을 영위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이와 같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이론적 연구 성과에서 영감과 힌트를 얻어 ‘서로 다른 별에서 온 존재들이 같은 지구별에서 더불어 살아가야만’ 하는 실존적인 소통의 문제에 대한 해법을 모색해 보았다.

【주제어】 정신분석학, 정신분열분석론, 욕망하는 기계, 신경증과 정신병, 분열증적 코기토

 

 

Abstract

Communication and unconsciousness in the age of schizophrenia -Focusing on Deleuze and Guattari's schizophrenia analysis

Chang-ho Oh(Pukyong National University)

This paper is a theoretical work to understand communication styles in the era of schizophrenia from a psychodynamic perspective. In particular, we will examine Deleuze and Guattari’s discussion of schizophrenia analysis. Given that the general discussion on communication is mainly focused on conscious activities, it was made with the awareness that communication theory would only be a lame understanding at best if it was not supported by a discussion on the level of the unconscious. The originality of Deleuze and Guattari’s schizophrenia analysis is that they criticize the previous Freud-centered psychoanalysis theory for being based on several fundamental errors and present schizophrenia theory as an alternative. Moreover, the starting point of such work is that schizophrenia analysis theory positions the ‘recovery of the ego’, which psychoanalytic theory considers as an achievement of treatment, as the beginning of the problem. In other words, the assumption of a unified and integrated overall ego is a wrong assumption and results in justifying social oppression, so starting from a dispersed, fragmented and partial, in other words, fragmented body, we can reach a ‘body without organs’ to become free and free. My goal is to lead a creative life. In this paper, we took inspiration and hints from Deleuze and Guattari’s theoretical research results and sought a solution to the existential communication problem where ‘beings from different planets must live together on the same Earth’.

 

【Key words】 Psychoanalysis, schizoanalysis, the desiring machine, neurosis and psychosis, the schizophrenic cogito * Professor, Dept. of Media Communication.

 

 논문접수일: 2024.05.25. 논문심사기간: 2024.06.18.~06.25. 게재확정일: 2024.06.25.

 철학·사상·문화 제45호

KCI_FI003099599.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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