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
1. 학문의 두 거장
2. 원효의 스타일, 대승기신론소 첫머리를 읽어 보자
3. 無我(?)의 코드로 읽는 퇴계
4. 中乘, 다시 책을 통한 불교를…
5. 원효와 퇴계 사이의 교감
6. 어디서 갈라지는가, 理의 객관성
1. 학문의 두 거장
한 사람은 7세기 동아시아 불교의 최고봉, 또 한 사람은 16세기 조선 유학의 최심층이다.
두 사람을 어떻게 비교할 것인가.
(1) DNA : 천재들의 게임?
원효가 천재형이라면 퇴계는 노력형이라면 실례가 될까?
生而潁異, 學不從師. (원효, 「탑비」)
生而大癡 壯而多疾 中何嗜學 晩何叨爵. (퇴계, 「自銘」)
그러고 보니, 다산도 율곡도 천재형임을 스스로, 혹은 타인이 인정했다.
幼而潁悟, 長而好學 (다산, 「自撰 墓誌銘」)
生而穎悟絶倫。 學語便知文字 (김장생, 栗谷 「行狀」)
하긴 누가, 다음의 시를 여덟살 코흘리개의 작품이라 하겠는가.
登花石亭有詩曰。
“林亭秋已晚。 騷客意無窮。 遠水連天碧。 霜楓向日 紅。 山吐孤輪月。 江含萬里風。 塞鴻何處去。 聲斷暮雲中。”
亭在坡州 栗谷。
(2) 성격 : 나아가는 자, 물러 서는 자
元曉는 이름 그대로 스스로 이땅의 새벽을 자부했다.
최초의 철학자, 단기필마로 세상을 향해 진격하는 무사의 풍모를 갖고 있다.
“해석의 성채를 용감하게 쳐나가고, 글의 진지를 무사처럼 종횡했 다.(勇擊義圍, 雄橫文陣)
… 씩씩하고 굳건하게, 경전을 향해 ‘나아감’ 에 주저함이 없어, 삼학 전체에 두루 통했다.
그쪽 해동에서는 그를 ‘홀로 만인을 상대할 사람’이라 했다 한다.
경전의 의미에 정통하고, 삶의 체험적 직관으로 접목시킨 경지가 그를 그렇게 할 수 있게 했 다.”
(仡仡然桓桓然, 進無前卻, 蓋三學之淹通. 彼土謂爲萬人之敵, 精義 入神爲若此也. 송고승전)
이에 비해 退溪는 고향의 멀쩡한(?) 兎溪를 고쳐 退溪로 칭했다.
그 는 한사코 ‘물러나고자’ 했다.
身退安愚分, 學退憂暮境. 溪上始定居, 臨流日有省. (1550년작)
몸이 (진흙탕에서) ‘물러나니’ 내 어리석은 분수에 맞는데 학문이 “뒤쳐저서” 늙으막이 걱정이다… 시냇가에 거처를 정하고, 흐름을 보며 날마다 반성한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늙도록 群居를 좋아하지 않았다. 홀로 방 안에서 지내며 義理의 본원을 함양하였다.”
아아, 나는 山林 가운데 즐거움이 있다는 것은 일찍 알았다. 그러나 중년에 들어서서 망녕되이 세상길에 나아가 바람과 티끌이 뒤덮인 속에서 여러 해를 보내면서, 스스로 돌아오지도 못하고 거의 죽을 뻔 하였다. 그 뒤에 나이는 더욱 늙고 병은 더욱 깊어지고, 처세는 더욱 어긋나니, 세상은 나를 버리지 않아도 내가 부득이 세상을 버릴 수밖 에 없게 되었다. 그래서 번롱樊*을 벗어나 田園에 몸을 던지니, 산림 의 즐거움이 뜻밖에 내 앞에 다가왔다. (「陶山記」)
(3) 행실
퇴계는 유학자답게 일상의 소소한 예절을 익혔다.
小學을 따라 언 제나 조신하게, 나날이 자신을 檢束했다.
거기 가르치는 細節들은 가령 이렇다.
“어른들 뒤는 공손하게 따라가야지, 앞서 질러가서는 안 된다.”
“길에서 선생을 만나면 빠른 걸음으로 나아가 자세를 잡고 두손을 모은다. 물으면 대답을 하고, 별말이 없으면 빠른 걸음으로 물러난다.”
“선생의 질문을 다 듣고 나서 대답한다. 수업을 청할 때나, 다시 질문 을 할 때는 일어서서 한다.”
“단정한 자세로 경청한다. 남의 말을 제 것인양 떠벌이지 말고, 분별 없이 맞장구쳐서도 안 된다. 옛것을 법칙으로 삼고, 선왕의 도를 논 술해야 한다.”
원효는 다른 풍모를 갖고 있다.
“말은 함부로 내뱉었고, 행적은 종잡 을 수 없었다.(發言狂悖, 示跡乖疏. 송고승전)
이런 평가도 있다.
“내키는 대로 행동했고, 일정한 규범을 지키지 않았다(任意隨機, 都無定檢.) “
시정 거사들과 더불어 술집, 창가에 드나드는데, 손에는 誌公처럼 쇠칼과 철지팡이를 들고 다닌다.
거룩하게 경전의 주석을 달고, 대중 앞에서 雜華를 강의한다 싶더니, 문득 절간에서 거문고를 끌어안고 깽깽이 연주를 하고 있다.
오늘은 여염집 한 칸에 잠을 청하고, 다음 날은 산중에 앉아 좌선을 하고 있다.
그는 이렇듯 내키는 대로, 또 처한 상황에 따라 어울려, 도무지 일정한 규율 법도가 없었다.”
(同居 士入酒肆倡家, 若誌公持金刀鐵錫. 或製疏以講雜華, 或撫琴以樂祠 宇, 或閭閻寓宿, 或山水坐禪, 任意隨機, 都無定檢.)
(4) 스승
공통점도 있다.
둘 다 일정한 스승의 문하에서 실력을 연마하지 않았 다는 것.
차이라면 퇴계는 그것을 늘 아쉬워하는데, 원효는 전혀 그런 기 색을 내보이지 않는다.
퇴계 : “내가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지만, 주위에 啓發하여 줄 스승이나 벗이 없었다.
그래 수십 년을 헤매면서도 어디로 들어가 공부를 시작해야 할지를 모르고, 헛되이 心思를 낭비했다.
그래도 탐 구와 모색을 계속해나갔는데, 때로 밤새 잠도 자지 않고 靜坐하다가, 心恙을 얻어 오랫동안 학문을 폐하기도 했다.
만약 훌륭한 師友가 있어 내가 잘못 든 길을 깨우쳐주었더라면, 어찌 이처럼 심력만 허비 하고 늙도록 아무 소득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
원효 : 자신을 믿고 공부에 스승을 따르지 않았다(生而穎異, 學不從 師).
“隨師稟業 遊處無恒.”
원효는 아마도 “여러 스승들과 대화를 통 해 자신을 점검하고 성숙시켜 나간” 독자적 사상가의 풍모를 지녔음 에 틀림없다.
(5) 제자들
퇴계 문하에는 3백명 이상의 제자들이 있었다고 한다. (陶山及門諸賢 錄)
이에 비해 원효의 제자는 아홉명 정도? (…傳..佛法 能者有九人… 「비 문」)라고 하나 누군지는 잘 모른다.
아무래도 노력형이 근기와 상황, 진 도에 따른 학습의 노하우를 더 풍부하게 갖고 있는 듯하다.
원효는 제자 들을 키우기보다 그 진리를 桑樞瓮牖玃猴之輩들, 즉 대중 속으로 직접 전파하는 길을 택했다.
“광대들이 쇼의 도구로 쓰던 큰 박을 얻은 적이 있다. 모양이 괴기했 는데, 그것으로 도구를 하나 만들었다. ‘어디에도 걸리는 데가 없어 야 생사의 고리를 건너뛴다’는 화엄경의 뜻을 노래에 담아 세상에 퍼뜨렸다. 이 ‘무애박’을 갖고 천촌만락, 방방곡곡을 노래하고 춤추고 다녔다. 숟가락 하나 꽂을 데 없는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들도 다 ‘불 타’를 알고 ‘나무’를 읊으며 귀의하게 되었으니 원효의 교화는 진정 위대했다.”
(偶得優人舞弄大瓠, 其狀瑰奇, 因其形製爲道具, 以華嚴經一 切無碍人, 一道出生死, 命名曰無碍, 仍作歌流于世. 嘗持此, 千村萬落且 歌且舞, 化詠而歸, 使桑樞瓮牖玃猴之輩, 皆識佛陀之號, 咸作南無之稱, 曉之化大矣哉.)
2. 원효의 스타일, 대승기신론소 첫머리를 읽어보자
두 사람의 저작 스타일을 살펴 보자.
근대 이전의 작가들이 그랬듯이 그들의 사유는 주로 고전의 주석과 편집의 형식을 빌리고 있다.
먼저, 원효.
大乘起信論疏의 첫 머리를 열면, 將釋此論。 略有三門。 初標宗體。 次釋題名。 其第三者依文顯義。 와 만난다.
주석의 전체 설계부터 밝히고 논설을 시작한다.
1) 전체 대의, 취지, 2) 대승기신론이라는 제목, 3) 그리고 본문을 따라가며 해석하겠 다는 것인데, 스타일이 놀랍게도 현대적이다.
1) 그리고 그 유명한 ‘대의(第一標宗體者)’가 선포된다.
然夫大乘之爲體也。 蕭焉空寂。 湛爾沖玄。 玄之又玄之。 豈出萬像之 表。 寂之又寂之。 猶在百家之談。 非像表也。 五眼不能見其軀。 在言 裏也。 四辯不能談其狀。 欲言大矣。 入無內而莫遺。 欲言微矣。 苞無 外而有餘。 引之於有。 一如用之而空。 獲之於無。 萬物乘之而生。 不 知何以言之。 强號之謂大乘。
이른바 標宗體는 자신의 ‘이해’를 축으로, 경전의 핵심을 표명하는 최 고난도의 작업이다.
여기 이르자면 1) 세부와 연관을 장악하고, 3) 전체 와 대면한 다음, 3) 전혀 다른 어휘로 취지를 조직할 수 있어야 한다.
‘대승’이란 무엇일까?
글자 그대로 ‘큰 수레’라고 사전식 정의에 만족 해서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스즈키 다이세츠의 영역본에 따르면 그 것은 인간의 영혼(衆生心)을 가리킨다.
雪滿空庭이란 비유처럼, 그것은 한편 비어 있고, 또 한편 차 있다.
기신론은 이를 眞如의 如實空과 如 實不空으로 공략하고 있다.
불교는 서로 모순되는 것들의 병행 혹은 공 존을 역설하는 점에서 배중률, 모순율을 말하는 논리학의 규칙을 저만큼 넘어선다.
원효는 ‘진리’를 두 계열로 분리해서 세웠다가, 또 부수어 나간다.
위 의 標宗體를 정리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1) ‘그것’은 어떤 규정이나 판단도 미끄러지는 곳(空寂)이지만, 그러나 언어로 표명될 수 있다(猶在百家之談).
그러나 이 방편이 곧 실재가 아니 라는 것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四辯不能談其狀). 여기서 유의할 것은 불교가 채용하고 있는 부정의 언사를 허무와 착 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 실재는 實際한다.
(2) 그곳은 가늠할 수 없는 ‘신비’이지만(玄之又玄之), 그러나 구체적 사물을 떠나 있지 않다(豈出萬像之表).
그러나 우리가 지각하고 구분하고 있는, 즉 표상된(represented) ‘사물’은 이 실재와 손잡지 못한다(五眼不能見 其軀).
실재는 인간의 ‘분별’을 넘어 서 있다.
그러하기, 크다거나 작다거나 할 수도 없고, 최종적으로 ‘있다’거나, ‘없다’고도 말할 수 없다.
‘있다’고 하자니, 모든 것이 본시 그 자리에 있었고, ‘없다’고 하자니, 만물이 이 실재를 타고 생겨난다.
이 신묘를 어떻게 이름지을지 몰라서, ‘큰 수레’라고 하기로 했다.
원효는 이 설명도 미흡하다고 느꼈는지, 「별기」에서 좀 다른 방식으 로 이 소식을 전해 준다.
<別記>
其體也。 曠兮其若太虛而無其私焉。 蕩兮其若巨海而有至公焉。 有至 公故。 動靜隨成。 無其私故。 染淨斯融。 染淨融故。 眞俗平等。 動靜成 故。 昇降參差。 昇降差故。 感應路通。 眞俗等故。 思議路絶。 思議絶 故。 體之者。 乘影響而無方。 感應通故。 祈之者。 超名相而有歸。 所乘 影響。 非形非說。 旣超名相。 何超何歸。 是謂無理之至理。 不然之大 然也。
이번에는 두 계열이 ‘가건물이나마’ 이름을 갖게 되었다.
(1) 無私 : 의지가 사라지면, 즉 ‘무아’라면 세상은 허공처럼 경계와 각 을 잃을 것이다.
주관이 없으므로, 깨끗하고 더러운 ‘구분’이 사라지고, 사바와 초탈도 괜한 소란일 것이다(染淨斯融, 眞俗平等).
(2) 至公 : 사라진 것은 다만 내 무명과 허상일 뿐. 창밖에는 여전히 새가 울고 꽃은 필 것이니, 내가 농담을 던지면, 너는 웃을 것이다(動靜隨 成, 感應路通).
이 둘은 서로 다른 ‘모순’인 것같지만, 그러나 ‘하나의 진실’을 서로 다른 방면에서 읽은 것이다.
이 중 하나가 빠져도 진리의 이름에 값하지 못한다. (是謂無理之至理。 不然之大然也) *
가령, 초기 불교가 1) 無私에 집중했다면, 나중 대승은 2) 至公을 같이 강조한다.
선불교가 채택한 화두는 직접적 방식으로 이 둘과 대면시키고자 한다.
가령, 조주가 無字를 말할 때는 1)을 일깨우려 하고, ‘뜰 앞에 잣나무’를 말할 때는 2)를 바로 보라는 권고일 수 있다.
원효의 말은 이어진다.
마명보살은 왜 이 책을 지었을까?
非杜口大士。 目擊丈夫。 誰能論大乘於離言。 起深信於絶慮者哉。 所 以馬鳴菩薩。 無緣大悲。 傷彼無明妄風。 動心海而易漂。 愍此本覺眞 性。 睡長夢而難悟。 於是同體智力堪造此論。 賛述如來深經奧義。 欲使 爲學者暫開一軸。 徧探三藏之旨。 爲道者永息萬境。 遂還一心之原。
우리는 어떤 곳에서 살고 있나?
無明의 미친(거짓) 바람이 몰아쳐 흉용 한 바다 한가운데에서, 부서진 배조각에 기대 정처 없이 표류하고 있다.”
(所以馬鳴菩薩。 無緣大悲。 傷彼無明妄風。 動心海而易漂。 愍此本覺眞性。 睡 長夢而難悟。 於是同體智力堪造此論。 賛述如來深經奧義)
파도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느라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와 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인간은 긴 꿈 속에 잠겨 있고, 이 책은 그 꿈을 ‘깨는’ 비결을 담고 있다.
그렇다면 언필칭 ‘깨달음’이란, 그럼 그동 안 내가 꿈 속에 있었네를 깨닫는 것으로 번역해도 될 듯하다.
아, 그러고 보니, 원효, 최초의 새벽이란 이름 또한 “인류의 오랜 잠을 두드려 깨우는 자”의 뜻을 담고 있네.
불교는 팔만의 위용을 자랑하지만, 그 기획은 간명하게 정리될 수 있 다.
그래서 기신론이 있게 되었다.
이 짧고 간결한 책은 불교의 매뉴얼 이자, 언설을 판단하는 잣대(諸論之祖宗, 羣諍之評主)이다.
<別記>
其爲論也。 無所不立。 無所不破。 如中觀論十二門論等。 徧破諸執。 亦破於破。 而不還許能破所破。 是謂往而不徧論也。 其瑜伽論攝大乘 等。 通立深淺判於法門。 而不融遣自所立法。 是謂與而不奪論也。 今 此論者。 旣智旣仁。 亦玄亦博。 無不立而自遣。 無不破而還許。 而還 許者。 顯彼往者往極而徧立。 而自遣者。 明此與者窮與而奪。 是謂諸 論之祖宗。 羣諍之評主也。 이 점에서 불교는 기실 하나이다. 所述雖廣。 可略而言。 開二門於一心。 總括摩羅百八之廣誥。 示性淨 於相染。 普綜踰闍十五之幽致。 至如鵠林一味之宗。 鷲山無二之趣。 金鼓同性三身之極果。 華嚴瓔珞四階之深因。 大品大集曠蕩之至道。 日藏月藏微密之玄門。 凡此等輩中衆典之肝心。 一以貫之者。 其唯此 論乎。 故下文言。 爲欲總攝如來廣大深法無邊義故。 應說此論。 此論 之意。 旣其如是。 開則無量無邊之義爲宗。 合則二門一心之法爲要。 二門之內。 容萬義而不亂。 無邊之義。 同一心而混融。 是以開合自在。立破無礙。 開而不繁。 合而不狹。 立而無得。 破而無失。 是爲馬鳴之 妙術。 超信之宗體也。 然以此論意趣深邃。 從來釋者尠具其宗。 良由 各守所習而牽文。 不能虛懷而尋旨。 所以不近論主之意。 或望源而迷 流。 或把葉而亡幹。 或割領而補袖。 或折枝而帶根。 今直依此論文。 屬當所述經本。 庶同趣者消息之耳。 標宗體竟。
팔만의 불교와 수많은 종파가 있지만(開則無量無邊之義爲宗。)
이들은 결국 정신의 ‘소외’와 그 ‘극복’이라는 프레임을 벗어나지 않는다.(合則二 門一心之法爲要)
이 교판이 원효가 포효하는 화쟁의 근거이다.
나는 이 대화와 화쟁이 불교 내부의 이견과 종파를 조율하는 것을 넘어서, 동서 고금의 인문과 철학, 그리고 종교를 매개시켜 나가는 원리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2) 이어 제목에 대한 해설(次釋題名)이 이어진다.
― 言大乘者
大是當法之名。 廣苞爲義。 乘是寄喩之稱。 運載爲功。 總說雖然。 於 中分別者則有二門。 先依經說。 後依論明。
원효의 스타일을 여기서도 볼 수 있다.
‘大’란 이 진리의 특성을 가리 킨다.
‘무한하고, 포괄적’이란 뜻을 담았다. ‘乘’은 비유이다.
사람과 짐을 실어나르는 도구라는 뜻을 취했다.
그러면서 원효는 수많은 경전과 논소에서 불교적 수련을 수레에 비유 하는 사례를 끌고 왔다.
읽기도 어지럽고 현란하다.
이 대목은 독자들이 건너 뛰어도 좋겠다 싶다.
― 言起信者 依此論文。 起衆生信。 故言起信。 信以決定謂爾之辭。 所謂信理實有。 信修可得。 信修得時有無窮德。 此中信實有者。 是信體大。 信一切法 不可得故。 卽信實有平等法界。 信可得者。 是信相大。 具性功德熏衆 生故。 卽信相熏必得歸原。 信有無窮功德用者。 是信用大。 無所不爲 故。 若人能起此三信者。 能入佛法生諸功德。 出諸魔境。 至無上道。 如經偈云。 信爲道元功德母。 增長一切諸善根。 除滅一切諸疑惑。 示 現開發無上道。 信能超出衆魔境。 示現無上解脫道。 一切功德不壞 種。 出生無上菩提樹。 信有如是無量功德。 依論得發心。 故言起信。
“이 논문에 의거해서 중생들이 믿음을 일으킨다!” 분명하다.
여기 信 이란 기독교식으로 “불합리하기에 믿는다”라기보다, 지금 적은 대로 “정 말 그렇구나”라는 ‘확신’을 가리킨다.
무엇을 확신하나?
(1) 진리와 구원(理)이 있다는 믿음… (信*體大. 卽信實有平等法界), 그 리고
(2) 거기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信可得者。 是信*相大。) “내 안에 그 모든 가능성과 조건들을 갖추고 있으니, 그것의 가호로 ‘나의 고향’에 도 달할 수 있을 것이다”(具性功德熏衆生故。 卽信相熏必得歸原).
(3) 세상을 향해 이 구원의 힘과 빛이 발휘될 것이라는 믿음(信有無窮 功德用者。 是信*用大。 無所不爲故)이 그것이다.
* 원효는 그러나, 「立義分」 안에서 相大, 用大를 다르게 해석하기도 한다.
즉 2) 相大 : 불각의 소외된 양상(染相),
3) 用大 : 그 소외를 극복하는 힘들(淨用)로...
여기서 원효의 실력을 엿볼 수 있다.
역시 해석은 한 길만이 아니라 두 갈래 이상으로 열려 있다.
言相用者含有二義。 一者能示如來藏中無量性功德相。 卽是相大義。 又示如來藏不思議業用。 卽是用大義也。 二者眞如所作染相名相。 眞 如所起淨用名用。 如下文言眞如淨法實無於染。 但以無明而熏習故則 有染相。 無明染法本無淨業。 但以眞如而熏習故則有淨用也。 大乘 起信論疏記會本卷一 (ABC, H0020 v1, p.740b09-b17) ― 所言論者 建立決了可軌文言。 判說甚深法相道理。 依決判義。 名之爲論。 總而 言之。 大乘是論之宗體。 起信是論之勝能。 體用合擧。 以標題目。 故 言大乘起信論也。
역시 ‘대승’은 이 모든 것의 ‘목표물’이고, ‘起信’은 이 논의 ‘효과’이다. 둘을 합쳐 제목으로 삼았다.
3) 그리고 본격 텍스트 해석(隨文顯意)이 시작된다.
첫머리 ‘찬탄’ 부분 만 음미해 보기로 한다.
[歸三寶。]
歸命盡十方。 最勝業徧知。 色無礙自在。 救世大悲者。 及彼身體相。 法性眞如海。 無量功德藏。 如實修行等。
― 歸命 :
a) “내 목숨(命)을 들어 바쳐 그분께 귀의합니다”라는 뜻과,
b) “내 근원인 一心(命)으로 돌아가렵니다”라는 두 가지로 읽을 수 있다.
여기서도 ‘문자’를 태클하는 원효의 공력을 리얼하게 읽을 수 있다.
원효 의 해석을 따라가다보면 송고승전이 찬탄한 “勇擊義圍, 雄橫文陣”이 괜한 치레가 아님을 느낄 수 있다.
a) 命謂命根。 總御諸根。 一身之要。 唯命爲主。 萬生所重。 莫是爲先。 擧此無二之命。 以奉無上之尊。 表信心極。 故言歸命。
b) 又復歸命者 還源義。 所以者。 衆生六根。 從一心起。 而背自原。 馳散六塵。 今擧命 總攝六情。 還歸其本一心之原。 故曰歸命。 所歸一心。 卽是三寶故也。
그리고 드문(?) 유머 감각까지 들어 있다.
남녀간 사랑의 노하우를 원 효의 불교에서 얻을 수도 있다?
― 救世大悲者
집안 큰 어른이, 삼계의 화택에서 불장난을 하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 놀라, 그들을 건지러 뛰어가며 소리칠 것이다.
슬픔 가운데도 ‘나와 남’을 구분 않는, 연고 없는 대비가 진정 위대하다.
是第三句擧人結歎。 佛猶大長者。 以衆生爲子。 入三界火宅。 救諸焚 燒苦。 故言救世。 救世之德。 正是大悲。 離自他悲。 無緣之悲。 諸悲中 勝。 故言大悲。
大悲는 힘이다… 원효는 여기 ‘힘’의 여섯 타입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 는데, 가령 어린아이는 그저 울어제치면 엄마가 다 해 준다.
바라문은 참 는 것이 힘이고, 아라한은 정진밖에 믿을 것이 없다.
왕은 교만과 위세가, 그리고 “여인네들은 ‘성질’을 내는 것이 힘이다.
그런 다음에 말로 원하는 것을 얻어낸다.”
(凡聖之力有其六種。 何等爲六。 小兒以嗁爲力。 欲有所說。 要 한형조_원효와 퇴계 사이의 대화 19 當先嗁。 女人以瞋恚爲力。 依瞋恚已。 然後所說。 國王以憍慢爲力。 以此豪勢而自 陳說。 阿羅漢以專精爲力。 而自陳說。)
3. 無我(?)의 코드로 읽는 퇴계
1) 수도사, 퇴계
* 15살 청년의 꿈, 산 속 시내의 가재
負石穿沙自有家。 前行卻走足偏多。 生涯一掬山泉裏。 不問江湖水幾 何。
(「石蟹」)
돌을 지고 모래를 파니 절로 집이 생겼네. 앞으로 갔다 또 뒤로 쪼르르, 다리가 많기도 하지.
내 삶은 여기 한 줌 샘물 속이거니 강호에 물이 얼마나 많은지는 물어보지 않으련다
* 퇴계의 호에 담긴 뜻 身退安愚分, 學退憂暮境. 溪上始定居, 臨流日有省. (1550년)
조정에서 “물러나니(退)” 내 어리석은 분수에 맞는데 학문이 “뒤쳐져서(退)” 늙으막이 걱정이다.
퇴계는 진퇴 양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나는 새장(樊籠)에 갇혔다!”
세 갈래의 기대가 그를 옭죄고 있었다.
율곡은 조정에 남아달라고 부탁 했고, 남명은 왜 거기서 얼쩡대느냐고 힐난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그를 시기하는 무리들이 있었다.
― 求‘退’得進, 辭小受大 (조정의 시기)
― ‘退’陶晩隱이라니? (남명의 냉소)
― 進不澤民, ‘退’啓後人 (율곡의 안타까움)
도산서당은 퇴계 학문의 상징공간이다.
서당을 통해 그의 지향과 학 문을 읽을 수 있다.
2) 도산서당의 사립문, 幽貞門
주역의 이괘(履掛)에서 따 왔다.
“履道坦坦, 幽人貞吉。” 여기 幽는 은둔을, 貞은 학문을 가리킨다.
주역 영역본은 다음과 같이 이 괘를 설명 해 주고 있다.
[외로운 성자가 처한 상황].
삶의 떠들썩함으로부터 물러나, 어떤 것도 찾지 않고,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으며,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 지 않는다. 그는 평탄한 길 위에서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며, 침해받 지 않고, 삶을 헤쳐 나간다. 운명에 거스르지 않고 자족하기 때문에, 속박과 곤경에서 자유롭다.” ( Richard Wilhelm, The I Ching or Book of Changes )
3) 1569년, 선조에게 해 준 마지막 강의
전하, 공부(學問)란, 돌덩이의 마음을 풀어 녹이는 작업입니다!
訂頑, 砭愚 : 不仁之人, ‘私欲蔽錮’, 不知通物我推惻隱, 心頑如石, 故 謂之頑. 蓋橫渠此銘, 反覆推明吾與天地萬物其理本一之故, 狀出仁 體, 因以破有我之私, 廓無我之公, 使其頑然如石之心, 融化洞徹, 物 我無間. 一毫私意無所容於其間, 可以見天地爲一家, 中國爲一人.
완고함에 망치를, 어리석음에 대침을 : 소외된 인간은 이기적 고착(私 欲蔽錮)으로 하여, 남과 소통이 되지 않고, 진정한 자신의 에너지(惻 隱)를 발현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오직 나만 아는 이기적 자아’를 깨고(破有我之私), ‘무아’의 공적 지평을 확대해 나가시옵소서(廓無我 之公)… 그때 돌처럼 굳어있던 마음이 풀어지고 어울려, 너와 나 사 이에 간극이 사라집니다(物我無間). 그때 악착하던 의지(* 무명의 오 랜 지배?)가 떨어져 나가(一毫私意無所容於其間), 천지가 한 집이고, 세상 사람이 한 마음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불교와 노장처럼 유교도 無我를 말한다.
가령 논어의 일절.
子絕四 : 毋意, 毋必, 毋固, 毋我。 (자한4)
공자께서는 네 가지를 끊었다.
의지, 집착, 편견, 이기를 떨쳐냈다.
주자의 집주는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意 : 사적 욕구, 必 : 기필코 구현, 固 : 패턴, 고착, 我 : 자아로…
意, 私意也。 必, 期必也。 固, 執滯也。 我, 私己也。 四者相為終始, 起 於意, 遂於必, 留於固, 而成於我也。 蓋意必常在事前, 固我常在事後, 至於我又生意, 則物欲牽引, 循環不窮矣。
이들 넷은 서로 연속되어 있고, 자아는 또 거기서 의지를 충동하는 점에서 사이클로 연환된다고 썼다.
주자의 해석이 불교를 닮아 있다는 것을 짐작할 것이다.
가령 여기 意를, 대승기신론에서 말하는 意, 意識의 특성과 견주어 보면 그 유사성이 더욱 뚜렷해질 것이다.
復次, 生滅因緣者, 所謂眾生依心. 意. 意識轉故。 此義云何? 以依阿 梨耶識說有無明不覺而起, 能見、 能現、 能取境界, 起念相續, 故說為 意。 此意復有五種名。…五者、 名為相續識, 以念相應不斷故, 住持過去無 量世等善惡之業令不失故, 復能成熟現在未來苦樂等報無差違故, 能 令現在已經之事忽然而念, 未來之事不覺妄慮。 是故三界虛偽唯心所 作, 離心則無六塵境界。…當知世間一切境界…如鏡中像無體可得, 唯 心虛妄。 以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種種法滅故。…復次, 言意識者, 即此相續識.
4) 心學
무아를 향한 주자학의 훈련을 敬 한 글자가 집약하고 있다.
毋不敬, “언제나, 어디서나 ‘敬(경건)’을 유지한다.”
유대이즘은 평범한 행위, 삶의 하찮은 것들을 다루는 신학이다… 경 건(敬)은 고립된 행동, 특별한 때의 순간적인 경험 속에 있지 않고… 인간의 영혼 속에 있는 끊임없이 계속되는, 변하지 않는 무엇이다. 공중에 부는 산들바람처럼 그것은 모든 행위, 주장, 생각들을 뚫고 달린다. 그것은 모든 성격에, 모든 행동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삶의 행로이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헤셸의 슬기로운 말들)
5) 오래된 昏亂을 타파하라.
마음은 망각과 혼란 속에 있다.
이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求放心 : “집 나간 닭은 찾으러 나서면서 네 마음을 잃어버린 줄은 모르느냐?”
心在 : “걱정하지 마라. 아차, 하는 순간, 여기 있다. 힘들이지 마라.
주시와 대면이 전부이다.
너를 집요하게 간섭하는 타자의 흔적을 경 계하라.
점차 물욕이 줄어들고, 자연이 자리를 잡게 될 것이다.
” 所謂放心者, 不是走作向別處去, 瞬目閒便不見, 纔覺得便又在面前, 不是苦難收拾. 且去提醒便見得. 若收斂, 都在義理上安頓, 無許多胡 思亂想, 則久久自於物欲上輕, 於義理上重.”
내적 명상 혹은 관찰로서의 敬은 다음 4가지 코드로 집약된다.
*必有事焉而 *勿正, *心勿忘, *勿助長也.
기대도, 방치도, 조작도 하지 말고… 그리고 ‘현재’를 살아라! Carpe Diem!
6) 天雲臺, 거울과 연못의 비유
天雲臺 도라드러 玩樂齋 蕭洒한듸 萬卷生涯로 樂事이 無窮하얘라 이 듕에 往來風流롤 닐어 므슴할고 (「도산십이곡」 중 7)
반 이랑 네모진 연못이 거울처럼 열려 있어 하늘 빛과 구름 그림자 어울려 오가네 묻노니, 그대 어찌 그리 맑을 수 있는가 아득한 샘에서 싱싱한 물이 솟아 오기 때문이지
半畝方塘一鑑開, 天光雲影共徘徊 問渠那得淸如許, 爲有源頭活水來 (朱子, 「觀書有感」)
7) 天淵臺, 혹은 자유
― 感應 : 바람이 불면, 숲이 울고, 봄이 되면 꽃이 피는 것과 닮았다.
― 鳶飛魚躍 : 인간은 자신의 힘과 권능을, 그 생명을 최고도로 발양 하게 된다.
鳶飛戾天, 魚躍于淵 (시경, 중용)
춘풍(春風)에 화만산(花滿山)하고 추야(秋夜)에 월만대(月滿臺)라 사시가흥(四時佳興)ㅣ사롬과 한가지라. 하말며 어약연비(魚躍鳶飛) 운영천광(雲影天光)이야 어늬 그지 이슬고. (「도산십이곡」 중 5)
In a spring breeze, flowers blanket the whole mountain. On a fall evening, the moon light chokes the pavilion. I don’t know what to do with all this fun, day and night. Fishes leap, hawks in flight; The clouds and sky shine on my pond.
이 ‘자연=자유’를 위해서는 몸과 마음의 래디칼한 훈련을 거쳐야 한다. 眞積力久, 久久純熟.
8) 술잔 속에 담긴 ‘존재’의 비밀
퇴계 도학의 종착지는 어디일까?
그가 도연명의 「음주(飮酒)」에 화답 한 시가 있다.
酒中有妙理, 未必人人知. 取樂酣叫中, 無乃汝曹惑. 當其乍醺醺, 浩氣兩間塞. 釋惱而破吝, 大勝榮槐國. 畢竟是有待, 臨風還愧默. (和陶集 飮酒).
퇴계는 말한다.
술잔 속에 ‘존재’의 비밀이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잘 모른다.
따뜻한 술이 한 두 잔, 목을 타고 뱃속으로 들어서면... 알딸딸한 기운(醺醺), 거나해지는 배포(浩氣)에 세상이 돈짝만하게 보일 터... 그때 釋惱而破吝, 나를 옭죄고 있던 수많은 근심과 걱정이 녹고, 그토록 떨던 악착이 떨어져 나간다.”
그때가, 사물들의 삐꺽임이 사라지고, 너와 내가 하나가 되는 곳(融化 洞徹, 物我無間)이고, ‘해체’를 통해 ‘존재’가 망각과 은폐를 벗는 자리 (aletheia), 또는 인간이 자연과 동형화하는 경지(天人合一之妙)가 열린다.
그러나… 이곳은 술이나 약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새벽 찬 공 기에 전봇대를 잡고 토할 수도 있고, 마약 중독으로 시설에 갇힐 수도 있다.
9) 퇴계의 경지
어느날 누군가가 서당앞 마당을 질러 가고 있었다.
마당을 쓸던 노복 이 불같이 화를 냈다.
“말에서 내리지도 않고, 인사도 차리지 않다니…”
아마도 조용히 책을 보고 있던 퇴계가 이렇게 말했다.
“좋은 풍경 하나를 보탰을 뿐인데, 네가 왜 화를 내고 있느냐?”
그는 ‘깊은 산 속 난초가 되고 싶다’고 했다. 아무도 없는 우거진 산 속에, 종일 향을 피우는 난초가… 그 난초는 심지어 자신이 향기를 온 사방에 흩뿌리고 있다는 것도 모른다.
君子之學。 爲己而已。 所謂爲己者。 卽張敬夫所謂無所爲而然也。 如 深山茂林之中。 有一蘭草。 終日薰香。 而不自知其爲香。 正合於君子 爲己之義.
4. 中乘, 다시 책을 통한 불교를…
* 혜능의 교판에 따르면, 공부는, 즉 인간의 길은 네 단계를 거친다.
見聞轉誦是小乘, 悟法解義是中乘, 依法修行是大乘. 萬法盡通, 萬法具備, 一切不染, 離諸法相, 一無所得, 名最上乘 小乘 :
즉 철학자들을 만나고, 고전을 읽기 위해 땀흘리는 수련이 있 다.
이 훈련이 익으면,
中乘 : 취지와 메시지를 이해하는 단계에 이른다. 복잡한 것들이 줄 어들고, 사로 다른 사유에서 동질성과 유형을 확인하는 易簡의 단계 로 진입한다.
大乘 : 그 직관을 삶에서 확인하고, 이해를 공고화해나가는 체험적 실천이 그것이다.
주자학의 어법으로는 先知後行이라 부를 만하다.
最上乘 : 그 오랜 도정의 끝에서 더 이상 그런 노력이 필요없는 자유 의 순간이 온다.
공자는 그것을 종심소욕불유구라 불렀고, 불교는 無 功用行이라 부른다.
여기서 관건이 중승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읽되, 거기 끌려가서는 안된다.
혜능은 “법화경을 굴려야지, 거기 굴림 당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 했다.
* 7세기 동아시아 불교의 최전성기, 거기 3걸의 선택 아시다시피,
(1) 현장은 인도불교의 ‘원전’에 조회하러 목숨을 건 여행 을 했고,
(2) 혜능은 기존의 불교를 넘어 ‘구어체 불교(口訣)’를 새로 창안 했다.
(3) 우리의 원효는 맨 첫머리에서 본 바, 宗要가 가리키듯, 불경을 완전히 ‘소화’해서… 그것을 자신의 언어로 풀어내는 독창적 길을 간다.
송고승전에서 원효를 두고 읊은 “勇擊義圍, 雄橫文陣!”는 취지를 장악하면서, 동시에 담론적 차이, 문화적 언어적 맥락을 고려한 새로운 어법의 불교를 창안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가 채택한 標宗體, 述大 意 등이 그 지점을 뚜렷이 보여준다.
이 시대 불교가 감당해야 할 길은 원효의 길을, 그 궤철을 밟는 것이 아닐까 한다.
원전으로 돌아가면 난삽의 오리무중으로 들어서기 십 상이고, 독보의 깨달음을 외치면 사이비인지 불교인지 모를 수도 있다.
중승의 길, 관건은 ‘이해’이다.
이 體會의 독서를 권한다.
고전은 어렵 다.
니체가 경고하듯이 책은 현대인들처럼(modern man) 읽어서는 안 되고 소(?)처럼 되새기고 연구해야 할 것이다.
* 대화 : 불교 밖에도 불교가
이때 자연스럽게 ‘불교’는 자신을 넘어 다른 전통과 대화하고, 그 평행 을 가늠하게 된다.
가령화엄경소서에서
1) 장자 : 원효가 봉황과 송사리를 구체적으로 대비하고, “겨자를 큰 창고에 들이듯”이라 한 비유는 장자에서 차용한 것 이다.
2) 유교 : 지금 대승기신론의 종지를 설하면서, “無私와 至公”이 라는 유교적 사회학의 프레임을 과감하게 차용하고 있다.
관건은 ‘이해’에 달려 있다.
일찌기 경허가 외친 바 있다.
“언설의 속살이 짚이면, 거리의 잡담도 다 진리의 가르침이요, 무슨 말인지 모르면, 팔만의 장경, 그 용궁의 보배 곳간도 한바탕 잠꼬대일 뿐이다(得其志也, 街中閑談常轉法輪, 失於言也, 龍宮寶藏 一場寐語.)”
그럼, 원효의 ‘화쟁’의 정신을, 지금 다른 동서의 인문, 철학, 종교적 전통까지 확장해야 한다.
왜 그럴 수 있는가.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 대화의 토대
― 동서고금, 말법의 시대조차, 인간의 조건은 바뀌지 않았다. (지눌, 「결사문」)
諸公聞語曰 時當末法 正道沉隱 何能以定慧爲務 不如勤念彌陁 修淨 土之業也. 余曰 時雖遷變 心性不移 見法道之興衰者 是乃三乘權學 之見 有智之人不應如是.
― 모든 궁극의 지식은 원효의 표현을 빌리면 “一心 二門”의 프레임 을 벗어나지 않는다.
則無量無邊之義爲宗。 合則二門一心之法爲要。 二門之內。 容萬義 而不亂。 無邊之義。 同一心而混融。 是以開合自在。 立破無礙。 開而 不繁。 合而不狹。 立而無得。 破而無失
*평행의 예를 들자면,
―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아마도 전생의 불교를 기억해낸 것인지도 모 른다
“The philosophical reception began with Arthur Schopenhauer in 1819... Although he had access to very few original documents, Schopenhauer reproduced the Buddhist system of thought from Kantian antecedents with such an accuracy that one may well believe that he remembered it from a previous life.” (E. Conze, A Short History of Buddhism)
― 로마 황제의 無住相布施
“남에게 친절을 베풀면서 사람들은 보통 다음의 세 가지 중 한 가지 태도를 취한다.
첫째는 자기가 베푼 친절이 곧 보답이 되어 돌아오기 를 바라는 것이고,
둘째는 곧 보답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자신의 친 절을 잊지 않고, 상대방을 빚진 사람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마지막으 로 자신이 베푼 친절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는 자신 의 친절에 대해 아무것도 돌려받기를 바라지 않는다.
마치 포도나무 에 포도가 열리고, 또 익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선행을 하였으면 그것으로 족한 것.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 주기를 바라지 말라. 제철 맞은 포도나무에 줄줄이 포도가 달리듯, 사냥개가 사냥감을 추적하 듯, 벌이 꿀을 모으듯,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선행을 베푸는 사람이 되라...” (명상록, 강분석 역)
“포도나무에 포도가 열리듯, 사냥개가 사냥감을 추적하듯...”이라는 표 현은 화엄의 소식, 무위의 자연스러움을 탁월하게 묘파하고 있지 않은가.
5. 원효와 퇴계 사이의 교감
본래의 주제로 돌아와서, 불교와 유교 사이에, 그리고 전혀 본 적도, 믿음도 다른 원효와 퇴계 사이에 교감 & 대화가 가능할까?
1) 유불의 역사적 교섭
선불교는 인도 불교와 노장 사상의 결합이다?
If Buddhism is the father, Taoism is the mother of this prodigious child. But there can be no denying that the child looks more like the mother than the father. (John Wu, The Golden Age of Zen ) → 그럼 원효, 화엄경소 등에 차용된 장자는 우연이 아니다?
“원효의 많은 저서에 莊子로부터의 영향이 여러 차례 나타나고 있음 은 그의 외전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적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김상현, 원효 연구 47쪽; 石井公成, 「원효와 중국사상」)
주자학은 유불도 삼교의 통합 체계이다.
불교에서 형이상학과 심리학 을, 노장에서는 자연과 생명을, 그리고 여기 유교의 사회적 관심과 윤리 학을 접목했다.
율곡은 드물게 금강산 입산의 경험이 있다.
이를 통해 주자학의 토대와 세부를 더 자세히 알 수 있었다.
퇴계와 원효 사이, 더 큰 층위에서 불교와 주자학 사이에 공유하는 지점 하나를 살펴보자.
體用論의 형이상학은 제쳐 두고, 근본 수행법에 주목하기로 한다.
2) 유불의 공유지점, 定慧雙修, 止觀兼修, 惺寂等持
定慧는 8정도 三學 중의 중심이다.
이 키워드는 원효의 대승기신론 이 止觀이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지눌의 수심결 등에서 “두 가지 定慧” 로 강조하는 점에서, 불교의 대표적이고, 일반적인 가르침이자, 불도 수 행의 중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수행법을 유교가 그대로 차용, 접목시켰다!
율곡은 아동들을 위한 주자학의 기초훈련으로 ‘靜坐’를 강조하면서, 惺惺寂寂을 강조했다.
“有事則以理應事, 讀書則以誠窮理, 除二者外, ‘靜坐’收斂此心, 使寂 寂無紛起之念, 惺惺無昏昧之失可也, 所謂敬以直內者如此.” (擊蒙 要訣)
일이 닥치면 사리에 맞게 대처하고, 책을 펼치면 온 마음으로 도리를 탐구한다. 그 외에는 ‘마음을 가다듬고 앉아’ 이 마음을 끌어모으되, 한편 온갖 상념이 방해하지 않도록 성벽을 치고(寂寂), 한편 정신이 혼침으로 가라앉지 않도록 깨어있도록(惺惺)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내면을 각성으로 바로잡는 법(敬以直內)’이다.
주자 心學의 기초 설명이 있어야겠다.
주자학은 인간의 문제를 ‘희노애 락’으로 설정했다.
“청천하늘에 별들도 많고, 우리네 가슴에 수심도 많다.”
살아있는 생명체로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고, 자신의 내적 의지를 분 출하는 인간 존재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나.
(* 「육도윤회도」에서 4.신체, 5. 감각, 6.자극, 7, 느낌, 8. 욕망의 연쇄 고리를 연상하면 되겠다. 오온 가운데 受: 느낌과 감정이 정신활동 가운데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인간의 ‘수행’은 이 ‘정동’을 완전으로 이끌어 가자는 것이다.
주자는 처음 ‘이미 발현된(已發)’ 희노애락과 그 감정을 계산하는 ‘사 념(意)’에 주목했다.
이 활동을 ‘省察’이라고 부른다.
주자는 그러나 이 ‘추 적’과 ‘심판’이라는 추후적 작업이 너무 번잡하고 늦다는 것을 자각, 사상 의 전환을 기한다.
그것을 中和新說이라고 부른다.
요점은 ‘감정’의 발출 이전에, 잠정적 ‘의지’의 측면에 손을 써야 한다는 것!
이를 “감정이 발하 기 이전”이라는 의미에서 ‘未發’이라고 부른다.
감정도 아직이고, 사려도 일어서지 않은 자리, 바로 그곳을 ‘미리’ 다스려야만, 자연스레 감정이 조 화를 얻고, 세상은 평온해질 것이다.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教。 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 非道也。 是故君子戒慎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 莫見乎隱, 莫 顯乎微。 故君子慎其獨也。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發而皆中節, 謂 之和;中也者, 天下之大本也;和也者, 天下之達道也。 致中和, 天地 位焉, 萬物育焉。
그런데 이 ‘未發’은 그럼, 어떤 상태이고, 어떻게 그곳을 수련할 수 있 을까?
이 주제가 불교적 ‘명상’과 연결되어 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성학집요의 「正心」장의 끝에서 율곡은 말한다.
臣按。 未發之時。 此心寂然。 固無一毫思慮。 但寂然之中。 知覺不昧。 有如沖漠無眹。 萬象森然已具也。 此處極難理會。 但敬守此心。 涵養 積久。 則自當得力。 所謂敬以涵養者。 亦非他術。 只是寂寂不起念慮。 惺惺無少昏昧而已。
이 ‘미발’의 상태는 “思慮가 아직 움트기 이전, 그러나 知覺은 깨어 있는 상태”라고 강조한다.
答張欽夫書。 (論中和第六書) 思慮未萌而知覺不昧。 是則靜中之動。 復之所以見天地之心也。
사람들은 “사려가 없는 상태”를 의식의 부재와 혼동하기 쉽다. (* ‘현 상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내리기도 한다.)
그래서 졸다 깨서, 잠시 정 신 없는 상태를 가리키느냐고 묻기 일쑤였고, 또 아니면 의식의 잠재적 가능성으로 추상화시킨 사람이 많았다.
지금의 학자들도 이 지점을 두고 논란 중이다.
간략하게 정리하면 이렇다.
‘未發’의 時에, 知覺은 살아 있으므로, 사 물들이 오고 가고, 음식 맛도 본다. 다만, ‘사려’ 즉, 염려는 없다!
(雖有見 聞。 不作思惟。 則不害其爲未發也) 臣答曰。 纔有所思。 便是已發。 旣云體認。 則是省察工夫。 非未發時 氣象也。 故朱子晚年定論。 以體認字爲下得重。 此不可不察。 但學者 靜坐時。 作此工夫。 輕輕照顧未發時氣象。 則於進學養心。 必有益。
“思慮未萌而知覺不昧”는 마음의 기본적 본원적 특성이다.
지금 보듯 未發은 추상이나 가능성이 아니라 모종의 ‘시점’이고 ‘경험’의 구체적 지 평 위에 있다.
주자학은 이곳을 虛靈知覺이라고 특칭했다.
‘비어 있는 신비’인 그곳 은 의식의 각성이 생생한 곳(知覺)이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없는가… 기신론에 익숙한 사람은 곧 주자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짐작할 것이다.
즉, 원효가 말한, “明明不昧, 然諸法皆空之處 靈知不昧 不同無情 性 自神解”가 이곳을 가리키고, 지눌이 수심결에서 역설하고 있는 空寂靈知之心도 이곳을 가리킨다.
그럼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원효, 지눌, 퇴계, 율곡이 공히 마음의 정체를 “空寂(虛)+靈+知(覺)”로 규정하고 있다고… 둘 사이의 유사성은 전혀 우연이 아니고, 근본적이고 결정적이다.
명상의 시작은 머리 속의 어지러운 ‘생각’을 가라앉히는 곳에서 시작 한다.
기신론 수행심신분을 읽어보자.
“세상은 본래 평온하다. 생각이 생각에 꼬리를 물게 하고, 사물이 마 음에 물결을 일으키게 하지 마라. 그런 후, 그 마음도, 즉 마음의 물 결을 일으켜서는 안 되겠다는 그 마음까지 제거하라. 생각에 굶주린 마음이 무료를 참지 못하고 해오던 대로 딴 생각에 콩밭에 가 있는 수가 있으니, 이때 화들짝 본래 자리, 정신의 고요로 돌아오게 해야 한다... 좌선을 풀고 일어나 길을 걸을 때도, 일을 할 때도 언제든 시시각각 이 훈련을 떠올리고 노력해야 한다. 이 각성과 머무름의 훈련이 오래되고 익숙해지면 마음이 안정되고 중심을 확보하게 된 다. 좀 더 밀고나가면 어느덧 가속력이 생겨 진여삼매(眞如三昧)로 진입하게 된다. 번뇌는 발아래 엎드리고 믿음은 크게 자라나 더 이상 후퇴를 염려치 않아도 된다. 이 효과를 의혹하지 마라.”
云何修行止觀門? 所言止者, 謂止一切境界相, 隨順奢摩他觀義故. 所 言觀者, 謂分別因緣生滅相, 隨順毘鉢舍那觀義故. 云何隨順? 以此二義, 漸漸修習, 不相捨離, 雙現前故. 若修止者, 住 於靜處, 端坐正意, 不依氣息, 不依形色, 不依於空, 不依地水火風, 乃 至不依見聞覺知, 一切諸想, 隨念皆除, 亦遣除想. 以一切法, 本來無 相, 念念不生, 念念不滅, 亦不得隨心外念境界, 後以心;除心, 心若馳 散, 卽當攝來, 住於正念. 是正念者, 當知唯心, 無外境界. 卽復此心, 亦無自相. 念念不可得. 若從坐起, 去來進止, 有所施作,於一切時, 常 念方便, 隨順觀察. 久習淳熟, 其心得住, 以心住故, 漸漸猛利, 隨順得 入眞如三昧, 深伏煩惱, 信心增長, 速成不退. 唯除疑惑、不信、誹謗、 重罪業障、我;慢、懈怠.如是等人,所不能入. 復次, 依如是三昧故, 則知 法界一相. 謂一切諸佛法身、與衆生身, 平等無二. 卽名一行三昧. 當 知眞如, 是三昧根本. 若人修行, 漸漸能生無量三昧.
이 훈련은 무의식을 건드린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장애와 방해가 나 타난다.
이 모두가 ‘마음의 장난’이라 여기고, 지혜로 관찰할 뿐, 거기 달 려들거나 잡아채지 말고 ‘생각 하나’로 오로지 밀고 나가라.
그럼 업장들 이 절로 점점 떨어져 나갈 것이다.
그렇게 순간순간 찰나에 일어났다 스러질 生滅의 마음들이 나를 이 토록 고통과 번뇌 속에 빠트리고 있지 아니한가.
주자학도 이 문제를 주 타겟으로 설정했다.
이상적인 마음은 明鏡止水.
먼지 없는 잘 닦인 거울처럼 깨끗하고, 물결 없는 시내처럼 고요하다.
이 안에는 선한 의도(著意)나 행위에의 강 박(按排)이 없다.
그 ‘빈자리’에서 사물들은 생긴 대로 놀고, 나 또한 본래 ‘예비된 자연(性)’을 표출할 것이다.
자극에 대한 반응은 이처럼 “無로부터 솟아나와야 한다(從無處發出)!”
이 점에서 유교, 특히 주자학은 노장 불교 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
대체 마음속에 어떤 찌끼가 살고 있을까.
대학은 ‘정심(正心)장에서 말한다.
“마음속에 분노가 있다면, 공포가 있다면, 특정한 선호가 있다면, 혹은 걱정에 쌓여 있다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한다.”
‘마음’이 무엇인가에 미리 점유되어 있다면 사물을 인지할 수 없음은 물론, 거기 적절히 반응 할 수 없다.
다시 대학은 말한다.
“마음이 (다른 것에 점유되어) ‘현재’를 놓치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음식을 먹어도 무슨 맛인지 모른다
(心不在焉,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
역시 마음은 “완전히 비워야(心不可有一事)”하는 물건이다.
그런데 그 게 어디 쉬운가.
마음속의 찌끼 가운데 율곡이 가장 경계하는 것이 있다.
바로 ‘뜬 생각(浮念)’이다.
머릿속을 오가는 수많은 벌떼 같은 상념들.
율곡은 차라리 ‘악념(惡念)’은 다루기 쉽다고 말한다.
도덕적 갈등이 자각 을 불러 일으키고 제어의 브레이크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뜬 생각들은 선도 악도 아닌 모호한 성격으로 하여 실제로 는 도(道)에 가장 위협적이라고 했다.
이들
“부념은 별 일이 없을 때, 문득 일어나고 사라져서 ‘자유’를 얻지 못하게 한다.”
“비록 착한 생각이라도 적절한 때가 아닌 것은 부념(或雖善念, 而非其時者, 則此是浮念也)”이다.
율곡은 이 생각을 그러나 ‘눌러 다스리려’ 해서는 안 된다고 천만 경 계한다.
이 점에서 지눌이 수심결(修心訣)에서 준 처방과 다르지 않다.
“부념이 일어날 때 이를 혐오하면 더욱 더 분란이 일어납니다. 혐오 하는 이 마음이 또한 부념임을 잊지 마십시오. 부념임을 ‘캐치’한 후 에는 그것이 가볍게 물러가도록 두십시오. 단지 마음의 각성을 일으 켜, 부념에 휘둘리지 않으면, 일어났던 마음이 곧 그칠 것입니다. (다만 절대로 여기 끌려다녀서는 안됩니다.) 이런 노력을 날마다 쉬지 않고 하시되, 하루아침에 효과를 볼 생각을 마시고, 작파해서도 안 됩니다. 기량이 자리 잡히기까지는 답답하고 한심한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 다. 다시금 정신을 가다듬고, 마음 바탕을 청소하여, 마음속에 ‘한 생 각’도 없게 해서, 청화한 기상을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久久純熟, 오 랜 훈련이 중심을 잡으면 이 마음이 우뚝 튼튼히 서 있는 것을 느끼 게 될 것입니다. 그때 더 이상 사물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에 속한 것이 자신의 뜻대로’ 발휘되고, 내 속 本體의 밝음이 가려지지 않고 빛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식의 밝은 렌즈에 사물의 실제가 어김없이 드러날 것입니다.
浮念之發。 有意厭惡。 則尤見擾亂。 且此厭惡之心。 亦是浮念。 覺得 是浮念後。 只可輕輕放退。 提掇此心。 勿與之俱往。 則纔發復息矣。 (念慮紛亂時。 此心省悟。 知其爲浮念。 勿爲所牽而俱往。 則漸當自息。) 如 是用功。 日夕乾乾。 不求速成。 不生懈意。 如未得力。 或有悶鬱無聊 之時。 則亦須抖擻精神。 洗濯心地。 使無一念。 以來淸和氣象。 久久 純熟, 至於凝定, 則常覺此心卓然有立, 不爲事物所牽累, 由我所使, 無不如志, 而本體之明, 無所掩蔽, 睿智所照, 權度不差矣.”
사념을 그치는 定과 止, 寂寂의 측면만 살펴 보았다.
여기 다른 짝의 ‘각성’이 합세해야 득력, 힘이 탄력을 받을 것이다.
아, 하나… 지눌은
自性定慧와 隨相定慧를 나누고, 후자를 근기가 낮 은 자들의 일로 돌렸다.
若言先以寂寂 治於緣慮 後以惺惺 治於昏住 先後對治 均調昏亂 以 入於靜者 是爲漸門劣機所行也. 雖云惺寂等持 未免取靜爲行 則豈爲 了事人 (修心訣)
그러나, 업장이 두텁고, 장애가 많은 사람들, 무명의 힘이 억센 사람 들은 이 각각의 분리 대치를 채택하지 않을 수 없다.
然障濃習重 觀劣心浮 無明之力大 般若之力小 於善惡境界 未免被動 靜互換 心不恬淡者 不無忘緣遣蕩功夫矣. (같은 곳)
퇴계와 율곡은 불교식 어법으로 하자면, 하근기의 “隨相(門)定慧” 쪽 만 강조할 뿐, 자성정혜는 특필하지 않는다.
다만 시간이 지나고, 眞積力 久… 훈련이 쌓이면 자연히 둘이 융통하는 경지로 이동할 것이라고만 짚 어두었다.
이 수련은 아무래도 자동차 운전을 닮은 듯하다.
처음 수동을 조작할 때는 클러치와 브레이크, 기어가 따로 따로 신경 쓰이고, 덜커덕, 더듬기 일쑤이다.
점차 경력이 쌓이면 손과 발이 자연스럽게 협화하다가, 어느새 휘파람을 불거나, 보도를 지나가는 사람의 매무새를 따라 가는 여유를 부리기도 한다.
若掉擧熾盛則先以定門 稱理攝散 心不隨緣 契乎本寂 若昏沉尤多 則 次以慧門 擇法觀空 照鑑無惑 契乎本知 以定治乎亂想 以慧治乎無記 動靜相亡 對治功終 則對境而念念歸宗 遇緣而心心契道 任運雙修 方 爲無事人 (같은 곳)
6. 어디서 갈라 지는가, 理의 객관성
원효 기신론의 수행신심분 & 지눌의 수심결, 그리고 퇴계의 敬이 핵심을 공유하고 있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중대한 차이가 있다.
누구나 짐작할 것인데, 앞에 인용한 율곡의격몽요결을 다시 보자.
“有事則以理應事, 讀書則以誠窮理, 除二者外, ‘靜坐’收斂此心, 使寂 寂無紛起之念, 惺惺無昏昧之失可也, 所謂敬以直內者如此.” (擊蒙 要訣)
敬以直內는 義以方外와 짝하고 있다.
불교식으로 ‘명상’으로는 충분 하지 않다는 것.
惺惺寂寂은 이를테면 반쪽이다!
수행은 動靜을 두루 갖 추어야 한다.
내면의 의지를 관찰하고, 그 작동을 억제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 고, 그를 기반으로, 활동적 인간의 삶을 완성하는 것은 또 다른 과제로 버티고 있다는 것이다.
원효는 앞에서 無私와 더불어 至公을 강조했는데, 이후의 불교는 이 지점을 본격 포괄하는데 아무래도 소홀한 듯하다.
有事則以理應事, 讀書則以誠窮理.
인간은 시시각각 일에 부닥치고, 그것을 적절히 대처하고, 사회적 상식과 규율에 맞게 처리해 나가는 것은 멀고 요원한 과제이다.
이 과제를 주자학은 ‘理’라고 불렀다.
以理應事, 일은 그에 따라 온전 히 처리해야 하고, 以誠窮理 그 ‘원리’를 독서와 사색을 통해 성실하게 탐구해 나가야 한다.
그러자면
1) 내적 자각의 유지(居敬)와 더불어
2) 사물의 존재와 대처 방안(窮理)이
서로 협력해야 인간의 길이 온전해 질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3) 이 ‘원리’를 일상의 어느 상황, 어느 시점에서든 구현해 나가는 힘든 도정(力行)이 기다리고 있다.
이곳이 핵심적 차이이다. 유교는 인간이 우주적 탄생이자, 동시에 사 회적(*가족적) 존재임을 잊지 않는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여, 율곡의 불교 비평을 들어보자.
그는 19세, 어 머니의 죽음과 맞닥뜨려 금강산에서 1년을 유력한 경험이 있다.
노승과 유불의 일대 격전을 짧은 글에 싣기도 했다.
다음은 성학집요의 「異端 」편에 붙인 자신의 ‘의견’이다.
불교에는 정밀한 것, 조잡한 것이 섞여 있다. 한편 윤회와 인과응보 로 죄와 복을 걱정한 우매한 중생들로 하여금 다투어 절간에 공양케 한 것이 조잡에 속한다. 한편 정신의 내부를 정밀하게 논의하기도 했다. 그들은 理를 心이라 하고(*객관과 주관을 혼동하고), 心을 만법의 근 본이라 했으며(*세계를 인식에 귀속시켰으며), 心을 性이라 했고(*현 실과 이상 사이의 간극을 놓쳤고), 性을 見聞작용이라 했으며(*방거사 처럼, 정신의 활동을 절대시했고), 寂滅을 최고의 경지로 했으며(*초 탈을 삶의 목표로 정했고…). 천지만물을 환망으로 여겨(*三界唯識. 우리가 보는 세상은 실재하지 않고, 다만 인식의 미망일 뿐이라고 생각 했다.) 그리고 출가를 길이라고 여겼고(*사회적 책임의 방기), 인륜을 질곡으로 알았다. (*윤리적 규제를 자유의 방해물로 생각했다.)
臣按。 佛氏之說。 有精有粗。 粗者。 不過以輪廻報應之說。 廣張罪福。 誘脅愚迷。 使之奔走供奉而已。 其精者則極論心性。 而認理爲心。 以 心爲萬法之本。 認心爲性。 以性爲見聞作用。 以寂滅爲宗。 以天地萬 物爲幻妄。 以出世爲道。 以秉彝人倫爲桎梏。
그 수행의 방법은 ‘不立文字。 直指人心。 見性成佛’을 요체로 했다. 頓悟하고 나서는 漸修를 더 해야 하는데, 혹 상근기라면 <돈오돈수> 도 가능하다 한다. (*율곡은 틀림없이 지눌의 수심결에 익숙하다)
양 무제때 달마가 중국에 들어와 처음 이 도를 전했는데, 선학이 바 로 이것이다.
당나라에 들어와 크게 융성, 그 무리들이 천하를 덮었 다.
“揚眉瞬目。 棒喝大笑”로 서로 인증 인가했다. 其用功之要。 則不立文字。 直指人心。 見性成佛。 頓悟之後。 方加漸 修。 若上根之人。 則或有頓悟頓修者。 達磨於梁武帝時。 入中國。 始 傳其道。 所謂禪學者是也。 至唐而大盛。 其徒遍天下。 揚眉瞬目。 棒 喝大笑。 以相印證。
요컨대 ‘무분별(無意)’을 도라고 여겨, 선악을 묻지 않는다.
‘분별(意 思)’로 얻은 것은 모두 거짓 망견으로 생각한다.
판단이나 사념 없이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것(必也任情直行。 不用意思)을 고취한다.
여기 도달하지 못한 자는 한 두 구절 ‘무의미한 화두(無意味話頭)’, 예를 들 면 ‘狗子無佛性。 庭前柏樹子’ 등에 무한 신비의 의미를 부여해, 그 의문을 오로지 한 마음으로 파고들어, 적공이 무르익으면 고요한 명 상의 끝(靜定之極)에서 정신(心性)의 그림자를 어렴풋한 상상 속에서 보게 된다고 한다.
이를 할연대오라 내걸고, 내키는 대로 자유롭게 사는 것, 그로서 (대장부) 일대사를 마쳤다고 한다.
송대 초에, 이들 무리가 치성했는데, 정자와 주자가 廓淸한 후에 기 세가 점점 수그러들어 지금 이른바 禪學은 거의 맥이 끊겼다.
大槪以無意爲得道。 不論善惡。 若以意思而得。 則皆以爲妄見。 必也 任情直行。 不用意思。 然後乃以爲眞見。 其未及乎此者。 則必以一二 句無意味話頭。 (若狗子無佛性。 庭前柏樹子之類。) 作無限妙理看。 遂 生大疑。 專心窮究。 積功不已。 靜定之極。 略見心性影子於髣髴想象 之際。 則遂擬之以豁然大悟。 猖狂自恣。 謂之了事。 宋初。 其徒猶熾。 自程朱廓淸之後。 其勢始衰。 于今所謂禪學者。 殆至於絶矣。 (聖學輯 要, 窮理 下)
율곡이 제시한 대로 불교와 주자학의 갈림길은 바로 ‘지식’에 있다.
세계는 실재한다는 것, 생명을 유지하고, 덕성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나와 세계에 대한 탐구가 필수불가결하다고 생각한다.
역시나, 혼자 살 것이라면 모르되, 공동체의 삶을 살자면, 그는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
전승된 관습과 의례, 그리고 역사적 사실과 정치적 격 변, 그리고 현재 삶의 조건과 그 개선에 대해서, 그는 많은 것을 알고 있어야 하고, 탐구는 계속되어야 한다.
룰을 모르면 적응할 수 없고, 비전 이 없으면 현재를 넘어설 수 없다.
율곡은 그리하여 유교 문명이 축적해온 지식의 집적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한다.
가령 인간의 감성(詩)과 역사(書)에 대해서, 그리고 우주와 사 건, 운명의 변화(易)에 대해서 옛 책들은 전한다.
정치의 득실(春秋)과 의례(禮)와 제도 또한 빠뜨릴 수 없다.
전승은 이어 인간이 감당할 책무의 스케일(大學)에 대해서, 그리고 그 실현의 단서(孟子)와 구체적 행동 지침 (論語)에 대해서, 그리고 이 모든 행위의 초자연적 토대(中庸)에 대해서 말한다.
이 기초 지식의 토대 위에 시대적 변화를 읽고, 時務를 해결하기 위 한 구체적 응용지식을 개발하고 보완해야 한다.
율곡은 말한다.
‘지식’이 없다면 한 발도 내디딜 수 없다. 또 지식이 완전하지 않다면, 우리의 행동 또한 완전할 수 없다. 그러므로 거경과 궁리는 새의 두 날개, 수레의 두 바퀴와 같다. 거경 은 불교가 노리는 의식의 虛明을 가져다주지만, 만일 그렇게 확보된 마 음이 세상살이에 필요한 지식과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 가 있을 것인가.
율곡은 말한다.
자유란 지식을 향한 그 격심한 고투의 극점에서, 이제 더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고(不思而得), 힘써 노력할 필요가 없는(不勉而 中) 지점에서 비로소 획득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때를 향해 그저 나아갈 뿐이다.
불교철학 12권(2023.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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