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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야기

헤겔의 시원론(始原論)과 주희(朱熹)의 태극론(太極論)에 관한 비교연구-존재론적 관점의 차이를 중심으로-/권기환.경희대

1. 들어가는 말

서로 다른 철학을 비교하려는 시도는 특정한 공통의 철학적 주제에 대한논의 및 소통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상호 접목의 필요성 때문에 많은 논의가 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비교철학을 논의하는 수준이 서로 다른 철학이 서로의 사유 방식 혹은 방법만 다를 뿐 종국에는 동일하다는

방식으로 결론을 맺게 된다면, 그것은 철학에 대한 체계적 물음을 통해서 숙고된 것이라기보다 한갓 기존의 배경상식을 통해 형성된 무비판적 사고의 생산물을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하다.1)

1) 이에 대한 비판적 관점은 박연규, 「‘차이’ 찾기로서의 비교철학」, 󰡔철학⋅사상⋅문화󰡕,

제11호, 동국 대학교 동서사상연구소, 2011, 12쪽 참조

이것보다 좀 더 생산적인 비교철학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비교를 통해 철학함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는 것이중요하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어떤 측면에서 비교의 대상을 설정하고

철학적 문제를 비교할 것인가가 관건이다.2)

2) 박연규, 「동서철학인가, 비교철학인가」, 󰡔철학⋅사상⋅문화󰡕, 제4호, 동국 대학교 동

서사상연구소, 2006, 7쪽 참조.

비교철학적 관점에서 필자는 우선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측면에 유의하고자 한다.

첫째, 비교철학3)이 지역의 경계에 함몰되어서 한갓 동양철학과서양철학이라는 이분법적 구도에 머물러 있어서는 여전히 양쪽의 간극을 메울 수 없다는 것이다.

3) 필자는 이 글에서 의도적으로 ‘동서철학’보다 ‘비교철학’이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어떤철학이든지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필자는 지역의 경계를 가르고 그 지역의 고유한 특성으로부터 출발하는 방식보다 문제 중심을 통해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차이에 집중하면서 이 글을 전개하고자 한다.

둘째, 비교철학이 인물과 인물의 단순화된 비교를 통해 피상적으로 논의된다면, 특정 인물에 대한 배경지식이 중요하게 될뿐, 철학적 문제를 다루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 글은 존재론에서 논의될 수 있는 특정한 개념적 정의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존재론이라는 철학적 문제를 놓고, 헤겔의 始原論과 朱熹의 太極論을 통해 존재론적 관점의 차이를 밝히는 데에 있다.

 

그러나 이 글은 양쪽에 존재론적 관점의 차이가 있다고 해서 서로의 우열을 가르고 등급을 나누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서로의 존재론적 관점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 글은 비교철학을 비교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부각시키는 데에 있다. 만일 서로의 존재론적 관점의 차이가 없다면, 우리는 비교할 이유가 또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존재에 대한 철학적 해명이 헤겔이든 朱熹든 공통적인 관심사였다는 것은 다른 철학도 마찬가지로 이미 주지된 사실이다. 헤겔과 朱熹는 선행자들에 대한 철학적 비판을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 각각의 독자적 방법으로 철학체계를 완성했다. 따라서 우리가 그들 각각의 철학을 일면적으로 평가하거나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은 분명히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헤겔 철학과 朱熹 철학을 비교하는 것이 무리일 수도 있다.

여기에는 물론 우리가 그들 각각의 철학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기도 어려운데, 서로 다른 철학을 균형 있게 비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생각도깔려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추상적인 개념 중심의 사고보다 문제중심의 사고가 필요하다.

문제 중심의 사고는 문제 자체를 비교하고 객관화 내지 중립화시킨다.

그렇게 되면 결국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 즉 문제에 대한 답변이 서로 다른 철학에서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만일 헤겔의 始原論과 朱熹의 太極論이 존재론에 대한 그들 각각의 답변이라면,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서로의 존재론적 관점의 유사성이 아니라,

서로의 존재론적 관점의 차이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2. 朱熹의 太極과 理氣關係

 

1) 朱熹의 太極論 이전에 논쟁들

儒學에서 존재론(Ontologie)을 구축한다는 것은 철학체계의 완성하기

위해 중요하다. 孔孟學은 도덕적 가치의 근거를 제시하긴 했지만, 우주 혹은 萬物의 근원에 관해서는

상세히 언급하지 않았다. 古書인 󰡔周易⋅繫辭傳󰡕에 의하면, 萬物의 근원은 太極이라고 지칭되어져 왔다. “易의 根源은太極이다. 太極에서 兩儀가 생겨나고, 兩儀에서 四象이 생겨난다.”4)

4) 노태준 옮김, 󰡔周易󰡕(서울: 홍신 문화사, 1978), 221-222쪽, “是故易有太極 是生兩儀

兩儀生四象”

이를근거로 해서 일찍이 漢代의 유학자들은 元氣로서 太極을 설정하고 太極 자체의 분화에서 萬物이 생성된다는 우주 생성론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렇게되면 전통적 儒家를 위한 도덕적 가치의 근거는 필연적으로 배제될 수밖에 없다. 周敦頤는 이 문제에 관해 어떻게 하면 우주론의 구도에서 존재와 가치의 근원을 동시에 설명할 수 있는 이론체계를 구축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周敦頤의 이러한 생각을 서술한 것이 이른바 「太極圖說」이다. 그런데「太極圖說」에 의하면 周敦頤는 ‘太極’이 무엇인가에 대한 입증을 하는 대신에, 道敎의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이는 용어를 많이 사용함으로써 후대에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이제 「太極圖說」의 원문 전체 중 일부를 한번 독해해 보자.

 

“無極이면서 太極이다. 太極이 움직여 陽을 낳고, 움직임이 極에 달

하면 고요해지고, 고요해지면 陰을 낳는다. 고요함이 極에 달하면 움직

임으로 되돌아간다. 한번 움직이고 한번 고요한 것이 뿌리가 되어 陰으로

나뉘고 陽으로 나뉘어 兩儀가 성립된다. 陽의 변화와 陰의 결합이 수⋅화⋅

목⋅금⋅토를 생성하고 五氣가 고루 퍼져 四季節이 운행된다. 五行은 하

나의 陰陽이고, 陰陽은 하나의 太極이며, 太極은 본래 無極이다. 五行이

생성되면 각각 하나의 性이 있게 된다. 無極의 참된 본체와 二五의 精

髓가 妙合하여 응결되어 乾道는 남자를 이루고 坤道는 여자를 이룬다.

理氣가 서로 감응하여 만물을 化生하고, 만물을 낳고 낳아 변화가 무궁

하다. 오직 사람만이 그 빼어남을 얻어 가장 영특하니, 형체가 이미 생

겨나며, 精神은 知覺을 발견하게 된다. 五行이 感應하여 움직이면 善惡

을 구분하며, 萬事가 드러난다.”5)

 

5) 장윤수 편저, 󰡔정주철학원론󰡕 제4장, 주돈이(서울: 이론과 실천, 1992), 95쪽 참조. 「太極圖說」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필자는 첫 번째 부분을 이미 위에서 설명했다. 두 번째 부분은 인간사회 혹은 개인의 본성에 내재해 있는 윤리적 가치의 존재근거를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은 두 부분을 종합해서 우주와 인간의 통일성을 찬탄하는 말로 끝난다. 위 인용문의 나머지 부분은 다음과 같다. “聖人은 자신을中正과 仁義로 규정하고 靜을 주요소로 삼아 人極을 세운다. 그러므로 成人은 천지와 그 덕이 합치되고, 해와 달과 그 밝음이 합치되고, 四季節과 그 순서가 합치되며, 鬼神과 그 吉凶이 합치된다. 君子는 그것을 닦아서 吉하고 小人은 그것을 거슬러서 凶하다. 그러므로 하늘의 道를 세우는 것을 陰과 陽이라고 말하며, 땅의 道를 세우는 것을 柔와 岡이라고 말하며, 사람의 道를 세우는 것을 仁과 義라고 말한다. 또한 시작을 살펴보아서 끝마침을 돌이켜 본다고 말하니, 그러므로 삶과 죽음의 說을 알게된다. 크다, 易이여 그 지극함이 이러하구나.”

 

위의 인용문은 우주의 탄생과 변화 및 발전뿐만 아니라 萬物의 생성과정

을 서술하고 있다. 周敦頤의 太極論을 실제로 수로 표시해 보자면, 논리적-

이론적 차원에서 萬物의 생성과정은 0/1(無極과 太極)->2(陰陽)->5(五行)->

∞의 순서가 된다. 周敦頤의 「太極圖說」에서의 설명방식은 󰡔周易⋅繫辭傳󰡕

에서의 설명방식인 1(太極)->2(陰陽)->4(四象)->8(八卦)->∞과 분명히 다

르다.6) 오히려 周敦頤의 설명방식은 (1)->2(陰陽 대신에 動靜)->4(動의

陰陽, 靜의 剛柔)->8(각각의 陰陽에 太小를 부여, 각각의 剛柔에 太小를

부여)->(∞)이라는 邵雍의 象數를 통한 논리체계7)와 유사하다.

朱熹와 연관해서 논쟁이 되는 부분은 우선 ‘無極’과 ‘太極’의 관계다. ‘無

極而太極’이라는 「太極圖說」의 첫 구절에서 ‘無極’은 儒家의 전통에서 보자

면 周敦頤 이전에 등장한 바가 없다는 것이 定論이다. 사실 이 개념은 老

子의 󰡔道德經󰡕28장 ‘復歸於無極’8)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인간이 無爲의 德

에 거슬리지 않음으로써, 老子는 끝이 없는 無窮無盡한 세계와 합일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9)

6) 노태준 옮김, 앞의 책, 221-222쪽 참조,

7) 장윤수 편저, 위의 책, 제5장 소옹, 132쪽 참조.

8) 老子, 장기근 외 옮김, 󰡔老子󰡕(서울: 삼성출판사, 1990), 98쪽.

9) 老子, 같은 책, 99-100쪽 참조.

따라서 老子는 끝이 없는 것을 ‘道’의 의미로 간주하면서 ‘無極’을 말한 것이다. 끝이 없기 때문에 ‘無極’ 밖에 ‘無極’이 없으므로 無盡도 없다.

‘無極’과 ‘太極’의 관계는 이른바 ‘周陸論辯’10)을 통해 지금의 논의보다훨씬 더 잘 알려져 있다.

10) 朱熹는 ‘無極’에서 ‘無’를 ‘무궁하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極’을 ‘지극하다’는 뜻으로 해석

한다. 이렇게 되면 朱熹는 太極이 형이상학적 본체에서 극을 지극한 것으로 보는 것이

므로, 太極이 보편적 원리가 된다. 따라서 無極과 太極은 다른 것이 아닌 것이 된다.

朱熹와 논쟁했던 陸象山은 ‘無極’의 ‘無’를 ‘中’이라고 해석하고 太極의 초월성을 거부한

다. 이에 대해서 권기환, 「변증법적 인식의 교차점」, 동국 대학교 동서사상연구소 춘

계학술 자료집, 2010, 44쪽 참조.

물론 이 논쟁이 개념상 중요한 논쟁이기는 하지만, 필자는 周敦頤의 ‘無極’을 어떤 ‘한계’ 혹은 ‘한정’될 수가 없다는 의미가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는 그 자

체로는 老子의 道처럼 언어로 표현하거나 혹은 규정불가능하기 때문에, 周敦頤가 이를 다소 어색하게

‘無極而太極’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無極’보다는 ‘太極’이 상대적으로 이해하기 쉽다.

‘太極’은 만물의 근원임과 동시에 陰陽動靜의 원인이 된다.

原文 그대로 시간적 先後關係에서 고찰해보자면,

‘無極’은 ‘太極’보다 더 始原的 차원에서 설명되어야 한다.

周敦頤의 太極論을 둘러싼 논쟁은 理氣論과 연관되면서 한층 심화된다.

氣一元論的 관점에서 張載는 ‘無極’을 ‘太虛’으로 이해했고 ‘太極’을 ‘太和’로 간주했다.

張載는 「正蒙」제1편 「太和」에서 ‘太虛’를 “모양이 없으며 氣의 본체”11)라고 말한다. 따라서 “太虛에는 氣가 없을 수 없고, 氣는 모여서 萬物이 되지않을 수 없다.12) 萬物은 흩어져 太虛가 되지 않을 수 없다.”13) 그러나 張載와 같은 氣一元論의 논리14)는 우리가 無極의 참된 본체를 포함한 太極과 陰陽五行을 모두 氣로 간주하면서도 이와 동시에 이 無極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도출되는 또 다른 과정을 인정해야만 하지 않을까? 그런 이후에 이두 과정에서 유래된 두 가지의 氣가 응결되어서 마침내 萬物을 생성시키는 것이어야 하지 않는가?

11) 장윤수, 같은 책, 제6장 장재, 173쪽 참조. “太虛無形 氣之本體”

12) 이것은 太和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13) 장윤수, 앞의 책, 174쪽. “太虛不能無氣 氣不能不聚而爲萬物”

14) 이것은 자연철학을 통한 우주론적(우주생성론의) 시각이 반영되어 있다.

이러한 해석은 氣의 분화 및 생성과정을 시⋅공간 의 내적인 과정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한에서만 타당하다. 無極의 氣가 理氣五行의 氣와 결합해서 萬物을 생성해낸다면, 이 氣는 太極을 생성한 이후에도 여전히 어떤 방식으로든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그것은 氣가 아닌 것이다.15)

張載의 氣一元論에 반대해서 程頤16)는 사물이 흩어지면 그 氣도 없어져

버리는데, 本源으로 돌아갈 이치가 없다고 생각한다.17)

15) 주광호, 「周敦頤 太極圖說의 존재 가치론적 함의」, 󰡔한국철학논집󰡕, 제20집, 한국 철

학사연구회, 2007, 16쪽 참조.

16) 이에 대해 牟 宗三은 朱熹가 程頤가 이해하는 방식으로 張載를 이해했기 때문에, 張載

의 전체학문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牟宗三 지음, 정인재, 정병석 옮김, 󰡔중

국철학특강󰡕(서울: 형설출판사, 1993), 426쪽 참조.

17) 정윤수 편저, 앞의 책, 171쪽 참조.

程頤는 이 氣란 萬物의 근원이 될 수 없는 물질적 器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程頤가 陰陽도 氣가 아니라, 器로 부른 이유는 陰陽 자체의 규정보다 陰陽이라는 氣의

현상 속에 내재하는 氣의 법칙을 理(즉, 道)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陰陽을 움직이게 하는 원인이 바로 理이기 때문에, 참다운 실재란 理이지, 氣가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것은 形而上者를 道라고 보고, 形而下者를 氣라고 본 것을 전제할 경우에 타당하다.

따라서 程頤는 理氣二元論을 주장한 것이다.

 

2) 朱熹의 太極論에 관한 理學的 해석

朱熹의 太極論에서 太極의 개념과 구조는 근본적으로 周敦頤의 太極論과

程頤의 理개념을 결합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와 동시에 太極은 邵雍의 象數처럼 규칙성을 갖고 있으며, 張載의 太虛와 같은 萬有의 근원이라는 위치를 갖는다는 점에서 존재론의 구조에서 출발점이자 최고점이라고 평가된다.

朱熹의 太極론은 周敦頤의 󰡔太極圖說󰡕을 理學의 形而上學的 틀로 만든것이다.

먼저 「太極圖解」에 의하면 “이것은 이른바 ‘無極이면서 太極이다.

움직임으로써 陽이 되고 고요함으로써 陰이 되는 근거는 本體다. 그러나

그것은 陰陽이 분리된 것이 아니고, 陰陽에서 그 本體를 가리키며, 陰陽이

뒤섞이지 않음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18) 無極과 太極의 관계란 그 둘이같은 것이다. 朱熹가 이렇게 말한 근거는 두 가지다.

첫째, ‘無極而太極’에서 ‘而’는 본래 순서가 없는 용어19)이기 때문에, 無極과 太極은 시간적 혹은 단계적 先後關係가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 ‘無極而太極’이라고 周敦頤가 말한 것은 太極을 形象이 있는 것이라고 이해될 수 있는 근거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다.20) 그렇다면 朱熹는 太極을 形體가 없는 萬物의 근본, 즉理라고 본 것이 된다. “‘無極이면서 太極이다’는 것은 太極 밖에 별도로 無極이 있다는 것이 아니다.”21) 朱熹는 形象이 없지만 理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 “이른바 太極이란 二氣(陰陽)五行의 理일 뿐 별도로 사물이 있어서太極이 되는 것이 아니다.”22)

그런데 朱熹는 陰陽을 말할 경우에, 시간적-단계적 先後關係가 있는 것23)으로 이해한다.

“움직임과 고요함, 陰과 陽은 모두 形而下者일 뿐이다 그러나 움직임이 또한 太極의 움직임이고 고요함 또한 太極의 고요함이다. 다만 움직임과 고요함이 太極 자체가 아니므로, 周敦頤는 無極이라고 말했다.”24)

18) 朱熹, 곽신한 외 옮김, 󰡔太極解義󰡕 제2장 「太極圖解」(서울: 소명출판, 2009), 16쪽.

필자는 원문을 역자들과 다소 달리 한국어로 번역했음을 밝혀 둔다. “比所謂‘無極而太

極’也 所以動而陽靜而陰之本體也 然比有以離乎陰陽也 卽陰陽而指其本體 不雜乎陰陽而

僞言耳”

19) 朱熹, 앞의 책, 22-23쪽 참조.

20) 朱熹, 같은 책, 24쪽 참조. “無極而太極 正恐人將太極做一箇有形象底看 故又說無極 言

只是比理也.”

21) 朱熹, 같은 책, 23쪽. “‘無極而太極’ 不是太極之外別有無極.”

22) 朱熹, 같은 책, 같은 쪽. “所謂太極者 只二氣五行之理 非別有物爲太極也.”

23) 이것은 朱熹의 太極論을 우주생성론으로 보았을 경우에 어느 정도 타당하다. 그러나 이

우주론적 해석은 一氣의 분화를 통한 생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주광호, 「朱熹 太極論에 나타난 우주론과 본체론의 분화와 소통」, 󰡔대동문화연구󰡕제54집,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소, 2006, 376-385쪽을 참조.

24) 朱熹, 앞의 책, 32쪽. “動靜陰陽 皆只是形而上者 然動亦太極之動 靜亦太極之靜 但動靜

非太極耳 故朱子而無極言之.”

이 경우에 太極의 운동으로 陰과 陽으로 나누어지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形而上者인 理에서 形而下者인 氣로 시간적-단계적 변화가 있게 된다.

太極이 움직임과 고요함으로 각각 陰과 陽으로 나누어질 경우에, 周敦頤는 특별히 ‘生’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形而上者와 形而下者의 관계를 말하지 않는다. 周敦頤와 달리 朱熹는 ‘所以’라는 개념을 통해 太極을 陰과 陽의 되는 근거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道가 太極이므로 한번 陰이 되고 한번 陽이 되는 근거에 의한 것이다. 朱熹는 太極과 陰陽을 形而上者와 形而下者로 갈라놓음과 동시에, 形而下者인 陰陽의 근거를 形而上者인 太極,즉 理로 정립시킨다.

이것이 朱熹에 있어서 太極論의 핵심이다.

朱熹는 周敦頤의 󰡔太極圖說󰡕이 道家的 논의로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것을 차단함과 동시에 太極을 理로 봄으로써 理에 존재론적 지위를 부여하고자 했다.25)

25) 理의 존재론적 지위는 太極을 理의 최고 개념으로 상정시킬 우려가 있다. 즉 太極을

理 이상의 上宰者로 여길 수 있는 소지가 있다. 이와 관련된 야마노이 유우의 주장에

대해서는 김한상, 「주희의 태극개념」, 󰡔철학논구󰡕, 제30집, 서울대학교 철학과, 2002,

96-97쪽 참조.

그런데 사실 이러한 논의는 周敦頤의 太極論을 본체론적 관점에서 해석한 것이다. 본체론적 관점에 의하면 理는 形而上者의 존재로서 어떤 존재자의 존재근거이고 운동 및 변화의 법칙을 뜻한다.

본체론적 영역에서 ‘太極’은 모든 존재자의 본체를 말한다. 이것은 理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따라서 朱熹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太極이 없다면 天地는 생겨나지 못했을 것이다. 太極은 다만

하나의 ‘理’라는 글자뿐이다.”26)

太極은 天地萬物의 本然에 있어서 理인 것이다. “太極은 다만 天地萬物의

理다. 天地가 있다는 측면에서 말하자면 天地 가운데 太極이 있고, 萬物이

있다는 측면에서 말하자면 萬物 가운데 太極이 있다.”27)

 

26) 朱熹, 黎靖德 편, 허락 외 역주, 󰡔朱子語類󰡕1卷(서울: 청계, 1998), 88쪽. 이것 역시

필자는 원문과 번역본을 대조했지만, 일부 번역을 나름대로 고쳤음을 밝혀둔다. “若無

太極, 便不翻了天地! 太極之是一箇理字”

27) 朱熹, 같은 책, 85-86쪽. “…太極之是天地萬物之理 在天地言 則天地中有太極 在萬物言

則萬物中各有太極”

이렇게만 본다면 理는 氣보다 우위에 있게 된다. 한번 陰하고 한번 陽하

는 것은 道를 통해서 動靜의 生成과 消滅이 끊임없이 순환된다. 그런데 朱熹는 太極에 動靜하는 理가 상대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理밖에 따로 무엇이 있어서 陰陽을 生成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理의 작용은 動的인 것을 陽이라고 규정하고, 靜的인 것을 陰이라고 그저 규정할뿐이다.

그런데 氣에 理가 先在한다는 朱熹의 설명을 우리가 시간적 先後關係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朱熹는 ‘理가 氣보다 先在한다‘는 말을, 논리적-이론

적으로 보았을 때, 先後關係를 굳이 말하자면 ‘理가 氣에 先在한다’고 말하

는 것이다. 왜냐하면 朱熹에 의하면 理와 氣의 先後문제가 실제로 論究하

기 어렵지만, 논리적 추론을 통해 올라가면서 理가 氣에 先行하기 때문이

다. “어떤 사람이 먼저 理가 있고 난 후에 氣가 있다는 학설에 대해 물었

다. ‘그렇다고 할 수 없다. 지금 알 수 있는 것은 먼저 理가 있고 나서 후

에 氣가 있게 되었는지, 아니면 氣가 먼저 있고 후에 理가 있게 되었는지

를 모두 추론해서 論究할 수 없다는 것이다…고 대답하겠다.”28) 따라서 理

와 氣의 논리적 先後關係는 추론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理가 앞서 존재하고, 氣는 나중에 존재하는가?’라고 묻자,

‘理와 氣는 본래 先後關係를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계속 추리해 나간다면,

마치 理가 氣에 앞서 있고 氣는 나중에 있는 듯하다’고 답변하겠다.”29)

 

그런데 이 답변에서 한 가지 의문은 실제로 理氣先後가 없는데 어떤 것

이 논리적으로 先後關係를 설명할 수 있는가에 있다. 朱熹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

“요약하자면 먼저 理가 있다. 단지 오늘 理가 있고 내일 氣가 있

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30)

形而上者인 理는 萬物이 生滅하더라도 萬物속에 있는 것이다.

물론 존재하는 것은 理와 氣가 先後關係 없이 공존한다.

理가 없는 氣는 없고, 氣 없는 理도 없다.31)

 

28) 朱熹, 같은 책, 96-97쪽, “或問先有後有氣氣之說 曰 不消與比說而今知得他合下是先有

理後有氣邦 先有理先有氣邦 皆不可得而推究”

29) 朱熹, 같은 책, 95-96쪽. “或問 理在先氣在後 曰 理與氣本無先後之可言 但推上去時 卻

與理在先氣 在後相以”

30) 朱熹, 같은 책, 97-98쪽. “要之也先有理 只不可說是今日有是理”

31) 朱熹, 같은 책, 98-99쪽 참조. “天下末有無理之氣 亦末有無氣之理”

 

특히, 현상 자체는 理와 氣의 구분이 없다.

朱熹는 존재세계를 理氣二元論으로 본다. 그러나 理와 氣가 시간적으로

先後關係가 없고 공간적으로 離合集散이 없기 때문에,

하나의 존재양태라는 관점에서 朱熹는 一元論이라고 할 수 있다.

朱熹는 理一元論과 氣一元論의 일면성을 극복한다는 차원에서 理氣二元論的 理論을 구축했다.

결론적으로 朱熹는 철학의 출발점과 존재의 원리를 太極論을 통해 존재론적으

로 밝힌 것이다.

 

3. 헤겔에 있어서 철학의 출발점과 始原의 존재론적 의미

존재론은 존재의 근본원리와 규정들을 존재자의 보편적 구조와 근거 속에서 밝히는 이론이다.

존재론에 관한 이 정의에 비추어 볼 경우에 존재의 근본법칙을 이루고 있는 원리(Prinzip)는

존재 자체에 대한 반성을 통해 철학의 출발점뿐만 아니라 종결점도 마찬가지로 매개해야만 한다.

따라서 원리 자체에 대한 반성을 내용으로 하는 始原論은 철학의 근본문제와

필연적으로 연관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1) 철학의 출발점에 관한 논의들

철학의 출발점, 즉 하나의 절대적 원칙(ein absoluter Grundsatz)아래에서 출발점으로 삼은 원리를

우리가 始原이라고 설정한다면, 始原論은 철학이 궁극적으로 도달해야만 하는 종결뿐만 아니라 시초도 동시에 뜻한다.

이러한 관점과 연관해서 라인홀트가 철학의 첫 번째 원칙(erster Grundsatz)에 주목한 것은 상당히 흥미롭다.

칸트주의 철학자였던 라인홀트에 따르면,

“첫 번째 원칙은 자신의 증명을 자기 자신에 근거 지워야만 하는 학문으로 가지고 오지 않으면 안 된다. 첫 번째 원칙은 학문의 영역에서 유일하게 증명될 수 없는 명제다. 왜냐하면 단지 이 영역에서 증명

되어야만 하는 것에 관한 한, 첫 번째 원칙은 근저에 놓여 있어야만 하기때문이다.

따라서 첫 번째 원칙이 명제를 통해 증명되어야만 하는 것을 통해서는 순환 없이 증명될 수 없다.”32)

32) K. L. Reinhold, Beiträge zur Berichtung bisheriger Mißverständnisse der

Philosophen (1790), Hg von F. Fabbianelli, Hamburg, 2003, 86쪽.

독일 관념론의 선두주자였던 피히테도 라인홀트와 유사하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절대적인 최초의 원칙, 즉 모든 인간지식[에 타당하면서] 단적으로 무제약적인 원칙을 발견해

야만 한다. 단적으로 무제약적인 원칙이 절대적인 최초의 원칙이어야 한다면 증명되거나 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33)

 

33) J. G. Fichte, Grundlage der gesamten Wissenschaftslehre als Handschrift für seine Zuhörer (1794), Hg von R. Lauth u. H. Jacob unterMitwirkung von M. Zahn, GA. I/2, Stuttgart-Bad Cannstatt 1965, 255쪽.

라인홀트와 피히테는 칸트의 주객관계의 이원적 대립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의 인식을 하나의 절대적 원칙으로 규정하고, 하나의 규정근거(ein Bestimmungsgrund) 아래에서 통합하려고 시도했다.

따라서 철학의 모든 형식과 내용은 이러한 원칙으로부터 도출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헤겔은 라인홀트의 위와 같은 주장을 증명이 결여된 것으로 간주한다.

왜냐하면

“절대적으로 참다운 것이 최초의 것이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고찰해 보면

필연적이지 않으며, 주관의 측면에서 보면 인식되지 않은 것이라는 통찰

은”34) 철학이 가설적이고 개연적으로 참된 것에서만 출발할 수 있음을 의

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작 그 자체는 설명을 이끌어 내는 우연적 방

식이라는 의미에서…주관적인 것으로”35)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34) G. W. F. Hegel, Wissenschaft der Logik (1832, I/1, 이하 WdL로 표기),

Hg. von F. Hogemann u. W. Jseschke, GW. 21, Hamburg, 56쪽.

35) G. W. F. Hegel, WdL (I/1), 같은 쪽.

피히테의 주장도 한갓 주관에 의한 반성철학(Reflexionsphilosophie)에 불과하다.

헤겔에 의하면 “자아에 의한 始原은 일부가 모든 후속되는

것이 최초의 참다운 것에서 연역되어야만 한다는 반성에서 나왔던 것이고,

일부가 최초의 참된 것이 이미 알려진 참다운 것이고 훨씬 더 직접적으로

확실한 참다운 것이어야 한다는 요구에서 나왔던 것이다.”36) 그러나 이미

알려진 어떤 것은 자아에 속하겠지만, 표상과 구별된 우연적인 내용일 수

밖에 없다. 이와 반대로 자아는 단순한 자기 확실성에 지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자아가 철학의 始原과 근거라는 것에는 구체적인 것의 분화-절대

적 작용이 요구된다. 그 때문에 자아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순화되어서 추

상적 자아로서 자신의 의식으로 나타난다.”37)

헤겔 철학이 이들의 철학과 다른 것이므로, 헤겔은 경험을 통해서든 반성을 통해서든 철학의 始原이 정립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헤겔에 있어서 철학의 始原에 관한 문제의식은 객관적 端初와 주관적 端初가 맞서는 가운데 양쪽이

갈등을 빚고 있다는 데에 있다.

철학의 원리가 “객관적 始原, 즉 사물 전체의 始原을 표현”38)하기 때문에, 객관적 端初는 한편으

로 하나의 독단적 철학함(ein dogmatisches Philosophieren)으로 明示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주관적 端初가 독단적 철학함의 태도에 반대한 주관의 평가기준에 근거하기 때문에, 시작 자체는 우연적 방식을 통해 주관적으로 남아 있다.

철학의 始原이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으로 구분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철학이 체계의 통일적 완결을 목표로 하는 헤겔의 관점에서는 철학적 사유의 규정된 내용을 종결로 갖는 원리와 철학적 사유의

출발점인 시초가 전혀 다른 것일 수 없다.

36) G. W. F. Hegel, WdL (I/1), 62쪽.

37) G. W. F. Hegel, WdL (I/1), 63쪽.

38) G. W. F. Hegel, WdL (I/1), 53쪽.

“왜냐하면 始原은 학문 전체를 새롭게 드러내 드러내고, 자기 자신을 결과로서 전제하기 때문이다.”39)

 

39) K. Schrader-Klebert, Das Problem des Anfangs in Hegels Philosophie,Wien/München,

1969, 76쪽.

2) 철학의 始原에 관한 난점과 순수 존재의 이중적 구조

헤겔은 철학의 始原에 관한 문제를 「무엇이 학문의 始原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가」라는

소논문의 첫 머리에 다음과 같은 명제로 말하고 있다.

 

“철학의 始原은 매개적이거나 직접적인 것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철학의 始原은 매개적인 것일 수도 없고 직접적인 것일 수도 없다는점이 쉽게 제시될 수 있다. 따라서 始原의 매개적 방식 혹은 직접적 방

식은 [각각의 태도에 따라] 반박을 받게 된다.”40)

 

철학의 始原을 발견하는 데에서 발생하는 어려움은 “철학의 대상이 始原

에 있어서는 무엇인가를 우리가 말할 수 없다”41)는 데에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철학의 始原에 관해 아무 것도 고찰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순수 사유의 체계(das System des reinen Denkens)를 통해 규정된 논리학의 영역에서 “始原이 어떻게 현상하는가.”42)를 말할 수 있다.

철학의 始原은 “…결과의 측면에서 볼 때 매개된 방식이거나, 본래적 始原의 측면에서 볼 때 직접적 방식”43)이거나라고 할 수 있다.

40) G. W. F. Hegel, WdL (I/1). 53쪽.

41) G. W. F. Hegel, WdL (I/1), 15쪽.

42) G. W. F. Hegel, WdL (I/1), 54쪽.

43) G. W. F. Hegel, WdL (I/1), 같은 쪽.

그러나 헤겔의 관점은 이 두 방식 중에서 어느 쪽도 취할 수 없다는 것이다.44)

44) 헤겔은 여기에서 칸트에 있어서 순수이성의 이율배반처럼, 유일하게 양자부정의 논리

를 사용하고 있다. 물론 종착점은 다르다. 칸트는 더 이상의 논의를 전개하지 못한 반면에, 헤겔은 변증법을 통한 양쪽을 종합한다.

왜냐하면 始原이 직접적인 것이라면, 직접적인 방식은 증명되지 않는 직접적 지식과 같은 신앙에 귀착할 것이고, 이와 반대로 始原이 매개된 것이라면, 매개적 방식은 타자에 의존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

이다. 따라서 철학의 始原을 발견한다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좀 더 구체적으로 논리적 차원을 살펴보자.

始原이 직접적인 것이라면, 그와 같은 논의는 순수 사유를 철학의 始原으로 서술하거나 혹은 始原에 대한 사유로부터 시작하는 경우에, 始原이 아무 것도 전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순수 존재(reines Sein)의 無規定性(Unbestimmtheit)을 통해 밝히는 것이다. 따라서 헤겔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결코 어떠한 전제 없이 우리가 始原 자체를 직접적으로 취하면 그것이 논리학의 始原이고,

사유 자체의 始原이어야만 한다는 것에서만 始原은 규정된다.”45)

헤겔이 논리학의 개념을 思想 자체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라고 규정하는 한,

“논리학은 결코 반성의 이 형식 또는 사유의 규칙과 대상을 전제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논리학의 내용 자체의 일부분을 이루고 나서야 비로소 논리학의 내부에서 定礎 짓게 되기 때문이다.”46)

 

45) G. W. F. Hegel, WdL (I/1), 56쪽.

46) G. W. F. Hegel, WdL (I/1), 27쪽.

논리학의 대상이 되는 개념적 사유는 오직 논리학의 전개과정에서만 산출되는 것이고, 결코 미리 제시된 것이 아니다.

논리학이 순수 학문으로서 無전제적인 것이어야만 한다면, 논리학의 출발점은 어쨌든 그 무엇에

의해서도 매개되지 않은 추상적 직접성이어야 한다.

헤겔은 이와 같은 존재를 순수 존재라고 불렀다.

따라서 논리학의 출발점이 곧 始原으로서 순수 존재인 셈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왜 논리학이 이와 같은 순수 존재로부터 출발해야만 하는가?

논리학이 규정된 존재로부터 출발하면 왜 안 되는가?

규정된 존재, 즉 現存在(Dasein)는 의식속에서 경험하는 서로 상대적 위치에서 유한한 관계를 지닌 채

존재하는것이고, 그것은 단순한 사물에 지니지 않기 때문에, 思想이 결여된 의식의 범주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순수 사유이면서 동시에 思想 그 자체로서의 사유인 논리학이 이러한 의식의 범주로 다루어지는 것은 부당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순수 존재로부터 논리학이 출발한다는 것은 가장 추상적인 것으로부터 구체적인 것으로 상승하는 변증법의 방법(die dialektische Methode)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始原의 직접성에 관한 논의로부터 획득된 결론은 始原이 논리학의 출발점으로서 순수 존재가 존재한다는 것일뿐, 그것을 증명하는 데에는 결함이 있다.

순수 존재가 있다는 사실은 도대체 왜 순수 존재가 있어야 하는가를 입증하지 않는다. 그

렇다면 이와 반대로 始原의 매개성으로 넘어가 보자.

 

始原의 매개성에 관한 논의는 의식의 경험에 관한 학문으로서 󰡔정신현상학󰡕과 순수 사유이면서 思想

자체의 사유로서 󰡔논리학󰡕의 관계에 대한 서술을 통해 순수 존재가 매개된 것으로서

타자에 의존한다는 것에 있다.

순수 존재는 󰡔정신현상학󰡕의 최종 단계인 절대 지식(absolutes Wissen)

즉, 순수 지식의 반성으로부터 획득된 것이다.

순수 지식이 󰡔정신현상학󰡕의 결과이면서 종결이지만 󰡔논리학󰡕에서는 출발점이다.

따라서 헤겔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始原이 자유롭게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사유의 지반에서 형성되어야 할 때에, 始原은 논리적이다. 이와 함께 始原은 순수 지식이 의식의 궁극적이며 절대적 진리라는 것에 의해 매개되어 있다.”47)

 

47) G. W. F. Hegel, WdL (I/1), 54쪽.

헤겔은 모든 존재에 있어서 궁극적인 최고의 진리를 절대 정신(absoluter Geist)이라고 불렀다.

절대 정신은 자기전개의 종결로부터 자기 자신이 外化하고, 자기 자신을 직접적인 존재의 형태로서

顯現한다. 그와 같은 절대 정신은 자신의 결과에 선행하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정신을 뜻한다.

이와 반대로 始原의 측면에서 보자면, 절대 정신은 원리와 같이 결과에 의존해 있으면서 스스로를

완결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始原이 이미 의식의 구체적 형태를 이루고 있는 것이므로 순수 지식은 의식의 현상으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정신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매개된 지식이 “…참다운 것을 인식하려 할 때, 지식은 직접적인 것과 그것들의 규정에 머무르지 않고, 이 존재의 배후에 존재 그 자체와는 다른 어떤 것이 있으며, 이 배후가 존재의 진리를 이룬다고 하는 전제를 갖고,이 직접적 존재를 뚫고 지나가는 것이다.”48)

 

48) G. W. F. Hegel, WdL I (1812/13), GW. 11, 1978, 241쪽.

매개성의 출발점이 전제된 어떤 타자의 존재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우리는 전제를 무엇인가에 의해

매개되고 규정된 것으로 보아야만 한다. 그렇다면 그 전제에 포함되지 않은 어떤 타자가 전제 밖에

남겨져 있어야 하지 않을까? 전제에는 매개하는 타자가 있을 것이고, 규정된 전제에는 규정에서 배제된 타자가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타자는 전제로부터 연역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타자의 매개를 위해서 제3자에 대한 반성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어떤 각각의 것의 시초는 그 자체가 최초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자에 始原을 갖고 있을 뿐이다.”49)

始原의 매개성이 이와 같은 방식이라면, 始原이 과연 학문 전체를 포괄하는 절대 始原(absoluter Anfang)일 수 있는가?

철학의 始原이 뜻하는 바는 시초로부터 종결까지도 매개하기 때문에 존재 전체가 연역될 수

있는 근거라는 것이다.

그러나 始原의 매개성에 의하면 始原에 포함되지 않는 타자가 始原 밖에 분명히 존재한다.

따라서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는 始原이 절대자(das Absolute)의 학문에 의한 始原이 될 수 없다.

결론적으로 始原의 매개성은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始原을 증명할 수 있다.

“논리적 전진행위가 후진적 행위이고 근거짓기(Begründung)라는 것”50)을통해 규정된 始原의

매개성은 얼마든지 증명이 가능하다. 그렇지만 始原은 존재하지 않는다.

헤겔은 始原을 다룸에 있어서 추상적 사유를 통해 도출된 내용이 지닌 원리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始原을 인식하는 태도에 주목한다.

“…주관적 행위도 또한 객관적 진리의 본질적 계기로 파악되고, 그 방법이 내용과 결합되고, 형식이 원리와 결합되어야 할 필요성이 야기된다. 그러므로 원리는 물론 始原이어야 하고, 사유에 대해서 최초의 것(Prius)은 사유의 과정에서도 최초의 것이어야 한다.”51)

헤겔은 다음과 같은 말로 始原의 매개적 직접성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킨다. “하늘, 자연, 정신 혹은 그 어디에도 매개와 마찬가지로 직접성을 포함하지 않는 것은 없으므로, 이

양쪽 규정들은 분리되지 않고 분리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나고, 앞서의 대

립은 공허한 것으로 드러난다.”52)

 

49) G. W. F. Hegel, WdL I, 357쪽.

50) G. W. F. Hegel, WdL (I/1), 57쪽.

51) G. W. F. Hegel, WdL (I/1), 54쪽.

52) G. W. F. Hegel, WdL (I/1), 같은 쪽.

 

헤겔의 始原은 학문 전체를 매개하는 절대적 근거로서 원리를 지니는 출발점이기 때문에 처음에서 가장 추상적 존재이지만 시초와 종결이 합쳐지는 절대 이념에 이르러서는 구체적 존재로 나타난다.

“절대 이념은 자신의 직접성이라는 형식을 같은 정도로 지양하고 자신 속에 최고의 대립을 지양한

다. …절대 이념은 오로지 존재다.”53)

따라서 절대 이념이 논리학의 마지막 지점에 가서 전면적으로 개시되는바 시초와 결과는 동일한 전제를 갖는다. 始原은 절대 이념의 근원적 형태다.

순수 존재로서의 始原을 이와 같이 논리학의 궁극적 결과로부터 설명하는 방식54)은 순수 존재가 “端初를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종결을 이루고 있는 것이고, 또한 가장 공허하면서도 가장 無규정적인

시초일 뿐만 아니라 절대자의 변증법적 전진규정에서 가장 충만한 결과를 이루고 있는 것”55)이다.

始原의 측면에서 볼 때, 端初란 개념의 운동이 복귀하는 그 지점을 결과로써 우리가 간주할 경우에

성립한다. 그 때문에 “최초의 것은 마찬가지로 근거이고, 최후의 것은 연역된 것이다.

최초의 것에서 출발해서 정당한 추론들을 거쳐 근거라는 최후의 것에 도달하기 때문에

근거는 결과다.”56)

이러한 의미에서 端初로서의 始原은 직접성을 갖지만 과정 전체를 매개한다. 왜냐하면 순수 지식의 차원에서는 始原의 출발점으로서 순수 존재가 무매개적 직접성이지만 학문을 始原을 통해 진행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순수한 직접적인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57)

 

53) G. W. F. Hegel, WdL II (1816). GW. 12, 1981, 236쪽

54) P. Kemmper, Dialektik und Darstellung, Frankfurt a/M, 1980, 199쪽 참조.

55) S. J .E. Coreth, Das dialektische Sein in Hegels Logik, Wien, 1952, 72쪽,

56) G. W. F. Hegel, WdL (I/1), 58쪽.

57) A. Schubert, Der Strukturgedanke in Hegels ‘Wissenschaft der Logik,’

Meisenheim a/G, 1985, 17-18쪽 참조.

따라서 端初로부터 출발하는 것은 곧 종결에서 출발한다는 것과 동일하다.

이와 동시에 종결도 端初에 있음을 의미한다. 端初와 종결이 동일성에 관한 테제는 형식적 추론관계에

있지 않으며 내용적인 先後關係에 있다. 그 때문에 端初는 결과를 내용적으로 포괄하는 방식이 아니라,

端初의 자체적인 운동에 따라 내용이 산출되는 방식으로 된다. 그럼에도 헤겔에도 端初와 종결이 동일한 이유는 端初가 지향하는 방향이 바로 결과이기 때문이다.58)

58) 유헌식, 「헤겔 ‘정신현상학’의 始源문제에 대한 방법적 반성」, 󰡔헤겔연구󰡕, 제30호, 한

국헤겔학회, 2011, 104쪽 참조.

그러나 端初 자체가 이러한 종결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始原은 매개적 직접성(vermittelnde Unmittelbarkeit)이다.

이제 端初 자체를 생각해 보자.

始原의 측면에서 端初 자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학문의 진행과정이 ‘후진적 근거짓기’

(die zurückgehende Begründung)의 방식을 통해 始原자체와 始原을 이루고 있는 것을 구분59)해 보는 것이 捷徑이다.

59) H. Fink-Eitel, Dialektik und Sozialethik, Meisenheim a/G, 1978, 33쪽 참조.

그는 始原 자체와 始原을 이루고 있는 것이 정작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지 않다. 필자는

이 구분을 통해 적어도 순수 존재의 이중적 구조를 생각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존재의 原始的 분할을 통해 고찰해 보자면

“존재는 우선 타자일반에 대립되는 것으로 규정된다. …존재는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 규정된다.”60)

그 다음에 이러한 규정을 받는 상태에서 벗어나서 존재 자체로 복귀함으로써,

존재는 이른바 始原이 되는 無規定性과 직접성을 띠는 것이다. 이렇게 볼 경우에

始原을 이루고 있는 것을 존재 혹은 無로 놓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始原을 이루고 있는 것이 존재라면, 존재는 “순수한 無規定性과 공허함이고…존재 속에서 사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또한 존재는 단지 이러한 공허한 사유일 뿐이다.”61)

이러한 존재는 결국 자기 자신과 동일한 존재일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존재가 그 자체와 구별된 내용, 즉 다른 존재와 구별된 존재를 정립하기 위해서는 존재의 순수성을 유지할 수없다.

그와 같은 존재가 고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닌 한, 존재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은 어떤 것이든 자신의 타자존재 일반 즉 無와 관계될 수밖에 없다.

 

60) G. W. F. Hegel, WdL (I/1), 66쪽.

61) G. W. F. Hegel, WdL (I/1), 69쪽.

둘째, 始原을 이루고 있는 것이 無라면, 無는 원래 無規定的 존재이므로

‘無로부터 아무 것도 발생될 수 없다’(ex nihilo nihil fit).

그러나 이러한 無도 존재에 연관된 無라면, 한갓 “규정된 無”62)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無도 존재와 동일하다. 존재와 無, 어느 한 쪽도 始原을 이루고 있는 것 그 자체로서는 端初63)

자체를 대표할 수 없다.

62) G. W, F. Hegel, WdL (I/1), 같은 쪽.

63) 여기에서 端初와 始原은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필자는 통일된 용어를 쓰지 않고 각각

경우에 따라 조금씩 용어를 변형해서 사용했을 밝혀둔다.

존재와 無는 양쪽 대립의 계기를 지양하고 양쪽의 계기를 지양하는 변증법을 통해 통일함으로써

생성의 진리를 획득한다.

“진리라는 것은 존재도 無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존재가 無로, 無가

존재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행되어 버린 것”64)에서 성립한다.

존재에서 無로의 이행 혹은 그 반대도 마찬가지로 어떤 基體를 설정해 놓고 각각

의 이행을 시간 속에서 나타나는 한갓된 현상이 아니다. 오히려 이 이행은 시간의 추상화를 통해

순수하게 사유된 것에서만 타당하다. 따라서 존재와 無는 한갓 양쪽의 외면적 통일이 아니라 존재로부터 無에로의 이행인 소멸과 無로부터 존재에로의 이행인 발생의 두 계기가 필연적으로 통일되는 생성에서 성립한다.

“(순수) 존재가 단지 직접적인 것으로만 정립하고, (순수) 無가 존재에서 단지 직접적으로 산출되기 때문에,”65) 우리는 존재에서 無를 직접적으로 도출하는 방식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64) G. W. F. Hegel, WdL (I/1), 70쪽.

65) G. W. F. Hegel, WdL (I/1), 86쪽.

그러나 그 반대도 가능하다.

이제 존재, 無, 그리고 생성의 관계를 통해 始原 자체와의 관계성을 생각해 보자.

존재와 無가 동일하다는 테제는 존재와 無의 관계에서 무차별적인 제3자의 중간자가 있어야 한다.

헤겔은 이른바 非존재(Nichtsein)를 제3자의 존재로서 설정한다.

존재와 無가 단지 규정된 질적 被規定態일 뿐이므로, 非존재는 이 양쪽과 다른 제3의 존재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존재와 無의 통일이 진리라면, 생성은 구체적 진리이므로 가장 추상적인 존재가 존재와 無로 구분되기 이전에 다른 제3의 존재 속에 이미 잠재적으로 함축되어 있어야 한다.

존재와 無가 각각 단독으로는 始原 자체로 대표될 수 없다. 헤겔은 始原자체를 “다른 어떤 것을 제시하기 때문에”66) 이 양쪽의 배후에 아직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제3의 존재가 논리적으로 존재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헤겔은 비존재를 “존재인 非존재, 동시에 非존재인 존재”67)라고 말한다.

非존재는 “무차별적 통일”68)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非존재로서 始原 자체는 “순수 無가 아니라 어떤 것이 출발해야만 하는 하나의 無(ein Nichts)다.”69)

만일 始原이 순수 無라면, 순수 無는 처음부터 출발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無로부터는 그 無가 어떤 것이든 아무 것도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하나의 無로부터 출발하는 것은 시작하는 것

이 존재로 향해 가는 것이지 無로 향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非존재의 측면에서 보자면 시작하는 것의 존재는 과정 속에서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

하지도 않을 수 있는 중간자일 수밖에 없다.

“시작하는 것은 이미 존재한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그것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70)

존재로부터 시작하든 無로부터 시작하든 시작하는 것은 아직 未發展된 한갓 추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이상의 어떠한 의미도 지니지 않는 이 단순한 것, 이공허한 것(Leere)”71)일 뿐이다.

66) G. W. F. Hegel, WdL (I/1), 60쪽.

67) G. W. F. Hegel, WdL (I/1), 같은 쪽.

68) G. W. F. Hegel, WdL (I/1), 같은 쪽.

69) G. W. F. Hegel, WdL (I/1), 같은 쪽.

70) G. W. F. Hegel, WdL (I/1), 같은 쪽.

71) G. W. F. Hegel, WdL (I/1), 65쪽.

아무런 내용이 없는 그 자체의 있음으로서 非존재는 존재와 無의 분열 이전에 양쪽을 통합하는 全一性(All-Einheit)을 띠는 존재다.

그러나 非존재가 무엇으로도 어떤 것으로도 전제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

기 때문에, 오직 존재가 본래 자기 자신으로 복귀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후진적 근거짓기’를 통해 此後的으로 구성될 경우에만 나타나는 근거형식만을 지니고 있는 존재인 것이다. 始原 자체로서 非존재는 존재이면서도 無이고, 無이면서도 존재인 동시에 양쪽의 어떤 규정도 전적으로 배제하는 제3의 존재, 말하자면 존재 자체의 형식만을 갖는 존재 일반이다.

그것은 우리의 사유가 極端에 도달하고 나서야 멈추는 하나의 궁극적 종결점이자

가장 근원적이면서 일체를 포괄하는 출발점, 즉 원리 자체로 귀결한다.

“완전히 추상적이고 완전히 보편적이고 일체의 내용이 없는 완전한 형식”72)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닌, 존재 일반, 즉 始原 자체다. 그것은 존재이면서 無이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양쪽

모두가 아닌 것으로 양쪽의 배후에서 양쪽을 근거지우는 최초의 존재인 것이다.73)

72) G. W. F. Hegel, WdL (I/1), 59쪽 참조.

73) 권기환, 󰡔헤겔에 있어서 始原에 관한 사변적 인식󰡕, 동국 대학교 석사 학위논문,

1997. 45-46쪽 참조.

 

4. 헤겔과 朱熹의 존재론적 관점의 차이

헤겔은 이전에 존재론을 논리학에 속하게 함과 동시에 일반 논리학과 선험적 논리학(transzendentale Logik)의 칸트적 구별을 결합시킨다.

선험적 논리학은 범주론, 반성개념론, 이성개념론과 같은 객관적 사유형식들을 포함한다.74)

헤겔적 사유에서 자신의 객관적 논리학은 그 이전에 형이상학의 위치에서 출발한다.75)

헤겔의 관점에서 이전의 형이상학은 단지 思想 속에서만 이끌어질 수 있는 “세계에 관한 학문적

건축물”76)을 통해설명된다.

74) G. W. F. Hegel, Nürnberger und Heidelberger Schriften 1808-1817, TW.4, Frankfurt a/M,57 1986, 40 6쪽 참조.

75) G. W. F. Hegel, WdL (I/1), 48쪽 참조.

76) G. W. F. Hegel, WdL (I/1), 같은 쪽.

헤겔에 있어서 형이상학은 존재일반의 본성을 탐구해야만 하는 존재론으로 분류되어 있고

그 위치에서 객관적 논리학과 만난다.

객관적 논리학은 존재하는 개념을 고찰하는 존재론뿐만 개념을 반성하는 규정들의

체계로 서술하는 본질론도 포함한다. 그리고 객관적 논리학이 그 밖에 형이상학의 내용들, 영혼, 세계, 그리고 신을 포함시킴으로써77) 존재론과 형이상학의 구분을 없애 버린다.

만일 헤겔이 이전의 형이상학을 존재론이라는 표제 아래에 定礎한다면, 헤겔의 존재론은 “직접적으로 이 대상적 사물의 직접적 본질”78)에 관한 이론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존재론에서 다루고 있는 가장 추상적인 존재인 순수 존재는 본질론의 측면에서 보면 한갓 가상에 지나지 않는다.

“…가상의 존재는…존재의 無實性(Nichtig keit)에 있다…가상은 존재의 無實함 밖에는, 본질 밖

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가상은 존재의 영역에 아직 남은 전체 殘餘”79)에불과하다.

77) G. W. F. Hegel, WdL (I/1), 49쪽 참조.

78) G. W. F. Hegel, Vorlesungen über die Geschichte der Philosophie II,TW. 19, 83쪽 참조.

79) G. W. F. Hegel, WdL II, 246쪽.

존재와 본질은 서로 대립하는 것이고, 양쪽의 통일은 개념을 통해 나타난다. 따라서 개념이 순수 존재의 종결이지만, 그 종결은 순수 존재로부터 출발한다. 개념이 존재의 가장 구체적 존재인 반면에,

순수 존재는 가장 추상적 존재라는 것도 분명히 드러난다. 순수 존재는 순수 無이기 때문에,

始原을 이루고 있는 것일 뿐, 始原 자체는 아니다. 始原 자체는 非존재다.

朱熹는 ‘존재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우리는 朱熹의 존재론을

본체론이라고 생각하면 별 무리가 없다.

본체론이 현상의 근본바탕에 놓여 있는 참다운 존재를 추구하는 것이므로, 본체론 중

太極은 현상계에 있어서 모든 사물의 존재근거이고 그 운동과 변화의 법칙이다.

따라서 현상계의 모든 사물은 모두 陰陽이라는 對待關係라는 속성들의 상호전이와 상호교섭을 통한

운동과정에 있다.

太極은 바로 이 陰陽의 상호전이에 의한 내재적 법칙인 理다. 理로서 太極이 스스로 운동하지 않지만,

현상계의 운동및 변화는 내재적 법칙에서 발생한다. 이것은 ‘太極에는 動靜이 있음’을 뜻한다.

물론 시공간적 초월적 범주로서 理가 太極과 마찬가지로 움직이지 않지만, 현상계의 모든 사물은

영원한 운동과 변화를 위해 법칙인 理가 있어야만 한다. 후자에 경우에도 陰陽, 즉 氣도 함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모든 사물은 구성될 수 없다. 현상계의 사물은 理와 氣가 不離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太極으로서 理의 始源性은 상실되는 것이 아닐까?

朱熹의 존재론이 불가피하게 균열이 될 수밖에 없지 않는가?80)

80) 추기연, 「朱熹 太極개념의 현상학적 해석을 통해 우리 시대 유가존재론에 이르기 위한

하나의 이정표」, 󰡔유교사상연구󰡕, 제2집, 한국유교학회, 2005, 224-225쪽 참조.

朱熹는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인간의 본성에 기초한 가치론으로 몰고 간다.

 

1) 全一的 존재양식으로서 始原과 太極의 관계

全一性에 대한 서양철학의 사유방식은 만물이 하나의 존재이고 하나의 존재가 전체존재라는 것에 있다. 이것은 하나의 존재와 전체 존재의 근원적 통일을 뜻한다.

하나의 존재가 전체 존재의 근거이기 때문에, 전체 존재에서 발생하는 대립 혹은 모순은 하나의 존재에서 극복되거나 조화를 이룬다.

하나의 존재는 전체 존재를 근거지우는 원리다. 따라서 全一的 무제약자를 사유의 원리, 즉 一者로

귀결시키고, 전체존재를 모두 이와 연관되는 것으로 파악하는 서양 철학적 사유방식은 생소한 것이 아니다.81)

81) Koichi Tsujimura, “Zur Differenz der All-Einheit,” Hg von D. Henrich, in:

All-Einheit, Bd. 14, Stutt gart, 1985, 23쪽 참조.

그러나 동양 철학적 사유방식은 全一性을 개별적 존재자와 전체 존재자와의 관계를 통해 설명한다.

이른바 對待關係는 상반된 타자를 적대적 관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근거지울 뿐만 아니라, 상반적 관계도 상호배척이 아니라 상호성취로 본다.

따라서 對待關係는 정적, 공간적 관계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 변화와 역동적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82)

82) 양무석, 「사변의 논리와 對待의 논리」, 󰡔동서철학연구󰡕, 제10호, 한국동서철학회, 1993,

160-162쪽 참조.

全一性에 대한 동양철학적 사유방식으로 볼 경우에, 全一性에 대한 서양 철학의사유방식은 一者가 근원적 一者로서 전체 존재를 지배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헤겔의 始原論도 “실체존재론적 일원론”83)으로 나가기 위한 이론이 아닐까?

83) R-P. Horstmann, “Ontologische Monismus und Selbstbewusstsein,” 앞의 책, 245쪽

모든 존재의 절대 근거가 무엇인지를 밝히려는 헤겔의 시도는 “방법이 내용과 통일되고, 형식이 원리와 통일되는”84) 것을 추구하는 데에 있다.

84) G. W. F. Hegel, WdL (I/1), 54쪽.

 

全一性에 관한 이론이 사유의 매개를 통해 존재 일반의 구조를 드러내는 것인 한, 헤겔도 전체 존재와

매개하는 개별자들의 차이를 궁극적으로 보지 않고 이들의 상호관계를 고려함으로써 전체 존재의 통일성을 도출한다.

따라서 이것은 一元論的 존재 구조에 상응한다.85)

85) 최신한, 「全一性 이론의 자기의식적 구조」, 󰡔헤겔 연구󰡕, 제6호, 한국헤겔학회, 1995,

11-12쪽 참조.

이를 위해 헤겔은 始原으로서 이른바 순수 존재를 설정한다. 순수 존재는 순수 無와 동일할 뿐만

아니라, 端初 자체까지 포함하는 존재이므로 총체성을 지니는 제3의 존재,즉 非존재이기도 하다.

헤겔은 이와 같은 非존재에 대해 “그 이상의 어떠한 의미도 지니지 않는 이 단순한 것, 즉 이러한 공허한 것”86)이므로 분석도 설명도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한다.

非존재는 순수 사유의 논리가 종결되는 지점, 즉 “사유의 零點”87)에 존재한다.

86) G. W. F. Hegel, WdL (I/1), 65쪽.

87) K. Schrader-Klebert, 앞의 책, 9쪽.

그런데 이러한 非존재는 처음부터 설정된 것이 아니라 후진적 근거짓기의 방식을 통해 나타난

無전제적 존재, 無규정적 존재, 無시간적-無공간적 존재이다.

그렇다면 非존재는 순수 존재의 다른 양태를 가진 존재다.

헤겔은 존재를 세 가지로 구분하면서, 세 번째 규정을 통해 모든 잠정적 규정성을 벗어난 존재를 始原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존재는 非존재라고 지칭된다. 따라서 非존재가 始原을 이루고 있는 것과 구분되는 始原 자체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端初 자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헤겔의 관점은 존재가 자기 자신으로 복귀할 경우에 진리가 되는 것에 근거한다. 그러나 지금의 존재는 보편성의 형식을 갖는 추상적 존재이고 굳이 말하자면 非존재라고 부를 수 있겠다.

이와 반대로 朱熹는 太極을 처음부터 理라고 설정한다. 太極은 “명칭을 초월한 究極의 존재이고 형체를 초월하고 장소를 초월한 無와 같은 존재다.”88)

그리고 太極은 위치도 없으므로 陰陽五行의 理가 모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太極은 理처럼 형체가 없는 無와 같지만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太極이 理라는 朱熹의 주장과 연관해서, 理의 측면에서 理를 사물과 분리해서 보자면, 형체가 없는 理는 無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사물의 측면에서 理와 사물을 合해서 보자면 理는 氣의 근거로서 氣에 내재하기 때문에 無라고 할 수 없다.89)

88) 오하마 아키라 지음, 이형성 옮김, 󰡔범주로 보는 주자학󰡕(서울 :예문서원, 1999), 73쪽.

89) 같은 책, 46쪽 참조.

朱熹의 太極론도 물론 全一的 사유방식에 근거한다. 朱熹의 太極論은 헤겔과 같은 추론적 이성에 근거한 존재론과 대결할 만한 사변적 존재론90)에 기초한 一元論이 아니라, 본체론에 근거한다.

90) D. Henrich, “Dunkelheit und Vergewisserung,” 앞의 책, 38쪽 참조.

본체론은 理氣二元論的 理論에 타당하다. 이것은 理와 氣의 관계를 對待關係로 만든다.

朱熹의 太極論은 헤겔의 始原論처럼 후진적 근거짓기의 결과에 의존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굳이 太極을 철학의 출발점으로 설정한다면, 철학의 출발점은 헤겔처럼 순수 존재가 아니라 無일 것이다. 헤겔이 논리학을 시작하면서 無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순수 존재로부터 출발하는 이유는

순수존재를 획득하는 방식이 직접적 방식이든 매개적 방식이든 두 다 가능하기 때문이다.

헤겔은 無로부터 아무 것도 발생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한다. 無가 순수 존재와 마찬가지로 無 그 자체로 고립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아무 것도 발생할 수 없다고 헤겔이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朱熹의 太極論에서는 그렇지 않다. 朱熹의 철학이 太極인 無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은 太極과 動靜의 관계에 근거한다. 形而上者의 理에서 太極이 無이기 때문에 “形迹이 없지만 動靜陰陽의 理는 太極에 완전히 내재한다.”91) 太極이 未發한 상태는 靜이다. 그런데 이 경우에 靜은 動과 상대되는 것이 아니라 動靜을 초월한 靜이다. 만일 朱熹가 太極이 未發한 상태에서 靜을 動과 상대적 의미에서 靜이라고 말했다면, 太極은 形而上者가 아닌 形而下者가 되어버린다. 朱熹는 形而上者와 形而下者를 분명히 구별

하고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太極에 動靜이 있다고 할 때, 太極은 직접적으로 動靜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動과 靜이 太極이 아니라는 뜻이다. 따라서 太極은 動靜과 관계하지만 動靜 자체가 아닌 것이다.92)

 

91) 오하마 아키라, 앞의 책 90쪽

92) 같은 책, 92쪽 참조.

2) 헤겔의 발생론과 朱熹의 순환론

헤겔의 始原論을 통해 端初 자체는 후진적 근거짓기에 의해서 존재와 無의 배후에 있는 제3의

존재이므로 처음부터 설정될 수 없는 無전제적, 無시간적-無공간적, 無規定的 존재이다.

이러한 존재는 非존재이고 존재와 無로 구분되기 이전에 先在해야만 한다. 존재와 無差別的으로 관계하는 非존재는 존재일반의 보편적 형식을 지니지만 존재와 無를 통합하지만 서로 배제하는 것이기도 하다. 헤겔이 非존재를 말하는 것은 발생론적 사유에 근거한다. 발생론적 사유방식은 존재의 근원으로부터

萬物을 설명하는 데에 유효한 방법이고, 변증법도 방법론적으로 발생론적 사유방식에 기초를 둔다.

헤겔은 非존재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

발생론적 관점에서 헤겔의 始原論을 한번 구성해 보자.

존재의 발생순서는 우선 端初 자체(非존재)-> 존재와 無-> 생성의 3단계일 것이다.

그런데 非존재가 이미 있는 것과 아직 없는 것으로 나누어지게 되면, 우리는 이 3단계를 5단계로도

변형해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1) 존재에서 출발해서 無로의 이행은 생성의 계기로서 소멸이다.93)

93) G. W. F. Hegel, WdL (I/1), 93쪽 참조

(2) 非존재와 존재가 無差別하기 때문에, 존재에서 출발해서 無로 이행해 버린 것은 이미 존재한다.

(3) 無에서 출발해서 존재로 이행하는 것은 생성의 계기로서 발생이다.94)

94) G. W. F. Hegel, WdL (I/1), 같은 쪽 참조.

 

(4) 非존재가 無와 구분되기 때문에, 無로부터 출발해서 존재로 이행하는 것은 아직 없다.

(5) 非존재가 아직 未發展된 존재이므로, 생성은 구체적인 존재임과 동시에 존재 자체로 복구한다.

朱熹의 순환론은 본체론적 사유방식에 근거한다.

우주생성론은 1->2->4->∞와 같은 분화과정만 있을 뿐이다.

예를 들자면 이것은 太極의 元氣(一氣)가 陰陽二氣로 분화되어 거기에서 萬物이 파생되어 나온다는 것과 마찬가지의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우주생성론은 太極과 陰陽의 관계가 속성들의 對待關係를 통한 상호전이운동이라는 것을 간과할 우려가 있다.

따라서 본체론적 관점은 우주 생성론이 아니라 1=2=5=∞95)이라고 하는 순환론으로 귀결된다.

周敦頤의 󰡔太極圖說󰡕에 의한 우주생성론이 우주의 운동 및 변화의 법칙과 개체의 존재 및 행위법칙 사이에 연속성과 통일성을 주장한 것이라면,

朱熹는 이러한 연속성의 현재성을 강조함으로써 우주 생성론을 본체론으로 변형시킨 것이다.96)

95) 주광호, 19)주의 논문, 384-385쪽 참조

96) 주광호, 「朱熹 太極論의 ‘생생’의 원리」, 󰡔철학연구󰡕, 제98집, 대한철학회, 2006, 303쪽 참조.

여기에서 ‘현재성’이란 개념은 ‘太極’이 운동과 변화가 현재에 진행하고 있으며, 거기에는 그 근거와 변화도 현재에 작용하고 있음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太極이 理로서 존재한다.

朱熹가 우주의 끊임없는 운동과 변화의 본성을 ‘生生’이라고 말한 것은 헤겔과 같은 생성의

개념이 아니라, ‘生’에 포함된 유기체적 의미를 통해 인간과 자연의 공통원리를 해명하기 위한 것이다.

헤겔의 발생론과 朱熹의 순환론의 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우주 혹은 만물의 발생과 근원을

존재근거로부터 고찰할 경우에, 자신들의 고유한 관점 아래에서 방법론도 서로 다르다는 데에 있다.97)

 

97) 어떤 방법론에서 서로 다른지에 대한 상세한 증명은 차후의 연구과제로 남겨 두고자 한다.

이 글에서 필자는 단지 서로의 관점에서 따라 서로의 차이만을 언급했을 뿐이다.

전자가 단계적 방식으로 존재의 근원으로부터 양쪽의 대립 및 계기적 지양을 통해 생성이라는

새로운 결과물을 생성해내는 논리를 주장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對待關係를 통해 본체론의 관점에서

우주 혹은 만물의 속성들이 상호관계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기적 관계를 뜻한다.

 

5. 나가는 말

지금까지 필자는 헤겔의 始原論과 朱熹의 太極論을 비교하면서, 양쪽의 존재론적 관점의 차이를

고찰해 보았다.

비교철학에서 중요한 것은 전자든 후자든 단순히 서로 다르거나 동일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서로 다른 철학을 구분 없이 서로 뒤섞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측면에서 어떤차이가 어떤 관점

아래에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어야 한다.

헤겔의 始原論은 헨리히의 정확한 지적처럼 논리학 전체를 보아서도 반성의 차원과 다른 구조를 지니고 있다.98)

이러한 始原論의 위치는 차이,구별, 모순 혹은 대립의 차원보다 全一性에 바탕을 두면서 거기에서 始原

자체의 측면에서 순수 사유와 순수 존재가 일치함을 보여준다.

헤겔의 논리학이 “절대자 자신을 전개해 나가는 포괄적인 체계임과 동시에, 일체의 根柢에 정신적인 것이 순수한 본질”99)을 이루고 있는 학문이므로, 근대 철학에서 논의되어 온 始原의 문제를 갖고 보자면, 우리는 사유의 주관적 측면이 객관적 진리의 본질적 계기가 되고 나서 원리가 논리적 사유의 端初

로 제시100)되었음을 알 수 있다.

98) D. Henrich, Hegel im Kontext, Frankfurt a/M, 1971, 73-74쪽 참조

99) 권기환, 앞의 논문, 2쪽.

100) 임석진, “Das Absolute im Zug der Dialektik des selbstvermittelnden Anfangs,” 󰡔변증법적 통일의 원리󰡕(서울 : 청아, 1992), 94쪽 참조.

헤겔은 적어도 철학의 始原에 관한 문제를 방법론적 측면에서 접근하는 태도 혹은 자기반성적 관점을 제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헤겔이 始原으로서 端初 자체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端初 자체, 즉 非존재는 우리의 사유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사유의 무차별점(Indiffenrenzpunkt)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朱熹의 太極論은 우주 생성론을 본체론으로 변형시키면서 우주와 존재의 근원을 제시했다.

‘太極이 理’라는 朱熹의 테제는 理論을 확립함과 동시에 현상계의 사물을 理氣二元論으로 定礎하는 데에 기여한다.

그런데 朱熹의 太極論은 헤겔과 같은 순수 사유의 학문으로서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지향하는 바를 근거지우는 존재의 법칙이면서 이와 동시에 萬物의 내재적 법칙인 ‘理’를 확립하려는 데에 있다.

물론 자연철학적 시각으로만 보면, 太極論이 우주론 혹은 우주 생성론일 수 있지만, 우주 생성론 자체의

관점에서 인간의 가치 혹은 윤리가 포함되기는 어렵다.

朱熹는 太極論에 理氣論을 끌어 들임으로써, 본체론을 통해 자연과 인간의 통일을 모색한 것이다.

天人合一이라는 聖人도 결국 이러한 존재론적 구조에 합당하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헤겔과 朱熹의 존재론적 관점의 차이를 고찰하기 위해서 각각 대표적으로 제시해 볼 수 있는 주제를 뽑아서 서로 관계 지우기를 시도해 보았다.

물론 이러한 관계지우기의 성공여부는 우리가 헤겔의 논리학에 대한 형이상학적 해명과 朱熹의 性理學에 대한 자연철학-윤리학적 접근을 세밀하게 점검한 이후에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은 그러한 성공여부를 판가름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글은 단지 비교철학에서 논의될 수 있는 다양한 주제들 가운데 하나의 주제를 선택해서

서로의 관점의 차이를 확인함으로써 헤겔 철학과 朱熹 철학에 대한 또 다른 철학적 논의를

이루는데 기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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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약 문】

이 글은 헤겔의 시원론과 주희의 태극론을 비교함으로써 존재론적 관점의 차이를 밝히는 데에 있다.

존재의 구조와 근거를 밝히는 이론으로서 존재론은 헤겔과 주희에 있어서도 각각의 철학체계를 완성하기 위해 필요한 이론이다. 헤겔의 시원론은 순수 존재의 이중적 구조를 통해 시원을 이루고 있는 것과

시원 자체가 구분되는 데에서 출발한다. 만일 시원을 이루고 있는 것이 존재와 무라면, 시원 자체는

존재와 무를 모두 포함하는 순수 존재 자체라고 이해된다.

그러나 시원 자체는 후진적 근거짓기를 통해 차후적 으로 존재하는 제3의 존재, 즉 비존재다.

이것은 무전제적, 무규정적 존재로서 모든 규정성으로부터 벗어난 순수 형식을 지닌 존재 자체다.

이와 반대로 주희의 태극론은 처음부터 존재의 근거와 만물의 근원을 본체론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우주 생성론으로부터 벗어난다. 주희는 형이상자와 형이하자를 구분함으로써 형이하자인 음양의 근거를 형이상자인 태극으로 설명한다.

그런데 현상계의 만물이 리와 기를 서로 뒤섞일 수 없지만 그렇다고 서로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주희의 철학체계는 리기이원론적 리론이다.

결론적으로 헤겔의 시원론과 주희의 태극론의 관계에서는 존재론적 관점의 차이가 존재한다.

헤겔의 철학은 순수 사유와 순수 존재가 일치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하여 순수 사유의 체계인

논리학을 통해 형이상학을 해명하는데 있다.

헤겔의 시원론은 단초로부터 종결에 이르는 과정을 변증법적 운동을 통해 진리를 획득하는 이론이다.

이와 반대로 주희의 태극론은 우주생성론이 아니기 때문에, 본체론에 상응한다.

여기에서는 헤겔처럼 순수 사유의 차원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과 자연의 유기적 통합이 중요하다. 따라서 이것은 우주 및 자연의 이치와 인간의 가치가

서로 연관된다는 것을 뜻한다.

【주 제 어】헤겔, 시원, 존재, 무, 주희, 태극, 리, 기, 존재론

<Zusammenfassung>

Eine vergleichende Untersuchung über die Theorie

des Anfangs Hegels und des T'ai-Chi Chu Hsiss

-In Ansehung des ontologischen Gesichtspunktes-

Kwon, Ki-Whan

Die vorliegende Arbeit beschäftigt sich mit der Differenz des ontologischen Ge

sichtspunktes, indem sie die Theorie des Anfangs des Hegels einen Vergleich mit der des

T‘ai-Chi Chu Hsiss anstellt. Die Ontologie als eine Lehre von Struktur und Grund des

Seins ist eine nötige Theorie bei Hegel und Chu Hsi, um jedes philosophisches System zur

Vollendung zu bringen. Die Theorie des Anfangs Hegels geht davon aus, dass das, was den

Anfang macht, von Anfang selber unterschieden ist. Wenn das, was einen Anfang macht,

Sein und Nichts ist, ist Anfang selber als reines Sein selbst. welches Sein und Nichts

enthält, zu verstehen. Aber Anfang selber ist das dritte Sein, welches durch die

zurückgehende Begründung nachfolgend vorhanden ist, d. h. Nichtsein. Dies ist Sein an

sich, wel ches sich aus aller Bestimmtheiten herauszieht und reine Form hat, als ein

unvorrausgesetztes, unbestimmtes Sein. Indem die Theorie des T‘ai-Chises Chu Hsiss

dahingegen von Anfang den Seinsgrund und Universumsursprüng ousiologisch

rekonstruiert, zieht sich von der Kosmogonie oder Kosmologie heraus. In dem

Chu Hsi das Metaphisches von Physisches unterscheidet, stellt den Grund für

Yun-Yang, nämlich das Physisches durch T‘ai-Chi, das Metaphysisches dar. Weil doch das

Universum der Erscheinungswelt weder Li mit Ki mischen kann, noch Li von Ki

untrennbar ist, heisst das philosophische System die Li-Ki-dual istische Li-Lehre. Zum

Schuss besteht die Differenz des ontologischen Gesichts punktes im Verhältnis von der

Theorie des Anfangs Hegels und T’ai-Chis Chu Hsiss. Die Philosophie Hegels geht von

einer Voraussetzung aus, dass reines Denken mit reinem Sein vereinigt, und besteht darin,

die Metaphysik durch die Logik, die das System des reinen Denkens heisst, zu darstellen.

Die Theorie des Anfangs bei Hegel hat einen Prozess, der von ein em Ansatz bis zum Ende

gelangt, und die Lehre, die zugleich durch die dialektische Bewegung Wahrheit bekommt,

Weil dahingegen die Theorie des T‘ai-Chi Chu Hsis keine Kosmogonie oder Kosmologie

ist, entspricht solche Theorie der Ousiologie. Hier wie Hegel die Dimension des reinen

 

Seins nicht ist, sondern ist die organische Vereinig ung von dem Mensch und der Natur

gewichtig. Also bedeutet dies, dass das Gesetz von Universum und Natur sich zu Geltung

des Menschen verhält.

【Schlüsselwörter】Hegel, Anfang, Sein, Nichts, Nichtsein, Chu Hsi,

T'ai-Chi, Li, Ki, Ontologie

 

 

논문제출일: 2013년 8월 4일  논문심사일: 2013년 9월 30일  게재확정일: 2013년 10월 5일

존재론 연구 제32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