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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야기

장자철학에서 ‘도’의 존재론적 지위/윤천근.안동대

1. 행위론적 도- 포정해우 이야기

‘도’는 말하기 어려운 주제이다. ‘도’는 중국사상의 전 영역에서 중요하게 쓰이는 개념이다. 아마도 ‘도’만큼 널리, 다양하게, 일상적으로, 그리고 신비롭게 사용되는 개념도 따로 찾기 어려울 것이다. ‘도가’철학이 ‘도’를 내세워 그들 사상 유파를 표시하는 이름으로 삼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을 그들의 전유물이라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가 ‘도’에 대해 이야기하기 어렵게 하는 것 중에는 이미 모든 영역에 걸쳐서, 일상적 차원에 있어서까지, 너무 익숙하게 이 말을 사용하는 우리의 언어 환경도 하나 손꼽을 수 있다. 다들 잘 알고 있다고 여기니 달리 특별한 생각을 담아내기 어려운 것이다. 도가철학의 특징을 보여주는 ‘도’는 존재론적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도’ 개념은 주로 행위론적인 것이다. 물론 행위란 존재에 걸려 있는 것이니 행위론적 도라 하더라도 ‘이미’ 존재론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중용에서 ‘솔성지위도’1)라고 할 때, 우리는 ‘품성에 근거를 두는 행위론적 도’를 만날 수가 있다.

1) 中庸; “率性之謂道.

여기의 ‘품성’은 ‘천명으로 주어진 것’이니, ‘있는 그대로의 존재성’이다. 그 존재성을 구현하는 행위가 바로 ‘도’인 것이다. 중용이 첫머리에 내걸고 있는 ‘도’는 ‘보다 행위론적인 것’이고, ‘이미 존재론적인 것’인 셈이다. 중용은 유학의 중요한 경전 중 하나이지만, 이 부분의 사유는 유학적 범주를 벗어나서 도가적 의식과도 연관된다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내가 목적으로 하는 것은 장자철학의 ‘도’를 존재론적 차원에서 말하여 보려는 것이다. 내가 기왕에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은 존재론적인 것이다. 나는 도가철학의 존재론이 현대적 관점에서 존재를 들여다 볼 때 유의미한 부분을 많이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장자철학은 특히 존재론적 사유를 자유롭게 전개시켜 나갈 수 있는 자료를 풍부하게 담고 있다고 보는 것이 나의 입장이다. 나는 이미 장자철학의 존재론적 구조에 대해 여러 편의 논문을 내 놓은 바 있다. 이 과정에서 나는 내 글을 읽어 준 사람들을 통해 ‘도’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접할 수 있었다. 이 글은 그러한 여러 견해들에 대해 나 자신의 답변을 마련하여 보고자 하는 것이기도 하다. 앞에서 말하였다시피, 나는 존재론적 관점을 중심으로 하여 ‘도’를 이야기하여 보려고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익숙히 알고 있는 ‘도 이야기’, 행위론적 도를 배제하고 이야기를 시작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먼저 행위론적 도를 거쳐 존재론적 도로 나아가는 과정을 밟아 나아가고자 한다. 장자 속에서 이러한 나의 입장을 가장 적절하게 대변하여 주는 것으로는 ‘포정해우’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포정이 문혜군을 위해 소를 잡는데, 손으로 만져보고, 어깨를 늘어뜨리고, 발로 버텨 서고, 무릎을 기울이고, 칼을 떨쳐 소리를 내었다. 칼이 나아가며 만들어 내는 소리는 박자에 맞지 않음이 없었는데, 상림의 무곡과도 같았고, 경수의 노래처럼 어울렸다. 문혜군이 말하였다. “허어! 좋도다! 기술이 이런 경지에 까지 이를 수 있단 말인가?” 포정이 칼을 거두고 말하였다. “신이 소를 잘 잡을 수 있는 것은 도에 따르기 때문이니, 기술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신이 처음 소를 잡기 시작했을 때에는 소가 눈앞에 보이지 않음이 없었으나 3년이 지난 후에는 소의 몸체가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방금 제가 소를 잡을 때에는 신령으로 소를 마주하여 갔지 눈으로 본 것이 아닙니다. 오관으로 맞지 않고 신령이 이끄는 대로 행하고, 천리에 의지하여 벌려있는 공간을 가르고 틈을 비집고 나아갑니다. 본래 이루어져 있는 모습에 바탕 하여 기술적으로 근육과 힘줄이 엉킨 사이를 갈라 나가는데 큰 틈이 있는 곳을 자르는 것이 문제이겠습니까? 좋은 백정은 해마다 칼을 바꾸는데, 가르는 식으로 칼을 쓰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백정은 달마다 칼을 바꾸는데, 자르는 방식으로 칼을 쓰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가 쓰는 칼은 19년 된 것이고, 이것으로 잡은 소가 수천마리에 이르는데도 칼날이 마치 금방 숫돌에 간 것과도 같습니다. 소의 저 근육과 힘줄, 뼈의 마디에는 사이가 있고 칼날은 두껍지 않으니, 두껍지 않은 것으로 사이가 있는 곳을 가름에 있어서는 넓고 넓은 것이 반드시 칼날이 나아감에 있어 남는 부분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런 까닭에 19년을 썼는데도 칼날이 마치 새로 숫돌에 갈아온 것만 같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육과 힘줄이 엉킨 곳에 이를 때마다 나는 그 사이를 가르기가 쉽지 않음을 느끼고, 두려워하며 스스로를 경계하니, 시선은 멈추어지고 갈라 나가는 속도는 늦어지며 칼날의 움직임은 아주 세밀하여 지게 마련입니다. 잠깐 사이에 해체가 끝나는 것은 마치 땅 위에 흙덩이가 놓여 진 것처럼 소를 보기 때문입니다. 칼을 들고 일어서서 사방을 돌아보면 마음속에 조심스러운 생각이 가득하여지지만 나는 칼을 잘 닦아 갈무리하는 것입니다.” 문혜군이 말하였다. “좋도다! 나는 포정의 말을 들으면서 생명을 살찌우는 도리를 얻었구나.”2)

2) 莊子 「양생주」; 제2절; 庖丁爲文惠君解牛, 手之所觸, 肩之所倚, 足之所履, 膝之所踦, 砉然嚮然. 奏刀騞然, 莫不中音, 合於桑林之舞, 乃中經首之會. 文惠君曰; “嘻! 善哉! 技蓋至此乎?” 庖丁釋刀對曰; “臣之所好者, 道也, 進乎技矣. 始臣之解牛之時, 所見無非牛者, 三年之後未嘗見全牛也. 方今之時, 臣以神遇, 而不以目視. 官知止, 而神欲行, 依乎天理, 批大却, 導大窾. 因其固然, 技經肯경之未嘗, 而況大軱乎? 良庖歲更刀, 割也. 族庖月更刀, 折也. 今臣之刀, 十九年矣, 所解數千牛矣, 而刀刃若新發於硎. 彼節者有間, 而刀刃者無厚, 以無厚入有間, 恢恢乎, 其於遊刃, 必有餘地矣. 是以十九年, 而刀刃若新發於硎. 雖然每至於族, 吾見其難爲, 怵然爲戒, 視爲止, 行爲遲, 動刀甚微. 謋然已解, 如土委地, 提刀而立, 爲之四顧, 爲之躊躇滿志, 善刀而藏之.” 文惠君曰; “善哉!吾聞庖丁之言, 得養生焉.

포정은 소 잡는 일의 ‘기술’을 넘어서서 ‘도’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다. 그에게 있어서 기술의 영역과 도의 영역은 서로 다르다. 포정이 ‘기술’을 넘어서는 경지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3년 동안 그 ‘기술’을 숙련시켜 나간 과정이 ‘이미’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3년까지의 포정은 소를 해체하는 능력을 닦아 나간 것이다. 이 과정 속에서 포정과 소는 서로 타자의 지위를 나누어 갖고 있다. 포정은 소를 자신이 해체하여야 하는 대상으로 간주하고, 소는 포정의 앞에 구분된 하나의 존재로 놓이게 된다. 포정은 자신의 눈으로 소를 보고, 자신의 지식으로 소를 공부한다. 소에 대한 파악, 소에 관한 지식이 요구되는 것이다. 소의 근육과 힘줄, 뼈의 구조를 완벽하게 숙지하여, 그 엉키고 나누어진 구조 자체를 이용하여 칼을 움직여 나가는 것이다. 이 점에서 포정은 인식의 문제, 지식의 문제를 갖게 된다. 지식으로 소에 대한 이치를 익혀 익숙하게 칼을 움직여 나가는 것은 ‘기술’이다. 그것은 머리와 손이 익혀 갖추게 되는 능력인 것이다. 포정에게 있어서 이것은 아직 소 잡는 일 속에 놓여지는 ‘도’가 아니다. 기술은 현상적 영역의 가장 익숙한 지점에 놓이는 것이다. 그것은 몸이 익히는 능력의 극점에 위치한다. 유학에서 ‘하학이상달’3)이라고 할 때, ‘상달’로 상승되지 않는 ‘하학’의 익숙한 구현도 이것과 같다.

3) 論語 「헌문」; “不怨天, 不尤人, 下學而上達, 知我者其天乎?”

이를테면 공자가 ‘삼십이입’으로부터 시작하여 ‘40이불혹’, ‘50이지천명’으로 까지 진화시켜 나가는 ‘학습의 과정’은 지식론적인 확장양상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만으로는 이 공부는 덕성의 함양이나 이치의 체현으로 구현되지 못한다. 지식론적 확장양상을 ‘육십이이순’의 덕성으로 환원시켜 내고, 마음 안에서 이치가 자연스럽게 동작하게 되는 ‘칠십이종심소욕불유거’의 경지로 까지 육화시켜낼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확장된 지식의 체계는 그 마음의 구성양상으로 정착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50이지천명’ 이전의 마음과 이후의 마음 사이에는 기능적인 지식행위를 하는 마음과 ‘이미’ 각성되어서 자연적 이치를 저절로 드러내는 마음이라는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4)

4) 논어 「위정」 참조. 唐滿先은 60의 耳順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더라도 眞假ㆍ是非를 판별할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한다.(唐滿先, 논어, 趙國華 책임편집, 白話先秦諸子, 合肥, 黃山書社, 1993, 2쪽.) 이것은 耳順이 갖는 和諧ㆍ融和의 의미를 약화시킨 것이라 생각된다.

유학은 전자의 지식과정을 통하여 후자의 각성된 존재성을 갖추어 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것들이 단계적 공부의 양상 속에 놓여 질 수 있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은 공자가 ‘도를 가르침 받을 수 있다’[聞道]5)고 말하는 것과 상관되어 있는 문제이다.

5) 논어 「里仁」; “朝聞道, 夕死可矣.” 주자는 여기의 ‘聞’을 ‘知得’으로 설명한다. (欽定四庫全書 御纂朱子全書, 12권, 37면 참조)

지식의 확장이 마음, 또는 정신의 각성을 이끌어 내는 결과를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은 유학적 도리가 학습을 통하여 얻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궤를 같이하는 이야기이다. 인간의식이 시작되는 지점은 언제나 삶의 현실 속이다. 사상은 이 삶의 현실을 통하여 어떤 시선을 길러 갖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는 문제이다. 어떤 사상도 이 점과 무관할 수는 없는 일이다. 만약 이것과 무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상이라는 이름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한바탕의 꿈, 그렇지 않으면 한차례 소비되고 마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 것일 터이다. ‘한바탕의 꿈’과 ‘소비되는 이야기’는 삶의 현실과 피상적 관계를 맺을 따름이다. 반면에, 사상은 삶의 현실과 구체적이고, 심층적인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삶의 현실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존재의 환경이다. 존재는 그 환경 속에 던져져 있는 것이며, 그 환경 속에서 나름의 지위를 얻어 갖추어야 하는 것이며, 그 환경과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사상은 그 능동성과 강제력의 접점에서, 존재가 어떤 능동성을 발현하고, 환경을 어떤 강제력으로 작동하도록 허용하는가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존재는 언제나 살아가는 자이고, 그 자신이 살아가는 양상에 관심을 갖는 자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던져진 자’로서의 존재양상이고,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살아가는 자’의 존재양상이다. 전자는 모든 존재의 기본적 토대이고, 후자는 의식을 갖는 존재의 본질적 토대이다. 도가와 유학의 존재론적 환경은 별로 다르지 않은 것이기도 하고, 아주 크게 다른 것이기도 하다. 전자, 서로 같다는 입장을 통해서 우리는 도가든 유학이든 다 같이 전체 자연세계 속에 던져진 존재의 삶에 절대적 관심을 갖는다는 점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후자, 서로 크게 다르다는 측면에서 우리는 도가가 이 ‘세계 속에 던져진 자’라는 존재양상에 집중하고 있는 반면 유가는 동시에 그러한 ‘자기존재에 대한 깊은 관심’을 드러낸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터이다. 도가는 ‘세계 속에 던져진 존재’로서의 ‘존재 자체’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라면, 유가는 ‘세계 속에 속하여 있는 존재’로서의 ‘자기존재’ 자체에 지극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런 차이로 인하여 도가는 ‘존재’를 대동하고 ‘세계’ 속으로 함입되며, 유가는 ‘자기존재’를 통하여 ‘세계’를 끌어안으려 하는 것이라 하겠다. 포정의 경우, 소를 해체하는 ‘기술’을 숙련되게 학습하여 도달하게 되는 경지는 ‘소와 그 사이의 구분이 없는’ 존재론적 경지이다. ‘학습’하는 것은 ‘오관으로 맞아 나가서’ 소의 근육과 힘줄, 뼈마디의 구성을 익히는 것이다. 그런 공부를 통하여 ‘포정’의 입장에서 ‘소’에 대해 통달하여, 소를 해체하는 일에 관한 한 막힘이 없게 된 것은 ‘행위론적 도’의 일정한 경지에 이른 것이다. 그것은 포정의 지식과 경륜의 과정 끝에 마련되어 있는 ‘깨침’의 양상일 것이다. 마음으로 ‘알고’, 몸으로 익숙하게 구현하여 나가는 것은 ‘조금 좋은 백정’의 기능이다. ‘조금 좋은 백정’은 ‘해마다 칼을 바꾸는데, 가르는 식으로 칼을 쓰는 기술’을 구사한다. ‘가르는 것’은 ‘오관’을 통하여 ‘백정 자신’의 입장에서 소를 ‘지식’하고, 그것에 바탕 하여 소를 해체하는 ‘최선의 기술’이다. 대상적 영역에서 이해와 지식, 지혜와 기능의 궁극의 지점에 이르렀으므로, 이것을 일단 ‘도를 통하였다’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의미의 연장선 속에 있는 ‘도’ 개념이고, 유학적 범주 속에 놓여 져 있는 ‘도’개념이지, 포정의 도, 또는 장자의 도는 아니다. 유학에서도 그러하고, 우리의 일반적 의식 속에서도 그러하지만, ‘도를 통하였다’는 것은 인간의 일반적 수준을 뛰어넘는 경지를 이루었다는 의미를 갖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이 놓이는 지평은 범주를 무엇으로 설정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된다. 포정 이야기 속의 ‘1년에 칼 하나를 쓰는 백정’은 행위론의 범주 속에서 소 해체기술의 극점에 이른 것이라 하겠으나, ‘그 너머’의 경지를 허용하지 않는 최후의 극점, ‘극점의 극점’에 이르러 있는 것은 아니다. 포정은 ‘지금 제가 쓰는 칼은 19년 된 것이고, 이것으로 잡은 소가 수천마리에 이르는데도 칼날이 마치 금방 숫돌에 간 것과도 같습니다’ 라고 말한다. 1년에 칼 하나씩을 쓰는 경지를 훌쩍 넘어서 있는 것이다. 그는 오관이 이끌어 가는 기술의 길을 뛰어넘어 ‘신령이 이끄는 대로 행하고, 천리에 의지하여 벌려있는 공간을 가르고 틈을 비집고 나아가는 세계’에 들어서 있다. 후자가 ‘포정의 도’이다. 전자인 ‘포정의 기술’과 후자인 ‘포정의 도’ 사이에 어떤 연관관계가 마련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것은 유학에서 말하여지는 ‘하학이상달’이나, 공자의 평생을 통한 공부과정과 서로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이라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학이상달’에서 ‘하학’의 공부는 ‘상달’의 성취로 전개되어 나간다. 공자의 평생공부 속에서 ‘지천명’까지의 지식론적 공부과정은 ‘종심소욕불유거’까지의 심성론적 성취과정의 전제가 된다. 유학의 이러한 공부 양상에서는 ‘학습’이 ‘도’ 를 깨치게 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하학’하는 자의 공부는 그에게 ‘상달’ 이라는 심성론적 깨달음의 경지를 가져다주며, 그것에 바탕 하여 그는 그 자신의 행위론적 도를 구현하게 된다. ‘지어학’으로부터 시작되는 공자의 공부양상도 이것에 대한 다른 설명구조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유학적 세계 속에서 존재는 그 자신의 밖으로 걸어 나가는 법이 없다. 그는 그 자신의 존재성을 완성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삼으며, 그 자신의 존재성 속으로 천리를 받아들여서, 그 자신 속에 성인의 심성을 갖추어내고, 그 성인의 심성을 ‘도’로 구현하여 낸다. 심성론적 차원에서 그 자신은 한 없이 확장될 수 있으나, 그것은 그가 세계 속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세계가 그 속으로 흡입된 것이다. 유학의 존재론은 심성론의 완성, 또는 심성의 확장을 통하여 운용된다는 전제는 아무리 하여도 폐기될 수 없는 셈이다. 따라서 그러한 결과로서 갖추어진 심성의 막힘없는 구현, 유학적 도의 양상은, 설령 그것이 천지의 이치와 같은 모습으로 드러난다고 하더라도,‘그 자신의 도’라는 조건을 벗어버릴 수 없는 것이다. 포정의 경우, 기술에서 도로 나아가는 길은 유학에서 ‘하학’에서 ‘상달’로 나아가는 것과는 다르다. 마음과 몸을 통하여 소를 해체하는 법을 배우고 익혀나가는 과정은 ‘1년에 칼 하나를 쓰는 백정’의 기술을 익히게 할 따름이다.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19년 쓴 칼을 여전히 새것처럼 유지하고 있는 포정’의 도로 나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백정의 기술’은 ‘기술로서의 도’, ‘행위론적 도’를 갖추어내는 것이 최선이다. ‘포정의 도’는 이것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론적 도’이다. 행위론적 도는 행위를 통하여 익숙하여지면 완성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행위 하는 자인 ‘주체’의 영역 속에 놓여진다. 존재론적 도는 존재세계 자체가 자신 속에서 저절로 구현하여 내는 것이다. 이것은 주체가 되는 존재 자체가 무화[無化]하여 전체 세계 내 존재의 영역으로 복귀함으로써 가능하여 진다. 백정의 기술은 백정이 소를 잘 파악하여 해체하는 것이지만, 포정의 도는 소가 스스로 갖고 있는 구조에 맡겨서 해체를 이루어 내는 것이다. 전자의 기술은 그 끝에 이르러서 ‘다른 차원의 있는 것에 내맡긴다’는 절절한 존재론적 전이에 이르게 하는 것으로써만 포정의 도로 나아가는데 일정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그 ‘존재론적 전이’가 포정으로 하여금 기술을 버리고 도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도록 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전자를 바탕으로 하여 후자의 세계를 완성시켜 내는 것이 아니라, 전자를 버리고 후자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2. 배울 수 없는 도- 바퀴 깎는 장인 이야기

포정은 기술의 영역과 도의 영역을 구분하여 본다. 전자는 ‘나의 오관’이 주도하여 나가는 곳이고, 후자는 ‘존재의 신명’이 이끌어가는 곳이다. 전자의 경우, 지식과 행위의 극치는 ‘나의 존재성’의 영역 밖에 놓이는 것이 아니다. 후자의 경우, ‘존재의 신명’은 나의 존재성과 세계의 존재성의 연관된 구조, 세계-내-존재양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 포정은 기술의 극치, ‘기술의 도’를 구현하는 기능을 갖추어 내더라도 그가 해체하여 내고자 하는 ‘소’와 ‘오관’을 통하여 대상적 관계 속에서 대면하여야 한다는 점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이 점에서 포정이 익숙하게 구현하고 있는 행위론적 도는 학습할 수 있고 가르칠 수 있다. 후자의 경우, 포정은 그 ‘기술의 도’를 잊고 ‘그 자신이면서 동시에 소’이기도 한 세계-내-존재의 존재성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하여 그 자신의 눈으로 소를 보지 않고, 소가 스스로 자기 자신을 드러내도록 하는 ‘존재의 도’를 구현하여야 한다. 이것은 모든 인위적 지식이나 의식을 버리고, 자신의 자연적 존재성으로 스스로를 귀환시키는 것, ‘존재론적 전이’를 이루어내는 것이므로, 학습이나 가르침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장자철학의 존재론적 도가 학습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다른 이야기를 통해 알아보도록 하자. 제나라 환공이 마루 위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바퀴 깎는 장인 편扁이 마루 아래서 바퀴를 깎다가 구멍 뚫던 망치를 내려놓고 환공에게 물었다. “공께서 읽고 계시는 것은 누구의 말씀이십니까?” 공이 말하였다. “성인의 말씀이다.” “성인은 어디 계십니까?” “이미 돌아가셨다.” “그렇다면 공이 읽고 계신 것은 옛 사람의 남겨진 찌꺼기로군요?” 환공이 말하였다. “과인이 책을 읽는데 바퀴 깎는 장인이 어찌 이러니저러니 말을 한단 말인가? 설명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설명할 수 없다면 죽으리라.” 바퀴 깎는 장인 편이 말하였다. “신이 신의 일을 가지고 살펴보자면, 바퀴 구멍을 여유롭게 뚫으면 너무 헐거워서 견고하지 못하고 바퀴구멍을 비좁게 뚫으면 빡빡하여서 축을 집어넣을 수가 없습니다. 너무 여유롭지도 않고 너무 비좁지도 않게 하는 것은 손에 익히고 마음으로 응하여 가야 되는 것으로 말로 할 수 없는 것이며, 그 사이에 빈틈없는 헤아림이 있는 것입니다. 신은 그것을 신의 자식에게 가르쳐 줄 수 없었고, 신의 자식 역시 신에게 그 기술을 전해 받을 수 없었으므로 신이 70살이 되도록 이렇게 바퀴를 깎고 있는 것입니다. 옛 사람은 전해 줄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죽은 것입니다. 그러니 공이 읽고 있는 것은 옛사람이 남겨놓은 찌꺼기라는 이야기입니다.”6)

6) 장자 「天道」; 제9절; 桓公讀書於堂上. 輪扁斲輪於堂下, 釋椎鑿而上問桓公, 曰; “敢問公之所讀者, 何言邪?” 公曰;“聖人之言也.” 曰; “聖人在乎?” 公曰; “已死矣.” 曰; “然則, 君之所讀者, 古人之糟魄已夫.” 桓公曰; “寡人讀書, 輪人安得議乎? 有說則可, 無說則死.” 輪扁曰; “臣也以臣之事觀之, 斲輪徐則甘而不固, 疾則苦而不入. 不徐不疾, 得之於手而應於心, 口不能言, 有數存焉於其間. 臣不能以喩臣之子, 臣之子亦不能受之於臣, 是以行年七十而老斲輪. 古之人, 與其不可傳也死矣. 然則, 君之所讀者, 古人之糟魄已夫.”

이것은 ‘기술’에 대한 이야기이므로 앞에 우리가 살펴보았던 ‘포정해우’와 같은 문맥 위에 놓이는 것이라 하겠다. 환공이 이야기 속에 들어옴으로써 ‘배워서 익히는 도’의 의미가 더 구체화되었다는 점에 의의가 있는 구절이다. 환공은 책을 통해 성인을 공부한다. ‘성인의 도’를 익히려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바퀴 깎는 장인은 ‘성인의 책’을 ‘성인이 남긴 찌꺼기’라고 이해한다. ‘책’ 속에 ‘성인의 도’가 담겨질 수 없다는 입장인 것이다. 그는 ‘책’으로부터 배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성인’으로부터 가르침 받을 수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자신이 익힌 것도 그 자신이 자식에게 가르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책 속에 담긴 성인의 도’는 ‘바퀴 깎는 장인의 지극한 기술’과도 같다. 그는 그 기술을 자식에게도 가르칠 수 없었던 것이다. 앞의 ‘포정해우’이야기 속에서 ‘포정’은 자신의 기술이 ‘기술을 넘어선 도’라고 말하였다. 여기 바퀴 깎는 장인은 자신의 기술이 ‘가르쳐 줄 수 없는 기술’이라고 이야기한다. 이야기의 표현은 서로 다르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가르쳐 줄 수 없는 바퀴 깎는 기술’은 ‘손에 익히고 마음으로 응하여 가야 되는 것’으로, ‘말로 전할 수 없는 것’이며, ‘그 사이에 빈틈없는 헤아림이 있는 것’ 이다. ‘손에 익히는 것’은 ‘기술의 축적과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마음으로 응해 가는 것’은 ‘기술을 넘어서는 과정’이다. ‘빈틈없는 헤아림’이란 ‘바퀴구멍’과 ‘굴대’, ‘장인의 솜씨’를 상호 연관시켜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것은 서로 다른 타자인 바퀴, 굴대, 장인의 삼위일체가 이루어져야만 가능한 영역이다. 지식과 기술은 나와 타자를 접근하게 할 수는 있으나 ‘일체’를 이루게 할 수는 없다. ‘일체’는 지식과 기술을 넘어선 지점, 존재와 자연스럽게 순응하는 영역에 놓이는 것이다. 이 자리가 앞의 ‘포정해우’에서 ‘도’로 말하여지는 곳이다. 그리고 여기 바퀴 깎는 장인의 이야기에서 그것은 ‘가르칠 수 없는 것’으로 말하여지는 영역인 것이다.

3. 도를 찾고 구하는 일- 앎을 넘어 존재 속으로

지식과 행위는 인간의 영역에 있는 것이다. 존재는 자연이다. 인간도 존재이므로, 이미 자연 속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의 사유는 자연 밖으로 나가 인간의 영역을 따로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중적 존재성의 주인인 것이다. 인간의 모든 것은 이러한 이중성과 연관되어 이해되어야 한다. 환공이 읽는 성인의 책이나 바퀴 깎는 사람 편扁 과 소 잡는 사람 포정이 학습한 기술은 인간영역에 놓이는 것들이다. 그것은 ‘도’와 완전히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도’ 그 자체도 아니다. 그것은 ‘도로 다가가기 위한 인간의 노력’ 쪽에 놓여진다. 자연, 또는 존재의 영역 속에 ‘도’는 그 자체로서 구현되어 있으나, 그 ‘도’는 주목되거나 주장될 필요조차 없는 것이고, 굳이 ‘도’라는 이름표를 가질 필요도 없는 것이다.7)

7) 그래서 노자는 구차하게 ‘字之曰道, 强爲之名曰大’(노자 25장)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을 어거지로 표현한다는 분위기를 담고 있는 구절이라 하겠다.

‘도’의 이름표는 인간영역 속에 있는 우리, ‘나’에 의해 주목되는 것일 뿐이다. 성인의 책을 읽는 환공, 열심히 바퀴 깎거나 소를 해체하는 기술을 닦고 있는 윤편이나 포정이 놓이는 지점은 이쪽, 인간의 영역이다. 인간의 영역에서 그들은 도의 구현을 추구한다. 이것은 물론 그들이 아직 도와 합체가 되기 전의 상황을 가지고 할 수 있는 말이다. 유학의 도는 인간영역에 들어와 있다. 그것은 성인의 행위로 구현되고, 성인의 말씀으로 정리되고, 성인의 지혜로 완성된 것이다. 그런 유학적 세계 속에서 우리는 천도, 천리 등으로 지시될 수 있는 자연의 도와 인도, 성인의 도로 구현될 수 있는 인간의 도를 만난다. 이러한 도를 유학은 위대한 정신의 완성, 또는 심성의 커다란 확장을 통하여 자기 속에 갖추어 내려고 한다. 그러나 도가의 도는 이것과 다르다. 도가는 자연 밖으로 걸어 나온 인간영역을 그들의 철학세계 속에 받아들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도가의 차원에서는 세계는 진실한 자연세상과 그릇된 인위세상으로 나누어진다. 인위세상 속에 자연세상의 도를 가져다 놓을 수 있다는 믿음은 유학의 것이지 도가의 것이 아니다. 도가의 경우, 자연세상 밖은 도가 없는 영역이다. 그러나 도가에 있어서도 현상적 인간은 이미 자연세상을 크게 벗어나 있다. 그것은 현상적 인간이 도로부터 차단되어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런 그들, 그런 우리가 자연 세상, 도의 영역으로 귀환하여야 하는 것은 존재 자체가 갖는 본질성, 존재 자체를 주목하고 있는 존재의 기본 속성이다. 그러나 인위가 강하면 이 존재의 속성은 묻혀버리게 된다. 도가의 경우, 자연으로부터 크게 벗어난 인간은 그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상황 속에 놓이게 된다. 이를테면 그것은 노자의 ‘표풍’이나 ‘취우’와 같은 경우이다. 노자철학의 세계에서 ‘표풍’과 ‘취우’는 자기를 크게 드러낸 존재, 자아성의 덫에 치어있는 존재이다.8)

8) 노자 23장 참조.

그런 존재는 그 생명력을 지속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 기반을 잃게 된다. 그것은 장자에서 ‘평범한 것이 복이 되고 넘치는 것이 해가 되는 것은 만물 중 어느 것도 그렇지 않은 것이 없는데 재부가 더욱 심한 것’이라 말하는 부분9)이나 ‘그 성품을 잃게 될 것’이라 말하는 부분10) 등에서도 동일하게 확인할 수 있는 입장이다.

9) 장자 「도척」; 제6절; 無足問於知和曰 부분; 知和曰; “平爲福, 有餘爲害者, 物莫不然, 而財其甚者也.”

10) 장자 「繕性」; 제1절; 德則不冒, 冒則物必失其性也.

“나의 인생은 한계가 있는데 지식에는 한계가 없다. 한계가 있는 것으로 한계가 없는 것을 따르면 위태로워질 따름이다. 그만 두어야 하는 것인데 알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으므로 위태로움이 있을 뿐인 것이다. 선을 행하여 명예를 얻지 않고, 악을 행하여 형벌을 받지 않으며, 원인이 되는 것을 잘 살펴 그것으로 행동의 준칙을 삼는다면, 한 몸을 잘 보전할 수 있고 생명의 이치를 온전하게 지킬 수 있으며, 가까운 이들을 부양할 수가 있고, 주어진 수명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11)라는 말을 통해서도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장자의 태도를 살펴볼 수 있다.

11) 장자 「양생주」; 제1절; “吾生也有涯, 而知也無涯. 以有涯隨無涯, 殆已. 已而爲知者, 殆而已矣. 爲善無近名, 爲惡無近刑, 緣督以爲經, 可以保身, 可以全生, 可以養親, 可以盡年.”

장자가 여기서 말하여 주는 ‘자기 지식을 추구하는 존재’는 노자의 ‘표풍’, ‘취우’와 같은 차원에 놓이는 것이다. 장자는 그런 존재는 ‘위태로워질 것’이라고 경계한다. 그 ‘위태로움’의 내용은 ‘한 몸을 잘 보존할 수 없고, 생명의 이치를 온전하게 지킬 수 없고, 가까운 이들을 부양할 수 없고, 주어진 수명을 다할 수 없는 것’이다. 구분된 자아 영역에 놓이는 우리의 삶은 이렇게 굴절되고 왜곡된 것이며, 그 자신의 존재성, 그 존재의 생명력을 갉아먹는 것이다. 그런데 존재는 구분된 자아 영역에 있는 우리에게 있어서만 존재인 것이 아니라 자연 영역 속에서도 존재이다. 존재와 자연은 ‘이미’ 상호 총체적으로 융합되어 있는 것이다. 자연적 존재는 우리의 자아영역에까지도 ‘이미’ 펼쳐져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만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자아영역과 자연영역을 상호 구분되는 것으로 우리 존재 속에 갖게 된다. 그런 구분은 우리 존재성이 내적 균열을 일으키게 하며, 존재성의 토대인 자연영역을 벗어나 자아영역 만을 앞장세워 수고스러운 삶의 전장으로 치달려 나아가게 만든다. 장자는 공자에게 충고하는 노자의 말을 빌려 이러한 삶이 놓이는 지점은 ‘부유함에 사로잡혀서 그 작록을 양여할 수 없고, 현자라는 이름을 드날리는 데에 묶여서 그 명성을 내놓지를 못하고, 권력에 마취되어서 사람들과 그 권세를 나누지 못하는 자리’라고 말한다.

“(자아의 욕망에 구속되어 있는 사람은) 이러한 것들을 갖추면 전율하듯이 즐거워하고, 이러한 것들을 잃으면 한없이 비통해 하며, ‘밝은 앎’[所鑒]을 가지고 이 멈출 수 없는 것[不休者]을 돌아보는 법이 조금도 없으니, 하늘이 형벌을 내릴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12)

12) 장자 「천운」; 제5절; “---操之則慄, 舍之則悲. 而一無所鑒, 以闚 其所不休者, 是天之戮民也.” 陳鼓應 은 여기의 ‘一無所鑒’을 ‘心中一無明見’이라 보고 ‘天之戮民’을 ‘從自然的道理看來, 他們像受着刑戮的人’이라 말한다.(진고응번역, 장자 천운 제5절, 趙國華 책임편집, 白話先秦諸子, 合肥市, 黃山書社出版, 1993, 167쪽.) 寧志新 주편의 文白對照道敎十三經 莊子편에서는 앞의 부분을 “心中一無明見以反省自己所追逐不休的”이라 하고, 뒤의 부분을 “上天施了(心智上)刑戮的人”이라고 번역한다. (寧志新 주편, 文白對照道敎十三經, 石家庄市, 河北人民出版社, 1995, 185쪽) 다같이 ‘마음속의 밝은 앎’이 그릇된 현재적 삶을 반성하는 기제로 기능해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곳의 ‘밝은 앎’은 지식론적인 도이다. 지식론적인 도는 이미 분별된 세계에 놓인 존재에게 요청되는 것이다. 분별 이전의 존재나 분별을 극복한 이후의 존재에게는 이런 지식론적 도가 필요하지 않다. 이들에게 이와 같은 지식론적인 도가 주어진다면, 그들은 적어도 ‘존재론적 삶을 살아가는 그들 자신’이나 ‘지식론적 도를 주목하는 그들 자신’의 둘로 분별될 수밖에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분별은 분별 이전이 될 수도 없고 분별을 극복한 이후도 될 수 없으며, 다만 분별 속에 있는 경우를 의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라 하더라도, ‘지식론적 도’를 갖추고 있는 어떤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자아로서의 존재이고, 분별세계 속에 놓인 존재일 따름이다. ‘지식론적 도’는 분별된 자아가 지식행위를 한 결과물이고, 분별된 자아가 분별된 세계가 떠올려 주고 있는 양상들을 통해서 반성적으로 구성하여낸 지적 깨달음의 묶음이라고 할 수 있다. 지식론적 도를 갖추었다는 것은 도의 세계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지 도의 세계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공자가 평생을 통하여 얻어 갖추고자 하였던 것은 바로 이 ‘지식론적 도’이다. 논어는 공자의 구도행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이지만, 장자 속에서도 우리는 그 편린을 살펴볼 수 있다.

공자는 51년 동안 돌아다녔어도 도를 얻어듣지 못하고 남쪽으로 패땅에 이르러 노담을 만났다. 노담이 말하였다. “그대 오시는가? 나는 그대가 북방의 현자라고 들었다네. 그대도 도를 얻었는가?” 공자가 말하였다. “아직 얻지 못했습니다.” 노자가 말하였다. “그대는 어떻게 도를 구하였던가?” “저는 도수度數에서 구하였는데, 5년이 지났어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노자가 말하였다. “그대는 또 어떻게 도를 구하였던가?” “저는 음양陰陽에서 구하였는데, 12년이 지났어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노자가 말하였다. “그랬을 것이네. 도를 헌납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 임금에게 헌납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을 것이고, 도를 진상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 어버이에게 진상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을 것이고, 도를 사람에게 알려줄 수 있는 것이라면 그 형제에게 알려주지 않은 사람이 없었을 것이고, 도를 다른 사람과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것이라면 그 자손과 함께 나누어 가지지 않은 사람이 없었을 것일세.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 속에 주인이 없으니 멈추어 설 곳이 없었기 때문이고, 그밖에 바른 모습이 없으니 행할 것이 분명치 않았기 때문이라네. 안에서 나오는 것은 밖에서 받을 수 없는 것이니 성인은 내줄 것이 없는 것이고, 밖에서 들어오는 것은 안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것이니 성인은 감추어 둘 것도 없는 것이지. 이름이라는 것은 공적인 물건이니 그것을 통하여 많이 취하여 가질 수가 없는 법이라네. 인의는 선왕이 잠시 머문 곳이나 하룻밤 유숙할 수는 있을지라도 오래 거처할 수는 없는 것이라서 거기 눌러앉으면 책망을 듣게 마련이지. 옛날의 지극한 사람은 인에서 길을 빌려 쓰고 의에 잠시 머물면서 소요의 빈 땅에서 노닐고, 밭에서 나는 거친 먹거리를 먹고, 빌려줄 가치도 없는 작은 밭에 거처를 세웠다네. 소요는 행하는 것이 없는 것이고, 거친 것은 간편하게 자신을 기르는 것이고, 빌려줄 것도 없는 것은 나아가지 않는 것이니, 옛사람들은 이것을 일러 진실한 것을 캐면서 노닌다고 하였다네. 부유함을 갖추고 이렇게 하려는 사람은 그 봉록을 양도할 수 없게 되고, 현달함을 통해 이렇게 하려는 사람은 그 명성을 양도할 수 없게 되지. 몸소 권세를 누리고 있는 사람은 사람들과 더불어 나누어 가질 수 없으니, 그것을 잡고 휘두르면 전율을 느끼고, 그것을 잃으면 비애를 느끼는 때문이야. --- 원망을 일으키고, 은혜를 느끼게 하고, 취하게 하고, 부여하여 주고, 잘못을 깨우쳐 주고, 가르침을 주고, 살아가게 하고, 죽어가게 하는 여덟가지는 바르게 만들어주는 도구라네. 오직 커다란 변화의 이치를 따르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것이지. 그러므로 ‘바른 사람은 바로잡는다’고 말하는 것일세. 그 마음이 그렇지 않게 움직이는 사람에게 하늘문은 열리지 않는 법이지.”13)

13) 장자 「천운」; 제5절; 孔子行年五十有一而不聞道, 乃南之沛, 見老聃. 老聃曰; “子來乎! 吾聞子北方之賢者也. 子亦得道乎?” 孔子曰; “未得也.” 老子曰;“子惡乎求之哉?” 曰; “吾求之於度數, 五年而未得也.” 老子曰; “子又惡乎求之哉?” 曰; “吾求之於陰陽, 十有二年而未得.” 老子曰; “然. 使道而可獻, 則人莫不獻之於其君, 使道0而可進, 則人莫不進之於其親, 使道而可以告人, 則人莫不告其兄第, 使道而可以與人, 則人莫不與其子孫. 然而不可者, 無他也, 中無主而不止, 外無正而不行. 由中出者不受於外, 聖人不出, 由外入者無主於中, 聖人不隱. 名, 公器也, 不可多取. 仁義, 先王之蘧 廬也, 止可以一宿, 而不可久處, 覯 而多責. 古之至人, 假道於仁, 託宿於義, 以遊逍遙之墟, 食於苟簡田, 立於不貸之圃. 逍遙, 無爲也, 苟簡, 易養也, 不貸, 無出也, 古者謂是采眞之遊. 以富爲是者, 不能讓祿, 以顯爲是者, 不能讓名. 親權者不能與人柄, 操之則慄, 舍之則悲. --- 怨, 恩, 取, 與, 諫, 敎, 生, 殺, 八者, 正之器也. 唯循大變無所湮者, 爲能用之. 故曰; ‘正者, 正也.’ 其心以爲不然者, 天門弗開矣.”

이 구절 속의 공자는 오랜 세월을 투자하여 도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준다. 열심히 찾아 배우는 사람, 논어 속의 공자와 다를 것이 없다. 위의 구절에서 공자는 도를 ‘도수’와 ‘음양’을 통해 얻으려고 한다. ‘도수’와 ‘음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정확하게 확정할 수 없을 것이다. ‘도수’는 아마도 이치일 것이고, ‘음양’은 아마도 조화일 것이다.14)

14) 임희일은 ‘도수’는 禮樂이고 ‘음양’은 萬物之理라고 말한다. (林希逸, 莊子口義, 臺北, 弘道文化事業有限公司, 민국60년, 권16제12 면.) 이면도 ‘도수’를 예법이라고 말한다. (李勉, 莊子總論及分篇評注, 臺北, 臺灣商務印書館, 민국62년, 316쪽) 진고응은 장자의 현대 번역에서 도수를 制度名數로 음양을 陰陽的變化로 풀어놓고 있다. (진고응 번역, 莊子, (趙國華책임편집, 白話先秦諸子, 合肥, 黃山書社, 1993, 167쪽) 制度名數란 제도 속에 내포된 이치일 것이다. 도수를 예법으로 보는 경우에도 예법의 형식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이치를 의미하는 것이라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공자에게 있어서 ‘도’를 얻어 갖추려는 ‘그’는 자연 또는 세계와 안과 밖으로 구분된 세상 속에 놓인다는 점이다. 공자는 도가 구현되어 있는 자연 세계 밖에 ‘세계의 타자’ 로 자리 잡고, ‘도’는 공자의 밖에 ‘도수’나 ‘음양’의 양상으로 ‘공자의 타자’로 구현되어 있다. 그렇게 구분된 영역에 따로 놓이는 도를 공자는 우리가 진귀한 보석을 얻어 갖듯이 수중에 넣으려고 하는 것이다. 노자는 그런 공자의 노력을 보며, 얻을 수도 없고 가질 수도 없는 도, 건넬 수도 없고 받을 수도 없는 ‘도’를 말한다. ‘안에서 나오는 것은 밖에서 받을 수 없는 것이니 성인은 내줄 것이 없는 것이고, 밖에서 들어오는 것은 안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것이니 성인은 감추어 둘 것도 없는 것’이라는 이야기는 깊은 사유를 요구하는 것이다. 여기의 ‘안/밖’ 구분은 ‘개인/사회’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이해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구분 속에 놓이는 것이 앞에서 거론한 공자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공자는 ‘밖’의 ‘도수/음양’으로부터 도를 찾아 안의 심성 속에 들여 놓으려고 하였다. 이것은 ‘밖’에 우리가 주목하여 볼 수 있는 ‘도’가 얻어서 가지고 들어올 수 있을 정도의 존재성을 갖추고 있다는 믿음에 근거한다. 그러나 노자는 ‘도’는 ‘안에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것’도 아니고, 주관과 다른 주관 사이에 동일한 것으로 놓여 질 수도 없는 것이며, 세계로부터 주관 속으로 들어온 것도 주관의 마음속에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도’는 그것이 드러나는 영역이 ‘안과 밖’으로 구분되어 말하여지는 경우라 하더라도, 똑같이 자연 존재가 자연히 그 존재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전자는 ‘주관’으로서의 존재가 자연히 드러내는 것이고, 후자는 주관 밖의 세계가 자연히 드러내는 것이다. 주관이 자연히 드러내는 것이 ‘도’가 될 수 있으려면 이 ‘주관’이 ‘자아의 존재’가 아니라 ‘자연의 존재’로 작동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 ‘주관’은 자신의 마음속에 ‘도’를 ‘주인처럼 모시는 자’가 아니므로 설령 밖의 세계 속의 도를 안에 들여 놓았다고 하여도 그 마음속에 그 도가 무슨 보물처럼 담겨져 있어서 그 자신이나 어떤 타인이 꺼내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라 하겠다. 일단 우리는 여기 공자와 노자의 이야기 속에서 ‘도’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방편이 말하여 지고 있는 부분에 주목하여 보자. 노자는 ‘옛날의 지극한 사람은 인에서 길을 빌려 쓰고 의에 잠시 머물면서 소요의 빈 땅에서 노닐고, 밭에서 나는 거친 먹거리를 먹고, 빌려줄 가치도 없는 작은 밭에 거처를 세웠다’고 말한다. 이 중 앞부분에서 우리는 ‘도’로 나아가는 방편으로 ‘인/의’가 말하여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인/의’는 세상 속에 ‘이미 드러나 있는 도’이다. 이것은 공자가 ‘배워서 익힌 도’이기도 하다. 공자는 그런 ‘인의의 도’를 넘어서서 ‘더 큰 인의의 도’, ‘보다 완전한 인의의 도’를 향해 나아가려 한다. 그러나 노자는 그런 ‘인/의’ 를 넘어서서 ‘소요’의 경지로 들어가는 것을 제시한다. ‘인/의’의 경지가 ‘세상의 도’로서 잠정적으로 인정될 뿐인 것이다. 앞에 우리가 인용하였던 ‘바퀴 깎는 장인 이야기’에서 ‘책’은 ‘옛사람이 남겨놓은 찌꺼기’라는 평가를 받았었다. 책 속에는 ‘성인의 인의’가 담겨 져 있다. 그러니 그냥 찌꺼기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도’로 나아가는 길을 알려주는 찌꺼기인 셈이다. 장자는 이 ‘도의 찌꺼기’로부터 ‘진실한 도’로 나아가는 길을 다음과 같은 은유를 통하여 슬쩍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준다. 남백자규가 말하였다.

“선생은 어떻게 그것에 대해 들은 것입니까?” “여러 ‘글씨의 자식’들에게 들었습니다. ‘글씨의 자식’들은 ‘계속하여 낭송되던 여러 이야기’에게 들었고, ‘계속하여 낭송되던 여러 이야기’는 ‘밝은 것을 넘겨다 본 이’에게 들었고, ‘밝은 것을 넘겨다 본 이’는 ‘소곤거리며 들려주는 이’에게 들었고, ‘소곤거리며 들려주는 이’는 ‘머뭇거리며 움직이는 이’에게 들었고, ‘머뭇거리며 움직이는 이’는 ‘대신해서 노래해 주는 이’에게 들었고, ‘대신해서 노래해주는 이’는 ‘그윽하고 어두운 것’에게서 알았고, ‘그윽하고 어두운 것’은 ‘자잘한 것이 가지런하게 들어차 있지만 조용하고 잠잠한 것’에게서 알았고, ‘자잘한 것이 가지런하게 들어차 있지만 조용하고 잠잠한 것’은 ‘있는지 없는지 의심스러운 처음의 그것’에게서 알았다고 하지요.”15)

15) 장자 「대종사」; 제11절; 南伯子葵曰; “子獨惡乎聞之?” 曰; “聞諸副墨之子. 副墨之子聞諸洛誦之孫,洛誦之孫聞之瞻明, 瞻明聞之聶許, 聶許聞之需役, 需役聞之於謳, 謳聞之玄冥, 玄冥聞之參寥, 參寥聞之疑始.”

‘도’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장자철학의 영역은 둘로 나누어질 수 있을 것이다. ‘도의 영역’과 ‘도가 이야기되는 영역’의 둘이다. ‘도가 이야기되는 영역’은 ‘진실한 도가 구현되어 있지는 않은 영역’이다. ‘도가 이야기되는 영역’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은, ‘도에 대한 표현’, ‘도에 대한 추구’이다. 전자는 ‘도에 대한 앎’을 유통시키는 것들이고, 후자는 ‘도에 대한 갈망’이 드러나는 것들이다. 여기 인용문의 ‘남곽자규’는 ‘도에 대한 앎의 주인공’이다. 그는 그 자신이 갖추고 있는 ‘도에 대한 앎’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 그에게 까지 주어질 수 있었는지 들려준다. ‘여러 글씨의 자식들’은 ‘도를 갖추고 있던 사람들이 남긴 기록’으로 볼 수 있다. 우리가 바퀴 깎는 장인의 이야기에서 살펴보았던 ‘제나라 환공이 읽고 있던 책’ 같은 것이 여기 해당될 수 있을 것이다. 보다 범위를 넓혀 말하자면 우리가 지금 거론하고 있는 장자도 이 범주에 속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바퀴 깎는 장인’의 지적이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는 이러한 책들에 담겨 있는 이야기가 ‘도의 껍데기’임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도를 갖추려는 이’의 목표점이 아니라 시발점이라고 할 수 밖에 없을 터이다. 여러 성인들은 ‘도를 전하는 이들’이다. 그것은 유가의 성인뿐만 아니라 도가의 성인 역시 마찬가지이다. 어떤 도를 전하느냐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 따름인 것이다. ‘성인의 말씀’은 ‘도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와 우리 세상 속에 전해져 유통되는 ‘도 이야기’는 ‘문자로 기록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껍질’일 따름이므로 우리에게 제대로 ‘도의 모습’을 전하여 줄 수 없다. 따라서 ‘도를 추구하는 우리’는 그 ‘껍질’을 통하여 ‘알곡’으로 나아가는 길을 걸어가야 한다. ‘문자로 기록된 것’[諸副墨之子]- ‘여러 세월 동안 낭송되어 내려온 것’[洛誦之孫]- ‘밝은 것을 넘겨다 본 것’[瞻明]- ‘나아가는 것을 잡아 낸 것’[聶許]- ‘머뭇거리며 움직이는 것’[需役]- ‘흥얼거리며 노래하는 것’[謳]- ‘그윽하고 어두운 것’[玄冥]- 자잘한 것이 가지런하게 들어차 있지만 조용하고 잠잠한 것’[參寥]- ‘있는지 없는지 의심스러운 처음의 그것’[疑始] 등은 도와 연관되어 제출되는 여러 영역이다. 이것들은 5단계로 나누어 질 수 있다. 제 1단계는 ‘문자로 기록된 것’[諸副墨之子]- ‘여러 세월 동안 낭송되어 내려온 것’[洛誦16)之孫]이다.

16) 洛誦之孫의 洛誦은 苞絡而訟之(林希逸, 莊子口義, 臺北, 弘道文化事業有限公社, 민국60년, 권8제15면)이라 한다. ‘솜으로 싸놓고 낭송한다’는 의미인데, ‘말로 전하여진다’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焦竤은 간단하게, ‘副墨書也, 洛訟言也’라 해석한다. (焦竤, 莊子翼, 臺北, 廣文書局, 민국68년, 莊翼二 六十一面 또는 71쪽)

이것들은 말이나 글로 표현되거나 전하여지고 있는 도의 영역이다. 이 속에 있는 것은 규정되거나 설명된 것이므로, 도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더라도 그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것은 유위有爲의 세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에게 ‘도’에 대한 어떤 지향을 품을 수 있게 이끌어 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속에 표현되어 가두어진 도에 묶여 버린다면, 그것은 형식화되고 박제화 된 도에 사로잡혀 또 다른 유위有爲의 그물망 속에 가두어지고 말 것이다.

제2단계는 ‘밝은 것을 넘겨다 본 것’[瞻明]- ‘나아가는 것을 잡아낸 것’[聶許] 이다. 이것들은 제1단계의 말과 글 속에 담겨지는 도, 형식화된 지식으로서의 도가 처음 생산되는 지점에 놓이는 것이다. 도에 대한 인식 또는 지식이 처음 만들어지는 자리에서, 도는 ‘밝은 것’으로, 또는 ‘나아가는 것’으로 ‘거기’ 놓여지고, 그 도를 ‘넘겨다보고’, ‘잡아낸’ 이는 ‘여기’ 놓이게 된다. ‘밝은 것’을 보고 ‘나아가는 것’을 잡았으므로, 그 보고 잡음은 너무 눈이 부시거나 움직이고 있는 것이어서 명료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것은 ‘도’에 대한 지식, 또는 인식의 한계를 전제하는 것이다. 도와의 만남, 도에 대한 인식의 ‘흐릿함’을 이해하는 것은 그 결과물을 표현하여 놓은 제1단계의 ‘말과 글 속 도’의 확실성, 절대성에 사로잡혀서는 안 되는 조건이 된다.

제3단계는 ‘머뭇거리며 움직이는 것’[需役]- ‘흥얼거리며 노래하는 것’[謳] 이다. 제2단계와 제3단계 속에 담겨지는 의미는 서로 중첩되어 있는 것이다. 제2단계는 그것을 ‘보는 사람’의 측면에서 말하여 주었다면, 제3단계는 그것을 ‘거기 있는 도’의 차원에서 이야기하여 주는 차이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제1단계가 지식으로 유통되는 도의 양태에 대한 것이라면 제2단계는 인식으로 포착되는 도의 양상에 대한 것이다. 이 둘은 다 도에 대한 우리의 앎과 연관되어 제출된다. 그러나 제3단계는 도 자체의 영역, 도가 구현된 세계가 갖는 어떤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도는 존재세계에서 저절로 드러나는 것인데, 장자의 존재세계는 구체적이고 절대적인 내용을 갖는 어떤 도를 막힘없이 구현하고 있는 영역이 아니라 매 순간 도가 새롭게 조형되어 나오는 곳이다. 그러므로 그 도는 구름이 피어오르는 것처럼 모호하게 전개되어 나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을 ‘머뭇거림’, 혹은 ‘흥얼거림’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렇게 명료하게 정체성을 짚어낼 수 없는 도의 존재양상에 기반을 두고 인식과 지식이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제4단계는 ‘그윽하고 어두운 것’[玄冥]- ‘자잘한 것이 가지런하게 들어차 있지만 조용하고 잠잠한 것’[參寥]의 세계이다. 제 3단계는 이 제4단계가 외적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고, 제4단계는 제3단계가 내적 양상으로 갖추고 있는 것이다. 제4단계의 내적 양상은 일체의 요소[자잘하게 들어참]가 그 안에 잠복[그윽하고 어두움]되어 있으면서 아무런 조짐도 구체적으로 드러내 보여주지 않음[조용하고 잠잠함]을 의미한다. 그러한 흐릿함 속에 도가 숨겨져 있으므로, 우리가 총체적 세계의 흐릿한 존재양상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 외에 도와 연관될 수 있는 계기는 확보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깊숙하게 숨겨진 있음의 세상’, 그런 세상 속에 펼쳐져 있는 도의 영역이라 하겠다.

제5단계는 ‘있는지 없는지 의심스러운 처음의 그것’[疑始]의 세상이다. 이것은 ‘있음’이 ‘없음’과, ‘없음’이 ‘있음’과 서로 뒤섞이고 교차하는 지점이다. 있는지 없는지조차 불명료하여지는 곳, 세계는 그러한 근원적 양상 속에 무화되는 것이다. 모든 있는 것들의 바탕에 놓이는 이 ‘무의 영역’은 비단 ‘처음’의 상태 속에 놓이는 것일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의 ‘근원’, 또는 ‘토대’를 이루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을 간단하게 말하자면 ‘무무’의 세계라 하겠다. ‘무무’의 세계는 어디 다른 특별한 시공 속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만물로 이루어진 현상적 세계의 깊은 내적 관계망을 이루며 총체적 시공간 속에 널리 펼쳐져 있는 것이다.17)

17) 이 점에 대해서는 나의 논문 (윤천근, 「장자철학에서 존재와 세계의 문제- 무무의 존재성과 그것의 드러남양상을 중심으로」, 동서철학연구 86호, 한국동서철학회, 2017, 51-82)을 참조 바람.

이 5단계를 장자는 ‘도에 대한 우리의 앎이 주어지게 되는 전前 과정’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니 우리가 제1단계의 ‘말과 글’로 전해진 도를 알게 되었다면, 그것을 실마리로 삼아 제5단계의 ‘그 도가 있는지 없는지 까지 의심스러운 영역’ 으로 거슬러 올라가 진실한 도의 실체와 합일되어야 함을 알려주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그것은 바로 앎으로부터 시작하여 자연적 존재영역으로 귀환하는 여정을 밟아 나가는 것이다. 1과 2의 단계가 지식 또는 인식 영역에서 도와 만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3,4,5의 단계는 존재 영역으로 깊이 걸어 들어가 자연적 존재성 또는 도와 일체가 되지 않으면 주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여우가 남곽자규에게 말하는 ‘도를 배움’ 또는 ‘도를 가르침’의 양상과 같은 문맥 위에 놓이는 것이라 하겠다. ‘도를 배운’ 여우는 ‘도를 가르치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여 준다. 그것은 ‘천하를 벗어남’- ‘만물을 벗어남’- ‘생명을 벗어남’- ‘모든 어둠을 벗어버림’- ‘나누어지지 않은 하나로 돌아감’- ‘옛날도 지금도 없는 영역으로 들어감’- ‘죽지도 살지도 않는 경지로 들어감’18) 등의 여러 단계로 말하여진다.

18) 장자 「대종사」 제10절 참조; 南伯子葵問乎女偊曰; “子之年長矣, 而色若孺者, 何也?” 曰; “吾聞道矣.” 南伯子葵曰; “道可得學邪?” 曰; “惡. 惡可? 子非其人也. 夫卜梁倚, 有聖人之才而無聖人之道, 我有聖人之道, 而無聖人之才, 吾欲以敎之, 庶幾其果爲聖人乎? 不然. 以聖人之道, 告聖人之才, 亦易矣. 吾猶守而告之, 三日而後能外天下, 已外天下矣, 吾又守之, 七日而後能外物, 已外物矣, 吾又守之, 九日而後能外生. 已外生矣, 而後能朝徹, 朝徹而後能見獨, 見獨而後能無古今, 無古今而後能入於不死不生. 殺生者不死, 生生者不生. 其爲物, 無不將也, 無不迎也, 無不毁也, 無不成也. 其名爲攖寧, 攖寧也者, 攖而後成者也.”

이 설명구조 역시 ‘모든 어둠을 벗어버림’ 전과 후의 두 단계로 나누어질 수 있다. 전 단계는 우리가 지식과 분별의 세상 속에서 갖게 된 모든 것을 벗어나는 과정이다. 이 ‘비움’의 과정을 통과하여 ‘모든 어둠을 벗어버림’의 단계에 이르게 되면 존재만이 남게 되고, 그 존재가 만들어 갖게 된 모든 것들은 비워져 버린다. 후 단계는 ‘존재’가 ‘개별성’으로부터 전체 세계의 근원적 존재성 속으로 혼입되어 들어가 세계-내-존재 양상을 갖추게 되는 과정이다. ‘나누어지지 않은 하나로 돌아감’은 공간적 전체세계와 연계되는 것이고, ‘옛날도 지금도 없는 영역으로 들어감’은 시간적 전체세계와 연계되는 것이다. ‘죽지도 살지도 않는 경지로 들어감’은 그런 세계-내-존재로의 환원을 통해 개별적 존재성이 무화됨을 의미한다. 이 모든 과정은 ‘도를 배움’, 또는 ‘도를 가르침’의 과정으로 말하여지는 것이다. 이것은 이 전 과정이 ‘도에 대한 앎’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도의 세계로 들어감’, ‘도를 구현하는 존재로 되어감’으로 말하여질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을 의미하여 준다.

4. 어디에나 있는 도, 어디에도 없는 도- 도의 존재론적 현현

도가에서 도는 ‘앎’의 영역으로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노자에서 “‘도’ 를 ‘도라고 부를 수 있다’면 ‘영원한 도가 되지 못한다’”19)고 할 때, 우리는 도가 이미 ‘앎’의 차원을 넘어서 있는 것으로 선언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 노자 도덕경, 1장; “道可道非常道.”

여기 ‘도’道, ‘가도’可道, ‘상도’常道의 세 표현 중 ‘가도’는 인식과 연관된 ‘앎의 도’ 이다. 그러나 ‘도’는 인식 이전의 ‘실재의 도’이고, ‘상도’는 그 실재의 도가 모든 세계 속에서 유전流轉하여 나가는 양상이다. ‘지금 있는 실재의 도’는 자연히 ‘무궁한 세계 속에서 유전하여 나가는 모든 도’이다. 그러나 ‘지금 있는 실재의 도’를 우리의 인식으로 붙잡아 ‘앎’으로 포장하여 갖는다면, 그 ‘실재의 도’는 그 ‘앎’ 속에 묶여 유전하는 세계, 변화하는 자연세계의 밖에 놓이게 된다. 전자는 ‘존재세계의 도’이고, 후자는 ‘앎의 영역의 도’이다. 노자에서 ‘도’는 ‘상도’라는 양상을 내포하고 있는 것인데, 이것은 장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도’는 본질성을 담고 있는 개념이고, ‘상도’는 전全 시간성, 전全 공간성에로 확장되어 있는 개념이다. ‘도’가 그대로 ‘상도’가 되는 것은 두 가지 경우가 있을 따름이다. 그것이 ‘그 자체로서 영원불변한 것’이거나, ‘존재세계가 구현하여 주는 모든 다양하고 변화하는 양상 속에 이미 담겨져 있는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경우 외에 제 3의 유형은 말할 수가 없다. 그런데 도가의 영역에서 ‘그 자체로 영원불변한 것’은 없다. ‘변화’를 배제하고 도가적 세계가 성립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는 것은 후자, ‘존재세계가 구현하여 주는 모든 다양하고 변화하는 양상 속에 이미 담겨져 있는 것’ 뿐인데, 구체적으로 구현된 모든 양상은 찰라적 존재성만을 갖는 것이므로, ‘도’이기는 하더라도 ‘상도’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도’이면서 ‘상도’가 될 수 있는 자격은 그 모든 다양하고 변화막측한 도를 구현하여 낼 수 있는 근원적 조화력, 세계 자체의 자연적 조화질서가 있을 뿐이라고 하겠다.

이 자연적 조화질서는 어떤 분별적 존재가 점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 어떤 앎을 통하여 얻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세계 자체에 속한 존재, 그리고 그 시공간적 분별이 없는 존재에게 ‘이미’ 갖추어져 있는 것일 따름이다. 도의 세계 밖에서 얻어 갖출 수 있는 것은 다만 ‘도에 대한 앎’ 뿐인데, 그것은 존재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길을 보여줄 따름이다. ‘도에 대한 앎’은 도를 갖춘 자, 도 속에 있는 자, 도를 구현하는 자의 것이 아니다. 그런 앎을 갖고 있는 동안에는 그는 도 속에 들어설 수가 없는 것이다. 앞의 인용 속에서 여우가 남백자규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바로 이것을 알려준다. 도를 구하려는 이가 분별적 지식을 다 버리고, 자연존재의 영역으로 귀환하게 되면, 모든 자연적인 것들이 다 도를 구현하고 있는 세상, 세계-내-존재로서의 자연세상에 놓이게 된다. 그가 버려야 하는 것 중에는 ‘도에 대한 앎’도 역시 포함된다. ‘도에 대한 앎’ 도 분별세계에 놓이는 것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이해利害에 대한 앎’ 같은 것과 아무 차이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에 대한 앎’을 포함하여 분별세계 속에서 얻어 갖춘 일체의 것들을 다 버리고 자연적 존재로 돌아가게 된다면, 그런 세상 속에 도와 도 아닌 것의 구분은 없게 된다. 장자가 ‘무릇 도라고 하는 것은 만물을 덮고 싣는 것이다. 아주 드넓고 큰 것이로다. 군자는 마음을 도려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20)라고 말할 때, ‘도려내야 하는 마음’은 ‘분별심’, 자아적 존재가 만들어 가진 마음이다.

20) 장자 「天地」 제2절 참조; “夫道, 覆載萬物者也. 洋洋乎, 大哉. 君子不可以, 不刳心焉.” 李勉은 君子不可以不刳心焉을 養道君子不可以不大其心也(李勉, 莊子總論及分篇評注, 臺北, 臺灣商務印書館, 민국62년, 264쪽)라 해석하고, 陳鼓應은 君子不可以不棄除成心去效法(陳鼓應, 莊子, 조국화責任編輯, 白話先秦諸子, 合肥, 黃山書社, 1993, 161쪽)이라 번역하며, 寧志新 주편의 南華眞經에서도 君子不可以不砲技成見去效法(寧志新 主編, 南華眞經, 道敎十三經上, 石家庄市, 河北人民出版社, 1995, 161-162쪽)이라 한다. 이것은 郭象에서부터 시작된 讀法이라 할 수 있다. 곽상은 有心則累其自然故當刳而去之 (焦竤, 莊子翼, 「天地」郭註부분, 臺北, 廣文書局, 민국68, 107쪽)라 주석하였다. 다 같이 여기의 心을 自然心의 반대편에 위치시켜 놓는 입장이라 하겠다.

분별심을 버린 존재는 자연심으로 돌아가게 되고, 자연적 존재성을 구현하게 된다. 자연적 존재성의 구현과 ‘도의 현현’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도는 만물을 덮고 싣는 것’이라고 할 때, ‘만물’은 ‘모든 자연적 존재’이다. ‘도’가 모든 자연적 존재를 ‘덮고’ 또 ‘싣는다’는 것은 양자 사이에 간격이 있을 수 없는 일원적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세계가 도에 의해 있게 되고[덮음], 또 도가 자연세계를 통해 있게 됨[실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도와 자연세계의 일원적 관계는 ‘존재 속에 이미 깃들어 있는 도’, ‘세계 자체 속에 이미 현현되어 있는 도’의 영역을 열어 준다. 물론 이것은 모든 존재에게 허용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자연적 존재에게 ‘이미’ 부여되어 있는 것이다. 인위적 존재라 한다면, 그가 아무리 커다란 깨달음을 자기 속에 갖추고 있는 경우라 하더라도, 도와 합일되어 있는 존재성이라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를테면 유학의 성인은 자기 안에 천지의 이치를 담고 있다 하더라도 세계 자체에 속할 수는 없는 ‘대아’大我일 따름이므로, 도가적 도와 합일되어 있는 존재성이라 할 수는 없다. 반면에 자의식을 갖지 않은 모든 것, 분별과 경계가 무화된 자연세상 속에 이미 놓여 져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돌덩이 같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대로 도와 합일되어 있는 존재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똥 속에도 있는 도’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측면을 말하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동곽자가 장자에게 물었다. “이른바 도라고 하는 것은 어디에 있습니까?” 장자가 말하였다. “없는 곳이 없습니다.” 동곽자가 말하였다. “정해서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장자가 말하였다. “땅강아지나 개미에게 있습니다.” “어찌 그렇게 낮은 것에 있다는 것입니까?” “돌피와 피에 있습니다.” “어찌 그렇게 더욱 낮은 것에 있다는 것입니까?” “기왓장과 벽돌에 있습니다.” “어찌 그렇게 심하게 낮은 것에 있다는 것입니까?” “똥, 오줌 속에 있습니다.” 동곽자는 응대하지 않았다. 장자가 말하였다. “선생의 질문은 질박한 데까지 이르지는 못하였습니다. 바로 짐승을 잡으려면 시정을 살피는 사람에게 발자국과 소리를 물어야 하는데, 매양 깊은 문제로 내려갈수록 더욱 비유 삼아 답하는 것을 들어야 하니, 그대는 오직 반드시 이러할 것이라는 생각을 버려야만 어떤 물건도 도망가 버리는 법이 없게 되는 법입니다. 지극한 도리는 이와 같은 것이고, 위대한 말씀도 이와 같은 것이지요. 죽 둘러있다, 널리 펼쳐져 있다, 모두 포함한다는 세 가지 말은 서로 다른 글자이지만 내용을 같이 하는 것이니, 그 가리키는 것은 하나입니다. 일찍이 아무것도 없는 집에서 서로 더불어 노닐면 같이 합하여 논란해서 다하는 바가 없고, 일찍이 서로 더불어 아무 하는 일이 없으면 담백하고 고요하면서 조용하고 맑고 조화롭고 한가한 것입니다. 나의 뜻을 텅 비워 나아가면 그 지극한 데에 이르는 것을 모를 수 없는 법입니다. 가고 오지만 그 멈추는 바를 알지 못합니다. 나는 이미 가고 왔지만, 그 끝나는 바를 알지 못하지요. 성문 앞에서 방황하고 있으면 큰 지혜가 들어오는데, 이것이 궁진하여 지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모든 사물은 사물과 더불어서 경계가 없는데, 사물이 경계를 갖고 있다는 것은 이른바 사물이 경계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경계 없는 것을 경계로 삼는 것은 경계가 경계로 되지 않는 것이지요. 가득 차고, 텅 비고, 쇠약해지고, 죽는다는 것으로 말하면, 저 가득 차고 텅 빈다고 하는 것이 가득 차는 것이 아니고 텅 비는 것이 아니며, 저 쇠약해지고 죽는다는 것이 쇠약해지고 죽는 것이 아니며, 저 근본이 되고 지말이 된다는 것이 근본이 되고 지말이 되는 것이 아니고, 저 쌓이고 흩어진다는 것이 쌓이고 흩어지는 것이 아니게 되는 것이지요.”21)

21) 장자 「知北遊」 제6절; 東郭子問於莊子曰; “所謂道, 惡乎在?” 莊子曰; “無所不在.” 東郭子曰; “期而後可.” 莊子曰; “在螻蟻.” 曰; “何其下邪?” 曰; “在稊稗.” 曰; “何其愈下邪?” 曰; “在瓦甓.” 曰; “何其愈甚邪?” 曰; “在屎溺.” 東郭子不應. 莊子曰; “夫子之問也, 固不及質. 正獲之問於監市履狶也, 每下愈況, 汝唯莫必, 無乎逃物. 至道若是, 大言亦然. 周徧 咸三者, 異名同實, 其指一也. 嘗相與游乎無何有之宮, 同合而論, 無所終窮乎, 嘗相與無爲乎, 澹而靜乎, 漠而淸乎, 調而閒乎. 寥已吾志, 無往焉而不知其所至. 去而來, 而不知其所止. 吾已往來焉, 而不知其所終. 彷徨乎馮閎, 大知入焉, 而不知其所窮. 物物者, 與物無際, 而物有際者, 所謂物際者也. 不際之際, 際之不際者也. 謂盈虛衰殺, 彼爲盈虛非盈虛, 彼爲衰殺非衰殺, 彼爲本末非本末, 彼爲積散非積散也.”

‘도는 똥 속에도 있다’는 것은 ‘도는 이 세상 모든 것 속에 이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의 인용문 속에서 ‘죽 둘러있다, 널리 펼쳐 져 있다, 모두 포함한다는 세 가지 말’은 세계 전체를 지시하는 말이다. 자연세계 전체를 하나의 영역으로 하는 것이다. ‘도’가 편재되어 있는 자연세계 전체 속에 ‘도가 있는 곳을 알려고 노력하는’ 동곽자와 같은 존재는 포함되지 않는다. 이런 질문을 하고 있는 동곽자는 자연세계 속에 이미 있는 ‘일물’로서의 동곽자가 아니다. 동곽자는 이 질문 속에서 스스로 도가 있는 세상 밖으로 자리를 옮겨 위치하게 되는 것이다. 동곽자는 ‘이미’ 전체세계 속의 ‘일물’로 있는 자이지만, 그의 그러한 자연적 존재성은 그의 의식에 의해 차단되고 배제된다. 그리하여 그는 그의 의식공간 속의 인위적 존재성에 의하여 주도되는 존재로 변이되어 있는 것이다. 그의 의식이 한정하여 주는 인위적 존재성은 ‘탈 세계적 자아 존재’의 양상이다. ‘죽 둘러있다, 널리 펼쳐져 있다, 모두 포함한다는 세 가지’는 그의 의식공간에는 들어설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의식은 이미 ‘그’ 라는 ‘일물’을 ‘세계의 타자’로서 ‘도려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의식공간 속으로 ‘죽 둘러있다, 널리 펼쳐져 있다, 모두 포함 한다’는 것은 들어설 길이 없게 된 것이다. 그는 ‘아무 것도 없는 집에서 서로 더불어 노니는 것’, ‘서로 더불어 아무 하는 일이 없는 것’, ‘나의 뜻을 텅 비우는 것’을 잃어버린 자이다. 그는 자아의 의식 공간 속에 한정되어서, 자아의 의식을 바탕으로 모든 세계와 단절되어 있으면서, 자아의 의식이 목적으로 삼은 ‘도’를 구하는 자로 자기 존재를 특수화 시켜 놓은 셈이다. 그가 구하는 도는 ‘그에게 없는 도’이며, ‘그에게 없는 도’는 당연히 ‘똥 속에도 없는 도’가 된다. ‘그에게 없는 도’라는 것은 ‘어떤 특별하고 중요한 것’이 되며, 그가 ‘도’에 대해 갖는 의식의 몰입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에게 없는 도’는 ‘세상의 어디에도 있을 수 없는 어떤 엄청난 도’가 될 수밖에 없다. ‘어떤 특별한 도’를 구하고 있는 동곽자는 ‘무위의 세계’ 속에서 돌출하여 ‘유위의 목적을 갖게 된 어떤 특별한 존재’이다. 그 자신의 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동곽자는 자신을 세계로부터 구분하여 내었으며, 자신을 ‘도의 타자’로 세워 놓았다. 그는 이미 경계 속에 놓이는 존재이다. 그 자신의 자연적 영토는 그 자신의 의식에 의하여 ‘돌려 세워’져 버렸으며, 그 자신의 자연적 존재질서는 교란되고, 왜곡되어, 그 자신이 자연스럽게 구현하여 낼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그는 ‘개별’ 속에 가두어진 존재로 변이되어, 스스로 ‘자기 존재성’과 ‘세계 존재성’ 사이에 ‘경계’의 장벽을 높이 둘러쳐 놓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의 ‘존재론적 장벽’ 속에는 ‘똥’도 그 자체로서 들어설 수 없고, ‘도’도 그 자체로서 놓여 질 수 없다. 그는 이미 ‘경계의 장벽’에 사로잡힌 존재성이기 때문에, 그 존재영역 속에서 ‘똥’은 너무 더럽고 낮은 것이라는 경계영역을 가질 수밖에 없고 ‘도’는 너무 아름답고 큰 것이라는 경계영역을 가질 수밖에 없으니, ‘똥’도 ‘도’도 그 경계 안에 스스로의 영토를 갖출 수가 없는 것이다. 그 ‘경계’ 안에 나름의 영토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경계’를 만들어낸 자, ‘유위의 자아’가 있을 따름이다. ‘유위의 자아’는 ‘도를 선망하는 유위의 의식과 행위’를 드러낼 수는 있으나 그 ‘도’ 를 자기 속에 갖추어낼 수는 없다. 그런 ‘유위의 자아 영역’안에서 ‘경계의 주인이 되어 있는 존재’는 ‘영허쇠살’盈虛衰殺의 경계, ‘똥과 도 사이의 경계’를 만들어 낼 수 있을 뿐, ‘영허쇠살이 바로 영허쇠살’이 아니며, ‘똥이 도이고 도가 바로 똥’인 무경계의 존재성을 갖추어낼 수는 없다. 이런 존재의 영역에서는 ‘어디에도 없는 도’를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런 존재가 크고 고원한 것으로 전제하는 ‘도’도 그의 ‘유위하 는 의식’이 만들어낸 ‘어떤 없는 도’인 것이다. 이 ‘어떤 없는 도’를 ‘유위 하는 의식’은 선망할 수는 있어도 획득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유위 하는 의식’의 세상 속에 도는 ‘어디에도 없는 것’으로 선반 위에 높이 올려 져 있을 따름이다. ‘유위 하는 의식’은 절절히 ‘어떤 없는 도’를 자신 속에 받아들이기를 선망하지만, 그의 소망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유위 하는 의식’이 ‘도에 대한 절절한 추구’를 통해서 얻어 갖출 수 있는 최선의 것은 절망과 좌절, 선망하는 도가 결코 그에게 주어질 수 없으리라는 암담함과의 조우, 그리고 애초에 그의 전망 자체가 그릇된 구조 속에 놓여져 있는 것이라는 깊은 깨달음이다. 그것은 소를 해체하는 기술을 열심히 닦던 포정에게 주어진 깨달음이고, 바퀴 깎는 기술을 자식에게 전해주기 위해 무한히 노력하였던 장인 편扁에게 주어진 깨달음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양생의 도를 보았던 문혜군에게 찾아든 깨달음이고, 바퀴장인에게서 책 속의 말씀이 성인의 찌꺼기임을 배웠던 제 환공의 깨달음이기도 하다. 이러한 깨달음은 ‘도’를 목적으로 추구하는 ‘유위의 세상’ ‘어디에도 도가 없음’을 절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영역에서의 추구는 ‘도’로 들어가는 ‘모든 길’이 차단되어 있고, 자신이 소망하고 선망하였던 ‘도’가 사실은 ‘도의 껍데기’ 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받아들이게 하는 토대로서 기능하게 된다. 이 절절한 깨달음은, 그것이 진실로 절절한 것이라면, ‘유위’와 ‘무위’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힘을 갖추게 된다. ‘도를 추구하는 나’와 ‘나의 밖에 소망스런 타자로서 놓이는 도’의 구분이 무너지는 것은 소리 소문도 없이 진행된다. ‘유위의 세상’에 ‘도를 향해 나아가는 길이 없음’을 절절하게 자각하는 순간 ‘유위의 세상’은 힘을 잃고, ‘유위의 세상의 주인인 나’의 권위도 사라진다. 그것은 ‘자아’가 그 본질적 바탕인 ‘존재’ 속으로 귀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위적 존재성인 자아가 무너지면 존재는 그저 자연적 존재성을 현현하는 것으로 세계 속에 있게 될 따름이다. 그런 자연적 존재에게는 자기 자신도 주목되지 않고, 도도 선망의 대상으로 ‘어디 따로’ 놓이지 않는다. 모든 있는 것들, 모든 현현된 것들이 다 그대로 ‘도’ 인 세상이 펼쳐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자연세상 속에 도는 어디에나 있고, 또 어디에도 없다. 그런 자연 세상의 모든 ‘있는 것’들은 ‘무위인 도의 현현’ 양상이므로, ‘똥조차도 그대로 도’이니, 그것은 바로 ‘어디에나 있는 도’라 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런 자연 세상의 모든 ‘있는 것’이 다 ‘무위인 도의 현현’양상이므로, 특별히 주목되는 도가 따로 있을 수 없고, 특별히 어떤 것이 도임을 주시하는 자도 있을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어디에도 없는 도’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

5. 정신주의와 물질주의를 넘어서서- 도의 존재론적 지위

도가의 도를 바라보는 시선은 다양한 갈래를 드러낸다. 그것을 대별하여 보자면, 정신주의와 물질주의의 둘로 요약될 수 있다. 곽말약은 ‘우주만물의 무한한 양상을 이루어 내는 것은 감관으로 포착되지 않고 시공간적인 구속을 받지 않는 도라는 본체인데, 이 도에 의거하여 모든 것은 있게 되고, 이 도는 자기 자신에 의거하여 있게 되는 것이라고 전제하고, 이 도를 학습한 사람이 대종사’라고 말한다.22)

22) 郭沫若, 十批判書, 北京, 科學出版社, 1956, 194-197.

여기 곽말약의 입장에서 우리가 주목하여 볼 필요가 있는 것은 그가 ‘도의 본체’를 전제하고 있으며, 이 ‘도의 본체가 우주만물의 무한한 양상을 있게 하는 조물자적 지위를 갖고 있음을 인정’한다는 점이다. 현상적 세계와 도의 본체를 대립적으로 보면서도 그 대립양상이 어떻게 상호 융합할 수 있는가, 양자 간의 연관은 어떠한가에 대한 설명은 부여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입론에 의하면 도와 현상으로 이루어진 세계는 서로 구분되는 양자가 되며, ‘도의 본체’는 현상세계 이전, 또는 현상세계의 근원에 놓이는 어떤 특별한 것이 된다. 그리고 대종사는 그런 어떤 특별한 것을 학습하여 갖추어낸 어떤 특별한 인간이 된다. 학습을 통하여 어떤 특별한 도의 본체를 체득한 어떤 특별한 인간은, 학습의 주체가 마음 또는 정신이라 할 수 있는 것이므로 결국 특별히 크거나 높은 차원의 인격으로 상승되어 있는 정신적 존재라 하겠다. 그것은 도의 본체라는 것 역시 정신의 어떤 경지와 연관된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게 한다. 관봉은 그의 어떤 글에서 ‘노자철학은 천지만물의 앞에 하나의 절대적 정신본체인 도를 둔다’23)고 말하고, 그러한 ‘노자의 입장은 객관유심주의라 볼 수 있는데, 장자는 노자의 입장을 계승하여 주관유심주의로 전환시켜 내었다’고 설명한다.24)

23) 關峰, 莊子內篇譯解和批判, 북경, 중화서국, 1961, 35쪽.

24) 위의 책, 2-3쪽. 모종삼이 “노자의 도는 객관성, 실체성, 실현성이 있는 것이니 적어도 그러한 태도를 갖추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장자는 이 세 가지를 다 없애버리고 순전히 주관의 경계를 갖추어내었다”(牟宗三, 才性與玄理, 臺北, 臺灣學生書局, 민국69년, 177쪽)고 말할 때에도 이러한 입장이 드러나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입론은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유심주의는 이미 주관인데, 어떻게 그것이 주관유심주의와 객관유심주의로 나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다. 무엇보다도 관봉의 입장은 절대적 정신이 어떻게 천지만물을 생성하여 내며, 그러한 절대정신을 ‘객관적으로든 주관적으로든’ 어떻게 ‘나’ 속에 수렴시켜 낼 수 있는가에 대한 설명을 하기 어렵게 만들어 준다.

왕명도 장자가 ’도통위일‘道通爲一의 세계관을 형성함으로써 객관유심주의에서 주관유심주의로 전환하는데,

그 사이에서 상대주의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본다.25)

25) 王明, 道家和道敎思想硏究, 重慶, 中國社會科學出版社, 1984, 41쪽.

풍우란은 관봉의 ‘도가 바로 절대정신’이라는 입장에 반론을 제기한다. 장자가 ‘성인과 우주정신의 합일’을 선포한다고 하여 주관유심주의라 말할 수는 없다고도 말한다. ‘도는 전체적인 것[全]’이라는 것이다.26)

26) 풍우란, 「三論莊子」, 哲學硏究編輯部編, 莊子哲學論集, 1961, 152쪽.

그는 장자의 ‘전’은 ‘일’一, 또는 ‘혼돈’混沌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실재하는 통일적, 전체적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분별을 종합한 논리적 구조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풍우란은 장자가 ‘무’에 근본을 두고 ‘유’를 ‘무’에 필연적으로 의존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중국 유심주의의 전통 속에 위치한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풍우란은 장자가 주관유심주의자라는 관봉의 평가를 받아들이기도 한다. 관봉과 설명방식을 달리할 따름인 것이다. “그는 그의 사상 속의 전全을 제1위第一位로 하고 사실상의 편偏을 제2위 第二位로 삼는다. 이것은 바로 그의 주관유심주의적인 특별한 표현이다.”27) 풍우란의 설명이다.

27) 앞의 책, 앞의 논문, 154쪽. 28) 陳紅映, 「莊子逍遙遊探微」, 莊子硏究, 상해, 복단대학, 1986, 410-411쪽.

나는 ‘전’, ‘일’, ‘혼돈’의 도를 말하는 풍우란의 입장이 ‘절대정신’을 전제로 하는 관봉의 견해보다 훨씬 장자의 ‘도’에 접근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풍우란이 장자를 여전히 유심주의자로 규정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장자에게 있어서 유물과 유심은 명확하게 구별되어 말하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진홍앙도 관봉이 장자철학을 자의적으로 왜곡하여 ‘철저한 주관유심주의라는 모자’를 씌우는 잘못을 범하였다고 비판한다.28)

28) 陳紅映, 「莊子逍遙遊探微」, 莊子硏究, 상해, 복단대학, 1986, 410-411쪽.

관봉이 장자철학을 주관유심주의라 규정하는 것은 장자의 도를 정신주의적 입장을 통해 이해하는 것과 상관되어 있는 문제이다. 풍우란은 관봉 식의 절대정신을 상정하는 주관유심주의는 부정하지만 ‘허무’虛無, 또는 ‘무무’無無인 ‘전’ 全을 논리적으로 끌어내어 ‘도’의 이름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주관유심주의자라는 평가를 한다. 진고응은 도를 ‘실존적인 것, 자존적인 것, 만물의 근원이 되는 것, 시공을 초월하는 것’ 등으로 정리하여 준다. 그러나 이러한 속성의 나열은 그것만으로는 도에 대한 어떤 구상적인 정보도 우리에게 전하여 주지 못한다. 진고응이 도의 실존성에 대한 이런 속성들을 적시하기 전에 전제하여 두고 있는 것이 바탕에 겹쳐져 있어야 이런 주장들은 내용을 갖출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노자와 장자는 다 같이 세계가 상제에 의해 창조된 것이라는 점을 부정한다. 그들은 세계는 무목적성, 무의식성, 비인격화, 비주재적 도에 의해 생겨난다고 본다. 천지만물의 유래에 대해 장자는 기본적으로 자연유출설의 입장을 취한다.”29)

29) 陳鼓應, 老莊新論, 上海古籍出版社, 1992, 170쪽.

여기서 핵심이 되는 것은 ‘자연유출설’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세계가 자연히 스스로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 속에 도가 깃들어 있다는 것이 진고응이 생각하는 장자철학의 구조이다. 전체로서의 자연세계가 갖는 권능 또는 기능을 여러 갈래로 특화시켜 도의 개념적 의미로 부여하고 있는 것이 ‘실존적인 것, 자존적인 것, 만물의 근원이 되는 것, 시공을 초월하는 것, 무목적성, 무의식성, 비인격성, 비주재성’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도에 대한 설명은 다양하다. 일반적 차원에서도 그러하고, 장자의 도에 한정하여서도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 중에서도 중심에 놓여야 하는 것은 도가 인간의 사유, 인식, 행위에 걸려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이미 속하여 있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 자연은 인위적으로 갖추어낸 것이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있는 것이다. 장자의 세계는 일원적인 것이다. 그에게 허용되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 외에는 따로 없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는 ‘기-음양-만물’로 뒤엉켜 있는 한 덩어리의 세상이다. 이 세상은 ‘기-음양-만물’사이의 복잡한 연관 구조에 의하여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 변화력은 바로 조화력이며, 세계 밖의 어떤 타자가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속의 자연적 구조 자체가 행사한다. ‘기-음양-만물’은 자연세계 자체이다. ‘도’는 ‘그 자체로서의 자연세계’에 연관되어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서의 자연세계’가 바로 도인 것은 아니다.30)

30) 엄영봉은 ‘도는 무형의 物’이고 자연은 ‘유형의 物’이라고 말한다. 도와 만물은 구별되는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는 ‘萬物爲道所生, 而道爲萬物所自生’이라고 말한다. (嚴靈峯, 道家四子新編, 대북, 臺灣商務印書館, 민국66년, 17쪽.) 자연은 ‘기-음양-만물’의 시공간적 세계망이고, 도는 그 망 속에서 형성되어 구현되는 조화력이다. 이 조화력은 모든 시공간적 흐름, 모든 만물의 질서로 흩어져서 다양한 양상으로 구현된다. 이 조화력에 관해서는 ‘윤천근, 「장자철학에서 중부부가 갖는 존재론적 창진성의 문제」, 동서철학연구89호, 한국동서철학회, 2018, 5-36쪽’을 참조 바람.

주역은 ‘한번 음이 되었다가 한번 양이 되었다가 하는 것이 도’31)라고 말한다.

31) 周易, 「繫辭」上傳; “一陰一陽之謂道.”

음양이 도인 것이 아니라, ‘한번 음이 되었다 한번 양이 되었다 하는 질서’가 도인 것이다. 주자는 이것을 ‘음으로 양으로 번갈아가며 도는 것은 기이고, 그 리理는 바로 도이다’32)라고 주석한다.

32) 朱熹, 易本義, 「繫辭」上傳; “一陰一陽之謂道.” 부분 주석. (世界書局印行, 58쪽)

‘기-음양-만물’의 자연세계는 스스로 있는 것이다. 그것에 앞서서 ‘도의 본체’가 선재한다고 하는 것은 이원론적 사고방식이다. 여기 주자의 경우처럼 ‘리’ 에 ‘도’의 의미를 부여한다면, 주자철학의 ‘이철학적 구조’에 입각하여 ‘리’ 또는 ‘도’는 ‘기’ 또는 ‘세계’보다 선재하는 것이 된다. 주자가 아무리 ‘불상리불상잡’ 의 미묘한 관계 속에 ‘리와 기’를 가져다 놓는다 하더라도, ‘리의 부림 없이 기가 스스로 작용하는 능력’은 적어도 주자철학에서는 부여되어 있지 않으므로 ‘리’ 또는 ‘도’의 선재성은 폐기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곽말약이 ‘도의 본체’를 우선적으로 이야기하고, 관봉이 ‘절대정신인 도’를 세계에 우선하는 것으로 가져다 놓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진고응이 ‘도’를 ‘자연유출’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부분은 이런 노선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진고응의 도에 대한 관점은 그리 명료하지 않은데, 그가 “결론적으로 말해서, 장자 본인이 말하는 도(내편 기준)는 경계의 의미를 갖는다. 도는 일종의 경계境界인데, 도의 경계는 인생의 최고 경계이다”33)라고 정리하여 주는 부분에서는 자연유출과는 다른 일종의 ’정신경지‘를 뜻하는 말로 특화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33) 陳鼓應, 「莊子論道」, (張松如 등 공저, 老莊論集, 齊南, 齊魯書社, 1987, 113쪽) 여기의 境界는 우리말로는 境地로 옮겨 놓는 것이 보다 적절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아무래도 진고응의 장자이해가 그 자연유출과 정신경지 사이에서 일정한 혼란을 겪고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이러한 혼란은 많은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것이기도 하다. “--- 장자의 중요하고 명확한 논술들을 볼 때, 도에는 기본적으로 두 개의 의미가 있다. 하나는 세계의 근원을 가리키고, 또 하나는 최고의 인식을 가리킨다. 앞의 것은 도의 실체적인 의미이니 자연관 중의 도이고, 뒤의 것은 인식론적 의미이니, 인식론 중의 도이다. 이 두 가지 의미는 일치하는 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동일한 것은 아니다. 이 두 가지 의미가 뒤섞여 있어서 장자를 논의할 때 혼란이 발생한다.”34)

34) 劉笑敢 지음, 최진석 옮김, 장자철학, 서울, 소나무, 1990, 63쪽.

이것은 대부분의 장자 해석이 갖는 혼란양상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 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장자철학 자체가 본래적으로 갖는 혼란양상으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한 문제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여기의 화자 자신이 가지고 있는 혼란이기도 하다. 장자는 체계적으로 정립되지 않은 다양하고 무수한 사유의 묶음이다. 철학적 체계는 장자 속에 완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장자를 해석하고 있는 우리가 완성시켜 내야 하는 것이다. 장자의 도가 갖는 정합적인 개념구조도 당연히 우리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도에 대한 개념적 혼란은 우리가 바라보는 장자철학의 도에 대한 관점이 흔들리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일 따름이다. 장자의 도는 무엇보다도 존재론적인 것이다. 인식의 관점을 통하더라도, 행위의 관점을 통하더라도, 결국 존재의 영역에까지 들어가지 않고서는 장자의 도가 갖는 개념적 지형을 제대로 포착하여 낼 수 없는 것이다. 포정의 경우, 초년의 그는 행위론적 차원에서 뛰어난 기능을 닦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러나 그는 결국 행위의 숙련, 행위의 단련을 통하여서는 최고 수준의 행위, ‘도의 구현’에 이를 수 없음을 알게 된다. 결국 그는 ‘자신의 기술의 숙련’을 넘어서서 존재세계로의 귀환을 선택한다. 자연적 존재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통하여 그는 ‘소를 해체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능력’, ‘행위의 도’를 구현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그 자신이 행위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소가 일체로 포함되어 있는 자연세계의 스스로 그러한 질서가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행위의 숙련을 통하여 도를 구현할 수 없다는 점은 지식과 배움을 통해서 도를 획득할 수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책을 통해서도, 성인의 말씀을 통해서도, 어떤 배움을 통하여서도 도는 획득할 수 없다. 도는 어떤 내용을 구체적으로 갖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는 완성된 모습으로 어디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세계의 처음에도 완성된 도는 없다. 세계의 끝에도 마찬가지이다. 성인의 지식에도 도는 완성된 모습으로 놓여 질 수 없다. 성인의 행위에도 도는 어떤 정해진 내용으로 담겨지지 않는다. 장자 속에 대아를 이룬 위대한 정신은 따로 없다. 장자의 대종사, ‘위대한 스승’은 어떤 초월적 정신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 아니다. 혜철嵇哲은 대종사 속의 ‘영녕’攖寧,35) ‘얽힌대로 평안함’에 대해 ‘도의 작용에 이르러 자연과 연계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35) 장자 「대종사」; 제10절; “其爲物, 無不將也, 無不迎也, 無不毁也, 無不成也. 其名爲攖寧, 攖寧也者, 攖而後成者也.”

이것을 다시 장자의 말을 빌려 이야기하여 보면, ‘천하를 천하 속에 숨긴 것’36)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36) 장자 「대종사」; 제10절.

전체 자연 속 존재로 돌아감, 그것이 장자가 지식론, 인식론을 통과하여 존재론 속으로 귀일하는 방식이다. 자연스러움에 맡겨 행하는 것, 그것이 장자의 ‘대종사’가 도를 구현하는 방식이다. 자연세계 속으로 돌아가 ‘세계-내-존재’의 자연성을 갖춘 자는 ‘천하를 천하 속에 감춘 자’이다. 그런 존재에 이르면 ‘주관과 객관의 구분은 무의미’37)하여진다.

37) Chang Chung-yuan, Creativity and Taoism, 뉴욕, HARPER COLOPHON BOOKS, 1970, 19쪽.

도에 대한 앎은 이런 본질적 세계, 세계-내-존재로 들어가는 길을 연다. 그리고 한 사람의 위대한 인간으로 어떤 고상한 행위를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내-존재의 자아 속으로 들어온 전체 자연세계가 이끄는 대로 맡기게 된다. 장자는 ‘지인무기’至人無己38)라 하였다. 장자적 지인, 장자 속 대종사 같은 최고인격은 그 ‘무기’의 존재성으로 인하여 전체 자연세계 속으로 귀환하게 되는 것이다.

38) 장자 「소요유」; 제11절.

도는 전제 자연세계가 구현하여 내는 스스로 그러한 흐름, 어떤 자연적인 질서이다. 그것은 존재론적 차원에서 실체성을 가지고 선재하는 것이 아니다.39)

39) 동광벽이 “우주의 본원으로서 도는 형이상학적인 실존자이다. 실존적 의미의 도와 비교하여 볼 때, 질서와 법칙으로서의 도는 진실로 존재하는 그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현상계에서 작용하면서 인간행위의 준칙이 된다. 질서와 법칙으로서의 도는 형이상학적인 道體가 아니라, 형이하학적인 道用이다”(董光璧 지음, 이석명 옮김, 도가를 찾아가는 과학자들, 서울, 예문서원, 1994, 100쪽)라고 말 할 때, 그는 도체와 도용을 구별하여 보는데, 道體가 갖는 실존성은 논리적으로 구성될 수는 있으나 실제로 선재하는 것으로 말하기는 어려운 노릇이다. 나는 실재하는 도는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질서와 법칙으로서의 도’라고 본다. 그런 무한히 변용하는 도의 질서가 묶여 있는 실 덩어리로부터 풀려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전체 자연세계의 무한한 자기변용을 통하여 무수하게 다양한 질서와 법칙이 흘러나오는 것이며, 그런 모든 질서와 법칙을 논리적으로 묶어서 ‘도체’를 ‘형이상학적 실존자’로 구성하여 낼 수는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시공간적 세계 속에 ‘도’의 완성된 양상은 어디에도 없다. 있는 것은 다만 ‘기-음양-만물’로 이루어진 현상적인 세계뿐이다. 그러나 그 ‘기-음양-만물’은 끊임없이 상호 연관된 망을 바꾸어 나간다.40)

40) 이종성은 ‘장자에게서 기운은 도가 개별화 되는 기초자료’라고 말한다. (이종성, 맨얼굴의 장자, 서울, 동과 서, 2017, 151쪽.) 자료가 없이는 실재와 연결되어 도가 드러날 방법도 없을 것이다. 모든 도는 개별적 질서와 흐름으로만 존재한다. 그것의 총체적 실재가 어디 있다고 보는 것은 논리적인 설명구조일 따름이다. 이재권이 ‘도는 궁극적 존재’(이재권, 도가철학의 현대적 해석, 대전, 문경출판사, 1995, 19쪽)라고 말할 때에도 궁극적 실재를 말하는 것이라고 하기 보다는 논리적으로 궁극적 의미를 갖는 것이라는 표현일 것이다.

그 관계망의 변경은 세계 속에서 움직이는 조화력을 이끌어내고, 작용하게 한다. 안과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요동, 모든 변화는 안의 조화력과 밖의 현상적 구현양상이 빈틈없이 일치되는 상호성을 갖추고 자연스레 전개되어 나간다. 이 조화력과 변화질서가 바로 장자의 존재론적 도이다. 그것은 ‘기-음양-만물’이 하나로 뒤엉켜 있는 세계-내-존재양상의 통일적 세계 속에서 움직이는 모든 작용력, 구현력이다. ‘기-음양-만물’이 하나로 뒤엉켜 있는 세계-내-존재양상의 통일적 세계 속에는 ‘대종사’도 포함되고, ‘똥’도 포함된다. 자아라는 ‘유위의 행위’를 하지 않는 모든 자연적 존재는 다 이 세계를 구성하는 부분이 된다. 그 부분 속에 전체가 깃들고, 전체 속에 부분이 포함되는 장자의 이 존재론적 세계는 그대로 어디에서나 도가 자연스럽게 구현되는 영역이 되는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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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요약>

‘도’는 도가 뿐만 아니라 중국사상 전반에 걸쳐서 중요한 개념이다. 도가사상이나 유 가사상의 경우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중국사상은 완벽하게 논리적 설명구조를 갖 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모아지기 어려운 다양한 주장과 언행으로 이루어져 있 는 것이기 때문에, 개념적 정합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중심을 어디에 가져다 놓느냐 하 는 것이 중요하다. 도 개념의 적절한 이해를 위해서도 이 점은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유가와 도가가 전제하고 있는 도 개념의 중심영역은 서로 다르다고 생각한다. 도 가의 도는 무엇보다도 존재론적인 것인데 반하여 유가의 도는 무엇보다도 행위론적인 것이라고 보는 것이 나의 입장이다. 지식론, 심성론의 과정을 거쳐 성인의 행위의 도 를 이루려는 것이 유가의 목표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유가는 인간, 대아로서의 위 대한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도가의 도는 무엇보다도 존재론적인 것이다. 도 가는 세계를 둘로 나누어 이해한다. 도가 구현되는 세상, 도가 구현되지 않는 세상, 무 위의 세상, 유위의 세상으로 나누는 것이다. 유위의 세상은 인간의 세상이다. 무위의 세상은 자연의 세상이다. 유위의 세상은 도를 소망하는 자, 도를 숭상하는 자, 도를 배 우려는 자, 도를 지식하는 자, 도를 구현하려는 자 등이 놓이는 영역이다. 이런 영역 속 에 유가의 성인도 놓여진다. 장자의 대종사가 만약 스스로의 큰 도를 이루기 위해 노 력하는 자이고, 스스로의 큰 도를 자랑삼는 자라면, 그런 대종사도 이 영역의 시민일 따름이라 하겠다. 유위의 영역에서 도를 알고, 선망하고, 추구하는 것이 갖는 의미는 결국 자신이 도의 세상 속에 놓여있지 않다는 것을 자각하게 만들어 주는 기능으로 충 분하다. 유위의 세상 속에서 그가 선망하는 도의 한계와 본질을 절절하게 자각한 존재는 그의 모든 지식과 의욕을 버리고, 자연존재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된다. 그는 유위 의 도를 가지고 이러한 ‘존재론적 전위’를 이루어 내는 것이 아니라 유위의 도를 버리 고 무위의 도의 세상 속으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유위의 세계 속에는 도가 없다. 도 에 대한 지식, 소망, 의욕이 있을 뿐이다. 유위의 존재가 ‘존재론적 전위’를 이루어 무 위의 존재로 환원되었을 때, 무위의 세계 속에도 도는 없다. ‘기-음양-만물’이 한 덩어 리의 총체적 ‘존재의 망’ 속에 놓이는 무위의 자연 존재의 세계에서는 ‘똥 속에도 도가 있는’ 경지가 펼쳐지게 되므로, 특별히 도에 주목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제어: 도, 성인 또는 대종사, 존재론적 전위, 유위의 존재, 무위의 존재, 총체적 존 재의 망

[Abstract]

Ontological status of ‘Tao’ in ‘Zang-Tzu’s philosophy

Youn, Choun-Guen(Andong Univ.)

The Tao is an important concept throughout the entire Chinese history of philosophy as well as in Taoism, the same can be said for for Confucianism. Chinese thought is not equipped with a structure of perfectly logical explanation, it is made up of words and actions with various arguments that are difficult to see as one in order to make conceptual consistency for the legitimate candidates that are important to put the at the center. This also goes for the proper understanding of the concept of Tao which should not be overlooked. I think that the meaning of Tao in Taoism and Confucianism have different centers of their concepts. The Tao of Taoism is more ontological, while in the case of Confucianism it has more features as a theory of action. In Confucianism, the theory of knowledge and the theory of mind will be based toward the act of the ‘great human’ following the Tao. In that point, Confucianism couldn't get from the human and the great man that which significantly expanded the human sense of self. The Tao of Taoism is concentrated on the ontology. Taoism split the world into two understandings: One is a world where the Tao is implemented as a whole, the other is a world where the Tao is non-implemented as a whole. In other words, which one person acts with intent, and the one person acts without any intent; these are the two contrasting views of the world in Taoism. The latter is the natural world. The former is the artificial world. The great man of Confucianism is placed in the artificial world. A great man of Taoism, named ‘DE_JONG_SA’大宗師, was a person trying to get the wisdom of the greatest limitlessly, he was only in the artificial world, absolutely not in the natural world. In the artificial world, the Tao can a guiding role through which people can realize the vanity of that knowledge of Tao. Throwing the Tao in the artificial world away he will cast away all artificial constraint, and will be led into the natural world, which everything is already implemented in Tao. Through a reversion to an ontological realm like this, although there is no knowledge, hope, or desire of the Tao he already exists in Tao. Already open to all areas that exist, but doesn’t feel anything of it, that’s the view of Tao in Taoism.

Keywords: Tao, Taoism, ontological, ‘DE_JONG_SA’大宗師, natural world, A reversion to an ontological realm

 2019년 08월 09일 접수   2019년 09월 15일 심사완료 2019년 09월 23일 게재확정

동서철학연구 제93호(2019. 9)

12 장자철학에서 &lsquo;도&rsquo;의 존재론적 지위 윤천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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