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들어가는 말
2014년 12월 20일, 중국 호북성(湖北省:후베이성) 무한(武汉:우
한)에서 중국식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현실적 의의를 중시하는 일군의
학자들에 의해 중요한 토론회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 참석한 학자
들은 2014년 9월에 출간한 신대중철학1)이 중국의 현실 문제를 해
결하는 데에 사상적 기여를 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 대해 열띤 토론
을 하였다.
1) 王伟光主编(2014)
그들은 이 책이 1934년 무렵의 중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철학의
대중화를 역설하며 마르크스주의철학을 중국식으로 풀이한 애사기(艾
思奇: 1910~1966, 아이스치)의 대중철학(大众哲学)을 계승하여, 현
재에 직면한 다양한 중국의 문제를 사상적으로 해결하는 면에 기여
하기를 기대한다.2)
2) 霍文琦明海英(2014年11月22日)
이것은 이 책이 1978년부터 30여 년 동안 진행된 개혁개방 정책의
역기능이 빚어내는 심각한 문제와 대내외적인 환경변화로 인해 발생
하는 여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
치고 있음을 뜻한다.
곧 이는 오늘날 중국식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한편으로 민족 모순과
계급 모순이 팽배하던 근대 전환기의 중국에 대해 마르크스주의철학
의 중국화를 통해 반봉건주의와 반제국주의의 사상적 토대를 구축하
고자 했던 1930년대 중국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다른 한편으로 20세기 전반기와 구별되는 21세기의 전반기에 나타나
는 각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심층적인 탐구를 진행하고 있음을 드
러낸다.
한편 2014년 9월 24일, 중국공산당 총서기이자 국가 주석인 습근평
(習近平:시진핑)은 공자 탄생 2565주년을 기념하여 국제유학연합회
가 주관하는 국제 학술대회의 개막식 연설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원리
와 유가철학의 유기적인 결합을 통해 중국의 나아갈 방향을 개척할
것을 강조하였다.3)
3) 习近平(2014年9月25日검색)
이는 습근평을 중심으로 하는 현대 중국의 지도부가 국가의 부강,
민족의 진흥, 인민의 행복이라는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구현하기
위해 ‘중국의 꿈(中國夢)’을 강조하며, 중국공산당 창립 100주년이 되
는 2021년의 소강사회 완성과 신중국 성립 100주년이 되는 2049년의
대동사회 건설이라는 목표에 부응하고자 하는 메시지이다.4)
4) 이철승(2014)
유가철학과 마르크스주의철학의 결합을 통해 중국의 나아갈 방향
을 제시하는 중국 지도부의 이러한 논리는 이미 2012년 11월 8일에
개최된 ‘중국공산당 제18차 전국 대표대회’의 개막식에서 연설한 호
금도(胡錦濤:당시의 국가 주석인 후진타오)의 사상을 철저히 계승하
는 것이다.5)
5) 胡锦涛(2013年9月28日검색)
그리고 호금도는 모택동(毛澤東: 1893~1976, 마오쩌둥)
부터 강택민(江澤民:장쩌민)에 이르는 이전 지도부의 이러한 관점을
계승하였다.
이처럼 19세기 중엽에 유럽에서 출현하여 20세기 전반기에 중국으
로 확산된 마르크스주의 철학과 유가철학의 유기적인 결합은 현재
중국 정부의 핵심 이념일 뿐만 아니라, 중국사상계의 중요한 사조 가
운데 하나이다. 예컨대 감양(甘陽:간양)은 2007년에 「중국의 길: 30
년과 60년」에서 유가의 어울림사상과 모택동의 평등사상과 등소평의
중국식 사회주의를 결합한 ‘유가사회주의 공화국’의 방향을 제시하였
다.6) 감양의 이러한 ‘유가사회주의’에 관한 이론은 적지 않은 지식인
들에게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6) 甘阳(2007年第6期)
그런데 ‘과학’과 ‘민주’의 중요성이 증가하던 ‘5 ‧ 4 신문화 운동’ 기
간의 중국사상계에서는 유가철학을 봉건주의의 이데올로기로 여기는
풍조가 만연하였다. 이 무렵 유학의 효시인 공자는 많은 사람들에 의
해 타도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의 세례를 받은 일부의 마르크스주자들
에게 유가철학은 ‘시대정신의 정화’가 아니라, 퇴출되어야 할 낡은 사
조로 여겨졌다. 이것은 이 무렵 중국에서 수용되고 유행한 마르크스
주의가 과학적인 세계관과 인식론을 체계적으로 논구한 변증법적 유
물론보다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을 해결하여 봉건주의와 자본주
의의 문제를 극복하고자 하는 역사적 유물론이 대세를 이루었기 때
문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철학의 연구가 심화되고 확대됨에 따라 마르
크스주의철학과 유가철학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철학의 관계를 새롭
게 조명하는 경향이 증가하였다. 일부의 연구자들은 유가철학의 내용
가운데 계승할 것과 비판할 것을 구분하였다. 그들은 유가철학 내용
가운데 관념론적 경향, 모호한 사유방식, 선지후행(先知後行)관 등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무신론, 기(氣)철학, 변증법적 사유,
선행후지(先行後知)관, 백성 중심 사상, 공동체정신, 공의로움 중시관
등을 적극적으로 계승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다. 곧 그들은 계승의 대
상으로 삼은 이러한 전통의 유가철학과 마르크스주의철학을 긴밀하
게 관계시키며, 중국식 마르크스주의철학을 정립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중국식 마르크스주의철학은 ‘5∙ 4 신문화 운동’ 시기의 이대
조(李大钊: 1889~1927, 리다자오)7)로부터 시작하여 1930년대의 애사
기와 모택동을 중심으로 하는 일군의 학자들에 의해 이론적 토대가
구축되었다.
7) 이 시기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전파자인 진독수(陈独秀: 1879~1942, 천두슈)와
이대조는 중국 전통철학에 대한 견해에서 차이를 보인다. 진독수가 전통철학을
철저히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긴 것과 달리, 이대조는 전통철학의 내용 가운
데 비판할 것과 계승할 것을 구별한다.
유가철학과 마르크스주의철학의 유기적인 결합을 통해 중국식 마
르크스주의철학을 정립하고자 하는 1930년대의 이러한 연구 풍토는
이후의 중국철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세계관과 ‘행선지후(行先知後)’관을 중심으로 유가철학과 마르크스
주의철학의 관계를 통해 근대전환기 중국철학계의 연구 동향과 특징
을 규명하는 이 글8)은 중국식 마르크스주의철학의 본질과 현대 중국
지도부의 사상적 근거를 이해하는 면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이후
에 전개되는 중국철학계의 중요한 흐름을 파악하는 면에 생산적인
기여를 할 수 있다.
8) 유가철학이 중국식 마르크스주의철학의 정초에 영향을 준 내용은 우주론, 역사
관, 인식론, 가치론 등 적지 않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이와 관련된 모든 내용
을 취급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필자의 능력으로는 하나의 소논문에서 이 모든
내용을 심층적으로 분석하여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의 3장에서는 유가철학 가운데 기(氣)중심의 관점과 ‘행선지후(行先
知後)’관이 애사기와 모택동 등 1930년대의 중국식 마르크스주의철학자들의 이
론과 어떻게 조응될 수 있는지에 대해 집중적으로 조명할 것이다. 이러한 필자
의 연구는 그동안 모택동을 비롯한 중국의 마르크스주의철학자들이 전통의 유
가철학을 철저히 배격했다는 일부의 견해가 사실에 기초하지 않은 오해임을 밝
히는 면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II. 마르크스주의철학의 수용과 전파
중국에 마르크스의 사회주의에 관한 소식을 전한 초기의 사람은
외교관이던 장덕이(张德彛: 1847~1918, 장더이)와 신문기자인 왕도(王
韬: 1828~1897, 왕타오)이다. 장덕이는 1871년 ‘파리코뮌(La Commune
de Paris : 1871.03.18.~1871.05.28.)’을 직접 목격한 후 삼술기(三述奇:
싼수치)라는 여행기에 그 내용을 기술했고, 유럽을 여행한 왕도는 귀
국 후에 홍콩[香港]에서 발행하는 화자일보(华字日报:화즈르바오)
의 편집 주간으로 재직하면서 ‘파리코뮌’의 내용을 화자일보에 연
재하였다.9) 또한 당시의 국제 사회주의 운동을 포함한 서양의 상황을
폭넓게 소개한 서국근사회편(西国近事汇编:씨궈진스후이비엔)10)이
1873년 3월에 창간되었는데, 이것은 1900년 1월까지 총 108권 1330기
가 간행되었다.11)
그리고 1898년 여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생애와 사상 및 사회주
의 학설을 체계적으로 해설한 태서민법지(泰西民法志:타이씨민파
즈)12)가 상해(上海:상하이)에서 출판된 후, 1899년 2월 광학회(廣学
会:광쑤에후이)에서 주관한 만국공보(万国公报:완궈공바오)는 마
르크스의 이름과 그 학설을 소개하였으며, 대동학(大同学:따통쑤
에)에서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와 자본론에 대해 소개하였다.13)
9) 이 무렵 王韬는 프랑스志略과 보불전쟁기를 편역하여 华字日报에 연재하
다가, 上海의 申报에 옮겨 실었다. 이 후에 王韬는 보불전쟁기를 단행본으
로 출간하였는데, 이 책은 당시의 李鸿章이 매우 중시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유신파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10) 이 무렵 ‘江南制造局翻译馆’에서 번역한 西国近事에서 처음으로 ‘康密民人’
과 ‘康密民党’이라는 표현이 등장했는데, 이것은 각각 ‘共产主义者’와 ‘共产党’을
최초로 음역(音译)한 것이다.
11) 이철승(2000: 13쪽)
12) Thomas Kirkup(1844~1912)의 社会主义史를 胡貽谷이 번역하여 上海广学会에
서 출판한 후, 책명을 泰西民法志라고 하였다.
13) 이철승(2000: 13~14쪽)
20세기 초에는 일본에 유학했던 사람들에 의해 일본 사회주의의
저작이 번역되었다. 1902년 12월 상해의 번역세계(翻译世界:판이스
지에) 잡지는 촌정지지(村井知至:무라이 도모유키)의 사회주의를
편역했는데, 이 책은 마르크스의 생애와 학설을 체계적으로 소개하였
을 뿐만 아니라, 잉여가치설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언급하였다. 1904
년에 조필진(赵必振:자오삐전)은 복정준조(福井准造:후쿠이 준조)
의 근세사회주의(近世社会主义)를 번역했는데, 이 책은 마르크스
와 그의 이념을 영국과 프랑스 사회주의 사조와 비교하였다.
또한 1904년에 행덕추수(幸德秋水:고토쿠 슈스이)의 사회주의신
수(社会主义精髓)가 번역되었는데, 이 책은 이미 일본에서 번역된
공산당선언과 사회주의는 공상으로부터 과학으로 발전함 등에
근거하여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주요 관점에 대해 상세하게 소개하고,
사회주의 혁명의 실현을 역사의 필연적인 추세로 여기고 있다.
이처럼 일본의 초기 사회주의 사상은 20세기 초의 중국사상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생산력, 생산관계, 유물사관, 계급투
쟁, 잉여가치 등의 개념은 대부분 일본에서 번역한 것을 차용한 것
이다.
한편 1902년 10월 양계초(梁啓超: 1873~1929, 량치차오)는 신민
총보(新民丛报:씬민총바오) 제17호의 「간섭과 방임」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자유방임으로 인해 빈부(贫富) 차이가 심화되자, 이를 대체
하기 위해 ‘사회주의’가 출현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가 1904년에 쓴
「중국의 사회주의」에 의하면 사회주의는 사유제를 폐지하고 공유제
를 중시하며 노동자를 역사의 주역으로 여긴다.14)
14) 鍾家棟王世根主編(1998: 17~19쪽)
또한 이 무렵 손문(孫文: 1866~1925, 쑨원)의 입헌민주주의파에서
도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와
그의 학설을 번역하여 소개하는 간행물이 지속적으로 출간되었다.
1910년 6월 신세계(新世界:씬쓰지에) 제2기에 주집신(朱执信:주
즈씬)이 번역하고 자진(煮尘:주천)이 정리한 「사회주의의 대가인 마
르크스의 학설」, 1910년 8월에 상해에서 출간된 동방잡지 제8권
제6호에 게재된 전지수(钱智修:첸즈씨우)의 「사회주의와 사회정책」,
1912년 10월 손문이 상해의 중국사회당에서 연설한 내용 등이 여기
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무렵 마르크스와 엥겔스 및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
러 사회주의 운동의 영향을 받은 중국의 지식인들은 대부분 사회주
의와 아나키즘의 차이를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사회주
의에 대해 권위주의를 반대하는 아나키즘으로 받아들이고, 사회주의
와 아나키즘의 본질적인 차이를 깊게 분석하지 않았다. 예컨대 1912
년 1월 강항호(江亢虎: 1883~1954, 장캉후)에 의해 창당된 중국 최초
의 ‘사회당’은 비록 명칭이 ‘사회당’이지만, 과학적 사회주의를 중시
하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회주의’의 이념과 다르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의 10월 혁명이 성공을 거두자, 국내외에서
활동하던 적지 않은 지식인들에 의해 과학적 사회주의의 이념이 중
국에 광범위하게 소개되고 전파되었다. 그들은 이 무렵 신청년(新靑
年:씬칭녠)과 매주평론(每週評論:메이저우핑룬)을 통해 마르크
스주의의 이념을 적극적으로 소개하였다.
특히 진독수와 이대조는 각각 일본에서 유학할 때에 자본주의의
모순을 인식하였다. 그들은 귀국 후에 당면한 중국의 문제를 극복하
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들은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의
소식을 접한 후,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내용을 공동으로 번역하여 소
개하기도 하고15), 자신의 마르크스주의관을 정리하여 발표하기도 하
였다.16)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그들의 적극적인 소개는 당시의 사상계
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15) 陈独秀李大钊譯, 共産黨宣言(1919年4月6日) 第二章, 共産黨宣言(1919年11月1日) 第一章
16) 李大钊(1919年5月, 11月)
이들 외에도 양포안(杨匏安: 1896~1931, 양파오안) ‧ 이달(李达:
1890~1966, 리다) ‧ 이한준(李汉俊: 1890~1927, 리한준) ‧ 진망도(陈望
道: 1891~1977, 천왕다오) 등 일본 유학파, 일본과 영국에서 유학했
던 채화삼(蔡和森: 1895~1931, 차이허선), 프랑스에서 유학했던 채원
배(蔡元培: 1868~1940, 차이위엔페이), 일본 ‧ 프랑스‧ 독일‧영국에서
유학했던 주은래(周恩来: 1898~1976, 저우언라이), 러시아에서 유학
했던 구추백(瞿秋白: 1899~1935, 취치우바이) ‧유소기(劉少奇: 1898~1969,
류샤오치), 손문(孫文: 1866~1925, 쑨원)의 ‘동맹회(同盟会)’에 참여했
다가 전환한 임백거(林伯渠: 1886~1960, 린바이취) ‧ 동필무(董必武:
1886~1975, 동삐우), 국내의 등중하(邓中夏: 1894~1933, 덩종쌰) ‧운대
영(惲代英: 1895~1931, 윈다이잉) ‧모택동 등에 의해 마르크스주의가
중국 곳곳에 전파되었다.17)
17) 이철승(2000: 15쪽)
그런데 중국 사상계에서는 ‘5 ‧ 4 신문화 운동’ 전후에 한편으로 마
르크스주의에 대한 이해가 확산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마르크스주
의에 대해 견제와 비판이 강화되었다. 이 때문에 당시의 지식인들은
마르크스주의의 의미에 대해 치열하게 논쟁을 진행하였다.
특히 매주평론에서 호적(胡適: 1891~1962, 후스)과 마르크스주의
자들 사이에 진행된 ‘문제와 주의’ 논쟁, 시사신보(時事新報:스스
신바오)에서 장동손(张东蓀: 1886~1973, 장동순)과 마르크스주의자
들 사이에 진행된 ‘사회주의’ 논쟁, 신청년을 중심으로 하여 진행
된 ‘아나키즘과 사회주의’의 논쟁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18)
18) 이철승(2000: 16쪽)
이처럼 다양한 사조가 혼재하는 가운데, 중국의 마르크스주의자들
은 1921년 7월에 전국을 대표하는 13명의 대의원들이 중심이 되어,
상해에서 ‘중국 공산당’을 창당하였다. 부르주아 자유주의 사상을 기
반으로 한 손문의 삼민주의(三民主义: 民族, 民权, 民生) 사상도
1924년을 전후로 하여 ‘소련과 연계하고, 공산당과 연계하며, 농민과
노동자를 도와야 한다.’는 이른바 ‘신삼민주의’로 전화되어, 제1차 ‘국
공합작(国共合作)’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또한 1923~1924년
에 구추백에 의해 소개된 ‘유물변증법’19)은 그간 공백으로 있던 마르
크스주의의 세계관과 인식론 방면의 이론 보충에 크게 기여하였다.20)
19) 1923년에 소련으로부터 귀국한 구추백은 그 해에 상해대학 교수가 되어 1923년
과 1924년에 각각 社會哲學槪論과 現代社會學을 강의했는데, 그 내용은 주로
유물변증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瞿秋白文集 第2卷(1988: 310~380쪽, 395~485쪽참조)
20) 이철승(2000: 16~17쪽)
이 외에도 1920년대에는 마르크스‧엥겔스와 레닌에 관한 다양한 서
적이 번역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와 관련된 논문과 저서가 많이 발표
되고 출간되었다.
III. 마르크스주의철학의 중국화
근대전환기 중국의 시대 상황과 비례하여 마르크스주의철학은 1870
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중국에 소개‧수용‧전파의 과정을 거쳐, 1930년
대에 비로소 중국식 마르크스주의철학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곧 중국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대부분 1920년대까지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이상적인 이념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학습의 대상으로 삼았
다. 그러나 1930년대부터 이러한 풍토에 변화가 일어났다.
1930년대의 중국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미 진독수를 중심으로 하
는 우경기회주의와 왕명(王明: 1904~1974, 왕밍)을 중심으로 하는 좌
경 교조주의가 빚어내는 문제의 심각성을 경험적으로 인식하고, 이에
대한 대안을 강구하였다.
그들이 찾은 대안은 중국식 마르크스주의철학의 정립으로서 마르
크스주의철학의 중국화이다. 그들은 이를 위해 한편으로 마르크스주
의철학의 기본 원리를 운용하여 중국의 실정을 분석한 후 정확한 노
선과 방법과 정책을 제시하고, 다른 한편으로 중국의 우수한 전통 철
학을 발굴하고 그 정화를 흡수하여 마르크스주의철학과 결합시키고
자 하였다.21)
21) 石訓(1996: 72~73쪽)
그런데 이때 마르크스주의철학과 결합시키려고 하는 우
수한 전통 철학 가운데 유가철학의 내용이 적지 않다.
이 당시 중국식 마르크스주의철학을 선도한 대표적인 연구는 1934
년에 출간된 애사기의 대중철학, 1937년 7월과 8월에 각각 발표된
모택동의 「실천론」과 「모순론」 등이다.22)
22) 이 밖에 1937년 5월에 출간된 이달의 사회학대강(社會學大綱)도 실천유물론
과 변증법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중국식 마르크스주의철학의 정립에 기여했지만,
전통 유가철학과의 관련 부분이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이 글의 주요 분석 대
상에서 제외되었다. 또한 劉少奇는 1939년 7월에 論共産黨員的修養을 발표하
여 공산당원의 도덕적 수양을 강조하기도 했지만(劉少奇選集上卷: 1981: 97~167
쪽),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 그 이론의 영향은 크지 않았기 때문에 이 글의 주요
분석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런데 李澤厚는 劉少奇의 이 도덕적 ‘수양’의 문제
를 중국식 마르크스주의의 중요한 특색이라고 평가한다. 李澤厚(1999: 1000쪽)
애사기와 모택동은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을 인류가 추
구해야 할 보편적인 이론으로 여긴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이론이 중국
에 적용될 때에 중국의 구체적인 실상을 외면하거나 배제해서는 안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에 의하면 마르크스주의의 원리는 중국의
실제적인 상황과 유기적으로 결합해야 한다.
이 때문에 그들은 중국의 구체적인 실상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고 중국의 전통철학, 특히 유가철학의 내용을
무조건적으로 배척하거나 옹호하지 않았다. 그들은 유가철학의 내용
가운데 관념론적 경향의 이론을 비판하고, 변증법적 유물론의 성향을
띤 이론을 계승하고자 하였다.
특히 그들은 세계관의 방면에서 형이상학적인 ‘리(理)’ 중심의 이
론을 비판하며 변증법적인 ‘기(氣)’ 중심의 이론을 옹호하고, 앎과 행
함의 문제에서 앎을 행함보다 앞서는 것으로 생각하는 ‘지선행후(知
先行後)’설을 비판하고 행함을 앎보다 앞서는 것으로 생각하는 ‘행선
지후(行先知後)’설을 옹호했으며, 역사관에서 엘리트 중심의 영웅사
관을 비판하고 보통 사람 중심의 민중사관을 옹호하였다. 그들의 이
러한 관점은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 부응한다.
그런데 유가철학과 마르크스주의철학의 이러한 공통점이 있음에도,
그들은 대부분 유가철학의 구체적인 내용과 마르크스주의철학의 구
체적인 내용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조응할 수 있는지에 대해 심층적
인 분석을 통한 엄밀한 논증에 심혈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큰 범주의 측면에서 마르크스주의철학과 유가철학의 공통점을 논할
뿐이다. 이것은 전통의 유가철학 가운데 관념론의 문제점을 구체적으
로 분석하여 철저하게 비판한 태도와도 구별된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이러한 태도로 학문을 탐구했을까? 그들의 이
러한 태도는 당시의 시대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1930년대의 중국은
대내적으로 마르크스주의의 이념이 정착되지 않은 상태에서 부르주
아 자유주의를 중시하는 장개석(蔣介石: 1887~19756, 장제스)의 국민
당 정권과 투쟁하야 하고, 대외적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위협과 침략
을 해결해야 하는 시대적 과제에 직면한 상태이다.
이러한 절박한 위기 상황에서 시대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당시
의 중국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우선 그들의 관점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이론의 문제점을 극복하고자 하는 사명감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이론 탐구에만 전념하지 않고, 시대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사회적 실천을 수행해야 하는 처지에 있었다.
이는 그들이 학문 탐구를 순수한 이론 탐구의 영역으로 설정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철학이란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관점과 ‘철학사란 유물론과
관념론의 투쟁사’라는 지다노프(Andrei Zhdanov : 1896~1948)의 관점을
철저히 계승하고자 한다. 이것은 그들이 철학 탐구를 ‘인식의 발전
사’23)라는 측면에서 다양한 관점을 인정하며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23) 그런데 중국 정부는 ‘개혁 개방’정책이 진행 중이던 1980년대에 ‘사회주의 초
급단계’를 주장하며 이른바 ‘중국식 사회주의’의 건설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제
시하면서 계급투쟁이 더 이상 주요 모순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 무렵 중국공산
당의 이러한 관점은 중국의 철학계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 이 때문에 많은 철
학자들은 철학사에 대해 ‘유물론과 관념론의 투쟁사’가 아니라 ‘인식의 발전사’
라고 지적하며, 관념론 계열의 철학에 대해 왕성하게 연구한다. 이러한 1980년
대 이후에 전개되는 중국 철학계의 분위기는 1930년대 마르크스주의철학의 중
국화를 정립하고자 했던 중국식 마르크스주의철학자들의 관점과 차이가 있다.
사상투쟁의 시각에서 자신의 견해와 대척적인 관점을 적극적으로 비
판하고자 하는 자세로 접근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 상황은 그들에게 전통의 유가철학과 마르크스주의 철
학의 공통점을 엄밀하게 분석하여 새로운 시대정신의 정화로 승화시
킬 수 있는 풍토를 조성하는 연구를 지연시키는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시대 상황은 두 이론의 논리 구조에 대한
치밀한 분석을 통해 합리적으로 종합하는 새로운 이론 창출에 필요
한 숙고와 물리적인 시간을 할애하는 면에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들은 전통의 유가철학과 마르크스주의철학의 공통된
요소를 낱낱이 비교하여 논리적으로 종합하는 연구 방법을 채택하지
않고, 사회적 실천을 통해 깨달은 진리관을 설명하거나 논증하는 과
정에 전통의 유가철학과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내용을 변증법적으로
종합하는 방법을 선호한다.
1. 형이상학에서 유물변증법으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철학사에서는 세계의 기원에 관해 크게 두
가지 관점이 존재한다. 하나는 사실과 가치의 근거이며 그 자체가 완
벽한 것으로 고정불변하는 정신적인 존재(神, 이데아, 절대정신, 理
등)이고, 다른 하나는 신이나 인간의 의지에 관계없이 그 자체의 내
부적인 요인에 의해 운동하는 비정신적인 존재(물질, 氣 등)이다. 철
학사에서는 전자를 형이상학적인 관념론이라고 하고, 후자를 변증법
적인 유물론(유물변증법)이라고 한다.
전통적으로 유가철학은 이 문제에서 두 가지 관점이 존재한다.
하나는 공자24), 맹자25), 동중서26), 정이27), 주희28), 왕수인29) 등으로 이어지는 관념론 계열이다.
그들은 인간의 정체성을 도덕성의 보유로여긴다. 그런데 이 도덕성은 경험의 축적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선험적으로 주어진다. 그들은 그 선험성의 근거를 하늘로 여기고,
하늘이 준 도덕성의 회복을 통해 도덕적인 삶을 구현하는 것을 이상으로 여긴다.
이러한 그들의 관점 가운데 주희를 중심으로 하는 성리학적 관점은 조선의 통치 이념은 물론
중세 이후 중국 전통 사회의 중심적인 가치관으로 작용하였고
왕수인을 중심으로 하는 양명학적 관점은 대만 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들의 관점은 또한 웅십력(熊十力:1885~1968, 쑝스리) ‧양수명(梁漱溟: 1893~1988, 량수밍) ‧풍우란(馮友蘭:1895~1990, 펑요란) ‧하린(賀麟: 1902~1992, 허린) ‧모종삼(牟宗三:
1909~1995, 모종산) 등 20세기의 현대신유학자들에 의해 계승되고발전되었다.
24) 論語 八佾, “子曰, ‘不然, 獲罪於天, 無所禱也.’” 論語 述而, “子曰, ‘天
生德於予, 桓魋其如予何?’” 論語 泰伯, “子曰, ‘大哉堯之爲君也! 巍巍乎! 唯天
爲大, 唯堯則之. 蕩蕩乎, 民無能名焉. 巍巍乎! 其有成功也, 煥乎其有文章!’” 論語
自罕, “子畏於匡, 曰, ‘文王旣沒, 文不在玆乎? 天之將喪斯文也, 後死者不得與
於斯文也, 天之未喪斯文也, 匡人其如予何?’” 論語 先進, “顔淵死. 子曰, ‘噫!
天喪予! 天喪予!’” 論語 憲問, 子曰, “不怨天, 不尤人, 下學而上達. 知我者其
天乎!” 論語 季氏, “孔子曰, ‘君子有三畏, 畏天命, 畏大人, 畏聖人之言. 小人
不知天命而不畏也, 狎大人, 侮聖人之言.’”
25) 孟子 梁惠王下, “孟子曰, ‘大事小者, 樂天者也, 以小事大者, 畏天者也. 樂天
者保天下, 畏天者保其國.’” 孟子 離婁上, “孟子曰, ‘天下有道, 小德役大德, 小
賢役大賢; 天下無道, 小役大, 弱役强. 斯二者, 天也. 順天者存, 逆天者亡.’” 孟子
離婁上, “誠者, 天之道也, 思誠者, 人之道也.” 孟子 萬章上, “萬章曰, ‘堯以
天下與舜, 有諸?’ 孟子曰, ‘否. 天子不能以天下與人.’ ‘然則舜有天下也, 孰與之?’
曰, ‘天與之.’” 孟子 萬章上, “舜相堯二十有八載, 非人之所能爲也, 天也.” 孟
子 萬章上, “舜禹益相去久遠, 其子之賢不肖, 皆天也, 非人之所能爲也. 莫之爲
而爲者, 天也, 莫之致而至者, 命也.” 孟子 萬章上, “天之生此民也, 使先知覺
後知, 使先覺覺後覺也.” 孟子 告子上, “耳目之官不思, 而蔽於物. 物交物. 則
引之而已矣. 心之官則思, 思則得之, 不思則不得也. 此天之所與我者.” 孟子 盡
心上, “孟子曰, ‘盡其心者, 知其性也. 知其性, 則知天矣. 存其心, 養其性, 所以事
天也. 殀壽不貳, 修身以俟之, 所以立命也.’” 孟子 盡心下, “仁之於父子也, 義
之於君臣也, 禮之於賓主也, 智之於賢者也, 聖人之於天道也, 命也, 有性焉, 君子不
謂命也.”
26) 春秋繁露 順命, “天者, 萬物之祖先; 萬物非天不生.” 春秋繁露 爲人者天,
“爲人者天也. 人之(爲)人本于天. 天亦人之曾祖父也.” 春秋繁露 順命, “天子受
命于天, 諸侯受命于天子, 子受命于父, 臣妾受命于君, 妻受命于夫. 諸所受命者, 其
尊皆天也. 雖謂受命于天亦可.” 春秋繁露 循天之道, “氣從神而成, 神從意而出.
心之所之謂意.” 春秋繁露 基義, “仁義制度之數, 盡取之天. 天爲君而覆露之,
地爲臣而持載之; 陽爲夫而生之, 陰爲婦而助之; 春爲父而生之, 夏爲子而養之.”
27) 二程遺書卷18, “天下只有一个理.” 二程粹語卷下, “有理則有氣.” 二程遺書
卷5, “陰陽, 氣也. 氣是形而下者, 道是形而上者.” 二程遺書 卷15, “大而化之, 只
是謂理與己一.”
28) 朱子語類卷1, 2조목, “未有天地之先, 畢竟也只是理. 有此理, 便有此天地; 若無
此理, 便亦無天地, 無人無物, 都無該載了. 有理, 便有氣流行, 發育萬物.” 朱子語
類卷1, 7조목, “理未嘗離乎氣. 然理形而上者, 氣形而下者. 自形而上下言, 豈無先
後? 理無形, 氣便粗, 有渣滓.” 朱文公文集卷58, 答黃道夫, “天地之間, 有理
有氣. 理也者, 形而上之道也, 生物之本也; 氣也者, 形而下之器也, 生物之具也. 是
以人物之生, 必稟此理, 然後有性; 必稟此氣, 然後有形.” 朱子語類卷4, 49조목,
“性卽理也. 當然之理, 無有不善者. 故孟子之言性, 指性之本而言. 然必有所依而立,
故氣質之稟不能無淺深厚薄之別. 孔子曰‘性相近也’, 兼氣質而言.” 朱子語類卷4,
50조목, “天地間只是一箇道理. 性便是理. 人之所以有善有不善, 只緣氣質之稟各有
淸濁.” 朱子語類卷5, 71조목, “性是未動, 情是已動, 心包得已動未動. 蓋心之未
動則爲性, 已動則爲情, 所謂‘心統性情’也. 欲是情發出來底. 心如水, 性猶水之靜,
情則水之流, 欲則水之波瀾, 但波瀾有好底, 有不好底. 欲之好底, 如‘我欲仁’之類;
不好底則一向奔馳出去, 若波濤飜浪.”
29) 傳習錄中, 答顧東橋書, “夫物理不外于吾心, 外吾心而求物理, 無物理也. ……
心之體, 性也, 性卽理也. 故有孝親之心, 卽有孝之理矣. 無孝親之心, 卽無孝之理
矣.” 傳習錄中, 答顧東橋書, “吾心之良知, 卽所謂天理也. 致吾心良知之千里于
事事物物, 則事事物物皆得其理也.” 傳習錄中, 答顧東橋書, “心者, 身之主也,
而心之虛靈明覺, 卽所謂本然之良知也. 其虛靈明覺之良知感應而動者謂之意, ……
謂之所用, 必有其物, 物卽事也.”
다른 하나는 순자30), 왕충31), 장재32), 왕부지33) 등으로 이어지는 유물론 계열이다.
30) 荀子 天論, “天行有常, 不爲堯存, 不爲桀亡.” 荀子 天論, “天有其時, 地
有其財, 人有其治, 夫是之謂能參.” 荀子 天論, “形具而神生.”
31) 論衡 物勢, “儒者論曰, ‘天地故生人’, 此言妄也. 夫天地合氣, 人偶自生也
…… 因氣而生, 種類相産, 萬物生天地之間, 皆一實也.” 論衡 論死, “人之所以
聰明智慧者, 以含五常之氣也. 五常之氣所以在人者, 以五臓在形中也. 五臓不傷,
則人智慧. 五臓有病, 則人荒忽, 荒忽則愚痴也. 人死, 五臓腐虧. 腐虧則五常無所托
矣, 所用蔵智者已敗矣, 所用爲智者已去矣. 形須氣而成, 氣須形而知.” 論衡 譴
告, “夫天道, 自然也, 無爲. 如譴告人, 是有爲, 非自然也.”
32) 正蒙, 太和篇, “‘太虛’無形, 氣之本體. 其聚其散, 變化之客形爾.” 正蒙, 太
和篇, “天地之氣, 雖聚散攻取百塗, 然其爲理也順而不妄. 氣之爲物, 散入無形, 適
得吾體; 聚爲有象, 不失吾常. 太虛不能無氣, 氣不能不聚而爲萬物, 萬物不能不散
而爲太虛. 循是出入, 是皆不得已而然也.”
33) 周易外傳卷5, 繫辭上, “天下唯器而己矣.” 周易內傳卷5, “盈天地之間唯陰
陽而己矣.” 周易外傳 卷6, 繫辭下, “太虛者本動者也.” 周易外傳, 說卦傳,
“陰陽不孤行于天地之間.” 張子正蒙注 太和篇, “陰陽二氣, 充滿太虛. 此外更
無他外物, 亦無間隙.” 張子正蒙注 太和篇, “太虛卽氣絪縕之本體.” 張子正
蒙注 太和篇, “氣在空中空無非氣通一無二者也.” 張子正蒙注 參兩篇,
“虛空卽氣, 氣卽動者也.”
순자와 왕충은 하늘을 도덕적인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물리적인 대상으로 여기며, 인간을 하늘의
운행 질서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긴다. 그리고 장재와 왕부지는 세계의
근거를 정신적인 요소가 있는 리(理)로 설정하지 않고, 비정신적인 기(氣)로 설정한다.
그들에 의하면 도(道)로 상징되는 리 역시 기를 초월하는 불변의
초시공적인 존재가 아니라, 항상 운동하고 변화하는 기의 조리이다.
기철학의 집대성자로 평가받는 왕부지는 “도(道)는 기(器)의 도이니,
기를 도의 기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34)고 하고, “기에 의거하여 도가
보존되고 기를 떠나면 도가 훼손되”35)므로 “기를 다하면 도가 그 속에
있다.”36)고 지적하며, 도를 기에 의존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그는 “하늘은 날마다 사람에게 명(命)을 주고, 사람은 날마
다 하늘에서 명을 받는다. 그러므로 성(性)은 생겨나는 것이니, 날마
다 생겨나고 날마다 이룬다.”37)고 하여, 성(性)을 인욕에 가려진 것으로부터 회복해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는 성리학적 관점과 달리 날마다 배양해야 하는 대상으로 여긴다.
34) 周易外傳 卷5, 繫辭上, “道者器之道, 器者不可謂之道之器也.”
35) 周易外傳 卷5, 大有, “据器而道存, 離器而道毁.”
36) 思問錄 內篇, “盡器則道在其中矣.”
37) 尙書引義 太甲2 , “天日命於人, 而人日受命於天. 故曰性者生也, 日生而日成之也.”
이러한 유물론 계열의 관점은 중국의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적극
적으로 수용된다. 중국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들의 이론을 마르크스주의철학의 중국화에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특히 1930년대에 중국식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정초를 다진 것으로 평가받는 애사기와 모택
동 등은 이들의 관점을 적극적으로 계승하여 마르크스주의철학을 강화시킨다.
애사기는 전통의 유가철학자들 가운데 공자‧ 맹자‧ 동중서‧ 주희‧왕수인 등의 철학을 관념론으로
평가하며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삼고,
순자‧왕충 ‧장재 ‧왕부지 등의 철학을 유물론으로 평가하며 계승해야 할 대상으로 삼는다.38)
애사기는 철학을 하늘로부터 떨어져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 속에서 형성되는 것으로 여기고, 인간의 사회가 없다면 철학도 없다고 생각한다.39) 이것은 그가 철학을 헤아리기 어려운 신비스러운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일상생활을 통해 문제의 본질을 찾아 해결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40)
철학을 대하는 이러한 그의 자세는 철학의 근본 문제, 곧 세계의 기원을 규명하는 면에 그대로 적용된다.
그는 철학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는 면에 관념론과 유물론 이외의 제3의 철학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신이나 인간의 의지에 관계없이 존재하며 그 자체의 내부적인 요인에 의해 운동하는 비정신적인
물질을 세계의 근거로 생각하는 유물변증법을 과학적인 관점이라고 평가한다.41)
38) 艾思奇文集Ⅱ, 辨證唯物主義講課提綱1956年(1981: 444~449쪽).
39) 艾思奇文集Ⅰ, 大衆哲學1934年(1981:130쪽)
40) 艾思奇文集Ⅰ, 大衆哲學1934年(1981: 134~135쪽)
41) 艾思奇文集Ⅰ, 大衆哲學1934年(1981: 145~176쪽)
세계의 기원에 대한 이러한 그의 관점은 진리관에도 적용된다. 그
에 의하면 “진리는 반드시 객관 사물과 일치하고, 주관으로부터 마음
대로 날조되어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주관적인 진리란 없는 것
이다. 왜냐하면 완전히 주관으로부터 생성된다는 견해는 결코 진리가
될 수 없으며, 모든 진리는 모두 객관성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42)
모택동 또한 전통의 유가철학에 대한 관심이 적지 않았다.
모택동은
“우리의 역사 유산을 학습할 때에 …… 공자로부터 손문에 이르
기까지 우리는 마땅히 총괄하여, 이 진귀한 유산을 계승해야 한다.”43)
고 하고, 또 “중국의 장기적인 봉건 사회 속에서 찬란한 고대 문화를창조하였다. 고대 문화의 발전 과정을 정리할 때에 그 봉건적 찌꺼기는 제거하고, 그 민주적인 알곡을 흡수하는 것이, 민족의 신문화를
발전시키고 민족의 자신감을 높여주는 필요조건이다.”44)고 지적하며,
유가철학을 비롯한 전통철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비판할 것과 계승할 것을 분별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모택동은 “인류의 인식사 속에서 지금까지 우주의 발전 법칙에 관한 두 견해가 있는데, 하나는 형이상학적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변증법적 견해로서, 서로 대립하는 두 세계관을 이루었다.”45)고 지적하고,
인간의 의지에 관계없이 인간의 외부에서 본래적으로 존재하는 형이상학적 존재에 의해 세계가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내부적인 요인에 의해 서로 대립되는 모순 상태의 물질에서 세계가 비롯
된 것이라고 하였다.46)
42) 艾思奇文集Ⅰ, 大衆哲學1934年(1981: 195~196쪽), “真理必须和客观事物一致,
不能夠由主观随意捏造出来, 主观的真理没有的. 因为完全由主观产生的见解决不会
是真理, 凡是真理, 都得要有客观性.”
43) 毛泽东选集 第2卷, 中國共産黨在民族戰爭中的地位1938年10月(1967: 499쪽),
“學習我們的歷史遺産, …… 從孔夫子到孫中山, 我們應當給以總結, 承繼這一份珍
貴的遺産.”
44) 毛泽东选集 第2卷, 新民主主義論1940年1月(1967: 667~668쪽), “中国的长期
封建社会中, 创造了灿烂的古代文化. 清理古代文化的发展过程, 剔除其封建性糟粕,
吸收其民主性精华, 是发展民族新文化提高民族自信心的必要条件.”
45) 毛泽东选集 第1卷, 矛盾论1937年8月(1967: 275쪽), “在人類認識史中, 從來
就有關于宇宙發展法則的兩種見解, 一種是形而上學的見解, 一種是辨證法的見解,
形成了互相對立的兩種宇宙觀.”
46) 이철승(2007: 78쪽)
그는 사물 내부의 필연적인 자기의 운동으로 인해 사물의 발전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에 의하면 각 사물의 운동은 모두 그 주위의 다른 사물과 서로 연계하며 서로 영향을 미친다.
사물이 발전하는 원인 역시 사물의 외부에 있지 않고 내부의 모순성에 있다.
어떤 사물의 내부이든지 모두 이러한 모순성이 있기 때문에 사물의 운동과 발전이 일어난다.
따라서 사물 내부의 이러한 모순성이 사물 발전의 근본 원인이고, 사물들 사이의 연계와 작용이 사물 발전의 두번째 원인이다.47)
47) 이철승(2007: 78~79쪽)
이것은 자연계와 인간 사회에 모두 적용된다. 그는 특히 사회의 모
순에 대해 생산력과 생산 관계의 모순,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 사
이의 모순,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사이의 모순으로 여긴다. 그에 의하
면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사회의 진보가 이
루어지고, 옛 것과 낡은 것 사이의 대사가 진행된다. 이것은 외부적
요인이 변화의 조건이고 내부적 요인이 변화의 근거이므로 외부의
작용은 내부적 요인을 통해 일어남을 의미한다.48)
48) 이철승(2007: 79쪽)
이처럼 그는 전통의 유가철학 가운데 유물변증법적 요소가 있는내용을 활용하고자 한다.
그는 이러한 세계관에 근거하여 “도의 큰 근원은 하늘에서 나온다. 하늘이 변하지 않으니, 도 또한 변하지 않는다.”49)고 하는 동중서의 관점을 비롯하여 선험적인 불변의 논리를 지지하는 관념론을 비판하였다. 특히 그는 이러한 관점에 근거하여 당시의 중국 사회에 팽배한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49) 漢書 本傳, “道之大原出于天. 天不變, 道亦不變.”
2. 선험적인 앎에서 경험적인 행함으로
앎과 행함의 선후 관계는 세계의 기원을 규명하는 것만큼 철학사에서 중요한 주제이다.
앎과 행함 가운데 어느 것이 먼저인지에 따라 관점이 확연히 구별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철학자들은 이 문제를 과학적으로 접근한다.
그들은 선험적인 앎을 긍정하지 않고, 앎이란 경험적인 행함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만약 선험적인 앎을 인정한다면 그들은 더 이상 유물론적 세계관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애사기와 모택동 등 중국식 마르크스주의자들 역시 이러한 관점을 수용한다.
전통의 유가철학에서도 이 문제를 중요하게 취급한다.
공자50), 맹자51), 동중서52), 정이53), 주희54), 왕수인55) 등 관념론 진영의 철학자
들은 앎을 행함보다 앞서는 것으로 생각한다.
50) 論語 季氏, “孔子曰, ‘生而知之者, 上也; 學而知之者, 次也; 困而學之, 又其
次也; 困而不學, 民斯爲下矣.’”
51) 孟子 盡心上, “人之所不學而能者, 其良能也; 所不慮而知者, 其良知也.” 孟
子 告子上, “仁義禮智非有外鑠我也我固有之也弗思耳矣”
52) 春秋繁露, 必仁且智, “知先規而後爲之.”
53) 二程遺書 卷25, “德性之知, 不假聞見.” 二程遺書 卷25, “知者吾之所固有.” 二程遺書 卷25, “致知在格物, 非由外鑠我也, 我固有之也.”
54) 朱子語類 卷9, 1조목, “論先後, 知爲先; 論輕重, 行爲重.” 朱子語類 卷60, 6
조목, “盡其心者, 由知其性也. 先知得性之理, 然後明得此心. 知性猶物格, 盡心猶
知至.” 朱子語類 卷60, 8조목, “知性, 然後能盡心. 先知, 然後能盡; 未有先盡而
後方能知者. 蓋先知得, 然後見得盡.”
55) 傳習錄中, 答顧東橋書, “德性之良知, 非由于見聞.” 傳習錄上, “身之主宰便
是心, 心之所發便是意, 意之本體便是知, 意之所在便是物.” 傳習錄上, “良知是造
化的精靈, 這些精靈生天生地, 成鬼成宰, 皆從此出, 眞是與物無對.” 傳習錄中,
答顧東橋書, “心者, 身之主也, 而心之虛靈明覺, 卽所謂本然之良知也. 其虛靈明覺
之良知感應而動者謂之意, …… 謂之所用, 必有其物, 物卽事也.”
그런데 이때 그들이 말하는 앎의 대상은 일반적인 내용이 아니라, 삶의 원리인 도덕성이다.
그들에 의하면 이 도덕성은 경험의 범주에 해당하는 감성적 앎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성적 직관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순자56), 왕충57), 왕부지58) 등은 이러한 관점을 비판한다.
그들은 앎이란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왕부지는 “태어나면서부터 안다(生而知之).”고 하는 논리에 대해,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 감각이 발달한 동물의 영역에 해당하는 것으로 생각한다.59)
56) 荀子, 勸學, “不登高山不知天之高也. 不臨深谿不知地之厚也”
57) 論衡 卷4, 實知篇, “巢居者先知風穴居者先知雨.” 論衡 卷4, 實知篇,
“不學不問不能知也. 不學自知, 不問自曉, 古今行事未知有也.”
58) 尙書引義 說命中二, “知非先, 行非後. 行有餘力而求知, 聖言結矣. 而孰與易
之乎?” 四書訓義下, 中庸, “今夫飮食之有味, 卽在飮食之中也. 知其味而後安
於飮食, 飮之食之而味乃知.”
59) 讀四書大全說 論語, “夫人之所以異於禽獸者, 以其知覺之有漸, 寂然不動, 待
感而通也. 若禽之初出於鷇, 獸之初墜於胎, 其啄齕之能, 趨避之智, 啁啾求母, 呴噳
相呼, 及其長而無以過. 使有人焉, 生而能言, 則亦智侔雛麑, 而爲不祥之尤矣. 是何
也? 禽獸有天明而無己明, 去天近而其明較現. 人則有天道(命)而抑有人道(性), 去天
道遠而人道始持權也. 耳有聰, 目有明, 心思有睿知, 入天下之聲色而硏其理者, 人
之道也. 聰必歷於聲而始辨, 明必擇於色而始晰, 心出思而得之, 不思則不得也. 豈
驀然有聞, 瞥然有見, 心不待思, 洞洞輝輝, 如螢乍曜之得爲生知哉? 果爾, 則天下之
生知, 無若禽獸. 故羔雛之能親其母不可謂之孝, 唯其天光乍露而於己無得也. 今乃
曰‘生而知之’者, 不待學而能, 是羔雛賢於野人, 而野人賢於君子矣.”
왕부지에 의하면 인간은 태어날 때에는 감각의 발달이 동물보다
느리지만 시간의 축적에 비례하여 동물보다 나은 이성적 인식으로
말미암아 사물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 이것은 왕부지가 앎의 시작
은 감각 기관을 통한 감성적 앎으로부터 시작하여 개념과 판단과 추
론이 동원되는 이성적 앎의 통일에 의해 사물의 현상과 본질을 모두
파악할 수 있게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앎의 기초가 되는 감각적 활동이 바로 행함이므로 행
함이 앎보다 앞선다. 이것은 결국 행함이 앎보다 앞서지만 행함 속에
서 앎이 형성되고, 앎의 자율성에 의해 앎이 행함을 인도하기도 한
다. 따라서 행함과 앎은 서로 긴밀하게 관계하며 서로를 견인하므로,
행함에서 앎이 나오고, 다시 앎에서 행함이 나오는 과정을 거친다.60)
60) 讀四書大全說 大學, “先儒分致知格物屬知, 誠意以下屬行, 是通將大學分
作兩節. 大分段處且如此說, 若遂項下手工夫, 則致知格物亦有行, 誠意以下至平天
下亦無不有知. 格致有行者, 如人學奕碁相似, 但終日打譜, 亦不能盡達殺活之機;
必亦與人對奕, 而後譜中譜外之理, 皆有以悉喩其故. 且方其進著心力去打譜, 已早
屬力行矣. 蓋天下之事固因豫立而亦無先知完了方纔去行之理. 使爾, 無論事到身
上, 繇你從容去致知不得; 便儘有暇日, 揣摩得十餘年, 及至用時, 不相應者多矣.
如爲子而必誠於孝, 觸目警心, 自有許多痛癢 相關處, 隨在宜加細察, 亦硬靠著平
日知道的定省溫淸樣子做不得. 是故致知之功, 非抹下行之之功於不試, 而姑儲其知
以爲誠正之用. 是知中亦有行也. 知此, 則誠意以下亦有知之之功, 亦可知矣. 如意
纔 起處, 其爲善爲惡之分界有顯然易別者, 夙昔所致之知可見其效, 而無待於更審
矣. 其疑善疑惡, 因事幾以決, 亦有非夙昔之可豫知者. 則方愼之際, 其加警省而爲
分別也, 亦必用知.”
왕부지의 이러한 행함에서 앎이 나오고, 앎에서 행함으로 이어지
며, 다시 행함에서 앎으로 나아간다는 앎과 행함의 변증법적 통일의
논리는 애사기와 모택동 등 중국식 마르크스주의철학자들에게 영향
을 미친다.
애사기는 행함이 앎의 기초이고, 행함이 없으면 아는 것이 많아질
수도 없고 발전할 수도 없다고 지적하며, 행함을 앎보다 앞서는 것으
로 여긴다.61)
61) 艾思奇文集Ⅰ, 大衆哲學1934年(1981: 201쪽)
그에 의하면 앎은 최초로 감각 기관의 활동을 통해 이
루어고, 이 앎은 행함이 진행되면서 계속 발전할 수 있다. 이것은 행
함과 앎이 긴밀하게 관계하여 상호전화를 통해 행함에서 앎으로 이
어지고, 앎에서 행함으로 이어지며, 다시 행함에서 다시 앎으로 이어
진다는 것으로 왕부지의 견해를 계승한 것이다.
또한 그는 “인간의 주관적인 인식은 다만 그것이 실천 속에서 항
상 객관적인 상황에 부합할 때에 증명되는 것이고, 다만 그것이 끊임
없이 실천의 발전에 따라 발전할 수 있을 뿐이며, 객관적인 상황의
추이와 변화에 따라 변화할 때에야 비로소 항상 그것의 객관 진리성
을 보존할 수 있다.”62)고 지적한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결국 객관‧
물질‧존재가 일차적이고, 주관‧ 정신‧사유는 이차적인 것이며, 인간
의 주관의식은 객관 물질의 발전 법칙을 반영한다는 변증법적 유물
론의 관점을 수용한 것이다.63)
62) 艾思奇, 毛泽东对马克思主义哲学的贡献, 毛泽东同志發展了眞理論(1983: 181
쪽), “人们的主观认识, 只有当它在实践中被證明经常符合于客观的情况的时候, 只
有它能够不断地随着实践的发展而发展, 随着客观情况的推移转变而推移转变的时
候, 才能经常保持它的客观真理性.”
63) 이철승(2002: 144쪽), 유가사상과 중국식 사회주의 철학
모택동 또한 행함이 앎보다 앞선다는 전통 유가철학의 영향을 받
는다. 그는 앎과 행함의 선후 관계에 대해 「실천론」에서 상세하게
논한다.
모택동은 인간이 어떤 사물을 안다는 것에 대해, 바로 어떤 사물의
현상이 인간의 감각 기관을 통하여 인간의 두뇌 속에 반영되는 것이
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는 이 반영이 거울에 비치는 외부 사물과 같
이 정지된 상태에서 수동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감각 기관의 활동
을 통해 능동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그가 앎이란
고도의 추상적인 이성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 기관의
실천 활동을 통해 시작하는 것임을 밝히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앎은 우리의 오관이 직접 받아들인 외계의 인상으로
부터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에 감각은 앎의 기점으로서 주관으로 하
여금 직접 외부 현상에 접촉한다. 이것은 외계 사물이 인체 밖의 기
관에서 작용한 결과이다. 결국 인간의 앎은 외부 사물에 대한 주관의
작용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에 직접 외계에 반영하는 감각이
앎을 이루는 시초이다.64)
64) 이철승(2007: 116~117쪽)
그러나 모택동은 이러한 감각 기관에 기초하는 감성적인 앎은 감
각 기능의 가변성으로 말미암아 부분적이고 현상적인 파악에 그치고,
전체적이며 본질적인 파악을 하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는 전
체를 체계적이며 본질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기능은 경험의 축적에
비례하여 발전하는 이성적인 앎이 동원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할 것
으로 생각한다.
그에 의하면 “이성적 인식은 감성적 인식에 의존하고, 감성적 인식은 이성적 인식으로 발전하는데, 이것이 바로 변증법적 유물론의 인식론이다.”65)
이것은 그가 앎과 행함의 선후 문제에서는 행함이 앎보다 앞서지만, 감각과 지각에 의존하는 감성적 앎의 불완전성을 극복하기 위해 이성적 앎이 동원되어야 한다는 왕부지의 관점과 마르크스주의에서 중시하는 유물변증법의 논리를 수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비록 이성적 앎이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는 면에 도움이 될 수 있을지라도, 그 앎이 행함을 배제하는 것이라면 불완전할 수밖에 없을 것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는 “많은 이론의 진리성은 불완전한 것인데, 실천의 검증을 통하여 그들의 불완전성을 교정한다.
많은 이론은 잘못된 것인데, 실천의 검증을 통하여 그 잘못을 교정한다. 이른바 실천은 진리의 기준이다.”66)고 하여, 행함을 통하여 앎의 완성도가 높아질 수 있음을 지적한다.
결국 그는 “인식은 실천으로부터 시작하고, 실천을 통하여 이론적인 인식에 도달한 다음 다시 실천으로 돌아가야 한다. 인식의 능동작용은 감성적 인식에서 이성적 인식에 이르는 능동적인 비약에서
드러날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이성적 인식으로부터 혁명적 실천에 이르는 이러한 비약에서
드러나야 한다. 세계의 법칙성을 파악한 인식은 반드시 그것을 다시 세계를 변혁하는 실천 속으로 돌아
가게 하고, 생산의 실천과 혁명적 계급투쟁과 민족투쟁의 실천과 과학실험의 실천 속에서 사용하여야 한다.”67)고 하고, “실천‧인식‧ 재실천‧ 재인식이라는 형식이 끝없이 순환 반복하며, 실천과 인식의 매
순환의 내용은 모두 비교적 높은 정도에 이른다.”68)고 지적한다.
65) 毛泽东选集 第1卷, 實踐论1937年7月(1967: 268쪽)
66) 毛泽东选集 第1卷, 實踐论1937年7月(1967: 269쪽)
67) 毛泽东选集 第1卷, 實踐论1937年7月(1967: 268쪽)
68) 毛泽东选集 第1卷, 實踐论1937年7月(1967: 273쪽)
이처럼 모택동은 앎과 행함에 대해 유물변증법의 인식론과 왕부지를 중심으로 하는 유가철학의 지행관을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중국화에 기여하고자 하였다.
IV. 맺는 말
‘과학’과 ‘민주’를 슬로건으로 내세운 서구사상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전통철학에 대한 회의가 증가하던 근대전환기에 중국의 지식인들은 가치관의 혼재를 경험하였다.
이 무렵 많은 사조가 중국에 소개되고 전파되었다.
현재 중국 정부의 주요 이념인 마르크스주의철학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생존하던 1870년대에 중국에 소개된 이래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20세기 초에 일부의 지식인들에
의해 왜곡된 상태로 소개되기도 했지만, 1917년 옛 소련의 볼셰비키혁명이 성공을 거두면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 대상이 되었다.
이 무렵 진독수와 이대조 등이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적극적으로 중국 사상계에 소개하였다.
이 기간에 유가철학은 일부의 학자들에 의해 옹호되기도 했지만,
다른 학자들은 유가철학을 낡은 이념으로 여기며 비판하였다.
특히 ‘5‧4 신문화 운동’시기에 유가철학은 봉건주의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한 것으로 이해되어
많은 지식인들로부터 타도의 대상이 되었다.
이 무렵의 마르크스주의철학자들 역시 대부분 유가철학을 계승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청산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다.
1920년대의 중국철학계는 이른바 ‘백가쟁명‧백화제방’의 분위기를연출하였다.
이 기간에 많은 철학자들이 유학을 포함한 전통 철학,과학, 부르주아 민주주의, 실용주의, 아나키즘, 마르크스주의 등 온갖사조의 의미에 대해 치열하게 논쟁을 전개하였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1921년에 중국공산당을 창립하고, 마르크스주의의 이념을 적극적으로 전파하였다. 그동안 역사적 유물론에 입각하여 마르크스주의철학을 지지했던 그들은 1923년에 구추백에 의해 소
개된 변증법적 유물론을 접한 후부터 마르크스주의철학을 심층적으로 탐구하였다.
그들은 이와 관련된 번역서와 논문과 저서 등 적지 않은 연구 성과를 냈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유가철학에 대해 여전히 극복해야 할 낡은 이념으로 여겼다.
1930년대에 중국의 마르크스주의철학자들은 마르크스주의철학을 새로운 관점으로 대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또한 유가철학을 비롯한 전통철학에 대해서도 이전의 시각과 다른 견해를 피력하였다.
이전의 마르크스주의철학자들은 대부분 마르크스주의철학을 중국에 적용시키는 문제에 대해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였다.
그러나 애사기와 모택동을 중심으로 하는 1930년대에 왕성하게 활동했던 마르크스주의철학자들은 마르크스주의철학의 보편 원리가 중국의 특수한 상황과 유기적으로 결합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들은 전통의 유가철학에 대해서도 이전의 마르크스주의철학자들처럼 맹목적으로 비판하지 않았다.
또한 그들은 유가철학 가운데 비판할 것과 계승할 것을 분별하고자 하였다.
곧 그들은 유가철학 가운데 관념론적 경향과 신비주의적인 내용과 모호한 사유 방식을 비판하고,
유물변증법과 ‘행선지후(行先知後)’관과 백성‧공동체‧공의로움 등을 중시하는 관점을 계승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그들이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특수와 보편 등 서로 다른 성질의 유기적 결합에 의한 변증법적 통일을 지향하는 것이다.
곧 그들은 구체적인 실상을 떠나지 않은 상태에서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현실을 토대로 하여 이론이 성립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마르크스주의철학의 중국화를 통한 중국식 마르크스주의철학을
정립하고자 하였다.
유가철학, 특히 왕부지를 중심으로 하는 기철학은 그들이 중국식 마르크스주의철학을 정립하는 과정에 중요하게 활용되었다.
이러한 그들의 노력은 20세기 후반의 장대년(張岱年: 1909~2004, 장다이녠) ‧임계유(任繼愈: 1916~2009, 런지위) ‧황남삼(黃楠森: 1921~2013, 황난선) ‧형분사(邢賁思: 1930~ , 씽펀스) ‧ 방극립(方克立: 1938~, 팡커리) ‧허전흥(許全興: 1941~ , 쉬췐씽) 등의 ‘비판계승론’자들에게 계승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중국의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도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처럼 전통의 유가철학은 지난 100여 년 동안 중국철학계에서 시대의 필요에 의해 부침을 반복해 왔다. 이것은 중국철학계가 어떤 이론을 교조적으로 받아들이거나, 맹목적으로 부정하지 않는다는 사실
을 보여준다.
중국철학계의 이러한 풍토는 “옛것은 현재를 위해 사용한다(古爲今用).”고 하는 그들의 실사구시적인
태도가 과거와 현재는 물론 앞으로도 여전히 유효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참고문헌
甘阳. 2007. “中国道路:三十年与六十年”. 讀書
瞿秋白文集 第2卷. 1988. 人民出版社
論語
論衡
讀四書大全說
孟子
毛泽东选集 第1 2卷. 1967. 人民出版社
四書訓義
思問錄
尙書引義
石訓. 1996. “解剖傳統文化是馬克思主義中國化的必然要求”. 馬克思主
義與儒學(崔龍水馬振鋒主編). 當代中國出版
荀子
习近平. 2014. “在纪念孔子诞辰2565周年国际学术研讨会暨国际儒学联合
会第五届会员大会开幕会上的讲话”. http://www.cntheory.com(理论
网).
艾思奇文集Ⅰ Ⅱ. 1981. 北京人民出版社.
艾思奇. 1983. 毛泽东对马克思主义哲学的贡献, 宁夏人民出版社
王伟光主编. 2014. 新大众哲学(七卷), 中国社会科学出版社
劉少奇選集 上卷. 1981. 人民出版社
李大钊. 1919. “我的馬克思主義觀”. 新靑年 第6卷5號, 6號
二程遺書
이철승 옮김. 2000. “옮긴이의 말”. 모택동사상과 중국철학. 畢劍橫저.
예문서원
이철승. 2002. 유가사상과 중국식 사회주의 철학. 도서출판 심산문화
______. 2007. 마오쩌둥(毛澤東) :현대 중국의 초석과 철학 사상. 태
학사
______. 2014. “현대 중국의 ‘중국의 꿈’관과 유가철학”. 중국학보 70
집. 한국중국학회
李澤厚. 1999. 中國思想史論下. 安徽文藝出版社
霍文琦明海英. 2014. “我们这个时代需要哲学”. <http://www.rmlt.com.cn
(人民论坛网)>
張子正蒙注
傳習錄
正蒙
鍾家棟王世根主編. 1988. 20世紀:馬克思主義在中國. 上海人民出版社
근대전환기 중국철학계의 연구 동향과 특징: 유가철학과 마르크스주의철학의 관계를 중심으로 313
周易內傳
周易外傳
朱子語類
中庸
陈独秀李大钊譯. 1919. “共産黨宣言” 第二章. 每週評論 第16號.
陈独秀李大钊譯. 1919. “共産黨宣言” 第一章. 國民 第2卷1號.
春秋繁露
漢書
胡锦涛. 2012. “中国共产党第十八次全国代表大会开幕, 胡锦涛同志作报
告”. <新华社>, 2012年11月8日. http://www.cntheory.com(理論網)
[논문 요약]
‘과학’과 ‘민주’를 슬로건으로 내세운 서구사상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전통철학에 대한 회
의가 증가하던 근대전환기에 중국의 지식인들은 가치관의 혼재를 경험하면서 새로운 대안을
강구하였다. 현재 중국 정부의 주요 이념인 마르크스주의철학은 1917년 옛 소련의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을 거두자, 진독수와 이대조 등에 의해 적극적으로 중국 사상계에 소개되었다.
이 기간에 유가철학은 일부의 학자들에 의해 옹호되기도 했지만, 봉건주의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한 것으로 이해되어 많은 지식인들로부터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 무렵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들 역시 대부분 유가철학을 계승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청산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다.
그러나 1930년대에 중국의 마르크스주의철학자들은 유가철학을 새로운 관점으로 대하였
다. 특히 애사기와 모택동을 중심으로 하는 1930년대에 활동했던 마르크스주의철학자들은 마
르크스주의철학의 보편 원리가 중국의 특수한 상황과 유기적으로 결합해야 할 것으로 생각
하였다. 그들은 전통의 유가철학에 대해서도 비판할 것과 계승할 것을 분별하였다. 또한 그
들은 유가철학 가운데 관념론적 경향과 신비주의적인 내용과 모호한 사유 방식을 비판하고,
유물변증법과 ‘행선지후(行先知後)’관과 백성 공동체 공의로움 등을 중시하는 관점을 계승해
야 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것은 그들이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특수와 보편 등 서로 다른 성질의 유기적 결합
에 의한 변증법적 통일을 지향하는 것이다. 곧 그들은 구체적인 실상을 떠나지 않은 상태에
서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현실을 토대로 하여 이론이 성립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마르
크스주의철학의 중국화를 통한 중국식 마르크스주의철학을 정립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그들의 노력은 20세기 후반의 장대년, 임계유, 황남삼, 방극립 등의 ‘비판계승론’자
들뿐만 아니라, 오늘날 중국의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계승되고 있다.
이처럼 전통의 유가철학은 지난 100여 년 동안 중국철학계에서 시대의 필요에 의해 부침
을 반복해 왔다. 이것은 중국철학계가 어떤 이론을 교조적으로 받아들이거나 맹목적으로 부
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중국철학계의 이러한 풍토는 “옛것은 현재를 위해 사용한
다.(古爲今用)”고 하는 그들의 실사구시적인 태도가 과거와 현재는 물론 앞으로도 유효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주제어: 근대전환기 중국철학, 유가철학, 마르크스주의철학, 마르크스주의철학의 중국화
<Abstract>
Research Trends and Hallmarks of Chinese Philosophy in the
Early 20th Century: A Study on the Dynamics between
Confucianism and Marxism
Lee, Cheol-Seung. Chosun University
Chinese intellectuals were exposed to varied value systems and sought to figure out new alternatives in the early 20th century in which the Western intellectual traditions were expanding their influence on China under the slogan of “science” and “democracy” and Chinese traditional philosophies were facing enormous challenges.
Marxism, the state ideology of Communist China, was introduced to China by Chen Duxiu 陳獨秀
(1879~1942) and Li Dazhao 李大釗(1889~1927) after the successful revolution by the Bolshevists in 1917.
At the time, many argued against Confucianism pointing out that it had supported the feudal social system and Confucian teachings became the target of criticism. Chinese Marxist philosophers also regarded Confucianism as something to be illuminated. However, the 1930s witnessed that some Chinese marxists treated Confucianism from a positive viewpoint. Ai Siqi 艾思奇(1910~1966) and Mao zedong 毛澤東(1893~1976), for example, held that the universal principles of Marxism should go hand in hand with the unique Chinese situation, and they distinguished what should be accepted from what should be criticized in Confucianism.
They criticized the idealist and mystical aspects of Confucianism and asserted that the materialist and communalist elements of Confucianism and its emphasis on action over knowledge should be integrated into Marxist approaches.
Their view can be understood as an attempt to pursue a dialectical and organistic unity of disparate
elements such as the East and the West, tradition and modernism, particular and universal, etc. In other words,they sought to build up a theoretical framework based on reality, and attempted to transplant marxism based on Chinese reality. Their efforts have been succeeded by a number of scholars of the late 20th century called “critical successors” who includes Zhang Dainian 張岱年(1909~2004), Ren Jiyu 任繼愈(1916~2009) Huan Nansen 黃楠森(1921~2013) and Fang Keli 方克立(b. 1938). Contemporary Chinese marxists are also in line with their views.
Confucianism went through ups and downs owing to the changes of historical reality over the last one
hundred years. This shows that Chinese scholars don’t accept theories dogmatically but attempt to adapt them to historical reality, In other words, Chinese tradition throughout history values empirical approaches to the challenges they face, which demonstrates that the principle “Gu wei jin yong”古爲今用is still viable at any given time.
Keyword: Chinese philosophy in the early 20th century, Confucianism,
Marxism, sinicization of Marxism
'철학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자철학에서 ‘도’의 존재론적 지위/윤천근.안동대 (0) | 2024.11.25 |
---|---|
논어에 나타난 ‘권도(權道)’의 논리 구조와 의미 -주희와 왕부지의 관점을 중심으로-/이철승.경희대 (0) | 2024.11.25 |
王夫之의 양명학 이해 및 비판에 관한 연구 /진성수.성균관대 (0) | 2024.11.25 |
尤庵 宋時烈의 栗谷 心性論 이해/유 연 석.충북대 (0) | 2024.11.25 |
나의 古典 孟子와 莊子/ 안병주.성균관대 (0) | 2024.11.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