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요약>
尤庵 宋時烈은 17세기 栗谷학파의 지도자로서 退溪학파와의 대결 구도 속
에서 栗谷 心性論에 대해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수용하는 태도를 견지하였다.
心是氣說에 대해서는 性卽理說과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있는 이론이라고 설명
하면서 先儒들의 학설 가운데 관련된 내용들을 근거로 제시하여 그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性心情意一路說에 대해서는 純善한 本然之性인 五
性으로부터 善惡이 혼재한 七情이 유발된다는 栗谷의 理일원적 性情論을 충실
하게 계승하면서, 이를 ‘모든 事物의 근본은 理이므로 天下에 理를 벗어난 사
물[理外之事]이 없고 性을 벗어난 사물[性外之物]이 없다’는 언명으로 정식화
함으로써 理일원적 관점을 강화하였다.
尤庵은 이러한 관점을 人心道心說에서 보다 철저하게 적용하여 人心과 道心
을 모두 本然之理로 규정하였다. 즉 本然之性으로부터 ‘直出’하여 人心이 中節
한 것을 ‘人心 本然의 體段’이라고 명명하고, 本然之性으로부터 ‘傍出’하여 人心
이 不中節한 경우를 人心이 왜곡 변질된 人欲으로 간주함으로써, 人心이 원칙
적으로 善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이와 같이 尤庵은 전반적으로 栗谷의 心性論을 지지하고 계승하는 태도를
취하지만, 유독 四端의 개념에 대해서 만큼은 이견을 보이고 있다. 氣發理乘一
途說에 입각할 때, 七情에 中節과 不中節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四端에도 中
節과 不中節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四端과 七情은 동일한 것으로 간주된다.
四端七情論에서 특기할 만한 사항은 尤庵이 情의 포섭관계를 규명하는 부분
이다. 즉 本然之性으로부터 유발되는 수만 가지의 情은 四端과 七情으로 통합
되고, 四端과 七情은 惡(오)와 欲 두 가지로 통합되며, 惡(오)와 欲은 惻隱 한
가지로 통합된다는 것이다. 이를 역으로 재구성하면 仁의 발현인 惻隱 한 가지
가 생명현상의 파괴를 부정하는 惡(오)와 생명현상의 고양을 긍정하는 欲의 두
가지로 분화되고, 惡(오)와 欲은 다시 四端과 七情으로 분화되며, 四端과 七情
은 수만 가지의 情으로 분화되는 것으로 설명된다. 이러한 尤庵의 견해는 四端
을 食色과 대비시키는 孟子의 문맥에서 벗어난 것으로, ‘天下에 理를 벗어난
사물[理外之事]이 없고 性을 벗어난 사물[性外之物]이 없다’는 理일원적 性情
論의 논리적인 전개가 도달한 궁극적인 결론이라고 생각된다.
주제어 : 理, 氣, 五性, 四端, 七情, 人心, 道心, 中節, 不中節
1. 머리말
尤庵 宋時烈(1607-1689)은 17세기 朋黨정치가 격화되던 시기에 栗
谷학파를 기반으로 한 西人정파의 학문적 정치적 구심점 역할을 한 인
물이다. 尤庵은 退溪학파를 기반으로 한 南人정파와 정국의 주도권 장
악을 둘러싸고 대결하였는데, 그 일환으로 추진된 것이 栗谷 李珥
(1536-1584)와 牛溪 成渾(1535-1598)의 文廟從祀이다. 1649년(효종
즉위년) 11월 太學生 洪葳(1620-1660) 등 수백 명이 栗谷과 牛溪의
文廟從祀를 건의한 疏를 올린 일이 발단이 되었다.1) 그러자 이듬해 2
월 영남 進士 柳㮨(1602-1662) 등 900여 명이 疏를 올려 이들의 文
廟從祀가 부당함을 논하였는데, 그 가운데 栗谷의 학문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다.
또한 李珥의 학문은 오로지 氣字를 主로 하고[主氣字] 氣를 理로
오인하여 理와 氣를 一物로 여기고는 다시 分別를 두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心은 氣이고[心是氣], 四端과 七情은 모두 氣發이다’라고
여기는 데에 이르렀으니, 그 病根은 陸家의 道와 器를 구분하지 않
는 견해에서 나온 것으로 그 해로움은 釋氏의 ‘作用이 性의 體이다’
라는 것과 같습니다. 理와 氣의 분별은 학문의 生死가 달린 갈림길
로, 天理와 人欲의 정밀한 경계 및 吾道와 異端의 同異・得失이 모두
여기에서 판가름나는 것입니다.2)
1) 朝鮮王朝實錄, 孝宗 즉위년 11월 23일자 기사 참조.
2) 朝鮮王朝實錄, 孝宗 1년 2월 22일자 기사. 且珥之學, 專主氣字, 認氣爲理, 故以理
氣爲一物, 而無復分別. 至以爲心是氣也, 四端七情, 皆氣之發, 是其病根, 元出於陸家
不分道器之見, 其爲害, 同歸於釋氏作用爲性之體也. 蓋理氣之辨, 乃學問生死門路也,
天理人欲之界至分數, 吾道異端之同異得失, 莫不於是乎判焉.
전체적인 요지는 栗谷의 학문이 主氣, 즉 氣를 위주로 하여 理와 氣
를 一物로 간주한 결과 ‘心은 氣이고[心是氣], 四端과 七情은 모두 氣
發이다’라는 주장을 하게 되었는데, 그 출처는 陸九淵(1139-1192)의
道・器를 분별하지 않는 견해이고 그 해로움은 佛敎의 ‘作用하는 것이
性이다[作用是性]’라는 說과 같다는 것이다.
退溪 李滉(1501-1570)은 四端의 내용을 타자의 생명현상을 제고하
는 것으로 이해하여 道心과 일치시키고, 이를 本然之性의 발현으로 간
주하여 ‘理發氣隨’로 설명하면서 ‘主理’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七情의
내용을 자아의 생명현상을 제고하는 것으로 이해하여 人心과 일치시키
고, 이를 氣質之性의 발현으로 간주하여 ‘氣發理乘’으로 설명하면서
‘主氣’로 규정하였다.3) 그리고 “理는 존귀하고 氣는 비천하다”4)고 하
여 氣에 대한 理의 가치론적 우위를 명시함으로써, 人性의 純善함을
천명하는 朱熹(1130-1200) 性卽理說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退溪의 性卽理說은 개별자의 생존욕구를 초월하는 순수한 도덕
성을 理에 귀속시키고 惡으로 유도될 위험성을 지닌 육체적 욕망을 氣
와 결부시키는 理氣이원적 구도 하에 人性을 理로 규정하는 구조로 이
루어져 있다.
退溪학파의 이러한 관점에서는 ‘心은 氣이고[心是氣], 四端과 七情은
모두 氣發理乘이다’라는 栗谷의 주장은 主氣, 즉 氣를 위주로 하는 이
론으로서, 朱熹 性卽理說의 근본적인 취지에 위배되는 것으로 간주되
었을 것이다.
柳㮨 등의 疏가 있은 이듬해, 45세의 尤庵은 그 내용을 조목조목 반
3) 退溪全書, 권16, 書, 答奇明彦-論四端七情第一書(改本). 故愚嘗妄以爲情之有四端
七情之分, 猶性之有本性氣稟之異也. 然則其於性也, 旣可以理氣分言之, 至於情, 獨不可
以理氣分言之乎? ; 退溪全書, 권16, 書, 答奇明彦-論四端七情第二書. 大抵有理發
而氣隨之者, 則可主理而言耳, 非謂理外於氣, 四端是也. 有氣發而理乘之者, 則可主氣
而言耳, 非謂氣外於理, 七情是也.
4) 退溪全書 권12, 書, 與朴澤之. 人之一身, 理氣兼備, 理貴氣賤.
박하는 擬兩賢辨誣疏를 작성하였는데, 그 가운데 栗谷의 학문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는 다음과 같다.
理와 氣의 二物이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가 되어 신묘하
게 결합되어 있으나 또한 뒤섞이지 않는 실상을 안다면, 李珥가 논한
바는 道體를 환하게 보고 前聖이 밝히지 못한 것을 밝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른바 “理와 氣를 一物로 여겨 氣를 理로 오인한다”는 병
통은 크게 맞지 않는 제목이며, 陸氏가 道器에 어두운 것과 釋敎가
作用을 말한 것은 黑白과 氷炭이 스스로 분별되는 것과 같으니, 한층
李珥의 高明하고 純正한 학문[高明純正之學]이 남달리 뛰어남을 알
수 있습니다. 前古의 聖賢들이 義理를 논하는데 익숙하게 강명하기를
싫어하지 않았고 구차하게 동조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안다면, 李珥
가 互發이 틀렸음을 논변한 것은 그 의도가 道를 밝히는 데 있고 李
滉을 공격하는 데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聖賢들이 心을 논
함에 知覺을 위주로 하였는데 知覺이 바로 氣임을 안다면, 李珥의
“心은 氣이다”라는 說은 말이 명쾌하여 聖訓에 신묘하게 들어맞아서
後學에게 功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5)
栗谷이 理氣의 妙合관계를 규명한 것은 氣를 理로 간주하는 異端의
說과는 무관하고, 氣發理乘一途說을 제시하여 退溪의 互發說을 비판한
것은 정당하며, 心是氣說은 聖賢의 가르침 가운데 근거가 있으므로 後
學에게 功이 있다는 것이 대체적인 요지이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栗
5) 宋子大全, 권21, 疏, 擬兩賢辨誣疏. 知理氣二物, 一而二二而一, 渾淪妙合, 亦不夾雜
之實, 則知珥之所論, 洞見道體, 發前聖所未發. 所謂理氣一物, 認氣爲理之病, 太不著
題, 而陸氏之昧道器, 釋敎之言作用, 不翅黑白氷炭之自別, 益見珥高明純正之學, 迥出
尋常者矣. 知前古聖賢論說義理, 不厭熟講, 而未嘗苟同, 則知珥論辨互發之差, 意在明
道, 而未嘗有意於攻滉也. 知聖賢論心以知覺爲主, 而知覺卽氣, 則知珥心是氣也之說,
說得明快, 妙契于聖訓, 而有功於後學也.
谷의 학설을 ‘高明하고 純正한 학문[高明純正之學]’이라고 지칭함으로
써, 栗谷이 孔・孟으로부터 朱熹로 이어지는 정통 儒學의 계승자로서
前聖이 미처 밝히지 못한 새로운 학설을 수립한 뛰어난 학자라고 평가
하고 있다.
본고에서는 이와 같이 退溪와 栗谷의 학문적 경향이 첨예하게 대립
하는 상황에서, 栗谷학파의 지도자인 尤庵이 栗谷의 학설을 어떻게 이
해하고 계승하고 있으며 또 어떤 점에서 차별화되는가라는 문제의식
하에, 栗谷 心性論의 전개 양상을 탐색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栗
谷 心性論을 心是氣說・性心情意一路說・人心道心說・四端七情論의 네 가
지 주제로 분류하여 고찰하고, 다음으로 각각의 주제에 대한 尤庵의
견해를 규명하는 방식으로 논의를 진행하겠다.
2. 栗谷 李珥의 心性論
(1) 心是氣說
栗谷의 心性論이 主氣的 경향을 띠는 것으로 간주될 때, 그 주요한
근거로 제시되는 학설이 이른바 心是氣說이다. “心은 氣이다[心是氣]”
라는 명제는 栗谷이 牛溪 成渾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단 한 차례만 발
견되는 표현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또한 朱子는 “心의 虛0知覺은 하나일 뿐인데, 혹은 性命之正에
근원하고 혹은 形氣之私에서 생겨난다”고 하여 먼저 하나의 心字를
앞에 놓았으니, 心은 氣이다[心是氣也]. 혹은 근원하고 혹은 생겨나
되 心의 發함이 아님이 없으니, 어찌 氣發이 아니겠는가? 心 가운데
尤庵 宋時烈의 栗谷 心性論 이해 41
있는 理가 바로 性이므로 心이 發하는데 性이 發하지 않을 이치가
없으니, 어찌 理乘이 아니겠는가?6)
우선 栗谷의 心是氣說이 朱子의 或原或生說을 氣發理乘一途說의 관
점에서 해석하는 과정에서 제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인용문 중에 “心
은 氣이다”라는 문장과 “心 가운데 있는 理가 바로 性이다”라는 문장
을 합쳐보면 ‘性은 理이고, 心은 氣이며, 理는 氣 가운데 내재한다’라
는 의미로 정리된다. 이는 性과 心을 각각 理와 氣로 규정하고, 양자의
포함관계를 설명하는 내용이다. 따라서 ‘心是氣’의 명제는 ‘性卽理’의
명제와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있는 것으로, 이를 主氣的 경향과 연결
시키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겠다.
그런데 心을 氣로 간주하는 이러한 입장은 栗谷 心性論의 전 체계 속
에서 제한적으로 적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天理가 사람에게 부여된 것을 性이라 하고, 性과 氣를 합하여 一
身을 主宰하는 것을 心이라 한다.7)
이 인용문은 ‘性은 理이고, 心은 理와 氣가 결합된 것이다’라고 정리될
수 있는데, 이는 “心은 氣이다[心是氣]”라는 명제와 배치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은 栗谷이 心과 性의 관계에 대하여 두 가지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는 점에 기인한다.
6) 栗谷全書, 권10, 書二, 答成浩原. 且朱子曰, ‘心之虛0知覺, 一而已矣, 或原於性命
之正, 或生於形氣之私’, 先下一心字在前, 則心是氣也. 或原或生而無非心之發, 則豈非
氣發耶? 心中所有之理, 乃性也, 未有心發而性不發之理, 則豈非理乘乎? 或原者, 以其
理之所重而言也, 或生者, 以其氣之所重而言也, 非當初有理氣二苗脈也. 立言曉人, 不
得已如此, 而學者之誤見與否, 亦非朱子所預e也. 如是觀之, 則氣發理乘與或原或生之
說, 果相違忤乎?
7) 栗谷全書, 권14, 說, 人心道心圖說. 天理之賦於人者, 謂之性, 合性與氣而爲主宰於
一身者, 謂之心.
대저 有形有爲이면서 動靜하는 것은 氣이고, 無形無爲이면서 動靜
에 내재하는 것은 理이다. 理가 비록 無形無爲이지만, 氣는 理가 아
니면 근본하는 바가 없다. 그러므로 “無形無爲이면서 有形有爲의 主
가 되는 것은 理이고, 有形有爲이면서 無形無爲의 器가 되는 것은
氣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따라서 性은 理이고, 心은 氣이며, 情은
心의 動이다. 先賢이 心과 性에 대하여 합하여 말한 것[合而言之者]
이 있으니 孟子가 “仁은 人心이다”라고 한 것이고, 나누어 말한 것
[分而言之者]이 있으니 朱子가 “性은 心의 理이다”라고 한 것이다.
나누어도 그 뜻을 얻고, 합해도 그 뜻을 얻은 연후에야 理氣를 아는
것이다.8)
心과 性의 관계는 ‘합하여 말한 것[合而言之者]’과 ‘나누어 말한 것
[分而言之者]’이 있는데, 孟子가 “仁은 人心이다”라고 한 것은 ‘합하여
말한 것[合而言之者]’의 사례이고, 朱子가 “性은 心의 理이다”라고 한
것은 ‘나누어 말한 것[分而言之者]’의 사례라는 것이다. 따라서 栗谷의
언급 가운데 ‘心은 理와 氣의 결합이다’라고 한 것은 ‘合而言之者’ 즉
종합의 관점이 적용된 것이고, “心은 氣이다[心是氣]”라고 한 것은 ‘分
而言之者’ 즉 분석의 관점이 적용된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그런데 ‘分而言之者’의 관점에서 ‘性은 理이고[性卽理], 心은 氣이다
[心是氣]’라고 했을 때, 無形無爲의 理는 主가 되고 有形有爲의 氣는
器가 되는 것으로 理와 氣의 역할이 구분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理와 氣는 각각 ‘주인[主]’과 ‘도구[器]’의 위상으로 설정
되고 있다. 도구[器]는 그 자체 내에 어떠한 방향성도 지니지 못하며,
8) 栗谷全書, 권12, 書四, 答安應休. 大抵有形有爲而有動有靜者, 氣也. 無形無爲而在動
在靜者, 理也. 理雖無形無爲, 而氣非理則無所本. 故曰無形無爲而爲有形有爲之主者,
理也. 有形有爲而爲無形無爲之器者, 氣也. 是故, 性, 理也. 心, 氣也. 情, 是心之動也.
先賢於心性, 有合而言之者, 孟子曰, 仁人心, 是也. 有分而言之者, 朱子曰, 性者心
之理, 是也. 析之得其義, 合之得其旨, 然後知理氣矣.
오직 주인[主]이 제시하는 목표를 실현하는 것으로 역할이 제한된다.
그렇다면 주인[主], 즉 理가 제시하는 목표란 무엇인가?
太極이 天에 있음을 道라 하고, 人에 있음을 性이라 한다. 元亨利貞은
(天)道가 流行하는 것이고, 仁義禮智는 (人)性이 갖추고 있는 것이다.9)
우주 만물의 총체적인 理를 가리키는 太極이 天道이자 人性이 된다
는 내용이다. 즉 太極은 하늘에서는 元亨利貞이 되어 만물을 化育하는
道가 되고, 인간에게는 仁義禮智가 되어 만물의 化育을 돕는 性이 되
는 것이다. 여기서 理가 ‘생명공동체의 영속적인 유지와 번영’이라는
목적을 함축하고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氣는 다만 理가 제시하는 善
한 목적을 실현하는 도구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따름이다.
性은 곧 理이니, 理는 善하지 않음이 없다. 다만 理는 독립적일 수
없어서 반드시 氣에 머무른 이후에 性이 되는데, 氣에는 淸濁·粹駁의
不齊함이 있다.10)
氣를 지도하는 지위에 있는 理가 보편적으로 善하고 도구적 역할을
수행하는 氣가 淸濁·粹駁으로 차별화된 것은 세계의 근본적인 모습이
다. 淸氣는 理를 완전하게 실현함으로써 善을 성취하지만, 濁氣는 理를
불완전하게 실현함으로써 善을 성취하지 못하고 不善을 파생시킨다.
여기서 현실의 善惡은 전적으로 도구적 역할을 담당하는 氣의 품질차
이에 기인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栗谷 修養論의 과제는 ‘氣質을 교정
9) 栗谷全書, 권20, 聖學輯要二, 修己上, 第4章窮理. 太極在天曰道, 在人曰性.
元亨利貞 道之流行者也, 仁義5智, 性之所具者也.
10) 栗谷全書, 권12, 書四, 答安應休. 大抵性卽理也, 理無不善. 但理不能獨立, 必寓於
氣, 然後爲性, 氣有淸濁粹駁之不齊.
하는 것[矯氣質]’으로 귀결된다.
이렇게 볼 때 ‘性은 理이고[性卽理], 心은 氣이다[心是氣]’라는 栗谷
의 언명은 ‘性은 생명공동체의 번영을 함축하는 理이므로 보편적으로 善
하지만, 心은 淸濁·粹駁의 품질차이를 지닌 氣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性
을 실현하는 도구적 능력에 우열의 차이가 있다’는 내용으로 정리된다.
(2) 性心情意一路說
栗谷의 性心情意一路說11)은 栗谷全書 전체에서 ‘性・心・情・意는 다
만 一路이다[性心情意只是一路]’라는 표현으로 단 한차례 발견된다.
性은 心의 理이고, 情은 心의 動이며, 情이 動한 후에 情으로 인
하여 計較하는 것이 意이다. 만일 心과 性을 둘로 나누면 道와 器가
서로 분리될 수 있고, 情과 意를 둘로 나누면 사람의 心에 두 개의
근본이 있는 것이니, 어찌 큰 잘못이 아니겠는가? 모름지기 性・心・
情・意가 다만 一路이고[性心情意只是一路], 각각의 境界가 있음[各
有境界]을 알아야 어긋남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무엇을 一路라고 하
는가? 心의 未發이 性이 되고, 已發이 情이 되며, 發한 후에 商量하
는 것이 意가 되니, 이것이 一路이다. 무엇을 각각의 境界가 있다고
하는가? 心이 寂然不動할 때는 性의 境界이고 心이 感而遂通할 때는
情의 境界이며 感하는 바에 따라 紬繹商量할 때는 意의 境界이니,
다만 하나의 心에 각각의 境界가 있는 것이다.12)
11) 栗谷의 性心情意一路說은 일반적으로 心性情意一路說로 명명된다. 그러나 栗谷
全書 가운데 ‘心性情意一路’라는 문구는 발견되지 않는다. 栗谷은 ‘心’字를 ‘性’字와
‘情’字 사이에 위치시켜서 ‘性心情意只是一路’라고 표현한 것에 대해 아무런 설명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性과 情이 心의 體用 관계에 있으며 意는 情을 말미
암아 計較하는 것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性心情意一路說’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12) 栗谷全書, 권14, 雜著一, 雜記. 性是心之理也, 情是心之動也, 情動後緣情計較者爲
情은 事物을 感하여 최초로 發한 것이고, 意는 情을 말미암아 計
較하는 것이니, 情이 아니면 意가 말미암을 곳이 없다.13)
첫 번째 인용문 중 “心의 未發이 性이 되고, 已發이 情이 되며, 發한
후에 商量하는 것이 意가 되니, 이것이 一路이다”라는 문장과 두 번째
인용문 중 “意는 情을 말미암아 計較하는 것이니, 情이 아니면 意가
말미암을 곳이 없다”라는 문장을 합쳐보면 ‘性은 心의 未發이고, 情은
心의 已發이며, 意는 情을 말미암아 計較하는 것이다’라는 의미로 정리
된다. 즉 心을 매개로 하여 性으로부터 情이 유발되고 다시 情으로부
터 意가 파생되는 ‘性―(心)→情→意’의 단일한 경로가 설정되는 것이
다. 여기서 性은 心의 未發에 해당하므로 本然之性을 의미하고,14) 情
은 心의 已發에 해당하므로 모든 종류의 情을 포괄하는 총체적인 情을
의미하는데, 이는 각각 五性과 七情의 개념으로 대체된다.
性은 心의 體이고, 情은 心의 用이며, 心은 未發已發의 摠名이다.
그러므로 “心統性情”이라고 한다. 性의 조목에 다섯 가지가 있으니
仁義禮智信이고, 情의 조목에 일곱 가지가 있으니 喜怒哀懼愛惡欲이
다.15)
意. 若心性分二, 則道器可相離也, 情意分二, 則人心有二本矣, 豈不大差乎. 須知性心
情意只是一路, 而各有境界, 然後可謂不差矣. 何謂一路. 心之未發爲性, 已發爲情, 發
後商量爲意, 此一路也. 何謂各有境界. 心之寂然不動時, 是性境界, 感而遂通時, 是情
境界, 因所感而紬繹商量, 爲意境界, 只是一心各有境界.
13) 栗谷全書, 권20, 聖學輯要二, 修己上, 第4章. 情是感物初發底, 意是緣情計較底,
非情則意無所緣.
14) 未發은 ‘性의 本然’으로서 惡이 개입될 여지가 없으므로 本然之性에 해당한다.
栗谷全書, 권9, 書一, 答成浩原. 未發者, 性之本然也, 太極之妙也, 中也, 大本也.
於此亦有不善之萌, 則是聖人獨有大本, 而常人無大本也, 孟子性善之說, 爲駕虛之高談,
而人不可以爲堯舜矣.
15) 栗谷全書, 권14, 說, 人心道心圖說. 性是心之體, 情是心之用, 心是未發已發之摠名.
故曰心統性情. 性之目有五, 曰仁義5智信, 情之目有七, 曰喜怒哀懼愛惡欲.
사람의 性에는 仁義禮智信의 다섯 가지가 있을 뿐이니 이 다섯
가지 이외에 다른 性이 없고, 情에는 喜怒哀懼愛惡欲의 일곱 가지가
있을 뿐이니 이 일곱 가지 이외에 다른 情이 없다. 四端은 다만 善
情의 別名이고, 七情을 언급하면 四端은 그 가운데 있다.16)
즉 性은 本然之性인 仁義禮智信의 五性으로 대체되고, 情은 喜怒哀
懼愛惡欲의 七情으로 대체된다. 따라서 栗谷의 性心情意一路說은 本然
之性인 五性으로부터 七情이 유발되고, 다시 七情으로부터 意가 파생
되는 일원적 구조를 지닌다. 여기서 善한 本然之性으로부터 어떻게 善
惡이 혼재한 七情이 유발되는가의 문제가 제기되는데, 이는 氣發理乘
一途說에 의해 설명된다.
性은 心에 갖추어져 있으면서 發하여 情이 된다. 性이 이미 본래
善하다면 情도 또한 마땅히 不善이 없어야 할텐데, 情에 간혹 不善이
있는 것은 어째서인가? 理는 본래 순수한 善이지만 氣는 淸濁이 있으
니, 氣는 理를 담는 그릇이다. 未發을 당해서는 氣가 아직 用事하지
않으므로 中體가 순수한 善이며, 發함에 미쳐서 善惡이 비로소 나누
어진다. 善은 淸氣가 發한 것이고 惡은 濁氣가 發한 것인데, 그 근본
은 다만 天理일 따름이다. 情의 善한 것은 淸明한 氣를 타고 天理를
좇아 直出하여 그 中을 잃지 않으니, 그것이 仁義禮智의 단서가 됨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四端으로 지목하였다. 情의 不善한 것은 비록
또한 理에 근본하지만 이미 汚濁한 氣에 의해 엄폐되어 그 本體를 잃
고 橫生하여 혹 過하기도 하고 혹 不及하기도 하니, 仁에 근본하면서
도 도리어 仁을 해치고 義에 근본하면서도 도리어 義를 해치며 禮에
16) 栗谷全書, 권10, 書(二), 答成浩原. 夫人之性, 有仁義5智信五者而已, 五者之外,
無他性. 情有喜怒哀懼愛惡欲七者而已, 七者之外, 無他情. 四端只是善情之別名,
言七情則四端在其中矣.
근본하면서도 도리어 禮를 해치고 智에 근본하면서도 도리어 智를 해
친다. 그러므로 四端이라고 할 수 없을 따름이다.17)
心이 외부 사물을 대면하면 ‘氣가 發하고 理가 타는 과정[氣發理乘]’
을 통해 本然之性으로부터 七情이 유발된다. 그런데 氣는 淸・濁의 품
질차이를 지닌다. 淸氣가 發한다면, 理는 淸氣를 타기 때문에 온전하게
보존된다. 이 경우 七情은 本然之性으로부터 ‘直出’하여 中節하게 된
다. 여기서 七情의 中節은 本然之性이 함축하는 생명공동체의 번영이
라는 목적이 특정한 외부 사물에 대한 心의 발현 과정에서 적절하게
실현된 것이므로 善으로 판정된다.18)
반면 濁氣가 發한다면, 理는 濁氣를 타기 때문에 온전하게 보존되지
못하고 엄폐된다. 이 경우 七情은 本然之性으로부터 ‘橫生’하여 不中節
하게 된다. 여기서 七情의 不中節은 本然之性이 함축하는 생명공동체
의 번영이라는 목적이 특정한 외부 사물에 대한 心의 발현 과정에서
적절하게 실현되지 못함으로써 도리어 생명공동체의 번영을 저해하는
것이므로 惡으로 판정된다. 여기서 七情의 中節과 不中節이 善惡을 판
정하는 유일한 기준이 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모든 인간의 本然之性은 동일한 理이므로 보편적으로 善하지만, 心은
17) 栗谷全書, 권14, 說, 人心道心圖說. 性具於心而發爲情. 性旣本善, 則情亦宜無不善,
而情或有不善者, 何耶? 理本純善, 而氣有淸濁, 氣者, 盛理之器也. 當其未發, 氣未用
事, 故中體純善, 及其發也, 善惡始分. 善者, 淸氣之發也, 惡者, 濁氣之發也, 其本則
只天理而已. 情之善者, 乘淸明之氣, 循天理而直出, 不失其中, 可見其爲仁義5智之
端. 故目之以四端. 情之不善者, 雖亦本乎理, 而旣爲汚濁之氣所掩, 失其本體而橫生,
或過或不及, 本於仁而反害仁, 本於義而反害義, 本於5而反害5, 本於智而反害智. 故
不可謂之四端耳.
18) 栗谷全書, 권19, 聖學輯要一, 統說. 致中和而位育者, 明德新民, 止於至善, 而明明
德於天下之謂也. 但所及有衆寡, 而功效有廣狹. 致中和之功, 止於一家, 則一家之天地
位萬物育, 而明德明於一家. 一家豈別有天地萬物乎. 只是父子夫’兄弟, 各正其分, 是天
地位氣象, 慈孝友恭唱隨, 各盡其情, 是萬物育氣象. 止於一國, 則一國之天地位萬物育,
而明德明於一國. 及於天下, 則天下之天地位萬物育, 而明德明於天下矣.
淸・濁의 품질차이를 지닌 氣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우열의 차별성을 지
닌다. 따라서 善한 本然之性으로부터 善惡이 혼재한 七情이 유발되는
현상은 本然之性을 담지하고 있는 氣의 품질차이에 기인하는 것이다.
氣質之性은 별개의 性이 아니다. 氣質이 性[=本然之性]을 포함하여
태어날 때 함께 생겨나므로 性[=氣質之性]이라 한다.19) 氣質은 그릇
과 같고 性[=本然之性]은 물과 같다. 깨끗한 그릇에 물을 담은 것은
聖人이고, 그릇 가운데 모래와 진흙이 담긴 것은 中人이며, 온통 진흙
가운데 물이 담긴 것은 下等人이다.……聖人은 情이 中節하지 않음이
없다. 君子는 情은 간혹 中節하지 않지만 意는 中節하지 않음이 없다.
常人은 혹 情은 中節하나 意가 中節하지 않기도 하고, 혹 情은 中節하
지 않지만 意가 中節하기도 한다. 만약 情을 善하지 않음이 없는 것으
로 여겨서 情에 맡겨서 行한다면 어찌 일이 실패하지 않겠는가?20)
氣의 품질차이에 따라 인간의 등급이 분류되고 있다. 聖人의 心은
淸氣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本然之性이 온전하게 보존된다. 그 결과
情・意가 항상 中節한다. 반면 常人의 心은 濁氣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本然之性이 온전하게 보존되지 못하고 일부 엄폐된다. 그 결과 情・意
19) 여기서 心을 이루고 있는 氣가 性[=本然之性]을 담지하고 있는 상태를 氣質之性으
로 명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氣質之性은 氣質과 本然之性이 결합된 상태를
가리킨다. 氣質之性이 善한 경우는 淸氣가 本然之性을 담지하고 있는 것으로 情・意
의 中節을 유발한다. 반면 氣質之性이 惡한 경우는 濁氣가 本然之性을 담지하고 있
는 것으로 情・意의 不中節을 유발한다. 따라서 氣質之性의 善惡 문제는 ‘氣質과 本
然之性’에 대한 논의로 환원된다고 할 수 있다. 栗谷全書, 권20, 聖學輯要二, 修
己上, 第4章窮理. 本然之性, 氣質之性, 非二性也. 就氣質上, 單指其理曰本然之性,
合理與氣質而命之曰氣質之性.
20) 栗谷全書, 권14, 雜著一, 論心性情. 大抵氣質之性, 非別性也. 氣質包性, 與生俱生,
故謂之性也. 氣質如器, 性如水. 淸淨器中儲水者, 聖人也, 器中有沙泥者, 中人也, 全
然泥土中有水者, 下等人也.……聖人情無不中. 君子情或不中, 而意無不中. 常人或情
中而意不中, 或情不中而意中. 若以情爲無不善, 任情而行, 則何嘗不敗事?
가 中節과 不中節로 교차된다. 여기서 情・意의 中節은 本然之性이 함
축하는 생명공동체의 번영이라는 목적이 心의 발현 과정에서 적절하게
구현되었음을 의미하므로 善으로 평가된다.21) 반면 情・意의 不中節은
本然之性이 함축하는 생명공동체의 번영이라는 목적이 心의 발현 과정
에서 적절하게 구현되지 못함으로써 도리어 생명공동체의 번영을 저해
하고 있음을 의미하므로 惡으로 평가된다.
이렇게 볼 때 栗谷의 性心情意一路說은 ‘五性[=本然之性]―(心)→七
情→意’의 단일한 구조 속에서, 純善한 本然之性이 善惡이 혼재한 七情
과 意의 근원이 된다는 점에서 理일원적 性情論이라고 할 수 있다.
(3) 人心道心說
退溪 李滉의 心性論에서 人心道心說은 四端七情論의 연장선에서 논
의되고 있는 만큼, 人心道心說은 四端七情論의 부연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栗谷은 37세(1572년)에 牛溪 成渾을 상대로 벌인 四
七論辨에서 人心道心說을 별개의 주제로 간주하여 매우 비중있게 다루
고 있으며, 10년 후인 47세(1582년)에 「人心道心圖說」을 지어 宣祖에
게 올렸다. 이는 人心道心說이 栗谷의 心性論 체계 속에서 四端七情論
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위상을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증이 된다
고 할 수 있다. 본 논의는 栗谷 만년의 견해인 「人心道心圖說」의 내용
을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天理가 사람에게 부여된 것을 性이라 하고, 性과 氣를 합하여 一身
21) 栗谷全書, 권19, 聖學輯要一, 統說. 致中和而位育者, 明德新民, 止於至善, 而明明
德於天下之謂也. 但所及有衆寡, 而功效有廣狹. 致中和之功, 止於一家, 則一家之天地
位萬物育, 而明德明於一家. 一家豈別有天地萬物乎. 只是父子夫’兄弟, 各正其分, 是天
地位氣象, 慈孝友恭唱隨, 各盡其情, 是萬物育氣象. 止於一國, 則一國之天地位萬物育,
而明德明於一國. 及於天下, 則天下之天地位萬物育, 而明德明於天下矣.
을 主宰하는 것을 心이라 하며, 心이 事物에 應하여 밖으로 發하는
것을 情이라 한다. 性은 心의 體이고, 情은 心의 用이며, 心은 未發已
發의 摠名이다. 그러므로 “心統性情”이라고 한다. 性의 조목에 다섯
가지가 있으니 仁義禮智信이고, 情의 조목에 일곱 가지가 있으니 喜
怒哀懼愛惡欲이다. 情이 發하는 데 道義를 위하여 發하는 것이 있으
니, 예컨대 부모에게 孝하고자 하고, 군주에게 忠하고자 하고, 어린
아이가 우물에 들어가려는 것을 보고 惻隱하고, 옳지 않음을 보고 羞
惡하며, 宗廟를 지나갈 때 恭敬하는 類와 같은 것으로 이를 道心이라
이른다. 口體를 위하여 發하는 것이 있으니, 예컨대 굶주리면 먹고자
하고, 추우면 입고자 하고, 피로하면 쉬고자 하며, 精氣가 왕성해지면
아내를 생각하는 類와 같은 것으로 이를 人心이라 이른다.22)
性은 “天理가 사람에게 부여된 것”으로 仁義禮智信의 다섯 가지가
있고, 情은 “事物에 應하여 밖으로 發하는 것”으로 喜怒哀懼愛惡欲의
일곱 가지가 있다. 따라서 本然之性인 五性으로부터 七情이 유발되는
理일원적 구조가 정립된다.
그런데 七情은 “道義를 위하여 發하는 것”과 “口體를 위하여 發하는
것”으로 분류된다. “道義를 위하여 發하는 것”은 道心이라 명명하는데,
예컨대 “어린 아이가 우물에 들어가려는 것을 보고 惻隱하는 것”과 같
은 부류이다. 여기서 “道義를 위하여 發한다”는 표현은 ‘道義라는 목적
을 위하여 發한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道心은 道義, 즉
‘타자의 생명현상의 고양’이라는 목적을 함축한다. 그리고 “口體를 위
22) 栗谷全書, 권14, 說, 人心道心圖說. 天理之賦於人者, 謂之性, 合性與氣而爲主宰於
一身者, 謂之心, 心應事物而發於外者, 謂之情. 性是心之體, 情是心之用, 心是未發已
發之摠名. 故曰心統性情. 性之目有五, 曰仁義5智信, 情之目有七, 曰喜怒哀懼愛惡
欲. 情之發也, 有爲道義而發者, 如欲孝其親, 欲忠其君, 見孺子入井而惻隱, 見非義而
羞惡, 過宗廟而恭敬之類, 是也, 此則謂之道心. 有爲口體而發者, 如飢欲食, 寒欲衣,
欲休, 精盛思室之類, 是也, 此則謂之人心.
하여 發하는 것”은 人心이라 명명하는데, 예컨대 “굶주리면 먹고자 하
는 것”과 같은 부류이다. 여기서 “口體를 위하여 發한다”는 표현은 ‘口
體라는 목적을 위하여 發한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人心
은 口體, 즉 ‘자아의 생명현상의 고양’이라는 목적을 함축한다.
이렇게 볼 때 本然之性인 五性으로부터 七情이 유발되고, 七情은 다
시 人心과 道心으로 분류되므로, 결국 本然之性인 五性으로부터 人心
과 道心이 유발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23) 그런데 本然之性인 五性은
‘생명공동체의 번영’이라는 목적을 함축하고, 人心은 ‘자아의 생명현상
의 고양’이라는 목적을 함축하며, 道心은 ‘타자의 생명현상의 고양’이
라는 목적을 함축하고 있다. 여기서 人心과 道心이 함축하는 각각의
목적은 本然之性이 함축하는 궁극적인 하나의 목적 가운데 포함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생명공동체의 번영’이라는 목적을 함축하
는 本然之性은 ‘자아의 생명현상의 고양’이라는 목적을 지닌 人心과
‘타자의 생명현상의 고양’이라는 목적을 지닌 道心의 공통적인 근원이
된다고 할 수 있다.
方寸 가운데 애당초 二心은 없고, 다만 發하는 곳에 두가지 端緖가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道心을 發하는 것은 氣이지만 性命이 아니면
道心은 생겨나지 않고, 人心을 근원하는 것은 理이지만 形氣가 아니면
人心은 생겨나지 않으니, 이것이 或原或生과 公私의 차이가 있는 所以
인 것이다. 道心은 순수한 天理이므로 善만 있고 惡은 없으며, 人心에는
天理도 있고 人欲도 있으므로 善도 있고 惡도 있다. 예컨대 마땅히 먹
23) 栗谷全書, 권10, 書二, 答成浩原. 發道心者氣也, 而非性命則道心不發, 原人心者性
也, 而非形氣則人心不發. ; 栗谷全書, 권9, 書一, 答成浩原. 人心道心皆發於性,
而爲氣所揜者爲人心, 不爲氣所揜者爲道心. ; 栗谷全書, 권10, 書二, 答成浩原. 人
性之本善者, 理也, 而非氣則理不發, 人心道心, 夫孰非原於理乎? ; 栗谷全書, 권
31, 語錄上. 問, “食色臭味亦天性, 則食色臭味之欲, 發於何性也?” 曰, “七情中愛欲,
皆發於仁之性.”
어야 할 때 먹는 것이나 마땅히 입어야 할 때 입는 것은 聖賢도 면할
수 없으니, 이는 天理이다. 食色의 생각으로 인하여 흘러서 惡이 되는
것은 人欲이다. 道心은 다만 지키기만 하면 되지만, 人心은 人欲으로 흐
르기 쉬우므로 비록 善하지만 또한 위태롭다.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한
생각이 發하는데 대하여 그것이 道心임을 알면 넓혀서 채우고 그것이
人心임을 알면 정밀하게 살펴서 반드시 道心으로서 節制하여 人心이 항
상 道心에게 명령을 들으면 人心도 또한 道心이 될 것이다.24)
“어린 아이가 우물에 들어가려는 것을 보고 惻隱하는 것”은 어린 아
이가 우물에 들어가려는 외부 상황에 대해서 心의 발현이 中節함으로
써 궁극적으로 생명공동체의 번영에 기여하는 효력을 발생한다. 따라
서 道心은 本然之性이 함축하는 목적이 외부 상황에 대한 心의 발현
과정에서 적절하게 실현된 것이므로 순수하게 善한 것으로 판정된다.
반면 “굶주리면 먹고자 하는 것”은 人心이 굶주림이라는 形氣의 조건
으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생겨났음을 의미한다. 이는 외부 상황에 대한
心의 발현이 아니므로 人心은 그 정의 상 中節과 不中節의 개념을 적
용할 수 없다. 따라서 人心은 구체적인 외부 상황이라는 조건이 추가
적으로 도입되어야 비로소 中節 또는 不中節로 판정될 수 있다.
“마땅히 먹어야 할 때 먹는 것[當食而食]”는 먹는 것이 합당한 외부
상황에 대해서 心의 발현이 中節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생명공동체의 번
영에 기여하는 효력을 발생한다. 이 경우의 人心은 本然之性이 함축하
24) 栗谷全書, 권14, 說, 人心道心圖說. 方寸之中, 初無二心, 只於發處, 有此二端. 故
發道心 者, 氣也, 而非性命則道心不生, 原人心者, 理也, 而非形氣則人心不生, 此所以
或原或生・公私之異者也. 道心, 純是天理, 故有善而無惡, 人心, 也有天理, 也有人欲,
故有善有惡. 如當食而食, 當衣而衣, 聖賢所不免, 此則天理也. 因食色之念而流而爲惡
者, 此則人欲也. 道心, 只可守之而已, 人心, 易流於人欲, 故雖善亦危. 治心者, 於一
念之發, 知其爲道心, 則擴而充之, 知其爲人心, 則精而察之, 必以道心節制, 而人心常
聽命於道心, 則人心亦爲道心矣.
는 목적이 외부 상황에 대한 心의 발현 과정에서 적절하게 실현된 것
이므로 善으로 판정된다. 반면 “마땅히 먹어서는 안 될 때 먹는 것[不
當食而食]”은 먹는 것이 부당한 외부 상황에 대해서 心의 발현이 不中
節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생명공동체의 번영을 저해하는 효력을 발생한
다. 이 경우의 人心은 本然之性이 함축하는 목적이 외부 상황에 대한
心의 발현 과정에서 적절하게 실현되지 못하고 왜곡・변질된 것이므로
惡으로 판정된다.
이와 같이 人心은 本然之性에 근원한다는 점에서 善하다고 할 수 있
지만, 形氣의 조건에 영향을 받는 만큼 현실적으로 不中節로 오도되어
惡으로 변질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人心은 그 자체 내에
교정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므로 道心의 기준에 입각한 節制가 요구
된다. 만일 人心이 道心의 지도와 감독을 충실하게 준수한다면, 이는
本然之性이 함축하는 생명공동체의 번영이라는 목적을 실현하는 것이
므로 본질적으로 人心과 道心의 차이는 무의미하게 되어 人心 또한 道
心이 된다고 할 수 있다.25)
(4) 四端七情論
주지하다시피 退溪 李滉과 高峯 奇大升(1527-1572)의 四七論辨, 그
리고 栗谷 李珥와 牛溪 成渾의 四七論辨, 이 두 역사적인 사건 이후
四端七情論은 조선 유학에서 학파적 계보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논
거가 되었다. 논점의 핵심은 退溪가 四端과 七情을 별개의 두 가지 범
주로 간주하는데 반하여, 栗谷은 四端과 七情을 동일한 범주에서 다루
고 있다는 점이다.
25) 栗谷全書, 권10, 書二, 答成浩原. 聖人氣質淸粹, 性全其體, 無一毫人欲之私. 故其
發也, 從心所欲, 不踰矩, 而人心亦道心也.
五性 이외에 다른 性은 없고, 七情 이외에 다른 情은 없다. 孟子
는 七情 가운데 그 善한 情만을 골라내어 四端으로 지목한 것이니,
七情 이외에 별도로 四端이 있는 것은 아니다. 情의 善惡이 어느 것
인들 性에서 發하지 않겠는가?26)
七情은 人心의 動함에 일곱 가지가 있음을 전체적으로 말한 것이
고, 四端은 七情 가운데 善한 一邊을 가려내어 말한 것이다.27)
첫 번째 인용문 중 “五性 이외에 다른 性은 없고, 七情 이외에 다른
情은 없다.……情의 善惡이 어느 것인들 性에서 發하지 않겠는가?”라
는 부분은 ‘純善한 本然之性인 五性으로부터 善惡이 혼재한 七情이 유
발된다’는 의미로 정리된다. 그리고 두 번째 인용문에서 七情은 모든
종류의 情을 포괄하는 개념이고, 四端은 七情 가운데 善한 부분을 지
칭하는 개념으로 제시되고 있다. 따라서 四端은 純善한 本然之性인 五
性으로부터 善惡이 혼재한 七情이 유발되는 理일원적 구조 속에서 ‘七
情의 善’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정리된다. 이러한 理일원적 구조는 氣發
理乘一途說에 의해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善은 淸氣가 發한 것이고 惡은 濁氣가 發한 것인데, 그 근본은 다
만 天理일 따름이다. 情의 善한 것은 淸明한 氣를 타고 天理를 좇아
直出하여 그 中을 잃지 않으니, 그것이 仁義禮智의 단서가 됨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四端으로 지목하였다. 情의 不善한 것은 비록 또
한 理에 근본하지만 이미 汚濁한 氣에 의해 엄폐되어 그 本體를 잃
26) 栗谷全書, 권20, 聖學輯要二, 修己上, 第4章. 五性之外, 無他性, 七情之外, 無他
情. 孟子於七情之中, 剔出其善情, 目爲四端, 非七情之外, 別有四端也. 情之善惡,
夫孰非發於性乎?
27) 栗谷全書, 권9, 書一, 答成浩原. 七情, 則統言人心之動有此七者, 四端, 則就七情中
擇其善一邊而言也.
고 橫生하여 혹 過하기도 하고 혹 不及하기도 하니, 仁에 근본하면
서도 도리어 仁을 해치고 義에 근본하면서도 도리어 義를 해치며 禮
에 근본하면서도 도리어 禮를 해치고 智에 근본하면서도 도리어 智
를 해친다. 그러므로 四端이라고 할 수 없을 따름이다.28)
七情의 善은 淸氣가 發하고 理가 타는 과정을 통하여 仁義禮智의 理
로부터 ‘直出’하여 中節한 것이다. 여기서 七情의 中節은 仁義禮智가
적절하게 실현된 것이라는 점에서 仁義禮智의 단서, 즉 四端으로 명명
된다. 반면 七情의 惡은 濁氣가 發하고 理가 타는 과정을 통하여 仁義
禮智의 理로부터 ‘橫生’하여 不中節한 것이다. 여기서 七情의 不中節은
仁義禮智가 적절하게 실현되지 못하고 왜곡・변질된 것이라는 점에서
仁義禮智의 단서, 즉 四端의 자격을 상실한다. 따라서 四端은 淸氣가
發하고 理가 타는 과정을 통하여 七情이 仁義禮智의 理로부터 ‘直出’하
여 中節한 것을 의미한다. 즉 四端은 七情의 中節을 의미한다.
그런데 七情이 人心과 道心을 포괄하는 개념임을 상기한다면, 七情의
中節 역시 人心과 道心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七情의 中節
을 의미하는 四端이 人心과 道心을 포괄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으로 보면 七情은 곧 人心・道心・善惡의 摠名이다. 孟子는 七情
가운데 善一邊만을 골라내어 四端으로 지목하였으니, 四端은 곧 道心
및 人心의 善한 것이다.……논자들이 간혹 四端을 道心으로 여기고
七情을 人心으로 여기는데, 四端은 진실로 道心이라 할 수 있으나 七
情이 어찌 단지 人心이라고만 할 수 있겠는가? 七情 이외에는 다른
28) 栗谷全書, 권14, 說, 人心道心圖說. 善者, 淸氣之發也, 惡者, 濁氣之發也, 其本則
只天理而已. 情之善者, 乘淸明之氣, 循天理而直出, 不失其中, 可見其爲仁義5智之
端. 故目之以四端. 情之不善者, 雖亦本乎理, 而旣爲汚濁之氣所掩, 失其本體而橫生,
或過或不及, 本於仁而反害仁, 本於義而反害義, 本於5而反害5, 本於智而反害智. 故
不可謂之四端耳.
情이 없는데 人心 한 편만을 가리킨다면 이는 절반[人心]만 거론하고
절반[道心]은 버린 것이다. 子思子가 七情의 未發한 것을 中이라 하
고 已發한 것을 和라고 하여, 性情의 全德을 논하면서 七情만을 거론
하였으니, 어찌 人心 한 편만을 거론했을 리가 있겠는가? 이는 명백
하여 의심할 만한 것이 없다.29)
七情은 純善한 道心과 善惡이 혼재한 人心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七
情의 善은 ‘道心’과 ‘人心의 善’에 해당하고, 七情의 惡은 ‘人心의 惡’에
해당한다. 따라서 七情의 善을 의미하는 四端이 ‘道心’과 ‘人心의 善’을
지칭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런데 이와 같이 栗谷이 四端을 ‘道心’과 ‘人心의 善’으로 규정한
것은 四端의 개념이 제기된 孟子의 문맥에서 벗어난 견해라고 할 수
있다. 孟子에서 四端은 ‘食色’과 대비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따라
서 이러한 관점에서는 四端 가운데 食色을 함축하는 人心을 포함시키
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인용문 중 “子思子가 七情의 未發한 것을 中이라 하고 已發한 것을
和라고 하여, 性情의 全德을 논하면서 七情만을 거론하였으니, 어찌 人
心 한 편만을 거론했을 리가 있겠는가?”라는 문장은 ‘七情이 人心과
道心을 포괄하는 것은 中庸에 근거한다’는 내용으로 정리된다. 이는
栗谷이 中庸의 ‘天命之謂性-喜怒哀樂’의 조합을 ‘五性-七情’의 일원
적 구조로 해석하면서 七情 가운데 人心과 道心을 포함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栗谷은 氣發理乘一途說에 입각하여 五性
으로부터 七情[道心+人心]이 유발되는 理일원적 구조를 정립하고, 七
29) 栗谷全書, 권14, 說, 人心道心圖說. 以此觀之, 則七情卽人心道心善惡之摠名也. 孟
子就七情中, 剔出善一邊, 目之以四端, 四端卽道心及人心之善者也.……論者或以四端
爲道心, 七情爲人心, 四端固可謂之道心矣, 七情豈可只謂之人心乎. 七情之外, 無他
情, 若偏指人心, 則是擧其半而遺其半矣. 子思子以七情之未發者, 謂之中, 已發者, 謂
之和, 論性情之全德, 而只擧七情, 則寧有偏擧人心之理乎. 此則較然無可疑者矣.
情[道心+人心]의 善을 四端으로 지목함으로써, “四端은 곧 道心 및
人心의 善한 것이다”라는 주장을 제기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栗谷 철
학에서 四端의 의미는 ‘惻隱・羞惡・辭讓・是非之心’에 한정되지 않고 ‘七
情의 善’으로 확장됨으로써 결국 善情을 뜻하는 일반명사로 사용되었
다고 할 수 있다.30)
3. 尤庵 宋時烈의 栗谷 心性論 이해
(1) 心是氣說
영남 유생 柳㮨 등이 栗谷의 心是氣說에 대해서 主氣 즉 氣를 위주
로 하는 이론이라고 비판하자, 尤庵 宋時烈은 이를 변호하는 疏에서
다음과 같이 반론을 제시하였다.
柳㮨 등이 또 “心은 氣이다[心是氣]”라는 말을 李珥의 병통으로 여
겼는데, 예로부터 聖賢들이 氣로 心을 논한 일이 많습니다. 柳㮨 등이
스스로 趨向의 방법에 어둡지 않다고 하면서 곧 이것을 알지 못했단
말입니까? 孔子가 “사람이 道를 넓히는 것이지, 道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는데, 朱子는 “사람의 心에는 知覺이 있고, 道
의 體에는 作爲가 없다”라고 해석하였고, 張子는 “心은 性을 극진히
할 수 있으나, 性은 그 心을 檢束할 줄 모른다”라고 해석하였으며, 程
子는 “心이 道를 生하니, 心은 活物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朱子는
곧바로 心을 氣의 精爽이라 하여, “心은 스스로 心이고, 理는 스스로
理이다”라는 說이 있게 되었습니다. 孔子로부터 宋儒에 이르기까지
30) 栗谷全書, 권10, 書二, 答成浩原. 四端只是善情之別名, 言七情則四端在其中矣.
모두 나누어 말하여[分而言之] 性과 道를 理에 소속시키고 心을 氣에
소속시킨 것은 상세할 뿐만이 아닙니다. 이는 바로 태양이 중천에 있
어도 소경은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李珥가 한 마디
말로 잘라 말하여 聖賢의 뜻을 세상에 빛나게 하였으니, 여기에서 또
한 李珥가 後學에게 功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心이 비록 形
氣에 관련되지만 이 理를 저장하고 있으므로 聖賢들이 합하여 말한
것[合而言之]이 있으니, 孟子가 “仁義의 良心”이라고 한 것과 張子가
“性과 知覺을 합하여 心의 명칭이 있게 된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
입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그 가운데 갖추고 있는 理를 가리켜 말한
것이니, 어찌 일찍이 곧바로 心을 理라 하는 柳㮨 등의 소견과 같겠
습니까?31)
전체적인 요지는 孔孟과 宋儒들이 心과 性의 관계에 대해 ‘나누어
말한 것[分而言之]’과 ‘합하여 말한 것[合而言之]’이 있는데, ‘分而言
之’의 관점에서는 心은 氣이므로 理와 구별되지만, ‘合而言之’의 관점
에서는 心은 理氣의 결합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心是氣’의 명제는 ‘分
而言之’의 관점에서 제기된 것으로 ‘性卽理’의 명제와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心은 氣이고[心是氣] 性은 理이니[性是理], 氣는 곧 陰陽이고 理는
곧 太極이다. 그러므로 氣로부터 말하면 “氣가 형체를 이루고 理 또
31) 宋子大全, 권21, 疏, 擬兩賢辨誣疏. 㮨等又以心是氣也之語, 爲珥之病, 從古聖賢,
以氣論心者多矣. 㮨等自謂不昧趨向之方, 而乃不知此耶. 孔子曰, 人能弘道, 非道弘
人, 朱子釋之曰, 人心有覺, 道體無爲, 張子釋之曰, 心能盡性, 性不知檢其心, 程子曰,
心生道也, 心是活物. 朱子又直以心爲氣之精爽, 而有心自心理自理之說. 自孔子至宋
儒, 皆分而言之, 以性道屬理, 以心屬氣者, 不翅詳矣. 正如大明中天而瞽者不見. 故珥
以一言直截說破, 使聖賢之意, 粲然於世, 此亦可見珥之有功於後學也. 但心雖涉於形
氣, 而該貯此理, 故聖賢有合而言之者, 孟子所謂仁義之良心, 張子所謂合性與知覺,
有心之名者, 是也. 然此亦指其中所具之理而言也, 何嘗直以心爲理, 如㮨等之見乎.
한 부여되었다”라고 하였고, 또 “사람의 心에는 知覺이 있고, 道의 體
에는 작위가 없다”라고 하였다. 理로부터 말하면 “太極이 動하여 陽
을 낳고 靜하여 陰을 낳는다”라고 하였고, 또 “만일 理에 動(靜)이 없
다면 氣에 어떻게 動靜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32)
“心은 氣이고[心是氣] 性은 理이다[性是理]”라는 문장은 ‘分而言之’
의 관점에서 제기되었음을 알 수 있다. 氣의 측면에서 논한다면 氣는
理를 담지하고 운반하는 역할을 담당하므로 心은 性을 실현하는 도구
가 되고, 理의 측면에서 논한다면 理는 氣가 動靜할 수 있는 근거의
역할을 담당하므로 性은 心이라는 도구를 통해 실현된다고 할 수 있
다. 이러한 논지는 ‘惻隱之心’의 사례에서 다음과 같이 적용된다.
어린아이가 우물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반드시 깜짝 놀라고 측은해
하는 마음이 있게 되는 所以는 心에 그 어린아이를 사랑하는 理가 있
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연히 이렇게 깜짝 놀라고 측은해하는 마음
이 發하는 것이다.……‘깜짝 놀라고 측은해하는 것은 곧 氣가 感한 것
이고, 그렇게 感할 수 있는 所以는 感하는 理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은 語意가 매우 완비되고 명백하다.33)
어린아이가 우물에 들어가는 상황을 목격하고 惻隱之心을 느끼는 현
상은 氣가 작용하는 것이고, 惻隱之心을 느끼게 되는 근거는 氣 가운
데 존재하는 ‘사랑의 理’이다. 즉 氣 가운데 ‘사랑의 理’가 존재하기 때
32) 宋子大全, 권90, 書, 與李汝九, 別紙. 心是氣而性是理, 氣卽陰陽而理卽太極也. 故
自氣而言, 則曰氣以成形而理亦賦焉, 又曰, 人心有覺, 道體無爲. 自理而言則曰, 太極
動而生陽, 靜而生陰, 又曰, 若理無動, 氣何以有動靜也.
33) 宋子大全, 권90, 書, 與李汝九, 別紙. 其所以見孺子入井, 而必有怵惕惻隱之心者,
是心有愛之之理. 故自有此怵惕惻隱之發也.……其曰怵惕惻隱, 乃氣之感, 而其所以能
感者, 由其有感之之理云者, 語意甚完備明白.
문에 현실의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氣가 작용하여 惻隱之心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는 ‘사랑의 理’가 근본이 되고, 이것으로부터 氣
의 도구적 역할을 통하여 惻隱之心이 유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
서 惻隱之心은 理가 함축하는 사랑이라는 목적이 氣라는 도구를 통해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실현된 사례가 된다.
이렇게 볼 때 栗谷의 心是氣說에 대한 尤庵의 이해는 기본적으로 栗
谷의 견해와 일치하는 것으로 主氣的 경향과는 무관함을 알 수 있다.
尤庵은 心과 性의 관계에 대한 두 가지 관점, 즉 ‘分而言之’와 ‘合而言
之’의 관점을 제시하고, ‘分而言之’의 관점에서 “心은 氣이고[心是氣]
性은 理이다[性是理]”라고 하여 양자 간의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설명
하면서, 先儒들의 학설 가운데 관련된 내용들을 근거로 제시하여 그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이는 ‘생명공동체의 번영’이라는 목적을
함축하는 理가 心 가운데 내재하여 純善한 性이 되고, 淸濁의 품질차
이를 지닌 氣가 純善한 性을 실현하는 心이 된다는 栗谷의 학설이 계
승 전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性心情意一路說
栗谷의 性心情意一路說은 純善한 本然之性인 五性으로부터 善惡이
혼재한 情・意가 유발되는 과정을 ‘五性[=本然之性]―(心)→七情→意’의
理일원적 구조로 설명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宋子大全 전체에서 性
心情意一路說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性心
情意一路說의 내용과 관련되는 자료를 중심으로 尤庵의 견해를 고찰하
고자 한다.
栗谷선생이 “理를 보고 窮究하고자 하는 것[見理而欲窮之者]은 仁의
尤庵 宋時烈의 栗谷 心性論 이해 61
端緖이다”34)라고 하였으니, 七情은 다만 五性으로부터 發하고 愛와 欲
은 仁으로부터 發하기 때문에 理를 보고 窮究하고자 하는 것[見理而欲
窮之者]을 仁의 端緖로 여긴 것이다. 七情 이외에 별도의 情이 없으므
로 情의 惡한 것이라도 반드시 性에 근원하여 發하니, 이른바 “善惡이
모두 天理이다”라고 한 것과 “구더기는 초에서 생겨나지만 초를 해치
는 것은 구더기이다”라고 한 것이 모두 이를 말한 것이다.35)
尤庵은 “理를 보고 窮究하고자 하는 것[見理而欲窮之者]은 仁의 端
緖이다”라는 栗谷의 발언을 ‘仁으로부터 欲이 發하는 것’으로 설명하면
서, 純善한 五性으로부터 善惡이 혼재한 七情이 유발되는 단일한 경로
만을 인정하고 있다.
다만 心性情意를 彼此과 先後로 나눌 수 없다는 것은 매우 온당하
지 않다. 心과 性은 비록 一物이라고 할 수 있으나, 心은 스스로 氣이
고 性은 스스로 理이니, 어찌 彼此가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情은
性에서 發하고 意는 情으로 인하여 計較하는 것이니, 어찌 선후가 없
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대들의 논의는 渾全을 즐기고 分析를 싫어하
는 병통이 있으니, 이 점을 살피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이른바 情이
라는 것은 喜怒哀樂愛惡欲이다. 반드시 먼저 이것이 있은 연후에 이
를 商量하는 것을 意라고 한다. 意의 商量이 수만 가지이지만 사실
이 七情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것을 알면 情과 意가 先後가 없을
수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36)
34) 栗谷全書, 권10, 書二, 答成浩原. 夫人之情, 當喜而喜, 臨喪而哀, 見所親而慈愛,
見理而欲窮之, 見賢而欲齊之者, 已上喜哀愛欲四情. 仁之端也.
35) 宋子大全, 권102, 書, 答沈德升, 別紙. 栗谷先生所謂見理而欲窮之者, 仁之端也者,
蓋七情只從五性而發, 而愛與欲自仁而發, 故以見理而欲窮之爲仁之端也. 大抵五性之
外無他性, 七情之外無他情, 故雖情之惡者, 必原性而發, 所謂善惡皆天理, 所謂蜹生於
醋而害醋者蜹, 皆謂此也.
36) 宋子大全, 권104, 書, 答金直卿・仲固, 別紙. 但以心性情意爲不可分彼此先後者, 甚
未安. 心性雖可謂之一物, 然心自是氣, 性自是理, 安得謂之無彼此. 情是發於性, 而意
是緣情而計較者, 安得謂之無先後哉. 高論略有樂渾全而惡分析之病, 此不可不察也. 大
抵所謂情者, 是喜怒哀樂愛惡欲也. 必須先有此物, 然後商量此物者謂之意. 意之商量,
雖千塗萬轍, 實不出乎此七者矣. 知此則情意之不能無先後, 可知矣.
尤庵은 心・性・情・意의 관계를 彼此과 先後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
다. 먼저 心과 性의 관계에 대해 “心은 스스로 氣이고, 性은 스스로 理
이다[心自是氣, 性自是理]”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理를 담지하고
운반하는 氣가 心이 되고 心 가운데 내재한 理가 性이 된다는 점에서
心과 性은 彼此의 구분이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다음으로 情과 意의
관계에 대해 “情은 性에서 發하고, 意는 情으로 인하여 計較하는 것이
다”라고 언급하고, 다시 “意의 商量이 수만 가지이지만 사실 이 七情
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라고 부연하고 있다. 이는 意가 필연적으로 七
情으로부터 파생된다는 점에서 七情과 意는 先後의 구분이 있음을 지
적한 것이다. 따라서 純善한 本然之性인 五性으로부터 善惡이 혼재한
情・意가 유발되는 과정이 ‘五性[=本然之性]→七情→意’의 理일원적 구
조로 제시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性은 하나이다.37) 그것이 靑氣 가운데 타고 있어서 發하는 것이 善
하면 善이라고 이르고, 濁氣 가운데 타고 있어서 發하는 것이 中節하
지 못하면 惡이라고 이르니, 모두 已發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未發의
때에는 비록 善한 것이지만 명명할 수가 없으므로 孟子가 부득이 情
37) “性은 하나이다”에서 性개념은 本然之性을 의미한다. 尤庵은 本然之性이 氣 가운데
내재한 理를 가리키는 것이지만, 이를 氣와 관련된 것으로 파악해서는 안된다는 점
을 강조하고 있다. 宋子大全, 권113, 書, 答朴景初, 別紙. 大抵高明之意, 以性爲理
與氣合而成者, 故似若以爲方其性之未感也, 已有善惡二者相對於其間者, 然此實高明
所見之誤處. 夫性固在於氣中, 然聖賢言性, 皆不雜乎氣而單言其理, 以明其本體而已.
(그대는 性을 理와 氣가 합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 性이 感하기
이전에 이미 善과 惡 두 가지가 그 사이에 相對하여 있는 것처럼 생각하였으니 이
는 진실로 그대의 소견이 잘못된 곳이다. 性은 진실로 氣 가운데 있지만 聖賢들이
性을 말한 것은 모두 氣를 섞지 않고 理만을 말하여 그 本體를 밝혔을 따름이다.)
의 善한 것으로 性의 善함을 명명한 것이다. 情이 어찌 已發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물며 未發의 때에 어찌 이른바 惡性이 善과 상대하여
있겠는가?38)
여기서 純善한 本然之性으로부터 善惡이 혼재한 七情이 유발되는 과
정이 氣發理乘一途說에 의해 설명되고 있다. 즉 本然之性이 淸氣를 타고
發하여 七情이 中節한 경우는 善으로 판정되고, 本然之性이 濁氣를 타고
發하여 七情이 不中節한 경우는 惡으로 판정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七情
의 善惡은 氣의 품질차이에 따른 中節・不中節의 문제로 환원된다.
이렇게 볼 때 尤庵은 氣發理乘一途說에 기초한 栗谷의 性心情意一路
說을 충실하게 계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다음의 인용문에서 보
다 진전된 논의를 보여주고 있다.
보내온 편지에 “善惡의 기미가 모두 誠의 動에서 나온다고 한다면
道理에 온당하지 않은 듯하다”고 하였는데, 나는 ‘모든 事物에는 반드
시 근본이 있으니 惡이 誠에 근본하지 않는다면 무엇으로부터 나오겠
는가’라고 생각한다. 이는 가장 눈여겨보고 가장 깊이 생각할 부분이다. 周子는
“五性이 感動하여 善과 惡이 나뉜다”라고 하였고, 程子는 “善과 惡이
모두 天理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說은 모두 무엇을 말하는 것인
가? 이른바 惡이 性의 本體가 아니고 天理의 自然이 아니라고 한다면
옳지만, 性에 근본하지 않고 天理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면 天下
에 근본없는 事物[無本之物]이 있고 또한 理를 벗어난 事物[理外之
事]이 있게 될 것이다. 惡이 性에 근본하고 天理에서 나온다는 것을
38) 宋子大全, 권113, 書, 答朴景初, 別紙. 性一也, 搭在淸氣中而其發也善則謂之善, 搭
在濁氣中而發不能中則謂之惡, 皆以已發而言之者也. 未發之時則雖其善者亦不得而名,
故孟子不得已以情之善而名性之善. 情豈非已發者乎. 況於未發之前, 寧有所謂惡性與
善對待乎.
그대가 이해하지 못했다면 한 가지 사례를 들어 밝히겠다. 情 가운데
愛는 본래 仁에서 나오는 것으로, 이 愛가 愛親를 위하여 發한 경우
는 仁이 直出한 것[仁之直出者]이고 愛利를 위하여 發한 경우는 仁이
傍出한 것[仁之傍出者]이니, 비록 直出과 傍出의 다름이 있으나 仁에
서 나왔음은 같다. 그러나 愛親을 위하여 發한 것은 仁을 행하는 일
이 되니 이른바 “불이 타오르고 샘이 솟는다”는 것이고, 愛利를 위하
여 發한 것은 仁을 해치는 도적이 되니 이른바 “구더기가 초에서 생
겨나지만 초를 해치는 것은 구더기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
니 이것을 본래 愛에서 나온 것이라 하여 性理의 當然한 것이라고 한
다면, 이는 이른바 도적을 자식으로 오인하는 것이다.39)
七情 가운데 ‘愛’는 五性 가운데 ‘仁’으로부터 나온다는 사례를 들어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愛親’의 경우는 仁이 ‘直出’한 것으로 仁을 행
하는 일이 되므로 善으로 판정되고, ‘愛利’의 경우는 仁이 ‘傍出’한 것
으로 仁을 해치는 도적이 되므로 惡으로 판정된다. 그러나 ‘愛親’과
‘愛利’는 모두 ‘仁’으로부터 나온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따라서 本然之
性은 善情과 惡情의 공통된 근원이라는 결론이 도출되는데, 이러한 논
지는 ‘모든 事物의 근본은 理이다. 따라서 天下에 근본없는 事物[無本
之物]이 없고 理를 벗어난 사물[理外之事]이 없다’는 언명으로 정식화
된다. 이는 本然之性이 善과 惡으로 점철된 세상사 모든 현상의 유일
39) 宋子大全, 권113, 書, 答朴景初, 別紙. 來諭謂善惡之幾, 皆出於誠之動, 則其於道
理, 似有未安. 愚謂凡物必有本根, 此所謂惡不本於誠則從何以出也. 此最著眼目最入思
慮處. 周子曰五性感動而善惡分, 程子曰善惡皆天理, 此說者, 皆何謂也. 蓋所謂惡謂之
非性之本體, 非天理之自然, 則可, 謂之不本於性, 不出於天理, 則是天下有無本之物,
而亦有理外之事矣. 夫惡之本於性, 出於天理, 高明未嘗理會, 則請以一事明之. 夫情之
愛者, 本出於仁, 而此所謂愛者爲愛親而發則仁之直出者也, 爲愛利而發則是仁之傍出
者也, 雖其直出傍出之不同, 而其出於仁則均矣. 然其爲愛親而發者爲行仁之事, 卽所謂
火燃泉達者也, 其爲愛利而發者, 爲害仁之賊, 卽所謂蛆生於醋而害醋者莫如蛆者也. 然
若以此爲本出於愛而謂性理之當然, 則是所謂認賊爲子者也.
한 근원이 된다는 것으로, 栗谷 性心情意一路說의 理일원적 관점이 강
화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3) 人心道心說
栗谷의 人心道心說은 人心과 道心이 純善한 本然之性으로부터 유발
된다는 점에서 원칙적으로 善하지만, 人心의 경우 形氣의 조건에 영향
을 받아 不中節로 오도됨으로써 惡으로 변질될 위험성을 지니기 때문
에 道心의 기준에 입각한 節制가 요구된다는 내용으로 정리된다. 尤庵
은 栗谷의 입장을 기본적으로 계승하면서, 本然之性으로부터 人心과
道心이 유발되는 理일원적 구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性은 理이다[性卽理也]. 性 가운데 仁이 있으므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어버이를 사랑하고 군주를 사랑하는 것[愛親愛君者]은
道心이고 음식을 욕구하고 여색을 욕구하는 것[欲食欲色者]은 人心
인데, 이는 모두 本然之理이다. 음식을 욕구하고 여색을 욕구하는 마
음으로 인하여 형의 팔을 비틀고 남의 집 담장을 넘는 것이 惡이다.
그 시초를 찾아보면 또한 어찌 理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天
下에 理를 벗어난 事物[理外之物]은 하나도 없으니, 이 한 구절을
생각하여 깨닫게 되면 시원해질 것이다.40)
“性은 理이다[性卽理]”라는 대전제 하에 道心과 人心이 모두 本然之
理로 규정되고 있다. 예컨대 五性의 仁이 ‘直出’하여 七情의 ‘愛’와 ‘欲’
40) 宋子大全, 권90, 書, 答李汝九, 別紙. 夫性卽理也. 性中有所謂仁, 故能愛. 其愛親
愛君者, 道心也, 其欲食欲色者, 人心也, 是皆本然之理也. 至於因欲食欲色之心, 而流
而至於紾兄臂踰東家墻者, 是惡也. 原其初, 則亦豈非自理而出乎. 天下無一理外之物,
試思此一句而有得, 則灑然矣.
이 유발되는 경우, 어버이를 사랑하고 군주를 사랑하는[愛親愛君] 道
心과 음식을 욕구하고 여색을 욕구하는[欲食欲色] 人心은 모두 善한
人性의 발현으로서 동등하게 本然之理의 위상을 지니게 된다. 이는 ‘타
자의 생명현상의 고양’을 내용으로 하는 道心과 ‘자아의 생명현상의 고
양’을 내용으로 하는 人心이 ‘생명공동체의 번영’이라는 本然之性이 함
축하는 하나의 목적 가운데 포함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道心은
항상 本然之性으로부터 ‘直出’하여 中節함으로써 善으로 평가되는 반
면, 人心은 形氣의 조건에 영향을 받아 不中節로 오도됨으로써 ‘형의
팔을 비틀고 남의 집 담장을 넘는’ 人欲으로 변질될 위험성을 지니는
데, 이는 五性의 仁이 ‘傍出’하여 七情의 ‘欲’이 유발된 것으로 ‘생명공
동체의 번영’을 저해한다는 점에서 惡으로 판정된다. 따라서 “天下에
理를 벗어난 事物[理外之物]은 하나도 없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른바 人欲의 큰 것으로 食色만 한 것이 없다. 형의 팔을 비틀어
빼앗아 먹는 것은 人欲이지만, 그 근본을 추구해 보면 어찌 굶주리
면 먹고자 하는 人心에 말미암는 것이 아니겠는가? 남의 집 담장을
넘어가 그 처자를 끌어안는 것은 人欲이지만, 그 근본을 추구해 보
면 어찌 精氣가 왕성해지면 아내를 생각하는 人心에 말미암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미루어 올라가 보면 人心은 비록 “形氣에서 생
긴다”고 하지만 실제로 또한 性命에 근본하는 것이니, 이른바 먹고
자 하고 아내를 생각하는 마음은 실제로 사랑하는 이치[愛之之理]에
서 근본하는 것이다. 만일 사랑하는 이치[愛之之理]가 없다면 음식
을 보거나 여색을 보아도 막연히 움직이는 바가 없을 것이다. 이 움직
인다는 動字는 깊이 살펴야 한다. 朱子가 惻隱之心으로 動字를 논하는 說이 매우 많
다. 그러므로 근본을 따라 말한다면 性은 人心의 근본이 되고 人心은
또 人欲의 근본이 된다.41)
人欲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것으로 食色이 거론되고 있다. 이 사례에
서 人欲은 “형의 팔을 비틀어 빼앗아 먹고, 남의 집 담장을 넘어가 그
처자를 끌어안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惡의 현상은 인간의
근본적인 성향이 아니라, “굶주리면 먹고자 하고, 精氣가 왕성해지면
아내를 생각하는” 人心이 외부 상황에 대한 합당성을 상실하여 不中節
함으로써 왜곡 변질된 것이다. 따라서 人心으로부터 人欲이 파생된다
는 점에서 人心은 人欲의 근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人欲이 人心의 변질 내지는 왜곡으로 간주되는 반면, 人心은 本然之
性에 근본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근본적인 성향으로 인정된다. 즉 心
가운데 사랑하는 이치[愛之之理]가 존재하기 때문에 음식과 여색을 볼
때 人心이 유발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人心은 形氣의 조건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不中節로 오도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人心은
그 자체 내에 교정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므로 道心의 기준에 입각
한 節制가 요구된다.
보내온 說에 “氣가 用事할 듯 用事하지 않을 듯하는 境界에서 좋지
않은 쪽으로 쉽게 흘러가는 것이 곧 人心 本然의 體段이다”라고 한
것은 말의 하자일 뿐만 아니라 名理에도 크게 맞지 않는다. 눈으로
아름다운 여색을 욕구하고 귀로 좋은 음악을 욕구하는 것[目欲色耳欲
聲者]이 人心인데, 마땅히 욕구해야 할 것을 욕구하는 것[欲其所當欲
者]은 人心 本然의 體段이고, 마땅히 욕구해서는 안 될 것[不當欲者]
으로 흐르는 것은 人欲이다. 만약 ‘人心은 人欲으로 흐르기 쉽다’고
41) 宋子大全, 권90, 書, 答李汝九, 別紙. 凡所謂人欲之大者, 莫如食色. 夫紾兄之臂而
奪之食者, 是人欲, 而原其本, 則豈非由於飢欲食之人心乎. 踰東家墻而摟其處子, 是人
欲, 而原其本, 則豈不由於精盛思室之人心乎. 然推而上之, 則人心雖曰生於形氣, 而其
實亦本於性命, 所謂欲食思室之心, 實本於愛之之理. 若無愛之之理, 則見食見色而亦
邈然無所動矣. 此動字, 當深察. 朱子以惻隱之心論動字, 其說甚多. 故從本而言之, 則性
爲人心之本, 而人心又爲人欲之本.
한다면 괜찮지만, 장차 人欲으로 흘러가려는 것을 가리켜 人心 本然
의 體段이라고 한다면 크게 잘못된 것이다.42)
“마땅히 욕구해야 할 것을 욕구하는 것[欲其所當欲者]은 人心 本然
의 體段이다”라는 문장은 ‘욕구하는 것이 합당한 상황에서 욕구함으로
써 人心이 中節한 것이 人心의 본래적인 모습이다’라는 내용으로 정리
된다. 이는 人心이 道心의 지시를 준수한 결과, 외부 상황에 대한 心의
발현 과정에서 本然之性이 적절하게 실현되었음을 의미한다. 반면 “마
땅히 욕구해서는 안 될 것[不當欲者]으로 흐르는 것은 人欲이다”라는
문장은 ‘욕구하는 것이 부당한 상황에서 욕구함으로써 人心이 不中節
한 것은 人心이 왜곡 변질된 人欲이다’라는 내용으로 정리된다. 이는
人心이 道心의 지시를 위배한 결과, 외부 상황에 대한 心의 발현 과정
에서 本然之性이 적절하게 실현되지 못하고 도리어 침해되었음을 의미
한다. 따라서 人心이 道心의 지시를 일관되게 준수하는 聖人의 경우,
人心의 발현이 합당한 상황에서는 人心이 中節하고 道心의 발현이 합
당한 상황에서는 道心이 中節함으로써, 純善한 本然之性을 완전하게
실현해낸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尤庵의 人心道心說은 기본적으로 栗谷의 입장을 계승하
되, 人心과 道心 양자를 本然之性과 직결시키는데 주안점을 두고 전개
되었다고 할 수 있다.
42) 宋子大全, 권104, 書, 答李君輔. 來說又謂在氣之欲用事未用事之境界, 易流於不好
者, 方是人心本然之體段, 非但語病, 其於名理, 亦大不着. 大抵目欲色耳欲聲者, 是人
心也, 欲其所當欲者, 是人心本然之體段也, 流於不當欲者, 是人欲也. 若謂人心易流於
人欲則可, 指其將流者爲人心本然之體段則大不可.
(4) 四端七情論
栗谷의 四端七情論은 四端과 七情이 모두 氣發理乘의 단일한 경로를
통해 本然之性으로부터 발현되는데, 七情은 善惡을 포괄하는 개념이고
四端은 七情의 善을 지칭하는 개념이라는 내용으로 요약된다. 尤庵은
栗谷의 견해를 대부분 수용하지만, 유독 四端은 七情 가운데 善을 가
리킨다는 내용에 대해서는 이견을 보이고 있다.
栗谷선생이 이에 대해 매우 상세하게 변론하였으나, 다만 四端을
七情 가운데 中節한 것이라고 말한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朱子가
“惻隱・羞惡에 中節과 不中節이 있다”고 하였으니, 이는 四端에도 不
中節이 있다는 것이다. 栗谷이 어쩌다 이것을 보지 못한 것인가?43)
尤庵은 “惻隱・羞惡에 中節과 不中節이 있다”는 朱子의 발언을 거론
하면서, 四端을 七情 가운데 中節한 것으로 규정한 栗谷을 견해를 비
판하고 있다. 그리고 四端에 中節과 不中節이 있다는 주장의 이론적
근거로 바로 栗谷의 氣發理乘一途說을 제시한다.
나는 이에 대해 별도의 의문이 있었으나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退
溪・高峯・栗谷・牛溪 모두 四端을 純善한 것으로 여겼으나, 朱子는 四
端에도 不善한 것이 있다고 하였으니, 네 분 선생이 모두 이 說을 보
지 못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저 四端에 어찌하여 또한 不善이
있는 것인가? 四端 역시 氣가 發하고 理가 탄 것[氣發而理乘]이기 때
문이다. 發하는 때 그 氣가 淸明하면 理 역시 純善하고, 그 氣가 紛雜
하면 理 역시 그것에 엄폐되어 그렇게 되는 것이다.44)
43) 宋子大全, 권133, 雜著, 退溪四書質疑疑義二. 栗谷先生於此, 辨論甚詳, 而但以四
端爲七情中中節者而言, 此爲未安. 朱子曰惻隱羞惡有中節不中節, 是則四端亦有不中
節者, 豈栗谷偶未之見耶.
44) 宋子大全, 권130, 雜著, 朱子言論同異攷. 愚於此別有所疑而不敢言矣. 退溪高峯栗
谷牛溪皆以四端爲純善, 朱子以爲四端亦有不善者, 未知四先生皆未見此說乎. 夫四端
何以亦有不善乎. 四端亦氣發而理乘之故也. 發之之時, 其氣淸明, 則理亦純善, 其氣紛
雜, 則理亦爲之所掩而然也.
尤庵은 四端이 七情과 동일하게 氣가 發하고 理가 타는 과정[氣發而
理乘]을 통해 本然之性으로부터 유발된다는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氣
가 淸明하면, 理는 淸氣를 타기 때문에 온전하게 보존된다. 이 경우의
四端과 七情은 本然之性으로부터 ‘直出’하여 中節하게 되므로 善으로
판정된다. 반면 氣가 紛雜하면, 理는 濁氣를 타기 때문에 온전하게 보
존되지 못하고 엄폐된다. 이 경우의 四端과 七情은 本然之性으로부터
‘傍出’하여 不中節하게 되므로 惡으로 판정된다.
이와 같이 四端과 七情이 모두 氣가 發하고 理가 타는 과정[氣發而
理乘]을 통해 本然之性으로부터 유발되고 氣의 품질차이에 따라 中節
과 不中節로 분기된다고 한다면, 사실상 四端과 七情이 구별되는 이론
적 근거가 사라지게 된다.
中庸과 孟子를 종합해 보면 七情과 四端은 모두 性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朱子가 “仁은 스스로 性이니, 이 愛之理가 發하여
나와서 비로소 惻隱이 있게 된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四端과
七情이 合一된 뜻이 아니겠는가? 오직 發하여 나올 때에는 理가 氣를
타고 發하게 되는데, 四端은 氣에 엄폐되지 않으므로 ‘理가 發한 것
[理之發]’이라 하고, 七情은 간혹 氣에 엄폐되어 곧게 이루지 못하므
로 ‘氣가 發한 것[氣之發]’이라 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 四端 가운데
不中節한 것 역시 ‘氣가 發한 것[氣之發]’이라 할 수 있고, 七情 가운
데 中節한 것 역시 ‘理가 發한 것[理之發]’이라 할 수 있으니, 어느
한 가지 측면에서 논할 수 없다.45)
45) 宋子大全, 권133, 雜著, 退溪四書質疑疑義二. 大抵以中庸孟子合而觀之, 則七情四
端, 皆出於性者也. 故朱子曰仁自是性, 却是愛之理發出來, 方有惻隱, 此豈非四端七情
尤庵 宋時烈의 栗谷 心性論 이해 71
尤庵은 “仁은 스스로 性이니, 이 愛之理가 發하여 나와서 비로소 惻
隱이 있게 된다”는 朱子의 발언을 四端과 七情이 ‘合一’된다는 것을 입
증하는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즉 仁은 愛之理이고 惻隱은 仁之端이라
는 점에 주목한다면, 愛와 惻隱의 차이가 발견되지 않으므로 四端과
七情이 ‘合一’된다는 것이다.
天下에 性을 벗어난 事物[性外之物]이 없으니, 이른바 性이라는 것
은 다만 仁義5智일 따름이다. 孟子가 惻隱을 ‘仁之端’으로 삼은 것은
四端을 가지고 말한 것이고, 朱子가 愛를 ‘仁之用’으로 삼은 것은 七情
을 가지고 말한 것이니, 그렇다면 四端과 七情은 실제로 하나인 것이
다. 사람의 情에는 비록 善惡의 같지 않음이 있으나 이 四端과 七情에
근본하지 않는 것은 없다. 만일 보내온 편지의 말과 같다면 이른바 음
식을 욕구하고 여색을 욕구하는 마음[欲食欲色之心]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禮記에서는 七情에 대해 처음에 喜怒哀懼愛惡欲을 가지고
대칭하여 거론하였으나, 그 아래에 다시 欲惡 두 글자만을 가지고 총
괄하여 결론지었으니, 이른바 喜怒哀懼愛의 다섯 가지는 모두 欲惡 두
가지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朱子에 이르러 처음에는 비
록 愛・恭・宜・別을 가지고 ‘性之用’을 논하고 또 惻隱・羞惡・是非・辭讓
에 각각 條理가 있다고 하였으나, 나중에는 惻隱의 一端을 四端이 모
두 모이는 정점[極]으로 삼았으니, 이는 四端과 七情이 惡欲 두 가지
에 귀결되고 또 이 두 가지는 합하여 惻隱의 一端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明道가 ‘羞惡之心 또한 惻隱이 發한 것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
다. 그렇다면 愛를 欲에 합치시키는 것이 이미 근거가 있는 것이다.
이제 人心 가운데 여색을 욕구하고[欲色] 음식을 욕구하는[欲食] 것
을 愛에 근본한다고 말하는 것이 어찌 분명하지 않겠는가?46)
合一之意耶. 惟其發出之時, 理乘氣而發, 而四端不爲氣所掩, 則謂之理之發, 七情或掩
於氣而不爲直遂, 則謂之氣之發. 其實四端之不中節者, 亦可謂氣之發, 七情之中節者,
亦可謂理之發, 不可執一而論也.
여기서 尤庵은 孟子가 惻隱을 ‘仁之端’으로 삼은 것과 朱子가 愛를
‘仁之用’으로 삼은 것을 결합하여 四端과 七情이 동일하다는 결론을 내
리고 있다. 나아가 禮記의 본문에 의거해서 喜怒哀懼愛惡欲의 七情
이 惡(오)와 欲 두 가지로 통합된다는 논지를 전개한다.47) 즉 외부 상
황에 대한 心의 반응양상에서 惡(오)가 부정성을 대표하고 欲이 긍정
성을 대표한다고 할 때, 분노[怒]・슬픔[哀]・두려움[懼]은 모두 惡(오)
안에 포함되고 기쁨[喜]・사랑[愛]은 둘 다 欲 안에 포함된다는 것이
다. 그리고 惻隱・羞惡・辭讓・是非의 네 가지가 惻隱 한 가지로 통합된
다는 朱子 만년의 說에 의거해서 다음과 같이 종합적인 견해를 제시한
다. 즉 本然之性으로부터 유발되는 수만 가지의 情은 四端과 七情으로
통합되고, 四端과 七情은 惡(오)와 欲 두 가지로 통합되며, 惡(오)와 欲
은 惻隱 한 가지로 통합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惻隱이 情의 포섭관계
에서 최상위의 위상을 점하게 된다.
이러한 情의 포섭관계를 분화의 방향으로 재구성하면, 仁의 발현인
惻隱 한 가지가 생명현상의 파괴를 부정하는 惡(오)와 생명현상의 고
양을 긍정하는 欲의 두 가지로 분화되고, 惡(오)와 欲은 다시 四端과
七情으로 분화되며, 四端과 七情은 수만 가지의 情으로 분화되는 것으
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이 四端이 七情과 동일하다면, 四端은 내용적으로 ‘자
46) 宋子大全, 권90, 書, 答李汝九, 別紙. 天下無性外之物, 而所謂性者, 只是仁義5智
而已. 孟子以惻隱爲仁之端者, 以四端言也, 朱子以愛爲仁之用者, 以七情言也, 然則四
端七情, 其實一也. 凡人之情, 雖有善惡之不同, 而無不本於此四七者. 若如來諭, 則所
謂欲食欲色之心, 從何以出乎. 5記於七情, 始雖以喜怒哀懼愛惡欲, 對擧而言之, 其下
又只以欲惡二字, 總而結之, 是所謂喜怒哀懼愛者, 皆入於惡欲二者, 可知矣. 至於朱
子, 始雖以愛恭宜別論性之用, 又以爲惻隱羞惡是非辭讓, 各有條理, 而其終則又以惻
隱一端, 爲總會之極, 是則四七歸於惡欲二者, 而又合爲惻隱之一端矣. 此與明道以羞
惡之心, 亦惻隱之發者, 同矣. 然則以愛合之於欲者, 已有據矣. 今以人心之欲色欲食,
謂之本於愛者, 豈不分明乎.
47) 여기서 惡(오)와 欲 두 가지는 好와 惡(오)로 대체 가능한 개념이다. 宋子大全,
권131, 雜著, 看書雜錄. 此蓋以欲惡二者, 爲七者綱1, 而孟子換作好惡二字.
아의 생명현상의 고양’을 함축하는 人心과 ‘타자의 생명현상의 고양’을
함축하는 道心을 포괄하는 개념이 된다. 즉 人心과 道心을 포함한 모
든 종류의 情은 仁義禮智의 발현이라는 점에서 四端으로 명명될 수 있
는 것이다. 이러한 尤庵의 견해는 四端을 食色과 대비시키는 孟子의
문맥에서 벗어난 것으로, ‘天下에 理를 벗어난 사물[理外之事]이 없고
性을 벗어난 사물[性外之物]이 없다’는 理일원적 性情論의 논리적인
전개가 도달한 궁극적인 결론이라고 생각된다.
4. 맺음말
栗谷의 理氣論은 생명공동체의 변영이라는 내용을 함축하는 無形無
爲의 理가 氣의 작용을 지도하는 준칙의 역할을 담당하고, 淸濁·粹駁
으로 차별화된 有形有爲의 氣가 理를 담지하고 운반하는 도구의 역할
을 수행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따라서 보편적으로 동일한 理가 다양한
품질차이를 지닌 차별적인 氣 안에 존재하게 되는데, 이는 인간 心性
의 영역에서 理가 性이 되고 氣가 心이 되는 것으로 설명된다. 즉 ‘性
卽理, 心是氣’의 명제가 정립된다.
栗谷의 性心情意一路說은 人心道心說과 四端七情論의 토대가 되는
이론으로, 純善한 仁義禮智信의 五性에서 七情이 발현되고 다시 七情
에서 意가 파생되는 단일한 경로만을 인정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純善
한 本然之性인 五性에서 善惡이 혼재한 七情・意가 발현되는 현상은 氣
發理乘一途說에 의해 설명된다. 즉 純善한 理가 淸濁의 품질차이를 지
닌 氣에 의해 운반되는 과정에서 ‘直出’과 ‘橫生’으로 분기됨으로써 七
情・意의 中節과 不中節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七情・意의 善惡
은 中節과 不中節로 환원된다.
그런데 本然之性에서 七情・意가 발현되는 일원적 구조에서, 七情・意
는 내용적으로 ‘자아의 생명현상의 고양’을 의미하는 人心과 ‘타자의
생명현상의 고양’을 의미하는 道心, 이 양자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사용
된다. 따라서 純善한 本然之性에서 人心과 道心이 모두 발현된다고 할
수 있는데, 道心의 경우는 항상 中節하지만 人心의 경우는 形氣의 조
건에 영향을 받아 不中節로 유도될 위험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道心의
기준에 입각한 節制가 요구된다.
그리고 四端은 七情의 善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本然之性에서 七情이
발현되는 일원적 구조에서 七情의 中節에 해당된다. 그런데 七情은 人
心과 道心을 포괄하는 개념이므로 四端 역시 내용적으로 人心과 道心
을 포괄하게 된다. 따라서 四端은 道心 및 人心의 善한 것이라는 결론
이 도출되는데,48) 이는 四端을 ‘食色’과 대비되는 의미로 사용한 孟
子의 문맥에서 벗어난 견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純善한 本然之性인 五性이 人心과 道心을 포괄하는 七情
의 단일한 근원이 된다는 栗谷의 학설은 ‘理일원적 性情論’이라고 명명
할 수 있는데, 이는 本然之性이 四端[=道心]의 근원이고 氣質之性이
七情[=人心]의 근원이 된다는 退溪의 견해가 ‘理氣이원적 性情論’으로
규정되는 것과 대비된다고 할 수 있다.
尤庵은 17세기 栗谷학파의 지도자로서 退溪학파와의 대결 구도 속
에서 栗谷의 학설에 대해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수용하는 태도를 견지
하였다. 心是氣說에 대해서는 性卽理說과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있는
이론이라고 설명하면서 先儒들의 학설 가운데 관련된 내용들을 근거로
제시하여 그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性心情意一路說에
대해서는 純善한 本然之性인 五性으로부터 善惡이 혼재한 七情이 유발
된다는 栗谷의 理일원적 性情論을 충실하게 계승하면서, 이를 ‘모든 事
48) 栗谷全書, 卷14, 說, 人心道心圖說. 以此觀之, 則七情卽人心道心善惡之摠名也. 孟
子就七情中, 剔出善一邊, 目之以四端, 四端卽道心及人心之善者也.
物의 근본은 理이므로 天下에 理를 벗어난 사물[理外之事]이 없고 性
을 벗어난 사물[性外之物]이 없다’는 언명으로 정식화함으로써 理일원
적 관점을 강화하였다.
尤庵은 이러한 관점을 人心道心說에서 보다 철저하게 적용하여 人心
과 道心을 모두 本然之理로 규정하였다. 즉 本然之性으로부터 ‘直出’하
여 人心이 中節한 것을 ‘人心 本然의 體段’이라고 명명하고, 本然之性
으로부터 ‘傍出’하여 人心이 不中節한 경우를 人心이 왜곡 변질된 人欲
으로 간주함으로써, 人心이 원칙적으로 善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이와 같이 尤庵은 전반적으로 栗谷의 心性論을 지지하고 계승하는 태
도를 취하지만, 유독 四端의 개념에 대해서 만큼은 이견을 보이고 있
다. 氣發理乘一途說에 입각할 때, 七情에 中節과 不中節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四端에도 中節과 不中節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四端과
七情은 동일한 것으로 간주된다.
四端七情論에서 특기할 만한 사항은 尤庵이 情의 포섭관계를 규명하
는 부분이다. 즉 本然之性으로부터 유발되는 수만 가지의 情은 四端과
七情으로 통합되고, 四端과 七情은 惡(오)와 欲 두 가지로 통합되며,
惡(오)와 欲은 惻隱 한 가지로 통합된다는 것이다. 이를 역으로 재구성
하면 仁의 발현인 惻隱 한 가지가 생명현상의 파괴를 부정하는 惡(오)
와 생명현상의 고양을 긍정하는 欲의 두 가지로 분화되고, 惡(오)와 欲
은 다시 四端과 七情으로 분화되며, 四端과 七情은 수만 가지의 情으
로 분화되는 것으로 설명된다. 이러한 尤庵의 견해는 四端을 食色과
대비시키는 孟子의 문맥에서 벗어난 것으로, ‘天下에 理를 벗어난
사물[理外之事]이 없고 性을 벗어난 사물[性外之物]이 없다’는 理일원
적 性情論의 논리적인 전개가 도달한 궁극적인 결론이라고 생각된다.
오늘날 흔히 이기성과 이타성이라는 상호 배타적인 개념이 인간의 善
惡을 평가하는 잣대로 통용되기도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도덕적 善이
이타성에 부여됨으로써 타자에 대한 헌신과 희생이 궁극적인 목표로 제
시되고, 이기성은 부도덕한 성향으로 취급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요원
한 목표의 설정은 도리어 현실의 인간이 자아의 도덕성을 포기하는 것
을 용이하게 할 뿐만 아니라, 타자의 삶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평가를 하
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나아가 인간의 자연적인 욕망을 도덕의
이름으로 억압함으로써 갖가지 부작용을 야기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이러
한 유형의 도덕은 설득력을 상실하고 현실로부터 유리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도덕의 목표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만족스러운 삶을 영위
하는데 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일차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사항이 ‘자
아와 타자의 삶에 대한 긍정’이라고 할 수 있다. 栗谷과 尤庵이 들려주
는 도덕은 인간이 갖고 있는 ‘자아의 살고자 하는 욕망’과 ‘타자의 살
고자 하는 욕망을 공감하는 감정’, 이 두 가지 모두를 원칙적으로 긍정
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인간의 삶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다양한 외부 상황들을 대
면하고, 그에 대해 반응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자신의 살고
자 하는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 합당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그 상황
에 알맞는 정도로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타자의 살고자 하는 욕
망을 실현시켜 주는 것이 합당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그 상황에 알맞
는 정도로 타자의 욕망을 실현시켜 준다면, 이러한 삶은 자신이 타자
들과 관계맺고 있는 공동체의 범위 내에서 자아와 타자 모두의 삶을
만족스럽게 이끄는데 기여할 것이다.49) 栗谷과 尤庵의 언어를 빌리자
면, 人心과 道心 두 가지가 모두 中節하여 純善한 本然之性이 실현된
경우에 해당된다.
49) 栗谷全書, 권19, 聖學輯要一, 統說. 致中和而位育者, 明德新民, 止於至善, 而明明
德於天下之謂也. 但所及有衆寡, 而功效有廣狹. 致中和之功, 止於一家, 則一家之天地
位萬物育, 而明德明於一家. 一家豈別有天地萬物乎. 只是父子夫’兄弟, 各正其分, 是天
地位氣象, 慈孝友恭唱隨, 各盡其情, 是萬物育氣象. 止於一國, 則一國之天地位萬物育,
而明德明於一國. 及於天下, 則天下之天地位萬物育, 而明德明於天下矣.
비록 세상이 惡으로 점철되고 있더라도 그것이 삶에 대한 욕망이 왜
곡 변질된 이상현상임을 이해한다면,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긍정적인
시선을 잃지 않게 될 것이다. 또한 자신의 惡이 욕구과잉 상태에서 비
롯되었음을 자각한다면, 스스로를 가꾸는 노력을 게을리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로부터 내 안의 모든 것들을 의미있게 만드는 길이 열린다.
□ 참고문헌 □
宋時烈, 宋子大全, 韓國文集叢刊111, 民族文化推進會, 서울, 1993.
李珥, 栗谷全書, 成均館大學敎 大東文化硏究院, 서울, 1986.
李滉, 退溪全書, 成均館大學敎 大東文化硏究院, 서울, 1985.
程顥·程頤, 二程集, 中華書局, 北京, 1984.
朱熹, 四書章句集注, 中華書局, 北京, 1995.
, 四書或問, 上海古籍出版社, 上海, 2001.
, 朱子語類, 中華書局, 北京, 1983.
, 朱熹集, 四川敎育出版社, 成都, 1996.
민족문화추진회, 국역 율곡집, 경인문화사, 서울, 1968.
이광호 옮김, 성학십도, 홍익출판사, 서울, 2001.
이상익, 畿湖性理學硏究, 한울아카데미, 서울, 1998.
한국정신문화연구원, 國譯 栗谷全書, 朝銀文化社, 서울, 1994.
韓永愚 譯註, 栗谷語錄, 三星美術文化財團, 서울, 1980.
율곡사상연구제22집 (2012.3.7)
'철학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근대전환기 중국철학계의 연구 동향과 특징:유가철학과 마르크스주의철학의 관계를 중심으로/이철승.조선대 (0) | 2024.11.25 |
---|---|
王夫之의 양명학 이해 및 비판에 관한 연구 /진성수.성균관대 (0) | 2024.11.25 |
나의 古典 孟子와 莊子/ 안병주.성균관대 (0) | 2024.11.25 |
《노자》 텍스트에 있어서의 부정과 역설의 미학 ― “道可道, 非常道”를 중심으로/ 김원중.건양대 (0) | 2024.11.25 |
맹자와 순자 사상의 결정적 차이 /신정근.성균관대 (0) | 2024.11.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