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약 문】
왕부지는 明末․淸初의 전환기에서 현실비판적․실용적 학문태도를 가지 고 당시의 思想界에 대해 비판 및 종합을 시도하였다.
본론에서는 특히 왕부지 의 양명학 이해 및 비판에 대해 ‘불교와 양명학의 유사성에 대한 비판’과 ‘역사 적․실용적 관점에서의 양명학 비판’으로 구분하여 살펴보았다.
첫째, 불교와 양명학의 유사성에 대한 비판을 살펴보자. 왕부지는 佛敎가 우주의 본질을 眞空으로 본 점, 天地를 幻想에 의한 것으로 본 점, 天地萬物과 人間倫理가 모두 心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본 점, 인간이 意識하지 않을 때에는 理氣도 존재할 수 없다고 본 점 등을 양명학이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특히, 양명학의 良知說은 인식의 주체와 대상을 분리시키는 문제점이 있다고 평가했다. 또한 양명학의 心卽理說에 대해 虛無寂滅을 추구하는 불교 의 논리에 불과하며, 왕양명의 四句敎 역시 불교이론의 變形에 불과한 것이라 고 비판하였다.
둘째, 역사적․실용적 관점에서의 양명학 비판을 살펴보자. 왕부지는 宋明 理學이 이론과 형식에 얽매임으로써 민족의 멸망을 초래했다고 보았다. 이에 ‘物理에 치중하여 本心을 상실한’ 程朱學과 ‘物理를 상실하고 本心에만 치중 한’ 佛敎․陽明學을 대체할만한 새로운 사상을 모색하였다.
이 과정에서 왕부 지는 역사적․실용적 관점을 가지고 양명학의 주관적 인식론이 사람들로 하여 금 禮儀廉恥를 버리고 人倫秩序를 혼란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하였다. 구체적으 로는 李贄의 童心說이 인간 욕망의 보편성을 극단적으로 강조함으로써 倫理와 대립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이처럼 왕부지는 程朱學과 陽明學을 동시에 비판․종합하는 철학사상을 완 성하게 되는데, 이것은 思想史的으로 볼 때 전환기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 이다. 즉 전환기 유교지식인으로서 왕부지의 종합적인 학문경향은 그의 철학 사상이 근대철학으로 나아가는 데에 있어서 집대성자로 평가되는 주된 요인이 되었다
【주 요 어】왕부지, 양명학, 성리학, 명말청초, 이지, 황종희, 불교
I. 서론
왕부지(1619-1692; 字는 而農, 號는 薑齋)가 활동하던 明末․淸初의 상황은 “역사의 운세가 기울어져 뒤집히고,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진”1)시기였다. 당시는 부패하고 무능한 明王朝에 대항한 농민반란이 끊이지 않았으며, 만주 족에 의한 明朝의 멸망과 淸朝의 등장이라는 역사적 전환기였다. 이러한 역사 적 전환기에 활동했던 왕부지와 당시 儒敎知識人들은 새로운 도전을 모색하게 되었다. 2) 明末․淸初의 시기는 ‘자본주의의 맹아’라고 하는 경제적 변화, ‘환관과 사 대부의 대립’ 및 ‘정주학과 양명학의 대립’이라고 하는 정치․경제․사상적 갈등이 심화되던 시기였다. 특히, 綱常倫理와 克己修養을 강조하던 宋․明代 와는 달리 自我 및 人欲을 강조하는 양명좌파[泰州學派]의 李贄(1527-1602)가 사상계의 전면에 등장했던 시기였다. 3) 왕부지는 일찍이 明朝 멸망에 대한 책임의식을 가지고 反淸復明의 민족부 흥운동을 시도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만다. 4) 이러한 현실적인 한계를 인식한
1) 船山全書 春秋家說․敍 : 歲在丙戌, 大運傾覆,……黃地旣裂, 昊天復傾.
2) 양계초는 淸代學術槪論(1920) 에서 ‘淸學이 발생하게 된 것은 宋․明代의 성리학에 대한 일종의 반론’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明末 양명학이 주자학에서 강조하는 독 서를 부정하고 空理空談에 빠지거나 혹은 李贄와 같은 狂禪一派가 도덕적으로 타락했 던 것에 반대하며 등장한 학문이 바로 청대 고증학이라고 정의하였다. 한편 錢穆은 中 國近三百年學術史(1937) 에서 고증학의 근원이 淸初에 있는 것이 아니라, 明 中葉에 있 다고 주장하며 東林學派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고증학의 시 작이 어디인지 만을 논한 것으로서 明學에서 淸學으로 왜 전환되었는가에 대한 근본적 인 문제를 다루지 못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山井湧 著, 金錫起․裵慶錫 共譯, 明淸思 想史의 硏究(학고방, 1994) , pp.287-289 참조.
3) 泰州學派와 王艮(1483-1540)의 講學活動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이경룡의 泰州學派 王 艮의 大成學 宗旨와 民間講學( 陽明學 18호, 2007) , pp.253-282 참조.
4) 1648년(30세) 10월, 왕부지는 夏汝弼, 管嗣裘, 僧性翰과 함께 南岳 方廣寺에서 무장봉기 를 도모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한다. 이후 耒陽과 永興을 거쳐 그 해 겨울, 肇慶 에 이르러 永曆政府에 헌신하려고 결심하여 永曆정부가 桂林으로 옮기자 왕부지도 동행한다. (張岱年 主編, 衷爾鉅 著, 大儒列傳 王夫之 , 吉林文史出版社, 1997, p.360 참조)
왕부지는 이후 직접적인 정치․군사적 활동보다는 당시 空理空談을 일삼던 학문태도에 대한 전면적인 반성을 시도하게 된다. 이러한 학문적 반성의 범위 는 明代뿐만 아니라 중국사 전체로 확장된다. 특히 당시 가치체계의 골간을 이루고 있던 주자학뿐만 아니라 陽明學, 老․佛 등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검토 를 시도하게 된다. 이것은 당대의 현실문제를 보다 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일종의 실용적 학문태도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본고에서는 왕부지의 실용적 학문태도에 초점을 두고, 이에 근거한 양명학 이해 및 비판에 관해 살펴볼 것이다. 따라서 본론에서 검토할 내용 역시 왕부지의 시각에서 1)불교와 양명학의 유사성에 대한 비판, 2)역사 적․실용적 관점에서의 양명학 비판 등으로 한정하여 전개할 것이다.
II. 실용적 학문태도의 형성
明末 당시는 明初의 里甲制가 점차 해체되면서 중앙정부의 영향력이 지방 향촌사회에서 점차 약화되던 시기였다. 또한 당시 신진사대부들은 사회적 안 정을 위해 정치개혁을 주장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다. 5) 이로 인해 극심한 사회혼란이 야기되어 대다수 농민들은 고통을 받게 되고, 일부 도시로 유입된 유랑민들은 상업이나 수공업에 종사함으로써 士․農․工․商의 기존 신분질 서는 급격히 변화되었다. 6) 특히 일부 부유한 상인이나 그 자제가 관료의 지위 를 획득하거나, 몰락한 관료 중 상업에 종사하게 된 자들도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기층으로부터의 변화는 당시 사대부뿐만 아니라 민중들의 의식의 변화 를 가져왔다. 明代에는 朱子學을 官學으로 정하고 많은 학교를 세워 백성들에 대한 교육 을 강화하는 한편, 과거시험을 통해 발굴된 인재들에게는 요역면제의 특권[優 免特權]을 주는 등 士 계층에 대한 장려정책을 시행했다. 이로 인해 明末에 이르러 生員․監生․擧人 등 학자계층이 증가하였다. 그러나 학자계층의 증 가는 오히려 이들의 관직참여 기회를 제한하게 되어 결국 在鄕 지식인의 증가 를 가져왔다. 이로 인해 관직을 통해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할 수 없게 된 在鄕 유교지식인들은 정권을 둘러싼 政爭 혹은 기타 학술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 게 되었다. 즉, 당시 사회개혁을 요구하던 향촌 지식인들은 明初부터 科擧를 통해 중앙으로 진출한 개혁적인 사대부세력과 연합하게 된다. 위기의식을 공 유한 이들은 明朝의 무능을 비판하며 점차 정치세력화 되었다. 7) 이것이 바로 明末 書院을 중심으로 전개된 東林黨의 정치개혁 운동이었다. 8) 또한, 당시 개혁적 유교지식인들은 학문적으로도 儒家經典에 대한 程朱學的 해석에만 머무 르지 않고 실증적인 연구방법을 모색하게 되는데, 이것은 이후 淸代 考證學의 발전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5) 당시 士大夫 중 東林派의 계급적 성격에 대한 小野和子의 분석은 다음과 같다.
①지방의 望族으로 독서인 가정의 출신
②농촌에서 중견적 지위를 점하는 중등지주층과 그 이하 의 小地主 및 자작의 경작지주
③상인 출신 등이다. 그러나 이 중에서도 특히 중소지주 층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明왕조의 정치적 수탈에 대해 강한 위기의 식을 가지고 있었다. 아울러 중앙 재정을 우선한 정책은 그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 다. 小野和子, 東林派とその政治思想 , 東方學報 28, 京都, 1958, pp.258-265 참조. (오금성 외 지음, 명청․청초사회의 조명 , 한울아카데미, 1999, pp.51-52)
6) 明末 부패한 정치로 인해 기본적인 사회질서가 흔들리면서 士․農․工․商의 구분이 이전 시대보다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이에 따라 4계층을 중심으로 한 四民意識은 점 차 무너졌으며, 이것은 당시의 정치적․사회적 혼란과 함께 백성들에게는 가치관의 혼 란을 가져오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이러한 시대상황에 대해 “낭만적이고 정서적이며 관능적인 분위기”라고도 하며, 16세기 후반 江南의 어느 文人은 “士農商 사이의 신분구별이 애매해졌다.”라고 적고 있다. (Takehiko Okada, “Wang Chi and The Rise of Existentialism”, in Wm. Theodore de Bary ed. self and Society in Ming Thought(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70), p.121 참조, Ping-ti Ho, The Ladder of Success in Imperial china:Aspects of Social Mobility, 1368-1911(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62), p.73 참조.(Lloyd E. Eastman 지음, 이승휘 옮김, 중국사회의 지속과 변화 , 돌베 개, 1999. pp.203-204에서 재인용)
7) 오금성, 중국근세사회경제사연구 , 일조각, 1986, pp.38-44 참조.
8) 東林黨은 明末 정치의 중심에 있던 內閣派와의 정치투쟁에서 밀려난 顧憲成을 비롯한 일부 관료들이 江蘇省 常州府 無錫에 東林書院을 건립(1604; 萬曆 32년)하고 講學을 시 작한 것이 시초가 된다. 자세한 내용은 이하 참조.(오금성외 지음, 명말․청초사회의 조 명 , 한울아카데미, 1999, pp.31-84 및 배영동, 명말청초사상 , 민음사, 1992, pp.163-193 및 貝塚茂樹 지음, 윤혜영역, 중국사 , 홍성신서-96, 1986, pp.443-474 참조)
한편, 明朝의 國運이 기울면서 泰州學派를 중심으로 성리학에 대해 정면으 로 비판하는 사상가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 대표가 바로 李贄이다. 그는 성리 학적 人性論과 修養論을 완전히 부정하였다. 9) 즉, 李贄는 마음속에서 頓悟를 통해 스스로 옳다고 느낀다면 ‘人欲’은 제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보 존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며 ‘去人欲’이라는 성리학적 덕목을 전면 부정한다. 또한 그는 人欲에 대한 긍정에만 그치지 않고 ‘거리에 가득 차 있는 것은 모두 聖人[滿街都是聖人]’이라고 하는 왕양명의 사상을 계승하여 “천하에 한 사람 도 生知 아닌 사람이 없다.”10)는 등의 극단적 주관주의 경향으로 흐르게 된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는 유가경전에 대해서도 “六經이나 論語 ․ 孟子 등은 당시의 史官이 지나치게 높이고 칭찬한 말이 아니면 당시 신하들이 극도로 찬미한 말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세상 물정에 어두운 門徒나 어리석은 제자들 이 스승의 말을 기억해낸 것이다. 그래서 머리는 있는데 꼬리가 없거나, 뒤의 내용은 있는데 앞을 빠뜨리고, 그저 자기의 소견에 따라 마음대로 기록하여 책으로 만든 것일 뿐이다.”11)라고 폄하하였다.
9) 明왕조의 멸망을 경험한 왕부지는 明의 官僚가 民生의 안정을 구실로 淸朝에 투항하는 현실을 보면서 儒敎的 大義名分의 필요성을 실감하게 된다. 따라서 節義를 버린 관료 들을 비판하기 위해 讀四書大全說 을 통해 大全 을 비판하고 孔子思想을 절대적인 가치로 인정하지 않는 異端을 철저하게 배척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왕부지는 讀四書 大全說 의 卷末에서 宋代 학자인 蘇軾(1036-1101)과 功利主義的인 永嘉學派를 비판하 였으며, 또한 明代의 三敎一致論者를 비판한다. 이 가운데 특히, 節義를 저버린 馮道 (882-954)의 民生安定의 功績을 인정한 李贄의 藏書 에 대해서는 더욱 신랄하게 비판 하고 있다. 佐藤鍊太郞, 王夫之 讀四書大全說- 集注 支持と 集註大全 批判 , pp.365- 366 참조.(松川健二編, 論語の思想史 , 汲古書院, 平成6年.)
10) 李贄, 焚書 答周西巖 : 天下無一人不生知. 11) 李贄, 焚書 童心說 : 夫六經語孟, 非其史官過爲褒崇之詞, 則其臣子極爲贊美之語. 又不然則其迂闊門徒, 懵憧弟子, 記憶師說, 有頭無尾, 得後遺前, 隨其所見, 筆之於書.
또한, 李贄는 堯․舜․禹․湯․文․武․周公을 중심으로 한 道統說에 대 해서도 전혀 근거 없는 이론이라고 비판하였다. 즉, 그는 전통적으로 인정되어 온 유학의 道統說을 부정하며, 道는 시대에 따라 언제나 존재하는 것으로서 특정인에 의해 계승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갖추어져 있 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12) 이러한 입장에서 李贄는 허위의식과 假學을 비판하 며, 당시 道學者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을 모두 거짓 道學者로 규정하고, 거짓된 마음을 끊고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眞心]의 회복을 주장하였다. 이처럼 泰州學派를 중심으로 전개된 이러한 전통적 가치관에 대한 저항의식은 당시 불안한 시대상황에 대한 사회․정치적 불만에 기인한 것이었다. 이것은 李贄 가 그의 저서에서 현실을 비판한 내용을 보면 잘 이해할 수 있다. 13) 그러나 李贄의 사상에 대해 지나친 主觀主義的 경향이라고 비판한 사상가 들도 있었다. 이들은 陽明右派로서 그 중 대표적인 학자가 바로 黃宗羲(1610- 1695)이다. 그러나 황종희 역시 유가경전에 대한 敎條的 해석에 대해서는 반대 하며, “자기 스스로 이해하여 그것의 결말을 찾으며, 傳注를 버리고 혼자서 經을 탐구한다.”14)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四書 와 五經 에 대해 기존 程朱 의 해석에 구애되지 말고 자유롭고 주체적으로 연구해야 함을 주장하는 것이 었다. 이러한 유가경전에 대한 새로운 접근은 두 가지 의미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당시의 정주학적 학문태도가 결과적으로 明朝의 멸망을 초래하게 되었 다는 사상적 반성에 기인한 것이었다. 둘째, 만주족이 세운 淸朝에 대해 학문적 으로 주체적인 태도를 견지해야 할 필요성에 기인한 것이었다
12) 李贄, 藏書 德業儒臣前論 : 道之在人, 猶水之在地也. 人之求道, 猶之掘地而求水也. 然則水無不載地, 人無不載道也審矣, 而謂水有不流, 道有不傳可乎.……彼魏軻之死不得 其傳者, 眞大謬也.……若謂人盡不得道, 則人道誠矣, 何以能長世也.……要當知道無絶 續, 人具只眼云耳.
13) 泰州學派와 李贄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중국 전근대 사상의 굴절과 전개(溝口雄三 지음, 김용천 옮김, 동과서, 1999.) , pp.69-162 참조.
14) 黃宗羲, 孟子師說 題辭 : 當身理會, 求其着落, 殿去傳注, 獨取遺經.
이러한 明代 학술계에 대한 비판의식과 淸朝에 대한 주체의식은 곧바로 당시 부패한 정치권력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즉, 黃宗羲는 “옛날에는 天下 가 主人이고 君主는 客이어서, 군주가 일생 동안 경영한 것은 천하를 위한 것 이었다. 지금은 군주가 주인이고 천하가 객이 되어 무릇 천하가 安寧을 얻지 못하는 것은 군주 때문이다.……그러므로 천하에 큰 害를 끼치는 것은 군주일 뿐이다.”15)라고 말하며, 당시 전제군주제의 폐해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이러 한 현실비판의식은 비단 黃宗羲뿐만 아니라 王夫之를 비롯한 당대의 진보적인 사상가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난 특징이었다. 왕부지는 당시 역사적 상황에 대해 “민족조차 굳게 보존하지 못하고 滿淸의 지배하에 들어가 있는데, 어떻게 그 이외의 덕목인 仁이 어떻고 義가 어떻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16)라고 반문하고 있다. 이것은 왕부지가 정주학의 도덕 중심적 학문태도에 대해 비판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대 목이다. 또한, 왕부지는 讀通鑑論 의 저작 이유를 서술하면서 “資治라는 것 은 단순히 治世와 亂世를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힘써 행하고 잘 다스리는 방법을 구하는 자료이다.”17)라고 말하며, 학문의 현실적 효용성을 강조한다. 여기에서의 현실적 효용성이라는 것은 구체적인 실천을 수반하는 것으로서 왕 부지의 경세론과 학문관을 일관하는 중요한 가치였다.
15) 黃宗羲, 明夷待訪錄 原君 : 古者以天下爲主, 君爲客, 凡君之所畢世而經營者, 爲天 下也. 今也以君爲主, 天下爲客, 凡天下之無地而得安寧者爲君也.……爲天下之大害者, 君而已矣.
16) 黃書 後序 , p.538 : 今族類之不能自固, 而何他仁義之云云也哉.
17) 讀通鑑論 敍論 四 , p.1181 : 資治者, 非知治知亂而已也, 所以爲力行求治之資也.
한편, 왕부지는 정주학의 도덕수양 중심의 학문태도가 인간의 본질적 가치 를 자각하고 心身修養을 위해서는 도움이 되지만, 반면 明代 유학자들에 의해 經典 註釋 전통이 점차 약화되고 나아가 현실적 효용성과 구체적인 실천이 미흡하게 되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왕부지 자신도 원칙 적으로는 도덕 지향적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그가 역사를 잘못 평가하 는 경우를 설명하면서 ‘하찮은 지식을 동원하여 역사를 잘못 비평하면 이익을 기뻐하여 人心을 갉아먹고 풍속에 절도가 없게 되며, 人倫을 싫어하게 되고 염치가 없어진다’라고 경고하고 있는 부분을 통해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近世 의 李贄와 鍾惺같은 泰州學派의 인물들이 역사를 비평한 說을 보면 사악하고 음란한 것도 좋게 서술하여 천하의 모든 사람들을 음란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다. 그 결과 마침내 ‘明王朝가 혼란하게 되고, 만주족이 세력을 키울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게 되어 나라를 빼앗기는 禍를 당하게 되었으니, 그 해로움은 홍수가 생기거나 맹수가 나타나는 위태로움보다 오히려 더 심하고 무섭지 않 겠는가?’라고 반문하고 있다. 18) 이처럼 왕부지의 현실비판적․실용적 입장은 정주학의 지나친 도덕수양 경향과 李贄의 과도한 人欲 긍정에 대한 비판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이러한 왕부지의 실용적 학문태도는 이후 그가 性理學에 서 氣哲學으로 선회하게 되는 주된 원인이 되었으며, 마침내 氣一元論으로 체 계화되었다.
18) 讀通鑑論 敍論 三 , p.1178 : 聞其說者, 震其奇詭, 歆其纖利, 驚其決裂, 利其呴嘔, 而人心以蠱, 風俗以淫, 彛倫以斁, 廉恥以墮. 若近世李贄鍾惺之流, 導天下於邪淫, 以釀中 夏衣冠之禍, 其非逾於洪水 烈於猛獸者乎
III. 佛敎와 陽明學의 유사성에 대한 비판
왕부지는 양명학의 良知說에 대해 佛敎의 가르침과 유사할 뿐만 아니라, 기 본적으로 불교에 근본한 이론이라고 비판하였다. 19)
天은 곧 道이며 用이 되어 萬物을 낳는다. 誠은 하늘의 道이며, 陰陽이 실재성을 갖는 것을 誠이라고 한다. (그러나 佛敎는) 단지 오는 것이 나온 곳이 없고, 가는 것은 돌아가는 곳이 없다고 보아 결국 (우주의) 本性은 본래 眞空이라고 말한다. (이에 따르면) 天地는 모두 幻想에 의해 세워진 것이고, 事物과 倫理는 한결같이 개인의 意見에 따라 제멋대로 생겨난 것이며, 보지 않고 듣지 않는 중에는 따로 理氣가 없다. 近世 王氏[王陽明]의 說은 이것에 근본한 것이며, 그의 所見이 좁을 뿐이다. 20)
이처럼 왕부지는 佛敎가 ①우주의 본질을 眞空으로 본 점, ②天地를 幻想에 의한 것으로 본 점, ③天地萬物과 人間倫理가 모두 心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본 점, ④인간이 意識하지 않을 때에는 理氣도 존재할 수 없다고 본 점 등을 양명학이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즉, 우주의 본질을 心으로 귀결 시키는 불교의 본체론과 인식론을 부정하면서 동시에 이에 근거한 양명학의 良知說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왕부지의 본체론에 근거한 것 이었다. 즉, 왕부지는 우주의 본질에 대해 인간의 의식 밖에 실재하는 氣의 聚散이라고 생각했다.
19) 讀四書大全說 大學 9장 , p.431 : 於德言明, 於民言新, 經文固自有差等. 陸王亂禪, 只在此處, 而屈孟子不學不慮之說1)以附會己見, 其實則佛氏呴呴嘔嘔之大慈大悲而已.
20) 張子正蒙注 太和篇 , p.25 : 天卽道爲用, 以生萬物. 誠者, 天之道也, 陰陽有實之謂 誠. 但見來無所從, 去無所歸, 遂謂性本眞空, 天地皆緣幻立, 事物倫理一從意見橫生, 不覩 不聞之中別無理氣. 近世王氏之說本此, 唯其見之小也.
왕부지는 우주의 본체를 氣로 보았다. 그는 張子正蒙注 의 저술 배경에 대해 설명하면서 “ 正蒙 은 陰陽의 고유함과 屈伸의 필연성을 특별히 드러냄 으로써, 中道를 확립하였다. 그리하여 지극히 합당하고 모든 것이 순응하는 위대한 근본이 모두 이것을 따름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性을 따르 는 것을 道라고 하였다. 天 바깥에 道는 없으며, 氣 바깥에 신묘한 작용은 없고, 신묘한 작용 바깥에 변화는 없다. (그러므로) 죽음도 근심할 것이 아니며, 삶도 걱정할 것이 아니다.”21)라고 말한다. 이것은 氣야말로 天地人의 원리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본체이며, 氣가 없다면 어떠한 법칙도 존재할 수 없다는 왕부지 의 생각을 요약한 것이다.
하늘이 사물의 현상을 움직이는 관점에서 말하면 봄과 여름은 생성하고 나오며 펼쳐지는 것이고, 가을과 겨울은 줄어들고 돌아가며 굽혀지는 것이다. 가을과 겨 울은 생성의 氣를 땅 속에 잠기도록 간직하므로, 가지와 잎새가 마르고 뿌리는 견고하고 무성해진다. 그러므로 가을과 겨울에 한 번 소멸하는 것이 결코 나머지 가 없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생성과 소멸은 釋氏의 佛敎에서 말하 는 천박한 학설이다. 만약 흩어져 남김없이 사라진다는 학설이 사실이라면, 이 太極이 두루 섞여 있는 우주 안에서 어느 곳이 사물을 흡수하고 받아들여 돌아가 게 하는 장소이겠는가? 또한 창조하고 변화하여 나날이 새로워지면서 옛것을 이 용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 太虛의 속에서 어디로부터 이 끊임없는 축적을 얻어서 옛것을 끝마치고 소멸로 가면서도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22)
21) 張子正蒙注 序論 , p.11 : 正蒙特揭陰陽之固有, 屈伸之必然, 以入中道, 而至當百順 之大經皆率此以成, 故曰, 率性之謂道. 天之外無道, 氣之外無神, 神之外無化, 死不足憂而 生不可罔.
22) 張子正蒙注 太和篇 , pp.21-22 : 以天運物象言之, 春夏爲生, 爲來, 爲伸, 秋冬爲殺, 爲往, 爲屈, 而秋冬生氣潛藏於地中, 枝葉槁而根本固榮, 則非秋冬之一消滅而更無餘也. ……生滅者, 釋氏之陋說也. 儻如散盡無餘之說, 則此太極渾淪之內, 何處爲其翕受消歸之府 乎. 又云造化日新而不用其故, 止此太虛之內, 亦何從得此無盡之儲, 以終古趨於滅而不匱邪.
왕부지에게 있어서 우주의 본질인 氣는 往來聚散만이 있을 뿐 결코 생성․ 소멸이 있을 수 없다. 또한, 우주만물은 인간의 意識과는 별개의 존재이기 때문 에 心의 작용에 의해 우주가 생성․소멸한다는 주장은 佛敎의 천박한 논리라 고 생각했다. 따라서 양명학에서 말하는 “心 밖에 理致가 없고, 心 밖에 萬物이 없다.(無心外之理, 無心外之物)” 혹은 “내 마음의 양지를 사사물물[萬物]에서 완성한다.(致吾心之良知於事事物物)”23) , “心 밖에 學은 없다.(心外無學)”24) 등 은 왕부지에 있어서 불교이론의 儒敎的 變容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 뿐만 아니라 왕부지는 양명학에서 知行合一을 강조하며 良知의 실천을 가로막는 私欲을 제거하게 되면 “본체를 자연히 알게 되고(本體自然會知)” 혹 은 “그 本體의 바름을 온전히 한다.(全其本體之正)”, 25) “하나의 생각이 發動하 면 곧 행동한다.(一念發動, 卽是行了)”26) 등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왜냐하면 왕부지는 양명학에서 말하는 우주본체인 良知의 작용만으로는 객관적으로 존 재하는 萬物을 모두 알 수는 없으며, 또한 각각의 구체적인 경험 없이는 그에 대한 올바른 인식 역시 불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佛敎와 老莊의 시작은 모두 (객관성이 결여된) 體는 세운다. (그러나) 用을 이미 없애면 體 역 시 실체가 없게 된다.”27)라고 말한 것처럼 양명학의 良知說 역시 결과적으로 ‘만물’과 인식의 주체인 ‘나’를 분리시키고, 이로써 ‘마음’과 ‘행동’이 서로 어 긋나게 만드는 잘못된 이론으로 생각했다
知라는 것은 禮를 아는 것이다. 禮라는 것은 그 앎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 앎을 실천하여 禮가 모두 절도에 맞고, 禮를 알면 義를 정밀하게 하여 神妙한 경지에 들어가 날로 높고 밝은 곳으로 나아감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그러므로 天地가 사귀어 태평하고, 天地가 사귀지 않아 막힌다. 그러므로 良知說을 주장하는 것은 物과 내가 서로 대립하고, 처음과 끝이 相反하며, 마음과 행동이 서로 어긋난다. 이것이 막히는 道[否道]이다. 28)
23) 王陽明全書 , 傳習錄 中.
24) 王陽明全書 紫陽書院集序 .
25) 王陽明全書 , 傳習錄 上
26) 王陽明全書 , 傳習錄 下.
27) 思問錄 內篇 , p.417 : 佛老之初, 皆立體而廢用, 用旣廢, 則體亦無實.
28) 思問錄 內篇 , p.425 : 知者, 知禮者也. 禮者, 履其知也. 履其知而禮皆中節, 知禮則 精義入神, 日進于高明而不窮. 故天地交而泰, 天地不交而否. 是以爲良知之說者, 物我相 拒, 初終相反, 心行相戾, 否道也.
또한 왕부지는 양명학의 心卽理說에 대해서도 정면으로 부정한다. 즉 양명 학의 ‘心卽理’를 ‘心外無理’와 ‘理外無心’으로 구분하여 그 문제점을 비판한다.
만약 心을 一理라고 말한다면 곧 心 밖에 理가 없으며, 理 밖에 心이 없다. 心外無 理를 말하면 가능할 수는 있지만, 그러나 진실로 佛敎의 唯心의 說과 같다. 부모 의 慈愛와 자식의 孝道는 理이다. 가령 어떠한 사람이 아직 자식이 없다면 비록 그 慈愛의 理를 구속하여 없애버리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慈愛의 理는 결국 心에 서 생겨나는 것은 아니니, 이 心에 아직 慈愛가 없다고 해서 곧 天下에 慈愛의 理가 없다고 말하는 근거가 될 수 있겠는가? 아직 자식이 없으나 慈愛의 理는 진실로 性에 간직되어 있다고 말한다면 가능한 것이지만, 만약 아직 자식이 없으 면서도 慈愛의 理가 心에 갖추어져 있다고 말한다면 어찌 가능하겠는가? 그러므 로 오로지 佛敎만이 理를 모두 幻想으로 인식한 이후에 그 心을 空한 것으로 인식 함으로써 心外無理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그 理外無心을 말한다면, 舜임금 의 말에 ‘道心은 오직 隱微하고 人心은 오직 위태롭다’고 하였으니 人心이라는 것도 理에서 한결같을 수 있겠는가? 知覺하는 것과 思慮하는 것을 따르면 理 아닌 것이 없으니, 不肖者의 放辟邪侈와 異端의 蔽陷離窮이라는 것으로도 理가 아닌 것이 없겠는가? 29)
이처럼 왕부지는 理는 구체적인 현상과 사물에 관계된 것으로서 心과는 별 개의 것이기 때문에 心에 구체적인 현상과 사물의 원리[理]가 내재한다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라고 비판한다. 30) 즉, 왕부지는 心 내부에 理가 있다는 心卽理說 은 결국 虛無寂滅과 幻想을 추구하는 불교의 논리와 다름없다고 보았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양명학에 대한 왕부지의 비판은 異端 학설인 佛敎의 논리에 근거한 주관적 인식론의 문제에 초점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양명학의 良知說과 心卽理說은 모두 불교의 禪사상과 본질적으로 동일하 며, 聖人의 學을 왜곡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본 것이다.
29) 讀四書大全說 孟子 盡心上 , p.1112 : 如其云心一理矣, 則是心外無理而理外無心也. 以云心外無理, 猶之可也, 然而固與釋氏唯心之說同矣. 父慈子孝, 理也. 假令有人焉, 未嘗 有子, 則雖無以牿亡其慈之理, 而慈之理終不生於心, 其可據此心之未嘗有慈, 而遂謂天下 無慈理乎. 夫謂未嘗有子而慈之理固存於性, 則得矣. 如其言未嘗有子而慈之理具有於心, 則豈可哉. 故唯釋氏之認理皆幻, 而後可以其認心爲空者言心外無理也. 若其云理外無心, 則舜之言曰, 道心惟微, 人心惟危, 人心者其能一於理哉. 隨所知覺 隨所思慮而莫非理, 將 不肖者之放辟邪侈與夫異端之蔽陷離窮者而莫非理乎.
30) 程朱學에서는 心을 氣의 精爽이며, 氣의 靈이라고 정의한다. 또한 心은 知覺할 수 있 으며 動靜이 있는데, 이 知覺하고 動靜하는 所以의 理를 性이라고 규정한다. 따라서 心은 性이 아니고 理도 아니며, 오히려 氣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理가 초월적인 존재로 서 氣를 주재하지만 그 자신은 스스로 활동하지 않듯이 理인 性도 결코 직접 활동하지는 않는다. 다만 오직 氣에 속하는 心만이 활동할 뿐이다. 그러므로 程朱學의 입장에서 보면, ‘性卽理’라고는 말할 수 있지만 ‘心卽理’라고는 말할 수 없다. 程朱學에서 말하는 ‘性卽理’ 란, 본연의 性은 天理로부터 주어진 것으로서 至善한 것이며, 바로 이 至善한 性이 理인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양명학의 이해(박연수, 집문당, 1999.) , pp.52-62 참조.
聖人의 말을 업신여기는 것은 小人의 大惡인데,……姚江의 學은 자신의 생각에 가까운 聖人의 말을 제멋대로 취하여 一字一句를 잘라내 중요한 비결이라고 했 다. 禪宗의 이론을 살짝 빌어오는 것은 거리낌없이 저지르는 일 가운데 가장 심한 것이다. 31)
이처럼 왕부지는 불교 이론을 거리낌 없이 차용한 양명학에 대해 “지금의 학자[姚江學派]는 한 번에 깨닫기를 조급하게 기대하다가 요행히 자신이 얻고 자 하는 것을 얻게 되면, 결국 자기 마음대로 방탕하게 즐긴다.”32)라고 비판하 였다. 이것은 우주만물을 心의 대상으로 환원하여 直覺的 방법에 의해 인식하 거나 혹은 程朱學에서 말하는 理氣를 心으로 대체한 불교의 주관주의에 대한 비판이었다. 즉, 불교이론을 받아들인 양명학은 客觀的인 원칙에 의거하기 보 다는 恣意的인 행동을 일삼게 만들고, 이로 인해 사상적 혼란을 초래하게 된다 는 것이다. 그러므로 왕부지는 왕양명의 四句敎 중 ‘無善無惡’의 가르침 역시 慧能과 神秀를 모방한 것에 불과하며, ‘無善無惡’의 내용은 ‘내 몸이 곧 菩提 樹’라는 불교이론의 變形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33)
31) 俟解 , p.489 : 侮聖人之言, 小人之大惡也.……至姚江之學出, 更橫拈聖言之近似者, 摘一句一字以爲要妙, 竄入其禪宗, 尤爲無忌憚之至.
32) 思問錄 內篇 , p.422 : 今之學者[姚江之徒}, 速期一悟之獲, 幸而獲其所獲, 遂恣以佚樂.
33) 俟解 , p.488 : 王龍溪錢緖山天泉傳道一事, 乃摹倣慧能神秀而爲之, 其無善無惡四句, 卽身是菩提樹四句轉語
IV. 역사적․실용적 관점에서의 양명학 비판
왕부지는 程朱學에서 ‘格物’을 인식의 출발점으로 삼아 구체적인 실천에 대 해 소극적인 자세를 갖게 된 것이 陽明學으로부터 비판을 받게 된 주된 원인이 라고 생각했다. 34) 이러한 왕부지의 비판은 당시의 혼란을 극복하고 새로운 사 회질서 회복을 위해 이론중심의 학문방법에서 벗어나 실천이 강조된 새로운 학문관을 모색하기 위한 고민에서 출발한 것이다. 즉, 왕부지는 宋明理學이 先秦儒學의 본질에서 벗어나 형식에 얽매이는 비현실적인 학문으로 전락하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따라서 구체적인 실천을 강조하기 위해 이론․도덕중심의 정주학적 지식론 및 수양론의 문제점을 부정해야만 했다. 35) 특히 왕부지는 주 렴계 이후 철학사의 흐름을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宋代에 周子가 출현한 이후 비로소 聖人의 道가 淵源하는 바를 드러내 밝혔는데, 모두 太極․陰陽․人道․生化의 끝과 처음에서 나온 것이다. 두 程子가 그것을 끌어와 전개하여 고요하고 한결같은 성실함과 공경함의 功을 實로 삼았다. 그러 나 유씨[游酢]와 사씨[謝良佐]의 무리가 또 갈라져 나와 부처의 샛길로 나아갔다. 그러므로 주자는 格物窮理로써 가르침의 기초로 삼아 학자를 뚜렷한 道의 가운 데로 바로 잡아 묶었다. 그러나 그것이 한두 번 전해진 이후에는 쌍봉[饒雙峯]과 물헌[熊勿軒] 등의 諸儒가 흔적을 쫓고 그림자를 밟아 訓詁에 탐닉하는 데에로 흐르게 되었다. 그러므로 백사[陳獻章]가 일어나 그것을 싫어하여 버렸으나, 결국 은 겉으로는 儒家이고 속으로는 佛家인 姚江 王氏[王陽明]가 聖人의 道를 속이는 사악한 학설을 열게 되었다.……그리하여 無善無惡과 理事를 통합한다는 속임수 로 가득 채웠다. 그 피해가 서로 더욱 커져서 中道가 서지 않게 되었고, 굽은 것을 바로 잡다가 올바름을 넘어버리게 되는 상황을 열게 된 것이다. 36)
34) 왕부지는 程朱學에서 말하는 ‘一旦豁然貫通’이라는 논리가 佛敎의 ‘頓悟’와 유사한 것 이라고 비판하며, 불교의 靜坐․寂滅의 수양방법으로 변질될 수 있음을 지적하기도 한 다. 讀四書大全說 論語 憲問 , pp.811-812 : 只下學處有聖功在, 到上達卻用力不得. 故 朱子云, 下學而不能上達者, 只緣下學得不是當. 此說最分明. 乃朱子抑有忽然上達之語, 則 愚所未安. 若立個時節因緣, 作迷悟關頭, 則已入釋氏窠臼.……忽然上達, 旣與下學打作兩 片, 上達以後, 便可一切無事, 正釋氏磚子敲門, 門忽開而磚無用之旨. 釋氏以頓滅爲悟, 故 其敎有然者.……發憤忘食, 樂以忘憂, 不知老之將至, 聖人之上達, 不得一旦忽然也, 明矣.
35) 정주학적 지식론에 대한 왕부지의 비판은 氣一元論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즉, 왕부지 는 氣와 太虛를 설명하면서 세계의 본질은 一原[一氣]임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氣는 다 만 현상적으로 有形․無形의 구별이 있을 뿐, 본질적으로 有․無의 구분이 있을 수 없 다고 보았다. 또한 왕부지는 氣로 가득 차 있는 공간이 곧 太虛이며 ‘氣 이외에 다른 존 재는 없다[此外更無他物]’고 하여 氣의 唯一性을 설명하기도 했다. ( 張子正蒙注 太和 篇 , p.26 : 陰陽二氣充滿太虛, 此外更無他物, 亦無間隙, 天之象, 地之形, 皆其所範圍也.)
36) 張子正蒙注 序論 , pp.10-11 : 宋自周子出, 而始發明聖道之所繇, 一出於太極陰陽人 道生化之終始, 二程子引而伸之, 而實之以靜一誠敬之功, 然游謝之徒, 且岐出以趨於浮屠之 蹊俓. 故朱子以格物窮理爲始敎, 而檠括學者於顯道之中, 乃其一再傳而後, 流爲雙峯勿軒諸 儒, 逐跡躡影, 沈溺於訓詁. 故白沙起而厭棄之, 然而遂啓姚江王氏陽儒陰釋誣聖之邪說,…… 而以充其無善無惡圓融理事之狂妄, 流害以相激而相成, 則中道不立矯枉過正有以啓之也
이처럼 왕부지는 객관적 物理에 치중함으로써 本心을 상실한 程朱學, 物理 를 상실하고 本心에만 치중한 佛敎, 그리고 그 영향을 받은 陽明學에 대해 비 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특히, 양명학에 대해서는 역사적․실용적 관점에서 비 판을 시도하는데, 이러한 그의 비판은 당시 시대상황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왜냐하면 왕부지는 明朝의 멸망이 異端 학설들로 인한 사상적 혼란에 의한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王陽明은 “아버지를 보면 저절로 효도할 줄 알고, 형을 보면 저절 로 공경할 할 줄 알며,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보면 측은히 여길 줄 안다. 이것이 곧 良知이니 밖에서 구할 것이 없다.”37)라고 하여 객관적인 대상 이 인식의 원천이 아니라고 보았다. 심지어 “가령 孝가 부모가 살아 계실 때 있는 것이라면, 부모가 죽은 후에는 내마음에 孝의이치가 없어지는 것인가?”38) 라고 말하면서 孝 관념은 선천적인 것으로서 결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부모 에게서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왕부지는 “孝의 대상이 부모라고 해서 孝가 부모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고, 사랑의 대상이 자식이라고 해서 사랑이 자식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등반의 대상이 山이라고 해서 등반이 山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고, 건너는 대상이 江이라고 해서 건너는 것이 江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39)라고 비 판한다. 즉, 인식 대상인 父子가 없다면 父子의 윤리규범이 있을 수 없으며, 孝․慈와 같은 윤리덕목도 존재할 수 없으므로 孝를 부모에게서 찾고 慈를 자 식에게서 찾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왕부지의 주장은 불교의 唯心 論과 유사한 양명학의 주관적 인식론에 대한 문제를 지적한 것이기도 했다
세상의 학문하는 자가 이 뜻을 알지 못하고 支離滅裂하고 獵等하여 어리석게도 차근차근 [구덩이를 채우며] 나아가는 것을 학문이 되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異端이 단지 人心을 가리켜 性을 본다는 說이 있은 후로부터 陸子靜과 王伯安이 그것에 편승하여 (결국) 곤궁함에 빠지고 실천이 善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40) 王氏[王陽明]의 學은 한 번 전해져 王畿가 되고, 다시 전해져 李贄가 되었다. (어 떤 것에 대해서도) 거리낌이 없는 가르침이 세워져 廉恥가 상실되고, 盜賊이 들끓 어 나라가 혼란해져서 모두 오직 人倫을 밝히고 事物을 살피는 데에 태만하고, 安逸과 이익만 추구하였다. 그러므로 君父를 보살피지 않아도 되었고, 膚髮[名分] 을 돌보지 않아도 되었다. 陸子靜이 나오자 蒙古가 번성[宋이 멸망]했는데, 그 흐름의 피해는 동일하다. 41)
37) 傳習錄 上 : 見父自然知孝, 見兄自然知弟, 見孺子入井自然知惻隱, 此便是良知, 不假外求.
38) 傳習錄 上 : 假而果在于親之身, 則親沒之後, 吾心遂無孝之理歟
39) 尙書引義 召誥無逸 , p.379 : 所孝者父, 不得謂孝爲父. 所慈者子, 不得謂慈爲子. 所 登者山, 不得謂登爲山. 所涉者水, 不得謂涉爲水.
40) 周易內傳 漸卦 , p.427 : 世之爲學者不知此義, 滅裂獵等, 而鄙盈科之進爲不足學. 自異端有直指人心見性之說, 而陸子靜王伯安附之, 陷而必窮, 動之不善, 宜矣.
41) 張子正蒙注 可狀篇 , p.371 : 王氏之學, 一傳而爲王畿, 再傳而爲李贄, 無忌憚之敎 立, 而廉恥喪, 盜賊興, 中國淪沒, 皆惟怠於明倫察物而求逸獲, 故君父可以不恤, 膚髮可以 不顧. 陸子靜出而蒙古興, 其流禍一也.
이처럼 왕부지는 양명학의 주관적 인식론이 올바른 학문의 길을 가로막았으 며, 사람들로 하여금 禮儀廉恥를 상실하게 하거나 人倫秩序를 혼란하게 함으 로써 결국 국가의 멸망을 초래하게 만들었다고 보았다. 이러한 왕부지의 주장은 그의 현실비판에 기초한 것이기도 했다. 즉, 明末의 학풍이 科擧를 위해 經書를 암기하거나 ‘性理空談’으로 치우치는 것[程朱學], 혹은 지나치게 주관 주의적 경향으로 변질되어 현실 문제에 대해 소홀한 것[陽明學․老佛] 등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던 왕부지는 현실문제에 대해 보다 능동적 으로 대처할 수 있는 철학적 대안을 추구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왕부지는 정주학[理氣論]과 양명학[心卽理論]의 代案으로서 張載의 氣哲學을 계승하여 氣一元論을 완성했던 것이다. 42) 구체적으로 보면, 왕부지의 현실인식과 역사적․실용적 관점에서의 양명학 비판은 사실 李贄의 童心說에 초점을 두고 전개되었다. 李贄의 童心說에 의하 면, 인간 본래의 心性이 곧 童心이며, 이 마음은 인간에게 원초적이며 보편적으 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란 童心은 인위적인 道理에 의해 왜곡되어 결국 본래성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이 때문에 세상에는 假言과 假人이 출현하 게 되고, 온통 거짓으로 가득한 세상[滿場是假]이 되었다는 것이다. 43) 따라서 李贄는 ①기존의 義理之學은 童心에서 자연적으로 나온 것이 아니며, ②근본 적으로 인간은 君子와 小人으로 구분할 수 없기 때문에 모두 평등하기 때문에 ③자연적 본성인 人欲을 적극적으로 긍정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왕부지는 王陽明과 王畿를 계승한 李贄의 童心說이 인간 욕망의 보 편성을 극단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인간의 보편적 倫理와 대립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즉, “그러므로 公理는 있을 수 있으나 公欲은 없다. 公欲이란 것은 習氣 의 妄靈된 것이다.”44)라고 하였다. 이것은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실제적으로 통합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이것을 公利的 입장에서 적절하게 조절해야 함을 강조한 말이었다. 이러한 입장에서 왕부지는 李贄에 대해 ‘시대에 따르고 백성에게 순응하는’ 것으로 세상을 현혹한다고 평가했던 것이다. 빨리 성취하려는 病은 지식의 量이 적음에서 비롯된다. 지식의 量이 적으면 천하 의 理致와 聖賢의 학문은 지름길로 가서 얻을 수 있고, 날 수를 헤아릴 정도로 빠른 시일 내에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陸象山과 楊慈湖는 이것으로 천하를 현혹 하였으니, 그 說은 高遠하지만, 그 실상은 賤하고 鄙陋하며 구차하고 疏略할 뿐이 다. 지식의 量이 적은 자는 (이처럼) 항상 驕慢하다. 45)
이처럼 역사적․실용적 관점에서의 양명학에 대한 왕부지의 비판은 李贄의 ‘公欲’을 ‘公理’로 대체한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즉, 그의 性日生日成論46)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왕부지 역시 인간의 욕망을 무조건 억압해서는 안 된다 고 보았다. 따라서 왕부지는 정주학에서의 절대적 원리인 天命[性]을 不變의 원리로 보지 않고 단순히 자연과 인간의 원초적인 능력[自然性]으로 해석하였 다. 그러므로 本性은 인간의 주체적 노력에 의해 필연적으로 보완․발전시켜 나가야 하는 대상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47) 性이라는 것이 어찌 한 번 形을 이룬 뒤에 損益을 받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君子 가 性을 기르는 데에는 비록 아무런 일을 行하지 않더라도 결코 그 저절로 됨[自 然]에 귀 기울이지는 않으니, 이것으로써 擇善은 반드시 정밀[精]해지고 執中은 반드시 견고해지니[固], 감히 마음대로 즐기지 않을 따름이다. 48)
이처럼 왕부지는 性을 生理로 해석하면서도 그 生理가 반드시 公益을 고려 하여 조정․순화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정주학의 性論과는 달리 倫理와 人欲을 조화시키는 胡宏(1102-1161)의 입장에 동의하며 “天理와 人欲 은 함께 행해지지만 實情은 다르다는 것이 옳다.”49)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天理와 人欲이 절대로 균형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태를 왕부지는 大同이라고 말한다. 50) 또한 왕부지는 大同이 이루어진다면 天理와 人欲은 대립하지 않게 된다고 말한다. 51) 이것은 각 개인의 욕구충족을 존중하는 사회를 大同이라고 말하는 李贄의 주장과는 엄연히 다른 것이었다. 이처럼 왕부지는 生理로서의 人欲이 天理와 조화를 이 루게 되면, 비로소 “소리와 색, 냄새와 맛에서 인간의 보편적인 公欲을 분명히 볼 수 있으며, 이것이 곧 만물의 公理가 될 수 있다.”52)고 말한다. 정리한다면, 왕부지의 독창적인 性論에 근거한 양명학 특히, 李贄에 대한 비판은 결국 인간 의 무절제한 慾望을 단계적으로 조절하여 이것을 公理로 승화시킴으로써 당시 혼란한 역사적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원리를 도출하고자 했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V. 결론
明末․淸初의 전환기에 활동했던 왕부지는 평생을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다. 당시는 정치․경제․사상적 갈등이 심화된 시기였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에 서 왕부지는 현실비판적․실용적 학문태도를 가지고 당시의 思想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시도하였다. 본론에서는 특히 왕부지의 양명학 이해 및 비판에 초점을 두고 1)불교와 양명학의 유사성에 대한 비판, 2)역사적․실용적 관점에 서의 양명학 비판 등으로 구분하여 살펴보았다. 첫째, 불교와 양명학의 유사성에 대한 비판을 살펴보자. 왕부지는 佛敎가 우주의 본질을 眞空으로 본 점, 天地를 幻想에 의한 것으로 본 점, 天地萬物과 人間倫理가 모두 心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본 점, 인간이 意識하지 않을 때에는 理氣도 존재할 수 없다고 본 점 등을 양명학이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특히, 양명학의 良知說은 인식의 주체와 대상을 분리시키는 문제점이 있다고 평가했다. 이것은 대상세계가 인간의 의식과는 별개의 존재이며, 氣의 聚散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우주만물이라고 하는 그의 氣一元論에 근거한 것이기도 했다. 이 밖에도 양명학의 心卽理說에 대해 虛無寂滅을 추구하는 불 교의 논리에 불과하며, 왕양명의 四句敎 역시 불교이론의 變形에 불과한 것이 라고 비판하였다. 둘째, 역사적․실용적 관점에서의 양명학 비판을 살펴보자. 왕부지는 宋明 理學이 이론과 형식에 얽매임으로써 민족의 멸망을 초래했다고 보았다. 이에 ‘物理에 치중하여 本心을 상실한’ 程朱學과 ‘物理를 상실하고 本心에만 치중 한’ 佛敎․陽明學을 대체할만한 새로운 사상을 모색하였다. 이 과정에서 왕부 지는 역사적․실용적 관점을 가지고 양명학의 주관적 인식론이 사람들로 하여 금 禮儀廉恥를 버리고 人倫秩序를 혼란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하였다. 구체적으 로는 李贄의 童心說이 인간 욕망의 보편성을 극단적으로 강조함으로써 倫理와 대립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이에 왕부지는 性日生日成論에 입각하여 인간의 주체적인 노력에 의해 욕망을 적절히 조절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구체적으 로는 天理와 人欲이 균형을 이루는 大同의 상태를 유지함으로써 李贄의 ‘公欲’ 을 ‘公理’로 승화시킴으로써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철학사상을 모색하 고자 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明朝의 멸망으로 근본적인 가치관마저 붕괴된 역사적 상황에서 왕부지는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기 위해 기존 학문체계 및 방법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程朱學과 陽明學을 동시 에 비판․종합하는 철학사상을 완성하게 되는데, 이것은 思想史的으로 볼 때 전환기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이다. 즉 전환기 유교지식인으로서 왕부지의 종합적인 학문경향은 그의 철학사상이 근대철학으로 나아가는 데에 있어서 집 대성자로 평가되는 주된 요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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