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老子는 중국 선진시대의 제자백가 중에서 부정적인 사유방법을 가장 철저하게 전개시킨 사상가요 언어적대 관계를 설정한 사상가다. 노자의 사유는 특유의 모순 어법 때문에 언제나 알 듯 모를 듯하다. 하지만 그것은 만물을 음양 양극간의 역 동적인 상호작용으로 파악하는 태도요 대립과 모순을 역설적인 조화로 설명해내는 어법이다. ‘무위(無爲)’라는 개념만 제대로 이해하고 그것이 주는 미망만 넘어선다 면 《노자》만큼 논리적이고 명쾌한 텍스트도 없다.1) 그의 《노자》는 부정과 역설의 논리로 저술된 중국 최초의 사상서이다.
1) 사마천은 《사기열전》 전체에 걸쳐 노자의 사상을 인용하면서 매우 높게 평가한다. <노 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에서 사마천은 노자가 160여 살 또는 200여 살을 살았는 데 그 이유는 양생술을 터득했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한다(“蓋老子百有六十餘歲, 或言二 百餘歲, 以其脩道而養壽也.”) 특히 사마천은 노자가 ‘도’와 ‘허무’를 귀하게 여겼고 ‘무위’ 에서 변화를 추구했다고 하면서 그가 지은 책의 문사가 미묘하여 이해하기 어렵다(“老 子所貴道虛無, 因應變化於無爲, 故著書辭稱微妙難識.”)고 평가했다. 특히 사마천은 공 자와 노자와의 만남을 기정사실화하여 공자가 노자에게 ‘예’를 물었고 그에 대한 문답 을 통해 공자가 노자를 대단히 높이 평가했다는 말도 덧붙였다(“孔子適周, 將問禮於老 子. …… 吾今日見老子, 其猶龍邪.”). 물론 노자이든 공자이든 당시 주류 사상은 아니었 지만, 공자와 노자의 사상적 회통의 가능성을 열어둔 사마천의 시각은 참신 그 자체로 평가될 만하다.
또한 김충열도 지적한 바, “문명을 반대 하고 전쟁을 싫어하며, 국가와 관리를 불신증오하고, 어질다고 뽐내는 사람을 비 웃으며, 법령을 우습게 여기고 …… 언어문자라는 문화의 수단을 허망과 가면의 공 구로 고발하는 등 모든 것을 부정한 ……”2) 반문명적 문화비평서이다. 이는 《노 자》라는 책이 비논리적인 것처럼 보이는 난문으로 일관되어 있는 듯한 데서도 엿 볼 수 있다. 때로는 강력한 모순어법과 시적인 언어가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아 논리적인 추론의 낯익은 상궤에서 벗어나도록 한다는 데서 알 수 있을 것이다.3) 역설의 언어요 도발적인 말이며, 언어 파괴를 통한 의미 획득을 역설한 저 유명한 구절인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로 시작되는 《노자》 텍스트는 단지 5천 여 자에 불과하지만 이 속에는 부정과 역설을 내포한 어휘를 500여 차례나 사용 되고 있다. 소(小)⋅유(柔)⋅약(弱)⋅과(寡)⋅희(希) 등이라든지, ‘강강(剛强’)보 다는 ‘유약(柔弱)’을, ‘실(實)’보다는 ‘허(虛)’를, ‘동(動)’보다는 ‘정(靜)’을, ‘유(有)’ 보다는 ‘무(無)’를, ‘기교(技巧)’보다는 ‘소박(素朴)’을, ‘작위(作爲)’보다는 ‘무위(無 爲)’를 강조하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 다음 단계로는 막(莫)⋅비(非)⋅불(不)⋅ 외(外)⋅절(絶)⋅기(棄) 등이 사용되었으며, 그리고 명사적으로 사용된 무(無)에 이르기까지 64종의 부정사가 사용되었다.4)
2) 김충렬, 《김충열 교수의 노장철학강의》(서울: 예문서원, 1995), p.50 김충열의 논의 를 좀 더 확장하면, 노자로 대변되는 도가는 유가에서 제창한 예의가 도덕을 파괴하고 인위는 허위를 조성했으며, 질서는 혼란을 야기했다며 ‘무위무불위(無爲無不爲)’라는 미 학 원칙으로, 문학의 작용에 있어서도 ‘무용무불용(無用無不用)’으로 나타났다. 그러기 에 노자는 형이상학, 즉 ‘대음희성(大音稀聲)’, ‘대상무형(大象無形)’의 경지를 중시한 것이다.
3) F. 카푸라 저, 이성범, 김용정 역,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서울: 범양사, 1988), pp.55~58. 이규호, 《말의 힘》(서울: 제일출판사, 1992), pp.14-15.
4) 鄔昆如, <否定詞在道德經中所扮演的角色>, (《哲學與文化》, 第八卷十期, 1981)
기본적으로 노자는 ‘무(無)’는 천지의 시작을 이름하고, 有는 만물의 어머니를 이름한다”5)라든지, “ [정말로]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知者不言, 言者不知).(《老子》 56장)”라는 식의 언어관을 견지했는데, 적어도 노 자가 생각하는 ‘도’는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으며 만져볼 수도 없는 비실재적 인 ‘도’6)라는 인식에 근거한다. 노자가 보기에 ‘소리도 없고[無聲]’과 ‘형체도 없는 [無形]’의 ‘도’이므로 제한된 언어나 개념으로서 표현하거나 정의를 내릴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7) 본고를 통해 필자는 노자가 ‘도’의 본질에 대해 절대적 가치부여를 한 근본적인 이유를 주로 ‘道可道, 非常道’를 중심 논제로 삼아 이 말이 갖는 의미를 살펴보고 자 한다. 노자는 기본적으로 일반 언어로는 ‘道’를 충분히 전달하지하지 못한다는 시각에서 출발한 근거, 즉 언어를 철저히 수단 내지 도구로 보아 그 기능적 한계 만을 인정하면서 언어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한 노자의 관점을 검토하고자 한 다.
5)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老子》 第1章 왕필은 이 문장에 대해 “可道之道, 可名 之名, 指事造形, 非其常也. 故不可道, 不可名也.”라는 주를 달았다.이 각주에 대한 풀이 는 牟宗三의 《理則學》(臺北: 國利編譯館, 1971), p.276을 참조하라.
6) “視之不見, 名曰夷, 聽之不聞, 名曰希, 搏之不得, 名曰微, 此三者不可致詰, 故混而爲一. 其上不皦 , 其下不昧, 繩繩不可名, 復歸於無物.” 《老子》 第14章. 이 장을 통해 노자는 도의 모습을 설명하면서 현실 속으로 도를 집어넣어 운용의 원칙을 말한 이 장은 제 1 장과 25장과 더불어 읽어보아야 한다. “이夷: 평이함”, “희希: 희미함”, “미微: 미미함” 라는 핵심 개념을 주축으로 하여 도의 근원적인 문제가 일상의 감각을 초월한 그 어딘 가에 존재한다는 의미, 즉 도의 신비한 초월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노자는 상대적인 무 와 상대적인 도에 대해 계속 설명하고 있다.
7) 노자가 ‘도’는 형상을 일컬을 수 없는 ‘무물(無物)’이고, ‘무(無)’야말로 만물이 산생하는 근원이라고 했으며, 천하 만물은 ‘유(有)’에서 태어나고 ‘유’는 ‘무’에서 태어난다고 한 근거는 무엇인가? 王弼의 해석에 의하면, “이름은 반드시 구분하는 바가 있고, 일컫는 것은 반드시 말미암은 바가 있다. 구분이 있으면 합치지 못하는 것이 있고, 말미암는 것이 있으면 다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합치지 못하면 그 바탕이 아주 다르고, 다하지 못하면 일컬을 수 없다.(名必有所分, 稱必有所由; 有分則有不兼, 有由則有不盡; 不兼則 大殊其眞, 不盡則不可以名).” 王弼, 《老子》 二十一章注 이 문장에 대한 논의는 本協立 의 <“言意之辨”: 語言的局限性與文學的重要性>(濟南; 《文史哲》, 1994年 第2期), p.71 에 자세하다.
본고를 통해 필자는 이 구절과 상관되는 《노자》 텍스트의 논거를 검토하면서 부정과 역설의 의미를 반문화론적 혹은 반문명론적인 입장으로 확장 가능한지의 여부8)도 따져 보고자 한다.
2. 세 가지 ‘道’의 多重性과 ‘도’의 근원적 속성 문제
노자는 언어로 표현되기 이전의 의식 또는 인식이 있음을 전제로 했기 때문에 이 책의 첫머리에서 ‘道可道, 非常道(‘도’가 말할 수 있으면 영원한9) 도가 아니 다.10))’라는 말을 한 것이다. 이 구절은 왕필王弼이 “말할 수 있는 도와 이름 지 을 수 있는 이름은 형체가 이루어진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영원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도라고 할 수 없으며, 이름을 지을 수도 없다.(可道之道, 可名之名, 技 事造形, 非其常也. 故不可道, 不可名也)”라고 주석을 단 것처럼, “말할 수 있는 도”(可道之道)의 의미에 해석이 집약되어 있다. 그러므로, ‘道可道, 非常道’라는 구 절에는 도의 진리를 밝히기 위한 하나의 분명한 메시지가 담겨 있으니, ‘도(道)’도 부득이 언어로써만 밝혀지고 설명될 수밖에 없다는 역설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 이 이미 전제되고 있다는 점이다.11) 왜냐하면 노자는 자신이 표현 불가능한 진정 8) 적어도 필자가 보기에 노자야말로 기존의 관습과의 단절을 통한 새로운 인식의 전환을 모색한 해체(deconstruction) 행위를 선언한 사상가라는 데 주목하고자 한다. 노자는 당시의 진리 개념을 해체한 것이요, 전통의 개념을 부정하였기 때문이다.
9) 원문의 “상常”에 대한 해석인데, 그 내포적인 의미는 “편중되지 않는”, “치우치지 않는” 이런 의미를 갖고 있다. 말하자면 사물이란 조화를 “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10) 이 장의 첫머리의 이 여섯 글자를 통해 노자는 이 장에서 “도道”와 “물物”, “물物”과 “명名”,그리고 “인人”과 “물物”의 관계 설정에 고심하고 있다.
11) 그러기에 위진남북조의 문학이론가 유협(劉勰)은 노자의 사상을 문학적으로 해석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 유협은 이렇게 말한다. “노자는 인위적인 것을 싫어했기 때문 에 ‘아름다운 말은 믿음이 없다’고 하였으나, (그의 《도덕경》) 5천 글자는 정묘하여 아름다움을 버린 것이 아니다. (중략) 이씨의 《노자》의 말을 자세하게 음미하면 꾸밈 과 본질이 성정에 부합됨을 알 수 있다(老子疾僞, 故稱‘美言不信’, 而五千精妙, 則非棄 美矣. (……) 硏味李老, 則知文質附乎性情). 《文心雕龍⋅情采》” 유협이 이렇게 말한 그 이면에는 노자가 말하고자 하는 언어 불신에 대한 나름의 이해가 배어있다. 즉 언어 와 도의 문제에 대한 노자의 입장은 도에 우월적 위치를 부여하였고, 언어에 대해서 는 그다지 중시하지 않는 듯한 입장을 보였으며 이런 사유가 유협에 의해 계승되었다 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도란 쉽게 개념화될 수 없으며 그러기에 도는 그 의미를 그대로 간직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언어를 통하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개념화된 도(언어로 표현된 도)는 우리의 관념 속에 고정되고 추상화되어 버리는 것으로서 본래의 실재적 도의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는 주장이다. 그리하여 노자는 언 어 밖에서 혹은 언어를 초월하여 도에 대한 이해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외쳤던 것이 다. 보다 자세한 사안은 김원중, 《중국문학이론의 세계》(서울: 을유문화사 2002) 참조.
한 의미의 ‘道’를 표현하기 위해 텍스트를 완성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제 1장 전 체의 내용을 인용해 보기로 하자.
‘도’가 말할 수 있으면 영원한12) 도가 아니다.13) 이름이 이름 지을 수 있으면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이름 없음이란 천지의 시작이고, 이름 있음 이란 만물의 어머니이다. 그러므로 영원한 없음으로 그 미묘함14)을 보고 자한다. 영원한 있음으로서 그 끝15)을 보려고 한다. 이 두 가지는 같은 곳에서 나왔으나 이름을 달리하므로 그것을 함께 현묘함이라고 일컫는다. [따라서] 현묘하고 현묘하여 온갖 미묘한 것들이 나오는 문이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16)之母. 故常無欲, 以觀其妙. 常有欲, 以觀其徼.17) 此兩者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眾妙之門.
12) 원문의 “상常”에 대한 해석인데, 그 내포적인 의미는 “편중되지 않는”, “치우치지 않는” 이런 의미를 갖고 있다. 말하자면 사물이란 조화를 “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13) 이 장의 첫머리의 이 여섯 글자를 통해 노자는 이 장에서 “도道”와 “물物”, “물物”과 “명名”, 그리고 “인人”과 “물物”의 관계 설정에 고심하고 있다.
14) “상무욕, 이관기묘 常無欲, 以觀其妙.”란 말은 존재사물을 의식의 대상으로 자기 앞에 내세우고 이러저러한 것으로 표상함이 없는 태도로써 존재를 직접 파악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는 주관과 객체와의 대립 이전의 인식으로서, 식능(識能)으로서의 “심 (心)”과 대경(對境)으로서의 “물(物)”이 마주 섬이 없이 이루어지는 사유 이전의 인식 이다. 원문의 “묘妙”란 왕필의 해석대로 은미함이 지극한 것을 일컫는다. 늘 아무것도 하려는 것이 없는 것과 공허함 속에서 만물의 시작의 그 미묘함을 살피라는 노자의 말을 음미해야 한다.
15) 원문의 “요徼”는 “묘妙”와 대비되는 것으로 밖으로 나타난 일종의 현상세계를 의미한다
16) “만물萬物”이란 말은 노자가 “자연(自然)”이라는 말보다 즐겨 사용하는 핵심 개념이다. “만물작언이불사萬物作焉而不辭”(2장)라든지, “수선리만물이부쟁水善利萬物而不爭”(8장) 라든지; “의양만물이불위주衣養萬物而不爲主”(34장), “만물시지이생이불사萬物恃之而 生而不辭”(34장), “천하만물생어유天下萬物生於有”(40장), “만물부음이포양萬物負陰而 抱陽”(42장) 등이 그러하다. 이런 몇몇 인용문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노자는 “만물 (萬物)”이라는 말을 자연이라는 개념과 유사하게 사용하고 있다.
17) 이 문장을 “常無, 欲以觀其妙. 常有, 欲以觀其徼.”라고 구두점을 찍어 해석하는 방식 도 있으니 왕안석王安石 등의 해석법이다[“道之本出於無, 故常無, 所以自觀其妙. 道之 用常歸於有, 故常有, 得以自觀其徼”]. 왕필王弼과 하상공河上公 등은 모두 현 판본처 럼 구두점을 찍었다. 후자의 경우 “영원한 없음에서 그 신묘함을 보고자 하고, 그 영 원한 있음에서 그 끝을 보고자 한다.”라는 식으로 해석한다. “유(有)”는 많고 복잡한 세계의 현상으로 “물(物)”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고, “요(徼)”는 제한과 한계를 가진 구 체적 사물이며, “욕(欲)”은 인간의 호(好), 오(惡)의 감정에 의해서 대상사물의 좋고 나쁨을 분별하는 평가적 태도가 아니라 현상계의 대상사물에 대한 지적인 의식지향을 말한다. 따라서 “상유욕(常有欲)”의 태도로 어떤 구체적 사물을 본다는 것은 일체의 정의적(情意的) 요소가 개입되기 이전의 단순한 지적 태도로 사물의 모습을 보는 것 으로서 경험적 인식의 태도라 할 수 있다.
18) 馮友蘭, Derk Bodde 공저, 姜在倫역, 《中國思想史》(서울: 일신사, 1983), p.103.
사실상 제 1장은 2장과 11장,40장과 함께 읽어보면 “無”에 대한 노자의 견해를 알 수 있다. 비자연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작위는 현상적 사물의 부분적 모습을 포 착하여 구성되는 불완전한 인식과 더불어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무절제한 욕구에 그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그러한 “자연(自然)”과는 정면으로 대립되는 개념이 된다.18) 따라서 “작위(作爲)”는 “자연(自然)”의 의미와 비교해 보았을 때 그 뜻이 더욱 분명해진다. 그렇다면 노자가 이런 사유를 하게 된 근거는 무엇인 가? 노자가 생각하기에 언어란 일차적으로 의미의 매개물로서 존재하지만 언어의 한계(혹은 속성)로 인해 본질을 일그러뜨리는 일이 허다하므로 참다운 인식의 방 해물이라고 간주했던 것이다. 그는 도는 스스로 그냥 있는 존재 일반을 가리키며, 스스로 그냥 있는 것이란 언어로 표현되기 이전의 것을 의미하므로 ‘현지우현(玄 之又玄)’이라 했다. 만일 ‘현(玄)’을 ‘묘(妙)’로 해석한다면 ‘도’의 의미를 ‘玄’ 자와 일시하여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현묘하다’라는 말의 의미는 확실하게 무엇이 라고 이름을 붙일 수 없다는 말19)로서 ‘도’의 개념과 기본적으로 상통하기 때문이 다. 이는 명명(命名)하기 이전의 존재란 어느 면에서 그것을 인식하는 의식에 분 명하게 나타날 수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한 사물의 개념은 언어를 떠나서는 불 가능하므로 언어로 표현되기 이전의 존재인 ‘道’는 그 자체가 이미 명백한 실체가 도저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노자 사상의 중심 개념인 ‘도(道)’는 세계를 구성하는 근원적 존재이고, 우주만 물을 생겨나게 하는 추진력이며,20) 만물이 운동 변화하는 법칙이고, 인간 행위의 기준이다.21) 다시 말해서 노자는 ‘도(道)’를 최상의 범주로 제시하고 그의 사상체 계의 핵심으로 삼은 것이니, 노자는 ‘도(道)’를 ‘만물의 근원’(萬物之宗)이라 하였 고, 도를 낳는 다른 존재란 없으며 그 자신이 바로 조상으로서 심지어 상제보다도 앞서 출현했다고 본 것이다.22) 이 도를 존재론적 측면에서 해석하면 세 가지로 특정화할 수 있다. 첫째는 도가 천지보다 먼저 있었다는 도의 선재성(先在性)이 고, 둘째는 소리나 형태가 없이 홀로 있다는 도의 자재성(自在性)이며, 셋째는 어 느 곳에나 번져 나가며 멈추는 일이 없다는 도의 편재성(遍在性)이다. 즉 도는 초 시간적 존재이며, 독립상존하는 존재이므로23) 시간, 공간, 물질 삼자가 화해한 우주의 개념밖에 무한의 공능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24) 노자는 이러한 도 와 만물의 관계에 관해 심오한 이치로 설명하고 있으니, 다음 문장을 보기로 한다.
19) 《說文解字》에 의하면, “玄이란 그윽하고 먼 것(玄幽遠也)”이라 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윽하다(幽)는 말은 깊다(深)는 뜻이므로, ‘玄’이란 깊고도 먼 것(深源)이라는 말이 다. 周紹賢, 《魏晋淸談述論》(臺灣: 商務印書館, 1987), p.53 재인용.
20) 여기서 ‘原理’라 하지 않고 ‘추진력’이라고 일컬은 까닭은 원리라는 것은 情態的 존재 이므로 그 자체는 창조생성할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려면 신과 같이 뒷 면에서 지휘하거나 발동시키는 것이 있어야만 되기 때문이다.
21) 陳鼓應, 《老子今註今譯》(台批: 商務印書館, 1983), P.50 참조.
22) 任繼愈 主編, 전택원 역, 《中國哲學史》(서울: 까치, 1990) pp.114~115 참조.
23) 牟宗三저, 宋恒龍역, 《才性與玄理》(서울: 동화출판사, 1983), pp.185~186 참조. 金忠烈, 《時空與人生》(台批: 華岡出版有限公司, 1970), pp.51~52 참조.
24) 金忠烈, 앞의 책, p.56.
“도(道)는 일(一: 태일太一로써 아직 도가 되지 않은 태일을 가리킴)을 낳고, 일(一)은 이(二: 천지, 혹은 대립된 두 방향)를 낳으며, 이(二)는 삼(三: 새로운 제 3자)을 낳고, 삼(三)은 만물을 낳는다. 만물은 음을 짊 어지고 양을 안고 있으며, 솟아오르는 기운으로써 조화를 이룬다.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25) 《老 子》 42장 이 인용문은 도와 만물의 관계를 설명한 것으로서 노자의 사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네 개의 “생生”자가 연속적으로 등장하는 첫 문장은 《노자》에서 가장 난해한 부분이면서도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 손꼽힌다. 물론 기본적인 의미는 도에서 일이 나오고 일에서 이가 나오며 이에서 삼이 나오며, 삼에서 만물이 나온다는 말인데, 왕필이 이미 주석을 달았듯이 “일”이란 물아일체의 상태요, “도”와 하나가 되는 “무 無”의 차원의 문제다. 그렇다면 “이二”는 무엇인가? 왕필은 “일一”에 대해 언급하는 말과 이에 대한 지시내용, 즉 분별지에 의해 대상화된 것이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리고 “삼三”이란 말과 말의 지시내용 그리고 여전히 대상화될 수 없는 마음을 비우는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자》라는 사상서를 통치술의 근본으로 파악한 한비(韓非)는 “도란 만물의 그러한 바이며[道者萬物之所然也]”26)라고 하였고 “만물의 이루어진 까닭이 다.[道者萬物之所以者也]”27)라고 하면서 만물의 생성이 ‘도’가 무형에서 유형으로 변해가는 과정으로 표명되므로 도와 만물은 이원적인 것이 아니라 일원적인 것으 로 파악했다.28) “도”가 곧 “일”로 표현되는데, 여기서는 “도”가 “일”보다 상위에 놓인다는 점이다. 즉 “도”는 “유”와 “무”, “음”과 “양” 등과 같은 대립적인 것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니,
25) 원문의 “화和” 자는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말한 “화龢” 자와 같으며 그 의미는 조화 롭다[調]는 의미다. 물론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유가에서의 관점에서 보면,“드러났으 나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라고 한다(發而皆中節謂之和).”(《예기禮記》 <중용中庸>)” 는 것이다.
26) 《韓非子》 <解老>
27) <上同>
28) 徐後觀, 《中國人性論史》(先秦論), 臺北: 商務印書館, 1963, p.337.
이미 이 둘이 포함되어 있는데도 왜 노자가 이런 식으로 논의를 전개시켰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도생일道生一”이란 말은 도가 일이라는 관념 속에서 산다, 혹은 관념을 이룬다는 식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도는 언제나 만물 위에 작용하지만 표면상으로는 정적이며 무위적인 것 처럼 보인다. 즉 도의 ‘용(用)’에 이르러서는 언제나 활동하면 한시도 쉬는 일이 없지만, 도의 ‘체(體)’에 이르러서는 있는가 하면 없고, 없는가 하면 있으니 황홀 하여 구별도 없고 아득하여 어둡기 때문에 구체적 사물로 고정화된 ‘유(有)’에 대 비시켜 ‘무(無)’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이런 맥락에서 다음 문장들을 보기로 하자.
i) “도는 [그릇처럼] 비어있으면서도 작용하여 [아무것도] 채우지 않을 듯하고, 깊으면서도 만물의 근원인 것 같기도29) 하다. 날카로움을 꺾고, 엉클어짐을 풀어주며, [번쩍거리는] 빛을 부드럽게 하고, 그 티끌[세속을 비유함]과 함께 하니, 맑으면서 존재하는 것 같지만, 나는 [도가] 누구의 아들인지 알지 못하지만, 하느님(조물주)보다는 앞서 있는 것 같다.(道沖 而用之或30)不盈. 淵兮似萬物之宗. 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 湛兮 似或存.31) 吾不知誰之子, 象帝之先.) 《老子》 4장”
29) 원문의 “사似” 자를 해석한 것으로 같은 것 같은데 닮았다는 말로 긍정적인 의미보다 는 부정적 의미가 강하다. 어찌 보면 그런 것 같기는 한데 끝까지 파고들어가 보면 다른 것으로 판명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러니 이 문장은 최진석의 지적처럼 “도를 만물의 발생의 근원이나 실체 혹은 본체로 볼 수도 있지만 사실은 자연의 존재 형식을 보여주는 범주에 불과하다”(《도덕경》(서울: 소나무, 2010), p.62)는 의미로 보는 것도 무리가 없다.
30) 하상공은 이 글자 “혹或”을 “상常” 자로 풀이하기도 했다.
31) 이 “挫其銳,解其紛, 和其光, 同其塵, 湛兮似或存.” 17글자는 왕필본에 근거하여 그대 로 두었는데, 이것들이 제56장의 착간錯簡으로 보는 학자도 있는데, 필자가 보기에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ii) “도는 항상 이름이 없으니, 질박하고 비록 보잘 것 없지만 천하에서 아무도[그것을] 신하로 삼을 수 없다.(道常無名, 樸雖32)小, 天下莫能臣 也). 《老子》 32장”
32) 마왕퇴노자본의 甲本과 乙本에 “수誰” 자가 “유唯” 자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 구절의 “박樸” 자는 “도道”와 함께 사용할 수 있다는 것도 병기한다.
ⅲ) “[그러나] 도는 말로 표현해 봐도 밋밋하여 맛이 없다. 그것을 보려 해도 보이지 않으며, 그것을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으며, 그것을 쓰려 해 도 다하지 못한다(道之出口, 淡乎其無味, 視之不足見, 聽之不足聞, 用之不 足旣). 《老子》 35장”
i)은 도의 작용을 설명하고 있는데, 무위(無爲)를 이루기 위해 보이지 않는 무 (無)의 작용을 본받으라는 것이다.
ii)는 어떤 것을 대상화 시킬 때 이름 붙이는 것 이상으로 하지 말라는 것이고 그것은 정치도 예외가 아니라는 관점이다.
ⅲ)은 도의 무한함과 절대적 작용성을 말하면서 도의 존재가 시각과 청각을 배제한 담담 함 그 자체라는 것이다.33) 이 세 예문을 통해 도는 차별적, 한정적, 인식 방법으 로는 파악될 수 없는 없으므로 감관작용을 통해 표상화할 수 있는 대상도 아니고, 사유작용을 통하여 추리할 수 있는 대상도 아닌 것이다. 다만 고도의 의식 정적 상태에서 형성되는 내적 직관에 의해서만 체득될 수 있는 무대상적 대상인 것이 다. 즉 노자에 있어서 인식의 최종 목적도 결국은 그가 말하는 ‘도(道)’의 인식에 있다. 그러기에 노자는 “[지식의] 구멍을 막고 그 문을 닫아 버리면(塞其兌, 閉其 門)” 평생 동안 병으로 고통 받는 일이 없다고 주장한다. 만약 지식의 구멍을 열 고 감각기관으로 사물을 정하여 지식을 쌓아나가면 죽을 때 까지 어떻게 해볼 도 리가 없게 된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그는 인간의 인식이 무지, 무욕의 무위 상태로 나아감으로써 비로소 최고단계에 도달된다고 보았다. 그는 “나 홀로 담담
33) 그러기에 장자도 “도는 귀로써 들을 수 없는 것이니 귀로써 들을 수 있으면 도가 아 니요 도는 눈으로써 볼 수 없는 것이니 눈으로써 볼 수 있으면 도가 아니요, 도는 입 으로써 말할 수 없는 것이니 입으로써 말할 수 있으면 도가 아니다(道不可聞, 聞而非 也, 道不可見, 見而非也, 道不可言, 言而非也. 《莊子》 <知批遊>)”라고 했던 것이다. 장 자에게 있어서 말은 수단적 위치, 다시 말해서 현존재(現存在, Dasein)의 삶의 체험 을 전달하기 위한 제 2의적인 수단, 그것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이류의 차원에 속할 뿐이다. 狩野直喜저, 吳二煥역, 《중국철학사》(서울: 을유문화사, 1986), pp.192~196 참조. 조셉니담 저, 이석호외 2인 역, 《중국의 과학과 문명》(서울: 을유문화사, 1988), pp.49~50. 박이문, 《老莊思想》(서울: 문학과 지성사, 1985), pp.24-29.
하여, 그 조짐도 들어내지 않은 것이 마치 어린아이가 웃음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 과 같다.(我獨泊兮其未兆, 如嬰兒之未孩. 《老子》 20장)”라고 하면서 무지몽매해야 만 도를 체득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기에 그는 극단적으로 “늘 백성들이 알 고자 하는 것도 없도록 하고 하고자 하는 것도 없도록 한다(常使民無知無欲. 《老 子》 3장)34)” 고 말함으로써 우민화(愚民化)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무엇인가 작용한다면 작용하는 것이 실재하게 되고, 작용하지 않는다면 아무것 도 없는 허무가 된다. 작용하는 것이 실재한다고 하는 것은 도가 사물로서 존재한 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말로 표현할 수 있고 마음에 생각할 수 있다고 하지만 이 것을 말로 나타내면 차츰 더 ‘도’에서 멀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말을 떠 나고 묵사(默詞)를 떠나 ‘무위’의 경지에서 ‘도’의 극치를 말해야 하는 것이다. 즉 현상으로 존재하는 것은 이름을 가지며 형체를 가지고 인간의 감각지각에 따라 포 착되어지는 실체를 가지기 때문에 말로 설명할 수 있지만, 물(物)을 물(物)이게끔 하는 일체의 존재로 하여금 일체의 존재로서 있게 하는 근원적 이법(理法)은 이름 을 갖지 않으며 형체를 갖지 않으며 인간의 감각지각에 의하여 포착되어지는 실체 도 갖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말로써 논하고 얘기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사물의 정미한 일면으로서 유형이요, 유한의 상대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형체 가 없고 무한의 크기를 가진 참된 진리는 정조(精粗), 대소(大小) 따위 차별의 말 가지고는 도저히 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도를 “천지로 구별되기 이전에 뒤범벅되어 있는 것35)이라고 보 았으니,
“어떤 것은 섞여서 이루어져 있어 [그것은] 하늘과 땅보다 먼저 생겨났다. 적막하고 쓸쓸하여, [의지하지 않고] 홀로 서있으며 바뀌지도 않는다. 두루 운행하면서도 위태롭지 않아 천하의 어머니(근본)가 될 수 있다.
34) 이 문장은 제 65장에서 “백성들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그들이 지혜가 많기 때문이 다. 따라서 지혜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나라의 도적이요, 지혜로써 나라를 다스 리지 않는 것이 나라의 복이다.(民之難治, 以其智多, 故以智治國, 國之賊, 不以智治 國, 國之福)”라는 말과 함께 읽어보면 그 의미가 분명하게 다가온다.
35) 이 문장에서 ‘字之’ 앞에 ‘强’ 자가 있어야 아래의 문장과 댓구를 형성하여 자연스러운 문장이 된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으니, 정세근이 그렇다. 정세근, 《노장철학》(서울: 철학과 현실사, 2002), p.26. 물론 정세근의 견해는 劉師培 등의 견해와 일치되는 것으로서 이 장에 대한 제가의 주석은 陳鼓應의 《老子今註今譯》, p.114에 상세하다.
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하니, 그것에 이름을 붙여 “도道”라고 하며, 억지로 이름을 붙여 “대大”라고 한다 (有物混成, 先天地生, 寂兮廖兮, 獨立不改, 周行而不殆, 可以爲天下母, 吾不知其 名, 字之曰道. 强爲之名曰大).”(《老子》 25장)고 하였다.
이 문장의 핵심은 천지가 창조되었다는 태초보다도 그 이전의 “무엇[物]”이 있었다는 것인데 이것을 “유물혼 성有物混成”이란 부정적 의미가 아닌 분화되지 않은 그 무엇을 의미한다. 노자는 이 개념을 모든 것의 시원 즉 완전한 그 무엇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도(道)의 움직임은 곧 만물의 자발적 운동과 변화이며, 그러한 모습은 스스로 그러하다는 등식이 성립된다. 즉 도(道)는 우주의 본원이요, 자연은 도 (道)의 성질인 것이다.36) ‘도’는 ‘무(無)’이므로 사람이 감각적으로 접촉할 수도 없고 어떤 물질적 내용이나 속성으로 규정될 수 없는 일종의 사유에 의한 순수한 추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기에 노자는 ‘도’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 다. “그것(도)은 위로는 밝지 않고, 그것은 아래도 어둡지 않다. [새끼줄처 럼] 꼬이면서 이어지기에37) [무엇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없고, 다시 아 무것도 없는 만물로 [귀결되어] 돌아간다. 이것을 형상이 없는 형상이라고 하며, 사물이 없는(보이지 않는) 형상이라고 하며, 이것을 황홀38)이라고 한다. (其上不皦, 其下不昧, 繩繩不可名, 復歸於無物, 是謂無狀之狀,無物之 象, 是謂惚恍.).” 《老子》 14장
36) 羅光, 《중국철학사상사中國哲學思想史》(선진편先秦篇), (台北: 學生書局, 1982), p.204.
37) 원문의 “승승繩繩”의 또 다른 해석은 “끊임없이 계속 이어지는 모습”인데, 필자는 마치 새끼 한 가닥 꼴 때마다 유와 무의 관계처럼 교차되어 꼬이는 듯한 상태를 의미하는 어감을 살려 번역했다. 한편 백서노자본에는 “승승繩繩”이 “심심尋尋”으로 되어 있는 데, 그 의미는 “오래도록 지속되는 모습”이다. 런지위任繼愈는 “묘망渺茫”이라고 번역 하면서 분명하지 않은 모습이라고 풀이하기도 했는데 타당성은 부족해 보인다(《老子 新譯》(上海: 上海古籍出版社, 1986), p.90).
38) 원문의 “황홀恍惚”은 미묘하게 다른 글자다. “황”이란 글자는 드러나 있으면서도 모호 함을 말하고, “홀”이란 글자는 감춰있으면서 흐릿한 모습을 말한다. 말하자면, 모든 구체적 사물들은 빛이 비치는 윗면은 밝고 그 아랫면은 어둡기 마련이다. 그러나 ‘도(道)’는 구체적 사물과는 달리 어떤 규정성도 없고 위아래라 할 것도 없다. 이 문장을 노자의 시각에 의해 해석하면, 그 윗면이라 하여 밝다거 나 아래라 하여 어둡다거나 말할 수[可道]도 없고 어떤 이름을 붙이기도 어려우며 [不可道] 그것의 최후는 아무것도 없는[無] 데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도’란 어떤 물질적 존재도 아니며, 인간의 감각으로 느낄 수 없는 현묘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도’는 어떤 형상도 없이 물질세계를 초월하여 역설적으로 물질세계의 원천이 되지만, 그 자체는 당연히 물질적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 간은 언어라는 형이하학적 도구로써 형이상학적인 ‘도’를 의미화(개념화)하려고 하 고, 도의 본질을 파악하지 않으려고 한다. 노자가 언어표현의 기능적 한계를 과도 하게 해석하여 그것을 불신하고 비판하며, 심지어 극단적으로 배격하는 이유는 바 로 이런 인식 때문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도를 이해한다는 것은 ‘無’로서의 존재 를 이해한다는 뜻이며, ‘無’로서의 존재를 이해한다는 것은 분별하는 우리들의 지 적 욕망이라든지 지적 욕구 같은 것을 초월한다는 말이다. 즉 개념 이전에, 언어 로 표현되기 이전의 존재를 알고 개념 없이 언어라는 매개체를 거치지 않고 존재 와 직접 접촉한다는 말이 될 것이다. 결코 가능할 수 없는 이 문제에 과도한 집착 을 보인 그는 언어 남용 문제를 경계하여 “다언삭궁多言數窮”(5장) 즉 말이 많으 면 자주 막힌다는 말을 하였고, “신언불미, 미언불신信言不美, 美言不信”(81장), 즉 “믿음직스러운 말은 아름답지 않고, 번지르르한 말은 믿음직스럽지 않다.”말을 통해 언어 불신, 혹은 언어회의론으로 매듭을 짓는다. 좀 더 논의를 확장시켜 보기로 하자. 노자는 “ [누가] 위대한 형상을 잡고 있으 면 천하가 [제 갈 길로] 나아간다.”39)라고 하여 ‘도’를 구현한 것이 ‘대상’이므로 ‘집상(執象)’으로서 ‘도지의(道之意)’를 다할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40) 이 ‘상’은 형체가 없으며, 구체적인 물상(物象)이 아니라 ‘도’를 체현한 것으로, 그것은 본질 과 현상, 주체와 객체의 통일인 것이다. 《노자》를 보면 ‘도’와 ‘상’의 관계를 깊이 다루고 있는 부분이 적지 않은데,41) 그가 말하는 ‘상’ 또한 구체적인 물상이 아니
39) “執大象, 天下往, 往而不害, 安平太.” 《老子》 35장.
40) 王樹人⋅喩柏林, <論“象”與“形象思維”>(北京; 《中國社會科學》 1998年 第4期), pp.42~43.
라 ‘도’와 관련된 구체적인 물상을 초월한 황홀한 허환지상(虛幻之象)이며, 일종의 심리표상(心理表象)이다. 즉 노자는 ‘상’은 ‘도’의 체현이며, ‘도’의 체현인 ‘상’은 ‘도’와 상통하는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본질과 현상, 주체와 객체, 구체와 추상의 통일인 것이다.42) 그러나 노자가 말하는 ‘상’은 언어로부터 창조되어 나타난 형상도 아니고, 또 언 어와 명확한 관계도 없다는 점이다. 《노자》에서는 ‘상’ 개념에 대한 명확한 해석을 하지 못했으며, ‘상’과 ‘물(物)’, ‘의’와 ‘언’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서술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노자는 근본적으로 언어를 바꾸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의 적(字意的)의미를 따져보더라도, ‘언(言)’은 ‘직접한 말’, ‘실마리를 꺼낸 것’이라는 의미이고, ‘어(語)’는 ‘어려운 것을 논한 것’, ‘대답을 서술한 것’43)을 뜻하므로 언 어는 우리 인간의 사고 전개와 의사전달의 중요한 수단인 것이다.44)
41) ⅰ)“無物之象, 是謂物象.” 《老子》 第14章, ⅱ) “道之爲物, 惟恍惟惚. 惚兮恍兮, 其中有 象, 恍兮惚兮, 其中有物.” 《老子》 第21章, ⅲ) “大方無隅, 大器晩成, 大音希聲, 大象無 形.” 《老子》 第35장.
42) 노자에게 있어 ‘형(形)’과 ‘상(象)’은 모두 볼 수 있는 것이지만, ‘형’은 ‘실(實)’에 치우 쳐 사물이 나타날 수 있는 형체를 가리키고, ‘상’은 ‘허’에 치우쳐 고정된 형체가 없는 사물의 황홀한 존재를 가리킨다. 이러한 노자의 ‘형’과 ‘상’에 대한 인식은 중국 고대 심미의식이 ‘허(虛)’에 치중했음을 내포한다.
43) “直言曰言, 論難曰語” 《說文解字》, “發端曰言, 答述曰語” 《周禮春官大司樂鄭注》.
44) Philip Wheelight, Metaphor and Reality, (Indiana University Press, 1962), pp.25~26. 휠라이트의 관점에 의하면, 이러한 언어는 객관적 사실들을 상 징화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언어의 의미를 분명히 알면서부터 사물과의 관계를 맺 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으로 노자의 시각과는 차이가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언어가 없다면 인간은 영원한 현재 속에서 과거나 미래라는 개념을 갖지 못하여 경험 의 축적이나 앞날을 계획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논지다. 예를 들면, 언어 란 살아 있는 것이며 動詞性을 지니고 있으며, 분명히 모든 언어는 영적이고 언어만 큼 영적인 것은 없으니, 진정으로 언어는 불가사의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때문 에 우리가 옛 성인들의 작품을 읽는데도 반드시 언어를 통해서 이해해야 한다는 논리 가 선다. 왜냐하면 언어는 이해를 중개해주는 역할을 하며 의미(혹은 의도)를 열어주 려는 창문의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어떤 물리적 자극도 그것이 무엇의 자극 혹은 감각이라고 언어화되기 이전에는 그것이 어떤 것인가를 의식할 수 없다. 그러므 로 언어는 언어 이전의 의식 상태를 전달할 것을 추구할 수 있는 수단이며, 이로 인해 언어는 어떠한 것에 대한 경험을 떠날 수 없고, 경험의 여러 가지 구분은 모두 자 아의 진상과 관계가 없는 것이다.
다만 노자는 인간이 언어라는 도구에 의해 본래적 모습 혹은 정신 현상까지 이 미지하고 계량화하려는 시도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도’는 인간이 추 구하는 진정한 가치이지만, 그것은 이성의 논리로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노 자에 있어서 ‘도(道)’는 완전하고 영원하며, 포괄적인 존재이며, 빛도 없고, 소리 도 없으며, 얼굴도 없는 것으로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이요, 스스로 나타 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즉 모든 감각적이고 지각적인 파악을 초월하고 있 으면서 삼라만상의 근원에 실재하는 신비적인 속성을 지닌 것이 바로 ‘도’이다.
3. 궁극적 실재와 제한된 표현의 초월: 언어회의론 역설의 논리
노자가 ‘도’의 언어적 표현이나 개념적 규정 등을 부정하려고 해도 근본적으로는 그것들과는 상대적인 위치에 있는 ‘도’의 특성을 밝히려는 목적의식에서 나온 역설 적 태도임을 알아야 한다. 즉‘도’가 어떠한 개념 규정도 불허하는 존재로서 명명화 할 수도 없고 무엇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한 자에게는 이를 알리기 위해서는 부득이 언어의 수단을 사용하여 설명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노자의 언어와 존재의 관계는 도와 자의식(自意識)의 관계를 살펴봄 으로써 더욱 명료하게 드러날 것이다. 노자는 일찍이 ‘도’만 위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도 하늘, 땅과 마찬가지로 위대하다고 보아 ‘도’와 인간의 합일을 꾀하였다. 인간이 ‘도’와 합일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도’의 진리성의 파악자인 동시에 그 런 파악을 통하여 실제적인 면에 응용할 수 있는 자라는 의미이다. 때문에 인간이 추구해야 할 최상의 노력은 자의식을 통해 도의 진리성(眞理性)을 파악하는 것이 다. 의식의 정(靜)을 통하여 원초적인 자의식으로 귀환한 자는 그의 의식이 도와 융화되어 하나로 융화일치된 상태를 신비스런 일치(玄同)라 하였다.45)이 ‘현동’의 상태는 언어의 표현을 초월하는 직접적 경험상의 문제이므로 이미 의미성을 담고 규정한 언어가 문자로 판단하여 기술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노자는 “[정말로]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 한다.(知者不言, 言者不知) 《老子》 56장”고 했던 것이다. 노자의 ‘언’과 ‘의’에 관한 생각은 ‘도(道)’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노자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도는 영 원한 도가 아니고, 말을 할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노자는 우주본 체인 ‘도’의 형이상학적 성질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언어라는 실재적 분석 도구가 ‘도’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음을 주장하고 있다.46) 왜냐하 면 노자의 ‘도’는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으며 만져볼 수도 없는 비실재적인(非 實在的)인 ‘도’47)이기 때문이다. 노자는 ‘무성(無聲)’, ‘무형(無形)’의 ‘도’는 제한된 언어나 개념으로서 표현하거나 정의를 내릴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사실상 노자가 ‘도’란 ‘무물(無物)’이고, ‘무(無)’야말로 만물이 산생하는 근원이 라고 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천하 만물은 ‘유(有)’에서 태어나고 ‘유’는 ‘무’ 에서 태어난다고 하는 전제의 출발은 바로 왕필이 설명했듯이, “이름은 반드시 구 분하는 바가 있고, 일컫는 것은 반드시 말미암은 바가 있다. 구분이 있으면 합치 지 못하는 것이 있고, 말미암는 것이 있으면 다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합치지 못 하면 그 바탕이 아주 다르고, 다하지 못하면 일컬을 수 없다.”48)는 맥락에서 이해 해야 한다. 노자가 말했듯이 ‘도’는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져볼 수도 없는 것이기에,49) ‘언’ 은 당연히 그런 ‘도’의 실체를 ‘다할(盡)’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 된다.
45) “塞其兌, 閉其門, 挫其銳, 解其分, 和其光, 同其塵, 是謂玄同.”(《老子》 56장)
46) 牟宗三, 《中國哲學十九講》(臺北: 學生書局, 1986), pp.20~21.
47) “視之不見, 名曰夷, 聽之不聞, 名曰希, 搏之不得, 名曰微, 此三者不可致詰, 故混而爲 一. 其上不 , 其下不昧, 繩繩不可名, 復歸于無物.” 《老子》 14장.
48) “名必有所分, 稱必有所由; 有分則有不兼, 有由則有不盡; 不兼則大殊其眞, 不盡則不可 以名.” 王弼, 《老子》 21장 注. 本協立, <“言意之辨”: 語言的局限性與文學的重要性>(濟 南; 《文史哲》, 1994年 第2期), p.71 재인용.
49) “視之不見, 名曰夷, 聽之不聞, 名曰希, 搏之不得, 名曰微, 此三者不可致詰, 故混而爲 一. 其上不皦, 其下不昧, 繩繩不可名, 復歸于無物.” 《老子》 14장.
그러기에 노자는 역설적으로 학문을 하게 되면 ‘도’의 진면목을 볼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지식을 지속적으로 제거하여 ‘무위(無爲)’ 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도’를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50) 노자가 말하는 ‘상’은 형체가 없으며,51) 구체적인 물상(物象)이 아니라 ‘도’를 체현한 것이니 말이다. 노자가 ‘도’와 ‘상’의 관계를 다루면서,52) 일관되게 주장하 는 것은 ‘상’ 또한 구체적인 물상이 아니라 ‘도’와 관련된 구체적인 물상을 초월한 황홀한 허환지상(虛幻之象)이며, 일종의 심리표상(心理表象)이라는 시각이다. 노 자는 ‘형(形)’과 ‘상(象)’이란 가시적인 것이지만, ‘형’은 ‘실(實)’에 치우쳐 사물이 나타날 수 있는 형체를 가리키고, ‘상’은 ‘허’에 치우쳐 고정된 형체가 없는 사물의 황홀한 존재를 가리킨다고 인식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노 자》라는 책에서 ‘상’ 개념에 대한 설명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과 ‘상’과 ‘물(物)’, ‘의’ 와 ‘언’과의 관계 규명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는 근본적인 문제이기도 한데, 노자는 어설픈 인간의 사고에 의해 계량화하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가졌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미 도는 이성의 경지나 인간의 가치 구현 그 이 상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 형이상학적 존재이기에 말이다. 결국 노자는 단순히 언어와 존재가 어떻게 다르냐를 말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 존재로서의 도는 우리에 의하여 일상적으로 경험되어진 개별적 사물처럼 그렇게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것임을 밝히기 위해서 언어로는 도를 표현할 수 없 다는 부정적인 표현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가 언어의 한계성을 유독 두드러지게 설명한 것은 장자가 “손가락을 가리켜 손가락이 아니라는 설명은 손가락을 들고 손가락이 아니라고 하는 것보다, 손가락이 아닌 다른 것을 들고 손 가락이 아니라고 설명하는 것이 더 낫다(以指喩指之非指, 不若以非指喩指之非指 也) 《莊子》 <齊物論>”라는 논리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아니 한 걸음 더 나아
50) “爲學日益, 爲道日損. 損之又損, 以至于無爲.” 《老子》 四十八장 徐小華, <“言盡意”, “言 不盡意”>(上海: 《古代文學理論硏究》 第15輯, 上海古籍出版社, 1991年), p.143.
51) “大象無形.” 《老子》 第41장.
52) ⅰ)“無物之象, 是謂物象.” 《老子》 14장 ⅱ) “道之爲物, 惟恍惟惚. 惚兮恍兮, 其中有象, 恍兮惚兮, 其中有物.” 《老子》 21장 ⅲ)“大方無隅, 大器晩成, 大音希聲, 大象無形.” 《老 子》 35장.
가 위진남북조의 문학이론가 유협의 다음과 같은 말에 의해 그 시공간적 유사성을 획득하고 있는 것이다.
“사고의 미묘한 정서나 문장 밖의 곡진한 뜻은 말로 표현 할 수 없으므로 진실로 붓을 놓아야 됨을 알아야 한다. 지극히 정밀해야만 그 이 치를 깨달을 수 있다. 이지(伊摯)도 요리의 비결을 설명할 수 없었고, 윤편(輪扁) 같은 이도 수레바퀴를 만드는 방법을 말하지 못했다. 이 그 미묘함이여! “至於思 表纖旨, 文外曲致, 言所不追, 筆固知止. 至精而後闡其妙, 至變而後通其數, 伊摯不 能言鼎,輪偏不能語斤, 其微矣乎!(《文心雕龍⋅神思》)”
적어도 유협은 이 두 고사가 시사하는 바와 같이 작품 창작이 인간의 언어의 범주에서 고정될 수 없음을 분명 히 지적하고 있다. 노자는 본래적 존재와 언어에 의해 의미화 된 존재를 철저히 구별하며, 장자에 비해 훨씬 과격한 언어부정론을 취하고 있다.53) 노자는 언어로 표현된 생각은 본 래의 생각이 아니라는 모순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텍스트를 남겨놓는 이 중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 노자는 만일 다른 생각을 앞세우고, 인간의 사유를 언어라는 틀에 담아 보존하기를 거부하면서도 이율배반적으로 언어라는 고 정된 틀 속에 깊고도 오묘한 ‘도’라는 존재를 담아두는 모순된 노력을 하고 있다. 이런 노자의 입장은 서양의 언어철학적 입장과는 현저하게 다르다. 왜냐하면 “인 간의 사유란 언어라는 통로를 거쳐야만 전개될 수 있고 …… 말보다 생각이 앞서 는 것도 아니고, 생각보다 말이 앞서는 것도 아니기”54)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다 소 거칠게나마 우리는 20세기 언어철학자 비트겐쉬타인의 “사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있는데, 그러한 것들은 스스로 나타내 보인다. 신비적이란 바로 그러 한 것들을 두고 말한다.”55)라고 한 구절을 노자에 있어서 유사하게 적용할 수 있 을 것이다.
53) 申東浩에 의하면, 莊子역시 노자와 마찬가지로 否定的 思惟를 전개시킨 철학자로써, 장자는 得意忘言 내지 寄言出意的 입장에서 그의 언어관을 피력하고 있어 철저히 言 不盡意的 성향을 띠는 노자와는 다르다. 申東浩, <先秦道家의 人間觀>(東西哲學硏究 (제3호), 1986) 참조. 아울러 위진현학자들의 언어관의 문제에 대해서는 李在權, <魏晋玄學에 있어서의 言意之辯 硏究>(충남대박사논문, 1990), 湯用彤, <魏晋玄學論 稿⋅言意之辯>(《湯用彤學術論文集》, 中華書局, 1983), 湯一介 《郭象與魏晋玄學》(湖 北: 人民出版社, 1983) 등의 문헌 참조.
54) 李奎浩, 《말의 힘》(서울: 제일출판사, 1980), pp.83~84 참조.
이 구절을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것에 직면하면 침묵을 지켜야 한다는 뜻으로 언어의 한계성을 지적한 것이다. 바꿔 말해서 언어는 적용대상이 표현하기 에 부적합할 때도 있다는 뜻이다. 물론 언어는 의미의 매개체로서 존재하지만 매개체 그 자체의 독자성으로 말미 암아 본체, 즉 의미(意味)를 깨뜨려서는 안 될 것이다. 즉 언어 자체는 의미를 연 결시키는 중성적 수단이지, 의미에 간섭이나 통제를 가해서는 안 된다는 점은 우 리가 모든 사유의 기본 틀을 언어라는 매개체를 통하는 것이지, ‘도’ 그 자체를 언 어 없이 접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56) 요약하자면, 노자의 견해처럼 존재와 언어는 비록 어떠한 인과적 혹은 논리적으 로 연결되어 있지 않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서로 연결될 수 있음은 너무나 자명하 다. 이러한 언어와 존재의 관계는 바다 속의 물고기와 그것을 잡는 어망과의 관계 로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어부는 그가 원하는 물고기를 잡기 위해서 알맞은 어망을 뜨게 되는데, 이런 의미에서 물고기와 어망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다. 그 러나 사실상으로는 물고기와 어망은 어떠한 직접적인 관계가 없으니, 물고기는 존 재하는 물체로서 그것대로 어떤 질서 속에 살고 있으며, 어망은 물고기가 그것들 이 살고 있는 환경과는 무관하게 어망이라는 조직으로 존재해 있다. 물고기나 그 것들이 살고 있는 환경은 우리들의 뜻대로 바꿀 수 없는 자연에 속하는 것이지만, 어망은 우리 마음대로 만들 수 있는 문화, 즉 사고의 체계에 속한다. 그러므로 물 고기는 사물에 해당되어 의미차원에 비유된 것이다.57)
55) 비트겐쉬타인, Tractatus Logico - Philosophicus (《논리철학 논고》), 박이문, 《현 상학과 분석철학》(서울: 일조각, 1984), p.122 재인용.
56) 이상섭, 《언어와 상상》(서울: 문학과 지성사, 1988), p.89.
57) 어떤 종류의 물고기를 잡으려는가에 따라 어망의 크기가 결정되듯, 적절하거나 그렇지 않은 언어는 그 언어가 어떤 절대적인 존재를 정확하게 복사하느냐 않느냐에 달려 있 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필요에 따라서 우리가 사물에서 얻는 경험이 어떻게 조직 되기를 바라고 있는가에 의해서 결정된다. 박이문, 《哲學이란 무엇인가》(서울: 일조각, 1983), pp.49~54, 《인식과 실존》(서울: 문학과 지성사, 1982), pp.186~190.
4. 결론
이상에서 검토한 바와 같이 노자의 사유의 기본 맥락은 철저한 부정과 역설의 사유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는 그가 당대의 시대상황에 만연된 가치체계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적 대안을 모색하는 가운데 나온 것이다. 물론 부정과 역설의 문제 는 방법론적 차원의 문제라는 점이며, “道可道, 非常道”로 대변되는 그의 언어관은 “도”의 개념화 가능성 여부에 대한 단순한 부정과 역설의 차원을 넘어서 반문화론 적인 차원의 문제까지 함축한 것으로 이해해야 마땅하다. 이는 노자의 관점이 언 어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문제는 과연 노자 가 정녕 언어 그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고 있느냐 하는 점인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필자가 이렇게 단정하는 것은 한 개념의 부정은 필연 적으로 다른 개념으로 향한 강한 역설의 논리이며, 부정이란 또 다른 긍정으로 나 아가기 위한 것이므로 부정은 결코 문자 그대로의 부정으로서만 끝나지 않고 보다 적극적인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58) 그 구체적인 예증이 바로 5,000여 자의 《노 자》 텍스트이다. 노자가 ‘도’란 A, B라는 개념으로 언어의 테두리 속에 들어갈 수 없다는 데에서 출발하면서도 이러한 ‘도’가 반드시 언어로 설명되어야 하기 때문에 ‘도’는 A, B가 아니라는 부정적인 표현을 빌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老 子》라는 텍스트에서는 노자 자신의 사유방식에 적합한 언어에 입각하여 도의 본질 이 무엇인가를 설명했기 때문에 그의 논리는 역설적인 이미지로 귀결될 수밖에 없 다.59) 물론 이러한 노자의 언어관에 대해 언어의 효용을 지나치게 강조한 데서 나온 나르시즘에 불과한 것 같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60)
58) 임홍빈, <否定의 樣相>, 《서울대, 교양과정부 논문집》(인문⋅사회, 第五輯, 1973), p.4 참조.
59) 이 때문에 馮友蘭은 “《老子》나 《論語》가 원래의 형태 속에 지니고 있던 그 풍부함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지금껏 행해진 모든 번역과 아직 완성되지 않는 다른 많은 것들을 배합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馮友蘭, A shout History of Chinese Philosophy, p.14 F. 카푸라 저, 이성범, 김용정 역,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서울: 범양사, 1988), p.124 참조.
60) 그렇다고 해서 노자에 있어서(장자의 관점과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언어는 완전히 부정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장자의 “말을 잃어버린 사람과 말을 해보고 싶다”는 역설 일 뿐이다. 즉 언어는 수단적 위치로 떨어졌을 뿐, 언어의 기능이 부정되는 것은 아 니다. 덧붙여 말한다면 장자가 말하는 언어의 일관성이라는 표준 자체가 일관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정세근, 《노장철학》, p.29. 61) 박이문, 《시와 과학》(서울: 일조각, 1986), p.34.
적어도 “언어가 없는 원 초적 자연의 상태에 귀의하려는 것이 언어를 가짐으로써 소외된 모든 인간의 자연 스러운 어쩔 수 없는 본능의 하나가 됨은 당연하기 때문이다.”61)
61) 박이문, 《시와 과학》(서울: 일조각, 1986), p.34.
왜냐하면 노자 에 있어서 “道可道, 非常道”는 우리 인간의 이해의 지평이 언어 밖에서 (초월하여)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으로서, 현상의 총체(道)에로의 복귀에 대한 노자의 염원이 기 때문이다. 노자의 관점은 우리의 저급한 형이하학적인 언어로서 형이상학적 위 상을 획득하고 있는 ‘도’에 대해 감히 함부로 재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일반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메타언어의 경지를 전제해야만 최소한의 접근이 가능하다 는 논리인 것이다. 메타언어의 논리적 측면에서 볼 때 노자의 언어관은 분명 언어 회의론자임이 분명하다. 이는 바로 《장자》라는 텍스트에 나오는 ‘망언지인忘言之 人’ 즉 ‘말을 잊은 사람’의 문제, 혹은 ‘알아도 말하지 않는’ ‘지이불언知而不言’(《莊 子》, ‘列禦寇’편)의 문제로 확장된다. 노자의 논리는 단순히 언어는 소통의 기능을 담당한다는 차원의 문제를 훌쩍 벗어나 차라리 언어의 침묵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 다. 물론 이런 노자의 ‘억지스러움’(强)은 그가 생각하는 ‘道’의 영역이 형언하기 힘들 만큼 거대하게 확장된 영역을 구축한다고 인식하기 때문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노자의 “道可道, 非常道”란 구절은 의미를 간섭하는 역할로서의 언어가 아니라 중재와 안내를 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역할로서의 언어의 기능 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막대기를 물속에 집어넣 으면 굽어져 보이는 것이 바로 물이라는 물질이 간섭하기 때문에 그런 것처럼 언 어 역시 존재를 간섭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노자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 던 것이다. 언어가 존재를 가로막는 장애물이라는 문제는 바로 언어의 본질을 정 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왔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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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esthetics of Negation and Paradox in Laozi’s text
Abstract
As I mentioned above, the fundamental thinking principle of Laozi is derived from the linguistic perspective of the permanent denial and paradox, which starts from the period when finding the basic alternative for prevailing social value. What we should contemplate on is whether Laozi has fundamental skepticism on language or not. The negation of a concept is the paradoxical logic heading for the other concept and the negation has more important meaning rather than literal meaning because it is the prerequisite for affirmation. In terms of the impossibility to belong to the concept in linguistic frame, Tao had no choice but to be considered as the opposite concept. Of course, this forced value of Laozi is originated from the recognition that the field of Tao constructs enormous area enough to deviate from the category of language.
Keywords: denial, paradox, skepticism on language, category of language, opposite concept
투고일: 2012. 11. 26. / 심사일: 2012. 12. 11.~12. 23. / 게재확정일: 2012. 1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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