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철학이야기

맹자와 순자 사상의 결정적 차이 /신정근.성균관대

Ⅰ. 문제제기

맹자와 순자의 차이는 동양 철학의 전공자만이 아니라 고등학생에게 이미 정답이 결정된 문제이다. 그 정답은 누구나 알고 있듯이 ‘맹자는 성 선설, 순자는 성악설’이다. 1)

이 정답에 대해 다른 말을 하기란 여간 어렵 지 않다. 왜냐하면 고등학생도 알고 있는 것을 아니라고 사람들에게 새 삼스럽게 정색하고 말해보았자 설득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학(사상)이 끊임없이 상식에 도전하면서 발전해왔던 것만큼 맹자와 순자의 대립 구도를 성선과 성악으로 환원해서 설명하는 방식도 한 번쯤 도전할 만한 주제이다. 도전이 실패한다면 그 구도가 한층 더 강력해질 것이다. 반대로 도전이 성공한다면 그 구도가 그렇게 철옹성 마냥 난공불락의 요새가 아니라는 점이 밝혀질 것이다. 사실 맹자와 순자의 차이가 성선과 성악의 도식으로 정착되면서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많은 문제점이 생겨났다. 두 사람은 풍부한 사상의 자원 을 펼쳐보였지만 이 도식으로 인해 도매 값으로 평가되었다. 예컨대 한유 는 이 도식에 의거해서 맹자를 순정하고 순정하다고 보았고 순자를 양웅 과 함께 전체적으로 순정하지만 부분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평가했다. 2) 이 평가는 송나라 신유학자들에게 그대로 수용되었다. 글자 그대로 순자는 大醇보다 少疵의 측면에 더 큰 주목을 받았다. 그 결과 소자는 일종의 낙 인처럼 작용해서 순자의 책은 볼 필요가 없는 것으로 저평가되었다. 李珥는 5000여자의 노자를 2098자로 발췌하여 풀이하면서 醇言이 라는 제목을 달았다. 洪啓禧의 발문에서 따르면 宋翼弼이 이이의 노자 작업을 괜한 일로 만류했다고 한다. 홍계희는 한유가 순자를 大醇과 少

1) 이 주장은 전문 서적과 논문만이 아니라 현행 고등학교 윤리 교과서를 비롯 해서 각종 교재와 사전에 두루 반영되어있기 때문에 출처를 옹호자를 밝힐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2) 「讀荀子」 “孟氏醇乎醇者也, 荀與揚, 大醇而少疵.”

疵를 평가하면서 성인의 도리에 맞고 맞지 않는 것을 구별했던 사례를 끌어들이며 이이의 노자 작업을 변증하고 제목에 쓰인 ‘醇’의 의미를 상기시키고 있다. 3)

도통에 따른 정통과 이단의 구분이 남아있었던 상황 을 감안하면 이이는 괜한 오해를 살 일이라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노자 를 읽고 연구했던 것이다. 이 작업은 학자의 용기로만 볼 수 없다. 거기 에는 아마 이단을 정통으로 포섭하려는 의도도 들어있을 것이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그는 노자를 소통할 수 있는 이단으로 보고 완전히 배 척하지 않았다. 순자는 성악의 주창자로 지목되면서 유교의 중심에 들지도 못한 채 전근대의 철학사에서 미아 신세가 되었다. 즉 순자는 유학의 도통에서 의심받는 존재가 되었다. 그 위에 또 법가의 李斯가 순자에게 배웠다 는 司馬遷의 언급으로 인해 그는 커다란 사고를 친 인물로 평가되었 다. 4) 바로 이 때문에 소식은 순자를 “이설을 내놓으며 양보하지 않고 고론을 일삼으며 주위를 돌아보지 않는다.”거나 “사람됨이 강퍅하여 겸손하지 못하고 스스로 잘난 체한 게 너무 지나치다.”는 인신공격을 퍼부었다. 5) 하지만 철학사에서는 이이처럼 상대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기보다도 낙인찍기가 더 성행했다. 맹자는 성선을 말한 덕택으로 道統에 포함해 서 亞聖의 지위를 누렸지만, 순자는 성악을 말했기 때문에 子書 이상의 평가를 받지 못했다. 이것은 순자만이 아니라 맹자에게도 불행한 일이 다. 왜냐하면 이처럼 당연시된 고평가와 저평가는 실상에 주목하기보다

3) 김학목, 율곡 이이의 노자, 예문서원, 2001 참조.

4) 사기 「李斯列傳」 “乃從荀卿學帝王之術. 學已成, 度楚王不足事, 而六國皆弱, 無可爲建功者, 欲西入秦.”

5) 蘇東坡全集 「荀卿論」 “荀卿者, 喜爲異說而不讓, 敢爲高論而不顧者也. 其言 愚人之所警, 小人之所喜也. 子思․孟軻, 世之所謂賢人君子也. 荀卿獨曰: 亂天下 者, 子思․孟軻也. 天下之人, 如此其衆也. 仁人義士, 如此其多也. 荀卿獨曰: 人 性惡, 桀․紂, 性也. 堯․舜, 僞也. 由是觀之, 意其爲人必也剛愎不遜, 而自許太過. 彼李斯者, 又特甚者耳.”

는 부풀려진 상징 권력에 관심을 두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는 이 글에서 맹자와 순자를 성선과 성악의 대립 구도로 환원할 수 있는지 재검토를 하고자 한다. 또 이런 대립 구도가 놓치고 있는 사항을 살펴보려고 한다. 나아가 나는 맹자와 순자가 지식―맹자의 是非之心과 순자의 知慮― 을 본성의 내부와 외부 중 어디에 두는가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에 따라 맹자의 수양은 存心養性으로 이어지고 순자의 그것은 化性養知로 이어지게 된다는 점을 밝히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 의 차이는 좁게는 유학사, 넓게는 동아시아철학사에서 同感(共感)과 新 知 중 어느 것을 사회적 도덕적 문제 해결의 중심에 두느냐, 라는 논쟁 의 근원이 된다는 점을 밝히고자 한다.

Ⅱ. ‘性善과 性惡’의 대립 구도는 과연 전면적인가?

1. 대립 구도의 형성

현행 맹자와 순자의 문헌 자료에 근거하는 한 성선과 성악의 대 립 구조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먼저 맹자를 살펴보자. 맹자는 「공손추」상 6, 「등문공」상 1, 「고자」 상 6, 7 등 네 곳에서 성선과 관련되는 주장을 하고 있다.

사람은 모두 차마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 …… 지금 어떤 사람이 문득 어 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장면을본다면, 누구나 깜짝 놀라서 함께 아파하는 마음을 겪게 된다. 이런 반응은 어린아이의 부모와 교분을 터기 위한 것이 아니 고, 마을 사람과 친구들로부터 칭찬을 듣기 위한 것이 아니고, 모른 척 했다는 비난의 소리를 듣기 싫어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 이로부터 살펴본다면 놀라서 함께 아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 놀라서 함께 아파하 는 마음은 仁의 싹이고,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은 義의 싹이고, 겸손하고 양보하는 마음은 禮의 싹이고, 적절함과 부적절함을 가리는 마음은 知의 싹이 다. 사람이 이 네 가지 싹을 경험하는 것은 사람이 사지를 가지고 있는 것만큼이나 확실하다. 6)

물론 맹자는 「공손추」상 6에서 직접적으로 성선을 말하지 않았다. 하 지만 문맥으로 보면 그는 사람이 이해를 초월해서 무조건적으로 타자를 위기에서 구출하는 행위를 할 수 있다. 맹자는 이러한 마음이 없다면 사 람이 아니라는 배제를 주장함으로써 위의 상황에서 사람은 타자를 구출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마음은 사람이 타자를 구출할 수 있고 구출 해야 하도록 이끄는 기관이다. 여기만 주목하면 맹자의 주장은 心善이 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분명히 놀라서 함께 아파하는 마음이 바로 仁이 아니라 仁의 싹이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놀라서 함께 아 파하는 마음이 仁의 싹에 대응한다면 또 다른 무엇이 仁에 대응한다는 것을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무엇’이 性이라고 한다면 위 구절 은 性善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맹자는 「공손추」상 6에서 자신의 성선(과 심선)을 밝히면서 그것의 대 립 구도를 설정하지 않았다. 그의 주장을 반대로 읽는다면, 사람들은 아 이의 부모와 교분을 맺으려고 하는 등 이해에 따라 행동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미래의 순자 그리고 상앙과 한비가 줄기차게 주장하는 好利 避害의 인간관이라고 할 수 있다. 7)

6) 「공손추」상 6 “人皆有不忍人之心. …… 今人乍見孺子將入於井, 皆有怵惕惻隱 之心. 非所以內交於孺子之父母也. 非所以要譽於鄕黨朋友也. 非惡其聲而然也. 由是觀之, 無惻隱之心, 非人也. …… 惻隱之心, 仁之端也. 羞惡之心, 義之端也. 辭讓之心, 禮之端也, 是非之心, 知之端也. 人之有是四端也, 猶其有四體也.”

7) 신정근, 「상앙 法사상의 내재적 특성」, 동양철학 제28집, 2007 참조.

이제 순자를 살펴볼 때가 되었다. 순자는 그의 이름만큼이나 널리 알려진 「性惡」에서 맹자와 다른 인간 관을 분명하게 펼치고 있다.

사람의 본성은 악하고 선은 인위의 결과이다. 지금 사람의 본성은 나면서부 터 이익을 좋아한다. 이를 그대로 따르면 다툼과 빼앗기가 생겨나고 양보가 사라지게 된다. 사람은 나면서부터 타자를 질투하고 미워한다. 이를 그대로 따르 면 손상과 살상이 생겨나고 충실과 신뢰가 사라지게 된다. 사람은 나면서부터 귀와 눈의 욕망을 가지고서 아름다운 소리(음악)와 여색을 좋아한다. 이를 그대 로 따르면 중독과 혼란이 생기고 예의와 조리가 사라진다. 그렇다면 사람의 본성을 그대로 따라가고 사람의 감정을 그대로 따라가면 반드시 다툼과 빼앗기가 일어나고, 분수를 어기고 이치를 어지럽혀서 폭력으로 귀결될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스승의 법도에 의한 교화와 예의에 따른 교도 가 있어야 한다. 그 다음에라야 양보가 생겨나고 조리에 맞게 되어 안정으로 귀 결될 것이다. 8)

8) “人之性惡, 其善者僞也. 今人之性, 生而有好利焉, 順是, 故爭奪生而辭讓亡焉. 生而有疾惡焉, 順是, 故殘賊生而忠信亡焉. 生而有耳目之欲, 有好聲色焉, 順是, 故淫亂生而禮義文理亡焉. 然則從人之性, 順人之情, 必出於爭奪, 合於犯分亂理 而歸於暴. 故必將有師法之化, 禮義之道, 然後出於辭讓, 合於文理而歸於治.”

순자는 분명이 사람의 본성이 악하며 선한 것은 인위적인 노력(수양) 의 결과라고 단정하고 있다. 그 근거를 제시하는 방식은 맹자와 사뭇 다 르다. 맹자는 사람을 어떤 상황에 놓아두고서 어떤 반응을 보일까 실험 을 하고 있다. 일종의 사유실험(thought experiment)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는 변수를 아주 축소해서 사람으로 하여금 예스 아니면 노만을 대답 을 하게하고서 특정 상황에서 사람이 보일 수 있는 반응을 끌어내서 성 선을 입증하고자 했다. 반면 순자는 장기간의 관찰을 통해서 지배적인 사회 현상을 뽑아내서 그것을 근거로 내놓고 있다. 즉 오랫동안 관찰을 해보니 사람들은 爭奪․殘賊․淫亂의 행위를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원인을 찾아보니 사람은 결국 好利․疾惡․耳目之欲이라는 성정에 의해서 추동되기 때문에 피할 수 없이 그러한 행위를 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순 자는 행위를 지배하는 인간의 정신적 심리적 기관으로 성정을 지목하고 있다. 맹자가 心 너머의 심층적인 性으로 탐구의 가능성을 열어둔 반면 순자는 性과 情을 주로 동일한 차원에서 논의하므로 사람의 심리를 지 시와 피지시의 관계처럼 중층적으로 규정하지 않고 있다. 9)

9) 순자는 性과 情을 두 가지 방식으로 사용한다. 예컨대 「정명」에서 “性者, 天 之就也. 情者, 性之質也. 欲者, 情之應也.”라고 할 때, 성과 정과 욕은 심층화 의 구분이 있다. 순자는 많은 경우 性情 또는 情性을 연칭하면서 둘 사이를 구별하지 않고 쓰기도 한다. 이글은 후자의 측면에서 주목하고 있다. 순자의 人性․性情과 관련해서 이장희, 「순자 심성론에 관한 소고: 심의 자율성을 중 심으로」, 공자학 제8집, 2001; 정재상, 「자연적 情과 당위적 情: 순자의 성 정론에 대한 소고」, 동양철학 제35집, 2011 참조

우리는 두 자료를 통해서 맹자가 心善을 포함해서 性善을 주장하고 순자가 情惡을 포함해서 性惡을 주장했다고 할 수 있다. 위의 논의만으 로 둘 사이의 대립 구도가 아직 뚜렷하게 형성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순자는 「非十二子」와 「성악」 두 곳에서 맹자를 비판하고 있다. 순자는 「비십이자」에서 동시대의 사상가들이 안고 있는 문제와 한계 를 비판하면서 子思와 孟子를 그 대상에 포함시키고 있다. 그의 지적을 보면 자사와 맹자는 지식이 잡다하고 기존의 것을 짜깁기해서 五行으로 부르며, 주장이 극단적이어서 일반화시킬 수 없고 무엇을 말하는지 분 명하지 않아 설명하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쉽지 않았다. 10) 순자는 「비 십이자」에서 다른 사상가를 논리적이며 체계적으로 비판했지만 맹자의 경우 논리적이라기보다 감정적이고 객관적이라기보다 자의적인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 또 그는 맹자의 사상을 五行으로 규정했고, 종래 주석에 서 오행을 木火土金水나 仁義禮知信으로 보았다. 하지만 맹자는 자신의 사상을 五行으로 규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木火土金水와 仁義禮知 信을 통합적으로 사용해서 체계적인 이론으로 만들지 않았다. 맹자를 찾아보면 五가 규범과 가치와 관련해서 「등문공」상 4의 五倫, 「이루」하 30의 五不孝, 「진심」상 40의 五敎 등이 있다.11)

10) “聞見雜博, 案往舊造說, 謂之五行. 甚僻違而無類, 幽隱而無說, 閉約而無解.”

11) 「등문공」상4 “后稷敎民稼穡, 樹藝五穀. 五穀熟而民人育. 人之有道也, 飽食․煖 衣․逸居而無敎, 則近於禽獸. 聖人有憂之, 使契爲司徒, 敎以人倫. 父子有親, 君 臣有義, 夫婦有別, 長幼有序, 朋友有信.” 「이루」하30 “孟子曰: 世俗所謂不孝者 五. 惰其四肢, 不顧父母之養, 一不孝也. 博奕好飮酒, 不顧父母之養, 二不孝也. 好貨財私妻子, 不顧父母之養, 三不孝也. 從耳目之欲, 以爲父母戮, 四不孝也. 好勇鬪狼, 以危父母, 五不孝也.” 「진심」상40 “孟子曰: 君子之所以敎者五: 有如 時雨化之者, 有成德者, 有達財者, 有答問者, 有私淑艾者. 此五者, 君子之所以 敎也.”

이 세 가지는 문맥으로 보면 순자가 말했듯이 ‘案往舊造說’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세 가지가 맹자 사상에서 중요하면서 대표적인 지위를 갖지 않을 뿐 만 아니라 순자 자신도 그 가치를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는 부분이다. 따라서 「비십이자」에서 맹자와 순자의 경쟁적 구도가 보이지만 둘 사이 의 성선과 성악의 대립 구조를 확인하려면 다시 「성악」을 살펴보지 않 을 수 없다.

순자는 「성악」에서 모두 3단락에서 걸쳐서 性과 僞의 구별을 토대로 성선을 부정하고 성악을 옹호하고 있다. 순자에 따르면 性은 자연적으 로 나아가는 것으로 배워서 되는 것도 아니고 노력해서(힘들여서) 되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배고프면 먹고 싶고 추우면 따뜻하게 하고 싶고 피 곤하면 쉬고 싶은 것이다.12) 僞는 배워야 잘하고 노력해야(힘들여야) 이 룰 수 있는 것으로 원래 사람에게 없다가 새로 생기는 것이다. 13)

12) “凡性者, 天之就也, 不可學, 不可事. …… 今人之性, 飢而欲飽, 寒而暴煖, 勞而 欲休, 此人之情性也.”

13) “可學而能, 可事而成之在人者, 謂之僞.”

예의를 차리고 사양하고 충실하게 되는 것은 모두 자연적인 성이 아니라 인위 적인 위와 관련된다. 이 논리에 따르면 맹자는 성과 위의 구분하지 못하 면서 성선을 주장한 셈이 된다. 아울러 맹자는 후천적인 학습과 같은 僞 의 가치를 부정하고, 제3자(성인)가 사람들의 성을 교정하기 위해서 개 인에게 개입(간섭)할 수 있는 근거를 부정한 셈이다. 이제 비로소 맹자와 순자의 성선과 성악이 대립 구도로 형성되게 되 었다. 물론 그 구도는 맹자의 의지와 무관하게 전적으로 순자에 의해서 짜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두 사람의 활동시기가 바뀌었다면, 맹 자는 순자의 性 정의, 性과 僞의 구분을 인정하면서 예의가 위가 아니라 성이라는 점을 논증할 것이다. 사실 「공손추」상 6의 논증이 바로 순자의 성악에 대한 답변이기도 하다.

두 사람이 각각 나름의 근거를 가지고 있더라도 상대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성선과 성악이 서로 배제하고 싶다고 해서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둘 다 성의 부분에 주목하 고 있기 때문이다. 맹자가 악의 환경의 영향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이 그 것의 영향을 극복하지 못했다면 환경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성의 측면 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물론 훗날의 이야기이지만 성리학의 본연지성 과 기질지성의 구분은 바로 성선과 성악이 가지고 있던 성의 부분성을 종합한 기도라고 할 수 있다.

2. 대립 구도의 약점

순자에 의해서 맹자와 순자 사이의 성선과 성악을 두고 대립적 구도 가 형성되었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이는 종래 철학사 서술과 다를 바 없 는 사실이다.

이제 둘 사이의 대립 구도가 완전히 타당하고 확실해서 결 코 의심할 수 없는 것인지 3가지 측면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사실 맹자가 성선을 주장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제대로 알 려지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맹자가 성선을 주장했다고 하더라도 맹자 에는 맹자가 직접 화법으로 성선을 말한 적이 없다.

성선과 관련해서 빠짐없이 인용되는 구절은 「공손추」상 6, 「등문공」 상 1, 「고자」상 6, 7 등 네 곳이다.

「공손추」상 6에는 타자에게 차마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不忍人之心, 네 가지 도덕 싹으로서 四端이 나오지 성 선은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다.

등나라 문공이 세자 시절에 楚로 가던 중 宋을 지나다가 맹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 맹자는 문공을 상대로 유세를 펼쳤다. 이 부분을 「등문공」상 1에서 “맹자는 성선을 말하면서 말끝마다 요와 순임금을 들먹였다.”라고 표현되고 있다. 14)

14) “滕文公爲世子, 將之楚, 過宋而見孟子. 孟子道性善, 言必稱堯舜.”

이는 맹자가 직접 서술한 것이 아니라 옆에 있던 제자가 대화 장면을 압축해서 기록 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고자」상 6에서 公都子는 당시 다양한 성론을 정리하고서 그것을 맹 자와 대립시키면서 마지막에 인용 형식으로 “선생님이 ‘성선이다’라고 하니 저들은 모두 틀린 것인가요?”라고 말하고 있다. 질문을 받고서 맹 자는 사람이 “자신의 바탕대로 따른다면 선하게 될 수 있으니, 이게 소 위 선이다. 가령 불선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자질의 탓이 아니다.”15) 여 기서도 맹자는 성선을 말할 듯하지만 ‘선’만 말한다. 물론 그 선 앞에 성 이 생략되었다고 볼 수는 있다. 「고자」상 7에는 귀의 同聽에 대비해서 마음의 所同然을 말하지 성선을 말하지 않는다. 네 구절을 근거로 삼더라도 맹자가 성선을 주장한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다만 성선이 철학사에서 맹자의 트레이드마크로 알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맹자가 맹자에서 성선을 그렇게 중요하고도 빈번하게 사용 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성선은 최고 공리로서 맹자 의 모든 사상을 정초시키고 모든 사상이 성선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으로 볼 수 없을 듯하다. 그러므로 맹자는 성선을 분명히 발견했지만 그것을 자기 사상의 최고 공리로 보지 않은 만큼 맹자와 순자 사상의 결정적 차이를 성선과 성악 의 대립으로 부각시킬 수 없을 듯하다. 다음으로 순자의 상황을 살펴보도록 하자. 맹자와 순자의 차이를 성 선과 성악의 대립 도식으로 설정할 경우 순자는 맹자보다 더 불리하다. 이제 그 근거를 하나씩 알아보자. 맹자의 성선만큼이나 성악은 순자의 트레이드마크이다. 우리는 자연 히 ‘性惡’이 순자 제20권 제32편 중 곳곳에 언급되리라 예상할 수 있 다. ‘성악’은 모두 19차례 쓰이지만 제23편 「성악」에만 보이고 다른 편 에는 전혀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다. 또 순자는 맹자의 ‘성선’을 비판하 면 그 용어를 6차례 사용하는데 역시 「성악」에만 보인다. 16) 이는 맹자가 성선을 직접 화법을 말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15) “公都子曰: …… 今曰‘性善’, 然則彼皆非與? 孟子曰: 乃若其情, 則可以爲善矣. 乃所謂善也. 若夫爲不善, 非才之罪也.”

16) 김승혜, 원시유교: 논어․맹자․순자에 대한 해석학적 접근, 서울: 민음사, 1994,여기 244쪽 참조.

이 책의 개정판이 2001년에 지식의풍경에서 유교의 뿌리를 찾 아서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가나야 오사무는 이런 맥락에서 「성악」이 순자의 사상을 반영하는 문헌으로 보지 않는다. 金谷治, 「荀子文獻學的硏究」, 日本學士院紀要 9-1, 1951 참조.

이 사실은 순자의 사상 에 다양한 지층이 있어서 시기별 차이를 보인다고 할 수도 있고 또 순 자가 성악을 자기 사상의 최고 공리로 간주하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 을 시사해준다.

그리고 性惡의 惡 의미도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둡스 (H. Dubs)와 같은 서양의 동양학 연구자는 성악을, 사람이 본성에 의해 의도적으로 악을 저지르도록 되어 있어서 악을 저지르면서 희열을 느낀 다는 맥락으로 파악했다. 아울러 성악은 이미 결정된 특성으로 선의 상 태로 회복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17) 이러한 악의 관점은 많은 말을 빌릴 필요가 없이 순자의 성악과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 순자는 성악이라고 진단했더라도 그것이 영구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 노력에 의해 서 선으로 전환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것이 바로 性僞의 구분이며 이를 바탕으로 化性起僞가 나오는 것이다. 18) 그는 나무와 숫돌의 작업 공정을 예로 들고 있다. 굽은 나무도 檃栝(일종의 도지개)로 고정시켜 찌게 되면 바른 나무로 변하고, 무딘 쇠도 숫돌에 갈면 날카로운 쇠가 되듯이 사람 의 성악도 스승과 법도의 지도를 받으면 바르게 되고 예의를 차리게 되 면 제자리 잡게 된다고 보았다.19) 이로써 우리는 순자의 악이 비결정론 의 맥락에서 상황에 따라 변화될 수 있는 특성으로 볼 수 있다. 순자는 선을 올바르고 가지런하며 공변되고 다스리지는 것으로 보고, 악을 치우고 비뚤어지며 어그러지고 어수선한 것으로 보고 있다. 20)

17) H. Dubs, “Mencius and Sun-dz on Human Nature,” Philosophy East & West, 6, 1965, 213~222. P. 아이반호, 신정근 옮김, 유학, 우리 삶의 철학[원제: Confucian Moral Ethic Cultivation, 2000], 서울: 동아시아, 2008, 94~96쪽 재인용.

18) 「성악」 “聖人化性而起僞, 僞起而生禮義, 禮義生而制法度.”

19) 「성악」 “枸木必將待檃栝烝矯然後直, 鈍金必將待礱厲然後利. 今人之性惡, 必 將待師法然後正, 得禮義然後治.”

20) 「성악」 “凡古今天下之所謂善者, 正理平治也, 所謂惡者, 偏險悖亂也. 是善惡之 分也已.”

여기서 악은 선과 완전한 적대적 상태가 아니라 선의 상대적 결여 상태이다.

순자가 성선과 성악을 동시에 거론할 때 분명히 대립 관계로 설명했지 만 선과 악의 정의를 내릴 때 악은 선을 지향하지만 아직 도달하지 못 한 만큼 문제가 되는 영역을 가리킨다.

그래서 순자는 선과 악을 好와 惡만이 아니라 美와 醜의 맥락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악은 변화 불가능한 사악하다(evil)가 아니라 좋지 않다(not good)거나 세련되지 못하고 거칠다(coarse)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21) 더 중요한 것은 순자가 「禮論」에서 예의 층위를 나누면서 情文俱盡을 최상의 상태로 보면서22) 각종 의례, 특히 상례에서 성정을 긍정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姦人과 君子를 구분하고서 간인은 산 사람 을 후대하고 죽은 사람을 박대하지만 군자는 그렇게 하면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보았다. 23) 또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고서 슬퍼하지도 않고 공경 하지도 않으면 짐승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하고 있다. 24) 이렇게 성정에 긍 정적인 평가를 하다가 순자는 “성이 없으면 위가 베풀 곳이 없고 위가 없으면 성이 스스로 아름다울 수 없다. 성과 위가 하나로 합쳐야만 성인 에 어울리는 이름과 천하를 하나로 만드는 공적이 이루어진다.”는 결론 을 내린다.25)

따라서 간인이 아니라 군자의 경우 「성악」의 성 또는 성․ 위가 「예론」의 성 또는 性․僞가 다르게 된다. 「성악」에서 性僞之分이 化 性起僞로 진행되지만 「예론」에서 性僞合이 情文俱盡으로 진행되고 있 다. 결국 순자는 성정을 악만이 아니라 선의 측면에 분명히 주목했다고 할 수 있다. 정리를 하자면 맹자와 순자의 차이를 성선과 성악의 대립적인 도식으 로 파악할 수 있다. 이 대립 구도는 분명 문헌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 하 지만 그 대립은 전면적 적대 관계가 아니라 부분적 적대 관계로 수위를 낮추어야 한다. 따라서 성선과 성악을 두 사람의 결정적 차이라고 할 수 는 없는 것이다.

21) 신정근, 「관계의 고착성과 탈바꿈의 자유 사이의 긴장」, 철학연구 제51집, 2000, 85~87쪽.

22) “至備, 情文俱盡. 其次, 情文代勝. 其下, 復情以歸大(太)一.”

23) 「예론」 “夫厚其生而薄其死, 是敬其有知而慢其無知也, 是姦人之道而倍叛之心 也. 君子以倍叛之心接臧穀, 猶且羞之, 而況以事其所隆親乎!”

24) 「예론」 “一朝而喪其嚴親, 而所以送葬之者不哀不敬, 則嫌於禽獸矣, 君子恥之.”

25) 「예론」 “性者, 本始材朴也. 僞者, 文理隆盛也. 無性則僞之無所加, 無僞則性不 能自美. 性僞合, 然後成聖人之名, 一天下之功, 於是就也.”

Ⅲ. 지식은 본성의 내부인가 외부인가?

1. 대립 구도의 확인

맹자에서 맹자와 告子는 두 가지 주제에서 의견이 극명하게 갈리고 있다.

사실 고자는 훗날 순자의 탄생을 예고할 정도로 둘은 비슷한 측면 이 많다.

첫째, 고자는 生之謂性, 즉 타고난 경향을 본성으로 보고 있다. (「고자」상3) 이는 순자가 본성을 天之就, 즉 자연적인 경향성으로 보는 것과 상당히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맹자는 性善을 주장했 다. 따라서 맹자는 고자를 통해서 순자와 대립한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둘째, 고자는 仁內義外, 즉 인은 내재적이고 의는 외재 적이고 주장했다.(「고자」상4, 5) 이는 순자가 「예론」에서 성정을 긍정하 면서 성인이 만든 禮義와 師法으로 사람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주장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맹자는 仁內義內를 주장했다. 마 찬가지로 맹자는 고자를 통해서 순자와 대립하는 것을 간접적으로 확인 할 수 있다.

두 가지 논의는 철학사에 이미 교과서적으로 정리되어 있을 정도로 별다른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나는 고자를 통하지 않고 맹자와 순 자를 직접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도식을 논의하고자 한다.

나는 맹자와 고자의 仁內義內와 仁內義外라는 대립 구도를 빌린다면, 맹자와 순자의 결정적 차이를 仁內知內와 仁內知外 또는 仁外知外26)로 볼 수 있다는 점을 밝히고자 한다. 즉 맹자는 지식을 본성의 안에 끌어안지만 순자는 지식을 본성 밖에 두면서 본성을 규제하도록 하고 있다.

26) 앞에서 논의했듯이 순자의 경우 仁은 「성악」에 주목하면 ‘仁外’이지만 「예론」 에 주목하고 ‘仁內’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지금까지 제대로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두 사람을 전면적으로 대립하게 만드는 결정적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맹자를 살펴보자.

이로부터 살펴본다면 놀라서 함께 아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겸손하고 양보하는 마음 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적절함과 부적절함을 가리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놀라서 함께 아파하는 마음은 仁의 싹이고,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 음은 義의 싹이고, 겸손하고 양보하는 마음은 禮의 싹이고, 적절함과 부적절함 을 가리는 마음은 知의 싹이다. 사람이 이 네 가지 싹을 경험하는 것은 사람이 사지를 가지고 있는 것만큼이나 확실하다. …… 무릇 네 가지 싹을 나의 마음에 서 경험하고 모든 상황으로 넓혀 나갈 줄 안다면, 이런 과정은 불이 처음 타오 르고 샘이 처음 솟아나는 형세와 유사하다. 만약 완전히 채워나간다면 사해를 지킬 수 있다. 만약 채워 나가지 못한다면 부모조차 섬길 수 없게 된다.27)

27) “由是觀之, 無惻隱之心, 非人也. 無羞惡之心, 非人也. 無辭讓之心, 非人也. 無 是非之心, 非人也. 惻隱之心, 仁之端也. 羞惡之心, 義之端也. 辭讓之心, 禮之端 也, 是非之心, 知之端也. 人之有是四端也, 猶其有四體也. …… 凡有四端於我 者, 知皆擴而充之矣. 若火之始然, 泉之始達. 苟能充之, 足以保四海. 苟不充之, 不足以事父母.”

맹자는 仁과 知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仁義禮知를 한꺼번에 다루고 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사람은 선천적으로 인의예지의 사덕을 갖추 고 있고 사덕은 제각각 어울리는 상황을 맞이해서 사단의 형태로 드러 난다. 사단을 보면 측은․수오․사양과 시비는 성격이 다르다. 정서와 이지 로 구분한다면 세 가지는 이지보다는 정서적 계기가 강한 반면 시비는 정서보다 이지적 계기가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구체적인 상황에서 사단 이 개별적으로 작용하지 않고 복합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예컨대 「양혜왕」상7에 나오는 제 宣王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그가 우 연히 구슬피 울면서 어딘가로 끌려가는 소를 보게 되었다. 그가 신하에 게 소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묻자, 신하는 釁鐘 의식을 치르기 위해서 소 를 데리고 간다는 대답했다. 그는 소 울음에 마음이 걸려서 以羊易牛, 즉 소를 양으로 바꾸라는 지시를 내렸다. 선왕이 소 울음을 듣고서 구해 야겠다는 마음이 든 것은 측은지심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흔종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시비지심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는 ―맹자 가 보기에― 두 가지를 以羊易牛로 절충하면서 곳간에 곡식이 썩어나면 서 백성들의 고통을 알지도 못한 채 해결하려는 자세를 털끝만큼도 보 이지 않았다. 여기서 측은지심과 시비지심이 제대로 결합한다면 소에게 서 느꼈던 측은지심을, 고통에 찬 세월을 보내는 사람(백성)에게로 옮겨 갈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선왕이 도덕 실패를 했다고 하더라도 惻隱과 是非 또는 仁과 知가 본성의 내부에 있으면서 때로는 개별적으로 때로 복합적으로 작용 한다고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후자의 경우 그 결합이 도덕적으로 성공 하거나 실패하는 차이를 나타낼 수도 있다. 측은과 시비 또는 인과 지가 실패의 결합으로 이어지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둘은 공통의 목적으로 나아가면서 협력하는 관계에 있는 것이다.

이제 순자의 경우를 살펴보자.

사람이 사람다운 까닭은 무엇인가? 분별력[辨]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배 고프면 먹고 싶고 추우면 따뜻하게 하고 싶고 피곤하면 쉬고 싶고 이익을 좋아 하고 손해를 싫어한다. 이것은 사람이 나면서부터 가진 본성이다. 또 그것은 다 른 것에 의지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성군이었던 우와 폭군이었던 걸이 같은 바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람다운 까닭은 다만 두 발로 직립하고 털이 없 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분별력이 있다는 데에 있다.28)

28) 「非相」 “人之所以爲人者, 何已也? 曰: 以其有辨也. 飢而欲食, 寒而欲煖, 勞而欲息, 好利而惡害, 是人之所生而有也, 是無待而然者也, 是禹桀之所同也. 然則 人之所以爲人者, 非特以二足而無毛也, 以其有辨也.” 여기에 「공손추」상 6의 성선과 반대되는 好利惡害가 보인다.

맹자가 늘 인의예지의 사덕을 묶어서 이야기를 끌어가는 반면에 순자 는 늘 본성과 지능을 대비시키면서 논의를 이끌어간다. 여기서도 순자는 食․煖․息․好利라는 사람의 네 가지 본성을 언급하면서, 그것이 후천적 학습 의 결과가 아니며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밝히고 있 다. 그는 이를 두 발로 직립하고 털이 없어 옷을 입어야 하는 사람의 동물 적 특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어서 그는 본성으로 흡수되지 않 는 분별력을 사람다운 특징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부분은 순자가 「왕제」 에서 물불․초목․금수와 사람의 차이를 해명하면서 사람은 동물 단계의 기․ 생명․지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위에 군집생활과 분업 활동을 가능하 게 하는 義를 발휘할 수 있다고 보는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29)

이처럼 순자는 사람의 본성과 대비되면서 지성을 발휘해서 해낼 수 있는 능력과 결과를 강조하고 있다. 즉 그는 「비상」의 辨, 「왕제」의 羣 과 分을 함축한 義, 「예론」의 度量과 分界를 정하는 禮(또는 禮義) 30) , 「 성악」의 禮義와 師法을 통해서 사람이 본성대로만 움직이지 않도록 견 제하고자 했다. 비유를 들자면 본성(성정)이 휘발유를 태워서 앞으로 나 갈 수 있는 차체라면 지성(지식)은 핸들이면서 브레이크와 같다.

29) 「왕제」 “水火有氣而無生, 草木有生而無知, 禽獸有知而無義. 人有氣有生有知, 亦且有義, 故最爲天下貴也. 力不若牛, 走不若馬, 而牛馬爲用何也? 曰: 人能羣. 彼不能羣也. 人何以能羣? 曰分. 分何以能行? 曰義.”

30) “禮起於何也? 曰人生而有欲, 欲而部得, 則不能無求, 構而無度量分界, 則不能 不爭. 爭則亂, 亂則窮. 先王惡其亂也. 故制禮義以分之.”

정리를 하면 맹자는 사람의 다양한 도덕적 능력을 네 가지로 본성으 로 수렴해서 그들 상호의 협력 관계를 구축하고자 했다. 성인이 아니라 면 도덕 실패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사람이 굳이 경전(문자)과 스 승(기억)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四德에 연원을 둔 四端이 도덕 성공을 위 해 서로 협업할 수 있다. 반면 순자는 본성과 지성 또는 정성과 知慮(지식)에서 사람이 전자에만 의존하면 도덕 실패를 하지만 후자가 전자를 적절하게 견인하게 되면 도덕 성공을 하게 된다. 이때 양자는 엄밀하게 서로 다른 질적 존재로 상대를 포함할 수는 없다. 바로 이러한 측면이 맹자와 순자의 질적인 차이라고 할 수 있다.

2. 대립 구도의 의의

우리가 맹자와 순자의 결정적 차이를 성선과 성악의 부분적 대립 구 도가 아니라 본성과 지성 또는 성정과 지려(지식)에서 찾았다고 하더라 도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앞으로 두 사람의 이러한 차이가 도덕 행 위를 어떻게 가능하게 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번에는 지금까지 서술 방식과 달리 먼저 순자를 살펴보도록 하자.

하고 싶고 싫어하는 것과 취하고 버리는 것의 저울질, 즉 선택의 문제를 알 아보자. 하고 싶은 것을 보면, 반드시 그것을 앞뒤로 싫어할 수 있는 가능성(측 면)을 따져봐야(고려해야) 한다. 이익이 될 만한 것을 보면 반드시 그것이 앞뒤 로 손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측면)을 따져봐야 한다. 欲惡와 利害를 아울러(종 합적으로) 저울질해 보고 깊이 있게 계산해본(숙고해본) 다음에 하고 싶고 싫어 하는 것과 취하고 버리는 것을 결정해야 한다. 이와 같다면 늘 잘못에 빠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 사람이 빠지는 문제는 한쪽으로 치우쳐서 그르치는 데에 있다. 하고 싶은 것 을 보면 그것을 싫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따져보지 않는다. 또 이익이 될 만한 것을 보면 그것이 손해가 날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이렇기 때문에 사람이 움직이면 반드시 실패하고 사람이 무엇을 하게 되면 반드시 치욕을 당한다. 이 것이 바로 한쪽으로 치우쳐서 그르치는 문제이다. 31)

31) 「不苟」 “欲惡取舍之權, 見其可欲也, 則必前後慮其可惡也者, 見其可利也, 則必 前後慮其可害也自, 而兼權之, 孰計之, 然後定其欲惡取舍, 如是則常不失陷矣. 凡人之患, 偏傷之也. 見其可欲也, 則不慮其可惡也者. 見其可利也, 則不顧其可 害也者. 是以動則必陷, 爲則必辱, 是偏傷之患也.”

사실 종래 순자의 이 구절은 그렇게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핑가레트는 공자의 한정해서 말하고 있지만 유가에는 도덕적 선택(moral choice)의 사 고가 없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공자 사상에서 사람은 어떠한 도덕규 범에 절대적 가치를 두지 않고 자유로운 상태에서 이것을 할까 저것을 할까를 선택하지 않는다. 만약 누군가가 도덕을 주체의 선택 문제로 몰 고 간다면, 그 사람은 지식이 부족하거나 문제 상황에 놓여있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은 일정한 도덕적 식견을 가지고 있다면, 당연히 이미 정해진 도덕규범을 향해 나아갈지 결의하고서 어떻게 하면 도덕 실패를 하지 않을까 숙고하게 된다. 32)

32) 핑가레트, 송영배 옮김, 공자의 철학: 서양에서 바라본 예에 대한 새로운 이 해, 서광사, 1991 참조.

핑가레트의 주장은 적어도 순자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사람이 욕망 과 이익의 대상을 마주하게 되면, 본성대로라면 사람은 자연히 그것을 소유하려고 나아가게 된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과 일시적으로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면 욕망과 이익의 대상은 사람이 기대하는 욕망과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다. 하지만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 것과 장기적으로 보 는 것으로 판단하면 욕망과 이익의 대상은 언제 증오와 손해의 대상으 로 뒤바뀔 수도 있다. 오늘날 소비사회에서 사람이 충동구매를 하고서 금세 후회를 하는 경우와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순자는 욕망과 이익이 충족된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본성대로 움직이지 말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는 욕망과 이익이 기대된다고 하더 라도, 당장 보이지 않는 욕망과 이익의 이면, 즉 증오와 손해의 측면에 서 미리 고려할 것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 그는 兼權과 孰計(熟計)를 제시하고 있다. 겸권은 저울에 욕망과 증오, 이익과 손해 둘 다를 올려놓고 검토해보라는 것이고, 숙계는 즉흥적이나 즉흥적으로 판단하지 말고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심사숙고하라는 것이다. 이처럼 순자는 도덕 실패를 예방하기 위해서 욕망과 증오, 이익과 손해라는 기 준을 가지고 겸권과 숙계의 방법으로 欲惡取舍를 신중하게 선택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33)

33) 도덕 선택과 관련해서 또 하나의 주장을 살펴볼 만하다. 정약용은 맹자요의 에서 自主之權을 통해 도덕 계발 가능성의 근거로서 자유 의지를 주장하고 있다. 이런 사유의 근원을 마테오 리치가 천주실의에서 자유 의지를 선과 악의 근원으로 보는 것과 연결 짓고 있다. 즉 자유 의지와 도덕 선택이 동양 과 다른 지적 전통을 가진 서양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송영배․금장태 외, 한국유학과 리기철학, 예문서원, 2000, 264~267, 282~283쪽 참조. 도덕 선택의 기원 문제와 관련해서 나는 서양의 영향만 아 니라 순자의 사유 방식도 함께 고려해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이제 맹자를 살펴볼 차례이다.

맹자가 대답했다. 자신의 큰 몸을 따르면 큰 사람이 되고, 자신의 작은 몸을 따르면 작은 사람이 된다. 공도자가 물었다. 모두가 사람인데 어떤 사람은 자신 의 큰 몸을 따르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작은 몸을 따른다고 하니 무슨 까닭인 가요? 맹자가 대답했다. 눈과 귀의 기관은 반성(집중)하지 못해 물에 가리어진 다. 물(외물)이 물(감관)을 만나면 감관을 끌고 갈 뿐이다. 마음의 기관은 반성 (집중)한다. 반성하면 얻게 되고, 반성하지 않으면 얻지 못한다. 34)

34) 「고자」상 15 “孟子曰: 從其大體爲大人, 從其小體爲小人. 曰: 鈞是人也. 或從其 大體, 或從其小體, 何也? 曰: 耳目之官不思, 而蔽於物, 物交物, 則引之而已矣. 心之官則思. 思則得之, 不思則不得也.”

얼핏 보면 맹자도 큰 사람과 작은 사람의 갈림길을 선택의 문제로 보 는 듯하다. 이것은 문맥을 오독한 탓이다.

맹자는 사람이 대인이 되느냐 소인이 되느냐를 선택의 문제로 보지 않는다.

이미 소인이 되어서는 안 되고 대인이 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그는 다만 전제가 이미 있 는 데도 불구하고 사람이 대인이 되지 못하고 소인이 될까 라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맹자는 대인과 소인 문제의 관건을 思에서 찾고 있다. 이 思는 순자가 말하는 兼權이나 孰計와 다르다. 사덕이 사람의 의식에 현전할 때, 즉 사람이 사단을 경험할 때, 思는 사람이 사단을 존중하고 그것에 따라서 생각하고 그것에 집중해서 그대로 행동하도록 하는 것이다.

「공손추」상 6의 어린아이 이야기를 실례로 든다면, 겸권과 숙계는 호리피해의 입장에서 심사숙고하는 것이라면 사는 측은과 시비의 맥락에 주목해서 아이 를 구하는 것이다.

반면 측은과 시비에 주목하지 않으면 아이를 구하지 않거나 구하더라도 이해의 관점을 취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맹자는 「고자」상 8에서 한때 나무로 무성해서 아름다웠던 牛山 이야기를 실례 로 들고 있다. 우산이 아름답다는 것은 사람이 본성(사덕)을 존중해서 그 대로 행위 하는 것이다. 우산이 민둥산으로 변한 것은 사람들이 나무를 마구잡이 베어내는 등 제대로 관리하지 않는 것을 나타낸다. 우산이 원 래 무성해서 아름답기 때문에 사람이 우산의 본성을 존중하고 제대로 관리한다면 계속해서 아름다움을 유지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민둥산 인 채로 황폐하게 될 것이다. 즉 맹자는 사람의 시선을 외부의 조건과 상황으로 향하지 않고 내면의 도덕의식으로 집중하도록 이끌고 있다. 정리하면 도덕 성공과 실패를, 순자는 탁월한 선택과 연관 지어서 논 의를 끌어간다면 맹자는 내면의 응시로 끌어가고 있다. 이것도 맹자와 순자의 사상을 결정적으로 구별하게 만드는 계기이다.

Ⅳ. 수양은 存心養性인가 化性養知인가?

1. 개인 수양의 방법

지금까지 우리는 성선과 성악이 맹자와 순자의 부분적 대립을 나타내 고, 본성과 지성(지식)의 관계가 두 사람의 결정적 차이라는 점을 논증해 왔다.

두 사람 사이에는 지금까지 살펴본 차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 로 많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사회 운영에서 제도보다는 군자(성인)의 존재를 결정적으로 요소로 간주하고 있다. 아울러 그들은 인의예지와 같은 공자(유학)의 가치를 함께 긍정하고 있다. 거칠게 말한다면 두 사람 은 출발점과 방법을 달리하지만 목표를 상당 부분 공유한다고 할 수 있 다.

이미 출발점의 차이를 살펴보았으므로 이제 같은 목표에 이르는 방법의 차이를 살펴볼 차례가 되었다.

방법의 차이는 살펴보기 위해서 개인 수양의 문제에 주목해보자. 四 端에 집중하지 못하거나(맹자) 兼權과 孰計에 의한 선택을 잘하지 못하 면(순자), 개인은 도덕 실패를 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도덕 실패를 하지 않으면 집중을 잘하고 선택을 탁월하게 하도록 해야 한다. 먼저 맹자를 살펴보자.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다 발휘하면 본성을 알게 된다. 본성을 알면 하늘을 알게 된다. 마음을 있게 하고 본성을 기르면 그것이 하늘을 받들어 모시는 길이다. 35)

35) 「진심」상 1 “盡其心者, 知其性也. 知其性, 則知天矣. 存其心, 養其性, 所以事 天也.”

맹자는 「고자」상 11에서 닭과 개가 우리를 벗어나면 사람이 찾아나서 는 비유를 들어서 사람은 왜 마음을 놓고 있으면서 그것을 굳게 지키려 고 하지 않는 세태를 풍자하고 있다.

맹자는 이를 놓은 마음을 찾는다는 求放心으로 표현하고 있다.36) 맹자는 구방심의 연장선상에서 도덕 성공 을 위해서 외적 조건이 아니라 내면의 심과 성에 주목하고 있다. 사람은 심이 가진 모든 능력을 최대로 발휘하게 되면 성을 만나게 된다. 비유로 설명하는 바위에 깔린 물건을 꺼내려고 할 때, 바위를 조금 들면 물건의 부분을 볼 수 있지만 전체를 온전히 꺼낼 수 없다. 바위를 완전히 들어 올릴 때에만 비로소 물건의 실체를 제대로 확인할 수 있고 손상 없이 온전히 꺼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측은한 마음을 온전히 하게 되 면, 타자를 향한 사랑(구원)이 중도에 멈추거나 증오로 바뀌지 않는다. 측은한 마음을 반쯤 가지거나 확 밀려오는 측은한 마음을 밀쳐낸다면 사람은 타자를 향해 사랑(구원)을 시작조차 하지 않거나 중간에 그만둘 수 있다. 그래서 맹자는 “완전히 誠하면서 타자를 감동시키지 못한 경우 가 없고, 誠하지 않으면서 타자를 감동시키는 경우가 없다.”37)고 말하면서, 마음의 진실성과 진정성을 강조했던 것이다. 맹자는 心과 性의 진실한 수양을 최종적으로 存心養性으로 귀결시킨 다.

36) “仁, 人心也. 義, 人路也. 舍其路而不由, 放其心而不知求. 哀哉! 人有鷄犬放, 則知求之. 有放心, 而不知求. 學問之道無他, 求其放心而已矣.”

37) 「이루」상 12 “至誠而不動者, 未之有也. 不誠, 未有能動者也.”

盡心이 사태마다 마음(사단)의 충실성과 진실성을 말하는 반면 存心 은 마음(사단)의 항구적인 지속과 충만을 가리킨다. 즉 존심은 사단이 들 락날락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다.

養性 은 성 자체가 늘 관심의 초점에 놓여서 주목을 받으면서 성이 실현되는 세계를 최대로 확장하는 계기를 가리킨다. 이로써 맹자의 수양은 존심 양성을 유지할 때 도덕 성공을 견인해낼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순자를 살펴보자. 어떤 사람이 순자를 찾아와 공자의 말이라며 다음같이 전했다.

周公 은 위대한 인물이다. 자신이 존귀해질수록 공손하고 부유해질수록 검소 하여 모범을 보였지만 적(殷)과 싸워 이길수록 위험을 느껴 경계를 엄격 하게 했다. 38)

38) 「유효」 “客有道曰: 孔子曰: 周公其盛乎! 身貴而愈恭, 家富而愈儉, 勝敵而愈戒.”

순자는 다음처럼 어떤 사람의 전언을 부정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마음을 고쳐먹고 사려를 바꿔서 주공에게 감화되어 순종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집밖의 문을 닫지 않고 온 천하에 걸쳐서 경계를 나누지 않았다. 이때를 당해서 누구를 위해 경계를 엄격하게 했겠는가? 39)

39) 「유효」 “四海之內, 莫不變心易慮以化順之. 故外闔不閉, 跨天下而無蘄. 當是時 也, 夫又誰爲戒矣哉!”

순자는 殷과 周의 교체기에 주공이 조직적인 저항을 받지 않고 통일 과업을 이룩했던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순조로운 왕조의 교체를, 사람 들이 자발적으로 變心과 易慮, 즉 마음을 고쳐먹고 사려 방식을 바꾼 것 으로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이를 앞에서 본 순자의 兼權․孰計와 함께 검토해보자. 겸권과 숙계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취 사선택하는 문제이다. 변심과 역려는 겸권과 숙계를 포함하면서도 또 겸권과 숙계의 원칙 자체를 바꾸는 것이다. 즉 殷이 지배 왕조일 때 변 심과 역려는 은을 부정하지 않고 겸권과 숙계를 하지만, 지배 왕조가 殷 에서 周로 바뀌면 변심과 역려는 은을 부정하는 것을 포함해서 겸권과 숙계를 하게 된다. 그만큼 변심과 역려는 겸권과 숙계에 비해서 근원적 이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겸권과 숙계가 통상적인 상황에서 欲惡과 利 害를 계산하는 방식이라면 변심과 역려는 근본적인 상황에서 겸권과 숙 계를 포함하면서 그것을 계산하는 사고 원칙 자체의 변화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논법은 개인 수양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결국 사람이 도덕 성공을 하려면 통상적인 상황에서 겸권과 숙계에 따라 탁 월한 선택을 하면 충분하지만 전환의 시대 상황에서 변심과 역려를 통 해 사고방식 자체를 수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떻게 하면 變心易慮를 통해서 사고의 근본적인 전 환을 이룰 수 있을까? 이와 관련해서 「성악」에 나오는 化性起僞와 「예 론」에 나오는 情文俱盡은 이미 검토한 적이 있다. 여기서 나아가 순자가 말하는 養情과 養知를 살펴보자. 양정은 생명을 길러주는 養生, 재물을 불리는 養財, 편안함을 더해주는 養安과 마찬가지로 禮義와 文理를 통 해서 정감을 길러내는 것이다. 40) 養知는 사람이 지식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므로 그러한 능력을 지속 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지식을 키우는 것이다. 41) 사람은 “세상의 핵심 을 총괄하여 세상의 많은 것(사람)을 다스리면 한 사람을 다스리는 것과 같고 거실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세상의 모든 실정(정보)을 자기 가까이 쌓아 두면”42) 도덕 실패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게 된다.

40) 「예론」 “孰知夫出死要節之所以養生也, 孰知夫出費用之所以養財也, 孰知夫恭 敬辭讓之所以養安也, 孰知夫禮義文理之所以養情也.” 원의는 신하와 군주 사 이의 일이지만 이를 일반적인 관계로 확대해서 해석하고 있다.

41) 「부국」 “百姓誠賴其知也, 故相率而爲之勞苦, 以務佚之, 以養其知也.” 원의는 백성과 仁人의 군왕 관계를 나타내지만 개인의 맥락으로 확대해서 풀이했다. 42) 「불구」 “推禮義之統, 分是非之分, 總天下之要, 治海內之衆, 若使一人. 故操彌 約而事彌大. 五寸之矩, 盡天下之方也. 故君子不下室堂, 而海內之情擧積此者, 則操術然也.”

결국 순자는 지식과 정보의 축적을 통해서 사람이 세계에 대처하는 操術을 장악하게 되고, 장악하는 만큼 실패의 확률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정리하면 맹자는 存心養性을 통해서 도덕 성공으로 나아가고 순자는 變心易慮와 養情養知를 통해 도덕 실패의 가능성을 줄이려고 했다.

이 처럼 우리는 결국 맹자와 순자의 성선과 성악의 부분적 대립 도식에서 벗어날 때 둘 사이의 객관적인 차이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2. 개인 수양의 한계와 사회 문제의 해결

과연 개인의 수양이 개인의 도덕 성공을 이끌어내며 동시에 도덕적 사회를 이룩해낼 수 있을까? 여기서 맹자와 순자의 수양 방식이 달랐던 만큼 둘의 차이가 극명하게 난다.

우리는 앞에서 맹자가 도덕 성공을 存心養性이라는 내면의 응시에서 찾았다고 했다. 과연 외적 세계의 고려 없이 내면의 응시가 사람에게 도 덕 성공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답을 찾는 실마리는 맹자 자신의 말에 있다. 「등문공」상 1에 따르면 맹자는 성선을 말하면서 말끝마다 요와 순임 금을 들먹였다고 한다. 43) 성선과 요순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 까? 이를 「진심」상 30에서 말하듯이 요와 순이 본성을 타고난 듯이 실행 했다는 것과 연결 지을 수 있다. 44) 즉 요순이 본성을 타고난 듯이 별다 른 어려움 없이 도덕 성공을 거두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는 성선을 타 인에게 설득하는 데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

43) “滕文公爲世子, 將之楚, 過宋而見孟子. 孟子道性善, 言必稱堯舜.”

44) “堯舜性之, 湯武身之, 五覇假之.”

요순과 같지 않은 사 람에게 性은 너무 멀어서 초월적인 것으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성선과 요순 관계의 실마리를 풀기 위해서 「고자」상 7을 살펴보자. 젊은이들이 풍년에 게을러지고 흉년에 난폭해지는데, 맹자는 이를 타고 난 재질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에 끼치는 환경의 영향으로 설명하고 있다. 45)

맹자는 사람이 환경의 영향으로부터 절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 고 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그는 恒産을 강조하고 이를 현실화시 키기 위해서 井田制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항산이 없으면 성선이 좌초에 부딪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가 과연 토지의 사 유화가 진전되는 전국시대의 상황에서 그것과 반대되는 정전제를 시행 할 수 있을까? 46)

그것은 바로 성인만이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맹자가 왜 性善과 聖人(堯舜)을 연결시켜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 는 맥락을 이해할 수 있다.

맹자에서 성선은 자립적인 이론이 아니라 성 인론 및 정전제와 결부되어야만 성립될 수 있었던 것이다.(군자라면 다 른 이야기가 가능할 수 있다. 여기서는 사람 일반을 두고 논의를 하고 있다.) 그

래서 맹자는 한편으로 마음의 응시를 강조하지만 다른 한편으 로 사회 제도와 그 운영 주체를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순자의 경우는 맹자와 처지가 다르다. 그는 개인이 도덕적 존재가 되려면 變心易慮와 養情養知의 수양을 해 야 한다고 보았다.

그의 心과 慮, 情과 知는 개인이 관여하는 계기와 사 회가 연루되는 계기를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변심역려는 통상적인 상 황만이 아니라 가치관이 근본적으로 전환하는 변혁의 시대와 관련이 된 다. 따라서 변심역려는 개인의 변화만이 아니라 사회의 변화가 동시에 함축되어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모든 사람이 동시에 한꺼번에 心과 慮 를 근본적으로 수정한다는 뜻은 아니다. 가치관의 혁명적 변화를 전제 하고 있으므로 개인의 변화와 사회의 변화 사이의 간극이 그만큼 좁을 수 있다. 47)

45) “富歲, 子弟多賴. 凶歲, 子弟多暴. 非天之降才爾殊也, 其所以陷溺其心者然也.”

46) 전국시대 토지 사유화와 공유화의 관련해서 이성규, 중국고대제국성립사연 구, 일조각, 1997 참조.

47) 나는 여기서 순자가 민주적인 의사 결정을 한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성인(요순)이 권위주의적이면서 간섭주의의 경향을 가지고 있다면, 變心易慮 는 전제적 사회의 출현을 방조할 수도 있다. 순자의 변심역려는 반드시 어떤 하나의 방향과 폐쇄적으로 연결된다기보다 방향이 열려있다고 보는 면이 더 타당할 듯하다.

양정양지의 정과 지는 개인의 순수한 정신세계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의 合禮的인 교류의 장과 연관이 있다. 양정과 양지는 사람과 합례적인 교제를 통해서 상호 우애와 이해가 두터워지는 것이다. 상호 우애와 이 해가 두터워지는 만큼 개인은 만족과 평안을 느끼고 사회에 평화와 질 서가 증대된다. 이렇게 보면 순자는 수양 단계에서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포섭함으로써 개인과 사회의 변화가 동시적으로 진행될 수 있는 길을 마련했던 것이다. 도덕적 개인과 도덕적 사회의 완성을 위해서 맹자는 내면에 집중하여 관념적인 지향을 나타내는 만큼이나 제도 개선을 위해 현실 지향적 특 징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반면 순자는 合禮的인 교제를 통해 정서와 지식의 증대를 강조했던 만큼 현실 지향적이지만 정작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물적 토대에 대한 사유를 집중적으로 전개하지 않고 있다. 그는 교 육을 통한 학습과 사법의 권위를 강조하고 있다.

Ⅴ. 맺음말

철학사에서 통상적으로 맹자와 순자의 차이를 성선과 성악의 대립 구 도로 설명해왔다. 하지만 그것은 부분적 대립일 뿐 전면적 대립이 될 수 없다. 둘 사이의 전면적 대립을 찾는다면, 그것은 두 사람이 지식(지려) 을 본성의 내부로 포섭하느냐 외부에 두느냐에 있다. 맹자는 지식을 본 성 안에 포섭해서, 사덕 또는 사단이 상호 협력하여 사람이 도덕 성공으 로 나아가게 했다. 순자는 지식(지려)이 본성 밖에 있으면서 본성을 규제 해서 사람이 도덕 성공으로 나아가게 했다. 이러한 본질적 차이는 두 사 람의 수양 방법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맹자는 내면의 주시를 통해서 본성이 교란되지 않도록 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순자는 개인의 탁월 한 선택을 통해서 본성이 상황을 일방적으로 주도하지 못하게 했다.

아울러 개인과 사회의 도덕화를 위해서 맹자는 性善이 聖人만이 아니라 정전제와 결합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순자는 지식(정보)의 축적 속에 개 인과 사회의 변화를 포섭함으로써 도덕의 물적 토대에 대한 논의를 집 중적으로 논의하지 않았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서 도덕적 개인과 사회를 위해서 맹자는 共感을, 순자는 新知를 중시한다고 결론을 끌어낼 수 있다. 이 특징은 두 사람에 게만 나타나지 않고 철학사에서 색깔을 달리하면서 되풀이해서 나타났 다.

예컨대 캉유웨이는 맹자의 不忍人之心, 즉 공감에 호소하여 국가적 경쟁과 국제적 대립을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천두슈는 과학적 지식 이 신중국을 건설하는 토대하고 보았다. 그리고 科玄논쟁(과학과 인생관 논쟁)도 공감과 신지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는 맹자와 순자의 대립 지점을 성선과 성악으로부터 벗어날 때 두 사람의 정확한 대립 지점을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철학사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다.

나아가 인간의 자기 변혁과 사회의 개선을 위해서 동아시아의 철 학은 지적 자양분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맹자는 사람의 본성 자체가 개인과 사회를 구원할 수 있는 동력으로 보았다면, 순자는 지식이 본성 으로 하여금 그 자체를 초월하게 하는 동력이 된다고 보았다.

<논문 요약>

맹자와 순자는 철학사의 라이벌이다. 둘의 결정적 차이는 무엇일까? 철학사에서 통상적으로 맹자와 순자의 차이를 성선과 성악의 대립 구도 로 설명해왔다. 하지만 그것은 부분적 대립일 뿐 전면적 대립이 될 수 없다. 둘 사이의 전면적 대립을 찾는다면, 그것은 두 사람이 지식(지려) 을 본성의 내부로 포섭하느냐 외부에 두느냐에 있다. 맹자는 지식을 본 성 안에 포섭해서, 사덕 또는 사단이 상호 협력하여 사람이 도덕 성공으 로 나아가게 했다. 순자는 지식(지려)이 본성 밖에 있으면서 본성을 규제 해서 사람이 도덕 성공으로 나아가게 했다. 이러한 본질적 차이는 두 사 람의 수양 방법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맹자는 내면의 주시를 통해서 본성이 교란되지 않도록 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순자는 개인의 탁월 한 선택을 통해서 본성이 상황을 일방적으로 주도하지 못하게 했다. 아 울러 개인과 사회의 도덕화를 위해서 맹자는 性善이 聖人만이 아니라 井田制와 결합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순자는 지식(정보)의 축적 속에 개 인과 사회의 변화를 포섭함으로써 도덕의 물적 토대에 대한 논의를 집 중적으로 논의하지 않았다.

주제어: 맹자, 순자, 인성, 養心, 變心

⋅접수일 : 2011.08.10 / 심사개시일 : 2011.08.11 / 게재확정일 : 2011.08.25

<참고 문헌>

논어, 맹자, 순자

김승혜, 원시유교: 논어․맹자․순자에 대한 해석학적 접근, 서울: 민음사, 1994.

김학목, 율곡 이이의 노자, 예문서원, 2001.

송영배․금장태 외, 한국유학과 리기철학, 예문서원, 2000.

신정근, 「관계의 고착성과 탈바꿈의 자유 사이의 긴장」, 철학연구 제51 집, 2000.

신정근, 「상앙 法사상의 내재적 특성」, 동양철학 제28집, 2007.

P. 아이반호, 신정근 옮김, 유학, 우리 삶의 철학[원제: Confucian Moral Ethic Cultivation, 2000],

서울: 동아시아, 2008.

이성규, 중국고대제국성립사연구, 일조각, 1997.

이장희, 「순자 심성론에 관한 소고: 심의 자율성을 중심으로」, 공자학 제 8집, 2001.

정재상, 「자연적 情과 당위적 情: 순자의 성정론에 대한 소고」, 동양철학 제35집, 2011.

金谷治, 「荀子文獻學的硏究」, 日本學士院紀要 9-1, 1951.

핑가레트, 송영배 옮김, 공자의 철학: 서양에서 바라본 예에 대한 새로운 이해, 서광사, 1991.

 

 

⋅접수일 : 2011.08.10 / 심사개시일 : 2011.08.11 / 게재확정일 : 2011.08.25

동양철학연구제67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