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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야기

다르마키르티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 비교연구- 아포하(apoha) 이론과 언어게임(game) 이론을 중심으로 - 권서용/부산대

목 차

Ⅰ. 서론

Ⅱ. 보편 비판

Ⅲ. 언어이론

Ⅳ. 언어와 의미대상과의 관계

Ⅴ. 결론

Ⅰ. 서론

Ⅱ. 보편 비판

1) 다르마키르티의 보편 비판

2) 비트겐슈타인의 보편 비판

Ⅲ. 언어이론

1) 다르마키르티의 아포하론

2) 비트겐슈타인의 그림이론과 게임이론

Ⅳ. 언어와 의미대상과의 관계

1) 다르마키르티의 언어와 의미대상과의 관계

2)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와 의미대상과의 관계

Ⅴ. 결론

<국문초록>

서양의 철학이나 인도의 정통육파철학은 이성(붓디)을 중심으로 세계를 파악하려는 이성중심주의가 주류를 이룬다. 이성(붓디)은 개별 사물의 차이 성을 인식하는 기제가 아니라 개별 사물들의 동일성을 파악하는 수단이다.

동일성에 대한 인식은 개별자들 속에는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본질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하지만 다르마키르티와 비트겐슈타인은 궁극적 실재는 이성 (붓디)에 의해 파악되는, 동일성을 본질로 하는 보편이 아니라 자기차이성을 본질로 하는 개체만이 존재한다는 입장을 공유한다.

다르마키르티는 언어의 본질 혹은 기능을 디그나가와 마찬가지로 타자부정으로 파악하는 아포하론 을 계승한다.

하지만 그는 부정의 대상으로서의 타자를 존재로서의 보편으 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인과적 효과성을 결여한 것, 동일한 결과를 낳지 않 는 것, 바라는 목적을 성취시키지 못하는 것, 착오로 인해 증익(가탁)된 것 등 활동하는 작용으로 간주하여 부정(apoha)을 어떤 문맥에서 사용하는가, 무엇 을 대상으로 사용하는가에 따라 다양한 의미가 표현된다는 언어사용의미론 에 입각하여 언어지시의미론을 포섭하는 아포하론을 완성한다.

비트겐슈타 인에 의하면 언어는 단지 대상을 지시하는 협애한 도구가 아니라 우리의 일 상의 언어공동체를 구성하는 무수히 많은 언어게임에 참여하여 언어를 사용 함으로써 의미가 생성된다고 하는 언어게임이론을 제시한다.

의미론으로 말 하면 언어게임이론은 언어의 의미는 그 사용에 있다고 하는 언어사용의미론 으로 귀결된다.

결국 의미론의 관점에 입각해 본다면, 디그나가의 아포하론 과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그림이론은 언어지시의미론을 공유하고 있고, 다르마키르티의 아포하론과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이론은 언어사용 의미론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성이 존재한다.

다르마키르티와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와 의미대상 사이의 관계는 전자가 인위적 관계를, 후 자는 본질적 관계를 주장함에 따라 서로 견해를 달리하지만, 후기 비트겐슈 타인의 언어이론에 이르게 되면 다르마키르티와 비트겐슈타인 두 사상가 공 히 언어와 의미대상과의 관계를 인위적 자의적 관계로 파악하고 있다.

주제어: 아포하론, 게임이론, 그림이론, 타자부정, 지시의미론, 사용의미론, 동일성, 자기차이성, 보편

Ⅰ. 서론

동물이지만 동물이 아닌 인간 특유의 능력으로는 이성(생각)과 언어가 있 다.

이성과 언어는, 존재의 ‘차이성’에 대한 파악을 통해 인간으로 하여금 행 동하게 하는 능력으로서의 지각과는 달리, 존재의 ‘동일성’에 대한 인식을 근거로 인간으로 하여금 행위하게 하는 능력이다.

그런데 기원 전 5세기 인문 의 시대 이후 서양 철학사는 인간 특유의 능력으로서 언어보다는 이성에 대 해 천착한 역사이다.

영혼을 본성으로 하는, 신이 주신 신성한 능력인 이성은 모든 인간의 나약함을 극복할 수 있는 만능의 키와 같은 것이었다.

이 이성에 의한 존재인식을 규명하는 인식론과 이성을 더욱 날카롭게 벼리게 하기 위 한 도구로서의 논리학이 서양철학의 핵심영역이 되었다.

그런데 중세철학을 마감하고 근대철학이 성립하면서 이 무한한 신적 능력인 이성에 대해 비판적 사고를 피력한 철학자가 바로 칸트이다.

그의 주저인 3비판서 즉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그는 이성의 한계에 대해서 비판적 관점을 취한다.

중 세철학이 인간의 이성적 능력의 신성성에 대한 예찬이라면 근대철학은 인간의 이성적 능력의 신성성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칸트의 한계는 이성의 한계를 인식하는 이성 자체에 대한 근원적 부정이 보이지 않는다 는 점이다.

그러한 점에서 칸트는 이성중심주의라는 서양철학의 메인 스트림(main stream)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은 철학자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현대철학에 이르면 철학에 대한 안목 자체가 근본적으로 바뀐다.

모든 철학적 문제 혹은 혼란들을 정신의 본성인 ‘이성’ 안에서 찾고자 하는 기 존의 철학자들과는 달리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혼란의 원인을 그러한 철학 적 사고를 표현하는 ‘언어’에서 구한다.

그에 의하면 철학의 한계는 ‘이성의 한계’가 아니라 ‘언어의 한계’이다.

언어의 본질, 의미, 대상, 기능에 대한 이해 가 잘못 되었기 때문에 철학적 혼란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철학적 혼 란을 인간의 이성(정신)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에서 구한다는 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은 획기적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그의 언어철학은 전기에는 ‘그림이론’으로 후기에는 ‘게임이론’으로 체계화된다.

한편 인도철학의 주류는 불변의 실체이자 순수한 영혼인 아트만(atman)을 신봉하는 정통육파철학이다.

그들에 의하면 세계 전개는 불변의 실체의 전변(轉變)이거나 집적(集積)이다.

여기서 불변의 실체는 본체세계를 구성하는 것이며 실체의 전변이나 집적으로서의 세계는 현상세계이다.

본체세계는 이성(붓디, buddhi)에 의해 파악되는 실재세계인 반면, 현상세계는 지각이나 감각의 대상인 가상세계이다.

이러한 이성중심주의는 서양의 이성중심주의와 별반 다르지 않다.

결국 이성중심주의적 사고는 베다의 신성을 옹호하고 찬 탄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베다는 신들에 대한 찬가이다.

그 찬가는 신성한 언어인 산스크리트어에 의해 표현된다.

따라서 그들에 의하면 언어는 신이었 던 것이다.

고대 인도인들은 베다성전의 전승과 해석을 위해서 음운학과 문법학 및 어원학이 성립되어 언어의 본질과 의미에 관해서 탐구하는 과정에서 파니니를 개조(開祖)로 하는 문법학파가 성립하기에 이르렀다.

다른 한편 인도철학의 비주류로서의 불교는 불변의 실체이자 순수 영혼인 아트만을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이 세계는 아트만의 전변이거나 집적이라는 전변설이나 집적설을 인정하지 않고 다만 요소(다르마)들의 인연에 의해서 구성된다고 하는 인연설[緣起說]을 주장한다.

이들에 의하면 주관을 구성 하는 원리인 아트만을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객관을 구성하는 원리인 브라흐만이나 프라크리티도 인정하지 않는다.

다만 ‘마음의 현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유식(唯識)사상으로 인도불교철학은 완성된다.

일체 나[我]도 없고 존재[法]도 없는, 다만 마음이 만들어낸다는 유식의 관념론을 기반으로 새로운 언어이론을 창출해 내는데 그것이 바로 디그나가(Dignāga, 460~540)의 아포하론(apohavāda)이다.

그리고 디그나가의 아포하론을 비판적으로 완성한 철학자가 다르마키르티(Dharmakīrti, 600~660)이다.

본 논문은 모든 철학적 문제 혹은 혼란을 이성 속에서 구하지 않고 언어 속 에서 추구하는 비트겐슈타인 언어철학과 신적 언어가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 약속의 체계이자 수단 내지 도구로 파악하는 다르마키르티 언어철학의 유사성과 차이를 탐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Ⅱ. 보편 비판

1. 다르마키르티의 보편 비판

인도의 주류철학이든 비주류철학이든 인식을 떠난 존재는 있을 수 없고존재를 여읜 인식도 있을 수 없다는 사유를 공유한다.1)

그래서 그들은 공히 인식[수단]과 [인식]대상을 철학의 주요 탐구대상으로 간주한다.

인식수단이란 프라마나(pramāṇa)이며, 인식대상이란 프라메야(prameya)이다.

각 학파마 다 프라마나의 수2)는 1종·2종·3종 등등으로 나누지만, 인도불교 인식논리학은 직접적 인식인 지각(pratyakṣa, 現量)과 간접적 인식인 추론(anumana, 比量) 2종만을 인정한다.

1) 이러한 생각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 위경생각진시유(爲境生覺眞是有)이다. 이 진술은 ‘대상 이 되어 지각을 낳는 것이 참된 실재’임을 의미한다. 인도적 사유에서 존재와 인식의 분리란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순수존재론, 순수인식론이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정통육 파철학은 인식주체의 절대성과 독존성에 대해 방점을 둔다. 하지만 불교인식 논리학은 인식 주체란 있을 수 없으며 언제나 대상에 의해서 생성된다는 무아론과 연기설의 입장을 통해 그 들의 인식론과 논리학을 구축한다는데 그 독창성이 있다.

2) 인식수단에 대해서 인도철학 학파 간에 의견이 분분하다. 특히 인식수단의 수, 인식수단의 특 징, 인식의 영역, 인식의 결과, 인식의 대상에 대해서 불교인식 논리학파와 인도철학 학파 간 의견을 달리한다. 고대 인도의 유물론적 쾌락주의학파인 차르바카는 지각 1종만을, 바라문교 계의 일파인 상키야학파는 지각과 추론 그리고 증언의 3종을, 바라문교계의 논리학파인 니야 야학파는 지각과 추론 그리고 유추(比定)와 증언의 4종을, 바라문교계의 미망사학파의 일파 인 프라바카라파 미망사학파는 지각과 추론 그리고 증언과 유추 및 요청의 5종을, 미망사학파 의 고파인 바타 미망사학파는 앞의 5종에다 비존재를 더한 6종을 인식수단으로 제시한다. 이 에 대해 불교인식 논리학의 정초자인 디그나가는 그의 주저 󰡔프라마나삼웃차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식수단은 지각과 추론의 2종뿐이다. 왜냐하면 인식대상이 자상과 공상의 2종 뿐이기 때문이다. 자상과 공상 이외에 다른 인식대상은 없다. 자상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지 각이며, 공상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추론임을 알아야 한다.” 인식수단이 1종·3종·4종·5종 ·6종이라고 주장하는 다른 학파와는 달리 디그나가는 2종임을 선언한다. 아울러 인식수단이 2종인 이유는 인식대상이 2종뿐이라는 근거를 제시하여 자기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디그나 가의 인식수단 2종설에 대해 다르마키르티도 전적으로 수용한다.

왜 인식수단이 2종뿐인가 하면 인식대상이 2종뿐이 기 때문이다.

여기서 2종의 인식대상이란 개별상으로서의 자상(自相, svalakṣana)과 보편상 혹은 일반상으로서의 공상(공상, samānyalakṣana)이다. 그렇다면 인도불교인식논리학에서도 보편으로서의 공상의 객관적 실재성을 인정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물을 수 있다.

하지만 다르마키르티는 보편(공상) 의 객관적 실재성에 대한 주장을 다음과 같이 일축한다.

[인식]수단은 2종이다.

왜냐하면 [인식]대상이 2종이기 때문이다.

[즉 대 상은] 인과적 효과성이든가 혹은 인과적 효과성이 아니든가 [둘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눈병에 걸린 눈의 인식에 현현하는] 털 등은 대상이 아니 다.

왜냐하면 [그것은] 대상이라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1송) [덧붙여 말하면, 인식수단이 2종인 것은 그것 이외에 다음과 같은 이유에 의거한다.

즉 인식대상은] 유사한 것이든가 혹은 유사한 것이 아니든가 [둘 중의 하나] 이기 때문이다. 또한 [인식대상은] 언어의 [지시]대상이든가 혹은 언어의 [지 시]대상이 아니든가 [둘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또한 [인식대상은] 다른 동력인(動力因)이 있을 때 앎(dhi)이 존재하든가 혹은 앎이 존재하지 않든 가 [둘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2송) 여기서 인과적 효과성 그것은 궁극적 차원의 존재[勝義有]이며, 다른 것은 일상 언어 차원의 존재[世俗有]이다. 이 둘은 [전자는] 자상(自相), [후자는] 공상(共相)이라 불린다.

(3송) (···) 그 러나 궁극적 차원에서는 개별상인 자상만이 인식대상이다.(53송)3)

3) PVⅡ1, “mānaṃ dvividhaṃ visayadvaividhyat śaktyaśaktitaḥ / arthakriyāyāṃ keśādir na artho ’narthādhimokṣataḥ //” PVⅡ2, “sadṛśāsadṛśatvāc ca viṣayāviṣayatvataḥ /śabdasya anyanimittānāṃ bhāve dhīsadasattvataḥ//” PVⅡ 3, “arthakriyāsamarthaṃ yat tad atra paramārthasat / anyat saṃvṛtisat proktaṃ te svasāmānyalakṣaṇe //” PVⅡ53, “meyaṃ tv ekaṃ svalakṣaṇam.”

다르마키르티에 의하면 인식의 대상은 자상(개별)과 공상(보편)이다.

자상 에 의해 지각(現量)이 형성되고 공상에 의해 분별적 사유(比量)가 생성된다.

그런데 자상과 공상은 어떠한 존재론적 위상을 갖는가라고 했을 때, 자상은 궁극적 차원의 존재 즉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고 공상은 일상 언어 차원의 존 재 즉 개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자상 뿐이다. 또한 그는 궁극적 차원의 존재를 언어로 규정되지 않는, 사유로 한정 되지 않는, 결과를 낳을 수 있는,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인과적 효과의 능력 (power, capacity)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능력이 있는 것만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개념적으로 존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다르마키르티의 생각이다.

그렇게 궁극적 차원의 존재인 자상(개별)을 현실 적 존재(vastu, actual entity)라 하고, 일상 언어 차원의 존재인 공상(보편)을 비 현실적 존재(avastu, non actual entity)라 했던 것이다.

결국 다르마키르티는 일상 언어 차원(세속 차원)에서는 보편으로서의 공 상을 인정하지만 궁극적 차원(승의 차원)에서는 보편(공상)을 인정하지 않는 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인과적 효과의 능력을 구비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보편은 그러한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 하기 때문에 비현실적 존재(avastu)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다르마키르티 철학 에서 보편(공상)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2. 비트겐슈타인의 보편 비판

서양철학은 소크라테스 이래 감각의 대상인 개별 사물에 대한 관심보다 그 개별 사물들이 공통적으로 지니는 어떤 것에 대한 탐구에 치중했다.

여기 서 ‘개별 사물들이 공통적으로 지니는 어떤 것’이란 그 사물이 지닌 본질이자 동류의 사물들에 내재하는 보편이다.

가령 개별 나무들 즉 소나무·잣나무· 참나무·감나무 등은 자기차이성을 본질로 하는 개별적 존재들이지만 ‘나무’ 라는 하나의 낱말로 지시될 수 있는 것은 그 개별자들의 공통하는 본질 즉 나 무임(treeness, 木性)이라는 보편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제 자 플라톤의 저작들은 어떤 개념들의 본질[보편]에 대한 정의로 구성된다.

가 령 󰡔향연󰡕은 ‘사랑’, 󰡔테아이테토스󰡕는 ‘지식’, 󰡔국가론󰡕은 ‘정의’, 󰡔에우튀프 론󰡕은 ‘공경심’, 󰡔리케스󰡕는 ‘용기’라는 개념의 본질을 탐구하고 있다.

이러한 보편[적 본질]을 추구한 플라톤의 철학은 이후의 서구 이성중심주의 철학의 주류를 형성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보편을 추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기 는 하지만, 오류임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철학자들은 동일성·통일성·일반 성 즉 보편에 대한 열망 때문에 공통적 본질이 있다고 간주하기 때문이다.4)

4) 이러한 일반성에 대한 열망 즉 보편에 대한 열망 때문에 언어게임의 원초적 형태들을 간과한 나머지 철학은 정신적 안개로 휩싸인다고 비트겐슈타인은 진단한다. 그는 󰡔청색책·갈색책󰡕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원초적 형태들로부터 새로운 형태들을 점차 덧붙임으로써 복잡한 형태들을 구축할 수 있음을 본다. 이제 우리가 이런 탐구 노선을 취하기 어렵게 만드 는 것은 일반성에 대한 우리의 열망이다. 일반성에 대한 이러한 열망은 특수한 철학적 혼란들 과 연관된 다수의 경향들의 결과이다. 여기에는 -(a) 우리가 보통 일반 용어 아래에서 포섭하 는 모든 실재물에 공통적인 어떤 것을 찾으려는 경향이 존재한다.-우리는 이를 테면 모든 놀 이들에 공통적인 어떤 것이 있어야 하며, 이 공통적 성질(보편)이 ‘놀이’라는 일반 용어를 다양 한 놀이들에 적용하는 것을 정당화해 준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놀이들은 그 구성 원들이 가족 유사성들을 지니는 하나의 가족을 형성한다.” 비트겐슈타인, 이영철 옮김(2006), 41. 객관적으로 공통의 본질 즉 보편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유사성만이 존재한다.

전자는 사유분별의 대상이라면 후자는 지각의 대상이라 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주류철학이 지향해 왔던 동일성·통일성·보편성· 일반성의 추구 대신에 차이성과 다양성을 추구한다. 그는 세익스피어의 󰡔리 어왕󰡕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 즉 “나는 당신에게 차이를 가르칠 것이다.”라는 문구를 표제어로 사용하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했다고 제자이자 벗인 드루리 가 전한다.

비트겐슈타인은 각기 자기차이성을 본질로 하는 개별자들은 공 통의 본질 즉 보편을 지니지 않는다.

왜냐하면 공통의 본질[보편]에 대한 인 식은 지각이 아니라 사유 분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별자들을 자세히 관 찰해 보면(지각해 보면) 유사성이 보인다고 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게임’이라고 부르는 활동들을 생각해 보라. 보드게 임·카드게임·구기게임·격투게임 등등.

이 모두에 공통된 것은 무엇인 가?

- 다음과 같이 말하지 말라 : “이것들에는 공통된 어떤 것이 있음에 틀림 없다. 그렇지 않다면 ‘게임’이라고 불리지 않을 것이다.”

- 대신 이 모두에 공 통된 어떤 것이 있는지 보라.

- 만약 당신이 그 게임들을 본다면, 그 모두에 공통된 어떤 것이 아니라 유사성들, 연관성들, 그리고 이것들의 전체적인 연속을 보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건대 : 생각하지 말고, 보라!5)

5) 비트겐슈타인, 이승종 옮김(2016), 109.

우리가 보통 보드게임, 카드게임, 구기게임, 격투게임 등을 ‘게임’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각각의 게임들에 공통되는 어떤 것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 한다.

그러나 공통된 어떤 것 즉 공통의 본질[보편]은 우리의 구체적인 지각 의 대상이 아니라 사유분별의 대상이다.

그런데 사유분별에 의해서 파악된 대상은 구체적인 리얼한 존재가 아니라 개념적·추상적 존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실로 우리의 지각에 의해 파악되는 것은 게임이라는 낱말에 의해 지 시되는 공통의 본질[보편]이 아니라, ‘유사성들, 연관성들 그리고 이것들의 전 체적인 연속들’ 혹은 ‘크고 작은 유사성들이 겹치고 엇갈린 복잡한 그물망’만 을 보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자들이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려 할 때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야 한다고 일갈한다.

철학자들이 어떤 낱말-지식·존재·대상·자아·명제·이름-을 사용해 서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려 할 때, 우리는 항상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이 낱말은 그것의 제자리인 일상 언어에서 실제로 이런 식으로 사용되는가? 우리가 하는 일은 낱말들을 그 형이상학적 사용에서 그 일상적인 사용으로 되돌리는 것이다.6)

6) 비트겐슈타인, 이승종 옮김(2016), 155-156.

이것은 다음과 같다. 일상 언어에서 “신은 전지전능하다.”라는 진술에서 보통 신의 본질이 전지전능하다고 기술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신은 전 지전능을 본질(보편)로 하는 존재라고 이해한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에 의 하면 이 말은 신의 본질(보편)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신’이라는 말의 문법적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사랑은 영원하다.”, “인간은 이성적 존 재이다.”와 같은 진술들도 비트겐슈타인식으로 해석하면, 사랑이라는 존재 의 본질(보편)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낱말의 문법적 표현으로서 ‘영원’이 언표 된 것이며,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보편)이 이성적 존재가 아 니라 ‘인간’이라는 낱말의 문법적 표현으로서 ‘이성적 존재’가 언표된 것이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일체의 사물들에는 본질이라 불리는 보편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문법적 표현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그는 이러한 관점에서 서양의 주류 이성주의 철학이 견지해 왔던 보편에 대한 관 념을 근본에서 전복시켰던 것이다.

Ⅲ. 언어이론

1. 다르마키르티의 아포하론

아포하론(apohavāda)은 인도불교의 독창적 언어이론이다.

이것은 인도불교인식논리학의 문을 연 디그나가에 의해 정초되고 다르마키르티에 의해 완성된다.

그런데 이 아포하론은 인식논리학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디그나가는 인식수단(프라마나)의 수에 대해 지각(現量)과 추론(比量)의 2종만을 인정한다.

인식수단이 2종인 까닭은 인식대상이 자상과 공상의 2종뿐이기 때문이다.

디그나가는 나아가 지각은 분별이 없는 인식 즉 지각무분별(知覺 無分別)이라 정의한다.

그렇다면 분별(分別)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언어 (nāma)와 보편(jāti) 등과의 결합이다.

따라서 지각은 언어로 규정되기 이전, 보편(적 개념)으로 한정되기 이전의 우리의 경험을 인식하는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자상을 그 자체만이 인식되고 언어표현이 불가능한 존 재라고 했던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지각은 대상에 대한 전체적·긍정적 인 식이라 할 수 있다.

한편 그에 의하면 공상은 ‘타자부정(anyāpoha)’이라는 활동에 의해 분별적 으로 구성된 개념이며, 공상에 의해 생긴 추론 자신도 ‘타자부정’을 본질적 작 용으로 하는 인식수단이다.

다시 말하면 추론이라는 인식수단은 그 대상인 공상의 성격에 의해 한정되기 때문인데, 공상의 본질이 ‘타자부정’이기 때문 에 추론도 ‘타자부정’을 본질로 하고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따라서 추론은 대상에 대한 부분적·부정적 인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인식수단인 추론과 인식대상인 공상이 공히 ‘타자부정’을 본질로 한다는 주장은 획기적인 것 이며 독창적인 것이다.

더더욱 획기적인 것은 언어의 대상도 ‘타자부정’이라 는 디그나가의 주장이다.

자신의 주저인 󰡔프라마나삼웃차야󰡕 제5장 ‘타자부정’에서 언어에 근 거한 인식과 분별에 근거한 추론이 동일한 인식작용이라고 언명한다.

다시 말하면 ‘언어와 의미대상의 관계’는 ‘추론인(推論因, 논증인)과 추론과(推論 果, 논증대상)의 관계’에 상응하는 것이며 그것들은 모두 개념이며 그 본질은 ‘타자부정’이라고 할 수 있다.7)

7) PSV,1, “na pramāṇāntaraṃ śābdam anumānāt tatha hi tat/ kṛtakatvādivat svārtham anyāpohoena bhāṣade // ”

가령, 연기(추론인)를 보고 불(추론과)을 추론 하는 과정과 ‘소’라는 말을 근거로 소라는 말의 의미대상을 언표 하는 과정은 동일하다.

아울러 그 본질은 모두 ‘타자부정’에 근거한다.

즉 연기라는 추론인도 연기가 아닌 것이 아닌 것을 지시하며 연기가 아닌 것이 아닌 것에 근거 하여 추론되는 불도 불이 아닌 것이 아닌 것이며, 마찬가지로 ‘소’라는 낱말도 긍정적 대상으로서의 소가 아니라 ‘소가 아닌 것이 아닌 것’을 지시한다는 것 이다.

다시 말하면 실재하는 소가 가진 무한한 양상 모두가 ‘소’라는 낱말에 의해서 표시될 수가 없기 때문에 이 낱말의 지시대상은 개별적인 실재하는 소가 아니라 사유작용에 의해서 개념적으로 구성된 공상(일반상, 보편)이며, 그리고 그 ‘소’라는 낱말은 그 기능으로서 타자부정, 즉 지각된 개체를 비소로 부터 구별하는 것을 갖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된다.8)

디그나가의 아포하론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언명은 “언어는 자신의 대상을 타자부정에 의해서 제시한다.”9)이다. 즉 언어는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대상 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부정에 의해서 한정된 개념적 대상을 지시하 는 것이다.

이 디그나가의 아포하론에 대해 미망사학파의 학장 쿠마릴라는 그의 주저 󰡔미망사·슬로카·바르티카󰡕의 아포하론 장에서 “언어는 실재하 는 보편을 대상으로 그것을 긍정적으로 표시하는 것이다.”10)고 하여 디그나 가의 아포하론과는 다른 언어이론을 제시한다.

8) 赤松明彦(1980), 966.

9) 赤松明彦(1980), 963.

10) 赤松明彦(1980), 963.

예를 들어 설명하면, ‘소’라는 낱말에 의해 지시되는 것은, 디그나가에 의하면 ‘소가 아닌 것이 아닌 것’이라 는 언어의 부정적 활동을 매개로 구성된 공상(보편)인 반면, 쿠마릴라에 의하 면 기체와 한정요소로부터 성립하는 복합체인 소의 보편(우성)이라는 공상 (보편)이다.

그런데 두 사상가 공히 언어의 지시대상은 개체(자상)가 아니라 보편(공 상)이라는 점에서 견해를 같이 하지만, 쿠마릴라는 언어의 기능을 ‘타자부정’ 이 아니라 ‘타자긍정’이라는 긍정적 활동으로 파악하고서 그 긍정되는 대상 인 공상은 객관적으로 실재한다고 하는 실재론을 견지하는 반면, 디그나가 는 언어의 기능을 ‘타자긍정’이 아니라 ‘타자부정’이라는 부정적 활동으로 파 악하고서 그 부정적 활동에 의해 지시되는 공상은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 이 아니라 개념적으로 존재한다고 하는 관념론을 견지한다는 점에서 견해를달리한다.

이렇게 디그나가와 쿠마릴라는 언어의 기능과 언어가 지시하는 대상의 실재성 유무에 대해 견해를 달리하지만, 대상의 지시를 통해 의미가 표현된다는 ‘지시의미론’(reference theory of meaning)을 취한다는 점에서 궤 를 같이 한다.

다르마키르티는 디그나가와 마찬가지로 ‘언어와 의미대상과의 관계’와 ‘추 론인과 추론과의 관계’는 상응한다고 본다.

아울러 언어의 기능을 ‘타자부정’ 으로 파악하고서 그 부정적 활동에 의해 표현되는 공상도 디그나가와 마찬 가지로 개념적 존재라고 하는 점에서 견해를 같이 하지만, 그 언어와 의미대 상과의 관계의 논리적 필연성 및 추론인과 추론과의 논리적 필연성의 존재 론적 근거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디그나가와 견해를 달리한다.

현실적 존재(vastu, actual entity)의 본질을 직접 지각하는 것에 근거해서 분별적 사유가 생긴다.

그 분별적 사유는 실제로는 대상을 가지지 않음에 도 불구하고, 마치 현실적 존재를 대상으로 하는 것과 같이, 같은 결과를 낳 지 않는 여러 개체들로부터의 구별에 근거를 둔 것이다.11)

이 송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현실적 존재의 본질을 직접 지각하는 것 에 근거해서 분별적 사유가 생긴다.’는 것이다. 디그나가는 인식수단으로 지 각과 추론의 2종임을 언급하지만 추론의 발생과정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다.

그에 반해 다르마키르티는 추론이라는 분별적 사유는 반드시 ‘현실적 존재의 본질을 직접 지각하는 것에 근거’한다고 하는 추론의 존재론적 근거 (ontological reason)를 묻고 있다.

추론의 논리적 관계의 타당성을 존재론적 관계의 필연성 속에서 구한다는 점이다.12)

11) PVⅢ 76, “tat svabhāvagrahād yā dhīs tadarthe vā''pyanarthikā | vikalpikā'tat kāryārthabhedanişţhā prajāyate ||”

12) 다르마키르티는 추론이나 언어활동이 유의미하기 위해서 다시 말하면 논리적 필연관계의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추론과 언어가 기반하고 있는 존재의 차원에서 필연성 을 획득해야 한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존재와 존재의 관계는 본질을 매개로 하는 본질적 결 합관계를 맺을 때 이 관계를 토대로 추론과 언어활동이 이루어질 때 목적을 성취할 수 있다. 그 관계를 본질적 결합관계라고 한다. 본질적 결합관계는 2종이 있다. 하나는 인과관계이며 또 하나는 동일관계이다. 인과관계는 불과 연기의 관계이며, 동일관계는 나무와 소나무의 관계이다. 다르마키르티에 의하면 언어와 의미대상과의 관계는 후자 동일관계를 맺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와 그 언어에 의해 표현되는 대상과의 논리적 필연관계를 맺을 수가 있 는 것이다.

그는 추론활동과 더불어 언어 활동도 청자에게 의미 있게 전달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현실적 존재에 근거 해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한다.

그리고 그들 [지식과 언어에 의한 표현활동은] 모두 현실적 존재들의 상 호구별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므로(상호구별에 근거하므로) [그들 활동이] ‘타자부정’을 대상으로 한다고 말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 활동이 그것 에 대응하는 현실적 존재와 간접적으로 결합관계를 갖는 경우 그와 같은 활 동은 그 현실적 존재를 획득하기 위한 기점인 것이다.13)

13) PVⅢ 80, “sa ca sarvaų padārthānām anyonyābhāvasaņśrayaų / tenānyāpohavişayo vastulābhasya cāśrayaų //”

따라서 다르마키르티의 아포하론은 디그나가의 그것을 계승하지만, 언어 적 활동이 인과적 효과의 능력 내지 결과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행위의 궁극 적 대상인 현실적 존재들에 기반해야 만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디 그나가의 아포하론을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타자부정’이라는 언어의 활동에 의해서 표현되는(지시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해 디그나가의 아포하론과 다르마키르티의 아포하론 의 결정적 차이가 존재한다.

디그나가가 ‘언어는 자신의 대상을 타자부정에 의해서 제시한다.’라고 했을 때 언어가 타자부정이라는 활동을 통해서 표현 되는 것(지시되는 것)이 존재하는 어떤 대상 즉 공상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쿠마릴라는 그 공상이 객관적으로 실재한다고 했고, 디그나가는 주관적으로 존재한다고 했다.

이렇게 객관적으로 실재하든 주관적으로 존재하든 간에 그 존재하는 대상을 지시함으로써 언어의 의미가 발생한다고 하는 점에서 지시의미론을 두 사상가 모두 견지하는 반면 다르마키르티는 이러한 대상 지시에 의한 의미 발생이라는 지시의미론을 넘어서 언어의 의미는 언어공동 체에서 언어가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따라서 그 의미는 다양하게 주어진다는 견해 즉 언어 사용의미론을 견지한다.

그는 말한다.

[그러나 그 언어표현은] 실재하는 대상을 가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실재 대상들은 [다른것과] 융합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 속에서 여러] 차이도 존재 하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결과 [혹은 같은] 원인을 갖는 것에 의해서 다른 여러 존재들로부터 구별되는 일군의 실재 대상이 그 모든 언어표현의 공통 의 근거이다. 그리고 언어는 바라지 않는 것을 제거함으로써 사람[청자]를 바라는 개체(대상)로 향하게 하기 때문에 타자부정을 대상영역으로 한다고 말해지는 것이다.14)

14) PVSV, 34.23-35.4, “asadartho api / arthānāṃ saṃsargabhedābhāvāt / tasya sarvasya tatkāryakāraṇ atayā anyebhyo bhidyamānā arthāḥ samāśrayo / dhvaniś ca aniṣṭaparihāreṇa pravartayati ity any āpohaviṣaya uktaḥ /”

“언어는 바라지 않는 것을 제거함으로써 사람(청자)을 바라는 개체(대상) 로 향하게 하기 때문에 타자부정을 대상 영역으로 한다.”에서 ‘바라지 않는 것’ 은 디그나가의 타자부정의 대상영역을 다르마키르티가 해석한 것이다.

디그 나가가 말하는 타자부정(anya apoha)에서 부정(apoha)의 대상은 타자(anya) 이며, 이 타자는 개념의 대상으로서 공상일 것이다.

이 타자의 부정에 의해서 남겨진 대상인 공상을 언어가 지시함으로써 의미가 생성된다는 것이 디그나가의 아포하론의 골자이다.

이러한 디그나가의 아포하론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언어는 공상을 지시함으로써 의미가 생성된다는 ‘지시의미론’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그런데 다르마키르티는 ‘타자부정’에서 부정의 대상으로서의 타자를 고정 된 존재로서의 공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바라지 않는 것’, ‘착오를 한 증 익(假託)’, ‘의혹’, ‘동일한 결과를 낳을 수 없는 것’, ‘동일한 목적을 실현시킬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그것을 부정하여 ‘바라는 것’을 성취하게 하고, ‘착 오를 한 증익이나 의혹’을 해소하고, ‘동일한 결과’를 도출하게 하고, ‘동일한 목적’을 실현시키게 하는 활동을 수행하게 하는 것이 언어라고 보았던 것이 다.

즉 다르마키르티는 다양한 존재들이 다양한 국면에서 부정적 활동을 행 하는 도구로 사용되면서 의미가 다양하게 생성된다고 하는 사용의미론(the use theory of meaning)을 피력하고 있다.

요컨대 다음과 같이 사용의미론에 근거하는 다르마키르티의 아포하론을정리할 수 있다.

“타자부정은 다르마키르티 자신의 언어로 vyavaccheda, parihāra, vyāvṛtti, viveka 등으로 환언되며 다른 증익이나 의혹의 배제 내지는 다른 존재로부터의 구별에 의한 대상의 한정, 혹은 실재의 측에서 다른 존재 와의 차이를 의미한다. 부정(apoha) 자체는 다른 존재를 부정한다는 기능을 가리키지만, 그것이 어떠한 문맥에서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따라, 또한 ‘무엇’ 을 부정하는가에 따라 상호 관련은 가지면서도 직접적인 의미의 차이가 있 을 것이다.”15)

2. 비트겐슈타인의 그림이론과 게임이론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진다.

전기의 대표적 저서는 󰡔논리철학논고󰡕이며, 후기의 대표적 저서는 󰡔철학적 탐구󰡕이다.

마찬가지로 그의 언어이론도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지는데 전기의 언어이론은 ‘그림이론 (picture theory)’이라 하고 후기의 언어이론은 ‘게임이론(game theory)’이라 한 다.

비트겐슈타인은 전기 철학에서 철학적 문제는 언어의 논리적 형식을 잘 못 이해한 결과 발생한 것이라 진단한다. 다시 말하면 종래의 철학은 언어의 논리가 허용하는 한계를 넘어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는 시도 때문에 혼란이 야기되었다고 진단한다.

“그는 새로운 철학은 우리가 사고할 수 있는 것과 사고할 수 없는 것의 한계를 명확히 설정해야 하며, 여기서 사 고할 수 있는 것은 곧 말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하며, 사고할 수 없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16)

15) 福田洋一(2011), 70.

16) 박병철(2014), 84.

그렇다면 사고의 주체인 ‘나’와 사고의 대상인 ‘세계’는 전혀 이질적 존재인 데 이 두 존재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다시 말하면 나는 세계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세계는 어떻게 해서 나에게 알려질 수 있는가?

이러한 물음은 전 기 비트겐슈타인 자신이 자신에게 질문했던 것이다.

그는 나의 정신 속에 세 계가 비친다는 관념론적 전략도, 세계를 구성하는 근원적 실재를 근거로 설 명하려는 유물론적 전략도 폐기한다.

다만 그는 세계와 사람의 마음을 연결는 매체로서의 ‘언어’에 주목한다.

즉 나와 세계를 정신이나 물질을 매개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매개로 설명하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언어 와 세계는 이질적인 것이지만 서로 대응하는 구조를 갖는다.

언어로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언어가 세계를 비추는 거울과도 같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 언어는 세계를 반영하는 거울이었던 것이다.

‘언어는 세계를 반영하는 거울’이라고 하는 것은 달리 말하면 ‘언어는 세계에 대한 그 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논고󰡕에서 언어를 가지고 세계에 대한 정치한 그림17)을 그리기 시작한다.

논고의 유명한 첫 구 절은 다음과 같다.

세계는 일어나는 모든 것이다.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이지, 사물들의 총 체가 아니다. 세계는 사실들로 나뉜다. 일어나는 것, 즉 사실은 사태들의 존 립이다. 사태는 대상들(실물들, 사물들)의 결합이다.18)

17) 비트겐슈타인의 전집 대부분을 번역하여 학계에 비트겐슈타인의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 게 한 연구자 가운데 한 사람인 이 영철은 ‘그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림이란 사 태들의 존립과 비존립을 표상하는 모형이다. 이 모형은 사태를 이루는 대상들에 대응하면서 대상들을 대표하는 어떤 요소들이 특정한 방식으로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하나의 사실이라 는 데 있다. 그림의 요소들이 대상들과 짝지어진 관계가 그림의 모사 관계이고, 대상들이 그 림의 요소들처럼 서로 관계 맺고 있을 가능성이 그림의 모사 형식이다. 그림이 현실을 (옳게 건 그르게건) 모사할 수 있는 것은 그림이 현실과 이 모사 형식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그림 은 현실과 공유된 모사 형식을 모사할 수는 없다.) 그림의 모사 형식은 공간적이거나 색채적 이거나 등등 다양할 수 있지만, 모든 그림이 현실과 공유해야 하는 모사 형식 즉 현실의 형식 은 논리적 형식이다. 모사 형식이 논리적 형식인 그림을 논리적 그림이라고 하며, 모든 그림 은 또한 논리적 그림이기도 하다. 그래서 모든 그림은 논리적 공간 속에 들어 있는 가능한 하 나의 상황, 즉 사태들의 존립과 비존립의 가능성을 묘사한다. 그림이 묘사하는 것이 그림의 뜻인데, 이 뜻은 그림의 참 또는 거짓과는 상관없이 모사 형식을 통해 묘사된다. 그림의 진위 는 현실과의 일치 또는 불일치에 있고, 이는 오로지 그림만으로는 알 수 없고 현실과 비교해 보아야 알 수 있다.” 이영철(2012), 194.

18) 비트겐슈타인, 이영철 옮김(2011), 19-20.

즉 언어의 구조는 낱말과 낱말들의 모임인 요소명제 그리고 요소명제들의 모임인 복합명제 등이며, 세계의 구조는 대상과 대상들의 모임인 사태(원자 사실) 그리고 사태들의 모임인 복합사실 등이다.

낱말은 대상의 그림이고, 요소명제는 사태들의 그림이며, 복합명제는 복합사실에 대한 그림이다.19)

그 는 계속해서 요소명제와 사태들 사이의 그림관계의 성립근거를 탐색한다.

그림에서 그림의 요소들은 대상들을 대표한다(2.131).

그림은 그 요소들 이 특정한 방식으로 서로 관계를 맺는다는 데 있다(2.14).

그림의 요소들이 특정한 방식으로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은 실물들이 서로 그렇게 관계 맺고 있다는 것을 표상한다(2.15).

그림과 모사된 것 속에 무엇인가 동일한 것이 있어야 그 하나는 다른 하나의 그림이 될 수 있다(2.161).

그림은 현실 의 모형이다(2.12) 명제는 현실의 그림이다.

명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바와 같이 현실의 모형이다(4.01).20)

19) 현대 언어학의 지시의미론은 대상, 대상의 속성, 사태를 지시하는 언어표현을 다음과 같이 분류하고 있다. 고유명사의 의미는 대상인 개체를 지시, 보통명사나 형용사 그리고 자동사 의 의미는 개체들의 집합을 지시, 타동사의 의미는 순서가 있는 개체항들의 집합을 지시, 문 장의 의미는 형태소나 단어 및 구 등의 의미합성으로 기술한다. 신수송(2005), 178.

20) 비트겐슈타인, 이영철 옮김(2011), 25, 26, 41.

가령, ‘나무’라는 말은 세계의 단위요소인 나무라는 대상을 지시하며, ‘나무 는 푸르다.’라는 문장은 어떤 단위조직의 나무가 존재하는 어떤 사태를 지시 하며, ‘해가 지고 달이 뜬다.’와 같은 복합명제는 ‘해가 진다’와 ‘달이 뜬다’는 복합사실을 지시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언어의 의미는 세계 내의 대상을 지 시할 때 생긴다는 언어이론은 언어 지시의미론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전기의 언어이론인 그림이론은 이러한 지시의미론에 기반해 있다고 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사에서 언어지시 의미론의 표본을 아우구스티누스의 언어이론에서 구한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을 제시하고 있는 󰡔철 학적 탐구󰡕의 첫 구절은 다음과 같이 아우구스티누스를 언급하는 것으로 시 작한다.

어른들이 어떤 대상의 이름을 말하고 동시에 그것을 향해 몸을 돌렸을 때, 나는 이를 보고서 그들이 그것을 지칭하려 했을 때 낸 소리가 그 대상을 지시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것을 그들의 몸짓들, 즉 모든 사람의 자연 언어를 통해 추측하였습니다. 이 자연 언어는 얼굴 표정, 눈 짓, 손발의 움직임, 어조 등을 통해서, 무언가를 갈망하거나, 고집하거나, 거절하거나, 기피할 때 일어나는 마음의 느낌들을 나타내는 언어입니다.

이에 따라 나는 사람들이 다양한 문장의 특정한 자리에서 낱말들을 반복해 말하는 것을 들으며, 점차 그 낱말들이 어떤 사물들을 지시하는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 입이 이 기호들에 익숙해지자 나는 그것들을 사용 해 내가 바라는 것들을 표현하게 되었습니다.21)

21) 비트겐슈타인, 이승종 옮김(2016), 28.

‘낱말들이 어떤 사물들을 지칭하는지 이해하는 법’이라는 언급은 언어의 의미는 대상을 지시할 때 형성되는 것이며, 이러한 언어 지시의미론은 언어 의 본질에 대한 특정의 유일한 그림이 아니라 일반적 그림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한다.

언어는 대상을 지시할 때 의미가 발생한다는 것은 언어 와 대상이 일대일 대응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리고 그 언어는 대상의 본 질을 지시하기 때문에 언어를 통해 우리는 대상을 안다는 것이다.

비트겐슈 타인은 이 언어지시 의미론을 틀렸다고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의미라는 것 을 고정되어 있다고 전제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본다.

그는 언어가 단순히 대 상을 지시하는 협애한 도구가 아니라 언어는, 언어를 말하는 것은 활동이며 삶의 형식의 일부라고 언명한다.

이 활동으로서의 언어는 일정한 규칙이 있 는 게임이며 언어를 가지고 게임을 하듯이 우리는 언어공동체에서 사람들과 소통하고 세계를 이해해 간다는 것이다.

그는 언어의 의미는 언어게임에 참 여할 때 생성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다양한 맥락과 상황에 따라 같은 언어라 고 해도 다양한 다른 의미들이 생성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언어 사용의 미론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후기 저서인 󰡔철학적 탐구󰡕에서 다양한 언어게임 을 제시하고 있다.

명령하기 그리고 명령대로 행하기, 대상을 본대로 혹은 측정한 대로 기 술하기, 묘사(스케치)에 따라 대상을 만들기, 사건을 보고하기, 사건에 관해 서 추측하기, 가설을 세우고 시험하기, 실험의 결과를 도표와 다이어 그림 으로 묘사하기, 이야기 지어내기 그리고 읽기, 연극하기, 윤무게임하기, 수 수께끼 알아맞히기, 농담하기, 이야기하기, 응용계산문제 풀기,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번역하기, 부탁하기, 감사하기, 저주하기, 인사하기, 기도하 기22) 여기서 ‘언어게임’이라는 낱말로 언어를 말하는 일이 어떤 활동의 일부 또 는 삶의 형식23)의 일부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다.24)

언어가 단순 히 어문론이나 문법학의 차원에서 대상을 지시하는 수단이라는 좁은 의미가 아니라 삶의 공동체 특히 언어를 매개로 소통하는 언어공동체 속에서 활동 을 매개하는 넓은 의미에서의 도구라고 비트겐슈타인은 생각한다. 이렇게 언어공동체의 언어게임에 주체적으로 참여하여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언어 의 의미가 생성된다고 하는 것이 언어 사용의미론이다.25)

22) 비트겐슈타인, 이승종 옮김(2016), 55.

23)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삶의 형식은 아주 중요한 개념이다. 포유류는 외부의 물리적 타격이 나 내적인 질병으로 인해 고통이 발생할 때 고통스러워하면서 얼굴을 찡그린다든지 울부짖 는다든지 소리를 지른다든지 하는 통증행위를 드러낸다. 이러한 통증행위는 모든 포유류가 보편적으로 드러내는 통증행위이다. 이것을 포유류 삶의 형식이라 한다. 그런데 인간은 이 러한 비언어적 통증행위를 할 뿐만 아니라 ‘아프다’라고 통증언어행위를 발화한다. 이러한 언어적 통증행위는 언어를 사용하는 어떤 집단이나 민족이든 모두 언어적 통증행위를 표출 한다. 이것은 인간 특유의 삶의 형식이라고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삶의 형식을 자연사와 결 부시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때로 이렇게 말한다. 동물들은 정신 능력이 없기 때문 에 말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다음을 의미한다. ‘동물들은 생각하지 않는다. 말을 하 지 않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동물들은 그저 말을 하지 않을 뿐이다. 또는 우리가 언 어의 가장 원초적인 형식을 제외한다면-동물들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표현이 더 낫겠 다-명령하고, 질문하고, 이야기하고, 잡담하는 일은 걷고, 먹고, 마시고, 노는 일과 마찬가지 로 우리 자연사의 일부이다.”[비트겐슈타인, 이승종 옮김(2016), 57] 인간의 언어능력이 무슨 특별한 대단한 능력이 아니라 특수한 인간 공동체를 영위해 가기 위한 원초적 행위로서의 언어라는 도구가 필요한 것일 뿐이다. 사자와 같은 다른 포유류의 공동체는 언어가 없이도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내적인 힘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언어를 사용할 능력 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필요가 없기 언어를 사용하지 않을 뿐이다.

24) 비트겐슈타인, 이승종 옮김(2016), 54.

25)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적 탐구에서 언어 사용의 의미를 기술한 섹션은 다음과 같다. “이 언어 의 낱말들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 그것들의 사용 방식에서가 아니라면, 그것들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나는 어떻게 보일까? 그리고 우리는 실로 그 낱말들의 사용을 이미 기술했 다.(10) ‘의미’란 낱말을 이용하는 경우의 많은 부류에 대해서 비록 그 모든 경우에 대해서는 아닐지라도 우리는 이 ‘의미’란 낱말을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즉, 한 낱말의 의미는 언어에 서의 그것의 사용이다. 그리고 때때로 한 낱말의 의미는 그 담지자를 가리킴으로써 설명된 다.(43) §432.

모든 기호 각각은 자체로는 죽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무엇이 그것에 생명을 주 는가?―사용에서 그것은 산다.(432)” 이에 대해 신상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논고󰡕에 서 어떤 낱말의 의미는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제 언어 놀이에 등장하는 언 어의 그림은 추상적인 기호들로 이루어진 체계로서의 언어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화자들이 채택하고 있는 도구, 실천적 관행으로서의 언어이다. 언어 놀이로서의 언어는 화 자의 비언어적인 활동과 결코 분리되어 생각될 수 없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어떤 표현의 의 미는 언어를 구성하고 있는 언어 놀이의 맥락 속에서 그것들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하나의 언어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언어를 사용할 줄 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언어의 사용 즉 언어적 활동이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이다. 언 어는 일상적인 삶의 조건과 상황 하에서 벌이는 인간의 활동, 즉 인간의 전체 삶의 양식 안에 서 이루어지는 그것의 쓰임을 통하여 의미를 획득한다.” 신상규(2004), 103.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언어철학은, 의미론의 관점에서 말하면, 언어 지시의미론을 포괄하면서 언어 사용의미론에로 확대된다.

Ⅳ. 언어와 의미대상과의 관계

1. 다르마키르티의 언어와 의미대상과의 관계

다르마키르티는 디그나가와 마찬가지로 언어의 본질을 ‘타자부정’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타자부정’이라는 활동에 의해 지시되는 대상은 무엇인가?

다 시 말하면 언어에 의해 지시되는 대상은 무엇인가?

인도철학 일반에서 언어 의 지시대상에 관한 입장은 크게 둘로 나뉜다.

하나는 “언어는 보편(ākṛti)을 지시한다.”고 하는 보편지시설과 또 하나는 “언어는 개체(vyakti)를 지시한 다.”는 개체지시설이다.26)

26) 服部正明(1989), 73.

우선, 디그나가는 “언어는 개체를 지시한다.”는 개체지시설에 대해 개체가 무수히 존재하기 때문에 언어는 개체를 지시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한편 다 르마키르티는 디그나가와 같이 언어의 개체지시설을 비판하는데, 그 비판의 논거는 다음과 같다.

어떤 언어를 사용하여 언어로 표현할 때, 이전에 그 언어가 언어에 의한 사회적 약속이 이루어질 때, 이전에 존재한 것과 같은 개체가 계속해서 존 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언어에 의한 사회적 약속은 개체에 대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27)

반론의 핵심은 개체가 존속하는 기체가 아니라 찰나멸 하는 현실적 존재 라는 것이다.

찰나멸하는 현실적 존재는 지각의 대상이지 추론이나 언어의 대상일 수가 없다.

아카마쓰에 의하면 디그나가의 반론은 개체의 ‘공간적 개 별성’에 근거한 것이라고 한다면 다르마키르티의 반론은 개체의 ‘시간적 개 별성’에 근거한 것이라 평가한다.28)

다음으로 디그나가는 “언어는 보편을 지시한다.”는 보편지시설에 대해 “‘존재(sat)’라는 낱말의 지시대상이 ‘존재성(satta)’이라는 보편이라고 한다면 ‘실체가 존재한다(sad dravyam)’, ‘속성이 존재한다(san guṇaḥ)’, ‘운동이 존재한 다(sat karma)’ 등의 문장에서 보이는 두 말의 동격관계(sāmānādhikaraṇya)가 성립하지 않는다.”29)고 하여 언어는 보편을 지시한다는 보편지시설을 부정 한다.

27) PVⅢ 92, “śabdāų saņketitaņ prāhur vyavahārāya sa smŗtaų / tadā svalakşaňaņ nāsti saņketas tena tatra na //”

28) 赤松明彦(1980), 984-985.

29) 디그나가는 타자부정이라는 입장에 4종의 대상의 대상이 언어의 지시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프라마나삼웃차야󰡕의 5장 아포하론에서 논술한다. 디그나가가 부정하는 4종의 대상 은 다음과 같다. 첫째 모든 특수(개별자), 둘째 보편, 셋째 결합, 넷째 보편을 지닌 것 등이다. 디그나가는 이들 하나하나를 부정하고 있다. 上田 昇(2001), 241.

이것을 풀어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문장에서 동격관계에 있는 두 낱말은 동일한 기체를 표시한다. 예를 들면 ‘그는 바라문이다(sa brāhmaṇaḥ)’ 라고 말할 경우 동격관계에 있는 ‘그(saḥ)’와 ‘바라문(brāhmaṇaḥ)’이 표시하는 것은 존재론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그런데 ‘sat’가 표시하는 것이 ‘보편(satta)’ 이라면 그것은 그 보편 안에 포괄되는 개개의 것을 나타내는 실체(dravya), 속 성(guṇa), 운동(karma)과 동격일 수가 없다.

그 경우에는 실체의 존재성 (dravyasya satta) 등의 경우처럼 두 말 사이에는 격어미의 상위(dravyasya는 속 격, satta는 주격)가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실체가 존재한다(sad dravyam)’ 등의 표현이 사용된다. 따라서 언어는 보편을 표시한다는 설도 타당하다고 인정할 수가 없다.”30)

한편 다르마키르티는 디그나가와 같이 언어 의 보편지시설을 비판하는데, 그 비판의 논거는 다음과 같다.

언어가 개체를 표시하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은 언어로 표현될 때 발화되는 언어에 근거해서 효과적 작용을 행하는 능력 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 그와 같은 효과를 달성하기 위해서 행동을 개시할 것이다. 따라서 능시자(단어들)는 대상들에 대해서 사용되는 것이다.

그 경 우 보편은 효과적 작용을 행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보편도 언어의 표시 대상=사회적 약속의 대상은 아니다.31)

디그나가가 보편지시설을 부정하는 주장의 근거는 ‘문장의 이론적 구조의 측면’에서 논하지만, 다르마키르티는 ‘언어 사용의 실제적인 측면’에서 논하 고 있다.32)

그렇다면 언어와 그 지시대상과의 관계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여기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언어와 지시대상과의 관계를 본질에 근거한 것 즉 ‘본질적 결합관계’라 보는 입장과 또 하나는 언어와 지시대상과의 관계를 사 회적 약속에 근거한 것 즉 ‘인위적 관계’로 보는 입장이다.33)

30) 三枝充悳, 심봉섭 옮김(1996), 128.

31) PVⅢ 93-94, “api pravarteta pumān vijñāyārthakriyākşamān / tat sādhanāyetyartheşu saņyojyante'bhidhākriyāų // tatrānarthakriyāyogyā jātis tadvānalaņ sa ca / sākşān na yojyate kasmād ānantyāccedidaņ samaņ //”

32) 赤松明彦(1980), 985.

33) 服部正明(1989), 77.

인도의 정통육 파철학에 준해서 말하면 전자의 입장을 견지하는 파는 문법학파와 미망사학 파이며, 후자의 입장을 견지하는 파는 바이세시카학파와 니야야학파이다.

문법학파는 언어가 무시이래로 항상 같은 대상의 관념을 낳기 때문에 언어 는 본질적으로 대상과 결합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미망사학파도 베다의 언어를 대상과 본질에 근거해서 결합해 있기 때문에 지각이나 그것에 근거한 추론이라는 인식수단에 의해서 인식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한다.

요컨대 언어와 대상과의 결합관계는 본질적인 것이지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사회적 약속에 의해 결합관계를 갖 는다면 어떤 사람이 언어를 사용할 때 약속관계를 설정한 주체인 작가가 동 시에 기억되어야 할 것이지만, 그와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미망사학 파의 논사는 반론한다.34)

반면 니야야학파는 대상이 언어와 가까이에 있는 경우에 ‘밥’이라고 말하 면 입에 밥이 가득하거나 ‘불’이라고 말하면 입이 불탄다든지 하거나 ‘칼’이라 고 말하면 입이 베인다든지 하지 않기 때문에, 아리아인이 ‘소’(gauh)라는 말 로 표시하는 대상을 이방인이 다른 말로 표시하는 것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언어와 대상의 본질적 결합관계는 성립할 수 없다고 반론한다.35)

그런데 인도불교논리학의 다르마키르티는 언어의 대상과의 결합은 사회적 약속(인위적인 관계)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니야 야학파와 입장을 같이한다.

다시 말하면 언어와 의미대상과의 관계는 본질 적으로 결합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약속에 의해 인위적 자의적으로 규정된 다는 것이다.

다르마키르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또한 [언어와 그 대상 간에] 본질적(본래적) 관계는 없다. 왜냐하면 [만약 본질적(본래적) 관계가 있다면 사회적 약속을 알지 못해도 단지 언어를 듣 는 것만으로 대상 그것을] 저절로 인식한다는 오류를 범하지는 않기 때문이 다.36)

미망사학파에 의하면 언어와 그 대상과의 관계는 사회적 약속에 의해 인 위적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과거로부터 이미 정해진 것이다.

따 라서 언어와 대상 사이에는 본질적(본래적) 관계가 존재한다.

하지만

“만약 언어와 대상의 관계가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본래적) 관계라면 언어 의 의미를 배울 필요가 없다. 다만 언어를 듣는 것만으로 그 의미대상을 파악 할 터이다. 그러나 현실에는 그와 같은 것은 경험되지 않는다.”37)

34) 服部正明(1989), 77.

35) 服部正明(1989), 78.

36) PVⅡ132-2, “na ca anuditasambandhaḥ svayaṃ jñānaprasaṅgataḥ //”

37) 戶崎宏正(1985), 213.

따라서 언어와 의미대상 사이에는 사회적 약속에 의한 인위적 관계가 존재한다.

2.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와 의미대상과의 관계

비트겐슈타인은 전기 언어철학에서 언어는 세계의 그림이라는 언어 그림 이론을 제시한다.

세계는 일어나는 모든 것이며, 일어나는 것은 사실이다. 따 라서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이지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어나는 모든 것이자 사실들의 총체인 세계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 앎 (인식)의 수단 즉 프라마나는 무엇인가? 그에 의하면 언어이다.

나와 세계는 이질적 존재지만 내가 세계를 알고 이해하는 것은 신비적인 능력을 통해서 가 아니라 언어를 매개로 해서이다.

역으로 말하면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면 나는 세계를 결코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언어를 매개로 세계를 안다는 것은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다름 아닌 세계의 구조와 언어의 구조가 유사하기 때문이다.

세계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인 대상들과 대상들의 결합인 사태들 그리고 사 태들의 결합인 사실들로 구성된다.

또한 언어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인 낱말 들과 낱말들의 결합인 요소명제들 그리고 요소명제들의 결합인 복합명제들 로 구성된다.

복합명제와 사실, 요소명제와 사태, 낱말과 대상들이 일대일 대 응하듯 대응한다. 즉 세계와 언어는 서로 대응한다는 것이다.

가령 ‘검은 고 양이가 문밖에 있다.’라는 명제는 방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문밖에 있는 고양 이를 보고서 기술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누군가에게 전달할 때 도 ‘검은 고양이가 문밖에 있다.’라고 표현한다.

그러면 상대도 검은 고양이 가 문밖에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이것은 마치 화가가 문밖에 있는 검은 고양이를 그림으로 묘사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화가가 어떤 사실들을 그림으로 그리듯, 우리는 언어라는 도구 를 통해 세계를 그린다고 하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그림이론이다.

낱 말은 대상에 대한 그림, 요소명제는 사태에 대한 그림, 복합명제는 사실에 대 한 그림, 즉 언어는 세계에 대한 그림이다.

이 그림이론은 언어는 대상을 지 시함으로써 의미를 표현한다는 언어 지시의미론을 전제한다.

결국 비트겐슈 타인의 전기 언어철학인 그림이론에서 언어의 대상은 대상, 사태, 사실, 세계 라고 할 수 있다.

언어가 대상을 지시함으로써 의미가 발생한다고 했을 때 그 지시의 대상 은 대상의 본질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언어는 대상의 본질을 지시할 때 그 의미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언어와 의미대상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언어는 본질을 매개로 대상과 결합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본 질을 지시하는 언어를 통해 우리는 대상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따라 서 언어와 지시대상과의 관계는 ‘본질적 결합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 은 의미의 고정성을 전제한 것이다.

즉 모든 사물들에는 공통의 본질이 존재 하고 그 본질을 반영하는 언어가 결합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언어 그림이론을 통해서 철학적 혼란이나 철학적 문제를 모두 해 결 해소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해 했던 비트겐슈타인의 자만은, 일상 언어 사 용을 차분히 관찰하면서 자신의 그림이론은 모든 언어 현상을 설명할 수 있 는 유일한 이론이 아니라 극히 특수한 어떤 하나의 언어현상을 설명하는 일 반적 이론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즉 그는 언어의 의미와 대상의 이해는 어떤 정신적 대상이나 물리적 대상을 지시하는 이름이 아니며 아울 러 그것들을 지시하지 않는다고까지 생각했다.38)

그는 어떤 것의 ‘의미’에 대 해 다음과 같이 언표 한다.

우리가 ‘언어에서 모든 낱말은 각각 어떤 것을 지시한다.’라고 말할 때, 어떤 구별을 하려는지 정확하게 설명하지 않는다면 아직까지는 아무것도 말한 것이 아니다.39)

비트겐슈타인은 낱말과 낱말에 의해 명명되는 대상과의 관계는 고정된 본 질에 의해서 연결된 신비스럽고 절대적인 하나의 관계만이 있는 것이 아니 라고 언명한다.40)

38) 이영철(2016), 209.

39) 비트겐슈타인, 이승종 옮김(2016), 41.

40) 비트겐슈타인 연구자 중 한 사람인 핏처는 언어와 의미대상의 관계가 인위적인 것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는 낱말을 - 종이 위의 잉크 기호를- 바라본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대 상이나 사람 (그 말에 의하여 명명되는 사물)을 바라본다.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하나가 다 른 것의 이름이 될 수 있으며 어떻게 그 둘이 연관되는지에 대해서 당황해 한다. 그것들 사이 의 관련은 아주 신비스러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신비는 꿰뚫을 수 없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물의 본성 속에 있는 ‘존재론적 신비’가 아니다. 그것은 철학자로서의 우리가 그 문 제를 보는 추상적 방식에 의하여 생겨난 인위적인 것이다.” 핏처, 박영식 옮김(1987), 307.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낱말과 대상 사이에는 하나의 관계가 아니라, 우리가 낱말이라 부르는 소리나 문자의 용법만큼 많이 존재한다.41)

41) 조지 핏쳐, 박영식 옮김(1987), 306.

이러한 관계의 다양성에 의해 의미가 다양하게 표현된다는 것은, 언어의 의미는 ‘지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용’에 있다는 그의 후기 언어철학의 필 연적 귀결이다.

언어와 대상의 관계는 본질적 결합관계를 갖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약속에 따라 그 언어공동체 내에서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따라 다양 한 결합관계를 갖는다고 하는 것이 후기 언어철학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그의 후기 언어철학에서 언어와 의미대상 사이의 관계는 사회적 약 속에 의한 인위적 관계임을 알 수 있다.

Ⅴ. 결론

이상의 논의를 토대로 종합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서양의 철학이나 인도의 정통육파철학은 이성(붓디)을 중심으로 세 계를 파악하려는 이성중심주의가 주류를 이룬다.

이성(붓디)은 개별 사물의 차이성을 인식하는 기제가 아니라 개별 사물들의 동일성을 파악하는 수단이 다. 동일성에 대한 인식은 개별자들 속에는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본질이 있다 는 것을 전제한다. 이렇게 개별자들 속에 내재하는 본질이 바로 ‘보편’이다. 이 보편이 객관적으로 실재한다고 하면 실재론이 되고, 관념 속에 존재한다 고 하면 관념론이 된다. 하지만 다르마키르티와 비트겐슈타인은 궁극적 실 재는 이성(붓디)에 의해 파악되는, 동일성을 본질로 하는 보편이 아니라 자기 차이성을 본질로 하는 개체만이 존재한다는 입장을 공유한다.

보편은 지각이 아닌 분별적 사유의 대상(다르마키르티)이며, ‘생각하지 말고 보라’에서의 ‘생각’(비트겐슈타인)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존재론을 피력한다는 점에 서 두 사상가의 사유의 유사성이 있다.

둘째, 인도불교의 독창적 언어이론인 아포하론은 디그나가에 의해 정초되 고 다르마키르티에 의해 완성된다.

디그나가 당대 ‘언어는 실재하는 보편을 대상으로 그것을 긍정적으로 표시하는 것’이라는 언어이론이 대세를 점하는 학문적 상황에서 디그나가는 ‘언어는 자신의 대상을 타자부정에 의해 표현하 는 것’이라는 아포하론을 표명한다. 전자는 언어의 본질 혹은 기능을 ‘타자긍 정’으로 파악하며 이 때 긍정의 대상인 타자는 각 개별자들을 하나로 포괄하 는 객관적 실재인 보편(공상)으로 간주하는 한편, 후자는 언어의 본질 혹은 기능을 ‘타자부정’으로 인식하며 이때 부정의 대상인 타자는 동류와 이류의 존재로부터 부정되는 차이로서 주관적 개념적으로밖에 존재하지 않는 보편 (공상)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두 사유체계 모두 언어의 의미는 보편(공상)을 지시함으로써 표현된다는 언어 지시의미론을 견지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그런데 다르마키르티는 언어의 본질 혹은 기능을 디그나가와 마찬가지로 ‘타 자부정’으로 파악하는 아포하론을 계승한다.

하지만 그는 부정의 대상으로서 의 타자를 존재로서의 보편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인과적 효과성을 결 여한 것, 동일한 결과를 낳지 않는 것, 바라는 목적을 성취시키지 못하는 것, 착오로 인해 증익(가탁)된 것 등 활동하는 작용으로 간주하여 부정(apoha)을 어떤 문맥에서 사용하는가, 무엇을 대상으로 사용하는가에 따라 다양한 의 미가 표현된다는 언어 사용의미론에 입각하여 언어 지시의미론을 포섭하는 아포하론을 완성한다.

그런데 철학의 한계는 ‘이성의 한계’가 아니라 ‘언어의 한계’라고 진단한 비 트겐슈타인은 ‘언어는 세계의 그림’이라는 언어 그림이론으로 자신의 전기 언어철학을 구축한다.

의미론적으로 말하면 그림이론은 언어의 의미는 대상 을 지시함으로 인해 표현된다는 언어 지시의미론을 근간으로 한다.

하지만 ‘논리 언어’의 사용에서 ‘일상 언어’의 사용에로 그의 안목이 전환되는 순간, 그림이론은 유일한 하나의 보편이론이 아니라 언어적 현상을 설명하는 이론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언어는 단지 대상을 지 시하는 협애한 도구가 아니라 우리 일상의 언어공동체를 구성하는 무수히 많은 언어게임에 참여하여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의미가 생성된다고 하는 언 어 게임이론을 제시한다.

의미론으로 말하면 언어 게임이론은 언어의 의미 는 그 사용에 있다고 하는 언어 사용의미론으로 귀결된다.

결국 의미론의 관 점에 입각해 본다면, 디그나가의 아포하론과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그림 이론은 언어 지시의미론을 공유하고 있고, 다르마키르티의 아포하론과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게임이론은 언어 사용의미론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 서 유사성이 존재한다.

셋째, 인도철학 일반에서 언어의 의미대상에 대한 입장으로는 크게 “언어 는 보편을 지시한다.”는 ‘보편지시설’과 “언어는 개체를 지시한다.”는 ‘개체지 시설’로 나누어진다.

디그나가와 다르마키르티는 언어의 지시대상으로 ‘타자 부정’에 의해 의미되는 것만을 인정할 뿐 개체와 보편 둘 다 언어의 지시대상 이 될 수 없음을 논한 다음, 그렇다면 언어와 지시대상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라는 물음에 대해 언어와 지시대상과의 관계는 본질적(본래적) 결합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약속에 의해 결합된 인위적 관계임을 주장하면서 미망사학파와 문법학파의 본질적(본래적) 결합관계를 부정한다.

한편 비트 겐슈타인은 전기 언어철학에서 언어의 의미대상은 대상, 사태, 사실, 세계이 며, 낱말은 대상을, 요소명제는 사태를, 명제를 사실을, 언어는 세계를 지시 한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전기 언어그림이론에서는 언어와 의미대상과의 관 계는 보편적 본질을 매개로 한 결합관계 즉 본질적 결합관계를 주장한다.

하 지만 후기 언어게임이론에 이르게 되면 낱말과 의미대상 사이에는 하나의 관계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낱말이라 부르는 소리나 문자의 용법만큼 많이 존재하기 때문에 언어와 의미대상 사이에는 본질적(본래적) 결합관계 가 아니라 언어공동체 내에서 언어게임에 참여하여 언어를 사용함에 따라 의미가 생성된다는 입장을 취하기 때문에 인위적 자의적 관계를 인정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겠다.

결국 다르마키르티와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와 의미대상 사이의 관계는 전자가 인위적 관계를, 후자는 본질적 관계를 주장함에 따라 서로 견해를 달리하지만,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이론에 이 르게 되면 다르마키르티와 비트겐슈타인 두 사상가 공히 언어와 의미대상과 의 관계를 인위적 자의적 관계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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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Comparative Study of Language Philosophy of Dharmakīrti and Wittgenstein: Focusing on Apoha Theory and Language Game Theory* 42)

Kwon, Seo-yong(Pusan National University)

In Western philosophy and Indian orthodox philosophy of six, rationalism, which tries to grasp the world centering on reason (buddhi), is the mainstream. Reason (buddhi) is not a mechanism for recognizing the difference between individual objects, but a means to grasp the identity of individual objects. Recognition of identity presupposes that within individuals there is an essence that can be united. However, Dharmakīrti and Wittgenstein share the position that the ultimate reality is not the universal, which is understood by reason (buddhi), but only individuals with self-difference as the essence. Dharmakīrti inherits Apohavāda, which understands the essence or function of language as negative negativity, just like Dignāga. However, he does not regard the other as an object of denial as a universal being, but lacks causal effectiveness, does not produce the same results, fails to achieve the desired purpose, and has gained profits due to error. Based on the semantics of language use, which means that various meanings are expressed according to the context in which apoha is used and what the object is used as an active action, the apoha theory is completed. According to Wittgenstein, language is not just a cooperative tool to designate objects, but suggests a language game theory that meaning is created by using language by participating in a myriad of language games that make up our everyday language community. In terms of semantics, language game theory results in language use semantics that the meaning of language lies in its use. In the end, based on the point of view of semantics, Dignāga’s Apohavāda and Wittgenstein’s theory of language painting share the meaning of language instruction, and Dharmakīrti’s Apohavāda and later Wittgenstein’s language game theory share the meaning of language use. There is a similarity in that there is. As for the relationship between Dharmakīrti and the previous Wittgenstein’s language and semantic objects, the former argued for an artificial relationship, and the latter insisted on an essential relationship. Both are grasping the relationship between language and meaning object as an artificial and arbitrary relationship.

Key Words: Apoha theory, game theory, picture theory, negation of others, reference theory of meaning, use theory of meaning, identity, self-difference, universal ㆍ

논문투고일: 2021년 5월 18일 ㆍ심사완료일: 2021년 6월 19일 ㆍ게재결정일: 2021년 6월 24일

동아시아불교문화 46집

 

다르마키르티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 비교연구 - 아포하(apoha) 이론과 언어게임(game) 이론을 중심으로 -.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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