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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야기

왕안석의 장자 사상 비판과 수용 양상/오헌필.덕성여대

1. 緖論

王安石은 北宋 文壇을 대표하는 文人이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개혁론을 제창한 사상가이자, 新法이라는 개혁을 주도한 爲政者였다. 王安石은 22세 때, 進士에 及第 하여 官界에 입문한 이래, 49세 때 개혁적 인식을 같이하는 神宗의 知遇를 받아 宰相의 자리에 오름으로써 新法이라는 혁신적인 개혁 정책을 추진하였는데, 新法 정책의 基軸은 바로 儒家思想이었다. 이러한 儒家思想의 바탕 아래서 그의 經世觀 이 형성되는데, 經世觀의 기본적 사고와 논리의 발상은 人을 天에 대한 주체적 능동성을 지닌 個體로 인식하는 데서부터 출발하여, ‘權時之變’ 이라는 진보적 社會 改革論이 그 골간을 이룬다. 이렇게 개혁적 사고를 지닌 그에게 있어서 莊子의 無 爲之治는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司馬光을 위시한 保守派의 得勢 아래서 新法이 실패로 끝나자, 결국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江寧(지금의 南京)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게 된다. 이 시기에 그는 官界에서의 厭症을 치유하고 세속을 초 연하고자 하는 希求를 佛家 ․ 道家思想에서 찾았던 것이다.1)

1) 宋 王應辰 〈跋荊公所書佛偈〉 : 荊公贈太傅, 其制云; 少學孔孟, 晩事瞿聃. 世或以爲有所譏, 然公自謂 余幼習孔子, 長聞佛老之風而悅之, 則制詞蓋公志也. 公所書彌勒偈, 此特其一爾, 可見公之于異學其篤 好如此.

 

따라서 젊은 시절 官界에서 개혁을 부르짖던 시기에 비판의 화살을 돌렸던 莊子思想에 대해서도 긍 정적 시각으로 수용하는 입장을 취하게 되었던 것이다.

王安石의 저술 중에는 《莊子解》가 있었지만 亡佚되어 전해지지 않으며, 莊子 와 관련된 王安石의 詩로는 〈陶嫀菜示德逢〉,〈雜詠八首〉,〈無營〉,〈絶句其 五〉,〈絶句其八〉,〈聖賢何常施〉, 〈自喩〉, 〈用前韵戏赠葉致远直讲〉, 〈梦〉, 〈忆江南〉, 〈千秋歲引〉(詞) 등이 있다.

산문으로는 〈莊周 上〉,〈莊周 下〉, 〈季子〉, 〈太古〉, 〈答陳柅書〉, 〈答王深甫書三之一〉, 〈九變而賞罰可言〉, 〈漣水軍淳化院經藏記> 등이 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詩文들의 내용 분석을 통하여 王安石이 莊子思想을 어떻게 비판하고 수용하였는가를 고찰하고자 한다.

2. 莊子思想 批判

王安石은 北宋 당시 사회의 病理的 현상을 治癒하기 위하여 진보적 사회개혁론 을 주장하였으며, 新法이라는 개혁정책을 통하여 救民救國하고자 하였다.

그가 추 구한 理想的 政治는 堯․舜․三代의 聖王의 정치였으며, 傳統 儒家의 道統을 확립 하고, 자신의 儒家思想을 수립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는 또한 經學과 經世致用을 밀접하게 결합하고 傳統 儒家經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하여 자신의 현실 정치 방안을 위한 이론적 근거를 삼고자 하였다. 그의 理想的 改革理念의 바탕은 물론 法家思想이 일정 부분 차지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儒家思想이 주축이 되었던 것이다.

正統 儒家를 표방하는 王安石에게 있어서 莊子의 思想은 비판의 대 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먼저 〈九變而賞罰可言〉에 주목하여 보자.

莊周는 고대의 황당한 사람으로 道에 대하여 방종하고 完善하지 못했는데, 聖人 이 그를 만나면 반드시 그와 약속을 하고 약속을 해서 듣지 않으면, 두려워서 四 海 밖으로 배척하고 그로 하여금 중국에 懷疑 論調를 퍼뜨리지 못하도록 하였을 것이다. 비록 그러하지만, 그의 언론이 이와 같았으니, 성인도 (그의 언론을) 없 앨 수는 없었다.2)

2) 李之亮 箋注,《王荊公文集箋注》, 巴蜀書社, 2005, (이하 箋注者, 出版社, 出版年度는 생략함) pp. 1049-1050. : 莊周,古之荒唐人也,其於道也,湯而不盡善,聖人者與之遇,必有以約之,約之而不 能聽,殆將擯四海之外而不使之疑中国. 雖然,其言之若此者,聖人亦不能廢.

寓言과 같은 황당무계한 글은 실제에 근거하지 않는 虛構를 통하여 道의 근 본을 흔들리게 했다고 비판하면서, 莊子가 참다운 聖人을 만났다면 莊子의 사상 체계는 모순을 최소화하여 儒家思想에 부합하여 大道에 이를 수 있었을 것이라 고 보고 있다. 이어서 莊子의 無爲之治를 비판한 王安石의 詩文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대가 말하기를 “오직 자신을 端正하게 하기만 하면, 만물을 단정하기를 기대하지 않아도 만물을 단정하게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나는 “오직 자신 을 端正하게 하기만 하면, 만물을 단정하기를 기대하지 않아도 만물을 단정하 게 할 수 있다.”라고 한 것은 사람을 다스리는 道가 없는 것이며, 老子 ․ 莊 子가 삼는 바라고 생각한다. 소위 말하는 大人(성인)이 어찌 老子 ․ 莊子가 삼는 바와 같겠는가? 자신을 단정하게 하고 만물을 단정하기를 기대하지 않 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자기를 단정하게 하고 만물을 단정하기를 기대하는 것 또한 잘못된 것이다. 자기를 단정하게 하고 만물을 단정하게 하는 것을 기 대하지 않는 것은 道義가 없는 것이다. 자기를 단정하게 하고 만물을 단정하 기를 기대하는 것은 天命이 없는 것이다. 大人(성인)이라는 사람이 어찌 道義 와 天命을 고려하지 않겠는가? 揚子가 말하기를 “먼저 자신을 다스린 뒤에 남을 다스리는 것을 大器라 한다.” 3)라고 하였다. 揚子가 말한 大器는 아마 孟 子가 말한 大人(성인)일 것이다. 만물을 단정하게 하는 것은 만물로 하여금 나에게서 단정함을 취한 연후에 단정할 수 있는 것이지, 만물로 하여금 스스 로 단정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武王이 말하기를 “사방에 죄가 있든 죄가 없 든 내가 있으니, 천하에 어찌 감히 그 뜻을 지나치게 하는 자가 있겠는가!”라 고 하였다. 한 사람이 천하를 橫行하는 것을 武王은 부끄럽게 여겼다. 孟子가 말한 바는 “武王이 한 번 노하여 천하의 백성을 편안히 하였다.”라는 것이 다. 4) 만물을 단정하게 하기를 기대하지 않고 만물로 하여금 스스로 단정하도 록 한 즉 한 사람이 천하를 橫行하게 하여, 武王이 노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孟子가 죽자, 大人(성인)을 말하고 老子 ․ 莊子를 본받지 않은 자는 揚子일 뿐이다.5)

3) 揚雄《法言․先知》: 或曰; “齊得夷吾而霸, 仲尼曰小器. 請問大器.” 曰; “大器, 其猶規矩準繩乎? 先自 治以後治人之謂大器.”

4) 《孟子․梁惠王 下》 : 《書》曰 ; 天降下民 作之君, 作之師, 惟曰其助上帝, 寵之四方, 有罪無罪, 惟我 在, 天下曷敢有越厥志? 一人衡行於天下, 武王恥之, 此武王之勇也. 而武王亦一怒而安天下之民.

5) 《王荊公文集箋注》, pp. 1219-1221.〈答王深甫書三之一〉 : 深甫曰; 惟其正己而不期於正物,是以使 萬物之正焉. 某以谓期於正己而不期於正物,而使萬物自正焉,是無治人之道也. 無治人之道者,是 老、莊之为也. 所谓大人者,岂老、莊之为哉?正己不期於正物者,非也;正己而期於正物者,亦非 也. 正己而不期於正物,是無义也;正己而期於正物,是無命也. 是谓大人者,岂顾無义命哉?扬子 曰:先自治而後治人之谓大器. 扬子所谓大器者,蓋孟子之谓大人也. 物正焉者,使物取正乎我而後能 正,非使之自正也. 武王曰:四方有罪無罪,惟我在,天下曷敢有越厥志!一人横行於天下,武王耻之. 孟子所谓武王一怒而安天下之民. 不期於正物而使物自正,则一人横行於天下,武王無为怒也. 孟子 没,能言大人而不放於老、莊者,扬子而已.

王安石은 王深甫가 “오직 자신을 端正하게 하기만 하면, 만물을 단정하기를 기 대하지 않아도 만물을 단정하게 할 수 있다.” 라고 하면서 老莊의 無爲政治을 옹호 한 것에 대하여, 이것은 사람을 다스리는 道가 없는 것과 같다고 하면서 反論을 제기하고 있다. 莊子는 만물을 원래 있는 상태 그대로 두어 自在하도록 하면 세상 은 저절로 다스려진다는 관점에서, 정치에서도 有爲之治로 인하여 오히려 천하가 혼란스러움을 초래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無爲之治를 주장하였던 것이다.

천하를 있는 그대로 放任해 둔다는 말은 들었으나, 천하를 다스린다는 말 은 듣지 못했다. 본래 그대로 있게 하는 것은 천하가 그 본성을 어지럽지 않 도록 염려해서이다. 그대로 방임해 두는 것은 그 자연의 德을 바꾸지 않도록 걱정해서이다. 천하가 그 본성을 어지럽지 않게 하고 그 자연의 德을 바꾸지 않는다면, 천하를 다스릴 필요가 있겠는가. 옛날 堯임금이 천하를 다스릴 때, 천하를 기쁘게 하고 그 본성을 즐기게 해주었지만, 이것은 平靜함이 되지 못 하였다. 桀王이 천하를 다스릴 때, 천하를 피곤하게 하고 그 본성을 고통스럽 게 했는데, 이것은 유쾌함이 되지 못하였다. 平靜하지 않고 유쾌하지 않은 것 은 德이 아니다. 德이 아니면서 오래갈 수 있는 것은 천하에 없는 것이다. 6)

6) 《莊子 ․ 在宥》 : 聞在宥天下, 不聞治天下也. 在之也者, 恐天下之淫其性也. 宥之也者, 恐天下之遷 其德也. 天下不淫其性, 不遷其德, 有治天下哉. 昔堯之治天下也, 使天下欣欣焉人樂其性, 是不恬也. 桀之治天下也, 使天下瘁瘁焉人苦其性, 是不愉也. 夫不恬不愉, 非德也. 非德也而可長久者, 天下無之.

이러한 莊子의 無爲之治에 대하여, 王安石은 孟子의 “大人(성인)인 자가 있으니, 자기의 몸을 바르게 한 후에 남을 바르게 하는 자이다.”7)라는 文句를 인용하여 儒 家의 有爲之治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孟子를 正統儒家로 推崇하였고, 仁義禮信 으로 천하를 다스려 태평성대를 구현하는 孟子의 王道思想을 흡수하여 자신의 정 치사상의 바탕으로 삼은 王安石에게 있어서 莊子의 無爲之治 주장에 대한 비판의 강도는 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한 王安石은 “孟子가 죽자, 大人(성인)을 말 하고 老子 ․ 莊子를 본받지 않은 자는 揚子일 뿐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 역시 老莊에 대한 혹독한 비평인 것이다.

王安石은 揚子에 대해서 正統 儒家로 인정하고, 老莊보다 優位에 두고 존숭하였던 것이다.

〈揚子三首 其一〉8)

儒者陵夷此道窮 유학자들 점점 쇠퇴하여 道 막혔는데

千秋止有一揚雄 천추에 다만 양웅 한 사람만 있었다오

當時薦口終虛語 당시에 추천하는 말은 결국 헛된 것이었고

賦擬相如卻未工 賦는 司馬相如를 본떴으나 교묘하지 못했네

〈揚子三首 其二〉

九流沈溺道眞渾 아홉 유파 허위적대니

道의 참됨 혼탁해졌거늘

獨溯頹波討得源 홀로 퇴폐한 물결 거슬러올라 근원을 찾았네 (下略)

〈揚子三首 其一〉에서는 그 당시 사람들이 揚雄을 賦로써 司馬相如에 비견하 여 추천한 것은 揚雄의 참된 면모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하면서, 揚雄은 孔子 ․ 孟子 이후로 儒家 道統의 傳承의 脈이 끊겼을 때 출현하여 儒家를 發揚한 인물 이라고 稱頌하고 있다.〈揚子三首 其二〉에서도 九家가 서로 뒤섞여 儒家의 진정 한 道가 혼탁해졌을 때, 9) 傳統 儒家의 참된 뿌리를 찾은 인물이 바로 揚雄이라고 찬양하고 있다.

7) 《孟子 ․ 盡心》 : 有大人者, 正己而物正者也.

8) 王安石 撰, 李壁 注, 李之亮 補箋, 《王荊公詩注補箋》, 巴蜀書社, 2002, pp. 964-965. * 이하 箋注者, 出版社, 出版年度는 생략함.

9) 《王荊公詩注補箋》, p. 965: 《穀梁序》; 九流分而微言隱, 異端作而大義乖.

王安石은 〈莊周 下〉에서도 出仕하지 않고 隱逸하려는 莊子의 자태를 통하여 無爲政治를 강도 높게 비판하였다.

(莊子가) 太廟의 犧牲을 인용하여 莊子를 초빙하여 出仕하게 하려는 楚의 사신을 물리쳤는데, 10) 그것은 격한 말로 쇠퇴하는 세상의 보통 사람들을 두 렵게 하였을 따름이다. 莊周의 재능으로써 어찌 出仕하는 데 판단이 흐려 도 리어 犧牲처럼 두려워한단 말인가? 무릇 孔子가 소위 말하는 隱居라는 말을 거리낌없이 하는 자는 莊周같은 사람을 가리킨 것이다. 그러나 莊周의 학설은 大道와는 상반된 것으로, 마땅히 聖人의 무리에게 죄를 지었음이 틀림없다. 11)

莊子를 초빙하여 出仕하게 하려는 楚의 사신을 ‘제사의 犧牲牛는 무늬있는 아 름다운 자수 옷을 입고, 꼴과 콩을 배불리 먹지만 太廟에 들어가면 한 마리의 보통 송아지가 되고 싶어도 될 수 없다.’ 라고 하면서 자신을 犧牲牛에 비유하고 出仕를 거절하고 隱居를 추구한 莊子를 聖人에게 죄를 지은 자라고 혹평하고 있다. 위에서 말하는 大道는 바로 儒家之道로서 莊子의 隱逸思想과는 거리가 멀다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王安石은 〈季子〉에서도 莊子를 儒家의 죄인으로 지칭하였다.

옛날 莊周가 喪妻했을 때, 동이를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12) 東門吳가 아들 喪을 당했을 때, 아들이 없었을 때와 같다고 하였다.13) 이것은 인정을 버리고 만물을 평등하게 보는 관점으로 우리 儒家의 죄인이다.14)

10) 〈莊子 ․ 列禦寇》 : 或聘於莊子. 莊子應其使曰: 子見夫犧牛乎? 衣以文繡, 食以芻叔, 及其牽而入於 大廟, 雖欲爲孤犢, 其可得乎!

11) 《王荊公文集箋注》, p. 1087 : 及其引太庙牺以辞楚之聘使,彼盖危言以惧衰世之常人耳. 夫以周之 才,岂迷出处之方而专畏牺者哉?盖孔子所谓隐居放言者,周殆其人也. 然周之说,其於道既反之宜其 得罪於聖人之徒也.

12) 《莊子․至樂》 : 莊子妻死, 惠子弔之, 莊子方箕踞鼓盆而歌.

13) 《戰國策․秦策》 : 梁人有東門吳者, 其子死而不憂, 其相室曰: 公之愛子也, 天下無有. 今子死不憂, 何也? 東門吳曰: 吾嘗無子, 無子之時不憂; 今子死, 乃卻與無子時同也, 臣奚憂焉?

14) 《王荊公文集箋注》, pp. 1076-1077 : 昔莊周喪其妻,鼓盆而歌;東門吳喪其子,比於未有. 此棄人齊 物之道,吾儒之罪人也.

윗 글에 서 는 梁 人 東 門 吳 가 아들이 죽었 어 도 “ 예 전 에 아들이 없을 때 나 지 금 아들이 죽어 서 없 을 때 나 똑 같 다.” 라고 하면 서 슬 퍼 하지 않았 던 사 례 와 莊 子 가 喪妻 했 을 때 , 동이 를 두 드 리 며 노 래 를 부 른 사 례 를 인 용 하면 서 사 람 의 인 정 을 버 리 고 만물을 평 등하 게 보 는 莊 子 의 萬物齊 同 論을 부정 적 으로 평 가하고 있 다.

王安石은 또한 莊子가 ‘無爲之治’를 주장하며, ‘사람과 禽獸가 구분이 없는 사 회 ’ 를 이 상 향으로 삼고, 復 古 를 지 향 한 데 대 하여 비 판을 가하였 다. 먼저 莊子의 관점을 살펴보자.

대저 지극한 德이 행해지던 세상에서는 (사람들은) 금수와 함 께 살 고 , 만 물 과 더 불 어 나 란 히 무 리 지 어 지 냈 다. 어 찌 군 자 와 소 인 을 헤 아 렸 겠 는 가! 만 물 과 같 이 無 知 였 고 , 그 德 은 자연 에 서 떠 나 지 않 았 다. - - - - - 성 인 이 나 타 나 게 되 자 , 힘 써 仁 을 행 하 고 억 지 로 義 를 행 하 여 천 하 가 疑 惑 을 품 게 되 었 다. 제 멋 대 로 음악 을 만 들 고 번 잡 한 禮 를 만 들어 천 하에 비 로 소 구 분 이 있 게 되 었 다. - - - - 도 덕 이 없 어 지 지 않 는 다 면 , 어 찌 仁 義 를 취 할 것 인 가! 性 情 이 떠 나 지 않 는 다 면 어 찌 禮 樂 이 필 요 하 겠 는 가! 五 色 이 어 지 럽 지 않 는 다 면 누 가 文 彩 를 만 들 겠 는 가! 五 聲 이 어 지 럽 지 않 는 다 면 누 가 六 律 에 맞추 겠 는 가! 대 저 통 나 무 를 손 상 해 서 그 릇 을 만 든 것 이 목 수 의 죄 라 고 하 면 , 도 덕 을 해 쳐 仁 義 를 만 든 것 은 성 인 의 잘 못 인 것 이 다.1 5 )

1 5 ) 《莊子 ․ 馬蹄》 : 夫至德之世, 同與禽獸居 , 族與 萬物竝 , 惡乎知君子小人哉 ! 同 乎 无知 , 其德不離 . - - - 及至聖 人 , 蹩躠 爲仁 , 踶 跂爲義, 而天下始疑矣 . 澶漫爲 樂 , 摘僻爲禮 , 而天下始分矣 . - - - 道德不 廢 , 安取仁義 . 性情不離 , 安用禮樂 ! 五色不亂 , 孰爲文采 ! 五 聲不亂 , 孰應 六律 ! 夫殘樸以爲器 , 工 匠 之罪也 . 毁道德 以爲仁義 , 聖 人 之過也 .

후 대 에 성 인 이 仁義禮樂 을 제 정 하여 有爲之治 를 행 함에 따라 사회 는 더 욱 혼 란 스 럽 게 되 었 으므로, 다시 無 爲之治 로 돌아가야 한 다고 역 설 한 莊 子 의 순 박 한 원 시 주 의 에 대 하여 王 安 石은 莊子 의 학설 을 부 정 하고, 歷史 進 化觀을 피 력 하였 다.

太古의 사람이 禽獸와 같지 않은 것이 얼마인가? 聖人이 이를 올바르지 않 다 고 여 겨 禮 樂 을 만 듦 으 로 써 禽 獸 와 구 별 하 였 다. 아 래 로 후 세 에 이 르 러 의 상 이 사 치 해 지 고 , 宮 室 이 웅 장 해 지 고 , 耳 目 聲 色 의 즐 거 움 을 좇 음 으 로 써 천 하 를 혼 란 스 럽 게 하 여 , 君 臣 ․ 父 子 ․ 형 제 ․ 부 부 사 이 가 모 두 당 연 히 지 켜 야 할 도 리 를 잃 고 , 仁 義 가 性 情 을 도야 할 수 없 고 , 禮 樂 이 情 欲 을 억 누 를 수 없 고 , 刑政 이 惡 行 을 구 속 할 수 없 어 서 방 탕 하 게 되 어 다 시 금 수 와 같 아 지 게 되 었 다. 성인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도리어 우매한 자가 교화의 방법을 알지 못하고 다시 太古로 돌아갔을 것이다. 太古의 道理가 과연 萬世에 행해질 수 있다면, 聖人이 어찌 그 사이에서 禮樂을 만들었을 것인가? 반드시 그 사이에서 禮 樂을 만든 것은 太古의 道가 시행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도리어 그때로 돌아 가고자 하는 것은 바로 禽獸의 대열에서 떠났다가 다시 禽獸의 대열로 돌아 가는 것으로, 어찌 교화에 도움이 되겠는가? 나는 治亂의 방법을 아는 자는 마땅히 교화의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太古로 돌아가자고 하는 것 은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면 바로 欺瞞하는 것이다.16)

1 6 ) 《 王 荊 公 文 集 箋注 》 , p. 1 1 0 1 , 〈 太 古 〉: 太 古 之人 , 不與禽兽朋 也幾何 ? 聖 人恶 之也 , 制 作 焉 以 别 之. 下而戾於後世, 侈裳衣,壮宫室,隆耳目之观, 以嚣天下, 君臣、父子、兄弟、夫妇皆不得其所當然, 仁义不足泽其性,禮乐不足锢其情,刑政不足網其恶,荡然復與禽兽朋矣. 聖人不作,昧者不识所以化 之术,顾引而归之太古. 太古之道果可行之萬世,聖人恶用制作於其间?必制作於其间,为太古之不可 行也. 顾欲引而归之,是去禽兽而之禽兽,奚补於化哉?吾以为识治乱者,當言所以化之之术. 曰归之 太古,非愚则诬.

王 安石 은 여 기 에 서 太古 의 無 爲之治 가 萬 世에 행 할 수가 없 는 것 임 에 도 불구하 고 다시 원 시 상태 로 回 歸 하 려 는 莊子 학설 의 모순을 지 적 하고 있 는 것 이 다. 또한 北宋 당시 司 馬光을 위 시 한 復古主 義派에 대 해 인 류 의 역 사 흐름을 인 식 하지 못하 는 무 지 몽 매 한 자들이 라고 비 난을 서 슴치 않고 있 다. 이 것 은 바로 王 安石 의 歷史進 化觀 의 표출이 며 , 개 혁 적 인 新法을 반 대 하는 보수 파에 대 한 反 駁인 것 이 다.

3. 莊子思想 受容

王安石의 生涯는 대 략 출 생 과 성 장 시 기 ( 1 세 - 2 1 세 ) ․ 及第와 地方官 시 기 ( 2 2 세 - 3 8세 ) ․ 초기 京官 시 기 ( 3 9 세 - 4 2세 ) ․ 居喪 講學 시 기 ( 4 3세 - 4 7 세 ) ․ 執政 新法 시 기 ( 4 8 세 - 5 6 세 ) ․ 鍾 山 隱居 시 기 ( 5 7 세 - 6 6 세 ) 로 나누어 볼 수 있 다 . 王安石은 초 기 京官 시 기 에 〈上仁宗皇帝言事書〉 1 7 ) 를 올 려 정 치 개 혁 을 촉 구 하였 지 만 , 우유부단 한 仁宗과 개 혁 으로 인 한 旣得權의 상실 을 두 려 워 하는 保守 高官들에 의 해 여 지 없 이 唾棄되 고 말았다 . 또 한 英宗 재 위 기 간에 는 召 命을 받고도 병 을 핑 계 로 사양 하며 나아가지 않았다 . 1 8 ) 그 후 神宗 의 知遇을 받아 宰相으로서 新法이 라는 개 혁 정 책 을 강 력 하 게 추 진 해 나갔으 나 , 정 책 집 행 과정 에 서 保守派의 거 센 반 대 에 부 딪 쳐 두 차 례 나 罷相 당 하는 등 苦楚를 겪 어 야 만 하였 다 .

이 런 순 탄 하지 않은 정 치 적 歷程 속에 서 그는 熙寧 1 0 년 ( 1 0 7 7 , 5 7 세 ) 判江寧府를 끝으로 관직 에 서 물 러 날 때 까지 십 여 차 례 관 직 을 固 辭하였 고 , 陶淵 明 을 흠모 하는 등 隱逸을 갈망하였 던 것 이 다 . 1 9 ) 그는 官界에 서 隱退하여 江寧에 은거 한 이 후 , 자연 과 高僧을 벗 삼아 悠悠 自 適을 즐 겼 는 데 이 시 기 에 그 는 自 然人 으로서 , 벼 슬살이 에 서 의 번 뇌 에 서 벗 어 나 인 간 본연 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 한 갈망을 佛家 ․ 道家思想을 통하 여 해 소 하고자 하였 던 것 이 다 .

17) 《王荊公文集箋注》, pp. 21-22.

1 8 ) 《 王 荊 公 文 集 箋注 》 , p. 9 3 , 〈 辭赴 闕 狀 三 〉.

19) 拙稿, 〈王安石의 詩文에 나타난 出仕와 隱逸 〉 , 《 中 國 學論 叢 》 1 9 집 , 韓 國 中 國 文化 學會, 2 0 05. 6 , p. 2 1 4 참 조.

바로 儒家와 法家를 개 혁 사상의 근 간으로 삼아 新法 을 추 진 하 던 시 기 에 그 가 비 판 했 던 莊子思想에 대 해 서 도 긍 정 적 시 각으로 수용 하 는 입 장을 취 하 게 되 었 던 것 이 다 . 먼 저 〈 無 營〉 2 0 ) 에 주 목 하여 보 자 .

無 營 固 無 尤 다 스 림 이 없 으 면 당 연 히 과실 이 없 고 多 與 亦 多 悔 많 이 관 여 하 면 또 한 후회 도 많 아지 네 物 隨擾擾集 만 물 은 좇 아 화 해 롭 게 모 이 고 道 與 翛 然會 도 는 더 불 어 유 연 히 모 이 는 법 墨 翟 眞 自 苦 묵 자 는 진 실 로 자신 을 고 통 스 럽 게 하 였 고 2 1 ) 莊 周 吾所 愛 장자 는 내 가 사 랑 하 는 바 일 세 萬 物莫 足 歸 만 물 은 돌 아 갈 만 한 곳 이 없 는 법 此 言 猶有在 이 말 을 존 중 하 는 자 가 있 었 네 2 2 )

20) 《王荊公詩注補 箋 》 , p. 7 8.

21) 《莊子․天下》 : 墨子稱道 曰 ; 昔者禹之湮洪水 , 決江河而通 四 夷九州也 , 名 山三百 , 支 川 三千 , 小 者無數. 禹親 自 操橐耜 而九雜天下之 川 . 腓 無胈 , 脛無毛 , 沐甚 雨 , 櫛疾風 , 置 萬 國 . 禹大聖也 , 而形 勞天下也如此. 使後世之墨者 , 多 以裘褐為 衣 , 以 跂 蹻為服 , 日 夜不休 , 以 自 苦為極 , 曰 ; 不能如此 , 非 禹之道也 , 不 足謂墨 .

2 2 ) 《莊子 ․ 天下》 : 寂寞無形 , 變化無常 , 死與生與 , 天地並 與 , 神明往與 . ﹗芒乎何之 , 忽乎何適 , 萬 物畢羅 , 莫足以 歸 . 古之道術有在於是者 . 莊周 聞其風而悅之 , 以謬悠之說 , 荒唐之言 , 無端崖之辭 , 時恣縱而不儻 , 不以觭見之也 .

이 시 에 서 는 禹王 처 럼 근 로 와 박애 를 최 고 의 道로 여 긴 墨子를 풍자 한 莊子의 견 해 에 동 의 하면 서 번 뇌 에 서 벗 어 나고 싶 은 심 정 을 읊고 있 다 . 바로 王安石 자신 이 出 仕하여 개 혁 정 책 을 추진 하는 과 정 에 서 보수 파의 거 센 반 대 로 겪 은 고충을 토로 하면 서 , 隱逸하여 無爲를 추구 하며 莊子같은 삶을 살고자 하는 갈 망을 표출 하고 있 는 것 이 다 . 이 러 한 王安石의 道家的 삶의 지 향은 다음의 〈 千秋歲 引 〉 2 3 ) 詞 작품 에 서 도 찾아볼 수 있 다 .

別 館寒 砧 객 사 의 차 가 운 다 듬 잇 돌 소 리

孤城畵 角 외 로 운 성 의 채 색 호 각 소 리

一派秋 聲 入寥 廓 온 갖 가을 소 리 허 공 에 퍼 지 네

東歸燕從 海上 去 동 쪽 으 로 돌 아 가 는 제 비 바다 위 로 떠 나 가 고

南 來雁 向 沙頭 落 남 쪽 으 로 오 는 기 러 기 모 래 톱 에 내 리 네

楚臺風, 庾樓 月 楚 王 놀 던 蘭臺의 바 람,2 4 )

庾 亮 읊 조 리 던 南 樓 의 달 2 5 )

宛 如 昨 완 연 히 어 제 같 구 나!

無奈被些名利縛 어쩔 수 없이 명리에 묶 이 고

無 奈被他 情擔 閣 어 쩔 수 없 이 다 른 정 에 붙 들 려 서

可 惜風流 總 閒 卻 애 석 하 게 도 풍 류 를 늘 소 홀 히 하 였 네

當初 謾 留 華表 語 애 당 초 부 질 없 이 華 表의 말 2 6 ) 뒤 로 남 겼 고

而今誤 我 秦樓 約 지 금 은 내 秦樓 의 약 속 어 겼 네

夢 闌 時, 酒 醒後 꿈 이 다 하 고, 술 이 깬 뒤 에 도

思 量著 생 각 은 그 치 질 않 는 구 나!

2 3 ) 汪 中 註 譯, 《 宋詞 三 百 首 》 , 三 民 書 局 , 1 9 8 1. p. 6 8.

24) 《宋玉傳》: 楚王遊於蘭臺, 有風颯至, 王乃披襟以當之 曰 ; 快哉此風 .

2 5 ) 《世說新語》 : 晉庾亮在武 昌 , 與諸佐吏殷浩之徒 , 乘夜 月 共上南樓 , 據胡床詠謔 .

2 6 ) 《續搜神記》 : 遼東城 門有華表柱 , 有 白 鶴集其上言 曰 ; 有鳥有鳥 丁令威 , 去家千年今來歸 , 城 中 如 故人 民非 , 何不學仙 冢 纍 纍 !

이 詞는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은퇴 후 江寧 ( 지 금 의 南京 ) 에 서 晩年을 보 낼 때 의 작품 으로 추정 된 다 . 楚王이 蘭臺에 서 상쾌 한 바 람을 즐기 던 일 과 晉代 , 庾亮 이 南樓에 서 달을 읊조 리 던 풍류 를 사 례 로 들 고서 , 세 월 이 빠름을 절 감하면 서 자 신 은 정 작 세 속을 초탈하여 풍 류 적 인 삶을 살지 못 한 데 대 해 후 회 하고 있 다 . 여 기 에 서 “어 쩔 수 없이 명 리 에 묶이 고 , 어 쩔 수 없 이 다른 정 에 붙들 려 서 ” 싯 구는 바로 出 仕하여 新法이 란 개 혁 정 책 을 추 진 한 것 을 가리 키 는 데 , ‘ 丁令威가 鶴이 되 어 遼東城 門의 華表柱에 날아와 앉아 仙道를 배 우기 를 권 유 했다는 고사’ 를 인 용하여 , 벼 슬 살이 에 억 매 여 仙道를 배 우지 못 한 데 대 하여 悔恨을 품고 있 는 것 이 다 .

다음의 〈 自 喻〉 2 7 ) 에 서 도 莊子의 無爲 自 然의 삶을 추구하고 있 는 王安石의 자 태 를 찾아볼 수 있 다 .

岸 凉 竹 娟 娟 서 늘 한 언 덕 에 대 나 무 는 쭉쭉 아 름 답 게 뻗 어 水

净菱 帖 帖 맑 은 물 에 마 름 드 리 워 져 있 네

虾 摇浮 游须 새 우 는 수 염 날 리 며 떠 돌 아 다 니 고

鱼 鼓嬉 戏 鬣 물 고 기 는 물 결 치 며 지 느 러 미 를 희 롱 하 네

释杖 聊一 愒 지 팡 이 를 놓 고 잠시 쉬 는 데

褰 裳如 可 涉 치 마 걷 고 건 너 려 하 네 2 8 )

自 喻适 志 欤 스 스 로 유 쾌 히 여 기 며 뜻 이 맞 고

翻 然梦 中 蝶 나 풀 나 풀 나 는 꿈 속 의 나 비 였 으 면 2 9 )

2 7 ) 《 王 荊 公 詩 注補 箋》 , p. 7 6.

28) 《詩經․國風․褰裳》 : 子惠思我 , 褰裳涉溱 . 子不我思 , 豈無他 人 ? 狂 童之狂也 且 !

2 9 ) 《莊子 ․ 齊物論》 : 莊周 夢爲胡 蝶 , 翩翩然胡 蝶也 , 自 喩適志與 .

여 기 에 서 는 두 개 의 典故를 써 서 悠悠 自 適한 삶을 갈 망하고 있 다 .

즉 莊子의 胡 蝶夢처 럼 현 실 도 꿈이 고 꿈도 현 실 인 物我一體 , 萬物齊 同 을 추구 하고 있 는 것 이 다 .

이 詩 외 에 도 王安石이 胡 蝶夢을 읊은 詩句 는 적 지 않 게 찾아볼 수 있 다 .

예 를 들어 서 ‘ 搏飞欲峨峨 , 铩 堕 今 跕 跕. 忘情塞 上 马 , 適 志 梦 中 蝶.〈 用 前韵戏赠 葉 致 远 直 讲〉 ’ , ‘ 黄 粱欲熟且 留 连 , 漫道春归 莫怅 然. 蝴蝶岂 能知 梦事 , 蘧蘧飞 堕 晚花 前.〈 梦〉 ’ , ‘ 城 南 城 北萬 株花 , 池 面 冰 消 水 见 沙. 回 首江 南春 更 好 , 梦为蝴蝶亦还 家.〈 忆江 南 〉 ’ , 등이 바로 그 것 이 다.

이어서 王安石의 莊子思想에 대 한 긍 정 적 시 각과 수용에 대 해 살펴 보 기 로 하 겠 다 .

萬 物余 一 體 만 물 과 나 는 한 몸 이 고

九 州余 一 家 구 주 와 나 는 한 집 안 일 세

秋 毫不 爲 小 추 호 도 작 다 고 하 지 않 고

徼 外不 爲 遐 변 경 밖 도 멀 다 고 하지 않네

不 識寿 與 夭 장 수 와 요 절 을 분 별 하지 않 고

不 知 贫 與 奢 가 난 과 사 치 를 알 지 못 하네

忘心 乃 得 道 마 음 을 잊 으 면 도 를 깨 우 치 는 데

道不 去 纷 華 도 는 화 려 함 에 서 떠 나 지 않 았 네

近迹以 觀之 가 까 운 흔 적 에 서 살펴 보 면

堯 舜亦泥 沙 요 순 역 시 진 흙 모 래 일 세

莊 周 謂 如 此 장 자 는 이 런 말 했 건 만

而世以 爲 夸 세 상 에 서 는 떠 벌 린 다 고 여 기 네 3 0 )

이 詩에 서 는 《莊子》 의 文句 를 몇 차 례 인 용하여 莊子 사상을 긍정 적 으로 해 석 하고 있다 . 3 1 ) 추호는 작고 변 경 밖은 멀 다고 여 기 며 , 장수와 요절 ․ 가난과 사치 가 분 별 되 어 이 로 인 해 喜怒哀樂이 발생 하게 되 는 세 속의 상황을 극복 하기 위 해 서 는 사 적 인 마음을 잊 어 야 한다며 萬物齊同 을 주장한 莊子의 학설 을 수용하고 있 다 .

3 0 ) 《 王 荊 公詩 注補 箋》 , p. 9 8.〈雜 詠八 首 其 一 〉.

31) “萬物余一體”는 《莊子》, 〈天下〉편의 “泛愛萬物 , 天地一體也 . ” , 〈 內篇〉 편 의 “ 天地一指也 , 萬 物一馬也 . ” 을 인 용 한 것 이 고 , “ 秋毫不爲小” 는 〈 知北遊 〉 의 “ 秋毫爲小 , 待之成體 . ” , 〈 齊物論〉 의 “ 天下莫大於秋毫, 莫小於太 山 . ” 을 인 용 한 것 이 고 , “ 不識寿與夭” 는 〈天地〉 편 의 “ 不樂壽 , 不哀 夭. ” 을 인 용 한 것 이 고 , “ 堯舜亦泥 沙” 는 〈 逍遙遊〉 편 의 “ 是其塵垢粃糠 , , 將猶 陶鑄堯舜者也 . ” 를 인 용 한 것 이 다 .

다음에 는 〈莊周 上〉 에 주목 하여 보자 .

세 상 에 莊 子를 논 한 사 람 은 하 나로 일 치 하 지 않 는 다.

儒家 를 배 우 는 자 들 은 “ 《莊 子 》 라 는 저 술 은 공 자 를 애 써 비 방 함 으 로 써 그 그 릇 된 주 장 을 믿 게 하 였 으 므 로, 그 저 술 을 불 사 르 고 그 무 리 들 을 없 애 야 만 되 며, 그 曲 直 은 논 할 가치 조 차 없 다.” 라 고 하 였 다.

儒家 를 배 우 는 자 들 의 말 은 이 와 같 았 으 나, 莊 子의 道를 좋 아 하 는 자 들 은 “ 莊 子의 德 은 만 물 이 자신 의 학설 을 방 해 하 지 않 게 해 서 그 道를 믿 을 수 있 게 하는 것 이 다. 그 가 仁義을 알 지 못 한 것 이 아 니 라, 仁義가 微微 해 서 자 기 에 게 행 할 만 하 지 않 다 고 여 긴 것 이 다. 그 가 禮樂 을 알지 못 한 것 이 아 니 라, 禮樂 이 엷 어 서 천 하 를 교 화 시 키 기 에 는 부 족 하 다 고 여 긴 것 이 다. 그 러 므 로 老 子 가 말 하 기 를 ” 道를 상 실 한 연 후 에 德 이 있 고, 德을 상실한 연후에 仁이 있고, 仁을 상실한 연후에 義가 있고, 義를 상실한 연후에 禮가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莊子가 仁義禮樂의 本意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가 仁義禮樂을 道의 末流로 여기고 그것을 경 시하였을 따름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무릇 儒生의 말은 맞지만, 莊子의 本意를 탐구한 적이 없다. 莊子의 학설을 좋아하는 사람은 莊子의 저술을 읽는 것은 알 았 지 만, 또 한 莊子 의 本意를 탐구 한 적 은 없 다.3 2 )

여 기 에 서 王安石은 儒生들이 장자에 대 해 비 판적 견 해 를 표 명 하는 원 인 은 莊 子 학설 의 진 정 한 목 적 을 이 해 하지 못 한 데 있 음을 지 적 하고 있 다 .

“莊子라는 저 술 이 孔子를 비 방하고 있 다 . ” 라고 하면 서 莊子에 대 한 대 립 각을 세 우고 있 는 儒生들 의 판 단에 대 해 , 莊子가 孔子를 비 방 한 것 은 아 니 며 , 다 만 孔子가 추구 하는 仁義禮 樂의 本意를 이 해 는 하면 서 도 , 仁義禮樂을 道의 末流로 여 기 고 경 시 하였 을 따름이 라고 부연 설 명 하고 있 다 .

아 래 의 글에 서 는 質朴 함도 사 라지 고 禮義가 무너 져 자 신 의 이 익 만을 추구하는 시 대 적 위 기 를 구 제 하 기 위 한 莊子의 취 지 에 동 의 하고 있 다 .

옛 날 先王 의 恩澤은 莊 子 의 시 대 에 이 르 러 消 盡되 고, 천 하 의 풍 속 은 속 임 수 가 횡 행 하 고, 質 朴 함 도 사 라져 비 록 세 상 의 學士, 大夫 들 도 자신 을 중시 하 고 외 물 을 경 시 하 는 도 리 를 알 지 못 하 였 다. 그 리 하 여 禮義의 근 본 을 포 기 하 고, 利 害를 다투 어 利 를 좇 는 것 을 치 욕 으 로 여 기 지 않 고, 자 신 의 생 명 을 버 리 는 것 도 아 깝 게 여 기 지 않 고, 점 점 깊 은 수 렁 으 로 빠지 니 구 제 할 수 가 없 는 지 경 에 까 지 이 르 렀 다. 莊子 는 이 를 염 려 하 고 그 의 학 설 로 천 하 의 폐 단 을 矯 正하 여 正 道로 돌 아 가 게 하 려 고 하 였 다. 그 는 과 도 하 게 염 려 하 여 仁義禮樂은 모 두 矯正하 는 데 부 족 하 므 로, 是 와 非 를 동 일 시 하 고, 彼와 我 를 가지 런 히 하 고, 利 와 害를 하 나 로 한 즉 마 음 으 로 족 히 체 득 할 수 있 으 므 로 이 것 이 천 하 의 폐 단을 矯正 할 수 있 는 것 이 라 고 여 겼 던 것 이 다.3 3 )

3 2 ) 《王荊公文集箋注》 , p p . 1 0 8 4 - 1 0 8 5 . : 世之论莊 子者 不一 , 而学儒者 曰 : 莊 子之书 , 务诋孔子以 信其 邪 说 , 要焚 其 书 、 废其 徒而後 可 , 其 曲 直 固不足 论也. 学 儒者 之言 如此 , 而好莊 子 之道者 曰 : 莊 子 之 德 , 不 以 萬物干 其虑而 能 信 其道者 也. 彼非 不知仁 义 也 , 以 为仁 义小 而不足 行 己 ; 彼 非不知禮 乐 也 , 以 为禮 乐 薄 而不足化天 下. 故 《 老 子 》 曰 : 道失 後 德 , 德失後 仁 , 仁 失 後 义 , 义失後禮. 是知 莊 子 非不 达 於仁 义禮 乐 之 意 也 ; 彼 以 为 仁 义 禮 乐 者 , 道 之 末 也 , 故 薄 之云 耳 。 夫 儒者 之言 善 也 , 然 未 尝 求莊 子 之 意 也 ; 好莊 子 之言 者 固知读 莊 子之书 也 , 然 亦 未 尝求 莊子 之意 也.

33) 上同 : 昔先王之澤,至莊子之時竭矣,天下之俗,譎詐大作,質 朴 并 散 , 雖 世之學 士大 夫 , 未 有知 貴 己賤物之 道者 也. 於是棄絶 乎禮 義之 緖 , 奪 攘乎利害 之 際 , 趨利而不 以 爲 辱 , 殞 身而 不 以 爲怨 , 漸渍 陷 溺 , 以 至 乎不 可 救 已. 莊 子 病 之 , 思 其 說 以 矯天下 之 弊而歸之於 正 也. 其心 過慮 , 以 爲仁 義 禮 樂 皆不 足 以 正 之 , 故 同 是 非 , 齊 彼我 , 一利害 , 則 以 足 乎心爲得 , 此其 所 以 矯天 下 之弊者 也.

王安石은 莊子의 학설 은 사회 발전 과 仁義禮樂의 가치 를 부 정 하였 기 때 문에 聖人의 道에 서 멀 어 졌 다고 생 각 하였 다 . 그 러 나 是非 , 彼我 , 利害 관 계 를 절 대 적 개 념 의 범 주에 서 벗 어 나 , 공존 하는 상 대 적 개 념 으로 인 식 함으로 써 , 천 하 의 폐 단을 矯正하여 正道로 돌아가고자 했 던 莊子 본연 의 취 지 에 는 긍 정 적 인 시 각을 보여 주 고 있 다 .

사실 상 莊子는 儒家와 墨家 사이 의 是非거 리 를 비 판하고 , 큰 지 혜 를 추구 해 야 함을 강조 하였 던 것 이 다 . 《莊子 ․ 齊物論》 에 초 점 을 맞춰 보자 .

道는 잔 재 주 에 가 려 지 고 말은 화 려 한 꾸 밈 에 서 가 려 진 다. 그 러 므 로 儒家 와 墨家 의 시 비 가 벌 어 져 서 상 대 가 그 르 다 는 것 을 옳 다 고 하 고 상 대 가 옳 다 는 것 을 그 르 다 고 한 다. 상 대 가 그 르 다 는 것 을 옳 다 고 하 고, 상 대 가 옳 다 는 것 을 그 르 다 고 하는 것 은 밝 은 지 혜 에 서 는 것 만 못 하 다. 사 물 은 저 것 아닌 것 이 없 고 이 것 아 닌 것 이 없 다. 저 것 으 로 부 터 보 면 자 기 의 허 물 은 보 이 지 않 고, 스스로를 알면 모두를 알게 된다. 따라서 저것은 이것에서 나오고, 이것 또한 저것에 起因한다. 저것과 이것은 나란히 아울러 생긴다는 말이다. 비록 그러 하나, 삶이 있으므로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으므로 삶이 있다. 可함이 있으 므로 不可함이 있다. 옳음에 起因해서 틀림이 있고, 틀림에 起因해서 옳음이 있다. 이런 까닭에 聖人은 그런 방법에 의하지 않고 하늘에 비추어 본다. 역 시 긍정에 의존한다. 이것은 또한 저것이고, 저것 또한 이것이다. 저것에 또 한 하나의 옳고 그름이 있고, 이것에도 또한 하나의 옳고 그름이 있는 것이 다.과연 저것과 이것이 있다는 말인가 없다는 말인가. 저것과 이것이 대립이 그치는 것을 道의 中樞라 한다. 道의 中樞라야 비로소 원의 중심을 얻어 무궁 함에 대응할 수 있다. 옳음도 또한 하나의 무궁함이며, 그름도 또한 하나의 무궁함이다. 그러므로 “밝은 지혜에 서는 것만 못하다.”라고 한 것이다.34)

3 4 ) 道惡乎 隱而有眞 僞 ? 言惡乎 隱而有是 非? 道惡乎往而不存 ? 言惡乎存而不可 ? 道 隱於小成 , 言 隱於榮 華 . 故有儒墨之是非 , 以是其所非而非其所是 . 欲是其所非而非其所是 , 則 莫若以 明 . 物無非彼 , 物無 非 是 . 自 彼則不見 , 自 知則 知之 . 故 曰彼 出 於是 , 是亦 因彼 . 彼是方生之說也 , 雖然 , 方生 方死 , 方死方生 . 方可方不 可 , 方不 可方可 . 因是 因 非 , 因 非 因是 . 是以聖 人不 由 , 而照之於天 , 亦 因 是也 . 是亦彼也 , 彼 亦是也 . 彼亦一是非 , 此亦一是非 . 果且有彼是乎哉? 果且無彼是乎哉? 彼是莫得其偶 , 謂之道樞 . 樞始 得其環 中 , 以應 無窮 . 是亦一無 窮 , 非亦一無窮也 . 故 曰莫若以 明 .

莊子는 “ 道는 잔재 주에 가 려 지 고 말은 화 려 한 꾸밈 에 서 가려 진 다 . ” 라고 하면 서 당시 儒家와 墨家는 자신 들 의 사상만이 옳다고 고 집 하면 서 상 대 방 의 사상을 포 용 하고 서 로 아우르며 共存하지 못하고 있 다며 강도 높 게 비 판 하였 다 . 또 한 莊子 는 儒家와 墨家의 論爭처 럼 是非거 리 는 주 관 적 인 관 점 의 차이 에 서 비 롯 되 는 것 으 로서 , 인 식 의 절 대 성 을 부 정 하고 상 대 성 을 긍 정 적 으로 인 정 해 야 함을 역 설 하였 던 것 이 다 .

주 관 적 견 해 가 객 관 적 타탕성 을 견 지 하기 위 해 서 는 다른 견 해 에 대 한 폭 넓 은 이 해 로 공존 해 나가야 한 다는 것 이 다 .

즉 사상의 다양성 을 인 정 하고 , 自 省 하 며 다른 사상의 장점 을 수용하여 대 립 상 태 를 극복하고 무궁 한 도를 추구해 야 한 다는 것 이 다 .

王安石은 또한 젊 은 시 절 의 莊子에 대 한 비 판 인 식 에 서 전 환하여 “莊子는 聖人 과 근접 해 있 다” 고 호 의 적 인 평 가를 내 렸 다 .

莊子 의 저 작 은 性과 命의 구 분 을 명 백 히 하 였 고, 生死 禍福 으 로 써 그 의 마 음 을 방해 하 도 록 하 지 않 았 는 데, 이 것 이 그 가 聖 人 과 근 접 한 바 입 니 다. 자신 이 총 명 하 고 지 혜 롭지 않 았 다 면, 이 러 한 경 지 에 이 를 수 없 습 니 다. 총 명 하 고 지 혜 로 우 며 성 인 의 학 설 을 이 해 하 면, 또 한 이 러 한 ( 莊子 의 ) 경 지 에 이 를 수 있 습 니 다. 이 러 한 경 지 에 이 르 지 못 하 고 莊周 의 학 설 에 탐 닉 한 즉 혼 란 이 크 게 됩 니 다. 墨 翟 은 교 만 하 게 성 인 을 비 방 하 여 세 상 에 그 의 학 설 을 세 운 것 이 아니 고, 성 인 의 道를 배 워 서 그 것 을 잃 지 않 았 을 따 름 입 니 다. 비 록 莊周 라 해 도 그 렇 습 니 다. 韓愈 는 〈 讀墨 〉 을 써 서, 또 子 夏 이 후 에 流傳되 어 莊 周 에 이 르 렀 다 고 하 였 는 데, 즉 莊 子 ․ 墨 子는 모 두 성 인 을 배 우 고 그 근 원 을 잃 지 않 는 자들 입 니 다. 老 子 ․ 莊子 의 저 작 은 모 두 現 存하 는 데, 그 학설 은 神 仙 을 언 급 한 적 이 없 는 데 도 오 로지 葛 洪 은 兩 人 이 神 仙 이 라 고 전 하 였 습 니 다. 그 러 나 귀 하 께 서 는 老子 ․ 莊子 가 神仙 에 몰 두 하 였 다 고 하 셨 는 데, ( 저 는 이 것 이 ) 老 子 ․ 莊 子의 實質 이 아 니 라고 회 의 하 기 때 문 에 일 찍 이 귀 하 에 게 이 렇 게 말 한 적 이 있 습 니 다. 老 子 ․ 莊 子는 비 록 神仙 에 이 르 지 못 하 고 그 학설 또 한 經 書에 부 합 되 지 는 않지 만, 道에 뜻 을 둔 사 람들 입 니 다. 성 인 의 학 설 은 광 대 하 고 심 오 하 니, 여 력 을 남 기 지 않 고 추 구 해 야 합 니 다. 이 두 저 작 을 비 록 읽 고 자 하 나, 여가가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바는 여기에 이를 뿐이니. 道에서 멀어지 는가 부합하는가하는 것은 귀하께서 스스로 선택하기 바랍니다.35)

3 5 ) 《王荊公文集箋注》 , p p . 1 38 4 - 1 3 8 5 , 〈答陳柅書〉 : 莊生之书, 其通性命之分, 而不以死生祸福累其 心 , 此其近聖 人 也 . 自 非 明 智 , 不能及 此. 明 智矣 , 读聖 人之说 , 亦 足以 及此 . 而陷 溺於周之说 , 则 其 为乱大矣 . 墨翟惟非亢然诋聖 人 而立其说於世 , 盖学聖 人之道而失之耳 . 虽周亦然 . 韩氏作 《读墨》 , 而 又谓子夏之後 , 流 而为莊周 , 则莊、 墨皆学聖 人 而失其源者也 . 老 、 莊之书具在 , 其说未尝及神仙 , 唯 葛洪为二 人作传以为 仙 . 而足下谓 老、 莊潜心於神仙 , 疑 非老、 莊之实 , 故尝为 足下道此 . 老 、 莊雖不 及神仙 , 而其说亦不皆合於经 , 盖有志於道者. 聖 人之说 , 博 大而闳 深 , 要當不遗馀力 以求之 . 是二书 虽欲读 , 抑有所不暇 . 某之所闻如此 , 其離合於道 , 惟足下 自 择之

윗 글에 서 王安石은 “莊子의 저 작은 性과 命의 구 분을 명 백 히 하였 고 , 生死禍福 으로 써 그의 마음을 방 해 하도록 하지 않았는 데 , 이 것 이 그 가 聖 人 과 근 접 한 바입 니 다 . ” 라고 하면 서 《莊子》 의 학설 은 儒家學說과 같은 맥 락인 곳 이 있 으므로 , 莊 子는 聖 人 과 가깝다고 긍정 적 인 평 가를 내 리 고 있 다 .

〈 九變而賞 罰可言 〉 에 서 도 莊子가 聖 人 의 道를 이 해 하고 있 다고 해 석 하고 있 다 .

만 물 은 이 것 을 기 다 린 연 후 에 야 살 수 있 는 데, 이 것 은 바 로 하늘 이 다. 이 것 을 따 르 지 않 으 면 나 아 갈 수 있 는 것 이 없 는 데, 이 것 은 바 로 道 이 다. 道가 나 에 게 있 는 것 이 德 이 다. 德으 로써 사 랑 하 는 것 이 仁 이 다. 사 랑 하 고 마 땅 히 하는 것 이 義이 다. 仁 에 는 先後 가 있 고, 義에 는 上下 가 있 는 데, 이 것 을 分이 라 한다. 先 이 後 를 멋 대 로 하지 않 고 下 가 上을 침 범 하 지 않 는 것 이 것 을 守 라 고 한 다. 形 은 사 물 이 것 이 고, 名 은 命名 이 것 이 다. 소 위 사 물 이 것 은 무 엇 인 가 ? 貴 賤親 疎로 표 면 적 으 로 수 식 하 는 데 사 물 을 다르 게 한 다. 소 위 命名 이 것 은 무 엇 인 가 ? 貴 賤親 疎로 호 칭 하 는 데 命名 을 다 르 게 한다. 사 물 이 것 은 貴 賤 으 로 각 각 나 타 내 며, 命名 이 것 은 親 疎 로 각 각 명 칭 이 있 다. 親 疎貴 賤 에 의 하 여 마 땅 히 하 여 야 할 바 를 임 용 하 는 데, 이 것 을 재 능 에 근 거 하 여 임 용 한 다 고 일 컫 는 것 이 다. 마 땅 히 하 여 야 할 바 를 임 용 하 는 데, 방 종 하 여 살 피 지 않 은 즉 또 과 도 하 게 느 슨 할 수 있 으 므 로 반 드 시 상 황 의 근 간 을 추 구 하 여 야 하며, 반 드 시 그 일 을 성 찰해 야 하 는 데, 이 것 을 原 省 이 라 일 컫 는 다. 原 省 이 명 백 한 후 에 是 非 를 분 별 할 수 있 고, 是非 가 분 명 한 후 에 賞 罰 을 실 시 할 수 있 다. 그 러 므로 莊 周 가 말 하 기 를 “ 먼 저 하 늘 을 밝 힌 다 음 에 도 덕 을 그 다음 으 로 하 고, 도덕을 이미 밝힌 다음에 仁義를 그 다음으로 하고, 仁義를 이미 밝힌 다음에 分守를 그 다음으로 하고, 分守를 이미 밝힌 다음에 形名을 그 다음으로 하고, 形名을 이미 밝힌 다음에 因任(재능에 따라 임용함)을 그 다음으로 하고, 因任 을 이미 밝힌 다음에 原省(일의 본말을 성찰함)을 그 다음으로 하고, 原省을 이미 밝힌 다음에 是非를 그 다음으로 하고, 是非를 이미 밝힌 다음에 賞罰을 그 다음으로 한다.”36)라고 하였다. 이 말은 비록 莊周가 아니더라도 고대의 사 람이 누가 그렇지 않았겠는가? 고대에 道德의 來源을 말하면서 그것을 하늘 로 귀착시키지 않는 자는 여태까지 없었다. ------ 莊周가 말하기를 “다섯 번 째야 形名을 거론할 수 있고, 아홉 번째야 賞罰을 말할 수 있다.” 라고 하였고, 또 “道를 말하면서 그 차례에 의하지 않고서 어찌 道를 받아들일 수 있겠는 가?”라고 하였다. 훌륭하도다! 그 언론은! 37)

3 6 ) 《莊子 ․ 天道》 .

3 7 ) 《 王 荊 公 文 集 箋 注 》 , pp. 1 049 - 1 0 5 0. : 萬物 待是 而後 存者 , 天也 ; 莫不 由 是 而 之焉者 , 道 也 ; 道 之 在我者 , 德也 ; 以 德愛 者 , 仁 也 ; 愛 而宜者 , 義也. 仁 有 先 後 , 義有 上 下 , 謂 之分 ; 先不擅後 , 下不 侵 上 , 謂 之 守. 形者 , 物此者 也 ; 名 者 , 命 此者 也. 所謂物 此者 , 何也? 貴賤 親疎 , 所 以 表飾 之其物不 同 者 是也. 所謂 命此者 何 也 ? 貴 賤親疎 , 所 以 稱 號之 , 其命不 同 者 是也. 物此 者 , 貴 賤各 有 容 矣 ; 命 此 者 , 親 疎各 有號 矣. 因親疎貴 賤任 之 以 其所宜爲 , 此之 謂 因 任. 因 任 之 以 其所 宜爲矣 , 放 而不 察乎 , 則 又 將大 弛 , 必 原 其情 , 必 省 其 事 , 此之 謂原 省. 原 省 明 而後 可 以 辨是 非 , 是 非 明 而後 可 以 施 賞罰. 故 莊 周 曰 : 先 明 天而 道德 次 之 , 道 德 已 明 而 仁 義 次 之 , 仁 義 明 而分 守次 之 , 分 守 已 明 而形 名 次 之 , 形 名 已 明 而 因 任 次 之 , 因 任 已 明 而原 省 次 之 , 原 省 已 明 而是 非 次 之 , 是 非 已 明 而 賞罰 次 之. 是 說雖 微 莊周 , 古 之人孰不 然 ? 古 之言 道德 所 自 出 而不 屬 之天者 , 未 嘗 之有也. - - - 莊 周 曰 : 五变 而形 名 可 举 , 九变 而 赏 罚 可 言. 语道 而 非 其序 , 安 取道. 善乎 , 其 言 之 也 !

王安石은 윗 글에 서 莊子가 《 天道》 편 에 서 밝 힌 아홉 단 계 의 道의 발 전 단 계 즉 天 ․ 道德 ․ 仁義 ․ 分守 ․ 形名 ․ 因任 ․ 原省 ․ 是非 ․ 賞罰에 대 해 상세 하 게 설 명 하고 있 다 . 즉 莊子가 주장 한 천 지 만물의 이 치 인 道와 道를 실 천 하 기 위 한 자아 의 도덕 수양 , 사회 윤 리 와 정 치 관 계 에 대 해 긍정 적 으로 평 가하고 있 으며 , 특히 도덕 의 근 원 을 하늘 로 귀 착시 킨 점 을 莊子의 특성 으로 꼽 고 있 다 . 이 어 서 “ 다섯 번 째 야 形名 을 거 론 할 수 있 고 , 아홉 번 째 야 賞 罰을 말 할 수 있 다 . 道를 말하면 서 그 차 례 에 의 하지 않고서 어 찌 道를 받아들일 수 있 겠 는가 ? “ 3 8 ) 라는 《莊子 ․ 天道》 편 을 인 용 하면 서 莊子가 聖人 의 道를 이 해 하고 있 음을 밝 히 고 있 다 .

3 8 ) 《莊子 ․ 天道》 : 故書 曰 : 有形有名 . 形名 者, 古 人有之 , 而非所以先也 . 古之語大道者 , 五變而形名 可擧 , 九變 而賞罰可言 也 . 驟而語形名 , 不 知其本也 . 驟而語賞 罰 , 不知其始也 . 倒道而言 , 迕道而說者 , 人之所治 也 , 安能治 人 . 驟 而語形名 賞 罰 , 此有知治之具 , 非 知治之道 . 可 用於天下 , 不 足以用 天下 , 此 之謂辯士 , 一 曲 之人也 .

사실 상 王安石은 정 통 儒家思想을 계 승 하였 으 나 , 佛家 ․ 道家 사상이 儒家思想 과 부 합하는 부 분이 있 다고 인 식 하고 장 점 을 폭 넓 게 수용 하였 던 것 이 다 .

이 러 한 佛家 ․ 道家 思想에 대 한 긍정 적 인 식 은 그의 〈 漣水軍淳化 院經藏記 > 에 서 도 찾아 볼 수 있 다 .

道 가 하 나로 통 일 되 지 않 은 지 오 래 되 었 으 니, 사 람 들 마 다 자 신 들 의 見 識 을 至善으 로 생 각 하 여 천 하 를 교 화 하 고 자 후 세 에 전 하 고 자 하 였 다. 후세 학 자 들 은 혹자 는 몸 의 욕 망을 좇 고, 혹 자 는 세 상 이 추 세 에 유 혹 되 고, 혹자 는 내 심 이 좋 아 하 는 것 을 얻 고 자 하 였 으 니, 그 래 서 聖 人 의 大 道가 분 열 되 어 여 덟, 아홉 갈래가 되었다. 견문이 넓고 식견이 있는 뜻있는 선비들이 해진 곳을 보 완하고 조화롭게 완전해지기를 바랐지만, 역부족이고 또 시행할 만한 여지가 없어 결국 이룰 수 없었다. 대체로 무릇 無思無爲하고, 깊숙한 곳에 몰래 물러 나 숨 어 마음 이 고 요 하 여 움 직 이 지 않은 것 은 중 국 의 老莊과 西 域 의 불 교 이 다. 이 것 으 로 써 천 하 를 교 화 하 고 자 후세 에 전 해 지 니, 그 무 리 들 은 대 부 분 관 대 하 며 원 망 하지 않 았 으 며, 바 탕 이 온 화 하 여 구 하지 않 았 는 데, 원 망 하지 않 음 은 仁 과 유 사 하 고 구 하 지 않 음 은 義 와 유 사 한 것 이 다. 선 비 들 이 과 시 하 며 부 당 하 게 이 익 을 취 하 고, 자 기 만 이 있 고 다 른 것 은 고 려 하지 않 는 자 가 세 상 에 많 이 있 을 때, 세 속 을 초 월 하 여 그 들 이 삼 는 바 가 나 의 仁 義와 유사 하 다.3 9 )

3 9 ) 《王荊公文集箋注》 , p . 1 6 0 2 . : 道之不一久矣 , 人善其所見, 以爲敎於天下 , 而傳之後世. 後世學者或徇 乎身之所然 , 或誘乎世之所趨 , 或得乎心之所好, 於是聖 人之大體, 分裂而爲八九 . 博 聞該見有志之士 , 補 苴調胹 , 冀以就完而力不足 , 又無可爲之地 , 故終不得. 蓋有見於無思無爲 , 退藏於密 , 寂然不動者 , 中 國 之老、 莊 , 西域之佛也 . 旣以此爲敎於天下而傳後世 , 故爲其徒者 , 多 寬平不 忮 , 質靜而無求 , 不 忮似仁 , 無求似義 . 當士之夸漫盜奪, 有 己 而無物者 多於世, 則超然 高蹈 , 其爲有似乎吾之仁義者.

이 글에 서 는 먼 저 道가 하나로 통일 되 지 않음을 안타까워 하고 있 다 . 宋의 儒學 은 新學派 ․ 朔學派 ․ 洛學派 ․ 蜀學派 등 몇 개 의 학파로 나누어 져 서 로 다른 사상 구조를 형 성 하고 있었 다 . 비 록 기 본적 인 발판은 동일 하였 으나 , 多 岐한 의 식 의 차이 를 나타내 고 있었 다 . 다시 말 해 서 국가의 최 종 목표가 도 덕 적 사회 의 실 현에 있 다 는 사실 에 는 일 치 하였 지 만 이 러 한 이 상을 실 현 하는 방 법 에 서 는 의 견 을 달 리 하고 무엇 이 정 통인 가를 둘 러 싸고 논 쟁 이 발 생 하였 다 . 4 0 ) 이 러 한 상황 하에 서 王安石은 老莊과 불교의 사상이 儒家의 仁義와 유사하다고 하면 서 , 老莊과 佛敎 사상을 유가 사상과 조 화롭 게 융 합하여 당시 사상의 난 맥 상을 풀어 나가고자 하였 던 것 이 다 .

4 0 ) 拙稿 , 〈 王安石 記體文의 說理性〉 , 《 中 國 語文論叢》 1 2 집 , 1 9 9 7 . 6 .

 

4. 결 론

본고는 莊子와 관 련 된 王安石 詩文의 내 용 분석 을 통 하여 王安石이 莊子思想을 어 떻 게 비 판하고 수용 하였 는가를 고 찰하고자 하였 다 .

王安石은 개 혁 적 思想家 ․ 爲政者로서 그 가 추구 한 政治 的 理想은 堯 ․ 舜 ․ 三 代의 聖王 의 정 치 였 다 .

그는 天人相分說을 주장하며 , 天人 關係에 서 人의 人爲的 作 爲를 重視하고 , 이 를 실 천 하는 이 상적 인 물 로 聖 人을 설 정 하였 다 . 聖 人을 ‘ 만물의 이 치 를 밝히 고 , 그 이 치 에 도 달 하기 위 해 作爲 하는 者’ 로 인 식 하고 , 聖 人의 經世致 用 을 강조하였 다 .

또 한 君子를 ‘ 聖 人의 道를 추구하고 體現하는 者’ 로 상정 하고 , 君 子는 역 사 발전 을 주도 하는 개 혁 적 인 인 물이 되 어 야 한다고 역 설 하였 다 .

이 러 한 그 의 개 혁 사상의 근 간은 法家思想이 일 정 부 분 차지 하지 만 , 주축은 바로 儒家思想이 었 다 .

이 러 한 有爲之治를 주장하며 개 혁 을 부 르짖 은 王安石에 게 있어 서 莊子의 사 상은 비 판 의 대 상이 될 수 밖에 없 었 다 .

王安石은 寓言 과 같은 황 당무 계 한 글로 실 제 에 근 거 하지 않는 虛構를 통하여 道의 근본을 흔들 리 게 했다고 莊子를 비 판하 였 고 , 莊子가 주장한 無爲之治 와 復古 回歸를 歷史進化를 거 스르는 학설 이 라고 부정 하였 다 . 그 러 나 , 隱退한 이 후 晩年에 는 新法을 추 진 하는 과 정 에 서 쌓였 던 官界에 대 한 厭症에 서 벗 어 나 , 세 속을 초탈하고 無爲 自 然을 추구 하고자 하였 으므로 자연 히 佛家 ․ 道家思想에 대 하여 긍 정 적 인 식 을 갖게 되 었 던 것 이 다 .

그 러 므 로 儒家 와 法家를 개 혁 사상의 근간으로 삼아 新法을 추진 하던 시 기 에 그가 비 판 했 던 莊子 思想에 대 해 서 도 긍정 적 으로 수용 하는 입 장을 취 하게 되 었 던 것 이 다 .

無爲를 추구 하는 莊子같은 삶을 지 향하였 고 , 萬物齊 同論에 동 의 하였 다 .

또한 莊子의 生死 ․ 可不可 ․ 是非를 동 일 시 하는 인 식 의 상 대 성 을 긍 정 하고 , 사상의 다양성 을 인 정 하 고 自 省 하며 다른 사상의 장 점 을 수용하여 대 립 상 태 를 극복하고 무 궁 한 도를 추 구해 야 함을 역 설 하였 다 .

王安石은 晩年에 는 젊 은 시 절 의 莊子에 대 한 비 판 인 식 에 서 전 환하여 “莊子는 聖 人과 근 접 해 있 다” 고

긍 정 적 인 평 가를 내 리 고 莊子思想을 수용 하고자 하였 던 것 이 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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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中 文 提 要 》

王 安 石 不 僅 是 一 個 大 學 問 家 、 同 時 更 是 一 個 直 接 從 事 政 治 實 踐 活 動 的 政 治 改 革 家, 他 對 於 傳 統 儒 學 有 關 治 國 安 民 的 思 想 尤 爲 重 視, 往 往 通 過 對 前 人 觀 點 的 論 述 來 表 達 自 己 的 思 想, 內 容 涉 及 政 治 理 想 、 政 治 制 度 和 具 體 的 政 治 措 施. 王 安 石 處 於 漢 唐 經 學 儒 學 到 宋 明 道 學 的 學 術 思 想 轉 型 階 段, 他 的 儒 學 思 想 旣 繼 承 漢 唐 儒 學 經 世 致 用 的 傳 統, 又 開 啓 了 宋 明 道 學 側 重 性 命 之 理 的 風 氣, 是 北 宋 時 期 興 起 的 新 儒 學 思 潮 的 中 堅. 因 而 王 安 石 隱 退 以 前, 以 儒 家 本 位 的 思 想, 莊 子 思 想 方 面 是 不 表 贊 同 的. 他 不 同 意 莊 子 回 歸 遠 古 的 思 想, 認 爲 人 類 社 會 的 發 展 是 必 然 的 趨 勢, 聖人的製禮作樂是不得已的也是應該的. 他對於現實的弊病, 不9應該抱否定一切的虛無主義 態度, 重要的是要尋求解決現實弊病的方法. 但王安石晩年退居江寧以後, 他的觀點與早年相 比發生了變化, 他將無爲與莊子的逍遙理論結合在一起幷持贊賞態度, 對莊子修心養性的方式 心生同感. 王安石對於莊子的學說, 認爲他總體上不符合聖王之道, 但在一些具體問題的論述 上却有合理之處. 他認爲莊子的用心, 顯示其爲聖人之徒, 提唱莊學.

關鍵詞 : 王安石, 莊子, 有爲, 無爲, 批判, 受容.

 

 

 2010년 11월 20일 접수  2010년 12월 16일 심사완료 2010년 12월 21일  게재확정

 中 國 文化 硏究 第 1 7 輯 ​

王安石의 莊子思想 批判과 受容 樣相 (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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