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론
II. 자연에 대한 어원과 정의의 난제
III. 인간 중심-유기적 자연관
IV. 인간 중심-기계론적 자연관
V. 자연 중심–생태적 자연관
VI. 자연 개념의 변천과 기독교의 응답
VII. 결론: 관계론적-삼위일체론적 자연관을 향하여
I. 서론
기후변화가 존재하고 그 변화가 전 지구적 위기 상황을 가져오기에 기후 위기라고 불리는 것이 이제 상식적으로 통용될 정도이다. 그만큼 많은 사람 들이 지구 온난화의 현실을 몸으로 체감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관측 이래 최고 온도 경신, 최대 강수량, 최악의 홍수, 최악의 산불이라는 지구촌 곳곳 의 뉴스를 통해 많이 듣는다. 2024년도에 지구 평균 기온은 섭씨 15.09도로 역대 최고로 높았다.
2018년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패널(IPCC)이 서울에 서 발표한 “1.5도씨 특별보고서” 기후위기를 막기 위한 마지노선을 평균온 도 1.5도씨 상승으로 제안 하였는데, 이 기록이 깨진 것이다.
특별 보고서에 서 비관적인 전망으로 제시한 시나리오가 2030년-35년 사이에 1.5도씨 상승 이 돌파된다는 것이었는데 그 비관적 전망이 무려 6년이나 일찍 현실이 되었 다.
기후변화로 인한 생태계 위기에 시간이 매우 촉박한 상태이지만 관련 정 책 실천은 더디고 사람들의 행동에도 많은 변화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들의 변화와 실천을 위해 어떤 점 이 필요한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은 중요하다.
사람의 행동에는 그 사람이 지향하고 가치를 담고 있는 인식이 존재하고 그 인식의 깊은 곳에는 그 시대 가 담고 있는 세계관이 자리 잡고 있다.
기후변화를 막고 생태계를 온전하게 보전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자연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탐구가 필요 하다.
그런 의미에서 본 논문은 기후위기를 극복할 이론, 실천 그리고 신학을 논하기에 앞서 전제가 될 수 있는 자연의 개념을 탐구하고자 한다.
본 논문은 자연의 개념을 크게 인간중심적 자연관과 자연중심적 자연관으로 나누어서 그 변천사를 살펴본 뒤에 기독교 공동체와 신학이 그 변화에 어떻게 대응했 는지 살펴보고 비판적으로 평가할 것이다.
그런 후에 결론으로 관계론적-삼위일체론적 자연관1 을 기후위기 시대에 필요한 대안적 자연관으로 제시할 것이다.
1) 특별히, “관계론적-삼위일체론적 자연관”에서 ‘관계론적’이라는 형용사는 삼위일체를 수식하는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밝혀둔다. 각 시대별로 등장한 자연관은 종교인과 비종교인을 구 분하지 않고 세계관의 부분으로서 영향을 끼쳤다. 이런 맥락에서 본 논문은 기독교적 관점에 기반 을 두고 있음에도 관계론적-삼위일체론적 자연관을 기존 자연관들에 대한 대안인 동시에 공적영 역에서도 통용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제시한다.그러므로 여기서 ‘관계론적’은 내적으로 삼위일 체론과 상통하면서 동시에 외적으로 현대 생태학 담론과 상통하는 일반적 용어의 의미를 담고 있 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결론에 적시하였다.
II. 자연에 대한 어원과 정의의 난제
프레드릭 두카르메와 데니스 쿠베(Frédéric Ducarme and Denis Couve)는 “자연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논문에서 자연에 대한 정의 내리기 어렵다 고 말한다.
한 언어 안에서도 다중적 의미를 내포하며 시대에 따라 변천해 왔 기 때문이다.2
그래서 이러한 자연이라는 용어가 정의내리기 어렵기에 “전 지구적 자연 보존의 방해가 되거나 기회”가 될 수 있다.3
고대 그리스에서 자연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는 ‘성장하다’, ‘생산하 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phuein에 기반한 phusis (φύσις)에서 비롯되었다.
하지 만 자연이라는 단어는 존재론적 의미를 가지고 종교와 형이상학과 연결된 굉장히 광범위한 의미를 가지며 현재 자연과학에서 사용하는 자연이라는 단 어의 의미와 대비된다.
서양에서 최초로 자연과학을 포함한 학문 분과들을 구분했던 아리스토텔레스조차도 자연이라는 용어 사용에 모호성과 내적 모 순을 보여준다.
인간을 자연 안에 포함시키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의 반의어를 인공이 아닌 카오스(무질서)로 바라보며 이런 점에서 시민으로서의 인간이 야만인보다 보다 자연적인데 왜냐하면 야만적 사회보다 시민사회가 보다 질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4
2) Frédéric Ducarme and Denis Couve, “What does nature mean?,” Palgrave Communications 6:14 (2020), 1
3) Frédéric Ducarme and Denis Couve, ”What does nature mean?,” 2.
4) Frédéric Ducarme and Denis Couve, ”What does nature mean?,” 2.
고대 로마 당시 기독교 사회에서 자연에 대한 의미가 변화하였다.
창조개념을 수용하면서 자연의 의미가 크게 변화 했는데
“중세 말에 창조적 과정으로서의 ‘natura'의 의미는 더 이상 변화하 는 프로세스가 아니라 변하지 않는 세계의 유일한 창조신의 속성을 간주되 었다.”5
5) Frédéric Ducarme and Denis Couve, ”What does nature mean?,” 3.
이와 같이 자연의 개념은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게 다양하게 정의되어 왔고 시대별로 다르게 이해되어 왔다. 여기서는 어원적 정의만 간단히 살펴 보았고 이제 시대별로 자연관의 변천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III. 인간 중심-유기적 자연관
1. 선사시대
호모 사피엔스로 분류되는 인간이 지구상에 등장했을 때 인류를 포함한 당시 생태계를 이루던 어떤 존재도 향후 수 만년이 흐른 후 이 종(species)이 지구 생태계 전체와 기후 체계를 변화시킬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 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선사시대 인류는 험난한 자연에 서 적응하고 생존하느라 하루의 대부분을 보낼 정도로 자연의 절대적인 영 향을 받는 존재였다.
이처럼 선사시대 사람들은 전적으로 생태계에 의존되 어 있었기에 자신들을 자연의 일부로 인식하였다.6
6) 유발 하라리/ 조현욱 옮김, 사피엔스 (파주: 김영사, 2015), 80, 87.
그러므로 인간 공동체 와 자연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있다는 유기적 자연관의 시초가 이러한 초기 인류의 생태적 조건에서 출현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인간의 생존을 위한 투쟁과 욕구는 자연에 의존되어 있는 인간의 상황을 보다 자기중심적으로 변화시키려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 였다.
예를 들어 스페인 알타미라 등의 동굴에서 발견되는 구석기 벽화를 통 해 그러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당시 사람들이 어둡고 비좁은 동굴에 일 부러 찾아가서 그림들을 그린 근본적 이유에는 미적 탐구가 아닌 생존을 위 한 갈망이 존재하고 있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황소 등의 동물들은 가족 내 지 부족의 생존에 꼭 필요한 사냥의 대상이었고 그림은 그 동물들을 잡을 수 있게 해달라는 소망을 담은 주술적 행위의 표현이었다.7
7) 신현경, “구석기 시대 동굴벽화에 대한 연구-알타미라 동굴 벽화와 미술의 제례적 기능”, 「기초조 형학 연구」 제5권 제2호, 한국기초조형학회 (2004): 126-27.
이는 해, 달, 산, 바 다, 동식물 등 다양한 자연의 존재들이 선사시대부터 신앙이 대상이 되었던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는 하나의 관점이 된다.
그 자연물들은 선사시대 사람 들에게 단순한 공경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존(혹은 구원)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따라서 선사시대의 유기적 자연관은 자연의 일부로 서의 순응과 생존을 위한 간접적 통제 욕구가 구분 없이 복합되어 있는 관점 이라 말할 수 있다.
2. 고대시대 - 그리스의 이원론을 중심으로
신석기 시대의 농업혁명 이후로 사람들은 안정적으로 식량을 확보하게 되었고 한 지역에 정주하는 인구가 늘어나게 되었다. 농업과 목축업이 발전 하면서 자연환경을 이용하는 기술이 발달하였고 동물들의 가축화가 진행되 었다.
선사시대와 마찬가지로 고대 사회와 중세사회는 농경과 목축에 기반 한 사회였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자연에 철저히 의존하였고 자연환경의 변화에 민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사시대인들이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과 고대시대 및 중세시대 사람들이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하였 다.
자연과 동물은 더 이상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거나 사냥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필요에 따라 사용되는 대상으로 바뀌었다.8
이에 따라 자연에 대한 이해는 점차 인간 중심으로 변화되어 갔다.
이러한 자연관의 변화 뒤에는 인 간 사회의 변화가 중요한 요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농업혁명 이후로 정주 여 건이 좋아지면서 인간 사회의 단위는 더 커지고 복잡해졌으며 종교 및 정치 지도자들에게 권력이 집중되면서 계급사회로 변화해 갔다.
위계의 구조는 사회 곳곳에 뿌리 내려졌다.
성별, 경제력, 권력 등의 정도 차이가 점차 공고 한 사회질서가 되었다. 자연을 위대하게 혹은 두렵게 바라보고 신앙의 대상 으로까지 여겼던 사람들은 이제 자신의 위계적인 사회질서를 자연에 투영시 키기 시작하였다
. 위계적 사회의 관점으로 자연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9
특별히 기독교 자연관에 직접 영향을 미친 고대 그리스 자연관을 살펴보 겠다.
기원전 5-6세기경 이오니아 지방을 중심으로 한 고대 그리스 자연철 학자들은 자연을 인격신으로 묘사한 그리스 신화를 비신화화 하였다.
자연 현상은 더 이상 인격신의 모습이라는 신앙적 이야기의 일부가 아니라 합리 적으로 설명 가능한 근본 원인에서 비롯된 것이다.10
자연철학자들의 시대 가 저물고 상대주의를 주장한 소피스트 시대를 지나면서 사람들은 불변하는 진리나 원리를 찾았다.
이에 부응한 대표적인 철학자가 바로 플라톤(Plato) 이다.
그는 세상의 모든 현상 뒤에는 근본 원인인 이데아가 존재한다고 주장 했다.
특별히 육체를 영혼의 감옥에 비유하며 악하게 여기고11 천대했던 그 리스 세계관이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반영되어 있는데 플라톤에 따르면 이 세계의 존재는 이데아의 모조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8) Linda Kalof, Looking at Animals in Human History (London: Reaktion Books, 2007), 11, 22.
9) 머레이 북친, “사회 생태론,” 문순홍 편저, 생태학의 담론 (서울: 솔출판사, 1999), 111.
10) 자연철학자들마다 물, 불, 공기, 원자 등 서로 다른 근본 원인을 제시하였지만 근본 원인을 찾고 자연에 대한 합리적 설명을 시도한 점에서는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11) 윤미정, 황경숙, “『파이돈』, 『파이드로스』와 『국가』를 통해 본 플라톤의 신체와 영혼의 가치이원적 관계,” 「움직임의 철학 : 한국체육철학회지」 통권 45호, 한국체육철학회 (2011): 179-180.
20세기 과정형이상학 자 화이트헤드가 “모든 서구철학은 플라톤의 각주이다”12라고 말할 정도로 플라톤의 철학은 현재까지도 서양의 세계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2) Alfred. N.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New York: Free Press, 1985), 39,
따라 서 플라톤의 영육 이원론은 고대 및 중세의 자연관 형성에 중요한 기초를 제 공하였다.
물질로 이루어진 자연은 육(flesh)에 해당하는 것으로 정신이나 영 혼과 비교했을 대 열등하거나 이데아의 모사품일 뿐이다.
이후 플라톤 철학 을 종교철학적으로 발전시킨 신플라톤주의는 플라톤의 영육 이원론을 보다 체계화하였다.
일자로부터 유출된 세계라는 신플라톤주의 세계관 속에서 자 연은 일자로부터 멀리 떨어졌으며 인간 정신보다 열등한 지위에 있는 존재 로 여겨졌다.
3. 중세 - 아리스토텔레스적 자연관
고대 및 중세 초기까지 플라톤주의가 지중해 지역의 사상적 흐름을 지배 하다가 11세기부터 200여년 지속되었던 십자군 전쟁을 계기로 중세 유럽의 사상적 패러다임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로 넘어갔다.
비록 십자군 전쟁은 성 지 회복을 명분삼아 탐욕과 폭력으로 점철된 기독교의 부끄러운 역사지만, 오랜 전쟁과 더불어 이루어진 이슬람 문명과의 교류를 통해 당시 유럽보다 앞선 이슬람의 문화와 기술을 유럽인들이 배우게 되었다.
그 중에 아리스토 텔레스 저작들이 다시 번역되어 유럽에 들어오면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유행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뿐만 아니라 식물과 동물 등 자연 속 존재들에 관 심이 많았고 500종이 넘는 동물들을 관찰하고 분류하였을 정도로 자연에 대 한 경험과 관찰을 중요시하였다.
그래서 플라톤과 달리 세계의 본질을 세계밖에서 찾지 않고 세계 내에서 찾았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더 이상 이데 아의 모조품이 아니라 내적 본질을 가지고 있는 실체(substance)이다.
실체는 네 가지 원인, 질료인, 형상인, 작용인, 목적인으로 분석된다.
이와 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 철학은 개별자를 중요하게 바라보기 때문에 자연을 존중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 레스 또한 위계적 세계관을 벗아니지 못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하여 “이성적 동물”이라고 규정하였으며 그 이성 때문에 인간의 영혼이 “신적 지성(nous)”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13
13) 차영주, “인간 본성에 관한 교육철학적 고찰: 고대 그리스 사상의 ‘자연’ 개념을 중심으로”, 「교 육철학연구」 제45권 제3호 한국교육철학학회(2023): 193.
IV. 인간 중심-기계론적 자연관
1. 근대과학의 혁명
중세시대와 근대시대를 구분하는 요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근대 과학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인들은 자연을 바라볼 때 중세의 아리스토 텔레스주의적 요소를 제거하려 하였다. 이제 인간은 자연 속에 존재하는 것 이 아니라 자연을 외부에서 관찰할 수 있으며 자연과 독립된 존재로 간주하 였다.
과학자들은 자연에 대해 주관적으로 판단할 여지가 있는 느낌과 성질 은 배제시키고 정량화하고 양적으로 측정 가능한 방법이 자연을 올바르게 연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베이컨과 같은 당시 과학자들은 “대지를 ‘지배’하고 ‘관리’하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14
14) 캐롤린 머천트/ 허남혁 옮김, 래디컬 에콜로지 (서울: 도서출판 이후, 2007), 78.
2. 자연을 시계로 – 기계로서의 자연
과학기술의 발전은 사람들의 자연 및 인간 이해에 큰 영향을 끼쳤다.
대 표저인 사례가 시계의 발명이다.
보통 중세 시대에 유럽 마을의 중심에는 교 회가 있었다.
이는 중세의 시대적 중심이 교회에 있음을 보여준다 하겠다.
교 회가 세상의 중심임을 드러내는 중세유럽의 문화가 또 있는데 그것은 교회 의 종소리이다.
농촌의 날은 교회가 새벽에 종을 치는 것으로 시작했다가 저 녁 무렵에 종이 치는 소리를 들으면 농민들은 밭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따라 서 하루의 리듬이 교회의 종소리로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태엽 시계가 발 명되면서 이러한 문화는 완전히 변하였다. 교회의 종은 시계탑으로 바뀌었 다.
이런 맥락에서 시계는 중세에서 근대로의 변화를 상징하는 물건이 되었 다.
중세시대 사람들은 교회가 종을 치는 소리로 하루의 시간을 어렴풋이 알 았지만 근대시대 사람들은 시계를 통해 시분단위로 시간을 정확히 알게 되 었고 생활리듬도 시계에 맞추어 갔다.
특별히, 시계 속에 있는 기계장치가 시초가 자동으로 돌아가는 모습은 당시 사람들에게 굉장한 충격이었다.
시 계를 통해 시간이 정확하게 흘러가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근대인들은 자연을 시계에 비유하기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연 속에 기계장치가 숨겨 져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15
이러한 문화적 변화 속에서 근대 과학자들 은 자신들의 과학적 업적들 속에서 자연을 기계처럼 간주하는 기계론적 자 연관을 제시하였다.
근대 근대과학 방법론의 기초를 놓은 프란시스 베이컨 Francis Bacon) 16과 근대 물리학을 세운 아이작 뉴튼(Issac Newton) 17은 동일 하게 자연을 기계와 같다고 보았다.
15) 이마무라 히토시/ 이수정 옮김, 근대성의 구조 (서울: 민음사, 1999), 71-72.
16) 이마무라 히토시, 근대성의 구조. 109.
17) Ian G. Barbour, Religion and Science: Historical and Contemporary Issues, 1st HarperCollins rev. ed. (San Francisco: HarperSanFrancisco, 1997), 18.
기계론적 자연관이 과학기술의 발달을 촉진시키고 경제 성장에 기여한 부분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연 생태계의 관점에서 기계론적 자 연관은 부정적 영향이 더 크다. 왜냐하면 기계론적 자연관이 자연환경을 파 괴하고 훼손시키는 일에 세계관적 근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중세시대까지 자연의 존재들은 인간보다 열등할지언정 어떠한 영혼을 가진 존재이며 목적 성을 가진 존재로 여겨졌지만 기계론적 세계관에서 자연은 영혼 없는 기계 일 뿐이다.18
18) 근대 철학의 기초를 놓은 르네 데카르트는 동물을 자동기계로 묘사한다.
공장에서 기계를 무한대로 돌리고 고장 난 부품은 버리고 새로 운 부품으로 교체하는 일에 어떤 사람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자연을 기계로 여기는 일은 자연을 원하는 대로 사용하고 기계처럼 마음대 로 조작한 뒤에 사용가치가 없으면 버리는 행위를 쉽게 만든 것이다.
3. 인간: 자연의 통제자
과학이 바라보는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다. 그래서 근대의 기계론적 자연 관은 과학적으로 인간에 적용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순서였다.
18세기 프 랑스 의사이자 과학자였던 쥘리앙 오프레 드 라메트리(Julien Jean Offroy de La Mettrie)는 그의 글 “기계로서의 인간”(man a machine)에서 의학 및 생리 학적 증거들을 가지고 “인간은 기계이며, 온 우주에는 다르게 변화된 것일 뿐 단 하나의 실체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과감하게 결론을 내린다.19
19) Julien Offray de La Mettrie, Man A Machine (Chicago: The Open Court Publishing Co., 1912), 148.
여기서 “하나의 실체(substance)”는 물질을 말한다.
이러한 관점은 20세기 이후 생물학이나 신경과학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한 과학적 유물론에 영 향을 주었다.
하지만 근대의 시상가들은 많은 경우에 있어서 인간을 자연과는 구별되 는 특별한 위치에 놓았다. 데카르트는 인간과 자연의 구분을 인간의 생각하 는 능력, 곧 이성에서 찾는다.
인간의 합리적 이성능력을 인간의 독특성, 나 아가 우월성을 보여주는 근거라는 주장은 근대시대 사상가들 사이에 거의 공통적인 전제였다.
이러한 근대적 인간중심주의는 휴머니즘이라는 사상적 조류와 운동 속에서 인간의 가치를 발견하고 평등사상과 인권 개념을 발전 시킨 긍정적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인간은 기계론적 자연관에서 예외적 존재가 되어 야 했다.
왜냐하면 자연이라는 기계를 통제하는 존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생태철학자 머천트는 이에 대해 “자연의 지배는 작동자로서의 인간에 대한 의존, 관리자로서의 인간과 권력에 대한 강조, 진보와 발전의 기준으로서 질 서와 합리성에 대한 강조에 근거한다.”라고 평한다.20
그런데 머천트는 “권 력과 통제라는 관련 가치들과 결합된 기계론적 틀은 자연과 사회에 대한 관 리를 가능하게 해 주었다”라고 말하면서 인간이 통제자가 될 수 있는 배경 에는 기계론이 있다고 지적한다.21
히토시도 비슷한 맥락의 주장을 펼친다.
인간이 자연이라는 기계를 통제하는 예외적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분할 할 수 없는 물질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기계론적 자연관이 더 이상 분할할 수 없는 근대적 개인주의를 가능했기 때문이다.22
20) 캐롤린 머천트/ 허남혁 옮김, 래디컬 에콜로지, 89.
21) 캐롤린 머천트/ 허남혁 옮김, 래디컬 에콜로지, 89.
22) 이마무라 히토시/ 이수정 옮김, 근대성의 구조, 120.
4. 자본주의와 결합 – 자연파괴 근대
기계론적 세계관과 개인주의의 결합이 왜 전지구적 생태계 파괴의 결과로 이어졌는지 이해하려면 기계론적 자연이해 및 개인주의가 결국 자본주의와 강하게 결합되는 역사로 이어졌음을 알아야 한다.
근대시대 많은 사 상가들이 시민들이 인간의 가치를 수호하고 자유 및 평등을 논하고 그 가치 들을 성취하기 위해 투쟁한 공헌은 소중하지만 그 가치들은 여전히 부분적 이거나 선택적 주장이었다.
왜냐하면 산업혁명과 자본주의가 발흥하던 시기 에 서구 열강들이 자원 및 시장 확보를 위해 무력을 통해 식민지들을 앞 다 투어 건설하였고, 식민지 시대를 통하여 노예매매, 자원 수탈, 인종 차별과 같은 온갖 악행들이 행해졌기 때문이다.
그들이 얘기한 자유, 인권, 평등은 백인 남성 중산층과 같은 특정한 계층에만 적용했던 가치였던 것이다.
식민지 시대를 통해 형성된 전 세계적 시장화에 힘입어 자본주의가 본격 적으로 정착되고 확장되었다.
이러한 자본주의는 20세기 이후로 소비 자본 주의로 바뀌면서 세계는 하나의 거대한 공장이 되었고 상품들은 거의 무한 히 생산되고 있다.
이러한 상품 생산과 소비의 거대한 사슬은 필연적으로 자 연자원을 훼손하고 생태계를 파괴하였다.
현재 기후위기의 주범으로 지목되고 있는 탄소배출량이 산업혁명 이후 부터 급격히 증가했다는 사실은 자본주의 발전과 환경파괴의 증가 사이에 분명한 상관관계 있음을 보여준다.23
최근에 등장한 탈식민적 생태비평24 은 이러한 상관관계 속에 불평등도 존재한다는 점을 비판적으로 제기한다.
탈식민주의 비평가들에 따르면 식민시대 피지배 국가들은 정치적 독립 이 후에도 사상적, 문화적, 경제적으로 과거 지배 국가들이나 20세기 신식민주 의를 주도하는 미국에 여전히 종속되어 있다.25
23) IPCC, 2023, Climate Change 2023: Synthesis Report. Contribution of Working Groups I, II and III to the Sixth Assessment Report of the 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 [Core Writing Team, H. Lee and J. Romero (eds.)]. IPCC, Geneva, Switzerland, 184 pp., doi: 10.59327/IPCC/AR6- 9789291691647, 42-43.
24) 탈식민적 생태비평(postcolonial ecocriticism)은 탈식민주의와 생태주의가 융합하는 비평분야로 식민주의 및 제국주의의 영향이 인간 사회를 넘어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도 존재함을 드러내려고 한다.
25) 박종성, 탈식민주의에 대한 성찰 (파주: 살림출판사, 2006).
예를 들어, 신자유주의 경제시스템은 임금지출의 최소화를 위해 제3세계 시민들을 열악한 노동환경에 서 저임금 노동자로 사용하는 구조를 만들었는데 이는 탈식민주의적 시각에 서 신식민주의 경제구조로 비판된다.26
탈식민적 생태비평가들은 이러한 탈식민주의 비평을 생태계 파괴 현실 에 적용하여 비평한다.
식민지로 오랫동안 지배당한 지역, 예를 들어 아프리 카나 남미지역의 자원수탈이나 환경파괴가 식민지 지배자 위치에 있던 서 구 국가들의 환경파괴보다 훨씬 심각하다. 유럽의 식민지화 이후에 카리브 해 원시림과 아마존 숲이 급속도로 사라졌으며 지배국가의 사람들과 동식물 들이 식민지로 이주하면서 식민지 생태계는 큰 변화를 겪어야만 했다.27
이 러한 현상은 오늘날 세계화 이후에도 지속되어 생태학적 신식민주의 현실이 확대되고 있다.
신정환의 분석에 따르면, “지구상 모든 곳을 통제하는 것이 가능해진 강대국들은 제3세계 국가들을 고부가 가치산업의 소비시장이자 자신들의 기본재화를 생산해 내는 굴뚝산업 공장 겸 쓰레기 하치장으로 전 락시켜 버렸다.”28
IPCC 6차 보고서에서도 드러난 것처럼 기후변화의 피해 는 산업기반이 약해서 탄소배출을 덜 하는 국가들이 탄소배출을 많이 하는 선진국들보다 더 크다.29
26) 나시카와 나가오/ 박미정 옮김, 신식민지주의론 (서울: 일조가, 2009).
27) 신정환, “탈식민주의 생태 비평과 라틴아메리카 문학”, 「외국문학연구」 제47호(2012), 81-82.
28) 신정환, “탈식민주의 생태 비평과 라틴아메리카 문학”, 84.
29) IPCC, 2023, Climate Change 2023: Synthesis Report. Contribution of Working Groups I, II and III to the Sixth Assessment Report of the 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 51, 101.
나아가 탈식민적 생태비평을 더 거시적으로 적용 하면 인류 문명이 자연 전체를 식민지화하고 있고 인간의 이기적인 번영을 위해 자연의 존재들을 노예처럼 부리며 수탈하고 있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V. 자연 중심–생태적 자연관
1. 현대 과학적 생태학 - 가이아 이론을 중심으로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생태계를 파괴하고 오늘날 기후위기의 근본 원인 이 된 기계론적 자연관의 형성에 근대과학자들이 결정적 기여를 하였다.
아 이러니컬하게도 기계론적 자연관에 균열을 내고 자연이해의 새로운 패러다 임에로의 변동을 주도한 사람들도 과학자들, 특별히 20세기 초반 1920-30년 대에 활약했던 양자물리학자들이었다.
양자물리학자들은 전자와 같은 미시 세계 물질들의 운동을 관찰하면서 물질의 운동이 고전역학이 설명하듯 견고 한 물질들이 상호교환 내지 상호침투 없이 기계부품처럼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물질의 벽은 눈에 보이는 것과 달리 외부에 열려있어 다른 물질들과 에너지를 상호 교환하고 있으며 입자와 파동이라는 이중성을 가지 고 있어 물질의 측정은 통계적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대 물리학 의 패러다임 전환으로 인해 자연에 대한 환원주의적, 결정론적 해석은 힘을 잃고 비환원적, 비결정적, 혹은 관계론적 해석으로 이행될 수 있는 과학적 기 초가 마련된 것이다.30
30) Ian G. Barbour, Religion and Science: Historical and Contemporary Issues, 166-173.
20세기 이후의 이러한 과학계의 패러다임 변화는 물리학뿐만 아니라 생 명과학 분야에서도 일어났다.
대표적인 예로 생태학이라는 새로운 과학 분 야의 등장이다.
생태학은 유기체와 유기체를 둘러싼 환경과의 상호관계 및 순환구조에 관심을 가지기에 전체론적이고 관계론적 연구 관점 및 방법을 취하는 경향을 가진다.
비록 20세기의 물리학의 패러다임 변화가 생태학 등 장에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기계론적 자연 이해에 서 관계론적 자연 이해로 이행되는 시대적 변화 형성에 양자물리학과 생태학은 과학계 내에서 절묘한 동행자가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생태학의 이론들 가운데 제임스 러브락(James Lovelock)이 제창 한 가이아 이론을 여기서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가이아 이론은 생 태학 분야뿐만 아니라 20세기 중후반 이후에 등장한 철학적 생태주의 사조 들에 상당부분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러브락은 이데올로기에 치우친 환 경주의자들에 비판적이었지만, 그의 의도와 달리 가이아 이론이 생태주의자 들에게 매력적이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따라서 가이아 이론은 과학적 생태학과 철학적 생태학 사이에 가교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러브락에 따르면 태양계 내에서 지구라는 행성은 매우 독특하다. 초기 지 구는 다른 행성들처럼 생명체가 살기 불가능한 환경이었다. 그런데 약 35억 년 전 쯤 최초의 생명체들이 등장한 이후 지구는 현재까지 생명체가 살 수 있는 환경을 가진 행성으로 변모하였다. 러브락은 지구에 등장한 수많은 생 명체들(생명권)과 지구환경이 상호작용하면서 지구를 생명체들이 살기에 적합한 환경으로 만들어왔다고 보고 이를 그리스 여신에 빗대어 가이아 가 설이라고 명명하였다.31
가이아 가설의 관점에서 볼 때 생명체들은 기계의 부품처럼 지구환경 시스템에 수동적으로 적응하는 존재들이 될 수 없다.
오 히려 모든 유기체들은 지구환경과 끊임없는 상호작용과 상호순환 과정을 통 해 지구환경을 구성해가는 능동적인 존재들이다.32
31) 제임스 러브락/ 홍욱희 옮김, 가이아: 살아있는 생명체로서의 지구 (서울: 갈라파고스, 2004), 70- 75.
32) 러브락은 이를 가이아의 “능동적 조절 시스템(active control system)”이라고 부른다. 제임스 러브 락, 가이아: 살아있는 생명체로서의 지구, 75.
여기에 기계론적 자연 이해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
2. 근본 생태론
1960년대 이후 오염수, 쓰레기, 공해 등 환경문제들이 사회적 이슈가 되 고 전 지구적인 생태계 파괴에 대한 심각성이 제기되었다. 환경운동들이 활 발해지고 사회적 논의가 무르익으면서 다양한 생태철학 사조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물론 68혁명과 같이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인종차별금지 운동, 여 성권 운동, 노동권 운동, 반전 운동 등 기성사회 질서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비판 운동들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던 시대적 분위기가 환경파괴에 대한 비판의식과 비판운동들로 이어지게 된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가이아 이론과 같은 과학적 생태학에 영향을 받았고 그러면서도 독자적 인 생태 철학을 내세운 것은 근본 생태론(Deep Ecology)이다. 근본 생태론은 노르웨이 철학자 안네 네스(Ane Ness)가 제창한 철학으로 심층 생태론이라 고도 번역된다.33
네스가 자신의 생태철학에 이러한 명칭을 붙인 이유는 기 존의 기계론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자연관과 그리고 세계관에 근본적인 전환 을 요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근본 생태론은 현대 생태위기의 해법으로 다음 과 같은 원리들을 제안하였다.
첫째, “자연 속의 인간”관점과 인간과 비인간 생명체의 동등한 중요성을 강조한다.
둘째, “개인과 지구의 총체적인 어울 림”을 의미하는 “거대한 자아(Great Self)”의 철학을 요구한다.
셋째, 산업 사 회를 거부하고, 땅을 야생지로 회복시켜 “미래의 원시인”처럼 살아가자고 제안한다.
넷째, “인간 중심적 윤리”가 아닌 “생태 중심적 윤리”를 지향한 다.34
33) 캐롤린 머천트, 래디컬 에콜로지, 140.
34) 캐롤린 머천트, 래디컬 에콜로지, 142.
3. 여성생태주의
생태여성론은 1970년대 여성과 자연과의 연관성이 주목되며 등장한 용 어로, 프랑스의 작가인 프랑수아 도본에 의해 만들어졌다.35
생태여성론에 는 자유주의, 문화적, 사회적/사회주의 라는 분파가 존재한다.
자유주의 생태여성론은 17세기에 시작되어 1960년대까지 이어진 여성 론을 말하는데 앞서 설명한 근대 기계론적 자연관을 수용하고 인간에게 적 용하여 “인간을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 하는 개별적인 합리적 행위자”로 본 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 이익 추구를 긍정적으로 보되 여성들은 “교육 과 기회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에” 이익을 취하지 못한 것이다. 자유주의 생 태여성론자들에게는 남성과 동등한 기회를 통해 “과학자, 자연 자원 관리자, 규제자, 법률가, 의원”이 된다면 여성들도 남성들처럼 환경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36
문화적 생태여성론은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에 발전한 이론으로 여성과 자연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본다.
문화적 생태여성론자들은 여성 이 남성보다 “생리적, 사회적 역할, 심리”로 인해 자연에 더욱 친화적이라고 주장하며, 종종 “여신 숭배”나 “고대 의례의 부활”과 같은 반과학, 반기술적 경향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런 사상 위에서 문화 생태여성론자들은 여성의 육체와 연관하여 오염되고 파괴되는 환경문제들(“방사능, 유해폐기물, 가정 화확물질” 등)을 비판하고 활동하였다.
그럼에도 문화적 생태여성론은 남성 들 또한 자연을 보살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어렵게 만들고 자본주의가 왜 자연을 지배하는지에 관해 설명하는 데 있어 취약하다. 이러한 연유로 다 른 여성론자들에게 비판을 사기도 한다.37
35) 캐롤린 머천트, 래디컬 에콜로지, 287.
36) 캐롤린 머천트, 래디컬 에콜로지, 293-295.
37) 캐롤린 머천트, 래디컬 에콜로지, 296-300.
사회적 생태여성론은 자연 지배가 근본적으로 인간 지배에서 시작되었 다는 사회 생태론의 전제를 수용한다. 사회적 생태여성론은 “경제적, 사회 적 위계의 전복을 통한 여성 해방을 옹호”하면서 “자본주의적 생산과 관료 제적 국가에 필수적인 공공-민간 이분법을 초월하는 분권화된 공동체 사회 를” 추구한다.38
한편, 사회주의 생태여성론은 사회주의 여성론의 변형적 이론으로 즉, 생산보다 재생산을 중시하고 “자연은 지배받는 수동적인 객체 가 아니라 능동적인 주체이며, 인간은 자연과 지속가능한 관계를 발전시켜 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화적 생태여성론과 달리 사회주의 생태여성론은 자 본주의 위계 구조를 비판한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39
38) 캐롤린 머천트, 래디컬 에콜로지, 302.
39) 캐롤린 머천트, 래디컬 에콜로지, 305. 318 「기독교철학」 제42호
VI. 자연 개념의 변천과 기독교의 응답
지금까지 자연의 개념이 변화해온 역사를 핵심적으로나마 살펴보았다.
크게 분류해보자면 오랜 역사를 가진 인간중심주의적 자연관과 비교적 최근 에 등장한 생태중심적 자연관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인간중심주의 자연관 은 다시 중세시대까지의 위계적인 유기체주의에 근거한 자연관과 근대시대 의 기계론적 자연관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처럼 시대에 따라 자연관이 변화 해온 역사적 흐름 속에 기독교의 역사도 함께 존재 하였고 교회와 신학자들 은 각 시대의 자연관과 소통이 가능한 신학을 제시해왔다.
왜냐하면 신학 본 연의 임무는 교회공동체가 처한 시대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신학을 재구성하고 그 바탕 위에서 기독교의 진리를 해석하고 전하는 것이 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각 시대의 신학적 해석은 각 시대별로 소구력이 있고 당시의 맥락에서 가지는 일정정도의 정당성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신학적 해석이 현대의 상황에서 맞지 않는다면 현재를 살아가 는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 과거의 해석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할 것은 비판하고 현재 상황에 맞는 새로운 해석을 재구성하고 제시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절에서는 자연의 개념의 변화에 따른 신학의 변화를 간략 하게 그렇지만 비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위계적-유기체적 자연관에 대한 신학의 응답은 그리스-헬라 시대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볼 필요가 있다.
그리스-헬라 세계관에 영향을 받기 이전 시기에는 대체로 창조세계, 땅, 육체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이거나 중립 적이다.
창조기사에 창조의 날이 마무리 될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라 는 구절을 통해 볼 때 피조물들은 창조주의 긍정으로 시작된다.
인간은 땅으 로부터 만들어진 존재이며 다시 땅으로 돌아가는 존재이다.
따라서 히브리 적 세계 이해는 하나님 중심의 일원론적 세계이며 그 안에서 영육 이원론이 잘 발견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가 그리스-헬라 문화권의 영향을 받은 포로기 이후 및 신 약시대부터 달라진다.
기독교는 창조주 하나님 신앙, 성육신 신앙, 예수의 하 나님 나라 운동, 부활사상 등을 통해 영지주의적 영육 이원론에 빠지지 않도 록 노력하였다.40
그럼에도 기독교 역사 속에서 영혼을 중시하고 육체를 탐 욕과 강하게 연결시키며 부정하게 생각하는 전통은 오랫동안 존재해왔다. 구원을 전인적 구원보다는 영혼구원으로 생각하고 천국을 사후에 영혼만 가 는 장소의 개념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많았다.
신플라톤주의 영향을 받은 어 거스틴이 죄가 육체(성)를 통한 유전된다고 주장한 것41, 중세교회에서 많 이 행한 육체적 고행 관습도 육체에 대한 부정적 시각의 사례라고 할 수 있 겠다.
40) 폴 틸리히/ I.C. 헤넬 엮음/ 송기득 옮김, 폴 틸리히의 그리스도교 사상사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0), 67-71, 73-81.
41) 폴 틸리히, 폴 틸리히의 그리스도교 사상사, 175.
더불어 중세 기독교의 영육에 대한 위계적 사고는 당시 사회 계층의 위계구조와 자연에 대한 인간 우월주의적 사고를 함께 반영하고 있다.
둘째, 위계적-기계론적 자연관에 대한 신학의 응답은 근대 과학의 발전 과 계몽주의의 도전에 대한 교회 및 신학의 대응과 함께 살펴보는 것이 필요 하다.
사실 중세시대를 무너뜨린 세력에는 과학자들과 계몽주의자들의 등장 이전에 종교개혁자들이 존재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중세 가톨릭의 부패를 비 판하면서 중세의 종교 권력을 무너뜨렸을 뿐만 아니라 만인제사장설을 통해 개인의 가치를 증대시키고, 직업 소명론을 통해 과학자들이 신의 창조 세계 를 탐구한다는 직접적 자부심을 고취시켜 과학연구의 발전에 정신적, 심리 적 기여를 하였다.
하지만 과학적 합리주의와 계몽주의가 사회주류가 되었을 때 기독교 신 앙은 비이성적, 비합리주의 소산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에 근대 신학자들 은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아 과학적 학문 방법을 성서비평 등의 신학에 적용 하기 시작했다.
윌리엄 페일리(William Paley)와 같은 신학자들은 근대 과학 의 기계론적 자연관을 수용하여 신을 시계공에 비유하며 신은 창조 이후에 시계처럼 자동으로 돌아가는 자연 운행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이신론(理神 論, Deism)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이신론적 신은 피조물과 소통하는 성서의 하나님과 부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께 예배하고 기도하는 신앙 적 행위를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리는 문제를 갖고 있다.
나아가 기계론적 자 연관은 근대 후기에 무신론적 과학주의 등장을 낳는데 기계론적 자연관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신학이 결국 무신론과 과학기술의 비윤리적 남용을 허 용한 데 기여한 형국이 되었다.
조금은 다른 맥락이지만 앞에서 언급한 탈식민적 비평의 관점에서 기계 론적 세계관과 기독교의 관계를 비판할 수 있다.
이성 우월주의 및 백인 우월 주의를 함의했던 계몽주의를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수용한 근대인들은 열등 한 민족에 우월한 문화와 사상을 전파하고 그들을 바른 길로 계몽한다는 논리를 통해 식민지 개척을 정당화했다.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과 성직자들은 이러한 논리를 선교에 적용하였다.
식민지 피지배인들을 진리를 모르는 미 개인들로 열등하게 여기며 복음을 통해 진리로 이끈다는 논리는 결국 총과 성경이 동시에 들어가는 정복주의적 선교를 정당화했고 피지배인들에게 기 독교를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각인되게 만들고 말았다.
이러한 우월주의와 선민의식은 자본주의 체제 속 경제적 성장과 부의 축적을 신앙적으로 정당 화시킨다.
미국 중남부의 근본주의적 기독교 그룹과 한국의 일부 보수 기독 교 그룹이 이러한 의식을 공유한 대표적인 그룹들이라 할 수 있다. 교회의 양 적 성장이 신앙과 목회의 기준이며 약자를 돌보는 공동체적 신앙보다는 개 인의 번영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42
42) 김성건, “기독교와 정치 - 미국과 한국의 복음주의를 중심으로”, 「담론 201」 15(2), 통권 46호, 한 국사회역사학회, 122.
최근에 미국의 보수 기독교 그룹이 지 구온난화를 가짜 뉴스라고 여기며 미국의 기후협약 탈퇴를 감행한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하였다.
이를 볼 때 이러한 그룹의 기독교인들은 자연을 성공 을 위한 수단으로만 여기는 기계론적 자연 이해를 여전히 고수하는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셋째, 기독교에는 앞서 말한 자연을 인간을 위한 축복이자 수단으로 여기 며 생태계 문제를 도외시하는 그룹만 존재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많은 그리 스도인들이 환경파괴를 창조질서의 훼손으로 여기며 생태계 보존을 위한 시 민운동과 실천에 참여해 왔다.
여기에 신학자들도 다양한 관점으로 신학적 대응을 하였다.
다만 생태중심주의 자연관에 대한 신학의 응답은 크게 소극 적 대응과 적극적 대응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소극적 대응은 방어적 대응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1960년대 역사가 린 화이트(Lynn White)가 생태계 위기의 근본 원인에 기독교가 있다고 비판하 며 창세기 1장의 “땅을 정복하라”는 구절에 대한 문자적 해석이 서구 문명 의 환경 파괴를 정당화했다고 지적하였다.43
이에 대한 많은 성서학자들은 성서가 쓰여 질 당시의 맥락에서 ‘정복하라’의 의미는 파괴의 의미가 아니 라 신의 선한 다스림의 청지기적 임무를 인간에게 위임한 것으로 해석해야 함을 강변했다.44
조직신학자들은 생태계 파괴의 주범을 기독교로 지목한 화이트는 근대의 기계론적 세계관과 탐욕적 자본주의로 생태 파괴가 발생한 현실을 외면하거나 축소하였다고 비판하였다.45
한편, 적극적 대응은 많은 현대 신학자들이 생태신학이라는 분야를 새롭 게 개척한 노력에서 발견된다.
생태신학자들은 생태계 문제를 진지하게 고 민하며 창조 질서 회복을 위한 새로운 성서 해석 및 신학적 재구성에 다양한 기여를 하였다.
이들은 과학적 생태학의 연구 결과들을 참고하면서 자연중 심적 생태철학에도 일정 부분 영향을 받았다. 예를 들어, 가톨릭 생태신학자 매튜 폭스(Matthew Fox)는 창조 영성을 논하면서 우주의 창조는 본래적으로 선하며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원복(the original blessing)을 강조하였다.46
이 는 근본 생태학이 회복해야한다고 주장했던 원시 자연에 대한 생태신학적 해석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생태신학 분야에서 생태여성신학은 큰 영향을 끼쳤는데 생태여성 신학은 명칭이 보여주듯 생태여성주의의 신학적 재해석이다. 대표적인 생 태여성신학자에는 로즈마리 류터(Rosemary Reuther)와 샐리 맥페이그(Sallie McFague)가 있다. 류터는 여성주의 역사가 캐롤린 머천트에 영향을 받아 기 독교의 성서적, 교회적 전통 속에 있는 남성우월주의와 남녀차별의 뿌리를 찾아내 비판하였다.47
43) Lynn White, Jr., “The Historical Roos of Our Ecological Crisis”, Science 155(1967), 1203-1207.
44) 캐롤린 머천트/ 허남혁 옮김, 래디컬 에콜로지, 195.
45) 오드리 R. 채프먼. “과학, 신학, 윤리학의 생태주의화”, 과학과 종교: 새로운 공명, 테드 피터스 엮 음/ 김흡영 외 옮김 (서울: 동연, 2002), 361.
46) 캐롤린 머천트/ 허남혁 옮김, 래디컬 에콜로지, 197.
47) Rosemary Radford Ruether, Gaia and God: An Ecofeminist Theology of Earth Healing , 1st ed. (San Francisco: HarperSanFrancisco, 1992). / 정미현, “기독교 신학의 비주류 전통 다시보기: 생태여성신학의 함의”, 「조직신학논총」 41(2015), 176.
이처럼 생태파괴와 관련한 기독교에 대한 비판에 소극적 대응을 하는 생태신학자들과 달리, 류터는 기독교 역사 속의 부끄러운 모습을 솔직히 인정하고 자기 비판을 하는 적극적 대응을 취하였다.
류터는 가이아 이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신학적 반성의 자료로 활용하는 동시에 가이아의 회복을 목표로 상정하고 있다.
류터는 성서 및 교회 전통을 비판하 면서도 여성 생태학적으로 재해석된 계약 전통과 성례전 전통 위에 그녀의 생태여성신학을 세우고 있다.
특별히, 류터가 성례전 전통에 대한 서술을 마 무리하면서
“개인적 존재의 모든 작은 중심들이 이 위대한 중심과 끊임없이 세계를 창조하고 재창조하는 과정 안에서 서로 대화하며, 작은 자아와 위대 한 자아는 궁극적으로 하나가 된다.”48
라는 문장 속에서 근본 생태론이 보 여준 신비주의적, 낭만주의적 경향과 유사한 요소를 발견하게 된다.
한편, 은유 신학이라는 신학 방법을 제시한 맥페이그는 “어머니 같은 하 나님, 연인 같은 하나님, 친구 같은 하나님”이라는 신학적 모델을 제시하고 세계를 “하나님의 몸”으로 은유함으로써 생태여성신학에도 큰 공헌을 하였 다.49
맥페이그는 이러한 모델 혹은 은유를 통해서 인류가 지향해야 하는 미 션을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우리는 생명과 사랑의 놀라운 네트워크의 부 분이 되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들이 번성하는 것을 돕는 일로 하나님께 찬양 드리기 위해 부름 받았다.”50
48) 로즈마리 래드퍼드 류터/ 전현식 옮김, 가이아와 하느님 (서울: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92). 297.
49) Stephen B. Scharper, Redeeming the Time: A Political Theology of the Environment (New York: Continuum, 1997), 144-146.
50) Sallie McFague, Life Abundant: Rethinking Theology and Economy for a Planet in Peril (Minneapolis, MN: Fortress Press, 2001), 137.
이처럼 자연의 개념은 역사 속에서 인간중심주의와 자연중심주의 두 축 사이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논의되었고 교회와 신학 또한 어느 쪽 축에 가깝 게 서는 지에 따라 입장을 정해왔다.
하지만 자연의 개념에 인간중심적 해석 과 자연중심적 해석이라는 양축만 존재하는지 그리고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필요하다.
그래서 본 논문은 인간중심주의도 아니고 자연 중심주의도 아닌 관계론적 자연관,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삼위일체론적 자연 관을 결론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VII. 결론: 관계론적-삼위일체론적 자연관을 향하여
본 논문이 관계론적-삼위일체론적 자연관을 제시하려는 이유는 앞서 살 펴본 인간중심적 자연관과 자연중심적 자연관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을 관 계론적-삼위일체론적 자연관이 극복하고 보완할 수 있는 생태철학적, 신학 적 장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중심적 자연관은 인간 사이의 위계, 인간과 자연 사이의 위계를 전제 하고 자연을 인간번영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수단으로만 간주하고 있다.
이 러한 위계적 세계관은 인권과 평등을 전제로 하는 민주적 가치에도 맞지 않 을 뿐만 아니라 기후위기를 맞고 있는 생태계 현실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연을 사용가치로만 보고 활용만 하다가 자연이 더 이상 인간에게 제공할 것이 없다면 인간의 생존도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인간중심적 자연관에 대한 비판과 반발로 자연중심적 자연관이 등장한 것이지만 자연중심적 자연관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문명 이전이 더 온전한 세계이기에 문명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근본 생태론 의 주장은 현실적으로 이루어지기 힘든 너무 이상적인 주장이다.
인간이 없 는 자연을 이상화한 것도 과학적 생태학이 설명하는 생태계와도 거리가 멀 다.
생태계가 관계로 연결된 것은 사실이지만 개별 지역과 단위에는 생존경 쟁, 먹이사슬, 개체나 군집 사이의 갈등이 엄연히 존재한다. 만약 생태계 내 인간만을 문제적 존재 내지 악한 존재로 보는 시각이 극단화되면 인류를 제 거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생태파시즘과 같은 극단적 사상으로 귀결될 위험성을 가진다.
더불어 인간과 자연을 대결구도로 삼는 일은 인간과 자연의 이원론을 전제한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것이다.
한편, 인간중심적 자연관과 자연중심적 자연관 모두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에도 문제가 될 수 있는 요소를 가지고 있다.
인간중심적 자연관에 담긴 위 계적 구조는 모든 피조물을 공평하게 사랑하고 은총을 주시는 하나님의 속 성에도 맞지 않고, 약자들을 사랑하고 돌보는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또한 근대시대의 인간중심적 자연관 은 중세의 억압적 구조를 깨뜨리고 인간의 가치를 발견한 공헌을 했지만 근 본적으로 기계론적 자연관과 결합하였기 때문에 자연에서 신을 제거하고 스 스로 자연의 통제자가 됨으로 인간을 신의 위치로 격상시켰다.
이는 신학적 관점에서 용납하기 어려운 우상화의 길이다. 자연중심적 자연관에도 이와 유사한 문제점이 발견된다.
자연중심적 생태철학들이 자연도 인간처럼 존중 받아야 하는 가치를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주는 공헌은 했지만 자연자체가 목적이 되고 중심이 되었을 때 이는 자연에 대한 우상화의 길로 안내해 줄 위험성을 가진다.
그렇다면 이제 어떤 측면에서 관계론적-삼위일체적 자연관이 기존 자연 관들이 가지는 문제점들을 극복하고 대안이 될 수 있는지 설명해 보겠다.
첫째, 관계론적-삼위일체적 자연관은 비종교적인 생태담론 맥락에서는 관계론적 자연관으로 불릴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관계론적’이라는 용어와 ‘삼위일체적’이라는 용어 사이에 대시 라인(dash line) 붙여놓은 것이다.
현 대 공공사회에서 신뢰를 잃은 교회가 공공성을 회복해야하는 과제가 있는 것처럼 현대 신학은 정교분리 구조 속에서 사적 영역으로 밀려난 신학을 위 해 공공 담론에서 토론에 참여할 수 있는 논리와 언어를 발전시킬 과제를 가 지고 있다.51
51) Stanley J. Grenz and Roger E. Olsen, 20th Century Theology: God & the World in a Transitional Age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2), 188.
급박한 기후위기 현실에 기독교가 도움이 되려면 공공의 생태 담론에서 통용될 수 있으면서도 내적으로는 기독교의 핵심을 담고 있는 ‘관 계적’이라는 용어가 적절하다고 보인다.
또 이러한 관계론적 자연관을 가진 신학자들은 다른 내적 이유를 가지고 있지만 유사하게 관계론적인 생태사상 을 가지고 활동하는 다른 분야 전문가들 및 활동가들과 연대하며 기후위기 극복에 일조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관계론’이라는 용어에서 드러나듯이 이 대안적 자연관은 생태계 의 연결성을 드러내는 현대 생태학을 진지하게 수용하고 철학적, 신학적 사 유를 발전시키는 일에 학문적 밑거름으로 삼는다.
이를 통해 과학적 생태학 을 수용한다고 하면서도 비현실적인 대안과 이데올로기를 내세운 근본 생태 론의 오류를 피하는 것이 필요하다.
특별히 여기서 ‘관계’라는 용어가 가지 고 있는 함의는 생태계에서 발견되는 현상적 관계 구조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기존의 자연관들이 인간 혹은 자연이라는 한 쪽 축으로만 중심 구조 를 만들고 그 중심성 외부의 존재들을 배재시키거나 위계적 권력을 통해 중 심에 강제로 편입시킨 논리를 거부하겠다는 철학적 의미를 가진다.
‘관계’ 는 인간과 자연, 양쪽 모두를 긍정하면서도 어느 한 쪽에 중심을 놓지 않고 양자의 상호관계 및 상호의존에 주목하며 그 현실이 우리가 서있는 현실이 자 지향해야 하는 진리성을 담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셋째, 관계론적-삼위일체론적 자연관이 담고 있는 ‘관계’는 철학적 의미 뿐 아니라 신학적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인간 사이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자 연의 관계 등 생태계에서 존재하는 모든 관계는 신학적인 관점에서 궁극적 으로 신과의 관계로 이어진다.
기독교가 고백하는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창 조자이면서 모든 곳 안에 거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는 전통 신학 이 세상과 단절한 채 교리만 논하거나 근대시대의 철저한 정교분리에 의한 종교의 사적영역화를 강하게 비판한다.
판넨베르크는 신학도 이성적 작업의 하나로 공공의 담론에서 토론할 수 있는 자 격이 있다고 본다.
넷째, 여기서 제시하는 대안적 자연관을 삼위일체론 안에서 해석하고자 하는 이유를 말할 필요가 있겠다.
한 마디로 기독교 신앙 및 신론의 핵심은 삼위일체론이며 삼위일체론의 핵심은 관계성이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삼위일체론은 20세기 이후에 전통적 삼위일체론을 새롭게 재해석한 삼위일체론의 맥락에서 말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신학은 세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삼위 사이의 내재적이고 형이상학적 삼위일체 논의에 집중하였 다.
근대에 들어와 중세적 신중심 세계관이 무너지고 나서 내재적 삼위일체 는 사람들에게 소구력도 없고 비합리적이라는 이유로 외면 받았다.
그러나 1, 2차 세계대전과 같은 위기들을 겪으면서 근대 이성과 진보의 신념이 무너 지고 동시에 신과 세계의 관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경세적 삼위일체 가 주목받게 되었다.
그래서 테드 피터스(Ted Peters) 같은 삼위일체 신학자는 20세기를 삼위 일체론이 부활된(revitalized) 시기라고 규정하였다.52
기독교는 삼위일체론 논의를 통해 아주 오랜 전부터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 περιχώρησις)’와 같 이 상호내재, 상호순환, 상호침투와 같이 관계론적 용어를 발달시켜 왔다.53
이는 생태계가 상호관계와 상호의존의 관계로 유지된다는 생태학의 정신과 소통이 아주 잘 될 수 있다. 물론 어떤 측면에서 신의 관계와 생태계의 관계 를 동일시 할 수 없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럼에도 20세기 대표적 가 톨릭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의 경세적 삼위일체가 내재적 삼위일체가 같다54는, 소위 “라너의 규칙”이 가지는 전제를 대체로 수용하는 20세기 이 후 삼위일체론 맥락에서 볼 때 삼위일체 하나님의 활동이 생태계 관계적 구 조와 연결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52) Ted Peters, God as Trinity: Relationality and Temporality in Divine Life, 1st ed. (Louisville, Ky.: Westminster/J. Knox Press, 1993), 81.
53) Leonardo Boff, Trinity and Society, Theology and Liberation Series (Maryknoll, N.Y.: Orbis Books, 1988), 135-136. 54) Karl Rahner, The Trinity (New York: Crossroad Pub., 1997), 23
성부 하나님의 대표적 활동을 창조라고 한다면, 성자 하나님은 성육신을 통해 육체성을 가졌기에 인간뿐만 아니라 생태계의 피조물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출애굽 이야기를 통해 하나 님은 노예처럼 고통 중에 자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며 복음서의 예수님은 약 자들과 함께 기뻐하고 함께 울며 그들을 위로하고 구원하는 존재이다.
이를 연결하면 생태계 파괴 및 기후위기 현실에서 기독교가 고백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생태계 내 모든 존재들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고 함께 동행하며 위 로하는 분이다.
더불어, 초기 교부 터툴리안이 이미 삼위일체에 대한 섬세하면서도 역설 적인 묘사를 제시한 것처럼55, 삼위일체의 각 위격은 상호의존하고 일체성 을 이루지만 혼합되지 않고 구별된다.
여기서 잠시 20세기 대표적인 삼위일 체론 신학자인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의 해석을 들어 보자.
“(삼위일체 하나님의) 인격들은 그저 서로의 관계 안에서 있는 그대로 존재하며 서로 구별하면서도 동시에 서로가 교제한다. 그러나 특히 서구 신 학에서 규정되어 온 대로 (삼위의) 인격들은 개별적 관계로 축소되지 않는 다.”56
55) 폴 틸리히/ I.C. 헤넬 엮음/ 송기득 옮김, 폴 틸리히의 그리스도교 사상사, 79. “우리는 신이면서 인간 예수라고 하는 하나의 인격에서 혼합(confusum)되지 않고 결합(coniunctum)되어 있는 이중의 본질을 본다.”
56) Wolfhart Pannenberg, Systematic Theology 1, Translated by Geoffrey W. Bromiley, Vol. 1., 3 vols. (Grand Rapids, MI: Eerdmans, 1991), 320.
이러한 삼위일체론적 해석을 생태담론에 적용한다면 앞에서 언급한 관계론적 자연관의 특성인 비위계성과 비중심성에 기독교적 정당성을 부여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 자연, 신은 상호의존하면서도 상대방을 정복하거 나 파괴하는 관계가 아니라 오로지 존중하고 사랑하는 관계가 되는/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섯째, 관계론적-삼위일체론적 자연관은 공공 영역에서의 생태담론과 도 잘 소통될 수 있지만 동시에 기독교 공동체에서도 잘 수용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진다.
삼위일체 신앙은 다양한 기독교 공동체에서도 보편적으로 고백되는 기독교의 핵심 신앙이기 때문이다.
보수 개신교를 중심으로 상당 히 많은 현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이 생태계 문제에 무관심하거나 기후변 화 이슈를 비복음적이라고 간주하기도 한다.
앞에서 비판한 것처럼 이는 인 간중심적이고 기계론적 자연관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중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하다. 대중이 무식하다고 무시하거나 계몽 하려는 자세는 상대를 존중해야 하는 관계론적 사유에도 어긋나는 일이다.
오히려 대중이 친숙한 언어나 개념을 통해서 설득하며 변화시키는 것이 더 욱 효과적일 수 있다. 일반 그리스도인들의 순수한 신앙을 존중하면서 삼위 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내용이 관계적 생태사유로 확장될 수 있도록 신 학과 목회가 도와야 할 거이다.
이를 통해 생태계 및 기후 위기 극복을 위해 그리스도인들과 공동체들의 지원을 이끌어내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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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 록
기후변화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기후위기가 초래되었고, 많은 사람이 지 구 온난화의 현실을 체감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최고 온도 경신, 최대 강수 량, 최악의 홍수 및 산불 등 다양한 기후 관련 사건이 발생하였다.
2024년 지 구 평균 기온이 15.09도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하였다. 이는 IPCC의 1.5도씨 특별보고서가 제안했던 1.5도씨 상승 마지노선이 예측보다 6년 일찍 무너진 것이다.
이러한 기후변화로 인해 생태계 위기가 심각해졌으나, 정책 실천과 사람들의 행동 변화는 더딘 상태이다. 사람의 행동의 저변에는 세계관 및 그 세계관과 연동된 자연관이 존재한다.
따라서 기후위기를 막기 위해서는 사 람들이 자연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탐구가 필요하다.
본 논문은 기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이론, 실천 및 신학을 논하기 전에, 전제가 될 수 있는 자연의 개념을 탐구하고자 한다.
자연의 개념을 인간중심적 자연관과 자연 중심적 자연관으로 나누어 변천사를 살펴보고, 기독교 공동체와 신학이 그 변화에 어떻게 대응하였는지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결론으로 관계론적-삼 위일체론적 자연관을 기후위기 시대의 대안적 자연관으로 제시한다.
키워드 : 자연 개념, 인간중심주의, 자연중심주의, 생태신학, 삼위일체론
Abstract
A Research of Christian Responses in the Historical Transition of the Concept of Nature and a New Christian Concept of Nature - Toward the Relational-Trinitarian View of Nature
Sungho Lee(Pai Chai University)
Climate change has led to a global climate crisis, with many people experiencing the reality of global warming. In recent years, there have been various climaterelated events such as record-breaking temperatures, maximum rainfall, and severe floods and wildfires. The average global temperature in 2024 reached 15.09°C, the highest on record. This indicates that the critical threshold of a 1.5°C rise, suggested in the IPCC's Special Report on Global Warming of 1.5°C, has been surpassed six years earlier than predicted. Despite the severe ecological crisis caused by climate change, the implementation of policies and changes in people’s behavior remain slow. Underlying human behavior lies a worldview and a perception of nature that is interconnected with that worldview. Therefore, it is essential to explore how people perceive nature to tackle the climate crisis. This paper aims to investigate the concept of nature, which can be a premise for discussing theories, practices, and theology to overcome the climate crisis. It examines the historical changes in the anthropocentric and eco-centric views of nature and critically evaluates how the Christian community and theology have responded to these changes. The paper concludes by proposing a relational-Trinitarian view of nature as an alternative perspective in the era of climate crisis.
key words: Concept of Nature, Anthropocentrism, Ecocentrism, Ecotheology, Trinitarian Theology
논문투고일: 2025.03.31 논문심사일: 2025.04.11 게재확정일: 2025.04.23
기독교철학 제42호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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