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는 말
본 연구의 목적은 러시아의 대문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Fyodor Dostoevsky, 1821-1881)의 작품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중심으로 작 가의 시각을 통해 요한복음을 해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요한복음 전체를 조망하는 데 있다.
요한복음 연구에 있어 문학이라는 요소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 다.
학자들은 지난 세기 다양한 문학 비평 기법들을 통해 성서 본문을 분 석하고 연구해 왔다.
40여 년 전 앨런 컬페퍼(A. Culpepper)의 『요한복음 해부』1) 출간 이후 요한복음을 하나의 내러티브로 바라보며 일관성 있게 구성된 문학으로 여기고 접근하는 다양한 시도가 있었으며, 이러한 연구는 요한복음의 역사적 맥락과 더불어 풍성한 해석을 생산하게 하는 요인 이 되어 왔다.
1) 앨런 컬페퍼/권종선 옮김, 『요한복음 해부』(서울: 요단, 2000).
본 연구 역시 동일한 맥락에서 요한복음을 하나의 문학이 라는 측면에서 탐구한다. 다만 문학 비평이라는 기법을 통한 분석보다는 하나의 문학 작품을 대하는 문학가의 시선으로 분석하고자 한다.2)
즉 요 한복음이 잉태한 하나의 문학 작품을 읽고, 그 작가의 시선으로 요한복 음을 읽고 해석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에 있어서 도스토옙스키 는 좋은 파트너가 된다.
그 이유는 요한복음을 문학의 시선으로 읽고 자 신만의 풍부한 신학적 사유와 성서 해석관을 기반으로 자신의 문학 세계 에 아름답게 표현하고 또한 유려한 필치로 녹여낸 작가이기 때문이다.3)
그는 요한복음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와 수많은 상징에 매혹되었던 작가 이다. 그의 작품 세계에서 요한복음을 인용한 횟수가 유독 많이 발견된 다는 것은(마태복음 12회, 누가복음 7회, 마가복음 2회, 요한복음 58회, 요한계시 록 16회) 요한복음에 대한 그의 깊은 관심을 증명한다.
그의 작품 전개 과 정에서 결정적인 순간 인용되는 본문은 대부분 요한복음이며, 그의 작품 서사 전개를 이끌어가는 중심적 개념 역시 요한 신학의 주요 개념들 — 거듭남, 영생, 사랑, 부활 등 — 이다.
비록 성서학자는 아니었음에도, 도 스토옙스키는 요한복음을 깊이 읽고, 신학적으로 폭넓은 사유를 하고 그 사유를 글로 표현한 사상가이다.4)
2) 문학과 종교의 학제간 연구에 대한 중요성에 대해 다음을 참고하라. 서명수, “문학과 종교의 접점 을 위한 신학적 성찰,” 「신학사상」 193 (2021/여름). 더 나아가 문학을 통한 성서 본문 연구에 대한 예시로 다음을 참고하라. 김윤식, “소설가 백도기의 문제의식과 구약성서 모티프의 환유적 구현 ― 소설 『청동의 뱀』을 중심으로,” 「신학사상」 197 (2023/여름).
3) 칼 바르트(Karl Barth) 역시 자신의 저서 『로마서』의 서문에서 자신의 사상 전환의 계기가 되었고 신학의 중요한 통찰력을 제시한 사람이 바로 도스토옙스키였다고 술회한다. 칼 바르트/손성현 옮 김, 『로마서』(서울: 복있는사람, 2017), 38, 90, 215. 성서를 읽고 자신의 작품을 통해 표현하는 도 스토옙스키의 신학적 해석에 대해서는 다음 책을 참고하라. Alexander B. Gibson, The Religion of Dostoevsky (Eugene, OR: Wipf and Stock, 1973), 52-77; P.H. Brazier, Dostoevsky: A Theological Engagement (Eugene, OR: Pickwick, 2016), 40-45.
4) Irina Kirillova, “Dostoevsky’s markings in the Gospel according to St John,” George Pattison & Diane Thompson (ed.), Dostoevsky and the Christian Tradition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1), 41-50.
요한복음에 대한 도스토옙스키의 관심은 『죄와 벌』 이후로 분류되는 그의 후기 작품에서 더욱 두드러진다.5)
특히 그 클라이맥스를 점했던 작 품이 바로 그의 노년의 마지막 대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다.
이 작 품은 그의 신학과 성서관이 응축된 최고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 다.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이 소설이 요한복음을 깊이 있게 반영한다는 점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작품 첫 페이지 제사(題詞)로 요한복음 12장 24 절을 기록한다.6)
5) 그의 후기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죄와 벌』(1866), 『백치』(1869), 『악령』(1872),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1880). 이 중 『악령』을 제외한 모든 책은 요한복음을 기반으로 서술된다.
6) 이병훈,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도스또예프스키의 삶과 예술을 찾아서』(파주: 문학동 네, 2012), 300.
뿐만 아니라 작품 전체 이야기를 전개하는 데 있어서 요한복음을 주된 메시지로 활용한다.
그렇다면 그가 이해하고 해석하는 요한복음은 어떠한 책인가?
요한복음은 이 작품에서 어떠한 역할을 차지 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요한복음 을 자신만의 렌즈로 읽고 해석한 ‘성서 해석자’ 도스토옙스키를 만나게 될 것이다.
문학가 특유의 섬세한 시각은 그동안 요한복음 해석에서 발 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통찰력을 제시해 줄 것이다.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 관점에서 볼 때, 하이포텍스트(hypotext)에 해당하는 요한복음 이 하이퍼텍스트(hypertext)에 해당하는 도스토옙스키 작품에서 어떻게 인용(quotation)되고, 암시(allusion)되고, 또한 반향(echo)을 이루는지 본 연구는 주목할 것이다.
이를 토대로 하이포텍스트인 요한복음을 새롭게 읽고 분석하는 데까지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 본 연구의 궁극적 목표이 다. 이를 위해 도스토옙스키가 이 소설에서 심도 있게 다루는 2장의 가 나 혼인 잔치와 12장 24절의 한 알의 밀 본문이 중심이 될 것이다.
본 논문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먼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개 관하고 이 작품에서 나타나는 요한복음의 주요 주제를 살펴본다. 이어서 도스토옙스키가 요한복음을 해석하는 관점을 토대로 요한복음을 재조망 하게 된다.
Ⅱ.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이해
1. 작품 줄거리와 주요 캐릭터
이 작품은 카라마조프 가족의 이야기로서, 주요 등장인물은 세속적 욕망으로 가득 찬 아버지 표도르 카라마조프와 세 명의 아들—드미트리, 이반, 알료샤—이다.
어느 날 표도르가 누군가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며, 이로 인해 살인범을 찾는 이야기로 작품은 전개된다. 처음에 는 큰아들 드미트리가 용의자로 법정에 서게 된다.
하지만 실제 범행은 표도르의 서자인 스멜쟈코프의 행동이었으며, 이는 둘째 아들 이반의 암 시 및 교사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첫째 아들 드미트리가 억울하게 유 죄판결을 받고, 이 과정에서 둘째 아들 이반은 정신적 장애를 앓게 된다.
작품은 이처럼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로 흘러간다.
그런데 이러한 암 울한 상황 속에서도 신앙의 빛으로 어두움을 몰아내는 인물이 등장하는 데 바로 막내 아들 알료샤다.
그는 신실한 신앙의 소유자이며 매우 경건 한 캐릭터이다.
작품 속에서 눈여겨볼 점은 세 아들이 각각 구별되는 캐릭터를 소유 한 인물들이며 그들이 이야기에 긴장과 갈등을 불어넣는다는 점이다.
러 시아의 문학 이론가 미하일 바흐친(Mikhail Bakhtin)이 도스토옙스키 소 설 속에 나타나는 다성성(多聲性, polyphony)을 제시하면서 주장했듯, 작 품 속 인물들은 모두 독립적이며 자립적인 말을 하는 실존하는 캐릭터들 이다.7)
7) 바흐친의 시각에서 볼 때 도스토옙스키 소설의 주인공 대부분은 저자의 목소리에 종속되지도 않 고, 저자에 의해 최종화(最終化, finalization)되지도 않는다. 미하일 바흐친/김근식 옮김, 『도스또 예프스끼 시학의 제(諸)문제』(서울: 중앙대학교 출판부, 2003), 41. 바흐친은 도스토옙스키 소설을 분석하면서, 우선 작품의 주인공이 작가로부터 어떻게 독립적이고 독자적일 수 있는가를 살펴본 다. 그래서 주인공의 의식이 작가의 의식 바깥에, 그 너머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바흐친의 생각 이다. 기존의 독백적 소설들에서는 작가의 목소리 외에는 모든 것이 주변적이었는데, 대화적 소설 에서는 분명 다르다. 도스토옙스키 소설에서 주인공들은 상대적으로 자유와 독립성을 가지고 있 다. 독자는 주인공의 자의식과 작가의 지속적인 대화의 과정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자의식의 적극 적 확장을 통해 최종화되지 못한 인간의 심연 속을 대화적으로 통찰해 볼 기회를 얻는 것이다. 이 강은, 『미하일 바흐친과 폴리포니야』(서울: 역락, 2011), 101-113.
바흐친의 주장대로 도스토옙스키는 등장 인물에게 작가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을 이입하지 않고 작중 인물 하나하나가 모두 독자적 목소 리를 내게 했다.
첫째 아들 드미트리는 아버지와 유사하며 탐욕적이고 쾌락주의자로서 세상을 살아간다.
반면 둘째 이반은 이성적이며 무신론 자를 대변하는 캐릭터다.
그리고 막내 알료샤는 둘째 이반과는 정반대로 영적인 존재로서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이다.
알료샤와 더불어 등장하는 또 다른 신앙의 캐릭터가 조시마 장로다.
그는 알료샤의 정신적 지주이 자 영적 스승이다.
2. 신인(神人) vs. 인신(人神)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캐릭터들은 신인(神人)-인신(人神) 간 의 대조 구도로 수렴된다.
도스토옙스키는 1860년대 당시 러시아 사회를 뒤엎던 무신론적 망상으로부터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자신의 작품을 통해 나타내곤 했다.8)
그래서 그의 소설에는 중요한 해석의 틀이 제시되 곤 하는데 바로 ‘신(神)-인(人) 관계론’이다.
그의 대부분 작품에서는 신과 인간을 각각 상징하는 인물들이 동시에 등장한다.9)
다시 말해 신의 성품 을 가진 신인(神人)과 신이 되려는 오만한 인신(人神)이 동시에 나타나는 것이다.
작품 속에서는 무종교성 인신을 대표하는 이반과 종교성이 충만 한 신인을 상징하는 알료샤의 대립 구도가 엿보인다.10)
8) 석영중은 이와 관련 도스토옙스키와 동시대 성서학자 르낭(Ernest Renan)의 『예수의 생애』(1863) 를 지목한다. 예수의 신성을 최소화하고 인간적 측면에 초점을 두면서 신성이 결여된 예수의 모습 을 그리는 비신앙적 기독론을 극복하고자 이와 같은 소설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석영중, 『도스토 옙스키 깊이 읽기: 종교와 과학의 관점에서』(서울: 열린책들, 2021), 271.
9) 『죄와 벌』에서는 ‘라스콜리니코프 vs 소냐’, 『백치』에서는 ‘나스타샤 vs 뮈쉬낀’이 그러하다.
10) 발터 옌스 · 한스 큉/김주연 옮김, 『문학과 종교』(서울: 문학과지성사, 2019), 320.
먼저 인신을 대표하는 이반은 삶에 대한 치열한 열망과 날카로운 이 성의 소유자로 묘사된다.
도스토옙스키의 이전 작품 『죄와 벌』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처럼 강한 무신론적 사상과 더불어 내적 분 열을 겪는 인물이다.
그는 계속해서 절대자 신을 찾지만, 자신의 이성이 만든 신의 개념에 갇혀버리는 존재로 나타난다.
그리고 니체의 허무주의 의 영향을 깊이 받아, 자신이 추구하는 전지전능한 신은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결론을 내리고 ‘신이 없으면 인간에게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명제 를 세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결국 이성적인 인간이 인신이 되는 것이 다.
반면 신인을 나타내는 막내 알료샤는 이반과 대립 구도를 형성한 다.11)
알료샤는 정직, 믿음, 순수한 영혼을 소유한 그리스도의 화신이라 할 수 있다.
도스토옙스키 역시 작품 서문에서 이러한 알료샤를 이 작품 의 주인공이라고 직접 명시하기도 하였다(1권 13쪽).12)
11) Ibid., 319
12)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페이지 인용은 다음 책을 토대로 페이지를 표기한다. 표도르 도스토옙 스키/김희숙 옮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3권 (서울: 문학동네, 2018).
알료샤와 더불어 다른 신인 캐릭터는 맑은 영혼과 신앙의 소유자로서 많은 사람의 정신적 기둥으로 등장하는 조시마 장로다.
조시마 장로는 주인공에게 있어서 세 속적인 육신의 아버지 표도르와 대조되는 영적 아버지로서 등장한다.
그 는 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삶을 살고 있으며 그리스도가 자신에게 가르 쳐준 그대로 삶 가운데에서 실천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다.
도스토옙스 키 작품은 이런 구도를 통하여 ‘신인 vs 인신’ 대조를 형성한다.
이 두 인 물, 즉 ‘신인’을 대표하는 알료샤와 조시마에 대한 묘사에서 도스토옙스 키는 요한복음 텍스트를 효과적으로 반영한다.
그리므로 독자들은 이 두 인물 묘사를 통해 도스토옙스키가 요한복음을 읽고 해석하고 표현하는 방식을 만나게 된다.
Ⅲ.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타나는 요한복음
1. ‘밀알 하나’(12:24) 그리고 가나의 혼인 잔치(2:1-11)
본 작품의 제사로 기록된 ‘밀알 하나’ 이야기는 두 캐릭터의 대화 속 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바로 조시마가 죽기 직전 남긴 유언에서다. 조시마 장로가 슬피 울고 있는 알료샤에게 요한복음 12장 24절을 낭독하 며 이 말씀을 명심하라고 명한다. 본문의 ‘밀알 하나’는 조시마 장로 본인 을 지칭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흥미로운 점은 조시마의 죽음 이후 벌어지는 혼란이다.
조시마는 당시 그리스도인 사이에서는 성자(聖子)와 같은 특별한 존재였기 때문에 시신도 썩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있었다.
그런데 죽음 이후 그의 시신은 오히려 다른 시신보다 더욱 빨리 썩게 되었다.
이 일로 인해 사람들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는 알 료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조시마의 시신이 썩어가는 장면’의 의미 는 무엇인가?
작가는 이 장면을 또 다른 요한복음 이야기인 2장 가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를 통해 풀어간다.
조시마의 시신 곁에서 기도하던 알료사는 무릎 꿇은 채 잠에 들게 되고, 이때 꿈을 꾸게 되는데, 꿈속에서 가나의 혼인 잔치 장면을 보게 된다.
그리고 알료샤 역시 그 잔치에 참여하는데, 알료 샤는 그 잔치에서 죽은 조시마 장로를 다시 보게 된다.
조시마 장로 역시 그 잔치에 초대받았던 것이다.
그렇다, 그에게로, 그에게로 그분이, 얼굴에 자잘한 주름이 가득한 여윈 노인이 조용히 웃으며 기쁜 모습으로 다가왔다. 관은 이미 사라 졌고, … 그분도 잔치에,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거로 구나. (2권 167쪽)
도스토옙스키는 가나 혼인 잔치 이야기를 조시마의 부활과 연관 짓 는다.13)
알료샤는 조시마 장로의 목소리를 듣고 그곳에서 새롭고 위대한 기쁨의 새 포도주를 노래한다.
이후 알료샤는 가슴속에 불타오르는 환희 를 느끼며 잠에서 깬다.
이제 환희로 충만한 그의 영혼은 자유를 갈망한 다.
흥미로운 점은 도스토옙스키가 조시마 장로 죽음 전후에 두 개의 요 한복음 본문(2:1-11; 12:24)을 삽입한다는 점이다.
먼저 12장 24절 관련하 여 조시마의 모습은 땅에 떨어져 죽어버린 밀알 하나를 연상케 한다.14)
13) 석영중, 『도스토옙스키 깊이 읽기』, 273.
14) 권철근, “카라마조프 형제들의 ‘일류샤의 죽음’ 재조명: 욥기와 요한복음의 조화,” 「슬라브학보」 27 (2012/겨울), 6.
하지만 그는 새로운 잔치 자리에 초대되어서 기쁨을 누린다.
결국 하나 의 밀알이 썩어 죽은 이후 부활의 잔치에서 기쁨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 다.
이처럼 작품 속에서 요한복음의 두 본문(2:1-11; 12:24)은 서로 밀접 하게 연관된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변화하는 장면은 12장 24 절에서 나타나는 존재론적 변화를 반향한다.
도스토옙스키가 재구성하여 제시하는 이 장면에서 요한복음의 ‘열 매’, 즉 하나의 밀알이 맺게 되는 열매는 조시마 자신의 부활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런데 그 부활은 조시마 한 개인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알 료사를 통한 미래의 새로운 열매를 암시하기도 한다.
그 근거는 가나 혼 인 잔치 체험에서 벗어나 이제 세속의 영역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알료샤 가 대지 위에 입맞추는 장면이다.
대지는 한 알의 밀이 썩어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는 터전이다.
알료샤가 입을 맞춘 대상은 대지이기도 하며, 그 곳에 떨어져 죽은 하나의 밀알이기도 하다.
입맞춤을 통해 알료샤 역시 죽음과 부활의 길 위에 서게 된다.
2. 패러독스와 죽음
요한복음을 통해 죽음과 부활을 연결 짓는 도스토옙스키의 해석은 패러독스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패러독스는 도스토옙스키의 문학 세 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그의 작가 입문 초기 작품 『정직한 도둑』(1848) 제목에서 이미 나타나듯 도스토옙스키 세계관 속에서 모순 적 상황은 작가 자신의 진실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죄와 벌』에서 매춘부 소냐를 통해 역설적으로 순결을 드러내고, 『백치』에서 ‘백 치’와도 같은 뮈시킨을 통해 지혜로움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이러한 역설 적 사고는 카라마조프 이야기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게리 모슨(Gary Morson)은 도스토옙스키 작품 속에서의 패러독스를 자기모순(self-contradictory)의 전형으로 간주한다.15)
15) Gary Morson, “Paradoxical Dostoevsky,” The Slavic and East European Journal 43 (1999/Autumn), 471. 실제 도스토옙스키는 「작가 일기」에서 스스로를 ‘역설가’(the Paradoxalist)라고 부르 곤 한다. 이러한 점은 그의 종교관, 즉 러시아 정교회와 깊은 연관이 있다. Steven Cassedy, Dostoevsky’s Religion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5), 91-95.
이러한 점은 조시마 장로의 죽음 장 면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조시마 장로가 죽음 직전 12장 24절을 읊 은 뒤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는 이 담장 밖으로 나가더라도 속세에서마저 수도자처럼 살 게야. 수많은 반대자를 가질테지, 하지만 너의 그 적들마저 너를 사랑하게 될 거다. 삶이 네게 많은 불행을 가져오겠지만, 바로 그 불행들로 인 해 너는 행복해지기도 할 것이며, 삶을 축복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삶을 축복하게 해 줄 게야. (2권 14쪽)
알료샤를 향한 조시마의 유언은 패러독스로 가득 차 있다.
이는 직전 에 읊조렸던 12장 24절에 담긴 패러독스를 반영하기도 한다.
도스토옙스 키는 죽음이라는 사건을 통해 역설을 제시한다.
죽음이 죽음을 이겨내 고,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다.16)
그런데 중요한 점은 죽은 자 자신이 다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 다른 존재를 생명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17) 실제 소설 속에서 죽음 이야기는 끊임없이 등장한다.
총 4명의 죽음 이야기가 나온다.
마르켈, 조시마, 표도르, 일류사.
이 모든 죽음의 공통점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타자를 생명에 이르게 한다는 점이다.18)
16) 권철근의 지적처럼, “그의 부패하고 썩는 냄새에 휩싸이게 되는 장면은 ⋯ 인간을 구원하는 시발 점이 된다.” 권철근, “카라마조프 형제들의 ‘일류샤의 죽음’ 재조명,” 12.
17) 석영중, 『도스토옙스키 깊이 읽기』, 271.
18) 권철근, “카라마조프 형제들의 ‘일류샤의 죽음’ 재조명,” 5-6, 17.
첫 째, 마르켈은 조시마의 형이다.
마르켈은 죽음 직전 신앙을 회복하고 영 적 부활을 경험한다.
마르켈의 회심과 죽음은 동생 조시마를 새로운 존 재로 거듭나게 해서, 훗날 장로로서 알료샤와 같은 젊은 영혼을 새롭게 하는 인물이 되게 한다.
둘째, 조시마 장로 역시 자신의 죽음을 통해 알 료샤를 거듭나게 한다.
알료샤의 꿈속에서 가나 혼인 잔치를 통해 부활 한 주인공은 조시마가 아니라, 엄밀히 말해 알료샤 자신이었다.
이러한 패턴은 카라마조프 가족 안에서도 유효하다.
드미트리 역시 아버지 표도 르의 죽음을 통해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
더 나아가 작품의 마지막 장면 속 일류사의 죽음은 12명의 친구를 비롯한 모든 독자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제시한다.
이와 같이 소설 속에서 한 존재의 죽음은 늘 새로운 사 건으로 확장된다.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새로운 생명과 삶으로 전개된다.
도스토옙스키는 이와 같이 죽음을 숭고한 아름다움으로 묘사한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부활로 가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가히 ‘죽음의 미 학’이라 불릴 만한다.
이 모든 죽음은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밀알의 죽음 에 연결된다. 그래서 죽음을 어두움과 연관 짓기보다는, 오히려 그 어두 운 죽음을 더욱 빛나게 해서, 그 죽음을 부활의 빛으로 승화시킨다.
그런 맥락에서 죽음은 구원의 출발점이다.
3. 기억과 부활
요한복음을 통해 전개되는 죽음과 부활 이야기는 작품 마지막에 아 름답게 빛난다.
작품 속에서 나오는 4번의 죽음 중 마지막으로 에필로그 에서 스네기료프의 아들 일류샤의 장례가 나온다.
알료샤는 일류샤의 장 례식에서 12명의 친구들과 함께 참석해서 바위 위에서 조사를 읽어 가는 데, 죽음을 넘어서는 부활의 소망을 전하며, 동시에 ‘기억’이라는 메시지 를 함께 전한다.
여러분 우리가 이제 평생토록 항상 기억하게 될, 그리고 기억하고자 하는 이 선량하고 훌륭한 감정 속에 우리를 결합시켜준 사람이 누구 인가요, 저 착한 소년, 사랑스러운 소년, 우리에게 영원히 소중한 소 년, 바로 일류샤 아닙니까! 이 소년을 절대로 잊지 맙시다. 이 소년 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을 우리 마음속에 영원히 간직합시다. 지금부 터 영원토록 (3권 522-23쪽)
죽음에 대한 기억을 강조하며 마지막으로 무덤 위에 빵 조각을 뿌린 다.
사람들은 장례를 마치고 그 빵을 함께 먹는다.
빵은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연결하고, 살아있는 자들을 한데 묶어 주는 성찬의 빵과도 같 다.19)
작가는 작품 속에서 무덤 위에 참새들이 와서 그곳에 뿌려진 빵조 각을 함께 먹는 장면을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이처럼 한 알의 밀은 누군 가에게 생명의 양식이 된다.20)
19) 석영중, 『도스토옙스키 깊이 읽기』, 283
20) Ibid.
이때 콜랴의 외침은 눈여겨 볼만하다.
그 는 죽음 이후 부활과 영생에 대해 “우리는 틀림없이 부활하여, 틀림없이 서로 보게 될 것이고, 그동안에 있었던 모든 일을 즐겁고 기쁘게 서로에 게 얘기할 것입니다”(3권 524쪽)라고 환희에 차서 말한다.
이와 관련 석영 중의 다음 지적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부활은 개별적인 인물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를 이루는 인류 보편의 문제로 확장되며 … 모든 부활 에피소드들도 결국은 이 우주적인 부활의 거대한 패러다임으 로 귀착된다.”21)
도스토옙스키가 이러한 부활 담론을 마지막 에필로그에 넣은 의도는 분명해 보인다.
독자들 모두가 예수의 죽음을 기억하고 그 부활에 동참하자는 것이다.
이처럼 이 작품은 신약성서, 특히 요한복음이 보여주는 내러티브를 상당 부분 차용해서 전개한다.
상호텍스트성 측면에서 볼 때, 상당한 인 용, 인유, 그리고 반향이 엿보인다.22)
21) Ibid., 284.
22) 상호텍스트성을 토대로 인유에 대한 신약 본문에 대한 예로 다음을 참고하라. 이현주, “모세보다 위대한 아들 - 예수의 세례(마 3:13-17)에서 모세 인유 읽기(출 3-4),” 「신학사상」 202 (2023/가을), 95-124.
특별히 요한복음이 남긴 가장 강한 흔적은 바로 제사로 제시된 한 알의 밀 구절이다.
그리고 그 밀알의 죽음 으로 인해 주어지는 새로운 생명이 핵심이다.
죽음보다는 죽음 이후의 부활에 그는 초점을 두었다.
그래서 가나 혼인 잔치 이야기를 작품 속으 로 가지고 왔으며, 죽음이라는 무거운 담론을 역설로 미학적으로 풀어낸 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작품의 주인공 알료샤의 강직한 목소리로 부활의 신앙을 독자들에게 전한다.
바흐친의 주장대로라면 알료샤는 독 자들에게 이 이야기에 참여할 것을 권면한다.
독자들로 하여금 밀알의 죽음을 기억하고, 이에 바르게 ‘반응’하도록 독자들을 요청하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요한복음을 인용하는 방식은 그가 요한복음을 해석하는 방식을 반영한다. 이제 다음 파트에서 는 도스토옙스키의 렌즈를 빌려와서 요한복음을 재조망해보기로 한다.
Ⅳ. 요한복음에 대한 새로운 접근
1. 가나 혼인 잔치와 하나의 밀알
도스토옙스키의 관점으로 요한복음을 해석할 때, 가장 중요한 본문 은 2장의 가나 혼인 잔치와 12장 24절이다.
이 두 본문은 밀접하게 연관 된다.
특히 제사로 사용된 12장 24절은 더욱 세밀한 접근이 필요하다.
먼저 구조 측면에서 밀알 본문이 포함된 12장은 요한복음 전체에서 중요 한 경첩에 해당한다.
요한복음 구조를 논함에 있어 레이몬드 브라운 (Raymond E. Brown)의 주장대로 전체 내러티브를 크게 두 파트 — 표적 의 책과 영광의 책 — 로 나눌 경우 11-12장의 배치에 대한 견해 차이가 발생한다.
11-12장을 표적의 책(1:19-12:50)에 포함시키거나,23) 11-12장 을 표적의 책에서 따로 분류해서 두 책(표적의 책 1-10장, 영광의 책 13-20 장)의 이음매 역할로 간주하는 것이다.24)
후자의 경우 11-12장이 과도기 적 전환점으로서, 1-10장을 돌아보게 하고, 또한 13장 이후 수난과 죽음 을 향해 나아가는 마지막 준비단계를 묘사한다는 주장으로 이해될 수 있 다.25)
23) 레이몬드 브라운/최흥진 옮김, 『요한복음 Ⅰ: 표적의 책』(서울: CLC, 2013); Francis J. Moloney, The Gospel of John, SP 4 (Collegeville, MI: Liturgical Press, 1998); G.R. 비슬리 머리/이덕신 옮김, 『요한복음』 WBC 36 (서울: 솔로몬, 2001); 안드레아스 쾨스텐베르거/전광규 옮김, 『요한신학』(서 울: 부흥과개혁사, 2015), 186-189.
24) D.A. 카슨/박문재 옮김, 『요한복음』(서울: 솔로몬, 2017).
25) 앨런 컬페퍼/권종선 옮김, 『요한복음 해부』, 150. 김문현 역시 12장의 역할에 대해 전반부의 표적 의 책과 후반부의 영광의 책으로 구분되는 서로 겹치는 이음 단락으로서 죽음 앞에 선 예수의 사 명과 역할이 두드러지게 표현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김문현, “죽음 앞에 선 예수: 요한복음 12:1- 50을 중심으로,” 「신약연구」 19 (2020/가을), 516-542.
하지만 도스토옙스키의 시각을 빌려서 볼 때 12장은 표적의 책 속 에 포함되어, 2장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그래서 2장 가나 혼인 잔치가 첫 번째 책을 열고 12장이 닫는 역할을 하게 된다.
먼저 2장 가나 혼인 잔치를 면밀히 살펴보자.
이 사건은 하늘이 열리 는 신비에 대한 예수의 예고(1:51) 직후 이어지는 첫 표적이다(2:11).
이 표적을 통해 요한복음의 수많은 기적들의 상징들이 잉태된다.26)
잔치는 메시아가 여는 새로운 시대를 상징한다.27)
특히 잔치를 의미하는 단어 γάμος는 종말의 구원을 상징하기도 한다(계 19:7, 9).28)
특히 잔치의 이미 지가 죽은 자를 구원하는 부활의 기쁨을 지칭하기도 한다는 점을 고려한 다면,29) 도스토옙스키가 묘사한 γάμος는 상당히 의미가 있어 보인다.
그 의 해석을 토대로 보자면, 예수는 죽음을 초월하는 종말론적 잔치를 벌 이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2장 기사가 부활 신앙으로 가 득 차 있다는 비슬리 머리(G.R. Beasley Murray)의 주장은 적절하다.30)
2장은 변화의 사건이고, 거듭남에 대한 암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를 통해 예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핵심이다(2:11). 하지만 참된 영 광은 오직 “때”가 되어야 계시된다.31)
26) Francis J. Moloney, The Gospel of John, 66.
27) 레이몬드 브라운/최흥진 옮김, 『요한복음 Ⅰ』, 376.
28) 이 단어는 요한 전승에서 4회 등장한다(요 2:1, 2; 계 19:7, 9).
29) 크레이그 쾨스터/최흥진 옮김, 『요한계시록Ⅱ』(서울: CLC, 2019), 1363.
30) 비슬리 머리/이덕신 옮김, 『요한복음』, 172. 31) 브라운은 2:11을 부분적인 영광의 시현 또는 예시로 볼 것을 제안한다. 레이몬드 브라운/최흥진 옮김, 『요한복음 Ⅰ』, 369.
2장의 그때(ἡ ὥρα) (2:4)는 바로 예 수가 직접 선포한 ‘영광을 받을 때’(12:23)를 의미한다.
물론 2장과 12장 사이에 ‘때’라는 표현은 여러 차례 언급되었다(2:4; 7:6, 8, 30; 8:20).
하지 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는 구절들이 이어 나오면서(7:30; 8:20) 내러티 브는 계속해서 긴장을 유지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12장에서야 그 ‘때’가 거의 도래한 것으로 묘사된다.
그 ‘때’는 예수의 죽음을 통해 완성된다.
주목할 점은 12장 23절에서 시간의 완성을 의미하는 완료형 ἐλήλυθεν이 처음으로 사용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때’라는 관점에서 볼 때 2장 가 나 혼인 잔치에서 예수의 선포는 12장 이후 전개되는 십자가 사건을 통 해 완성되는 것이다.
죽음 이후 인간은 존재론적 변화를 통해 잔치에 참 여하게 될 것이고, 예수는 이 모든 일의 주관자로서 영광의 주인공이 된 다.
흥미로운 점은 두 사건 사이에 변화와 거듭남이라는 키워드를 담은 이야기가 촘촘하게 연결된다는 것이다.
2장 이후 변화와 갱생에 대한 강 조는 3장 니고데모와의 대화, 4장의 사마리아 여인의 변화를 묘사하는 과정에서 드러난다. 5장 이후 병자 치유 사건 ― 38년 된 병자 및 실로암 맹인 — 역시 그러하다.
치유는 병자의 실존적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계 속되는 갱생이라는 주제의 클라이맥스를 이루는 사건은 바로 11장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사건이다.
나사로는 어두운 밤, 죽음의 시간에 놓여있었다. 하지만 밝은 낮, 생명의 시간 속에서 부활한다.
나사로는 2 장부터 계속 전개되어 온 거듭남이라는 주제의 정점을 나타내는 사건이 고, 이 나사로는 11장에서 다시 살아난 이후 12장에서도 계속해서 등장한 다(12:1, 9-11, 17-19).
이처럼 요한은 나사로 사건의 잔향을 11장에 이어 12장에서도 은밀하게 계속 남겨두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11장에서 나사 로 이적의 목적이 12장 23절에서 ‘영광을 받을 때’라는 표현으로 재진술 된다는 점이다.32)
32) Ibid., 975.
그러므로 2장에서 계시된 변화와 거듭남은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정점을 이루고 예수의 한 알의 밀 선포를 통해 그 영 광의 순간을 극대화한다.
지금까지 논의를 통해 볼 때, 12장 24절의 ‘밀알 하나의 죽음’의 의미 는, 특히 2장과의 연관성 속에서 볼 때, 죽음 이후 변화와 다시 태어남을 통해 메시아가 주관하는 잔치에 참여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2장의 가나 혼인 잔치는 예수의 첫 표적이자 동시에 다시 태어난 자가 누리는 잔치에 대한 상징적 사건이며, 요한은 2장부터 12장에 이르는 일련의 이 야기를 통해 죽음 이후 다시 태어남의 주제로 논리적 완결성을 확고히 한다.
사실 11-12장은 예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고편으로 일반적으로 해석되지만, 도스토옙스키의 시각을 통해 볼 때, 이 본문은 다시 태어나 서 예수가 주재하는 영광스러운 종말론적 잔치의 자리에 초대 받는 사건 의 완성으로 해석된다.
2. 패러독스
도스토옙스키의 시각으로 요한복음을 볼 때 패러독스는 요한복음 전 체 내러티브를 해석하기 위한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33)
사실 요한복음에 는 패러독스가 빈번하게 나타난다.
그 패러독스를 만들어내는 출발점은 요한 특유의 이원론적 개념이다.34)
1장 프롤로그부터 어둠과 빛을 통한 이원론적 구도가 제시된다(1:5).35)
하지만 요한의 이러한 의도는 단순히 세상이 어둠과 빛과 같은 대립되는 요소들의 조합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밝히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강조 하는 데 그 궁극적 의미가 있다.
후자는 결국 전자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 이다. 가령 생명과 죽음이라는 이원론적 구도는 두 개념을 대립하기 위 한 것이 아니다.
생명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죽음이 하나의 과 정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즉 죽음을 통해 생명을 얻게 된다는 구도이다. 바로 이 지점에 패러독스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 맥락에서 바레트 (C.K. Barrett)가 요한복음의 이원론적 대조되는 개념들을 단순히 이원론 적으로 보지 말고 패러독스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 바는 우리의 주목을 요한다.36)
33) 물론 요한복음을 문학적으로 읽고 해석하는 데 있어 패러독스와 더불어 아이러니 역시 중요한 기법으로 제시된다. 참고 George W. Macrae S.J., “Theology and Irony in the Fourth Gospel,” Mark W. Stibbe (ed.), The Gospel of John as Literature: An Anthology of Twentieth-Century Perspectives (Leiden: Brill, 1993), 103-113. 문학적 읽기 측면에서 요한복음은 패러독스와 아이러니 두 가지가 다 적용될 수 있다. 다만 본 연구는 도스토옙스키 작품과의 연관성 속에서 논하기에 패러독스라는 측면에 집중해서 논의를 이어가고자 한다.
34) 리처드 보컴/문우일 옮김, 『요한복음 새롭게 보기』(서울: 새물결플러스, 2016), 205-240 참고.
35) 구체적으로 요한복음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원론적 대립 구조는 다음과 같다. 빛과 어둠, 생명과 죽음, 육과 영, 하늘과 땅, 진리와 거짓, 사랑과 미움, 신뢰와 불신 등이다.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방식과 인간적 모습을 묘사하는 방식은 이 대립 구조와 대부분 일치한다.
36) C.K. Barrett, Essays on John (London: SPCK, 1982), 101; 안드레아스 쾨스텐베르거/전광규 옮김 『요한신학』, 311.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병자 치유 사건 역시 마찬가지다.
병과 건강의 대조 구도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닌, 병이라는 것이 결국 하나님 의 영광을 위한 귀한 수단임을 드러내는 것이다(9:3; 11:4).
특히 나사로 사건은 패러독스로 가득 차 있다.37)
나사로의 죽음이 영광의 순간으로 전환되고, 죽음이 생명으로 이어지게 되는 흐름 때문이다(11:25).
에스테스(Douglas Estes)의 주장에 따르면 요한은 의도적으로 패러독 스를 많이 사용했다.
그 이유는 신학적 문학적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서다.38)
패러독스의 결정체는 바로 12장 24절이라 할 수 있다.
죽음이 생 명을 잉태하고 영광으로 이어진다.
본문에 등장하는 3개의 동사를 통해 분석하자면,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지고(πίπτω), 죽어서(ἀποθνῄσκω) 결국 영광을 얻는다(δοξάζω).
여기서 요한의 강조점은 πίπτω와 ἀποθνῄσκω에 있 다.39)
떨어져 죽었기에 영광이 가능한 것이다.
예수의 죽음은 23절에서 는 영광으로, 24절에서는 열매로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하늘로 들려 올 라가는 것(12:32)이 궁극적 목적이다. 예수는 목숨을 다시 얻으려고 자신 의 목숨을 기꺼이 버린다고 말한다(10:17).
이처럼 생명을 위해 죽음을 택 하고, 죽음으로 열매를 맺는다는 놀라운 역설은 요한이 자신의 복음서를 전개하는 중요한 기법이 된다.40)
그런 맥락에서 밀알이 곡식의 뿌리로 변하는 지극히 일반적인 자연 현상을 ‘죽음’이라는 자극적 표현으로 묘사 한 것은 죽음과 영광의 패러독스를 강조하기 위한 요한의 의도라 할 수 있다.41)
37) 예수는 그를 살렸기 때문에 죽을 위협에 처하게 되었고(11:53), 예수가 살린 나사로는 새로운 생 명을 얻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죽을 위협에 처하게 된다(12:10). Craig Keener, The Gospel of John 2 vols (Grand Rapids: Baker, 2010), 2:873. 나사로 이야기는 이처럼 삶과 죽음 사이에 얽힌 복잡한 관계를 패러독스로 전개해 간다.
38) Douglas Estes, “Dualism or Paradox? A New ‘Light’ on the Gospel of John,” JTS 71 (2020/4), 108. 에스테스는 요한복음 속 패러독스의 의미에 주목하며, 그 연구를 확장하여 요한복음 본문 에서의 구조적 패러독스에 대한 논의로 전개한다. Douglas Estes, “The Receiver’s Paradox: Agency and Essence in John 13:20,” CBQ 85 (2023/1), 97-109.
39) 레이몬드 브라운/최흥진 옮김, 『요한복음Ⅰ』, 970.
40) Edward W. Klink Ⅲ, John, ECNT (Grand Rapids: Zondervan, 2016), 552
41) Marianne M. Thompson, John, NTL (Louisville, KY: WJK, 2015), 269
3. 죽음의 미학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요한복음은 죽음에 대한 미학을 강하게 드러 낸다.
실제 요한은 죽음이라는 주제에 깊은 관심을 드러낸다.
죽음을 표 기하는 ‘ἀποθνῄσκω’의 용례에서도 나타나듯 죽음은 요한복음에서 빈번하 게 등장한다(마태복음 5회, 마가복음 8회, 누가복음 10회, 요한복음 28회).
물론 죽음이라는 단어가 일반적으로 부정적 뉘앙스로 사용되는 것 역시 사실 이다.
생명과 죽음이 양립할 수 없다는 구절에서 드러나듯, 죽음은 죄의 어두운 측면과 연결되는 경향이 있다(6:49, 50, 58; 8:21, 24, 53).42)
하지 만 도스토옙스키의 시각에서 요한복음을 읽을 때, 죽음은 생명으로 나아 가는 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숭고한 아름다움의 과정으로 비추어 진다.
요한이 제시하는 죽음의 숨겨진 의미는 새로운 생명의 열매로 가 기 위한 출발점이다.43)
42) 안드레아스 쾨스텐베르거/전광규 옮김, 『요한신학』, 311
. 43) 레이몬드 브라운/최흥진 옮김, 『요한복음Ⅰ』, 979.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조시마 장로의 죽 음과 시신의 부패 과정이 구원의 출발점이 된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요 한복음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그 죽음은 구원을 위한 출발점이 된다.
요한복음에서 죽음은 예수의 통제 하에 있다.
아무도 예수에게서 목 숨을 빼앗아 갈 수 없으며, 목숨을 버리는 것과 다시 얻는 모든 권세는 예수에게 있다(10:18).
예수는 그 죽음을 직접 통제한다.
그리고 그 죽음 의 의미까지도 직접 규정한다(참고 12:33).
요한복음에서 죽음은 예수의 영광, 승리의 역설적 표시로 작용한다(3:14-15; 8:28; 12:32-33; 18:32).
무엇보다 요한복음의 예수는 실제 죽음의 현장에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낸다.
왕의 신하 아들 죽음을 믿음으로 연결하여 영광스러운 사건으 로 승화시키는 것이 대표적인 예가 된다(4:53).
앞서 살펴본 나사로 사건 역시 그러하다.
그 죽음을 자신의 영광으로 의미 부여한다.
죽음은 곧 영 광스러운 사건이다(12:28). 죽음 이후 하늘로 올라가는 것은 창세 전에 누리던 그 영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17:5).
이는 예수가 세상과 어둠, 죽 음의 권세를 극복했다는 것이고. 더 나아가 예수의 역설적 승리를 반영 한다.44)
특별히 예수의 죽음을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그 죽음이 바로 타 자를 위한 죽음이라는 점이다.
그 죽음은 남을 위한 희생적 대속적 죽음, 즉 ‘ὑπέρ’의 죽음이다(참고 10:11; 15:13).45)
그리고 그러한 타자를 위한 죽 음을 가능케 하는 것은 사랑이다. 그래서 요한은 죽음을 사랑으로 표현 한다.
이미 복음서 초반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해서 독생자를 주셨다 (δίδωμι)고 말한다(3:16).
예수의 오심은 사랑하는 자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다(10:10). 예수는 선한 목자가 사랑하는 자를 위해 자신 의 목숨(ψυχή)을 버린다고 말한다(10:11).
예수의 죽음은 순수한 사랑의 행위로서 자발적인 행위이다(10:17-18).46)
44) Marianne M. Thompson, John, 359.
45) Ibid., 226.
46) 리처드 보컴/문우일 옮김, 『요한복음 새롭게 보기』, 131.
그래서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한다고 했다(εἰς τέλος ἠγάπησεν αὐτούς, 13:1). ‘끝’을 의미하는 ‘τέλος’가 십자가 죽음의 순간 “다 이루었 다”(19:30)라는 표현에서 다시 등장한다는 것은, 그 사랑의 완성이 죽음 임을 입증한다.
즉 죽기까지 사랑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요한의 예수는 죽음을 사랑(ἀγάπη)으로 묘사한다(15:13).
죽음은 친구를 향한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인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15장 12절에서 제자들을 향해 서로 ‘사랑하라’(ἀγαπάω)는 것은 친구를 위해 죽을 수 있을 정도로 깊은 사랑을 하라는 것이다.
이는 죽음을 통해 타자를 변화시키는 숭고함을 보여준 다. 죽음은 영광의 순간이다.
이러한 메시지는 요한복음 마지막 장까지 이어진다.
예수는 하늘로 승천하기 직전 베드로를 만나서 사랑에 대해 질문을 한다(21:15-17).
예수는 어떤 죽음으로 베드로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지를 암시한다(21:19).
그리고 마지막으로 베드로를 향해 나를 따르라고 명한다.
마치 카라마조프 이야기 마지막 에필로그가 일류샤의 죽음 앞에서 그 죽음을 기억하고 숭고한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자는 메시 지로 마무리되었듯, 요한복음 역시 그 죽음의 영광에 동참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처럼 도스토옙스키 시각으로 볼 때 요한복음의 아름다운 내러티브 기저에는 바로 ‘죽음’이라는 주제가 있음이 확인된다. 작품 속 죽음의 미학은 요한복음을 새롭게 읽게 해주는 동기가 된다.
V. 나가는 말
소설가 도스토옙스키의 모든 문학 여정의 마침표와도 같은 『카라마 조프가의 형제들』은 신약성서 요한복음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해석의 자 료가 된다.
본 연구는 도스토옙스키라는 한 명의 작가를 ‘성서 해석자’로 간주하고, 그의 해석을 재구성하여 요한복음 본문을 읽는 시도였다.
요 한복음을 하나의 문학 작품으로 볼 때, 그 작품이 잉태한 또 다른 문학 작품과 함께 읽어가며 작가의 시선으로 요한복음을 읽고 해석하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도스토옙스키가 요한복음을 읽고, 해석해서, 자신 만의 내러티브로 표현하는 방식은 매우 새롭다.
특히 죽음과 부활이라는 거대한 담론을 한 알의 밀이라는 요한복음 구절을 통해 실마리를 풀어가 며 다양한 캐릭터들의 갈등과 조화를 통해 거대한 텍스트를 탄생시키는 작업을 하였다.
도스토옙스키의 시각으로 요한복음을 볼 때, 2장과 12장의 긴밀한 연결과 이 두 본문 사이에 연결되는 다양한 에피소드들은 갱생과 부활이 라는 주제 하에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가나 혼인 잔치는 예수의 첫 사역 이라는 중요성과 동시에 요한복음이 제시하는 ‘변화’라는 주제에 대한 하 나의 예표가 된다.
가나 혼인 잔치 본문에서 계시된 변화와 거듭남은 나 사로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정점을 이루고, 예수의 한 알의 밀 선포를 통 해 영광의 순간으로 극대화된다.
그리고 죽음과 부활이라는 주제로 요한 복음 전체 본문을 조망할 수 있게 해준다.
특히 이 주제는 패러독스라는 수사법에 의해 효과적으로 재현된다.
죽음이라는 개념을 숭고한 아름다 운 주제로 승화시켜 복음서를 전개해 가는 요한의 글쓰기 방식은 도스토 옙스키의 섬세한 시각 덕분에 새롭게 발견될 수 있었다.
도스토옙스키가 이 작품을 통해 신학계에 던지는 화두는 자명하다.
아울러 이 방대한 작품이 담고 있는 성서 해석의 흔적들은 하나의 소논 문으로 담기에 어려울 정도로 무수하다.
다만 본 연구는 소논문이라는 지면의 한계상 제사로 제시된 12장 24절을 해석하는 데 초점을 두고 이 와 연관된 에피소드들을 중심으로 연구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통해 더욱 다양한 연구로 확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다고 판단된다. 문학을 통해 삶을 읽어내고 예수의 메시지를 읽어내는 것은 의미 있 는 작업이다.
특히 문학가의 눈으로 성서를 읽어내고 해석하는 작업은 역사적 맥락과 성서 비평이 그동안 쌓아 올린 성서 해석의 거대한 유산 을 더욱 생기있게 만드는 역할을 할 것이다.
최근 요한복음 연구에 있어 서 최종 형태의 본문에 집중하는 공시적(synchronic) 관점의 다양한 연구 방법론이 끊임없이 소개되는 상황에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은 유익한 참 고 자료가 될 것이며, 그런 측면에서 도스토옙스키는 더욱 풍성한 성서 해석을 갈구하는 우리 시대 독자들에게 좋은 해석자로 다가 온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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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초록
본 연구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통해 요 한복음을 새롭게 읽고 해석하는 데 목적이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요한복 음을 깊이 읽고 자신의 폭넓은 신학적 사유를 통해 복음서 내용을 작품 에 투영해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를 완성했다. 특히 제사(題詞)로 사 용된 요한복음 12장 24절은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중심 구절이 된다. 작품 속에서 한 알의 밀이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는 구절은 주인 공 알료샤를 향한 조시마 장로의 마지막 유언이기도 했지만, 그가 요한 복음 2장의 가나 혼인 잔치 장면을 통해 재등장함으로써 죽음은 부활로 승화된다. 도스토옙스키는 요한복음 2장과 12장 24절을 긴밀히 연결하 고, 이 두 이야기를 죽음과 부활이라는 주제로 채색한다. 이 과정에서 패 러독스를 사용해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전개하며, 새로운 열매를 맺기 위한 그 과정으로서 죽음의 아름다움을 묘사한다. 실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작품 속 등장인물들의 죽음은 수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 도스토 옙스키가 자신의 작품에서 재현한 이러한 요한복음의 중심 주제들은 독 자들로 하여금 요한복음 전체를 새롭게 읽도록 인도한다. 도스토옙스키 의 관점에서 요한복음을 볼 때 2장 가나 혼인 잔치에서 계시된 변화와 거 듭남은 11장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정점을 이루고 예수의 한 알의 밀 선포를 통해 그 영광의 순간을 완성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전개에 서 패러독스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패러독스 중 가장 두드러진 용례는 죽음을 통한 승리와 영광이다. 죽음은 숭고한 아름다움의 상징이다. 그 런 측면에서 볼 때 12장 24절에서 죽음은 요한복음의 미학을 가장 잘 내 포하고 있다. 이처럼 도스토옙스키의 섬세한 문학의 눈으로 독자들이 요 한복음을 읽을 때 그들은 요한복음을 더욱 새롭게 읽을 수 있는 통찰력 을 얻게 될 것이다.
주제어 요한복음, 도스토옙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밀알 하나, 패러독스
Abstract
Reading the Gospel of John through the Biblical Perspective of Fyodor Dostoevsky — Implications of ‘a grain of wheat’ (John 12:24) in The Brothers Karamazov
Deok-Hee Jung Associate (Professor, New Testament Studies Department of Christian Studies Hannam University)
This article aims to read and interpret the Gospel of John with a fresh angle through the novel, The Brothers Karamazov, written by Russian author Fyodor Dostoevsky. He wrote this novel with his own theological considerations based on a thoughtful reading of John‘s Gospel. In particular, John 12:24, the epigraph of the book, functions as the key to understanding the entire novel. The testament of the Father Zoshima toward Alyosha (John 12:24) indicates the death as well as resurrection of himself through the scene of the Wedding at Cana. In this manner, the author connects the two separated passages — 2:1-11 and 12:24 — and then portrays the stories with the theme of death and resurrection. Dostoevsky employs paradox for a more attractive reading and aesthetically illustrates death. Actually, the death of the characters in the novel bears much fruit. These themes in the novel allow the readers to read the Gospel of John from a fresh angle. From the view of Dostoevsky, the transformation in 2:1- 11 reaches the climax in chapter 11, the episode of Lazarus, and is completed by Jesus‘ statement about death and glory in 12:23-24. Along the way, paradox plays a significant role in the entire narrative, especially for illustrating victory and glory by death which is a symbol of sublime beauty. Thus, this essay claims that the passage of 12:24 contains the aesthetics of the Fourth Gospel. Like this, the reading of the novelist Dostoevsky would provide a fresh angle to read and interpret the gospel.
Key Word The Gospel of John, Fyodor Dostoevsky, The Brothers Karamazov, A Grain of Wheat, Paradox)
논문접수일: 2024년 8월 20일 논문수정일: 2024년 9월 10일 논문게재확정일: 2024년 12월 20일
신학사상 제207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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