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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다시 보는 단종애사(端宗哀史)(7)/받은 글

 

<다시 보는 단종애사(端宗哀史) 제72회>

 

이계전은 곧 수양 대군 궁으로 달려갔다. 이렇게 긴하고 은밀한 일에 자기가 참견하는 것이 계전에게는 크게 만족하였다.

 

며칠이 안 지나면 병조 판서가 아니냐. 정경(正卿)이 아니냐. 대감이 아니냐. 상감도 하오 하는 지위가 아니냐.

생각하면 금시에 날개가 돋치어서 공중으로 날아 오를 듯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다 수양 대군의 은혜다. 이 은혜를 생각하면 아무리 하여서라도 수양 대군이 가장 미워하는 안평 대군을 하루바삐 없애드려야 할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고 수양 대군 궁을 향하여 마음으로 수없이 절을 하였다.

 

수양 대군을 만난 이계전은 첫째로 좌의정 정인지와 자기가 어떻게 간절하게 안평 대군을 죽여야 할 것을 상감께 말한 것이며 자기는 죽여 줍소사 까지 한 것이며, 그러나 상감은 ‘안평 숙부가 무슨 죄가 있나’ 하여 안평대군이 죄 없는 것을 누누이 말씀하시던 것을 말한 뒤에 이계전 자기의 의견으로,

 

“그러면 말씀이요, 안평 대군이 무죄하다 하면 나으리가 죄인이 되신단 말씀이요. 안 그렇소오니까. 하니까 소인은 죽더라도 안평을 없애고야 말리오.” 하고 자못 자기 말에 스스로 흥분이 되어 얼굴이 붉고 어성이 높아진다.

 

그러다가 비로소 자기가 정인지에게 받아가지고 온 사명이 생각이 나서 제 말만 하노라고 심부름 온 것도 잊어버리었던 자기의 경망을 스스로 웃고 하였다.

 

“나으리께서 몸소 상감께 뵈옵고 안평 대군의 죄상이 용서할 수 없는 것을 말씀하여 놓으시면, 오늘 안으로 말씀이야요, 그리 하시며 내일은 좌의정이 솔백관(率百官)하고 안평 대군 용의 목을 줍소사고 상소를 할 것이니까, 그리만 되면 안평 대군의 목이 쇠로 되었기로 견딜 장사 있소오니까.” 하고 한 번 웃어 보인다.

 

수양 대군은 계전의 말을 듣고 불쾌한 빛을 보인다. 수양 대군의 진정은 동기되는 안평 대군을 죽이기까지 할 생각은 없는 것이나. 상감 말씀마따나 안평대군이 무슨 죄 있나. 한명회 말과 같이 여러 형제 중에 뛰어나게 잘난 죄밖에 없는 것이다.

 

안평 대군이 미운 것도 사실이요, 누가 죽여 주었으면 다행일 것도 진정이지마는 형 되는 자가 자기 손으로 아우를 죽여서 후세에라도 동기를 죽이었다는 누명을 듣기는 그리 원치 아니하는 바였다.

그러므로 이제 다시 상감 앞에 가서 자기 입으로 안평 대군을 죽여 줍소사 하는 말은 하기가 싫었다.

 

수양 대군의 생각에는 어디까지든지 자기는 안평 대군 죽이는 일에서는 발을 빼고 싶었다. 다만 발을 뺄 뿐 아니라 수양 대군은 어디까지든지 지친의 정리에 안평 대군을 죽일 수는 없다고 반대하는 태도로 일관하고 싶었다.

 

“어, 안되지. 안평이 아무리 죄가 있기로 죽이다니 말이 되나.”

이렇게 한 번 힘있게 말하고 싶었다. 수양 대군의 본심은 이렇게 말하기를 졸랐으나 수양 대군의 욕심이 훼방을 놀았다.

 

‘안평을 살려 두고 내 뜻을 이룰까.’ 하고 수양 대군은 눈을 감는다. 뜻을 이룬다 함은 일극의 정권을 내 손에 잡는 욕심을 채운다는 말이다.

 

수양 대군이 아무리 안평 대군을 못 죽인다고 뻗대더라도 정인지가 죽여 주었으면 고런 맞추임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마는 만일 수양 대군이 안평 대군을 살리고 싶어 하는 빛을 조금만 보이고 말면 정인지도 그것이 한 면치레인 줄 알고 ‘어 안되오. 죽여야 하오’ 하겠지마는 그 분량이 조금 지나치었다가는 정인지로 하여금 ‘에키’하고 물러서게 할 것인즉 그랬다가는 안평 대군은 살아나고 말 것이다.

수양 대군의 마음은 잠깐 괴로웠다.

 

“그렇지마는 내 말은 사정이요, 제상(諸相)의 말은 공론이니까 만일 공론이 그렇다 하면 나도 공론을 막을 바는 아니어.” 하고 한참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계전을 바로 보며,

“다 상감 처분에 달렸지. 내야 알겠나. 알아 하소.” 하고 더 말하기 거북한 빛을 보인다.

 

이계전은 수양 대군의 그 심사를 못 알아볼 사람이 아니다. 아무렇게 하든지 왕의 입으로 안평 대군을 죽이라는 말씀이 나오도록 하라는 뜻이다.

 

“소인 물러가오. 염려 마시겨오.” 하고 이계전은 수양 대군 궁에서 나와 곧 정인지에게로 갔다.

 

정인지는 아직도 아까 경회루에서 상감의 말씀으로 생긴 분함이 가라앉지 아니하여 어찌 하면 안평 대군을 죽이는 목적을 달하고 또 어찌하면 왕으로 하여금 정인지가 무서운 사람인 줄을 알게 할까하는 생각에 애를 쓰고 있었다.

 

이계전이 돌아와 전하는 말을 듣고 인지는 자기가 얘기하였던 생각과 같았다는 듯이 눈을 사르르 감고 입을 한일자로 다물고 소리없이 웃는다. 이것은 무슨 계획을 얻어가지고 되었다 하는 뜻이다.

 

인지는 곧 사인(舍人)을 불러 내일 아침에는 솔백관계(率百官啓) 할 일이 있으니 정부(政府), 정(政) 원(院), 삼사(三司), 육조(六曹)할 것 없이 육품(六品) 이상은 한 사람 빠지지 말고 근정전에 모이라고 분부를 내렸다.

때는 신시초(申時初)나 되어 각 마을 대소 관인들은 그날 사무를 끝내고 사퇴하려 하는 때다.

 

이때에 솔백관계라는 말을 듣고 모두 무슨 큰일이나 보는 듯이 서로 바라보며 두런두런하였다.

 

대신이 백관을 거느리고 상소한다는 것은 과연 큰일이다. 여간한 국가 대사가 아니고는 못 하는 일일 뿐더러 만일 이렇게까지 하여도 왕이 듣지 아니하시면 대신은 백관을 거느리고 벼슬을 버리고 조정에서 물러나오는 책임까지도 져야 할 것이니 여간 대사가 아니다. 이를테면 왕에게 대한 시위운동이요, 최후통첩이다.

 

 

<다시 보는 단종애사(端宗哀史) 제73회>

 

수양 대군의 의향을 안 정인지는 이 어마어마한 최후 수단을 가지고 어리신 왕을 위협하자는 것이다. 사실상 왕은 아니지지 못할 것이다. 정인지의 입에는 쾌한 승리의 웃음이 떠돌았다.

 

비록 상소할 내용은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도 이것이 안평 대군의 생명에 관한 것인 줄은 다들 짐작하였다. 누구나 안평 대군이 살아 있고는 수양 대군의 세상이 얼마 오래 가지 못할 것을 아는 까닭이다.

 

그런데 백관이라는 사람들 중에는 안평 대군 궁에 출입하던 사람도 적지 아니하고 또 설사 직접으로는 안평 대군을 만나지 못하였더라도 마음으로 안평 대군을 사모하던 이는 부지기수요, 그뿐더러 안평 대군이 아무 죄도 없이 아주 애매한 것은 한 사람도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 사람들은 장차 이 일에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인가.

 

원동 성총관(成摠管) 집사람이다. 성총관이라 함은 성삼문(成三問)의 아버지 오위(五衛) 도총부(都摠府) 도총관(都摠管) 성 승(成 勝)의 말이다.

 

주인 대감은 도총관이요, 맏아들 삼문은 집현전 학사로 승정원(承政院) 우승지(右承旨) 곧 예방(禮房) 승지(承旨)요, 삼문의 아우되는 삼고(三顧), 삼빙(三聘), 삼성(三省)도 다 진사(進士) 대과(大科)로 한림(翰林), 검상(檢詳)의 청관(淸官)을 지내고 있다.

 

비록 세도하는 집은 못된다 하더라도 인물이나 문한(文翰)으로는 당시 일류로 일세가 부러워하는 바였었다.

 

그중에도 성삼문이라면 집현전 학사 중에도 가장 이름이 높은 사람중에 하나였었다. 그와 비견할 만한 이 박팽년(朴彭年),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신숙주(申叔舟) 등이 있었을 뿐이다.

 

세종 대왕께서 말년에 피부병이 계시어 누차 온천에 행행(行幸)하실 때에도 성삼문은 이 개, 신숙주 등으로 더불어 평복으로 왕의 곁에 모시어 무시로 왕의 구문을 받았다. 이처럼 성삼문과 신숙주는 세종 대왕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지을 때에도 성삼문, 신숙주가 중심이이었던 것은 누구나 다 알 바이다.

 

세종 대왕이 승하하시고 문종 대왕이 즉위하신 뒤에도 성삼문은 집현전 모든 학사 중에 가장 왕의 사랑하심을 받았다. 성삼문이 입직하는 날 밤이면 가끔 왕이 ‘근보(謹甫)’하고 부르시며 입직청에 무시로 찾아오시기 때문에 밤이 깊어 왕이 취침하심이 확실하다고 생각된 뒤가 아니면 성삼문은 관복을 벗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은 전에도 한 번 한 말이다.

 

당시 이름 높던 집현전 팔학사 중에서 경학(經學)과 인격으로는 박팽년(朴彭年)이 으뜸이요, 책론(策論)으로는 하위지(河緯地)가 으뜸이요, 시로는 이개(李塏)가 으뜸이요, 사학(史學)으로는 유성원(柳誠源)이 으뜸이요, 이학과 교제(交際)와 모략으로는 신숙주가 으뜸이요.

 

이 모양으로 다 각기 특색이 있는 중에 찬란한 문장과 풍류해학(風流諧謔)으로는 성삼문이 으뜸이었다.

 

술 잘 먹고 잘 떠들고 웃는 소리 잘하고 세상 이면경계 같은 것은 돌아볼 줄 몰랐다. 그러하면서도 그에게는 추상열일(秋霜烈日)과 같은 엄연한 절개(節槪)가 있었다.

 

그가 북경 가던 길에 백이숙제묘(伯夷叔齊廟)에 써 붙이었다는 시를 보든지, 또 그가 지은 단가(시조)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어 있어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한 것을 보든지, 다 그의 열사적 반면을 보이는 것이다.

 

아니다, 열사적 반면이랄 것이 아니라 겉으로는 파탈하고 웃고 떠든다 하더라도 속으로는 무엇으로도 굽힐 수 없는 송죽 같은 맑고 매운 절개가 있던 것이다.

 

또 성삼문이 북경 갔던 길에 어떤 사람이 조선 문장 성삼문이 온다는 말을 듣고 묵화(墨畵) 백로도(白鷺圖) 한 폭을 가지고 와서 화제를 청하였다. 삼문은 그림을 보자마자 그를 불러서 명나라 사람들은 놀래었다고 한다. 아무리 성삼문이 시는 잘못 짓는다 하더라도 이만큼은 그도 시인이다.

 

성삼문은 이번 수양 대군이 소위 정란에 의분을 금하지 못하나 일개 승지로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내일은 안평 대군을 죽이기 위하여 좌의정 정인지가 솔백관계한단 말을 듣고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다하여 그 아버지 승의 허락을 얻어가지고 평소부터 믿던 집현전 친구들을 모아 명일에 할 대책을 토론하기로 하였다.

 

성삼문은 술과 안주를 준비하고 시회를 빙자로 박팽년, 하위지, 유성원, 이개, 이석형(李石亨), 기건(奇虔) 등을 청하였다. 신숙주, 최항을 청하고 아니 청하는 것은 여러 사람이 모인 뒤에 의논하기로 하였다.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드는 대로 비분강개한 언론이 나왔다. 이번 수양 대군의 정란이 생긴 뒤에 이렇게 모여서 토론하기는 처음인 까닭이다.

 

“당초에 어찌 된 셈을 알 수 없어 자네는 정원에 있으니 잘 아나?”

이것은 하위지가 성삼문에게 물은 말이다.

하위지의 이때 벼슬은 집의(執義)다.

 

청천벽력이어서 어찌된 셈을 모르는 것은 하위지뿐이 아니었다. 수양 대군이 이상한 뜻을 품었다는 것은 문종대왕 승하 이래로 소문난 일이지마는 설마 이렇게도 벼락같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래 정부에서는 깜깜히 몰랐더람. 지봉(芝峯)은 몰랐다 하더라도 절재(節齋)까지라도 몰랐더람. 다들 낮잠만 자고 있었더람.” 하고 주인 되는 성삼문이 도리어 먼저 분개하였다.

지봉이란 황보인의 당호요, 절재란 김종서의 당호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정부의 무능을 분개하게 여겼다.

 

 

<다시 보는 단종애사(端宗哀史) 제74,75회>

 

“최항이가 정인지 문하에 긴히 다니느니. 사람이 재승박덕해. 재주는 있지마는 원체 의리가 박하고 물욕이 있어.” 하는 것은 전 대사헌(大司憲) 기 건(寄 虔)의 말이다.

 

기 건은 수양 대군 이하 왕자들이 궁중에 분경(奔競)하는 것을 탄핵(彈劾)하다가 수양 대군에게 밀리어 쫓겨난 사람이다.

 

“최항이 아니기로 모르겠나. 내일 상소야 빤하지. 수양 대군이 안평 대군을 싫어하는 줄 아니까 안평을 아주 죽여버려서 수양의 마음을 기쁘게 하자는 정 정승의 충성에서 나온 일이겠지.”

하는 것은 하위지다.

 

문제의 중심은 내일 아침 정인지가 백관을 거느리고 근정전에서 상감께 안평대군 죽여야 할 것을 아뢸 때에 그 옳지 못함을 한 번 다투어 볼까 함이다.

 

“간신(奸臣)의 무리가 무죄한 사람에게 누명을 씌워 죽이는 것을 볼 때에 묘당(廟堂)에 한 사람도 다투는 이가 없다. 하면 의(義)를 어디 가서 찾는단 말인가.

 

또 이때에 한번 수양과 정가의 예기를 자르지 아니하면 장차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를 것이니까 이때에 우리가 불가불 목숨을 내어놓고 다투어야 할 것일세.” 하고 강경론을 하는 것은 이 개다. 이렇게 말하는 이 개의 심중에 항상 수양 대군과 정인지 의 주구(走狗)가 되어 껍죽대는 그 숙부 계전의 모양이 보이었다.

 

이 개의 강경론에 성삼문, 김 질도 찬성하였다. 어전에서 한 번 정인지와 흑백을 다툴 것을 주장하였다.

 

“우리가 아니하면 누가 한단 말인가. 만약 이 일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무소불위할 것이니까, 우리 몇 사람이 중심이 되어서 연명을 하여가지고 정가에게 하늘 높은 양을 보여야 하네.” 하고 김 질은 연명 상소라는 구체안까지 내어놓았다. 김 질의 말에 여러 사람은 그럴 듯이, 그러나 결정 못하는 듯이 서로 바라보고 앉았다.

 

김 질은 풍세가 좋은 듯하면 더욱 기운을 내는 사람이다. 자기의 의견이 설 듯한 눈치를 보고는 더욱 기운을 내어,

 

“이렇게 한단 말이야. 내일 조회에 정인지가 말을 낼 때까지는 아무 소리 말고 가만히 있거든. 정인지가 의기양양해서 안평 대군 죽여야 한다는 뜻을 상감께 상주하고 물러나지 않겠나. 그러면 아무도 감히 나서는 사람이 없을 것이어든.

 

그러면 정인지의 득의가 오죽하겠나. 그때에 우리가 나선단 말이야. 우리가, ‘상감께 아뢰오. 좌의정 정인지의 말이 옳지 아니하외다.’ 하고 나서는 날이면 제가 간담이 스늘하지 않고 배기겠나. 이것도 하고 (왼손 엄지손가락을 우뚝 내세운다. 수양 대군을 가리키는 뜻이다) 에끼하고 가슴이 꿈쩍할 것일세.

 

그렇다구 우리가 무서워서 하려면 일을 못하지는 않겠지마는 설사 우리 본 뜻은 실패한다 하더라도 어쨌든지 한 번 크게 예기는 질러 놓는단 말이야. 망신도 한 번 톡톡히 시키고, 안 그런가?”

김 질의 눈가에는 회심의 웃음이 돈다.

박팽년, 하위지같이 마음이 무거운 패는 김 질의 말을 듣고,

 

“응, 왜 그리 말이 교묘하고 자리할꼬.” 하여 김질의 태도가 군자답지 못함을 불쾌하게 여기었으나 성삼문, 이 개와 같이 외분이 앞서는 사람들은 수양 대군, 정인지 등을 한번 망신을 시키는 것만 해도 어떻게나 통쾌한지 몰랐다.

 

“됐네 됐어. 꼭 됐어.” 하고 성삼문은 무릎을 치며 김 질의 꾀를 칭찬하였다.

유성원은 말없이 가만히 듣고만 앉았다.

이렇게까지 하여서라도 안평 대군을 위한다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결코 안평 대군이 무죄한 사람이란 이유만은 아니다.

 

이러한 어수선한 판에 무죄한 목숨을 위해서 여러 사람이 목숨을 내어놓고 다툴 여유가 있을까? 없다. 안평 대군을 살려야만 할 이유가 있다.

 

그 이유 중에 첫째로 가는 것은 안평 대군이 살아 있지 않고는 감히 수양 대군을 당해낼 사람이 없다는 것이니, 안평 대군마저 죽여버리면 수양 대군 일파에 대하여서는 정히 무인 지경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정치적 이유로 보아서 아무리하여서라도 안평 대군은 죽지 않게 하여야 할 것이다.

 

또 안평 대군을 살려야 할 둘째 이유가 있으니, 그것은 도덕적 이유다. 성삼문 등이 생각하기에 수양 대군은 불의를 대표한 세력이요, 안평 대군은 의를 대표한 세력이었다.

 

안평 대군이 밤낮에 시와 술과 풍류에 묻히어서 비록 적극적으로 하여 놓은 일은 없었다

하더라도 그는 옳은 일을 알아보고 옳은 사람을 알아볼 줄 알므로 천하의 옳은 사람들이 돌아가는 바 되어 은연중 천하

의인지사의 중심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안평 대군이 죽는 것은 안평 대군 개인이 죽는 것이 아니라, 실로 의를 대표하는 세력이 죽는 것이다. 이르므로 안평 대군은 아니 살리지 못할 것이다.

 

안평 대군을 아니 살리지 못할 셋째 이유가 있다. 그것은 어리신 상감을 위하여서다. 고명 받은 유력한 제신이 다 죽어버린 이때에 어리신 왕을 보호할 가장 큰 힘은 안평 대군이다.

 

성삼문 일파의 눈에 수양 대군은 아무리 자기가 그렇지 않다는 것, 자기의 목적이 성왕에게 대한 주공이 됨에 있는 것을 누누이 선언한다 하더라도 상감에게 호의를 가진 보호자가 아닌 줄로 보이었따.

그러므로 왕을 안전하게 함은 그것은 성삼문 일파 자기네의 문명, 고명에 대한 최대한 의무다.

 

이는 안평 대군을 살리는 수밖에 없었다. 안평 대군에게 개인적으로 받은 지우(知遇)에 대한 정도 결코 가벼운 것은 아니었다.

 

 

<다시 보는 단종애사(端宗哀史) 제76회>

 

어느 편으로 보든지 안평 대군을 살려내는 것은 현하시국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문제다.

그런데 이 목적을 달하려면 그 가장 첩경은 수양 대군의 마음을 돌리는 것이지마는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요, 오직 남은 길은 여론을 일으켜서 수양 대군으로 하여금 체면에 안평 대군 죽이기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지마는 정인지는 이것을, 여론이 일어나면 이롭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에 극비밀리에, 질풍 신뢰적으로 해버리려는 것이다.

 

내일 아침에 솔백관계하고 왕을 위협해 왕께서 부득이 수양 대군에게 물으시어, 수양 대군이 가장 부득이한 듯이 백관의 의향을 막을 수 없다고 상주를 하여, 그리하면 아마 일 주야가 지나지 못하여 안평 대군의 목숨은 벌써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안평 대군을 살리려는 편에서는 어떻게 조수족(措手足)할 여유가 없다.

 

사정이 이러하고 보니 인제는 김 질의 말과 같이 내일 아침 묘당에서 한바탕 풍파를 일으켜 보는 수밖에는 아무 도리도 없다.

 

감정에 격한 이 개, 성삼문 등은 전후를 돌아볼 새 없이 김 질의 말에 찬동하였으나 비교적 냉정하고 이지적인 하위지, 박팽년 같은 이는 또 그 결과에까지 생각이 미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일은 안되고 목숨은 잃고 그렇지마는 의리상 아니 그러할 수는 없고……”

실로 난처한 경우이다.

 

“이번에도 목숨은 하나 내어놓아야 하겠고 또 후일을 위하여서도 목숨은 하나 남겨 두어야 하겠고.” 하고 마침내 박팽년이 탄식하는 소리를 발하게 되었다.

 

사실상 그러하였다. 수양 대군이 정권을 잡은지 사흘이 다 되지 못하여서 벌써 벼슬하는 사람들은 그 밑으로 돌아가 붙으려고 애를 썼다. 날이 갈수록 사람들은 의리와 임금에게 충성되기보다 권세 잡은 수양 대군, 정인지에게 충성도기를 힘쓸 것이다.

 

만일 이번 안평 대군일로 하여 ‘우리네’가 다 죽어버리면 뒷일은 누구에게 부탁하랴 하는 것이 오늘 밤 모인 몇 사람의 진정의 근심이었다.

이때에 성삼문이 신숙주 문제를 끌어내었다.

 

“내가 그 사람을 청하려다가 또 다들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서 아니 청하였다. 이번에 갑자기 벼슬이 높이 오른 것을 보면 수양이나 정가에게 긴히 보이기도 한 모양이지마는 그런들 설마 아주 환장이야 하였겠나. 설사 환장이 되었기로니 우리 말이야 제가 안 듣겠다.

 

또 가만히 생각하면 우리네 중에 신숙주가 가장 수월한 듯하니까 아마 그 마음을 사노라고 높은 벼슬을 주었는지도 알 수 없어. 아무리 세상이 뒤집히었기로 설마 신숙주가 어디 그럴 리야 있을라고.”

 

신숙주는 이른바 집현전 팔 학자 중에 하나로 여기 모인 사람 중에 어느 누구와는 친하지 아니하라마는 특히 성삼문과는 성이 다를 뿐이지 죽마고우요, 동문수학이요, 동포 형제 나 다름이 없이 절친한 사이였다.

그래서 이번 사건에 남들은 다 신숙주를 의심하여도 성삼문만은 아직도 그를 의심하고 싶지 아니하였다.

 

“아니야 아니야.” 하고 성삼문의 말에 이 개가 손을 내어두르며 굳세게 부인하였다.

“신숙주가 이번 일에는 제일 가는 모사래.

첫째가 한명회, 둘째가 신숙주라네. 내 삼촌 말을 들으니까 신숙주는 벌써부터 수양 대군과 통한 모양이요, 정인지를 수양 대군에게 갖다가 붙인 것도 신숙주라나보데.

 

내 삼촌은 수양 대군 문하에 밤낮 다니기나 하지마는 신숙주는 수양 대군 궁에 한 번 발도 안 들여놓고도 내 삼촌보다는 더 긴 했던 모양이니 알아볼 것 아닌가.”

사람들의 눈은 성삼문에게로 옮아갔다. 그러나 삼문도 이 개의 말을 반박할 아무 재료도 가지지 못하였다.

 

“그래도 신숙주가 나서면 혹시 안평 대군을 살려낼지도 모르니 한 번 말이나 해볼까.”

“안 될 말이야! 안평 대군을 죽여야 한다는 꾀도 신숙주 놈의 속에서 나왔기가 십상팔굴세. 내 삼촌의 말눈치가 신숙주 놈부터 때려죽일 놈이야.” 하고 이 개는 흥분을 못이겨 그 가냘픈 몸이 떨린다. 이 개가 삼촌이라는 것은 무론 이계전이다.

 

명일 조회에 한 풍파 일으키기로 마침내 작정이 되었다. 의리 소재에 주저할 바가 아니라고 보았다.

 

“뒷일을 생각해서 목숨을 아껴 둔다는 것은 의가 아니야. 보지 못하는 장래를 위하여 목전에 닥친 대의를 저버리다니 말이되나. 우리네가 이번 의에 죽으면 후일에 그때 의에 죽을 사람이 자연 또 있을 것이야.” 하는 이 개의 말은 여러 사람의 뜻을 결정하는데 가장 힘이 있었다. 이석형(李石亨), 기 건(奇 虔)의 자중론(自重論)은 이 대의 앞에 자연히 소멸되고 말았다.

 

오륙인이 미관말직의 의롭고 약한 힘으로 일국 정권을 마음대로 놀리는 수양 대군과 정인지를 대항한다는 것은 실로 당랑거철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의를 위하여 죽는다’하고 생각하면 마음이 든든하였다.

 

술이 나왔다. 아마 이 세상에서 마지막일지 모를 주회다. 권커니 잣거니 여러 순배에 이르러도 내일 일이 관심이 되어 술이 취하지는 아니하였다.

 

“누구 유력한 사람을 하나 장두(狀頭)로 세우는 것이 어떠한가. 우리네 미관말직만이 나서는 것보다 그래도 자리에 첨예한 사람이 한둘 있으면 더 소리가 크질 않겠나.” 하고 하위지가 술잔을 놓고 말을 낸다.

“그래, 내 뜻도 그러이.” 하는 것은 박팽년이다.

 

 

<다시 보는 단종애사(端宗哀史) 제77회>

 

박팽년이 예조참의(禮曹參議), 성삼문이 우승지(右承旨), 이 개가 직제학(直提學), 유성원이 사예(司藝), 김 질도 유성원과 같이 사예, 이석형이 교리, 그중에 기 건이가 대사헌(大司憲)을 지냈으니 가장 벼슬자라가 높다 하려니와 현직은 없고 그 나머지는 조정에 나서서 힘있게 말할 만한 지위에 있는 이가 없다.

 

현재 대사헌 권 준(權蹲), 대사간 이계전(李季甸)이 동지였으면 대단히 소리가 클 것이언마는 이 두사람은 수양 대군의 심복이다.

 

그런즉 내일 조정에서 정인지와 다툴때에는 적어도 정경(正卿)의 지위는 가진 사람이 두목으로 나서는 것이 필요하다.

한 번 말을 낸 뒤에는 아무나 나서서 말할 수가 있겠지마는 처음 말을 낼 사람은 지위나 명망이 족히 정인지와 비둥할 사람이 필요하다.

 

그러나 누가 좋을까 하며 오래 생각할 필요가 없이 한 사람을 택하였다. 그 사람이 누구 인 것은 독자도 벌써 짐작할 것이니 그것은 의정부(議政府) 좌참찬(左參贊) 허 후(許詡)다.

 

허 후 집에 가는 교섭 위원은 성삼문과 이 개 두 사람으로 정하였다. 이 개와 허 후와는 관계가 있다. 허 후의 아들 교리 허 조가 이 개의 매부였다. 이렇게 이 개와 허 조와는 다만 남매의 분의가 있을 뿐더러 또한 자기상적하는 동지였다.

 

성삼문이 개가잿골 허 후 집에 다다랐을, 때에는 벌써 야심하였었다. 그러나 인제 어떠한 벼락이 내릴지 모르는 허 후 집에서는 내외가 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개만 짖어도 금부 도사나 아닌가 하고 마음을 조리고 있었다.

성삼문, 이 개는 우선 허 조와 만나서 내일 일을 말하였다. 허 조는 대번에 승낙하였다.

 

“그런데 여보게.” 하고 성삼문은 허 조더러,

“춘부 대감께서 앞장을 서시어야 하겠네. 우리네 미관말직 배들만으로야 무슨 말이 설 수 있겠나. 그래서 춘부 대감을 우리 두령으로 추대하기로 의논들이 되었네.” 하고 허 후가 두목으로 나서지 아니하면 안될 뜻을 말하였다.

허 조는 아버지의 명운이 실로 절박한 것을 깨닫고 한참이나 침음하더니,

 

“잠간 기다리게. 내 아버지한테 자네 말은 전함세. 자식 된 도리에 늙은 아버지를 죽을 길로 들어가시라고 권하기는 차마 못하겠네 그려.” 하고 큰사랑으로 올라갔다.

 

허 후는 이때까지도 옷도 끄르지 아니하고 편지 축을 내어놓고는 이번에 순난(殉難)한 여러 친구들에게서 받은 필적들을 골라서 꿇어앉아서 두 손으로 받들고 읽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들을 바라보며 무슨 말을 내려는 뜻을 보인다.

허 후는 아들 허 조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오, 너 잘 왔다. 이리 오너라.” 하고 서안 위에 골라 놓은 몇 뭉텅이 종이를 가리키며,

“이것이 지봉(芝峯), 이것이 절재(節齎) 관적이야. 충신열사의 필적은 분향 단좌하여 보는 법이야. 이것은 내가 죽은 뒤에라도 자손에게 전해야 한다.” 하고 또 다른 뭉텅이 하나를 내어놓으며,

 

“이것은 안평 대군 필적이야. 다 잘 두어라.” 한다.

아무리 의에 대하여는 자기 목숨을 초개같이 아는 허 후라도 불출일년에 아들 손자가 다 도륙을 당하고 허 후의 집이 영원히 멸망해 버리리라고까지는 생각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의 눈앞에는 둘째 손자 구령(九齡)이 할아버지 곁에서 놀다가 아랫목에 곤하게 자는 양이 보인다. 큰 손자 연령(延齡)은 명춘에 과거를 보려는 나이다.

 

허 조는 아버지가 말하는 대로 ‘예’ ‘예’ 하기는 하면서도 마음은 슬펐다. 그렇게도 좋은 아버지 좀 괴벽하다고 할 만은 하지마는 일찍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제 몸이나 제 집을 위하여 무엇을 생각하거나 일하는 것을 보지 못한 그러한 아버지.

 

별로 능력은 없으나 나라 일만을 자기 일로 생각하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분해하던

아버지.

 

그러한 아버지가 이제나저제나 하고 금부도사를 기다리게 된 정경을 생각하면 전래 효성을 타고난 허 조의 가슴은 메어지는 듯하였다. 더구나 성삼문, 이 개가 청하는 대로 한다면 아마도 이 늙고 좋은 아버지의 생명은 내일 하루를 넘기지 못할 것이다.

 

“아버지!” 하고 부르고는 허 조는 말문이 막히었다. 죽고 사는데 대하여 무서워하거나 슬퍼할 허 조가 아니언마는 모든 사정이 허 조의 슬픔을 폭발하게 한 것이다.

허 후는 안평대군의 편지 한 장을 들고 보다가 아들의 말에 놀라는 듯이 고개를 들어 물끄러미 아들을 바라본다.

 

“아버지!” 하고 허 조는 남아의 의기로 복받치어 오르는 울음을 눌러버리고,

“성 삼문이가 왔습니다.” 하고 말문을 열었다.

“성 삼문이가 왔어? 혼자?”

 

“이 개허구요.”

“응, 어찌해 이 밤중에?” 하고 허 후는 손에 들었던 안평 대군의 편지를 책상 위에 내려놓는다.

“내일 아침에 솔백관계한다고 아니 합니까.”

“응, 그렇지. 정가가.”

허 조는 방 안에 누가 듣지나 않나 하는 듯이 휘 한번 둘러보고는 소리를 낮추어,

 

“오늘 저녁에 성삼문의 집에 몇 사람이 모였더래요.”

“누구 누구?”

“그 사람들이지요, 박팽년, 하위지, 이석형, 기 건, 유성원…….” 하고 말도 끝나기 전에 허 후가 눈을 크게 뜨며,

 

“무어? 유성원이가 무슨 낯을 들고 나와 뎅겨?” 하고 소리를 지른다.

 

 

<다시 보는 단종애사(端宗哀史) 제78회>

 

“그제야 협박을 받아서 그런 것입니다. 유성원이가 마음이야 변할 리가 있어요?” 하고 허 조는 유성원을 두남 둔다.

 

“협박만 받으면 아무런 것이라도 한단 말이냐.” 하고 허 후의 소리는 더욱 커진다.

허 조는 아버지 뜻을 거스르기가 어려워 잠깐 잠자코 앉았다.

허 후는 유성원 문제보다 더 중대한 문제를 잊었던 것을 생각하고 성난 것을 거두고,

 

“그래 그 사람들이 모여서 어찌했단 말이냐?”

“내일 아침 정인지가 안평 대군 죽여야 할 것을 주장하거든 안평 대군을 죽이는 것이 옳지 않다고 크게 박론하기로 작정하였다고 합니다.” 하는 허 조의 말에 허 후의 고개가 저절로 번쩍 들리고 눈이 크게 떠지더니 숨길 수 없이 기쁜 빛이 드러나며,

 

“그렇기로 작정을 했어? 조정에서 정인지와 한바탕 다투기로?” 하고 참을 수 없는 듯이 빙그레 웃는다---.

“어, 장하다. 아직도 의가 살았구나.”

허 후는 유성원 때문에 일어났던 분한 마음도 다 스러지고 가장 유쾌한 듯이,

 

“왜 이리 들어오라고 아니한단 말이냐. 귀한 손님들이로구나. 이리 들어오라고 하여라.” 하고 서안 위에 늘어 놓인 종이 뭉텅이를 주섬주섬 주위서 문갑 속에 집어넣는다.

“그런데 아버지가 앞장을 서라고요.” 하고 허 조가 아버지를 우러러본다.

 

“내가 나서라고? 나서기를 두 말이냐. 하늘이 도와서 인제 내가 죽을 곳을 얻었다. 어서 다들 이리 들어오라고 하려무나.” 하고 허 후는 마치 오래 그리워하던, 대단히 반가운 사람이나 만나려는 듯이 기뻐하였다.

처네를 들어 손자 구령의 곤히 자는 몸을 덮어 주었다.

이리하여 허 후와 내일 일을 다 짜 놓고 허 후 집에서 나오는 길에 성삼문은 이 개더러,

 

“여보게, 우리 범옹(泛翁)이 한테 들러가세.” 하였다. 범옹은 신숙주의 자다.

“그건 무엇하러?” 하고 이 개는 냉랭하였다.

“가서 그 사람이 환장을 했나 아니했나 보세그려. 보아서 정말 환장을 했거든, 한바탕 호령이나 해주고 그렇지 않고 예전 신숙주대로 있거든 안평 대군 위해 힘을 좀 쓰라고 해 보세그려.

 

사리 여부를 알아보지도 아니하고 친구를 버린다는 것이 어디 친구의 도린가.” 하고 성삼문은 이 개를 끌었다.

 

성삼문의 말은 이치에 합당하였다. 이 개는 마음으로는 싫지마는 성삼문의 말을 그렇게 거절할 수도 없고 또 신숙주 집이라야 허 후 집과 같이 잿골이어서 집으로 가는 길에서 얼마 돌지도 아니하겠기로 성삼문을 따라나섰다.

신숙주 집 대문은 굳이 잠겨 있었다. 문을 열 때에는 전에 보지 못하던 관노(官奴) 같은 사사오인이 성삼문, 이 개에게 대하여 교만한 태도로 수하(誰何)하였다. 이 개는 대로하여,

 

“이놈들! 눈이 삐었느냐. 우리를 몰라보고 웬 버르장머리야.” 하고 호령을 하였다.

이 개가 하도 톡톡히 호령하는 바람에 관노 같은 놈들은 뒤로 물러섰다. 이 소리에 뛰어나온 종 하나가 성삼문을 알아보고 허리를 굽신하며,

 

“원골 영감마님 입시오.” 한다.

“오, 영감 계시냐?” 하고 성삼문의 말에 종이,

“네, 대감마님 계시오.” 하고 곁에 무엇이 있으면 둘러치기라도 할 듯이 잔뜩 성이 난 이 개를 힐끗 본다.

 

“오, 영감이 아니라 대감이시로구나.” 하고 성삼문은 신숙주 집 기구가 갑자기 변하였구나 하면서 사랑으로 들어갔다.

“범옹이!” 하고 길게 부르는 성삼문의 소리, 그것은 거의 날마다 귀에 익히 듣던 옛 친구의 소리에 신숙주는,

 

“어, 근보(謹甫)인가.” 하고 전보다 더욱 반가운 듯이 뛰어나와 맞았다. 숙주의 등 뒤로 흘러나오는 불빛에 전에 보던 커다랗고 넓적한 옥관자가 없어지고 그 자리에 자그마한 환옥관자를 붙인 것이 눈에 띄었다.

 

“소인 문안 아뢰오.” 하고 성삼문이가 시치미 떼고 신숙주 앞에서 읍하는 것을 신숙주가 한 손으로 성삼문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이 개의 팔을 잡으면서,

 

“이 사람 미치었다. 이건 다 무슨 짓이야.” 하고 픽 웃고,

“이리 들어오게.” 하며 두 사람을 방으로 끌어다가 앉히고,

“그런데 이게 웬일이야? 이 밤중에?” 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듯이 방 한편 구석에 피석하여 앉은 사람을 바라본다.

 

성삼문, 이 개의 눈도 그리로 향하였다. 거기는 사팔뜨기 눈에 광대를 쏙 내솟고 허위대 큰 작자 하나가 있다.

 

‘저게 웬 것이야?’ 하고 성삼문은 속으로 생각하였다. 그 괴상하게 생긴 작자는,

“대감 안녕히 주무시오. 소인 물러갑니다.” 하고 일어나 나갔다.

 

한명회가 사팔뜨기라더니 저것이 한명회라는 것인가 하고 성삼문은 일어나 나가는 한명회의 뒷모양을 흘겨보고 한명회 류가 이 야심한데 신숙주와 단둘이 무슨 은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대단히 마땅치 못하였다.

 

“이사람 그것 웬 작잔가?” 하고 성삼문은 한명회가 마당에 내려설까 말까 한때에 듣겠거든 들어라 하는 듯이 큰소리로 물었다. 이 개도 책망하는 듯한 눈으로 이 질문을 받는 신숙주를 바라보았다.

 

“응, 그 사람, 저 뉘 심부름 온 사람이야.” 하고 신숙주의 어음은 분명치 못하였다.

신숙주는 어찌해 등에다가 모닥불을 퍼붓는 듯함을 느끼었다.

 

 

<다시 보는 단종애사(端宗哀史) 제79회>

 

여태껏 한명회에게 또박또박 대감을 바치고 경대함을 받을 때에는 자기의 지위가 높음을 깨달아 만족한 기쁨이 있더니 성삼문, 이 개 두 친구의 들여다보는 눈을 볼 때에는 몸이 무엇에 눌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음을 깨달았다.

 

“뉘 심부름 온 사람이라니 그 눈깔하고 흉악하게 생겨 먹은 폼이 수양 대군 궁에 드나든다는 한가 아닌가. 이번에 영양위 궁 사람 죽이는 일에는 원훈이라지?” 하고 이 개가 칼날같이 날카로운 말로 숙주를 쏘았다.

숙주는 웃고 손으로 턱을 만질 뿐이요, 대답이 없다.

 

“그런가, 그것이 한 명횐가.” 하고 성삼문도 곁에서 재촉한다.

“그래, 한명회야. 그렇게 흉악한 사람은 아닐세. 외양은 그렇지마는 마음은 그닥지는 아니한 모양이야. 저 민대생의 사위 아닌가.” 하고 우리네가 사귀어도 관계치 않다는 듯이 숙주가 억지로 쾌활한 빛을 보인다.

 

숙주가 한명회의 변명을 하는 것이 두 사람에게는 더욱 불쾌하였다. 더구나 이 개는 당장에 숙주의 낯에 가래침이라도 뱉어 주고 싶도록 명회를 변명하는 숙주의 낯이 빤빤하였다.

 

오직 숙주를 가장 믿고 사랑하는, 본래 친구를 믿으면 거짓말까지도 믿으려 하여 의심할 줄을 모르는 성삼문만이 어떻게 하여서도 신숙주가 변심하지 아니한 것을 이 개에게 증명하고 싶었다. 그래서 단도직입으로,

 

“여보게 우리가 이렇게 야심한데 온 것은 자네헌테 물어볼 말이 있어서 온 것이야. 세상에서 말하기를 자네가 변심하였다네그려‘

우리네를 버리고 정인지 편이 되었다니 그런가. 정인지라고 본래부터 그리된 것은 아니겠지마는 정인지야말로 단단히 변심을 하였어.

 

세상이 다 지봉, 절재를 배반한다기로니 정인지야 어디 그럴 수가 있겠나. 저는 그럴 수가 없지. 그런데 듣는 바로 보면 지붕, 절재를 죽이게 한 것이 한명회, 정인지의 소위라 하니 정인지가 환장이 안되었으면 그럴 수가 있겠나.

 

그런데 자네는 이계전, 최 항과 함께 정인지 패가 되었다고 하니 그게 있을 말인가. 어디 자네 입으로 좀 그렇지 않다고 말을 하여 보게. 이번 자네 벼슬이 갑자기 뛰어오른 것이 수상하다고들 하지마는 그것이 혹 자네를 환장시키려는 정인지의 계책인지 몰라.

 

그렇지만 어디 세상에서야 그렇게 생각해 주나. 다 자네가 정인지 편이 되었다고 그러지. 아무려나 자네가 청백한 것을 보이려거든 우선 자네 입으로 이 자리에서 시원히 말을 해보게.” 하고 숙주를 바라보았다.

숙주의 관자놀이는 쉴새없이 들먹거리었다.

 

“어디 변심이고 말고가 있나.” 하고 숙주는 겨우 불분명한 외마디 대답을 한다.

“아니, 이 사람.” 하고 이 개가 고개를 숙주에게 내어 밀고 살기 있는 눈으로 숙주의 옥같이 아름다운 얼굴을 노려보며 묻는다.

 

“그러면 자네는 이번 수양 대군의 일에는 아무 상관이 없단 말인가. 집현전에서 영묘(英廟)와 현릉(顯陵)의 고명을 받던 신숙주 고대로 있단 말인가. 그렇거든 그렇다고 분명히 말을 하게.”

성삼문, 이 개의 말은 구구절절이 신숙주의 폐부를 찔렀다.

 

신숙주는 ‘죽을 죄로 잘못 했으니 살려 줍시오’ 하고 그만 방바닥에 엎드리고도 싶었다. 그러나 그리할 수가 있을까 그리할 수는 없다.

숙주는 얼음같이 차디찬 욕심의 들로 설레는 양심의 병아리를 꽉 눌려 질식을 시키고,

 

“글세, 이 사람들이 오늘 웬일인가. 자네네들까지야 나를 이렇게 의심해서 쓰겠나.” 하고 슬쩍 농치어 버린다.

이때에 종이 주안상을 들고 나왔다.

이 주안상은 숙주를 살리었다. 숙주에게 잠시 피신할 곳을 준 셈이다.

 

“자, 한 잔 먹세.” 하고 숙주는 예쁜 종으로 하여금 술을 치게 하였다. 이 젊은 종은 삼문이나 이 개가 일찍 숙주의 집에서 보지 못한 바다. 그렇기로 벼슬이 오른지 사흘이 다 못되어 이대도록 숙주 집 기구가 굉장하게 변할까.

 

신숙주 아버지는 참판 신장(申檣)이다. 그렇게 호화로운 집은 되지 못한다. 아버지 신참판이 치산하는 재주가 있는 덕에 가난치는 않다하더라도 이렇게 아름다운 종을 둘 처지가 못 되는 줄은 성삼문이 가장 잘 아는 바다. 이 종은 수양 대군한테서 선물 받은 종이다.

 

술도 수양 대군 궁에서 온 술이다. 그런 줄을 알았더면 성삼문, 이 개는 아니 먹었을는지 모르거니와 그들은 출출한 김, 흥분한 김, 으스스 추운 김에 이 따뜻하게 데운 달고 매운 향긋한 청주를 따라 놓는 대로 아니 마실 수가 없었다. 이리하는 동안에 신숙주는 두 친구의 무형한 단근질에 부대끼던 몸을 잠시 숨을 돌릴 수가 있었다.

 

이 술에 대하여 신숙주의 부인 윤씨(尹氏)에게 감사하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윤씨는 재와 색과 덕이 겸비하기로 동배간에 유명한 부인이다. 그는 남편의 친구가 사랑에 오면 가만히 종을 시켜서 그가 누구인지를 탐지하여서 적당하게 대접을 한다.

 

그것은 남편과의 친 불친을 표준으로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마는 결코 그 뿐은 아니다. 덕행과 명성에 흠이 있는가 없는가를 스스로 판단하여서 대접할 만한이는 하고 못할 이는 아니한다. 윤씨의 이 총명에 대하여서는 신숙주도 신임하고 간복하는 터이다.

윤씨 부인은 한명회가 왔을때에는 아무 대접도 아니하였다.

 

“왜 그런 소인을 사귀시오?” 하고 직접 남편에게 말한 적까지 있었다.

“아니, 그 사람이 그렇게 소인은 아닌걸.” 하고 그때에도 숙주는 아내에게 어물어물해 버리었다.

 

 

<다시 보는 단종애사(端宗哀史) 제80회>

 

성삼문이 윤씨부인의 가장 환영하는 손님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성삼문 올 때에 나오는 술상이 가장 좋다 좋은 안주가 생긴 때에는 윤씨는 성삼문 오기를 기다려서 다락 속에 감추어 둔다.

 

오래 감추어 둘 것 없이 성삼문이 찾아온다. 아내의 이 뜻을 신숙주도 기뻐한다. 아내 윤씨는 남편 신숙주의 뜻을 다 알아 두고는 남편이 말하기 전에 그가 원하는 바를 다하여 준다. 참 알뜰한 며느리요, 아내라고 칭찬받는 것이 마땅하였다.

 

“그러면 자네 뜻은 예나 이제나 변함이 없단 말인가?” 하고 성삼문은 한 번 더 숙주에게 묻는다.

“두 말인가. 신숙주가 설마 권세를 따라서 마음 변할 사람이겠나. 자네들헌테 이러한 의심을 받는 것이 내가 박덕한 탓일세 마는 내 마음은 그렇지를 않아.” 하고 숙주는 잠깐 휴양하는 동안에 새 기운을 얻어서 서슴치 않고 대답하여 버린다.

 

“글세, 그러면 그렇지. 우리 범옹이가 설마 절개를 팔아 먹을리야 있나. 여보게 백고(伯高) 안 그런가.” 하고 성삼문은 그만 마음이 탁 풀려서 좋아라고 무릎을 치며 이 개를 바라본다.

숙주가 무죄한 것이 그렇게 기뻣던 것이다. 백고(伯高)는 이 개의 자다.

그러나 이 개는 그렇게 단순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맵고 맺힌 사람이다. 숙주의 말이 그대로 믿어지지를 아니하였나.

 

“자네가 진실로 청백하거든.” 하고 이 개는 폐간을 꿰뚫어 보는 듯한 무서운 눈으로 신숙주를 들여다보며 명령하는 듯한 어조로 들이세운다.

 

“진실로 자네가 청청백백할 것 같으면 그러한 표를 보이게.”

하고 이 개가 요구한다.

“어떻게 하면 그 표를 보이는 것인가.” 하고 신숙주도 청백한 표를 보이고 싶은 태도를 보인다.

 

“첫째로 자네 벼슬을 내어놓게. 자네 벼슬이 너무 엽등(躐等)이야. 까닭이 없는 엽등에는 바르지 못한 속살이 있는 짓이라고 남이 말한들 자네가 무엇이라고 발명할 터인가. 자네가 아무리 청청백백하다고 하더라도 일개 승지로서 일약에 좌참찬이 되었다 하면 아무도 자네를 이번 일에 가장 공이 큰 사람으로 아니 볼 수가 있나.

 

정인지가 우참찬에서 좌의정으로 뛰어 오르고 한명회가 백면으로서 군기사(軍器寺) 녹사(綠事)된지 이틀 만에 이조참의(吏曹參議)가 된 것 이상일세. 그러니까 자네가 진실로 청백하거든 내일 아침으로 자네 벼슬을 내어놓게.”

 

이 개의 이 말은 참으로 신숙주에게는 아픈 말이었다. 일년내로 친구를 속이고 아내를 속이고 양심까지 속이고 애를 쓴 것이 무엇 때문인데? 권세 때문인데. 이 개의 말은 큰일날 소리었다.

 

“자네 말이 옳기는 옳의. 그렇지마는 너무 서생론(書生論)이야.” 하고 신숙주는 이제는 조금도 면난한 빛이 없고 도리어 이 개를 지도하는 태도다.

 

“어찌해 자네 말이 서생론인고 하니 우리가 다 청렴한 듯이 발을 빼고 물러나오면 나라일은 어찌한단 말인가. 영릉, 현릉께서 고명하신 것도 결코 물려나와서 독선기신이나 하라고 하신 뜻은 아닐 것일세. 자네들이나 내나 다 같이 이 몸과 목숨을 나라에 바치지 아니하였나.

 

한 번 바친 몸과 목숨을 늙어서 폐인이 되거나 죽어서 해골이 되기 전에 다시 찾을 수가 있나. 그것은 도리가 아니야. 하물며 오늘날같이 국가 다사한 날에 우리가 일심의 명예나 안락을 위해서 몸을 피하다니 될 말인가. 백고(伯高)! 자네가 잘못 생각한 말일세. 안 그런가 이 사람 근보(槿甫)?”

신숙주의 말은 과연 당당하다. 과연 충신의 말이요, 국사(國士)의 말이었다.

 

“옳의, 범옹(泛翁)이, 자네 말이 옳의. 우리가 물러나와서 쓰겠나. 우리가 나오면 그야말로 권 람이 한명회같은 류의 판이 되게. 안 그런가 백고?” 하고 성삼문은 의심이 다 풀리었다 하는 만족한 표정으로 이 개의 동의를 구한다.

 

그러나 이 개도 성삼문 모양으로 그렇게 단순하게 신숙주의 말에 넘어갈 사람은 아니다.

도리어 이 그럴듯한 신숙주의 말 속에 더욱 가증한 속임이 있는 듯이 깨달았다. 그렇지마는 그것을 폭로하여 뻔뻔한 신숙주가 부끄러워 죽도록 윽박지를 방법이 없는 것이 분하였다.

 

이 개의 해쓱한 얼굴은 더 해쓱하고 여자의 손가락같이 가늘고 흰 손가락들은 흥분으로 떨리었다. 숙주가 싸워 이긴 기쁨으로 빙그레 웃는 낯으로 이 개를 보는 것이 더욱 가증하고 분하였다.

 

“자네 속은 시원히 알았네.” 하고 성삼문은 기쁜 듯이,

“언제는 내가 자네를 의심하였겠나마는 하도 세상에서들 자네가 이번 일에 원흉(元兇)이라고 그러니까 자네 입으로 한 마디 안 그렇단 말을 시원히 들어 보려고 왔더니……어, 속이 다 트이는걸. 안 그런가 백고.” 하고 이 개의 팔을 잡아끌며,

 

“자, 한 잔 더 먹게.” 하고는 자기부터 혼자 잔을 들어 마신다.

“그러면 자네는 벼슬을 내어놓을 수 없단 말일세 그려?” 하고 이 개가 다시 채찍을 들어 신숙주의 피나는 양심을 후려갈긴다.

 

곤경이 다 풀리었거니 하였던 숙주는 가슴이 꿈쩍하였다. 이 사람이 내가 죽는 양을 보고야 말려는가 하고 잠깐 망연자실 아니할 수 없었다.

 

“이 사람, 고만하게. 더 말할 것이야 있나.” 하고 성삼문이 민망한 듯이 손으로 이 개를 막는 모양을 한다.

 

 

<다시 보는 단종애사(端宗哀史) 제81회>

 

이 개가 다시 다지는 바람에 신숙주는 몸에 소름이 끼치고 등골에 땀이 흘렀다. 그리고 결코 뜻이 변하지 아니한 것을 중언부언 말하였으나 그 말에는 도시 힘이 없었다. 성삼문이 새에 나서서 이 개를 무마하여가지고 신숙주 집을 나섰다.

 

그날 밤 신숙주는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개의 말과 같이 벼슬을 내어놓을 생각은 없었다.

 

이튿날 조회다. 영의정 수양 대군 유, 좌의정 정인지, 우의정 한 확, 좌찬성 신숙주, 좌참찬 허 후 이하로 정부, 삼사, 육조의 백관이 품질 찾아 근정전에 보이었다.

 

이날 조회에 첫째로 한 일은 수양 대군 궁을 호위하는 일이다. 정인지의 상주대로 금군진무(禁軍鎭撫) 두 사람이 갑사(甲士) 오십, 별시위(別侍徫) 오십, 총통(銃筒) 이십 방패(防牌) 이십으로 수양 대군 궁을 호위하기로 되었다.

 

이것은 황보인, 김종서 등 역적의 잔당(殘 黨)이 혹시 수양 대군을 엿볼까 하는 근심이 있다는 이유에서 나온 것이다. 기실은 정인지의 수양 대군에 대한 충성을 표한 것이다.

 

둘째 일은 이번 일에 공 있는 사람들을 정란(靖亂)공신(功臣)이라 하여 정인지 이하 삼십육인에게 일등훈(一等勳), 이등훈(二等勳), 삼등훈(三等勳)으로 나누어 군(君)을 봉한다는 것을 발표한 것이다.

 

그중에 중요한 사람 몇을 들면,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 정인지(鄭麟趾)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한 확(韓確) 고령부원군(高靈府院君) 신숙주(申叔舟)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 권 람(權擥)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

인산부원군(仁山府院君) 홍윤성(洪允成) 남양부원군(南陽府院君) 홍달손(洪澾孫)

 

영성부원군(寧城府院君) 최 항(崔恒) 한성부원군(韓城府院君) 이계전(李季甸) 강성부원군(江城府院君) 봉석주(奉石柱) 서부원군(西府院君) 양 정(楊汀) 여기 적힌 이름들은 독자도 벌써 다 아시는 바다. 한명회, 홍윤성, 양 정도 인제부터는 부원군 대감이 되었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박팽년, 성삼문 두 사람이 그날 밤에 집현전 입직을 하였다 하여 정란공신 삼등훈에 들어 군을 봉함을 받은 것이다. 물론 이 두 사람은 한 번도 군 행세를 한 일이 없었고, 또 공신들이 돌아가며 한턱씩 낼 때에는 두 사람은 가난하다는 것을 핑계로 내지를 아니하였다.

 

그러나 청천벽력으로 한명회, 홍윤성 등과 같이 정란공신 명부에 이름이 오른 것을 볼 때에는 두 사람은 벌린 입이 다물어지지를 아니하였다.

 

성삼문, 박팽년 두 사람을 정란공신에 집어넣은 것이 수양 대군, 정인지 등의 고등 정책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될 수 있으면 집현전 학사들 중에 누구누구 하는 사람들을 다라도 정란공신 속에 집어넣고 싶었다.

 

이러하므로 이번 소위 난의 누명을 조금이라도 감할 수가 있고 적어도 말썽 많은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을 수가 있는 까닭이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핑계가 없었고 성삼문, 박팽년은 그날 밤에 입직했다는 핑계가 있었던 것이다. 또 이 두 사람을 공신에 넣는데 신숙주와 정인지가 힘을 많이 쓴 것은 사실이다.

 

삼십육인 정란공신이 탑전(榻前)에 사은 숙배한 뒤에 정인지는 안평 대군 용과 전(前) 우의정(右議政) 전(全) 경(慶) 도(道) 도체찰사(都體察使) 정분에게 사사(儩死)하여야 할 것을 백관의 뜻이라 칭하여 탑전에 아뢰이었다. 그 요지는 이러하다---.

 

안평 대군 용은 수악(首惡)이라 종사(宗社)의 대죄인인즉, 비록 지친(至親)이라 할지라도 단정코 용서할 수 없을 것이요, 또 백관과 민심이 다 이 불공대천지수(不共戴天之讐)를 살려 두기를 원치 아니하니 왕은 사정을 버리시고 공론을 쫓아 단연히 안평 대군을 죽이소서 함이요,

 

또 전 우의정 정 분에 대하여는 정 분이 비록 도체찰사로 밖에 있었었으나 황보인, 김종서와 같은 봉당인 것이 의심 얹은즉, 그도 죽임이 마땅하다 함이다.

 

정인지가 충성을 다하는 듯, 죽음을 무릅쓰는 듯, 어린 왕을 효유하는 듯, 위협하는 듯 도도 수천 언을 늘어 놓을 때에 백관 중에는 숨소리도 없는 듯하였고, 왕은 다만 어찌할 줄 모르는 듯이 좌우를 돌아보시었다.

 

안평 대군의 목숨이 쇠줄로 되었더라도 견디어날 것 같지 아니하였다. 어리신 왕은 이 사람들이 어찌하여 한사코 안평 대군을 죽이고야 말려는고 하고 그 속을 알 수가 없으시었다.

왕은 정인지를 바라보고 다시 마치 동정을 청하는 듯이 수양 대군을 바라보았다.

 

이 경우에 왕이 취할 길이 셋이다. ‘윤(允)’이라 하거나, 그와 반대로 ‘불윤(不允)’이라 하거나, 또 ‘영유보정 군국(軍國) 중사(重事) 실위총치(總治) 이(以) 여(余) 친(親) 정(政) 지(之) 일(日)’이라 함과 같이 나라 일은 모두 수양 대군에게 위임해 버리었으니 안평 대군을 죽이고 살리는 판결을 수양 대군에게 밀어버리시든지. 실로 위기일발이다.

이때에 허 후가 나섰다.

 

“좌참찬 허 후 아뢰오.” 하는 힘있는 늙은 음성이 조용하던 절내에 울릴 때 사람들의 귀와 눈이 다 허 후에게로 향하였다.

 

“저것이 또 무슨 객담을 하려고 나서.” 하고 수양 대군은 허 후를 흘겨보았다. 아무리 하여도 길들일 수 없는 허 후가 미웠다.

왕도 눈을 허 후에게 돌렸다.

허 후는 탑전에 부복하였다.

 

성삼문, 이 개, 박팽년, 유성원, 김질, 하위지 등은 언제나 나설 차비를 하고 뒷줄에서 허 후와 함께 가슴을 뛰게 한다.

 

“상감께옵서 좌의정 정인지를 파직하시와 금부(禁府)로 내려 가두시오!”

이것이 허 후의 말이다. 누구는 이 말에 놀라지 아니하였으랴마는 그중에도 정인지는 낯빛이 종잇장같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