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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일본의 세계유산 등재 정책의 문제점 -일제 강제동원 관련 세계유산 등재 사례-/서인원.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 目 次

1. 들어가며

2. 일본 세계유산 등재 사례의 관련 진정성

  2.1. 일본 메이지산업혁명유산 등재 문제

  2.2. 사도광산 세계유산 등재 문제

3. 향후 일본 세계유산 등재 동향 분석

  3.1. 도치기현 아시오동산에서의 조선인 강제동원

  3.2. 도야마현 구로베댐에서의 조선인 강제동원

4. 결론

 

Key Words: 강제동원(Forced Mobilization), 강제노동(Forced Labour), 국제법 (International Law), 민족차별 (Ethnic Discrimination), 유네스코 (UNESCO), 세계유산(World Heritage)

 

1. 들어가며

 

아우슈비츠 감옥과 비키니 핵실험지는 과거의 부정적인 사실에 대한 100% 인정을 전제로, 다시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후대에 남기고 자 등재되었는데1) 일본정부는 강제동원 사실을 숨기고 일본 역사를 미화하기 위해 메이지산업혁명 등재를 추진하였고 강제동원 표기와 설명을 한다는 약속을 이행하고 있지 않는다.

 

   1) 강동진・남지현(2014.4) 일본 큐슈—야마구치 일원 근대화 산업유산군의 세계문화유 산 등재에 대한 비판적 고찰 󰡔국토계획󰡕 49(2), 대한국토・도시계획학회. https://doi.org/10.47563/KJMC.43.2 

 

세계유산의 보존과 활용은 국가주의적인 역사관의 선전 이나 관광 이익의 목적을 가지고 실시해서는 안 되고, 특히 평화나 인권존중을 이념으로 중요시하는 유네스코가 관할하고,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대한 평가에 기반하는 세계유산 등재에 있어서는 평화나 인권을 유린해 온 사상이나 역사와 의 관계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세계유산이 되려면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 복원이나 정비를 위해 사용한 재료가 원형과 같은 진짜여야 하고, 원형을 변형하 거나 변질시키지 말아야 한다. 진정성은 진짜라고 주장하는 유산이 진실하지 못하면 세계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네거티브 유산(negative heritage; 負의 유산)으로써 강제동원 노동자들의 희 생에 대한 정당한 반성이 없다면 세계유산으로서의 자격은 상실되는 것이며 일본에서의 강제동원 기억유산은 세계유산으로서 자격이 없는 것이다.

일본 메이지산업혁명유산 등재 관련해서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는 전체 역사(Full History)를 알리라는 내용을 권고하였고 사토 구니(佐藤地) 주유네스 코 일본대사는 강제노역을 언급하면서 강제동원을 국제사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지금까지 강제동원 설명에 대한 약속 이행을 하지 않아, 이에 대한 일본정부의 세계유산 등재 문제점과 향후 일본의 세계유 산 등재 동향에 대해 분석하면서 세계유산 등재의 이념과 진정성에 대해 논하 고자 한다.

기존 선행연구에서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은 류큐(琉球)병합, 청일전 쟁, 타이완의 식민지화, 러일전쟁, 한국의 강제병합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아시 아 인민들을 무력으로 짓밟고, 그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과정에서 건설되었 다는 사실이 빠져 있다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일본 사회 내부의 많은 시민활동가들이나 양심적 지식인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듯, 일 본이라는 국가는 침략전쟁과 패전, 그리고 전후 민주주의로부터 결과적으로 자신들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채, 다시금 메이지의 영광이라는 허상에 혼이 붙들린 채,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려고 하는 듯 보인다고 했다.2)

 

    2) 이영진(2020)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을 둘러싼 기억의 정치에 관한 일고찰 󰡔아세아연구󰡕 63(2), 고려대 아시아문제연구소. 

 

또한 인류 번영에 결격 사유가 없는 후보들만이 세계문화유산이 되어야 하고 산업유산 으로서의 원기능이 변질되지 않고 아우슈비츠 감옥처럼 강제동원과 관련된 모든 사실을 정확히 밝히고 이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보상 후 등재를 해야 한다고 했다.3)

다케우치 야스토(竹內康人)는 메이지산업혁명유산, 군함도, 사도광산 등 일본 의 세계유산 등재 관련 한국인 강제동원을 연구하여 한국인 증언에서 본 강제동 원으로 세계유산 진정성과 강제동원의 전체 역사에 대해 설명하였다. 4)

정혜경은 미쓰비시광업(주)과 사도광산의 조선인 명부와 신문기사 및 문서 기록과 구술 기록, 현지 조사를 통해 동원 과정과 피해 실태를 분석했다. 5)

그리고 이 연구보고 서를 바탕으로 대중서를 만들어 사도광산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기 위한 강제동 원의 전체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6)

 

    3) 강동진・남지현(2014) 일본 큐슈—야마구치 일원 근대화 산업유산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대한 비판적 고찰 󰡔국토계획󰡕 49(2), 대한국토・도시계획학회.

   4) 竹内康人(2024) 󰡔朝鮮人強制労働の歴史否定を問う 軍艦島・佐渡・追悼碑・徴用工󰡕 社会評論社 ; 竹内康人(2022) 󰡔佐渡鉱山と朝鮮人労働󰡕 岩波書店 ; 竹内康人(2018) 󰡔明治 日本の産業革命遺産 強制労働Q&A󰡕 社会評論社.

   5) 정혜경(2019) 󰡔일본지역 탄광・광산 조선인 강제동원 실태: 미쓰비시(三菱)광업(주) 사 도(佐渡)광산을 중심으로󰡕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6) 정혜경・허광무(2021) 󰡔탐욕의 땅, 미쓰비시 사도광산과 조선인 강제동원󰡕 선인

 

이런 선행연구에서 향후 일본의 세계유산 등재 후보군(아시오동산, 구로베댐)에 대한 분석이 없어 기존의 일본 세계유산 등재의 문제점에 대해 분석하면서 아시오동산, 구로베댐에서의 조선인 강제동원 실태에 대해 분석한다.

그리고 최근 세계유산 등재의 공통성, 중립성이 제기되어 모든 현재 인류와 미래세대에게 공통의 중요성을 가지고 있고 분쟁유산은 분쟁의 승자인 국가나 지역에 한정된 기념물일 수 있음에 논제가 제기되고 있다.

또한 분쟁의 기억은 자칫 정치적으로 또는 영향력을 가진 일부 국가에 의해 자신들의 진실로 설정될 수 있다.

그래서 일본의 세계유산 등재 후보군을 세계유산 등재 기준(OUV, 진정 성, 완전성)에 맞추어 등재 가능성과 보완점에 대해 논하겠다. 

 

2. 일본 세계유산 등재 사례 관련 진정성

 

2.1. 일본 메이지산업혁명유산 등재 문제

 

세계유산 등재 기준은 10가지가 있으며 문화유산은 Ⅰ~Ⅵ번, 자연유산은 Ⅶ~ Ⅹ번 중 1개 이상을 등재 기준으로 선택해야 한다.

Ⅵ번 경우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쟁,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되는 등재 기준을 가진 유산들이 증가하고 있는데, 이는 근대기 에 발생한 각종 사건・사고들(전쟁, 원폭, 학살, 노예 수송, 식민지화, 강제 착취와 억압 등)이 세계유산 콘텐츠로 선택되고 있다.7)

일본의 구로베댐 등재 관련해서 등재 기준인 Ⅳ번은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측면으로 교량, 운하, 댐 등 산업화와 깊은 연관을 가진 건설 인프라 관련 유산도 유럽과 북미지역에서 20개소로 높은 점유율을 보인다.

2015년 7월 제39차 세계유 산위원회(World Heritage Committee: WHC)는 결정문8)에서 일본 근대산업시설 (Sites of Japan’s Meiji Industrial Revolution) 23개소9)의 세계유산 등재를 결정 하고, 각 시설의 전체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해석 전략을 마련할 것을 권고하 였다.

 

     7) 강동진외(2020) 󰡔세계유산의 새로운 해석과 전망󰡕, (사)이코모스 한국위원회, p.103

     8) WHC Decision 39 COM 8B.14

     9) 23개 시설 중 하시마(군함도) 탄광, 미이케 탄광, 다카시마 탄광, 야하타 제철소, 미쓰비시 조선소 내 3개 시설 등 7개 시설에서 한국인 등 강제 노역 피해 발생 

 

현재 한국 정부가 파악한 규슈와 야마구치(山口) 강제동원 작업장은 약 8백여 개소 이상이며, 이 중 군수공장은 140여 개소에 달한다.

이 지역의 대표적인 강제동원 기업은 미쓰비시(三菱)중공업・미쓰비시광업, 일본제철, 스미토모(住 友), 히타치(日立) 등으로, 이 지역의 강제동원 피해자는 37,000여 명, 현지 사망 2,500여 명, 행방불명 670여 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 중 미쓰비시중공업 나가사 키(長崎)조선소 등은 1945년 8월 9일 원폭 투하 이후 한국인 강제동원자들을 복구 작업에 투입하여 나가사키에서만 1만여 명의 사망과 총 2만 여 명의 피폭 피해를 입었다.

특히 하시마(端島)는 강제 노역된 한국인들에게 가장 끔찍한 작업 장이었다. 철저하게 고립된 섬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열악한 노동조건과 폭력, 차별, 익사 사고 등은 지옥섬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한국인 피해자들 은 증언하고 있다.

일본이 자랑하는 근대산업시설 세계유산 등재의 이면에는 강제동원 피해자들 의 피와 땀, 눈물, 강요된 죽음의 노동 등이 서려 있다는 것은 이미 다 알려진 사실이다.

강제 노역의 실태가 빠져 버린 산업유산정보센터 전시내용은 근대산 업시설의 일면만을 보여주는 부정확한 역사의 단면이라 할 수 있다. 2017년 12월 일본은 세계유산센터에 이행경과보고서를 제출하였고, 제39차 세계유산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권고 이행 상황 점검을 위한 보고서(State of Conservation Report: SOC 보고서)를 제출하였으나, 동 보고서 내용은 2015년 등 재 당시 일본 대표의 발언과는 상당한 괴리가 있었다.

2015년 등재 당시 일본 대표 발언은

 ① 1940년대 일부 시설에서 수많은 한국인 등이 본인 의사에 반해 동원되어 가혹한 조건 하에서 강제 노역하였다,

 ② 산업유산정보센터 설치와 같은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해석 전략에 포함시키겠다고 하였 다.10)

그러나 2017년도 일본 제출 이행경과보고서에서 상기 내용과 대조되는 내용이 보고되었다.

 ① 전쟁 전후 수많은 한반도 출신자들이 일본의 산업을 지원 하였다,

 ② 산업유산 보존을 위한 보급과 이해에 기여하는 싱크탱크로서 도쿄에 산업유산정보센터를 설치할 계획이라 했다.

2018년 6월 제42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일본 보고서 점검 후 결정문을 채택하 였다.

일본의 이행경과보고서를 점검한 세계유산위원회는 결정문11)에서 일본 대표의 발언을 포함한 2015년도 결정문을 충실히 이행할 것을 요구하고, 관련 당사국과 지속적인 대화를 권장하면서, 전체 역사 해석에 있어서 다양한 국제 모범 사례를 고려할 것을 강력히 독려하였다.

 

  10) UNESCO WH 2015a, pp.222~223

  11) WHC 42 COM 7B.10 

 

2019년 12월 일본은 제42차 세계유산위원회의 결정에 대한 SOC 보고서를 제출하였으나, 동 보고서 역시 2015년 등재 당시 일본이 약속한 후속 조치 이행  내용이 포함되지 않았다.

세계유산위원회의 당사국과의 대화 권고를 국내 이해 당사자로 제한적으로 해석하고, 주요 당사국인 한국을 대화 상대에서 배제하였 다.

2020년 6월 15일 일본 정부가 일반에 공개한 도쿄 소재 산업유산정보센터 전시 내용에 2015년 7월 세계유산 등재 당시 세계유산위원회의 권고 및 일본이 약속한 후속 조치를 불이행하였다.

강제 노역 사실을 부정하는 내용의 증언 및 자료들을 전시하였고, 전시 내용에 강제 노역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조치는 없었다.

교도통신은 일본 정부가 역사적 정설을 자학사관으로 보고 반론을 펴려는 의도로 보이지만 과거의 사실을 덮는 역사수정주의를 조장한다는 비판을 부를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일각에서는 아베 내각이 한국의 반발이 예상되는 사안을 강행함으로써 양국 관계가 악화하는 것을 조장하거나 방치하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있었다.12)

제44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2021년 7월 22일 일본 근대산업시설 세계 유산 등재 후속 조치 불이행에 대해 강한 유감을 표명하고, 충실한 이행을 촉구하 는 결정문을 컨센서스로 채택하였다. 13)

일본이 ① 각 시설의 전체역사 해석 전략, ② 한국인 등 강제노역 이해 조치, ③ 희생자 추모 조치, ④ 국제 모범 사례, ⑤ 당사자간 대화 등 5가지 사항을 포함하여, 공동조사단 보고서의 결론을 충분 히 참고하여 관련 결정 이행을 요청하였다.

또한 일본에 업데이트된 보존 현황 보고서 및 상기 이행 사항을 2022년 12월 1일까지 제출하여 2023년 제46차 세계 유산위원회에서 검토될 수 있도록 할 것을 요청하였다.14)

 

  12) 日, 유네스코 합의 깨고 군함도 강제노역 은폐 󰡔조선일보󰡕 2020년 6월 15일

  13) Decision 44 COM 7B. 30

  14) 외교부 뉴스・공지 보도자료(2021.7.22.) 제44차 세계유산위원회, 일본 근대산업시설의 세계유산 등재 후속조치 이행 촉구 결정문 채택

 

세계유산위원회는 산업유산정보센터가 유산의 구성 부지의 물리적 인근에 있지 않다는 점에서 세계유산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를 인정한 기간과 그 외 세계유산의 전체 역사를 다루는 자료가 각 구성 현장에서 거의 또는 전혀 이용할 수 없다는 점을 표명했다. 위원회는 산업유산정보센터의 디지털 통역을  통해 각 유적지의 전체 역사에 대한 이해를 강력히 권장하고 있다.15)

2023년 9월 14일 제45차 세계유산위원회 안건에서 당사국의 세계유산협약 이행 노력을 인지하고, 동 시설의 전체적 해석 전략을 더욱 강화해 나가기 위해 당사국 스스로의 약속을 계속해서 이행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였고, 당사국 이 동 유산의 해석 전략을 강화하기 위해 새로운 증언을 포함한 추가 연구, 자료 수집 및 확인 작업을 수행할 뿐만 아니라 관련 당사국들과의 대화도 지속할 것을 독려하였다.

그러나 일본 도쿄 산업유산정보센터에는 강제 동원 한국인 관련 학대와 차별이 없었다는 왜곡된 전시물이 설치・상영되고 있다.

이런 일본 의 조치는 2018년 유네스코 제42차 세계유산위원회가 일본 정부에게 관련국과 대화를 하고, 국제적인 모범사례를 참고해, 2015년의 약속을 이행하겠다는 계획 을 2019년 12월까지 제출하라고 요구한 것을 완전히 무시하는 행태이다.

제39차(2015년, 본), 제42차(2018년, 마나마) 및 제44차(2021년, 푸저우, 화상회 의)에서 채택된 세계유산위원회 결정들을 일본에 상기시켜, 당사국들과의 지속 적 대화 및 유산의 해석 전략 강화를 위한 추가 조치들에 대한 진전 사항을 세계유산센터 및 자문기구들이 점검할 수 있도록 2024년 12월까지 제출할 것을 일본에 요청하였다.

그러나 2024년 12월 1일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은 한국이 요청했던 한국인 강제동원 피해자 증언 전시, 강제노역을 포함한 전체 역사 설명, 한일 강제병합이 합법이라고 시사하는 전시물 철거, 강제동원 피해자 에 대한 진정한 추모 등의 요구 사항을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서 외교부는 세계유산위원회의 거듭된 결정과 일본 스스로 약속한 후속 조치들이 충실히 이행되지 않고 있는 데에 유감을 표하면서 일본이 국제사 회에 스스로 약속한 바에 따라 관련 후속 조치를 조속히 성실하게 이행할 것을 재차 촉구한다고 했다.16)

 

    15) UNESCO World Heritage Convention, Sites of Japan’s Meiji Industrial Revolution: Iron and Steel, Shipbuilding and Coal Mining (https://whc.unesco.org/en/soc/4085, 검색일: 2025년 3월 1일)

   16) 사도광산 이어 ‘2연타’ 맞은 정부…“군함도 약속 불이행 유감” 󰡔중앙일보󰡕 2025.2.1. 

 

일본 정부의 약속 불이행으로 향후 일본의 세계유산등 재 작업에 제동이 걸릴 것이고 지속적으로 한국정부가 기존 세계유산에 대한  약속 이행 요구가 있어 한일관계가 경색될 우려가 있다.

그리고 네거티브 유산인 일본의 메이지산업혁명유산 등재 계기로 국가간 상층된 시각으로 국제적 분쟁과 갈등의 소지가 발생하여 유네스코에서는 국제분쟁 소지가 있는 유산의 경우, 우선적으로 갈등 해소 후 등재 추진이라는 원칙을 세우게 되었다.

 

2.2. 사도광산 세계유산 등재 문제

 

2023년 2월 일본은 사도광산(佐渡鉱山)의 세계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에도시 대(17~19세기)에 한정하여 신청서를 제출하면서 논란이 될 수 있는 한국인 노 동자 강제동원 시기(20세기)를 제외하였다.

2024년 6월 7일 세계유산 자문기구 인 국제기념물유산협의회(ICOMOS)는 기타자와(北沢) 산업시설은 일본이 등 재하려는 에도시대와 관계없으므로 세계유산에서 제외할 것을 권고하였다.

동시에 ICOMOS는 등재 대상 시설에 대해서 에도시대뿐만 아니라 20세기가 포함된 ‘전체 역사’를 설명하라고 권고하였다.

2024년 7월 27일 일본은 위 두 가지 권고를 모두 수용하고, 세계유산위원회는 등재를 결정하였다. 일본 정부 는 사도광산의 전체 역사를 종합적으로 반영하는 해석과 전시 전략 및 시설을 개발할 것이며, 사도광산의 모든 노동자, 특히 한국인 노동자를 진심으로 추모 하기로 했다.17)

그러나 2024년 11월 25일 사도광산 추모식을 개최하였는데, 추모행사는 당초 사도광산 등재시 합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였다. 일본 정부의 고위급이 추도식에 불참하고 사도광산 전체 관련 추도식을 하면서 조선인 희생에 대한 언급도 없었 고, 강제동원에 대해 언급하지 않아 별도로 한국정부 자체 추도행사를 개최하였 다.

이것은 과거사에 대해 일본과 타협하지 않겠다는 한국 정부의 확고한 의지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다케우치 야스토는 사도광산의 ‘모든’ 노동자들 위한 추도식 열면서도 제2차 세계대전 잔혹행위는 은폐하려 하는 문제를 드러냈다고 했다. 18)

 

    17) 사도광산 세계문화유산 등재 결정 외교부 보도자료(2024.7.27.).

    18) Japan holds first memorial for ‘all workers’ at Sado gold mines but blurs WWII atrocity. Why? 󰡔AP󰡕 2024.11.25. (https://apnews.com/article/japan-korea-unesco-sado-history-forcedlabor-0218064869fb4a1270dad471432b9c46, 검색일: 2025.3.3.). 

 

오쿠조라 히데 키(奧園秀樹) 시즈오카현립대 대학원 교수는 일본이 윤석열 대통령 입장을 더 어렵게 만들었으며, 일본에도 득 될 것 없다고 지적했다.

한일관계 개선 흐름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지는 않지만, 한국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다고 했다.19)

아라이 마리(荒井眞理) 사도 시의원은 세계유산 등록 축하 자리가 아니었던 만큼 누구에게 감사를 표하는지 명확히 했어야 했고, 유가족들이 참석했다면 마음 불편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고스기 쿠니오(小杉邦男) 전 사도 시의원는 세계유 산 등록 축하를 위한 자리 같았고 진심이 담겨 있지 않아 지금 일본에는 전쟁 중 한반도에 큰 폐를 끼쳤다는 인식이 부족하다고 하면서 강제노동을 명확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20)

 

     19) <考論>佐渡追悼行事, 日本の配慮足りず 静岡県立大大学院教授・奥薗秀樹氏 󰡔朝 日新聞󰡕 2024.11.25. (https://www.asahi.com/articles/DA3S16091537.html, 검색일: 2025.3.2.).

     20) 佐渡金山の日本側追悼式 歴史に光当ててきた地元住民の見方は 󰡔朝日新聞󰡕 2024년 11월 26일(https://www.asahi.com/articles/ASSCT3PTWSCTUOHB00KM.html?iref=com_ myk_p001_th001, 검색일: 2025년 3월 1일) 

 

2024년 7월 일본 사도광산 등재 관련해서 강제 동원을 포함한 ‘전체 역사(full history)’에 대한 언급 없이 등재한 것은 ‘보편적 가치와 완전성, 진정성’에 어긋나 는 행위로, 일본 정부에 즉각적인 시정조치가 필요하다.

세계유산은 ‘전체 역사’ 를 기록하도록 되어 있는데, 일제강점기에 조선인 노동자를 강제 동원한 사실이 빠져 있는 것에 대해 납득할 수 없다.

또한 일본 정부의 메이지 근대산업시설 세계유산 등재 후 개관한 산업유산정보센터에 ‘한국인 등 강제 노역과 관련한 역사적 사실을 제외’한 것에 대해 일본 정부에 즉각적인 시정조치와 약속이행을 해야 한다.

일본은 2015년 제39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의 권고 에 따라 일부 근대산업시설에서 ‘한국인 등이 본인 의사에 반하여 강제 동원된 후 가혹한 조건에서 노역을 한 일이 존재하며, 피해자들을 기리기 위한 정보센터 설치 등의 조치를 하겠다’고 국제사회에 약속했지만 아직도 이행하지 않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사도광산 등재에서 약속한 한국인 강제동원 설명에 대해 살펴보겠다.

일본은 아이가와향토박물관에 사도광산에서의 한국인 노동자 존재 및 그 삶을 보여주는 패널 전시를 하였다.

패널 주제는 노동자의 출신지, 광산 노동자의 생활, 가혹한 노동 조건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국가총동원법에 근거한 국민징용령이 한반도에 도입되어, 1945년까지 사도광산에 1천 명 이상의 한반도 출신(한국인) 노동자가 있었다는 사실 설명하면서 관알선 모집에는 조선총독부가 관여했음을 명시하였다.

사도광산의 한국인 노동자들이 ‘소아이료(相愛寮)’라는 이름의 기숙사에 단 체 거주했다는 사실 및 기숙사에서 도주한 기록( 연초배급대장 사료), 노동자 들의 공동취사장 터가 남아 있는 것을 설명하였다.

전시 패널에는 위험한 갱도 내부 작업(삭암(削岩), 지주(支柱), 운반(運搬))에 한국인 노동자가 일본인 노동자 에 비해 더 많이 종사했다는 기록, 한국인 노동자 월평균 근로일(가동일)이 28일 에 달했다는 기록, 식량 부족 상황,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노동쟁의 발생 기록, 갱도 내부 작업 중 사망한 기록을 제시하여 당시의 가혹한 노동환경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전시 패널에는 조선인의 가혹한 노동은 기술돼 있지만 ‘강제성’ 표현은 전혀 없어 세계유산 등재의 진정성에 의심이 간다.

전시 패널 중, 귀국 조선인에 대한 미불 임금 채무 등에 관한 조사에 대하여 사도광산(사도광업소) 측이 전후 1,140명의 채권자(귀국 한국인 노동자)에 대한 미지불 임금(총 231,059엔 59전)을 공탁한 기록을 전시한 것을 보면, 최소한 1,140명의 조선인이 강제 동원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이들의 급여와 저축, 각종 보험금을 지불하지 않고 공탁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강제저축으로 도주를 방지하기 위해 노무관리, 처우를 강제적으 로 통제했다는 증거이다.

또한 전시 패널에 ‘조선인을 반도인으로 표현하며 반도인(조선인)은 원래 둔하고 기능적 재능이 극히 낮다, 반도인 특유의 불결한 악습은 바뀌지 않는다’ 는 등 조선인을 비하하는 내용21)을 전시하고 있다.

 

   21) 在日朝鮮人運動史研究会 編(1983) 佐渡鑛業所, 半島勞務管理ニ就テ (1943.6) 󰡔在日 朝鮮人史硏究󰡕 12, 緑蔭書房, p.88

 

일본내 사도광산 관련 공식 홈페이지들에는 역사, 시설 안내에서는 조선인 관련 전시관, 전시 내용 소개도 없다.22)

위키페디아 홈페이지 사도광산 설명에 일부 내용이 잘못되어 있어 수정이 필요하다. 전시 중 조선인 노동 중, 모집지역은 충청남도가 80%, 충청북도・전라 북도가 20%로 한 촌락 20명 모집 할당에 대해 약 40명이 응모가 많을 정도 인기가 많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23)

당시 할당 모집은 조선인 강제동원을 얘기하고 있어 강제성을 입증하는 정책이다. 또한 조선인 출신지 분포에 대해 조선총독부 지정 연령자 명부에 함남 갑산과 경북(영덕, 봉화, 청송, 의성, 영일군)이라는 본적지를 찾을 수 있고, 대일항쟁기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 원회에서 피해 판정을 받은 이들(148명 가운데 147명)의 출신 지역은 충남과 충북, 전남과 전북, 경북 등 5개도에 해당하기 때문에 최소한 출신 지역에 관한 내용은 수정할 필요가 있다.24)

원문 전시 사료 중, 특고월보 (1940, 1942)는 한국인 노동자들에 의한 노동쟁 의25)(1940년 2월 발생), 한국인 노동자가 사도광산에서 작업 도중 사고로 사망한 사실(1941.12월 발생) 기록이 있다.

노동쟁의 원인은 ‘급여 외에 식비(1일 50전)나 장비대(1조당 50전)를 공제하는 일, 무료 지급이라 여겼던 작업화 등 작업 필수품 을 모두 본인에게 부담하도록 하는 문제’가 있었고, ‘일부 노무 관리자들의 극단 적인 차별의식’도 원인이 되었다.

또한 조선인 노동자 모집 당시의 노동조건 보다 다른 점도 조선인의 차별 사례이기도 하고 노동쟁의의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했다.26)

 

   22) 史跡 佐渡金山 (https://www.sado-kinzan.com/facility/, 검색일: 2025년 3월 21일); 佐渡 島の金山―新潟県佐渡市 (https://www.city.sado.niigata.jp/site/mine/, 검색일: 2025년 3월 21일); 佐渡島の金山 (https://www.sado-goldmine.jp/, 검색일: 2025년 3월 21일); 佐渡の 文化財 (https://www.city.sado.niigata.jp/site/bunkazai/, 검색일: 2025년 2월 21일)

   23) 佐渡金山 (Wikipedia https://ja.wikipedia.org/wiki/%E4%BD%90%E6%B8%A1%E9%87 %91%E5%B1%B1, 검색일: 2025년 3월 1일)

   24) 정혜경(2019) 󰡔일본지역 탄광・광산 조선인 강제동원 실태—미쓰비시(三菱)광업(주) 사도(佐渡)광산을 중심으로—󰡕,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p.99

   25) 內務省 警保局(1940.3.4) 󰡔特高月報󰡕; 張明秀(1982) 新潟県在日朝鮮人関係年表 , 󰡔新潟 近代史研究󰡕 3, 新潟近代史研究会, pp.122-123 26) 相川町史編纂委員會(1971) 󰡔佐渡相川の歷史―通史編, 近現代󰡕, p.682 

 

3. 향후 일본 세계유산 등재 동향 분석

 

3.1. 도치기현 아시오동산에서의 조선인 강제동원

 

일본이 사도광산에 이어 도치기(杤木)현 아시오동산(足尾銅山)을 세계유산으 로 등재하기 위해 2006년부터 ‘아시오동산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는 모임’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2008년 문화청에서 제안에 대한 조사・심의 결과가 공표 되어 아시오동산은 세계유산 잠정 일람표에 추가되어 등재 후보 자산으로 위치 부여되어 세계사적, 국제적인 시점에서 국내외 동종자산과의 비교연구를 추진하 고 문화재로써의 보호가 충분하지 않는 것에 대해 문화재 지정・선정 또는 추가 지정을 한다고 했다. 27)

그리고 동양 최대 동산으로 일본을 대표하는 광산의 하나 로 일본 근대화에 크게 공헌하였고 공해 대책 기점이 된 역사를 가지고 있어 세계유산으로 등재한다고 했다.

닛코(日光)시 홈페이지의 아시오동산 역사 설명문에는 ‘전시하 노동력 부족을 보충하는 목적으로 한반도에서 노동 인구가 조달되어 갱내외에서의 작업에 종사 하였다’는 내용만 있고 조선인 노무자 강제 동원과 민족 차별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

닛코시 아시오동산 조사 보고서에는 ‘전시하 노동력 부족을 보충할 목적으로 한반도에서 노동 인구 조달이 있어 2,400명을 넘는 조선인이 갱내외에 서 작업에 종사했다.

또는 중국인 강제 연행자도 혹독한 환경에서 작업에 종사하 여 불행히 사망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고 했다.28)

 

    27) 日光市, 足尾銅山の世界遺産登録に向けて (https://www.city.nikko.lg.jp/soshiki/10/1041/2_1/ 1233.html, 검색일: 2025년 3월 1일)

    28) 日光市教育委員会(2013) 󰡔足尾銅山跡総合調査報告書 上巻󰡕 日光市文化財調査報告書 第6集, pp. 32-33. 

 

일본 도치기현 닛코시 아시오동산은 17세기에 에도막부 직영의 동산이 되어 수출품이 되었지만, 메이지 신정부는 아시오동산을 소유하여 곧 민영화가 되었 다.

후루카와 이치베에(古河市兵衛)가 1877년에 이 광산을 인수해 채굴을 시작해 1884년에 아시오동산은 일본 최대의 산동량을 기록하게 되었다.

반면에 구리 제련 연기는 주변 산림을 파괴하고 광독이 와타라세강(渡良瀬川) 유역을 오염시 켰다.

아시오동산에서의 구리 생산은 국가전쟁을 지원하는 것이라 광업 폐업을 요구하는 오염 지역의 민중 목소리는 탄압되었다.

환경 피해는 하층 피해민의 생활에 보다 큰 타격을 입히면서 심각한 빈곤 문제를 초래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정부가 내린 해결 처분은 광업을 유지하는 대신 피해지의 지조를 면제해 주는 미봉책이었다.

지조 면제 처분은 광독 피해를 토지에만 한정했고, 하층 피해민이 서서히 입는 피해를 무시했다.29)

또한 노동자 운동도 형성되어 1907년에는 아시오 폭동 , 1919년에는 대노동 쟁의가 일어나 1921년에는 광산에서 최초 노동자의 날(May Day)도 개최되는 등 노동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전쟁 확대로 구리 생산 태세가 강화되고, 1935년에 는 새로운 선광장이 건설되고, 1939년에는 아시오동산광업보국회가 설립됐다. 광산 노동자가 징용되어 노동력이 부족하게 되면 조선인・중국인・연합군 포로 가 강제 연행되게 되었다.30)

군수회사에 지정된 주요 광산은 자재, 노동력, 자금 증가 없이 비상 증산 확보 를 도모하는 근간이 된 것은 갱내 노동력의 주력을 차지하는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기술훈련, 기간 연장, 이동 방지를 위한 노무관리 강화였다. 31)

아시오동산에 는 육군참모본부에서 교장이 파견되어 지정군수회장에 대한 국가관리가 강화되 었다. 또한 초중점 광산으로 지정된 아시오동산에 취로 중의 조선인 노동자들도 당연히 현원 징용이 되었다. 후생성 근로국 조사 아시오동산 명부(도표. 1)에는 2,461명분의 연행 연월일・ 이름・주소・이동일・이동 이유 등이 적혀 있다.32)

 

    (도표. 1) : 생략 (첨부논문파일 참조)

 

    29) 김보람(2021) 아시오 광독사건(足尾鉱毒事件) 속 빈곤문제 󰡔東方學志󰡕 제195집, p. 29

    30) 足尾鉱山への朝鮮人強制連行 (http://www.pacohama.sakura.ne.jp/kyosei/asio.html, 검색 일: 2025.3.1.).

    31) 鉱山統制会(1943.11) 󰡔鉱山統制会月報󰡕 第1巻 第9号, pp. 27-28.

    32) 竹内康人(2014) 󰡔調査・朝鮮人強制労働 ②財閥・鉱山編󰡕 社会評論社, p. 133. 

 

이 명부에서 아시오동산으 로의 연행 상황을 보면, 1940년 8월부터 조선인 강제 연행되어 경남 양산군에서 86명이 연행되어, 1941년 3월 양산에서 86명, 4월 경남 울산에서 84명, 9월 전북 진안에서 93명, 12월 경북 예천에서 126명이 연행되었다.

1942년에는 3월 진안에 서 134명, 8월 경북 봉화에서 89명이 연행되었고, 1943년 1월에 진안에서 90명, 3월 충북 청주에서 87명이 연행되었다.

아시오동산에의 강제 연행은 100명 단위 로 행해졌고 연행은 1939년의 모집부터 1942년에는 관알선이라는 형태가 되었지 만, 식민지로부터 강제 동원이었던 것은 차이가 없다.33)

 

    33) 竹内康人(2014) 󰡔調査・朝鮮人強制労働 ②財閥・鉱山編󰡕 社会評論社, p. 134.

 

 1943년 4월에는 홋카이도의 스미토모광업 고노마이(鴻之舞)광업소에서 370명, 5월에는 치토세(千歳)광업소에서 155명의 전송되어 총 520명이 넘는 조선 인이 홋카이도에서 보내어 왔다.

이것은 금광산에서 동산에의 광산 노동자 전출 은 상공성의 광산 정책의 전환(1943년 4월 금광업 정비에 관한 방침 요지)에 의한 것이었다.34)

고노마이광업소부터의 전송자 중, 충남의 부여・논산・서천 출신자는 1941년 9월에, 경남의 밀양 출신자는 1942년 3월에, 경기의 파주 출신자는 같은 해 4월에, 경북의 성주 출신자는 같은 해 6월에 연행되었던 사람들이었다. 35)

 

     34) 古庄正(1995) 足尾銅山・朝鮮人強制連行と戦後処理 󰡔経済学論集 26-4󰡕 駒沢大学経 済学会, p. 23.

     35) 林えいだい(1990) 住友鴻之舞鉱山強制連行者名簿 󰡔戦時外国人強制連行関係史料集 Ⅲ 朝鮮人2 下󰡕 明石書店, pp. 1333-1415

 

고노마이광업 소에는 1942년 9월까지 2,600명 정도가 연행되고 있었지만, 그 중 371명이 아시오 동산으로 전송되었다.

1943년 10월에는 충북의 보은 79명, 전북의 정읍 34명 외 타지역의 총 119명이 연행되었다.

1944년 4월 경북에서 영덕 41명・영일 16명,5월에는 경산 44명, 6월에는 영천・영일 등 123명이 연행되고, 7월에는 강원의 삼척・강릉 등에서 125명이 연행되었다.

1944년 9월 이후에는 징용이 적용되었고, 11월에는 함남의 풍산・갑산・안변 등에서 192명이 연행되었다.

1945년에는 1월에는 강원도 횡성에서 125명, 2월에 는 경기 양평・고양 등에서 107명이 연행되고, 또한 경기에서 4월 5명, 5월 10명 으로 소규모이면서도 연행이 이어졌다.

연행은 강원에서 함남지역까지 확대되어 연행자 수는 2,416명을 넘어갔다.

아시오광산 명단 2,416명에서 도주자 수를 보면 838명이 된다.

연행자의 35% 정도가 도주하고 있지만, 징용 적용 전의 연행 집단을 보면, 조선인이 반이상 도망한 것이 많다.

일시 귀국 57명, 사망 38명 송환・질병 등 169명, 징병 3명, 기재 불명 23명이다.

만기 귀국은 413명이지만 만기 귀국자 중 60% 가 홋카이도로부터의 전송자이다.

1945년 패전 당시 잔류하고 있던 것은 연행 자 수의 30%에 해당하는 875명이다.36)

2,416명 중 관알선은 1,444명이고 징용 은 447명, 고노마이광업소에서의 전출은 370명, 치토세광업소에서의 전출이 155명이 된다.37)

‘초중점 광산’으로서의 아시오동산은 노동자에 대한 혹사라는 점에도 가장 강경한 보수적 경향이었다.

특히 특별 증산 기간 중에는 일왕의 시종과 상공대신 까지 아시오에 와서 광부를 독려했지만, 이것은 아시오 노동자에 제한도 없는 장시간 노동을 강제하는 것이 되었다.

사사󰡔창업100년사󰡕에도 24시간 2교대제로 사람도 기계도 극한까지 계속 일을 했다고 했다. 38)

광산통제회 근로부의 조사보 고서 반도인 노무관리에 대한 자료에 의하면 17개 광산 일본인 노동자 가동률은 최고 91.8%, 최저 62.4%, 평균 82.4%였고, 조선인은 최고 95.8%, 최저 66.8%, 평균 87.7%로 조선인 가동률이 일본인보다 높다.39)

 

    36) 竹内康人(2014) 󰡔調査・朝鮮人強制労働 ②財閥・鉱山編󰡕 社会評論社, p. 134.

   37) 古庄正(1995) 足尾銅山・朝鮮人強制連行と戦後処理 󰡔経済学論集 26-4󰡕 駒沢大学経 済学会, p. 22.

   38) 古庄正(1995) 足尾銅山・朝鮮人強制連行と戦後処理 󰡔経済学論集 26-4󰡕 駒沢大学経 済学会, p. 37.

    39) 鉱山統制会(1943.9) 󰡔鉱山統制会月報󰡕 第1巻 第7号, p. 16. 

 

특별 증산을 위해 회사 노무계는 조선인에 대한 린치, 폭행, 폭언, 힘든 작업 지시 등이 자행되었고 조선인에 대한 노무관리, 노무 환경이 아주 열약했다. 또한 식사 면에서 조선인은 상처와 병으로 일을 못 하면 식사가 제공되지 않았지만, 일본인이 상처와 병으로 일을 쉬어도 식사를 제공하는 민족 차별이 있었다.40)

조선인 노동자 임금은 아시오동산 노동자 평균 임금 70~85%에 머물고 있고 일본인 노동자의 임금과 비교하면 격차는 컸다.

또한 조선인 임금은 지급금에서 구매품비, 의료비, 건강보험료, 국민저금, 노동연금, 세금, 회비를 공제하고 임의 저금을 하고 잔액을 본인에게 지급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조선인 노동자에는 현금을 주지 않고 광산회사의 임금 관리의 기본 방침으로 저금통장은 회사가 보관하고 만기 퇴직 시까지 본인에게 주지 않았다.41)

일본 패전 후 아시오동산은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어떤 보상도 하지 않았고 미불금 반환을 하지 않은 채 각계 각 기관에 전가하고 조선인의 즉시 송환을 획책하였다.

노동성 노동기준국 급여과의 󰡔조사집계󰡕에 따르면, 조선인연맹 도 치기현 본부에 인도한 아시오 구리광산의 보상금은 49만 5,218엔에 이른다.

이 보상금은 미군정 세션즈 사정관의 지시에 의해 즉시 조선인 송환이 이루어줘서 조선인 노동자들은 보상금을 받지 못했다.42)

 

       40) 足尾銅山労働組合(1958) 󰡔足尾銅山労働運動史󰡕 足尾町(栃木県): 足尾銅山労働組合, p. 181.

       41) 古庄正(1995) 足尾銅山・朝鮮人強制連行と戦後処理 󰡔経済学論集 26-4󰡕 駒沢大学経 済学会, pp. 40-41.

       42) 古庄正(2011) 足尾銅山・朝鮮人戦時動員の企業責任: 村上安正氏の批判に答える 󰡔在 日朝鮮人史研究󰡕 41, 緑蔭書房, pp. 69-81. 

 

3.2. 도야마현 구로베댐에서의 조선인 강제동원

 

도야마(富山)현 다치야마(立山)에는 국가지정 중요문화재 죠간지(常願寺) 사방 (砂防)시설을 비롯해 어려운 자연환경에서 하류 주민을 재해에서 지키기 위한 학술적으로 가치가 높은 근대 사방시설군이 존재한다.

도야마현에서는 방재유산으로 사방시설군의 가치에 착목해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목표로 여러 가지 활동 을 전개하고 있다. 43)

여기에는 구로베(黑部) 제3발전소가 포함되어 있는데 ‘고열 지대와 눈사태를 극복해서 건설된 역사적인 건물로써 가치가 있다’고 홍보하고 있지만 조선인 강제동원 역사에 대한 설명이 없다.

1926년 쇼가와(庄川)수전댐공사에 팔백수십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동원되기 시작해 거의 모든 발전소 공사에 조선인이 동원되었다. 1936년 개시된 구로베 제3발전소 공사에 많은 조선인이 희생되었다. 세계적인 아치형 댐으로 알려진 도야마현 구로베 제4발전소는 관광지로 유명하고 전후에 만들어졌지만, 전시 중 구로베 제3발전소 건설은 세계적으로 어려운 공사였다.44)

구로베댐에는 2천명에서 3천명의 노동자가 종사했고 그 중 약 천명의 조선인 이 있었기45) 때문에 조선인에 의해 구로베 제3발전소가 완공되었다고 할 정도 이다.

조선인의 작업 내용은 가장 위험한 작업이 많았고 발파에 의한 사고, 눈사태 사고 등 최악의 환경으로 어려운 공사였다.

1938년 8월 구로베에서 다이너마이트 사고가 생겨 다케다함바의 남경술 등 6명은 두부, 안면을 분쇄당 해 즉사하였다.46)

1938년 8월 28일 센닌다니(千人谷) 히토미다이라(人見平) 터 널 공사에서 손무술외 3명의 조선인 토목공들이 중상을 입는 대형 참사가 발생 했다.

처음에는 집단 모집에 의해 강제동원이 진행되었다가 도야마현에서는 1940년 부터 761명이 동원되었다.

동원 초기에는 연고에 의해 동원도 진행되어 761명 중 277명이 연고에 의해 동원되었다. 47)

 

   43) 立山砂防の世界遺産登録を目指して 富山県庁 (https://www.pref.toyama.jp/1505/bousaianzen/ bousai/ dosh/kj00020435/index.html, 검색일: 2025.3.21.).

   44) 内田すえの・此川純子・堀江節子(1992) 󰡔黒部・底方の声 : 黒三ダムと朝鮮人󰡕 桂書房.

   45) 󰡔北陸タイムス󰡕 1938.6.27.

   46) 󰡔北陸タイムス󰡕 1938.8.30.

   47) 労務動員関係朝鮮人移住状況調 1943年末現在 ( 昭和20年度追加予算参考書 内文書 種村氏警察参考資料第110集 ). 

 

중앙협화회의 이입조선인노무자현황조 사 (1942)에서 사토(佐藤)공업이 아리미네(有峰)발전소 공사에 100명, 오하라(小 原)발전소 공사에 124명, 구로베 제3발전소 공사・우나즈키(宇奈月)에 149명을 연행한 것을 알 수 있다.

노무동원 초기에는 연고모집에 의한 동원도 있었다. 사토공업이 구로베발전 소 공사를 청부했지만, 산하 함바 책임자 김명석은 밋카이치(三日市)경찰서에 서 도항허가증명서를 얻어 경남 거창군의 친척 등을 도항시켜 현장에서 노동시 켰다.

백영희는 이러한 연고모집으로 동원되었다. 박경호는 아버지가 함바 책 임자로 사토공업에 의한 1940년 4월 모집으로 조선에서 도항했다. 구로베에는 80명 정도가 배치되어 공사가 끝나자 30명 정도는 이와세(岩瀬)운하 공사에 연행되어 갔다.

숙사는 감시되어 도망쳐서 잡히면 모두 앞에서 반죽음이 되었 다고 한다.48)

조선인 노동자들의 임금은 상당히 낮았고 이와세에서는 필요 이외의 현금을 받을 수 없었다. 조선인 노동자 모집 요강에는 시국 산업에 종사함으로써 국가에 공헌한다는 사실을 자각할 것, 직장 변경은 하지 말 것, 일본의 생활 습관을 따르고 일본인이 혐오하는 행위를 하지 말 것, 그 밖에 협화회 사업단체 간부, 경찰관 및 직업 소개인의 지시에 따를 것으로 되어 있어49)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통제와 감시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국의 요청으로 국가전력사업으로 우선시해서 착공된 구로베 제3발전소는 지질조사를 무시한 채 고열 속에서 조선인 노무자에게 삭암 작업을 시켰다.

암반 온도 100도가 넘는 터널 안에서 뜨거운 열기를 견디며 노동자들은 삭암기 로 암반에 구멍을 뚫었다.

그리고 구멍에 다이너마이트를 장전하고 점화, 폭발 시키면서 바위를 깼다.

마지막으로 돌덩어리를 도로코로 실어 나르는 작업을 반복했다.50)

 

    48) 内田すえの・此川純子・堀江節子(1992) 󰡔黒部・底方の声 : 黒三ダムと朝鮮人󰡕 桂書房, pp. 35-36.

   49) 고노가와 준코・호리에 세쓰코・우치다 스에노 저, 박은정・안영신 역(2023) 󰡔구로베 저편의 목소리—구로베 협곡에 흐르는 조선인의 피와 땀 그리고 눈물󰡕 글로벌콘텐츠, p. 64.

   50) 고노가와 준코・호리에 세쓰코・우치다 스에노저, 박은정・안영신 역(2023), 위의 책, p. 81.

 

그래서 아조하라(阿曽原) 진료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따르면 진료소에는 조선인이 많이 찾아왔는데 그 대부분은 화상이나 부상 환자 였다고 한다.

다이너마이트 폭발로 사망한 노동자 시체가 갱내에서 도로코로 실려 나오는 것을 본 사람도 있었고 사방으로 날아간 신체의 일부를 목격한 사람도 있었다.

눈이 녹으면서 댐공사 희생자 사체를 찾으면서 가혹한 노무 실태를 보여주고 있다.

1939년 3월 8일 게야키다이라(欅平)의 강가에서 사체를 건져 올렸고 3월 15일에는 기쿠치모토 함바 인부였던 이범윤의 사체가 고야다이라(小屋平)댐 에 표착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51)

3월 29일에 부패한 사체가 강의 본류로 흘러 가는 것을 발견했다고 했고 5월 3일까지 47명 중 18명(도야마현 외 5명, 도야마 현 내 7명, 조선인 6명)이 흘러 내려왔고 그 뒤 8월까지 15명이 발견되었다고 했다.52)

도야마일보, 호쿠리쿠타임스에서 눈사태 사고로 조선인 사망자 37명, 행방불 명자가 47명으로 확인되어 전체 희생자는 84명으로 보도되었다. 53)

사고 이후에 도 눈사태에 대한 안전 대책으로 함바를 전부 터널 안으로 옮기고 동굴에서 지내면서 겨울 작업을 계속했다.54)

1940년 1월 9일 아조하라에서 눈사태가 발생하여 야간 근무를 마치고 숙소에 서 쉬고 있던 사람들은 또다시 피해를 입었다. 조선인 17명을 포함한 26명이 행방불명되었고 조선인 21명을 포함한 35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그러나 도야마 현 경찰 부장은 이번 참사로 동절기 공사가 중지되지 않고 발전소 공사는 중요한 국책 사업이기 때문에 더욱 공사에 박차를 가할 예정이라 했다.55)

 

    51) 󰡔北陸タイムス󰡕 1939.3.18.

    52) 󰡔北陸タイムス󰡕 1939.8.31.

    53) 󰡔富山日報󰡕 1938.12.29.

    54) 󰡔北陸タイムス󰡕 1939.1.15.

    55) 󰡔富山日報󰡕 1940.1.11. 

 

1940년 11월에 완공된 구로베 제3발전소 건설은 어려운 공사여서 300명이상 사망했고 그 중 눈사태와 고열수도로 난항을 겪은 제1공구와 제2공구에서 165명 이 희생되었다.

이렇게 많은 희생이 나왔던 것은 전시 국가전력사업으로 전력 조달에 무리한 공사를 추진했고 이에 대한 안전조치도 없이 무리하게 댐 공사를 추진해서 발생했던 것이다.

기존의 일본 세계유산 등재 사례를 보면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동원되어 강제 노동을 한 피해자에 대한 이해를 돕는 해석 조치가 충분하지 않고, 희생자를 기리는 목적에 부합하는 전시물이 없었다. 또한 다른 국가 산업유산들이 강제노 동의 사례와 유산 현장이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된 사실을 온전히 인정하고 있는 것과 비교할 때 일본 메이지산업혁명유산, 사도광산, 세계유산 등록 후보군은 국제적 모범 사례에 미치지 못한다.

 

4. 결론

 

본고에서 일본 세계유산 등재의 문제점에 대해 분석하면서 아시오동산, 구로 베댐에서의 조선인 강제동원 실태에 대해 분석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세계유산 등재 후보군을 세계유산 등재 기준(OUV, 진정성, 완전성)에 맞추어 등재 가능성 을 분석해 보았다.

일본은 메이지산업혁명유산에 대해 한국이 요청했던 한국인 강제동원 피해자 증언 전시, 강제노역을 포함한 전체 역사 설명,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진정한 추모 등 요구 사항을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았고 세계유산위원회의 거듭된 결정 과 후속 조치들이 무시하고 있다.

이런 유적지는 관광 증진, 지역경제 발전 목적 으로 세계유산이 변모하면서 교육적 가치는 없어지고 역사를 제대로 조명되거나 세계인들과 공유되지 않고 있다.

일본 정부의 약속 불이행으로 향후 일본의 세계유산 등재 작업에 제동이 걸릴 것이고 지속적으로 한국정부가 기존 세계유산에 대한 약속이행 요구가 있어 한일관계가 경색될 우려가 있다.

이것은 세계유산 이념을 무시하는 행위 라 할 수 있다. 세계유산조약에는 문화유산 및 자연유산을 인류 전체를 위한 세계유산으로써 손상, 파괴 등의 위협에서 보호하고 보존하기 위해 국제적인 협력 및 원조 체제를 확립하는 것이 목적이다.

문화와 자연을 인류 공통의 자산으로 미래에 이어가는 것에 일본이 독단전행이 있는 것은 본래 목적을 일탈하는 것이다. 

또한 사도광산 등재 관련해서 강제 동원을 포함한 ‘전체 역사(full history)’에 대한 언급 없이 등재한 것은 ‘보편적 가치(OUV)와 완전성, 진정성’에 어긋나는 행위로, 일본 정부에 즉각적인 시정조치가 필요하다.

최근 일본은 사도광산에 이어 도치기현 아시오동산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2006년부터 동양 최대 동산으로 일본을 대표하는 광산의 하나로 일본 근대 화에 크게 공헌하였고 공해 대책 기점이 된 역사를 가지고 있어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아시오동산에서의 조선인 노무자 강제 연행과 민족 차별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

이것은 세계유산 등재의 공통성, 중립성을 위반되며 세계유산 등재 국가인 일본이 정치적으로 또는 영향 력으로 자신들의 진실, 기준으로 설정하고 있다.

아시아태평양전쟁 확대로 구리 생산 태세가 강화되어 조선인 노동자가 강제동 원되어 특별 증산을 위해 회사 노무계는 조선인에 대한 린치, 폭행, 폭언, 힘든 작업 지시 등이 자행되었고 조선인에 대한 노무관리, 노무 환경이 아주 열약했다.

또한 식사와 임금 대우는 일본인에 비해 격차가 컸고 민족차별을 받기도 했고, 어떤 보상도 받지 못했고 미불금 반환을 받지 못했다. 도야마현에서는 방재 유산 으로 사방시설군의 가치에 착목해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목표로 여러 가지 활동 을 전개하고 있다.

여기에는 구로베 제3발전소가 포함되어 있는데 ‘고열지대와 눈사태를 극복해서 건설된 역사적인 건물로서 가치가 있다’고 홍보하고 있지만 조선인 강제동원 역사에 대한 설명이 없다.

구로베 제3발전소 건설은 어려운 공사여서 300명이상 사망했고 그 중 눈사태와 고열수도로 난항을 겪은 제1공구 와 제2공구에서 165명이 희생되었다.

전시체제에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고열지 대, 산사태, 폭발 작업 등의 위험에 대한 안전조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채 국책 사업을 완수하기 위해 추진되었다.

이런 강제 노역과 조선인 민족 차별 사례는 일본정부가 ILO 제29호 협약— C029 강제노동에 관한 협약(1930)을 위반한 것이고 세계유산 이념인 평화와 인권 존중에 맞지 않는다.

세계유산의 보존과 활용은 국가주의적인 역사관의 선전이 나 관광 이익의 목적을 가지고 실시해서는 안 되고, 특히 평화나 인권 존중을 이념으로 중요시하는 유네스코가 관할하고,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대한 평가에 기반하는 세계유산 등재에 있어서는 평화나 인권을 유린해 온 사상이나 역사와 의 관계를 고려한다면, 일본정부는 평화와 인권을 위해 조선인 강제동원 전체 역사를 설명해야 세계유산으로서 가치가 클 것이다.

최근 세계유산 등재는 ‘부정적인 역사를 가진 유산 증가 현상’이다.

현재 세계 유산 중 부정적인 성격을 가지는 유산은 60여 개소로 조사되며, 유산에 내포된 주제는 전쟁과 학살, 분규와 저항, 강제와 착취, 식민사회 등과 관련된다.

이러한 유산들은 불행한 역사를 기억하고 국제적인 화해와 평화를 증진하기 위해 등재 되고 후대에 대한 교훈으로 제공되고 있다. 그래서 일본은 세계유산을 등재하기 위해서는 네거티브 유산(부의 유산)의 가치에 대해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접근해야 하고 아시오동산, 구로베댐에서의 조선인 민족차별, 산업재해, 안전 관리 분야 관련 전체 역사를 보완해야 세계유산 등재 기준에 맞출 수 있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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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Study on the Problems with Japan’s Policy on the UNESCO World Heritage List ― The Cases of World Heritage Listings Related to Forced Mobilization by the Japanese Imperialism ―

Seo, Inwon

In this paper, we analyze the problems of Japan’s World Heritage listing and the reality of forced mobilization of Koreans at Ashio Copper Mine and Kurobe Dam. Japan has not accepted any of Korea’s demands for a full historical explanation, including forced labor of Koreans, regarding the Sites of Meiji Industrial Revolution Heritage, and the World Heritage Committee’s repeated decisions and follow-up measures are ignoring them. The Japanese government’s failure to keep its promise will put the brakes on Japan’s future work on registering World Heritage sites, and there is concern that Korea-Japan relations will become strained as the Korean government continues to demand that it keep its promises on existing World Heritage sites. This can be considered an act that ignores the World Heritage concept. In addition, the fact that the Sado mine was registered without mentioning the Full history, including the forced mobilization, is an act that goes against “OUV(Outstanding Universal Value), Integrity, and Authenticity,” and the Japanese government must take immediate corrective action. Recently, Japan has been trying to register Ashio Copper Mine in Tochigi Prefecture as a World Heritage Site, following Sado Mine. However, the Japanese government has no specific information on the forced mobilization of Korean laborers and ethnic discrimination at Ashio Dongzan. As the Asia-Pacific War expanded, the copper production system was strengthened, and Korean laborers were forcibly mobilized. The company’s labor department carried out lynching, assault, verbal abuse, and difficult work orders against Koreans, and the labor management and labor environment for Koreans were very poor in order to increase special production, Toyama Prefecture is carrying out various activities with the goal of registering it as a World Heritage Site as a disaster prevention heritage. This includes the Kurobe No. 3 Power Plant, which is being promoted as “a historical building that was built overcoming high-temperature areas and avalanches,” but there is no explanation of the history of forced mobilization of Koreans. The construction of the Kurobe Dam was a difficult project, and more than 300 people died, including 165 people who died in the first and second sections, which suffered from avalanches and high-temperature water. The national project was pushed forward without proper safety measures for high-temperature areas, landslides, and explosive work in order to supply electricity in wartime. These cases of forced labor and discrimination against Koreans are a violation of ILO Convention No. 29 - C029 on Forced Labor (1930) by the Japanese government, and are against the World Heritage ideals of peace and respect for human rights. The preservation and utilization of world heritage sites should not be carried out for the purpose of propagating nationalistic views of history or for tourism interests, and should be under the jurisdiction of UNESCO, which particularly values peace and respect for human rights as its ideology. Also, In the case of World Heritage listing based on an evaluation of universal human values, considering the relationship with ideologies and histories that have trampled on peace and human rights, the Japanese government should explain the full history of forced mobilization of Koreans for the sake of peace and human rights in order to increase its value as a World Heritage site.

Key Words : Forced Mobilization, Forced Labour, International Law, Ethnic Discrimination, UNESCO, World Heritage 

 

 

국문초록

본고에서 일본 세계유산 등재의 문제점에 대해 분석하면서 아시오동산, 구로베댐에 서의 조선인 강제동원 실태에 대해 분석하였다. 일본은 메이지산업혁명유산에 대해 한국이 요청했던 한국인 강제노역을 포함한 전체 역사 설명 등의 요구 사항을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았고 세계유산위원회의 거듭된 결정과 후속 조치들이 무시하고 있다. 일본 정부의 약속 불이행으로 향후 일본의 세계유산 등재 작업에 제동이 걸릴 것이고 지속적으로 한국정부가 기존 세계유산에 대한 약속이행 요구가 있어 한일관계가 경색될 우려가 있다. 이것은 세계유산 이념을 무시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또한 사도광산 등재 관련해서 강제 동원을 포함한 ‘전체 역사’에 대한 언급 없이 등재한 것은 ‘보편적 가치와 완전성, 진정성’에 어긋나는 행위로, 일본 정부에 즉각적인 시정조치가 필요하다. 최근 일본은 사도광산에 이어 도치기현 아시오동산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려고 노력 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아시오동산에서의 조선인 노무자 강제 연행과 민족 차별 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 아시아태평양전쟁 확대로 구리 생산 태세가 강화되어 조선인 노동자가 강제동원되어 특별 증산을 위해 회사 노무계는 조선인에 대한 린치, 폭행, 폭언, 힘든 작업 지시 등이 자행되었고 조선인에 대한 노무관리, 노무 환경이 아주 열약했다. 또한 식사와 임금 대우는 일본인에 비해 격차가 컸고 민족차별을 받기도 했고, 어떤 보상도 받지 못했고 미불금 반환을 받지 못했다. 도야마현에서는 방재 유산으로 세계유산 등록을 목표로 여러 가지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여기에는 구로베 제3발전소가 포함되어 있는데 ‘고열지대와 눈사태를 극복해서 건설된 역사적인 건물로서 가치가 있다’고 홍보하고 있지만 조선인 강제동원 역사에 대한 설명이 없다. 구로베 제3발전소 건설은 어려운 공사여서 300명이상 사망했고 그 중 눈사태와 고열수도로 난항을 겪은 제1공구와 제2공구에서 165명이 희생되었다. 전시 체제에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고열지대, 산사태, 폭발 작업 등의 위험에 대한 안전조치 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채 국책 사업을 완수하기 위해 추진되었다. 이런 강제 노역 과 조선인 민족 차별 사례는 일본정부가 ILO 제29호 협약―C029 강제노동에 관한 협약(1930)을 위반한 것이고 세계유산 이념인 평화와 인권 존중에 맞지 않는다. 세계유산의 보존과 활용은 국가주의적인 역사관의 선전이나 관광 이익의 목적을 가지고 실시해서는 안 되고, 특히 평화나 인권 존중을 이념으로 중요시하는 유네스코가 관할하고,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대한 평가에 기반하는 세계유산 등재에 있어서는 평화 나 인권을 유린해 온 사상이나 역사와의 관계를 고려한다면, 일본정부는 평화와 인권을 위해 조선인 강제동원 전체 역사를 설명해야 세계유산으로서 가치가 클 것이다.

키워드 : 강제동원, 강제노동, 국제법, 민족차별, 유네스코, 세계유산

 

 

◆접 수: 2025. 3. 10. ◆수 정: 2025. 4. 15. ◆게재확정: 2025. 4. 25. 70

韓日軍事文化硏究 第43輯

일본의 세계유산 등재 정책의 문제점-일제 강제동원 관련 세계유산 등재 사례-.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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