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백 시가론 - 붓 끝에 핀 꽃>
1. 생애
이백(字 太白, 自號 靑蓮居士)은 측천황후 무씨 장안 원년(則天皇后 武氏 長安 元年)인 701년에 태어나 대종 보응 원년(代宗 寶應 元年)인 762년에 세상을 떠났다. 꿈속에서 밝은 별[長庚星, 일명 太白星]이 어머니 품으로 뛰어든 후에 태어났다는 태몽에서부터, 물에 비친 달을 잡고자 강으로 뛰어들어 익사했다는 사인(死因)에 이르기까지, 그의 일생은 베일에 싸인 채 전설이 되었다.
그는 아버지 이객(李客; 이는 장사꾼이라는 의미이며, 본명은 상실되었다)과 어머니 강씨(姜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문중에서의 항렬은 열두 번째로서 흔히 그를 '이십이(李十二)'라고 부르는 것은 이러한 까닭에서이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그의 조상들은 수(隋)나라 말기의 혼란을 피해 중앙아시아 쇄엽(碎葉; Suyab)으로 피신하였다가 신룡(神龍; 705~706) 초기에 광한(廣漢; 지금의 巴西郡 綿州)으로 잠입하였고, 이백의 아버지는 가까운 창명현(昌明縣)으로 이주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가정환경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지만, 장사로 번 재산을 청년 이백에게 주어 세상을 두루 돌아보게 했을 만큼 풍족하였음은 분명하다. 세파에 시달리면서도 친구에게 어두운 낯빛 한 번 보이지 않았다던 구김살 없는 이백의 성격은 이 같은 유년기의 여유로운 집안 분위기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의 이백은 영민함과 씩씩함을 갖춘 조숙한 소년이었다. 남들이 여덟 살 때부터 배우기 시작했다는 육갑(六甲)을 이미 다섯 살 때 외우고, 열 살 때부터는 시서(詩書)와 제자백가 그리고 도가(道家)의 서적까지 섭렵하는 등 폭넓은 독서를 시작하였다. 열다섯 살에는 검술을 좋아했고, 신선의 경지에서 노닐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글 솜씨에 탁월함을 보여, 열다섯에 부(賦) 짓는 솜씨는 이미 한나라 부(賦)의 대가인 사마상여(司馬相如; B.C.179~B.C.117)를 넘볼 정도였고, 스무 살 때 지은 시문(詩文)은 당대의 예부상서(禮部尙書) 소정(蘇頲; 670~727)에게 '천재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으니, 더욱 노력하면 사마상여와도 견줄 수 있겠다는 칭찬과 격려를 받을 정도였다.
그가 스물네 살 되던 724년 고향 촉(蜀)지방을 떠나, 벼슬살이를 위해 장안으로 가기 직전인 741년까지의 당나라는 개원 연간(開元年間; 713~741)의 후반기에 해당된다. 이 시기에 현종(玄宗)은 어진 재상들을 기용하여 정치, 경제, 군사 면에서 전례 없는 안정과 풍요를 누렸기에, 청년 이백 또한 경세제민의 큰 뜻을 품고 웅비할 날을 고대하고 있었다. 고향을 나온 그는 3년 동안 장강(長江) 일대를 유람하면서 수만금을 써가며 벗들과 사귀었고, 안륙(安陸)에서 결혼하여 3년간의 안정된 생활을 누렸다. 그러나 청운의 꿈을 품고 있던 이백은, 저명인사의 추천에 의한 관리 등용이 일반적이던 당시 풍조에 따라, 제후들에게 자신의 재능을 알리고자 730년 장안으로 길을 떠났다. 사명광객(四明狂客)이라 이름난 하지장(賀知章)과 같은 인물에게 자신이 지은 악부 〈촉도난(蜀道難)〉을 보여주고 '하늘에서 귀양 온 신선[謫仙人]'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하였지만, 당대 재상 장열(張說)의 둘째아들 장게(張垍)에게는 냉대만 받았고, 장안 근처 종남산(終南山) 옥진공주(玉眞公主)의 별관에 머무르며 왕공 대신들에게 접근하려던 계획도 무산되었다. 이 같은 첫 번째 정계 진출 시도가 실패로 끝나자, 막막한 마음을 가눌 길 없었던 이백은 장안 근처를 여행하기도 하고 술과 노름으로 나날을 보내기도 하였다. 장안을 나온 그는 황하를 따라 송성(宋城; 지금의 河南省 商邱縣)에 도착하여 옛 고적들을 두루 살피다가 안륙(安陸)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 북쪽 태원(太原) 지방과 남쪽 오(吳)지방을 두루 여행한 후, 산동(山東) 지방에 정착하여 재기의 발판을 다졌다.
현종의 후기 집권기 천보연간(天寶年間; 742~755)이 시작되던 742년과 때를 같이하여 이백의 벼슬길이 열렸다. 태자빈객(太子賓客)으로 있었던 하지장(賀知章), 벗 원단구(元丹丘), 옥진공주(玉眞公主) 등의 추천에 힘입어 한림공봉(翰林供奉) 벼슬을 맡게 된 것이다. 그러나 현종은 개원(開元) 연간에 이룬 성취에 만족하여 교만하고 사치해져서, 정치를 등한시하고 간신들에게 전권을 위임하며 변방의 장수들을 총애하였다. 이로 인하여 왕실은 부패하고 왕의 측근들이 권세를 휘둘러, 충직한 선비는 모략과 배척을 당하는 등 성당 초기의 태평성대는 돌이킬 수 없는 내리막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당시 이백의 벼슬 또한 제왕의 포고문 초고를 마련하고 윤색을 가하거나, 시시때때로 임금의 향연에 불려나가 가공송덕(歌功頌德)을 일삼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는 어지러운 궐내 분위기와 어용 문인으로서의 갑갑한 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틈만 나면 장안의 한량들과 어울려 술에 만취된 생활을 일삼았다. 취중에 임금의 명을 받들어 시를 지으며, 당대 세도가였던 고력사(高力士)에게 신을 벗게 하고, 도도하기 그지없던 양귀비(楊貴妃)에게 먹을 갈게 하는 등, 기고만장했다는 일화도 이때 나온 것이다. 그는 부패한 궁중에서의 벼슬생활을 견디다 못해 결국 744년, 임금에게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한 정치 지망생의 천진난만한 꿈이 현실에 부딪쳐 좌절되고 만 것이다.
벼슬을 버리고 장안을 나온 직후인 744년에는 제남군 자극궁(濟南郡 紫極宮)에서 도사(道士) 자격증인 도록(道籙)을 받고 도사가 됨으로써, 소년시절부터 동경하던 도교에 정식으로 귀의하였다. 그 후 안록산(安祿山)의 난이 시작된 755년까지 동노 연주(東魯 兗州; 지금의 山東省 兗州市)의 집을 거점으로 삼아 북쪽과 남쪽 지방, 그리고 장안을 두루 유랑하였다. 두보(杜甫)나 고적(高適)과 같은 당대의 쟁쟁한 시인과 함께 노닐면서 창작에 전념하면서, 임금 곁을 떠나올 수밖에 없었던 울분을 다양한 방식으로 형상화하고, 제왕을 비판하며 정국을 우려하는 작품을 지어내는 가운데 그의 필력은 더욱 원숙해졌다.
안록산의 난이 발발하여 급기야는 현종이 장안을 버린 채 촉(蜀)으로 피신하고, 영무(靈武)에서 그의 아들 형(亨)이 왕위에 올라 숙종(肅宗)이 되자, 이백도 가족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그는 756년 안록산 잔당을 토벌하여 기세를 떨치던 영왕 이린(永王 李璘)의 권유에 못 이겨 그의 막하에 합류하지만, 그 세력의 확장을 경계하던 형 숙종에 의해 린(璘)의 거사가 역모로 간주되고, 이백 또한 이 사건에 연루되어 옥살이 끝에 귀양을 가다가 759년에야 겨우 사면되었다. 이백의 세 번째 정계진출도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이백은 이 좌절감과 고독을 술로 달래고 불교(佛敎)의 청정(淸淨)함으로 씻어보고자 했지만,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그는 결국 자신의 모든 작품들을 친척 이양빙(李陽冰)에게 맡기고 몸져누웠다. 762년 등극한 대종(代宗)은 그를 임금 보좌직인 좌습유(左拾遺)에 임명하였으나,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2. 연마와 지향
이백의 이 같은 극적인 삶 이면에는 시 창작을 위한 각고의 노력이 있었다. 누군가의 말처럼, 예술가는 예술가이기 이전에 좋은 숙련공이며, 위대한 걸작도 부지런히 갈고닦은 노력의 결과물인 것이다. 독창적인 시인으로 손꼽히는 이백은 유미문학(唯美文學)의 정화집(精華集 : anthology)인 《문선(文選)》을 곁에 두고 그 방대한 내용을 세 차례에 걸쳐 모방하여 짓는 등, 역대 작품들에 대한 학습과 연마 과정을 통해 고전 문학 제반의 형식과 기교를 두루 익혔다고 한다. 그의 시 세계를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대(當代)까지 이어져 온 시 형식과 장르의 흐름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국 시의 가장 고전적인 형식은, 작품 길이나 운율에 제한이 없이 자연스러운 내재율만을 지닌 고체시(古體詩) 형식으로서, 그 연원은 중국 최초의 시 모음집인 《시경(詩經)》으로까지 소급된다. 공자(孔子)에 의해 편찬된 305편의 이 시들은 "생각에 사악함이 없다.[思無邪]"라는 찬사와 함께, 부드럽고 온화한[溫柔敦厚] 유가문학(儒家文學)의 모태로 여겨지고 있다. 시경의 여러 판본 중에 하나인 모시(毛詩)는 그 서문(序文; 詩大序)에서 시란 "작자의 마음을 표현한 것[詩言志]"이라 정의하고, 시경의 내용 및 형식적 특징을 육의(六義)로 분류하였으며,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정치를 살펴보게 되며, 대중들을 모이게도 하고, 원망하게도 하는 데[興觀羣怨]"에 시의 정치. 사회적 가치가 있으며, "새와 짐승과 풀과 나무의 이름을 많이 알게 해 주는" 등, 생동하는 이미지의 원천(源泉)으로서도 중요하다고 보았다.
본격적인 고체(시) 형식은 한대(漢代) 민가(民歌)로부터 시작되어, 한말(漢末) 건안(建安) 초 〈고시십구수(古詩十九首)〉, 〈대풍가(大風歌)〉, 〈연가행(燕歌行)〉 등으로 이어지고, 남북조(南北朝)를 거쳐 당대(唐代)까지 약 500년 동안 5언 고체(古體)와 7언 고체(古體) 형식이 주류를 이루었다. 남조(南朝; 430~589) 이래 발달한 근체 형식과 대(對)를 이루는 이 고체 형식은 외양상 5언 고체, 7언 고체, 잡언체(雜言體, 일명 長短句)로 세분되고, 창작 계층별로는 민가(民歌)와 문인시(文人詩)로 나뉘어 상호 영향 속에서 당대(唐代)까지 이어져 왔다.
그 중에서 대중들이 지은 노래가사, 곧 민가의 전통은 《시경(詩經)》 중 열다섯 지역의 민요, 15국풍(國風)으로부터 시작되어 한대(漢代)에서 육조(六朝)까지 민가 채집 기관인 악부(樂府)에서 수집한 악부시(樂府詩; 흔히 악부로 불린다)로 이어졌다. 대중적 생활을 바탕으로 한 이 장르의 서사성(敍事性) 강한 소재, 진솔한 정서, 시대를 앞서 가는 참신한 형식 등은 동시대 문인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지은이를 알 수 없는 민가와는 달리, 시인의 이름을 걸고 창작한 문인 고시의 전통은 조조(曹操; 155~220) 조비(曹丕; 187~226) 조식(曹植; 192~232) 등 조위삼부자(曹魏三父子)에서 시작되어 당대(唐代)에 이르기까지 허다한 시인들의 손을 거치면서, 곡진한 감정을 표현하는 서정(抒情), 철학적 사변을 서술하는 설리(說理), 산수 풍경을 묘사하는 사경(寫景), 인물이나 사물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영물(詠物), 민가의 내용과 표현기법을 모방하는 모의(模擬) 등과 같은 폭넓은 기법을 망라하며 이어졌다.
고체 형식 외에 당대 시가의 형성에 간접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서, 초나라 굴원으로부터 시작된 4, 6조의 초사체(楚辭體)가 있는데, 이는 한(漢)에서 위진(魏晉)을 거치는 가운데, 장황하게 늘어놓고 화려하게 수식하는 '사부(辭賦)'의 장르로 자리 잡았다. 사부는 당대(唐代)에 들어와서도 진사과(進士科) 과거시험(科擧試驗)의 당락을 결정하는 '시부(詩賦)'의 한 분야로 중시되어, 문인들의 기교 연마와 창작 활동에 큰 밑거름이 되었고, 한편으로는 초당대 네 명의 시인[初唐四傑]의 노력에 힘입어, 7언 고체의 변형 형식인 7언 가행체(歌行體; 일명 7言 長短句)를 발달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이런 흐름과는 별도로, 남조(南朝) 때 장강(長江) 유역에서 유행하던 짤막하고 사랑스런 민가 청상곡사(淸商曲辭)에 영향을 받은 시인들이, 평성(平聲)과 측성(仄聲), 입성(入聲) 등 성조(聲調) 간의 어울림으로 청각적 미감을 극대화시키는 사성팔병설(四聲八病說)을 확립하게 되면서, 성조나 압운이 정형화된 5언 근체와 7언 근체시(近體詩) 형식을 개발하였으며, 절구(絶句)와 율시(律詩) 중심의 근체(시) 형식은 성당(盛唐) 시인들의 창작을 통해 꽃을 피웠다.
이처럼 다채로운 토양 위에 탄생한 이백의 시는, 근체 형식으로 된 일부를 제외하고는 길이나 성조의 운용이 자유로운 고체 형식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성향은 구속을 싫어하는 그의 개인적 기질 외에도, 문단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적지 않게 작용한 결과이다. 시라는 매체를 통해 자신의 시대적 위상과 사명을 밝힌 고풍 제 1수는 독특한 주제와 뚜렷한 관점이 돋보이는데, 여기서 그는 시인의 정치 이상과 현실 정치가 간극 없이 일치하는 주(周) 문왕(文王; BC.1100년 전후) 시절의 시, 즉 '대아(大雅)'를 이상적인 모델로 내세우고, 이 대아가 사라지고 난 후 남조(南朝) 말까지, 시는 장식 성향이 극에 달하며 쇠퇴 일로를 걸어왔다고 비판하였다. 그리하여 쓸데없이 아름답기만 한 기려(綺麗)의 기풍을 일소하고 대아를 회복하는 일이, 다시 도래한 태평성대의 요청이자 자신의 과업이라고 선언하였다. 가깝게는 진자앙(陳子昻; 661~702)의, 좀 더 멀리로는 초당사걸(初唐四傑)의 문제의식을 계승한 그의 창작 지향은, 바야흐로 격률을 완비하여 유행하기 시작한 짤막하고 엄격한 근체 형식이 아니라, 시대와 사회까지도 담아낼 수 있는 큰 그릇, 곧 고체 형식을 통해 구현되었다.
3. 3대 장르
이백을 대표하는 3대 장르인 고풍, 악부, 가음은 이러한 인식 위에 문학 전통의 여러 요소들을 혼합하여 매혹과 다채로움을 더한 시가들로서, 각각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시집 첫머리에 실린 59수의 고풍시는 이백이 평생 동안 지은 5언 고체의 무제(無題)작품들을 편자(編者)가 한데 묶은 것으로서, 정치 현실을 개탄하고 풍자하는 진지한 내용에다 단순하고 고전적인 비유들이 많아 '예스러운 풍의 시'라는 이름에 걸맞다. 후대 비평가들은 이들이 이백의 가치관이나 세계관, 역사의식, 미의식과 같은 광범위한 사상의 발로이며, 역대 5언 고체 시가들 중에서도 최고라고 평가한다. 송대(宋代) 주희(朱熹; 1130~1200)는 이백의 호방한 다른 시들과 달리 온화하고 부드러운(雍容和緩) 작품으로 고풍 첫 수를 들면서, 이처럼 다양하고 탁월한 시세계는 《문선(文選)》 시에 대한 학습과 연마의 결과라고 보았다. 청대(淸代) 비평가 심덕잠(沈德潛; 1673~1769)은, 현란한 수사로 재능을 과시하거나 호기를 부린 그의 다른 시들과 달리 고풍 59수는 진중한 기풍이 특색이며, 이는 시대 사회의 아픔을 노래한 완적(阮籍; 210~263)과 진자앙(陳子昻)의 뒤를 이은 것이라며 그 특징과 연원을 요약하였다.
옛 노래나 민가를 모방한 150여 수의 악부는, 시적 관습의 경계를 넘나드는 창조적 재능이 아낌없이 발휘된 작품들이다. 소재의 다양함은 물론이려니와, 서사(敍事)를 중심으로 하는 악부 전통의 대중적 틀거지 위에, 사경(寫景)과 서정(抒情), 설리(說理), 영물(詠物)을 위해 절차탁마된 문인시의 기교들이 예술적 완성도를 높여주고, 짤막한 3언에서부터 10언 이상의 장구로 바뀌는 변화무쌍한 7언 가행체와, 고.근체를 가리지 않는 다양한 형식이 한데 어우러져, 깊이와 화려함을 갖춘 이백의 대표 장르가 되었다.
고풍과 악부가 전통적 소재와 주제를 다루는 고전적인 표현 양식임에 비해, 제목과 내용이 창안된 81수의 가음은 사실적 소재와 신변묘사가 두드러진 개인적 표현 양식이다. 술은 단골 소재로서 작품 곳곳에 등장하며, 이로 인해 한층 고양된 상상력은 고금(古今)과 피아(彼我) 사이를 자유로이 넘나든다. 장단구(長短句)를 포함하는 시원스런 7언 가행체 형식은 사실성이 강조되는 이 장르의 성향에 힘입어 가슴 속 응어리를 거침없이 분출하고 있으며, 당대 유행 곡조와의 연관성이 깊어 보이는 근체 작품들은 노래 가사 특유의 절제된 여운을 지니고 있다.
심덕잠(沈德潛), 왕부지(王夫之; 1619~1692) 등 역대 비평가들은 이백의 필력이 가장 잘 발휘된 분야로서 '가행(歌行)'을 지목하였는데, 이는 '가음'과 어떤 관계일까? '가행'이란 용어는 관점에 따라 넓게도 혹은 좁게도 규정된다. 청(淸)대 전량택(錢良擇; 1678 전후)은 《당음심체(唐音審體)》에서, '지사(指事; 사실묘사)와 영물(詠物; 사물의 외관에 대한 묘사)을 위주로 하는 7언 고체 및 장단구로서, 옛 표제를 쓰지 않는 작품'으로 그 범위를 분명하게 한정짓고 있다. 이렇게 되면, 뛰어난 작품이 몰린 이백의 '가행'에는 옛 제목을 쓴 악부시들이 배제되고, 사건이나 사물을 중심으로 노래한 대다수 '가음'이 중심을 이루게 된다. 이에 비해 허학이(許學夷; 1563~1633)는 《시원변체(詩源辨體)》에서 '7언 가행'이란 용어를 사용하면서, 〈원별리(遠別離)〉, 〈촉도난(蜀道難)〉, 〈공무도하(公無渡河)〉 등의 악부시, 〈명고가(鳴皐歌)〉와 같은 가음, 〈파릉행(灞陵行)〉, 〈억구유(憶舊遊)〉, 〈노군요사(魯郡堯祠)〉, 〈천모음(天姥吟)〉 등의 일반 시들을 대표작으로 예시하며, '7언 및 장단구 형식으로 된 작품들'을 포괄적으로 '7언 가행' 혹은 '가행'이라고 불렀다. 이런 관점에서도 대부분의 이백의 '가음'은 수작들이라고 평가되는 '가행'에 포함됨을 알 수 있다.
4. 개성
천오백 여 년 전의 시인이 여전히 만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역대 비평가들이 짚어낸 이백 시가의 매력은, 너르고 시원스러우며, 고고하고, 솔직하며, 산뜻하고 말쑥하며, 낭만적이고 변화무쌍한 데 있고, 다양한 소재, 환상적인 비유와 생동하는 이미지, 거침없고 활달한 구문, 염세적이며 냉소적인 세계관이 특색이라는 등, 이 천재 시인에 바쳐진 헌사(獻辭)의 폭은 중국 시사(詩史)상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너르다.
이백 시에 대해 이루어진 최초의 공식적 평가는, 714~753년 사이의 성당시(盛唐詩)를 수록한 '당인선당시집(唐人選唐詩集)' 《하악영령집(河岳英靈集)》의 언급일 것이다. 이 책을 간행한 은반(殷潘)은 〈전성남(戰城南)〉 등 악부 7수(首)를 비롯한 이백의 대표작 13수를 가려 뽑고 "구속을 싫어하는 분방함이 이백의 천성이었으며, 기이하고 또 기이한 악부 〈촉도난(蜀道難)〉 같은 작품은 굴원(屈原) 이후에 없다."며 극찬하였다.
이백의 개성을 정확하게 짚어낸 것은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주가 있었고, 뜻과 기질이 크고 넓었으며, 세상을 초월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졌다.[少有逸才, 志氣宏放, 飄然有超世之心.]"라는 《구당서(舊唐書)》 〈문원열전(文苑列傳)〉의 평일 것이다. 북송 문인 증공(曾鞏; 1019~1083) 역시 〈이백시집(李白诗集)〉 후서(後序)에서, "그 표현이 크고 자유롭고 빼어나고 훌륭하다.[其辭宏肆儁偉]"며 《구당서》의 안목에 동의하면서, 초사(楚辭) 작가들조차 그의 시에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백 시에 대해 가장 널리 알려진 평은, 남송(南宋)대 비평가 엄우(嚴羽; 1197?~1253?)가 《창랑시화(滄浪詩話)》에서, 당대(唐代)를 대표하는 두 시인 이백(李白)과 두보(杜甫)의 시세계를 논하면서, 침울하고 내면의 꺾임과 변화가 두드러진 두보 시의 '침울(沈鬱)'은 호방하고 고고한 이백 시의 '표일(飄逸)'과 치환될 수 없는 독특한 면모라 본 것이다. 이러한 평은 두 대가의 개성을 비교하면서, 7언 가행체 작품들에서 특히 두드러진 이백의 진면모를 잘 요약한 것이다. 이백의 시를 활달하고 자유로운 것으로 본 이러한 평가들은 여타 시인들과 구별되는 특징을 잘 짚어낸 것이기는 하지만, 그의 시 전반을 아우르는 평가로 보기에는 미흡한 감이 있다. 오히려 '이백 시 전체가 다 호방한 것은 아니고, 〈고풍 1〉과 같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것[雍容和緩]도 있다'고 한 남송 학자 주희(朱熹; 1130~1200)의 견해가 일반화의 오류를 피해 가고 있다.
한편 문학 전통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평으로는, 동시대 시인 두보가 〈춘일억이백(春日憶李白)〉에서 "청신한 유개부, 준일한 포참군.[淸新庾開府, 俊逸鮑參軍.]"이라며 이백과 역대 시인들 간의 유사점을 짚어냈으니, 이백 시의 산뜻하고 참신함이 남조(南朝) 시인 유신(庾信; 字 開府, 513~581) 시와 유사하며, 유장한 호흡과 격조는 포조(鮑照; 字 參軍, 414~466)의 시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절제와 함축이 뛰어난 짤막한 근체 작품들이나, 장편 고체 작품 중에 담긴 독창적인 정경묘사(情景描寫)는 유신 근체시의 기풍과 유사하며, 고금을 조망하며 불우를 한탄하는 이백의 7언 가행체 작품들은 〈의행로난(擬行路難)〉 8수와 같은 포조의 헌걸찬 기개를 닮았다.
그 밖에 "시경(詩經)과 초사(楚辭)를 원조로 삼고, 한위(漢魏) 시를 우두머리로 하여 아래로는 포조와 서릉(徐陵; 507~583), 유신 등도 때때로 원용하는 등, 기괴하며 놀라운 변화에 뛰어났다."는 명대(明代) 호진형(胡震亨)의 평, 이백 시는 "시경과 초사를 원조로 삼고, 양진(梁陳)의 칠언(七言)에 이르기까지 아우르지 않은 것이 없어, 기이하고 기이하다."며 글자마다 내력이 있음을 지적한 풍반(馮班)과 오교(吳喬)의 평, "폭넓은 학문으로 인해 시세계가 깊다."고 한 왕부지(王夫之)의 견해들 모두, 고전문학에 대한 학습과 연마의 내공을 강조한 것이다.
이백의 시에 대한 이처럼 다양한 평가들은 결국, 분석과 평가가 불가능한 천재의 솜씨라는 찬사로 귀결된다. 이백의 "악부가행(樂府歌行)은 폭넓은 연마로 실력을 쌓은 후 주머니를 기울여 꺼낸 것이다."(王夫之), "〈원별리〉는 황홀함의 극치이다."(翁方綱), "〈원별리〉, 〈촉도난〉, 〈천모음〉 등은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으며, 변화무쌍함이 이리 저리 얽히고 설켜 아득하고 혼미한 것이 재주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멍하니 바라보다 쓰러질 따름이다."(胡應麟), "고악부는 고상하고 놀라우며 자유자재로 변화함으로써 천재의 극치를 보여준다."(王世貞), "7언 고체시는 시상(詩想)이 기상천외하고, 단락이 절로 변화하여 생겨나는 것이, 마치 큰 강은 바람이 불지 않아도 절로 물결이 이는 것 같아······사람의 힘으로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沈德潛), "제왕(帝王)을 위해 짓게 된 작품에서조차 궁체시(宮體詩)의 구태의연한 영물(詠物)풍을 찾아볼 수 없으니, 신선의 경지이다."(方弘靜), "장자(莊子)와 이소(離騷)에 조예가 깊어 비흥에 뛰어나 황홀한 표현이 많다."(喬億), "그 시의 온갖 의경(意境)이 다 허구(虛構)다."(屠隆)와 같은 평들은 모두, 변화막측하고 황홀한 그의 시에 대한 예찬이다.
한편, 속세와 청산 사이를 방황하는 모순된 가치관에, 꿈과 환상을 즐겨 읊고 때로는 상투적 표현마저 꺼리지 않은 이백의 재기발랄한 시보다, 투철한 유가 정신 위에 각고의 연마로 구축된 두보(杜甫; 712~770)의 견결(堅決)한 시에서 본받을 점이 더 많다고 평하는 이들도 있다. 송대(宋代) 왕안석(王安石; 1021~1086) 같은 이는 이백, 두보, 한유, 구양수 등의 시를 모아 《사가시선(四家詩選)》을 엮으면서, 두보를 맨 앞에 놓고 이백을 제일 뒤에 놓으며, 뛰어난 재주에 비해 여자와 술이 빈번하게 노래되는 이백의 낮은 식견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한다. 이는 특유의 표현양식을 오해하여 온당한 평가로 보기 어려운 면이 있지만, 이백 시의 강한 즉흥성이 흠결로 작용할 때가 없지는 않다. "입만 열면 글이 되었다."(胡震亨), "즉흥적 표현이 많다."(胡應麟), "5언 고시는 노골적 표현[露語]이나 즉흥적 표현[率語]이 많다.", "〈장진주(將進酒)〉 등은 작품 전체가 얕고 유치한 표현의 극치이다"(許學夷), "가행은 즉흥성을 넘어 경솔한 것도 있다."(毛先舒), 심지어는 "멋들어지게 호탕하기는 하지만, 화려하기만 하고 내실이 없으며, 호사스럽고 뽐내기 좋아하여 의리가 무엇인지 모른다."(蘇轍)는 맹비난을 받게 된 것도, 작품의 즉흥성향을 말년(末年)의 신중치 못한 처신과 연관 지음으로써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이백이 "벗들과 주고받은 증답시(贈答詩)들은, 진정한 속내를 털어놓은 훌륭한 것이다."(方回), "시의 앞머리는 문을 열고 산을 바라보듯 수월해 보이지만······작품 끝부분의 걸출함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安磐)라는 평들을 미루어 볼 때, 즉흥성이나 경솔함은 옥의 티일 뿐, 궁극적으로는 "이백과 두보의 문장이 있어, 만 길 환한 그 불꽃 영원하여라.[李杜文章在, 光燄萬丈長.]"며 예찬한 한유(韓愈; 768~824)나, 이백을 두보와 같은 반열에 두고 '백대를 뛰어 넘는 걸출한 시인[李杜凌跨百代]"이라 평한 소식(蘇軾; 1037~1101)의 견해가, 예술가 이백의 위상을 바르게 자리매김한 것이라 본다.
5. 상징체계
이백의 평생 저작을 모아 〈초당집(草堂集)〉을 낸 이양빙(李陽冰; 721전후~785전후)이 그 서문(序文)에서 "표현에 풍흥이 많다.[語多諷興]"고 지적한 이후 "사물을 끌어들여 뜻을 확장하여, 풍흥이 많다.[連類引義, 多諷興.]"라고 한 명대(明代) 호진형(胡震亨)의 평가에 이르기까지, '풍흥'은 이백 시의 개성적 면모로 줄곧 인정되어왔다. 이것이 유가(儒家) 경전(經傳)의 정신과 일치하느냐 하는 도학자적 관점에서 "법도에 맞는 것이 적기는 하다.[白之詩連類引義, 雖中於法度者寡...]"는 증공(曾鞏)의 다소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하였지만, '연류인의(連類引義)'와 관련된 여러 견해를 종합해 볼 때, 이백이 능했던 풍흥이란 《시경》 이래로 발전되어 온 여러 비유 기법을 폭넓게 수용하여 개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본래 비유는 시의 본질적 요소이고, 이 기법을 구사한 중국 시인들도 허다하지만, "음주(飮酒), 신선(學仙), 전쟁(用兵), 유협(遊俠) 등 이백 시의 주제들이 모두 기흥(寄興)이다"(吳喬), "유협, 신선, 여성, 술 등의 주제는 악부의 전통을 빌린 것이다"(劉熙載) 같은 지적처럼, 광범위한 고전적 주제와 표현들을 개인적 상징체계로 활용한 이백과 같은 경우는 없었으니, 그의 '풍흥'은 부분적 '표현기교'의 수준을 넘어 '표현양식'의 차원으로 확대 발전된 것이다.
당대(唐代) 시인들의 시구에 얽힌 일화를 모은 맹계(孟棨; 875 전후)의 《본사시(本事詩)》에는 "흥기(興寄)가 깊기로는 4언이 5언 보다 낫고, 5언이 7언 보다 낫다" 한 이백의 말이 인용되어 있다. 4언체 시를 거의 쓰지 않은 이백이기에, 이 같은 발언은 시형(詩形)이 아니라 시어의 경제적인 사용을 통한 '함축미와 여운'에 무게를 실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가 벗 최성보(崔成甫; ?~758)의 〈택반음(澤畔吟) 20수〉를 예찬하며 붙인 서문에서 "감춘 듯 하면서도 드러나고, 은근하게 아름다우며, 슬픔이 나로부터 시작되지 않고, 감흥은 독자(讀者)에 이르러 완성되었다.[微而彰, 婉而麗, 悲不自我, 興成他人.]"라 한 구절을 통해서도, 그의 '풍흥'은 시의 호소력에 대한 깊은 고려에서 비롯된 것임을 짐작해볼 수 있다.
"〈궁중행락사(宮中行樂詞) 8수〉 등은 제량(齊梁)풍을 이어받았으나, 풍자의 뜻을 잃지 않아 기흥(寄興)이 돋보인다."는 심덕잠의 평이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듯이, 그의 '풍흥'은 남조 궁체시(宮體詩)의 폐단을 마저 쓸어내고 옛 도[古道]를 회복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전통의 독자적 수용을 통해 시사(詩史)의 새로운 지평을 연 그의 이 같은 역할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명대(明代) 왕세정(王世貞)을 비롯한 일부 비평가들은 이백의 고전 성향을 두보의 사실주의[卽事名篇]와 대립되는 것 혹은 그만 못한 것으로 평가하기도 하지만, 그 개인적 상징체계의 중심에 놓인 사실주의 정신을 간과하지 않았던 청대(淸代) 왕사정(王士禎)은 그를 '악부의 변화 발전[樂府之變]'에 기여한 사실주의 작가들의 반열에 놓았다.
전통을 모방하는 의악부 방면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발휘된 개인적 관점과 사실주의 정신은 고풍이나 가행 등 그의 전 시가를 일관하고 있다. 두보가 선배 시인 이백과의 교류 경쟁을 통해 사회 모순을 고발하는 사실주의 국면을 개척하며 역사의 수레바퀴를 밀고 나아가고자 하였다면, 낭만가객 이백은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그 자신이 어렸을 때 꾸었던 꿈처럼 붓끝마다 꽃을 피우고 영원으로 날아오르는 편을 택하였던 것이다.
<이백 고풍론 - 사색과 비유>
이백 시집의 첫머리에는 고풍(古風)이란 범주 안에 5언 고시(古詩) 59수가 실려 있다. 이들은 본래 무제시(無題詩)였는데, 후대의 이백 시문집 편찬자가 〈고풍〉이라는 명칭을 붙이고 작품에 일련번호를 매겨, '〈고풍〉 59수'로 불리게 되었다. 작자가 애초에 제목을 붙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간혹 대단치 않은 습작 묶음 정도로 오인되기도 하지만, 연구자들에게서는 '인생에 대한 성찰과 사색이 돋보이는 '사변적인 시', 사상적 원류를 알게 해 주는 '진중한 시'로 인정받고 있다. 이백의 시는 호방하고 현란하다는 통념에 비추어 볼 때 고풍시의 이러한 '깊이'는 퍽 이채로운 것인데, 이는 완적(阮籍; 210~263)의 〈영회시(詠懷詩)〉 82수, 진자앙(陳子昻; 661~702) 〈감우시(感遇詩)〉 38수의 창작 정신을 이어, 시인의 역할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모색한 궤적이 오롯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1. 시인과 사회
천보(天寶) 초 장안(長安)에서 한림공봉(翰林供奉)을 지내던 중 정치현실에 크게 실망한 이백은 744년, 짧은 벼슬 생활을 마감하고 궐(闕)을 나오면서, 그 울분과 갈등을 한 데 엮어 시창작에 매진하였다. 그는 특히 〈고풍 1〉을 통해 '시'의 유구한 역사를 개관하면서 자신의 창작 지향을 밝혔다.
크고 바른 시 사라진 지 오래러니 / 나 늙고 나면 그 누가 펼치리오.
요순시절 훌륭하던 기풍, 풀 섶에서 시들고 / 전국(戰國) 시대에는 가시덤불 무성터니,
용과 범이 서로를 물고 뜯으면서 / 전쟁이 광포한 진나라에 이르렀도다.
바른 소리, 어이 그리 아득한지 / 슬픔과 원망으로 초사(楚辭) 시인 생겨났다.
양웅(揚雄)과 사마상여(司馬相如), 쇠퇴의 흐름을 열어 / 틔어놓은 물꼬가 끝없이 흘렀으니,
흥망성쇠 천만 번 바뀌어도 / 바른 문장 끝끝내 물속에 잠겼도다.
건안(建安) 이후의 작품들 / 야단스런 아름다움 보잘 것 없는데
성스러운 이 시대에 옛 근원으로 돌아가 / 옷깃 드리운 채 맑고 진실함을 중히 여기도다.
뭇 수재들 아름답고 밝은 시절을 만나 / 운을 타고서 저마다 고기비늘처럼 생동하고
씨알과 무늬가 어우러져 빛나니 / 뭇 별들이 가을 하늘에 수놓은 듯하도다.
나의 뜻은 산술(刪述)에 있으니 / 드리운 그 빛은 천추를 비추리라.
성인을 소망하여 기틀이 선다면 / 기린 얻을 제 붓을 놓으리로다.
작품은 '대아(大雅)가 오래도록 지어지지 못하였구나'라는 개탄으로 시작하여, 공자(孔子) 이후 당대(唐代)까지 오백 년간 이어져 온 시문(詩文)의 역사를 비판하는 것으로 옮겨간다. 여기서의 '대아'란, 주(周) 문왕(文王) 등의 선정(善政)을 기리는 《시경(詩經)》 시의 한 분야를 일컫는 용어이지만, '명맥이 끊겼다'거나 '지속적으로 이어져야 마땅했다'는 문맥은 이 용어가 주(周)라는 특정 시대를 넘어서는 개념임을 시사하고 있다.
그 외연적 의미를 짚어볼 수 있는 단서는 작품 중간에 언급된, 제량(齊梁) 이래 '비단처럼 아름답기만 했던 시의 풍조[綺麗]'에 대한 '반감'으로서, 이러한 반감은 흔히 선배 시인 진자앙(661~702)이 동방좌사 규의 수죽편에 붙인 편지글, 〈여동방좌사규수죽편서(與東方左史虯脩竹篇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 글에서, 사회에 대한 지식인의 관심과 책임감을 표현한 '한위(漢魏)시대의 기상[漢魏風骨]'이 사라진 것에 유감을 표하고, '함축미[興寄]'를 잃은 제량(齊梁) 이후 시의 허황한 아름다움에 대해 단호한 비판을 가하면서, 이상적 경지인 '풍아(風雅)'가 발현되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한 바 있다.
'아(雅)'를 중심으로 한 진자앙의 이와 같은 주장이 실은 당대(唐代) 초기 문인들의 주장을 발전시킨 것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당대 초, 상관의(上官儀; 608~664)와 같은 시인들이 대구(對句)의 여러 유형들을 정리하고 이를 시 창작에 적극 활용하여 우아하고 유약한 시들을 지어내자, 초당사걸(初唐四傑) 중의 왕발(王勃; 650~676)과 양형(楊炯; ?~692)은 제량(齊梁) 이후 시의 '조잡함[彫蟲小技]'을 비난하면서, '시대를 반영한 바른 시', 즉 《시경(詩經)》을 모범으로 삼는 유가적(儒家的) 문학관에 다시금 주목하였다.
왕발이 배시랑에게 준 〈상이부배시랑계(上吏部裴侍郞啓)〉에서 '맹자(孟子)까지만 해도 바른 것을 버리고 교훈을 저버리는 일[遺雅背訓]을 하지 않았으나, 굴원(屈原) 이후 남조(南朝)말에 이르는 동안 시인들이 시를 망쳤다'고 혹평하였고, 그의 벗 양형이 676년에 요절한 왕발의 문집 서문에서 '가의(賈誼)와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아송(雅頌)을 무너뜨렸다'면서 왕발의 의견에 동조를 표했으며, 조정 내에서 영향력이 있던 문단의 영수 설원초(薛元初)나 낙빈왕(駱賓王; 640~680)이 이들에게 힘을 실어주었던 일련의 활동들은, 종국적으로 남조시(南朝詩)의 유미적 풍조를 불식시킬 돌파구를 유가적 문학관에서 찾아보려던 것이었다.
진자앙은 이러한 초당사걸의 뜻을 이어 시경의 창작정신을 회복하고자 한 것이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절친한 친구였던 노장용(盧藏用; ?~713)은 그의 문집에 서문을 붙이면서 벗의 문학적 업적을 기렸는데, 여기에 피력된 시사(詩史)에 대한 논평이 이백 〈고풍 1〉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예전에 공자께서 천부적인 재능으로 위(衛)에서 노(魯)로 돌아오시고는 《시(詩)》、《서(書)》를 재편집하고, 《역(易)》의 도(道)를 저술하고 《춘추(春秋)》를 지으셨으니 수 천 백년이 지나도 그 문장은 찬연히 빛나고 있다.
공자가 타계하신 지 200년 만에 초사(楚辭) 작가 굴원(屈原)이 나와, 아름답고 과장적이고 호사스러운 글이 생겨났다. 한(漢)이 세워진 지 200년, 가의(賈誼)와 사마천(司馬遷)의 걸출함으로 예악(禮樂)과 헌장(憲章)에 노련한 풍모가 있었으며, 사마상여(司馬相如)와 양웅(揚雄)의 무리는 훌륭했다가 속였다가 만 번 변하였으니 역시 기이하고 특이한 선비였지만, 안타깝게도 왕공대인(王公大人)의 말씀은 매끄러운 말에 파묻혀버리고 말았다. 그 후에 반고(班固), 장형(張衡), 최인(崔駰; ?-92), 채옹(蔡邕), 조식(曹植), 유정(劉楨), 반악(潘岳), 육기(陸機) 등이 물결을 따라 문장을 지었으니, 대아(大雅)에는 부족하였지만, 남은 열기로 아직 바른 모습은 지니고 있었다.
송(宋)과 제(齊) 이후로 거의 쇠하여졌고, 이리저리 휘청대며 흘러가서는 돌아올 줄 몰랐으며, 서릉(徐陵)과 유신(庾信)에 이르자 하늘이 장차 문학을 망하게 하려 하였고, 그 뒤를 따라 상관의(上官儀) 같은 이가 발자취를 이어 생겨나, 풍아(風雅)의 도가 다 쓸려가 버렸다. (그러나) 《역경(易經)》에 이르기를, 사물은 끝끝내 막히지 않고 통하는 데로 이어진다 하였으니, 도(道)가 상한지 오백 년 만에 진군(陳君; 子昻)을 얻게 된 것이다.[孔宣父以天縱之才, 自衛返魯, 乃刪《詩》《書》, 述《易》道, 而作《春秋》. 數千百年, 文章粲然可觀者也. 孔子歿二百歲而騷人作, 於是婉麗浮侈之法行焉. 漢興二百年, 賈誼·馬遷爲之傑, 憲章禮樂, 有老成人之風. 長卿.子雲之儔, 瑰詭萬變, 亦奇特之士也. 惜其王公大人之言, 溺於流辭而不顧. 其後班·張·崔·蔡·曹·劉·潘·陸, 隋波而作, 雖大雅不足, 然其遺風餘烈, 尚有典刑. 宋齊已來, 蓋憔悴矣. 逶迤陵頹, 流靡忘返. 至於徐·庾, 天之將喪斯文也. 後進之士, 若上官儀者, 繼踵而生, 於是風雅之道掃地盡矣. 《易》曰 「物不可以終否, 故受之以泰.」 道喪五百歲而得陳君.] 〈右拾遺陳子昻文集序〉
'대아(大雅)', 그리고 '騷人' '萬變' '憲章'과 같은 어휘가 그대로 쓰인 것을 비롯하여, 문학 발전사를 평가하는 노장용의 시각은 이백의 관점과 대동소이하다. 요컨대 초당사걸(初唐四傑)-진자앙(陳子昻)-노장용(盧藏用)-이백(李白)으로 이어지는 '아(雅)'란, 주(周) 문왕(文王)의 태평성대를 최고 모델로 삼는 유가적(儒家的) 문학 이념이자, 유미주의 풍조가 잃어버린 시의 핵심가치, 곧 사회적 맥락[漢魏風骨]과 함축미[興寄]를 아우르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이 같은 복고 지향은 무게 중심을 현실사회 쪽으로 옮겨, 기울어가는 문단의 균형을 바로잡아보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이백은 〈고풍 1〉의 후반부에서, 막 꽃피기 시작한 성당(盛唐) 문단에서 기라성 같은 시인들과 어깨를 겨루며 참된 시 정신의 구현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선언하였는데, 이는 저물어가는 자신의 나이를 한탄하면서, 시대와 문화의 전승에 힘쓰던 선배들의 산술(刪述) 정신을 되살려 저술활동에 헌신하리라던 공자(孔子)의 자세를 본뜬 것이다.
이백의 시문을 모아 〈초당집(草堂集)〉을 편찬한 이양빙(李陽氷)이 그 서문에서 "노장용이 말하기를 '진자앙이 망해가는 물결을 제압하니, 천하가 한 마음으로 이를 따랐다'하였지만, 남아 있는 제량(齊梁) 궁체시 기풍은 이백에 이르러 크게 변하여 다 사라지게 되었다"며 그의 업적을 기렸고, 당(唐) 맹계(孟棨; 875전후)가 《본사시(本事詩)》에서 그를 평하여 "진자앙과 함께 이름을 날렸으며, 선후배가 힘을 합쳐 공을 세웠다.[與陳拾遺齊名, 先後合德.]"하였으니, 모두 이 같은 지향과 역할을 부각시킨 것이다.
2. 제왕과 병사들
이백이 시가 안에 적극 투영시켜보려던 그 시대와 사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가 주로 활동했던 성당(盛唐; 712~755)대는 당 현종(玄宗)의 치세인 개원(開元; 713~741). 천보(天寶; 742~755)연간으로서, 중국사에 유례없는 번영기이기도 했지만 근저(根底)에 몰락의 단초들을 내포하고 있었다. 나라의 기틀을 잘 잡아가던 임금은 점차 교만하고 사치해져, 731년경에는 음흉한 환관 고력사(高力士)를 총애하고, 736년경에는 이림보(李林甫)와 같은 간신을 재상으로 삼아 정국을 전횡하도록 하여, 덕 있고 충직한 재상 장구령(張九齡)은 귀양 가고, 뜻있는 선비들도 정계 진출 기회를 속속 박탈당하였다. 현종은 천보(天寶)년간에 들어서 745년 양옥배(楊玉杯)를 귀비(貴妃)로 승격시켜 취생몽사를 일삼더니, 752년에는 불학무도(不學無道)한 양국충(梁國忠)에게 재상을 맡기고, 국경의 수비는 안록산(安祿山) 같은 변방 장수(番將)에게 일임하여, 국가 대란인 안록산과 사사명의 난[安史之亂; 755~763]을 자초하며 파국으로 치달았다. 이 와중에 관료들은 부패하였고 부자들은 농민들의 땅을 흡수하여 원성을 샀으며, 잦은 전쟁에 동원된 백성들은 생활 터전을 잃고 가정은 파괴되었다.
이처럼 시대가 저무는 형국이었기에 '태평성대를 구가(謳歌)하리라'던 이백의 당초 소망도 좌절되면서, "예찬하는 소리 오래 전에 무너지고, 대아(大雅)를 대하여 문왕(文王)을 그리노라"(〈고풍 35〉)와 같은 풍자(諷刺)로 굴절될 수밖에 없었다. 서정(抒情) 위주의 5언 고시(古詩)의 전통을 이은 〈고풍〉은 정국을 바라보는 비장한 심경과 소외된 지식인의 외로움을 묘사하는 데 치중하고 있는데, 역사적 사건이나 사물에 비유(比喩)한 경우가 많다. 하향 길로 접어든 정국은 '침몰'이나 '쇠퇴' 같은 직설적인 어휘로 자주 묘사하고 있으며(2, 11, 29, 35, 51, 54, 58), 세도가들의 대립으로 삼계(三季)가 분열하고 칠웅(七雄)이 맞서 파국으로 치달으면서 진(晉)나라 여섯 고관들끼리 세력다툼을 벌인 전국(戰國)시대의 고사(故事)로써 난국(亂國)을 바라보는 안타까움을 형용하기도 하고(29, 53, 54), 막힌 벽, 가려진 해, 어두움, 눈보라(〈고풍 2, 고풍 39, 고풍 54〉) 등으로 막막한 심경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문란한 왕실과 혼미한 정국을 바라보는 고통스러운 심경을 묘사한 다음과 같은 작품이 그 단적인 예이다.
은(殷) 왕비 달기(妲己)는 하늘의 바른 도를 흩뜨렸고 / 초(楚) 회왕(懷王)도 어리석은 지 오래 되었다.
불길한 짐승이 중원에 우글대고 / 조개풀과 도꼬마리가 솟을대문에 더부룩하다.
충신 비간(干諫)은 간언하다 죽었고 /어진 굴평(屈平)도 상수(湘水) 상류에 숨었어라.
범 아가리가 무에 그리 곱다고 / 못된 여수는 공연히 어거지를 부렸는가.
팽함(彭咸)이 사라진 지 오래되었으니 / 이 뜻일랑 누구와 이야기할 것가.
나라를 망친 왕과 왕비로 인해 온 나라엔 불길한 조짐이 가득하고, 죽음의 구렁텅이로 이끄는 그럴싸한 말들이 난무하니, 우직한 충신의 비극적인 말로(末路)는 정해진 이치이다. 은 왕비와 초 회왕, 비간과 굴평 같은 '서로 다른 시대의 여러 인물들'에 관한 고사들, 불길한 양, 도꼬마리 풀, 범의 아가리 등과 같은 비유, 그리고 팽함같은 충신이 '사라져 개탄해 마지 않'는 작품 말미의 '현재적' 시점은, 그의 관심이 과거사에 멈추어 있지 않음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이처럼 역사 고사를 인용(引用)하여 동시대를 풍자(諷刺)한 작품은 고풍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진시황의 몰락 과정을 묘사한 〈고풍 3, 고풍 31, 고풍 48〉, 주(周) 목왕(穆王)과 한(漢) 무제(武帝)의 황음무도를 그린 43, 초(楚)왕의 황음무도를 비판한 58 등이 이러한 경향을 보이는 대표작이다.
진왕(秦王)이 천하를 쓸어내고 / 범처럼 노려보니 어이 그리 사나운가.
칼을 휘둘러 뜬 구름을 가르니 / 제후들 모두 서쪽으로 와 조아렸도다.
확고한 결단력은 하늘이 내렸고 / 큰 지략으로 뭇 재사들을 부렸도다.
무기를 거둬 녹여 사람 모양 만들자 / 함곡관(函谷關)은 아예 동쪽으로 열렸어라.
회계령(會稽領) 바위에 공을 새겨 넣고는 / 낭야대(琅邪臺)를 으스대며 구경하노라.
칠십만 징역꾼으로 / 여산(驪山) 자락에 궁궐터를 닦았고
불사약을 얻고자 애를 쓰며 / 넋 잃은 채 안타까워했도다.
연거푸 힘센 활로 물고기 쏘아 대도 / 큰 고래는 정녕 엄청나기도 하여,
이마와 코는 오악(五岳)을 닮았는데 / 물결을 일으켜 구름 천둥 뿜어내누나.
지느러미가 푸른 하늘을 가리니 / 무슨 수로 봉래산(蓬萊山)을 찾을 건가.
서불(徐巿)이 진(秦)나라 여인을 싣고 갔다는 / 다락배는 어느 때나 돌아오려나.
오로지 보이는 건, 땅 속 물길 세 층 아래 / 금관 속에 찬 재만 묻혔노라.
표면적으로는 장생불로를 추구하던 진시황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는 과거지사를 기술한 것처럼 보이지만, 과거사를 돌아보는 마지막 두 구절의 냉소에서 작자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혁혁한 공적과 불로장생에의 굳은 의지에도 불구하고 끝내는 땅 속 차가운 재로 묻히고 만 진시황의 궤적은, 천보(天寶) 9년(750) 형부상서(刑部尙書) 장균(張均) 등을 보내 보선동(寶仙洞)에 있다는 도교의 전적을 가져오게 하는 등, 장생술을 맹신한 당 현종의 어리석은 행태를 거울처럼 비추고 있다. 즉 고사를 인용하며 당대의 제왕을 풍자하고 그 비극적인 말로를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진시황의 죽음을 불길하게 예고하는 31, 제(齊) 간공(簡公) 시해 사건을 다룬 53도 이와 같은 계열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주자(朱子)가 《주자어류(朱子語類)》에서 "진자앙을 많이 모방하였으며, 한 구절을 다 인용한 것도 있다.[多效陳子昻, 亦有全用其句處.]"라 한 것처럼, 고시 중에서도 진자앙 〈감우시(感遇詩)〉의 직접적인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또 같은 계열인 완적(阮籍; 210~263)의 〈영회시(詠懷詩)〉, 좌사(左思; 250~305)의 〈영사(詠史)〉보다 더욱 단순. 과감한 비유로 제왕의 잘못이나 어두운 현실을 비판함으로써, '말하는 사람은 죄가 없고, 듣는 사람은 경계로 삼게 되는' 《시경》의 풍자정신(諷刺精神)을 되살리고 있다.
당 현종은 대외적으로 오랑캐와 잦은 교전을 벌여 국토 확장의 야심을 불태워, 병사들은 전쟁터로 내몰리며 삶의 터전을 상실하였다. 이백은 전쟁의 불가피함을 인정하여 병사들의 승전을 기원하기도 하였지만, 제왕의 야욕으로 인해 애꿎은 목숨이 스러지고 단란했던 가정들이 파괴되고 논밭이 피폐해지는 전쟁에 절망하였다. 살벌하고 참담한 전쟁터를 생생하게 묘사하여, 두보(杜甫; 712~770)의 〈새상곡(塞上曲)〉에 필적할 만한 걸작이라고 평가되는 〈고풍 14〉는 다음과 같다.
오랑캐 요새엔 모래 바람 드세어 / 예로부터 삭막하기 그지없도다.
낙엽 지고 가을 풀 누래질 적에 / 높이 올라 오랑캐 땅 바라보자니,
황폐한 성은 사막 우에 텅 비었고 / 변경 마을엔 남은 담장 없도다.
백골이 긴 세월 풍상 속에 뒹굴어 / 삼대 같은 잡초더미에 파묻혔구나.
묻노니, 그 누가 그리 포악하였나. / 오랑캐가 무력을 함부로 썼다가,
우리 임금을 진노케 하여 / 지친 병사들 말 위 북을 쳐댔거늘,
화락한 기운은 살기로 변하고 / 징집이 중원을 들레게 하였도다.
병사 삼십육만이 / 저마다 슬퍼서 비 오듯 눈물인데,
또다시 서글프게 행역 나가면 / 고향집 밭갈이는 그 누가 하나.
수자리 간 사람을 보지 않고야 / 어이 변새의 고생을 안다 하리오.
이목(李牧)이 이제는 가고 없으니 / 변방 사람들 범과 이리를 먹여 기르네.
모래바람이 불어오는 변경에서 시인은 주검이 나뒹구는 전쟁터를 침통하게 굽어보고 있다. 육조(六朝) 및 초당(初唐) 변새시(邊塞詩) 같은 치밀한 전장 묘사에 뒤이은 한(漢)나라 이 장군의 고사(故事)는 비장감을 더해준다. 전쟁을 주제로 한 〈고풍 6, 고풍 14, 고풍 22, 고풍 34〉에서는 모두, 정경묘사 뒤에 고사를 인용하면서, 평화를 위해 싸워야 하고, 살리기 위해 죽여야 하고, 공(功)을 세운 자와 상 받는 자가 다른 전쟁의 아이러니를 풍자하고 있다.
3. '나'와 그 분신들
"시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라[詩言志]"는 관념은 중국 시인들을 오래도록 지배해 왔지만, 제세지(濟世志) 혹은 지사(志士)라는 용어에서처럼 '사회적 관심사'라는 함의를 띄며 활용되어 온 '지(志)'는, 가기(歌妓)나 무희(舞姬)의 아름다움을 공들여 묘사했던 제량(齊梁) 궁체시(宮體詩)에서 사라졌고, 이러한 추세는 당대(唐代) 초까지 이어졌다. 여기에는 시인들 거의가 궁정시신(宮庭侍臣)이어서 왕을 따라 시를 짓게 된 계층적 한계도 크게 작용하였다.
초당사걸, 진자앙, 노장용의 뒤를 이어 제량(齊梁)의 유미(唯美) 풍조를 쓸어버리려 했던 이백은 〈고풍 1〉의 첫 머리부터 시종일관 '나[吾, 我]'의 사회적 관심사를 드러내는 데 치중하였는데, 그 표현 방식은 역사적 사실이나 사물을 표면에 내세우는 비유의 성향이 강하였다. 독자 대부분은 이 사물들이 '나'에 대한 등가물(等價物)이라 짐작하고 있지만, 보다 깊이 있는 이해를 위해 그의 시 안에서 이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으며, 시의 전통과는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홀로 핀 난초'만을 묘사한 〈고풍 38〉은 비유가 작품 전반을 일관하고 있다.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한 떨기 난초, 깊숙한 정원에 피었는데 / 잡초들이 얼크러져 묻혀 버렸네.
따사로운 봄볕이 비치는가 싶더니 / 높은 가을 달이 또 다시 구슬프고나.
하늘 서리 벌써 후두둑 떨어지니 / 싱싱하던 그 모습 시들까 걱정이라.
맑은 바람조차 불어 오지 않는다면 / 고운 그 향기, 누굴 위해 풍기랴.
깊숙한 정원에서 잡초들에 덮여 곧 져버릴 난초를 그린 이 작품은 도덕적 의미가 배후에 깔린 알레고리(allegory)의 성격을 띠고 있다. 난초가 피어 있는 장소는 인적이 드문 정원이고, 잡초들에게 수모를 당하고 있으며, 무심한 시간은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난초가 처한 상황, 지닌 품성 등은 불우한 선비의 처지를 묘사한 공자(孔子)의 〈유란조(幽蘭操)〉나 초당 낙빈왕(駱賓王)의 〈동신부간앙수사현상인임천(同辛簿簡仰酬思玄上人林泉)〉其4와 같은 작품들을 모습을 연상시키고 있지만, 단정 짓기에는 여전히 모호한 부분이 있다.
3년간의 장안(長安) 벼슬 생활을 청산할 수밖에 없었던 울분을 피눈물로 호소한 〈고풍 37〉은 이런 류의 고풍시 해석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 옛날 연(燕)나라 신하가 통곡을 하니 / 오뉴월 하늘에서 가을 서리 내렸고
여염집 아낙이 하늘 향해 부르짖자 / 성난 바람이 제(齊)의 건물에 몰아쳤지.
간절한 마음에 감동하여서 / 조물주조차 슬퍼했다는데
나는 정녕 무슨 허물이 있길래 / 금궐 곁에서 멀리 와 있단 말가.
뜬 구름이 자줏빛 궐문을 가려 / 흰 해도 햇빛을 돌리기 어렵네.
모래알들이 빛나는 구슬을 더럽히고 / 잡초더미가 한 송이 꽃을 뒤덮으니
자고로 모두가 한숨짓는 일, / 흐르는 눈물만 부질없이 옷깃을 적시네.
이 작품은, 천지를 울리며 통곡하는 옛 사람들, 잡초더미에 수모를 당하고 모래에 광채를 잃어버린 '한 송이 꽃'과 '옥'은 궁궐을 나올 수밖에 없었던 불우한 '나'의 등가물임을 분명히 드러내주고 있다. 이로서 37의 난초의 개념은 보다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런 구도의 〈고풍 37, 고풍 38〉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불행한 '미인'이 등장하는 27의 본뜻도 짐작케 한다.
연(燕)과 조(趙) 땅의 빼어난 미인 / 푸른 구름 끝 채색 누대에 있네.
고운 눈매는 밝은 달보다 화사하니 / 웃음 한 번에 나라인들 아까우랴.
언제나 푸른 풀 이울까 저어하며 / 앉은 채 차운 갈바람에 흐느끼노라.
고운 손으로 옥 거문고에 시름을 얹어 / 맑은 새벽에 일어나 장탄식 하노라.
어이하면 헌헌장부 짝이 되어서 / 날아가는 난(鸞)새를 같이 타 보나.
세월의 무상함을 한탄하며 헌헌장부를 기다리는 '미인'은 불우한 '나'의 다른 이름(vehicle)이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기다리는 여인'이 작품의 주인공 격인 이백 시를 '작자 자신에 대한 비유'로 해석하곤 하는데, 유추의 근거가 생략되었을지언정 그리 틀린 관점은 아니다. '추녀(醜女)의 질투를 받아, 군왕(君王)에게 버림받은 미인'이 '임금 곁에서 쫓겨난 열사(烈士)'와 병치(竝置)된 가음 〈옥호음(玉壺吟)〉, 같은 제목으로 된 일련의 작품들 안에서 이와 유사한 구도가 발견되는 〈효고(效古)〉 시 1, 2는 이런 해석을 뒷받침해주는 〈고풍〉 밖의 단서들이다.
기실 '난초, 미인'의 비유는 멀리 초사(楚辭)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가깝게는 진자앙 〈감우시 1〉, 장구령(張九齡) 〈감우 2〉에서 취해 온 것이다. 이들은 오랜 문학의 관습을 통해 불우한 지사(志士)에 대한 상징으로 굳혀져 왔는데, 이백은 누구보다 월등하게 잦은 빈도로 이러한 고전적 상징을 활용하고 있다. 이와 유사한 상징으로서 연꽃(26), 옥(36, 37, 50, 56), 귀한 칼(16), 황학(15), 봉황(40, 54) 등이 있다.
이백 특유의 강한 자아는 이와 같은 사물 뿐 아니라 다양한 역사 인물들로 대치(代置)되곤 한다.
함양 이삼월 / 궁궐 버들은 황금 가지인데.
푸른 두건 쓴 이, 뉘 집 자제인가 / 구슬 파는 집 한량이로세.
저물녘에 술 취해 돌아오면서 / 흰 말 거만하게 내달아 가네.
모두들 우러르는 드높은 기개 / 한창 때를 만나서 질탕하게 노니네.
자운은 세상 물정 알지 못하여 / 뒤늦게 장양부를 지어 올리고
부를 바치자 몸 또한 늘그막 / 태현경을 짓고 나니 귀밑털은 실과 같네.
누각에서 떨어진 일, 참으로 애석컨만 / 오로지 이들에게는 웃음거릴세.
말년까지 고생만 하고 세상의 비웃음을 산 양웅(揚雄)과 미모로 출세한 동언(董偃)의 처지는 빛과 그늘처럼 대비되고 있는데, 〈고풍 46〉의 마지막 구절, '변덕스러운 세태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태현경을 지었노라'에 재차 등장하는 양웅은, 유사한 출세가도를 거쳐 초라한 말년을 보내고 있는 이백 자신에 대한 비유이다. 궐 안에서 이름을 날리던 전성기를 회고하며 "승명려 안에서 조서를 기다릴 제, 모든 이가 양웅의 글재주를 훌륭하다 하였네.[當時待詔承明裏, 皆道揚雄才可觀.]"라 묘사한 〈답두수재오송견증(答杜秀才五松見贈)〉의 '양웅'은 자전적(自傳的) 성격의 악부 〈동무음(東武吟)〉의 "양자운이 그랬던 일을 본떠, 감천궁에서 부를 바쳤네.[因學揚子雲, 獻賦甘泉宮.]라는 대목에 이르러 그 실체를 드러낸다.
그 밖에 임금의 총애를 한 몸에 받다가 버려진 한(漢)나라 진황후(陳皇后)(2), 고상한 노래를 잘 부르지만 알아주는 사람 없는 초(楚)나라 영객(郢客)(21), 하늘 향해 억울한 처지를 통곡했다는 연(燕)나라 신하나 제(齊)나라 여인(37), 마음이 내키면 홀로 수레를 몰다 바퀴자국이 끝나는 곳에 다다르면 통곡하고 돌아왔다는 진(晉)나라 완적(阮籍)(54) 등도, '나'와 호응하여 실의(失意)에 찬 작자의 고독과 한(恨)을 대신하고 있다.
〈고풍〉에서는 또한 고시(古詩)의 전통을 이어 갖가지 새와 짐승, 풀과 나무의 이미지로 생동감을 살리고, 때때로 '나'를 비롯한 주인공과 이들을 대립시켜 갈등과 긴장을 높이고 있다. 큰 짐승들은 난폭하거나 사납고 작은 것은 힘이 없고 잔망스러우며 때로는 흉측하다. 꽃과 나무는 쓸모없거나 변덕스럽다.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두꺼비(2), 계수나무(2, 25), 범, 큰 고래(3, 34), 복사꽃(4, 19, 25), 범과 이리(14, 19), 칼(16), 원앙, 누렁이(18), 나방, 누에(22), 푸른 풀(27) 쑥, 원숭이, 벌레(28), 가을 매미(32), 뭇 새, 물고기(34), 벌레, 가시나무, 원숭이(35), 잡초(37, 38, 43, 54), 오동나무, 제비, 참새, 탱자나무, 닭(40), 덩굴풀(44), 불길한 양, 도꼬마리(51), 호랑이(51, 53), 쑥, 해바라기, 콩잎(52), 까마귀(54), 고기 눈알(56)
여러 사물과 나를 대립시켜 선/악, 군자/소인의 구도를 세우는 것은 《초사》이래 〈영회시〉나 〈감우시〉에서 구사된 고전적인 비유방식인데, 이백은 이러한 표현기법들을 더욱 발전시켜 이중의 의미 층을 지닌 확장된 비유, 곧 알레고리로 발전시켜 자신의 중요한 상징체계의 일부로 삼은 것이다.
4. 신선
59수의 고풍 중에는 은일을 노래하거나 신선을 동경하는 도가(道家) 성향의 작품이 23수를 차지하고 있다. 결코 적지 않은 양의 이러한 작품들은 제1수를 비롯한 유가(儒家) 지향의 고풍들과 어떠한 관계에 있을까?
이백은 어려서부터 신선술을 좋아하여 도관(道觀)에서 생활하기도 하였고, 장안(長安) 벼슬생활을 마감한 직후에는 여귀도사(如貴道士)에게서 도사 자격증에 해당되는 도록(道籙)을 받을 정도로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열망이 강하기도 하였는데, 굴곡진 인생 역정 속에서 신선 세계에 대한 동경은 한층 깊어지게 되었다. 한 때 누려 본 부귀(富貴)는 동쪽으로 흐르는 물결처럼 부질없었고(39), 나비 꿈처럼 무상한 부귀영화에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다는 체념으로 이어졌으며(9), 산에 올라 경험하는 선유(仙遊)의 청정한 아름다움은 발아래 피투성이 속세와 선명하게 대비될 수밖에 없었다(19).
서쪽으로 연화산(蓮花山)에 올라 / 저 멀리 샛별선녀를 바라보도다.
하얀 손에 부용을 들고 / 허공을 걸어가며 하늘나라를 즈려 밟도다.
무지개 옷에 너른 띠 끌며 / 훨훨 몸을 날려 하늘로 올라가도다.
나를 맞이해 운대(雲臺)에 올라서는 / 위숙경(衛叔卿)에게 공손히 읍하는도다.
황홀하게 그와 함께 가 / 기러기 앞세워 선계로 솟아 보도다.
낙양(洛陽)의 내를 내려다보니 / 까마득히 오랑캐 졸개들 내달리도다.
흐르는 피는 들풀을 적시며 / 승냥이와 이리들이 죄다 갓을 썼도다.
작품 말미에 등장하는 낙양(洛陽)이라는 지명과, 갓을 쓰고 있는 난폭한 짐승에 대한 비유는 이 지역을 거점으로 시작된 안록산의 난을 연상시킨다. 이백은 전란이 시작되기 직전에 유주(幽州)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전설 속 샛별선녀[明星玉女]가 산다는 화산(華山)에 들른 적이 있는데, 청정한 산에서 전운이 감도는 판국을 굽어볼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비통한 심경을 이 작품에 담은 것으로 보인다.
옛 왕조가 전국(戰國)시대로 나뉘고, 칠웅(七雄)이 난마처럼 뒤얽히자, 성인이 자줏빛 노을 위로 솟아올랐다는 〈고풍 29〉는, 은일과 선유(仙遊)가 세태에 대한 절망감의 또 다른 표현임을 잘 말해주고 있다. 도의 경지를 해치는 때 묻은 세상을 탓하며, 도피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절망감(25), 폭군 진시황의 사망 예고를 듣고서 무릉도원을 향해 길 떠나는 백성들의 막막함(31), 화해할 수 없는 세상과 단절한 한(漢)나라 엄군평의 고독(13) 등은 모두 신선 세계만이 유일한 도피처임을 웅변한다. 〈고풍 7〉은 신선이 되어 날아갔다는 전설 속 인물, 안기(安期)를 부러워하는 작품으로, 다른 고풍과 달리 속세에 대한 집착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다.
객중에 학을 탄 신선이 있어 / 훨훨 날아 하늘 위로 솟구치더니,
푸른 구름 속에서 소리쳐 말하기를 / 자기 이름이 안기(安期)라 하더라.
쌍쌍이 백옥 같은 옥동자들이 / 양 옆에서 자줏빛 난(鸞)새 피리 부는데,
떠나가는 그림자 홀연 뵈지 않고 / 회리바람만이 천상의 소리를 배웅하도다.
머리를 들어 먼 곳을 바라보니 / 살별처럼 순식간에 사라지누나.
원컨대 금광초(金光草)를 먹어 / 하늘만큼이나 오래도록 살아보리라.
더 이상 아래를 굽어보지 않는 홀가분한 초탈은 속세에 대한 무거운 절망의 다른 이름이다.
그의 고풍 중에는 나비 꿈(9), 곤(鯤)고기와 붕(鵬)새(33) 같은 장자(莊子)의 우화를 수용한 것 외에도, 태청(7, 19), 은하수(13), 도경(20), 부용(20), 삼주수(30), 유사(29), 삼산(33), 자니해, 약목, 태소(41), 요대(55)와 같은 상상 속의 신선 세계나, 근원을 탐색하고(13), 깊고 오묘한 경지인 침명(沉冥)을 추구한다(13, 36). 자란생(7)과 같은 신선의 음악이 등장하고, 신선이 거처하는 대루산(4), 태백산(5), 부춘산(12), 금화산(17), 곤륜산(17, 40), 연화산(19), 화부주산(20), 봉래산(9, 30), 삼산(33), 지주산(40) 같은 곳을 배경으로, 불사약(4), 자하거(4), 단사(5), 금광초(7), 옥 꽃술(17), 옥 음료(41), 보결(5)과 같은 신선의 비결을 익히거나 복용한 후에, 학(7), 용(11), 봉황(13, 40), 누른 학(15), 흰 사슴, 푸른 용(20)을 타고, 날개 달린 말, 나는 수레(4), 구름(28)을 타고 날아가는 신선에 관한 묘사들이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다. 여기에 엄자릉(12, 17), 노중련(10, 36)과 같은 은일의 이상적 모델이나, 한중(4), 안기(7), 목양아(17), 치이자(18), 위숙경(19), 적송자(20), 광성자(25, 28), 왕자진(40), 자하객(55)과 같은 신선 고사(故事)가 펼쳐진다.
이러한 심상(心象)들은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이래로 발전해 온 유선시(遊仙詩; 신선 추구를 주제로 한 시)들의 요소를 흡수하여 발전시킨 도가(道家)풍 시의 상징(象徵)들이다. 이백은 이 방대한 전통적 상징들을 개인적 방황의 여정과 녹여, 자신만의 상징체계를 구축해 나아갔다. 속세와의 고단한 부대낌 속에서 자존과 자유에 기반한 본질적 자아를 지켜내고 초월을 지향한 이 도가 성향의 고풍시들은 이백 시가의 표일(飄逸)하고 고고(孤高)한 시풍 형성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5. 초월의 양식(樣式), 비유
〈고풍〉 59수를 일관하고 있는 일인칭 화자(話者)는 이들이 '비판과 호소'를 위한 장르임을 말해준다. 더불어 그것이 기대고 있는 고전 양식의 추상성은 그 주관적 울분의 무게를 덜고 시공(時空)의 한계를 넘는 호소력을 지니게 한다. 문인 고시에서 사용되었던 고전적 비유들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확대된 이백의 〈고풍〉에서 특정 주제를 상기시키는 상징(象徵)으로 굳어지고, 부분 묘사로부터 알레고리에 이르는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흔히 풍흥(風興)이라 일컬어지는 이러한 예술적인 기제(機制)는 '신선'과 같은 탈속적(脫俗的) 소재나 주제의 범주를 넘어서는, 이백 시 특유의 초월 성향을 이루는 데 기여하고 있다.
지기 최성보(崔成甫; ?~758)의 〈택반음(澤畔吟)〉 20수에 붙인 서문에는 이백이 중시했던 고전 양식의 특징과 효과가 잘 묘사되어 있다.
감춘 듯하면서도 드러나고, 은근하게 아름다우며, 슬픔이 나로부터 시작되지 않고, 감흥이 남에게서 완성되었으니, 그 어찌 원망하는 자의 무리가 아니랴![至於微而彰, 婉而麗, 悲不自我, 興成他人. 豈不怨者之類乎.]
수수께끼처럼 모호하게, 베일에 싸인 듯 영롱하게, 나의 슬픔을 남의 것인 양 표현하였다 함은 벗의 작품에 대한 찬사이자, 시적 아름다움과 감동에 대한 그 자신의 지론일 터이다. 삶의 고된 여정 속에서 이백은 현실과 환상이 포옹하는 형형색색의 비유 가득한 고풍시들로써 시대의 과제를 해결하고, 독자들에게는 언제까지나 아름다운 형상으로 기억되기를 소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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