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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한반도 전쟁에서 도로망의 군사적 함의- 역대 전쟁에서 사용한 주요 종적 도로 분석을 중심으로- /최창국.육군교육사령부

Ⅰ. 서 론

Ⅱ. 한반도 종적 도로의 중요성과 한민족의 역대 전쟁

Ⅲ. 고대 전쟁의 기동로와 1번 국도 축선 분석

Ⅳ. 고려·조선시대 주요 전쟁의 기동로

Ⅴ. 6.25전쟁의 주요 기동로

Ⅵ. 결 론

 

 

 

Ⅰ. 서 론

 

전쟁은 국가와 국가, 또는 교전(交戰) 단체 사이에 무력을 사용하여 싸우는 행위이며, 전통적으로 전쟁이 행해지는 장소는 지상영역이다. 물론 최근에는 ‘다영역작전’이라는 개념이 일반화되어 지상, 해상, 공중뿐만 아니라 우주와 사이버공간까지 전쟁의 영역으로 확대되 고 있다. 하지만 전쟁은 여전히 작전의 최종 목표 달성 단계에서 지상군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1)하고 있다.

이를 위해 공군과 해군을 포함한 다양한 가용작전요소들이 지상군의 작전 여건 조성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고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왜 지상영역, 즉 땅에서의 전쟁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던 것일까?

물론 문명과 과학기술의 발달이 오늘날과 같지 않은 과거에는 자연 장벽 을 개척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은 주로 지혜로운 활용 혹은 순응(順應)의 대상 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각종 기술들을 통해 자연을 유용하게 활용할 뿐만 아니라 원하는 목 적에 맞게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대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부분의 자연 이 실재(實在)하는 지상이 주요 전장(戰場)이 되는 이유는 인간 삶의 터전이 바로 ‘땅’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강 주변에서 정착생활을 하며 거주의 규모가 커지면서 도시가 형성되 었고, 자연스럽게 주요 시설물들이 증가함으로써 거주하는 사람들의 수도 그에 비례하여 증가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형성된 도시는 다른 도시와 교류하거나 도시 자체로서 존재 의미를 갖기 위해 ‘도시의 기능’을 수행해 왔다.

도시의 일반기능과 특수기능은 그 도시의 배후지(背後地) 범 위를 뛰어넘는 경우가 대부분2)으로 이런 현상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1) 걸프전이 공군력 중심의 공중 폭격 이후 지상군 투입 100시간 만에 종료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반면 2008 년 러시아-조지아 전쟁은 지상전에 의해 종전된 것이 아니라 유럽 연합의 중재로 종료되었지만, 지상전에서 러시아 육군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남보람, “러시아의 영토확장 행동에 대한 나토와 미국의 군사적 대응 연구,” 한국과 국제정치, 제37권 제4호,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2021년, pp. 150-151.

    2) 한국도시지리학회 편, 한국의 도시 (경기 파주: 법문사, 2005), pp. 117-118. 도시의 일반기능(general function)은 어떤 도시가 그 도시 자체와 배후지에 대해 수행하는 일반적인 행정 서비스이며, 특수기능 (special function)은 특화된 제조업 혹은 특산물의 생산 등 특정 도시만이 수행하는 기능을 의미한다.

 

그리고 도시 의 기능들이 인접 도시로 전파되기 위해서는 도로가 필수적이다.

결국 강 주변에 정착한 사 람들이 도시를 만들고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기 위해 도로가 생겼으며 이런 과정을 거쳐 강 과 도시를 중심으로 주요 시설물들이 구축되어 대도시는 정치·군사·경제·외교적으로도 전 략적 중요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반도 역시 그러하다.

대륙의 중국과 해양 일본이 호시탐탐 침략을 시도했던 한반도에 서 침략세력들이 그들의 야욕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도로를 중심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 다.

특히 한반도는 지형적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종적 도로가 발달하였기 때문에 한반도에 서 발생한 전쟁에서도 종적 도로의 중요성은 지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1번 국도를 위시한 3·5·7번 국도는 정치, 경제, 외교, 군사, 사회적으로 전략적 함의가 큰 한반도의 종적 도로임에도 불구하고 한민족 전쟁사를 통해 이들 도로들을 통사 적·종합적 관점에서 분석한 연구들은 쉽게 접할 수가 없다. 다만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발간한 고구려 대수·당전쟁사, 여요전쟁사, 대몽항쟁사 등에서 주요 진군로를 엿볼 수 있다. 이외에 이상훈이 나당연합군의 안주-평양 교통로를 분석3)하였고, 한정훈은 고려 북계와 동계 지역의 주요 거점도시를 중심으로 한 육상 및 수 상교통로가 군사·행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주장4)하였다.

이혜은도 조선시대의 역 원과 봉수제를 통해 조선의 주요 도로와 교통통신로를 분석한 바5) 있다. 모두 의미 있는 연구이나 한민족 전쟁사와 역사의 단편들에 해당하는 것으로 통사적·종합적 접근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에 본 연구는 한반도에서 발생한 역대 전쟁에서 종적 도로의 활용과 중요성에 대해 분 석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한반도의 종적 도로 중 남과 북을 관통하는 1·3·5·7번 국도 의 전략적 가치를 살펴보고, 한민족의 역대 전쟁을 통사적으로 분석할 것이다.

한반도를 관 통하는 종적 도로의 명칭은 시대별로 상이했다.

1번 국도만 하더라도 1971년 「일반국도노 선지정령」에 의해 명명6)된 것이지만,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고시」 제956호(1938. 12. 1.)에 의거 목포~경성 구간은 국도 3호선, 경성~신의주 구간은 국도 2호선이었다.

 

       3) 이상훈, “고구려 영류산의 위치와 나당연합군의 진군로” 한국고대사탐구, 34호,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20, pp. 194-200. 이상훈, “668년 신라군의 진군로와 그 의미” 대구사학, 133집, 대구사학회, 2018, pp. 15-24.

      4) 한정훈, “고려 전기 양계의 교통로와 운송권역” 한국사연구, 141호, 한국사연구회, 2008, pp. 142-152.

      5) 이혜원, “조선시대의 교통로에 대한 역사지리적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76.

      6) 1971. 8. 31. 제정된 「일반국도노선지정령」에서는 1·3·5·7번 국도를 포함하여 총 59개의 국도 명칭을 지정하였다. 

 

이 런 이유로 본 연구에서는 종적 도로의 개념을 선(線)의 개념이 아닌 통로 혹은 구간의 의미 로 접근할 것이다.

이는 시대별로 도로의 명칭은 변하더라도 그 도로 인근에 위치하고 있는 도시들은 이동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한민족의 역대 전쟁은 모든 전쟁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한민족과 이민족 간의 전쟁 위주로 분석할 것이다. 아울러 이해 도모를 위해 고대~현대지도까지 다양한 지도를 활용하고 자 한다. 왜냐하면 본 연구의 목적이 시대별 전쟁양상과 진군 상황 등을 역사지도에 도식하려 는 것이 아니라 역대 전쟁에서 어떤 기동로를 주로 이용했느냐를 분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로를 중심으로 한반도에서 발생한 대소 전쟁의 고찰과 분석은 본 연구의 객관성과 논 리성을 한층 더 보장해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밝힌 바와 같이 횡적 도로를 포함 한 모든 도로가 아닌 한반도를 관통하는 주요 종적 도로를 분석 대상으로 하고, 해당 도로들을 공간적 개념으로 접근했으며, 모든 전쟁이 아니라 주요 전쟁을 선택적으로 분석한 본 논문의 연구방법은 그것 자체가 한계이자 후속연구가 필요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방법을 통해 본 연구는 각 전쟁에서 사용된 기동로들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그중 가장 핵심적 역할을 했던 도로가 1번 국도이며, 이를 위시한 종 적 도로들은 전쟁 영역이 우주, 사이버 공간 등으로 확장되더라도 현재와 미래에도 매우 중 요한 기능을 담당할 것이라는 결론을 도출할 것이다. 이러한 결론은 우리 군의 전장 영역별 작전수행개념 발전에 있어 일종의 통찰력(insight)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 본다.

 

Ⅱ. 한반도 종적 도로의 중요성과 한민족의 역대 전쟁

 

본 장에서는 한반도를 관통하는 종적 도로들의 전략적 가치와 중요성을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목포에서 신의주로 이어지는 지금의 1번 국도는 1971년 「일반국도노선지정령」에 의 해 명명되었다.

1번 국도가 경유하는 나주, 광주, 전주 등의 전라도 지역은 대한민국 제1의 곡창지대이며, 대전광역시와 세종특별자치시는 경제,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도시이다.

평 택과 오산에는 주한미군의 주력부대가 주둔하고 있으며, 수도 서울의 중요성은 굳이 언급 할 필요도 없다. 서울부터 의주로 이어지는 의주로(義州路)는 고려 수도 개성, 고구려와 현 재 북한의 수도인 평양이 있으며, 조선시대 연행로(燕行路)로 활용되었다. 특히 의주에서 압록강을 넘어 단동을 거쳐 북상하면 중국군의 북부전구 사령부가 있는 선양(瀋陽)과 연결 된다.

1번 국도는 예나 지금이나 정치, 군사, 경제, 사회적으로 매우 중요한 도로이다.

3번 국도는 경남 남해에서 출발하여 평안북도 초산까지 한반도의 중앙을 관통한다. 광양 국가산업지와 지근거리인 남해군은 한반도 남쪽바다의 중앙지점에 위치하여 특히 군사적으 로 매우 중요하다. 문경은 부산 동래에서 한양으로 가는 최단거리로 교통과 국방의 요충지 이다. 이천은 남한강을 통제할 수 있는 핵심 도시이며, 평강은 김화, 철원과 함께 철의 삼 각지라 불릴 만큼 군사적으로 중요한 도시이다. 특히 평강은 평원선과 5번 국도, 경원선 철 도가 통과하는 곳으로 교통의 요충지이다. 평강 북쪽의 양덕 역시 북한의 주요 횡적 도로인 8번 국도와 만나는 곳으로 8번 국도는 서해의 남포와 동해의 원산을 연결한다. 3번 국도의 끝인 초산은 고래로 중국군의 한반도 유입 시 의주와 함께 이용되었던 주요지점이다. 즉 3 번 국도는 교통, 군사적으로 가치가 높은 도로이다. 5번 국도는 경남 통영에서 시작하여 거제, 창원, 대구, 원주, 춘천, 원산, 함흥, 장진을 경유하여 평북 중강진에 이른다. 통영, 거제는 남해안의 군사적 요충지이자 조선 산업의 핵 최 창 국 240 제17호, 2025. 6. 심지역이며, 창원은 국가산업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대구를 포함한 이들 경상도 지역은 삼 한 중 진한이 발전하여 예부터 그 중요성이 이미 입증된 지역이다. 원주와 춘천은 강원도의 주요 거점도시이며, 원산은 교통과 항만의 핵심지로 1876년 강화도조약 때 부산, 인천과 함께 개항되었을 정도로 중요한 항구도시이다. 함흥은 관북지역 최대의 도시로 북한에서는 평양, 남포에 이어 세 번째로 인구가 많고, 성천강 유역은 함흥평야가 발달된 곡창지대이기 도 하다. 장진강이 흐르는 장진은 1934년 장진선, 1936년 장진강댐이 완공된 개마고원상 의 중요한 도시 중 하나이다. 중강진7)은 한반도에서 가장 추운 곳이며 목재의 집산지로 제 재업이 발달하였고 중국과 맞닿은 국방상 중요한 지점이다. 이렇듯 5번 국도는 교통, 산업, 군사적으로 전략적 가치가 높다.

7번 국도는 부산에서 출발하여 동해안을 따라 함북 온성까지 이어진다. 대한민국 제2의 도시 부산, 천년고도 경주를 거쳐 동해안을 거슬러 올라가면 대부분의 도시들이 항포구이 다. 원산과 함흥의 전략적 가치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하였고, 길주, 명천, 경성, 그리고 경 흥, 경원, 온성은 조선시대 함경북도 지역에서 운용했던 제승방략의 6진 3읍8)에 속하는 주 요도시들로 예부터 군사, 행정, 경제의 거점도시들이었다. 특히 러시아·중국과 인접한 자유 경제무역지대 나진, 선봉은 통일 이후 북방교역의 교두보가 될 수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7번 국도는 교통, 경제, 국제적으로 가치가 높은 도로이다. 이상과 같이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등 제분야에서 의미가 큰 종적 도로들의 중요성을 분 석하기 위해 필자가 본 연구에서 다루고자 하는 한민족의 역대 전쟁9) 범주는 크게 세 가지이 7) 김정호의 대동여지전도에서도 목포-의주(1번 국도), 남해-초산(3번 국도), 부산-온성(7번 국도)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확인할 수 있으나, 통영에서 출발한 5번 국도는 중강진이 아닌 장진까지만 표시되어 있다. 8) 최창국, “고려와 조선전기의 동북계 강역인식” 대전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20, p. 94. 9) 한민족은 역사상 930여 회의 외침을 받은 것으로 인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1970년 유봉영(“외구(外 寇)와 감결소위(鑑訣所謂) 십승지지(十勝之地)” 백산학보, 8호, 백산학회, 1970, pp. 221-223.)의 “한민족은 대 륙방면 438회, 해양방면 493회, 총 931회의 이민족 침해를 당했다”는 연구결과가 결정적이었다고 보는 것이 일 반적이라 할 수 있다. 1972년 문교부에서 편찬한 시련과 극복에서도 “우리나라는 역사상 많은 국난을 겪어 왔 으며”라는 표현을 했고, 이선근은 “우리나라가 예부터 헤아릴 수 없이 외적의 침략을 받았지만”이라는 서술(최병 옥, “한국의 역대 대외전쟁에 대한 인식,” 군사 , 25호, 국방군사연구소, 1992, p. 86.)을 하는 등 한민족이 많 은 외침을 받았다는 표현은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이는 1970년대부터 시작된 한국 경제의 비약적 발전을 부각시키고자 우리가 극복한 질곡의 역사를 역설적으로 강조하는 과정 속에서 나타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가 일부 학술적 연구와 결합되어 “역사상 많은 국난”과 “헤아릴 수 없는 외적의 침략”이라는 표현을 통해 930여 회의 외침으로 귀결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반면 신형식(한국고대사의 신연구 (서울: 일조각, 1984), pp. 286-287.)은 BC 1세기부터 AD 10세기까지 삼국과 통일신라가 이민족과 벌인 무력충돌을 181회로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유봉영이 제시한 삼국시대 143회보다 38회나 더 많은 수치이다. 또한 최병옥은 4명의 연 구자들이 고려시대 왜구의 출현횟수를 연구한 자료를 분석한 결과가 모두 상이함을 발견하였다. 이를 통해 우리 나라가 930여 회의 외침을 받았다는 기존 연구는 신뢰도가 매우 낮음을 알 수 있다. 최창국  한반도 전쟁에서 도로망의 군사적 함의 241 다. 첫째 우리민족과 이민족 간의 전쟁, 둘째 압록강 및 두만강 일대 동북 3성 일부를 포함한 한반도 내에서 발생한 대외전쟁, 마지막으로 교전국이 사용한 기동로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 는 전쟁을 그 대상으로 하고자 한다. 다만 나당연합군에 의한 백제 공격은 대상에서 제외하였 다. 소정방이 이끈 당군은 수로를 이용10)하였고, 무열왕의 신라군은 서쪽의 백제 공격을 위 해 내륙의 추풍로를 이용한11) 것으로 판단되기에 전체적으로 지상에서 종적 도로를 이용한 전례로 보기에는 부적절하기 때문이다. 무장 항일독립운동은 이미 한반도 내에 주둔 중인 일 본군에 대한 다수 지역에서의 항쟁이었기 때문에 특정 기동로 활용에 대한 분석이 큰 의미가 없어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반면 6.25전쟁은 국제전의 성격으로 한반도 내에서 치열한 공방 전이 지속되었기에 본 연구의 범주에 포함시켰다. 이를 시대별로 나열하면 아래와 같다. 1. 고대 ① 고수(高隋)전쟁: 598~614년,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12) ② 나당(羅唐) 연합군에 의한 고구려 멸망: 668년 ③ 나당(羅唐)전쟁: 670~676년, 당나라 세력 축출 2. 고려시대13) ① 여요(麗遼)전쟁: 993~1019년, 거란의 고려 침입(27차례) ② 여몽(麗蒙)전쟁: 1231~1259년, 몽고의 고려 침입(7차례) 3. 조선시대 ① 임진왜란: 1592~1589년, 조선·명 對 일본 ② 정묘·병자호란: 1627~1637년, 후금·청나라의 조선 침입 10)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제5 무열왕 7년 6월 21일조. 11) 이재준, 백제멸망과 부흥전쟁사 (경기 파주: 경인문화사, 2017), pp. 31-34. 신라군이 경주에서 경기도 이천 의 남천정까지 이동한 경로에 대해 이재준은 경주-영천-선산-상주-화령-보은-진천-이천 경로가 가장 가능성 높 은 것으로 판단하였다. 12) 고구려가 승리한 제1·2차 고당(高唐)전쟁(645~662년)은 주요 전장이 중국 요녕성의 요동성과 안시성 및 서해 등으로 한반도와 많이 이격되고 지상전 사례가 적어 본 연구의 분석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13) 고려시대 여진과의 전쟁도 주요전쟁이기는 하나, 여진정벌은 서경(평양)을 출발하여 화주(영흥)를 거쳐 함주(함 흥)-길주로 이어지는 7번 국도를 활용한 사례이며, 정벌 후 설치한 동북 9성의 위치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여 여진정벌은 제Ⅳ장에서 7번 국도를 활용한 사례의 하나로만 언급하였다. 최 창 국 242 제17호, 2025. 6. 4. 근대 이후 ① 6.25 전쟁: 1950~1953년

 

Ⅲ. 고대 전쟁의 기동로와 1번 국도 축선 분석

 

1번 국도의 명칭이 시대별로 상이했기 때문에 본 장에서의 1번 국도는 큰 틀에서 통로 및 구간의 의미임을 다시 한번 밝힌다.

 

1. 고수(高隋)전쟁

 

1.1. 제1차 고수(高隋)전쟁(598년)

 

수나라는 건국 초기에 남으로 진(陳), 북으로는 돌궐과 대치하고 있었다.

중국 통일을 추 진하던 수는 이간정책을 통해 북쪽의 돌궐을 동·서 돌궐로 분리(583년)시켜 국력을 약화시 킨 후 동돌궐을 제압하였다. 이어 남쪽의 진(陳)을 멸망(589년)시키고 중국을 통일한 수는 고구려를 다음 목표로 삼았다14).

이에 고구려 영양왕은 장차전에 대비, 유리한 여건조성을 위해 오늘날의 ‘예방전쟁’ 차 원15)에서 598년 직접 말갈족 1만여 명을 이끌고 요서의 거점도시인 영주(현재 遼寧省 朝 陽市)를 공격하였다. 하지만 영주총관(營州摠管) 위충(韋冲)이 이를 격퇴하여 고구려군은 오 히려 큰 피해를 입었다.

이후 수문제는 수군과 육군 30만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16)하지만 그 결과는 주지하다시피 요하에서의 장마와 전염병, 요동반도 남해상 폭풍으로 인한 자진 철군이었다.

수의 1차 고구려 침공은 요하(遼河)를 건너지 못한 상황에서 종료되었지만, 고구려의 영 주(조양) 공격은 살펴볼 만할 가치가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王率靺鞨之衆萬餘라 기록하여 왕이 친정(親征)했다는 사실17)을 밝히고 있다.

 

    14)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고구려 대수·당전쟁사 (서울: 동 연구소, 1991), pp. 50-51.

    15)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한국고대 군사전략 (서울: 동 연구소, 2005), p. 146.

    16) 삼국사기 권20, 고구려본기 제8 영양왕 9년(598) 첫 번째 기사.

    17) 위의 기사. 

 

즉 왕이 평양을 출발하여 요하를 건넜다는 것인데 결국 영양왕은 평양–의주–압록강–요하(遼河)–조양에 이르는 기동로를 이용했다 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림 1] 제1차 고수전쟁 이전 고구려군의 선제공격 기동로 요하 조양 의현 흑산 무순(신성)심양 요중(회원진) 본계 요하 요동성(요양) 안시성 추정 (해성) 오골성(봉성) 단동박작성(中:호산산성) 의주 염주정주 안주 평양 출처: 中國地圖集(中國 北京: 中國地圖出版社, 2004), pp.74-75. 세부 내용은 연구자가 추가 작성.

 

또한 요하를 건넌 이후 회원진(요중)-흑산–의현을 경유하여 영주로 진격18)하였다는 것을 보면 [그림 1]에 표시한 바와 같이 고구려군은 압록강 도하 후 봉성(鳳城)에 위치한 오 골성(烏骨城)을 경유, 본계(本溪)에서 서진하여 요동성[요양(遼陽)]을 거쳐 요하를 건넜을 것 으로 판단된다.

 

   18)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한국고대 군사전략, p. 146. 244 제17호, 2025. 6. 

 

즉 고구려군이 한반도에서는 1번 국도를, 압록강 이북에서는 단동에서 심양으로 이어지 는 중국의 304번 국도를 주 기동로로 활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심양–단동을 잇는 304번 국도는 북한 급변사태 시 중국의 북부전구 병력들이 북한으로 유입되는 주요 기동 로이자 우리가 대륙으로 진출할 때 사용할 수 있는 주요 도로이기도 하다.

 

1.2. 제2차 고수(高隋)전쟁(612년)

 

수나라의 제2차 고구려 침공은 수문제의 둘째 아들 수양제에 의해 진행되었다.

1차 침공 의 패전 원인을 고려하여 612년 정월 탁군(북경)을 출발한 약 113만 명의 수군(隋軍)은 4 월이 되어서야 요하를 건넜고, 이어 전략적 요충지인 요동성을 포위하였다.

하지만 3개월이 경과해도 요동성을 함락하지 못하자 수양제는 우문술과 우중문에게 별동대 약 30만 명 을 주어 직접 평양을 공격하게 하였다.

압록강 대안인 단동 일대에 도착한 수군19)은 을지 문덕의 기만술에 의해 살수(청천강)를 건너 평양 북쪽 30리까지 진격20)하였으나, 을지문덕 의 철군 종용 오언시(五言詩)21)를 명분삼아 살수 이남으로 물러났다.

이후는 그 유명한 살 수대첩의 대승이다.22)

 

     19) 삼국사기 권20, 고구려본기 제8 영양왕 23년 6월 기미조.

     20) 삼국사기 권20, 고구려본기 제8 영양왕 23년 6월 다섯 번째 기사.

     21) 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

     22) 삼국사기 권20, 고구려본기 제8 영양왕 23년 7월조.

 

여기서 수나라 별동대의 이동경로를 보면 요동–단동(압록강 대안)-살수–평양이었음을 알 수 있다

. [그림 1]에서 보면 단동에서 압록강을 건너면 의주이며, 살수를 건너기 위해서 는 안주를 거쳐야 한다.

즉 수나라 별동대는 제1차 침공 때 고구려군이 사용했던 것과 같 이 요동 ↔ 단동 ↔ (압록강) ↔ 의주 ↔ 정주 ↔ (청천강, 살수) ↔ 안주 ↔ 평양으로 이어 지는 중국 304번 국도와 우리의 1번 국도를 이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 나당 연합군에 의한 고구려 멸망(668년)

 

고구려를 공격한 당나라 장군 이적(李勣)은 668년 9월 평양을 함락하였다.

이적이 대행 성(大行城)23)을 격파하자 다른 길로 온 당의 여러 군대가 이적과 합류하여 압록책(鴨綠柵) 에 이르렀다.

고구려군이 막아 싸웠으나 이적은 욕이성(辱夷城)을 거쳐 수하(手下) 계필하력 (契苾何力)이 이미 점령한 평양 부근에 이르렀고 한 달여 만에 평양성을 함락24)한 것이다.

여기서 이적의 기동로는 대행성-압록책-욕이성-평양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대행성과 압록책이 압록강 일대이기 때문에 결국 욕이성은 압록강과 평양성 사이의 어디쯤에 해당될 것이다. 이상훈은 욕이성의 위치를 청천강변의 안주로 비정25)하였는데 필자 역시 이에 동 의한다.

이적이 평양성을 함락한 9월 이전인 668년 6월 22일에 문무왕은 김인문 등으로 하여금 당나라 군영으로 이동하라 지시26)했고, 김인문이 6월 29일에 당군과 함께 영류산 (평양 북쪽 20리 지점) 아래로 진군했다는 기록27)이 이를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23) 서영교, “당의 고구려 내전개입과 신성·대행성 점령” 중국사연구, 131호, 중국사학회, 2021, pp. 66-69. 대 행성은 압록강 하구에 있는 박작성 인근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24) 삼국사기 권22, 고구려본기 제10 보장왕 27년(668) 9월조.

       25) 이상훈, “고구려 영류산의 위치와 나당연합군의 진군로” 한국고대사탐구, 34호,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20, pp.189-193.

       26) 삼국사기 권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8년(668) 6월 22일조.

 

그리고 이때 김인문 등이 이끈 신라군은 육로가 아닌 해로를 이용했다고 봐야 한다. 선발대인 김인 문 군대가 신라군 본대보다 먼저 도착하여 당군과 합류해야 하는데 굳이 육로를 이용하여 고구려의 방어선을 뚫고 평양 북쪽으로 이동할 이유가 만무하기 때문이다28).

 

[그림 2] 의주-평양 간 주요 도시 오골성(봉황성) 구련성 의주 서림성 정주 가산(운천) 용천 철산 선천(선주) 곽산 안주 숙천 영유(평원) 순안 평양 개천 순천 자산(평성) 출처: https://kyudb.snu.ac.kr 고지도, 大韓輿地圖(19世紀 末 ~ 20世紀 初) (검색일: 2025. 4. 27.). 세부내용은 연구자가 추가 작성.

 

이상훈은 또한 안주에서 평양까지의 진군로를 서해안에 가까운 안주-숙천-순안-평양 으로 판단하였는데 이 역시 동의한다.

[그림 2] 대한여지도를 보면 안주에서 개천을 경유 하여 순천-평성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평양까지 도착하는 소요시간이 과다하고, 산악지대 라는 위험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 방어시설물들이 밀집해 있을 것이 분명한 애로지 역이기 때문이다29).

 

     27) 삼국사기 권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8년(668) 6월 29일조.

     28) 이상훈, “668년 신라군 선발대의 진군로와 그 의미,” pp. 3-4. 

     29) 위의 논문, pp. 194-200. 246 제17호, 2025. 6.

 

또한 나당 연합군 입장에서는 공격기세 유지를 위해 굳이 우회도로를 이용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결국 나당 연합군이 압록강을 건너 욕이성(안주)을 거쳐 평양까지 진군한 이동로 역시 의주-선천-정주-안주-숙천-순안-평양으로 이어지는 1 번 국도였음을 알 수 있다.

 

3. 나당(羅唐) 전쟁(670~676년)

 

백제와 고구려 멸망 이후 신라와 당의 전쟁 중 눈에 띄는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 다.

  첫째, 671년 9월 당나라 고간이 4만의 병력을 이끌고 평양에 도착한 후 대방(황해도 사리원 일대)을 공격30)한 것이다.

당군이 평양에서 황해도 대방으로 이동하기 위해 서는 [그림 3]과 같이 평양-중화-황주 봉산(사리원)으로 이어지는 직선로를 선택 했을 것이다31). 

모두 1번 국도상이다.

 

  [그림 3] 당군(唐軍)의 기동로 출처: 김정호, 대동여지전도 사본 (서울: 도서출판 지우사, 2006)

 

 

둘째, 672년 8월 석문전투이다.

당나라 고간이 대방을 공격한 이후 석문까지 내려 와 신라의 주력을 대파한 사건32)이다.

석 문은 황해도 서흥 서북쪽 운마산 석문사 부근으로 추정33)되는 곳으로 역시 1번 국 도 축선상에 위치한다.

  셋째, 신라와 당나라의 마지막 육상전투 인 675년 매소(초)성(買肖城) 전투이다.

당 군 이근행(李謹行)이 군사 20만을 이끌고 매소성(買肖城)에 주둔하였으나 신라군이 공격하여 몰아내고 전마(戰馬) 30,380필을 획득한 전투이다.

매소성은 오늘날 경기도 연천 대전리산성으로 비정34)되고 있는데

 

   30) 삼국사기 권7, 신라본기 제7 문무왕 11년(671) 9월조.

   31) 육군본부, 한국군사사2, 고대Ⅱ (충남 계룡: 육군군사연구소, 2012), p. 118.

   32) 삼국사기 권7, 신라본기 제7 문무왕 12년(672) 8월조.

   33) 이기동, “역사편,” 한국학기초자료선집-고대편 (경기 성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7), p. 89. 육군본부, 한 국군사사2, 고대Ⅱ, p. 119에서 재인용.

   34) 민덕식, “羅·唐戰爭에 관한 考察, 買肖城(매소성) 전투를 중심으로,” 사학연구, 제40호, 한국사학회, 1989,  pp. 178-191.   

 

연천은 3번 국도상에 위치한다.

1번 국도 외에 또 다른 종적 도로인 3번 국도의 중요성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처럼 고대 한민족의 대내외 전쟁에서 1번 국도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접근로이자 기동로였다는 사실을 현존하는 기록과 지도 및 지형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Ⅳ. 고려·조선시대 주요 전쟁의 기동로

 

1. 고려시대

 

1.1. 여요(麗遼) 전쟁(993~1019년)

 

916년 야율아보기(태조)는 거란족을 통일한 후 세력을 확장하여 926년에는 발해를 멸망 시켰고, 그의 아들 양율덕광(태종)은 936년 연운 16주(북경∼하북성 북쪽 지역 일대)를 획 득하였으며, 947년에는 국호를 ‘요’로 개칭하였다35).

하지만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 입장에 서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은 단지 고토 회복의 대상일 뿐이었다. 고려 태조 25년(942), 거 란이 사신 30명과 낙타 50필을 보내오자 사신들은 섬에 유배 보내고 낙타는 만부교 아래 에서 굶겨 죽인 만부교 사건36)은 거란에 대한 고려의 적대감을 잘 나타내는 사례 중 하나 이다.

이후 고려와 거란의 국교는 단절되었고, 거란은 40년이 지난 993년 고려 정벌을 목표로 압록강을 도하하였다.

이후는 잘 알다시피 소손녕의 80만 대군에 맞선 서희의 외교담판으 로 강동 6주를 획득한 것이다.

고려와 거란의 제2차 전쟁(1010년)은 태후(太后)가 죽은 이후 명실상부한 황제가 된 거 란 성종의 친정(親征)이었다.

자신의 위상을 대내외에 과시하고자 한 성종37)에게 고려에서 발생한 강조의 변(1009년)38)은 고려 원정의 훌륭한 명분이 되었다. 거란의 본군은 1010년 11월 압록강을 도하하여 흥화진-통주(선천)39)-곽주(곽산)-청천강(안주)-숙주(숙천)-서경(평양)40)을 거쳐 이듬해 1월 1일에는 개경(개성)41)까지 이르 렀다.

 

      35)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고려시대 군사전략 (서울: 동 연구소, 2006), pp. 36-37.

      36) 고려사 권2, 「세가」 권2, 태조 25년(942) 10월조.

     37) 안주섭, 고려거란전쟁 (서울: 경인문화사, 2003), p. 117.

     38) 서북면도순검사 강조가 목종을 폐위하고 현종을 옹립한 정변. 

     39) 고려사 권4, 「세가」 권4, 현종 1년(1010) 11월 16일조, 24일조. 

     40) 고려사 권4, 「세가」 권4, 현종 1년(1010) 12월 6일조, 8일조, 10일조, 17일조

     41) 고려사 권4, 「세가」 권4, 현종 2년(1011) 1월 1일조. 요군의 진격로는 고려사, 고려사절요에 기록된 통 주·곽주·임원역·마탄전투 등을 통해서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림 4] 거란의 제2차 고려 침공 기동로 출처: 김정호, 대동여지전도 사본. 세부내용은 연구자가 추가 작성.

 

반면 요의 별동부대는 의주-삭주-천마를 거쳐 귀주를 공격하였으나, 고려군의 준비된 방어에 귀주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자 본대 철군 시 퇴로 확보를 위해 귀주 일대에서 잔류하 였다42).

[그림 4]는 거란의 2차 고려 침공 시 기동로를 표시한 것이다.

고대 전쟁을 분석했을 때 와 동일하게 1번 국도를 활용하여 개경까지 공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별동부대는 삭주에서 귀주로 연결되는 61번 국도를 이용하였는데 이는 뒤에서 분석하는 전쟁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도로이다. 이후 제3차~제5차 전쟁은 강동 6주의 반환 요구가 주요 배경이었고, 거란의 기동로는 압록강~청천강 사이의 1번 국도였다.

강감찬 장군이 활약한 1018년 제6차 전쟁 역시 흥화 진부터 시작되었고, 강감찬에게 크게 패한 소손녕은 바로 개경으로 진격하였으나 자산(평 성)의 내구산에서 대장군 강민첨에게 또 패하였다. 또한 강동의 마탄에서는 시랑(侍郞) 조 원에게 만여 명이 사살되었다.43)

퇴각하는 길에는 귀주(現 평북 구성)에서 강감찬 장군에 의해 거의 궤멸44)당했는데 결국 거란군이 흥화진에서 개경을 왕복했던 경로는 구성-태천-영변-개주(개천)-순천-자산- 강동-수안-평산을 경유했을 것으로 추정45)된다.

 

      42)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여요전쟁사 (서울: 동 위원회, 1990), pp. 116-120. 임요한, 전쟁과 역사2 (서울: 혜안, 2004), pp. 119-120.

      43) 고려사 권4, 「세가」 권4, 현종(顯宗) 9년(1018) 12월 10일조. 고려사 권94, 「열전」 권7 제신 강감찬.

      44) 고려사 권4, 「세가」 권4, 현종(顯宗) 10년(1019) 2월 1일조. 고려사 권94, 「열전」 권7 제신 강감찬.

     45) 안주섭, 고려거란전쟁, pp. 162-163. 최 창 국

 

이는 오늘날 1번(개성-평산), 53번 (평산-수안), 65번(자산-개주-영변), 64번(영변-태천-귀주) 국도로 거의 대부분 종으 로 발달한 도로이다.

 

1.2. 여몽(麗蒙) 전쟁(1231~1259년)

 

여진족의 대금(大金)은 1125년 거란, 1127년 송을 멸망시켰으나 1234년 몽골 칭기스칸 에 의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때 고려는 무신정권기로 몽골과는 1218년 거란족 토벌을 위해 최초로 연합전선을 형성한 후 형제의 맹약을 맺고 국교를 수립하였다.

하지만 1225년 1월 고려에 파견된 몽골 사신 저고여가 귀국하던 중 압록강 부근에서 도적에게 피살되자 두 나라의 국교는 단절되고 말았다.46)

 

      46) 고려사 권22, 「세가」 권22, 고종(高宗) 12년(1255) 1월 22일조.

 

칭기스칸 사후 등극한 태종 오고타이는 중국 중원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저고여  피살사건을 명분으로 1231년 8월 고려를 침공하였다.

살리타이를 수장으로 한 몽골군은 함신진(의주)을 포위하고 철주(철산)를 도륙하였다.47)

 

      47) 고려사 권23, 「세가」 권23, 고종(高宗) 18년(1231) 8월 29일조. 최창국  한반도 전쟁에서 도로망의 군사적 함의 251 

 

[그림 5] 몽골군 1차 침입 시 이동 계획 출처: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대몽항쟁사 (서울: 동 위원회, 1988), p.46. 도로명은 연구자가 추가 작성.

 

이후 몽골군은 3개의 제대로 분군(分軍)하여 남로군과 본군은 철주-선주(통주)-곽산 박주를 거쳐 안북성(안주)까지 진출하였고, 북로군은 함신진에서 삭주를 거쳐 귀주성을 공 격하였다48).

북로군은 4개월간 3차에 걸친 귀주성 공방전에서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여49) 안북성에서 본대와 합류하고자 했던 최초 계획을 달성하지 못했다.

청천강을 도하한 남로 군과 본군은 순주(순천)-자주(자산, 평성)를 거쳐 서경(평양)을 향해 남진하였으나 서경 공 격 역시 성공하지 못했다.

이에 몽골군은 서경을 뒤로하고 황주와 봉주(봉산)를 거쳐50) 평 주(평산)를 지나 예성강을 도하, 개경까지 진격하였다.51)

개략적으로는 [그림 4] 거란의 기 동로와 유사하나 청천강 도하 이후 서경(평양)까지의 진격로는 [그림 5]와 같이 1번 국도가 아닌 65번 국도를 이용했다는 차이점이 있다.

몽골의 1차 침입 이후 서북면에 다루가치를 설치하고 병력이 철수하자, 고려는 1232년 (고종 19) 7월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다52). 하지만 몽골은 이를 적대행위로 간주하고 제2차 침공을 감행하였다.

2차 침공군의 지휘관 역시 살리타이였다.

몽골의 별동대는 대구까지 공격하여 팔공산에 있는 부인사의 초조대장경을 불태웠다53).

반면 살리타이는 본대와 함께 용인 처인성을 공격하다 전사54)하여 몽골군은 고려와 강화를 맺고 급히 철수하였다.

몽골의 2차 침공 시 한양까지는 1번 국도를 이용하였고, 용인에서 일부 부대가 대구 부 인사까지 기동한 것으로 보아 별동대는 용인-안성(죽주)-진천-청주-추풍령-김천 왜관을 거쳐 대구에 이르렀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림 6]과 같이 오늘날 3번-45번-57번- 17번-4번 국도에 해당한다.

1234년 금나라를 멸망시킨 몽골은 유럽과 남송 정벌을 계획하는데 이에 앞서 고려와 남 송의 연대를 끊기 위해 1235년부터 1258년까지 지속적으로 고려를 다시 침공하였다.

장기 간의 전쟁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목표는 고려의 전 국토를 대상으로 하였고55) 그만큼 다양 한 기동로를 사용하였다.

 

    48)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대몽항쟁사 (서울: 동 위원회, 1988), pp. 41-67.

   49) 고려사 권23, 「세가」 권23, 고종(高宗) 18년(1231) 9월 3일조 등.

   50) 고려사 권23, 「세가」 권23, 고종(高宗) 18년(1231) 9월 10일조, 14일조.

   51) 고려사 권23, 「세가」 권23, 고종(高宗) 18년(1231) 11월 28일조, 29일조

   52) 고려사 권23, 「세가」 권23, 고종(高宗) 19년(1232) 7월 7일조.

   53) 고려사 권24, 「세가」 권24, 고종(高宗) 38년(1251) 9월 25일조.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대몽항쟁사, pp. 100-104.       54) 고려사 권23, 「세가」 권23, 고종(高宗) 19년(1232) 12월 미상. 고려사절요 권16, 고종(高宗) 19년(1232) 9월 미상. 

   55)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고려시대 군사전략, pp. 243-245. 252 제17호, 2025. 6.

 

[그림 6] 몽골군의 2차 침입 기동로(한양~대구) 출처: 대한민국전도(1:1,000,000) (대한민국 육군지형정보단, 2006). 세부내용은 연구자가 추가 작성.

 

앞선 1·2차 침공과 같은 방법으로 고려사 및 고려사절요, 대몽항쟁사 등을 분석 하면 1235~1239년의 상황은 [그림 7]로 요약할 수 있다.

눈에 띄는 도로는 종적으로 발달 한 1번, 3번, 5번 국도이며, 횡적 도로인 4번, 8번 국도도 등장한다.

8번 국도는 6.25전쟁 에서도 주요한 기동로 중 하나였다.

즉 전장이 확대될수록 사용하는 기동로도 그에 비례하 여 증가함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고려시대에 발생한 전쟁 역시 대부분 1번 국도가 주 요 축선이었으며, 병행하여 3·5·7번56) 같은 종적 도로의 중요성도 부각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56) 7번 국도는 고려 예종3년(1108) 여진정벌 시 주(主) 기동로였기에 언급하였다. 

 

[그림 7] 몽골의 1·2차 침입 기동로(1235~1239) 출처: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고려시대 군사전략, p. 248. 도로명은 연구자가 추가 작성.

 

2. 조선시대

 

1.1. 임진왜란(1592~1598년)

 

조선을 침공한 일본군은 크게 4개의 군으로 구분된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제1군,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 제2군,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제3군 그리고 한성에서 강원도 지역으로 진격한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의 제4군이다.

1592년 4월 13일 어떠한 저항도 받지 않고 부산에 상륙57)한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북진하였다.

 

    57) 선조실록 권26, 선조 25년(1592) 4월 13일 임인 11번째 기사. 254 제17호, 2025. 6.

 

[그림 8] 일본군 진격로 및 선조의 피신로 출처: 온창일, 한민족전쟁사 (서울: 집문당, 2001), p. 290. 도로명은 연구자가 추가 작성.

 

고니시 1군은 부산진-밀양(4. 19.)-청도-대구(4. 21.)-낙동강 도하 후 선산(4. 24.)- 문경-조령-단월, 충주 탄금대(4. 28.)-여주-양평-서울 동대문(5. 3.)-대동강 차안 지역인 동대원(6. 8.)-평양(6. 15.)으로 진격하였고, 가토 2군은 부산진-언양(4. 19.)-경 주(4. 21.)-영천, 군위(4. 22.)-점촌-문경-충주(4. 29.), 고니시 1군과 합류-죽산-용 인-한강 남쪽(5. 2.)-서울 남대문(5. 3.)-파주(5. 10.)-임진강 방어선 격파(5. 17.)-개경-(함경도 방향)-금천-곡산-노리령(황해도와 함경도 경계, 6월 초)-함경도 법동-안 변(6. 17.), 모리 4군과 합류-함흥-북청-단청-성진(7. 18.)-길주까지 진격하였다.

또 한 구로다 3군은 죽도(4. 19.)-김해(4. 20.)-창원-창녕-현풍-신창(4. 23.)-김천(4. 27.)- 추풍령(4. 28.)-청주-죽산-서울-대동강 차안 동대원(6. 8.)으로 진격하였고, 모 리 4군은 6월 1일 한성을 출발하여 김화-회양(6. 5.)-철령-안변(6. 17.), 가토 2군과 합 류-통천-강릉까지 이르렀다58).

[그림 8]에서처럼 일본군의 진격로가 1·3·5·7번 등 종적 도로 위주임을 한눈에 알 수 있 다.

반면 일본군의 진격에 따라 선조는 계속 북으로 피신하여 의주까지 이르렀는데 그 이동 로 역시 서울-임진강-개성- 봉산-황주-평양-순안-숙천-안주-영변-박천-정주- 선천-용천-의주59)로 이어지는 1번 국도였다.

   

     58) 온창일, 한민족전쟁사 (서울: 집문당, 2001), pp. 270-289.

     59) 선조실록 권26, 선조 25년(1592) 4월 30일조~6월 22일조.

 

1.2. 정묘호란(1627년)

 

1623년 3월 인조반정을 성공시킨 서인들은 이전 광해군의 중립 외교노선을 배격하고 친 명배금(親明排金)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은 당시 평안북도 남쪽의 가도(椵島) 에 주둔하고 있던 명나라 장수 모문룡을 지원하였는데 모문룡은 후금 내부를 교란시키고 함경북도 지역까지 진출하였다.60)

하지만 조선의 친명정책과 모문룡 지원은 후금 내부의 정치적 갈등과 대기근으로 인한 사회적 상황의 악화와 맞물려 결국 후금 태종 홍타이지[皇太極]로 하여금 조선을 침략하는 정묘호란을 유발하였다. 1627년(인조5) 1월 13일 후금은 압록강을 도하하여 의주를 함 락61)하고 선천, 정주를 지나 안주마저 점령62)한다.

그리고 파죽지세로 평양63), 황주64)를 거쳐 평산까지 이르렀다.65)

 

     60) 비변사등록 인조 2년 4월 27일 3개의 기사.

     61) 인조실록 권15, 인조 5년(1627) 1월 17일 을유조 첫 번째 기사.

     62) 인조실록 권15, 인조 5년(1627) 1월 18일 병술조 첫 번째 기사.

     63) 인조실록 권15, 인조 5년(1627) 1월 24일 임진조 아홉 번째 기사.

     64) 인조실록 권15, 인조 5년(1627) 1월 25일 계사조 첫 번째 기사. 

     65) 인조실록 권15, 인조 5년(1627) 1월 26일 갑오조 두 번째 기사. 

 

그런데 모문룡 제거에 실패하고 원숭환 등 명나라 군에 의해 지속적으로 후방 위협을 받 던 후금의 입장에서 조선과의 장기전은 결코 유리할 수 없었다.

후금의 궁극적 목적은 명과의 결전이었기 때문이다66).

이와 같은 이유로 결국 조선과 후금은 형제의 맹약을 맺는 정 묘화의를 체결하였다.67)

 

     66) 육군본부, 한국군사사7, 조선후기Ⅰ (충남 계룡: 육군군사연구소, 2012), p. 271.

     67) 인조실록, 권15, 인조 5년(1627) 3월 3일 경오조 두 번째 기사.

 

[그림 9] 정묘호란 시 후금군의 진격로 출처: 육군본부, 한국군사사7, 조선후기Ⅰ (충남 계룡: 육군군사연구소, 2012), p. 272.

 

[그림 9]는 후금의 조선 침략 기동로를 표시한 것이다. 침략 초기 용골·능한산성 전투가 있긴 했으나 의주에서 평산까지 1번 국도를 이용하였다. 조선도 청천강의 안주 방어선과 예성강의 황주 방어선 등을 구축하였지만, 후금의 기세를 이겨내지 못했다.

 

1.3. 병자호란(1636~1637년)

 

후금은 1636년 4월 국호를 대청(大淸)으로 바꾸고 12월 다시 조선을 침공하였다.

조선이 모문룡에 대한 지원을 멈추지 않았으며, 후금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조선으로 넘어간 한 인(漢人) 망명자 송환 요구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후금과의 무역에서 만주 상인 의 특권으로 경제에 타격을 입어 불만이 쌓인68) 조선이 후금의 군신관계 요구에 강경한 입 장69)을 취한 것도 이유였다.

 

     68)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조선시대 군사전략 (서울: 동 연구소, 2006), pp. 223-225. 

     69) 인조실록, 권32, 인조 14년(1636) 2월 21일 병조신 첫 번째 기사.

 

[그림 10] 병자호란 시 청군의 진격로 출처: 육군본부, 한국군사사7, 조선후기Ⅰ, 2012, p. 329. 도로명은 연구자가 추가 작성.

 

1636년 12월 8일 청군의 선봉대는 압록강을 도하하여 의주를 거쳐 안주까지 진격하였 고, 이어서 좌익군(1번 국도 축선)이 의주에 도착하여 저녁에는 의주 소재 백마산성을 공격 하였다.

청 태종 본대도 12월 10일 압록강을 도하하여 의주-용천-곽산-정주를 거쳐 12 월 14일에는 개성에 도착하였다.

또한 청의 우익군은 창성 일대에서 압록강을 도하하여 영 변까지 진출하였다.

그리고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는 소식을 접한 후에는 선발대가 12월 15일, 좌익 군이 12월 16일, 그리고 청 태종 본대도 12월 26일 한성을 지나 27일 남한산성에 도착하 여 성을 포위하였다70).

 

     70) 육군본부, 한국군사사7, 조선후기Ⅰ, pp. 320-322. 

 

[그림 10]은 청군의 진격로를 정리한 것인데 1번 국도 위주임이 확 연하다.

 

Ⅴ. 6.25전쟁의 주요 기동로

 

스탈린이 계획하고 모택동의 지원을 받아 김일성이 기습적으로 남침한 6.25전쟁은 크게 북한군 남침기, 유엔군 반격 및 북진기, 중공군 침공 및 유엔군 재반격기 그리고 교착전기 로 구분한다.71)

 

    71) 6.25전쟁 부분은 육군 공간사(公刊史)인 육군본부, 교육참고 8-3-21 6.25전쟁 다하지 못한 이야기들 (2011) 과 육군대학, 교육참고 7-0-14 6·25 전쟁사 부록 (2007)을 참고하여 기술하였다.

 

1. 제1단계: 북한군 남침기(1950.6.25.~9.15.)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전격적으로 기습 남침했을 때 한국군은 주요 지휘관이 교체 되고 부대 편성 및 재배치가 정상적으로 완료되지 않았으며, 6사단을 제외한 전방지역 부 대의 병력들은 6월 25일 일요일 당일 상당수가 출타한 상황이라 전투준비태세가 갖추어지 지 않은 상황이었다.

전쟁 초기 동부전선의 춘천에서 국군 제6사단이 선전한 반면, 서부전선의 의정부 축선 은 조기에 붕괴되어 서울은 3일 만에 함락되었다.

하지만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중심으로 한 한강방어선과 충주-제천을 잇는 중동부전선의 구축은 효과가 있었는데, 특히 임시 혼 성부대로 편성된 한강방어선은 북한군 공격을 7일간 저지함으로써 미군의 한반도 증원 시 간을 획득함과 동시에 아군으로 하여금 북한군의 기습에 의한 충격에서 회복할 수 있게 해 주었다.

7월 7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 결의에 따라 유엔군이 창설되고, 일본 주둔 미 제24사단이 투입되었으나 한국군과 유엔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북한군 역시 누적된 병력손 실과 병참선의 신장으로 전투력이 크게 저하되었으며, 특히 낙동강 전선에서 감행한 8월과 9월 공세는 한국군과 유엔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작전한계점에 도달하였다.

 

[그림 11] 6.25전쟁 제1단계 북한군 남침기 출처: 육군대학, 교육참고 7-0-14 6·25 전쟁사 부록, 2007, p. 1. 도로명은 연구자가 추가 작성.

 

6·25전쟁 제1단계에서 북한군의 진격로를 종합한 것이 [그림 11]이다.

1번 국도를 중심 으로 3·5·7번 국도가 주요 축선이며, 대전에서 대구로 이어지는 4번 국도 방향으로의 진격 역시 눈에 띈다. 고대~조선시대의 전쟁이 주로 1번 국도 위주였다면 현대로 접어들면서 지상 최 창 국 전의 영역이 확대되자 3·5·7번 종적 도로들의 중요성이 더욱 높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60 제17호, 2025. 6. 2.

 

제2단계: 유엔군 반격 및 북진기(1950.9.15.~11.25.)

 

[그림 12] 6.25전쟁 제2단계 유엔군 반격 및 북진기 출처: 육군대학, 교육참고 7-0-14 6·25 전쟁사 부록, 2007, p. 3. 도로명은 연구자가 추가 작성.

 

북한군이 9월 공세 이후 작전한계점에 도달한 반면, 한국군과 유엔군은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을 통해 전쟁의 주도권을 확보하여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었다. 9월 16일에는 미 제8군도 낙동강방어선에서 반격을 개시, 9월 22일~23일에는 북한군 진지를 돌파하여 북 최창국  한반도 전쟁에서 도로망의 군사적 함의 261 한군은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서부지역은 유엔군이 경부 축선(4번, 1번 국도)과 호남지역의 우회로를 따라, 중동 부지역은 한국군이 3·5번 및 7번 국도 축선을 따라 북진하였는데 이는 북한군의 남침 경로 와 유사한 반대 방향이었다. 10월 1일 38도선 돌파 이후 북진작전을 시작한 한국군은 제2군단이 3번 국도와 5번 국 도 축선으로 공격하여 춘천-양덕-개천을 거쳐 초산까지 진격하였으며, 동부의 제1군단 은 7번 국도를 따라 원산-함흥-청진일대까지 진격하였고, 미 1군단은 1번 국도를 따라 평양을 점령하고 청천강 이북까지 북진하였다. 물론 평양에 가장 먼저 입성한 부대는 백선 엽 장군의 한국군 제1사단이며 여기에는 미 육군의 제6 전차대대도 자진 배속72)되어 있었 다.

 

    72) 백선엽, 군과 나 (서울: 대륙연구소출판부, 1990), pp. 98-105.

 

그러나 10월 25일 이후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해 연합군은 전면 철수하게 되었다.

[그림 12]와 같이 제2단계 유엔군의 북진작전 시에도 주요 기동로는 1·3·5·7번 국도 위 주의 종적 도로였고, 횡적 도로 중 남한의 4번과 북한 8번 국도(원산-평양 간 기동로)가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제3단계:중공군침공및유엔군재반격기(1950.11.25.~1951.6.23.)

 

중공군의 개입에 한국군과 유엔군은 방어태세를 갖추지 못하고 11월 30일경부터 철수를 시작하여 1951년 1월 4일에는 서울을 빼앗기고 평택-삼척을 연하는 방어선을 구축하였 다.

중공군의 공세가 한계에 다다르자 연합군은 1월 25일 반격을 개시하여 한강 차안부터 강원도 횡선선까지 확보하였다. 이후 중공군의 반격(4차 공세, 1951. 2. 11.~2. 18.)이 있 었으나 이를 격파하여 3월 15일 서울을 회복하고 캔자스선(Kansas, 임진강-포천 영평천- 화천댐(파로호)-남애리)과 와이오밍선(Wyoming, 철원-김화)까지 진격하였다.

계속되는 공방전 속에서 연합군의 3차 반격(1951. 5. 23.~6. 15.)을 통해 아군은 문산- 연천-철원-김화-간성을 연하는 주요 지역을 확보하였으나 1951. 7. 10. 소련의 제의 로 개성에서 첫 휴전회담이 개최되었고 이후는 모두가 알고 있는 고지전의 양상이었다.

[그림 13]은 6.25전쟁의 제3단계 전황을 정리한 요도이다. 중공군의 침공과 유엔군의 재 반격 기간 중에도 피아가 주로 사용한 기동로는 모두 종적 도로 위주임을 알 수 있다.

이렇 듯 6.25전쟁 당시 모든 전투에서 1번 국도를 포함한 종적 도로는 매우 중요한 기동로였다 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림 13] 6.25전쟁 제3단계 중공군 침공 및 유엔군 재반격기 출처: 육군대학, 교육참고 7-0-14 6·25 전쟁사 부록, 2007, p. 4. 도로명은 연구자가 추가 작성.

 

Ⅵ. 결 론

 

이상과 같이 필자는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에서 발생한 주요 전쟁에서 교전 당사국들이 사용했던 도로를 종적 도로 위주로 분석하였으며, 이를 다시 종합적으로 정리 하면 <표 1>과 같다.

 

 <표 1> 고대~현대 한반도 전쟁에서 사용한 주요 도로 현황 구 분 주요 사용 국도 종적 도로 고대 1번 횡적 도로 고려 시대 對遼 對蒙 1·53·61·65번 1·3·17·45·57·61·65번 64번 4·8·64번 對日 조선 시대 對後金 對淸 현대 1·3·5·7·9·17·31번 1번 1·61·63번 1·3·5·7·53·61·65번 4·8번 64번 4·8번

 

종적 도로 중 1번 국도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공통적으로 사용된 가장 중요한 도로였으 며, 전쟁의 규모가 커지고 전장이 확대될수록 3·5·7번 국도의 사용빈도도 함께 증가하였음 을 알 수 있었다. 횡적 도로인 4·8·64번 국도 역시 고려시대부터 현대까지 의미 있는 도로 였음을 말해 주고 있다.

그리고 이 도로들은 한반도를 종과 횡으로 관통한다는 공통점을 가 지고 있다.

현재도 한반도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도로는 1·3·5·7번 국도뿐이며, 횡으로 관 통하는 도로는 북한에 3개(8·10·64번), 남한에 9개(2·4·6·24·34· 36·38·42·46번)가 있 다.

더욱이 남한의 도로는 종횡으로 그물망처럼 계속 증가하고 있다.

한반도 전쟁에서 위 도로들의 사용빈도가 높았던 것은 한반도의 도시 발달과 연관이 깊 다.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동고서저형인 한반도는 대부분의 물길이 서해를 향하고 있어 서 쪽지역에 평야가 집중되어 있다.

한반도 서쪽은 압록강부터 청천강, 예성강, 임진강, 한강, 금강 등이 발달하였고 1번 국도는 이 강들을 모두 관통한다.

그러면 다시 강도시도로의 관계로 돌아가 보자.

횡적 하천 형성으로 평야가 발달 한 서부 지역은 예나 지금이나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상을 가지고 있는 도시가 많을 뿐만 아니라 이들을 연결하는 도로 역시 그와 비례하여 매우 중요하다.

특히 남한의 경우 대도시 의 수용능력 포화로 위성도시나 신도시가 신설되더라도 이들의 거점(據點)은 기존의 대도시 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한반도에서 1·3·5·7번 국도 및 그와 연결 되는 도시들은 계속 발전하고 그 중요성 역시 더욱 배가될 것이다.

대표적으로 6.25전쟁 이후 남한에서 4번 국도 이외에 8개의 횡적 관통도로가 모두 1·3·5·7번 종적 국도와 연결 되고 있는 것은 이를 잘 증명한다.

그렇다면 전사를 통해 확인한 종적 도로의 중요성이 군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 264 제17호, 2025. 6. 는 것일까?

한반도의 DMZ는 70년 이상 사용하지 않아 전쟁 당시 사용했던 도로들은 점토 질의 습지가 되어 차량이동이 쉽지 않으며 미확인 지뢰 등 인공장애물도 유사시 극복하기 쉽지 않은 장애물이다.

하지만 이런 DMZ에도 경의선과 동해선 도로73)가 지나는 통로가 있다.

모두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의 결과물들로 경의선은 1번 국도, 동해선은 7번 국 도에 해당한다.

그래서는 안 되겠지만, 만약 남북 간 군사적 충돌 시 DMZ를 극복해야 한 다면 결국 종적 도로는 그 중요성이 다시 부각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한국군과 한미연합군은 작전수행개념 발전 시 1·3·5·7번 국도 등 종적 도로들의 전략적 중요성을 고려해야 한다.

물론 지금도 이를 바탕으로 대비하고 있지만 DMZ의 변화 된 작전환경을 좀 더 심도 있게 재평가하여 반영할 필요가 있다.

또한 공격작전 시에는 북한 지역의 깊은 종심까지 공격 기세를 유지하기 위해 종으로 발달한 도로를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2021년 기준 북한의 도로는 총 26,203km로 남한의 113,405km에 비해 23.1%에 불과하고, 포장률은 10% 미만에 간선도로 대부분이 편도 1차선밖에 되지 않으며74), 횡으로 발달한 도로가 적어 피아 공히 북한지역에서 작전 시 전투력의 횡적 전 환이 제한된다. 이는 산악 위주 중동부지역의 전투력을 절약하여 종심 깊이 발달한 서부축 선의 도로상으로 강력한 돌파부대를 편성하고, 7번 국도 주변의 항포구를 창의적으로 활용 하는 작전수행방안을 검토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특히 한국군의 인공위성이 촬영한 EO/IR 및 SAR 영상정보를 실시간 융합하여 실사에 가깝게 구체화한 data를 활용한다면 훈련 및 작전 성과를 더욱 극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 혹자는 지상 도로 위주의 선형작전 분석이 오늘날과 같이 공중·해양뿐 아니라 우주·사이 버 공간까지 전쟁영역이 확대된 다영역 작전환경에서 적합하지 않다는 의견을 제시할 수도 있다.

물론 미래는 지금보다 더 발전된 첨단과학기술을 바탕으로 전장영역이 다차원화된 가운데 하이브리드전, 정밀타격전, 네트워크 중심전, 우주전, 사이버 전자전 등 전쟁양상이 매우 다양해 질 것이다75).

 

    73)2000년 6월 남북공동선언 이후 추진되어 동해선 도로는 2003년 2월 임시 개통된 후 2004년 10월 완공되었으 며, 경의선 도로는 2007년 5월 17일 시험운행 하였다.그러나 남북관계 경색 국면에서 북한은 2024. 10. 15. 경의선과 동해선 일부 구간을 폭파하였다.

    74) https://kosis.kr/bukhan. 2022년 통계청 북한통계포털(p. 139)에서는 북한 도로 총길이를 26,203km로 명시 했으나, 남정희는 “북한도로현황,” 도로, 19-1호, 2017, p. 11에서 통계청 자료 중 1988년 조선지리지에 서 언급한 6급 도로 31,744.5km가 누락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75) 대한민국육군, 첨단과학기술 정책지침 (육군본부 정책실, 2023), pp. 제2장-20-16~제2장-20-20. 

 

이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미래전은 기술 고도화 및 다영역작전 양상으로 전개될 것이라 예상하지만, 그 본질을 살펴보면 한반도에서 전개될 전쟁양상은 여전히 1·3·5·7번의 종적 도로 중심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전통적인 전쟁방식과 사이버, 정보전 등의 비정규전 방식이 복합적으로 적용되는 하이브 리드전 역시,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보듯 전쟁의 장기화로 인해 지상군의 중요 성이 다시 증대되고 있다.

또한 우주전, 네트워크 중심전 등 첨단과학기술이 적용되는 전쟁 에서는 각각의 핵심노드가 지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들의 위치는 대부분 대도시 및 주요 종적 도로들과 연계되어 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남북한 대부분의 주요 도시와 전략시 설들이 1·3·5·7번의 종적 도로를 중심으로 발달되어 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는 군사전략적 목표들과 군사적 중심이 종적 도로상에 있다는 뜻으로 유사시 적 드론 을 포함한 공중위협이나 사이버공격 등도 지상공격과 더불어 결국은 종적 도로 축선의 지 상과 공중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반도 전쟁에서 종적 도로의 중요성은 여전히 중요할 수밖에 없다. 육군이 미래를 대비하여 추진하는 Army TIGER의 3대 전투체계인 Army TIGER기반 전투체계와 드론봇 전투체계, 워리워 플랫폼은 지상, 공중, 해양, 우주, 사이버 영역까지 전 쟁영역이 확대된다.

그러나 이 모든 영역에서 운용되는 전력들은 한반도에서 결국 1·3·5·7 번 국도를 중심으로 투사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우주자산과 능력들은 지상작전에서 6대 전투수행기능의 효과를 증진시켜 전쟁의 승리에 기여하는 것76)이지 우주 공간에서의 직접 적인 교전으로 전개되는 것은 아니다.

 

    76) 최창국, “육군우주작전수행방안,” 한국군사학논집, 80집2권, 육군사관학교, 2024, p. 325. 266 제17호, 2025. 6.

 

사이버 공간 역시 마찬가지이다.

역사의 교훈을 ‘강조’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그것을 ‘현재에 적용하는 것’은 단순한 문 제가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과거의 전훈이라 하더라도 현재에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면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래서 전쟁의 교훈은 유사시 국가를 지켜내는 최고의 무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만의 하나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한다면 1·3·5·7번 국도는 그래서 당연히 강조될 수밖에 없다.

동맹국과의 연합이 매우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흔들림 없는 굳건한 준비와 능력이 먼저라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우리 자신의 준비와 능력 강화에 본 연구가 작은 기여를 할 수 있기 바란다.  

 

*그림/표 : 생략 (첨부논문파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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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한 동고서저(東高西低) 지형은 한반도의 종적 도로망 형성을 자연스 럽게 이끌었고, 이에 따라 주요 도시들도 해당 도로를 따라 발달하였다. 이러한 배경은 한반도에서 발생한 주요 전쟁들이 종적 도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에 본 연구는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주요 전쟁사례를 바탕으로, 한민족과 이민족 간 전쟁에서 사용된 주요 기동로를 분석함으로써 1번 국도를 포함한 종적 도로들이 핵심 기동 축선으로 기능해 왔음을 규명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러한 분석은 향후 1·3·5·7번 등 주요 종적 도로가 한반도 유사시 군사적으로 전략적 중요성을 지닐 것이라는 점을 시사하며, 전쟁 영역이 다영역으로 확장되더라도 도로와 도시 간의 구조적 연계성으로 인해 종적 도로의 중요성은 더욱 부각될 것으로 전망된다.

 

주제어: 1번 국도, 종적 도로, 고려시대의 주요 대외전쟁, 조선시대의 주요 대외전쟁, 6.25전쟁

 

 

Abstract

TheMilitary ImplicationsofRoadNetwork inthe KoreanWar- Focusedontheanalysisofmain longitudinal routes used inpreviouswars

Choi, Chang-kuk (ROK Army Training & Doctrine Command)

Due to the geographical characteristics (having highlands in the east and lowlands the west) centered on the Baekdudaegan mountain range, the Korean Peninsula has naturally developed longitudinal road networks. Major cities have been established along these routes, reflecting their geographical and strategic importance. This context suggests that major wars on the Korean Peninsula may have been fought along longitudinal axes. Therefore,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analyze the main routes used in the wars between Korean forces and foreign adversaries, from ancient to modern times, in order to demonstrate that longitudinal roads, including Route 1, have consistently functioned as major maneuver corridors. This analysis shows that in the event of future war on the Korean Peninsula, major longitudinal roads such as Routes 1, 3, 5, and 7 will have strategic importance. Furthermore, even if war zone expands into multi-domain operations, longitudinal roads will remains strategically important due to the enduring structural linkage between road networks and cities.

Key Words: National Route 1, Longitudinal road, Major Foreign Wars of the Goryeo Dynasty, Major Foreign Wars of the Joseon Dynasty, The Korean War

 

 

 논 문 접 수 일: 2025.04.30.   논 문수정일: 2025.06.02.  논문게재확정일: 2025.06.27.

한국군사 제17호, 2025. 6.

 

https://doi.org/10.33528/kjma.2025.6.17.2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