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43회
황희·율곡도 거친 ‘왕 비서실’…
6명 승지가 정무 분담했던 ‘출세 전당’
우두머리 도승지 등 정보파악 위해 다른 직책 겸직…
‘과다 업무’ 탓 오래 못했고
그만두면 ‘종2품 이상 벼슬’ 보장받아
주서 2명은 ‘승정원일기’ 쓰고 암행어사 임무, 서리 28명은 비밀서찰·민심 파악 심부름…
임금의 눈·귀 역할 해
내명부와 내시부가 왕의 생활을 돕는 기관이라면
승정원(承政院)은 왕의 정치를 돕는 비서기관으로 왕이 가장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이 배치된 곳이었다.
승정원은 조선 초에는 군사 기밀과 왕명을 출납하던 중추원에 속해 있었다.
이는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이은 것이다.
고려에서는 중추원에 좌승선과 우승선을 두고, 그 아래에 부관들을 거느리도록 했다.
또 한림원에는 학사와 승지가 있었고, 승지들의 근무처인 승지방이 있었다.
그리고 조선이 개국된 뒤 중추원에 도승지와 좌우승지, 부승지를 두었는데, 2대 정종 때인 1400년에 승정원을 독립시켜 조선의 최고 비서기관으로 재탄생시켰다.
승정원을 독립시킨 것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함이었는데,
이를 주도한 인물은 당시 세자로 있던 태종 이방원이었다.
태종은 왕위에 오른 뒤에 왕권을 한층 강화할 목적으로 의흥삼군부와 승정원을 합쳐 승추부를 만든다.
군무와 정무를 일원화시킨 것이다.
하지만 이후 왕권이 안정되자,
1405년에 승추부는 병조와 결합시키고 승정원을 다시 독립시켰다.
이후 승정원은 조선 말까지 왕의 정무 비서기관으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승정원에는
도승지, 좌승지, 우승지, 좌부승지, 우부승지, 동부승지 등 6명의 승지가 있으며
이들은 모두 정3품 당상관(주석①)들이었다.
승정원의 여섯 승지는 각자 육조의 업무를 분할하여 맡았다. 도승지는 이조, 좌승지는 호방, 우승지는 예조, 좌부승지는 병조, 우부승지는 형조, 동부승지는 공조를 맡았으나
때론 능력에 따라 업무를 변경하기도 하였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44회
승지의 품계는 정3품이었지만 종2품을 지낸 관리가 승지가 되는 경우도 많았다.
지금도 장관을 지낸 사람이 대통령 수석비서관에 임명되는 것과 비슷하다.
왕명을 받고 내보내는 과정에서 왕은 승지에게 의견을 묻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승지들은 자신의 견해를 말하기도 하고,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임금께 직접 자신의 의견이나 여러 신하의 의견을 아뢰는 조언자의 역할도 하였다.
승지들은 이와 같은 고유 업무 외에도 다른 기관의 직책을 겸하기도 했다. 왕에게 경서를 강의하는 경연참찬관, 역사에 관한 기록을 맡은 춘추관 수찬관을 겸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또한 도승지는 임금의 경연과 서적을 관리하는 홍문관 직제학을 겸하기도 하고 옥새, 병부 등을 맡아보던 상서원정을 겸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승지 중에는 내의원, 상의원, 사옹원의 부제조를 겸하기도 하였으며, 형조를 맡은 승지는 죄수를 관리하는 전옥서제조를 겸하기도 했다.
이처럼 승지가 여러 가지 업무를 겸직한 것은 왕을 제대로 보필하기 위해 다양한 정보가 필요하였을 뿐만 아니라 왕명의 출납을 쉽게 하기 위해서였다.
승지들은 이렇게 겸직으로 얻은 다양한 정보를 통하여 궁궐 내부의 사정을 소상히 파악할 수 있었으며,
좀 더 정확한 정보와 의견을 왕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직책이 많은 만큼 업무량도 많았다.
그 때문에 승지는 오랫동안 지속할 수 없는 자리였다.
또 고생을 많이 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답으로 승지를 그만두면 항상 종2품 벼슬 이상을 보장받았다.
조선 역사에서 국가에 많은 공헌을 했거나 정승을 했던 사람 중에는 승지 출신이 아주 많다.
대표적인 인물을 열거해보면
세종 시대의 명재상이었던 황희와 맹사성이 모두 승지 출신이었고,
또 6진을 개척한 김종서도 승지 출신이었으며,
뛰어난 정치가이자 학자였던 율곡 이이,
조선 중기의 명재상 오리 이원익,
선조 대의 명재상 서애 유성룡 등등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인물이 승정원을 거쳐 유명한 정치가가 되었다.
이 때문에 승정원은 최고의 인재가 모이는 곳이었고, 출세의 전당이기도 했다. 특히 승정원의 우두머리인 도승지는 출세를 보장하는 직책이었다.
조선이 개국된 뒤 가장 먼저 도승지가 된 인물은 안경공이었다.
안경공은 고려 왕조 때에 뛰어난 문인이었던 안축의 손자이며, 조선 개국공신인 안종원의 아들이었다.
그는 도승지에서 물러난 뒤에는 사헌부 수장인 대사헌이 되었으며, 이후 한성부 판사, 집현전 대제학, 흥녕부원군 등의 벼슬을 지냈다.
안경공의 경우만 보더라도 도승지 직책을 거친 후 화려한 관직 생활을 이어가게 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안경공이 도승지 직책을 수행한 기간은 1392년 7월부터 1393년 3월까지 8개월 정도였다.
그를 이어 도승지에 오른 인물은 이직이었는데,
이직은 1393년 4월부터 9월 12일까지였다.
도승지에서 물러난 이직은 사헌부 대사헌, 의정부 지사, 이조판서, 의정부 찬성사 등을 거쳐 세종 때인 1424년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영의정 벼슬에 오르게 된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45회
이직에 이어 도승지가 되었던 한상경도 의정부 참찬과 이조판서를 거쳐 영의정에 오른다. 태종 때에 도승지로 유명했던 박석명은 태종의 어릴 때 친구이기도 했다.
그는 사람 보는 눈이 탁월하여 태종에게 황희를 승지로 천거하기도 했는데, 잘 알려져 있듯이 황희 역시 도승지를 거쳐 세종 대의 대표적인 정승이 되었다.
이렇듯 승정원 승지 자리는 조선의 문관들이 재상의 반열에 오르기 전에 거치는 요직 중의 요직이었다.
승정원에는 승지 외에도 정7품의 주서 2인이 있었고,
서리 28인이 있었으니 규모가 꽤 큰 비서실이었다.
주서의 역할은 승정원의 기록인 ‘승정원일기’를 쓰는 일을 담당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직책이었다. ‘승정원일기’를 바탕으로 실록이 편찬되었기 때문이다.
승정원의 주서는 춘추관 기사관을 겸하였고, 사초 기록이나 실록 편찬에도 참여했기 때문에 집안도 좋고 유능한 인물들이 배치되었다. 승정원 주서는 ‘승정원일기’를 쓰는 임무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왕의 특명을 받고 지방으로 파견되어 특별한 일을 조사하는 임무도 자주 맡았다.
태종은 재위 12년 8월 10일에 승정원 주서 김자와 환관 노희봉을 시켜 풍해도의 농사 상황을 알아보도록 했다.
이때 태종은 이런 말을 한다.
“풍해도 각 고을에서 풍우(風雨)로 곡식이 상한 형편을 실지로 보고하지 않아서 종잡기가 어렵다. 만일 부실(不實)한 자가 있게 되면, 즉시 잡아다 서울로 압송하라. 내 마땅히 그 연고를 묻겠다.”
풍해도는 곧 지금의 황해도인데, 태종은 당시 이곳의 농사 상황 보고에 의문을 품었다. 풍해도의 관찰사 보고가 다른 도에 비해 매우 늦었고, 바람으로 인해 손실된 논밭도 다른 도에 비해 너무 많았던 까닭이다.
그래서 승정원 주서 김자와 승전색 노희봉에게 특명을 내려 그곳의 상황을 살펴 관찰사의 보고와 비교해서 보고하라고 했던 것이다. 일종의 암행어사 임무를 주었던 셈이다.
김자는 풍해도의 상황을 살핀 후 이런 보고를 하였다.
“논은 모두 충실하나, 간혹 10분의 1, 2가 손실되고, 밭은 10분의 1, 2에서 간혹 10분의 3, 4까지 손실되었습니다.”
이 보고서를 받고 태종은 몹시 화를 내며 지시했다.
“관찰사·경력·수령이 다 손상되었다고 보고한 것은 실로 나를 속임이니, 마땅히 모두 죄주도록 하라.”
이렇듯 승정원 주서는 임금이 특별히 알아볼 일이 있을 때, 지방으로 파견되어 임금의 눈과 귀가 되는 역할도 했다.
세종은 재위 5년 6월 10일에 승정원 주서 이극복을 고양현에 파견하였다.
당시 고양현에 굶어 죽은 사람이 있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세종은 그 진위를 알아보도록 했던 것이다.
주서 이극복이 고양현에 가서 그 내막을 알아보니, 여종 모란과 두 아들이 너무 굶주려 부종이 생겼고, 어린아이 하나가 굶어 죽은 사실이 있었다.
이에 세종은 의금부에 명령하여 고양현 현감 김자경에게 곤장 80대를 치게 하였다.
세조 때에는 승정원 주서를 유구국 사신에게 보내 술과 고기를 내려주었고, 겨울에 날씨가 추워지자 의금부와 전옥서의 죄수들이 입고 있는 옷 두께를 살펴보고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렇듯 승정원 주서는 임금의 특명을 받아 시행하는 일이 많았다. 한마디로 그들은 임금의 눈과 귀 노릇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승정원 주서 임무를 마치게 되면 반드시 벼슬을 올려 중요한 직책으로 이동하게 하였다.
승정원 주서뿐 아니라 서리들도 임금의 눈과 귀 노릇을 하였다.
승정원 서리들은 대개 대를 이어 승정원에 근무하곤 했는데,
그 때문에 승정원에는 왕과 친분이 두터운 서리가 많았다.
그래서 왕들은 아끼는 신하에게 서찰을 내리거나 특별한 당부를 할 땐 승정원 서리를 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신하들과 비밀 서찰을 주고받았던 정조의 심부름꾼들도 하나같이 승정원 서리들이었다. 또한 임금들이 백성의 동향을 파악할 때도 서리들을 동원하는 일이 많았다.
그만큼 승정원 서리는 왕이 믿고 의지하는 수족 같은 존재였다.
주석①당상관
조정의 회의에서 당상(堂上·임금이 있는 대청마루)에 앉을 수 있는 관료로 고관대작의 반열에 올랐음을 상징하는 기준이었다. 조선왕조에서는 같은 정3품 관리도 당상관과 당하관으로 나눴는데, 당상관과 당하관은 차림새나 대우에서도 차이를 보였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46회
조선시대
'법정 은퇴연령 70세인데…'
숙종·영조는 왜 50대에 노인대접 받았을까
‘기로(耆老)’라는 말이 있다.
‘늙을 기(耆)’에 ‘늙을 노(老)’ 이므로 노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예기> ‘곡례 상’은
“60세는 기(耆)이며, 남에게 일을 시켜도 되는 나이(六十耆指使)이고,
70세는 노(老)이며, 자기 일을 넘겨주고 은퇴하는 나이(七十曰老而傳)”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즉 ‘기로’는 예순살(60)이 넘어가면 노인 대접을 받고,
일흔살(70)이 되면 정년퇴직 한다는 깊은 뜻을 담고 있다.
물론 70세가 되더라도 물러나지 않는 법은 있었다.
임금에게서 궤장(궤丈·의자와 지팡이)을 하사받는 것이다.(<예기> ‘곡례·상’)
예컨대 신라 문무왕은 664년 70세가 된 김유신(595~673)에게 궤장을 하사했다
.(<삼국사기> ‘열전·김유신’조)
존경의 의미와 함께 은퇴하지 말고 임금이 내려준 지팡이를 짚고 출근해서 의자에 앉아 근무하라는 뜻도 담았다.
이른바 ‘삼달존’의 조건~~
그건 예외였다. <증보문헌비고> ‘직관·치사’조는
“70세가 되면 은퇴하고, 비록 70세가 되지 않더라도 사직을 청하면 대부분 허락한다”고 설명했다.
70세 이상의 은퇴 관리 중 정2품 이상의 문관 중 ‘기로소’로 입소하는 이들이 있었다.
일종의 원로원이라 할까.
물론 자격요건을 채우더라도 다 기로소 회원이 될 수 없었다.
우선 과거급제를 통하지 않고 관리가 되면 아무리 학문이 높고 명망이 두터워도 원칙적으로 입소할 수 없었다.
그리고 무관 출신도 역시 자격을 얻지 못했다.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조건이 한가지 더 있었다.
바로 ‘덕(德)’이다.
<맹자> ‘공손추·하’는 “세상에서 존귀하게 여기는 세가지가 벼슬(작·爵)과 나이(치·齒)와 덕(德)”이라 했다. 이것을 ‘삼달존’(三達尊·존귀한 조건 세가지)이라 했다
‘정2품 문관(爵)’으로서 ‘70세 이상(齒)’이 된 이라도 ‘덕(德)’을 겸비하지 못한 이는 기로회원이 될 수 없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47회
노인대접 받겠다고 아우성 친 두 임금~~
이렇게 ‘삼달존’의 원로대신만이 입소할 수 있는 기로소에 들어가겠다고 아우성 친 임금이 두 분 있었다.
숙종(1661~1720, 재위 1674~1720)과 그 아들인 영조(1694~1776, 재위 1724~1776)임금이다
더욱이 이 두 분은 70세는커녕 60세도 안된 59세(숙종), 심지어 51세(영조)에 기로소 입소를 강행했었다.
두 분은 임금 신분으로서 들어갈 필요가 없는 기로소 입소가 뭐가 그리 급했을까
1719년(숙종 45) 4월18일이었습니다. 59세에 기로소에 입소한 숙종은 기로신 10명을 초청하여 기념 잔치를 벌였다.
당시 숙종은 눈병 때문에 잘 보이지도 않았는데. 그래도 “병든 몸이 궁전에 오르니…여러 관리 모여있고…이 연회는 본시 높이려는 뜻에서 나왔으니 가득한 술잔에 자주 손이 간들 어떠리”라는 어제시를 지었다.
숙종은 기로신들과 하루종일 어울리며 5차례에 걸쳐 5잔씩 술을 마시도록 했다. 그날의 연회내용을 글과 그림으로 제작한 것이 ‘기사계첩’(보물)이다.
59세에 “노인대접 받고 싶다”.......
숙종의 기로소 입소를 처음 거론한 이는 여성군 이집(1668~1731·인조의 고손자)이었다.
이집은 1719년(숙종 45) 1월10일 “어차피 올 연말이면 (춘추 60을 앞둔) 성상의 기로소 입소를 준비할 것인데, 그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겠느냐”는 의견을 낸다.
이때 대리청정 중이었던 세자(경종·1688~1724, 재위 1720~1724)가 반색했다.
“태조대왕께서도 60세에 기로소에 들어가셨다. 성상(숙종)도 59세가 되셨으니 자식된 마음에 어찌 기쁘지 않겠느냐.”
그러나 법과 절차에 따라 추진해야 했습니다. 곧 난제가 생겼다.
“‘태조가 60세에 기로소에 입소했다’는 내용을 <실록> 등 공식 기록에서 찾을 수 없다”는 보고가 올라온 것이다
백방으로 근거자료를 뒤진 끝에 후대의 인물인 심희수(1548~1622)와 김육(1580~1658)이 기록한 ‘태조와 기로소’ 이야기를 겨우 찾아냈는데. 일각에서 “비록 실록 등의 공식기록에는 보이지 않지만 아쉬운대로 심희수와 김육 등의 기록이 있으니 ‘근거’는 마련된 셈”이라고 했다.
하지만 임금의 일을 사적인 기록에 의존하기는 왠지 찜찜했죠. 공식기록에 나와있는 출처와 근거가 필요했다.
조정은 지춘추 민진후(1659~1720) 등 춘추관 관리 2명을 실록이 보관된 강화 정족산 사고(史庫)에 급파했다.
그러나 민진후는 “<태조실록> 첫권부터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출처를 확인할 수 없었다”(<숙종실록> 1719년 1월22일)고 보고했다.
세자(경종)가 “정말 없더냐”고 되물었다
민진후는 “두사람이 밤새도록 철저하게 찾았으니 놓칠리 없다”고 쐐기를 박았습니다.
민진후는 중전(인현왕후·1667~1701)의 오빠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민진후는 “근거와 출처가 없으니 차라리 날씨가 따뜻해지기를 기다려 양전(숙종과 중전)을 위한 잔칫상을 베푸는게 좋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관례도, 출처도 없는 군왕의 기로소 입소 행사 강행에 신중론을 개진한 겁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48회
“나 안할래!” 삐친 숙종임금
이 말에 충격을 먹은 것일까요. 삐친 것일까요.
숙종은 “그래? 기록이 없다니 할 수 없지. 논의를 중지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이 무렵 <실록>을 읽으면 잘 짜여진 각본 같습니다. 임금이 “야. 증거 없다잖아. 안할래”라고 떼 쓰자, 종친들이 상소문 릴레이를 펼치고…. 세자가 맞장구치고…. 급기야 연잉군 이금(영조) 등이 종신(宗臣·벼슬하는 종친)을 거느리고 나선다.
“실록에 없다고 갑자기 논의를 중단하다니오. 아니 될 말씀입니다. 국초에는 사관들이 더러 빠뜨리고 기록했을 겁니다.”
연잉군 등은 갑자기 “선조 말년에 태조대왕의 고사를 뒤쫓아 기로소에 입소하려고 했다가 미처 시행하지 못했다”는 가짜뉴스까지 동원했다.
선조(1552~1608, 재위 1567~1608)는 57세에 승하했는데. <선조실록>에도 “선조가 기로소 입소를 도모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숙종은 “세자와 왕자, 여러 종친이 한 목소리로 청하고…선조의 고사까지 전해진다니 명백한 일이 아니냐”면서 기로소 입소의 명을 내렸다.
아무리 눈치없는 신하들이기로서니 더는 반대할 수 없었다.
59세나 51세나 60 바라보는 것은 매한가지
이 숙종의 기로소 입소 소동은 새발의 피였다. 숙종의 아들인 영조는 51살에 기로소에 입소했기 때문이다
영조는 “기로소에 입소한 뒤 국사를 원량(사도세자·1735~1762)에게 맡기고 한가롭게 지내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라 했다
<영조실록> 1743년 1월11일)>
종신들이 가만 있지 않았다.
1744년(영조 20) 7월29일 여은군 이매가 “전하의 춘추가 ‘50을 넘어 60을 바라보게 되었으니’ 기로소 입소 자격을 갖췄다”는 상소문을 올렸다.
‘51세=망육(望六·60을 바라보는 나이)’이라 하니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숙종은 59세였고 전하는 51세입니다. 조금 차이는 나지만 ‘육순을 바라보는 것은 매한가지(望六旬則一)’입니다.”
59세에 기로소 입소를 추진하려던 계획은 실록 등에서 그 근거와 출처를 찾을 수 없다는 이유로 반대의 목소리에 부딪쳤다.
그러나 종신(벼슬에 나선 종친)들이 상소릴레이를 펼치고 급기야 왕자인 연잉군 이금(훗날 영조)까지 앞장서자 일사천리로 강행됐다.
그런 억지춘향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영조는 “기로소 입소가 내 소원이기 때문에 겸손 떨지 않겠다”면서
“선조(숙종)의 고사를 따려면 59세까지 기다려야 하지만 (몸이 아픈 내가) 어찌 될 줄 알겠느냐”고 맞장구를 쳤다.
<영조실록>은 이 대목에서 “영조의 하교가 누누이 수백마디에 달했다”고 표현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49회
보다못한 우의정 조현명(1690~1752)이 “성교(聖敎·임금의 지시)가 너무 장황하고 번거롭다”고 일침을 놓았답니다. 영의정 김재로(1682~1759)가 가세했다.
“태종·세종·세조·중종·선조 같은 분들은 50세를 넘겼지만 모두 기로소에 들어가지 않았다.
기다렸다가 의논하더라도 늦지 않습니다.”(8월11일)
영조는 평소 “기로소에 입소하는 것이 일생의 소원”이라고 누누이 강조했다.
남들은 젊어보이려고 콧수염 뽑는데…
정승들까지 앞장서서 반대하자 영조가 어린아이같이 생떼를 피운다.
“자네들이 나를 아비라고 여긴다면 8년을 기다리라고 했겠느냐. 역시 아들이 아버지 생각하는 마음과, 너희 같은 신하들이 임금 생각하는 것과 역시 다르구나.”(8월19일)
이에 조현명이 일침을 놓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늙는 것을 싫어해서 족집게로 흰 머리털을 뽑기까지 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젊어보이려고 애쓰는데 임금이라는 분은 왜 이렇게 노인대접을 받으려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가 임금의 고집을 꺾을 수 있을까.
조현명 등은 “정 그러하시다면 특별 교서로 명한다면 불가하지 않을 것”이라고 항복했다.
마침내 극심한 반대여론을 잠재웠다고 의기양양한 영조 앞에 새까만 관리가 나섰다.
사헌부 지평(정 5품) 박성원(1697~1767)이었는데요.(8월29일) 박성원은
“성상께서는 100세까지 사실 수 있을 것 같은데…뭐 그리 급하시냐”고 꼬집은거죠. 영조가 펄펄 뛰었다.
“네가 감히 임금이 기로소에 들어가는 것을 반박하는가.”
영조는 ‘너 때문에 더러워서 임금 노릇 못해먹겠다’는 듯 “모든 정사는 앞으로 승정원이 알아서 처리하라”는 명까지 내렸다. 말하자면 양위소동을 벌인것이다
승정원 관리들이 “저희의 팔뚝이 끊어지더라도 망극한 하교를 받잡을 수 없다”고 아우성쳤다. 결국 상소문을 올린 박성원은 영조의 역린을 건드린 죄로 절도(남해)에 유배됐다. 이 지경이니 누가 반대목소리를 낼 수 있겠는가?.
영조는 1744년(영조 20) 9월9일 ‘60을 바라보는 나이’(망육·望六)라면서 기로소에 입소했다. 이때 입소를 기념하여 제작한 계첩도 있다(중앙박물관 소장)
신료들은 “보통 사람들은 족집게로 흰 머리털을 뽑는데 전하는 왜 그러시냐”고 했고, 영조는 “너희가 날 아버지로 여긴다면 8년을 기다리라고 하겠느냐”고 맞섰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50회
초조했던 51세, 59세 두 임금~~
숙종·영조 부자는 왜 말도 안되는 생떼를 쓰면서까지 기로소 입소를 ‘소원’했을까
갖가지 해석이 나오지만 역시 건강문제를 들 수 있겠다.
조선 임금들의 평균수명은 48세(한국나이) 정도였다
27명 중 환갑을 넘긴 이는 태조(74)·정종(63)·광해군(67)·숙종(60)·영조(83)·고종(67) 등 6명이다.
숙종의 경우 병치레가 심상치 않았다.
기로소에 입소하기 2년 전인 57살 때는 다리가 저리며 양쪽 눈이 어지럽고 잘 보이지 않는 증세에 시달렸다.
세자(경종)에게 대리청정을 명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승들의 반대에도 51세 기로소 입소 방침을 마무리 지은 영조는 사헌부 지평(5품)인 박성원까지 나서 반대의 목소리를 내자 ‘양위소동’까지 벌인다.
영조는 박성원을 절도에 유배를 보냈다.
과연 숙종이 기로소에 입소한 직후 급격하게 쇠약해졌다.
1720년(숙종 46) 1월 육순을 맞이했다
그러나 그 해가 마지막이 됐죠. 6월8일 승하할 때까지 6개월 이상 병석에 누워 있었다.
숙종은 60을 맞이하기도 어려운 몸 상태를 알고 기로소 입소를 강행한 것 같다.
영조는 어떨까.
83세까지 산 영조는 조선 임금 가운데 가장 장수한 왕이다.
그러나 ‘골골 팔십’이라는 말이 꼭 맞았다.
특히 기로소에 입소할 무렵인 50세 때는 담증과 근육통, 어지럼증에 시달렸다.
그래서 영조가 “선조(숙종)의 고사를 따르려면 59세까지 기다려야 하지만 어찌 될 줄 알겠느냐”고 조바심을 낸 것이다
또 영조는 무수리 출신인 숙빈 최씨(1670~1718)의 소생이었다.
출생 콤플렉스가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이복형(경종)을 독살했다는 의혹이 평생 따라다녔다.
영조는 기로소에 입소한 부왕 숙종의 모습과 자신을 대비시키면서 왕권의 정통성을 입증하려 했다는 해석이 있다.
노인대접 받는 법?
요즘 ‘노인 연령’ 문제가 반드시 풀어야 할 화두로 등장했다.
1981년 제정된 노인복지법 등에 따라 제도적으로 통용되는 ‘노인 연령 기준’은 만 65세다.
그러나 평균수명이 길어지고 고령화가 가속화하면서 그 기준을 늘려야 한다는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2025년, 5명 중 1명이 노인으로 분류된다고 한다.
그럼 그런 노인들을 부양해야 할 젊은이들의 부담이 너무 커질 것 같다.
물론 ‘정년 연장’ 문제도 함께 논의되어야 하겠지만....
평균수명이 턱없이 낮았던 왕조시대에도 은퇴나이가 70세였는데....
출처 및 참고문헌
이기환의 Hi-story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51회
넷플릭스( Netflis)에 소개된 영화
(2024.10월 22일 개봉)
‘전.란’의 주인공,
장군 한명련(韓明璉)
왜란이 일어난 혼란의 시대, 함께 자란 조선 최고 무신 집안의 아들 ‘종려’(박정민)와
그의 몸종 ‘천영’(강동원)이
‘선조’(차승원)의 최측근 무관과 의병으로 적이 되어 다시 만나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로
임진왜란 비운의 맹장 한명련 일대기를 그린 영화다
실존인물...
우리가 잘 몰랐던 주인공 한명련
넷플릭스의 절란 실제 역사 인물 1명이 실제 역사 인물은
조선 선조 때의 한명련이라는 사람이다.
한명련은 노비에서 임진왜란 영웅이 되었지만 토사구평이 되어
반역자가 된 남자...
참 기구한 운명이다.
그는 임진왜란의 영웅에서 한순간에 반역자로 전락해버린 사람이다.
전민 출신으로 시작해 나라를 구한 영웅이 되고 결국엔 반역자로 몰락하기까지 그의 삶은 마치 한편의 드라마와 같은 것이었다.
한명련은 황해도 문화현(현재 관악군) 출신의 천민인이었다.
그 출생연도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당시 청년이었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한명련은 주저 없이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영남 지방에서 왜적과 맞서 싸우며 놀라운 혁명을 떨쳤다 .
한명련의 뛰어난 무예와 지략은 곧 조정의 주목을 받게 된다.
1594년 그는 경상 우도의 별장으로 임명되어 진지를 보수하고 군대를 훈련시키는 중책을 맡게 되었다. 이후 한명련은 수많은 전장에서 활약하며 이름을 날렸고 나날이 승승장구했다.
전세가 수그러지자 의병장 김덕령(金德齡)과 함께 휘하의 군사 및
새로 모집한 군대를 거느리고 좌우별장이라 칭하면서 각지의 진지를 보수하고
군대를 훈련시켰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52회
그 용맹함은 곧 조정에 보고되었다.
“팔도에서 싸우고 있는 장수들 중에 공적이 뚜렷하여 칭송할 만한 자는 누구인가 ?”
그러자 대신들이 입을 모아 대답했다.
비록 천민이지만 한명련이 가장 잘 싸운다고 하옵니다.
이렇게 한명련은 천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아
정 삼품 별장으로 임명되었다.
천민 출신이었던 그런 관직을 하사받게 되자 이에 보답이라도 하듯 더욱 엄청난 활약을 펼치게 된다.
한명련은 명장 김덕령과 함께 각각 도원수 권율우 왼팔 오른팔이 되어
왜군을 휩쓸기 시작했다.
그는 마치 목숨이 여러 개 있는 듯 죽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수많은 왜군을 물리쳐 나갔다 .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도원수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충청도방어사와
합세, 해덕에서 공을 세우고, 공주에서 분전하다가 부상을 당하였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내의(內醫)를 보내어 치료하게 하고 양피(羊皮)를 하사하였다.
이듬해 다시 권율의 휘하에서 의병장 정기룡(鄭起龍)과 합세,
정유재란 때 한명련은 다시 한번 그 용맹함을 증명한다.
그는 공주에서 왜적과 맞서 싸웠는데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선봉에 서서 적진 한 가운데로 뛰어들었다.
그는 수많은 적병을 닥치는 대로 쓰러뜨리며 큰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한명련은 부상을 입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선조임금은
매우 걱정을 한다
그리고 선조는 이렇게 명을 내렸다 .
“한명련는 어디에 있는가 ?
칼날의 오른팔을 부상 당하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어떠한가 중상은 아닌가?”
뿐 만 아니다.
실력이 좋은 의원을 보내 확실히 치료받을 수 있도록 조치까지 했을 뿐 아니라
또한 천민이었기 때문에 평판이 좋지 않았던 한명련에게 부족함이 없이 급료를 넉넉히 챙겨주었다.
이처럼 한명련은 선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은 영웅이 되었다.
무한 신뢰와 확실한 보상을 받은 한명련은 계속해서 공적을 올리면서
전국 팔도의 명성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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