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23회
금화도감 소속 소방수 ‘금화군’(禁火軍) ~
불 끄러 왔다는 ‘신패’차고 현장 출동
“도성 안에 금화(禁火)의 법을 담당하는 기관이 없어 백성들이 부주의로 화재를 일으키면 집이 타버려 재산이 탕진되오니 그들의 생명이 애석하옵니다.”
<(조선왕조실록 1426년 2월 26일기사>
1426년(세종 8년) 2월 15일 인순부(동궁에 딸려 있던 관아)에 살던 노비의 집에서 일어난 화재가 거센 바람을 타고 민가와 관아 2000여 채를 태웠다.
이 사고로 32명이 숨지고, 수많은 사람이 다쳤다.
당시 한양에 있던 가옥 1만8000여 채 가운데 10분의 1이 넘게 불타버린 큰 화재였다.
나무로 지은 데다 지붕을 지푸라기로 엮어 덮은 초가(草家)가 대부분이었으니 불이 한번 붙으면 막을 방도가 없었다. ‘불이야!’ 소리에 사람들이 집 밖으로 뛰쳐나와 불을 끄는 데 정신을 쏟는 틈을 타 좀도둑이 일부러 불을 지르기도 했다.
오후 10시∼오전 4시 통행을 금지한 인정(人定) 제도는 밤에 방화하고 도둑질하는 사람을 막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크고 작은 화재가 잇따르자 세종은 조선 최초의 소방기구인 금화도감(禁火都監)을 설치한다.
여기에 금화군(禁火軍) 또는 멸화군(滅火軍)이라 불리는 전문 소방수를 배속시켰다. 이들은 종루(鐘樓·종로네거리 일대)에서 화재를 감시했고, 방화벽을 설치하거나 각종 화재진압도구를 준비했다.
일정 구역마다 물을 담은 항아리를 비치하고 우물을 파도록 했으며,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지 않도록 간격을 두고 도로를 넓히기 위해 민가를 철거하는 등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애썼다.
화재가 일어나면 금화군은 불을 끄러 왔다는 신패(信牌)를 차고, 물을 떠오는 역할을 맡은 급수비자(汲水婢子)와 함께 장비를 챙겨 현장으로 출동했다.
화재 진압 중에는 계속 종을 울렸고 불이 난 곳 근처에 높은 깃발을 세워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했다.
금화군은 밧줄과 긴 사다리로 지붕으로 올라가서 쇠갈고리로 지붕의 기와나 짚을 걷어냈다. 도끼로 기둥을 찍어 건물을 무너뜨렸다.
목조주택은 복구할 수가 없었기에 화재를 진압하기보다는 불이 난 건물을 무너뜨려 불길이 번지지 않도록 하는 데 중점을 뒀다.
오늘날처럼 물을 직접 뿌리는 수총기(水銃器)는 1723년(경종 3년)에 청나라에서 들여왔다.
금화도감은 성문의 관리 업무를 추가로 맡아 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로 개편되지만 얼마 못 가 필요 없는 비용과 인원을 줄인다는 명목으로 혁파됐고
소방업무는 한성부에서 담당했다. 갑오경장 이후 경무사(警務使)가 소방을 맡았다가 일제강점기에 소방서가 생겨났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24회
붓 만드는 ‘필공’(筆工,筆匠)
허균의 ‘황모필’ 써본 명나라 사신 “천하제일의 붓이로다”
“경상도에 붓을 잘 만드는 사람이 있다. 몇 해 전 두세 자루를 얻어 썼는데, 국내에서 으뜸일 뿐만 아니라 천하제일이라 해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추사 김정희(1786∼1856)가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
조선 최고의 서예가 김정희는 경상도의 이름 없는 필공(筆工)이 만든 붓을 천하제일로 꼽았다. 필공은 붓 만드는 사람으로 필장(筆匠)이라고도 한다.
경상도 필장이 모처럼 서울에 올라오자 추사는 명필로 이름난 친구 심희순에게 이 기회를 놓치지 말라며 서둘러 편지를 보냈다.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허균(1569∼1618)에게 중국제 붓 다섯 자루를 주었다.
허균이 써 보니 전부 엉망이었다. 토끼털 붓은 너무 뻣뻣하고 염소털 붓은 너무 물렀다. 허균이 자기가 쓰던 붓을 주자 주지번은 깜짝 놀랐다.
“이것이 천하제일의 붓이다(是天下第一品也).” 주지번은 조선 붓 수천 자루를 사서 돌아갔다.
경상도 필장이 만든 붓도, 허균이 준 붓도 모두 족제비 꼬리털로 만든 황모필(黃毛筆)이다. 붓은 재료에 따라 이름이 다르다.
청서필(靑鼠筆·다람쥐털 붓), 양호필(羊毫筆·염소털 붓), 토모필(토毛筆·토끼털 붓), 장액필(獐腋筆·노루 겨드랑이털 붓), 구모필(狗毛筆·개털 붓), 서수필(鼠鬚筆·쥐 수염 붓), 초미필(貂尾筆·담비 꼬리털 붓) 등이다. 하지만 부드러우면서도 질긴 황모필을 따라오지 못했다.
황모필은 명나라 조정의 백서 ‘명회전(明會典)’에 조선의 조공품으로 기록된 명품이다.
조선 특산품이지만 원재료는 대부분 중국에서 수입했다. 일종의 가공무역이다.
조선에서도 족제비가 잡히지만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다.
실록에 따르면 1622년 조정에서 한 달에 필요한 황모필이 무려 3000자루였다. 조공품과 하사품을 모두 합친 수량일 것이다.
붓 제작은 공조(工曹)의 필공이 맡았다.
‘성호사설’에는 억센 털로 심지를 만들고 부드러운 털로 감싼 다음, 다시 조금 억센 털로 겉을 둘러싸야 좋은 붓이 된다고 나온다.
이러한 ‘털 블렌딩’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필공의 일은 고됐다. 할당량을 채우기도 만만치 않은데 아전들은 붓을 뇌물로 요구했고, 양반들은 필공을 제 종 부리듯 했다.
삯도 주지 않으면서 붓을 만들게 했다. 무리한 요구를 견디지 못한 필공이 목을 매거나 손가락을 잘랐을 뿐 아니라 대궐 안에서 제 목을 찌르는 사건도 일어났다.
기술이 있다고 대접받기는커녕 갈취의 표적이 됐던 것이다.
황모필은 개당 4, 5전(錢)이었는데, 납품가는 2, 3전에 불과했다. 필공은 살기 위해 속임수를 썼다. 개털을 속에 넣고 겉만 족제비털로
살짝 덮은 가짜 황모필이 판을 쳤다. 선조가 진상된 황모필을 해체했더니 속에 싸구려 털을 넣은 가짜였다. 노발대발한 선조는 필공을 처벌했다.
부역을 견디지 못한 필공은 민간으로 흩어져 조선 후기에는 전국 각지에서 활동했다. 사람들은 붓 만들 재료를 준비해 놓고 필공을 집으로 데려와 붓을 만들게 했다.
필공은 떠돌이 신세였지만 비로소 기술자 대접을 받았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25회
<재담꾼(才談)> ~
천의 얼굴로 풍자… 스탠딩 코미디언
“함북간이라는 자가 있다. 피리도 제법 불고 이야기와 광대놀이를 잘했다. 남들의 생김새와 행동을 보기만 하면 바로 흉내 냈는데 누가 진짜고 가짜인지를 분간하기 어려웠다. 또 입을 오므려 각종 피리 소리를 냈는데 소리가 웅장해 몇 리까지 퍼졌다.”―성현, ‘용재총화’에서
조선시대, 풍자를 섞어가며 익살스럽게 이야기를 풀어놓는 공연예술인 재담(才談)은 귀천을 떠나 큰 인기를 누렸다. 고담, 덕담, 신소리라고도 했다. 재담꾼은 무대 장치나 분장 없이 천의 얼굴을 연기했고, 그에 더해 구기(口技)로 이야기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구기는 온갖 소리를 흉내 내는 기예다. 재담꾼은 조선의 스탠딩 코미디언인 셈이다.
재담꾼의 실력은 외국인도 놀라게 했다. 1883년 12월 조선을 방문한 미국의 천문학자 퍼시벌 로웰은 고종의 소개로 화계사에서 재담꾼의 공연을 관람했다. 로웰은 “배우는 단번에 호랑이로 변했다. 으르렁대는 포효는 진짜 호랑이조차 따라가지 못할 만큼 무시무시했다”고 회고했다.
조선 최고 재담꾼으로는 정조 때 활약했던 김중진이 꼽힌다. 그는 젊은 나이에 이가 몽땅 빠졌던 터라 늘 입을 오물거렸다. 그래서 ‘외무릅’ ‘오물음’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다양한 레퍼토리가 있었는데, 특히 ‘세 선비 소원담’을 잘했다. 재치가 남달라서 즉흥 재담으로 묘미를 살렸다고 한다.
‘청구야담’에는 ‘인색한 양반을 풍자한 오물음은 재담을 잘한다(諷吝客吳物音善諧)’란 이야기가 나온다. 구두쇠로 이름난 ‘종실(宗室·왕실의 인척) 노인’이 오물음(김중진)을 불렀다. 김중진은 그 앞에서 유명 자린고비 이동지가 ‘저승에는 빈손으로 간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손을 관 밖으로 빼놓으라고 유언했던 이야기를 공연했다. 종실 노인은 깨달은 바가 있었던지 자식들에게 재산을 물려줬다고 한다.
김중진은 관중의 면면, 공연 장소, 분위기에 맞춰 이야기를 펼치면서도 세상을 풍자했고 교훈과 감동을 줬다. 조선 후기 문인 김희령은 ‘소은고(素隱稿)’에서 “입에서 나오는 대로 사연을 전개했으나 큰 진리를 비유했다”며 그의 이야기 실력을 높이 평가했다. 재담은 일제강점기 박춘재 명창이 우리 전통 소리에 녹여내 ‘재담소리’로 거듭났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26회
'지장'(紙匠) ~
종이 만드는 공무원, 6개월씩 3교대 근무
전통 방식으로 종이를 만드는 모습을 담은 옛사진. 인터넷 화면 캡처
“중국에서는 종이를 금처럼 귀하게 여겨 한 조각도 땅에 버리는 것을 볼 수 없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종이를 흙처럼 하찮게 쓰니….”
<이유원(李裕元)의 ‘임하필기(林下筆記)’ >
조선시대에는 책과 편지뿐 아니라 벽지, 장판, 창호 등 생활용품부터 옷, 갑옷에 이르기까지 종이가 쓰였다.
초상집에 종이로 부조하는 풍습도 있었다. 장례를 치르기 위한 필수품이었기 때문이다.
종이의 수요가 늘자 태종은 1415년 조지소(造紙所)를 설치했다.
조지소에는 종이 제작을 담당하는 지장(紙匠)이 배속됐는데 서울에만 81명, 지방 221개 군현에 692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6개월씩 3교대로 일했다. 국가에서는 토지를 따로 마련해 그 소출로 월급을 지급했다.
지장 외에도 각종 기구를 만드는 목장(木匠), 종이를 뜨는 발을 만드는 염장(簾匠), 그리고 노비 100여 명이 북적거리며 일했다.
죄를 짓고 노역형에 처해진 자에게는 닥나무를 다듬고 종이를 두드리는 도침군(도砧軍)을 시켰다.
도침군은 고되기로 유명해 기피 대상이었다. 세종 대에는 노역형 대상자를 무조건 조지소로 보냈다.
종이를 만들려면 닥나무와 잿물, 황촉규(닥풀)가 필요했다. 1년생 닥나무를 잿물에 삶은 뒤 오래 두드려 닥섬유를 추출하고, 황촉규 뿌리의 점액 성분을 추출해 지통에 닥섬유와 함께 풀어뒀다.
이것을 발로 떠내어 말리면 종이가 만들어졌다.
100번의 손질이 필요하다고 해 백지(百紙)로 불릴 만큼 손이 많이 갔다.
백성들에게 의무적으로 닥나무를 심도록 했지만 닥나무의 공급은 나아지지 않았다.
봉급마저 나오지 않게 되자 지장은 점점 줄어들었다.
81명이었던 서울의 지장은 임진왜란 이후 4명이 되었고,
60명이던 도침군도 5명밖에 남지 않았다.
지장은 사찰이나 민간에서 종이를 만들었고 조정에서는 지장이 필요할 때만 고용했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청나라에 조공하는 종이의 수량이 폭증했다.
한 해 7500권 정도 필요했던 백면지(白綿紙)가 6만 권으로 늘어났다.
조정에서는 부족한 종이의 생산을 각 지역의 절에 부담시켰고, 종이 만드는 괴로움에 승려들이 도망가 절이 텅 비어 갔다.
이후 다른 조공품의 수량은 점점 줄었으나 종이는 오히려 늘었다. 품질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18세기에 들어서며 종이는 더욱 다양한 모습을 띠었고 생산 수량도 크게 늘었다. ‘산림경제’와 ‘임원십육지’에는 원료, 색깔, 두께, 질, 용도에 따라 100종 이상이 나온다.
조선 후기 실학자 위백규는 종이 사치와 낭비가 만연한 풍조를 비판했다.
또 탐관오리들이 지장이 납품하는 종이를 퇴짜 놓으며 그 10배에 달하는 뇌물을 요구하거나 납품가를 100분의 1로 후려친다고 폭로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천년 가는 종이를 만드는 지장의 명맥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27회
글씨 새기는 ‘각수’ ~
영조임금 때 재상인 채제공 문집 내는 데 판각비로 요즘돈 10억~~
“가야산의 늙은 각수승 묘순은 재주가 뛰어나지만 성품은 순박하다네. 글씨 새기는 것은 이번 생의 업이고, 스님 노릇은 허깨비로다.”
<이수광의 ‘지봉집(芝峯集)>
금속활자는 조선에서도 활발히 사용했지만 한 번에 10여만 자 이상을 주조했기 때문에 부담이 컸다.
그래서 주로 나라에서 반포하는 책을 만들 때 사용했다.
민간이나 사찰에서는 목판에 글자를 새겨 찍어내 책을 만들었다. 이때 목판에 글씨를 새기는 사람을 각수(刻手)라고 했다.
각자장(刻字匠), 각공(刻工), 각원(刻員)으로도 불렸다.
조선 중기 문인 이수광은 용봉사의 승려 묘순에게 시를 써 주며 이번 생은 스님이 아니라 각수라고 놀렸다.
각수는 민간인보다 승려가 많았다.
인조 때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원두표는 각수승 100여 명을 불러 모아 주자전서(朱子全書)를 찍어내기도 했다.
조선시대 사찰에서 펴낸 책은 지금까지 확인된 것만 510종으로 승려 각수 3059명을 포함해 각수 3377명이 참여했다.
경전 한 종을 찍어내는 데 보통 6명, 최대 72명의 각수가 동원됐다.
목판의 마구리 하단부와 마지막 목판에는 작업에 참여한 각수들의 이름이 적혀있다.
각수의 품삯을 챙겨주고 하자의 책임을 지우기 위한 것이다.
조선왕실의궤에는 수많은 각수의 이름뿐 아니라 다양한 공구와 물자 및 그 수량까지 상세히 나온다.
나무에 글씨를 새기는 각도(刻刀)와 망치, 새긴 목판을 다듬는 숫돌, 나무 조각을 털어내는 멧돼지 털 등이다.
각수는
총책임자인 도각수(都刻手),
업무를 총괄하는 수두(首頭),
연락책을 맡은 공사원(公私員),
판각에 관련된 제반의 일을 처리하는 장무(掌務),
마구리를 맡은 목수,
책판을 다듬는 책공으로 나뉘었다.
간혹 양반이 조상의 책을 간행하는 데 각수로 참여하기도 했다.
채제공의 문집 번암집(樊巖集)을 간행한 기록인 ‘간소일기’에는 간행에 1만 냥이 필요했다고 나온다.
판재(목판)비, 편집비, 글씨 쓰는 비용이 전체의 4할가량을 차지했고, 각수의 판각비가 3할 정도였다.
1만 냥은 현재 가치로 40억 원 이상으로 추정되므로 각수의 인건비가 10억 원이 넘는 셈이다.
작업을 하는 사이 명절이나 경조사가 있으면 각수에게 부조를 해줬으며, 검수하다가 잘못이 발견되면 그에 상응하는 처벌이나 불이익을 받았다.
적지 않은 비용 때문에 가난한 집에서는 조상의 문집을 간행할 엄두도 내지 못했고, 무리하다가 패가망신하기도 했다.
비용을 아끼려고 책의 분량을 줄이다가 저자의 의도와 멀어지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다 가문과 지방의 서원, 지역 유림이 문집을 공동으로 출판하는 체제가 마련됐다.
경판을 층층이 쌓으면 백두산 높이를 넘는다는 고려의 팔만대장경,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본인 신라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
한국국학진흥원 장판각에 소장된 6만4000여 장의 유교 목판도 모두 각수들의 손에서 나온 작품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28회
공연 스타 해금연주자~
모기 소리 내며 도적 흉내 몸짓… 팬 몰고다녀
해금 연주자의 모습이 담긴 20세기 초반의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강원도 회양에 사는 금순채는 해금에 뛰어나 금선(琴仙)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10대부터 연주를 시작해 일흔 살까지 현역으로 활동했다. 금강산을 유람하는 사람들은 경치 좋은 곳에서 연주를 감상하고 싶은 마음에 그를 데리고 가고 싶어 했다. 덕분에 그는 금강산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강준흠의 ‘삼명시집(三溟詩集)’에서
해금은 원래 중국 랴오허강 상류에 사는 해족(奚族)의 악기다. 고려시대에 우리나라로 전해졌다. 왕실과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던 해금은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대중화됐다. 문학과 예술의 여러 분야에서 상품화 현상이 나타난 시기다. 악기 연주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김성기(1674∼1720)처럼 현악기, 관악기, 노래, 작곡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던 멀티 아티스트 유형의 천재 음악가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단일 악기로는 해금 연주자에 대한 기록이 유독 많다.
해금 연주자들은 모기가 앵앵거리는 소리, 장인들이 뚝딱거리는 소리,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 등을 해금으로 흉내 냈다. 다양한 몸짓도 곁들였다. 배가 아파 크게 소리를 지르는 모습이나 남한산성 도적이 이리저리 달아나는 흉내를 냈고, 다람쥐가 장독 밑으로 들어갔다고 외치기도 했다. 이들은 풍자와 해학을 소리와 접목시켰다. 19세기 중반까지 살았던 시인 조수삼은 이를 두고 ‘사람을 깨우치는 말’이라 했다.
적지 않은 인기도 모았다. 공연을 하면 사람들이 겹겹이 둘러쌌고, 공연이 끝나 돌아갈 때면 따라오는 이들이 수십 명이었으니 스타라 부를 만했다. 하루 벌이도 ‘곡식 한 말과 돈 한 움큼’이었으니 상당한 편이었다. 부유층 연회에 불려간 연주자는 더 많은 돈을 벌었다.
그러나 조선에서 가장 유명했던 해금 연주가 유우춘(1776∼1800)은 수입 고민이 컸다고 전해진다. 유우춘은 원래 용호영에 근무하는 하급 무관. 그 역시 음악에 대한 순수한 열정으로 해금 연주자가 된 것이 아니었다. 노모를 봉양해야 하는 절실함과 박봉이 동기가 됐다.
그는 다섯 손가락에 못이 박일 정도로 실력을 갈고닦았다. 3년 만에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정도가 됐다. 그러나 살림살이는 크게 늘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이 그의 음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탓이다.
‘예술성을 좇을 것인가, 대중성을 추구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유우춘이 고관대작들 앞에서 연주하며 곁눈질로 살짝 보면 많은 사람들이 졸고 있었다. 자기가 연주하고 자기 혼자 듣다 오는 꼴이었다. 요취곡(군악 계통의 곡조)과 영산회상의 변주곡을 연주하면 귀공자들은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좋다. 좋아!” 하고 외쳤다.
유우춘은 속으로 그들을 비웃었다. 하지만 음악성을 추구하자니 수입이 줄어들 판이었다. 반대로 대중성을 추구하면 미천하다는 비판이 뒤따랐다. 돈과 예술 사이에서 갈등했던 직업 연주자의 고민은 조선시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29회
원숭이 조련 ‘농후자’ - 사람처럼 절하고 꿇어앉고…
中사신 오면 원숭이 공연“꼭두각시 무대에 올라오자/
동방에 온 사신은 손뼉을 친다/
원숭이는 아녀자를 깜짝 놀라게 해/
사람이 시키는 대로 절도 하고 꿇어도 앉네.” ―박제가의 ‘성시전도시(城市全圖詩)’에서
조선 후기 다양한 공연 문화가 꽃피는 가운데 원숭이로 공연하는 걸 ‘후희(후戱)’라고 했다. 원숭이를 길들이고 조련하는 사람은 ‘농후자(弄후者)’라고 불렸다.
한반도에 서식하지는 않지만 우리 민족은 일찍부터 원숭이를 키웠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 원숭이를 나무에 오르게 하는 장면이 있다. 삼국유사에는 이차돈이 순교한 뒤 원숭이가 떼 지어 울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 문인 이인로는 ‘파한집’에 “첩첩산중에 원숭이 울음소리뿐이구나”라는 시구를 남겼다. 조선 전기 문인 최수성은 원숭이를 길러 편지를 전하는 데 썼다는 기록이 있다.
원숭이는 외교 선물로 이 땅에 들어왔다. 지금도 그렇지만 동물은 국가 간 친선을 도모하는 수단이었다. 조선은 명나라에 매와 사냥개를 보냈고, 명나라와 일본에서 원숭이를 받았다. 원숭이는 사복시 관원이 맡아 키웠다. 태종 대에는 원숭이 수가 크게 늘어 궁 밖으로 분양했다. 원숭이가 탈출해 야생화되기도 했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궁궐뿐 아니라 저잣거리에서도 농후자가 공연을 했다. 공연은 원숭이 습성을 이용했다. 원숭이가 높은 곳을 잘 오르는 점을 활용해 까마득히 높은 솟대를 세우고 끝에 먹이를 둔 다음 원숭이가 뛰어오르도록 했다.
‘태평성시도(太平城市圖)’에는 원숭이 두 마리에게 목줄을 매 높은 솟대에 오르게 하는 공연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에서 갓을 쓴 농후자는 염소를 곁에 두고 있다. 원숭이가 염소를 타는 공연도 했을 것이다.
박제가가 쓴 ‘성시전도시’ 속 원숭이는 사람처럼 절하고 꿇어앉기도 한다. 원숭이가 사람처럼 행동하도록 조련한 공연이다. 이는 중국 사신에게 선뵐 만큼 진귀한 모습이었다.
조선 후기 문인 조수삼이 쓴 ‘추재기이(秋齋紀異)’에 ‘농후개자’라는 인물이 나온다. 농후개자는 원숭이로 공연하며 구걸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벌이가 시원치 않아 거지 행색을 면하지 못했던 것. 보는 사람이 감탄하며 돈을 낼 만큼 기묘한 재주를 선보이려면 원숭이를 혹독하게 조련해야 했지만 농후개자는 한 번도 원숭이에게 채찍을 들지 않았다. 또 아무리 피곤해도 집으로 갈 때면 원숭이를 어깨에 올려놓았다.
농후개자가 죽자 원숭이는 배웠던 대로 사람처럼 울면서 절을 해 돈을 구걸했다.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이 돈을 추렴해 거지를 화장했다. 홀로 남은 원숭이는 구슬픈 울음소리를 내며 불길로 뛰어들었다고 한다. 농후개자와 원숭이는 주인과 물건의 관계가 아닌 함께 살아가는 동료였던 것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30회
표낭도(剽囊盜)
조선시대 소매치기~
“소매치기도 그 사이에 끼어 있어 남의 자루나 전대 속에 무엇이 든 것 같으면 예리한 칼로 째어 빼간다. 소매치기를 당한 줄 알고 쫓아가면 식혜 파는 골목으로 요리조리 달아난다. … ......거의 따라가 잡을라치면 대광주리를 짊어진 놈이 불쑥 ‘광주리 사려’ 하고 튀어나와 길을 막아버려 더 쫓지 못하고 만다.”
<이옥(1760∼1815)의 ‘이홍전(李泓傳)’>
조선시대에도 소매치기가 활개를 쳤다. 이들은 ‘재빨리 주머니 속의 물건을 훔친다’고 해서 ‘표낭도(剽囊盜)’ 혹은 ‘표낭자(剽囊者)’라 불렸다.
‘이홍전’에 나오는 표낭자는 2인 1조. 한 명이 물건을 칼로 째어 훔쳐 달아나면 다른 한 명은 광주리장수로 위장해 쫓아오는 사람을 막았다.
이옥의 ‘시간기(市奸記)’에서는 고가의 일본 단도(短刀)를 두고 김경화와 박 씨 사이에서 쟁탈전이 벌어지는데, 이때 소매치기 3명이 등장한다.
부산의 칼 수집가 김경화는 순금 30냥을 주고 산 일본 단도 한 자루를 몸에 차고 서울로 놀러 왔다.
박 씨가 1만2000전을 주며 그 칼을 팔라고 했지만 김경화는 거절했다.
박 씨는 “어차피 소매치기를 당할 것이니 내게 파는 것이 이익이다”라고 했다.
김경화는 소매치기를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이후 김경화와 박 씨 사이에 칼을 둘러싼 게임이 사흘 동안 벌어졌다. 박 씨는 표낭도 3명을 섭외했고, 김경화와 함께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박 씨는 칼을 표낭도들에게 보여주며 사흘 안에 훔쳐 오면 보수를 넉넉히 주겠다고 했다.
김경화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세 걸음마다 한 번씩 칼을 확인하며 이틀 동안 칼을 지켰다.
마지막 날 김경화는 소광통교(小廣通橋·청계천 광교 주변 다리)를 지나다가 한 사람과 마주쳤다.
순박해 보이지만 화려한 옷을 입은 이 사람은 김경화에게 ‘왼쪽 어깨에 이가 기어간다’고 조롱했다. 김경화는 얼굴을 붉히며 오른손으로 이를 털어냈다.
그리고 몇 걸음 걷고 보니 칼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숙소로 돌아오자 칼은 박 씨의 손에 있었다.
1921년 3월 10일자 동아일보에도 ‘스리도적’(소매치기) 통계가 나온다.
1920년 총 333건의 소매치기 사건이 보고됐는데, 전차에서 일어난 사건이 233건으로 가장 많았고 정거장과 영화관, 길거리 등이 뒤를 이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31회
관현맹(管絃盲) - 소리를 보는 맹인
조선시대의 맹인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점을 보고 경전을 외우는 판수가 되거나 침과 뜸을 놓으며 생계를 이었다. 악기를 연주하기도 했는데 눈이 보이지 않는 대신 소리에 민감해지기 때문이었다. 맹인 연주자를 관현맹(管絃盲)이라고 한다.
관현맹은 궁중 행사에서 음악을 연주하거나 기생의 가무에 반주를 맡았던 음악인이다. 여자 악공만으로 필요한 악기를 제대로 연주하기가 곤란했기 때문에 남자 맹인 악사들을 동원했던 것이다.
세종 때는 음악을 관장하는 관습도감(慣習都監)에서 선발한 맹인 18인에게 음악을 익히게 하였다. 이들은 궁중음악인 당악(唐樂)과 우리 고유의 음악인 향악(鄕樂)의 전공으로 나뉘어 퉁소, 피리, 가야금, 거문고 등 다양한 악기를 연주했다.
‘경국대전’에는 장악원(掌樂院)에 4명의 관현맹이 소속되었다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그보다 많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폐지되었다가, 효종 때 다시 시행되어 궁중 연회에서 13인의 관현맹이 급료를 받으며 연주를 했다. 설치와 폐지를 반복하면서 조선 말까지 존속되었는데, 흉년이나 국상(國喪)을 당하면 수입이 줄어 지극히 가난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뛰어난 악공이 많이 배출되었다. 성종 때 살았던 이마지(李亇知)는 거문고를 잘 탔는데, 김안로(金安老)는 그의 연주를 듣고 극찬했다.
“구름이 떠가는 듯 냇물이 솟구쳐 흐르는 듯하고, 소리가 그칠 듯하다 이어지고, 활짝 열렸다가 덜컥 닫히고, 유창하였다가 처절해졌다. 그 변화에 황홀해진 좌중은 술잔을 드는 것도 잊고 나무토막처럼 멍하니 얼이 빠져 있었다.”
율곡 이이(李珥)도 어릴 적 같은 동네에 살았던 관현맹 김운란을 만나 아쟁 연주를 듣고 지은 시가 있다.
“빈 누각에 아쟁 소리 들려오자, 오싹하니 좌중이 조용해지네. 아쟁의 현이 손을 따라 말을 하고, 세찬 냇물 깊은 곳에서 흐느끼네. 늦여름 매미가 이슬 젖은 잎에 매달려 있고, 작은 샘에서 물이 솟네. 귀를 기울이니 구름 속에 있는 듯이, 여운이 오래도록 다하지 않는구나.”
이처럼 장애와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하며 살아간 관현맹들이 있었고 그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32회
어우야담(於于野談)에는 다양한 재미있는 야사들이 들어 있다.
1621년 광해군 때 어우당於于堂) 유몽인이 암행어사로 전국을 다니면서 보고 들은 야사와 향담을 모은 책이다.
조선 수필의 백미로 손꼽힌다고 한다.
원본은 한문분이지만 한글본도 함께 전해진다.
어우야담은 왕실과 사대부의 이야기부터 백성들과 노비들의 고달픈 삶을 기록한 설화집으로 원래는 10여권인데 유몽인이 억울하게 모반죄로 처형된 후 일부가 소실되었다고 한다.
1964년에 유몽인의 후손인 ‘유제한’이 필사본 등 30여 종의 이본을 보충하여 ‘어우야담’을 새로 간행했다.
그러면서 어우야담은 유몽인이 죽은 이후의 이야기도 여러편이 실린다.
유몽인은 전라도 고흥 출신으로 초시.복시.전시에 모두 장원 급제한 천재였다.
특히 명나라 사신으로 사던 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평양까지 호종했다.
광해군과도 인연이 매우 깊었다.
그는 광해군이 세자시절 때 그의 스승이었고 광해군이 선조의명을 받들어 분조(임시정부)를 만들자 분조에 참여를 했다.
인진왜란 후 암행어사와 전라도 관찰사.대사성 등을 역임했고 도승지( 왕 비서실장).에 임명되어 광해군의 즉위에 공헌을 하게 된다.
광해군이 집권하면서 승승장구 할지 알았는데.....
광해군을 임금으로 만든 공신 대북파 이이첨등의 인목대비 폐비론에 반대를 하다 고향으로 낙향하여 어우야담을 저술하며 지내게 된다.
그러나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이번에는 불사이군을 주장하며 광해군에 대한 절개를 지킨 인물로 유명하다.
이에 유응형이 ‘유몽인이 광해군 복위를 꾀한다’고 무고를 하는 바람에 체포되었고 64세에 아들과 함께 억울한 죽음을 당한다.
조선 정조임금은
불사이군을 주장하며 재야에 은거한 두 거두인 김시습(세조에 반대하여 운둔)과 유몽인(인조에 반대하여 은둔)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한다.
「김시습이 웅장한 설악산 같다면 유몽인은 화려한 금강산 같다」
정조임금은 유몽인에게 의정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이조판서를 추증하면서 그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었다.
1832년 방계 후손들이 유몽인의 글을 모아 어우집(於于集)을 간행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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