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ㆍ4공화국 政治秘史 제11회》
☆보복은 보복을 낳고☆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1963년 7월 초에 영호남 지방이 태풍 "설리"로 인해 피해가 극심하여 수해지구를 돌아보기 위해 서울을 떠나면서 김재춘 중정부장도 같이 가자고 하여 김재춘이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호남지방을 먼저 돌아보고 하동, 진주를 거쳐 7월 5일 저녘 때 진해 해군통제부 영빈관에 투숙을 했는데 밤중에 중정의 이상무 국장이 전화로 "중정에서 공화당 간부 40명을 체포하려 한다는 음모가 발각되어 치안국에 초비상이 걸렸습니다."라는 전화를 해왔습니다.
이 전화를 받은 김재춘은 박의장에게 보고하고 즉시 서울로 올라와 상황을 파악해 보니, 중정에 근무하는 육사 11기 몇명이 주동이 되어 4대의혹 사건에 관련된 공화당 요원 40명을 처단하겠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조치를 취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박의장도 김재춘의 뒤를 이어 황급히 귀경하여 보고를 받았습니다.
박의장은 이 사건을 정승화 장군의 방첩대에 맡겼습니다.
왜냐하면 중정의 장교들이 관련된 사건이기 때문에 공정을 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방첩대에서 조사를 하여 관련자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박의장에게 보고를 했는데 김재춘 정보부장이 박의장에게 "혈기왕성한 젊은 장교들이 모여서 의견을 나눈걸 가지고 처벌을 한다면 4대의혹 사건도 확실하게 마무리가 안되었는데 또 시끄러워지면 혁명정부에 득 될 것이 없습니다. 그냥 덮어두십시오."라고 건의하였는데 박의장은 버럭 화를 내었습니다.
김재춘이 4대의혹 사건을 조사하는 등으로 박의장에게 부담을 주었기 때문인지 김재춘을 못마땅해 하고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 며칠후 김재춘은 박의장의 의도를 감지하고 사표를 냈습니다.
그 후임으로 남산의 "돈까스"로 불리는 8기 김형욱이 제4대 중정부장에 임명되었습니다.
김재춘이 약 6개월 정도 짧은 기간에 중정부장을 하면서 8기들에게 철퇴를 가했기 때문에 김형욱은 다시 복수의 칼을 갈았습니다.
우선 정보요원들은 시켜 김재춘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였습니다.
김재춘은 낌새를 채고 숨어다녀야 했으며, 숨어다니면서도 김종필의 공화당을 견제하기 위해 작업하던 자민당의 송요찬과 김준연씨를 은밀히 만나고 있었습니다.
(송요찬은 육참총장 출신으로 4.19 때 계엄사령관을 지냈고. 혁명정부에서는 내각수반을 지낸 인물이며, 김준연은 제헌국회의원과 법무장관을 지낸 인물임)
1963년 8월 들어 박의장의 대통령 출마가 확실시 되자 송요찬이 8월 8일자 동아일보에 "군인은 국방에 전념해야 한다. 부패도 나쁘지만 독재는 더 나쁘다.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다. 나 아니면 안된다는 사고방식은 위험하다. 박정희 의장은 물러나는 것이 애국하는 길이다."라는 글을 실었습니다.
이것은 송요찬의 실수였습니다.
혁명주체세력은 당연히 기분이 나빴습니다.
혁명주체세력은 송요찬을 내각수반 자리에 까지 앉혀 주었는데 배신을 때렸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후락 최고회의 공보실장은 즉각 포문을 열었습니다.
"송요찬씨는 내각수반을 하면서 군정을 10년 더 연장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습니까?
당신은 3.15 부정선거에 연루된 사람인데 양심에 가책이 없느냐?"고 송요찬의 약점을 터뜨렸습니다.
이에 대해 송요찬은 반격을 못했습니다.
3일 후 송요찬은 구속되었습니다.
구속사유는 살인 및 살인 교사혐의였습니다.
살인혐의는 6.25 때 부하인 조명구 중령을 즉결처분 한 것이고 살인교사 혐의는 4. 19 때 경무대 앞에서 발포한 사건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송요찬은 구속상태에서 그해 9월 대선에 옥중출마를 하였으나, 김형욱의 압력을 받고 대선후보를 사퇴하면서 일체의 정치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며 박정희 정권에 협조하겠다는 성명을 내고 11월 11일 병보석으로 풀려났습니다.
김재춘은 숨어다니다 중정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는 등 곤욕을 치르고 박의장에게 불려가 사죄를 하고 김종필 처럼 외유길에 올랐습니다.
《3ㆍ4공화국 政治秘史 제12회》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 대통령이 되다☆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민정에 참여하기 위해 1963년 8월30일 강원도 철원군 지포리 5군단 간이비행장에서 전역식을 가졌습니다.
이 전역식에서 박정희는 지난 2년동안 혁명정부를 잘 이끌어 준 혁명동지들과 어려움을 잘 참고 협럭해주신 국민 여러분께 감사드린다는 인사말을 전하고 "다시는 이 나라에 본인과 같은 불운한 군인이 없도록 합시다."라는 말로 전역인사를 마쳤습니다.
민간인이 된 박정희는 민주공화당에 입당하고 제 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습니다.
당시 대선에 뛰어든 후보는 많았으나, 대표적으로 신흥당의 장이석, 자유민주당의 송요찬, 민주공화당의 박정희, 추풍회의 오재영, 민정당의 윤보선, 국민의 당의 허정, 정민회의 변영태 등 일곱명이 등단하였다가 야당 단일화를 위해 허정과 송요찬은 사퇴하고 다섯명의 후보가 선거를 치렀으나 다른 후보들은 존재감이 미미했기 때문에 지지율이 보잘것 없었고 박정희와 윤보선의 양자 대결 양상이 되었습니다.
투표일은 10월 15일이었으며 개표 결과 윤보선은 4,546,243표를 얻었으며 박정희는 4,702,640표를 얻어 15만여표 차로 윤보선을 누르고 당선되었습니다.
박정희는 윤보선 측이 과거 남로당 사상 문제를 강하게 공격하는 바람에 고전을 하였으나 오히려 영호남에서 박정희 후보에게 몰표를 몰아주어 당선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상대적으로 수도권과 강원ㆍ충청은 윤보선 표가 많았습니다.
박정희가 1963년 12월 17일 대한민국 제 5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제3공화국 시대의 문이 열렸습니다.
《3ㆍ4공화국 政治秘史 제13회》
☆김형욱 중정부장과 박종규 경호실장 대결☆
남산의 돈까스니, 남산의 멧돼지니, 하는 별명을 달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김형욱 부장은 박정희 대통령을 위하는 일이라면 불속에라도 뛰어들 기세였다는 것이 당시 권력의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의 뒷 담화입니다.
김형욱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용인술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그 용인술이란 중간보스들을 경쟁시켜 적절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중정부장 김형욱, 방첩부대장 윤필용, 경호실장 박종규, 공화당 의장 김종필 등 박정희 대통령을 정점으로 중간보스에 해당하는 이들은 충성경쟁을 벌이면서 여러가지 무리한 일을 벌였습니다.
중정은 1967년 7월 동베르린 간첩단 사건을 수사하면서 박종규 경호실의 여비서 김옥희가 관련되어 있다며 잡아가 구속시킨 일이 있었습니다.
사흘간이나 모르고 있던 박종규는 화가 머리 끝까지 올랐습니다.
박종규가 김형욱에게 전화하여 당장 석방시키라고 하였으나 김형욱이 거절하였습니다.
박종규도 한 성질 하는 사람인데 그냥 넘어갈 위인이 아니었습니다. 당장 남산으로 차를 몰았습니다. 박종규는 김형욱 사무실로 쳐들어가 권총을 뽑아 김형욱의 이마에 들이대며 "너만 국가와 각하를 위해 일하는게 아니지 않느냐, 내방에서 일하는 사람을 잡아가려면 나에게 이유를 설명해야 할게 아니냐, 죽고싶으냐?"고
한바탕 으름짱을 놓아 여비서를 빼내 온 일이 있었습니다.
권총을 이마에 겨누었다는 것은 좀 과장된 이야기인 것 같기도 하지만 그때부터 둘의 관계가 비틀어진 것만은 사실입니다.
*동베르린 사건(일명 東柏林 사건)은 1967년 7월 8일 중정이 발표한 간첩단 사건이며, 당시 독일 유학생과 현지 교민들 중 동독 베르린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북한 공작원들에게 포섭되어
북한에 들어갔다 오거나 간첩활동을 했다고 의심되는 194명을 조사하여 34명에 대해 유죄판결을 내렸는데 그중에는 서독에 거주하는 이응노 화백, 작곡가 윤이상, 시인 천상병 등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김형욱은 또 한번 박종규를 골탕 먹인 일이 있었습니다.
김형욱이가 1968년 8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경호실 간부 7명과 비서실 간부 10명이 국회의원에 출마하려는 궁리만 하고 일을 제대로 하지않는다고 박대통령에게 고자질을 한 것입니다.
사실은 경호실 차장 신동관과 홍병철 두사람만 출마를 고려하고 있었는데 부풀려서 허위보고를 한 것입니다.
끄응! 하고 있던 박종규는 얼마 뒤 박대통령을 모시고 김형욱과 함께 시내 모 요정에서 저녁식사를 하였는데, 그자리에서 박종규는 김형욱에게 "당신은 각하께 허위보고를 했으니, 사표를 내야한다. 당신이 억울하다면 나도 사표를 내겠다."고 윽박질렀습니다.
입장이 난처해진 박대통령은 슬며시 자리를 떴고 남은 두 사람은 말다툼을 하다 박종규가 주먹을 날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박종규는 천하가 다 아는 피스톨 박에다 태권도가 몇단 되는 스포츠맨이었습니다.
여하간 박정희 대통령의 충성맨들은 서로를 감시하며 이간질을 하면서 긴장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이후락 비서실장과 김형욱 관계도 나빴고, 김종필과 김형욱 관계도 나빴습니다.
김형욱 뿐만은 아니고 박정희 대통령의 충성맨들은 박정희 대통령을 위하는 일이라면 혁명동지도 필요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충성맨들이 긴장관계를 유지하면서 서로를 감시하게 되니, 허튼짓을 못하게 됨으로써 권력의 정점에 있는 박정희 대통령에게는 권력을 유지하는데 이점이 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3ㆍ4공화국 政治秘史 제14회》
☆혁명정부의 내무장관 한신 장군☆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는 혁명 공약을 확실하게 실천하기 위해 행정각부 장관과 시ㆍ도지사를 대부분 군인들로 채웠습니다.
혁명공약 6개 실천사항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세번째 항인 "이 나라 이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바로잡기 위하여 참신한 기풍을 조성한다."와
네번째 항의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신 장군(육사 2기)은 5.16혁명 당시 논산훈련소장을 마치고 국방대학원에 입학하여 학생으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5.16 새벽에 총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나 무슨 일인가 하여 밖으로 나가보았으나, 특별한 정황을 알수가 없었습니다.
아침에 국방대학원에 등원을 하니, 동급생들이 여기저기 모여 박정희 장군이 오늘 새벽에 혁명을 일으켜 혁명군이 육본을 점령하고 남산 KBS방송국을 장악했다고 쑤군대고 있었습니다.
이때 한신 장군의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습니다. 아군끼리 피를 흘려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국방대학원 교수로 있는 동기생 전두열 대령과 함께 육본으로 가서 박정희 장군을 만났습니다.
한신 장군은 동기생인 박정희 장군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아군끼리 총격전은 피해야 한다."고 조언을 하였습니다.
박정희 장군도 흔쾌히 동의하였습니다. 한신 장군은 그길로 원주 1군사령부 이한림 장군에게로 달려갔습니다.
이한림 장군에게도 똑같은 말로 아군끼리는 절대 총격전은 피해야 한다고 조언하였으며 역시 이한림 장군도 같은 생각이라고 동의하였습니다.
한신 장군이 이한림 장군을 면담하고 나온 뒤에 윤보선 대통령의 친필을 전하러 온 대통령 비서관이 1군사령관을 만나서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 하였습니다.
그런 일이 있고난 후(5월 20일) 최고회의에서 들어오라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오라고 하는시람이 누구냐고 물으니, 박정희 부의장 같다고 하였습니다. 최고회의로 가서 박정희 부의장 사무실로 들어가니, 반갑게 맞이하며 내무장관을 좀 맡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한신 장군은 박정희 부의장 보다 나이는 다섯살이나 적었지만, 같은 육사 2기 동기생으로서 그동안 군생활을 하면서 한신 장군이 원리원칙주의자로 부정을 모르는 참신한 군인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신 장군에게 내무장관을 맡겨서 일대 혁신을 해보려는 욕심이 있었습니다.
여하튼 한신 장군은 박정희 부의장의 부탁을 받고 내무장관을 성심껐 하겠다는 확답을 하고 취임을 하였습니다.(장면 내각은 5월 18일 부로 해산되었기 때문에 모든 내각이 공석이어서 5월 22일부로 장성급 군인들로 장관직에 보임하였음)
한신 장군은 취임과 동시에 각 시 ㆍ도를 순시 하여 업무를 파악하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첫째 각 시ㆍ도의 정책목표는 추상적이며 알맹이가 없다는 것
둘째 유관기관과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고 각자도생이라는 것
셋째 인사는 정치적 논공행상으로 하고 있어 실력보다는 인정에 치우치고 있다는 것(그러다 보니, 행정이 무엇인지 알지못하는 지방기자 출신이 시장을 하고 있는 곳도 있었음)
넷째 관공서의 공사는 발주시기가 늦어 매번 부실공사 투성이라는 것
다섯째 공사자재 등 물자관리가 엉망이라는 것
여섯째 도 교육위원회와 학교가 각각 따로 놀고 있다는 것 등이었습니다.
이를 종합적으로 분석해 본 결과 행정기관들이 대체적으로 피동적이며 소극적이었고 국가자원의 중요성과 자원배분의 원칙을 모르고 주먹구구식으로 일을 하고 있다고 판단되었습니다.
이런 분석결과를 토대로 공무원들의 기강을 확립하고 근무자세를 능률적이고 생산적으로 확 바꾸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야 국민들이 공직기관을 믿게되고 공직자들도 사기가 울라갈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기관장들이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을 최소화 하고 현장에서 뛰면서 국민들과 함께 일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한신 장군 자신도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보다는 현장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았습니다.
비가 안와서 모내기를 못한다고 핑게를 대는 기관장들에게는 관정을 파서 논에 물을 대어 모내기를 하도록 강요를 하고 각 시 ㆍ군별로는 모내기 진도를 보고토록 하고 도 공무원들이 현장에 나가 확인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최고회의 의장을 비롯하여 위원들과 중앙부처 공무원들이 모내기 현장에 나와 모내기 일손 돕기를 하는 풍경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시초가 되어 새마을 운동이 탄생하게 되었다고 한신장군은 그의 회고록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한신 장군은 내무장관을 하면서 타성에 젖어 허위보고를 하거나 실적이 형편없이 저조한 3~5명의 시장ㆍ군수와 국장들을 파면시켰습니다. 그러니 뛰지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공직기강을 확립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당시 내무부 공무원들이 힘들기는 했지만, 국민들이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근면해 지는 모습에서 보람을 느꼈다고 당시를 회고하는 공무원들이 많습니다.
한신 장군은 군복을 입은채로 내무부 장관을 하다 1963년 8월 15일 강화도 지역의 태풍피해 현장을 돌아보다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쳐 업무를 더 이상 수행하지 못하고 병원에 입원치료를 하고 다시 군으로 복귀했는데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다시 불러서 감사원장을 맡았습니다.
그러다 1964년 8월에 다시 군으로 복귀하여 1975년에 육군대장으로 예편하였으며, 예편 후에는 아시아자동차 사장과 대한중석 사장을 역임하였습니다.
본인이 여기에 한신 장군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하는것은 그분이 내무행정의 기틀을 확실하게 잡아놓은 실적이 크기 때문입니다.
해방된지 15년이 지났지만, 그때까지도 공무원 사회의 행정구조는 유교문화의 잔재와 일제 총독부식 행정의 부스러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산림녹화에 대한 공문을 작성하는데 소설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예) 아국(我國)은 자고로 산자수명(山紫水明)하고~~로 시작하영 미사여구만 잔뜩 늘여놓고 마지막에는 소나무 묘목 0000그루를 00월 00일까지 심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고리타분한 탁상행정을 걷어치우고 현대식 행정체제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예) 수신 : 00군수
발신 ; 00도지사
제목 : 00년도 식수 사업 추진계획
1. 내용
가. 수종 : 소나무 묘목 3년생
나. 수량 : 3000그루
2. 언제까지 식수사업을 완료하고 사진 첨부하여 결과보고 할것
이것이 미국식 행정을 교육 받아 군이 먼저 접목한 행정 스타일이었습니다.
한신 장군은 군에서도 손꼽히는 군기반장이었습니다.
성질이 워낙 꼼꼼하고 대쪽같아서 부정과 비리를 절대 용납하지 못하는 진정한 군인이었으며 지휘관 중에 지휘관이었습니다.
군에서도 잘못을 저지른 장교들은 가차없이 처벌하는 무서운 장군이였습니다.
《3ㆍ4공화국 政治秘史 제15회》
☆3선개헌의 공로자 김형욱☆
악명높기로 유명했던 김형욱 같은 사람을 두고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세도가라고 합니다.
그런 세도가는 조선시대에도 많았지만, 5천년 역사에서 김형욱 만큼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한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는 박정희라는 주군을 연속 세번이나 대통령에 출마할 수 있도록 헌법을 고치는 3선 개헌 작업을 진두지휘한 인물입니다.
그 과정에서 국회의원들을 남산으로 불러다 없었던 일을 꾸며서 협박과 고문으로 굴복시키는 일을 다반사로 하였습니다.
67년 5.3 대선에서 윤보선 후보의 선거운동을 방해하고 이어서 실시된 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국회의원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쑥대밭을 만들었습니다.
선거결과 공화당이 129석으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신민당은 44석으로 죽을 쑤었습니다. 당시 국회의원 정수가 175석이었데 공화당이 129석을 차지하였으니, 박정희 대통령은 마음놓고 국정을 펼쳐나가게 되었습니다.
7대 국회의원 선거과정에서 김형욱 중정부장이 공화당 의장 김종필을 낙마시키기 위해 김종필 계파의 국회의원들을 남산으로 불러 고문을 한 일이 있었으며 괜히 김종필의 청구동 가옥 까지 감시를 하였습니다. 이에 기분이 나빠진 김종필이 1968년 5월 30일 당의장과 국회의원직 사퇴를 선언하였습니다.
그리고 6월 3일 박 대통령을 찾아가 면전에서 "제가 <낫세르>입니까? 왜 저를 의심하십니까? 제가 조카 딸(박영옥)과 결혼 했으니 한 식구 아닙니까?"라고 따지니 박대통령이 머쓱해 했고 옆에서 육영수 여사가 김종필 편을 들어주어 무사하기는 하였으나, 당 의장은 윤치영에게로 넘어갔습니다.
*여기서 <낫세르>란 1952년에 이집트에서 상관인 <나기브>와 같이 군사혁명을 일으키고 <나기브>가 대통령이 된 뒤에 <나기브>를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한 사람을 말함
김종필로 말하면 혁명주체세력 중에서 박정희 다음이며 김형욱은 김종필 덕으로 크게 되었는데 은혜를 모르고 배은망덕한 짓을 한 것이지요.
그래도 박정희 대통령은 김형욱을 두둔하며 계속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1969년 1월이 되자 공화당 의장 서리 윤치영은 3선 개헌 문제를 슬쩍 언론에 흘렸습니다.
3선 개헌 문제가 터져나오자 세상은 벌집을 쑤셔놓은듯 시끄러웠습니다.
이 때 신민당 원내총무였던 김영삼은 초산테러를 당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3선 개헌 법안은 69년 7월 30일 밤에 날치기로 통과되고 10월 17일 국민투표에 붙여져 찬성 65.1%, 반대34.9%로 나타나 박정희는 3선에 도전하게 된 것입니다.
이게 다 박정희 대통령이 조카 사위인 김종필 보다 김형욱 중정부장의 고삐를 잡고 자신의 꿈을 실현시킨 결과였습니다.
《3ㆍ4공화국 政治秘史 제16회》
☆김종필과 백운학☆
10여년 전에 중앙일보에 연재했던 故 김종필 총리의 회고담을 엮어놓은 증언록이 있어서 잠깐 훓어보니, 5.16혁명 직전에 당시 예비역 중령이던 김종필 씨가 백운학의 운명철학관을 찾았던 이야기가 있어서 여기에 소개해 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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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은 1961년 4월 말 거사준비로 한창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 일요일 아침에 석정선 동기생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석정선은 사업도 잘 안되는데 우리 백운학 한테 가서 관상이나 보자고 하였습니다.
석정선도 김종필과 함께 정군운동 사건으로 강제 전역을 당하여 택시 2대로 운수사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종로에서 제일여관 안채를 빌려 운명철학관이라는 간판을 걸어놓고 관상을 보고 있는 백운학을 찾아갔습니다.
석정선이 먼저 안방으로 들어가고 김종필은 마루에 앉아 있는데 백운학은 석정선의 관상은 봐주지 않고 자꾸 김종필만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더니, 대뜸 "됩니다!"하고 소리치는 것이었습니다.
김종필은 "되기는 뭐가 된다는겁니까?"고 물었습니다.
백운학은 거침없이 "아, 지금 준비하고 있는 혁명 말입니다."
김종필은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이 양반이 누굴 죽이려고 이러시나, 그런 엉뚱한 소리 입밖에도 내지 마시오."라고 쐐기를 박았습니다.
백운학은 "때가 됐습니다. 다들 원하는 일입니다. 국민 모두가 변화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마음놓고 하십시오. 아무놈도 말리지 못합니다. 됩니다."라고 그는 웅변하듯이 말했습니다.
김종필은 백운학의 말을 듣고 내 얼굴 어디에 혁명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을까? 알수없는 일이라고 생각되었으나, 백운학의 말에서 민심을 읽을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지난해 이때 쯤 4.19학생 의거를 기회로 민주당 정권이 들어섰지만, 민심을 끌어안지 못하여 연일 데모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김종필이 백운학의 말을 막으며 "다음 사람이나 얼른 봐주시오."라고 하니, 백운학은 석정선을 바라보며 "봐 허니 선생은 사복을 입기는 했지만, 중령 아니면 대령 같은데, 그 바퀴 굴리는거 그만하시지요. 그걸로는 밥먹기 어려워요."라고 정곡을 찔렀습니다.
석정선과 김종필은 서로를 쳐다보며 깜짝놀랐습니다.
석정선이 운수사업 하는 것을 어떻게 찍었을까?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김종필은 일어서면서 "두번다시 그 얘기 하지마시오."라고 다짐을 받으려는데 백운학은 껄껄 웃기만 하였습니다.
"넌 모르지만, 나는 알고 있어, 돼! 돼! 다들 올것이 왔다고 할거야, 방해할 사람 없으니, 해!" 이러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김종필은 관상쟁이가 혁명을 입에 담다니? 반신반의 하면서도 은근히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사실 그당시에 4월 위기설이 장안에 공공연히 퍼져 있었으며 술자리의 안주로도 등장할 정도였습니다.
혁명주체 세력도 4.19 의거 1주년을 전후하여 학생들이 움직이면 그 틈을 이용하여 혁명의 방아쇠를 당기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학생들이 움직이지 않아 포기했던 것입니다.
김종필은 혁명이 성공하고 난 뒤 7월 쯤에 백운학을 저녁식사 자리에 초대하였습니다.
그자리에는 박정희 의장이 함께 자리 하고 있었는데, 백운학은 그자리에서 "각하! 20년은 가겠습니다. 소신껏 하십시오."라는 덕담을 하였습니다.
박정희 의장은 빙긋이 웃기만 하였습니다.
식사가 끝나고 헤어졌는데 남아 있던 김종필이 백운학을 살짝 불러서 "그 뒤에는 어떻게 되겠느냐?"고 물으니, 백운학은 귓속말로 "괘가 이상한데 그무렵에는 상황이 별로 좋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김종필은 그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잊고 있었는데 10.26 사건이 닥치고서야 백운학의 예측에 다시한번 놀랐다고 합니다.
#태조 이성계가 젊은 시절에 함흥 저자거리에서 자판을 깔고 파자점(破字点)을 보는 관상쟁이에게 관상을 봐 달라고 하니, 여러 글자를 보여주며 마음에 드는 글자를 찍으라고 하였습니다.
이성계는 물을 문(問)자를 찍었습니다.
관상쟁이는 이성계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갑자기 무릎을 꿇으며 "장차 군왕이 되실 상(相)입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성계는 당황하여 "예끼 여보시오. 그런 쓸데없는 소리 하지마시오." 라고 하니, 관상쟁이는 종이에다 左君右君 君王之相이라고 써서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즉 당신은 왼쪽을 봐도 임금君이요. 오른쪽을 봐도 임금君이라는 글자를 짚었고 당신의 얼굴에 그렇게 쓰여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의심스러워서 길가는 사람에게 복비를 주면서 저 관상쟁이 한테가서 물을 問자를 찍고 관상을 봐 달라고 하라고 시키고 뒤에서 지켜보니, 그사람에게는 "문전개구 걸인지상(門前開口 乞人之相)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즉 너는 남의 문앞에서 입벌리고 밥빌어먹는 거지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問자를 보면 좌를 봐도 우를 봐도 임금君자가 되고 또 어찌보면 門앞에 입(口)을 벌리고 있으니 거지 같다는 글자도 됩니다.
똑같은 問字를 찍었지만, 사람마다 운(運)은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ㅎㅎ
《3ㆍ4공화국 政治秘史 제17회》
☆월남 파병의 뒷이야기☆
김종필은 1962년 2월에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특사로 월남을 반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월남 정부는 <고딘 디엠>이 대통령을 하고 있었는데 <고딘 디엠>은 첫만남에서 월남을 전쟁의 구렁텅이에서 구해달라고 여러번 부탁을 하였습니다.
김종필은 우리도 1950년에 전쟁을 겪어봐서 잘 이해한다고 답변하고 이튿날은 최전방에서 싸우고 있는 월남군 제1사단 지역을 방문하였습니다.
사단장은 3년 후에 대통령이 되는 <구엔반 티우> 장군이었습니다.
<티우>는 17도선 표지판을 가리키며 저것은 한국의 38선과 같은 표지판이라고 하여 한번 웃었다고 합니다.
월남 순방을 마치고 돌아온 김종필은 박정희 의장에게 월남에 파병을 하면 좋겠다는 보고를 했는데, 박정희 의장은 지금 우리 형편에 가능하겠느냐고 반문하면서 국민 정서도 그렇고 젊은 사람들을 사지(死地)로 보내는 것 같아 신경이 쓰인다며 차차 생각해 보자며 일단 덮어두자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2년 뒤인 1964년 6월에 중앙정보부가 관련된 4대 의혹 사건 등의 문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모든 공직을 버리고 미국 하버드 대학으로 공부하러 간다고 떠났는데 거기서 <키신저> 박사를 만났습니다.
김종필은 공부도 좋지만 가난한 나라에서 국민을 잘살게 해보겠다고 혁명을 했는데 남의 나라에 와서 공부만 하고 있기에는 너무 무책임 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적(籍)은 하바드에 두고 워싱턴의 의회로 가서 상하 국회의원들을 만나 한국문제를 어필하며 월남 파병 문제도 토론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미국이 월남전에 깊숙히 빠져 있다는 것을 간파하게 되었고 우리도 월남에 파병할 용의가 있다는 뜻을 비쳤습니다.
그 당시 미국 상층부의 분위기를 감지해 보니, 미국이 우리에게 조만간에 파병을 요청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끌려가는 것보다는 우리가 먼저 선수를 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에서 그런 뜻을 비쳤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 2사단과 7사단을 빼갈 수 있을 것이라는 불안감도 작용하였던 것입니다.
그때 김종필의 나이가 불과 38세 밖에 안되었지만 국제문제에 대한 상황판단 능력이 뛰어났던 전략가였다고 아니 할 수 없습니다.
김종필 이후에 어느 누가 외국에 나가서 자발적으로 국가이익을 위해 뛴 사람이 있었던가? 저는 들어보지를 못했습니다.
미국이 만일 주한 미군 2개 사단을 빼가면 당장 미국의 지원이 끊어질 것이고 안보에 커다란 구멍이 생길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미 상원의원들과 미팅을 하면서 무엇을 얻어내고 무엇을 줄 것인가를 고민하다 미국의 "농업 수출 및 원조에 관한 법률 489조에 의해 잉여농산물을 저개발국에 지원해 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내어 그것을 우리에게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다행히 <도드> 상원의원과 몇몇 의원들이 찬성을 해주었습니다.
기분이 좋아진 김종필은 <도드>의원 방에서 바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그 소식을 전했더니 뱍정희 대통령은 "이 사람이 공부나 하고 오랬더니, 큰일을 저질렀구만, 나도 동감이야!"라며 껄껄 웃었다고 합니다.
64년 12월에 <존슨>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월남 파병 요청을 친서로 보내왔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1월 8일 국무회의에서 파병을 결정하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과 김종필은 [월남 파병은 6.25전쟁 때 우리를 위해 피를 흘려준 미국에 대한 보답이며 우리 군이 전투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도 되고 경제적인 이득을 챙길 수 있을뿐만 아니라 주한 미군을 한국에 계속 붙들어 놓을 수 있다는 장점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1965년 부터 파병이 시작되었으며 기업들이 진출하여 달러를 벌어들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존슨> 대통령은 65년에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에게 월남에 파병해 준 감사의 표시로 선물을 하나 주고 싶은데 무엇을 주면 좋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과학기술연구소" 설립과 군대의 현대화를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래서 홍릉에 과학기술연구원이 설립되었으며 군대의 장비가 대폭 현대화 되었던 것입니다.
군장비의 현대화는 대표적인 것이 M16 자동소총입니다.
나라를 흥(興)하게 하고 망(亡)하게 하는데는 여러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한 두사람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3ㆍ4공화국 政治秘史 제18회》
☆3선에 성공한 박정희와 지역감정☆
3선 개헌을 밀어붙인 박정희는 71년 4.27 대선에서 95만표 차이로 신민당 김대중 후보를 물리치고 제7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박정희로서는 세번째 대통령이 된 것입니다.
선거유세를 하면서 박정희는 이번이 저의 마지막 출마이니, 국민 여러분께서 한번만 더 저를 선택해 주시면 하던 일을 마무리 짓고 깨끗이 떠나겠다고 호소하였습니다.
박정희가 3선에 성공한데는 자신의 호소력도 먹혀들어 갔다고 볼 수 있지만, 중정부장 이후락의 솜씨가 한몫 했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후락은 70년 12월 23일 대선을 불과 4개월 앞두고 김형욱의 후임으로 주일대사에서 중정부장으로 기용되었습니다.
그당시 중정은 영호남 지역감정 부추기, 김대중 선거참모 격리, 김대중 후보가 내세운 향토예비군 폐지에 대한 역공격, 박정희 후보 유세장에 청중 동원하기, 신민당 지도부 이간책동, 당정 선거대책회의 운영, 박정희 대통령의 마지막 출마설 홍보 등을 비밀리에 추진하였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71년 대선부터 지역감정이 노골화된 것이 큰 문제였습니다. 사실 그 이전까지는 지역감정이 거의 없었습니다. 67년 6대 대통령 선거 때만 해도 호남지역에서 박정희 후보를 찍은 표가 윤보선 후보를 찍은 표 보다 월등히 많았고 국회의원 숫자도 공화당 의원이 더 많았습니다.
그리고 자유당 정권하에서는 전남 광양 출신 조재천씨가 경북도지사를 역임했고 대구시와 달성군에서 연거푸 세번이나 국회의원에 당선되기도 하였습니다. 지금과 같은 세상이면 어림도 없는 일이지요.
어떤 이유에서건 국민정서를 병들게 하는 지역감정은 국민 개개인이 솔선하여 청산해야 할 적폐 중에 적폐입니다. 이런 문제는 정치인들 스스로가 선거 때만 되면 지역감정에 호소하는 버릇을 고쳐야 합니다.
특히 1980년 5.18 광주사태 이후 지역감정이 더 노골화 되어 이제는 고치기가 대단히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호남지역에는 기초자치단체 의원 부터 국회의원에 이르기까지 단 1명도 국민의 힘 소속 의원이 없다는 것을 보면 얼미나 지역감정의 골이 깊은지 감이 잡힐 것입니다.
#위에서 "김대중 선거 참모 엄창록 격리"라는 말을 하였는데 엄창록은 선거의 귀재로 명성이 높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1961년 강원도 인제 보궐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도록 꾀를 제공한 일등공신이었습니다. 그 뒤로도 계속 김대중의 선거참모로 맹활약을 하여 연속 국회의원이 되도록 꾀를 제공하였습니다.
그사람의 선거전략은 신출귀몰 하다고 할 정도로 정평이 나 있었습니다. 그걸 중정이 그냥 놓아두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71년 대선을 앞두고 중정은 그를 낚아오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사람의 선거전략을 중정에서 책으로 엮어 비밀리에 교육자료로 활용할 정도였고 박정희 대통령도 그 자료를 보고 혀를 내둘렀다고 하니, 신출귀몰한 꾀가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래서 이후락은 그의 선거전략을 71년 선거에 적용하여 박정희가 세번째 대통령이 되는데 일등공신이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설에 의하면 엄창록을 중정이 빼간 것이 아니라 엄창록이가 신민당에 전국구 국회의원 자리를 하나 달라고 했는데 그걸 들어주지 않은 것에 대해 배신감을 느끼고 김대중과 결별했다고도 합니다.
그러니까 옛날부터 사람을 부려먹었으면 그에 상응한 대접을 해주는 것이 도리라고 했는데 이 말이 사실이라면 김대중이 깊이 헤아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3ㆍ4공화국 政治秘史 제19회》
☆반 JP 4인체제의 항명☆
71년 대선에서 승리한 박정희는 다시 대권을 잡고 오치성을 내무장관에 신직수를 법무장관에 기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오치성과 공화당 재정부장 김성곤 사이에 불협화음이 터졌습니다.
오치성은 내무장관이기 때문에 경찰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대통령 앞에서 회의를 하면 자기가 모르는 정보를 김성곤이 먼저 알고 보고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걸 이상하게 생각한 오치성이 김성곤의 뒤를 밟아봤습니다. 그런데
시 ㆍ도 경찰국장들이 김성곤으로부터 용돈을 받아 쓰면서 정보를 김성곤에게 먼저 보고하고 자기에게는 나중에 보고한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다.
화가 난 오치성은 단칼에 경찰국장들을 전부 갈아치워 버렸습니다.
그래놓으니, 김성곤이 뿔이 난 것입니다.
김성곤은 당장 오치성을 탄핵 해야한다며 자기와 친하게 지내는 길재호, 김진만, 백남억을 불러 오치성 탄핵모의를 하고 야당 국회의원들까지 포섭하여 탄핵을 밀어붙이기로 하였습니다.
이 정보를 남산의 이후락이 모를리가 없고 당의장 김종필이 모를리가 없었습니다.
이 네사람을 JP를 반대하는 4인방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다 김종필의 덕을 본 사람들이었습니다.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어쨌던 이들은 김종필을 따돌리고 차떼고 포떼고 다했습니다.
김종필은 저으기 괘씸했지만, 대통령과 당을 살리려면 이만한 수치는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김종필은 국회가 열리기로 한 이틀 전인 9월 30일 밤에 신문로의 김성곤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김종필은 김성곤에게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오치성이를 탄핵하겠다는거요? 대통령의 성질 알지 않소? 당을 위해서 없었던 걸로 하시오."라며 얼루고 달래봤지만 막무가내였습니다.
남산의 이후락도 김진만을 불러 달래봤지만 실패하였습니다.
결국 10월 2일 탄핵국회가 열리고 오치성 내무장관은 찬성 107표, 반대 90표, 기권 6표로 탄핵안이 가결되었습니다.
김종필은 청와대로 달려가 오치성의 탄핵안이 가결되었다는 보고를 하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불같이 화를 내며 중정부장을 찾았습니다. 눈치가 9단인 중정부장 이후락은 미리 비서실에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흥분하였습니다. "이것들이 나를 시험하는거야 뭐야!"
청와대 비서실이 꽝꽝 울리도록 소리를 질렀습니다.
비서관들은 초죽음이 되어 벌벌 떨었습니다.
이때 김종필은 속으로 "김성곤은 이제 죽었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중정부장이 들어오자, 박정희 대통령은 "이부장! 틴핵에 찬성한 놈들 다 잡아서 조사해봐! 이것들이 무슨 마음으로 나에게 항명을 하는건지, 철저히 조사해! 나가봐!"
이후락은 "예! 다 준비되었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쏜살같이 남산으로 달렸습니다.
이후락의 두뇌는 빠르고 간사했습니다. 벌써 대통령이 어떤 지시를 할 것이라는 의도를 간파하고 4인방을 얽어넣을 준비를 다 해놓았던 것입니다.
김성곤 등 항명 주동자 20명은 그날밤 바로 남산으로 붙들려 가서 고문을 당하고 김성곤은 콧수염이 뽑히고 몽둥이 찜질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이 아사리판에서도 살아남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김진만과 백남억이었습니다.
그 두명은 투표 전날까지 찬성하기로 해놓고 투표장에는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무사했고
김성곤과 길재호는 탈당계를 쓰고 국회의원직에서 쫓겨났습니다.
오치성 탄핵의 후폭풍은 요란했습니다. 김성곤이 박정희 대통령을 잘못 본거지요.
이것으로 김성곤과 길재호는 정치생명이 끝나버렸던 것입니다.
김성곤은 오치성과의 개인감정 때문에 일을 크게 벌려가지고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져버렸습니다.
김성곤은 원래 쌍룡양회와 동양통신사를 경영하던 사업가였습니다.
그런데 김종필이 중정부장 할 때 찾아와서 "6.25 때 자기가 부역한 사실이 종로경찰서에 남아 있는데 그걸 좀 빼달라고 부탁을 해왔습니다.
빼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하니,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님에게 충성을 다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치안국장에게 부탁을 해서 빼주고 공화당에 영입하여 재정부장까지 시켜주었더니, 자신과 박대통령을 배반하더라는 것입니다.
길재호는 평안도 출신이며 자기와 육사 동기생이고 혁명 주체세력인데 역시 배반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김종필은 그뒤부터 사람을 대할 때 이리저리 재보는 버릇이 생겼다고 합니다.
일반인들도 의리를 중시하는데, 특히 정치인들 사이에는 의리가 생명이라고들 합니다.
지금 우리 정치계에도 의리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배신자들이 눈에 띄이게 많아젔습니다.
그것은 박근혜 대통령과 윤석열 대통령 탄핵정국에서 확연하게 드러났습니다.
또 6.25 전쟁 때 풍전등화였던 우리를 살려준 미군에 대해 "반미 양키고홈"이라는 소리를 지껄이는 양아치들이 많은것도 참 한심스러운 일입니다.
《3ㆍ4공화국 政治秘史 제20회》
☆이후락과 김일성의 만남(1)☆
이후락은 70년 12월 21일 주일대사에서 중정부장으로 내정된 직후에 도쿄에서 기자회견을 하였습니다.
회견 중에 이후락은 "북한에 대한 대책도 국제적인 협조를 통해 적극적으로 해결해 나갈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이 1년 반 후에 평양으로 이어질지는 누구도 몰랐습니다.
이후락은 정보맨으로서 장면 정권에서 이미 정보연구원장을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혁명주체세력이 아니면서도 최고회의 홍보실장을 거쳐 대통령 비서실장까지 역임한 재주꾼이었습니다.
주변사람들은 일명 책사 또는 모사라고도 하였습니다.
1970년에 주일대사를 하면서는 도쿄에서 유명한 초밥을 청와대까지 날랐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나중에 이탈리아 대사를 지낸 모 고위 공직자가 사무관 때 그 초밥을 나르면서 "대사쯤 되는 사람이 꼭 이렇게 까지 해야되나?"라는 생각도 가졌지만 한편 생각해 보면 부하로서 상관을 모시는 그 정성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털어놓아서 주변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이후락은 71년 4.27 대선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남북관계 개선작업에 들어갔습니다.
강인덕 국장과 정홍진 국장 등 북한 전문가들과 검토한 결과 1차적으로 비정치 분야인 남북적십자 회담 부터 시작하여 북한의 발목을 잡아야 한다는 결론을 얻어냈습니다.
71년부터 월남에서 미군의 힘이 쇠퇴해지고 닉슨 대통령과 모택동 사이에 핑퐁외교가 진행되고 있어 우리로서는 이 상황을 구경만 하고 있을 수 없다는 판단을 한 이후락 부장은 바로 손을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 측에서 먼저 북한에 대고 남북적십자 회담을 통해 이산가족 찾기 운동을 벌이자고 제의를 했는데 의외로 북에서 적극 찬성을 하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71년 9월 20일 판문점에서 남북대표가 각 5명씩이 모여 예비회담을 하였는데 북쪽 사람들은 말끝마다 "친애하는 김일성 동지"를 읊어대며 체제 선전으로 일관하는 바람에 회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이후락은 역시 공산주의자들과 회담은 대단히 어렵다는 것을 일게 되었고 특히 실무자들끼리는 회담이 안된다는 것을 인식하고 윗선을 움직여야겠다며 방향을 평양으로 돌렸습니다.
즉 김일성을 움직이지 않으면 회담은 좀처럼 진행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후락 부장이 아니면 누구도 생각해 낼 수 없는 아이디어였습니다.
그만큼 이후락은 국제정세에 대한 예리한 분석과 전럑적인 판단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 당시는 68년 1.21 사태와 69년 울진ㆍ삼척무장공비 침투사건 직후여서 남북관계가 얼어붙었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정홍진 국장을 시켜서 북한 노동당 조직부 책임지도원 김덕현을 만나게 해서 비밀 정치회담을 하자는 제의를 하였으며 정홍진이 72년 3월 28일 판문점을 넘어 평양으로 가서 모란봉 초대소에서 김일성의 동생이며 노동당 조직부장인 김영주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자리에서 정홍진은 이후락 부장의 안부를 전하고 이후락 부장이 김부장을 만나고 싶어한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김영주 부장도 이부장을 한번 만나고 싶다는 의사표현을 하며 꼭 전하라는 당부도 잊지않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다음달 4월 18일에는 북한의 김덕현 노동당 조직부 지도원이 서울을 답방하였으며 이때 이후락은 직접 김덕현을 데리고 서울의 이곳 저곳을 구경시켜 주면서 은근히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얼마나 좋은 제도인지를 보고 느끼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남북의 밀사들이 오고가면서 이후락 부장과 김영주 부장의 만남을 확정하고 72년 5월 2일로 이후락 부장의 방북일정을 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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