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ㆍ4공화국 政治 秘史 제 1회》
☆남산의 중앙정보연구위원회☆
남산의 "중앙정보연구위원회"라 하면 약간 생소한 느낌이 드실겁니다. 중앙정보부도 이니고?
남산의 중앙정보연구위원회는 서울특별시 중구 예장동 4번지 남산 북쪽 언덕에 간판이 없는 2층 건물인데 여기가 장면(張勉) 내각의 정보맨들이 근무하는 곳이었습니다.
이곳의 수장은 이후락 예비역 육군소장이었습니다.
이곳에는 몇명의 현역 대령과 서울대 출신들로만 구성된 엘리트들이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1961년 5월 16일 아침 이후락은 직원들에게 "오늘 새벽에 군사혁명이 일어났습니다. 혁명 지도자는 아직 모릅니다. 우선, 미아리, 청량리, 무악재, 용산쪽으로 나가 군부대의 동태를 살펴서 보고해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대원들은 각자 맡은 곳으로 나가 정보를 수집하여 보고해 왔습니다.
보고를 종합한 이후락은 이를 미대사관과 미8군 정보처로 보고하였습니다.
장면 총리는 이미 칼멘 수도원으로 피신했기 때문에 연락이 두절된 상태라 보고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후에 잠깐 밖에 나갔다 들어온 이후락은 직원들을 모아놓고 "2군 부사령관 박정희 소장이 혁명 지도자로 밝혀졌습니다. 이분은 청렴결백하고 민족주의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합니다.
나는 혹시 이자리를 그만둘지 모르지만, 여러분은 계속 근무하게 될 것입니다. 안심하고 근무하시기 바랍니다."라고 연설하였습니다.
이후락의 정치 감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발달되어 있었습니다. 코로 말하면 🐕 코 정도는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 당시 함께 근무해본 사람들의 뒷이야기 입니다.
혁명 3일째 되는날인 5월 18일 남산 중앙정보연구위원회로 계급장 없는 카키색 군복을 입은 김종필이 나타났습니다.
뒤에는 석정선 중령(육사8기)이 따라왔습니다. 김종필은 연구원들에게 혁명의 당위성을 장황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이병희 중령(육사 8기) 일당이 이후락을 체포해 갔습니다. 죄명은 반혁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후락은 혁명을 반대한 일이 없습니다. 그당시 혁명군은 자기들 편에 서지않은 사람은 무조건 반혁명분자로 낙인을 찍었습니다.
이후락은 1924년생이며 울산농업학교(농고)를 졸업하고 만주 관동군에서 부사관 생활을 하다 해방된 조국에서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가 장교로 임관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줄곧 정보분야에서 근무한 정보맨이었습니다.
그래서 이후락은 1960년 육군소장으로 전역과 동시에 장면내각의 정보책임자로 발탁된 것입니다.
그리고 남산의 중앙정보연구위원회 사무실은 혁명군이 접수하고 김종필이 중앙정보부를 창설할 때 사무실로 활용하였습니다.
《3ㆍ4공화국 政治秘史 제2회》
☆중앙정보부 창설☆
김종필은 군사혁명 3일째인 5월 18일 저녁에 서정순, 이영근, 김병학 등 세명을 불렀습니다.
김종필은 세사람에게 중앙정보부 법을 연구하라는 임무를 부여하고 미국의 CIA(중앙정보국)와 일본의 내각조사실 법을 참고하여 정보수집 기능뿐만 아니라 수사권까지 가지는 무소불의의 권력기관으로서의 위상에 맞는 법률을 제정하라는 지침을 주었습니다.
세사람은 모두 방첩대에 근무하는 유능한 정보맨들이었고 김종필과 동기생들이었습니다.
이들은 20여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위 양개 법률을 참고하여 중앙정보부 법의 그림을 그렸는데 법률을 전문으로 공부를 하지않은 사람들이라 이를 정식 법률로 체계화는 못하고 박정희 장군이 5사단장 시절에 법무참모였던 신직수를 영입하여 정식 법률로 체계화 하였습니다.
그때가 6월 초였으니까 불과 20여일 만에 중앙정보부 법을 만든 것입니다.
이 법률은 국가재건최고회의(이하 최고희의) 부의장 박정희와 의장 장도영의 숭인을 받아 공포되었습니다.
중앙정보부 법은 1961년 6월 10일 최고회의 법과 같은날 법률 제619로 공포되었는데, 최고회의 법에 "중앙정보부는 공산주의 세력의 간접침략과 혁명과업 수행의 장애를 제거하기 위해 최고회의에 중앙정보부를 둔다."라고 규정해 놓으므로서 중앙정보부는 최고회의의 손발이 되어 움직이도록 장치가 마련된 것입니다.
이 법률에 의해 중앙정보부가 창설되었는데, 부장에는 김종필, 제1차장에 서정순, 제2차장에 이영근이 임명되고, 제1국장(총무업무) 강창진, 제2국장(해외정보업무) 석정선, 제3국장(수사업무) 고제훈, 제5국장(교육업무) 최영택, 비서실장 김봉성, 통신실장 김태진, 고문에는 정치고문 장태화, 법룰고문 신직수, 경제고문 김용태가 임명되고 특수팀장에는 차지철 대위를 임명하여 박정희 부의장을 경호토록 하였습니다.
중앙정보부는 1961년 6월 10일 법률 공포와 동시에 출범하였으며 직원은 3만 명까지 대폭 증원되었고 각 시 ㆍ도 지부까지 조직되어 명실공히 국정책임자의 강력한 펀치로 작용하게 된 것입니다.
김종필 부장은 중앙정보부의 훈(訓)을 "우리는 음지(陰地)에서 일하고 양지(陽地)를 지향한다."로 정하고,
하나, 중앙정보부는 근대화 혁명의 숨은 일꾼이어야 함으로 정보부원은 자꾸 나타나려고 하면 안된다.
하나, 숨어서 정부를 뒷받침 해야한다.
하나, 밖으로 나타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성과여야 한다.
하나, 음지에서 묵묵히 일하는 것을 몰라주어도 좋다. 우리가 만든 정보를 국정책임자가 사용해서 국가발전에 이바지 하면 그것이 바로 양지를 향해 사는 것이다.
중앙정보부는 이와같은 실천강목을 가슴에 새기고 힘차게 출발하였습니다.
《3ㆍ4공화국 政治秘史 제3회》
☆1군사령관 이한림 장군의 체포와 장면 정권의 퇴진☆
5.16혁명 당시 한국군의 주력은 강원도 원주의 제1야전군이었으며 군사령관은 이한림 중장이었습니다.
이한림 장군은 5월 16일 새벽 3시에 육군본부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고 군사혁명 소식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육본의 연락을 받은 이한림 장군은 즉시 1군단장 임부택 장군에게 출동준비를 지시하고 5월 17일 각 군단장과 참모들에게 구데타에 절대 반대한다는 소신을 밝혔으며 명령만 내리면 혁명군을 모조리 쓸어버리겠다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상부로부터 아무런 지시가 없었습니다.
알고보니,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은 혁명군에 설것인지, 진압을 해야할 것인지를 결정하지 못하고 허둥대고 있었으며, 현석호 국방장관도 대통령실과 국방부를 오가느라 연락이 되지 않아 마냥 시간만 허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실질적인 군통수권을 행사해야할 장면 총리는 새벽부터 칼멘 수도원으로 숨어버린 상태였습니다.
(당시는 내각책임제였기 때문에 총리에게 군통수권이 있었음)
이러저러한 이유로 군 통수기능이 마비되어 버린 상태였습니다.
그나마 윤보선 대통령이 5월 17일 박정희와 장도영에게 "아군끼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유혈사태를 일으켜서는 안된다."는 주의를 주고 각 군사령관과 군단장들에게 친서를 보내 병력을 동원하여 싸우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당부하였기 때문에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대통령의 친서를 받은 각 군사령관과 군단장들은 이에 수긍하였으며 이한림 장군도 자연히 수긍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한림이 이상하였습니다.
그날 오후에 유엔군 사령관 <매그루더> 장군이 1군사령부를 방문하여 이한림 사령관에게 "1군이 혁명군을 진압하라."는 언질을 주자, 마음이 바뀌어 대통령의 지시를 어기고 혁명군을 진압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혁명군 지휘부는 긴장하였습니다.
이때 박정희 장군은 "이한림을 잡아들여!"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박정희 장군의 이 한마디에 혁명군 지휘부 참모들은 목숨을 걸겠다는 각오를 다짐하고 바로 1군사령부의 조창대 중령과 엄병길 중령, 심우성 중령 등 혁명동지들에게 이한림 사령관을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하라는 지령을 내렸습니다.
만일 혁명군을 진압하기 위해 1군이 동원된다면 박정희의 혁명은 실패하게 되고 혁명군은 만고의 역적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순간은 누가 의지가 강하느냐의 싸움이었는데 박정희가 이한림보다 강했습니다.
지령을 받은 세사람은 5월 18일 아침 6시에 군사령관 집무실에서 군수처장과 아침 식사를 하는 이한림 사령관의 무장을 해제하고 체포하여 서울 덕수궁 혁명군 지휘부로 압송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1군의 혁명군 진압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유엔군 사령관 <매그루더>도 포기하고 나중에 김종필에게 설득당하여 혁명을 지지하게 되었습니다.
5월 18일 오후에는 장면 총리가 수녀원에서 중앙청으로 나와 기자회견을 하였으며 "내각 총사퇴"와 "계엄령 추인" 등 두가지 안건을 처리하고 총리직을 사임하였습니다. 이로써 장면 내각은 1년도 못넘기고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3ㆍ4공화국 政治秘史 제4회》
☆장도영 최고회의 의장과 5기생들의 몰락☆
혁명을 일으킨 최고 지도자는 박정희 장군이었지만 대외적인 위상과 혁명과업을 순조롭게 추진하기 위해 육군참모총장 장도영 장군을 최고회의 의장으로 추대하고 박정희 장군은 부의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혁명을 일으킨지 한달여쯤 지난 6월 중순에 사고가 터졌습니다.
5기생들이 장도영 최고회의 의장과 모의를 하여 혁명주체세력인 8기생들을 몰아내겠다는 정보를 중앙정보부가 입수한 것입니다.
5기생들은 자기들이 실병력을 동원하여 혁명을 성공시킨 세력인데 8기생들이 실권을 장악하고 자기들을 무시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영등포의 6관구를 동원했던 참모장 김재춘 대령과 공수특전단을 동원했던 여단장 박치옥 대령, 6포병여단을 동원했던 여단장 문재준 대령 등 5기생들이 주축이 되어 장도영 최고회의 의장을 지도자로 내세워 구데타를 일으켜 8기생들을 축출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정보가 누설되었습니다. 육군 헌병감으로 자리를 잡고 있던 문재준 대령이 수도경비사령부 참모장 신윤창 중령(출동당시 6포병여단 2대대장)에게 이 비밀계획을 암시해 주었는데 신윤창 중령이 동기생인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에게 이 정보를 제보하였던 것입니다.
김종필과 8기생들은 6월 23일을 기해 장도영 최고회의 의장이 갖고 있던 최고회의 의장, 육군참모총장, 국방장관, 내각수반, 계엄사령관이라는 5개의 직책 중에서 최고회의 의장과 내각수반 직책만 남겨두고 나머지 자리는 김종오 중장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장도영과 5기생들은 불만이 컸습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습니다.
김종필의 중앙정보부는 불평하는 5기생들을 중앙정보부에 불러다 조사를 하고 결국은 장도영과 5기생들을 반혁명분자로 찍어 구속해버렸습니다.
장도영이 결정적으로 약점이 잡힌 것은 최고회의 참모들과 상의도 없이 기자회견을 하면서 8월 15일 광복절을 기해 혁명위원회를 해산하고 군으로 원대복귀하겠다는 것과 비상계엄을 경비계엄으로 바꾼다는 등의 말을 한 것입니다.
중앙정보부는 장도영 최고회의 의장과 5기생들을 체포하여 조사를 벌였으며,
최고회의 공보실은 7월 9일 최고회의 의장 장도영을 비롯한 반혁명 분자 44명이 정부 전복 음모와 혁명주체 세력을 암살하려 했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장도영은 최고회의 의장을 맡은지 45일 만에 몰락하고 박정희 부의장이 의장으로 추대되었으며 송요찬 전 육군참모총장을 내각수반(총리)에 앉혔습니다.
이러한 모든 일은 김종필의 중앙정보부에 의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당시는 김종필이 이끄는 중앙정보부는 내치(內治)와 외치(外治)에 관한 모든 일을 해결했던 무소불위의 권력집단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김종필이 처음에 중앙정보부를 창설할 때 정보수집 업무뿐 아니라 수사권 까지 법에 집어넣으라고 했던 뜻을 그때서야 알게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서른 다섯이던 김종필의 머리에서 그런 기상천외한 꾀가 나왔다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제갈량이 환생한 것 같다는 얘기도 있었다고 합니다.
《3ㆍ4공화국 政治秘史 제5회》
☆혁명이 애들 장난입니까?☆
5.16혁명위원회는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을 회유하여 5월 19일 회의를 열어 혁명위원회의 명칭을 "국가재건최고회의"로 바꾸고 의장에 장도영 육군참모총장, 부의장에 박정희 소장을 추대하고 최고위원 30명과 고문 2명을 선출하였습니다.
최고회의 의장에게는 내각수반, 국방장관, 육군참모총장, 계엄사령관이라는 네개의 직책을 더 부여하여 혁명정부의 명실상부한 최고지도자로 받들었습니다.
하늘에는 태양이 하나밖에 없듯이 최고회의에도 태양이 두개가 뜰 수 없는 것이 원칙인데 이상하게도 장도영과 박정희라는 두개의 태양이 뜬 것입니다.
인간사회 조직에서는 절대 두개의 태양이 공존할 수가 없다는 것이 수천년의 역사에서 증명되어 왔는데ᆢ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4회에서 얘기했듯이 혁명주체세력은 대외적인 위상과 혁명과업을 순조롭게 추진하기 위해 장도영을 전면에 내세운 것이지 예뻐서 내세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장도영은 자기를 예뻐서 내세운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었던거지요.
그래선지 좀 우쭐거리고 다녔습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조금 더 나가버린 것이 문제였습니다.
분수를 몰랐던거지요. 장도영은 최고회의 위원들과 상의도 없이 5월 27일 독단으로 AP통신과의 회견에서 비상계엄을 경비계엄으로 바꿀것이며 8월 15일을 전후하여 "민정이양"을 할수 있다는 발언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 발언은 혁명주체세력에게 충격이었습니다.
장도영이 이렇게 독주를 하자 혁명주체세력은 불끈했지요.
장도영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장도영에게 육군참모총장과 국방장관직을 내려놓으라고 정중하게 건의하였습니다.
그러나 장도영은 일언지하에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나 혁명주체세력은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혁명주체세력은 장도영 거세 임무를 이석제 중령(8기)에게 맡겼습니다. 이석제 중령은 육군대학에서 교관을 하다 혁명에 가담했는데 고시공부를 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법리(法理)에 밝은 장교였습니다.
이석제 중령은 단독으로 최고회의 의장실 문을 노크하였습니다.
*이석제 : 의장님! 국방부 장관과 육군참모총장 직을 내려놓으시고 최고회의 의장과 내각수반 자리만 지켜주십시오.
*장도영 : 귀관이 무슨 권한으로 상관에게 자리를 내놓으라 마라 하는거야!
*이석제 : 정말 못내놓으시겠습니까?
*장도영 : 절대 못내놓아, 귀관이 혁명했다고 일개 육군중령이 참모총장을 협박하는건가?
이석제 : 혁명이 애들 장난입니까? 우리가 계급 가지고 혁명한줄 아십니까? 우리는 한강다리를 넘어올 때 이미 계급 위계질서를 벗어놓았습니다.
#이렇게 이석제 중령은 장도영 의장과 4시간 동안이나 입씨름을 벌였습니다. 대단한 결기였지요. 주군(主君박정희)의 명령을 관철시키기 위해 하늘같이 높은 참모총장이요 국방장관이며 더구나 현재는 직속상관인 최고회의 의장에게 일개 중령이 보여준 결기는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바로 혁명주체세력은 육군참모총장과 국방장관 직을 빼앗아 6.25 전쟁 때 백마고지 전투의 영웅 김종오 중장(일본군 학병 소위 출신)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이후 장도영은 5기생들과 짜고 8기생들을 몰아내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역습을 당하여 반혁명 분자로 몰려 그를 따르는 5기생들과 함께 몰락하였습니다.
《3ㆍ4공화국 政治秘史 제6회》
☆김종필-오히라 메모☆
이한림과 장도영 문제가 마무리 되고 얼마안된 8월 말쯤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하 중정부장)이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에게 한일회담 필요성을 건의하였습니다.
박정희 의장은 지금 국민 정서상 용납이 되겠느냐고 반문하였습니다.
김종필 중정부장은 경제개발을 하려면 한일회담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역설하였습니다.
박정희 의장이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방법론을 물으니, 김종필 중정부장은 우선 제가 가서 타진을 해보겠다고 하였습니다.
30대 새파란 젊은 혁명가가 정치 바닥에서 수십년을 닳고 닳은 여우같은 일본 수상 <이께다>를 직접 만나 담판을 짓겠다고 하니, 박정희 의장이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일단 박정희 의장은 김종필 중정부장의 건의를 승인하면서 성공하고 돌아오라며 등을 두드려 주었습니다.
당시 박정희는 마흔 넷, 김종필은 서른 다섯의 젊은 혁명가들이었습니다.
김종필 중정부장은 10월 24일 은밀히 동경으로 건너가 <이께다> 수상을 만났습니다.
그자리에는 <오히라> 외무상이 배석하였습니다.
*이께다 수상 : 김부장 선생, 어떻게 오셨습니까?
*김종필 부장 : 두가지 목적을 가지고 왔습니다. 하나는 한일회담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함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이렇게 왔으니, 다음에는 수상께서 서울로 특사를 보내달라는 것입니다.
*이께다 수상 : 대단히 실례지만, 지금 연세가 몇이십니까?
*김종필 부장 : 서른 다섯입니다.
*이께다 수상 : (하! 하고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명치유신 때 지사(志士)를 보는 것같습니다. 아주 감복하였습니다. 나와 똑같은 생각을 말씀하셨는데, 내가 곧 특사를 서울로 보내겠습니다.
#이께다 수상이 명치유신 때 지사를 보는 것 같다고 한 말은
1860년대 일본 명치유신의 주체세력이었던 30세의 <사카모토 료마> 같은 혁명가를 비교해서 한 말이었습니다.
당시 <이께다> 수상은 62세, <오히라> 외무상은 51세의 노련한 정치가들이었습니다.
이들을 상대로 서른 다섯의 김종필 중정부장이 이승만 정부와 장면 정부에서도 시도하다 포기한 한일간의 국교를 정상화 하고 배상금 청구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선 용기와 지혜가 대단했지요.
일단 일본 수상의 긍정적인 반응을 받아온 김종필 중정부장은 몇차례 더 일본을 왕래하면서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상업차관 1억달러 도합 6억달러를 요구하였습니다. 이것은 일본이 우리를 괴롭힌 것에 대한 일종의 손해배상액이었습니다.
당시 일본 은행에는 달러 잔고가 18억달러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6억달러나 되는 거금을 줄수 없다고 버텼고 김종필 중정부장은 6억달러를 관철시키려고 계속 요구하였습니다.
그리고 1962년 11월 12일 밤 8시부터 12시 까지 일본외무상 <오히라> 방에서 장장 4시간 동안을 밀고 당기는 지루한 협상 끝에 김종필 부장이 요구한 액수대로 타결되었으며 차후에 서로 다른 말을 하지않기로 하고 메모지에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상업차관 1억달러를 적고 서로 사인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김종필-오히라 메모입니다.
아래 사진은 당시 김종필 중정부장과 오히라 일본 외무상이 사인한 메모지입니다.
《3ㆍ4공화국 政治秘史 제7회》
☆공화당 창당 작업☆
김종필 중정부장은 1962년 5월부터 비밀리에 공화당 창당 준비를 해왔습니다.
사무실은 효창동 비밀가옥을 이용하고 윤천주(나중에 문교장관), 김성희 교수 등 법조인과 교육계 학자와 공무원들을 선발하여 작업을 진행하였습니다.
정치질서가 잡히고 나면 민정이양을 하고 군으로 복귀한다는 약속을 했기때문에 창당을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 모르게 은밀하게 진행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완전한 비밀은 없다는 말을 대변이라도 하는듯 방첩대장 김재춘이 냄새를 맡았습니다.
김재춘 방첩대장은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에게 "김종필 중정부장이 창당작업을 한다는데 알고 계십니까?"라고 조심스럽게 여쭈어 보았습니다.
박정희 의장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며 철저히 조사해서 보고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그러나 박정희 의장은 김종필 부장으로부터 공화당 창당에 관해 다 보고 받고 있었습니다.
김재춘은 이런 사실을 알게 되면서 박병권 국방장관, 김종오 육군참모총장, 김동하, 유양수, 박태준 등 최고위원들과 연합전선을 펴고 김종필 중정과 대립각을 세웠습니다.
이렇게 되자 중정은 차지철 특공부대를 시켜 김재춘을 미행하며 위협을 가했습니다.
김종필계와 김재춘계가 대립하고 있던 1962년 여름에 최고회의 공보실장 이후락이 "국민의 여론이라면 박정희 의장이 대선에 출마할 수도 있다."는 식의 견해를 밝혔습니다. (이후락은 정치감각이 비상한 사람으로 반혁명분자로 감옥에도 두어달 갔다왔지만 어느새 최고회의 공보실장 자리를 꿰어차는 탁월한 실력을 발휘하였던 것임)
이후락의 발언 이후 12월 14일 김종필 중정부장은 군정을 빠른시간 내에 끝내고 민정이양을 하겠다는 복안을 밝혔으며 12월 17일 제3공화국 헌법이 국민투표에 의해 확정되었습니다.
그리고 12월 23일 공화당 창당에 관한 내막을 최고위원들에게 브리핑을 하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창당작업을 몰랐던 사람들은 고성을 지르며 한바탕 난리를 피웠습니다.
이렇게 김종필의 중정이 독주를 하게 되자 위기를 느낀 반 김종필 세력이 반기를 들고 박정희 의장에게 항의를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항의의 표시로 송요찬 내각수반, 유원식, 김동하 최고위원 등이 사표를 낸 것입니다.
박정희 의장은 위기를 맞았습니다.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김종필을 중정부장에서 밀어내고 제 2대 중정부장으로 김용순 중장을 임명하였습니다. 김용순은 경남 하동 출신으로 박정희 의장이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 할 때 그 밑에서 참모장을 하던 사람입니다.
박정희 의장은 김용순이 성격이 무난하여 사태를 원만하게 수습할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중정부장을 맡은지 한달여만에 장충동 최고회의 의장 공관에서 차지철 중정 특수부대와 중정의 다른 팀과 총격전이 벌어진 사건 때문에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45일만에 물러나고 방첩대장 김재춘이 제3대 중정부장에 임명되었습니다.
8기생들은 김형욱을 밀었지만, 박정희 의장은
5기생 대표 김재춘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만일 김형욱을 임명할 경우 송요찬, 김종오, 김동하 등 원로들의 반발이 더욱 심해질 것이고 5기들의 불만도 더욱 거세질 것이라는 점을 간파한 고단수의 해결책이었습니다.
박정희 의장의 입장에서는 혁명이라는 배를 8기생들로만 끌고 갈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지요.
그때가 1963년 2월 21일이었습니다. 8기생들은 긴장하였고 김재춘은 혁명동지 8기생들에게 철퇴를 가했습니다.
혁명은 같이 했지만 먹거리는 같이 나누어 먹을 수 없다는 비정한 정치세계의 부끄러운 단면을 보여준 것이지요.
춘추전국 시대에 월(越)나라의 모사 범려는 월왕 구천을 섬기면서 원수인 오(吳)나라에 복수를 하고 난 뒤 미련없이 모든 직위를 버리고 제(齊)나라로 망명하면서 대부 문종에게 " 당신도 빨리 그자리를 띠나시오. 월왕 구천은 고생은 같이 할 수 있어도 영화는 같이 누릴 수 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새가 다 잡히고 나면 좋은 활은 창고에 집어넣어버리고 교활한 토끼가 다 잡히고 나면 사냥개는 삶아먹힐 뿐입니다."라는 편지를 보냈는데, 과연 문종은 우물쭈물하다가 월왕 구천으로부터 사약을 받고 죽임을 당했다는 고사가 생각나서 한줄 덧붙였습니다.
飛鳥盡良弓藏 狡兎死走狗烹
(비조진량궁장 교토사주구팽)
《3ㆍ4공화국 政治秘史 제8회》
☆박정희와 김재춘의 관계☆
김재춘은 반혁명 사건에 연루되어 장도영 최고회의 의장과 박치옥, 문재준 등 5기 동기생들과 함께 된서리를 맞았는데 어떻게 해서 방첩대장이 되고 자신에게 철퇴를 가했던 중정부의 수장 자리에 오르게 되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그것은 박정희와 김재춘은 과거에 같이 근무한 인연도 있지만, 5.16 거사일에 보여준 탁월한 능력과 기지를 발휘하여 박정희 장군을 도왔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6.25전쟁 때는 박정희가 9사단 참모장일 때 그밑에서 군수참모를 하였으며 또 박정희가 영천 육군 정보학교장을 할 때 교관으로 같이 근무한 인연이 있습니다.
김재춘은 박정희와 함께 근무하면서 받은 신뢰와 존경심 때문인지 1960년 4.19혁명 때 6관구(영등포)참모장으로 있었는데 계엄사령부에서 진압군에게 실탄을 지급하라고 했을 때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으로 있는 박정희에게 "사령관님, 계엄사가 실탄을 지급하라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조언을 구할 정도였습니다.
"실탄 지급은 참상을 불러온다. 절대 지급하면 안돼!"라는 박정희의 조언을 듣고 실탄을 지급하지 않았습니다. 그 일로 김재춘은 항명죄에 걸려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가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함으로써 다시 6관구 참모장에 컴백하였습니다.
5.16 거사 당일에는 6관구 사령관 서종철 장군(육사1기)을 제끼고 자신이 6관구 사령부를 혁명군 지휘부로 쓰도록 박정희에게 내주었으며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의 지시를 받고 혁명주체세력을 체포하러 온 육본 헌병차감 이광선 대령을 설득하여 혁명군에 끌어들이는 솜씨를 발휘하였습니다.
나중에 부대가 소란스럽다는 보고를 받고 부대에 나타난 서종철 6관구 사령관과 부사령관에게 권총을 들이대며 "오늘부터 저의 상관은 박정희 장군입니다. 사령관님도 혁명에 가담해야 살 수 있습니다."라고 설득과 협박으로 혁명대열에 끌어들였습니다.
그날 김재춘의 활동이 없었다면 혁명은 실패 하였을 것입니다.
육군참모총장의 지시를 받고 혁명 주동자들을 체포하러온 이광선 대령과 헌병대 병력에게 혁명군 지휘부가 체포되었다면 100% 실패로 끝났을 것이라는 것이 당시 그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의 뒷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박정희의 민정 참여를 반대하다가 중정부장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3ㆍ4공화국 政治秘史 제9회》
☆육사 11기가 어떻게 혁명 위원회에 끼어들었는가?☆
5.16군사혁명 위원회에 육사11기가 끼어들었습니다.
그 경위는 이렇습니다.
그 당시 대위급 장교였던 육사 11기들이 학군단(ROTC)과 방첩대에 많이 포진되어 있었습니다.(61년에 ROTC 1기를 모집하여 교육중이었음)
그때 가장 발빠르게 움직인 사람이 동숭동 서울대학교 학군단 교관으로 있던 전두환 대위였습니다.
전두환 대위는 5월 16일 아침 8시에 육본으로 가서 동태를 파악한 뒤 김종필을 만나 우리에게는 왜 연락을 하지 않았느냐며 불평을 하였습니다.
김종필은 연락한 여력이 없었다며 이후부터는 행동을 같이 하자고 전두환을 다독거렸습니다.
그래서 전두환. 노태우, 손영길, 이상훈, 이동남, 김복동, 최성택, 정호용 등 11기들이 혁명위윈회에 가담하게 되었으며 강영훈 육사교장의 반대를 무릅쓰고 5월 18일 생도들을 동원하여 동대문에서 서울시청 앞까지 혁명지지 행진을 하였습니다.
그날 육사 생도 1000여명의 시가행진이 혁명의 성공을 확신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약간 흔들리던 사람들도 혁명에 동조하는 세력으로 돌아선 것입니다.
이를 계기로 11기 대표 전두환은 박정희로부터 크게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전두환에게는 정치군인이라는 딱지가 붙어 다녔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최고회의에 들어가 박정희의 총애를 받으면서 장차 승승장구하게 될 발판을 굳히게 된 것입니다.
《3ㆍ4공화국 政治秘史 제10회》
☆중정의 4대 의혹사건이란?☆
혁명에 성공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민정이양을 하고 군으로 복귀하겠다고는 했지만, 막상 정권을 잡고보니 손을 봐야할 곳이 한두군데가 아니었습니다.
금고에는 달러 한장 없지, 경제는 바닥이지, 온 산천은 갈퀴로 긁어서 벌건 민둥산이지, 물관리가 되지않아 비가 오지않으면 태반이 모내기를 못할지경이고 또 홍수가 나면 전국에서 이재민이 속출하는 참혹한 현실을 두고 군으로 다시 복귀한다는 것은 무책임한 처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군복을 입은채로 정치를 할 수없으니, 민간복장으로 갈아입어야겠다고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정치를 하려면 정당이 필요하고 그 정당을 업고 대선에 뛰어들어야 하며 이를 뒷받침 해줄 수 있는 정치세력이 있어야 하기때문에 참신한 기존정치세력을 끌어들이게 된 것입니다.
이런 아이디어는 김종필 중정부장과 중정간부들의 머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창당을 하고 당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정치자금이 필요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중정에서 총대를 메고 정치자금을 마련하려고 손을 댄 것이 문제가 된 "4대 의혹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첫째가 증권파동 사건입니다.
그 당시는 지금과 같이 증권시장이 활발하게 움직이던 시절이 아니어서 경제계에 몸담고 있지않은 일반시민들은 증권이 무엇인지 잘 몰랐습니다.
그럴때인데 중정은 증권계의 투기꾼인 윤응상이라는 사람을 끌어들여 한국전력 대주주인 농협에 압력을 가해 12만 8천주를 5%씩 싼 가격으로 시중에 방출시켜 그중 70%인 8억원어치를 중정이 관리하다 주가 폭락으로 138억원의 손해를 끼쳤다는 것입니다.
주가 폭락으로 인해 5,340명이 자살소동을 벌이는 등 사회적인 문제가 발생하자 최고회의 특별감사단이 조사를 하게 되었고 관련자들이 구속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두 번째는 새나라 택시 사건입니다.
한국의 자동차 사업이란 처음에 시발택시라고 하여 미군이 전쟁에서 쓰다버린 군용 찦차를 개조하여 운행하였는데 중앙정보부가 자동차 사업을 육성한다는 명목으로 "새나라 자동차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일본에서 "닛산" 자동차 500대를 한대당 900달러에 수입하여 1800달러씩에 팔아 수익금을 정치자금으로 유용했다는 의혹사건입니다.
세번째는 워커일 호텔 건축 관련 사건입니다.
중정은 서울시 광진구에 호텔을 지어서 관광수입을 얻어내려고 하였습니다.
그당시는 서울에 외국인들이 관광을 와도 마땅히 투숙할 호텔이 없었고 주한미군들에게도 휴양지로 제공하면 좋겠다는 아이디어를 낸 것입니다.
아이디어는 참신하고 좋았는데 공사자금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산업은행이 출자를 책임지고 교통부가 맡아서 공사를 하기로 했지만, 자금조달이 어려워지자 정부출자금 5억3천900여만원을 공사대금으로 빌려주었는데 막대한 자금을 중간에서 가로채 유용하고 군 공병대 병력과 장비를 동원하는 등의 무리가 발생해 시끄러웠던 사건입니다.
네번째는 빠칭코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재일동포 사업가 김태준 등이 관련되어 일본에서 빠칭코라는 도박성 기계를 들여와 사업을 하다가 들통이 나 중정이 곤욕을 치루었던 사건입니다.
이 4대의혹 사건은 떠들썩하게 정치 스캔들로 비화됐지만, 정치차원에서 적당히 조사하고 마무리 되었습니다.
1963년 김종필 중정부장은 이 사건으로 중정부장직에서 물러나 외유길에 오르면서 "자의 반 타의 반"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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