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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조선잡사(24)/받은 글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83회

 

며칠 후

사헌부 장령 박숙달이 다시 아뢰길

 

‘정인지는 본래 성품이 이를 탐해서 날마다 산업을 일삼고 그 인근 사람의 집을 침노하여 빼앗아 아울러 가졌으니 만일 정인지를 삼로로 삼으면 신은 후세에 비난을 남길까 두렸습니다.

만약 마땅한 사람이 없으면 삼로와 오경을 각 각 임명하지 말고 한 명으로 겸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다시 수정해서 아뢰 것이다.

 

그러자 영상 한명회는

 

“ 다만 정인지가 장리한다는 것은 들었을 뿐 재산을 불린다 것은 듣지 못했습니다.

만일 장리하는 행위를 재산을 불리는 것이라 하면 지금의 관리중에 재산을 불리는 자가 누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웃집의 매매라는 것도 서로 합의하에 했다면 어찌 죄가 됩니까?“ 라고 하여 정인지를 적극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

 

결국 성종 임금이 결론을 내리게 된다

 

성종 왈

“비록 장리(=長利: 봄에 곡식(穀食)을 꾸어 주었다가 가을에 받을 때에, 그 본 쌀의 절반(折半)이 되는 이자) 라 해도 백성을 해치지 않는 다면 재산을 불렸다고 할 수 없고 비록 이웃집아울러 차지하더라도 원하여 스스로 서로 매매한다면 또한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하물며 정인지는 여섯 조정에 벼슬하여 공이 중대하고 또 큰 허물이 없다.

전하여 들은 말로 경솔하게 논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자 사헌부 장령 박숙달은 또 다시 아뢴다.

“신은 죄를 가하고자 함이 아니라 다만 재산을 불린 사람은 임금의 스승이 되는 것은 마땅치 않으므로 감히 아뢸 뿐입니다.하물며 성균관 유생도 도한 불가하다고 하여 상소하고자 하기에 이르렀는데 저들의 말도 이치가 있으므로 미친 선비라고 하여 그 말을 버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라고 다시 상소를 했다.

 

반면에 동지사 서거정은

“가령 정인지가 재산을 불렸다고 해도 삼로로 삼는 데 무슨 방해가 되겠습니까?

더구나 정인지의 재주가 다른 시대에도 따를 만한 사람이 없을 정도이니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라고 주장을 했다.

 

 

이와같이 조정에서의 논의는 두파로 갈라졌다.

영의정 정창손.영사 한명회.동지사 서거정 등 이미 벼슬이 높은 사람은 장리로 돈을 버는 것이 문제가 없음을 들어 정인지를 삼로로 삼는 것은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는 것이고

 

젊은 관리들과 성균관 유생들은 치부한 사람은 왕의 스승으로서 부당하다는 논리다.

 

성종은 결국

시끄러운 일은 피하고자 정인지의 삼로 임명은 중지했다.

 

이처럼 조선은 상업과 공업 등 부를 증진시키는 기초산업은 천시하면서도 자신들의 부를 위한 이자놀이는 옹호했다.

 

그리하여 조선은 이자놀이는 성하고 산업은 발달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놈의 유학이 문제였다.

 

대다수 백성들은 5백년 내내 연리5할이 넘는 고율 이자 고통을 당했다고 할 수 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84회

 

짝퉁 판매 전문가 안화상~~

 

조선 후기 서울에는 세 군데 큰 시장이 섰다, 운종가(종로2가). 배오개(종로5가). 소의문(서소문동)이다.

 

사람이 하도 많아 어깨와 등이 부딧치고 갓을 똑바로 쓰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난전이 난립한 서소문 시장은 짝퉁의 온상이었다고 한다.

한 사람만 속이면 배의 이득을 볼 수 있었다.

 

서울내기 李生은 서소문 시장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다. 짝퉁 상인에게 속는 어리숙한 시골사람을 비웃으며 자기는 절대 속지 않을 것이라 자부했다.

 

하루는 시장을 지나가는데 아이와 상인이 다투고 있었다. 상인은 아이가 가져온 물건을 열푼에 넘기라고 하고 아이는 그 돈으로는 못판다고 하고....실랑이를 벌였다.

 

상인은 훔친 물건이 아니냐며 의심하고 아이는 상인에게 욕을 하고 달아났다.

 

이생이 아이가 가진 물건을 보니 진귀한 황대모(바다거북 등 껍질) 였다.

이생은 아이를 달래어 열두품에 물건을 넘겨 받았다. 그런데 나중에 일고 보니 엽소 뿔로 만든 가짜였고 아이는 상인의 아들이었다.

 

상인과 아이의 짜고 치는 고스톱!

이생은 父子의 연극에 감쪽같이 속았다.

이옥의 「시장 사기꾼에 관한 기록(市奸記)에 나오는 이야기다.

그렇게 조선시대에도 지금처럼 짝퉁이 많았다.

 

짝퉁 상인의 표적은 귀한 약재와 골동품이었다.

가장 심한 것은 인삼이다.

 

대동법이 시행되면서 인삼 납품은 공인(貢人)이 담당하게 되었다. 인삼의 수요는 갈수록 늘어났지만 화전개간으로 인삼 산지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어 도저히 가격을 맞출 수는 없었다.

 

공인들은 도라지와 더덕을 아교로 붙이고나 인삼 껍데기에 족두리를 가루를 채워 넣어 가짜 인삼을 만들었다.

이를 조삼(造蔘0이라고 하다. 심한 경우에는 납을 넣어 무게를 늘렸다.

 

쓰시마 번주가 조선 상인에게 사들인 가짜 인삼을 애도 막부에 바쳤다가 가짜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한.일간 외교문제로 까지 비화 한 적도 있을 정도다.

 

영조 때 편찬된 법전 ‘속대전’에 인삼 위조에 대한 처벌 조항이 실릴 정도였다.

 

이를 위폐제조에 준하여 엄벌햇지만 가짜 인삼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심지어 임금에게 바치는 진상품조차 작은 인삼풀로 붙여 크게 만든 부삼(付蔘) 이었다.

 

골동품도 짝퉁이 많았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야사 기록물인 ‘추재집’에 나오는 이야기다.

 

손씨 노인은 골동품 애호가였지만 감식인이 없었다.상인들이 가져온 가짜 골동품을 비싼 값에 구입하는 일이 허다했다. 많던 재산은 순식간에 거덜 나고 끼니를 걱정하는 처지로 전략했다.

 

짝퉁이 정치적으로 이용된 사례도 있다.

1669년 중국에 사신으로 간 민정중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의 어필을 구해 왔다.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라는 ‘비레부동.非禮不動’ 네 글자였다.

 

송시열은 이 어필을 보고 감격하며 화양동 바위에 새겨 놓았다.

그러나 그 글자가 의종의 어필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조선 사신들이 중국에 가면 작퉁 상인들이 몰려와 온갖 가짜 물건을 팔았으니 이 역시 가짜는 아닌지?

 

송시열이 세상을 떠난 뒤 ‘비례부동’ 글자를 새긴 자리에는 만동묘(萬東廟 )가 들어섰다.

송시열의 문인들은 이곳에서 임진왜란 때 구원병을 보낸 명나라 신종과 마지막 황제 의종의 제사를 지냈다.

 

만동묘는 ‘숭명배청’의 이념을 상징하는 노론의 성지가 되었다.

 

노론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崇明1排淸(숭명배청)은 국가의 지배이념으로 자리를 잡았으며

 

조선왕조는 멸망할 때 까지 이를 견지했다.

 

모두 명나라 의종의 어필(비례부동)이 계기가 되어 일어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병자호란도 이런 지배 이념 때문이다.

짝퉁 한 점이 조선 정치사의 물줄기를 바꾼 것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85회

 

사기꾼 편사 ~~~

 

‘세상에 이러한 인간들이 있은 지 오래다. 간교함이 날로 심해지고 사기가 날로 들끓고 있다. 굶어 죽은 시체를 업고서 밤에 남의 집 문앞을 열어젖히고 주인을 급히 부른다.

성질을 돋게 하여 서로 주먹질을 하는데 까지 이른 뒤 비로서 큰 소리로 “ 주인이 내 친구를 죽였다. 관가에 고발하겠다.”라고 한다.

주인이 영문도 모르고 무거운 대가를 치르고서야 겨우 가라앉게 된다.

<이옥. 성진사전>

 

유약하고 졸렬한 사람이 억센 사기꾼에게 놀아나는 세상. 이런 세상은 늘 있어 왔고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역사에 기록된 사기 사건들은 오늘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시장에서 가격을 속이고 작퉁을 진짜라고 속이고 없는 죄를 만들거나 자기 죄를 남에게 덮어 씌우고 각 종 비용이나 투자금을 가로 채는 유형이 가장 일반적이다.

이처럼 예나 지금이나 별 다르지 않다.

 

이렇게 반복적으로 남을 속여 각종 이득을 취하는 사람을 요즘마로 사기꾼, 조선시대엔

편사라 불렀다.

 

<광해군 일기>에 중앙 정부의 재정을 대상으로 한 사기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간큰 도둑이다.

지방에서 거두워 들인 전세( 田稅)가 한양에 도착 하자마자 사기꾼들이

명사의 이름을 사칭하여 빼가는 일들이 상당히 빈번했음을 보여 준다.

 

그런데 18세기 후반 이후로는 이러한 기록들이 유독 자주 눈에 뛴다. 정조임금은 초계문신들에게 당대의 폐습을 말하며

“ 온 세상의 군중들이 내달리듯 거간꾼이나 사기꾼의 와중으로 빠져든 지 무려 몇 년이 되었는가?”라고 한탄하기도 한다.

 

풍속이 각박해서 사기꾼이 창궐하기도 하지만 그 속에는 빈곤의 문제도 도사리고 있었다.

이옥의 “성진사전” 에는 이 문제가 들어난다.

 

친구의 시체를 활용하여 돈을 뜯어내는 간교한 사기 사건을 예로 들어 세태를 비판하는 한편 죽은 아이의 시체를 활용하여 부짓집 재물을 탐하는 생계형 사기꾼이 동시에 둥장한다.

 

한편, ‘청구야담’에 실려 있는 ‘이씨 무인 이야기’에는 세상 물정에 어두운 시골 무인의 모든

재산 300냥을 한양의 사기꾼이 가로채는 사기 사건이 드라마 처럼 펼쳐진다고 한다.

 

시골 무인이 벼슬을 구하기 위해 한양으로 올라 왔는데 눈앞에 병조판서 사환이 나타났다.

 

무인이 건장한 노복을 데리고 좋은 말을 타고 오는 모습을 보고 벼슬을 구하기 위해 상경한 사람임을 알아차린 사기꾼이 위장하여 접근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 물정에 어두은 무인은 사황의 갑작스런 등장을 의심하기 보다는 기회로 받아 들였다.

 

사기꾼은 바로 작업에 들어간다.

“나리 행중에 지나신 것이 얼마나 되시는지요?‘라는 물음에 바로 ’300냥이다”라고 답을 하는 순간 무인은 사기꾼의 손아귀에 들어간다.

사기꾼은 차근차근 그에게서 돈을 뜯어내기 시작한다.

 

사기꾼은 세 명의 인물을 조작하여 등장시킨다.

 

첫 번째는

과부로 지내는 병조판서의 누님이다. 그것도 매우 극진히 생각하여 웬만한 부탁이라면 들어주는 누님이다.

 

두 번째는

병조판서가 매우 신뢰하여 자문을 구하는 동료다.

 

세 번째는

병조판서의 애첩이다.

 

더욱 치밀한 것은 뇌물의 배정이다. 무인이 가진 돈이 300냥 임을 확인한 사기꾼은 300냥에 맞게 작업을 한다.

 

병조판서의 피붙이로 조작된 인물에게 100냥.

신뢰에 근거하여 공적 의견을 나누는 동료에게 쉰 냥.

총애하는 애첩에게 쉰냥.

그리고 무인의 외모를 꾸미는데 쉰냥.

총 250냥을 배분한 것이다.

나머지 쉰냥은 무인이 서울에서 생활하는데 필요한 비용이다.

 

누가 봐도 완벽한 섭외 대상을 꾸며 내고 뇌물을 쓰되 무인 자신에게 투자하는 것까지 마련했으니 무인이 사기꾼에게 넘어가는 것은 당연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86회

 

조선시대 위폐 제조업자~~

 

임진왜란 이후부터 동전의 유통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으로 1678년에 상평통보의 발행과 유통 체계가 완성되었다.

그 결과 동전의 유통 범위가 상인이나 일부 부유층을 넘어 일반 백성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18세기 초에 이르면 통화량이 급증하고 18세기 중반을 전후하여 전면적인 화폐 경제 생활로 전환되기 이른다.

이러한 과정에서 동전 제작에 민간이 합법적으로 관여하다 보니 지방으로 까지 확산되어 널리 퍼지게 되었다.

 

특히 구리로 동전을 위조하면 세배 정도의 이익이 발생하므로 민가에서 놋그릇 절도가 횡행할 정도였고 이는 결국 동전 유통에 혼란을 야기하므로 국가에서 엄하게 금지시켰다.

 

문제는 화폐제작 기술이다.

동전제작을 민간이 담당했으므로 민간의 화폐제작기술은 국가의 통제를 벗어났다.

따라서 국가의 명령을 어기고 불법으로 동전을 제조하는 일이 계속되었는데

이러한 화폐 제작업자를 도주자(盜鑄者)라고 했다,

 

화폐 위조는 조선 초기부터 큰 문제로 대두되었다 집현전 직제학 이계전이 지폐 위조 폐단의 심각성을 제기한 기록이 나온다.동전 사용이 본격적으로 시행된 17세기 말에 이르면 동전 위조가 매우 심각한 국가적 문제로 등장했다.

 

1695년

영의정 남구만은 회폐 위조의 페단을 막기 위해 제작자는 물론 공범까지 강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숙종 임금 역시 이를 허락했다.

정부의 강력한 단속으로 위조.화폐 제작업자들은 서서히 서울을 떠나 산속이나 도서지역으로 이동했다.심지어 바다에 배를 띄우고 그 안에서 위폐를 제조하기도 했다.

영.정조시대에도 위조 화폐와의 전쟁은 계속 되었다.

 

<승정원 일기>에는 1724년 인천 앞바다에 잇는 선감도의 위조화폐 현장을 급습한 내용이 등장한다. 단속 정보가 세어 나가 위조 화폐 제[작업자들을 놓쳤지만 현장에서 화폐위조를 위해 사용했던 구리 3,000근.납 2,000근.석탄 200섬 등을 압수했다.

그 양이 실로 어마어마하여 위조 화폐 제작 규모를 알 수 있다.

이옥이 남긴 <석굴 도주자>라는 글에서도 위조 화폐 제작 현장과 그 실상이 그려져 있다고 한다.

 

경상남도 진주 지역의 토포군(討捕軍)이자 최고의 염탐꾼 허남의 눈에 아름다운 세 명의 여성이 들어왔다. 그들은 돈을 물쓰듯 하면서 많은 물건을 구입했다. 구입한 물건을 다섯명의 짐군이 운반했다.

허남은 이들 뒤를 밟았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고성의 한 동굴이었다.동굴안에 쇠를 녹이는 십여 개의 화로가 있고 사람들이 가짜 상평통보를 만들고 있었다.

그들은 위폐 제작이 탄로 나자 허남에게 뇌물을 주고 설득한 후 돌려보냈다. 이후 허남이 여러 명의 포교들을 이끌고 위조 화폐 제작 현장을 급습했을 때는 이미 모두 도망하고 없었다.

 

기업 규모로 위폐를 제작하고 시장을 통하여 위조된 동전을 세탁하는 모습. 남녀노소가 집단으로 은신처를 마련하여 생활하는 모습 등이 생생하게 확인된다.

19세기에 들어와서도 이러한 위폐 제작과 유통을 통제할 수 없었다.

위폐가 너무 많아 시장이 마비될 정도였다

 

가짜 동전들은 함석을 사용하지 않고 구리와 납만을 섞어 만들었기 때문에 정상적으로 주조된 동전에 비해 가벼웠고 품질 역시 다소 떨어졌다. 하지만

백성들은 이를 식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조정은 위조 근절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상평통보 뒷면에 발행 관청에서 더하여 천자문순으로 일련 번호를 새기는 방법이 논의되기도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민간에서 제작된 동전이 그 지역 화폐처럼 쓰이기도 했다.

 

특히 동전의 가치가 제작비용을 크게 상회하면서 위조 역시 계속 늘었다. 훙선 대원군의 당백전 발행 정책이 실패로 돌아간 데에도 역시 화폐의 위조가 큰 영향을 미쳤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87회

 

상투 속 더위를 이겨 낸 ‘백호’~

 

「백호 친다」 는 말의 유래

 

사극이나 옛 그림에서 상투를 튼 모습 보면 여름에 상당히 덥겠다는 생각이 든다.

머릿속에서 발산되는 열기를 어떻게 감당했을까?

 

그러나 그런 걱정은 기우였다.

 

옛 사람들은 상투를 틀 때 열기를 피하기 위해 정수리 주변의 머리카락을 둥그렇게 깎아냈다.

이것을 ‘백호친다’라고 한다.

 

정수리 주변의 머리카락을 깎아 낸 다음 ‘주변머리’를 모아 빗어 올려 정수리 부근에서 상투를 틀었다.

 

그러니 만약 머리를 풀어 헤치면 ‘소갈머리’가 없어 아주 재미있는 모습이 연출된다.

 

죄인들은 상투를 틀지 못하고 머리를 풀어 헤치게 되어 있다.

 

그러면 언제부터 상투를 틀었을까?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삼국지위지동이전’에는 한반도 사람들이 관모를 쓰지 않고 상투만으로 다녔다는 기록이 나온다고 한다.

 

고구려 고분에도 작은 상투 모습이 보인다고 한다. 거의 2천여년 가까이 상투를 트는 모습을 유지했었다고 볼 수 있다.

 

1895년 김홍집 내각이 일본의 강요에 의해 단발령을 내린 것은 그 간 세월동안 이어져온 전통파괴를 위한 혁명적 사건이었던 것이다.

 

단발령에 차열하게 저항했던 이유다.

 

몽고 지배기에 고려에 나타난 ‘펑크’ 스터일~

 

그와 비슷한 사건이 역사상 한번 더 있었다.

몽고에 의해 지배당했던 고려 말기의 일이다.

 

몽고의 풍습에 따라 이른 바 ‘개체변발’이란 것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상투를 트는 것과 정반대로 정수리 부근의 머리만 남기고 나머지는 께끗이 민 다음 뒤통수에서 묶어 길게 땋아내린 것이다.

 

1278년 충렬왕이 변발령을 내렸는데

다만 이 때의 조치는 관리들에 대한 것으로 일반 백성이 이에 따랐다는 기록은 보이질 않는다.

 

‘신체발부는 부모님에게서 물려 박은 것이니 내 머리를 벨 수는 있으나 내 머리카락을 자를 수는 없다’며 버티던 그 머리카락이 아닌가?

 

그럼에도 머리카락을 깎아낸 것을 보면 상투속이 덥기는 했을 것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88회

 

군대 대신가는 알바!!!!

 

조선시대 16~60세 남성(양인)은 수시로 군사훈련을 받다가 유사시 동원되었다,

오늘날 동원 예비군과 비슷하다.

 

이러한 병역 의무를 軍役(군역)이라 하는데

布木(포목)을 내면 면제 받았다.

 

군역 대신 낸다는 의미로 ‘軍保布(군보포)’ 줄여서 ‘군포’라고 부르기도 했다.

 

군포는 1년에 두 필이었으나 1751년(영조 27년) 균역법이 시행되면서 한 필로 줄었다,

‘속대전’에 따르면 배 한 필의 가격은 두 냥이다.

 

유마주는 일기 ‘흠영’에서 여덟 식구 한 해 식비로 쉰여섯 냥을 썼다고 기록했다,

한 사람 식비가 일곱 냥인 셈이니 균역법 시행 전까지 양인 반년치 식비를 세금으로 내야 생업에 온전히 종사할 수 있었다.

 

만약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군역을 받을 수 없다면 한 사람 몫의 한 해 식비를 냈을 것이다.

1년에 한 필로 줄었지만 여전히 버겨워 하는 사람이 많았다.

 

생업을 잠시도 손에서 놓을 수 없고 군포를 낼 여력도 없는 이들은 날품팔이를 고용했다.

이렇게 품삯을 받고 군역을 대신 하는 사람을 代立軍(대립군)이라 했다.

대립군은 품삵을 받고 군대에 가는 대신 가는 아르바이트였다.

 

대립군은 나라에서 직접 고용하기도 했다.

 

“영동지방에서 강릉과 양양이 재해가 가장 심합니다. 두 고을 기병이 지금 당번이오나

옷과 물품이 허술해 얼어 죽을까 염려됩니다.

 

그러니 번 서는 것을 한달 감해 주고 쓰고 님은 군포로 雇軍(고군: 품팔이)더러 대립을 시키는 것이 편할 듯 합니다<<현종실록 4년 1663년 11월 27일>>>

 

병조판서 김좌명은 강릉과 양양 재해가 심해 해당지역의 정규군을 운용하기 힘드니 재정이 허락하는 범위내에서 대림군을 쓰자고 제안 한 것이다,

급한 대로 품삯을 주고 일꾼을 고용해 군졸로 쓰자는 의견을 제시한 것이다.

 

대립군은 임시방편으로 순기능이 없지 않았으나 역기능이 더 컸다.

일반인과 군졸이 대립군을 악용하는 일이 많았다.

 

1700년 (숙종 26년) 이세정은 과거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가 의주로 쫓겨나 군역을 이행하는 벌을 받았다.

 

그는 과거 시험장을 지키는 군졸을 매수해 자기 노비 최말선을 대립군으로 쓰게 했다.

 

최말선이 시험장을 지키게 되자 이세정은 마음놓고 부정행위를 저질렀다,

답안을 고쳐주는 이들과 함께 시험을 치렀고 급제까지 했다.

 

군졸이 멋대로 대립군을 사서 임무를 맡기기도 했다,

 

<승정원 일기> 에 따르면 1638년(인조 16년) 비변사는 파발이 지체되는 문제의 원인으로 담당 군졸이 대립군을 사서 쓰는 일을 지목했을 정도다.

 

1776년(영조 52년)에 구선복은

束伍軍(속오군)에 소속된 이들이 “習操(습조: 훈련)할 때만 사람을 사서 대람을 함으로써 눈앞의 죄를 면한다.”라고 지적했다.

 

돈 있는 군졸은 힘든 훈련이 닥치면 대립군을 대신 보낸 것이다.

 

품삯을 받는 몸이니 대립군은 “을” 입장인 것 같은데 그렇지만은 않했다.

한양에서는 대립군이 군졸을 갈취하는 일도 있었다.

 

1648년(인조 26년) 사헌부는 서울 주민이 성곽을 방비하려고 상경한 군졸을 상대로 대립군을 쓰도록 강요한다고 보고를 했다. 억지로 대립군을 쓰게 하고 하면서 가격을 멋대로 책정해 군졸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그들은 한양에 왔으면 꼭 대립군을 써야 한다며 군졸을 으르고 협박을 했다.

상경한 군졸들은 눈뜨고 코 베인 격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대립군이지만 누군가에겐 꿈을 실현할 통로였다.

 

장지연(張志淵)은 여러 인물의전기를 모아 ‘ 일사유사(逸士遺事’를 간행했다.

이 책에 나오는 효녀 부랑은 장수가 되고픈 여인이었다.

노쇠한 아버지가 징집되자 부랑은 남장을 하고 아버지를 대신해 군졸이 되었다.

부랑은 대립군이 되어 꿈을 향해 첫발을 내디덨다.

 

대립군은 대부분이 날품팔이였던지라 군포를 낼 여력이 없었다.

 

당연히 자기군역은 그것대로 또 이행하고 여기에 더해 다른 사람의 군역까지 맡았으니 대립군은 군에서 먹고 자는 군졸이 아닌 군졸이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89회

 

세종대왕이 창제한 훈민정음은 조선에서 얼마나 사용했을까?

 

1446년 음력 9월 훈민정음 반포, 훈민정음 해례본이 같이 간행되었는데 이 책에 훈민정음의 창제목적과 원리, 사용법 등이 있지만 공적인 교육기관은 없이 가족등 사적으로 공부를 했다

 

세종은 하급 관리를 뽑을 때 훈민정음을 시험 과목에 추가, 삼강행실과 같은 국가 윤리를 훈민정음으로 풀어 백성들에게 가르치도록 했으며

 

사서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하게 했고 백성들이 관가에 제출하는 서류를 훈민정음으로 작성토록하며 형률 적용 과정에서 그 내용을 훈민정음으로 번역해 알려주도록 했다

 

뿐만아니라 궁중의 여인들에게 훈민정음을 익히도록 하고 세종 자신은 조정의 대신과 기관에 훈민정음으로 글을 내리기도 했으며 이후 민간과 조정의 일부 문서에서 훈민정음을 사용했다

 

 

[첫 번째]

 

과거시험 과목으로 훈민정음이 편입된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만들고 나서 새 문자가 일반 백성들뿐만 아니라 사대부를 비롯한 지배계층에서도 통용되기를 바랬다.

 

조선왕조실록 세종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吏科(이과: 하급관리등용시험)와 吏典(이전: 이조의 한 부서, 법전)에 取才(취재: 시험으로 인재를선발) 때는 훈민정음도 아울러, 시험에서 뽑게 하되 비록

義理(의리)는 통하지 못하더라도 능히 合字(합자: 한문+ 한글) 하는 사람을 뽑게 하라.

<조선왕조실록 세종 28년, 1446년 12월 26일>

 

세종은 훈민정음을 간행하고 난 뒤 일련의 정책을 펼쳐서 새 문자 보급에 박차를 가했다.

 

상기 왕조실록 기사는 하급관리인 서리를 선발하는 시험에서 훈민정음을 익힌 사람을 뽑으라는 세종의 명을 기록하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세조 때에는 문과의 초장시험에 훈민정음을 반영하였고 세조 10년에는 성균관 유생들의 교육과정에 훈민정음을 과목으로 포함하자는 건의까지 나온다.

 

세종과 세조 시대에 과거 시험 과목으로 채택될 만큼 위상이 높았던 업무는 그 후 유생들과 관리들 사이에 빠르게 퍼져나간다.

 

이렇듯 언문이 성행하자. 숙종대에 이르러 남구만 같은 학자가 언문의 폐단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릴 정도였다.

 

그의 상소에 따르면

 

문과에 응시하는 유생들 중에 어려서부터 언문으로 글을 익혀 읽기 위주의 공부만 하다가 정작 과거에 오르면 한문 편지 한 장을 쓰지 못하는 유생들이 많다고 비판하고 있다.

 

언문 때문에 한문 실력이 낮아졌다고 상소할 만큼 언문이 유생들에게 널리 퍼져 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두 번째 ]

 

언문으로 교서를 내린 왕 선조임금

 

그러나 조선에서 대부분의 공식 문자 생활은 한문으로 이루어졌다. 그런 중에 선조는 왕으로서 공식 문서인 교서에 언문을 사용한 왕으로 주목을 끌고 있다.

 

물론 선조임금이 언문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고 사연이 있었다.

 

 

교서는 국왕의 명령을 담은 문서로서 보통 신하가 글을 이어 올리면 왕이 검토하여 완성하는 과정을 거쳤다.

 

물론 한문으로 작성하는 게 원칙이었다.

 

그런데 선조는 왜 언문으로 교서를 지어 반포했을까?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90회

 

 

선조 25년 1592년 4월 13일,

 

왜군이 700여 척의 배를 앞세워 부산포로 쳐들어왔다. 미처 전쟁 준비를 하지 못했던 조선은 왜군의 침략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파죽지세로 몰려드는 왜군을 감당하지 못하고 속속들이 관군이 무너졌다는 패보가 전해오는 중 중에 한 가닥 희망은 백성과 천민들이 뭉쳐 의병을 활동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혼란 중에 선조는 전국에 교서를 붙이게 한다.

 

언서로 방문을 많이 써서 송언신에게 보내어 민간을 효유(알아듣고 깨우침)하게 하라.

 

예컨대 류성룡이 어떤 중과 함께 북도에 가서 정탐한다 하니 또한 언서를 보내어 효유하게 하라. 등이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25년 8월 15일>

 

선조가 언서로 방을 써서 민간에 유포하도록 한 것은 백성들을 달래고 한편으로는 백성들을 전쟁에 참여하도록 독려하기 위함이었다.

 

비록 유쾌한 용도로 사용된 것은 아니었지만 이러한 기록들을 통해 임진왜란 당시 언문이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의 중요한 의사소통의 수단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다. 임진왜란 당시 백성들의 상당수가 언문을 알고 있었다는 점 또한 짐작할 수 있다.

 

임진왜란이 1592년에 발발했으니 훈민정음 창제 후 150년이 지난 시점이다.

그 사이에 언문은 일반 백성들에게 중요한 소통의 도구로 자리 잡고 있었다.

 

[세 번째]

 

철저한 언문 사용자 왕실 여성~~

 

훈민정음이 창제된 후부터 조선의 왕도는 일상에서 쓰고 읽을 줄 알았던 것으로 보인다.

 

선조처럼 언문을 공식 문서에 사용한 경우는 드물었지만 비공식적인 언어생활에서 언문은 왕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문자였다.

 

무엇보다도 왕실 여성들과 소통을 하기 위한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왕실 여성이라 함은 위로는 대왕대비, 왕대비 아래로는 중전을 비롯하여 여러 비들과 자녀들을 아우른다.

 

왕실 여성들은 대부분의 문자생활에서 철저하게 언문을 사용하였다. 왕실 여성들은 사적인 일에는 물론이고 수렴첨정과 같은 공적인 일을 하는 경우에도 철저하게 언문을 사용하였다.

 

대왕대비가 수렴첨정을 하는 경우 발 안에서 언문교서를 내리면 신하들이 이를 받아 보고 그것을 다시 한문으로 번역한 뒤 공식 문서로 반포하였다.

 

한자가 한자가 공식 문자이던 당시 상황에서 언문 교시를 다시 한자로 번역해야 하는 일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 짐작되는 것. 그것은 왕이나 사대부 신하들이 왕대비와 소통할 수 있을 만큼 언문으로 쓰인 글을 모두 이해하고 쓸 줄 알았다는 사실이다.

 

다만 그들은 공식 문자생활에서 여전히 한문을 선택하는 관념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91회

 

이중 문자 생활을 한 사대부 남자들이 공식적인 문자 생활에서 한문을 쓰고 비공식적인 문자 생활로나 언문을 사용하는 이중 문자 생활을 하였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그들은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한자와 언문을 선택적으로 사용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의 내용 중에는 사대부들의 언문 생활을 짐작하게 하는 여러 가지 사건들을 찾아볼 수 있다.

 

자신의 첩의 죄과를 덮어주기 위하여 언문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건을 조작하려고 하다가 들통이 난 유인홍 사건

< 조선왕조실록 연산 2년 1400년 2월 3월 14일>

 

연산군의 기녀 모집에 선발되지 않도록 자신의 첩에게 꾸미지 말라는 당부의 의문 편지를 썼다가 발각되어 참형을 당한 '한 곤'이라는 선비 사건이 있었다

< 조선왕조실력 연산 11년, 1505년 5월 24일>

 

그 외에도 사대부들이 관계된 사건의 중심부에는 남녀 사이에 오간, 언문 편지가 단서가 된 경우들이 많았다.

 

우리는 그 사건들에서 언문이 사대부의 삶에 얼마나 보편적이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네 번째]

 

언문으로 상소를 올리게 된 백성들~~

 

조선시대 백성들은 억울한 일을 당하면 일차적으로 각 고을의 관찰사에게 고하고 거기서도 해결이 되지 않으면 사헌부에 고하고 그러고도 원통함이 남으면 신문고를 올려 왕에게 직접 고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백성들은 억울한 일을 문서로 작성할 능력이 없으므로, 억울함을 전달하는 방법은 여전히 막막하였다. 언문이 보급되자 문자생활이 가능하게 된 백성들 중에는 직접 서장을 작성하여 호소하는 백성들이 생기게 되었다.

 

어느 가난한 참판의 아내가 가난에 못 이겨 언문으로 상언(임금에게 글을 올림)을 하여 그 처지를 구제받은 이야기가 있고

<조선왕조 숙종 25년, 1699년 4월 3일>

 

직계 자손이 끊겨 제사를 지내기 어렵게 된 늙은 부인이 제사를 다른 자손에게 옮겨지도록 상언하는 일이 있다

<조선왕조실록 영종 19년, 1743년 2월 5일>

 

소박을 맞고 쫓겨난 여인이 시아버지의 상견례에 참여했다가 집안 남자들로부터 크게 모욕을 당하여 목숨을 끊으면서 남긴 억울함을 호소한 이야기 등

< 조선왕조실록 석종 27년 1700여 1년 4월 25일>

 

언문이 백성들의 소통 수단으로 산물 곳곳에서 그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여실히 들여다볼 수 있다.

 

한글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훈민정음, 언문, 한글 등으로 다양하게 불렸지만 우리 문자로서 그 가치를 확인하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문자는 사람대로 삶에서 들고 돌아야 살아남는다.

 

조선왕조 실록에 나타난 선조들의 삶에 계층을 망라하고 한글이 그 애환을 같이 하고 있다. 선조들의 애환을 담아낸 한글이 오늘날 우리의 삶을 싣고 있는 것이다.

 

<글, 정주리, 동서울대학교 교양과 교수. ‘조선 언문 실록’ 공동 저자>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92회

 

 

‘폐하' 글자 넣자 ~아니다 빼자~

 

한심한 싸움에 백성은 죽어 나가고

 

 

처절한 도시빈민 항쟁이 있었다. 당시 권력은 언론을 강압해 이를 철저히 은폐했다. 그래서인지 조금 생경하다.

 

1971년 '경기도 광주 대단지 항쟁'이다.

부도덕한 권력의 강제 이주에, 도시 빈민은 비조직적이나마 격렬히 저항했다.

 

이때의 강제 이주로 도시가 태동하였다는 사실은 더 생경하게 다가든다. 당시 이주단지를 관리한 서울시 산하 기구가 '성남출장소'다.

 

성의 남쪽이니, 여기서 말하는 성은 바로 남한산성이다.

 

남한산성은 산성이라기보다 읍성에 가깝다.

오랜 기간 경기도 광주 유수부였다. 동쪽으로 트인 너른 분지다. 농토도 제법 있어, 경작과 장기 농성이 가능했다.

 

이런 연유로 도성인 한양을 지키는 동쪽 방어성이었다. 총 길이가 12.2km다. 본성이 8.9km이니, 한양을 방어하는 유수부로 어울리는 격이자 규모다.

 

남문에서 서문으로, 굴욕으로 이어진 46일

 

이런 지리적 지위가 역사의 숙명으로 이어졌다.

 

1636년 12월 9일부터 1637년 1월 30일(음력)까지 52일간의 전쟁,

병자호란을 겪어야 했다.

 

무지몽매한 왕이 12월 14일 남문으로 쫓기듯 들어와 이듬해 1월 30일 서문을 나가기까지 46일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춥고 어두운 장면이다.

 

작지 않은 산성에, 적지 않은 군사 1만 3천. 군량 1만 4300석에 장류 220 항아리다.

 

아끼고 아꼈다면 능히 100일은 버텨내지 않았을까?

아둔한 김경징이란 자에게 강화도 수비를 맡긴 게 실책이었을까? 아니다.

 

주변국 변화에 둔감했고, 낡은 이데올로기에 나라의 모든 게 함몰되었으며 몽매한 혼군이 지도자였던 탓이다.

 

성벽 따라 걷는 걸음마다 묵직한 아픔이 아리게 저미니, 성에 짐 지운 숙명 탓일까?

 

도성이 함락되었으니, 백성들 안위는 어땠을까? 조정은 백성에게 관심이나 있었을까? 정반대다. 오히려 엉뚱한 행동에 몰두한다.

 

지금 시각으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의례다. 국체를 왕과 왕세자로 보았으니 당연한 처사였을까?

 

산성에 갇힌 조정이, 백제 도읍에서 군사작전을 펼치는 예로 온조왕에게 제를 올린다. 성에 갇힌 지 12일째인 12월 25일이다.

 

그래도 시련이 끊이지 않자, 이듬해 1월 8일 '엉겁결에 구차하게 행하였으므로' 부족하다 하여 다시 제를 올린다.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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