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163회
이정귀의 문제 제기 후 18년이 지난 1641년(인조 19년) 대제학 이식이 다시금 <선조수정실록>의 편찬 문제를 제기했다.
“잇달아 변란을 겪으면서 사초는 물론 민간에 떠도는 야사와 각 가문에서 전하는 서책들이 거의 모두 인멸되었습니다. 또 옛 일을 아는 신하들이 죽었거나 늙어서 조정에 있는 자는 한 두 명도 안 됩니다. 만약 다시 수년을 지나고 보면 신들과 같은 무리들도 점차 죽게 될 것입니다.”
<인조실록>
<선조 수정실록> 편찬은 이식의 상소로 급물살을 탔다.
처음에는 편찬의 방법론 상에 논쟁이 벌어졌다.
최명길 등은 “사마광이 <자치통감>을 편찬했듯이 수정작업은 이식이 전담하게 하고 실록청도 이식의 집에 설치하자”고 제안했다.
말하자면 사마천의 <사기>나 사마광의 <자치통감>이나 김부식의 <삼국사기>나 사관 1명이 책임을 지고 역사서를 일관되게 찬술하는 편이 효율성면이나 비용절감 측면에서도 낫다는 것이다.
이식은 선조수정실록을 편찬하면서 선조실록을 폐기하지 않았다
“역사는 반드시 의논해서 공론의 지지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역사편찬을 사사로이 논의해서 결정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최명길은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예로 들었습니다만 그것과 조선의 실록은 다릅니다.
<자치통감>은 전조(당나라)의 역사였습니다.”
<인조실록. 1641년 4월6일>
이식은
“역사는 홀로 담당해서는 안될 일”이라면서 “절충하고 필삭할 일은 마땅히 함께 의논해서 결정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이식은 역사서술이 개인의견이나 당론에 의해 좌지우지 된다는 비난을 피하려 한 것이다. 수정작업이 공론의 지지를 받으려면 여러 사람들의 논의를 통한 필삭, 즉 공적인 논의구조가 필요함을 역설한 것이다.
예조 역시 신중한 견해를 밝혔다.
“오로지 태사(사관)에게 맡기면 편찬작업이 수월할 겁니다. 하지만 선왕의 역사를 한사람의 견해에 맡겨 개인 집(사가)에서 찬술하게 하면 후세의 공론에 맞더라도 당사자인 신하는 미안스러운 마음일 것입니다.”
논란 끝에 이식의 주장이 가납되어 <선조수정실록>은 사관 개인의 저술이 아니라 공론에 따라 진행됐다.
빈 관사를 정해 편의를 제공하고 전국 팔도의 감사에게 사관을 지낸 적이 있는 사람들의 사초와 야사를 고을별로 수집하여 올려 보내도록 했다.
“춘추관이 아뢰었다. ‘이식이 감히 집에서 홀로 감당해 낼 수 없다고 하여 이렇게 사양하고 회피하는 것은 사리상 당연합니다. 한 군데 빈 관사에서 동료들과 회의하여 산정(刪定)한다 해도 비용이 더 들지는 않습니다.
그의 상소대로 가능한 한 편의를 제공해 속히 완수토록 하소서.’”
<인조실록.1641년 5월7일>
수정작업을 맡은 이식은 검열 심세정과 함께 무주 적상산 사고에 있는 선조실록 가운데 잘못된 곳을 기록한 뒤 따로 <실록담초> 1책을 만들었다.
춘추관에서 수정실록을 찬술할 때 참고하려던 것이었다.
이식은 선조 시대의 역사 가운데 1596년까지의 개수작업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순조롭지 않았다. 이후에도 이식의 파직 등 갖가지 사건이 터져 수정작업은 난항을 거듭한 끝에 1657년(효종 8년)이 되서야 마무리됐다.
인조 원년(1623년)에 시작된 편찬작업은 무려 44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164회
주묵사(朱墨史) 정신 ~~~
그런데 <선조수정실록> 편찬에서 간과해서는 안될 대목이 있다.
<수정실록>을 제작하면서 잘못된 오욕의 역사라고 지목되어 타도대상으로 삼았던 <선조실록>을 폐기하거나 훼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다.이 대목에서 수정본을 제작한 이식과 채유후의 분명한 역사관을 평가할 수 있다.
이식이 염두에 둔 수정실록의 전범은 중국 송나라 시대의 <주묵사(朱墨史)> 였다.
주묵사란 무엇인가?
중국 송나라 때 사관 범충이 <신종실록>을 수정하면서 썼던 기법을 일컫는다.
즉 원문은 검은 글씨로, 뺄 것은 노란 글씨로, 새로 삽입하는 것은 붉은 글씨로 썼다. 이것을 세간에서는 수정하는 대목의 역사를 붉은 글씨로 썼다 해서 ‘주묵사’라 했다.
<송사. ‘열전 범충전>
물론 선조수정실록의 편찬자들은 주묵사를 따라하지 않고, 그 정신만은 되살렸다.
먼저 이식이 선조수정실록의 편찬을 주장하면서 언급한 내용을 보라.
“야사나 각 가문의 기록을 수습해서 절충하고 첨삭해서 사고에 ‘함께 보관하는 것’은 ‘주묵사’가 남긴 뜻입니다.”
또 <선조수정실록> 편찬에 참여한 채유후의 말은 더 분명하다.
“역사기록에는 잘못된 곳이 많기 때문에 갖가지 수정서 및 해석서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잘못을 바로잡을 수밖에 없으니 송나라 범충의 역사서(주묵사)가 그것입니다.…수찬한 실록은 신구본을 모두 보존하여 이 주묵사처럼 참고하도록 하였습니다.”
<선조수정실록. 후기 및 1657년 10월5일>
그들은 선조실록(원본)을 폐기하지 않았다
무슨 말인가?
. 이식과 채유후는 잘못된 역사를 고쳤다고 해서 원래의 역사서를 폐기하면 안된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것이 ‘주묵사’의 교훈이라는 것이다.
대단하지 않은가.
잘못된 역사서술을 고친다면서 수정서를 애써 만들어 놓고 예전의 ‘그 오욕의 역사서’를 폐기하지 않았던 정신….
이식과 채유휴의 언급대로 ‘원본과 수정본을 함께 남겨둠으로써 후대의 공정한 평가를 받아보겠다’는 역사가의 정신이 아닌가. 이것은 아무리 미심쩍고, 잘못된 내용이라도 사관의 기록은 삭제하지 않고 남겨야 한다는 조선시대의 역사관을 상징하고 있다.
후세인들은 이식과 채유후 같은 역사가가 함께 남긴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의 상반된 내용을 읽고 나름의 판단을 내리고 있다.
이것이 진짜 역사이자, 진짜 역사가의 자세이다. 이 참에 이식과 채유후가 남긴 한마디를 전해본다.
“나라가 있어도 역사가 없으면 나라가 아니요 역사가 있어도 공정치 못하면 역사가 아닙니다.”
<이식>
“무고되고 모욕 당한 사실을 일일이 거론하여 말끔히 씻어내지 못했다. 그러나 사람의 처음과 끝을 살피면 옳고 그름을 판정할 수 있을 것이다. 보는 사람이 자세히 살필 일이다.”
<채유후>
[출처 및 참고문헌 ] : 이기환 경향신문 논설위원.흔적의 역사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165회
이원익(李元翼, 1547~1634년)은 조선 관료 중 최고위 직책인 영의정을 여섯 번이나 지낸 유일한 인물이다.
그것도 선조, 광해군, 인조 3대에 걸쳐 한 정권마다 두 번씩 영의정을 수행했다.
왕과 집권 세력이 바뀌는 상황에서도 이원익이 영의정을 여러 차례 지낸 비결은 무엇일까?
우선 행정력과 실무 능력이 탁월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재물을 중시하지 않고 도덕성과 청렴함을 갖췄으며 비교적 합리적 사고를 했다는 점 또한 비결이다.
이원익은 어떤 상황에서도 떳떳하게 소신을 밝히고 왕을 보좌했던 재상 중의 재상이었다.
“조선 전기 황희와 맹사성이 있다면 중기에는 이원익이 있다”고 해도 지나친 얘기가 아닐 것이다
그가 주로 활동한 선조, 광해군, 인조 시대는 대내외적으로 격변의 시기였다.
대내적으로는 당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으며 대외적으로는 왜란과 호란 등 국가적 위기가 발생했다. 이원익은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중반까지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율곡이 발탁한 이원익 ~~
관료로서 소임을 다해
이원익은 1547년 10월 24일 한양 유동(楡洞) 천달방(오늘날 동숭동 일대)에서 태어났다.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 본관은 전주(全州)로 왕실 후손이다. 4대조 익녕군은 태종 11남이었으며, 증조 수천군, 조부 청기군 표(彪), 부친 함천군 억재(億載) 모두 왕실 종친이다.
모친은 동래 정씨로 감찰 치(緇)의 딸이었다.
조선시대는 왕실의 정치 관여를 막기 위해 종친에 대해서는 관직 진출을 불허했다.
다만 4대가 지나면 출사할 수 있었는데 이원익대에 이르러 관직 진출이 가능했다.
이원익은 1564년 생원 초시에 합격한 후, 1565년 정몽주 7세손인 정추의 딸과 혼인했다. 1569년(선조 2년) 10월 문과별시에 급제해 본격적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이원익이 관료의 길에 들어선 얼마 후인 1575년(선조 8년)에는 사림파 내부 분열로 동인과 서인이 대립했다.
당쟁의 시작이다. 동서분당 직전인 1574년 10월 이원익은 지방 관직인 황해도 도사에 임명돼 당쟁에서는 떨어져 있었다.
당시 황해도 도관찰사는 그 유명한 율곡 이이였다. 이이는 바로 이원익의 재주를 알아보고 정무를 맡겼다. 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이원익은 젊어서 과거에 올랐는데, 조용히 자신을 지켰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알지 못했다. 성균관 직강으로 있다가 황해 도사가 됐는데,
감사 율곡 이이가 그의 재주와 국량이 비범함을 살피고서 감영의 사무를 맡겼다.
이이가 조정으로 돌아와 원익의 재기와 조행(操行)이 쓸 만하다고 말했다.”
이후 이원익은 사간원 정언이 됐고, 이어 지평·형조정랑 등 중앙의 주요 직책을 두루 거쳤다.
이원익 직책이 오르는 동안에도 당쟁은 더욱 기승을 부렸지만 그는 당쟁에 휩쓸리지 않고 관료로서 소임을 다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166회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이원익은 이조판서이자, 평안도 도체찰사를 겸직해 선조를 수행하며 피난길에 올랐다.
왜란 직후인 1598년 7월엔 좌의정으로 명나라를 다녀온 뒤 영의정에 올랐다.
선조대 후반 북인 주도 정국이 지속되면서 이원익은 사직을 청하고 시흥 금양리(현 광명 소하동)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후에도 관서·관북지방 도체찰사를 맡으면서 틈만 나면 국가의 부름에 응했다.
이순신 장군을 처형위기에서 구한 인물이기도 한다
▶대동법 실시 주역 ~~
광해군 경제개혁 1등 공신
광해군 즉위와 함께 북인은 정국 중심으로 떠올랐다. 북인 중에서도 정인홍·이이첨 등 대북(大北)이 권력 실세였다. 그런데 광해군은 예상을 깨고 이원익을 영의정에 임명했다. 광해군 역시 임진왜란 전후 관료로서 보여준 이원익의 탁월한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이원익은 광해군대뿐 아니라 조선 후기 최고의 세제 개혁으로 평가를 받는 대동법 실시 주역으로 활동하면서 임진왜란 이후 피폐해진 민생 안정에 최선을 다했다.
대동법을 담당하는 관서로 선혜청을 설치하고 그에 맞는 관원을 배치한 다음, 1결당 쌀 16두를 봄가을로 나눠 8두씩 징수하게 했다. 기존 공물 부담이 가호별 부과 방식이었던 데 비해 토지 결수를 부과 기준으로 한 대동법은 지주 부담을 증가시키는 반면 소농 부담은 줄어들게 했다.
“선혜청을 설치했다. 전에 영의정 이원익이 의논하기를, 각 고을에서 진상하는 공물이 각사(各司)의 방납인들에 의해 중간에서 막혀 물건 하나의 가격이 몇 배 또는 몇 십 배, 몇 백 배가 돼 그 폐단이 이미 고질화됐는데, 기전(畿甸)의 경우는 더욱 심합니다.”
<광해군일기, 1608년(광해 즉위년) 5월 7일>
위 기록은 조선시대 가장 혁명적인 세제 개혁 ‘대동법’ 시행의 중심에 이원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내용이다.
경제개혁은 높이 평가받았지만
광해군 초반 정국은 정치적으로 혼란의 시기였다.
임해군 처형과 영창대군 살해, 인목대비 유폐 등 대북 강경 노선에 반대한 이원익은 병을 핑계 삼아 거듭 영의정에서 물러날 것을 청했다.
1609년 8월 23차례 사직서를 올린 끝에 영의정에서 물러날 수 있었다.
그러나 2년 뒤 1611년 9월 광해군은 이원익을 다시 영의정으로 복귀시켰다.
그의 경험과 노련한 국정운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의정으로서 광해군과 두 번째 동거는 짧았다.
여전히 대북 중심의 정국 속에서 이원익은 할 일이 많지 않았다.
결국 1612년 4월 영의정에서 물러났다.
이후 이원익은 광해군의 실정을 막아보려 노력했으나, 오히려 그에게 돌아온 건 유배였다. 1615년 6월 홍천에 유배된 후 2년간 유배지에서 보낸 이원익은 거처를 여주 여강에 있는 앙덕리로 옮겼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167회
초가 두어 칸에서 비바람도 가리지 못한 채 거처했고,
처자들은 하루걸러 끼니를 먹을 정도로 가난했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청빈한 삶은 이원익에게 늘 일관적인 모습이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과 북인 정권이 무너졌다.
대북 핵심 정인홍은 89세 고령임에도 처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인조와 서인 정권은 모든 정책 방향을 광해군 흔적 지우기에 나섰지만,
영의정만은 예외였다.
광해군 때 두 번이나 영의정을 지낸 이원익이 인조 시대에도 첫 영의정에 올랐다.
이원익이 영의정에 임명된 날,
“왕이 승지를 보내 불러오자, 그가 도성으로 들어오는 날 도성 백성들은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맞이했다”는 ‘인조실록’ 기록을 통해 이원익이 얼마나 백성들의 신망을 받았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정국 안정을 위해 영의정직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이원익은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고 판단한 시기에 다시 사직을 청했고,
1625년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6개월도 되지 않아 인조는 다시 그를 불렀다.
선조, 광해군대에 이어 인조 대에도 두 번째 영의정에 오른 것이다.
그가 마지막 영의정으로 재직했던 1627년 1월 정묘호란이 발생했다.
광해군대 중립외교 대신 친명배금(親明排金)을 앞세운 인조의 외교 정책이 결국 전쟁으로 이어졌다.
강화도로 피난을 가면서 인조는 이원익을 도체찰사로 삼았다. 고령을 이유로 사양하는 이원익에 대해 인조는 “누워서 장수들을 통솔해도 될 것”이라며 부탁했다.
이미 80세가 넘어도 국가는 여전히 그를 필요로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은 1634년, 향년 88세였다. 마지막까지 그의 삶은 소박했다.
“금천(衿川)에 돌아가 비바람도 가리지 못하는 몇 칸 초가집에 살면서 떨어진 갓에 베옷을 입고 쓸쓸히 혼자 지냈으므로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 줄 알지 못했다”는 기록은 최후까지 청백리 삶을 살았던 그의 모습을 보여준다.
199대 1의 승리자
파격적인 진급을 하고 현지에 부임한 李舜臣(이순신)은 당시
경상 좌수사 박홍
경상 우수영 원균
전라 우수사 이억기
그울타리에
전라 좌수영 절도사로 왔다.
예나 지금이나 군대 조직에서 파격적인 계급장을 달고 내려온
장수를 보고 순순히 인정하고 가만 있기가 어려웠었나 보다 .
1597년(정유년) 2월 . 원균의 모함으로 이순신은 한산통제영 에서 체포된다.
한양으로 압송되어 국형장이 열리고 선조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문무백관 200명 모두가 "이순신은 역적이오니 죽여야 마땅하옵니다.“
외친다.
아침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읍조 하며 임금(선조도 속으로는 동조 함)을
압박하고 있으니
이순신을 발탁해주고 6계급 파격 진급에 힘을 써준 유성룡까지도 "공은 공
사는 사”라고 하며 이순신을 죽여 야 한다는 문무백관 들의 의견에
반대를 하지 못한다.
당시 이순신의 누명 상황이 어떠한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이틀이 걸려도 이순신 형 집행을 못하고 있었던 이유는
당시 領議政(영의정) 겸 (都體察使) 도체찰사
국가비상 사태 직무 총사령관인 오리 이원익(1547~1634)대감이
임금의 어명으로 전시상태의 모든 권한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전시상태에서는 임금과 문무 백관들이 이순신을 죽여야 한다 외쳐도
이원익의 승락 없이는 선조 임금도 어쩔 수 없는 상황 이었다.
이원익은 거듭되는 선조의 형 집행 재촉에 청사에 길이 남는
그 유명한 명 대사로 고한다.
“전하께서
전시에 신을 폐하지 못하시는 것처럼 신 또한
전쟁중에 삼도수군통제사인 이순신을 해임 하지 못하옵니다.”
이원익의 이 말에 선조도 체념을 하고 이틀이나 걸린 이순신 "국형장"에서
문무백관 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도체찰사가 그리 말을 하니
이순신이 죄가없는가 보구나.!“
오직 한사람의 곧고 바른 판단과 집념으로 199명의 고집을 꺾었다.
드디어 이순신은
사형을 면하게 된다.
당시 문무백관 199명 대 이원익 1 명만이 반대를 하여
이순신을 살려 낸 것이다.
자신을 낮추고 오직 나라와 백성 만 떠받든 공복
그가 있으면 온갖 사물이 제 자리를 잡게 되는 소박 하고 비범한
조선의 대표적 청백 리 초가집에 살았던
"조선의 명재상 오리 이원익 대감“
세월은 400년이 지나고 시대만 수없이 변했을 뿐 정치는 변한게 없다.
온갖 시기질투와 모함으로 사형 직전까지 간 만고의 충신을 알아 보고
199대 1로 임금의 불신으로 부터 믿어준 탁월한 先見之明 (선견지명)의
굳은 신념이 도탄에 빠진 나라와 백성들의 생명과 조선 사직을 지켜낸
오리 이원익 대감이야 말로 만고에 길이 빛나 는 충신이며
나라의 보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수의 사람이
나라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단 한 명 이원익이 나라를 구했던것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168회
자신을 신임한 광해군을 배신한 허균 ~
신분제·왕조 부정…차별 없는 세상 꿈 못 이뤄~
정치가가 자신의 행위에 대해 비판을 받고 공직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받는 ‘탄핵’.
조선시대 정치가도 ‘탄핵’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중에서 ‘탄핵’을 수도 없이 많이 당했던 이가 있다.
바로 허균(許筠, 1569~1618년)이다.
생전뿐 아니라 사후에도 끊임없이 그에 대한 탄핵이 가해졌다. 조선왕조실록에 가장 부정적으로 기술된 인물이기도 하다.
‘홍길동전’ 저자로 익히 알려진 허균이 정치적으로 왜 이토록 기피 인물이 됐던 것일까.
허균은 선조와 광해군 시대를 거친 문장가이자 사상가,
그리고 개혁가였다.
한국사에 수많은 인물이 역사의 무대를 장식하며 명멸했지만 허균처럼 극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은 흔치 않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 허균의 사상은 불온한 것으로 평가받았으며, 과격하고 직선적이며 자유분방한 그의 기질, 행동가적인 성향 때문에 끝내 그는 처형됐다.
양천 허씨 명문가 집안 자식이었던 허균은 1569년(선조 2년) 11월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던 허엽과 강릉 김씨 사이에서 3남 2녀 중 막내아들로 외가인 강릉에서 태어났다.
부친 허엽은 호가 초당(草堂)으로, 초당을 호로 삼은 것은 그의 처가인 강릉 초당과 관련 있다.
허균이 태어난 곳은 조그마한 야산이 이무기가 기어가듯 꾸불꾸불한 모양을 이루고 있다고 해서 예로부터 교산(蛟山, 교는 이무기의 뜻)이라 불린 곳이다.
허균이 자신의 호를 교산이라 한 것은 고향에 대한 향수에서 나왔지만 자신의 이상을 펴지 못한 채 처형된 이무기와 같은 그의 삶을 대변해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난 허균은 12세에 아버지를 여의었지만, 누이 허난설헌과 함께 허봉의 벗인 이달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이달은 최경창, 백광훈과 함께 조선 중기 삼당시인(三唐詩人)의 한 사람으로 꼽힐 만큼 시재(詩才)가 뛰어났지만 서자라는 이유로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허균이 훗날 서자인 홍길동을 주인공으로 한 ‘홍길동전’을 저술한 것도 스승의 한을 풀어주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17세가 되던 1585년에는 김대섭의 딸과 혼인했다.
1597년 29세 때 문과에 급제해 본격적인 관직 생활을 시작하는데 자유분방한 기질 때문에 늘 그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20여년 관직 생활 동안 파직과 복직이 되풀이되는 삶을 살았다.
황해도 도사 시절인 1599년 기생, 무뢰배와 어울린다는 이유로 처음 파직된 이래, 부처를 섬기고 불교를 신봉한다는 탄핵을 받아 1604년(선조 37년)과 1607년 수안군수와 삼척부사에서 각각 파직됐다.
삼척부사에서 파직된 직후에는 공주목사에 임명됐다. 공주목사로 있으면서 파직되기까지 8개월 동안은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홍길동과 같은 처지인 서자들과 긴밀한 교류가 이뤄진 시기였다.
그는 이곳에서 심우영과 이재영 등 서자들을 공주 관아에 식객으로 맞이하며 새로운 세상을 위한 꿈을 키웠던 것으로 보인다.
허균의 관직 생활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 기생이다.
허균이 처음 파직된 것은 “서울에서 창기들을 불러 모아놓고 따로 관아까지 만들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1604년의 실록에는 “일찍이 강릉 땅에 갔을 때 기생에게 혹해 그의 어머니가 원주에서 죽었는데도 분상(奔喪)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허균 문집에는 그와 정신적인 교감을 나눴다는 부안 기생 매창을 비롯해 광산월, 낙빈, 선래, 춘방 등 다양한 기생이 등장한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169회
허균 학문과 사상에서 주목되는 것은 성리학뿐 아니라 불교, 도교, 서학 등에 두루 관심이 깊었다는 점이다.
16세기 이후 조선 사회에 정착된 성리학은 사회 생활을 지배하는 원리로 자리 잡았다. 성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는 사단칠정론과 같은 이론 논쟁을 수반했다.
이론 논쟁은 성리학 이론을 깊이 연구할 수 있게 하는 긍정적 요인도 있었으나, 실사(實事)보다는 공담(空談)을 위주로 하는 풍토를 조성해 사회 문제 해결에는 미흡한 점이 많았다.
허균은 성리학 이론 논쟁에 빠져들지 않고 다양한 사상을 접하면서 현실을 극복하는 방안을 찾았다.
허균의 박학과 개방적인 사상은 논설을 통해 사회 개혁 의지로 구체화됐다. ‘관론(官論)’에서는 관원이 너무 많아 기구와 관료를 줄여 국고의 손실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후록론(厚祿論)’에서는 관리에게 의식주를 해결할 정도의 후한 녹봉을 줘야 부정과 부패를 막을 수 있다고 했으며 ‘병론(兵論)’에서는 모든 계층이 고르게 군역 의무를 져야 할 것을 주장했다. 그의 개혁 의지가 가장 잘 피력된 글은 ‘유재론’과 ‘호민론’이다.
허균은 ‘유재론’에서 서출이라 해 능력 있는 인재를 수용하지 않는 것은 조선에만 국한된 점임을 지적했다.
서얼에 대한 차별이 많은 사람들의 불만으로 표출될 수 있음을 경고했다. ‘호민론’은 허균의 민중 지향적 사상이 대표적으로 함축된 글이다.
허균은 “천하에 두려워할 바는 백성뿐”이라고 전제한 후 백성을 호민(豪民), 원민(怨民), 항민(恒民)으로 나눴다. 여기에서 항민은 ‘무식하고 천하며, 자신의 권리나 이익을 주장할 의식이 없는 백성’을 말하며, 원민은 ‘정치적으로 피해를 입지만 원망만 하고 스스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백성’으로 나약한 지식인을 뜻한다.
이와 달리 호민은 ‘자신이 받는 부당한 대우와 사회 모순에 과감하게 대응하는 백성’을 뜻한다. 호민의 주도로 원민과 항민이 합세해 무도한 무리를 물리친다는 것이 허균의 호민론이다. 특히 호민론은 ‘왕은 백성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백성의 위에 군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허균은 선조대 이후 여러 차례 관직에 올랐지만 잦은 돌출 행동으로 파직과 복직을 거듭했다. 그러던 그에게 본격적으로 정치적 위기가 닥친 것은 1613년 7명의 서얼이 주도한 계축옥사였다. 서얼의 실질적인 후원자라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이 사건 이후 허균은 요주의 대상이 됐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70회
이런 혐의를 피하기 위해 허균은 당시 대북 정권 최고 실세이자 글방 동문이었던 이이첨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이첨의 후원 속에 허균은 집권 대북 세력에 적극 협력하면서 광해군의 든든한 후원자로 자리 잡았다. 허균은 폐모론(廢母論) 같은 정국의 최대 이슈에 직면해 인목대비 처벌을 강경하게 주장함으로써 광해군의 정치적 부담을 덜어주는 한편 자신의 입지를 강화했다.
대북 세력 행동대장 역할을 맡으면서 허균에 대한 광해군의 신임은 커져 호조참의, 형조참의를 거쳐 좌참찬까지 오르게 된다. 그의 장기인 외교력과 문장력을 발판으로 외교사절로 두 차례나 명나라도 다녀왔다.
광해군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지만, 허균은 내면적으로 광해군을 몰아내려는 위험한 발상을 한다.
만주에서 흥기하는 후금 세력으로 말미암아 민심이 동요되는 것을 기회로 삼았다. 거사를 위해 기존 소외받던 수백 명 승군과 무사, 서얼을 비밀리에 동원했지만 반대 세력에 의해 움직임이 포착됐다.
1617년 12월 기준격은 허균의 역모를 고발하는 비밀 상소문을 올렸다. 기준격은 처음엔 허균 동료였지만 인목대비 폐출을 계기로 반대 정치 노선을 걸었던 기자헌의 아들이다. 허균의 제자이기도 했던 기준격의 고변 상소로 허균은 궁지에 몰린다.
허균은 즉각 반박 상소를 올리며 반격하지만, 인목대비 폐출을 반대하던 각지 유생들이 들고 일어나면서 곤혹스런 입장에 놓였다.
설상가상 허균의 역모를 확증하는 격문이 1618년(광해군 10년) 8월 10일 남대문에 붙었다.
광해군을 비방하고 민심을 선동하는 내용의 이 격문이 허균의 심복이 한 짓이라는 사실이 폭로되면서 허균은 빠져나갈 곳이 없게 됐다.
허균은 죽는 순간까지 역모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를 변호하는 이는 없었다.
1618년 8월 24일 허균은 현응민, 우경방, 하인준 등의 동지들과 함께 저자거리에서 능지처참되면서 50세 생애의 마침표를 찍었다.
허균의 비극적인 생애는 무엇보다 그 스스로의 표현대로 ‘불여세합(不與世合)’하는, 즉 현실과 타협하지 못하는 강한 기질과 혁신적인 사상, 그리고 자유로운 행동가적인 면모에서 기인했다.
세상과 타협하지 못한 허균은 세상을 자신에게 맞도록 바꾸려 했지만, 생각만 앞섰던 무리한 시도는 역적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그럼에도 성리학 질서만이 지배되던 사회 흐름을 바꿔보려 했던 허균의 시도는 개혁의 불씨로 남아 새로운 사상이 자리를 잡는 데 어느 정도 역할을 했다.
불후의 명작 ‘홍길동전’ 유통과 보급은 그가 지향한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이 어느 정도 실현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출처
< 신병주의 '조선의 참모로 산다는 것>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71회
조선의 우체부
조선시대에 편지는 멀리 떨어진 이와 소식을 주고받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당시 편지는 인편으로 부탁하는 방식이다. 오가는 사람이 없으면 편지를 써 두고 기다렸다가
마침 일정이 맞는 사람이 있으면 보냈다.
1700여통의 편지를 남긴 조선 후기 양반 조병덕은 일정이 맞는 사람을 만나자 밀린 편지를 급하게 썼다, 밤 늦도록 많은 편지를 썻던 그는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눈병이 악화되어 괴롭다고 했다.
일정과 행선지가 맞는 사람을 만나기란 쉬운 알이 아니다.
인편이 잇어도 거리가 멀면 언제 도착할지 기약할 수도 없었다. 충청도 예산에 살던 예안 이씨가 제주도에 유배간 남편 추사 김정희에게 보낸 편지는 7개월이 지나서야 도착했다.
인편과 달리 품삯을 받고 일정에 맞게 편지를 전달하는 전문 배달꾼도 있었다.
이들은 전인(專人). 전족(專足), 전팽(專伻)이라 불렀다.
전인은 품삯을 받고 편지를 수취인에게 정확히 전달하는 것으을 업을 삼았다.
전인은 남다른 전문성이 필요햇다.
먼저 전인은 수취인이 사는 곳 지리를 잘 알아야 했고 발걸음도 빨라야 했다.
전인은 전담하는 담당구역이 있엇고 각 지로 떠나는 전인들을 관리하는 중개인도 있었다.
급히 보낼 편지가 있던 조병덕은 인편이 구하기 어려워 서업동이라는 중개인을 만났고 중게인은 조병덕에게 송금돌이라는 전인을 소개 받앗다. 이들 간에는 중개 수수료. 노잣돈등이 오갓다.
중개업자가 없으면 직접 구인을 했다.이 경우 가격이 비쌌다. 여의치 않으면 고리로 빚을 내기도 했고 부족한 돈은 수취인 부담(착불)으로도 했다.
먼거리를 가는 전인의 품삯은 만만하지 않았다.
춘향전에서
춘향은 방자를 불러 열 냥을 주고 솜 옷도 한 벌 해 줄테니 이 몽룡에게 편지를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방자더러 전인 노릇을 하라는 말이다.
조선 후기 한양 임노동자 하루 품삯은 스물 닷 푼(2.5전) 남짓이었다.
그러니까 40일치 노임과 옷 한 벌을 품삯으로 제시한 것이다,
대궐에서는 글월비자를 두어 이들이 전인 노릇을 했다.
글월비자는 섹장나인(시중을 두는 궁녀) 밑에서 심부름 하는 사람이다.
민간인 신분인 전인이 드나들기 어려운 궁궐 안팎에 편지를 전달하는게 주 임무다.
조선 정조임금 시절 헤경궁 홍씨는
아들 정조를 두고 “노모 마음을 헤아려 서울 성내 거동이라도 궁을 떠나시면 안부를 묻는 편지가 끊이질 않으시더라”라고 썼다.
정조임금이 어머니 헤경국 홍씨에게 수시로 보낸 편지는 글월비가 전달했을 것이다.
1899년 독립신문 배달도 반송도 못한 편지가 우체국에 무더기로 쌓여 있다는 기사가 실렸다.
1896년 집마다 통,호가 부여 되었지만 전인에게 편지를 맡기는 관습이 있어 발송인은 전인에게 편지를 맡기며 주소 없이 그냥 예전처럼 ‘동대문 000’라고 그냥 했기 때문이다.
서울가서 김서방 찾기다.
과거 전인들은 이런 주소만으로 편지를 전달했던 것이다.
1884년 우정총국은 체전부를 뽑으며 과거 역참에 소속된 역관출신을 우대했다.
그들은 지리감각 및 하루 100리를 갈 수 있는 체력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전인이 더 익숙했다. 대충 말해도 통했기 때문이다.
우체부가 등장했어도 실제는 한 동안 전인들이 활동했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72회
조선시대 여형사 다모~~
남성 경찰관이 술취한 취객을 제압하는 동안 옆에서 구경만(?) 한 여경에 대한 비난 수위가 높아지고... 최근에는 여경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같은 기준의 체력검사를 실시하여 합격여부를 가리고 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여자 포졸 (일명 다모)의 포졸 합격기준을 살펴보자
조선시대 다모는
현재의 여형사와 비슷한 직책으로 포도청 산하에서 운영되어 사대부를 은밀히 내사하고 필요하면 체포하는 임부를 수행하였고......
주로 유교 윤리적인 이유로 여자들이 있는 규방 등에 투입하는 그런 부대다.
잠입수사.함정수사등에 동원되기도 했다.
어떤 역사책에는 의녀 중 실력이 가장 떨어진 여인을 다모로 착출했다고도 한다
당시 다모의 합격 조건을 보면
1.채력조건
쌀 5말(약 40킬로)을 들어 올려야 하고
막걸리 5사발을 마셔야 한다
2.무술실력
발차기와 검술 등 종합적인 기술과 체력을 검사하였다.
3.신체조건
기본적으로 필요한 키 5척( 150센티 이상)
조손시대 여성 평균 키는 149센치 인데.......
아마 현재기준으로는 160센티 정도로 봐야 한다.,
4.무장
죄인을 포박할 수있는 오랏줄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범인 제압을위한 쇠도리깨를 지니고 있었다.
다모는 치마속에 2척 정도 되는 쇠도리깨와 오랏줄을 차고 있다가 죄가 의심되면 언제나 도리깨로 문을 무수고 들어가 오라로 죄인의 몸을 묶어 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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