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이야기

조선잡사(23)/받은 글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73회

 

조선 최고의 벼슬 평안감사 판공비는 ?

 

"평안감사도 제 싫으면 그만"이라고 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정작 본인이 싫다면 아무 소용없는 것이다. 조선시대 평안감사가 최고로 선망받는 관직이라는 방증이기도 하다.

 

감사(監司)는 관찰사이다. 도백으로도 불렸던 종2품의 관찰사는 8도에 파견됐던 지방행정 최고 책임자로 관내 군사, 사법, 행정을 총괄했다.

 

그 중 평안관찰사가 으뜸이었다. 평안도는 세금으로 거둔 세곡을 서울의 경창으로 보내지 않고 평안도 내에서 자체 사용했기 때문이다.

 

군수물자 비축의 필요성, 낮은 미곡생산량, 운송의 어려움, 중국 사신 접대비 부담 등으로 인해 평안도의 세곡은 서울로 갖고 오는 것보다는 지방에서 사용하는 것이 효율적이었다. 평안감사는 다른 도와 달리 도의 세금을 걷고 사용하는 독자적 재정권이 부여돼 많은 관료들이 동경했던 것이다.

 

평양은 경제적으로 번성했다.

18세기 청과의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조선은 경제가 활기를 띈다. 무엇보다 의주대로와 해로를 통한 중국 교역로의 길목에 위치한 평양은 이 시기 상업발전이 최고의 전성기를 맞는다. 인구와 물자가 평양으로 몰리면서 평양은 지방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으로 부상한다.

 

평안감사가 되면 `돈방석`에 올라 앉았다.

평안감사의 판공비는 어마어마한 거금이었다.

 

조선후기 문신·실학자 유수원(1694~1755)의 `우서(迂書)`는 "평안감사가 한달에 쓰는 공비가 1000관(貫)이 넘는다"고 기술한다.

 

이는 상평통보 기준으로 1만냥에 해당하며 1년은 12만냥이 된다. 12만냥은 19세기 초반 상납미 3만석을 구입할 수 있는 액수로, 3만석을 오늘날 화폐가치로 단순 환산하면 65억원에 달한다. 19세기 초반 쌀값이 훨씬 비쌌던 점을 고려할 때 평안감사의 수입은 상상을 초월하는 액수였다.

 

권력과 재화가 있는 곳에 술과 유흥이 있기 마련. 기생도 평양이 제일이었다.

 

`이춘풍전`에서 주인공은 평양의 기생에게 재산을 모두 탕진한다. 흥선대원군 이하응도 호서의 사대부, 호남의 아전과 함께 관서(평양)의 기생을 `나라의 3가지 폐단`으로 지목했다.

 

접대로 평양을 따라올 곳이 없었다. 조선후기 문신 정태화(1602~1673)가 사행단을 이끌고 중국을 다녀온 내용을 기록한 `임인음빙록(壬寅飮氷錄)`은 평양의 환대문화를 언급한다. 이에 의하면,

 

정태화는 영의정에 재직 중이던 1662년(현종 3) 진하 겸 진주사(進賀兼陳奏使)로 중국길에 올랐다.

정태화 일행이 평양에 도착하자 평안감사 임의백(1605~1667)이 마중을 나왔다.

 

정태화가 평안감사의 안내를 받아 대동강에 이르자 기생들을 가득 실은 배가 띄워져 있었다. 정태화가 놀라 "상복을 입고 있는 처지이니 잔치는 불가하다"고 만류했다.

 

평안감사는 마지못해 별당에 숙소를 마련하고 대접을 했다. 이 역시 얼마나 융숭했던지 사행단의 역관들이 "이런 일은 과거에 없던 일"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연광정, 부벽루, 을밀대, 만경대, 모란봉, 능라도, 청류벽, 주암 등 곳곳에 산재한 자연·역사 명소들도 평양의 매력을 더했다. 평양은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가진 역사도시이자 다채로운 향연과 유흥이 끊이지 않는 풍류도시였다.

 

이같은 조선후기 평양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 바로 <평안감사향연도>인 것이다. 길이 2m(가로 196.9cm, 세로 71.2cm)의 대작으로, 김홍도 서명과 인장이 찍혀있어 흔히 <전(傳) 김홍도 필 평양감사향연도>로 불린다.

 

 

<평안감사향연도>는 왕에게 평안감사 부임에 대해 이해를 돕거나 보고하기 위한 어람용으로 그렸거나 부임식의 시각적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궁궐의 화원들이 제작한 그림이 분명하다.

 

조선후기 문인 신광수(1712~1775)는 절친인 채제공(1720~1799)이 평안감사로 부임하자 선정을 바라며 전별 선물로 108수의 시를 담은 `관서악부`를 지어줬다.

 

사망 1년 전인 1774년의 일이다.

 

<평안감사향연도>에 이 `관서악부`의 내용이 응축돼 있다. 그림은 어진정치를 폈던 채제공을 주인공으로 삼아 그의 공적을 기리는 의미에서 특히 제작된 기념화일 수도 있다.

 

양반, 상민,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가 화합해 새로 부임하는 평안감사 채재공을 대대적으로 환영하는 모습을 통해 목민관으로 하여금 선정을 베풀어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간절함을 담았던 것은 아닐까.

 

이왕가박물관은 1916년 7월15일 김윤근에게서 3폭 모두 합쳐 단돈 80원에 샀다. 1916년 쌀 1석(144㎏) 값은 15원이었다. 단순 쌀값 비교로 80원은 오늘날 200만원에 해당하는 셈이다. 국보도 보물도 아니어서 일반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출처 : 매일경제신문 배한철 본부장 글 발췌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74회

 

조선의 짚신 재벌~~

 

토정 이지함이 고을 사또가 되자 큰 집을 지어서 빌어먹는 백성을 모여 살게 하고 수공업을 가르쳤다. 가장 손재주 없는 사람은 볏짚을 주고 짚신을 삼게 했다. 하루에 한 켤레를 만들어 팔아 하루 양식을 마련하고 남는 것으로 옷을 지어주니 몇 달 만에 먹고 입을 것이 넉넉해 졌다

< 정약용 목민심서>

 

위 글은 토정비결의 저자 토정 이지함이 포천 현감을 지낼 적에 일이다.

 

재료비는 들지 않는다. 볏짚. 왕골.삼베 등 재료는 사방에 널려 있었다.

수요도 많다.짚신은 오래 쓰는 물건이 아니다.

짚신 삼기는 조선시대 가장 인기 있는 부업 이었다.농사짓는 사람들도 농한기나 궂은 날씨에는 집에서 짚신을 삼았다.

 

승려들도 가을과 겨울에는 짚신을 삼아 생계를 유지했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글에 승려들에게 짚신을 선물 받았다는 기록들이 나온다.

 

전업으로 짚신을 삼는 사함들도 많았다. 구한말 이건창의 기록에 따르면 강화도에 사는 유 노인은 30년 동안 집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고 짚신을 삼았다. 완성하면 집주인에게 주고 시장에 가서 쌀로 바꿔오게 했다. 이 건창은 유노인 집 맞은편에 살았지만 한 번도 얼굴을본적이 없었다.

 

흑산도의 신운서 라는 사람은 재료를 짊어진 채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짚신을 삼아 주었다. 그는 항상 막내딸의 손을 잡고 돌아다니며 짚신을 삼아주었다.

원대 딸이 넷이었는데 첫째.둘째는 시집을 갔고 셋째는 큰 딸에게 맡기고 막내만 데리고 다닌 것이다.그 가 막내딸을 맡길 곳을 찾자 누군가 물었다.

“짚신을 삼아 팔면 먹고 살 수 있는 데 굳이 맡기려 고 하는가?”

신운서가 대답했다

“사내아이는 상관없지만 계집아이를 길바닥에서 키울 수는없소!”

 

짚신 장사들은 부지런하기만 하면 부자도 가능했다.

 

송세홍 이라는 사람은

두세 살 무렵 서울 한복판에 버려졌다. 때 마침 서울에 올라온 경남 기장 사람이 발견하고 데려다 키웠다. 그 사람의 성을 따라 송씨가

낮에는 품팔이 하고 밤에는 짚신을 삼았다. 잠을 쫓으려고 눈에 후추를 찧어발랐다.

어느 날 송세홍은 갑자기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승려가 된 후에도 계속 짚신을 삼았다.

10년 후 수천 냥의 돈을 모았다, 그는 승려 노릇을 그만 두고 가정을 꾸렸다.

그러나 가정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아내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는 어린 아들과 함깨

다시 절로 들어갔다. 짚신을 삼아 돈을 모으기 위해 속세보다 출가를 택한 것이다.

10년이 지나 아들이 결혼할 나이가되자 비로서 절을 나왔다. 그 는 이 마을에서 으뜸가는 부자였다.

송세홍은 수만 냥의 돈을 모으고도 짚신 삼는 일을 그만 두지 않았다.

“나는 이것으로 집안을 일으켰으니 잊을 수 가 없다”

동네 마을에 기부도 많이 했다.

 

마을사람들은 그를 위해 기념비도 세워주었다.

현재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에 있는 ‘청강교비’가 그것이다.

 

송세홍은 98세까지 장수하고 병 없이 편안히 세상을 떠났다.손자 하나는 무과에 급제했다.사람들은 베풀기를 좋아한 덕이라고들 했다.

 

그는 자기 상여를 매 줄 일꾼들이 신을 짚신 수십 켤레를 미리 만들어 놓고 죽었다.

 

짚신 삼기는 일제 강점기에도 변함없는 풍경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용인에 살던 선비 정관해는 마을 사람들과 옹기종기 모여 앉아 짚신을 삼으며 말했다

 

“낮에는 나무하고 저녁에는 짚신을 삼으며 빚 독촉을 받지 않은 게 상팔자다,”

 

그러나 그의 상팔자는 오래가지 않았다.

 

고무신 혁명이 일어나자 짚신은 하루아침에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이다. 고무신은 비쌌지만 오래 신을 수 있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75회

 

 

조선시대 갈비 요리~~

 

가든은 원래 나무가 있고 때론 연못이나 시내가 있는 정원을 뜻한다. 우리나라 가든은

숯불갈비 집이다.

 

종래에는

외식을 한다든지 손님접대를 한다든지 좀 특별한 음식을 먹어보자고 하면 으레 갈비부터 생각했을 정도다.

 

교외 한적한 멋있는 경치 좋은 곳에 자리잡은 갈비집. 시내 중심가에도 나무좀 심어넣고...분수도 있고...무슨 길비집..

 

조선의 큰 선비 우암 송시열 선생은 그의 저서 <우암집>에서

“우리나라 풍속은 쇠고기를 으뜸의 맛으로 삼았으며 이것을 먹지 않으면 죽는 것으로 여겨왔다. 따라서 소의 도살금지령을 내려도 귀담아 듣는 이가 아무도 없다”고 했을 정도다.

외국인들도 우리나라 갈비를 좋아하는데 일본의 음식점에서 ‘가루비’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 갈비맛을 흉내내어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한국의 소갈비가 특별히 맛을 내는 이유는 뭘까?

 

그 맛의 비결은 미리 잘 양념이 된 고기를 굽는데 있다.

중국이나 일본의 고기요리는 대개 고기 그대로를 굽거나 삶아서 양념이나 장에 찍어 먹는다.

반면 한국의 갈비는 마늘이나 부추 같은 훈채에 양념을 섞어서 미리 고기를 재어 놓아 고기에 맛이 배게한다.

 

여기에 숯의 연기까지 스며들어 맛잇는 숯불갈비가 탄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양념갈비에도 원조가가 있었으니 바로 고구려사람이다.

 

고구려인들은 원래 유목민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고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이것을 중국인들은 맥적이라 불렀는데 ‘맥’은 고구려를 ‘적’은 불위에서 구워먹는 고기라는 뜻이다.

 

중국인들은 이민족의 음식인 ‘맥적’을 매우 좋아하였다.

 

이것을 중국인들은 맥적이라 불렀는데 ‘맥’은 고구려를 ‘적’은 불위에서 구워먹는 고기라는 뜻입니다.

 

맥적을 만드는 방법은 오늘날의 갈비와 거의 유사한데 부추같은 훈채를 쓰고 거기에 만주에서 난콩으로 빚은 장을 써서 미리 고기를 잰 후에 불에 구워 먹었다.

 

이때 맥적은 쇠고기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고기종류라면 뭐든지 가리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즐겨 먹고 자주 먹어야 자연히 그 요리법도 발달하는 법이다.그런데 고구려 맥적은 삼국을 통일한 신라나 고려가 육식을 금하는 불교를 국교로 채택하고, 농사에 중히 쓰이는 소를 함부로 도살하지 못하도록 함에 따라 후손들에게 사랑받지 못하게 된다.

 

알다시피 불교에서는 육식을 금하고 있으며 특히 농사에 중히 쓰이는 소는 함부로 도살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다가 다시 고기를 즐기게 된 것은 몽고의 침략 이후다

몽고 침략 후 몽고인들은 유목민족인지라 목장을 만들어 대량으로 소를 키워 고기를 즐겨 먹었다.

 

고려에 고기가 없자 목장을 만들어 대량으로 소를 키웠고 여러 가지 요리법을 고려인에게 전수를 했다.

 

이리하여 고구려 멸망이후 끊겼던 맥적요리법은 개성의 명물 설리적으로 전승되어집니다.

 

‘설리적’이란 눈속에서 구운고기란 뜻인데, 눈내리는 겨울밤의 술안주로 각광을 받았다.

 

<해동죽지>라는 책에 요리법이 나와있는데 '소의 갈비나 염통을 기름과 훈채로 조미하여 굽다가 반쯤 익었을때 냉수에 잠깐 담근 후 센 숯불에 구워 익히면 눈 내리는 겨울밤의 술안주가 되는데, 고기가 몹시 연하고 맛이 좋다'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숯불갈비’다

 

다만 냉수에 잠깐 담갔다가 다시 익힌다는 거ᅟᅩᆺ이 다소 특이하지만....

 

결국 유목민족 고구려인들의 전통은 신라와 고려에 의해 끓겼다가 다시 유목민족인 몽고족의 침략으로 되살아나게 된 것이다.,

 

그 후 맥적의 전통은 농경이 생산활동의 중심이 되면서 역대 조선시대의 왕들이 끊임없이 소의 도살을 금지 했으나 꿋꿋하게 살아남아 지금까지 없어지지 않고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76회

 

 

매품팔이 이야기~~!

 

흥부전에서 김좌수가 흥부에게

 

“돈 서른 냥을 줄 것이니 내 대신 감영에 가서 매를 맞고 오라”

 

흥부는 곤장을 대신 맞아 주면 서른 냥을 주겠다는 제안을 받는다.

여기서 곤장 몇 대인 지는 확실하지 않다.

 

흥부 왈

“서른 냥을 받아 열 냥 어치 양식사고, 닷 냥 어치 반찬사고, 닷 냥 어치 나무사고

열 냥이 남거든 매 맞고 와서 몸 조심 하리라“

 

흥부의 당시 직업은 말편자 박기( 수입: 닷 푼).분뇨 수거(수입: 두 푼),빗자루 만들기( 수입: 한 푼) 등 이었다.

100푼이 한 냥이니 서른 냥이면 3,000냥인 셈이다. 말편자를 600개를 박아야 하고 화장실1,500개를 청소 하든지. 빗자루 3,000개를 만들어야 생기는 수입이다.

 

당시 일용직 일 급여가 스무 푼 정도였다.

1개월이면 600푼(6냥) 정도다

3,000냥이니 5개월 급여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흥부는 김좌수의 그 제안을 수락한 것이다. 그러나 운 없게도 특별 사면령이 내려져버려

없었던 일이 된 것이다.

 

<승정원일기>에

“돈을 받고 곤장을 대신 맞는다.”라는 문구가 기록 된 것으로 보아 매품팔이는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아들이 늙고 병든 아버지를 대신하여 곤장을 맞겠노라고 나섰다는 기록이 종종 등장한다.

아버지 대신 곤장을 맞다가 죽은 아들도 있었다.

비속이 존속대신 곤장을 맞는 것은 일종의 효행으로 간주하여 암암리에 허용한듯하다.

노비가 주인 대신 매를 맞는 일도 흔했다. 이러한 제도가 일종의 거래로 바뀐 것일까?

 

조선 후기 문인 성대종의 <청성잡기>에는 직업적 매품팔이가 등장한다.

그가 곤장 100대를 맞고 돈은 고작 일곱 냥이다.욕심쟁이 아내가 채근하는 바람에 하루 세 차례나 매품을 팔던 그는 결국 공장을 맞다가 죽고 말았다.

 

흥부는 서른 냥인데 일곱 냥이면 너무 적은 게 아닌 가.

경국대전에 따르면 곤장 100대는 일곱 냥의 벌금으로 대납이 가능했다.

이렇게 본다면 흥부의 서른 냥은 좀 과장된 것이 아닐까?

 

매품팔이가 돈을 혼자 갖는 것도 아니다.

곤장을 치는 형리와 나누어야 한다. 곤장을 치는 횟수는 정해져 있지만 그 강도는 얼마 든지조정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형리에게 뇌물을 주어 살살 치게 했다는 기록은 여러 군데 나온다.

춘향전에도 나온다.월매가 형리에게 뇌물을 준 것이다

 

 

실제로 매 품팔이가 받는 돈은 얼마 되지 않았다.

뇌물을 주지 않아 매를 맞다 불구가 된 사람도 많다. 민초들의 가슴 아픈 사연이 아닐 수 없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56회

 

<세종실록>에 따르면

제주 목사 김인은 원숭이 여섯 마리를 잡아 길들여 후임 목사 이붕에게 인계를 한 기록이 나온다.

 

궁궐에서 기르는 원숭이는 좋은 대우를 받았다.

 

성종 임금 당시

사복시 관원은 혹한에 원숭이가 죽을까 봐 흙집을 지어 주고 사슴 가죽을 입히자고 청했다.

 

사슴 가죽을 옷으로 잘못 들은 조정 신료가 백성의 삶을 먼저 살펴야 한다 며 ‘원숭이 옷’을 문제 삼기도 했다.

 

조선후기에 이르면 궁궐만이 아니라 저잣거리에서도 농후자가 공연을 벌였다.

 

조선 말기문인 도한기는 ‘관헌집’에서 청나라 사람이 한양에 와서 연행하는 원숭이 공연을 봤다고 썼다.

 

당시 공연은 원숭이의 습성을 이용한 것과 조련을 통해 익힌 기예를 선 보이는것 두 가지였다.

 

습성을 이용한 공연은 원숭이가 높은 곳을 오르는 것을 활용한다. 까마득이 높은 솟대를 세우고 그 끝에 먹이를 둔 다음 원숭이를 뛰어오르도록 했다.

오랜 조련이 필요 없었다.

다만 원숭이목에 도망가지 못하게 목줄을 단단이 채웠다.

 

19세기에 제작된 ‘태평성시도’에는

목줄을 맨 두 마리 원숭이가 높은 솟대에 오르게 하는 공연이 소개되었다.

 

이 장면에서 농후자는 염소를 곁에 두고 있다.사람이 말을 타듯 원숭이가 염소를 타는 공연도했을 것이다.

 

박제가가 쓴 ‘성시전도시’ 속 원숭이는 사람처럼 절하고 꿇어 앉아 보는 사람을 놀라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중국사신에게 선보인 만큼 진귀한 공연으로 여겼음을 짐작할 수 있다.

 

농후자와 원숭이 사이는 어떠했을까?

 

조수삼의 ‘추세기이’에 ‘농후개자’라는 인물이 나온다.

농후개자는 원숭이를 희롱하며 빌어먹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원숭이 공연으로 구걸하는 거지였던 셈이다.

직업의 일종인 셈이다.

 

농후개자는 원숭이 공연으로 돈을 벌 법 했으나 거지 행색을 면하지 못했다.

벌이가 시원찮았기 때문이다.

 

보는 사람이 감탄하며 돈을 기꺼이 지불할 수 있는 묘기가 없었다는 것이다.

농후자는 공연을 마치고 귀가할 때 항상 원숭이를 어깨에 올려 놓았다.

 

나중에 농후자가 죽자 원숭이는 배운 대로 사람처럼 울면서 절을 해 돈을 구걸했다.

 

이를 불쌍히 여긴 사람들이 돈을 추렴해 거지를 화장 했다.

 

시체가 반쯤타자 원숭이는 구슬픈 울음소리를 내며 불길로 뛰어 들었다.

 

농후개자와 원숭이는 사람과 짐승. 주인과 물건이 아닌 함께 살아가는 동료이자 반려자였던 셈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77회

 

행사전문가 조방꾼 이야기~

 

조방(助房)이란 기생의 일정과 수입을 관리하는 직업이다.

오늘 날 매니져와 가까울까?

소설 춘향존, 배비장전 등의 고전 소설에 나오는 기생의 이미지로 인해서 기생하면 접대부를 떠 올린다.

 

그러나 오래 전 기생전에서 보듯이 기생들은 관에서 체계적으로 고육받고 관리를했다.

일종 연예인 이며 탈렌트로 각종 국가행사에 동원되는 연예 전문가 였다.

 

제도적으로는 기생은 공물이기 때문에 사사로이 남성을 접대하는 일은 금기시 했다.

연산군 이후부터는 기생들의 서방이 등장했다.

이를 기부(妓夫)라고 불렀다.

관아에서 작성한 기부명단에 올라간 사람은 처벌을 받았다

 

이세걸의 경우는 임금의 종친임에도 처벌을 받았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알게 모르게 기부( 妓夫)는 조선 전기에도 등장한다.

 

전문적인 직업인으로서 조방은 18세기 중반 연암 박지원 ‘광문자전(廣文者傳)’에 등장한다.

한양에서 당시 제일가는 기생 소아의 조방은 ‘최박만’이라는 사람이다.

기생 소아를 만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최박만 이라는 조방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조수삼은 ‘추재기’에 재미있는 일화 두 편을 실었다.

 

기생을 미끼로 한번에 열 명의 손님을 속여 돈을 번 이중배 라는 조방 이야기 등장한다.

기생 조아를 데려다 연회를 하려는 남자 십 여 명에게 사기를 쳐서 하룻밤 사이에 100냥을 챙긴 사람 이야기다.

 

또 다른 조방은 최 씨는 외모도 준수하고 말솜씨도 휼륭했다, 그는 관청과 민간의 기생은 물론 남성 접대부 까지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관리를 했는데 비밀스럽게 운영했다.

 

날마다 돈 많은 부유층 자제들을 포섭하여 비밀 파티를 열곤 했다. 손님들은 그들의 비밀를지켜주는 그를 아방한(啞幇閒)이라고 불렀다. 벙어리 조방꾼 이라는 말이다.

남몰래 유흥을 즐기고 바람기 많은 남녀 고객들이 많았다.

 

이런 조방은 조선 후기. 일제 강점기로 오면서 관기 제도는 폐지되고 권번이라는 조합으로 변모하여 기업형으로 변모 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78회

 

조선의 사채업자 식리인~~

 

“근래 백성들의 폐단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중에서도 사채가 특히 심합니다.

흉년에 가난하고 초췌한 백성들이 먹고살 길이 없어 마침내 모두 부잣집으로 몰려가서 사채를 빌려다가 두 배의 이자를 갚고 있습니다..............................중략

만약 갚지 못하고 본인이 먼저 죽으면 기필코 그 자손과 친족에게 거둡니다.“

 

<영조 1년 1725년 7월16일 승정원 일기>

 

은행문턱이 높아 서민들은 제2금융권이나 사채시장으로 갈 수 밖에 없다.

조선시대에도 대출사업이 매우 성행했다. 조선초기부터 쌀이나 비단으로 대출 사업용 펀드인 대금을 조성했고 18세기 부터는 화폐가 그 자리를 대신 했다.

대출 자금 조성 행위를 입본(立本)이라 하고 대출사업은 급채. 방채. 흉리.식리(殖利)라 했는데

식리가 가장 일반적으로 쓰였다고 한다.

대출이자를 이식(利息)이라 하고 50퍼센트가 넘는 고금리를 장리(長利)라 불렀다.

대출사업자의 공사에 따라 공채(公債)와 사채(私債)로 구분했으며 해당 분야 전문가를 흥리인(興利人) 혹은 식리인(殖利人)이라 불렀다고 한다.

 

<성종실록>에는

중국가는 사신들이 이들을 하인으로 가장시켜 데리고 가서 무역을 담당하게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따라서 식리인은 상업전문가에서 출발하여 점차 금융 전문가로 분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등장하는 하인이름은 말동.검동.김모지리. 등이 나온다.

조선 건국 초기부터 대출사업은 관에서 주도했다.기방관들이 펀드를 조성하고 이를 민간에 대출하여 이자수입으로 부족한 예산을 충당했는데 특히 지역의 방위비 쪼달을 위해 가장 많이 활용되었다.

부족한 지방 예산을 마련할 대안이 달리 없었으므로 지방관의 대출사업은 조선 말까지 성행했고 탐관오리와 민간인들의 결탁으로 많은 백성들의 피해가 컸다.

 

이 과정에서

대출 금리 책정이 가장 큰 문제였다. 조선 초기부터 어느 정도 예외는 있었으나 공채와 사채 금리는 각각 20 퍼센트와 50 퍼센트가 가장 일반적이었다.

이처럼 공식적으로 등장하는 대출금리와 달리 <무명자료>에는 매우 극단적인 사례가 등장하기도 한다. 대출금리가 연 100 퍼센트에 이르고 1년 후 원금과 이자를 매긴다.

일수도 등장하는데 이는 매일 2퍼센트의 이자와 원금을 분할 상환 하는 형식으로 받는다.

2개월에 20퍼센트의 이자와 원금을 모두 상환하는 상품이다.

 

향도미(香徒米)라는 상품은 쌀을 대출하는 방식이며 금리가 200퍼센트에 이른다. 사채를 빌려 쓴 서민의 고통이 짐작이 갈 것이다.

사채의 고금리로 인한 갈등은 빈번했고 극단적 경우 살인사건도 발생했다.

 

한윤옥이 한명회의 사채를 거두는 과정에서 저지른 살인사건과 윤필상이 의금부 나장을 시켜 사채를 독촉하여 받다가 발생한 살인사건이 대표적인 사건이다.

 

결국 중앙정부가 나서 <경국대전> 대출금리가 년 20퍼센트를 넘지 못하게 규제하는 조항을 넣었다. 그리고 이자를 갚지 못해 몇 년 동안 계속 누적되더라도 갗아야 할 이자 총액이 원금의 50퍼센트를 넘지 못하게 했는데 이를 <子母定式: 자모정식>이라 했다.

 

세종의 사위 윤사로를 비롯하여 한명회.운필상. 등 고관대작들은 물론이고 승려.생원.진사의 자치 협의기구 司馬所(사마소)도 사채업자에 종사했다.

<목심심서>에 나오는 전라 감영의 아전 최치봉은 대표적인 사채업자다.

그는 전라도 전체 쉰세 개 읍에 두세 명의 아전을 포섭하여 스스로 맹주가 되었다.

매년 수십만 냥을 조성하여 자신이 포섭한 아전들에게 나누어 주고 민간인을 대상으로 사채놀이를 하게 했다. 청렴하고 법을 잘 지키는 관리는 중상모략하고 탐관오리의 비리가 담긴 기록물을 모두 빼내어 삭제해 주면서 자신의 위상을 세웠다.

그러던 중 ‘이노익’이 전라 감사로 부임한 지 열흘 만에 최치봉을 잡아들여 죄를 묻고 곤장을 쳤다.

그로부터 최치봉은 서너 고을을 옮겨 다니며 수감되었는데 결국 고창감옥에서 죽엇다.

 

다산은

“타일러도 깨닫지 못하고 가르쳐도 고치지 않으며 끝내 허물을 뉘우칠 줄 모르고 사기만을 일삼는 아주 간악한 자는 형벌로 다스려야 한다”라고 하면서

그 근거로 악덕 사체업자 최치봉을 제시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79회

 

자금의 대출업자와 차입자를 연결해 주는 ‘환도중’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환전거간’ 이라고도 한다.

 

환도중의 중개를 통해 연 15퍼센트 월 1.25 퍼센트 정도의 이율로 시변이라는 신용 대출이 이루어 졌다.

조선시대 일반적인 금리가 연 50퍼센트 정도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저렴한 금리다

 

시변을 통해 급전을 확보했던 개성상인은 松商(송상)이라고도 한다.

조선 초기부터 개성사람은

관직에 진출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상업에 주력했다.

 

개성의 특산물 인삼은 같은 면적에서 곡물을 생산하는 것보다 배 이상의 이익을 볼 수 있었다.

개성상인은 인삼을 대량으로 재배하고 松房(송방)을 통해 판매하여 전국적인 유통망을 형성했다.의주를 통한 청나라와의 무역과 동래왜관에 상주하는 일본인과의 무역에도 활발히 참여를 했다.

이들은 서양보다 200년이나 앞서는 독툭한 복식부기법인 四介置簿法(사개치부법)을 창안하여 활용했다.

 

유력 가문의 자제를 어릴 때부터 다른 유력 상인의 사환으로 보내 실무를 가르쳐 경영자로 길러내는 ‘差人’(차인)이라는 인큐베이팅 시스템도 있었다.

 

시변의 결재일은 항상 매월 말일이었다.

월말이 다가올수록 대출금의 상황 기간이 줄어들어 금리가 조금씩 덜어지는데 이를 ‘落邊 ’(낙변)이라고 한다.

 

시변의 금리는 월 1.25퍼센트.

맹월 1~5일 사이레 빌리면 1.25퍼센트가 모두 적용되고 6~10일 사이에 빌리면 1퍼센트. 11~15일 사이에 빌리면 0.75퍼센트. 26일 이후 빌리면 그 달의 이자를 부담하지 않은 방식이다.

 

환도중의 조합 대표와 거래자 대표는 매년 두 차례 환도중의 동업조합 박물계 사무소에 모여 금리를 결정했다.

 

시변은 오늘날 은행간의 단기 거래에 적용되는 콜금리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금리를 결정하는 방식 역시 한국은행의 기준 금리 결정 방법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겠다.

 

환도중의 중개 수수료는 대출금의 0.15퍼센트였다.

1만냥을 1장이라고 하는데 1장이면 환도중의 몫은 열 닷냥이다.

 

0.15% 수수료는 일제 강점기 까지 지속되었다.

수수료는 차입자에게 받았다.

 

1000원 미만의 소액대출도 있었지만 몇 만 원.10만 원에 이르는 거액이 오가는 경우도 많앗다. 따라서 시변은 상당한 자본력을 가진 사람만 이용할 수 있었으며 중소 상공업자나 일반 서민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신용 거래를 바탕으로 신용전표인 환(換)과 어음이 보편화 되면서 휴대가 불편한 동전보다 널리 사용되었다.

 

환도중을 비롯하여 시변의 대출자와 차임자 모두 신용이 두터웠으며 별명을 사용했다.

일단 거래가 이루어지면 대출자.환도중.차임자는 대출금을 결재할 때 까지 만날 일이 없었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이 시변 거래에 세금을 매기려 했지만 방법이 없어 신뢰할 정도로 비밀 보장이 확실했다.

 

1912년을 전후하여

개성의 식산은행.한성은행과 같은 금융기관의 총 예금액이 100만원 정도였는데 환도중

시변 중개 금액은 700~800만원에 달했다.

 

1939년 까지 시변의 유통액이 연간 300만 원 정도에 달했다고 한다.

 

비교적 최근까지 황도중은 시변이라는 제도를 통해 대출자와 차입자가 아무런 담보 없이

자금을 거래하도록 중개했다.

 

금리 결정도 주관했던 만큼 오늘 날의 은행과 유사함 점도 많다고 할 수 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80회

 

조선시대의 고리대금업

 

고리대금업은 역사상 가장 오래된 직업중 하나라고 한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쌀이나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것은 아주 옛날부터 있어왔다.

 

그런데 빌려준 원금에 대하여 얼마의 이자를 받을 것이냐 하는 것은 각 시대마다 상이하다.

법정이자율이라 하여 정부가 직접 이자의 한도를 정하기도 했는데 이는 이자를 물어야 하는

사람들이 가난했기 때문이다.

 

고려에 광학보(廣學寶)하는 장학재단이 있었다.(946년).

불문에 입문하여 정진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조정에서 설치한 것이다, 이 광학보는 일정한 자금을 마련한 후 일반인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받는 이자로 운영되었다.

광학보는 공공기관이었기 때문에 법정이자율을 적용했는데 쌀 15두를 빌려주면 5두를 이자로 받았고 옷감 15척을 빌려주면 5척의 이자를 받앗다. 1년에 한번씩 이자를 냈으니 33%의 높은 이자율이었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이자율이 너무 높다는 원성이 있었다. 나중에는 납부이자의 총액이 원금과 같아지면 더 이상 이자를 받지 않고 원근만 갚도록 했다. 이를 자모정식법(子母停息法)이라 했다.

 

요즈음 장학재단도 이자로 운영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조선시대 농촌에서 성행한 이자율은 무려 5할~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이자 종류가 다양해진다. 그 종류를 한번 살펴보자

먼저 1할(十一邊).1년에 한번 1할의 이자를 납부하는 것으로 조선전기에 국가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발행했던 공채의 이자율이다.

 

고려시대의 높은 이자율에 비해

조선초기에는 비교적 낮은 이자를 받았다.

조선후기로 가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2배로 껑충 올라간다.이자율이 2할이었다.

 

그리고 5할(長利).그야말로 높은 이자지만 조선시대 농촌에서 가장 성행했던 이자율이다.

조선 조정은 공채에는 낮은 이자율을 적용하면서 실생활에서는 높은 이자율을 허용하는 모숩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5할의 높은 이자를 받은 주체가 바로 궁중의 내수사였기 때문이다.

내수사는 궁중의 회계기관인데 왕실의 쌀,베 등을 민간에 빌려주고 이렇게 높은 이자를 받았던 것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81회

 

 

이는 곧 농촌에 널리 퍼져 봄의 춘궁기에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가을에 추수가 끝나면 5할의 이자를 받았다.

 

봄에서 가을까지 7~8개월 빌려주고 5할을 받았기 때문에 연리로 따진다면 7할이 넘는 이자율인 셈이다.

 

이밖에 연리로 계산하지 않고 매월 이자를 받는 경우도 있었는데 조선후기에 이자놀이를 하던

사람들이 주로 사용하여 월3%에서 10% 까지 다양했다.

 

연리로 따지면 36%에서 120%에 이르는 것이니 돈놀이를 하는 사람들이 급전을 빌려주고 막대한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따라서 조선조정은 차주 이식제한령을 내려 지나친 이자로 백성을 울리는 일을 막고자 애를썼다.

 

조선시대의 금리정책을 살펴보자.

조선 초기의 이식제한령은 주로 이자총액의 상한선을 긋는 것으로 고려시대처럼 이자 원금 이상 받지 못하게 한 것이다.

연리 33.3%라면 3년까지(이자에 대한 복리계산은 나라에서 금했다).50%의 장리(長利)는 2년까지 이자를 받고 그 이상은 받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다가 숙종 때인 1717년

이자율 자체에 대한 이식제한령이 내려졌다.

이시기는 조선의 경제가 쌀이나 베로 돈을 대신하던 현물 경제에서 점차 돈이 중심이 되는 화폐경제로 이행하던 시기였다.

 

따라서 돈놀이도 대단히 성행했기 때문에 조정은 이자제한을 할 필요가 있었다.

1717년의 이식제한령은 돈이나 베는 2할. 곡식은 연 5할을 초과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리고 1746년,영조때는

돈이든 곡식이든 상관없이 연리 2할을 넘지 못하도록 했다.

 

어떤 조건의 이자로 빌려주었던 간에 처음 정해진 1년 이자만 받아야 했으니 10년이 지나도 1년 이자만 받는 것이 법이 되었다.

 

장리 쌀을 빌려 먹어야 했던 가난한 백성의 입장에서 보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법.제도였다.

 

그러나 실제로 이렇게 지켜졌는지 여부는 기록이 없다. 약자인 백성이 훗날을 생각할 때과연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82회

 

조선 유학자들의 고리대금~~

 

조선의 유학자들은 상업이나 공업은 천시하면서 고리대급업에 대해서는 무던히도 관대했다.

왜 그랬을까?

그 자신들이 고리대금업을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부는 가난의 어머니인데 만약 장리가 없으면 흉년에 가난한 백성들이 어떻게 살겠는가?”

라는 논리로 5할의 장리를 오히려 옹호하고 한 사람들이다.

 

대표적인 사건은 조선 초 정승 정인지 사건이다.

 

성종 때 1478년의 일이다.

명망이 높고 학문이 깊은 유학자를 삼로오경(三老五更: 왕의 스승을 일컫는 말로 삼로 1인.오경1인 이다)으로 삼으려 했다.

 

대신들은 삼로에 정인지, 오경에 당시 영의정 정창손이 옳다고 주청을 드렸다.

 

정인지(1396-1478)는 태종 때에 관직에 나와 세종.문종.단종.세조.성종 때 까지 6대 임금을 섬기면서 벼슬이 영의정에 올랐던 인물이다.

 

세종 때는 한글 창제에 공헌했고 문종 때는 <고려사>을 개편하는 등 학문으로도 정평이 나있는 인물이다.

 

삼로에 임명되는 일은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다.가문의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성종은 삼로에게는 단지 절을 받을 뿐 아니라 스승으로 삼아 몸소 절을 하는 등 정승보다 높은 예우를 했다.

 

그런데 사헌부 장령 (부장검사) 박숙달이 정인지의 축재를 언급하며 딴지를 걸었다.

 

박숙달 아뢰길

 

“이제 정인지를 삼로로 삼으려고 하시니 정인지는 한미(=寒微: 가난하고 지체가 높지 않음)한데서 일어나 오로지 재산을 불리어 치부를 했습니다. 삼로는 정차 왕사(王師)로 심는 것인데 이와같은 사람이 삼로가 될 수 있습니까? 성균관 유생들이 정인지를 삼로로 삼느다는 말을 듣고 뭇 의논이 자자하기에 상소하여 논란하고자 합니다” 라고 상소를 한 것이다.

 

그러자 정인지와 더불어 오경의 물망에 오른 영의정 장창손은

 

“다른 이익이 되는 일을 관리한 것은 없고 다만 재산을 불려서 치부를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재산으로서 누가 장리를 놓지 않겠습니까 ‘라고 아뢰었다.

 

지사 강희맹도

“자공(=정인지)은 공자문하의 높은 제자인데도 이자로 재산을 불린 것이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또 남들이 버리는 것을 취하고 남들이 취하는 것을 버리는 것이 도한 옛사람들의 재산을 늘리는 길인데 지금 정인지가 재산을 불리는 것이 무엇이 부당하다는 것입니까?”라고 발언을 하여 정창손을 거들고 정인지를 옹호했다.

지금 같으면 난리가 날 발언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