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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다시 보는 단종애사(端宗哀史)(13)-최종회/받은 글

 

<다시 보는 단종애사(端宗哀史) 제135회>

 

사십리 길을 걸어 양주(楊洲) 의정부(議政府)에 거의 다다랐을 적에 어떤 사람 하나가 마주 오다가 노산군 행차를 만나 길을 피하고 있었다. 그는 곧 양성(陽城) 사는 차성복(車猩腹)이었다.

행차가 다 지나가도록 성복은 그가 누구 행차인지를 몰랐다. 그래서 후배더러,

 

“어느 행차시오?” 하고 물었다.

“노산군이요.” 하고 후배 군졸하나가 대답한다. 군사들도 더위와 먼 길에 피곤하였다.

“노산군이라. 노산군이 누구시오?” 하고 성복은 의아하여 다시 물었다.

 

일찍 노산군이란 이름을 듣지 못하였고 또 이렇게 오십여 명 군사가 따를 때에는 여간한 양반이 아닐 듯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 이상한 것은 남녀 속에 앉은 이의 의표가 비범하였음이다.

 

“상왕이라면 알겠나. 상왕이 인제 노산군이라오.” 하였다. 상왕이라는 말에 차성복은 무릎을 굽히고 땅바닥에 엎드리었다.

상왕께서 마침내 높으신 지위를 잃으시고 어느 시골로 떨어지시는가 하고 성복은 황송한 생각을 금하지 못하였다.

 

이윽히 앞으로 지나가신 행차를 바라보고 한탄하고 있는 즈음에 어떤 행인 이 삼인이 지나가며 하는 말이 들린다.

 

“온종일 수라를 안 올렸대.”

“온종일이 무엇인가. 영월부에 가시기까지는 일체 잡수실 것을 올리지 말라고 전교가 내렸다네.”

이러한 말이다. 설마 영월부까지 가시도록 잡수실 것을 드리지 말라는 전교야 내렸으랴 (그것은 알 수 없는 말이다.)마는 이러한 소문은 어디서 난지 모르게 장안에도 퍼지고 행차가 지나가는 노변에도 퍼지었다.

 

그것은 온종일 길을 가도 군사와 나졸들까지도 다 주식을 먹건마는 노산군께 무엇을 올리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이 증명하게도 되었다.

 

군자정 김자행과 내시 홍득경이 행차를 따르는 것은 노산군이 어떻게 대접을 잘 받으시나 하는 것을 염탐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학대를 받으시나 하는 것을 감독하려는 것이다.

 

만일 홍 첨지나 왕 도사나 설혹 노산군께 좋게 하여 드리려 하는 생각이 있더라도 이 두 사람의 네 눈망울이 무서워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상 금부도사 왕방연은 노산군께 대하여 그윽한 충성과 동정을 가지고 있어 오늘도 먹고 마시는 것이, 차마 목에 넘어가지를 아니하였다. 그러나 어찌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행인들이 하는 말을 듣고 성복은 나귀를 돌리어 행차 뒤를 따랐다.

 

행차가 의정부에 들매 처음에는 백성들이 웬일인 줄을 잘 모르다가 차차 이 양반이 어린 상감님으로서 삼촌님한테 쫓겨나서 영월로 귀양 가시는 길인 줄을 알게 되매 모두 동정하였다.

다만 군사와 관인들이 무서워 입 밖에 내어서 말을 못할 뿐이었다.

 

노산군 숙소는 어떤 주막 안채에 정하고 그 사랑채에는 첨지(僉知) 어득해(魚得海), 도사(都事) 왕방연(王邦衍) 내시부사(內侍府事) 홍득경(洪得儆), 군자정(軍資正) 김자행(金自行)이 들었다. 주막집이란 안채는 보잘 것 없는 것이다.

 

차성복은 일행이 다 들고 남은 주막을 택하여 사처를 정하였다. 성복은 주인 노파에게 명하여 백설교 한 시루를 찌라 하였다. 그러고 성복은 행장에서 원산(元山)서 가지고 오던 대구 어 수십 마리를 꺼내어 잘게 찢기를 시작하였다. 노파는 이 손님이 대체 무엇을 하려는고 하고 시키는 대로 하였다.

 

밤이 깊은 뒤에 성복은 떡과 대구 어 뜯은 것을 보자기에 싸서 들고 노산군 사처로 찾아갔다. 군사들도 다 피곤하여 잠이 들고 성복의 발자취 소리가 날 때마다 개들이 콩콩 짖는다. 여름 그믐밤은 지척을 분별할 수 없도록 캄캄하고 벌써 가을이 가깝다고 벌레들이 울고 먼 논에 개구리 소리도 들렸다.

 

길가로 향한 대문은 걸었으나 개천으로 향한 뒷 사립문은 방싯 열린 대로 있다. 초저녁에는 거기도 군노 한두 사람이 앉아 이야기를 하더니 그들도 어디로 가버리고 말았다. 아무도 없는 모양이다.

 

성복은 발자취를 숨기어 안마당으로 들어왔다. 노산군이 어느 방에 드신 것은 미리 노파를 시켜 알아도 보았거니와 그 방이 안방에는 문이 닫히고 희미하게 불이 비치었다.

성복은 문을 들어섰다.

 

이때에 노산군은 자리에 누우시어 부채로 모기를 날리시며 잠을 이루지 못하시다가 불의에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일어 앉으시나 말씀은 없으시었다. 혹시 자객이나 아닌가 하는 의심도 가지시었다.

 

노산군 생각하시기에 결코 이 길을 무사히 가서 영월 구경을 할 것 같지 아니하시었다 중로 어느 주막에서 필시 살해를 당할 줄로 생각하시었던 것이다.

성복은 손에 들었던 것을 앞에 놓고 노산군 앞에 부복하였다.

 

“무엄하온 죄는 만 번 죽어 마땅하오나 오늘 상감마마 노중에서 수라 못 잡수신 말씀을 듣삽고 소신이 시루떡과 대구 어 자반을 바치오니 내일 가시는 길에 행리 속에 감추시었다가 내어서 잡수시옵소서.” 하는 성복의 음성은 울음으로 끝을 막았다.

 

노산군은 저녁을 잘 잡숫지 못하시어 정히 시장하시던 때라, 성복이 울리는 뭉치를 손수 끄르시어 아직 김이 나는 떡을 떼어 입에 넣으시고 맛있게 잡수시며,

 

“오, 네 충성이 가상하다.” 하시고 눈물을 머금으시며,

“너는 누구냐?” 하고 물으시었다.

성복은 감히 머리를 들지 못하고 엎드리어,

“소신은 양성(陽城) 사옵는 차성복이요.” 하고 아뢴다.

 

“머리를 들어 나를 보라.” 하시는 말씀에 성복이 황송하여 약간 고개를 들어 노산군을 우러러 뵈오니 비록 초췌 하오시나 용안의 아름다우심이 이 세상 사람 같지는 아니하시다고 생각하였다.

 

 

다시 보는 단종애사(端宗哀史) 제136회

 

“물건은 네 붉은 정성이니 잊지 못하리라. 나는 아마 세상에 오래 있지 못할 것이요, 또 죽어도 돌아갈 곳이 없으니 만일 혼이 있으면 네 집에 가서 의탁할는지 어찌 아느냐.” 하시고 심히 감개가 많으시다가,

 

“여기 오래 있을데가 아니니 어서 나가거라.” 하신다. 혹시 들키면 성복에게 무슨 화가 있을가봐 두려워하심이었다.

 

성복은 부엌을 더듬어 냉수 한 그릇을 떠다가 드리고 숙소로 물러 나왔다. 후에 노산군이 죽임을 당하신 뒤에 성복의 꿈에 익선관, 곤룡포를 입으신 단종 대왕(노산군)께서 나타나시어, ‘내가 네 집에 의탁하러 왔다’ 하시므로 성복은 기일마다 시루떡을 쪄 놓고 제사를 드리었고 성복이 죽은 뒤에도 대대로 제사를 계속하여 숙종 대왕때 단종 대왕을 복위하신 때까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또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비에 젖고 볕에 그을려 칠월 초생 달빛에 두견성이 슬피 들릴때에 하늘에 사무치는 한을 품으신 노산군은 마침내 영월부(獰越府) 청령포(淸怜浦) 적소에 도착하였다.

 

청령포는 영월부의 서쪽 서강(西江)가에 있는 조그마한 동리다. 남, 서, 북이 모두 산이요, 동으로는 서강을 건너 영월부중이 바라보였다.

 

삼면 산에는 수목이 울창하여 항상 구름이 머물고 앞으로 흐르는 서강소리는 밤새도록 끊일 줄을 몰랐다.

 

노산군 계실 곳으로 정한 것이 수풀 속에 있는 촌가 서너 채. 그중에 한 집이 노산군 계신 곳이요, 다른 집들은 노산군을 지키는 군사와 궁노들의 숙소다. 군사 이십 명, 궁노 십 명, 후에 따라 온 궁녀 여섯 명, 내시 두 명, 모두 이만하였고 또 영월부에서도 날마다 중군, 천 총이 거느린 십여 명 군사와 형리와 호장이 나와서 다녀갔다.

 

노산군이 계신 집은 나무 조각으로 지붕을 인 침침한 집이었다. 뒤꼍은 바로 산에 연하여 밤에는 밤새, 낮에는 새 소리가 시끄럽게 들리었다.

 

부엌에 연한 이간 방 가운데 장지가 있어 새를 막고 아랫방에 노산군이 계시고 웃방 하나에 궁녀 여섯이 살았다.

 

처음 노산군이 떠나오실 때에는 궁녀도 내시도 없었으나 사 오일 후에 상왕 전에 모시던 궁녀들 중에 넷은 예전 대비, 지금 노산군 부인 송씨를 따르고 여섯은 천리 머나먼 길에 옛 주인을 따라온 것이다. 왕도 그것까지는 막지 아니하시었다.

 

내시 두 명도 이 모양으로 온 사람이다. 뒤에 정인지가 알고 궁녀가 따라와서 노산군을 모시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다고 누차 왕께 아뢰었으나 왕은 인지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였고, 뒤에 신숙주가 또,

 

“노산군이 종사의 죄인으로 천지에 용납지 못하려든 궁녀와 탄관이 수종한다. 하옵고 또 범절이 너무 호사하오니 유사에게 명하시와 자의로 따라간 궁녀와 환관을 엄벌하시고 범절을 줄이도록 하심이 마땅한가 하오. 그렇지 아니하면 이것이 성습이 되어 차차 무슨 폐단이 생길는지 알 수 없사온 즉 화단을 미연에 막으심이 옳을까 하나이다.” 하고 아뢰었으나 왕은 머리를 흔드시고,

 

“버려두라.” 하시었다. 아무려나 이리하여 평소에 모시던 궁녀들이 노산군의 좌우에 모시게 되었다.

 

노산군이 서울을 떠나시와 영월 청령포까지 오시는 오륙일 길에 노산군을 모시던 사람들은 다 노산군이 인자하시고 아무리 어려운 처지에 계시더라도 제왕의 위덕을 조금도 손상하심이 없으신 것을 뵈옵고 깊이 감동하였다.

 

시장하시거나 목이 마르시거나 모기 때문에 잠을 못 주무시고 밤을 새우시거나 좌우에 모시는 무지한 무리들이 무엄한 언동을 하거나 노산군은 한 번도 불쾌한 빛을 드러내지 아니하시었다.

 

그래서 따르는 자들은 조금이라도 이 가련하신 옛 임금의 불편하심을 덜어 드리려고 마음으로는 애를 쓰나 서로 무서워서 감히 남의 눈에 뜨이게 도와 드리지는 못하였다.

 

만일 노산군에게 충성된 빛을 보이었다가 그 말이 왕의 귀에 들어갈까 두려워함이다. 그래도 차차 산간의 맑고 찬 샘물을 떠다 드리는 이도 있고, 비에 젖은 뫼 딸기를 따다가 드리는 이도 있고, 주막에서 밤중에 일어나 모깃불을 피워 드리는 이도 있었다

 

그러면 노산군은 언제나 비록 조그마한 호의라도 가상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는 표를 보이시었다. 그것은 혹은 빙그레 웃으심으로, 혹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심으로 표하시었으나 일체 말씀은 하시는 일이 없으시었다.

 

이렇고 노산군은 따르는 군사들의 사모함을 받으시었다. 그중에도 금부도사 왕방연은 가장 감동 받음이 컸다. 그는 노산군을 청령포에 모시어 가두고 사흘 만에 서울로 희정할새 떠나기 전날 밤에 차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냇가에 앉아서 이러한 노래를 불렀다.

 

“천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물도 내 안 같아 울어 밤길 예노매라.”

이날 밤에 잠 못 이룬 이는 금부도사만이 아니었다.

왕방연은 아무도 듣는 줄 모르고 부른 노래언마는 이때까지 잠 못 이루고 계시던 노산군이 들으시고 곧 궁녀를 불러 이 노래 부르는 이가 누군가 알아 올리라 하시었다.

 

그러고 그것이 금부도사 왕방연인 줄을 들으시고 더욱 감개무량하시었다.

이튿날 금부도사 왕방연은 노산군께 뵈옵고,

 

“소인 올라가오.” 하고 하직을 아뢴다. 마땅히 소신(小臣)이라고 일컬어야 옳을 처지에 소인(小人)이라고 일컫기가 왕방연의 마음에 심히 괴로웠다.

 

그렇지마는 지금은 노산군은 대군도 못되시고 군이 시니 소인이라고 일컫는 것도 과한 대접이 될는지 알지 못한다. 그렇지마는 관인들은 다 노산군에게 칭 소인하고 다만 궁녀들과 내시들만이 옛날 말대로 칭 신을 하였으나 아무도 이것까지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다.

 

 

<다시 보는 단종애사(端宗哀史) 제137회>

 

“오, 가느냐. 애썼다.” 하시는 노산군의 눈에는 눈물이 돌았다. 그러나 곧 위의를 정제하시고,

 

“애썼다. 상감 뵈옵거든 내 잘왔다 아뢰고 거처가 좀 협착하나 수석이 좋으니 다행일러라고 아뢰어라.” 하시고 망연히 무엇을 잃으신 듯하시다.

 

“소인 물러가오.” 하고 왕방연은 그래도 차마 떠나지 못하여 노산군 앞에 엎드린 채로 이윽히 일어나지를 못하였다.

 

“소인 물러가오.” 하고 한 번 더 하직하는 절을 드리고 물러날때에 노산군은,

“오, 애썼다.” 하시고 궁녀를 시키어 금부도사에게 술을 주라 하시었다.

왕방연이 지난밤에 부른 노래 한 머리가 말할 수 없는 깊은 인연을 뒤에 남아 있는 여러 사람의 속에 맺게 하였다.

 

청령포에 오신지도 벌써 십여 일이 넘어 칠월 백중절을 당하였다. 이때에도 아직 신라(新羅)와 고려(高麗)에서 불도(佛道)를 숭상하던 유풍이 많이 남아서 칠월 백중이 되면 서울이나 시골이나 관가와 민가에서 열나흘, 보름 열엿새 사흘 동안을 쉬고 새 옷을 갈아입고 절에 가서 우란분회(盓蘭盆會)에 참예하며

 

혹은 집에 중을 청하여 각각 제 조상과 돌아갈 곳 없는 무연한 혼령들을 제도하기(無緣) 위하여 제를 올리고 또 조상의 산소에 가 성묘하고 지전을 불살랐다.

 

노산군을 모시는 궁녀들 중에는 늙은이도 있고 젊은이도 있거니와 그들은 궁중에 있는 동안에 다 불도를 존숭하였고 또 지나간 몇 해 동안에 하도 세상의 변천과 수없는 인명이 초로 같이 스러지는 것을 보아서 인생의 무상을 느낌이 심히 간절하여서 더욱 염불을 외우고 진언을 염하는 일이 성풍이 되었다.

 

더구나 일찍 한 나라의 지존이시던 양반이 보잘 것 없이 비참한 처지에 계시게 된 것을 뵈옵는 그들은 오직 나무아미타불을 염하여 왕생극락을 하거나 그것은 못하더라도 한 번 더 인생에 태어나 금생에 맺힌 무궁무진한 원한을 품어보기나 할까 하는 생각이 아니 날 리가 없다.

 

또 그들이 진정으로 사모하옵는 ‘상감마마’(노산군)를 위하옵는 길도 내생복락이나 빌어 드리자 하는 것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래서 이 궁녀들은 백중을 차리기를 결심하였다. 떡가루를 빻자니 방아가 있나, 떡을 찌 자니 시루가 있나, 도라지, 고비, 고사리가 산에 가득하건마는 일찍 산 것을 보아 본 사람이 궁중에 있을 리가 없으니 캐어올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늙은 궁녀가 인근 민가로 다니며 없는 기구와 물재를 빌어오기로 하였다. 민가에서 기쁘게 빌릴뿐더러 기름, 차조, 옥수수, 버섯, 송기, 열무, 멧나물, 오이, 참외, 수박, 가지, 풋고추 등속을 나도 나도 하고 들고 와서 수두룩하게 헛간에 쌓이게 되었다.

 

등도 많이 만들었다. 떡도 찌고 나물도 삶았다. 후원 늙은 소나무 밑에 단을 모아서 제단을 삼았다. 이 제단은 평시에는 노산군이 나와 앉으실 데라고 생각하면서 정한 황토를 깔았다.

 

이날 볕은 났으나 몹시 무더웠다. 첫가을다운 새파란 하늘이 보이면서도 여기저기 때때로 뭉게뭉게 구름이 피어올랐다. 오늘 밤에 비가 아니 오려나 하고 궁녀들은 들며 나며 구름머리를 바라보았다.

 

밤이 들어 조그마한 등들이 달리었다. 냇물에 띄워 보낼 등들도 동글동글하게 쌓이어 있었다. 환하게 달이 떠올라서 지나가는 구름장 속에 들락날락하였다.

 

제단에는 두를 병풍이 없어서 정면에 기둥 두 개를 세우고 거기 널빤지 하나를 가로 건너 매고 커다란 종이에 다가 길게 지방을 써서 붙이었다. 이 지방은 노산군이 손수 쓰신 것이다.

 

첫머리에 삼생부모영가(三生父母靈駕)라고 쓰시었다. 이것을 쓰실때에 가장 간절히 생각 난 이는 조부 되시는 세종 대왕과 아버님 문종 대왕이시거니와 금생에 한 번 대면해 뵈옵지도 못하시고 또 일전에 종묘에서 그 위패까지도 철폐함을 당하신 어머니 현덕 왕후 권씨를 생각할 때에는 피눈물이 솟음을 금치 못하시었다.

 

다음에 쓰신 이는 조모도 되고 어머니와도 같은 혜빈 양씨와 그 세 아드님. 그 다음이 안평 숙부 부자,

그다음이 아버님 항렬 중에 가장 나이 많은 화의군(和議君) 영,

다음에 황보인, 김종서, 정 분, 허 후 등 계유정란 때에 죽은 사람들을 쓰고

 

또 그다음에는 성 승, 유응부, 박 정, 성삼문, 박팽년, 이 개, 하위지 등을 쓰시고

다음에 외조모와 외숙 권자신의 패를 쓰시고 다음에 장인 장모되는 송현수 부처를 쓰시고 나중에 노산군의 유모 이 오(李午) 부처를 쓰시고 나중에 대자로 충혼 원혼 영가(忠魂冤魂靈駕)라고 쓰시었다.

 

이것을 쓰실 때에 감개가 무량하시었음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정성으로 이 모든 충혼, 원혼을 부르시는 슬프신 뜻이 촛불에 어른어른 비치인 그 필적에 드러났다.

 

노산군은 친히 이 제사에 참예하시지는 아니하시었고 다만 궁녀들끼리만 제사를 지내었다. 그렇지마는 친필로 위패를 쓰시었으니 친제 하심이나 다를 것이 없다.

 

노산군은 의관을 정제하시고 방에 홀로 앉으시어 지난 일이 제 일을 생각하실제 후원에서 늙은 궁녀가 축원하는 소리가 들린다.

 

‘왕생극락’, ‘천추만세’ 같은 구절이 수없이 들린다. 혼령더러는 왕생극락하라고 비는 것이요, 우리 임금(노산군)은 천추만세나 사시라고 비는 것이다.

 

축문을 지어 읽을 만한 한문의 힘도 없고 또 푸념, 덕담을, 할 만한 무당의 구변도 없는 그들은 그저 같은 소리를 뇌고 뇌고 할 뿐이었다. 중얼중얼하다가는 왕생극락, 천추만세, 상감마마 이러한 소리가 크게 들린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의 합창이 들리는 것은 제사가 다 끝이 나는 모양이다.

 

 

<다시 보는 단종애사(端宗哀史) 제138회>

 

이때쯤 부터 투드럭투드럭 뜰 배나무 잎사귀에 굵은 비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것이 순식간에 천명 만마를 몰아오는 듯한 큰비가 되어 순식간에 마당에는 무릎이 잠기도록 물이 괴었다.

 

우뢰와 번개와 빗소리와 갑자기 불어서 미처 내려간 길을 찾지 못하는 수 없는 시냇물 소리와 실로 천지가 뒤집히는 듯하였다. 불을 켜서 홀리려 하였던 등은 불도 아니 켠 채로 다 떠나가 버리고 말았다.

 

궁녀들은 노산군 좌우에 둘러서서 무슨 벌이나 당하기를 기다리는 듯이 덜덜 떨었다.

어디서 우루루 하는 소리가 난다. 무엇이 무너지는 소리다, 궁녀들은 더욱 무서워서 입술이 파랗게 질린다.

 

부엌 뒷벽이 무너지고 그리로 뒷산 물이 물결을 치고 달려들었다.

위험은 가까웠다.

노산군이 앉으신 방에도 뒷문으로 물이 들어오기를 시작하였다.

 

번쩍하고 한 번 크게 번개하는 빛에 보면 마당은 바다와 같이 붉은 물이 편하였고 뜰 가에 섯는 뜰 배나무와 느룹나무가 바람에 흔들리어 풀 잎사귀 모양으로 번쩍번쩍 뒤집힌다.

그 광경은 여자가 아니라도 사내대장부라도 무서울 만하였다.

 

마침내 노산군은 궁녀들을 데리시고 집을 떠나시었다. 군사들이 유숙하는 집에도 물이 들어서 이 청령포 온 동리가 떠나갈 지경이 되어 백성들은 늙은이를 끌고 어린 것들을 업고 퍼붓는 비속으로 갈팡질팡 하였다.

 

이따금 번개가 크게 번쩍할 때에는 물이 무릎 위에까지 올라오는 속으로 부녀들과 아이들이 울고 헤매는 모양이 보이었다. 읍내로 통하는 사강 다리가 떠버린 것이다.

 

노산군은 어찌할 줄 모르는 궁녀들더러 산으로 가자 나를 따르라 하시었다. 노산군 말씀대로 궁녀들은 산 있는 곳으로 길을 더듬었다. 경각간에 옷이 젖어서 몸에서 물이 흐르고 바람이 후려갈기는 빗발에 눈을 뜰 수도 없었다.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고 산속으로 헤매기를 얼마 하였으나 무론 인가를 찾을 길도 없었다. 군사들도 저마다 저 살길을 찾노라고 사산하고 어디로 간 줄을 몰랐다.

그래도 태연히 풀을 헤치고 나뭇가지를 더워잡고 나아 가시던 노산군은 걸음을 멈추시고,

 

“내가 어찌 이리 덕이 박한고.” 하고 한탄하신다. 궁녀들은 이러한 처지에서도 노산군의 한탄하심을 듣고 눈물을 씻었다.

 

그러고 산길을 찾기 위하여 다시 번개가 번쩍하기를 기다렸다.

과연 노산군이 하늘을 우러러 한탄하심이 끝나자마자 서북편에 온 하늘이 모두 불빛이 되는 듯한 큰 번개가 일어났다.

 

이 무서운 큰 빛에 어둠에 잠기었던 산과 벌과 그 위에 있는 모든 움직이는 것들이 일시에 눈에 보인다. 누우락 일락하는 나무들, 철사같이 휘음하게 하늘에서 내려뻗은 빗줄기까지 역력히 눈에 보인다.

 

그 통에 바로 수십 보 앞 낭떠러지 밑에 잔뜩 붙은 물굽이가 불빛같이 보이고 그 위에 분명히 큰 나무 하나가 가로 넘어지어 다리처럼 되어 있는 양이 보인다. 그러고는 번개가 씨물씨물 동편 하늘로 흘러가버리고 도로 캄캄한 밤이 되고 말았다.

노산군은,

 

“이리로 나가자.” 하고 손을 들어 그 나무 보이던 곳을 가리키시며 앞서가신다. 번갯불에는 그렇게 지쳐 같이 보이던 곳도 걸어가면 대단히 멀었다. 그러나 천신만고로 마침내 물가에 다다랐다 거기는 과연 수십 척 돌벽루요, 어두운 속에도 그 밑으로는 바위라도 부술 듯하게 급한 물살이 좁은 목을 넘노라고 비비고 틀고 용솟음 치어 흘러가는 것이 보이고 그 요란한 소리가 천지가 움직이는 듯하였다.

 

아까 번개 빛에 노산군이 보신 바는 추호도 틀림이 없었다. 이쪽 벼루 위에 섰던 큰 소나무 하나가 뿌리가 끊어지어 가로누워서 그 머리를 저편 벼루에 걸치어 놓았다. 밑둥이 두 아름은 될 듯하였다.

 

“천우다. 나는 죽어도 아깝지 아니한 몸이다마는 너희야 죽어서 되겠느냐. 자 건너가거라.

여기만 건너가면 읍내가 얼마 멀지 아니할 것이요, 또 읍내 가기 전에 빈가가 있을 터이니 사람 사는 곳에 인정 없겠느냐. 어서 건너가거라.” 하시고 노산군은 아니 건너가실 듯한 빛을 보이시었다.

 

노산군은 이제 이 모양을 하고 살아나실 뜻이 없으시어 무고한 궁녀들, 당신을 따라 불원천리하고 아무 영광도 없는 곳에 따라 온 그들이나 살 길을 얻어주시고는 차라리 이 밤에 몸을 던지어 이 세상을 버리자고 작정하시었던 것이다.

 

그러나 궁녀들은 노산군 앞에 꿇어 엎디어 이 다리를 건너시기를 빌고 만일 아니 건너시면 자기네가 먼저 벼루에서 몸을 던지어 죽을 것을 맹세하였다.

이리하여 노산군은 무사히 읍내에 들어오실 수가 있었다.

 

이 일이 있은 뒤로부터 관에서는 노산군을 청령포에 나가 계시게 하지 아니하고 객사 동헌 (客舍東軒)을 수리하고 거기 계시게 하였다.

 

새 감사가 올 때마다, 새 부사가 올 때마다, 또 서울서 갑자기 무슨 명이 내려오면 노산군을 대우함이 혹은 후하고 혹은 박하고 여러 가지 변천이 있었으나 영월부중에 여기저기 다니시는 자유까지는 빼앗는 자가 없었다.

 

영월 부사 중에는 노산군을 너무 잘 대접한다 하여 갈린 자도 있었다. 그러므로 약은 사람은 아무리 마음으로는 노산군에게 동정을 하더라도 겉으로는 노산군을 학대하는 양을 보이지 아니치 못하였다.

 

평시에도 금부 진무 한두 사람이 늘 있을뿐더러 언제 경관이 무슨 명을 가지고 올는지도 몰랐고 또 관속 중에서도 노산군에 관한 무슨 죄목을 찾아내어서 서울에 밀고하여 공명을 세우려는 놈이 없지 아니하였다.

 

이러하기 때문에 영월 부사로 내려오는 사람은 서울을 떠날때에 벌써 근심거리가 되었다. 감사도 그러하였다.

 

 

<다시 보는 단종애사(端宗哀史) 제139회>

 

노산군을 학대만 하자니 양심도 괴롭거니와 민심에 거슬리어지고 후대를 하자니 왕이 무서웠다. 그래서 무서운 부스럼 모양으로 노산군은 아무쪼록 건드리지 않고 모르는 체하기로만 주장을 삼았다.

 

한둘이 매우 노산군께 까다롭게 굴어 관풍헌(觀楓軒), 자규류(子規榴), 금강정(金剛錠) 같은 데 소풍 나가시는 것조차 이 핑계 저 핑계로 말썽을 부리었으나 그중에 한 사사가 갈려서 올라 가는 길에 돌팔매를 얻어맞고 죽인다는 위협을 받은 뒤로는 그처럼 까다로운 자도 없었다.

 

노산군이 영월 오신지도 반년이 넘어 지내어서 가을이 가고 겨울이 가고 정축년 봄이 된 때에는 노산군을 감시하는 것도 전보다는 많이 해이해지고 구신(舊臣)들 중에 비밀은 비밀 이지마는 찾아와 뵙는 이가 있는 것도 내버려두게 되었다. 인제야 노산군이 무엇을 하랴.

 

백성들인들 무얼 노산군을 더야 생각할라고, 이러한 심리도 아니 섞였는지 모른다. 사실상 그렇게 전국 민심 초동 목수까지도 아이들까지도, 여편네들까지도 이를 갈게 흥분시키던 노산군 손외(遜外)도 지금은 얼마쯤 김이 빠지어버렸다.

 

슬픈 일, 괴로운 일이 끊일 새 없이 뒤대어오는 이 인생에서는 한 가지 슬픔이나 분함을 오래 지녀 가기도 어려운 일이다.

 

슬픔과 분함이 들어와서는 낡은 그것들을 아주 잊어버리게 할 지경은 아니라 하더라도 기운이 약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그렇지마는 한 번 민심에 깊이 박혔던 슬픔이나 분함은 결코 영영 사라지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언제까지라도 마치 생나무에 낸 생채기와 같이 세월이 갈수록 껍질은 비록 성한데 비슷하게 되더라도 속으로는 더욱 언저리가 커 가고 깊어가는 것이다.

 

노산군 손의 사건에 대한 비동하던 민론이 적이 가라앉을 때가 되면 왕이 노산군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도 때때로 솟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어린 조카가 무슨 죄 있나. 성삼문 사건에 노산군이 관계 아니하였을 것을 왕이 모를 리가 없다. 아무리 성삼문이 어리석기로 그런 말씀을 성사도 되기 전에 어리신 상왕께 여쭈었을 리가 없다.

 

이렇게 왕은 생각하신다. 다만 노산군의 오직 하나 큰 죄는 그가 왕 당신 앞에 임금되신 것이다.

 

“내가 왕이 되자 하니 불쌍한 너를 죄를 씌워 내어쫓은 것이로구나.”

만일 왕이 면륜관을 벗어 놓고 그냥 한 사람으로 노산군과 삼촌, 조카가 되어서 만나신다하면 반드시 이렇게 말씀하시고,

 

“잘못했다, 모두 내 욕심 탓이로구나. 풀의 이슬 같은 영화를 탐내는 욕심 탓이로구나.” 하시고 조카님에게 사죄하였을 것이다. 과연 이로부터 십년이 못하여 왕은 이러한 후회를 사실로 하게 된 것이다(그렇지마는 아직 왕이 지으실 죄는 관영하지 못하였다).

 

왕은 영월에 계신 조카님이시오, 예전 임금이시던 노산군을 생각하실 때에 긍축한 마음이 없지 아니하시어서 강원(江原) 감사(監司) 김광수(金光粹)에게 문안하라 하신 명을 내리시었다.

 

그러고 내시부(內侍府) 우승지(右丞旨) 김정(金淨)을 영월로 보내시어 노산군께 문안하라 하시었다. 이것은 노산군이 과연 어떻게나 지내는가 하는 것을 알고자 하는 것이 첫 목적이라 하더라도 또한 어리신 조카님의 가슴에 맺힌 원한이 무시무시하여 그것을 조금이라도 풀어 보자는 것도 목적이 아님이 아니다.

 

여기는 노상 이유가 없지 아니하다. 현덕 왕후를 폐하고 노산군을 영월로 내어쫓은 후로는 매양 왕의 마음이 편안치 아니하시어 무서운 원혐이 원수 같은 칼을 품고 왕의 신변을 범하는 듯한 생각이 가끔 번개같이 지나가서 머리카락이 쭈뼛거림을 깨달으시는 때가 있고, 어떤 때에는 형수님 되시는 현덕 왕후가 원망하시는 눈으로 노려보시는 꿈을 꾸시는 일도 있었다.

 

더구나 몸이 피곤하시거나 편치 아니하신 때에 그러하였다. 꿈이 무어? 죽은 사람이 무어? 귀신이 나를 어찌해? 하시고 당신의 강한 운수를 믿으시면서도 무시무시하고 쭈뼛쭈뼛한 무엇이 떠나지 아니하였다.

 

노산군께 문안을 보내시고 또 강원 감사에게 노산군을 편안히 하여 드리라는 분부를 내리신 것이 전혀는 아니라 하여도 일부분은 이 때문도 되었다.

 

강원 감사 김광수는 이 명을 받아서 명대로 할 것인가 아닌가 하고 주저하였다. 대개 왕이 비록 겉치레로 이러한 명을 내리시더라도 속으로는 그렇게 노산군을 위하여(그것 잡수실 채소와 과일을 풍성히 드리는 것이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하면) 드리는 짓을 기뻐 아니하실 듯한 까닭이다.

 

그래서 얼마 동안 주저하다가야 비로소 영월 부사에게 명하여 노산군 처소에서 가까운 곳에 밭 한 패기를 장만하여 그 밭에 각양 채소와 참외, 수박 등속을 심어 노산군이 마음대로 따 잡수시게 하라고 하였다.

 

왕의 이 명은 얼른 보면 그리 끔찍한 것도 아니었지마는 그 영향은 적지 아니하였다. 노산군에게 편하게 하여 드리어도 죄가 되지 아니한다는 생각으로 여러 사람에게 준 것이 여간 노산군에게 큰 이익이 되었는지 모른다.

 

부사가 매삭일차 문안을 나오게 되고 나올 때마다 혹은 잡수실 것을, 혹은 피륙을 갖다가 바치는 것을 보고 군사들이 버릇없던 것도 차차 들어가서 공손하게 되고 백성들도 마음 놓고 채소, 과일 같은 것을 보내어 드릴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노산군에게 무슨 큰 위로가 될 리가 만무하다. 봄철이 되어 초목에 새 움이 나오고 철 찾아 오는 새들이 목이 메어 우는 소리를 들으실 때면, 노산군의 흉중에는 말할 수 없는 슬픔이 끓어올랐다.

그러나 이 슬픔을 뉘게 다 말하랴, 말할 사람이 없었다.

 

 

<다시 보는 단종애사(端宗哀史) 제140회

 

심서가 자못 산란하여 진정키 어려우신 때에는 퉁소부는 늙은이 하나를 데리시고 관풍매죽루에 오르시어 봄달을 바라보시며 퉁소를 들으시었다. 밤에 퉁소 소리가 들리면 인근 백성들은 노산군이 관풍루에 오르신 줄 알고 다들 한숨을 쉬었다. 우는 이도 있었다.

 

혹시 퉁소 소리를 따라 관풍루 앞으로 지나가는 이도 있었다. 그들의 말을 들으면 노산군은 반드시 익선관, 곤룡포를 입으시고 난간 앞에 단정히 앉으시와 하늘에 뜬 달을 바라보시되 퉁소 한 곡조가 다 끝나도록 몸도 움직이지 아니하시더라고 한다.

이러하시다가 밤이 이슥한 뒤에야 숙소로 돌아오시기를 일과로 삼으시었다.

 

(달밝은 밤 두견 울 제 수심 품고 누 머리에 지혔으니 네 울음 슬프거든, 내 듣기 애닲아라. 여보소 세상 근심 많은 분네 애어 춘삼월 자규루에 오르지 마소.) 하시는 것이나

 

또, (한 번 원통한 새가 되어 임금의 궁을 남으로부터 외로운 몸, 짝 없는 그림자가 푸른 산 속에 있도다.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이 깊이 아니들고, 해가 가고 해가 와도 한이 닿지 않는 도다. 우는 소리 새벽 묏부리에 끊이니 지샌 달이 희었고, 뿜는 피 봄 골짜기에 흐르니 지는 꽃 붉었도다. 하늘은 귀먹어 오히려 애달픈 하소연을 듣지 아니하시거늘, 어찌다 수심 많은 사람의 귀만 홀로 밝았는고.) 하시는 것이나 다 봄날 잠 아니 오는 밤에 퉁소를 들으시며 지으신 것이다.

 

영월은 산 읍이라 사면이 산이어서 봄철 밤, 달 질 때쯤 하여 누에 오르면 반드시 어디서나 두견의 소리가 들린다. 밤이 깊을수록 더욱 슬피 울고 새벽달에 차마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도록 슬피 운다. 관풍헌(觀風軒)이나 자규루나 다 노산군이 발을 새어 자규성을 들으시던 곳이다.

 

지으신 시를 사람더러 읊으라 하시고는 그 소리를 들으시고 삼연히 나루하신 일이 몇 번인 고. 좌우에 모시었던 사람들도 옷 소매가 젖었다.

 

차차 날이 더워 여름이 되면 노산군은 금강정(金剛錠)에도 가끔 오르시었다. 금강정은 금강가에 있어 누에 앉았으면 물소리 구슬피 들렸다. 이것을 논산군은 심히 사랑하시어 더구나 달 밝은 밤이면 밤 깊은 줄도 모르시고 여울여울 울어가는 강물 소리를 들으시었다.

 

천하가 다 변하는 중에도 옛정과 옛 의를 잊지 아니하고 찾아와서 뵈옵는 구신들도 있었거니와 그 네를 보신 것도 이러한 곳에서였다.

이목이 번다한 곳에서 구신들을 만나시면 누가 무슨 말을 지어낼지도 모를 것이요, 또 찾아 뵈옵는 구신들로 보더라도 밤 조용한 처소가 편하였던 것이다.

 

영월부에 노산군을 찾아와 뵈온 이를 다 적을 수는 없거니와 그중에는 조상치(曺尙治), 구인문(具人文), 원 호(元昊), 권 절(權節), 송간(松間), 박계손(朴溪孫), 유자미(柳自湄) 같은 이들이 있었다.

 

비록 구신은 아니나 김시습(金時習)도 거사의 행색으로 두어 번 노산군께 뵈웠다. 노산군은 일찍 시습을 대면하신 적은 없었으나 그 이름을 들으시고 누구인지 알아보시었다. 이때에는 시습이 아직 머리를 깎지 아니 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다 성명을 변하고 행색을 변하고, 혹은 거사 모양으로, 혹은 유람객 모양으로, 혹은 농부 모양으로 변장을 하고 영월부에 들어와 하루 이틀 묵으면서 동정을 보다가 노산군이 자규루나 관풍루나 금강정에 납시는 기회를 타서 무심코 그 앞으로 지나가는 행객 모양으로 점점 가까이 들어와 노산군께 뵈옵는 목적을 말하였다.

 

그러고 와서 뵈옵는 이는 노산군 앞에 엎드리어 가슴과 목이 메어 오래 일어나지를 못하고 노산군도 흔히 낙루하시는 일이 있었다. 이때에 낙루하심은 찾아오는 자의 정성에 감격하심이었다.

 

뵈워야 길게 사뢸 말씀도 없거니와 또 오래 모시고 있는 것도 옳지 아니할 듯하여 흔히는 맥맥히 시로 바라보고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이번 떠나면 다시 언제 뵈오리, 이번이 마지막이다 하는 생각이 자연히 날 때에 피차에 감회는 더욱 깊었다.

 

찾아왔던 이가 하직하고 물러날 때에는 노산군은 반드시 일어나시와 그의 팔이나 손을 만지시고 석별하시는 뜻을 보이시었다.

가는 사람은 십 보에 한 번, 이십 보에 한 번 뒤를 돌아 보고 눈물이 앞을 가리어 비틀거림을 금치 못하였다.

 

금성 대군이 순흥부(順興夫)에 귀양살이하는지가 벌써 이태나 되었다. 집을 빼앗긴 것은 이미 독자도 다 아는 바여니와 왕은 그가 처자와 함께 있기도 허락치 아니하였다. 그래서 금성 대군은 순흥부 어떤 조그마한 민가 하나를 잡고 시녀 두엇과 사내 하인 두엇과 함께 둠이 되었다.

 

시녀는 본래 금성 대군 궁에 있던 사람으로 상전을 따라온 사람이다. 두 궁녀 중에는 금련(金蓮)이라는 나이 이십 이삼세, 자못 자색이 있는 계집이 있었다.

 

이 시녀 금련은 어려서부터 금성 궁에서 자라나며 십칠 세 적부터는 그윽히 금성 대군을 사모하여 그 곁을 떠나지 아니하려 하였고, 금성 대군도 금련이 아름답고 영리한 것을 귀히 여겨 미워하지 아니하였다.

 

순흥에 금성 대군을 따라온 것도 그만한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성 대군은 본이 근엄한 사람인 데다가 단종 대왕이 선위하심으로부터는 더구나 주색에 뜻을 두지 아니 하였다. 이것이 금련에게는 불만이요, 또 원한이 되었다.

 

금성 대군은 이곳 온 뒤로 기회만 있으면 남중 인사와 사귀었다. 그는 금지옥엽의 몸으로도 모든 존귀한 생각과 태도를 버리고 어떤 사람을 대하여 겸손하고 간담을 토진하였다. 이것이 남 중 인사를 사이에 큰 칭찬과 존경을 산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다시 보는 단종애사(端宗哀史) 제141회>

 

본래 영남 사람은 의리가 있다. 상왕을 노산군으로 감봉하여 영월에 안치한 것을 보고는 가슴 속에 억제할 수 없는 불평을 품고 한 번 죽기로써 의를 위하여 싸우리라는 비분강개한 생각을 가진 선비도 불소하였다. 이러한 인사들은 금성 대군에게서 그 영수를 발견한 것이다.

 

금성 대군은 죄인의 몸이라 사람들과 교제하기가 자유롭지를 못하였다. 부사를 따라서 그 자유는 혹 넓어도 지고 좁아도 지었다.

 

그러나 열 눈이 한 도적 못 막는다는 셈으로 그러한 중에서 금성 대군이 사람 만나볼 기회는 있었다. 봄철이면 산에서, 여름이면 냇가 낚시질 터에서, 또는 밤에 주석에서, 어떻게든지 만나는 방법은 있었고 또 의리로 서로 사귐이 여러 번 만나 길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다.

 

관부의 눈에 뛸 위험을 무릎쓰고 찾아오는 것만 보아도 금성 대군 편에서는 저편 생각을 짐작할 수 있고 또 금지옥엽 귀한 몸으로서 이름도 없는 하향 선비의 손을 잡고 차마 놓지 못하는 금성 대군의 태도만 보면 저편에서도 이편의 생각을 짐작할 것이다. 만나서 말을 한 대야 다만 한 원을 펼 뿐이나 그것으로써 의를 맺기에 족하였다.

 

이렇게 한 번 금성 대군과 지기가 상함한 사람이면 또 자기의 동지를 구하여 금성 대군에게 소개하였다. 이 모양으로 순흥부에 온 뒤에 금성 대군이 사귐을 맺은 사람이 무려 수백 명에 달하였다.

 

마침 정축년을 당하여 이보흠(李甫欽)이 순흥 부사로 내려왔다.

보흠은 세종대왕(世宗大王) 기유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集賢殿) 박사(博士)를 지낸 사람이다. 자를 경부(警部)라 하고 호를 대전(大田)이라 하여 굴하고 이재(理財)가 있고 천성이 사치한 것을 싫어하여 옷이 해어지고 때가 묻어도 부끄러워하지를 아니하였다.

 

선위가 있고 성삼문 변이 있은 뒤에 벼슬에 뜻이 없어 집에 있다가 이번 순흥 부사로 내려온 것이다.

그는 일찍 글을 지어 길주서(吉注書)의 묘전에 제를 지내었다. 그 글에 이러한 구절이 있다.

 

이 글 구절을 보아도 그가 시국에 대하여 불평한 생각을 품은 줄을 알 것이다. 그는 친구와 술을 나누다가도 말없이 문득 낙루하는 것은 상왕(노산군)을 생각함이었다.

 

그러나 그는 한 강개한 생각을 품은 선비요, 일군은 아니다. 그가 순흥 부사로 와서 금성 대군을 만나지 아니하였던들 그는 무슨 일을 도모할 생각을 내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금성 대군의 맵고 매운 충성과 의리를 볼 때에 그만 감격하여 몸을 바치기를 맹세한 것이다.

 

저녁이 되면 부사 이보흠은 미복으로 급창(及唱) 하나만 데리고 금성 대군을 찾아갔다.

이 급창은 얼굴이 잘나고 또 영리하여 보흠이 됨 이래로 항상 곁을 떠나지 아니하는 사람이다. 아주 공순하고 삽삽하여 보흠의 부인까지도 그를 사랑하였다. 그는 다만 보흠 내외의 사랑만 받을 뿐 아니라 그보다도 더한 믿음을 받았다.

 

금성 대군과 이보흠이 마주 대하면 서로 낙루함을 금치 못하였다. 금성 대군은 보흠을 만나 뜻이 서로 맞는 것을 보고 심히 기꺼하였다. 비록 보흠이 지인지감이 부족하고 일솜씨가 없다 하더라도 그는 순흥 부사요, 순흥부 삼백 명 군사와 칠십 명 관 속을 부릴 권력을 가진 사람이다.

 

맨주먹 밖에 없던 금성 대군에게 한 고을 권세라는 것이 여간한 것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일을 하기로 작정하던 날 밤에(닭 울 때나 되었었다) 금성 대군은 자기 갓에 달았던 산호영자를 뚝 떼어 보흠에게 주며,

 

“내 몸에 지닌 것이, 벗에게 줄 만한 것이 이것밖에 없소.” 하였다. 갓끈을 떼어서 정표로 주는 것, 그것은 실로 적은 일이 아니었다. 보흠은 일어나 절하고 받고 죽기로써 허하였다.

 

이렇게 순흥 부사 이보흠이 밤이면 금성궁에 나아가서 밤이 깊도록 일을 의논하는 동안에 다른 일 하나가 생긴다. 그것은 시녀 금련과 급창과의 사람이다.

 

처음 급창을 볼 때에부터 금련의 마음이 그에게로 끌리지 아니함이 아니었으나 금성 대군 같은 고귀한 양반을 오래 마음에 두어오던 금련의 눈에 시골 급창 같은 것은 너무도 초라하였다.

 

그러나 한 달 두 달 지나고 열 번 스무 번 만나는 도수가 많아지는 동안에 그만 두 남녀는 서로 좋아하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하루는 이보흠이 금성궁에 있어서 늦도록 상의한 끝에 거사한 계책을 확실히 정하여 놓았다. 그 계책은 이러하다.

 

순흥부에 조련받는 군사가 삼백 명, 관속이 칠십 명이요, 순흥 경내에 흩어져 있는 정병(精兵)과 기타 잡역을 모조리 징발하면 또한 삼백 명이 되니 이리하여 순흥 한 고을에서 육칠백 명 군사를 얻을 수가 있고 또 비밀히 격서를 보내어 각처에 의기남아를 모집하면 기 아래 모일 사람이 또한 많을 것이다.

 

그동안 남중에서 얻은 금성 대군의 명명과 그윽히 의를 맺어 둔 인사가 수백 명에 내리지 아니한즉 한 번 격서를 보는 날이면 이 사람들이 다 향응할 것은 분명한 일이다.

 

이리하여 순흥에 넉넉한 병력과 군량을 준비해 놓고(넉넉한 병력이라 함은 인근 어느 고을 병력이라도 감히 대항하지 못할 만한 병력이라는 뜻이다. 이때에 벌써 태조, 태종 시대에 정하여 놓은 제도가 해이하기 시작하여 각 읍 군비와 군량을 실지로 전쟁을 치를 만한 데가 많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아무 때나 인근 읍을 점령할 만한 실력을 이룬 뒤에(일각 안에 이 실력은 얻을 수 있으리라고 금성 대군과 이보흠은 생각하였다) 영월에 계신 노산군을 모시어 닭선재를 넘어 순흥에 이봉하고 새재, 대재 두 길을 막아 영남과 서울과의 교통을 끊어 놓고 영남 일로를 호령하면 영남 각 읍을 손에 넣기는 그리 어렵지 아니할 것이다.

 

 

<다시 보는 단종애사(端宗哀史) 제142회>

 

세력이 이만큼만 되면 영남 말고도 팔도 지사가 다 향응할 것이니 서서히 경중을 찔러 장안을 점령하고 노산군을 복위하시게 하여 하늘에 사무친 불의와 원한을 한꺼번에 풀어버리자는 것이다.

이렇게 계획을 세워놓고 두 사람은 너무도 감격하여 손을 마주 잡고 이윽히 말이 없었다.

 

“자, 인제 격서를 짓는 것은 대자의 재주요.” 하고 금성 대군이 서안 위에 놓인 지필을 보흠의 앞으로 밀어 놓는다.

“남아가 글을 배웠다가 이런 데 쓰게 되니 사무여한이요.” 하고 순흥 부사는 붓을 든 손으로 눈물을 씻었다. 깊은 벼루에 먹 가는 소리가 삭삭하고 들린다.

 

이보흠은 필생 정력을 다하여 격문을 지었다. 다 쓰고 붓을 던질 때에 보흠의 망건 편자에는 땀방울이 맺히었다. 그 격서는 그리 길지 아니한 것인데 대요는 수양 대군이 정인지, 신숙주 등 간신에게 그릇 함이 되어 골육상잔하는 옳지 못한 일을 하고 마침내 왕위를 찬탈하였으니 이는 천인이 공노할 일이라, 천하 의사는 일어나 그릇된 일을 바로잡아 상왕을 복위하시게 하자 함이었다.

 

격서를 초하기가 끝난 뒤에 금성 대군은 서너 번이나 읽어보고 문구에 의혹되는 데를 토론하여 몇 군데를 교정도 하였다. 그래서 더할 수 없이 완전하다고 본 뒤에야 다시 정서하고 끝에다가 금성 대군이라고 서명하고 그보다 한 자 떨어뜨리어 순흥 부사 이보흠이라고 썼다.

 

보흠이 돌아간 뒤에 금성 대군은 그 격서를 봉하여 문갑 속에 넣고 여러 가지 올 일을 생각하다가 잠이 들었다.

 

늦도록 어려운 일을 생각하고 또 이야기하던 금성 대군은 매우 몸이 피곤하였다. 오늘 하루만 아니라 근래에 연일 노심초사로 그의 안색은 매우 초췌하고 잠이 들면 심히 깊이 들었다. 게다가 오늘 밤에는 만사가 다 작정이 되고 격서까지 써 놓아서 마음을 턱 놓고 잠이 깊이 들어버리었다.

 

그 담담날이 순흥 장날이다. 장날을 이용하여 장군 모양으로 동지들이 왕래하는 것이 가장 편하였다. 더욱이 여러 사람이 남모르게 한데 모이는 편의는 이밖에 없었다. 이번 장에는 각처 동지가 모여들어 최후 의논을 하게 되었다.

 

최후 의논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금성 대군이 이보흠과 같이 상의한 일을 전하고 아울러 격서에 착명할 사람은 착명하고 그 격서를 돌릴 직분을 맡을 사람은 맡는 일이다.

 

금성 대군이 등잔불도 끄지 아니하고 깊이 잠이 들었을 때에 시녀들이 자는 협실(그것은 건넌방이다) 문이 방싯 열리고 금련의 모양이 나타났다. 때는 시월 초생이나 아직 가을날 같은 기후였다.

 

금련은 마루청 널이 울리지 아니하도록 마치 고양이 모양으로 사뿐사뿐 발을 떼어 놓아 금성 대군의 방문 밖에 섰다. 그는 귀를 기울이어 방안에서 나오는 숨소리를 듣는 것이다.

그 숨소리는 가볍게 코를 고는 소리였다.

 

금련은 방싯하게 문을 연다. 금성 대군의 수염 좋은 옥 같은 얼굴이 보인다. 금련이 여는 문으로 들여 쏘는 바람에 불이 춤을 춘다. 금련의 그림자가 벽에서 춤을 추었다. 이때에 만일 금성 대군이 눈을 떠서 금련의 자태를 보았던들 그가 아무리 지사의 철석같은 간장을 가지었더라도 금련에게 혹하지 아니치 못하였으리만큼 불빛에 비추인 금련의 모양은 아름다웠다.

 

그러나 가슴에 한 뭉치 충성밖에 남은 것이 없는 금성 대군은 잠결도 향락적인 마음을 아니 가지려는 사람과 같이 금련을 등지고 돌아 누워버린다.

 

금련은 울렁거리는 가슴을 억제하고 문 안에 쪼구리고 앉아서 숨소리를 죽인다. 도로 나올까 하고 한 손으로 문을 잡는다.

 

그러나 금성 대군은 돌아누울 때에 잠간 중지하였던 가벼운 코 고는 소리를 다시 시작하였다. 금련은 불현듯 금성 대군이 원망스러운 생각이 난다. 칠팔 년을 두고 사모하여도 거들떠 보아 주지 아니하는 야멸친 정든 임을 원망한 것이다.

 

<어디 견디어보아.> 하고 금련은 무릎으로 걸어 금성 대군 머리맡에 놓인 문갑을 열고 간지 하나를 집어내어 날쌔게 허리춤에 끼어 버린다. 문갑 열리는 소리에 금성 대군의 숨소리는 잠간 가늘어지었으나 다시 여전히 잠이 드는 모양이다.

금련은 그 일 위해서나 들어왔던 모양으로 금성 대군의 이불을 끌어 올려드리고,

 

“가엾으시어라, 오죽곤 하시면,” 하고 종알거리며 나와버렸다.

금련은 마루에서 내려와 종종걸음으로 대문간으로 나온다.

대문 밖에는 웬 사내가 어정어정하다가 안마당에 발자취 소리 들릴 때에 대문 곁으로 바싹 가까이 간다.

 

그 사내는 말한 것 없이 순흥 부사 이보흠의 심복 되는 급창이다. 영리한 급창은 금성 대군과 부사가 자주 상종하는 것이 무슨 일인지 낌새를 알고 기회만 있으면 엿들었다.

 

이날도 양인이 대사를 의논하고 격문을 초할 때에는 물론 급창이나 시녀나 부르기 전에는 가까이 오지 말 것을 분부하였으나 이날따라 더욱 엄하게 좌우를 물리는 것이 더욱 수상하여 급창은 시녀들에게도 밖에 술 사먹으러 나간다고 일컫고 뒤꼍으로 들어가 뒷문을 가만히 열고 나가 금성 대군 방 반침 속에 들어가 숨어서 양인의 의논을 자초지종으로 다 듣고 나중에 금성 대군이 격문을 어디 두는 것까지 살피고 나왔다.

 

그리고 나와서는 금련을 불러내어 그 이야기를 하고 격문만 훔쳐 내면 부귀가 돌아오고 자기네 양인이 팔자 좋게 백년해로를 하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금성 대군이 역적으로 몰리는 판에 금련도 같이 적몰되어 죽을 것을 말하였다.

 

 

<다시 보는 단종애사(端宗哀史) 제143회>

 

이래서 금련은 마침내 서방과 부귀에 미치어 십년 상전으로 섬기고 정든 입으로 사모하여 오던 금성대군을 배반하여 죽을 물에 빠지게 할 양으로 문갑 속에 두었던 격문을 훔쳐낸 것이다.

 

“찾았어?” 하는 것은 밖에 선 사내의 말이다.

“응.” 하는 것은 안에 선 계집의 말이다.

“이리 주어!” 하고 급창은 문틈으로 눈과 손을 댄다.

“가만 있어!” 하고 금련은 소리 안 나게 대문 빗장을 열려고 손을 음질음질한다.

 

“이러다가 나으리가 알면 모가지 날아나. 어서 그것부터 내어 보내어.” 하고 사내는 재촉한다.

이 문답이 모두 소리없는 말로 되었다.

 

그러나 금련은 그 보물을 문틈으로 내어 보내려고는 아니하였다. 그래서 기어이 대문을 열고야 말았다.

 

“이리 내어!” 하고 사내는 금련의 팔을 잡았다.

“나는 어찌할 테야. 임자만 서울로 달아나면 나는 어찌할 테야.” 하고 금련은 사내의 옷소매에 매어달린다.

 

“나를 기다리고 있어! 내가 귀히 되면 저는 귀히 되지 않나. 어서 이리 내어!” 하고 급창은 계집이야 어찌 되었든지 그 격문만 있었으면 좋겠다는 빛을 보이고 금련의 품에 손을 넣으련다.

 

“웬 소리야. 나으리가 내일이라도 아시면 나는 죽게. 웬 소리야, 나도 같이가. 데리고 가.” 하고 금련은 가슴을 해치는 급창의 손을 뿌리친다.

 

급창은 금련을 달래어도 아니 듣는 것을 보고 와락 금련에게 달려들어 한 팔로 금련을 꼭 껴안고 한 손을 금련의 허리에 넣어 간지를 빼어 들고는 한 번 힘껏 금련을 떠밀어 대문 안에 비틀비틀 들어가게 하고 자기는 어두움 속에 어디로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이 녀석! 이 녀석!” 하고 금련이 이를 갈고 따라 나왔으나 벌써 사내는 간 곳을 모르고 동네집 닭과 개만 놀란 듯이 소리를 높이어 짖었다.

 

급창은 그 격문을 전대에 넣어 안 허리에 꼭 둘러 띠고 서울을 향하여 길을 떠났다.

그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돌았고 발에 날개가 돋히어 저절로 옮겨지는 듯하였다.

 

이 격문이 잃어진 것을 발견한 것은 그 이튿날 저녁이었다. 마침 어느동지가 금성 대군을 찾아와서 그 격문을 보려 하여 문갑을 열어 본즉 격문이 간 곳이 없었다. 금성 대군은 크게 놀래어 집안을 뒤지었으나 아무리 찾아도 급창이 가지고 서울로 가니 격서가 나올 리가 없다.

 

 

“이게 웬 일이냐.” 하고 금성 대군은 절망한 듯이 한숨을 쉬었다.

금성 대군은 곧 부사 이보흠에게 그 연유를 말하였다. 부사도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것은 급창놈이 온종일 보이지 아니한 때문이다.

 

곧 나졸을 급창의 집에 보내어 급창의 어미 아비를 잡아 들이었으나 어젯밤 나간 뒤에는 간 곳을 모른다고 잡아떼었다. 사실상 그의 부모도 그가 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 급창은 공명에 탐이 나서 이것저것 돌아볼 사이가 없었다.

 

부사 이보흠 부처가 평소에 저를 어떻게 심복으로 사랑하여 준 것도 그에게 터럭 끝만한 의리의 속박을 주지 못하였다. 정든 금련도 그의 마음을 끄는 힘이 되지 못하고 늙은 부모도 다 잊어버리어 마음의 어느 구석에도 생각이 남지 아니하였다. 그는 다만 서울로 서울로 달려갔다.

 

마침내 금성 대군과 이보흠은 이것이 급창 놈의 농간인 것을 짐작하였으나 그 격문을 가지고 간 것은 급창이라 하더라도 훔치어낸 사람은 따로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달하였다.

그게 누굴까 이 문갑에 그것이 든 줄은, 어찌 알았으며 또 알았기로니 그것을 누가 집어 내었을까?”

 

의심은 금련에게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금성 대군은 금련을 불렀다. 금련은 많이 울고 난 산 사람 모양으로 해쓱하였다.

처음에는 금련이 실토하지 아니하고 뚝 잡아매었으나 마침내 이실직고 하여 버리고,

“살려 줍시오!” 하고 금성 대군 앞에 엎더지었다.

 

금성 대군은 부사에게 부탁하여 금련을 옥에 내리어 가두라 하고 곧 급창 따라잡을 계교를 생각하였다.

 

“저놈이 본래 길을 잘 걸어 하루에 족히 이백 리를 가는 놈이요.” 하는 이보흠의 말에 금성대군의 입술은 파랗게 되었다.

“어찌하면 저놈을 따라잡소?” 하고 금성대군이 부사의 찡그린 얼굴을 바라본다.

보흠은 이윽히 침음하더니,

 

“한 가지 길이 있소. 기천 현감(縣監) 김효흡(金孝洽)이 말을 잘 타고 또 걸음 잘하는 말을 먹이니 그 사람에게 청을 할 수밖에 없소. 지금 곧 사람을 기천으로 보내어서 그 사람이 마침 어디를 가지 않고 기천 있기만 하면, 곧 말을 타고 떠나기만 하면 급창이 그놈이 아무리 빨리 가더라도 대재 지경을 못 벗어나서 붙들릴 것이요.” 한다.

이 말을 듣고 금성 대군은 적이 안심하는 빛을 보이었으나 다시 미우에 근심이 떠돈다.

 

“어디 기천 현감은 믿을 수가 있소?”

“그것은 염려 없을 듯하외다. 그 아비가 생전에 소인과 친분이 있었고 또 저도 조상부모 하고 혈혈무의한 것을 소인의 선친이 거두어서 소인의 집에서 무이생장 하다시피 하였고

또 남행으로 출륙이나 하게 되는 것도 소인의 반연이 적지 아니하니 설마 제가 소인의 청을 아니 듣겠소오리까. 그걸랑 염려 마시겨오.” 하고 보흠이 안심하는 한숨을 내어 쉰다. 금성 대군도 그제야 적이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영리한 급창이 뒤에 따를 것을 미리 짐작하고 간도로 들어갈는지도 모르고 낮에는 숨고 밤이면 갈는지도 모르는 김이다. 이러한 의심이 나면 보흠의 말도 그리 탐탁하게 믿어지지를 아니하지마는 이 길밖에는 더 어찌할 수가 없었다.

 

 

<다시 보는 단종애사(端宗哀史) 제144회>

 

그리하여 보흠으로 하여금 기천 현감 김효흡에게 간곡하게 통정하고 부탁하는 편지를 쓰고 금성 대군도 이번 일에 힘을 쓰기를 바란다는 말과 또 그러하면 후일에 공이 크리라는 말까지도 써서 편지 한 장을 써서 동봉하였다.

 

그리고 감영에 급한 차사 다니기에 쓰는 썩걸음 잘 걷는 관노 하나를 뽑아 중상을 걸고 나는 듯이 기천에 다녀올 것을 명하였다.

 

기천 현감(縣監) 김효흡(金孝洽)이 순흥(順興) 부사(府使) 이보흠(李甫欽)의 편지를 받은 것은 이튿날 명명이었다.

 

김효흡은 좋게 말하면 쾌남이요, 좋지 못하게 말하면 건달 같은 사람이었다. 문관이면서도 말달리기와 활쏘기를 좋아하고 또 주색을 좋아하였다. 문하라기도 우습지만 기천 읍내에는 말 달리기, 활쏘기, 노름하기, 술 먹기 좋아하는 건달패들이 현감의 휘하로 모여들어 동헌에는 밤낮에 풍류가 질탕하였다.

 

이러고도 파직을 아니 당하는 것이 이보흠의 힘인 것은 말할 것이 없다. 이보흠이 일개 부사에 불과하거니와 그의 문명이 높음이 있고 나졸에게까지도 상당한 존경을 받았던 것이다. 이러한 관계이기 때문에 이보흠은 김효흡을 제 질 모양으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효흡은 보흠의 편지를 받아보고 곧 말을 달리어 대재를 향하여 달리었다. 급창이 재작일 밤에 순흥부를 떠났다 하면 제아무리 빨리 걸었다 하더라도 충주(忠州)를 지내지 못하였을 것이니 역마를 갈아 타고 달리면 속함녀 장호원(長湖院), 아무리 더디더라도 이천(利川) 안짝에서 따라잡을 것은 의려 없다고 생각하였다.

 

기천 현감은 준마를 달리어 단풍도 다 지내고 낙엽이 표요하는 대재를 단숨에 넘어 단양 육십리를 점심지을 때도 다 못되어 다다랐다.

 

이 모양으로 그는 밥도 마상에서 먹고 밤에도 주막에서 눈을 붙이는 둥 마는 둥 또 길을 떠 나서 사흘 만에 급창을 장호원과 음죽(陰竹)새에서 따라잡았다.

김효흡이 한 달에도 한두 번은 반드시 순흥에 이보흠을 찾아보는 관계로 급창을 잘 알았다.

 

“이놈아, 게 섰거라!” 하고 김효흡은 말을 달리어 소로로 피하려 하는 급창을 꼭 붙들었다. 여러 날 길에 놈도 더 뛸 근력이 없었던 것이다.

“이놈아, 그 편지 내어!” 하고 손으로 급창의 몸을 뒤지어 격문이 든 전대를 빼앗았다.

 

“허 요놈, 발칙한 놈 같으니. 그렇게 너의 사또 신세를 지었거든 그래 요짓이야.” 하고 말채찍으로 급창의 잔등을 한 개 후려갈기고 격문을 내어서 본다.

 

급창은 분함을 금할 수 없었다. 손에 잡았던 금덩어리를 그만 떨어뜨린 셈이 되었다. 처음에 김효흡을 좀 저항하여 보려고도 하였으나 아무리 보더라도 견딜 도리가 없어서 이만 뽀드득뽀드득 갈고 길가에 서서 있다.

효흡이 이것을 다 보고 나서,

 

“허 고놈, 네 이제 무엇인 줄 알고 훔쳐가지고 어디로 간단 말이냐.” 하고 그 격문을 찢으려고 두 끝을 잡는 것을 급창이 달려들어 효흡의 팔을 붙들며,

 

“사또 잠깐만 참읍쇼. 소인 말씀을 한마디만 들읍소.” 하고 막는다.

이 꾀 많고 구변 좋은 급창이 좀 어리석한 기천 현감을 휘어 넘기려는 것이다.

“그래 무슨 말이니? 요놈 때려죽일 놈 같으니. 어디 말해 봐!” 하고 효흡도 격서 찢기를 잠깐 정지한다.

 

“사또, 경상 감사 한자리 안 버시렵쇼? 지금 경상 감사 궐 인뎁쇼. 사또만 하신 양반이 기천 현감이 당할쇼.”

“요놈, 웬 소리야?” 하고 효흡은 급창의 말에 놀라면서도 경상 감사란 말이 노상 듣기 싫지는 아니하다.

 

“사또, 이 격서를 가지고 서울로 올라갑쇼. 그러시면 내려오실 때에는 경상 감사는 떼어 놓은 당상이닙쇼. 경상 감사 하시거든 소인 부르시와 두둑한 구실이나 한 자리 줍쇼.” 하고 급창이 당장 경상 감사 앞에 청이나 하는 듯이 허리를 굽신굽신한다.

 

기천 현감 김효흡은 잠깐 주저하였다. 급창의 말이 과연 옳은 말이 아니냐. 그러나 이보흠의 신세를 어찌할꼬. 옳다, 이보흠의 성명 삼자는 칼로 오려 버리자 하고 마음을 작정하였다.

김효흡은 이렇게 생각하고 그 격서를 소매 속에 집어넣고 말에 올라 서울을 향하고 달아나려 할 적에 급창이 앞을 가로막으며,

 

“사또, 소인은 어떻게 하랍쇼?”

“순흥으로 가려무나.”

“죽기는 누가 죽고요. 사또 귀히 되시거든 소인 공도 내세운다고 무슨 필적이라도 줍쇼.”

 

필적이란 말에 기천 현감은 열이 상투 끝까지 올라 말채찍을 높이 들어 급창을 후려갈기니 채찍 끝이 머리에서 귀통을 감싸고 돌아 뺨이 터져 피가 흐른다. 급창이 아파서 몸을 휘청하고 쓰러지는 틈을 타서 먼지를 차고 말을 달려 가버리고 말았다.

 

급창은 의기양양하게 달려가는 기천 현감의 뒷모양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으나 어찌할 수 없었다. 그는 안타까운 듯이 땅에 엎드리어 손으로 잔디 뿌리를 뜯다가 문득 벌떡 일어나며,

“옳다 되었다.” 하고 오던 길로 기천을 향하고 돌아섰다.

 

그는 아무러한테서나 실망하고 자빠질 사람이 아니다 발길에 채어서 죽는다 하면 그는 반드시 차는 사람의 발바닥이라도 매어먹고 그러고 한 번 웃고야 죽을 사람이다.

그는 한 묘책을 얻은 것이다. 그것은 어러하다.

 

아무리 기천 현감이 말을 잘 탄다 하더라도 서울을 가려면 아직도 이튿날 가야 할 것이요, 서울서 기천 현감의 기별을 듣고 관병이 순흥부에 내려오려면 아무리 속하여도 칠팔일은 걸릴 것이다.

 

이 동안 급창이 근처 안동(安東)으로 가서 안동 부사 한명진(韓明溍)에게 이 말을 하여 안동군사를 가지고 불의에 순흥을 엄습하기는 나흘 안에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리하면 격문을 가지고 서울까지 올라간 기천 현감이 도리어 헛물을 켜고 금성 대군과 순흥 부사를 잡은 공은 도리어 자기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급창은 김효흡에게 얻어맞아서 아픈 것도 잊어버리고 있는 기운을 다 내어 안동부로 향하였다.

 

 

 

<다시 보는 단종애사(端宗哀史) 제145회>

 

김효흡은 급창이가 말하던 경상 감사인 두영이 손에 잡힐 듯 잡힐 듯하여 몸이 피곤하는 줄도 모르고 말을 채치어 서울에 득달하였다. 그래서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이징석(李澄石)을 통하여 그 격문을 왕께 올리었다. 격문 끝에 쓰인 순흥부사 이보흠의 이름은 칼로 도려내고 오직 금성 대군의 서명만이 있었다.

 

왕은 격문을 보시고 일변 놀라시고 일변 분하시어 기천 현감 김효흡을 불러 이번 역모에 관한 자세한 말씀(그것을 김효흡은 본래 모르는 일이기 때문에 되는 대로 지어서 아뢰었다)을 물으시고 그 일을 고하는 충성을 가상히 여긴다 하시었다.

 

그러고 즉시로 영의정 정인지를 부르시와 금성 대군과 그 관련을 잡을 것을 명하시고 대사헌(大司憲) 김 순(金淳), 판례 빈사 김 수를 보내어 금성 대군을 국문하게 하시고 또 소윤(少尹) 윤자(胤子), 우보덕(右輔德) 김지경(金之慶), 금부(禁府)진무(鎭撫) 권함 등으로 금성 대군 이외에 죄인을 국문하게 분부하시와 즉일로 출발하라 명하시었다.

 

안동(安東), 예천(醴泉) 군사로 하여금 순흥을 엄습하게 하고 한명회의 중제되는 안동 부사 한명진으로 하여금 토적사(討賊使)의 중임을 맡게 하시었다.

 

이때에 금성 대군과 순흥 부사 이보흠은 기천 현감의 회보를 기다렸으나 이틀이 지나고 사흘 나흘이 지나도 소식이 없음을 보고 비로소 의아하기를 시작하였다. 만일 김효흡이 그 격문을 가지고 서울로 올라갔다 하면 (이보흠은 김효흡이 그러하리라고 믿지는 아니하였다) 만사는 수포에 돌아갈 뿐더러 금성 대군과 이보흠의 목숨은 부지를 못할 것이다.

 

써 놓았던 격문을 잃어버린 금성 대군은 새로 격문을 써 우선 예천 안동으로 띄웠다. 그러나 그 격문은 안동 지경을 다 돌기도 전에 밤중을 타서 안동, 예천군사 오백여 명이 안동 부사 한명진의 거느림을 받아 순흥부를 엄습하였다.

 

불의에 수많은 군사의 엄습함을 받은 순흥부는 미처 손쓸 사이도 없이 개미 한 마리 샐 틈 없이 포위를 당하고 빗발 같은 시석이 성풍으로 쏟아지었다.

일변 한명진은 순흥 부사 이보흠에게 사자를 보내어 속히 금성 대군을 잡아내어 보내라 그렇지 아니하면 성중을 무찌르리라고 위협을 하였다.

 

본래 용병지재가 아닌 이보흠은 이 불의 지변에 어찌 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그는 한낱 선비다. 격문은 지을 줄 알아도 실지로 싸울 줄은 몰랐다.

 

게다가 한명진은 성중에 글을 던지어 누구나 항복하면 목숨을 용서하려니와 만일 관명을 거역하면 도륙을 면치 못하리라고 위협하고 또 사실상 약간 반항하는 언행이 있는 사람을 잡아 목을 베어서 높은 곳에 달아 백성들의 기운을 눌러서 성중 백성들은 오직 전전긍긍하고 군사들도 싸울 뜻이 없어 성문에서 도망할 틈만 엿보았다.

 

오직 어떤 중군(中軍) 한 명과 천총(千摠) 한 명이 각각 백 명가량의 군졸을 수습하여 가지고 동헌과 몇 사방을 지키어 죽기로써 안동군에 저항할 뿐이다.

 

이때에 금성 대군은 정히 잠이 들어 있다가 병마지성이 요란한 것을 보고 옷을 떨치어 입고 칼을 들고 뛰어나 동헌으로 향하였다. 얼마를 가지 아니하여서 뛰어오는 관노 하나를 만났다. 그는 부사의 심부름으로 금성궁으로 오는 길이었다.

 

“나으리 마님 입시오?”

“오, 누구냐?”

“소인이요. 돌쇠요. 큰일 났습니다. 안동, 예천 군사가 수없이 몰려와서 지금 부중을 겹겹이 에워싸고 나으리 마님 잡아내라고 야단입니다.

 

사또께옵서는 소인더러 나으리 마님 어서 피신 하십소사 여쭙고 오라 하시와 지금 뵈오러 가는 길입니다. 나으리 마님, 시각이 바쁘니 어서 피신하십쇼.” 하고 관노는 황황하게 재촉한다.

 

“사또는 어디 계시냐.”

“시방 군사를 모으라 하시는 모양이요. 군사들이 안동 군사가 무서워 더러는 도망하옵고 더러는 항복하옵고 또 죽기도 하였는지 알 수 없사오나 모여드는 군사는 얼마가 되지 못하는 듯하옵니다.”

 

이때에 ‘뚜우~ 뚜우~’하는 나발 소리와 북소리가 들린다.

“취군이요.” 하고 관노가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

금성 대군도 귀를 기울이니 철철, 터벅터벅하고 군사들의 발이 땅을 차고 달리는 소리가 땅속에서 나오는 소리 모양으로 들린다.

 

동헌으로 점점 가까이 갈수록 인기척은 요란하였으나 말소리는 들리지 아니하였다. 한참 동안 짖던 개들도 너무도 짖기에는 어마어마하다는 듯이 소리를 잠가버리고 말았다.

백성들은 모두 잘 수도 없고 뛰어나오기도 무서워 덜덜 떨고 믿을 수 없는 문고리만 비끄러 매었다.

 

“어서 피신하십시오.” 하고 관노가 성화를 하는 것도 듣지 아니하고 금성 대군은 삼문 안까지 들어왔다.

삼문 안에는 한 오십 명 가량 되는 군사가 활을 메고 창을 들고 모여 섰다. 이것이 천촌 한 사람이 한 알갱이 두 알갱이 모아들인 군사다.

 

중군이 거느린 군사는 밖에서 동으로 달리고 서으로 달려가 장수효나 많은 듯이 안동군사를 엄포하고 있었다.

천총은 분명히 계상에 서 있는 부사 이보흠의 명령을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금성 대군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부사 이보흠이 펄쩍뛰며,

 

“나으리 웬 일이시오? 왜 아직도 피신을 아니하시오?” 하고 심부름 보내었던 관노더러,

“이놈, 내 무어라고 이르더냐. 널더러 나으리 모시어 오라고 이르더냐.” 하고 호령을 한다.

“아니요.” 하고 금성 대군이 부사의 팔을 붙들고,

 

“아니요. 내가 피신할 내가 아니요. 이제 내가 불명해서 대사를 그르치었으니 나 혼자 피신하여 살기를 도모할 내가 아니요. 막비운이어, 운이니까 내 혼자 안동 부사를 만나보고 무고한 목숨을 살해하지 말도록 말이나 하려고 하오. 날 잡으러 왔다 하니 나만 가면 무사할 것 아니요?” 하고 일어나 나가려 한다.

부사 이하로 여러 사람이 만류하고 사생을 같이 하기를 원하였으나

금성 대군은,

 

“그대들은 살아남아 상왕을 복위하시게 하라.” 하고 듣지 아니하였다.

이리하여 금성 대군은 안동 부사의 손에 붙들려 안동 옥에 가둠이 되었다.

 

<다시 보는 단종애사(端宗哀史) 제146회>

 

금성 대군이 붙들리고 마침내 안동 옥에서 교살을 당하매 신숙주는 이때야말로 노산군을 없이 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자주 왕께 노산군을 제하여 버리기를 청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거년에 이 개의 무리도 노산을 빙자하였삽고 이제 유(금성 대군)도 또한 노산을 끼고 난을 일으키려 하였사온 즉 노산을 살려 둘 수가 없습니다.”

왕은 숙주의 말을 들으시고 고개를 흔드시며,

 

“인제 의정부에서 또 무슨 말이 있겠지. 그때에 다시 의논해서 시행하지.” 하시었다.

숙주는 왕의 이 말씀을 의정부로 하여금 청하게 하라시는 뜻으로 해석하여 영의정 정인지, 좌의정 정창손, 이조 판서 한명회 등에게 말하여 숙주와 함께 왕께 청하라 하였다.

노산군이 역적 금성 대군의 받든 바 되었으니 살려 둘 수 없다는 뜻이다.

 

왕은 침음양구에 붓을 들어 (왕은 말씀으로 하시기 어려운 때에는 흔히 글로 쓰시는 버릇이 있었다.) ㅇㅇ라고 써서 신숙주를 보이시고 한참 있다가 또 붓을 드시어, ㅇㅇ라고 쓰시어 정인지를 주시었다.

그 뜻은 삼가 그대들의 뜻(노산군을 죽여야 한다는)은 알거니와 내가 더할 수 없이 박덕하여 형제를 많이 죽였거든 또 어찌 감히 조카를 죽이랴.

 

노산군을 폐하여 뭇 백성이나 만들라 하심이다. 진실로 왕도 안평 대군, 금성 대군, 화의군, 한남군, 영풍군 합하여 친동기를 다섯 분이나 죽이시었고 조카들은 예일 것도 없이 죽였으므로 또 골육을 죽인다 하면 입에서 신물이 돌았다. 될 수만 있으면 노산군은 아니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신숙주와 정인지, 그중에도 신숙주가 주동이 되어 종친부(宗親府), 의정부(議政府), 충훈부(忠勳府), 육조 연명으로 계목을 올리었다.

이리하여 마침내 노산군을 죽이기로 조의가 확정이 되었다.

ㅇㅇ라고 정원 일기에 적히게 되었다. 시월이라 함은 정축년 시월이다.

 

이날 영월부에는 금부 도사가 내려왔다고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노산군을 모시는 시녀들과 종인들도 이 말을 들으매 자연 가슴이 두군거렸다. 순흥부에서 대재 하나 넘으면 영월이라 사흘 길이 다 되지 못하니 금성 대군 사건 일어난 소문이 영월에 들어온지가 벌써 수십일이나 되고 금성 대군이 안동 옥에서 교살을 당하였다는 소문이 온지도 오륙일은 되었다.

 

이러한 일이 있은 뒤에는 반드시 노산군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은 누구나 다 짐작하던 일이다.

금성 대군이 순흥서 잡히어 안동으로 이수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신 날에 노산군은 하룻밤을 내려 우시었다.

 

“금성 숙부마저 돌아가면 나는 누구를 의지하나.” 하고 한탄하시고 느껴우시니 좌우가 다 목을 놓아 울었다. 그런 뒤로는 노산군은 시녀들과 내시들과 제 소원으로 따라와서 수종 드는 오륙인 선비들에게 각기 돌아갈 곳을 구하는 것이 좋다는 뜻을 말씀하시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 노산군을 사생 간에 끝까지 따르기를 맹세하였다.

 

이러하던 판에 금부 도사가 내려온 것이다. 내려온 금부 도사는 작년에 노산군을 모시고 왔던 왕방연(王邦衍)이다. 그는 사약(賜藥)을 가지고 노산군 처소에 이르렀다. 이때에 노산군은 익선관, 곤룡포를 갖추시고 당 중에 좌정하시어 정하에 부복한 방연을 보시며,

 

“무슨 일로 내려왔느냐. 상감 강녕하시냐.” 하고 물으시었다.

처음 왕방연은 문전에 이르러 차마 들어오지 못하여 머뭇거리기를 마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나장이 시각이 늦는다고 발을 구르고 재촉하므로 부득이 들어간 것이다.

 

들어오기는 하였지마는 노산군의 위의를 뵈오매 차마 내려온 뜻(잡숫고 돌아가실 약을 가지고 내려왔다는)을 말을 만들어 입 밖에 낼 수가 없어서 다만 이마로 마당을 조아라고 느껴 울 따름이었다.

 

노산군은 왕방연이 차마 말을 못하는 양을 보시고 또 그가 엎드린 곁에 백지로 봉한 네모난 조그마한 상자가 놓여 있음을 보아 그가 가지고 온 사명을 짐작하였다.

대문 밖에서는

 

“유시요! 유시요!” 하는 나장의 재촉이 들려온다. 유시(酉時)가 노산군이 사형을 받을 시간이다.

 

금부 도사 왕방연이 울고만 엎드리어 언제 일이 끝날지 모를 때에 평소 노산군을 따라와 모시던 공생(貢生)한 놈이 활시위를 뒤에 감추어 들고 노산군의 등 뒤로 달려와서 노산군의 목을 졸라매고 복창 밖으로 잡아당기었다.

 

노산군은 뒤로 넘어지시어 줄을 따라 끌려가시다가 복창 문턱에 걸리어 절명하시었다. 그동안에 소리도 아니 지르시고 몸도 움직이지 아니하시었다. 시녀들이 알고 달려들어 목맨 줄을 끄르고 애써 소생하시게 하려 하였으나 다시 소생하시지 아니하시었다.

 

“아이고 아이고.” 하고 시녀들은 머리를 풀어 헤치고 통곡하였고 다른 사람들(그때에도 수십 명 되었다)도 통곡하였다.

공명을 이루려고 노산군의 목을 매어 죽인 공생은 대문을 나서지 못하여 피를 토하고 즉사하여 버렸다.

 

금부 도사 왕방연은 군사를 명하여 노산군의 시체를 금강(錦江)에 띄우게 하였다. 그는 만류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하지 아니하면 반드시 시체도 온전치 못하시리라고 하였다.

 

노산군의 시체가 물에 들어가 둥둥 떠서 흐르지 아니하고 하얀 열 손가락이 떴다 잠겼다 하는 것을 뵈옵고는 시녀들과 종자들이 모두 통곡하고 사랑하는 임금의 뒤를 따라 물에 뛰어 들어갔다.

밤에 영월 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가 몰래 시체를 건지어 어머니를 위하여 짜 두었던 관에 넣어 부중에서 북으로 오리 되는 곳에 평토장을 하고 돌을 얹어 표하여 두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