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단종애사(端宗哀史) 125회>
유응부가 성삼문, 박팽년 등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서생은 불가여모사라더니 과연이로구나. 아까 내가 한 번 칼을 써 보려 할때에 너희 놈들이 굳게 막아서 천재일시를 놓치어버렸으니 이런 분할 데가 있나. 이놈들 날더러 만전지계가 아니라고 하였지? 그래 이 꼴 되는 것이 만전지계냐. 엑끼 못생긴 놈들 같으니 너히 같은 놈이 사람이 무슨 사람이야. 개 같은 놈들, 못생긴 놈들.” 하고 이를 간다.
누구누구와 함께 역모를 하였느냐고 묻는 데는 유응부는 다만 한 마디, 무슨 물을 “말이 있거든 저 썩어진 선비놈들헌테 물으려무나.” 하고는 이내 굳게 입을 닫아버리고 만다.
왕은 더욱 노하여 단근질을 하라고 명하신다. 성삼문을 지지던 쇠꼬창이를 뻘겋게 달게 하여 응부의 불두덩을 지지니 기름이 지글지글 끓고 그 기름에 불이 붙어 번쩍번쩍 불길이 일어나고 살점이 익고 타서 문들어지어 떨어진다.
“이놈, 그래도 항복을 아니해? 그래도 같이 한 사람을 안불어?” 하고 왕은 소리를 지르시고 앉으락 일락 진정을 못하시도록 분통이 터지신다.
응부는 왕의 말은 귓등으로 듣고 대답도 아니하고 안색이 조금도 변함이 없이 꼿꼿이 서서 흥종 같은 어성으로,
“이놈들아, 쇠꼬창이가 식었구나. 더 달궈 오너라.” 하고 종시 항복을 아니한다.
왕은 하릴없이 응부를 물리라 하고 이 개(李塏)를 끌어내어 단근질을 시작한다. 이 개는 서서히 왕을 바라보며,
“여보, 이게 무슨 형벌이요?” 하고 물었다. 과연 이런 형벌은 걸주(桀紂) 이후에는 없는 것이다. 왕은 무료하여 더 물으시지 아니하고 하위지(河緯地)를 불러낸다.
하위지는 상왕이 선위하신 뒤에 벼슬을 버리고 선산항제로 내려갔었으나 이번에 동지들에게 불려 올라왔던 것이다.
왕은 위지를 보시고,
“이놈, 너도 저놈들과 같이 역모를 하였지?” 하고 물으신다.
“참칭왕(僭稱王)을 패하고 상왕을 복위하시게 하려고 하였지요.” 하고 위지는 한숨을 쉰다. 불행히 실패하였다는 뜻이다.
“어찌해서 그랬어? 벼슬이 부족해서 그랬느냐?” 하고 다시 물으신다.
“벼슬? 나으리가 영의정을 주기로 받을 내요? 악을 치고 의를 붙들자는 것이요.” 하고 극히 선선하게 대답한다. 그는 본래 침묵하고 또 있는 대로 말하는 사람이었다.
문종대왕이 승하하시고 상왕께서 사위하신지 얼마아니 되던 어떤 날, 박팽년이 하위지를 찾아왔다가 비를 만나서 하위지에게 우비를 빌어 입은 일이 있다.
그때에 하위지는 시 한 수를 지어서 팽년을 주었다. 그 시는 이러하다.
첫 연(聯)은 남아가 예나 이제나 모름지기 의를 위하여 살고 죽을 것을 말한 것이요, 아래 연은 사생을 같이 하자는 뜻을 말한 것이다. 이 시를 받은 팽년은 다만 눈으로 알았다는 뜻을 표하였던 것이다.
왕이 다른 사람과 같이 하위지에게도 악형으로 항복을 받으려 할 때에 하위지는 다만,
“내가 반역일 것 같으면 죽일 것이지, 더 물을 것이 무엇이요? 하고 다시 말이 없다.
왕은 악형도 지리해지고 또 악형했자 신통한 것이 없을 것을 알아서 화로를 물려 버렸다.
그리고는 다시 성삼문을 향하여 그 같이 한 사람이 누구누구인 것을 물었다. 일이 이렇게 다 발각이 된 뒤에 숨길 것이 없다고 삼문은 선선하게 대답한다.
지금 나으리가 다 물어보지 안했소“? 박팽년, 유응부, 하위지, 이 개가 다 내당이요.” 한다.
“네 아비 승이 운검으로 들어가면 나를 죽이려 하였지?” 하고 왕이 물으신다.
“그랬소. 내 아버지가 이 일에 아니 참예할 리가 있소.” 하고 삼문이 자긍하는 듯이 대답한다.
“또 그 담에는 누가 있어?” 하고 그래도 더 알아보려고 왕이 물으실 때에 삼문은,
“내 아비도 아니 숨기거든 다른 사람을 숨기겠소? 그 밖에는 더 없소. 오, 김 질이 있군.” 하고 웃는다. 김 질의 얼굴이 파랗게 질린다.
이때에 제학(提學) 강희안(姜希顔)이 붙들려 들어온다.
왕은 그를 고문하였으나 그는 모른다고 한다. 왕이 삼문을 보고,
“희안도 네 당이지?” 하고 물었다.
“희안은 참말 애매하오. 나으리가 선조 명사를 다 죽이고 인제 이 사람 하나 남았으니 이 사람을랑 죽이지 말고 쓰시오. 현인이 멸종이 되면 나라 꼴이 되겠소? 희안은 현인이요. 또 애매하니 후일에 죽이더라도 아직은 살려 두고 쓰시오.” 하는 삼문의 말은 실로 간절하다.
왕은 삼문의 말을 옳이 여겨서 희안을 놓기로 하였다.
악형도 다 끝난 때에 공조참의(工曹參議) 이 휘(李徽)가 한 편 구석에서 나서며,
“소인이 삼문 배의 역모를 아옵고 진즉 진계하려 하였사오나 사실을 더 알아보려고 늦었사옵니다. 여량부원군(礪良 府院君) 송현수(宋玹壽)와 그 아내 민씨와, 또 전 예조판서(禮曹判書) 권자신(權自愼)과 그 어미 최씨가 다 이 일에 간참한 줄로 아뢰오.” 하고 일러바친다.
이 휘(李徽)는 성삼문 등과 같이 일을 의논한 사람중에 하나다. 이 일이 탄로되어 성삼문이 국문을 당하게 되매 혹시나 자기 이름이 나오지나 아니할까 하여 전전긍긍하였으나 삼문은 이미 알려진 사람 밖에는 말하지 아니하였다.
유성원(柳誠源)도 늙은 어머니가 계신 것을 생각하고 말하지 아니하였고 이 휘는 늙은 아버지가 있는 것을 생각하고 말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가만히만 있었으면 이 휘도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이다.
<다시 보는 단종애사(端宗哀史) 제126회>
그러나 이 휘는 안심이 되지를 아니하였다. 더구나 김 질이 큰 공명을 하게 된 것을 생각하면 자기가 그 공명을 못한 것이 분할뿐더러 또 어느 때 김 질의 입에서 자기 이름이 나올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궁리해 낸 것이 송현수, 권자신을 걸고 들어간 것이다. 그렇게 공조참의 이 휘는 영리한 사람이다.
그러나 예기한 바와 같은 칭찬을 이 휘는 받지 못하고 성삼문 등의 무서운 눈질만 받아 몸에 오한이 나도록 몸서리를 치었다. 그는 집에 돌아오는 길로 병이 나서 누웠다. 그는 악한 일을 먹고 삭일 만한 뱀의 똥집이 없었던 것이다.
왕은 송현수, 권자신을 이번 기회에 없이할 결심을 하였으나, 해도 이미 다 간 오늘에 계속하여 잡아다가 국문할 생각은 없었다. 그만하고 내전에 들어가 편히 쉬고 싶으시었다.
왕도 너무 격렬한 흥분과 참혹한 광경에 진저리가 나고 심신이 피곤하신 것이다. 맥이 풀리는 듯하시었다.
“이놈을 끌어내어 오차를 하여라.” 하는 명령을 도승지 한명회에게 내리시고는 옥좌에 일어나시어 뒤도 안 돌아보시고 내전으로 듭시었다 성삼문 유응부 등은 눈을 들어 왕이 문으로 나가시는 뒷모양을 바라본다.
여름날 기나긴 해도 인왕산에 거의 올라앉고 대궐 추녀 끝에서는 저녁 까치가 짖는다. 구경하던 여러 신하들도 모가지와 팔다리 힘줄이 들과 같이 굳어진 듯하였다.
성삼문은 형장으로 가는 길로 무사들에게 끌려 나서고 박팽년, 유응부, 이 개, 하위지의 차례로 끌려 나선다.
삼문은 옛 친구들을 돌아보며,
“자네들은 현주(賢主)를 도와 나라를 태평케 하소. 삼문은 지하에 돌아가 옛 임금께 뵈오려네. 자 가자.” 하고 대궐을 나섰다.
영추문(迎秋門) 협문 밖에는 죄수를 실을 수레가 놓이고 죄수의 가족들이 죽기 전 한 번 마지막 볼 양으로 모여 섰다.
조그마한 판장문이 열리고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성 삼문이 먼저 사람들의 눈앞에 나서서 그의 눈이 지는 별에 번쩍할 때에 가족이나 아니나 보는 사람들이 다 소리를 놓아 울었다.
이 개와 하위지 두 사람은 제 발로 걸어 나오나 성삼문, 유응부, 박팽년, 성 승, 박 정 등은 모두 몸을 마음대로 놀리지 못하여 군사들에게 붙들려 나온다.
삼문은 수레에 오르며 소리 높이 시 한 수를 읊는다.
번역하면 이러하다.
“북을 쳐서 사람의 목숨을 재촉하는데, 머리를 돌리니 날이 저물었구나. 황천에 주막이 없으니 오늘 밤을 뉘 집에서 잘꼬?”
다 읊고나니 삼문은 소리와 눈물이 한꺼번에 내리고 보고 듣는 자도 느껴 울지 않는 자가 없다.
죽을 사람들의 수레는 삐걱 소리를 내며 육조 앞 넓은 길로 나서서 천천히 나간다. 수레에 ‘역적 성삼문’이라 이 모양으로 먹으로 대자로 쓴 기를 걸고 또 등에도 죄목과 성삼문을 써 붙이었다. 길 좌우에는 장안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고 모여 섰다.
“충신들이 죽는구나.” 하는 한탄 겨운 속삭임이 사람들 사이로 바람과 같이 돌아가고 그 피투성이 된 참혹한 모양이 바로 앞에 지나갈때에는 다들 입술을 물고 고개를 돌린다.
삼문의 다섯 살 된 딸이 아버지의 수레 뒤를 따라가며,
“아버지, 아버지! 나도 가, 나도 가요!” 하고 발을 구르고 운다.
삼문이 돌아보며,
“오, 울지 말아. 네 오라비들은 다 죽어도 너는 계집애니까 살 것이다.” 하고 종이 따라 울리는 술을 허리를 굽히어 받아 마시고 또 시 한 수를 읊는다.
이 개(李塏)도 수레에 오를 때에 한 시를 읊었다.
첫 연은 사람이 나라를 위하여 큰일을 할 때에는 목숨이 우정같이 중하지마는 의를 위하여 죽을 때에는 새털같이 가볍다는 뜻이요, 아래 연은 문종 대왕의 고명을 저버리지 아니하여 오늘의 죽음을 취하노라는 뜻이다.
일행이 황토마루를 지날때에 왕은 김 질(金礩)과 금부랑(禁府郞) 김명중(金命重)을 시켜 한 번 더 성삼문 이하 여러 사람이 뜻을 돌리기를 권하였다. 뜻만 돌리면 죽기를 면할 뿐더러 높은 벼슬로써 갚으리라 하심이었다.
삼문은 붓을 들어,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삼각산 제 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하는 단가 한 편을 지어 쓰고,
박팽년도 붓을 들어,
“까마귀 눈비 맞아 희는듯 검노매라
야광 명월이 밤인들 어두우랴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고칠 줄이 이시랴” 하였고
또 박팽년은,
“금생여수(金生麗水)라 한들 물마다 금(金)이 남녀
옥출곤강(玉出崑崗)이라 한들 뫼마다 옥(玉)이 날쏜야
암으리 사랑(思郞)이 중(重)타 한들 님님마다 좃츨야. 하였다.
김명중이 팽년을 향하여,
“글세 왜 노친이 계신데 말 한마디면 펴일 일을 이 화를 당하시오?” 하고 다시 마음 돌리기를 권할때에 팽년은 입이 아파 말은 못하고 다시 붓을 들어라고 써서 보였다. 김 질이 다시 무슨 말을 하려 하였으나 팽년은 더러운 말은 아니 듣는다 하는 듯이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려버린다.
유응부는 말이 없이 다만 눈만 한 번 흘겨볼 뿐이요, 김 질, 김명중 등이 하는 말은 듣지도 아니한다. 성 승과 박 정도 그러하였다. 하위지는 오직 잠잠할 뿐, 아니 움직이기 산과 같았다.
형장이 군기감(軍器監) 앞에는 상왕의 외숙되는 권자신(權自愼)과 그 어머니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부인(夫人) 최씨(崔氏)의 김문기(金文起), 윤영손(尹鈴孫), 송석동(宋石同) 등이 잡혀와 있었고 성삼문의 아우 삼고(三顧), 삼빙(三聘), 삼성(三省), 박팽년의 아버지 중림(仲林)과 아우 대년(大年), 기년(耆年), 영년(永年), 인년(引年) 등이 벌써 결박되어 죽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보는 단종애사(端宗哀史) 제127회>
유성원(柳誠源)과 허 후(許詡)의 아들이요, 이 개(李塏)의 매부인 허 조는 잡히기 전에 자살하였다.
그날 유성원은 성균관에서 여상하게 제생을 가르치고 있었다. 물론 오늘 일이 감쪽같이 되리라고 믿고 그 결과가 알아지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밖에 나갔던 어떤 학생 하나가 뛰어 들어와 유성원을 보고 성삼문 등이 잡히어서 국문을 당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에 성원은 명륜당 앞뜰 은행나무 그늘에서 더위를 피하고 있었다. 성원은 학생이 전하는 말을 듣고 손에 들었던 부채를 던지고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였다.
성원은 곧 나귀를 내어 타고 집으로 달려 돌아왔다.
의아해하는 부인더러 술을 내오라 하여 그 노모께 한 잔을 드리고 부인께도 술을 권하고 귀련 (貴蓮), 송련(松蓮) 두 아들을 불러 남아가 언제 죽을 때를 당할는지 모르는 것이니 아무 때에 죽더라도 비겁한 모양을 보이지 말고 태연자약하게 죽어야할 것을 말하고는 아무도 뒤를 따르지 말라 하고 혼자 사당으로 올라가 배례한 뒤에 찼던 칼을 빼어 들고,
“불효 성원이 두 번 가명을 더럽히지 아니하고 죽습니다.” 하고 그 칼로 목을 찌르고 자진하였다.
오늘 남편이 하는 일이 수상하고 또 사당에 참배하고 오래 돌아오지 아니하는 것을 근심하여 달려갔을 때에는 성원은 벌써 피에 떠서 숨이 끊어져 있었다. 부인은 성원의 목에서 칼을 빼었으나 가버린 목숨은 도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이때에 금부 나졸이 달려들었다. 아들 귀련, 송련 형제를 잡아 앞세우고 성원의 시체를 지우고 군기감 앞으로 돌아왔다.
유성원의 시체가 형장에 왔을때에는 성삼문은 벌써 사지를 찢기고 목을 잘리어 전신이 모두 여섯 토막으로 나뉘었었다 그러고 그의 눈 감지 못한 머리는 상투로 끈을 삼아 그의 죄명과 성명과 함께 높다랗게 새로 세워 놓은 시렁에 대롱대롱 매어 달리었다.
성삼문의 다음이 박팽년이다. 그다음이 이 개, 유응부, 하위지, 성 승, 박 정, 송석동, 권자신이 차례로 찢어 죽이고, 그다음에 상왕의 외조모인 화산부원군 부인 최씨를 찢어 죽이고, 다음에 유성원의 시체를 찢고 그 나머지는 날이 저물어서 내일에 죽이기로 하고 황쇄족쇄하여금부로 옮겨 가두었다.
이 일이 있는 동안에 영의정(領議政) 정인지(鄭麟趾) 이 휘(李徽) 등 문무백관이 벌여 서서 형벌 행하는 것을 감독하고 구경하였다.
밤이 들어 백관이 각각 집으로 돌아갈때에는 어디선지 모르게 돌팔매가 날아오고 ‘정인지야’, ‘신숙주야’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리어서 대관들은 모든 군사와 무사의 옹위를 받았다.
피비린내 나는 형장에는 창검 든 군사 수십 인이 죽은 이들의 머리와 몸뚱이를 지키노라고 파수를 보았다. 여름 달빛이 피 묻은 머리를 비추어 감지 못한 눈이 번쩍번쩍할 때에는 군사들도 몸에 소름이 끼침을 깨달았다.
이튿날은 도리어 더욱 참혹하였다. 아버지들과 할아버지들이 죽은 피 묻은 자리에서 육십여 명 어린 자손들과 연루자들이 죽었다. 젖 먹는 어린것까지도 죽여버리라는 엄명이요, 만일 그들의 아내 중에 잉태한 자가 있거든 해산하는 것을 지키어 나오는 대로 남자여든 죽이라 하였다.
그때에 죽은 사람들을 일일이 다 기록할 수는 없으나 그중에서 중요한 사람들 몇을 들면 이러하다 (의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렸거든 거기 무슨 중요하고 중요치 아니한 차별이 있으 랴마는 가장 사람들의 흥미를 끌 만한 이를 골라서란 말이다).
첫째 성삼문이 집안을 말하면 삼문 부자가 이번 사건에 주범으로 죽은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맹첨(孟瞻), 맹평(孟平), 맹종(孟終) 삼 형제는 그 조부 성 승과 아버지로 하여서, 현, 택(澤), 무명(無名), 금년생(今年生) 네 어린아이들은 그 증조부 승과 조부 삼문으로 하여서 참혹하게 죽었고, 삼문의 아우 되는 부사(府使) 삼빙(三聘), 정랑삼성(正郞三省), 장신삼고(將臣三顧)는 그 아버지 성 승으로 하여 주검이 되었다.
박팽년의 집으로 말하면 그 아버지 판서중림(判書仲林)은 팽년과 같이 역모에 관련하였다 하여 죽고, 팽년의 아들 헌(憲), 순(珣), 분(奮), 삼 형제와 손자 점동(占同), 갯동(㖋同), 파록대(波彔大), 산흔(山欣), 금년생(今年生) 오 형제와 팽년의 아우 인년(引年), 검열(檢閱) 영년(永年), 수찬(修撰)이요 호를 동재(東齋)라 하는 기년(耆年), 박사대년(博士大年) 사 형제 가 한 자리에서 죽었고,
유응부의 아들 사수(思守), 박 정(朴靖)의 아들 숭문(崇文), 손자 계남(季男), 칙동(則同), 권자신(權自愼)의 아들 구지(仇之), 허 조의 아들 연령(延齡), 구령(九齡), 송석동(宋石同)의 아들 창(昌), 영(零), 안(安), 태산(太山) 등이 다 죽고 우습고 불쌍한 것은 권자신, 송현수를 고발한 이 휘(李徽)가 붙들려 죽은 것이다. 김 질(金礩)은 좌익공신을 봉함이 될때에 이 휘는 역적으로 효수를 당한 것은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하위지의 가족은 선산 시골집에 있었기 때문에 그 아들들은 며칠 뒤에 선산에서 죽었다.
하위지의 집은 선산부(善山府) 영봉리(迎鳳里)에 있었다. 금부도사가 위지의 가족을 잡아 남자면 죽이고 여자면 종을 만들려고 서울서 내려왔다. 호(號), 박(珀), 연, 반(班) 사 형제 중에 연과 반은 아직 철모르는 어린아이들이요, 호는 장성하였으나 박은 불과 십 육칠 세의 소년이었다.
<다시 보는 단종애사(端宗哀史) 제128회>
금부도사가 거느린 선산 관속이 사 형제를 잡아 앞 세울때에 박이 금부도사더러 모친에게 마지막 한마디 할 말이 있으니 잠깐만 여유를 달라고 하였다. 금부도사는 박이 연소하면서도 태연자약하며 군자의 풍이 있는 것에 감복하여 허 하였다. 박은 안으로 들어가 모친 앞에 꿇어 앉았다. 모친은 흘리던 눈물을 거두고 태연하게,
“왜 남아답지 못하게 어미를 한 번 더 보려고 들어왔느냐?” 하고 꾸짖었다.
박은 어머니 앞에 이마를 조아리며,
“소자가 죽는 것을 어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죽임을 당하시었거든 소자가 살 리가 있습니까. 비록 조명이 없다 하더라도 소자가 마땅히 자결하였을 것입니다. 그러하오나 우리 동기 중에 오직 누이 하나, 저도 이미 과년하였는데 적돌 되어 종이 되면 천한 몸이 부인의 의를 지키기가 극난할 것입니다.
비록 죽을지언정 반드시 한 남편을 좇고 개 돼지의 행실을 아니하도록 어머님께서 잘 훈계 하십시사고, 그것이 소자가 마지막으로 여쭙는 말씀입니다.” 하고 일어나 두 번 절하고 물러 나온다. 그때에 곁에 있던 누이가,
“소매가 아녀자지마는 하씨 집 가명을 더럽게 할 사람이 아니니 오라버님 염려 놓으시오.” 하였다. 누이는 열다섯 살이었다.
선산부 객사 앞 넓은 마당에서 하위지의 아들 사 형제가 일시에 교형을 당하였다.
사형제를 가지런히 늘어 세워놓고 금부도사와 선산 부사의 감형으로 사형제의 목에 올개미를 씌울때에 일곱 살 먹은 연까지도 조금도 두려워함 없이 조용히 서 있었다. 선산부에 하위지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 하위지의 덕행에 감복 아니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형장에는 수천 명 부민이 모여 모두 눈물을 흘리었다.
그때에 마침 태중에 있던 이가 박팽년의 며느리 한 분과 허 조의 아들 연령의 아내였었다. 둘이 다 만일 남아만 낳은 날이면 그 아이는 죽을 운명을 가질 것이나 박팽년 집에는 마침 종에 상전과 같이 해산한 이가 있어서 상전이 낳은 아들은 종의 아들을 삼고 종이 낳은 딸은 상전의 딸을 삼아 박팽년의 후손이 살아 남았고,
허연령의 처가 낳은 아들은 자란 뒤에 죽이기로 하고 연령의 처와 함게 괴산부(槐山府)에 맡기어 두었다가 세조 대왕의 분한 마음이 풀린 뒤가 되어 아니 죽이기로 하였으니 그것은 이로부터 칠 년 뒤 일이다.
이렇게 칠십여 명 사람이 죽은 것을 병자(丙子) 원욱이라고 일컫거니와 이 일이 있은 뒤에 계속하여서 죽이는 일은 한참 동안 끊이지 아니하였다. 그중에 가장 큰 것은 혜빈 양씨(惠)嬪楊氏)와 그의 몸에서 난 두 아드님 한남군(漢南君) 어, 영풍군(永豊君) 천의 죽음이다.
이 세 분은 성삼문 사건에 관계되었다고 드러난 증거가 없었다. 그러나 왕이 생각하시기에나 정인지, 신숙주, 권 람, 한명회 등이 생각하기에 혜빈 양씨 세 모자와 세종 대왕의 아드님으로 나이 가장 높은 화의군영(和義君瓔)과 안평대군이 돌아간 뒤에 종실에 가장 명망이 높은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와 상왕이 가장 정다와 하시고 또 신임하시는 영양위 정종, 여량 부원군(礖良 府院君) 송현수(宋玹壽) 등은
아무렇게 죄목을 만들어서라도 이번 기회에 없애버려야 할 것이라고 보았다. 죽일 죄를 찾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혜빈 삼 모자로 말하면 가장 상왕과 관계가 가까울 뿐더러 매양 말썽이 되어 왔다.
독자가 이미 잘 아는 바여니와 혜빈은 세종 대왕의 후궁이요, 한남군(漢南君), 수춘군(壽春君), 영풍군(永豊君) 세 분의 어머니일뿐더러 세종 대왕의 명을 받들어 상왕을 양육하였고 후에 문종 대왕 승하하실 때에는 동궁을 향하시와 혜빈을 궁중의 어른으로 존경하실 것을 명하시었다. 그래서 비록 수렴청정은 아닐지라도 군국 대사에 어리신 왕의 자문을 받는 지위에 있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혜빈이 덕과 지혜를 갖추고 범할 수 없는 위엄이 있어 수양대군에게 대하여서는 한 큰 적국을 이루었던 것이다. 또 그의 아드님이요 수양대군에게는 친아우님 되는 한남, 수춘, 영풍 세 분으로 말하면 항상 대의명분론을 주장하여 수양대군의 야심을 달게 여기지 아니하였다.
그중에도 상왕 선위 전에 돌아간 수춘군이 더욱 충성과 우애지정이 지극하였다. 한남군은 일시 대세라 무가내하다 하여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시는 것을 찬성하는 태도까지 취하였으나 당시 아직 이십 미만이던 수춘군이 눈물을 뿌리며 상왕께 신절을 지켜야 할 것을 극언함으로부터 다시 마음이 돌아섰다고 한다.
한남, 영풍 형제분이 선위를 전하는 날 아침에 수양대군을 찾아가서 마지막으로 수양대군의 야심이 옳지 아니한 것을 극언한 것이 수춘군의 정성에 힘입음이 많다고 한다.
어디로 보아도 혜빈 삼 모자(수춘군이 살았더면 사 모자)의 목숨은 부지할길이 없었다.
성삼문 등이 죽은지 사흘 뒤에 이 세 분은 화의군과 함께 성삼문의 당이라 하여 사형을 받았으나 다만 종실이라 하여 걸형을 면하고 교형을 받았다. 이리하여 왕은 안평대군과 아울러 친동기네 분의 목숨을 끊어버린 것이다.
금성대군은 왕과 어머니가 같은 덕에 아직 죽기를 면하고 순흥부(順興府)에 안치를 당한 대로 두고 송현수와 정종은 상왕의 극히 가까운 척분이 있다 하여 아직 목숨은 보전하여 후일을 기다리게 되었다. 정종은 광주(光州)에 귀양을 보내었다.
이렇게 성삼문 등을 죽이고 난 뒤에 왕은 이러한 반교문(頒敎文)을 내리시었다.
<다시 보는 단종애사(端宗哀史) 제129회>
반교문(頒敎文)이라는 것은 이러한 것이다.
이 반교문은 왕이 이번 성삼문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고자 하는가를 보이는 중요한 글이니 그대로 번역하여 보자.
“저즘께 용(안평 대군)이 역적을 도모하매 널리 당파를 심거 서울과 시골에 아니 박힌 데가 없더니 남은 못된 놈들이 다 죽지 아니하여 서로 이어 난을 도모하도다.”
여기까지는 사 년 전에 안평대군, 황보인, 김종서의 무리를 죽인 이른바 계유정란을 끌어 이번 역모도 그때 그 못된 놈들 죽다 남은 것들이 한 일이라는 것을 가리킨 것이니 이것은 한 팔매에 두 마리를 맞히자는 것이다.
즉 세상이 다 애매한 것을 아는 안평대군, 황보인, 김종서 등을 한 번 더 역적이라고 선포하는 것이 하나요, 이번도 계유년 역모의 계속이라 하여 이번 성삼문 등의 역모가 뿌리가 깊은 것을 말하려 함이다.
“근자에 여당 이 개(李塏)가.”
하필이 개를 중심으로 내어 세운 심사는 성삼문을 머리라기 하기 싫은 까닭이다.
“근자에 여당 이 개가 흉악한 생각을 품어 주장하여 난을 지울 제 그의 무리 성삼문 등이 그윽히 궁중과 통하여.”
여기가 상왕을 물고 늘어지는 데다.
“내외가 서로 웅하여 날을 정하고 일을 들어 장차 내 몸을 해하고 어린이를 끼고 제 마음대로 하려 하더니.”
또한번 상왕을 껴들었다. 이것이 심히 중요한 일이니 이번 일의 근원을, 책임을 상왕께 돌리려 하는 것이 왕과 정인지, 신숙주, 권 람, 한명회 등의 일치 협력하여 애를 쓰는 바다.
그러나 종묘와 사직이 붙들고 도우시는 “힘을 입어 큰 악이 스스로 나타나 죄 있는 놈들이 모두 죽었으니”
이번에 참혹하게 죽은 칠십여 명 사람들은 다 죽어 마땅한 죄인들이다.
“마땅히 관대한 은혜를 베풀어서 신민과 정사를 같이하리라.” 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으나 이것은 역적들이 다 죽어 없어지어 국가에 이만한 경사가 없은즉 백성에게 이 기쁨을 나누기 위하여 모든 죄인에게 대사, 특사의 은전을 주자는 말이다.
이 반교문을 내리자 과연 전국 수천의 죄수는 지옥과 같은 옥에서 나옴을 얻었다.
또 이 사건 덕으로 좌익 삼등 공신이던 정창손은 이등 공신으로 올라가고 김 질은 좌익 삼 등의 녹훈을 받아 상락 부원군(府院君)이 되고, 나중에 좌의정으로 문정공(文情公)이란 시 호까지 받도록 귀한 사람이 되었다.
이 통에 하마터면 죽을 뻔한 이가 둘이 있으니, 하나는 정 보(鄭保)요,
하나는 이석형(李石亨)이다.
정 보는 독자도 기억하시려니와 고려 말 충신 정몽주의 손자요, 그 서매가 한명회의 첩이 된 사람이다. 천성이 방랑하여 주색으로 일을 삼았으나 그래도 가슴에 한 점 내조(乃祖)의 기맥을 받은 것이 있어 비록 궁하되 결코 권문세가에 아부하는 일은 없었다.
그가 현감(縣監) 한 자리를 얻어 한 것이 한명회 덕이라고 비웃는 사람도 있으니 이것만은 사실인 듯하나 궁해서 한 일이라 그리 책망할 것은 아니라고 성삼문이나 박팽년도 용허하여 주었다. 성, 박 등과는 매우 친하게 지내었다.
성삼문 사변이 난 날 그는 명회의 집을 찾아서 그 누이를 보고 명회가 간 곳을 물은즉 누이는,
“대궐에서 아직 안 나오셨어요, 죄인을 국문한다나.” 하였다.
“죄인?”하고 정 보는 손을 두르며,
“죄인이 누가 죄인이야. 대감 돌아오거든 그래라 내가 그러더라고. 이 사람들을 죽이면 만고에 죄인이 되리라고.” 하고는 옷을 떨치고 일어나 나갔다. 정보는 다시 이 집에 아니 오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국문이 끝난 뒤에 명회가 집에 돌아와서 첩 정씨에게 정 보가 하던 말을 듣고 분이 나서 저녁상도 아니 받고 대궐로 뛰어 들어가 왕께 뵈옵고 정 보의 말을 아뢰었다.
왕께서도 분함을 이기지 못하시와 곧 정 보를 잡아들이어 친히 국문을 하시었다.
“네가 그런 말을 하였느냐?” 하시고 왕이 물으실 때에,
“네, 과연 하였소.” 하고 정 보는 태연히 대답하였다.
“저런 괘씸한 놈이 있단 말이냐. 어찌하여 감히 그런 난언(亂言)을 하여?” 하시고 왕이 소리를 높이신다.
“옳은 말이니 하였소. 상감도 이 사람들을 죽이시면 만고에 죄인이 되시오리다.”하고 정 보는 까딱없다.
“이놈, 그러면 성가 박가 놈들이 성인군자란 말이야?”
“그러하오.”
이때에 곁에 섰던 정인지, 신숙주, 한명회 등이 아뢰기를,
“제 입으로 제 죄를 자복 하였사온즉 청컨대 형벌을 바로 하소서.” 하였다.
“그놈을 찢어라!” 하고 왕은 노함을 누르시지 못하시었다.
정 보가 무사에게 끌려 장차 형장으로 나가려 할 때에 왕은 하도 정 보가 태연한 것이 심상치 아니하게 생각하시고 왕은 좌우에게 물었다.
“그놈 뉘 자손이냐?”
한명회는 감히 자기의 첩이 형이라고 대답은 못하였다. 그리다가 자기까지 봉변하기를 두려워하는 까닭이었다.
이때에 곁에서 누가,
“정몽주의 손자요.”하고 아뢰었다.
왕도 정 보가 정몽주의 자손이란 말을 들으시고는 놀라시었다. 이 사람을 죽이면 또 선비들 사이에 무에라고 말썽이 많을 것을 생각하신 까닭이다.
이때에 만일 정보 하나는 살리면 왕이 충신의 후예를 존중한다는 칭찬을 천추에 남길 것이라고 생각하시고 선선히 사형을 감하여 연일현(延日縣)으로 유배하라신 처분을 내리시었다. 이리하여 정 보는 목숨을 보전하여 연일 정씨의 조상이 되었다.
둘째로 죽을 뻔한 이는 이석형(李石亨)이다. 이석형은 그 지조로 보든지 성삼문, 박팽년 등과의 교의로 보든지 반드시 죽었어야 옳은 사람이언마는 그가 병자 사변에 들지 아니한 것은 전라 감사로 외임에 있었던 까닭이다.
<다시 보는 단종애사(端宗哀史) 제130회>
이석형(李石亨)은 각 읍을 순행하던 길에 익산(益山)에 들러서 비로소 성삼문, 박팽년 등 구우들이 다 죽었단 말을 듣고 여관 벽상에 글 한 수를 써 붙이었다.
성삼문, 박팽년 등이 대와 같은 절개를 가지었으면 나도 솔과 같은 절개를 가지었다. 그대들과 함께 죽지는 못하였을망정 속에 품은 뜻은 같다는 말이다. 원체 글줄이나 하는 선비의 객쩍은 짓이다. 이런 글을 써 붙일 까닭이 없는 것이다.
이 글귀가 어떻게 서울에 굴러 올라와서 대간(臺諫)의 탄핵 구실이 되었다. 이때에나 지금이나 잡아먹기를 장기로 알았다. 그러나 왕은 그러라 하시고 대간의 죄목을 물리치시었다.
이야기는 좀 뒤로 돌아간다.
성삼문 등의 국문과 처형이 끝나고 무사와 갑사의 호위를 받아 신숙주는 저물게 집에 돌아왔다. 신숙주가 돌아오는 길은 반드시 성삼문의 문전을 통과하였다. 이제 이 집에 누구가 있나?
성삼문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아버지와 형제, 다 신숙주의 눈앞에서 죽어버리었다. 숙주의 교자가 삼문의 집 모퉁이를 돌아설 때에 안에서 살아남은 부녀들(삼문의 어머니와 아내와 제부들과 딸들)의 울어 지친 느끼는 소리가 들려올 때에 숙주의 등골에는 찬 땀이 흘렀다.
세상에 친구가 많다 하더라도 숙주와 삼문과 같은 사이는 드물었다. 소년시로부터 성부동 형제와 같이 지낸 것이다. 안에서까지도 다들 친하였다.
아까 대궐에서 삼문이 자기를 노려보던 눈을 숙주는 어두움 속에 보는 듯하여 눈을 감았다. 가슴이 두근거리었다. 삼문의 원혼이 자기의 뒤를 따르지나 아니하나 하는 어림없는 생각까지도 나서 소스르이 끼침을 깨달았다.
숙주가 집에 다다르니 중문이 환히 열렸다. 어찌하여 중문이 열렸는고 하고 안마당에 들어서서 기침을 하여도 부인이 내다봄이 없었다. 평일 같으면 반드시 대청마루 끝에 나서서 남편을 맞던 부인이다.
숙주는 안방에 들어왔다. 거기도 부인이 없었다. 어디를 보아도 부인의 그림자도 없었다.
“마님 어디 가시었느냐?” 하고 집사람더러 물어도 아는 이가 없었다.
숙주는 다락문을 열었다. 둘이 쏘는 등잔 불빛이 소복을 하고 손에 긴 베 한 폭을 들고 울고 앉은 부인을 비추었다.
숙주는 놀랐다. 의아하였다.
“부인, 어찌하여 거기 앉았소?” 하고 숙주가 물었다.
부인은 눈물에 젖은 눈으로 남편을 바라보며,
“나는 대감이 살아 돌아오실 줄은 몰랐구려. 평일에 성 승지와 대감과 얼마나 친하시었소? 어디 형제가 그런 형제가 있을 수가 있소. 그랬는데 들으니 성학사, 박학사 여러분의 옥사가 생기었으니 필시 대감도 함께 돌아가실 줄만 알고 돌아가시었다는 기별만 오면 나도 따라 죽을 양으로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데 대감이 살아 돌아오실 줄을 뉘 알았겠소?” 하고 소리를 내어 통곡한다.
부인의 이 말에 숙주는 부끄러워 머리를 숙이고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겨우 고개를 돌며,
“그러니 저것들을 어찌하오?” 하고 방에 늘어선 아이들을 가리킨다. 이때에 숙주와 부인과 사이에는 아들, 딸 형제가 있었다. 나중에 옥새를 위조하여 벼슬을 팔다가 죽임을 당한 정이 그 맏아들이었다.
그러나 숙주가 이 말을 하고 고개를 든 때에는 부인은 벌써 보국에 목을 매고 늘어지었다.
숙주가 놀래어 집사람들과 함께 부인의 목맨 것을 끄르고 방에 내려 눕히었으나 그렇게 순식간이언마는 어느새에 숨이 끊어지어 다시 돌아오지를 아니하였다. 부인 윤씨는 죽은 것이다.
윤씨는 성삼문 등을 국문하노라는 기별을 전하러 상왕께 심부름 갔던 승지 윤자운(尹子蕓)의 누이다. 자운은 후에 숙주의 당이 되어 영의정까지 지내었다.
비록 윤씨가 이렇게 죽었건마는 숙주는 집사람을 신척하여 이말이 세상에 흘러나지 못하게 하였다. 그 말이 나는 것은 체면에 큰 수치로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목매어 죽은 윤씨는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 고령부(高靈府) 원군(院君)의 부인으로 비단에 씌워 가장 영화로운 장례로써 땅에 묻힘이 되었다.
한편으로 죽은 사람들의 집은 어떠하였나. 오직 눈물과 분함과 욕봉뿐이라 할 수 있다.
살아남은 부인과 딸들은 그날부터는 종이 되어 다른 집에도 가지 아니하고 정인지, 신숙주, 김 질, 한명회, 권 람, 홍윤성, 양 정 같은 소위 공신의 집으로 분배가 되어 가게 되고 그중에도 과년한 처자는 서로 가지기를 원하여 다투는 형편이다.
그중에도 가장 불쌍한 이는 유응부의 부인이었다. 유응부는 본래 청렴하여 재물을 알지 못하므로 몸이 재상의 지위에 있으되 집에 문짝이 없어 기직을 늘이고 일찍 그 밥상에 고기 가 올라본 일이 없다 하며 조식 지을 양식이 떨어지는 일까지 있었고 그 부인이 육십이 되도록 깁 것을 몸에 걸어보지 못하였다. 아들이 없고 오직 딸 형제가 있었으나 다 출가하고 부인 혼자 집을 지니고 있다가 산과 몸을 적물을 당할 때에 부인은,
“생전에도 굶주리다가 죽을 때에까지 이 화를 당하다니.”하고 통곡하였다. 이 정경을 보고 이웃과 군사들까지도 울었다.
그러나 그렇게 구차하면서도 상왕이 선위하신 뒤에 받은 녹은 곡식 한 알갱이, 피륙 한 자 건드리지 아니하고 철 찾아 내리는 부채, 체력 등속까지도 꽁꽁 모아 쌓아 두었었다. 성삼문, 박팽년 등도 받은 녹은 다 봉하여 두었음을 발견하고 왕이,
“독한 놈들이다.” 하고 한탄하시었다.
<다시 보는 단종애사(端宗哀史) 제131회>
유응부, 성 승, 박 정 같은 이외 부인들은 다 연로하여 아무도 욕심내는 이가 없으므로 도리어 여생을 보내기가 그리 힘들지 아니하였으나 가장 곤경을 당한 이는 박팽년 부인 이씨와 성삼문 부인 김씨다.
그들은 다 후실이어서 아직 이십 사오세의 청춘이었고 또 자색도 있었기 때문에 간 곳마다 유혹과 위협이 있었으나 죽기로써 절을 지키었다.
왕은 세종 대왕이래로 인재 양성의 기관이 된 집현전(集賢殿)을 혁파하고 거기 있던 책을 예문관(藝文館)으로 옮기었다. 왜 집현전을 혁파하였으냐. 성삼문, 박팽년, 이 개, 유성원, 하위지 등이 모두 집현전 학사들이기 때문이다. 그놈의 집현전이라 하면 왕의 잇사이에 신물이 돌았던 것이다.
다시 상왕을 창덕궁에서 금성 대군 궁으로 옮겨 모시고 전보다 대우를 낮추고 단속을 엄하게 하여 일체로 외간과 교통하심을 금하였다. 잡수시는 것까지는 전에는 왕으로 계실 때와 같이 하였으나 지금은 보행 객주의 손님이나 다름없이 하라 하시었다.
상왕을 창덕궁에서 다시 금성 대군 궁으로 옮겨 모실 때에 정인지는, 성삼문 등의 도모를 미리 알았을 것이라고 상소를 하였다.
상왕이 성삼문 등의 도모를 미리 알았다고 하는 것은 정인지의 멀쩡한 거짓말이다. 그러나 상왕을 없이하려면 이것을 핑계로 삼는 것이 가장 편하겠기 때문에 이렇게 상왕이 미리 안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도모를 미리 알았다라고 함은 어서 죽여버리자는 말이다. 상왕을 벌써 죽여버리었더면 이번 처럼 성삼문의 일도 아니 생기었을 것이라고 정인지는 자기의 선견지명을 자랑한다. 이제라도 죽여버리지 그냥 살려 두면 또 제이 제삼의 성삼문 사건이 납니다. 하고 정인지는 왕의 결심을 재촉하려 하였으나 왕은 아직도 애매한 상왕의 목숨을 끊어버릴 생각까지는 나지 아니하였다.
서강(西江)에 김정수(金正水)라는 사람이 살았다. 그는 일정한 직업이 없이 서울 대가집 사랑으로 돌아다니는 자다. 의술도 아노라 하고 풍수 노릇도 하노라 하고 또 삼점, 사과점도 치노라 한다.
그의 과수 누이 하나가 여량부원군 송현수 집에 침모로 들어가 있다가 부인의 의심을 받아서 매우 창피한 꼴을 당하고 쫓겨나왔다. 그 의심이란 대감이 가까이하는 듯하다는 것이다.
누이가 나와서 그 오라버니 정수에게 서러운 사정을 할 때에 정수는,
“오냐, 속 시원하게 해주마.” 하고는 혼자 웃었다. 속 시원하게 한다 함은 물론 원수를 갚는다는 것이다.
그렇지마는 이 사람이 결코 원수만 갚고 말 작자가 아니다. 원수도 갚고 이도 보자는 생각이 났길래 그는 웃은 것이다.
김정수는 곧 갓을 내어 쓰고 문안으로 들어왔다. 누구를 찾아가서 이 말을 할까 하고 주저하였으나 얼른 제학(提學) 윤사균(尹士均)의 집으로 발을 돌리었다.
그것은 사균이와 가장 친분도 있을뿐더러 또 그가 신숙주와 교분이 있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김정수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사균은 매양 하는 버릇으로,
“어, 김 서방인가.” 하고 반쯤 조롱하는 빛으로 맞는다.
“글세 영감, 나이 사십이 되어도 밤낮 김 서방이니 그래 김정수의 이마빼기에는 서방 두 자를 새겨 붙이었단 말씀이요?” 하고 김정수는 성내는 양을 보인다.
“그럼 무어라고 부르나. 김 정승이라고나 부를까.” 하고 사균은 적이 무료하여진다. 그는 좀 못난 편이다.
“정승이야 간 대로 바라겠소마는 왜 정수의 머리에는 탕건이 올라앉지를 못한답니까. 김정수의 귀밑에는 옥관자, 금관자가 못 붙는답니까?”
“허, 이 사람이 오늘은 웬 일인가.”
“웬일이라니요. 권 람은 우참찬이 되고 한명회는 오늘 이조판서 승차 아니하였소? 영감 어디 나 같은 사람, 감투 하나 얻어 씌워 보시구려.” 하고 정수가 농치어 웃는다.
윤사균은 어른한테 놀림 받는 아이 모양으로 싱글싱글할 뿐이다.
얼마 동안 농담과 잡담을 한 뒤에 윤사균이 혼자 있게 된 때를 타서 정수는 정색하고(그가 정색할 때에는 뒤로 제치어진 갓을 바로 잡는다.)
“그것은 다 웃음의 말씀이고, 그런데 영감 큰일이 났소이다.”
사균도 덩달아 엄숙하게 되며,
“어, 무슨 큰일?” 하고 정수를 바라본다.
“왜? 어디 또 역모나 일어났나?”
이때에 큰일이라면 상왕을 회복하려는 도모(왕의 편에서 보면 곧 역모다)밖에 없을 것이다.
이 역모라는 말을 들을 때에 웬만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생각이 번개같이 지나간다.
나도 몰려 죽지나 아니하나 또는 내가 먼저 알았다가 고발하였으면 하는 것이다. 사균도 이 두 가지 생각을 동시에 하였으나 자기가 신숙주와 긴한 것을 생각하고는 첫 근심은 없어지고 둘째 희망이 남을 뿐이었다.
정수는 사균을 믿지 못하는 듯이 이윽히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말없이 다만 고개만 끄덕끄덕하여 보인다.
“누가? 누가?” 하고 사균은 대단히 구미가 동하는 듯이 싱겁게도 정수를 조른다.
정수는 말을 할까말까 하는 듯이 가만히 눈을 감고 입을 다물었다.
“이 사람 누가? 내게야 못할 말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 사람 누가?” 하고 사균은 정수의 소매를 잡아끈다.
이런 경우에 호락호락하게 말해 버릴 김정수가 아니다. 저편의 비위를 부쩍 당길수록 이익이 많은 줄을 알기 때문에 말을 할듯 할듯하며 아니하는 것은 매우 요긴한 일이다.
그뿐더러 이런 말이라는 제 섣불리하여 버리면 공은 남에게 빼앗기고 정작 자기는 헛물만 켤 뿐더러 도리어 죄를 뒤집어 쓰는 일이 십상팔구다. 더구나 인심이 효박하고 악착하여지어 의리보다도 이를 따르는 이대인 것을 정수는 잘 안다.
<다시 보는 단종애사(端宗哀史) 제132회>
물론 윤사균은 그렇게 살짝 남의 공을 빼앗고 그 대신에 죄를 뒤집어 씌울 사람은 아니다 그것은 의기남아가 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만한 꾀가 없어서, 정수의 생각을 빌면 못나서 그런 것이다.
허구 많은 사람에 윤사균을 김정수가 택한 것이 이 때문이다.
“내가 영감을 의심할 리야 있소이까. 의심 아니 하길래 이런 참 대사를 의논하는 것이지요. 그렇지마는 매사는 튼튼히 하는 것이 대장부의 일이니까.” 하고 또 잠깐 주저하다가,
“분명 영감이 나를 저버리지 아니하실 테지요?” 하고 한 번 다진다.
구미가 대단히 동한 윤사균은,
“저버리다니 말이 되나. 어서 말을 하소. 그래 누가 또 역모를 한단 말인가.” 하고 애원하는 빛을 보인다.
그제야 정수는 사균의 귀에 입을 대고,
“송현수(宋玹壽).” 하고 한 마디를 불어 넣는다.
“응?” 하는 사균의 눈에는 웃음이 있다.
“그래 송현수가? 응 그럴 일이야. 그래 누구허고?”
정수는 대답이 없다.
“언제 거사하기로?” 하고 윤사균이 재치어 물어도 정수는 여전히 대답이 없다.
정수는 이 자리에서 윤사균에게 다 말해버리는 것이 아무리 하여도 공을 빼앗길 염려가 있는 까닭이다.
“영감, 그럴 게 없소. 나허고 신찬성(申贊成)댁으로 가십시다. 그렇지 아니하면 승정원(承政院)으로 바로 가든지 이 자리에서 영감한테 말씀해도 좋지마는 이목이 번거하니 같이 나가시지.” 하고 정수가 먼저 일어선다.
사균은 정수가 자기를 의심하는 것이 괘씸하게는 생각하였으나 또한 무가내 하다. 김정수의 비위를 거스르는 것은 날아 들어오는 부원군 첩지를 몰아내는 셈이라고 생각하여 사균은 정수를 따라나섰다.
신숙주에게로 갈까, 바로 대궐로 들어갈까 망설이다가 내궐로 들어가기로 하였다. 이왕 세울 공이면 신숙주를 새에 내어 세울 것도 없었고 또 요사이 역모를 고발하는 일이면 당상관만 되면 아무 때에나 예궐할 수가 있었다.
이리하여 송현수가 왕을 시(弑)하고 상왕을 복위하려는 음모를 한다는 말과 매양 권 완 (權完)이가 송현수를 찾아와서는 늦도록 있다는 말과 송현수 부인 민씨가 상왕과 내통한다는 말과 기타 김정수가 그럴듯하게 지어낸 말을 입직 승지에게 고하였다.
왕은 누구든지 송현수, 권 완의 무리를 없이할 죄목을 갖다가 바치기를 기다리던 터이라 내전으로 사균을 불러들여 자세한 말을 들으시고 누가 이 역모를 알아내었느냐고 물으실 때에 사균은 김정수의 이름을 아뢰었다.
왕은 사균과 정수에게 술을 주라 하시고 즉시로 대관을 궁중으로 부르시고 일변 금부에 명하시와 판돈녕(判敦寧) 송현수(宋玹壽), 판관(判官) 권 완(權完)을 잡아 오라 하시었다. 궁중에는 등불이 휘황하고 또 친국이 있다고 법석이었다.
사균과 정수는 의기양양하여 승정원에 앉아서 떠들었다.
왕이 사정전(思政殿)에 납시와 영의정(領議政) 정인지(鄭麟趾), 우의정(右議政) 정창손(鄭昌孫), 좌찬성(左贊成) 신숙주(申叔舟), 좌참찬(左參贊) 권 람(權擥), 우참찬(右參贊) 박중손(朴仲孫), 병조판서(兵曹判書) 홍달손(洪達孫), 예조판서(禮曹判書) 홍윤성(洪允成),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 윤사로(尹師路),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이인손(李仁孫),
공조판서(工曹判書) 양 정(楊汀), 이조판서(吏曹判書) 한명회(韓明澮), 도승지(都承旨) 구치관(具致寬), 우승지(右承旨) 조석문(曺錫文), 우부승지(右副承旨) 권 지(權識), 동부승지(同副承旨) 김 질들을 부르시와 송현수(宋玹壽), 권 완(權完)의 역모를 말씀하시고 제신의 뜻을 물으시었다.
“송현수가 불측한 뜻을 품었다는 말은 들은지 오래되 상왕의 낯을 보아 지금껏 불지 아니하였으니 감격하여 마땅하거든 제가 부녀들의 말에 혹하여 상왕과 통하여 이런 불쾌를 도모한단 말인가. 가증한 일이로다.” 하시고 왕은 은근히 상왕과
대비, 송현수 부인 민씨도 동 죄인인 것을 비추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뜻을 제신에게 암시하였다.
영의정 정인지는 백관을 대신하여,
“송현수, 권 완의 죄는 만사무석이요.” 하고 아뢰었다. 물론 아무도 감히 이 말에 반대하는 자가 없었다.
이윽고 여량 부원군 송현수와 돈녕부 판관 권 완이 들어온다. 그들은 붙들려 오는 것이지마는 관복을 갖추었고 결박도 함이 되지 아니하였다. 여기도 왕이 상왕의 친척을 존중하는 모양을 보인 것이다.
송현수와 권완은 왕께 배례도 아니하고 읍하지도 아니하고 도승지 구치관이 지정하는 자리에 우두커니 섰다. 그들은 모든 일은 다 안 것이다.
왕은 크게 진노하시와,
“네 어찌 내 앞에서 읍하지 아니하고 부복도 아니하고 빳빳이 섰단 말이냐.” 하고 두 사람을 노려보신다.
“지금까지는 후일을 바라고 나으리 앞에서 허리를 굽혔소마는 이제 상왕을 회복지도 못하고 나으리 손에 죽는 마당에 허리를 굽혀 무엇하오? 내가 살아 있고는 나으리가 잠을 편히 못 잘 모양이니 잘 되었소. 어서 죽여주오.” 하고 송현수가 왕을 바라본다.
“권 완이 너는?” 하고 왕이 권 완에게 물으시니 권 완은 소리를 가다듬어,
“나는 죽어서 지하에 선조를 대하기가 부끄럽소. 나으리 같은 무도한 역신을 진멸 못하고 집안에 가만히 앉았다가 붙들려 죽는 것이 부끄럽기 짝이 없소.
이렇게 나으리 마음에 안드는 사람들을 다 잡아 죽이면 나으리는 천추만세에 복락이 무궁할 듯하지마는 머리 위를 보시오. 창천이 무심하실 리가 없으니 나으리가 가슴을 두드리고 죄를 뉘우칠 날이 멀지 아니하리다.” 하고 왕을 노려본다. 키가 작은 권 완의 음성은 쇳소리와 같이 울리었다.
<다시 보는 단종애사(端宗哀史) 제133회>
왕은 분하심을 참지 못하시와,
“두 놈을 결박하고 때리라.” 하는 영을 내리신다.
도승지 구치관이 무사를 부르니 모두 한명회의 심복이라 달려들어 송현수와 권 완의 사모를 벗기고 품대를 끄르고 두 손을 뒷집을 지워 결박을 한 뒤에 손을 들어 두 사람의 입을 때리니 코와 입에서 피가 쏟아진다. 얼마큼 때려서 두 사람이 정신없이 거꾸러지는 것을 보시고야 왕이 겨우 노하심을 진정하시었다.
“네가 역모를 할 때에는 상왕과 통모를 하였겠다?” 하고 두 사람이 다시 정신이 들 만한 때에 왕이 송현수에게 물으신다.
“내가 역모하는 줄은 나도 몰랐으니 상왕이 아실 리가 있소. 죽이려거든 내나 죽일 것이지 상왕까지 죽이려 하시오? 아스시오, 그런 법은 없습니다. 더욱 불충일뿐더러 골육상잔이 아니요.” 하고 송현수가 고개를 흔든다.
송현수와 권 완은 죄를 자복하지 아니하였으나 어전에서 발한 이 불공한 말만 하여도 걸 형을 당하기에 넉넉하였다.
그러나 오늘은 이미 밤이 깊었으니 명일을 기다려서 죽이기로 하고 밤 동안 금부에 내리어 가두라 하시었다. 정인지, 신숙주의 무리는 당장에 그 무리를 박살하지 아니하는 것이 망극한 성은이라고 칭송을 올리었다.
송현수와 권 완과 그 부인들과 자손들이 멸망을 당한지 나흘 되는 유월 이십 육일에 왕은 교지(敎旨)를 내리시와 상왕의 어머니시오, 왕 자기에게는 형수님이시오 문종 대왕의 왕후이신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를 폐하여 서인을 만드시었다. 현덕왕후는 돌아가신지가 벌써 십 칠년이 되신 양반이다.
이것도 역시 정인지, 신숙주의 계책에서 나온 것이니 표면 이유는 현덕왕후의 친정 어머니 되는 화산(花山) 부원군(府院君) 부인(夫人) 최씨(崔氏)가 역모에 걸려서 죽었거든 그 딸 되시는 현덕왕후가 어찌 감히 종묘에서 제향을 받으랴 함이지마는 기실은 상왕을 욕보이자는 것이 목적이요, 정가, 신가의 생각에 상왕을 욕보이는 것은 곧 금상을 기쁘게 함이었다.
이날 왕은 특별히 상왕께서 종묘에 참배하시기를 허하시었다. 무슨 영문을 모르시는 상왕과 대비께서는 첫째로 오래간만에 문밖에 나오시는 것이 좋았고, 둘째로는 슬픔 많고 외로우신 몸이 평소에 사모하옵는 조부모님과 부모님의 위패 앞에 뵈올 것이 기쁘시었다.
상왕이 타신 남녀(그것은 연이 아니요 남녀였다)가 종로로 지나갈 때에 그 어른이 상왕이 신 줄 아는 백성들은 뒤를 우러러 뵈옵고 울었다. 그렇게 이렇게 초초하게 가시는 어른이 이전 왕이시던 상왕이시라고 아는 사람도 얼마 되지 아니하였다.
상왕이 종묘에 듭신 때에 동부승지(同副承旨) 김 질이 왕명을 받아가지고 문종 대왕의 위패를 모신 독에서 현덕왕후의 위패를 메어내어 상왕이 보시는 곳에서 뜰로 홱 내어던지니 둘러섰던 군사와 궁노들이 발길로 그 위패를 차서 굴린다.
상왕은 신도 안 신으시고 뛰어내려,
“나를 차거라, 나를 차거라.” 하시며 흙 묻은 위패를 가슴에 안고 기색하시어 땅에 쓰러지시었다.
그러나 상왕은 그 위패를 보호하실 힘이 없으시었다. 군사들은 기색하신 상왕의 품에서 그 위패를 빼앗아 도끼로 산산조각에 패어서 아궁이 불 속에 집어넣어 버렸다.
이튿날 이십 칠일에 왕은 마침내 상왕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 한다는 교지(敎旨)를 내리시었다.
허두에 ‘성삼문의 말이 상왕이 그 일에 참예하였다 하므로 종친과 백관이 모두 아뢰기를 상왕이 종사에 죄를 지었으니 서울에 편안히 있지 못할지라 하니 하였다. 성삼문이 그런 말 한 일은 없지마는 성삼문의 입으로 이 말이 나왔다고 하는 것은 심히 필요한 일이다.
“내 어찌 차마 사사로운 은정으로써 큰 벌을 굽히며 하늘이 명하는 바와 송사의 중함을 돌아보지 아니하랴.” 하여 부득이 종친과 백관의 청을 들어 상왕을 노산군으로 하고 영월로 내려가시게 한다는 것이다.
상왕을 노산군으로 강봉하여 영월로 가시게 하는 일에 대하여 종친과 백관이 함사(含辭)라 하고 개왈이라 한 것은 노상 없는 말이 아니다. 종친 중에는 임영대군이 왕의 편이 되어서 종친이 나서야 할 때에는 항상 앞장을 섰다.
양녕대군(讓寧大君)이 집안의 어른이지마는 그는 성삼문 사건을 듣고는 소리산(所利山)으로 들어가 숨어버리고 말았다. 그가 서울에만 있더면야 억지로라도 이번 일에 필두가 되고야 말았을 것이다. 임영대군은 왕의 친 아우님이요, 노산군에게는 마찬가지 숙부다.
또 백관 중에서는 무릇 네 번 상왕을 서울에서 내어쫓자는 상서가 있었다. 그 출천한 충성을 만세에 전하기 위하여 그들의 향기로운 이름을 아니 기록할 수 없다. 첫 번은 정인지(鄭麟趾), 정창손(鄭昌孫), 신숙주(申叔舟), 황수신(黃守身) 등이 의정부의 이름으로 계목(啓目)한 것이니 그 글의 요지는, 내어쫓자라한 것이나 왕은 ‘不’이라 하시었다.
둘째는 권 람(權擥), 이인손(李仁孫), 박중손(朴仲孫), 홍달손(洪達孫), 성봉조(成棒組), 김 하 (金何), 박원형(朴元亨), 어효첨 등이 옥조 이 몸으로, 내어쫓자라한 것이니 역시 왕은 ‘不’하시었다.
셋째번은 다시 정인지, 정창손, 신 숙주 등이 정부 이름으로 내어쫓자라 한 것이니 이것은 심히 간절한 청이다. 비록 친부자 간이라도 이런 경우에는 내어쫓을 것이어늘 하물며 그까진 조카랴. 어서 내어쫓으시와 왕의 자리를 굳히소서 함이다. 이에 대하여 왕은, 불윤하시고 또 계목(啓目) 하였으나 불윤이라 하시었다.
<다시 보는 단종애사(端宗哀史) 제134회>
다음에는 대사헌(大司憲) 안숭효(安崇孝), 좌사간(左司諫) 권개(權愷) 등이라 하였다. 이 계목 중에는 등이라는 문자가 있다. 이에 대하여서도 왕은 불윤이라 하시었다.
이만하면 왕이 상왕을 아끼시는 성덕을 보이기에는 넉넉하였다. 아무도 감히 상왕의 존호를 폐하고 강봉하자는 말을 내지 못하였다. 이것이 왕의 생각에 퍽 답답하였다.
상왕이라는 존호를 가지신 대로 서울에서 내쫓는다 하면 듣기에 매우 좋지 못하다.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지어서 상왕의 존호를 잃고 목숨까지도 잃어야 옳을 것을 왕의 바다 같은 성은으로 목숨 하나는 용서함을 받아서 시골로 가시는 것으로 하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아무리 왕이 상왕에게 호의를 보이신다 하더라도 상왕의 바로 눈앞에서 그 어머님의 위패를 욕 보이시었으니 아무도 왕의 호의를 알아드리지 아니할 것이다.
아무러나 이리하여 왕은 첨지(僉知) 어득해(魚得海)와 금부도사(禁府都事) 왕방연(王邦衍)을 명하여 노산군을 강원도(江原道) 영월부(寧越府)로 호송하게 하시고 군자정(軍資正) 김자행(金自行), 내시부사(內侍府事) 홍득경(洪得儆)을 종행하게 하시었다.
노산군(魯山君)이 서울을 떠나시는 날, 병자 유월 이십팔일, 노산군이 계시던 금성 대군 궁은 초상난 집과 같았다. 노산군은 비록 대장부의 기개를 보이시어 울음을 참으시거니와 부인 송씨와 본래 후궁이었고 지금은 무엇이라고 부를 만한 칭호조차 잃어버린 권씨와 김씨, 세분은 기색하기를 몇 번을 하다시피 애통하였다.
그까짓 국모의 지위를 잃고 대궐에서 쫓겨나시던 것 같은 것은 생각할 새도 없다. 낳아 주신 부모(송현수 부처)가 살육을 당한지 이렛만에 남편 되시는 어른을 살아 영이별하는 설움, 인생에 이에서 더한 설움이 또 있을까.
권씨도 이번에 그 아버지 권완(權完)과 몇 일족의 도륙을 당하였다. 권씨는 송씨와 같이 노산군을 따라 영월로 가려 하였으나 왕은 이를 허하지 아니하시었다. 그 허하시지 아니한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으나 밖에서 전하는 말은 아이를 낳으실 것을 염려하심이라고 한다.
아이가 난다 하면 살려 두게 되더라도. 후환이 있을 것이요, 죽여버릴 계제가 되더라도 귀찮을 것이니 차라리 내외한테 있지를 못하게 하자는 것이 그 이유라고 한다.
“종사에 큰 죄인이 목숨만 부지하는 것도 어분에 과의 어든 솔권이 말이 되오.” 하시는 것이 한 확의 노산군을 위한 간청에 대한 왕의 대답이었었다.
이날 왕은 내시 안로(安路)를 시키어 화양정(華陽亭)에 약간 잔치를 베풀고 노산군을 전송하게 하였다.
안로는 노산군에게 술을 권하며,
“나으리, 이게 웬 일이시오? 나으리는 아무 죄도 없으시건마는 성삼문 때문에 애매히.” 하고 동정하는 듯이 노산군의 눈치를 보았다. 이것은 왕이 노산군의 입으로 성삼문의 역모를 알았다는 말씀을 들어오라 하신 까닭이다.
“소인에게야 무슨 말씀은 못하시오? 성삼문이 나으리께 그런 말씀을 아뢰입더니까?” 하고 늙고 교활한 안로는 더욱 간전히 물었다.
지존의 지위를 아끼고 죄인의 몸이 되어 혈혈단신으로 서울을 쫓겨나시는 노산군은 예전 당신의 신하들 중에 한 놈도 따르기는커녕 나와 뵈옵지도 아니할때에 안로가 그래도 전별하는 정을 보이는 것을 보시고 마음에 고마워하시다가 이러한 말을 묻는 것을 보시고 괘씸하여,
“이 늙은 여우놈아, 물러나거라.” 하시면서 술잔을 들어 안로의 면상을 때리시었다. 잔이 안로의 코허리를 치어 빨갛게 피가 흘렀다.
노산군이 다 낡은 남녀를 타시고 종로를 지나 동대문으로 나가실 때에 장안 백성들은 길 가 땅바닥에 엎드리어 울고 배웅을 내었다.
“우리 상감마마 어디를 가시오?” 하고 소리를 내어 외치다가 관노들의 손에 입을 얻어맞는 순박한 늙은이도 있었다.
장마는 걷었으나 무시로 비가 오락가락하였다. 볕만 났다 들었다 하였다. 별만 나면 길가 풀잎이 시들도록 날이 더웠다. 말복이 엊그제 지나지 아니하였는가.
첨지(僉知) 어득해(魚得海)가 앞을 서고 군사 오십 명을 두 대에 갈라 앞뒤에 서게 하고 의금부(義禁府) 도사(都事) 왕방연(王邦衍)은 날 샌 나졸 네 명으로 더불어 노산군의 바로 뒤에 말을 타고 따라섰다. 군자정(軍資正) 김자행(金自行)과 내시부사(內侍府事) 홍득경(洪得 儆)도 항상 노산군 남녀 곁으로 말을 몰았다.
군사들은 밥을 배불리 먹고 또 몸에 밥과 떡을 지니어 길 가면서도 시장하면 내어 먹었으나 노산군은 그저께 종묘에서 그 욕을 당하신 뒤로 거의 조석을 폐하시나 다름이 없고, 오늘도 아침에 궁을 납실 때에 부인이 마지막으로 드리시는 미음을 잡수신 뿐이어서 해가 낮이 기울 때쯤 하여서는 시장하시고 기탈 하심을 금할 수 없으시었다.
혹시 주막에 쉬어 육십 명 일행이 막걸리 한 잔이라도 다 사 먹을 때에도 노산군에게는 냉수 한 모금도 드리지 아니하였다. 하도 허기가 지고 목이 마르시므로 곁에 따르는 홍득경(洪得儆)을 부르시어 잡수실 것을 청하시면 그는,
“아 왜 이리 급하시오? 나으리 잡수실 것은 영월부에 가야 있지요.” 하고 말조차 버릇없이 거절하였다.
“이것도 왕명이냐.” 하고 노산군이 소리를 높이시면, 명대로 아니 하거든 “ 걸려서 압송 하랍시었소. 암말 말고 가만히 계시오.” 하고 첨지 어득해가 호령을 하였다.
이 모양으로 점심 수라도 잡수시지 아니하시고 기나긴 여름 햇발도 벌써 석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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