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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다시 보는 단종애사(端宗哀史)(11)/받은 글

 

<다시 보는 단종애사(端宗哀史) 제115회>

 

애초에 윤유월 열하루 상왕께서 선위하시던 날에 성 승이 몇십 차례나 정원에 사람을 보내어 아들 성삼문에게 선위 여부를 묻다가 마침내 성삼문이 앙천낙루(仰天落淚) 하더란 말을 듣고는 그는 곧 병을 일컫고 집에 돌아와 사랑문을 굳이 닫고 집안사람도 들이지 아니하였다. 밤에 성삼문이 돌아온 뒤에야 성삼문을 불러놓고,

 

“네 어찌 살아 있느냐?” 하고 꾸짖었다.

“후설지관(喉舌之官)이 되어 상감 지척에 모시었을 뿐더러 네가 선조의 고명을 받았거든 이제 네 손으로 수양(首陽)에게 국보를 전하고 또 그 잔치에 참예 하였다가 살아서 집으로 놀아온단 말이냐. 내 평소에 너를 절의 있는 사람으로 여기었더니 내 집에 불행이로구나.” 하고 피눈물로써 엄히 꾸짖었다.

 

성삼문은 그 아버지가 죽기를 결심한 줄을 알아차리고 머리맡에 놓인 칼을 보았다. 이 칼은 일찍 세종 대왕께서 하사하신 것이요, 성 승이 평소에 사랑하던 칼이다. 그는 반드시 칼로 자문하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식음을 전폐하고 굶어서 죽을 결심인 줄을 알았다. 성 승은 그러한 사람이다.

성삼문은 아버지 앞에 엎디어 느껴 울다가 아버지의 꾸짖음이 끝나기를 기다려,

 

“소자가 구차히 목숨을 아끼는 것이 아니요 죽을 곳을 찾으려 하는 것입니다. 한 번 죽기는 쉽거니와 상왕을 도와 보위를 회복하기는 뉘 있어 하오리이까. 다행히 우리 사형제 다 무엇이나 할 만하고 또 밖에도 충의지사가 없지 아니할 것이오니 오늘 구차한 목숨을 살려 가지고 돌아온 것은 이 까닭이옵니다.” 하고 경회루 밑에서 박팽년과 서로 맹약한 이야기도 하였다.

성삼문의 말에 성 승은 주먹으로서 가슴을 치고 기뻐하였다.

 

“그러하더냐 진실로 그러할진댄 나도 죽지 아니하고 너희가 하는 일에 한몫 참예하리라. 사람이라고 다 믿지 말아라. 큰일 그르칠라.”

백발이 성성한 성 승의 눈에서는 대장부의 피눈물이 흘렀다.

 

왕은 무슨 변란이 일어나기 전에 하루바삐 그 지위를 굳건히 하기를 힘썼다. 이러하기 위하여서 첫째로 한 일은 요새 말로 하면 선전이다. 왕이 왕이 되고 싶어서 되신 것이 아니라 상왕이 사양하심과 국가의 사정이 부득이 하므로 왕이 되었다는 것을 널리 선전하는 것이다. 왕은 첫째로 이러한 즉위 교서를 내리시었다.

 

이것 역시 국가 다사한 이때에 이런 임금으로는 종사를 지켜 나갈 수 없다 하여 상왕이 굳이 사양하시고 또 종친과 대신들이 ‘다 말하기를’ 종사 대계를 사양하는 것이 의리에 어그러진다고 하므로 부득이 여론을 쫓은 것이라 한 것이다.

 

둘째로 할 일은 이때에 있어서는 명나라 황제의 승인을 어서 속히 받는 것이다. 이러한 때의 준비로 상왕이 즉위하실 때에도 당시 수양 대군으로 명나라에 가시기를 전력을 다하신 것이다.

 

또 명나라 황제의 후궁의 아버지 되는 한 확도 유력한 사람이다. 비록 이번 선위에 대하여 한 확이 속으로 반대하는 뜻을 가지었으나 일이 이렇게 된 뒤에야 보신책으로 하더라도 새 왕께 요공할 수밖에 없이 되었다.

 

왕은 곧 예조 판서 권자신(상왕의 외숙)을 파면하고 김 하(金何)로 대신하여 정사(正使)를 삼고, 형조 참판 우효강(禹孝剛)으로 부사(副使)를 삼아 명나라로 보내었다. 예조판서 권자신을 보낼 수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이번 사신은 상왕이 선위하시기 전에 이를테면 조선 왕이라는 벼슬을 사면한다는 사면 청원을 하는 사신이다. 이것이 절차로도 당연하거니와 또 새 왕에게도 편한 일이 많다.

 

첫째 이번 선위가 상왕이 자진하여 하신 것이요, 결코 새 왕이 찬역(簒逆) 하신 것이 아닌 것을 보이는데 편하고,

 

둘째로는 이번 기회에 황보인, 김종서의 죄를 역설하여 어디까지든지 새 왕이 옳으신 것을 발명하기에 편한 것이다. 미상불 계유정란(癸酉靖亂)이라는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계유 사변은 명나라에서는 매우 시비거리가 되었다. 누구나 이 일은 당시 수양 대군이 자기의 야심을 펴려는 준비로 생각하였고 더구나 이번 선위로 말미암아 그것이 증명된 것같이 알게 되었다.

 

재래의 관례로 보더라도 명나라가 조선의 내정을 간섭한 일은 없었으므로 이번 상왕이 선위하신 데 대하여 적극적으로 명나라 조정에서 간섭을 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아니하나, 명나라 조정에서 조금이라도 새 왕의 행동을 비난하는 일이 있으면 그것은 곧 조선 민심에 반향이 되어 새 왕께는 적지 아니한 손해가 될 것이 분명하다.

 

이에 청사위(請辭位) 주문(奏文)의 필자가 문제가 되었다. 가장 글 잘하는 사람, 가장 명성 높은 사람의 손으로 이 글을 짓게 하는 것이 또한 왕에게 유리한 일이요, 될 수만 있으면 문종 대왕의 고명을 받은 집현전 학사들 중에서 택하고 싶었다.

 

이래서 망에 오른 것이 사헌부 집의 하위지(河緯地), 승정원 좌부승지 성삼문(成三問), 성균관 사예 유성원(柳誠源) 및 상왕의 선위 교서를 지은 김예몽이었다. 박팽년도 망에 올랐으나 그때 병탈하고 집에 누웠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아니하였다.

 

하위지 성삼문 유성원은 심히 곤란한 처지에 있었다. 그러나 준걸히 거절한다 하면 우스운 일에 생명 문제이므로 이번 일에 붓을 들 사람이다 하여 김예몽을 천하였다. 왕은 세 사람의 뜻을 모름이 아니나 그들의 마음을 당신에게로 돌리기를 힘쓰시기 때문에 더 강요하지도 아니하시고 김예몽으로 하여금 기록하게 하고 정인지가 지휘하게 하시었다.

 

그 소위 청사위 주문(奏文)이란 것은 이러하다.

 

 

<다시 보는 단종애사(端宗哀史) 제116회>

 

청사위 주문(奏文)이란 것은 다섯가지 부분으로 되어있다.

첫째는 왕이 어려서부터 항상 몸이 약하고 병이 있다는 것을 말하여 건강으로 보아 왕될 자격이 없는 것을 말하고,

 

둘째로 이러한 몸을 가지고 열두 살에 왕이 되어서는 어찌할 바를 몰라서 모든 일을 신하들에게 맡기었다는 것을 말하고,

 

셋째로 그랬더니 간신이 역모를 하는 것을 수양 대군이 먼저 왕께 고하여서 그 공로로 나라를 안보하였다는 것,

 

넷째로 그런데 아직도 흉한 무리가 남아 있고 왕 자기는 왕 될 자격이 없고 숙부 수양 대군이 학문이 도저하고 덕이 높고 공이 많고 만민의 숭앙을 받으니 그가 아니면 안되겠기로 지나간 윤유월 십일일에 명나라 황제의 윤허도 없이 벌써 왕의 자리를 수양 대군에게 물려 주었다는 것, 그러하니 제발 허하여 달라는 것이다.

 

“과연 일대 문장이다!” 하고 왕은 이 글을 보시고는 격절탄상(擊節歎賞) 하시었다.

이 글로 보건대 과연 상왕은 선위 아니하실 수가 없고 수양 대군은 왕이 아니 되실 수가 없었다. 아무 억지도 없이 일이 순순히 된 것 같다.

 

이 주문에 대한 대명 황제의 조칙은 반년이 넘어도 오지 아니하였다. 아무리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 주의를 쓴다 하더라도 명나라 조정에는 이론이 있었던 까닭이다.

 

첫째는 상왕이 결코 병약하지 아니하시다는 것이다. 상왕이 비록 수양 대군과 같이 장골은 아니시고 의탁을 하시와 몸이 작으시고 여자 모양으로 용모가 단아하시와 약질이신 듯하지마는 별로 병환은 계시지 아니하였고, 그뿐더러 근년에 와서는 혼인하신 뒤로 도리어 건강이 증진하시는 형편이시었다.

 

명나라 조정에서 또 한 가지 이번 선위에 의심을 낸 것은 상왕께서 명철하시다는 것이다. 비록 교통이 불편한 당시라 하더라도 명나라에서는 결코 조선 사정을 알기를 소홀히 여기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상왕이 왕손으로 계실 때부터 장차 명군이 되실 자질을 가지시었다는 정보가 명나라 조정에 아니 들어갔을 리가 없다.

 

셋째로 이 사위 주문이 믿어지지 아니하는 것은 황보인, 김종서 등이 역모를 하였다는 것이다. 더구나 황보인은 명나라 대관들도 많이 아는 이다. 그들이 수모가 되어서 역모를 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아니하였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로 승인이 지체된 것이다.

 

명나라 조정에 이러한 이론이 있는 것이 얼마쯤 걱정되지 아니함이 아니나 그렇다고 그다지 크게 걱정될 것도 없었다.

 

그래서 새 왕은 식구를 데리고 당당하게 경복궁으로 들어와 부인 윤씨는 곤전마마, 열아홉 살 된 맏아드님 도원군(桃源君)은 왕세자, 여섯 살 되는 둘째 아드님(장래 예종 대왕)은 해양대군(海陽大君)을 봉하시어 왕의 영화를 누리시고 정인지, 한명회, 권 람, 신숙주 이하 사십 일인은 좌익공신(左翼功臣)이라 하여 모두 작록을 받아 갑자기 부귀를 누리게 되었다.

 

다만 마음이 놓이지 아니하는 것은 상왕의 일이다. 아직도 민심은 상왕에 있고 상왕이 왕께 대하여 품으신 노여우심과 원망하심은 풀리지를 아니하시어 선위 후 첫 번 원조인 병자년 설날에 왕이 또 백관을 거느리고 창덕궁에 세배차로 오시었을 때에도 상왕과 대비는 단연히 거절하시고 받지 아니하시었다.

왕은 도저히 상왕의 마음을 풀 수 없는 줄을 깨달으시고 심히 걱정하시었다.

 

상왕을 현재의 지위에 계시게 하고는 도저히 화근을 끊을 수가 없었다. 크나큰 창덕궁 대궐에 수백 명 사람이 왕을 시위하고 또 외척과 상왕이 신임하는 사람들이 출입하니 그것도 도리어 전에 상왕이 왕으로 계실 때보다도 금하기가 국난하였다,

 

상왕이 선위하신지 반년이 넘도록 이다지도 왕을 두려워하시는 빛을 보이지 아니하는 것은 반드시 뒤에 상왕을 충동하는 무리가 있는 것이니 이대로 두었다가는 혹시 상왕을 받들어 복위시키려는 반란이 일어날지도 모를 것이다.

 

그래서 왕은 상왕을 창덕궁에서 어디 조그마한 곳으로 옮겨 모시고 아주 교통과 통신을 끊어버리기로 결심하였다.

이때에 영의정(領議政) 정인지(鄭麟趾)가 육조 참판 이상을 거느리고 왕께 아뢰었다.

 

“소신 등이 전부터 매양 아뢰옵는 바이옵거니와 상왕을 지금과 같은 지위에 모시오면 반드시 화근이 될 것이 분명하오니 복원 전하는 속결무류(速決無留) 하옵시오.”

정인지의 주장은 상왕의 지위를 왕보다도 높이하여 창덕궁에 거처하시게 하지 말고 상왕의 지위를 낮추어 군(君)으로 강봉(降封)하여서 어느 먼 시골에 계시게 하자는 것이다.

 

그리 하면 첫째로는 민심도 상왕에서 떨어질 것이요, 둘째로는 흉악한무리들이 상왕을 끼고 흉모를 할 수 없으리라 함이다.

 

정인지는 두어 번이나 왕께 상왕의 생명을 없이하여 아주 화근을 끊어버릴 것을 진언한 일도 있었으나 왕은 말없이 고개를 흔드시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민간에 상왕을 사모하는 생각이 점점 간절하여지고 또 이렇다 저렇다 하는 소문도 들리어 정인지의 뜻이 자못 편치 못하였다. 만일 상왕이 다시 정권을 잡으시거나 그렇지는 못하더라도 누가 상왕을 복위하시게 할 도모를 한다 하면 반드시 정인지 자기가 미움의 관력이 될 것을 잘 안다.

 

항간에 전하는 말에도 ‘정가’를 좋지 못하게 말하는 일이 많았다. ‘정가’라 하면 곧 정인지를 가리키었다. 이러한 줄을 밝은 정인지가 모를 리가 없다. 그러면 이제 남은 일은 죽기를 한하고 상왕을 제거하고 새 왕의 업을 왕성케 하는 것이다. 이것이 정인지 개인의 보신지책이 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정인지뿐이 아니다.

 

 

<다시 보는 단종애사(端宗哀史) 제117회>

 

정란공신(靖亂功臣)이니, 좌익공신(左翼功臣)이 하는 수양 대군의 뒤를 따라 부귀를 누리는 측들은 다 정인지와 같은 생각을 가지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이 모양으로 이해가 상동하므로 한데 뭉칠 수가 있어서 그들의 독한 눈매는 밤낮으로 창덕궁을 향하였다. 원컨대 무슨 급한 병으로 상왕이 돌아가시었으면 하는 이도 불소하였다.

 

후환을 두려워하는 것뿐 아니라 마치 사람을 때려서 채 죽이지 아니하고 돌아선 사람이 어디를 가나 그 사람이 따라올까 따라올까 겁이 나는 모양으로 또는 옳은 사람을 모해한 무리들이 하늘 어느 구석에서 이제나 무슨 천벌이 떨어질 듯한 불안이 있는 모양으로 이 정란공신들과 좌익공신들이 창덕궁에 계옵신 상왕을 생각할 때마다 이러한 겁과 불안이 있었다.

 

이래서 그들은 하루라도 바삐 상왕을 제거하기를 도모하였다. 그러자면 왕의 뜻을 움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왕은 상왕에 대한 말이 날 때마다 항상 말없이 고개를 돌리시었다.

 

왕도 상왕이 후환의 근원이 되실 줄을 모름이 아니나 골육의 친조카에게서 이미 나라를 빼앗고 이제 다시 목숨을 빼앗을 뜻은 없으시었다. 될 수만 있으면 현상대로 영원히 가고 싶다고 생각하시었다.

 

이에 정인지는 상왕을 제거할 정당한 이유를 발견할 필요를 느끼었고 또 그것은 어렵지 아니한 일이었다. 그러면 그 이유란 무엇인가.

‘첫째는 국가의 안녕을 위하여서요,

둘째는 상왕 자신의 안락을 위하여서’라 함이었다.

 

국가를 위하여서 상왕을 서울 밖에 계시게 함이 좋다. 상왕이 일생을 편히 지내시기 위하여 높은 상왕의 지위를 때고 군으로 강봉하는 것이 좋다 하는 것이 인제는 왕께 요공하는 백판의 말투가 되었다. 정인지가 상왕의 목숨을 끊어버리기를 진언하는 때에는 그것은 극히 은밀한 때의 귓속이요, 큰 소리로 하는 말은 역시 이것이었다.

 

이번에 육조 참판 이상을 거느리고 왕의 최후의 결심을 재촉한 때에도 그 내용은 상왕의 지위를 낮추고 상왕을 어느 조그마한 시골에 가두어버리자는 것이다.

그러나 왕은 여전히,

 

“경들의 말이 옳거니와 자고로 제왕이 일어나는 것은 반드시 천명이니 내가 일어난 것도 천명이어든 간사한 놈들이 있더라도 어찌 상왕을 힘입어 못된 도모를 할 수가 있나. 망진자 호야(亡秦者胡也)라 하였거니와 천명을 어찌할 수가 있나.” 하시었다.

 

왕이 천명이 당신에게 있는 것을 믿으신 것도 사실이다. 그는 본래 자부심이 많으신 까닭에, 그러나 이렇게 천명에 미루고 태연하심을 보이심에는 다른 정책이 있는 것이 물론이다.

 

그 정책은 무엇인가. 정인지 등 신료로 하여금 더욱더욱 상왕을 처치할 것을 발론케 하기 위함이요, 또 하나는 왕좌에 경동하지 아니하고 태연한 태도와 상왕께 대한 골육 지정이 깊음을 보이려 하심이다. 그렇지마는 왕의 속은 그렇게 편안하실 수가 없었다. 정인지, 한명회 무리보다도 더 조급하신 것이 사실이다.

 

정인지, 한명회의 무리도 왕의 이러하신 심정을 잘 알기 때문에 왕께서 거절할수록 더욱 졸랐다.

 

“전하 일어나옵심이 천명인 것이야 다시 말씀 하오리이까 마는 천명에만 맡길 수 없사옵고 마땅히 인사를 다할 것인가 하오. 상왕은 밖에 나아가 계시게 하여 혐의를 피함이 마땅한가 하오. 만일 늦으면 후회막급이 되올까 하오.” 하고 정인지가 물러나지 아니하고 다시 아뢴다. 지극히 충성을 보임이다.

 

왕은 지필을 올리라 하시와 이렇게 적어 정인지를 보이시었다.

왕에게는 이러한 결심이 벌써 있었던 것이다. 지금 비어 있는 금성 대군 궁을 수리하고 그리로 상왕을 옮겨 모시자는 것이다.

 

창덕궁에서 금성 대군 궁에 옮겨 모신다는 것은 안방에서 행랑으로 내어 모신다는 것보다 더한 일이다. 게다가 바깥과 통하지를 못하시게 하고 모시는 사람을 부쩍 줄이자는 것이다.

 

만일 상왕의 지위를 낮추어 군을 봉하고 어느 시골로 귀양살이를 시킨다 하면 민심을 경동할뿐더러 왕의 성덕에 하자가 될 근심이 있거니와 서울 안에서 거처만 바꾸면 그다지 눈에 거슬리지 아니할 듯함이다.

 

이튿날 영의정 정인지는 다시 솔백관(率百官)하고 상왕출외(上王出外)를 청하였으나 왕은 다시 붓을 드시라 하고 쓰시었다. 이 일에 관하여 말씀으로 하시기는 퍽 비편 하시었던 까닭이다. 하기 싫은 말인 까닭이다.

 

이 일에 양녕대군(讓寧大君) 제(禔)가 매우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그는 종친의 어른으로서 여러 종친을 거느리고 정인지와 함께 상왕 출외를 주청하지 아니치 못할 사세사 된 까닭이다.

 

왕은 이에 제종(諸宗)과 백관(百官)의 뜻을 버릴 수 없다는 이유로 상왕을 금성 대군 집으로 옮겨 모시었다. 금성 대군은 벌써 순흥(順興)에 귀양 가 있는 것은 독자가 기억하실 바이다.

상왕을 창덕궁에서 금성 대군 집으로 옮겨 모시는 일도 크게 슬픈 일 중에 하나였었다.

 

상왕과 대비 두 분이 창덕궁에 오신지 거의 일년이 되어 집과 동상에 다 낯이 익고 마음을 붙이실 때 쯤하여 한 번 상왕께 여쭈어보지도 아니하고 별안간 거마를 보내어 두 분을 모시어 내었다.

 

그것은 마치 잡아내는 것과 같았다. 쓰시던 물건 하나도 마음대로 못 나르시고 부리시던 사람들조차 마지막으로 불러 보실 사이도 없으시었다.

 

그러나 왕은 반항하실 길도 없어 오직 분을 참고 금성 대군 집으로 끌려오시었다. 금성 대군 집이 바로 원골이기 때문에 궁장 밑을 돌아 초초하게 행차하시니 백성들도 누구신지 알아 뵙지 못하였다.

 

그러기에 상왕과 대비 두 분께서 금성 대군 궁으로 옮아오신 뒤에도 얼마 동안 백성들은 두 분이 창덕궁에 계시거니 하였다.다시 보는 단종애사(端宗哀史) 제117회

 

정란공신(靖亂功臣)이니, 좌익공신(左翼功臣)이 하는 수양 대군의 뒤를 따라 부귀를 누리는 측들은 다 정인지와 같은 생각을 가지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이 모양으로 이해가 상동하므로 한데 뭉칠 수가 있어서 그들의 독한 눈매는 밤낮으로 창덕궁을 향하였다. 원컨대 무슨 급한 병으로 상왕이 돌아가시었으면 하는 이도 불소하였다.

 

후환을 두려워하는 것뿐 아니라 마치 사람을 때려서 채 죽이지 아니하고 돌아선 사람이 어디를 가나 그 사람이 따라올까 따라올까 겁이 나는 모양으로 또는 옳은 사람을 모해한 무리들이 하늘 어느 구석에서 이제나 무슨 천벌이 떨어질 듯한 불안이 있는 모양으로 이 정란공신들과 좌익공신들이 창덕궁에 계옵신 상왕을 생각할 때마다 이러한 겁과 불안이 있었다.

 

이래서 그들은 하루라도 바삐 상왕을 제거하기를 도모하였다. 그러자면 왕의 뜻을 움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왕은 상왕에 대한 말이 날 때마다 항상 말없이 고개를 돌리시었다.

 

왕도 상왕이 후환의 근원이 되실 줄을 모름이 아니나 골육의 친조카에게서 이미 나라를 빼앗고 이제 다시 목숨을 빼앗을 뜻은 없으시었다. 될 수만 있으면 현상대로 영원히 가고 싶다고 생각하시었다.

 

이에 정인지는 상왕을 제거할 정당한 이유를 발견할 필요를 느끼었고 또 그것은 어렵지 아니한 일이었다. 그러면 그 이유란 무엇인가.

‘첫째는 국가의 안녕을 위하여서요,

둘째는 상왕 자신의 안락을 위하여서’라 함이었다.

 

국가를 위하여서 상왕을 서울 밖에 계시게 함이 좋다. 상왕이 일생을 편히 지내시기 위하여 높은 상왕의 지위를 때고 군으로 강봉하는 것이 좋다 하는 것이 인제는 왕께 요공하는 백판의 말투가 되었다. 정인지가 상왕의 목숨을 끊어버리기를 진언하는 때에는 그것은 극히 은밀한 때의 귓속이요, 큰 소리로 하는 말은 역시 이것이었다.

 

이번에 육조 참판 이상을 거느리고 왕의 최후의 결심을 재촉한 때에도 그 내용은 상왕의 지위를 낮추고 상왕을 어느 조그마한 시골에 가두어버리자는 것이다.

그러나 왕은 여전히,

 

“경들의 말이 옳거니와 자고로 제왕이 일어나는 것은 반드시 천명이니 내가 일어난 것도 천명이어든 간사한 놈들이 있더라도 어찌 상왕을 힘입어 못된 도모를 할 수가 있나. 망진자 호야(亡秦者胡也)라 하였거니와 천명을 어찌할 수가 있나.” 하시었다.

 

왕이 천명이 당신에게 있는 것을 믿으신 것도 사실이다. 그는 본래 자부심이 많으신 까닭에, 그러나 이렇게 천명에 미루고 태연하심을 보이심에는 다른 정책이 있는 것이 물론이다.

 

그 정책은 무엇인가. 정인지 등 신료로 하여금 더욱더욱 상왕을 처치할 것을 발론케 하기 위함이요, 또 하나는 왕좌에 경동하지 아니하고 태연한 태도와 상왕께 대한 골육 지정이 깊음을 보이려 하심이다. 그렇지마는 왕의 속은 그렇게 편안하실 수가 없었다. 정인지, 한명회 무리보다도 더 조급하신 것이 사실이다.

 

정인지, 한명회의 무리도 왕의 이러하신 심정을 잘 알기 때문에 왕께서 거절할수록 더욱 졸랐다.

 

“전하 일어나옵심이 천명인 것이야 다시 말씀 하오리이까 마는 천명에만 맡길 수 없사옵고 마땅히 인사를 다할 것인가 하오. 상왕은 밖에 나아가 계시게 하여 혐의를 피함이 마땅한가 하오. 만일 늦으면 후회막급이 되올까 하오.” 하고 정인지가 물러나지 아니하고 다시 아뢴다. 지극히 충성을 보임이다.

 

왕은 지필을 올리라 하시와 이렇게 적어 정인지를 보이시었다.

왕에게는 이러한 결심이 벌써 있었던 것이다. 지금 비어 있는 금성 대군 궁을 수리하고 그리로 상왕을 옮겨 모시자는 것이다.

 

창덕궁에서 금성 대군 궁에 옮겨 모신다는 것은 안방에서 행랑으로 내어 모신다는 것보다 더한 일이다. 게다가 바깥과 통하지를 못하시게 하고 모시는 사람을 부쩍 줄이자는 것이다.

 

만일 상왕의 지위를 낮추어 군을 봉하고 어느 시골로 귀양살이를 시킨다 하면 민심을 경동할뿐더러 왕의 성덕에 하자가 될 근심이 있거니와 서울 안에서 거처만 바꾸면 그다지 눈에 거슬리지 아니할 듯함이다.

 

이튿날 영의정 정인지는 다시 솔백관(率百官)하고 상왕출외(上王出外)를 청하였으나 왕은 다시 붓을 드시라 하고 쓰시었다. 이 일에 관하여 말씀으로 하시기는 퍽 비편 하시었던 까닭이다. 하기 싫은 말인 까닭이다.

 

이 일에 양녕대군(讓寧大君) 제(禔)가 매우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그는 종친의 어른으로서 여러 종친을 거느리고 정인지와 함께 상왕 출외를 주청하지 아니치 못할 사세사 된 까닭이다.

 

왕은 이에 제종(諸宗)과 백관(百官)의 뜻을 버릴 수 없다는 이유로 상왕을 금성 대군 집으로 옮겨 모시었다. 금성 대군은 벌써 순흥(順興)에 귀양 가 있는 것은 독자가 기억하실 바이다.

상왕을 창덕궁에서 금성 대군 집으로 옮겨 모시는 일도 크게 슬픈 일 중에 하나였었다.

 

상왕과 대비 두 분이 창덕궁에 오신지 거의 일년이 되어 집과 동상에 다 낯이 익고 마음을 붙이실 때 쯤하여 한 번 상왕께 여쭈어보지도 아니하고 별안간 거마를 보내어 두 분을 모시어 내었다.

 

그것은 마치 잡아내는 것과 같았다. 쓰시던 물건 하나도 마음대로 못 나르시고 부리시던 사람들조차 마지막으로 불러 보실 사이도 없으시었다.

 

그러나 왕은 반항하실 길도 없어 오직 분을 참고 금성 대군 집으로 끌려오시었다. 금성 대군 집이 바로 원골이기 때문에 궁장 밑을 돌아 초초하게 행차하시니 백성들도 누구신지 알아 뵙지 못하였다.

 

그러기에 상왕과 대비 두 분께서 금성 대군 궁으로 옮아오신 뒤에도 얼마 동안 백성들은 두 분이 창덕궁에 계시거니 하였다.

 

 

<다시 보는 단종애사(端宗哀史) 제118회>

 

상왕을 창덕궁에서 금성 대군 집으로 옮겨 모시고는 왕은 상왕의 거처 범절에 관하여 이렇게 규정하시었다.

 

첫째 삼군진무(三軍鎭撫) 두 사람으로 하여금 군사(軍士) 열씩을 거느리고 번갈아 과수하여 잡인의 출입을 금지할 것.

 

상왕전(上王殿) 두 사람, 차비수 고적 네사람, 별감(別監) 네 사람을 두되, 반씩 잘라 번갈게 하고 시녀(侍女) 열두 사람, 수사 다섯 사람, 복지 두 사람, 수모(水母) 두 사람, 방자(房子) 각 두 사람, 수사각 한 사람을 두고 각 색장(色掌) 십이인은 둘에 갈라 번갈게 하고

 

덕녕부(德寧府) 관원이 차례로 낮에 입직하기로 하고 대비 한 분, 별실 두 분 본댁에서 내왕하는 환관, 시녀의 출입이며, 무슨 물건 진납은 사흘에 한 번씩 덕녕부에서 승정원에 고하여 허가를 얻은 뒤에야 하도록 명하시었다.

 

이렇게 되니 존호는 비록 상왕이라 하여도 갇힌 죄인이나 다름이 없었다. 귀찮고 눈칫밥 잡숫는 식구가 되시었다.

성삼문 부자는 이 일이 있음으로부터 더구나 야심 후면 마주 앉아 통곡하였다.

 

“저렇게 해놓고 어떤 짓을 할는지 알 수 있느냐.” 하는 성승의 말은 옳은 말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상왕을 가두어 놓은 것은 다른 뜻이 있음이라고 수군거린다.

혹시나 음식에 독을 넣어드리지나 아니할는지, 독약은커녕 아무렇게 죽이더라도 그 속에서 하는 일을 아무도 알 리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렇게 돌아가시게 한 뒤에 어떠어떠한 병환으로 승하하시었다고 하면 그만이 아닐까 하였다.

 

성승이나 기타 상왕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장 염려한 것은 이것이다. 상왕이 살아 계시고야 보복도 하고 어떠한 날에 흑백을 가리어 통분한 것을 씻기도 하려니와 상왕 한 분이 돌아가시고만 보면 만사가 수포에 돌아가고 불의의 무리들은 제 세상이라고 발을 뻗고 누워 억울한 죽음을 당한 의인들,

 

황보인, 김종서 이하로 장차 죽을 수 없는 사람들까지 영영 누명을 쓰고 말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성삼문의 무리는 매우 초조하여 기회를 엿보았다.

 

왕이 이들의 음모를 알리는 없지마는 그래도 그들이 마음 놓이지 아니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서울에 모여 있지 못하게 하는 방책으로 박팽년을 전라 감사로 보내고 하위지를 경상 감사로 보내고, 그 밖에도 다 상당히 높은 벼슬을 주어 하나씩 하나씩 외방으로 보낼 경륜을 하였다.

 

제일착으로 박팽년은 전라 감사로 갔으나, 하위지는 비록 권도라 하여도 수양 대군 조정에 벼슬을 아니 받는다 하여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라는 상왕 때의 직함을 띤 채로 고향인 선산(善山)으로 돌아가 자제들을 데리고 농사일에 숨어버리고 말았다.

 

그러하는 동안에 한 기회가 온다. 그것은 상왕이 선위하고 수양 대군이 즉위하신 문제에 대한 명나라 조정의 의논이 정하여 수양 대군 앞으로 조선 왕됨을 승인한다는 조칙을 가지고 명나라 사신이 서울에 오게 된 것이다.

 

명나라 사신이 온다는 것은 유월이다. 예조판서(禮曹判書) 김하(金何) 등이 갔던 일, 상왕이 선위하시는 것을 승인한다는 명나라 조서(詔書)가 온 것은 두 달 전인 사월이다. 김하가 명나라에 갔던 것이 지난해 윤유월이니까 거의 열 달이나 넘은 셈이다.

 

비록 말썽되던 일이지마는 명나라 조정은 마침내 새 왕을 승인하게 된 것이다. 왕이 상왕을 창덕궁에서 옮기어 금성 대군 집에 가둘 용기를 내신 것도 이것이 큰 힘이 되었던 것이다.

 

소위 천사(天使)라는 명나라 사신이 오는 것은 정식으로 고명(誥命)과 면복(冕服)을 전하기 위함이다. 이때 명나라 사신은 윤 봉(尹鳳)이었다.

윤 봉은 의주(義州)에 건너서는 날, 조선 조정에서 마중간 접반원 신숙주를 보고,

 

“신왕(新王)이 상왕을 유폐(幽閉)하였다 하니 참인가.” 하고 책망다운 질문을 하였다.

그 접반원은 땀을 흘렸다. 대개 명나라 황제가 지난 사월에 왕께 보낸 조서 중에, 이러한 구절이 있는 까닭이다.

 

왕은 항상 상왕을 우대하되 모름지기 소홀히 함이 없어야 한다. 이를테면 명령이다. 그런데 창덕궁에 계시던 상왕을 금성 대군 궁으로 옮겨 모신 것은 결코 우대가 아니었다.

 

이 시절에 명나라 사신의 말이라면 실로 하늘 말과 같이 무서웠다. 실상 윤 봉이가 이런 말을 끌어낸 것은 한 번 트집을 잡아 보자는 속이요, 왕도 이러한 어려운 트집이 나올 줄 짐작하였길래 신 숙주 같은 중신을 국경까지 관반(館伴)으로 파견하시었던 것이었다.

 

“아니, 왕이 상왕을 유폐하신 것이 아니요. 상왕이 가끔 궁에서 나오시기를 즐겨하시기로 나오신 때 거처하실 곳을 권정(權定)한 것이 아마 간인(奸人)의 입으로 천조(天朝)에 오전된 가 보오.” 하고 말 부족한 신숙주가 아니라 극력하여 변명하였다.

그러고는 사람을 달리어 서울에 이 뜻을 급보하였다.

 

의주에서 신숙주가 올린 장계는 일천 백리 길을 밤 사흘, 낮 사흘에 땀 흐르는 파발마 편에 실리어 서울에 올라왔다.

 

이 편지에 왕의 놀라심도 적지 아니하였다. 명나라 사신이 그만한 트집을 잡는다고 대세에 무슨 변동이 있을 것도 아니지마는 그래도 그에게 책을 잡히는 것은 고통이 아니될 수 없었다.

 

이에 왕은 일변 사람을 명하여 창덕궁을 정하게 수리하게 하고, 일변 친히 금성 대군 궁에 상왕을 뵈오러 가시었다.

 

 

 

<다시 보는 단종애사(端宗哀史) 제119회>

 

왕이 마지막 상왕을 뵈오러 가신 것은 지나간 설날이니 벌써 반년 전이다. 그러나 그때에도 상왕을 뵈옵지는 못하였으니 정말 서로 대면하시기는 작년 윤유월 열하루, 경회루에서 선위하시고 나서 사정전에 듭시었을 때다. 그동안이 일 년이 되었다.

 

왕이 상왕을 뵈오러 오신다는 말씀을 들으시고 상왕은 놀라시었다. 상왕 따위는 다 잊어 버리었을 만한 때에 왕이 몸소 온다는 것이 웬일인고 이렇게 생각하신 것이다.

 

실상 그동안 두어 달, 금성궁에 이이하신 뒤로 말하면 상왕의 지위는 어느 대군 하나만도 못하였다.

상왕은 거절하실 것을 생각하시었다. 그러나 이 처지에 상왕은 거절하실 힘이 없으시다.

비록 오너라 하고 부른다든지 관노를 보내어 붙들어 가더라도 대항할 힘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상왕은 왕을 만나시었다. 일 년 동안에 두 분의 용모는 무척도 변하시었다. 상왕은 수양 숙부의 얼굴이 과연 왕자답게, 더욱 위엄과 윤택한 빛이 생긴 것을 놀라시고, 왕은 상왕의 얼굴에서 소년다운 빛이 전혀 사라지고 마치 인생의 고초를 다 겪은 중년 남자의 얼굴과 같이 노성하고도 초췌한 빛을 띤 것을 놀라시었다.

 

마음의 한 편 구석에 심히 감동되기 쉬운 인정을 가지신 왕은 기구한 인생의 행로에 감개가 아니 일어날 수가 없었다.

 

왕은 상왕을 위로하는 말씀을 많이 하시고 또 이튿날부터 다시 창덕궁으로 이어하실 것과 지금 계신 집이 창덕궁과 연장하여 있으니 어느 때에나 소창하러 나오실 것도 권하시었다.

 

상왕은 창덕궁으로 다시 가라는 것도 귀찮게 생각하시고 또 이집에 가끔 소창하러 나오라는 것도 우습게 생각하시었다 이집, 숙부 되는 금성 대군이 상왕 당신을 위해서 쫓겨난 집이 잠시인들 상왕의 마음을 편안하시게 할 리가 없다.

그렇지마는 상왕께서는 입 밖에 내어 반대도 아니하시고 그저 들을 만하실 뿐이었다.

 

“여기도 좋소.” 하신 것이 유일한 대답이시었다.

마지막으로 왕은 명나라에서 사신이 온다는 말과 그때에는 상왕께서도 왕과 함께 태평관(太平館)에 천사를 방문하실 것을 말씀하시었다.

 

“내가 무엇하러 가오?” 하고 상왕은 거절하시었으나 마침내 왕이 오늘 찾아오신 일이 이 일 때문이요, 창덕궁으로 도로 가시라고 하시는 것도 다 이 때문인 줄을 상왕도 대강 짐작하시었다.

왕은 상왕이 태평관에 명나라 사신 방문하기를 거절하시는 것을 고통으로 생각하신다.

 

새 왕이 상왕을 홀대한다. 두 분의 사이가 좋지 못하다 하는 것이 거짓 선전이요, 도리어 상왕과 왕과의 사이가 극히 친밀하신 것이 사실인 것을 명나라 사신에게 보이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인 까닭이다.

 

이것은 오직 명나라 조정의 여론을 완화 시키기 위하여서보다 조선 내의 민심을 완화하기 위하여서 지극히 중요한 일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왕은 잊어버림이 되시었던 상왕궁에를 몸소 찾아오시었고 상왕께 여러 가지로 유리한 조건을 드린 것이다.

 

상왕은 마침내 왕의 청을 들으시어 왕과 함께 명사를 태평관에 방문하시었다. 그러할뿐더러 상왕이 결코 창덕궁에서 쫓기어나신 것이 아닌 것을 보이기 위하여 심일 후에는 상왕이 주인이 되어 창덕궁에 명사를 환영하는 어연을 배설할 것까지도 상왕이 허락하시었다.

 

실로 이 일이 성공된다 하면 왕이 상왕에게서 무리하게 왕위를 찬탈하고 또 그 후에도 상왕께 대하여 우대함이 부족하다는 시비를 명나라에게서나 본국에서나 덜 듣게 될 것이다.

일거양득이란 이를 두고 이른 말이다. 왕은 매사가 뜻대로 되는 것을 생각하고 혼자 빙그레 웃으시었다.

 

도총관(都摠管) 성 승(成勝)과 훈련도감(訓練都監) 유응부(兪應孚)가 이날에 운검(雲劒)으로 뽑히게 된 것은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의 계략에는 가장 큰 도움이 되었다.

대개 운검이라 하면 검을 빼어 들고 왕의 뒤에서 왕을 호위하고 섰는 직책이기 때문이다.

 

운검으로 섰는 사람이 왕을 죽이려면 그야말로 일거수로 될 것이 아닌가. 이날에 왕이 동궁을 곁에 앉히고 명나라 사신을 대하실 예정이니 실로 왕과 동궁과의 생명을 성 승과 유응부 두 사람의 칼날 밑에 있다 할 것이다.

 

“수양 부자는 응부가 담당할 것이니 다른 놈들을 군 등이 맡으소.” 하고 장담한 유응부의 말은 조금도 보탬 없는 가장 확실한 말이다.

“그 담에 죽일 놈은 신숙주(申叔舟)야. 숙주는 나와 평생지교지마는 죄가 중하니까 불가부주(不可不誅)야.” 한 것은 성삼문이다.

 

“그렇고말고, 숙주의 죄는 인지(麟趾), 명회(明澮)보다도 가중한 바 있어.” 하고 자리에 있던 동지들이 웅성하였다. 대개 명나라와 본국 민간에 대하여 선위 사건의 거짓 선전을 말은 자가 신숙주인 까닭이다.

 

신숙주는 “내가 맡으리라. 그놈의 모가지는 내가 베리다.” 하고 나서는 것이 형조정랑(刑曹正郞)이요, 상왕의 이모부 되는 윤영손(尹鈴孫)이다.

 

“정인지(鄭麟趾)의 늙은 모가지는 내가 맡았소.” 팔을 뽐내고 나서는 것은 김 질이다.

그는 이번 모사에 가장 열렬한 급진주의자였다.

 

“가안(可安)인가. 이번 성사하면 수상(首相)은 자네 장인이 되어야 할 것일세. 어떻게들 생각하시오?” 하는 것은 성삼문이다.

 

가안(可安)은 김 질의 자다. 그의 장인이라 함은 우찬성(右贊成) 정창손(鄭昌孫)을 이름이다. 대관 중에 이 일에 내통한 이는 정창손뿐이다.

이러한 의논을 한 것은 창덕궁에 어연이 있을 전날 밤이다.

 

 

<다시 보는 단종애사(端宗哀史) 제120회>

 

이 밖에 장 신(將臣) 박 정(朴靖), 송석동(宋石同)이 각각 밖에서 창덕궁과 경복궁을 엿보아 안으로서 무슨 군호만 있으면 동하기로 하고 궁내에서는 잔치 중간에 일제히 일을 일으키어 왕과 세자와 정인지, 신숙주 등의 중신을 죽이고 명나라 사신이 증인으로 앉은 자리에서 상왕을 복위하게 하시고 왕의 죄를 성토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여반장이야.” 하고 그들은 맹세하는 술을 마시었다.

“한명회(韓明澮), 권 람(權擥) 두 놈은 내가 담당하마.” 하고 늙은 성 승의 눈에 불이 난다. 삼문은 정다운 듯이 아버지의 주름 잡힌 얼굴을 바라본다.

 

이튿날 창덕궁 광연전(昌德宮廣延殿)에는 명나라 사신을 맞는 큰 잔치가 벌어지었다. 대청 동쪽이 주인 측의 자리가 되어 남으로부터 북에 차례로 처음에 상왕, 다음이 왕, 그다음이 동궁의 자리가 되고 서쪽이 객의 자리가 되어 역시 남으로부터 북에 차례로 윤 봉(尹鳳) 이하 부사, 아울러 명나라 사신 세 사람이 늘어앉게 되고 북벽과 주, 객석 좌우로는 본국 대관과 명나라 사신의 수원이 벌여 서게 되었다.

 

영의정(領議政) 정인지(鄭麟趾), 좌의정(左議政) 한 확(韓確), 우의정(右議政) 강맹경(姜孟卿), 좌찬성(左贊成) 신숙주(申叔舟), 이조판서(吏曹判書) 권 람(權擥), 예조판서(禮曹判書) 홍윤성(洪允成), 병조판서(兵曹判書) 양 정(楊汀) 명나라의 사신으로 갔던, 현 공조판서(工曹判書) 김 하(金何),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지내고 나서 도리어 도승지(都承旨)가 된 한명회(韓明澮), 좌승지(左承旨) 박원형(朴元亨), 동부승지(同副承旨) 김 질(金礩), 좌부승지(左副承旨) 성삼문(成三問) 명나라 사신과 글 짓는 접반이 되기 위하여 전라 감사(全羅監司) 박팽년(朴彭年) 집현전 직제학(集賢殿 直提學) 이 개(李塏) 등이 주인 편 좌우에 입시하게 되고 도총관(都摠管) 성 승(成勝), 훈련도감(訓練都監) 유응부(兪應孚)는 명예로운 운검(雲劒)으로 왕의 뒤에 칼을 빼어 들고 모시게 되었다.

 

광연전 마당에는 차일을 치고 풍악과 춤을 아뢰게 될 것임 삼천 궁녀 중에서 고르고 고른 꽃같이 아름다운 궁녀들은 비단 소매를 너흘 거리며 배반 사이에 주선할 것이다. 어찌하였으나 조선의 힘으로 차릴 수 있는 대로 아름답게 차린 잔치다.

 

왕은 미상블 다소의 근심이 없지 아니하시었다. 연락하는 석상에서 명나라 사신한테 상왕의 선위에 대하여 무슨 책이나 잡히지 아니할까 하는 것도 걱정이려니와 그보다도 이 자리에서 상왕이나 또는 상왕을 사모하는자 중에서 누구가 상왕의 선위하시지 아니치 못하게 된 내막, 즉 왕이 정인지의 무리를 시키어서 하신 음모를 발설이나 아니할까 하는 것도 염려요,

 

그보다도 한층 더 나아가서 이 기회 명나라 사신이 오고 사람이 많이 모이고 민심이 흥분되어 무슨 일이 일어나지나 아니하나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는 기회를 타서 왕의 목숨을 엿보는 일이나 아니할까 하는 것도 근심이 되시었다.

 

본래는 무서움이 없던 왕도 왕이 되신 뒤에는 겁이 많이 늘으시어 주무실 때면 사벽에서 칼날이나 아니 나오는가 하시고 의심 내실 때도 있었다.

 

그중에도 상왕(왕이 계실적에도)을 없수이 할 말을 정인지, 한명회 같은 무리에게서 들으신 때나, 또는 혼자서 그러한 생각을 하신 날 그러한 의심이 더하여 잠이 들지 아니하시었다.

 

비록 심복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때에는 의심이 난다. 어느 신하는 문종 대왕이나 상왕의 신하가 아니던가. 상왕을 배반하고 돌아선 정인지, 신숙주의 무리는 지금 왕을 배반하고 돌아 서지 말라는 법이 있나, 이렇게 생각하면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를 아니하였다. 왕이란 결코 마음 놓이는 자리가 아닌 것을 깨달았다.

 

“상감, 내일 운검을 폐하시겨오.” 하는 한명회의 말에는 깊은 뜻이 있는 듯이 왕에게 들리었다. 등 뒤에 칼 빼어 들고 섰을 두 장수, 분명히 속을 믿기 어려운 성 승과 유응부, 왕은 생각만 하여도 전신에 찬 기운이 돌았다.

“또 동궁께옵서는 명일 본궁을 지키심이 옮은가 하오.” 한명회는 이런 말씀도 아뢰었다.

 

왕은 밤을 잠 없이 지내시와 매우 신기가 불편하신 대로 경복궁을 납시어 운종가를 지내시와 창덕궁으로 거동하시었다. 동궁은 명회 말대로 경복궁에 있으라 하시었으나 운검을 폐하라는 명회의 말은 듣지 아니하시었다.

 

대개 그것은 예에 어그러질 뿐더러 또한 세상에 너무 비겁하다는 치소를 들을까 두려워하는 까닭이다. 성 승, 유응부, 제가 감히 나를 어찌하랴. 천명이 내게 있지 아니하냐, 이렇게 생각하시고 마음은 진정하시려 하시었다.

 

예정대로 상왕이 수석에 앉으시고 다음에 왕이 앉으시고 그다음 동궁이 앉을 자리는 비 이기로 되었다. 성삼문은 그 빈 자리를 힐끗힐끗 바라보고 침을 삼킨다.

운검 성승이 칼을 차고 바야흐로 전에 오르려 할 때에 도승지 한명회가 문을 막아서며,

 

“운검, 들지 말라 하옵시오.” 한다. 명회의 그 태도가 심히 오만무례하였다.

성 승은 분김에 칼자루에 손을 대었으나 명회 뒤에 서있는 삼문이 눈짓하는 것을 보고 말없이 계하로 내려서서 뒷문 밖으로 물러 나왔다. 뒤를 따라 삼문이 나온다.

 

“명회 놈부터 먼저 죽일란다. 운검을 안 들이는 것을 보면 무슨 낌새를 챈 모양이니 닥치는 대로 한 놈이라도 죽이는 것이 옳지 아니하냐.” 하는 것은 성 승이 삼문을 보고 하는 말이다. 성 승의 목에는 핏줄이 불룩거린다.

 

 

<다시 보는 단종애사(端宗哀史) 제121회>

 

“아니올시다.” 하고 삼문은 손을 들어 아버지를 막는 모양을 하며,

“세자가 아니 왔으니 명회를 죽이면 무엇합니까. 오늘 일은 틀리었습니다. 후일 다시 기회를 보지요.” 한다. 이때에 유응부가 역시 칼을 들고 들어온다.

삼문이 유응부를 막으며,

 

“아니외다. 세자가 본궁에 있고 또 운검을 들이지 아니하니 하늘이 시키는 것이외다. 만일 여기서 거사를 하더라도 세자가 경복궁에서 기병을 하면 승패는 마찬가지니까 다른 날 상감과 세자가 함께 있는 때를 타서 일을 하는 것이 옳을까 합니다.” 한다. 유응부가 삼문의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리어 화를 내며,

 

“아닐세. 일은 신속해야 하는 것이야. 공연히 지연하다가는 일이 누설이 될 염려가 있지 아니한가. 세자가 비록 본궁에 있다 하더라도 모신적자(謀臣賊子)가 다 수양(首陽)을 따라 여기 있지 아니한가,

 

오늘 그놈들만 다 죽여버리고, 상왕을 복위하시게 한 뒤에 무사를 시켜 일대병을 거느리고 경복궁으로 지치어 들어가면 세자가 제가 어디로 도망한단 말인가.

설사 지략있는 놈이 있다 하더라도 별 수 없을 것이야. 이 천재일우를 잃어버린단 말인가 이 사람아.” 하고 발을 구른다.

 

전정에서는 풍악이 일어난다. 이 풍악 한 곡조가 그칠 만하면 상왕전에 계시던 상왕과 왕이 가지런히 광연전으로 납시고 또 다른 전각에서 시각을 기다리던 명나라 사신도 광연전으로 들어올 것이다.

 

“늦네, 늦어.” 하고 유응부가 부득부득 들어가려는 것을 박팽년이 또 황망히,

“대감, 이게 만전지계(萬全之計)가 아니외다.”하고 막았다.

“만전지계? 만전지계가 어디 있단 말인가. 온 때를 놓치면 또 어느 때가 있단 말인가.” 하고 한탄하고 응부는 하릴없이 물러 나왔다.

 

이렇게 일이 중지된 줄도 모르고 신숙주 죽일 것을 담당한 윤영손은 편상에 앉아 망건을 다시 쓰고 있는 숙주를 죽이려고 칼을 들고 들어가는 것을 역시 삼문이 눈짓하여 막아버렸다.

 

“왜? 왜?” 하고 윤영손은 성삼문이 막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였으나 이번 일에 주장되는 삼문의 말을 아니 들을 수가 없었다.

오늘 일이 모두 중지되는 것을 보고 김 질은 그저 부정 창손에게로 달려갔다. 이때에 정창손은 우찬성으로 예복을 갖추고 바로 광연전으로 들어오려 하는 때였다.

 

“오늘 운검을 폐하시고 세자께서 수가(隨駕) 아니하신 것은 천명이요, 오늘 일은 다 틀렸으니 먼저 상감께 고하는 것이 옳을까 합니다. 그러면 부귀가 유여(裕餘)할 것이 아닙니까.” 하였다.

 

정창손은 잠깐 주저하였으나 가만히 있다가 화를 당하는 것보다 왕께 이 일을 아뢰어 부귀를 누리는 것이 또한 전화위복하는 상책이라 하여 사위 김 질을 데리고 왕이 계신 궁전으로 달려갔다.

 

때에 마침 왕은 곤룡포에 익석관을 벗으시고 명나라 황제가 보낸 면류관(冕旒冠)과 황포(黃袍)를 입으시고 백옥홀을 드시고 연회장인 광연전으로 납시려 할 때였다.

 

정창손이 김 질을 데리고 황망히 들어오는 것을 보고 왕은 무슨 일인가 하여 일변의아하고 일변 놀라운 생각으로 창손과 질을 바라보신다.

 

“소신 정창손 아뢰오. 지금 성삼문의 무리가 역모를 하오니 상감께옵서 시급히 처분 계옵시오.” 하고 정창손이 가장 근심스러운 빛을 보인다.

“무엇이? 성삼문이?”하고 곁에 섰는 한명회를 돌아보신다.

 

한명회는 오래전부터 성삼문, 박팽년의 무리가 간흉하여 이심을 품을 염려가 있음을 누누이 왕께 아뢰었고 또 오늘도 세자를 본궁에 두고 운검을 물리라는 말씀을 아뢴 까닭이다.

한명회는 자기의 선견지명을 자랑하는 듯이 빙그레 웃었다.

 

“역모라 하니 그래, 어떻게 성삼문배가 역모할 줄을 정 찬성이 어떻게 알았단 말요?” 하고 왕이 창손을 노려보신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소신의 사위 김 질이가 평소에 삼문, 팽년의 무리와 추측하와 이번 역모에도 참예 하였다가 황천이 살피시와 제 마음을 돌리시와 소신께 말하옵기로 여기 데리고 왔사옵거니와 죄당만사요. 소신까지도 죽여줍시오.” 하고 눈물을 흘린다.

왕이 김 질을 흘겨보신다.

김 질은 무릎을 덜덜 떨고 이마로 마루바닥을 두드리며,

 

“소신 죄당만사요. 죽여줍시오.” 하고 느껴 운다.

“그래 분명 역모를 하였단 말이냐?” 하고 왕의 음성도 흥분으로 떨린다.

“소신이 무엇을 아오리까마는 따라다니며 삼문, 팽년의 무리가 의논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래 무어라고 하더냐? 들은 대로 말하여라.”하시는 왕의 눈에서는 불이 나려고 한다.

 

역모란 말도 불쾌하거니와 더구나 오늘과 같은 날, 조선의 만인이 기껍게 왕을 추대하는 양을 사실로 보이려 하고, 그중에도 상왕과 왕과 사이에 왕위를 주고받은 일이 가장 의합하게 된 것을 실지로 보이자는 오늘에 이러한 불쾌한 일로 파홍과 망신을 아울러 하게 된 것이 분하였다.

 

김 질은 성삼문 등이 자초로 의논하던 것과 오늘 하려던 계획이며 하려다가 중지하게 된 연유를 아뢰되 극히 자세하게 아뢰었다. 그러나 자기가 그중에서 가장 열렬한 사람 중의 하나인 것은 털끝만치도 입 밖에 내어 놓치 아니하였다.

 

“그래 너도 그 역모에 참예했더란 말이지?” 하고 왕은 당장에 김 질을 죽이기라도 할 것같이 노려보신다.

 

“전하, 김 질이 아니면 누가 이 역모를 사전에 아뢰오리이까. 김 질의 죄는 용서하시오.”

하고 한명회가 곁에서 김 질을 변호한다.

“환궁하리라.” 하고 왕은 오늘 연회도 다 잊어버린 듯이 부랴사랴 경복궁으로 돌아오시었다.

 

 

<다시 보는 단종애사(端宗哀史) 제122회>

 

명나라 사신과 백관에게까지도 왕이 갑자기 미령(靡寧) 하시어 환궁하신 줄로 말하게 하시고 권람과 한 명회와 신숙주 등 극히 심복인 몇 중신만 따르라 하시었다. 그리고는 상왕이 주인이 되고 제양 군과 정인지가 왕을 대표하여 사신과 수작이 있었으나 흥이 날 리가 없었다. 사신은 무슨 비치를 채었는지 곧 사관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환궁하신 왕은 편전(便殿)에 좌정하시고 숙위장사(宿衛壯士) 모으신 뒤에 명을 내리어 제 승지를 부르라 하시었다.

승지 구치관(具致寬), 윤자운(尹子蕓), 김 질 등이 들어온 뒤에 성삼문(成三問)이 무슨 일인가 하고 달려 들어와 추보로 옥좌 앞에 나아가,

 

“좌부승지 성삼문이요.” 하고 왕의 앞에 부목하려 할 때에 왕의 명을 받고 기다리고 있던 내금위(內禁衛) 조방림(趙邦霖)이 달려들어 우선 철여의로 삼문의 어깨를 한 개 후려갈기고 발을 번쩍 들어 삼문의 목을 낼 밟으며,

 

“이놈, 바로 아뢰어라.” 하고 외친다. 흥분을 이기지 못하는 듯하다.

삼문은 일이 탄로가 난 것을 깨달았고 오늘 왕이 갑자기 복통이 난다고 하여 어연에 참예도 아니하고 급거이 돌아온 연유도 알았다.

 

“이놈, 네가 죽을 죄를 몰라?” 하고 왕이 발을 구르신다.

조방림은 손수 삼문의 두 팔을 잡고 발로 삼문의 뒷가슴을 으스러지어라 하고 냅다 차서 붉은 오라로 잔뜩 결박을 지운다.

 

“무슨 일인지 모르거니와 이것은 과하지 아니하오?” 하고 삼문은 고개를 들어 조방림을 바라본다.

왕이 물으시는 말씀에는 대답이 없고 조방림에게 말을 붙이는 삼문의 태도는 왕의 오장을 뒤집어 놓는 듯이 더욱 미웠다.

 

“이놈 듣거라. 네 내 녹을 먹거든 무엇이 부족하여 오늘 우리 부자를 해하려고 역모를 하였다 하니 과연 그러하냐?” 하시는 왕의 말씀에 삼문은 이윽히 하늘을 우러러보다가 허허하고 웃으며,

“그런 말씀은 누가 아뢰었는지 아뢴 사람을 만나게 하여 주시오.” 하고 얼굴이 홱 풀리어 태연하게 된다.

“김 질아, 네 나와 삼문과 면질하여라.” 하시는 왕의 명을 받자와 김 질이 덜덜 떨리는 무릎을 끌고 나와 삼문의 옆에 두어 걸음 떨어지어서 선다. 삼문이 김 질을 바라보며,

“이 사람, 상감께 무슨 말씀을 아뢰었나?” 하고 빙그레 웃는다.

“자네가 그러지 아니하였나. 승정원 입직실에서 그러지 아니하였나. 그때에 근일에 혜성이 뜨고 사옹원(司饔院)에서 시루가 울었으니 반드시 무슨 일이 있으리라고 자네가 날더러 그러지 아니하였나. 내 말이 거짓말인가?”

“그래서?”

“그래서 내가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까 자네같이 요새에 상왕께옵서 창덕궁 복문을 열고 유(瑜=금성 대군)의 구가에 왕래하시게 하는 것을 보니 이것은 필시 한명회 같은 놈들이 상왕을 좁은 골목에 드시게 하고 역사를 시켜 담을 넘어 죽이게 하려는 꾀라고, 자네가 날 더러 안그랬나, 바로 승정원 대청에서.”

“그래서?” 하고 삼문은 옳다는 듯 비웃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그러고 자네가 날 더러 네 장인헌테 이 말을 하라고, 그래서 우선 윤사로(尹師路), 신숙주(申叔舟), 한명회(韓明澮)의 무리부터 없애버리고 상왕을 다시 세우면 뉘라서 좇지 아니하랴나고 그러지 아니하였나. 내 말이 다 옳지 아니한가.” 하고 김 질의 얼굴은 처음에는 붉었으나 삼문의 눈살에 전신에 피가 다 말라 버리는 듯이 점점 얼굴이 파랗게 되고 입술이 말라 경련하고 망건편자에는 수없는 식은땀이 방울방울 맺힌다.

 

“그래, 그래서 자네는 자네 장인 정창손헌테 그 말을 전하였던가.” 하고 삼문은 또 한번 웃는다.

김 질은 대답이 없다. 두 무릎이 마주친다.

“그래 그뿐인가. 더 한 말은 없나?” 하고 성삼문의 말은 아직도 부드럽다. 하도 어이없고 기막혀서 나오는 부드러움이다.

 

성삼문과 김 질의 양인 대질하는 말이 한 마디 한 마디 울려날 때마다 왕과 좌우에 입시 한 신하들의 등골에는 찬 기운, 더운 기운이 번갈아 흐른다.

김 질이 아무쪼록 자기는 빼어가면서, 또 왕이 듣기 싫어하실 말씀을 빼어가면서 지루하게 모복하려던 전말을 말하는 것을 삼문이 고개를 흔들어 막으면서,

 

“그만해라. 네 말이 다 옳지마는 좀 깐깐하다.” 하고 다시 왕을 바라보며,

“더 말할 것 있소. 상왕께옵서 춘추가 높으시어서 선위하신 것도 아니시오, 잘못하심이 있어서 하신 것도 아니시오. 나으리라든가 정인지, 신숙주, 한명회 같은 불충한 무리들에게 밀려서 선위를 하옵신 것이니까 복위를 원하는 것은 인신소당위(人臣所當爲)가 아니요?

 

다시 물을 것 있소. 그래서 오늘 나으리 부자를 죽여서 천하의 공분을 풀려고 하였더니 일이 뜻 같지 못하여서 이 꼴이 되었소. 마음대로 하시오.” 하고 왕을 상감이라고 부르지 아니하고 나으리라고 부른다.

왕은 삼문의 태연한 태도와 불공한 말에 더욱 진노하시와,

 

“이놈 네가 입으로 충효를 부르며 감히 나를 배반하니 저런 죽일 놈이 있느냐.” 하시고 무슨 말씀을 더 하시려는 것을 삼문이 막으며,

 

“배반이란 말이 되어. 내가 어찌하여 배반이란 말이요? 우리네 심사는 국인(國人)이 다 아는 것이야. 나으리 같이 남의 국가를 도적하는 사람도 있거든 삼문이 인신이 되어 그 군부가 폐함이 되심을 차마 보지 못함이지 배반이란 말이 되오? 앗으시오. 나으리가 평일에 언필칭 주공(周公)으로 자처하지 아니하였소? 어디 주공이 이런 짓 하였습니까.

 

성삼문이 한 일은 천무이일(天無二日)이요, 민무이주(民無二主)인 연고요. 앗으오, 그리 마오.” 하고 왕을 책망한다.

 

 

<다시 보는 단종애사(端宗哀史) 제123회>

 

왕이 용상에서 벌떡 일어나시어 발을 구르시고 소리를 높이시어,

“그러하거든 네 어찌하여 수선(受禪)하는 날 막지를 못하고 오늘 와서 나를 배반한단 말이냐.” 하신다.

명나라 사신이 온 날에 이 일이 일어난 것이 왕께는 더욱 한이 되는 까닭이다.

 

“힘이 못 미쳤소. 마음이 없었겠소? 내가 나서야 막지도 못할 것이요. 돌아가 죽으려 하였으나 죽기만 하면 무엇하오. 도사무익(徒死無益)이겠기로 후일을 도모하려고 지금까지 살아 있다가 이 옥이구려.” 하고 삼문은 분과 한을 못이기는 듯 한숨을 쉬고 힘없이 고개를 숙여버린다.

 

“이놈, 네가 칭신(稱臣)을 아니하고 날더러 나으리라 하니 웬 말인고? 네가 내 녹을 먹었거던 녹을 먹고 배반함이 반복이 아니고 무엇인고? 상왕을 복위한다 하나 실은 사욕을 채우려는 것이 아니냐.” 하신다. 삼문이 고개를 번쩍 들어 노한 눈으로 왕을 노려보며 소리를 가다듬어,

 

“상왕이 계시거든 나으리가 어떻게 나를 신하를 삼는단 말이요? 또 나는 나으리의 녹을 먹은 일이 없소. 내 말이 못 믿거든 내 집을 적목하여다가 계량하여 보오. 나으리께 받은 것은 고대로 쌓아 두었으니 도로 가지어 가오. 나으리가 하는 말은 다 허망무가취(虛妄無可取)야. 그 말을 누가 믿는단 말이요?” 하였다. 왕은 참다 못하여,

 

“이봐라 네 이놈을 불로 지지어라.” 하고 발을 구르시고 앉으락 일락 하신다.

무사(武士)는 청동화로에 숯불을 피우고 인두와 화 젓가락을 묻어서 달인다. 번쩍 빼어 드는 인두는 불 핀 숯과 같이 뻘겋게 달았다.

무사가 달려들어 삼문의 옷을 찢어 벗긴다. 왕은 속히 하라고 성화같이 재촉하신다.

 

왕은 일변 성삼문을 인두로 지지어가며 이번 역모에 공모자가 누구누구냐고 국문을 계속하고 일변 승지 윤자운(尹子蕓)을 창덕궁으로 보내어 성삼문 등이 상왕을 죽이려는 역모가 발각된 일과 시방 공모자를 공초 받기로 하여 국문한다는 말을 전하게 하여 가로되,

 

“성삼문이 심술이 불초하지마는 뙈기 학문이 좀 있기에 정원에 두었삽더니 근일에 있어 실수하는 것이 많사옵기로 예방 승지를 공방 승지로 고치었삽더니 그것을 마음에 분히 여기어 말을 지어 가로되 상왕이 유의 집에 왕래하시며 그윽히 불측한 일을 도모하신다 하고 또 대신들을 다 죽이려 하옵기로 시방 국문하나이다.” 하시었다.

 

이로 보건대 성삼문이 상왕을 해하려 하는 음모를 하기 때문에 괘씸하여 국문한다는 뜻이다.

이 말을 전하려 온 윤자운에게 상왕은 술을 주시었다. 혹시 상왕은 윤자운이가 전하는 왕의 말씀을 믿었는지도 모른다.

 

대개 성삼문 등은 이 일을 도모할 때에 상왕께는 아시게 하지 아니한 까닭이다. 만일 상왕이 이 일을 아신다 하면 불행히 일이 패한 뒤에 화가 상왕께 미칠 것을 두려워 하였음이다.

 

삼문의 팔과 다리에는 불같이 뻘건 인두가 번갈아 닿아 지글지글 살이 타고 기름과 피가 흘렀다. 그러나 그는 잘못하였다고 빌지도 아니하고 누구와 같이 하였다고 불지도 아니하였다. 또 불어낼 필요도 없다. 김 질이가 일러바치었으면 다 알 것이다. 그렇지마는 그렇다고 자기의 입으로 동지를 불지는 아니하였다.

 

그러나 왕은 삼문의 입으로서 잘못했다는 말과 또 누구누구와 함께 하였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그래서 뻘겋게 단 화 젓가락으로 넓적다리와 장딴지를 뚫기도 하고 두 팔과 손바닥을 뚫기도 하였다. 고기 굽는 냄새와 같은 살과 기름 타는 냄새가 대궐 마당에까지 들이고 방안에는 노란 연기가 피어오른다.

 

뻘겋게 달았던 화 젓가락과 인두는 삼문의 피와 기름으로 하여 순시간에 식어버린다.

뿌지직 뿌지직하는 소리가 그칠 때마다 삼문은,

 

“이놈들아, 쇠가 식었구나. 더 달게 하려무나.” 하고 소리를 지른다.

왕은 더욱 진노하여,

 

“이봐라, 그놈이 본시 흉악한 놈이라 불이 뜨거운 줄을 모르나보다. 네 쇠꼬챙이를 불이 다 되도록 달궈서 놈의 배꼽을 쑤시어라. 그래도 아픈 줄을 모르고 제 죄를 깨닫지 못하는 가 보리라. 그러고 저놈이 만일 기색하거든 냉수를 뿜어서 깨워 가며 지지어라.” 하신다.

이는 성삼문이 아픈 것을 못이기어 가끔 꼬빡하고 조는 때가 있기 때문이다.

 

불같이 뻘건 쇠꼬창이가 삼문의 배꼽을 지진다. 기름이 보글보글 끓고 그 기름에 불길이 일어난다. 꼬빡 졸던 삼문은 번쩍 눈을 떠서 자기가 당하는 것이 무언인 것을 보더니,

 

“성삼문의 몸뚱이가 다 타서 없어지기로 성삼문의 가슴에 박힌 일편 충성이야 탈 줄이 있으랴.” 하고 벽력같이 소리를 지른다. 이 소리에 놀래어 쇠꼬치는 무사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

삼문의 배에서 붉은 피가 한없이 흐른다.

 

이때에 신숙주가 무슨 은밀한 말씀을 아뢰려고 왕의 곁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삼문이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지른다.

 

“이놈 숙주야, 네가 나와 함께 집현전에 입직하였을 적에 영능께옵서 원손(元孫)을 안으시고 뜰에서 거니시며 무어라고 하시더냐. 내가 천추만세에 너희는 이 아이를 생각하라고 하신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거든 너는 벌써 잊어버렸단 말이냐.

 

아무리 사람을 믿지 못한다 하기로 네가 이다지 극흉 극악하게 노닐 줄은 몰랐다. 이놈아, 네가 대의를 저버렸거든 천벌이 없이 부귀를 누릴듯 싶으냐.”

 

숙주의 얼굴은 흙빛이 되어 감히 삼문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한다. 왕은 숙주를 명하여 전후(殿後)로 피하게 하신다.

 

 

<다시 보는 단종애사(端宗哀史) 제124회>

 

성삼문은 점점 기운이 없어진다. 힘써 몸을 바로 잡으려 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아니하고 눈이 감긴다. 앞으로 고꾸라질 듯 할때에 왕이 무사를 명하여 냉수를 몸에 끼얹으라 하신다.

삼문이 깜짝 정신을 차리어 옥좌에 앉으시어 숨소리가 높으신 왕을 바라보며,

 

“나으리 형벌이 너무 참혹하구려.” 하고는 그만 기절하여 쓸어진다.

왕은 기절한 삼문을 한편을 비켜 다시 피어나도록 약을 쓰라 하고 다음에 박팽년을 앞으로 불렀다.

 

왕은 이번 일에 잃어버릴 인재를 아끼거니와 그중에도 박팽년을 더욱 아끼었다. 그도 그럴 만하다. 집현전 문학지사 중에 가장 이름난 사람으로 신숙주(申叔舟), 최 항(崔恒), 이석형(李石亨), 정인지(鄭麟趾),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유성원(柳誠源), 이 개(李塏), 하위지(河緯地) 등으로

 

삼문의 문(文), 위지의 책소(策梳), 성원(誠源)의 경사(經史), 개의 이 모양으로 각각 특장이 있었지마는, 그중에도 팽년은 모든 것을 집대성(集大成)하여 경학, 문장, 필법 어느 것이나 깨나지 아니함이 없었다. 이 까닭으로 왕은 박팽년을 아끼었다.

 

그뿐 아니라 세조가 정란을 마치고 영의정이 되어 부중에 대연을 베풀렸을때 이러한 시를 지은 것이 있었다.

 

왕은 이 시가 자기의 공업을 칭송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현판에 새기어 부중에 걸게 하였다. 이 때문에도 박팽년은 아까왔다.

그래서 한명회를 시키어 팽년더러,

 

“네, 내게 항복하거나 이 일을 모르노라고만 하라. 그러면 살리리라.” 하고 귓속으로 말하게 하였다.

그러나 박팽년은 웃었다. 그러고 마루에 흐른 성삼문의 피를 가리키며,

 

“나으리, 이 피를 보시오. 이것이 충신의 피요.” 하고 무릎을 꿇어 감히 그 피를 밟지 못할 양을 보인다.

나으리란 팽년의 말에 왕의 비위는 와락 뒤집힌다.

 

“삼문이 나를 불러 나으리라 하더니 너도 나으리라 한단 말이냐. 어찌하여 네 내게 칭신을 아니한단 말이냐.” 하고 무사를 시켜 주먹으로 팽년의 입을 쥐어지르게 하신다.

그래도 팽년은 굴치 아니하고 말끝마다 왕을 불러 나으리라 하고 자기를 불러 나라고 한다.

 

“네가 이미 내게 신을 걸었고 또 내 녹을 먹었거든 이제 와서 칭신을 아니하면 무엇 한단 말이냐.” 하고 왕은 팽년을 비웃으신다.

“내가 상왕의 신하요, 나으리 신하가 아니어든 나으리 앞에 칭신할 리가 있소. 죽여도 안 될 말이요.” 하고 팽년이 입으로 피를 뿜는다.

 

“그러면 어찌하여서 지금까지는 칭신을 하였단 말이냐.” 하고 왕의 어성은 높인다.

칭신을 할 리가 있소 내가 충청 감사가 되어 나으리에게 목을 보낼때에 일찍 신이라고 한 일이 없고, 또 나으리가 주는 쌀 한 알갱이도 먹은 일이 없소.

 

내 말을 못 믿거든 제 목을 고람(考覽)이라도 하시구려. 또 나으리가 녹이라고 준 것은 딴 곳간에 꼭꼭 쌓아 두었으니까 이제는 도로 가져가시오. 박팽년이 굶어 죽을지언정 두 임금의 녹을 먹을 사람이 아니요.” 하고 엄숙하기 추상과 같다.

 

“이봐라. 그놈의 입에서 나으리란 소리가 다시 나오지 못하도록 매우 때려서 저리 밀어 놓아 다시 생각하여 보라 하여라.” 하시고 왕은 유응부(兪應孚)를 부르신다.

 

유응부는 정이품(正二品) 훈련도감(訓練都監)의 위풍이 늘름한 군복을 입고 투구 밑으로는 희뜩희뜩한 반백의 귀밑 터럭이 보인다.

왕은 유응부를 보시고,

 

“너는 나깨나 먹고 귀밑이 허연 것이 의리를 아람즉 하거든 저 무지한 놈들의 꼬임에 든단 말이야? 그래 어찌할 작정이냐?” 하시고 호유하는 어조로 물으신다.

응부는 허리도 아니 굽히고 고개도 아니 숙이고 옹녀히 왕을 바라보며,

 

“오늘 한 칼로 임자를 없애버리고 옛 임금을 회복하려다가 불행히 간사한 놈의 말을 들은 바가 되었으니 인제 하길 무엇하오. 임자는 빨리 나를 죽이오.” 하고 노한 눈을 부릅떠 왕을 흘겨본다. 왕은 응부의 눈에서 불이 번쩍함을 보고 몸에 소름이 끼침을 깨달았다.

 

“이놈, 무엇이 어찌하여? 상왕을 핑계로 사직을 도모하고서는.....” 하시고 왕은 분을 못 이기시어 주먹을 불끈 쥐시고 이를 가신다. ‘나으리’란 말도 비위가 뒤집히려는데 하물며 ‘임자’라고 함이랴. 당장 유응부의 간을 내어 씹고 싶도록 분하시었다.

 

“사직을 도적한 것은 수양 자넬세. 우리네는 무너진 강상을 바로잡으려다가 이렇게 자네 손에 붙들린 것일세. 잔말 말고 어서 죽이게 죽여.” 하고 응부가 발을 탕 구르니 대궐이 흔들린다.

 

전 내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실색한다. 지금이라도 손에 칼이 하나 있었으면 하였으나 인제는 결박된 몸이라 어찌할 수 없었다.

왕은 ‘자네’라는 응부의 말에 참다 못하여 옥좌에서 벌떡 일어나시며 입에 거품을 무시고,

 

“이 놈을... 이 대역무도한 놈을 세워 놓고 껍질을 벗기되 개 껍질 벗기듯이 하여라.” 하시고 발을 동동 구르신다.

무사들이 번쩍번쩍하는 식칼 같은 칼을 들고 달려들어 응부의 옷을 찢어 벗기고 세워 놓은 대로 목에서부터 등과 가슴과 팔로 껍질을 내려 벗긴다.

 

칼이 지나간 뒤를 따라 방울방울 피가 흘러내리고 껍데기 벗겨진 살은 씰룩씰룩 경련한다. 쩍쩍하고 껍질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래도 응부는 아프다는 소리도 내지 아니하고 몸도 꼼짝 아니하고 꼿꼿이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