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이야기

조선잡사(20)/받은 글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143회

 

‘비린’으로 유명한 이가 한나라 창업공신이자 지독한 말더듬이라는 주창(周昌)을 들 수 있다.

 

주창은 한나라 고조 유방의 최측근이었다.

하루는 유방이 “나는 어떤 군주냐”고 묻자 주창은 “폐하는 걸주와 같은 폭군입니다(桀紂之主)”라 외쳤다.

 

유방이 정부인인 여후의 맏아들을 제치고 애첩 척희의 아들을 태자로 삼겠다는 유방을 ‘폭군’이라 소리친 것이다.

 

말을 심하게 더듬었던 주창은 황제 면전에서 “기, 기, 기어코 그 명을 받을 수 없습니다(期期期知其不可)”라 고함쳤다.

 

뭐니뭐니해도 가장 지독한 직언은 아마도 시간(尸諫)일 것이다.

 

시체(尸)가 되어서도 임금에게 바른 말을 한다(諫)는 뜻이니까 말이다.

 

시간의 주인공은 바로 춘추시대 위나라 대부였던 사추였다.

 

당시 위나라에는 거백옥이라는 충신이 있었고, 미자하라는 간신이 있었다.

 

위나라 군주 영공은 미자하를 무척 총애했다.

사추는 생전에 그토록 “거백옥을 등용하고 미자하를 내치라”고 임금에게 간했지만 소용없었다.

 

훗날 지병으로 죽음을 앞둔 사추가 아들에게 유언을 남긴다.

 

조선시대 임금들은 가뭄이나 홍수, 지진과 같은 재변이 일어나면 반드시 직언을 청하는 ‘구언교서’를 내렸다.

 

임금들은 교서에서 ‘모든 재변은 못난 임금 탓이며, 불쌍한 백성을 생각하면 죽고싶지만 그럴 수 없다“면서

 

”어떤 말이라도 좋으니 직언을 해달라“고 자세를 낮췄다.

 

“내가 결국 임금을 바로잡지 못했구나. 죽어서도 예(禮)를 이룰 수 없다. 내가 죽으면 시체를 창 아래에 두어라.”

 

사추가 죽자 조문하러 온 위령공이 자초지종을 듣자 크게 깨달았다.

 

위령공은 마침내 거백옥을 등용하고 미자하를 내쳤다.

 

사추는 시체가 되어서도 임금에게 직언을 했고. 마침내 그 뜻을 이룬 것이다.

 

이보다 지독한 간언이 어디 있겠는가.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44회

 

직언의 끝판왕 열전~~

 

직언의 끝판왕으로 즐겨 인용되는 역사인물 가운데 주운(朱雲)과 신비(辛毗) 두 사람이 있다.

 

주운은 한나라 성제(재위 기원전 32~7) 때의 인물이다.

두려움없는 간언으로 이름을 떨쳤다.

 

당시 한나라 성제가 스승으로 존경하던 인물이 있었다. 안창후(작호) 장우였다.

 

주운은 그 장우가 황제 앞에서 바른 말을 하지 못한채 녹만 축내고 있다고 여겼다.

주운은 대신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목숨을 건 직언을 서슴치 않는다.

 

 

주운 왈

“폐하. 저에게 칼 한자루를 주소서. 무능한 자의 목을 베어 본보기로 만들까 합니다.”

 

한성제 답하길

“간신배라니 누구를 가리키는가.”

 

주운 왈

“안창후(장우의 작호)입니다.”

 

자신이 신임하는 정승을 목베겠다는 말이 아닌가.

성제는 “저 자를 당장 끌어내라”고 소리쳤다.

 

호위병들이 주운을 끌어내려 달려들었다.

 

하지만 주운은 끌려나가지 않으려고 전각 난간을 붙들고 매달렸다.

그러면서 소리쳤다.

 

“안창후 장우의 목을 쳐야 합니다. 폐하!”

 

옥신각신하는 사이 난간이 뚝 부러졌다.

사건이 마무리되고 부러진 난간을 교체하려 했을 때 황제가 명을 내렸다.

 

“저 부러진 난간을 바꾸지 말고 그냥 맞춰 놔라. 목숨을 걸고 직언한 신하의 충성을 기려야 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꺾을 절(折) 난간 함(檻)’의 ‘절함’의 고사이다.

<한서. ‘주운전’>

 

 

신비(辛毗)는 삼국시대 위나라 문제(재위 220~226) 때의 인물이다. 문제(조비)가 기주(하북성) 지방의 가옥 10만호를 하남으로 옮기려 했다.

 

대신들이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다”고 반대했다.

 

하지만 문제는 “반대하는 자는 죽여버리겠다”고 입단속을 시켰다.

 

이때 신비만이 나서 조목조목 따졌다.

 

 

이것이 그 유명한 ‘꺾을 절(折) 난간 함(檻)’의 ‘절함’의 고사이다.

<한서. ‘주운전’>

 

신비(辛毗)는 삼국시대 위나라 문제(재위 220~226) 때의 인물이다.

문제(조비)가 기주(하북성) 지방의 가옥 10만호를 하남으로 옮기려 했다.

 

대신들이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다”고 반대했다. 하지만 문제는 “반대하는 자는 죽여버리겠다”고 입단속을 시켰다. 이때 신비만이 나서 조목조목 따졌다.

 

 

 

“폐하가 신하들에게 벼슬을 내린 까닭이 무엇입니까. 저희가 사사로운 일을 아뢰는 것입니까. 다 나라를 염려하는 것입니다.

어찌 노여워만 하실 수 있읍니까.”

 

황제는 신비의 간언에 한마디 대꾸도 않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자 신비는 황제의 옷자락을 끌어 당겼다.

황제는 옷을 떨친채 신비를 뿌리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황제의 옷소매가 떨어져 나갔다. 잠시 후 황제가 나와 신비에게 물었다.

 

“왜 짐의 옷을 잡아 당겼느냐.”

 

“폐하는 민심을 잃고 백성은 먹고 살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황제는 떨어진 용포 자락의 반만 옮겼다. 이것이 바로 ‘견거(牽거·옷자락을 당겼다)’의 고사이다.

<삼국지. ‘위서’>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145회

 

직언을 구하지 않는 자는 폭군 ~~

 

다른 사람이 대놓고 나에게 싫은 말을 하면 기분 좋을 리 없다.

더구나 지존이라는 임금이나 황제가 쓴소리를 참고 듣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현군 혹은 성군이라면 쓴소리 듣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왕조시대 군주들이 즐겨 인용하는 이가 바로 한나라 문제(기원전 180~157)이다.

 

그는 과거의 한 과목으로 직언과 극간을 채택해서 바른 말을 잘하는 선비를 관리로 선발했다.

 

자그만치 2100년 전의 군주인데, 이 얼마나 선진적인 지도자인가.

 

 

 

이후 왕조시대 임금들은 줄기차게 직언을 구했다.

직언을 구하지 않는 자는 폭군이라 폄훼됐다.

 

북제-수-당나라 등 3왕조에서 벼슬을 한 배구(裴矩)를 보자.

 

북제가 망하자 수나라로 간 배구는 양제에게 아첨 해서 신임을 받고 우문술(宇文述·?~616) 등 5명과 국정을 농단했다. 그는 618년 우문술의 반란이 실패한 뒤 당나라에 투항했다.

 

그런데 당나라에서의 배구는 180도 달랐다.

배구는 당 태종에게 “백성을 덕으로 인도하라”는 등 충언을 서슴치 않았다.

그러자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람이 한결같아야지 왕조와 임금에 따라 달라질 수 있냐는 것이다.

 

아무리 어리석거나 포악한 군주라도 죽을 각오로 바른 말을 해야 충신이 아니냐는 것이다. 하지만

<당서> ‘배구열전’을 쓴 역사가는 흥미로운 평가를 가한다.

 

“군주가 직언을 싫어하면 충성이 아첨으로 변한다. 군주가 직언을 즐거워하면 아첨이 충성으로 변하는 것이다. 임금은 형체이고 신하는 그림자다.

 

따라서 형체가 움직이면 그림자가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모든 허물은 평소 직언을 좋아하지 않은 수 양제 탓이지, 배구의 탓은 아니라는 것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146회

 

그랬으니 옛 군주들은 미치도록 직언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명군, 현군, 성군 소리를 역사서에 남겨야 했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중국 진(晉)나라 황제는 새해 정월 초하루가 되면 대궐 안의 뜰에 백호준(白虎尊·뚜껑을 백호로 장식한 술그릇)을 설치해놓았다. 새해 첫 조회 때 직언을 서슴치않는 대신에게 술 한 잔 하사했다.

 

직언과 관련해서는 당태종의 일화가 자주 인용된다.

 

그만한 성군에는 그만한 신하가 있다는 소리다.

하루는 당 태종이 불같이 화를 내면서 조회를 일찍 파했다.

 

“내 저 자를 죽일거야.”

 

재상 위징(魏徵·580~643)이 심한 말로 황제를 욕보였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당태종의 부인 문덕황후가 오히려 남편에게 “축하드립니다”라 하례했다.

 

당 태종이 그 이유를 묻자 문덕황후는 이렇게 말했다.

“그거 군주가 명철하고 신하가 정직하다는 뜻이 아닙니까.

 

그러니 축하드려야죠.”

 

태종은 그제서야 깨닫고 더불어 기뻐했다.

<정관정요>

 

이 위징이라는 인물도 대단한 사람이었다.

 

위징은 황제가 매를 좋아해서 늘 어깨 위에 올려놓고 즐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나깨나 백성만을 생각해야 할 황제가 매나 키우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던 차였다.

 

당 태종도 대쪽같은 위징을 늘 의식했다.

어느 날 매를 평소와 다름없이 매를 어깨 위에 올려놓고 즐기던 태종은 위징이 오는 것을 보고는 그 매를 품 속에 숨겼다.

 

그 모습을 본 위징은 일부러 오랫동안 나가지 않고 당 태종 황제와 국사를 논했다.

황제는 애가 닳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결국 품속에서 숨을 쉬지 못했던 매는 결국 죽고 말았다.

<자치통감. ‘당기·唐紀’>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147회

 

세종도 직언을 싫어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우리 역사 속 임금과 신하들 가운데도 대단한 분들이 많았다.

 

예컨대 조선 역사상 가장 임금노릇을 하기 싫어했던 조선 2대 정종 임금조차

“경연 때마다 간관 1명은 반드시 입시해서 과인의 잘못을 직언으로 고하라”는 명을 내릴 정도였다.(1400년)

 

서슬퍼런 태종 때도 마찬가지였다.

1403년(태종 3년) 태종이 사냥에 정신을 팔리자 대간들은 벌떼처럼 일어났다.

 

“하늘의 경계를 조심하고서.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늘 두려워하고 삼가소서. 백성을 두려워 하소서.”

 

그것은 역사상 최고의 성군이라는 세종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제 아무리 성군이었다지만 세종 임금도 직언은 귀에 거슬리기 마련이었다.

 

1440년(세종 22년) 고약해(高若海)라는 인물이 아주 무례한 어조로 세종 임금에게 직언을 쏟아냈다.

그러자 세종은 해도해도 너무한다면서

“저 무례한 자를 탄핵하도록 하라”고 사헌부에 특명을 내렸다.

 

하지만 사간원 우헌납 김길통이 득달같이 나서 ‘아니되옵니다’를 외쳤다.

 

“아니 신하가 가볍게 진언하는 것이 아닌데 만약 임금이 고약해를 죄로 다스린다면 어느 누가 감히 임금에게 바른 말을 하겠습니까.

 

고약해는 생각한 바를 반드시 진술했습니다.

게다가 전하께서 일찍이 충직(忠直)하다고 허락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좀 무례했더라도 죄를 묻지 마시고 언로를 넓히시옵소서.”

 

이에 세종은 “너희 말이 옳지만 과인은 직언을 미워한 게 아니라 그 무례함을 미워한 것일뿐”이라고 변명했다.

 

1440년(세종 22년) 사간원이 세종 임금을 맹비난한다.

임금이 도성 안의 사찰인 흥천사를 보수한 뒤 이를 경축하는 경찬회를 열려하자 벌떼처럼 일어난 것이다. 유교국가에서 웬 사찰중건이며, 무슨 경찬회냐는 것이었다.

 

“불씨(석가모니)를 존중하자는 겁니까. 게다가 여러 해 흉년이 들었고 농사도 여의치 않은데 어찌 홀로 무익한 일에 재물을 쓰고 뭘 축하한다는 겁니까. 급히 명령을 거두소서.”

 

세종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절이 중창되었으니 이를 축하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면서

“그리고 당장 하자는 한 것도 아니고 하중에 하자는 것인데 뭐 그리 빡빡하게 구냐”고 맞섰다.

 

그렇지만 사간원은 “나중에 하든, 지금 하든 경찬회는 절대 안된다”면서 “전하의 성덕에 누를 끼칠 것”이라 경고까지 했을 정도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148회

 

왕조시대 군주들은 기상이변이나 대형사고 등 갖가지 재변이 닥쳤을 때마다 이른바 ‘구언(救言·임금의 잘잘못에 비판의 말을 구하는 일)’을 내렸다.

 

그런데 구언, 즉 직언을 구하는 임금들의 태도도 음미해볼만 하다.

즉 재변의 시기에 임금이 내리는 교지의 형식이 일정하다는 것이다.

 

어김없이 ‘나같은 소자(小子)가 외람되게 나라를 맡아’ ‘보잘 것 없는 내가 즉위한 이래’… 등등처럼 한결같이 겸손한 말로 시작된다.

 

그러면서 ‘모두 임금의 책임이며,

임금을 잘못 만난 백성을 생각하면 죽고싶은 심정’이라 한다.

 

그런 뒤 ‘모두 임금의 부덕에서 비롯된 소치이니 임금의 허물을 낱낱이 지적하고 앞으로의 대책을 마련해서 가리지 말고 올리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무리 심한 직언이라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마무리 짓는다.

 

이 모두가 재난에 맞서는 왕조시대 임금의 자세이다.

 

예컨대 1656년(효종 7년) 서남부 지방에 기상이변이 일어나자 효종이 내린 ‘직언을 구하는 교서’내용이다

 

“내가 나라를 다스림이 보잘것 없어 기상이변이 발생했다.

두려움과 걱정에 몸둘 바를 모르겠다. 죽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다. 직언을 구해서 이 어리석은 자질을 변화시켜라.”

 

 

 

기상이변이 일어난 것은 부덕한 임금 때문이며,

그래서 죽고싶은 심정이란다. 임금의 진심이 묻어나오는 <실록> 기사가 아닐 수 없다.

 

효종의 뒤를 이은 현종도 마찬가지였다.

1660년(현종 1년) 기상이변으로 가뭄과 황충, 그리고 그에 따른 기근이 닥쳤다. 이삭이 나올 때인데 20일이 지나도록 비 한방울 내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현종은 “이 모든 허물이 나에게 있는 것이지 고단하게 사는 백성들이 무슨 죄냐”고 한탄했다.

 

3년 뒤인 1663년(현종 4년)에도 가뭄이 계속되자 현종은 “차라리 금방 죽어버리고 싶은 심정”이라고 괴로움을 토해냈다.

 

백성이 모조리 죽게 생겼으니 국가가 누구를 의지하겠느냐는 것이다.

 

1690년(숙종 16년) 가뭄이 극심하자 숙종 역시 ‘구언’을 내린다.

 

“하찮은 소자(小子)가 외람되게 어려운 사업을 받아…덕이 모자라 홍수·가뭄 등의 변이 거르는 날이 없구나.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가엾은 우리 백성은 장차 죽음이 가까왔다. 차라리 죽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구나. 직언(直言)을 구한다. 임금의 부덕과 잘잘못을 숨김없이 아뢰라. 어떤 말이라도 죄주지 않을 것이다. 재변은 내가 덕이 없기 때문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149회

 

1723년(경종 3년) 가뭄이 극심하자 경종이 내린 교지도 숙종의 것과 판박이다

 

“아! 보잘것 없는 내가 즉위한 이래 비상(非常)한 재앙과 홍수·가뭄·바람·우박 등의 참혹함이 거의 달마다 곡식을 해쳤고…. 하늘이 두려움을 주고 잘못을 고쳐 주려는 것이다.

임금이 반성해야 한다. 직언을 구하라. 광망(狂妄)한 직언이라도 용납할 것이다. 지금 내린 재이(災異)는 모두 무덕(無德)한 나의 소치이니….”

 

1725년(영조 1년) 영조 임금이 구언을 내릴 때도 마찬가지다.

 

“아!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으로써 하늘을 삼는다. 하지만 백성은 곤궁하고 역질마저 겹쳤으며, 탐관오리가 죽은 사람에게까지 군포와 병역을 부과한다. 슬프다. 게다가 붕당을 만들어 아부하는 풍습이 요즘보다 심할 때가 없구나. 누구의 허물인가. 나의 허물이다.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 밥맛도 없다.”

그렇게까지 임금이 ‘내가 죽일 X이고, 모든 게 내 책임’이라고 전제했음에도 신하들의 직언은 폐부를 찌른다.

 

예컨대 1626년(인조 4년) 사헌부 대사헌 정경세 등이 인조 임금을 다그친다.

 

“(인조)반정 초기엔 백성을 지성으로 아끼셨는데…. 이젠 방백(관찰사)와 수령들이 백성들을 죽여도 머리카락 까닥하지 않고 가만 앉아계십니다.

백성 사랑하는 마음이 처음만 못하다는 얘깁니다. 그리고 직언을 포용하는 아량도 처음만 못합니다. 직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역린했다는 노여움만 삽니다. 이렇게 하셔서는 안됩니다. 통렬히 반성하시고….”

 

인조는 그저 “모두 나의 허물이 쌓인 탓”이라고 인정했다. 그렇지만 <인조실록>의 기자는 그조차도 부족하다고 꼬집고 있다.

 

“이 상소문은 임금을 조용하고 간곡하게 이끄는 내용이었다. 그렇지만 상(임금)은 이 상소문을 진심으로 받아들였다는 증거가 없다. 애석한 일이다.”

 

1635년(인조 13년) 이조참의 유백증은 ‘임금이 획기적으로 분발하라’고 주문한다.

 

“인심이 원망하여 이반하고 백성이 극도의 고생을 겪는 것은 전하가 안민에 뜻을 두지 않아서입니다.

또 언로는 국가의 혈맥입니다.

혈맥이 통하지 않고서 몸이 제대로 보존되겠습니까. 임금이 의심으로 아랫사람들을 다스리는 것을 술법으로 삼지 마소서.”

 

‘내 잘못인데 당신이 왜 물러나’

 

1650년(효종 1년) 영의정 이경여가 막 즉위한 임금에게 올린 상소문은 어떤가.

시중의 여론을 들먹거리고 있다.

 

“전하께서 초심을 잃었다는 것이 제가 들은 여론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위란의 지경에 빠졌다는 겁니다.

아! 천명은 믿기 어렵고, 인심은 쉽게 떠납니다.

임금의 도량이 좁고 사심을 이기지 못해서 그런겁니다.”

그러면서 이경여는 “제가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경여의 상소도 상소지만, 효종의 반응은 더 음미할만 하다.

 

“부끄럽고 두려움이 교차한다. 허물을 반성해보니 망연자실할 뿐이다. 뭐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말 한마디 글자 하나인들 감히 소홀히 하겠는가. 내가 띠에 써놓고 언제나 마음을 가다듬는 자료로 삼겠다.”

 

 

 

그러면서 효종은 “그런데 경(이경여)이 왜 물러나려고 하느냐”면서 “모든 것은 전적으로 임금이 하늘에 죄를 얻어서 내려진 재앙”이라 했다.

 

“날이 가물고 황충(메뚜기)이 발생한 것은 내가 어리석어 하늘에 죄를 얻었기 때문이다. 내 책임인데 경이 왜 사직하려는가.”

 

효종의 마지막 말이 백미다.

 

“나와 같이 일할 만한 자격이 없다고 하여 날 버리지 마라.

날마다 숨김없이 직언을 올려라.

그래서 나로 하여금 선(善)한 정치를 하게 하고, 허물을 고칠 수 있게 하라.”

 

임금 앞에서 꼿꼿이 서서 잘잘못을 따진 뒤 물러나려는 신하에게 “모든 것은 내 잘못”이라 쿨하게 인정하고

“내 잘못인데 당신이 왜 그만 두냐”는 임금의 태도를 보라.

 

조선~~

대단한 임금에, 대단한 신하가 아닌가.!!!!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150회

 

“1784년(정조 8년) 임금이 직언을 구했다.

‘그대들도 유의하라. 그대들은 미리 유의하여 내 이 말이 또 실속 없는 데로 돌아가게 하지 말라.’”

 

그러면서 정조가 한마디 덧붙인다.

 

“<서경>을 보니 신하가 임금을 바로잡지 못하면 묵형(墨刑)에 처한다고 했다. 너희들은 힘쓰라.”

 

임금이 직언을 널리 구하면서 “직언은 대신들의 의무이며, 직언하지 못하는 자는 죄를 받는다”고 독려한 것이다.

 

또 있다. 재변을 너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가르침이다.

 

1798년(정조 22년) 좌의정 채제공이 무지개가 해를 관통한 일 때문에 임금에게 ‘선정을 베풀라’고 청한다.

 

채제공의 언급이 의미심장하다.

 

“오히려 재변이 없는 나라는 위태로운 법입니다. 재변이 없다는 것은 하늘이 그 나라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재변이 없다는 것은 속된 말로 하늘조차 포기한 나라라는 뜻이라는 거다.

왜냐면 싹수 있는 나라라야 하늘이 때때로 경계하라는 뜻으로 재변을 내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임금의 공구수성을 권해 임금 스스로 깨닫게 만든다는 것이다.

 

조선~~

대단한 임금에, 대단한 신하가 아닌가.

 

사관(역사기록) 민인생은 태종 앞에서 사관 위에 하늘이 있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역사학자들은 ‘사관 위엔 하늘이 있다’며 직필을 실천하고자 했던 선배들의 자랑스런 전통을 계승해야 한다고 했다

 

학자들이 직접 언급한 바로 그 사관 선배들은 바로 조선조 태종 시대의 사관 ‘민인생(閔麟生)’과 ‘홍여강(洪汝剛)’이었다.

 

조선시대 전임사관의 직위는 기껏해야 7~9품의 하위직이었다.

 

두 사람은 지금 이 순간도 네이버와 같은 인터넷 포탈 사이트의 ‘지식백과’나 인물검색에도 나오지 않는 사관들이다.

 

태종이 누구인가.

세자이자 이복동생인 그 어린 방석과 방번 등을 죽이고(1차 왕자의 난), 형(방간)까지 쫓는 등(2차 왕자의 난) 피바람을 일으키며 왕위에 오른 무시무시한 임금이 아닌가.

 

오죽했으면 형님이자 임금이었던 정종(방과)마저 동생(이방원)만 만나면 부들부들 떨었다지 않은가. 그 모습을 보다못한 부인 정안왕후가 절규했다.

 

“전하께서는 동생의 눈도 마주치지 못하십니까. 하루빨리 양위하시어 마음 편히 사세요.”

<연려실기술. ‘정종조고사본말’>

 

반강제로 형의 양위를 받아내고 즉위한 태종에게 감히 어느 누가 잡소리를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사관 민인생이 나섰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151회

 

태종이 즉위한 지 4개월이 안된 1401년(태종 1년) 3월 18일이었다.

태종이 조준·이거이·하륜 등 고관대작과 10여 명의 무신들을 거느리고 하루종일 매사냥을 한 뒤 날이 저물고 나서야 돌아왔다.

 

그런데 온종일 태종의 눈에 거슬리는 자가 있었다.

임금의 곁을 끝까지 찰싹 달라붙어 ‘얼굴을 가린채’ 뭔가를 끄적대던 민인생이었다.

 

태종이 찰거머리처럼 따라붙는 저 자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자 민인생이 대답했다.

 

“신은 사관인데 감히 직사(職事·직무)를 소홀히 할 수 없어 온 것입니다.”

 

심사가 뒤틀린 태종이 한마디 하려는데, 총제 이숙번이 막아섰다.

 

“전하. 사관의 직책은 매우 중하옵니다. 원컨대 더는 묻지 말아주소서.”

 

‘사관은 제발 들어오지 마!’

 

윤 3월이 지나고 맞이한 4월 하고도 29일 이번에는 사관 홍여강이 나섰다.

홍여강 역시 대단한 사관이었다.

 

<태종실록> 1401년 2월 20일조를 보면 흥미로운 대목이 등장한다.

 

“사관 홍여강이 공신들의 잔치가 열리던 연청(宴廳)에 들어가려다 공신 심귀령에게 매를 맞고 쫓겨났다”는 기록이다.

 

심귀령은 젊었을 때부터 태종 이방원을 따라다닌 호위무사로 1·2차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워 좌명공신에 오른 인물이었다. 홍여강은 바로 기고만장한 공신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기록하려다가 안하무인이었을 심귀령에게 맞았다는 것이다.

 

물론 홍여강이 속한 춘추관이 심귀령을 비난하는 문서를 보냈고, 사헌부가 탄핵했지만 유야무야 넘어갔다.

 

그렇게 봉변을 당한 홍여강이었지만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4월25일,

이번에는 임금의 일상을 기록하겠다고 편전(보평전)에 들어서려 했다.

 

그러나 태종은 홍여강의 입장을 허락하지 않았다.

편전의 뜰 아래까지 진입했다가 내시들이 홍여강의 팔짱을 끼어 부축한채 내보냈다.

 

태종의 입장불허 방침은 분명했다.

 

“무일전(無逸殿)이라면 물론 사관이 좌우에 있어야 해. 하지만 이곳(편전·보평전)은 내가 편안히 쉬는 곳이야. 승지(承旨)들이 모두 사관의 직책을 겸했잖아. 그러니 사관이 반드시 들어올 것이 없어.”

<태종실록>

 

이 무슨 말인가. 태종은 즉위하자 마자 ‘무일전’과 ‘편전(보평전)’을 따로 조성했다.

 

태종은 정전이 너무 좁다고 해서 좀더 넓게 고쳐 짓고 무일전(無逸殿)이라 이름 붙였다.

 

그러면서 정사를 보는 곳을 무일전, 쉬는 곳을 편전(보평전)으로 구분지었다. 그러니 쉬는 곳까지 사관이 올 필요가 있겠는가. 게다가 사관직을 겸한 승지들이 승정원일기를 기록하는데, 전임 사관까지 와서 귀찮게 할 필요가 있느냐. 뭐 이것이 태종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정사를 어떻게 무 자르듯 전각에 따라 구분지어 펼칠 수 있단 말인가.

임금이 편전에서 쉬다가도 대신들을 불러 정사를 논할 수도 있고, 그곳에서 경연장(경전을 논하고 논쟁하는 곳)을 베풀 수도 있지 않은가.

 

게다가 일기 형식인 승정원일기와 임금·신하의 잘잘못을 엄정하게 평가하는 전임 사관들의 역할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152회

 

 

사관 위에 하늘이 있습니다.

 

홍여강은 결국 쫓겨 나갔지만 이번에는 민인생이 나섰다.

사관들의 저항이 시작된 것이다.

민인생이 다시 편전 문을 들어서려 하자 도승지(비서실장) 박석명이 제지했다.

 

“이봐. 홍여강도 왔다가 ‘편전에는 들어오지 말라’는

주상의 명을 듣고 돌아갔어.”

 

민인생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박석명에게

“전지(傳旨·직접 명령)를 들은 바 없다”면서 편전의 뜰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태종이 민인생을 보았다.

 

 

태종왈

“사관은 어찌 들어왔는가.”

 

민인생이 답하길

“전하께서 사관이 좌우에 입시하라고 윤허하셨습니다.

그래서 들어왔습니다.” 라고 했다.

 

 

태종 왈

“편전에는 들어오지 마라.”

 

민인생이 답하길

“편전이라 해도 대신들이 정사를 아뢰고, 경연이 열리는 곳인데 사관이 들어오지 않으면 누가 제대로 기록한단 말입니까.”

 

 

태종왈

 

“(웃으며)편전은 내가 편히 쉬는 곳이야. 들어오지 않는 것이 옳아. 그리고 사필은 곧게 써야 하는 것인데 비록 편전 밖에 있더라도 어찌 내 말을 듣지 못하겠는가.”

 

이때 민인생이 결연한 한마디를 던진다.

 

“신이 만일 곧게 쓰지 않으면, 사관의 위에 하늘이 있습니다.

(臣如不直 上有皇天)”

 

임금이 밝으면 신하도 곧아집니다 ~~

 

 

 

또 그로부터 며칠 뒤인 5월 8일 태종은 경연을 베풀어 정사를 논한 뒤 거나한 술자리를 마련했다.

기분좋은 자리였다.

그런데 이 때 민인생이 사관의 편전 입시문제를 거론했다.

 

“전하의 오늘 강론은 정말 정교했사옵니다. 원컨대 편전에 앉아 정사를 들으실 때도 사관이 입시하여 그 아름다운 말(嘉言)을 기록하게 하소서.”

 

이첨·박신·조용·김과 등의 신하들이 민인생의 주장에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경연에 사관이 입시하는 것은 가하지만 정사를 듣는 때에 들어오는 것은 좀…. 저희도 고려조 우·창왕 시절 사관이었는데 두렵고 위축되어 감히 임금을 뵙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