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153회
민인생은 이들의 주장을 일축했다.
“임금이 밝으면 신하가 곧은 것입니다. 어찌 감히 전조(고려조)를 오늘에 비교하려 하십니까.(主明則臣直 豈敢以前朝比今日乎)”
술자리 분위기를 깨뜨리는 민인생의 일갈에
‘좀 더 논의해보고 결정하자’고 미뤘다.
태종은 결국 매달 6번씩 관원들이 모여 임금에게 정사를 아뢰는 6아일(衙日)에 한해 사관의 입시를 허락했다.
나름대로 절충안을 마련한 것이다.
그런데 1401년 7월 8일, 편전에 앉아있던 태종은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들었다. 과연 누군가 문밖에서 엿보고 있었다.
깜짝 놀란 태종이
“어떤 자가 편전을 엿보고 있는 거냐”고 물었다.
내관들이 달려나가 보니 사관 민인생이었다.
들어가지 못하게 하니까 몰래 훔쳐보며 임금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려 한 것이다.
태종은 불같이 화를 내며 도승지 박석명에게 특명을 내렸다.
“이제부터 사관은 매일같이 입궐하지 않도록 하라.”
결국 사관 민인생은 편전의 휘장까지 걷고 엿보는 등 예절에서 벗어났다는 죄목으로 유배형의 처벌을 받았다.
아! 지긋지긋한 저 자들!
그러나 민인생·홍여강에 이어 사관들의 저항은 끊이지 않았다.
9년 뒤인 1410년(태종 10년) 4월28일 사관 최사유가 민인생·홍여강처럼 편전의 뜰에 들어왔다가 쫓겨나기도 했다.
이 때 태종은 노발대발하면서
“지금부터 정전(正殿)에서 열리는 조계(朝啓·군신들이 모이는 정식회의)를 제외하고
경연청이나 광연루(廣延樓) 같은 곳에는 절대 사관을 들이지 마라”는 엄명을 내린다.
하지만 ‘사관 위에 하늘이 있다’는 사관들의 끈질긴 항거에 태종은 항복하고 만다.
2년 뒤인 1412년(태종 12년) 7월29일 <태종실록>에 태종과 지신사 김여지의 문답내용이 나온다.
태종왈
“사관이 다시 편전이 들어온 것인 언제부터였지?”
지신사 김여지가 답하길
“경인년(1410년)이옵니다.
사간원이 주청을 올려서 그때부터 들어오게 됐습니다.”
태종
“….”
이 대목에서 <태종실록>은 김여지의 심리상태를 흥미롭게 기록해놓았다.
“김여지는 왜 태종이 갑자기 뜬금없는 질문을 했으며, 또 대꾸 조차 하지 않았는지 매우 의심하며 두려워 했다. 임금이 사관을 또 들이지 못하게 할까봐 그런 것이다.”
태종은 ‘최사유 사건’ 이후 사관의 편전 입시를 사실상 전면금지했지만 사간원의 맹렬한 반대로 철회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사관들이 뭔가 또 임금의 심기를 건드리는 꼬투리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김여지를 불러 ‘사관의 입시를 다시 금하라’는 명을 내릴까 하다가 겨우 참았음을 <태종실록>은 암시하고 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154회
당대 사관들의 지독한 직필정신을 일러주는 단적인 예가 하나 있다.
당시 태종은 시도 때도 없시 사냥을 나갔는데 이것은 나라의 안녕에는 큰일이었다.
대신들은
“임금이라 함은 옥좌에서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두려워하면서 정사를 펼쳐야 하는데 사냥을 일삼는다”고 아우성쳤다.
사냥을 나갔다가 변을 당하기라도 한다면 이것은 감당할 수 없는 변고였다.
그런데 1404년(태종 4년) 임금이 반대를 무릅쓰고 노루사냥에 나섰다가 그만 말에서 떨어졌다.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그런데 깜짝 놀라 훌훌 털고 일어난 태종이 한다는 말이 걸작이다.
“이 일을 사관이 모르게 하라.(勿令史官知之)”
이 때의 사관은 필시 그 지긋지긋한 민인생이었으리라.
그런데 결과는 어찌 되었는가.
사관은 태종 임금이 ‘이 일을 모르게 하라’는 말까지 기록해서 결국 <태종실록>에 남긴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후세 사람들이 읽고 있는 것이고….
결국 당대의 사관들은 천하의 지존인 임금이 쓰지 말라는 것 까지,
즉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이 ‘오프더레코드’를 걸어놓은 것까지 쓴 것이다.
그렇다면 사관 민인생·홍여강·최사유는 왜 그토록 임금의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을까.
자그만치 1500여 년 전 진흥왕(재위 540~575)에게 신라의 역사서 국사(國史)의 편찬을 권하던 이찬 이사부의 말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국사는 군신의 선악을 기록하여 후대의 엄정한 평가를 받는 것입니다. 국사가 편찬되지 않으면 후손들이 무엇을 보고 배우겠습니까.”
<삼국사기>
이사부는 ‘역사는 백성의 잘잘못이 아니라 군신의 잘잘못을 기록하고,
그것으로 후대의 평가를 받는 것’이라 강조했다.
이 대목이 매우 중요하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155회
역사란 군주가 백성을 가르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군주(대신)의 잘잘못을 가려 후대의 평가를 받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강조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공자가 <춘추>를 쓰며 견지했던 춘추필법이다.
공자는 ‘훗날 군주가 될 사람들의 참고용’으로 <춘추>를 썼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사기. ‘공자세가’>
그랬으니 맹자는 공자가 <춘추>를 쓰자 ‘난신적자들이 두려워했다’고 한 것이다.
위정자가 백성을 가르치려고 역사를 기록했다는 대목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그러니 위정자가 감히 역사를 백성에게 가르치려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난신적자라 할 수 있다.
“역사를 쓰는 직책이란 한 시대의 사실을 서술하여 만대의 후세에 전하는 것입니다. 그 책임이 중대합니다. 반드시 관료 중에 가장 현명하면서도 삼장(三長)의 재주를 갖춘 사람을 선임해야 시비가 공정하게 되어 사람들이 이의를 달지 못합니다.”
1548년(명종 3년) 5월 29일 지중추부사 정사룡이 실록청 당상의 직책에서 사의를 표명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명종이 <인종실록> 편찬작업의 책임자로 정사룡을 임명했지만 스스로 적임자가 아니라면서 사직을 청한 것이다. 정사룡의 사퇴의 변을 읽어보자.
“욕먹는 자가 역사를 쓸 수 없습니다.”
“신은 40년 가량 공직에 있으면서 걸핏하면 논박을 당했습니다. 한번 논박을 당하면 10일은 보통이고 한 달이나 계속 됐습니다. 이 모두가 일록(日錄·사초 같은 매일매일의 기록)에 모두 기록돼있습니다.”
그러면서 “뻔뻔하게 녹이나 축내면서 남의 비방을 듣는 처지라면 죄를 얻는 것일 뿐 아니라 후세까지 그 견책을 남길 것”이라 사퇴의 변을 밝혔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56회
명종은 “여러 해 동안 공직에 있으면서 탄핵을 받는 경우가 왜 없겠느냐”고 사표를 반려했다.
하지만 정사룡은 사퇴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4번이나 사직상소를 올린 끝에 결국 사표가 수리됐다. 정사룡의 상소건을 기록한 <명종실록> 사관의 평가 역시 혹독했다.
“정사룡은 글재주는 있었으나 본래 품행에 문제가 많아 여론의 비난을 받은 지 오래됐다. 그가 역사 편찬의 책임을 맡자 기롱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사직한 것이다.”
종합해보면 정사룡은 임금의 명에 따라 실록편찬의 책임을 맡았지만 사관의 자격이 없음을 깨닫고 스스로 물러난 것이다.
곱지않은 주변의 여론도 감안했을 것이다.
당연했다. 공직에 있는 동안 여러차례 비판 당한 사연들을 전임사관들이 빠짐없이 기록해놓았으니까….
그러니 정사룡은 자신의 흠결을 기록한 사초를 정리해서 실록을 편찬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왜냐면 역사기록에 사(私)가 낄 수 있기 때문이다.
1567년(선조 즉위년) 10월 1~1577년 5월 13일 사이의 기록이 남아있다.
<미암일기>는 임진왜란 때 사초책이 불타 없어지는 바람에 <선조실록을 편찬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무엇보다 정사룡은 스스로 사관의 덕목인 ‘삼장(三長)’을 갖추지 못했기에 사퇴할 수밖에 없다고 요약했다. 그렇다면 정사룡이 언급한 ‘삼장’은 과연 무엇인가.
‘삼장’은 당나라 역사학자 유지기(劉知幾·661~721)가 주장한 역사학자가 갖춰야 할 3가지 조건을 일컫는다.
유지기는 “사관은 재(才)와 학(學), 식(識)을 겸비해야 한다”고 했다.(<신당서> ‘유자현전’)
여기서 ‘재’는 문장력이고, ‘학’은 학문이며, ‘식’은 통찰력, 즉 사관(史觀)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세가지를 겸비하기가 어디 쉬운가.
유지기 역시 세가지 덕목을 겸비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제대로 된 사관이 드물다고 했다.
후대에는 삼장도 모자라 사장(四長)으로 사관의 조건을 더욱 까다롭게 만들었다.
중국의 계몽운동가 량치차오(梁啓超·1873~1929)는 삼장 외에 덕(德)을 추가하면서 맨 앞에 두었다.
즉 사덕(史德)-사학(史學)-사식(史識)-사재(史才)의 순으로 그 중요도를 설명했다.
그는 역사가는 역사를 도덕으로 바라보는 마음씨를 지녀야 공정한 사서를 저술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야 자신이 저술한 역사가 예사(穢史·더러운 역사)나 방서(謗書·남을 비방하는 사서)라는 혹평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157회
그렇다면 사관의 삼장(三長)을 어떻게 가릴 수 있는 것일까.
일반적으로 사관이라 함은 매일매일 군주와 대신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는 전임사관을 뜻한다. 예문관 소속 봉교(7품) 2명·대교(8품) 2명·검열(9급) 4명 등 8명으로 구성됐다.
신라 때부터 이들을 한림(翰林)이라 일컬었다.
직급에서 보듯 하급관리들이었다.
하지만 과거급제자 가운데 엄격한 선발절차를 거쳐야 했으니 하고 싶다고 아무나 할 수 있는 직책이 아니었다.
젊은 패기로 무장해야 때묻지 않은 절개를 지키고, 직필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1417년(태종 17년) 이조가 사관을 천거하는 법을 임금에게 올렸다.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은 후세의 귀감이 되니 책임이 가볍지 않습니다. 이제 결원이 생기면 춘추관 당상관이 하급의 문관 가운데 직품이 합당한 자들을 모아 경사(유교경전과 역사서)에 막힘이 없고 제술(시와 글)에 능한 자를 시험으로 뽑아야 합니다. 여기에 친족과 처가, 외가에 모두 흠결이 없는 자여야 합니다. 이런 자들을 골라 한 자리에 3명의 후보를 선발해서 이조에 서류를 보내면 이것을 임금에게 아뢰어 임명하는 것을 규정으로 삼으소서.”
참으로 엄격한 임용절차였음을 알 수 있다.
문장과 글, 그리고 경전과 역사서에 두루 능할 뿐 아니라 친·인척 가운데 어떤 흠결도 없는 사람이라야 후보가 될 수 있었다는 얘기다.
그것도 3명의 후보자 가운데서 가려 뽑았다니….
‘천벌을 받는다’ 다짐까지…
이 같은 원칙 아래 사관 임명의 구체적인 제도를 갖춰갔다.
<연려실기술>을 토대로 공석이 된 사관을 뽑는 단계를 살펴보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있다.
바로 현재의 전임사관 가운데 가장 늦게 사관이 된 막내(하번·下番)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막내 사관이 바로 고참 사관들과 진행하는 추천회의를 사실상 주관한다.
광주 이씨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온 사초
사관들끼리의 추천회의도 ‘문을 닫고 진행하는 비밀회의’였다.
이것을 비천(秘薦)이라 했다.
만약 여기서 추천할만한 적임자가 없다는 판단이 들면 그냥 공석으로 놔뒀다. 예를들어 성종 시대의 사관이었던 김일손은 막내사관으로 일한 5년동안 후임자를 추천하지 않았다.
그러다 정여창(1450~1504)을 보고는 적임자라 판단해서 비로소 추천했다.
제대로 된 사관을 뽑으려고 막내의 불편함을 5년이나 감수한 것이다.
그런데 사관들이 모여 추천 대상자 3명을 확정했다고 해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전임사관을 역임한 전직사관들과 홍문관·예문관의 당상에게 후보자 명단을 돌렸다.
거기서 하자가 없다는 승인을 받아야 겨우 통과됐다. 통과의례 또한 까다로웠다. 사관들은 예복을 갖춰 입고 추천자들의 이력서를 상 위에 올려놓은 다음 향을 피우고 차례로 네 번 절한 뒤 축문을 읽었다.
“황천(皇天·하늘신)과 후토(后土·토지신)에게 고합니다.
사필을 잡는 임무는 가장 중요한 국정입니다. 추천된 사람이 그 적임자가 아니면 반드시 천벌을 받을 겁니다.”
하늘·땅에게 제사까지 지내고 ‘천벌’ 운운할 정도이니 얼마나 무시무시한 사전 통과의례인가.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158회
피말리는 1대1 면집시험까지
임진왜란 때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 전쟁통에 상당수 대신들이 뿔뿔이 흩어졌고, 선조 임금 곁을 따라다니며 사초를 기록해야 할 사관 4명이 도망가는 불상사가 생겼다.
그래도 역사는 기록해야 했기에 사관을 선발해야 했다. 하지만 적임자가 전무했다. 그 때 유일한 사관이었던 기자헌이 행재소(임금의 임시거처)에서 부족한 사관수를 채우려고 후보자를 한사람 추천했다.
문제는 추천 대상자가 사관의 자격을 갖췄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제대로 시험을 볼 여건이 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3명이어야 할 후보자가 단 1명에 불과했으니까….
기자헌은 차마 축문을 읽지 못하고 고육책으로 그냥 말로 하늘에 고했다.
“난리로 인해 사람이 모자라 부득이 한사람만 후보로 올렸나이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지봉유설>
그렇지만 절대 웃을 일이 아니다.
전쟁통에 그렇게 어수선한 국면이었는데도 사관을 뽑았고, 임시방편이었지만 축문을 읽는 행사를 생략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축문을 읽은 것은 하나의 과정에 불과했다.
가장 어려운 단계가 남아 있었다. 바로 시험이었다.
시험관의 면면은 화려하기 그지 없었다. 영의정·좌의정·우의정 등 3정승은 물론 좌·우찬성과 좌·우 참찬관, 그리고 춘추·예문관 소속 3품 이상의 당상관 및 이조당상 등이 합석했다.
이들은 추천된 수험생 3명에게 <자치통감 강목>과 <좌전(左傳)>, <송감(宋鑑)>의 글을 정해 한사람씩 불러 1대1 면접으로 테스트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결정된 후보자들의 순위는 시험관들의 도장을 일일이 받아 공문서인 입안(立案)으로 만들어 제출했다. 이로써 선발절차가 막을 내린 것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159회
구악(舊惡)은 사관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젊은 신진들에게 사관의 직무를 맡겼을까.
그렇지않아도 태종 때인 1417년 이런 제도가 불합리하다는 반대의 의견이 개진됐다.
즉 “사관들이 멋대로 젖비린내나고 서법도 잘 알지 못하는 자를 천거하는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태종은 이에 “새롭게 진출하는 유생들의 능력과 가문을 윗사람들이 어찌 알겠느냐. 그래서 사관 동료들끼리 선택하도록 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태종은 “이렇게 사관을 뽑는 것은 그 유래가 오래 됐다”고까지 했다.
사관들 스스로 후임자를 뽑는 전통이 상당히 깊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연려실기술>은 또 조극선(1595~1658)의 문집인 ‘야곡삼관기’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젊은 신진에게 사관의 직무를 맡기는 것은 잘못이 아닐까’하고 의심했더니 어떤 사람이 말했다. ‘벼슬이 높은 사람은 너무 세상일에 익숙하게 되어 사사로운 정(情)에 이끌리기 쉬운 폐단이 많다. 그러니 젊고 의기가 날카로운 자들을 사관으로 선발하는 것이 더 공평한 역사를 서술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래서 예로부터 젊은 사람들을 사관으로 뽑는 제도를 마련한 것이리라.”
한마디로 말해 오래 벼슬한 사람들은 시쳇말로 사사로운 정에 이끌리는,
이른바 ‘구악(舊惡)’이 될 수 있으니 엄정한 사필을 휘둘러야 하는 사관의 자격을 얻을 수 없다는 말이다.
사관 한 사람 뽑는 데도 이렇듯 철저하고 엄중하게, 또한 신중하게 뽑았던 것이다.
“내 과실을 마음껏 쓰도록 하라”
그렇다면 임금은 그렇게 뽑힌 사관들을 어떻게 대했는가.
1508년(중종 3년) 종종은 승정원과 예문관에 붓 40자루와 먹 20홀을 내리면서 이렇게 당부했다.
“이 붓과 먹으로 모든 나의 과실을 숨김없이 마음껏 쓰도록 하라.(以是筆墨 凡吾過失 百書無隱)”
영조 임금은 또 어땠나.
1738년(영조 14년) 영조 임금은 친히 실록을 봉안한 ‘춘추관 사고(史庫)’를 방문해서 ‘대공사필(大公史筆)’이라는 휘호를 써서 처마 끝에 달도록 했다.
‘대공사필’이란 ‘사필을 크게 공정히 한다’는 뜻이다.
영조는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역사를 기록하는 법은 과연 어렵다. 여러 대신들은 물론 사관들이 입시하지만 당파에 치우친 나머지 역사를 멋대로 첨삭할 수도 있는 것 아니냐.
또 임금이 한번 제작된 역사책(실록)을 절대 볼 수 없으니 역사책이 공정하게 쓰였는지, 혹은 불공정하게 쓰였는지 어찌 알겠는가.
그래서 내가 대공사필이라 써서 벽에 건 것이다. 역사를 아주 공정하게 서술하라는 뜻이다.”
지금 이 순간은 과연 어떤가. 정녕 제대로 된 사관을 뽑고 있는 것인가. 또 우리의 지도자들은 과연 중종이나 영조처럼 자신의 잘못을 숨김없이 마음껏 쓰게 하고, 역사를 공정하게 서술하라고 북돋아 줄수 있을까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60회
선조수정실록의 비밀
<34년간의 우여곡절 끝에 마무리된 <선조수정실록>.
“류성룡은 좁고 굳세지 못해 이해가 닥치면 흔들림을 면치못했다.…재상의 그릇이 부족한 인물이다.”
<선조실록>
“실록 편찬자가 비방하고 배척했다. 류성룡은 나라걱정을 집안일처럼 했다.”
<선조수정실록>
“윤두수는 참으로 염치를 모르는 비루한 사내다.”
<선조실록>
“사신이 허위로 날조해서 모함하느라 급급했다.”
<선조수정실록>
“정철은 편협하고 망령되어…원망을 자초했다.…죽을 때까지 비방이 그치지 않았다.”
<선조실록>
“권간이나 적신으로 지목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정승 노릇을 1년 남짓 했고, 이산해·류성룡 등 다른 정승들도 있는데 어떻게 권세를 부린단 말인가.”
<선조수정실록>
“정언 이이첨은 천성이 영특하고 기개가 있으며 간쟁하는 풍도가 있었다.”
<선조실록>
“이이첨은 간적의 괴수다. 실록을 쓸 때 스스로를 거리낌없이 칭찬했으니 통탄스러울 뿐이다.”
<선조수정실록>
“기자헌은 도량이 넓고 덕망이 있었다.”
<선조실록>
“기자헌이 실록을 감수할 때 자기 입맛대로 스스로를 칭찬했으니 주벌(誅罰)을 가해도 모자라다.” <선조수정실록>
선조~광해군대를 풍미했던 이들의 인물평이다.
이토록 상반될 수 있단 말인가.
<선조실록>은 류성룡과 윤두수, 정철을 부족하고 편협한 사람이라 폄훼했지만,
선조수정실록>은 “그것은 전적으로 <선조실록>을 쓴 사관들의 잘못된 서술”이라면서 긍정평가를 내렸다.
또 <선조실록>이 ‘좋은 사람들’이라 극구 칭찬했던 인물들을 두고 <선조수정실록>은 ‘스스로 역사를 포장하려 했던 파렴치한’이라 손가락질 하고 있다.
심지어 주벌을 가해도 시원치않다고까지 저주했다.
대체 왜 이런 상반된 평가가 일어나게 된 것일까. <선조실록>은 무엇이고, <선조수정실록>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161회
‘적신의 괴수가 편찬한 부끄러운 역사입니다’
“<선조실록>은 적신(賊臣)의 괴수(魁首)에 의해 편찬되어 부끄럽고 욕됨이 심합니다. 당연히 고쳐야 합니다.”
1623년(인조 1년) 지사 이정귀가 광해군대에 편찬된 <선조실록>의 수정을 요구하는 상소문을 올린다.
대북파인 기자헌과 이이첨이 중심이 되어 찬술한 <선조실록>이 객관성을 잃었다는 것이었다. 원래 <선조실록>은 1609년(광해군 1년)부터 이항복과 이정구, 신흠 등이 편찬작업을 펼쳤다.
그러나 1613년(광해군 5년) 계축옥사(대북파가 영창대군 및 소북파를 제거하려고 일으킨 옥사)로 이항복 등 3인이 축출됐다.
이후 <선조실록>의 편찬은 기자헌과 이이첨 등 대북파가 주도하게 됐다.
이정구가 주장한 ‘적신의 괴수’란 바로 대북파 기자헌과 이이첨을 두고 한 말이다.
그러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세상이 바뀌어 광해군과 대북파가 쫓겨가자 수정작업에 나선 것이다.
사실 <선조실록>은 광해군 시대에 처음 편찬 작업에 나설 때부터 부실논란을 빚었다.
왜냐면 실록 편찬을 위한 원자료인 사초가 임진왜란 와중에서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1609년(광해군 1년) 실록 편찬위원이던 신흠은 <상촌휘언>에서 ‘사초실종’의 내막을 전하면서 분통을 터뜨린다.
“선조 즉위년(1567년)~임진왜란 직전(1592년 3월)까지의 역사기록이 깜깜한 채 징험할 수 없게 됐다. 임진왜란(1592년)을 겪으면서 사관인 조존세·박정현·임취정·김선여 등이 사초책을 모조리 불태워 버리고 도망갔기 때문이다.”
<상촌휘언>
신흠은 당시 실록청 총재관(편찬위원장) 이항복에게
“잃어버린 25년의 사적을 그날그날의 일을 다 찾아 기록하자면 10년이 걸려도 완성될 수 없을 것”이라 하소연했다. 그러나 편찬위원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명공거경(名公巨卿·고위관리)의 일거수일투족은 알려져 있으니 이들의 행적을 ‘열전’처럼 기록하면 당시의 사적은 모두 드러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초를 잃어 임금의 행적에 따라 서술할 수 없지만 신하들의 <열전> 형식을 통해서라도 <실록>을 편찬하자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편법이 아닐 수 없었다.
설상가상의 사건이 벌어졌다.
앞서 밝힌대로 계축옥사로 이항복 등이 쫓겨나고 기자헌 등 대북파가 나서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래서인지 지금 남아있는 <선조실록> 221권 가운데 ‘사초실종’ 25년의 기사는 불과 26권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 162회
임진왜란 이후의 기록들도 변란 초기 기록이 부실할 뿐 아니라, 조잡하고 당파에 얽혀 불공정한 기록들이 많다. 따라서 <선조실록>은 조선왕조실록 중 가장 형편없다는 평을 받고 있다.
<선조실록>. 임진왜란 때 선조를 따라 몽진길에 올라있던 사관 4명이 사초를 몽땅 불태운 뒤 사라져버렸다.
이에따라 <선조실록>은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가장 허술한 실록이 되고 말았다
“선조실록은 왜곡사입니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선조실록>은 인조반정에 따른 대북파의 몰락으로 수정의 운명을 맞게 된 것이다.
정권교체가 직접 원인이 됐지만,
사실 대북파의 편협하고 일방통행식 역사서술도 <수정실록> 편찬의 빌미가 됐다.
역사가 아무리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지만 대북 정권의 입맛대로 자파는 자화자찬하고, 다른 파에 대해서는 비방을 일삼는 서술로 일관했기 때문이었다.
당색을 떠나 인망이 두터운 한준겸·이덕형·이현영 같은 인물들과, 류성룡·정구 등 남인 관료나 학자, 서인 계열의 성혼·이항복·윤두수·신흠·이정귀와 김상헌 등을 닥치는 대로 비방했다.
특히 이정귀의 경우 폐모론에 반대해서 관직에서 물러난 뒤 다시 광해군에 의해 재등용될 정도로 외교관으로서의 문명을 떨친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런 인물에게 <선조실록>은 “사부(辭賦·한시)에 식견이 없다”고 비난했다.
반대로 기자헌·이이첨 등 자파 인물들은 세상에 둘도 없는 군자로 표현했으니 올바른 역사서술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선조실록> 편찬은 계축옥사와 폐모론이 진행되는 무렵 지지기반이 좁아지던 대북 정권의 실정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서술은 대북정권의 고립을 촉진시켰다.
그랬으니 정변(인조반정)으로 정권이 바뀌자 수정의 논의가 다시 거세게 인 것이다.
<선조실록>은 인조반정 뒤 ‘사실을 왜곡시킨 역사’, 즉 무사(誣史)라는 혹평을 들었다.
어떻게 수정할 것인가
하지만 <선조수정실록>의 편찬도 녹록치않은 작업이었다.
이정귀 등의 상소로 추진됐지만 이괄의 난(1624년)과 정묘호란(1627년), 병자호란(1636년) 등 병란이 겹치는 바람에 지지부진했다.
그 와중에 폐주의 역사라는 <광해군일기> 편찬이 더 급하다고 해서
<선조수정실록> 편찬은 뒷전으로 밀렸다.
광해군 초기의 역사를 기록한 사초가 이이첨 등의 영향을 받아 왜곡됐으니 이 또한 시급하게 처리해야 할 현안으로 꼽혔던 것이다.
반정세력으로서는 갖가지 병란을 겪으면서 실추될대로 실추된 ‘반정의 정당성’을 먼저 입증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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