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93회
1637년 1월 30일,
왕이 굴욕적인 항복에 나선 문이 서문이다.
실록은 남염의(藍染衣)를 입고 문을 나섰다고 기록한다. 파란색 계열로 염색된 쪽빛 옷이다.
일종의 죄수복을 입고 문을 나선 셈이다. 서문을 나서 산성을 내려가면 마천과 가락이고, 백제 고분군을 지나 삼전도가 지척이다.
못난 왕이 거기서 청 홍타이지에게 신하의 예를 다했다.
삼배구고두례다.
백제 고분군에서 동북쪽으로 2km 남짓이면 몽촌토성이고, 거기서 풍납토성이 지척이니 그곳이 온조왕의 근거지였음이 새삼스럽다.
위례신도시를 나눈 3개 자치단체가 행정동으로 각각 '위례동'을 둔 웃지 못할 일이 현실이다.
남한산성 전투는 격렬하진 않았다.
실록에도 작은 전투 몇 뿐이다. 오히려 지방에서 초모한 근왕병이 여길 구하려다 당한 패배와 손실이 훨씬 더 크고 심각했다.
당시 시각으로 보아도 그만큼 한심한 지경이다.
역사라는 추상적 실체도 백성이라는 현시적 실체도 아닌, 자신들이 누리던 복록과 권력만이 나라 실체라고 그들 스스로 호도했던 건 아닐까? 당시 지배 계급의 밑바닥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삼전도의 청군과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가 적힌 문서만 수도 없이 주고받는다.
청에 보낼 문서에 폐하라는 글자를 넣자 빼자,
청이 보내온 문서가 어쩌고저쩌고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논의만 무성하다.
글마다 오랑캐라 적은 사관의 시각이 이 모든 상황의 생생한 증언자다.
그 사이 청의 말발굽 아래 백성은, 얼마인지도 모르게 죽어 나가고 있었을 터다. 날씨마저 적이다.
극한이었다.
모든 게 유난했다.
군량을 아끼고 강화도를 지켜내 얼음이 풀릴 때까지 버텼다면, 삼전도 굴욕은 피할 수 있었을까?
12월 27일 이미 죽은 말을 잡아먹을 지경이었다. 다음날 허세로 술에 돼지고기와 쇠고기를 적진에 보내는 한심한 작태를 벌인다.
연이어 성안 식량이 바닥을 보인다. 추위와 굶주림에 모두 아사 직전이다.
1월 14일
처음으로 군졸이 얼어 죽는다.
이런 상황에서도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인식의 바탕을 헤아릴 재주가 내겐 없다. 싸움을 주장한 김류나 김상헌 같은 고관대작이, 창칼을 들고 저 극한 상황의 성첩에 단 한 번만이라도 올라가 봤을까?
1월 19일 실록은
'오랑캐가 성안에 대포를 쏘았는데, 대포 탄환이 거위알만 했으며 더러 맞아서 죽은 자가 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홍이포 폭탄이 이때 처음 성안에 날아들었다.
같은 달 24일 실록은 '적이 대포를 남격대 망월봉 아래에서 발사했는데, 포탄이 행궁으로 날아와 떨어지자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피하였다'한다.
망월봉은 벌봉으로 추정한다. 해발 522m 남한산 정상 북쪽이다.
다음날에도 포격이 있었다. 실록은 '대포 소리가 종일 그치지 않았는데, 성첩이 탄환에 맞아 모두 허물어졌으므로 군사들 마음이 흉흉하고 두려워하였다'라고 기록한다.
26일에서야 22일에 함락된 강화도 소식이 남한산성으로 스며든다. 홍이포 공포와 강화도 함락 소식은 이제 추위와 배고픔을 벗어날, 비겁하지만 매우 절실한 결정적인 명분으로 변신한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94회
주전파와 주화파
무척 어려운 명제다.
당시도 그러했고, 지금도 난제다.
당시 주전파의 논리란 현재의 시각과는 천양지차다. 주화파의 그것도 물론 마찬가지다.
청나라에게 항복한다는 것은 주전파 입장에선 명나라 은혜에 대한 배신으로 여겼다.
주화파에게 '임진왜란 때 우리를 도와준 명나라의 은혜를 어찌할 것인가(재조지은)?'라며 울부짖는다.
재조지은에 대한 배은망덕이란다. 이면에는 '어떻게 오랑캐에게'라는 오만도 깃들어 있다. 청을 오랑캐로 업신여기는 사대 사상에 사로잡혀 있었으니 당연지사다.
주화파는 우선 살자고 주장한다. 그들 안중에도 물론 백성은 없다. 국체인 왕과 세자를 보호해 위기를 넘기고, 훗날을 도모하자는 것이다. 후에 봉림대군이 왕이 되어 구호 뿐인 북벌을 외치기는 한다. 남한산성에서 그들 주장이, 북벌이라는 미래 부국강병에까지 잇닿았는지는 의문이다.
두 주장을 선의로 재해석해 본다. 주전파는 항복을 굴욕으로 보았다. 싸우다 죽는 게 명예롭다고 여겼다. 국격과 자존의 훼손은 물론 역사에 기록될 비겁을 두려워했음이 분명하다.
주화파는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순응하고, 지배 계급의 생명과 재산이 우선이라고 여겼을 터다. 꺼져 가는 명나라를 숭상하며 소 중화 사상까지 들먹이는 허세를 견딜 수 없어했는지도 모른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 정세에서 국익이 무엇인지 세세히 따져 실용적으로 대처하자는 주장이다. 21세기 남한산성에 갇힌 당신이라면 어디에 손들겠는가?
동쪽을 향해 앉은 행궁이 제법 상서롭다. 행궁 뒷산 수어장대 위용도 자못 볼 만하다. 4백 년 전 굴욕의 상황에도 저러했는진 모르겠으되, 자태만으론 당당한 행궁으로써 위용을 갖춘 셈이다.
당시 백관들은 어땠을까? 윤집과 오달제는 스스로 잡혀감으로써 주전파 의리에 충실했다.
김상헌과 정온은 실패한 자결이나마, 목숨을 내걸었다.
최명길로 상징되는 주화파 여생도 순탄치만은 못했다.
1643년 최명길이 청에 끌려가 2년간 억류 당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당시 고관대작들 실상이 꼭 명분과 실리만을 추구한 것 같지는 않다. 주전이나 주화를 주장한 신료들은 그래도 주관과 소신이 뚜렷한 부류일 수 있다.
왕이 치욕의 항복 예를 마치고 창경궁으로 향한 1월 30일 실록 끝자락에
'상(임금)이 소파진(所波津)을 경유하여 배를 타고 건넜다. 당시 나루의 병사들은 거의 죽고 빈 배 두 척 뿐이었는데, 백관들이 다투어 건너려고 어의를 잡아당기기까지 하면서 배에 오르기도 하였다'는 내용을 보자면 쓴 웃음을 금하기가 힘들다.
산성에 갇힌 46일의 역사가, 현재를 짓누르는 듯하다.
짙은 청록의 남한산성 숲 사이로 화창하게 파고든 날카로운 햇살이, 이끼 낀 성벽을 싹둑 베어버리는 느낌이다.
씁쓸함이 더해온다. 아둔한 왕 앞에서 머릴 조아리며 싸우자, 화친하자 맹렬하게 쟁투했을 그들의 얄팍한 속내가 날 것으로 밀려 들어서다.
더불어 산성의 이런 응답도 같이 들려온다.
'모든 다툼의 바탕에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아야 하지 않겠는가?'
출처 : 오마이 뉴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95회
조선의 가정교사 塾師(숙사)~~~
입주 가정교사는 1970년대를 대표하는 대학생 아르바이트다.
중고등학교 입시가 존재하던 시절에는 나이 어린 중고등학생도 입주 가정교사 시장에 뛰어 들었다. 숙식이 해결되니 시골에서 올라온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이라면 이만한 아르바이트가 없을 정도다.
공부 말고는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선비가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은 많지가 않다.
훈장 노릇도 있지만 최소한 집은 있어야 한다 .
집조차 없는 가난한 선비는 입주 가정교사로 남의 집에 얹어 살며 아이를 가르쳤다.
이를 ‘숙사’라고 했다.
숙사 노릇이 좋아서 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선비가 입에 풀칠이라고 하려고 선택하는 직업 이었다.
숙사가 필요한 집에서는 주위에 수소문하여 적당한 사람을 물색한다.
그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자식교육을 맡긴다.
숙사의 목표는 오직 하나~~
학생이 글을 깨우쳐 과거에 합격하는 것이다.
학생이 과거에 합격하면 숙사와의 인연을 거기서 끝이 난다. 숙사는 새로운 일자를 찾아야 하는 실업자 신세가 된다.
학생도 숙사를 무시한다
저명한 학자나 관료는 한 번만 만나도 스승으로 떠받들면서 여러 해 자기를 기르쳐준 숙사는 스승으로 여기질 않았다.
성해웅은
“정승 집안의 귀한 자제들은 숙사를 업신여기고 치욕을 주며 못하는 짓이 없다.”라고 했다.
이런 탓에 숙사들의 존재는 좀처럼 드러나질 않았다.
그렇지만 역사에 이름을 남긴 숙사도 적지는 않다.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 집안의 숙사 노긍(盧兢)은 조선 후기 3대 천재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며 조선 최대 백과사전 <임원경제지>의 저자 서유구의 숙사 儒琴(유금) 은 유클리드 기하학에
조예가 깊은 과학자였다.
소론파 명문가 조한명의 숙사 강취주는 한쪽 다리를 쓰지 못하는 불구의 몸이었으나 조선 전역을 여행하면서 인기 절정의 가수였다.
먹고 살기 위해 숙사노릇을 했지만 모두 남다른 재능이 있는 선비였다.
李龜相(이귀상)이라는 사람은 가난하지만 똑똑하고 단정한 선비였다. 어찌나 단정했는지 장작을 팰 때도 나뭇결을 따라 단정하게 도끼질을 했을 정도다.
한양으로 올라온 그는 김성웅 집안의 숙사가 되어 두 아들을 가르쳤다.
그중 한 사람이 정조의 장인 김사묵 이다.
이귀상은 여느 숙사와 달리 매우 엄격했다.그렇지만 차근차근 자세히 가르치기로 유명했다.
이웃에 사는 오원이 자기 집 숙사로 모셔와 두 아들의 교육을 맡겼다.
오원의 아들 오재순. 오재소 형제는 모두 판서의 저리에 올랐다. 훗날 이귀상이 세상을 떠나자 오재순의 아들 오희상이 묘지명을 지었다.
“공은 스승의 권위를 엄격히 세우고 절도 있게 수업을 했다. 차근차근 자세히 가르쳐 어리석은 사람이나 똑똑한 사람이나 모두 유의했다.
반드시 먼저 의리와 이익을 분명히 구별하고 방향을 알려 주었으니 글이나 가르치고 마는 정도가 아니었다. 자금까지도 그 명성이 자자하다“
어린시절 부터 함께 먹고 자며 가르친 숙사의 영향은 절대적이다, 조선의 교육을 담당한 것은 퇴계나 율곡 같은 큰 스승이 아니라 이른 없는 숙사들이다. 그런데 숙사의 존재는 무시당하기 일쑤다.
“백년 사이에 풍속이 갈수록 쇠퇴하여 꼭 스승을 집으로 데려와 먹여주는 자제를 그르치게 하다. 자제들은 평소 교만한 데다 먹여주는 권세를 맏고 스승을 대한다. 스승은 권위를 세울 수가 없어 꾸짓지도 못하고 회초리를 들지도 못하며 시키는 대로 할 뿐이다”
<성해웅의 ‘연경재전집’>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번듯한 정규직 교사나 대학교수만 스승이 아니다. 학습지 교사, 학원강사 기간제 교사 대학의 시간강사 없으면 우리 교육은 무너(?)질 것이다. 허지만 그들에 대한 대접(?)은 반성할 여지는 없는지 한번 쯤 뒤돌아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96회
조선시대
수학자이자 회계사 算員(산원)~~~~
“둥근 땅의 둘레가 365와 4분의 1척이다.크고 작은 개미 두 마리가 나란히 출발해서 이 땅의 둘레를 돈다. 작은 개미는 하루에 한자. 큰 개미는 하루에 13과 19분의 7자를 이동하면 두 마리 개미는 얼마만에 만나는가?”
<홍정하의 ‘구일집’.에 나오는 글이다.
조선은 건국 초에 조세 제도를 정비하는 한편 토지를 새롭게 축량했다.
여기에 각종 면적 계산법과 단위 환산에 뛰어난 算學(산학). 즉 수학 전문가가 동원 되었다, 수학을 토대로 조세를 포함해 국가 회계와 측량 업무를 담당했던 전문가를 산원이라 불렀다.
조선시대 국가재정과 회계는 호조에서 담당했다, 사원은 호조에 배속되어 복잡한 계산을 담당했다. 둘레가 곡선인 논.밭 면적을 계산하고 거기서 나오는 잡곡ㄴ을 쌀로 환산한 뒤 다시 면포로 계산하는 일, 군량을 고려해 징병할 군인 수를 산정하는 일 .궁궐행사에 소요되는 비용
을 따지는 일이 모두 산원의 몫이었다.
산원은 복잡한 계산이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동원되었다. 해와 달의 운행과 절기변화를 계산래서 달력을 정비하는 사업, 악기의 크기를 조정해서 음율을 고르는 사업.성벽을 보수하고 증축하는 사업등에 전문성을 발휘했다.
산원은 산학 취재를 통해 선발했다. 산원을 선발하는 시험 문제는 <상명산법> 등 중국에서
출간한 算書(산서)에서 출제 했다.
이들 수학 서적은 실무에 필요한 측량법.도량 환산법을 비롯해서 기하학과 제곱근. 10차방정식등 고급수학을 망라했다.실무차원에서 회계를 담당한 산원은 수학을 연구하는 전문 수학자이기도 했다.
조선 산원은 산학실력을 놓고 중국관리와 자존심 대결을 벌이기도 했다.
조선영조 때 산원 홍정하가 쓴 연구서 <구일집>에 수학문제와 함께 다음과 같은 일화가 실려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97회
홍정하는 산원 유수석과 함께 청나라 司曆(사력=천문 관측관리) 하국주를 만나 산학문제를주고 받았다.
이 때 하국주는 홍정하를 앝보고
“ 360명이 1인당 은 한냥 8전을 냈다면 합계 얼만인가?” 라는 문제를 냈다.
좀 유치한 문제였다.
홍정하는 즉시 답을 했고 더 어려운 문제도 답을 잘했다.
동석한 중국관리 아제도는 조선 산원을 얕잡고 하국주를 치켜세웠다.
아제도는 하국주가 천하 4위의 수학자라며 어려운 문제를 내보라고 홍정하에게 채근했다.
홍종하가 다음 문제를 냈다.
“둥근 옥이 있다.내접하는 정육면체 옥을 빼놓은 껍질의 무게가 265근 50냥 5전이다.
껍질의 두께가 4촌5푼이라고 하면 구형의 옥의 지름과 정육면체 옥의 한변의 길이는 각각 알마인가? “
하국주는 당장 답이 어려울 테니 내일 찾아 오라고 했다.
결국 중국관리는 이 문제를 풀지 못했다.
산원은 산가지와 주산을 이용하여 복잡한 계산을 했다.
산가지는 가늘고 길게 다듬은 나뭇가지를 가로 세로로 배열해 숫자를 표기하는 방식이었다.주산은 곱셈표를 막대에 써서 배열하는 방식이었다.
산가지는 주산이 보급되며 본토인 중국에서 사라졌지만
조선은 일제강점기 까지 애용했다.
빠른 셈이 가능했으나 산원은 주판에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
조선 말기 <주학신편>에서 주판의 구조를 설명한 이후로 계산법이나 활용방안에 주목한 산원은 없었다.
산원이 산가지를 애용한 까닭은 그들의 정체성과 관련이 깊었다.
산가지는 수학 문제를 풀이해 문서로 정리할 때 그리기가 더 쉬웠다.
수학공식을 일목요연하게 표기하는 데 산가지가 더 적합했던 것이다.
그래서 산원은 주판사용법을 알아도 산가지를 손에서 놓을 수 가 없었다.
사원은 단순 계산을 하는 존재가 아니라 공식을 다루는 수학자였다.
네델란드 선원 하멜은 조선관원이 긴 막대기를 이용해 계산을 한다고 <하멜 표류기>에 기록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조선을 방문한 스기하라 기타오는 조선인이 주판 대신 점술가들이 쓰는 서죽같은 가지로 계산을 한다고 회고 하기도 했다.
특별한 능력을 지닌 산원은 어떤 대우를 받았을까?
산원은 벼슬아치가 쓰는 紗帽(사모)를 썼지만 성조임금을 지나면서 문무반 대열에 함께 서지는 못했다.
산원은 조선을 운용 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관료였지만 기능직에 불과하다고 폄하되었던 것이다.
무시를 받으면서도 산원은 전통 산학을 연구 발전 시켰으며 조세 업무를 담당해 나라살림을 보필했던 것이다.
당시 산원은 수학자요 공인회계사였던 것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98회
조선 최고의 노름꾼, 타짜는 누구인가?~
그는 조선 영조임금 때 우의정을 지낸 원인손(元仁孫(1721 ~ 1774) 이었다
그는 효종임금의 딸 숙경옹주의 손자였고 병조.이조판서를 지낸 원경하의 아들이다.
그는 우의정이라는 고위 관직까지 올랐지만 관직에 출사하기 전에는 투전판에서 뛰어난 노름꾼, 타짜로 유명했으며 투전판에서 「조선의 국수」로 통했을 정도다.
그에 대한 일화로 여주의 주막에서 투전에 끼어들어 돈을 따가자 그의 실력을 보고 겨루던 사람들이 그를 알아봤다고 한다.
아버지 원경하가 노름판을 하는 것을 보고 꾸짖자 노름을 끊으려고 해도 국수라고 소문나서 여러 사람들이 도전하기 때문에 이를 거절하면 비겁하다고 나쁜 소문을 낸다고 했다.
원경하가 아무리 꾸짖어도 노름을 그만두지 않으니 아예 노름판에 못 나가게 하려고 후당에 가둬버렸는데, 거기서 병풍을 둘러치고 왈짜 노름꾼들을 불러 모아 투전을 연구해서 타짜가 되어 나왔다고 한다(...).
실력이 어느 정도였냐면
원인손의 아버지 병조판서 원경하가 그 재주가 얼마나 뛰어난지 보겠다고 투전을 가져와서 섞은 뒤에 소매 속에 숨겼는데,
원인손은 정확히 그 위치를 알아챘고 원경하가 여러 차례 숨겨도 찾아냈고 투전패 80장을 보여준 뒤 뒤집어 놓으면 전부 다 알아맞혔다고 한다.
그 재주를 본 원경하는 "이것은 하늘이 낸 재주요. 귀신의 지혜다"라면서 원인손이 투전하는 것을 막지 않았고
원인손은 매일 나가서 투전을 했지만, 투전판에서 싸움이 나서 칼에 맞아 사람이 죽은 사건이 일어나자 투전을 끊고 학문에 전념했다.
30세에 사마시에 합격해 음보로 출사했고 33세에는 문과에 급제해 관직 생활을 했으며, 탕평책을 지지했고 사간원 정언, 세자시강원 사서, 사헌부 지평, 홍문관 부흥교를 지냈다.
이후 충주, 광주에 암행어사로 나갔고 사복시정, 당상관, 승정원 동부승지, 승정원 도승지, 사간원 대사간, 성균관 대사성, 예조참의, 전라도관찰사, 사헌부 대사헌, 이조참판, 한성부 판윤, 이조판서, 판의금사를 지내다가 52세에 우의정이 되었다가 2년 후에 사망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199회
경대거울 가는 사람 ‘마경장’(磨鏡匠)
녹 잘 스는 청동-백동거울, 갈고닦아 반짝반짝 새것으로
조선시대라고 ‘사농(士農)’, 선비와 농민만 살았으랴. 오늘날 정도는 아니라 해도 수많은 ‘공상(工商)’이 살았다. 조선의 진면목은 낮과 궁(宮)뿐 아니라 밤과 저잣거리에도 있을 것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출신 젊은 연구자들이 사료의 짧은 기록을 추적해 그들의 세계를,다양한 직업을 조명한 내용을 발췌하여 연재한다
“13일 마경장(磨鏡匠) 15명을 대령하라 했는데, 하지 않았다. 공조와 상의원 해당 관원을 국문하라!”
<연산군일기 1504년·연산 10년 1월 14일>
마경장이 뭐하는 사람이기에 연산군은 15명이나 찾았을까?
조선 후기까지 거울은 지금 흔히 보는 유리 거울이 아닌, 청동이나 백동으로 만든 금속 거울이었다. 금속 거울은 쉽게 녹슬었다.
녹을 벗기고 갈고 닦아 맑고 선명한 빛을 다시 살리는 작업이 필요했다.
이를 담당했던 사람이 거울 가는 전문가 마경장이다.
낡고 녹슨 거울은 마경장 손끝에서 새것으로 거듭났다.
훗날 작성된, 경모궁(景慕宮·사도세자와 그의 비 헌경왕후의 사당)에서 제사 지낼 때 쓸 물건을 제작하기 위해 만든 ‘경모궁악기조성청의궤’를 보면 마경장이 거울을 닦는 데 썼던 도구가 나온다.
강려석, 중려석, 연일려석과 법유이다.
강려석은 거친 숫돌, 중려석은 중간 거칠기 숫돌, 연일려석은 포항 연일 특산의 고운 숫돌을 말한다. 법유는 들기름이다.
도구가 단출한 편이라 공정도 단순해 보인다.
그러나 무조건 부지런히 간다고 잘하는 게 아니다. 숫돌 세 종류를 고루 잘 써야 한다. 또 청동, 백동 등 거울 재질에 맞춰 연마 강도도 조절해야 한다.
여기에 들기름 적당량을 발라야 광택도 얻고 녹스는 것을 막는 효과도 볼 수 있다. 작업 과정에 숙련도와 전문성이 요구된다.
이러한 전문성은 거울을 만드는 ‘경장(鏡匠)’에서 또 다른 직업인 마경장이 일찍이 갈려 나온 이유다.
연산군은 조바심 내며 마경장을 찾았다.
거울 수집가 연산군? 아니다.
마경장이 손본 거울은 연산군을 모시는 기녀들이 썼다.
기녀가 많은 만큼 치장에 쓰이는 거울도 많았고, 그만큼 마경장도 많아야 했다.
그런데 마경장이 부족했다. 마경장이 부족해 거울이 불량했고, 기녀의 꾸밈 역시 불량했다. 흥이 깨진 연산군은 다음 날 불호령을 내렸다.
‘내가 마경장 15명을 대령하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호색한 연산군은 거느린 기녀가 늘어날수록 마경장이 절실했다.
마경장이 긴요했던 또 다른 이도 있다.
자화상으로 유명한 윤두서(1668∼1715)다. 윤두서 자화상은 여느 그림과 마찬가지로 붓, 물감, 종이로 그렸다.
여기에 빼놓을 수 없는 재료가 하나 더 있다. 깨끗한 거울이다. 천재 화가는 거울 속에서 머리카락 한 올까지 찾았을 터. 윤두서의 거울을 갈고 닦던 마경장은 혼신의 힘을 다했을 법하다. 마경장 덕분인지, 윤두서 자화상은 잡티 하나, 수염 한 올도 놓치지 않았다.
고전소설 ‘최고운전’에서 최치원은 승상의 외동딸 나 소저를 보기 위해 남루한 차림으로 갈아입고 마경장 행세를 한다.
거울 간다는 외침을 들은 나 소저는 유모를 통해 낡은 거울을 맡긴다.
마경장은 숫돌과 참기름을 지고 ‘최고운전’의 최치원처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골목을 누비며 거울을 갈았을 것이다.
18세기에도 마경장은 조선의 골목을 누빈다.
“떠오르는 달을 보면 거울 가는 법을 깨닫게 된단 말씀이야.”
19세기 중반까지 살았던 시인 조수삼이 ‘추재기이’에 기록한 절름발이 마경장의 말이다.
마경장과 비슷한 직업으로 마광장(磨光匠)이 있다.
마광장은 옥새부터 악기까지 온갖 물건을 빛나게 하는 광택 전문가였다.
경장, 마경장, 마광장은 다른 듯 닮았다. 세 직업은 조선을 누비며 방방곡곡을 오래도록 빛나게 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00회
조화 만드는 사람 ‘화장(花匠)’
“흰 밀랍과 푸른 종이로 매화와 대나무를 만들고, 그 사이에 비단을 오려 만든 붉은 복숭아꽃을 두었다.”
<이황 ‘퇴계집·退溪集’>
한순간 피었다가 스러지는 꽃을 원하는 대로 장식하고 오래 보기 위해 만드는 것이 조화(造花)다.
요즘은 조화를 하도 잘 만들어 생화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지만, 싸구려라는 편견 탓인지 생화를 선호한다.
하지만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다. 조화로 만든 화환을 쌀 열 가마니 값을 들여 샀다면 선뜻 이해할 사람이 있을까?
옛날에 생화를 장식으로 사용했다는 기록은 오히려 찾기 힘들다. 왕비와 궁녀의 머리 장식인 잠화(簪花)도, 장원 급제자의 사모에 꽂는 어사화(御賜花)도, 각종 궁중 행사의 장식도 모두 조화였다. 지금처럼 사시사철 생화를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원예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했다.
조화의 종류도 국화, 모란, 장미, 복분자꽃, 연꽃 등 다양했으며 비단과 종이, 밀랍 등을 이용해 만들었다. 행사에 쓰인 물품과 비용을 기록한 의궤를 보면 한 차례 연회에서 사용되는 조화의 수는 보통 수천 개에 달했으며, 화환의 크기가 9척 5촌(약 3m)인 것도 있었다. 당시 조화의 개당 가격은 종류에 따라 6전에서 20냥까지 갔다. 쌀 한 가마니가 두세 냥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고가다.
전문 기술자인 ‘화장(花匠)’이 조화를 만들었다. 화장에 대한 기록은 고려시대부터 있다. 국왕의 물품을 관리하는 중상서와 국왕의 의복을 전담하는 상의국 소속이었다. 조선시대에도 관청 소속이었다. 상의원, 연회를 담당하는 예빈시, 내자시뿐 아니라 지방 관청에도 별도로 소속됐을 정도로 꼭 필요한 직무였다.
이들은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마다 소집돼 조화를 만들었다. 왕실 연회에 쓰이는 조화의 종류와 수량은 갈수록 늘어났고, 고종 때에 이르면 연회에서는 한 번에 수만 개의 조화가 사용됐다. 고종의 사치 탓이라고도 했지만,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전략이기도 했다.
조선시대 기술자가 대개 그랬듯이 화장도 고된 노동을 했지만 대접은 제대로 받지 못했다. 국가 소속이더라도 행사가 없으면 월급은 한 푼도 나오지 않았다. 그들은 먹고살기 위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야 했다. 새로운 고객은 왕실 문화를 선망하는 사대부였다.
궁중을 드나들던 사대부들이 조화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지금의 꽃다발이나 화환처럼 보편화시켰다. 퇴계 선생도 밀랍 매화, 종이 대나무, 비단 복숭아꽃을 보고 시를 짓기도 했다.
급기야 선비들 사이에서 ‘조화 DIY(Do It Yourself)’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인기 있는 품목은 선비의 상징인 매화였다. 나무틀에 밀랍을 부어 꽃잎을 만들고, 초록 종이를 오려 꽃받침을 만든다. 노루털로 꽃술을 만들고 부들 가루를 발라 꽃가루 효과를 주었다.
이렇게 만든 꽃을 진짜 매화 가지에 붙이면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매화가 완성된다. 연암 박지원(1737∼1805)은 이렇게 만든 조화를 친구에게 팔기도 했다.
사대부는 화장을 ‘속장’(俗匠·속된 장인)이라며 무시했지만, 이처럼 정교한 작업은 전문가가 아니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고된 노동, 부족한 자원, 낮춰 보는 시선 속에서도 화장은 조화를 아름다운 우리의 전통문화로 만들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01회
맹인 점술가 ‘판수’
“맹인은 사농공상에 끼지 못해 생계를 꾸릴 방법이 없으나, 주역을 배워 점을 치고 겸해서 경문을 외워 살아간다. … 저잣거리를 다니며 노래하듯 ‘문수(問數·운수 물어보오)’라 외친다.” (이규경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별다른 직업이 없던 ‘심청전’ 속 심학규와 달리, 조선시대 맹인은 전문직에 종사했다. 조정은 맹인에게 악공과 점술가를 장려했다.
청각·촉각이 뛰어난 맹인은 관현맹(管絃盲)이 되었다.
관현맹은 나라에 소속된 전문 악공이다.
유명한 관현맹으로 세종 때 이반, 성종 때 정범, 김복산 등이 있다.
점술에 뛰어난 맹인은 관상감(觀象監·천문 지리를 담당한 기관) 소속 관원인 명과맹(命課盲)으로 선발했다. 선발되지 못한 맹인은 ‘판수’로 생업을 삼았다.
판수는 민가에서 활동한 독경(讀經)과 점술 전문가였다.
판수는 초하루와 보름이면 명통시(明通寺·맹인 교육 및 집회소)에 모였다.
명통시에서 독경 기술을 전수했고, 정기적으로 나라의 안녕을 비는 제사를 지냈다.
나라에서 거행하는 전례를 정리한 ‘태상제안’에 판수를 동원한 의례가 나온다.
판수는 기우제나 임금이 거처를 옮길 때 동원됐다.
동원된 판수는 ‘옥추경’이라는 도교 경전을 외웠다. 이로써 비를 불렀고 임금이 거처할 곳에 있을지 모를 사악한 기운을 물리쳤다.
중국에서 도교 도사가 하던 일을 조선에서 판수가 담당했던 셈이다.
판수는 무당처럼 현란한 몸짓을 선보이지는 못했다.
그 대신 듣는 이가 혀를 내두를 만큼 빠른 속도로 경전을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정확히 외웠다.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야 하는 일이었다.
19세기 중반까지 살았던 시인 조수삼은 ‘추재기이’에 판수 유운태의 삶을 정리했다.
유운태는 100번 점을 쳐 단 한 번도 실수가 없던 당대 최고 판수였다. 점 풀이로 하는 말도 범상한 판수와는 달랐다.
운수를 묻는 이에게 효의, 공손, 충성, 신의를 말해 사람 된 도리를 일깨웠다.
조선후기 문신 성대중은 유운태를 만나 운수를 물었던 일을 ‘청성잡기’에 쓰면서
“죽을죄를 저지른 죄인이라도 처벌할라치면 유운태의 말이 떠올랐다”고 했다.
조선시대에도 맹인의 삶은 지금처럼 고단했지만 비장애인이 맹인을 보는 시선은 달랐다.
조선 사람은 비장애인이 보지 못하는 것, 느끼지 못하는 것을 맹인이 보고 느낀다고 여겼다. 이러한 믿음 아래 관현맹의 연주에 감탄했고, 판수의 목소리를 신뢰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02회
글씨 써주는 남자 ‘서수’(書手)
과거시험 답지 대필… 일부 부정행위도
“표암 강세황이 ‘내가 남에게 서법을 많이 가르쳤으나 정 군처럼 빠르게 성취한 자는 없었다’라고 했다. 우리 형제의 과거시험지와 원고는 모두 그가 글씨를 썼다.”
<심노숭의 ‘자저실기·自著實紀’ 중에서>
1차 기록물의 대부분을 직접 붓으로 작성했던 시대, 글씨는 지식인이 갖춰야 할 중요한 덕목이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뛰어난 서법을 익힐 수는 없었다.
글씨를 대신 써 주는 전문가가 있었으니, 이들을 서수(書手)라 불렀다.
서수에 대한 언급은 고려시대부터 등장한다.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目)에는 고려시대 문하부(門下府) 이속(吏屬)에 서수의 직임을 두었다는 기록이 보이고,
정약용의 목민심서 이전(吏典) 6조에는 고려시대 관직 중에 서인들이 주로 담당하는 분야 중 하나로 제시됐다.
18세기 후반을 전후해 서수들은 뛰어난 글씨로 민간 분야에서 전문가 집단을 형성했다.
영조실록에 이제동이라는 인물이 신씨 집안에서 10년 넘게 서수 노릇을 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서수들은 주로 어떤 자료를 필사했을까?
허균의 성소부부고(惺所覆부藁)에 실린 ‘병오기행’은 서수들이 없어서 시를 빨리 필사할 수 없다고 했다.
18세기 한양의 세책가(貰冊家·책 대여점)에서 주로 다뤘던 한글소설 역시 전문 필사자들이 베꼈다.
무엇보다 서수들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곳은 과거시험 현장이었다.
조선 후기 과거에 응시하는 사람은 좋은 자리를 잡아주는 선접군, 답지를 대신 작성해 주는 거벽, 작성된 답지를 깔끔하게 필사해 주는 서수와 한 팀을 이뤄 시험을 치렀다.
이익이 과거시험 답지를 스스로 작성하는 사람이 10%도 되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기록을 볼 때 이러한 모습은 당시 매우 일반적인 것으로 보인다.
서수의 대필은 과거시험 부정행위로 연결되고 사회문제로도 부각됐다.
정조는 거벽과 서수의 과거시험장 출입 금지령을 내렸으나 완전히 근절하지는 못했다.
관에 제출하는 공문서 작성 및 필사 역시 서수가 담당했다.
서수는 작문이 불가능한 사람들의 문서 작성을 대행하거나 훌륭한 글씨가 필요한 사람을 위해 수수료를 받고 필사를 했다.
목민심서 호전 6조 ‘호적’에는 호적 작성을 둘러싼 비용과 비리가 기록돼 있다.
관아에서 호적 대장의 등서(謄書·원본에서 베껴 옮김)를 위해 거두어들이는 벼인 정서조(正書租)는 가구별로 한 말(약 1냥)이 제시됐는데,
여기에 문서를 필사하는 서수들의 품삯도 포함됐다.
이처럼 서수들은 사대부가의 기록물, 고전소설, 과거시험 답지, 그리고 각종 공문서 등의 필사를 담당하며 왕성하게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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