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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조선잡사(26)/받은 글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03회

 

<조선의 과거시험제도>

 

<과거시험에는 몇 명이 응시했을까?>

 

조선시대 과거는 양반이 관직에 나아가기 위한 거의 유일한 길이었다.

또 법적으로는 과거를 볼 수 있었던 양민들에게 과거는 양반이 될 수 있는, 대대로 입신양명 할 수 있는 거의 절대적 기회였다.

 

물론 이들에게 공부할 수 있는 조건은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과거 사법고시에 그토록 집착했던 것도 과거시험과 그 뿌리를 함께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신라시대에도 ‘독서삼품과’라는 시험이 있었으나 과거가 처음 실시된 때는 고려 958년경이다.

이 당시 과거 응시생이 얼마나 정도인지 기록은 없다.

 

조선시대에는 인구도 늘어났고 해서 응시생이 더 늘어났을 것으로 추측할 수는 있다.

 

1차 시험격인 소과를 거쳐 본과시험을 쳤기 때문에 본과 응시생의 수는 원천적으로 제한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소과를 거치지 않고 한 번에 치르는 과거시험도 있었다.

 

영조 임금 당시 기록을 보면 이 시험에 1만8천명이 응시했는데 기록상으로는 이 기록이 최고의 응시생이라고 할 수 있다.

 

식년시(式年試)는 유일한 정기 과거시험으로 3년마다 한 번 있었다.

식년이란 십이간지 중에서 쥐.토끼.말.닭띠 해를 말한다.

그 전에 소과 초시를 보고 그 해 2월에 소과 복시를 본다.

 

초시에는 한양에서 , 생원시.진사시에 각 200명을 뽑는 등 전국에서 생원시,진사시에 각각 700명씩 도합 1400명을 뽑았다.

 

여기에 성균관이나 지방 수령이 별도로 인재를 뽑아 소과 복시에 응사 할 수 있도록 했으니

성균관에서는 10명( 후일 12명으로 늘어남).개성과 수원에서는 4명.제주도에서 2명이 정원이었다.

 

이밖에도 관료들이 별도로 시험을 봐서 초시를 거치지 않고 복시에 응시할 수 있도록 했는데 그 인원은 그리 많지는 않았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초시를 통과한 사람이 식년 3월에 서울로 모여 과거시험을 치르는데 규정대로 한다면 대략 1500여명 정도가 응시한 것으로 보고 있다.

 

여기에 생원 100명.진사 100명을 뽑는다. 생원.진시만 되어도 일단 양반으로서 행세를 하는데는 별 지장이 없었다.

 

1차에서 240명.

2차에서 최종 합격자는 33명을 선발 했다.

 

본과인 문과에는 본래 생원과 진사과만이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대략 200명이 이 시험을 보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옛날 이야기에서 보듯 생원.진시가 아닌 유생들도 시험을 보러왔다.

그것은 지방 향교, 사당 같은 교육기관의 독자성을 인정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관의 응시생 수는 들쑥날쑥 이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04회

 

21만1000명 중 단 10~12명만 뽑혔다.

 

1800년(정조 24년) 음 3월21일과 22일 조선의 수도 한양은 수능시험과 대기업 입사시험일을 방불케하는 시험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21일에는 왕세자(순조)의 책봉을 기념하는 특별시험인 경과(慶試·경사스러운 일을 맞아 치르는 과거) 초시가, 22일에는 춘당대에서 인일제(人日製·성균관 유생들을 대상으로 치른 특별과거)가 잇달아 열렸다.

 

“21일의 경과(초시)는 3곳으로 나누어 치렀는데 총 응시자는 11만1838명에 달했고, 시권(답안지)를 바친 자는 모두 3만8614명이었다. 과거 역사상 관광인(觀光人)이 이렇게 많은 적이 없었다. ~인일제는 바로 경과의 다음날에 실시했는데, 과거응시자는 모두 10만 3579명이었고, 시권을 바친 자는 3만 2884명이었다…”

<정조실록. 홍재전서>

 

문헌에 기록된 이틀간의 문과 응시자수는 21만5417명에 이른다. 이중 답안지를 제출한 응시생만 해도 7만1498명에 이르렀다.

 

이 뿐이 아니다.

 

이것은 문과 응시생만의 통계이다. 따로 뽑은 무과 응시생은 3만5891명에 달했다. 문·무과를 합하면 28만6915명이다.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에 기록된 1800년 3월21~22일의 특별과거. 왕세자(순조)의 책봉을 축하하기 위해 실시됐다.

 

이틀간 치른 시험에 무려 21만영이 응시했다.

 

궁금증이 든다. 정조는 왜 이틀 연속으로 각 차마다 10만명이 넘는 시험을 치렀을까.

 

원래 정조가 왕세자(순조)의 책봉을 맞아 기획한 특별과거는 경과 하나 뿐이었다.

 

그러나 10만명이 넘는 응시자가 경과에 지원하자 ‘한번 더’의 시험을 치렀는데,

 

그것이 바로 인일제였다.

 

인일제는 원래 성균관 유생들을 대상으로 하여 보인 특별 과거였다.

 

원칙적으로 인일제에서 상위 3등까지는 곧바로 과거(대과) 합격의 영예를 내렸다.

 

원창애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은 “그러나 정조가 치르도록 명령한 1800년 3월22일의 인일제는 성균관 유생 뿐 아니라 ‘경과’ 응시를 위해 상경한 경향 각지의 유생들에게 문호를 한번 더 열어준 추가시험의 성격이 짙다”고 전했다.

 

이 가운데 두번째 날인 인일제에서 장원급제한 이는 서울의 유학 김수종과 호서의 유학 이남익 등 단 2사람이었다.

 

이들에게는 임금 앞에서 최종 평가를 받는 전시에 참여할 자격을 주었다. 두 사람은 요즘으로 치면 행정고시 최종합격증을 받은 셈이다.

 

임금 앞에서 치르는 시험은 그저 최종합격자들을 대상으로 등수만 가리는 시험이다. 당락과는 관계없다.

 

인일제에서는 이 두 사람 외에 차점자 100명에게 경과 초시 합격증을 추가로 발급했다.

 

결국 인일제 급제자 2명은 대과 급제자의 명단에 올랐고, 하루전 치른 경과 초시 합격자 1000명과 인일제 차점자 100명 등 1100명은 다시 본시험을 치렀다.

 

<정조실록>은

“정조는 이때의 경과에서 10명을 급제자로 뽑으라”는 명을 내렸다. 새삼 따져보면 어마어마한 경쟁률이다. 문과만 계산해도 이틀간 21여 만 명이 치른 과거시험에서 단 ‘12명’(익일제 급제자 2명 포함)의 합격자를 냈다. 경쟁률이 얼마인가. 자그만치 1만8000대 1이 아닌가.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05회

 

조선은 가히 시험의 나라였다

 

과거 합격자의 평균 연령이 35살 내외였는데,

보통 5살 때 과거공부를 시작한다면 무려 30년 이상 머리를 싸매고 공부해서 시험을 치러야 겨우 합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국가시험만 5차례 거쳐야 했다.

 

과거시험은 원칙적으로 3년마다 실시됐다.

수험생들은 한번 떨어지면 최소 3년을 기다려야 했으니 합격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었다.

 

우선 예비시험인 소과의 경우 초시(1400명 선발)를 거쳐 복시를 통과한 200명이 생원(100명)·진사(100명)가 됐다.

생원·진사가 돼야 본시험인 대과(문과)를 치를 수 있었다.

 

대과 역시 1차시험격인 초시에서 240명을 선발했고,

다시 이 240명이 2차 시험인 복시에 응시할 수 있었다.

 

이렇게 4차례의 시험에서 뽑힌 33명의 과거급제자가 꿈에 그리던 문관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행정고시 최종합격자이다.

3년에 한번씩 불과 33명을 뽑는 행정고시라면 어떤가. 당대의 공시생들이 감당할 수 없는 바늘구멍 고시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합격자 33명에게는 또 하나의 관문이 남아있었다.

 

그것은 바로 임금 앞에서 치러야 하는 전시(殿試)이다. 33명을 대상으로 치르는 이 전시는 당락을 가르지는 않는다.

 

임금이 직접 출제한 시험문제로 임금 앞에서 33명의 등수를 가릴 뿐이다.

 

갑과 3명, 을과 7명, 병과 23명 순으로 매겼으며 1등 합격자는 당연히 장원급제자로 일컬어졌다. 이 시험을 책문(策文)이라 한다.

 

종이가 없던 시절 대나무 조각(죽간·策)에 문제를 써서 응시자에게 주면(策問) 응시자가 이에 대한(對) 생각을 적은 대나무(策)을 제출했다.

 

이것이 요즘 우리가 말하는 대책(對策)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06회

 

그리고 갑.을.병 각 급제자는 관리로 등용할 때도 차별을 했다.

흔히 장원 급제란 갑과(3명))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성적을 차지한 사람을 말한다 곧 수석합격이라는 말이다.

 

이같이 정기 과거는 소과에서 본과에 이르기 까지 복잡한 과정을 거쳤고 각 지방에서 몇 명이 응시했는지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전국적인 응시생의 숫자는 알려지지 않았다.

 

 

특별시험도 있었다.

항상 특별이 문제가 아닌가?

 

이밖에 국가적으로 경사가 있을 때 치르던 중광문과나 별시문과도 있었는데 정기사험과 같은 방법으로 치러졌다.

 

반면 단 한 번으로 당락이 결정되는 시험이 있었다.

이들 시험은 기간도 짧고 단 한 번에 결판이 나기 때문에 운이 많이 따랐다,

그래서 특히 응시생이 많았다. 이를 살펴보자

 

‘외방별시’는 임금이 온천에 가거나 지방에 출타 했을 때 그 곳에서 보는 시험이다.

자주보는 시험은 아니어서 10년에 한번 꼴로 보았고 인원도 한번에 3명 정도만 뽑았을 정도다.

그러나 이들은 과거급제자와는 엄연히 구별되어 대부분 정기 본과인 복시에 곧 바로 응시 할 수 있는 자격을 주는 정도였다. 물론 급제대우도 받은 사람도 있다.

 

‘외방별시’보다 인기가 있었던 것이 ‘알성문과’다.

 

임금이 제례를 올린 다음 친히 시험을 치르는데 단 한 번의 시험으로 급락을 결정 할 뿐만 아니라

고시 시간도 짧고 과목도 한 과목이고 또 당일 발표하기 위해 채점하기 쉬운 문제를 냈기 때문에 운이 많이 따랐다고 할 수 있다.

 

처음에는 성균관 유생들만 응시할 수 있었는데 인원이 많지 않았지만 지방 유생들도 웅시할 수 있도록 했다.

 

영조임금 당시 1만8천명이 응시한 시험이 바로 이 ‘알성문과’ 시험이다.

 

그전 숙종 임금때도 알성문과에 한꺼번에 1만여 명이 응시했다고 한다.

 

이밖에도 국가의 중대사.경사에 있을 때 실시하는 시험으로 ‘정시문과’.‘춘당대시문과’.

등이 있었고 한번의 시험만 보았기 때문에 응시자가 많이 몰렸다고 한다.

 

 

비록 책문이 당락을 결정하지 않지만 합격자의 등수는 향후 관직생활에서 결정적인 변수가 됐다. 즉 갑과 1등인 장원급제자는 곧바로 종 6품에 제수됐다.

 

종 9품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는 다른 급제자보다 적어도 7년 이상 앞서 나가는 셈이 된다.

 

게다가 장원급제자 및 갑과 합격자는 이조·병조·사간원·사헌부·홍문관 등 핵심권력기관인 이른바 청요직(주1)에서 출발할 수 있었다.

 

주1)

'청렴해야 하는 중요한 자리’라는 뜻으로, 조선시대 삼사(사헌부·사간원·홍문관) 등 감찰·간쟁을 맡는 관직을 가리킨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07회

 

 

“자세히 진술하라. 내가 직접 볼 것이다”

 

따라서 책문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지치 않은 시험이었다.

책문은 이처럼 과거의 마지막 관문인 전시에서도 출제됐지만 성균관 유생들에게도 출제됐다.

 

또 관리들이 매달 치러야 했던 월과(月課)의 문제로도 활용됐다.

 

예컨대 중흥군주인 정조는 자신이 직접 양성하는 초계문신들을 대상으로 집요하게 책문 시험을 실시했다.

 

책문은 주로 왕조가 당면한 현안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묻고 대답하는 글이다. 요즘의 논술시험에 비견된다.

 

하지만 최종독자가 다름아닌 임금이며, 그 임금이 직접 채점하는 것이니만큼 책문의 무게를 논술시험과 비교할 수 없다.

 

임금이 기존 정치의 타성을 벗으려고 막 새출발하는 젊은 피의 톡톡 튀는 정책대안을 구하고자 한 것이다.

 

형식은 자못 비장하다.

책문은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王若曰)”면서 긴 글로 출제의도와 글제를 발표한다.

 

그러면서

“자세히 진술하라. 내가 친히 볼 것이다(其悉陣之 予將親覽焉)”라 했다.

 

그러면 응답자들은

“신은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臣對)”라면서

“죽을 각오를 하고 말씀드리겠다”고 말하면서 답안지를 시작한다.

 

마지막에는

“다시 한번 보잘 것없는 말씀을 드려 죄송하고 두렵지만 솔직히 말해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죽기를 각오하고 말씀드린다”면서 “신이 삼가(臣謹對) 대답합니다”라고 마무리 짓는다.

 

상투적인 표현과 형식이 난무하는 것 같다.

그러나 책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관직에 첫발을 내딛는 젊은 피의 개성과 능력, 정치적인 포부가 넘쳐흐른다.

 

임금을 향한 갖가지 찬사를 늘어놓으면서 기어코 할 말은 다 한다.

 

정조의 책문에 대해 초계문신 이면승은

“담배가 인삼이나 술, 음식보다 월등한 공덕을 지녀 득만 있고, 실은 없다”면서 정조의 출제의도에 ‘깔맞춤 모범답안’을 제출했다.

 

정조의 ‘남령초’ 책문에 이면승이 제출한 대책은 이면승의 <감은편>에 실여있다.

 

과연 정답 일까?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08회

 

논술고사와는 비교할 수 없다

 

책문의 내용을 보면 주로 정치·사회·군사·국제 등 복잡하고 시급한 정치현안의 문제를 다룬다.

 

대책은 “나라를 망치지 않으려면 왕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명종의 질문(1542년 증광문과)에

“진리를 탐구하고 소인을 가려애야 한다”(노진·1518~1578)의 대책과,

 

“법의 폐단을 고치는 방법은 무엇이냐”는 세종의 책문(1447년 문과중시)에

“역사 사례에서 배우라”(성삼문·1418~1456),

“언로를 열어 직언을 들으셔야 한다”(신숙주·1417~1475),

“깃털처럼 보잘것 없는 의견도 들어야 한다”(이석형·1415~1477)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책문의 독자가 임금인 이상 임금의 심기를 건드린다면 어찌되겠는가.

 

임금이 제 아무리

“기탄없이 자네의 포부를 펼쳐보이라” 해도 임금의 심기를 건드리는 표현과 형식의 글을 제출하거나 때로는 임금과 임금 측근의 인사들을 비판하는 내용이 담겨있다면 횡액을 당하기도 했다.

 

1611년 광해군의 책문에 임숙영은 “전하가 나라의 진짜 우환과 조정의 병폐에 대해서는 문제를 내지 않았다”면서 “왜 마땅히 내야할 문제를 내지 않는 것이냐”고 직격탄을 날렸다.

 

시험답안지가 일으킨 필화~~

 

1534년(중종 29년) 시행된 과거 시험의 책문 글제는

‘예양(禮讓)을 높이고 풍속을 아름답게 하는 방안’이었다.

 

이에 나세찬(1498~1551)은

“조정은 길을 함께 하는 자끼리 붕당을 만들어 배척하기에 겨를이 없으니 어떻게 잘 다스려지기를 바랄 수 있겠느냐”고 비판하는 대책을 올렸다.

 

당시 권력을 농단하고 있던 김안로(1481~1537)는 자신을 겨냥한 줄 알았다.

제발이 저린 것이다.

 

김안로가 이를 문제 삼았다.

 

나세찬은 40여일이나 갇혀있으면서 총 6차례나 고문을 곁들인 심문을 당했다.

 

나세찬은 “전혀 숨은 의도가 없었다”고 호소했지만

곤장 100대에 원지 부처되는 것으로 일단 봉합됐다.

 

중종은 “그래도 글 짓다가 생긴 일로 죄를 줄 수 없다”고 목숨만은 살렸다.

 

나세찬 사건은 김안로가 죽은 1537년이 되어서야 끝났다.

 

김안로도 참 어지간한 인물이다.

그러나 나세찬은 예문관 응교시절인 1538년(중종 33년) 문무 현직 관리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탁영시에서 장원급제했다.

 

낭중지추(囊中之錐)가 아닐 수 없다.

 

광해군의 ‘나이듬의 서글픔에 대해 논하라’는 책문에 이명한은

 

‘사람은 세월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지만 세월은 사람이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지 않는다’는 답안지를 냈다.

<이명한의 백주집>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09회

 

‘그 자의 임금이 된 자는 너무 괴롭지 않은가’

 

책문이 필화를 일으킨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광해군대의 인물인 임숙영(1576~1623)이었다.

 

광해군은 1611년(광해군 3년) 3월 실시한 별시의 전시에

 

‘지금 나라의 기장 시급한 과제는 무엇이냐’는 제목의 시험을 냈다.

 

그런데 당시 36살의 나이에 급제한 임숙영의 대책이 파문을 일으켰다.

 

“~임금이 하루라도 자기 역할을 생각하지 않으면 덕을 잃어버리게 되고 결국 망하게 됩니다. 밖에서는 외척을 빙자해 위세를 떨치고 안에서는 왕비나 후궁의 세력을 끼고 욕심을 채우려 합니다.”

 

임숙영의 칼날은

척족의 횡포와 함께 임금의 생모인 공빈 김씨에게 왕후의 존호를 올리려 한 이이첨(1560~1623)을 겨누는 것 같았다.

 

그러나 책문의 주제를 하나로 좁히자면

 

“나라의 병폐는 왕 당신에게 있다”는 것이었다.

 

화가 난 광해군은 임숙영을 급제자 명단에서 삭제할 것을 명한다.

이것이 삭과파동이다.

 

광해군은 “임숙영의 답안을 보니 주제에 벗어나 오로지 임금을 능멸하는 것을 능사로 삼았으니 너무 무례하다”고 비판했다.

 

광해군의 덧붙인 한마디가 재미있다.

 

“임숙영의 임금된 자(광해군)가 너무도 괴롭지 않겠는가.”

 

이에 삼사(홍문과·사헌부·사간원)는 물론 재야에서도 임숙영 삭과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상소가 빗발친다.

 

영의정인 이덕형과 좌의정 이항복 등도 삭과의 부당성을 논변하고 나섰다.

 

결국 광해군은 “두 정승의 청을 받아들여 과인의 명을 접는다”고 뜻을 굽혔다.

 

그러나 광해군은 “주제에 벗어난 답안의 폐단이 적지 않다”면서

“게다가 응시자가 출제자의 문제와 상관없는 답안을 미리 지어오는 폐단을 키워서는 안되니

다음부터는 결코 뽑지 말아야 한다”고 밝힌다

<광해군일기>

 

학봉 김성일의 <학봉속집>에 나오는 퇴계 이황의 일화.

 

퇴계도 과거에서 3번이나 낙방했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퇴계는 “24세 때 연이어 세 차례나 낙방하였어도 낙담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퇴계는 “때때로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까닭에 욕을 당한다고 생각해서 잠간 과거 급제와 낙방에 관심을 가졌다”면서

 

“과거가 사람을 동요하게 하는 것이 몹시 두려워할만하니 그대들은 경게하라“고 했다. 과거에 세번 낙방한 퇴계는 훗날 조선성리학의 기초를 세운 인물이 됐다.

 

엉뚱한 곳에 옮겨붙은 불똥~

 

가만 보면 광해군의 주장에도 일리는 있다.

출제자의 의도와 상관없는 대책을 미리 생각했다가 짓는 행위 또한 정당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임숙영 삭과파동은 엉뚱한 곳으로 불똥이 튀었다.

 

1612년(광해군 4년)당대의 시인인 권필(1569~1612)이 이 무렵 지은 ‘궁류(宮柳)’라는 시가 또 필화를 일으켰다.

 

“궁궐 버들은 파릇파릇하고 꾀꼬리 이리저리 나는데(宮柳靑靑鶯亂飛) 온 성안의 벼슬아치 봄빛에 재롱부리는구나.(滿城冠蓋媚春輝) 조정에는 태평의 즐거움을 함께 축하하는데(朝家共賀昇平樂) 누가 위태로운 말을 포의에서 나오게 했는고.(誰使危言出布衣)”

 

시의 제목인 궁류(宮柳)는 광해군의 부인인 유씨(1576~1623)와 처남인 유희분(1564~1623)·유희발(1568~1623) 형제를 가리키는 것 같았다.

 

‘파릇파릇하다’는 ‘권세가 극성스럽다’는 뜻이고,

 

‘봄빛’은 ‘광해군’을 일컬으며,

 

재롱 떤다’는 ‘화려한 관을 쓴 벼슬아치들이 온통 권세에 아첨한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권필은 영의정 이덕형·좌의정 이항복 등 재상들의 청원으로 죽음만은 면하고

유배형의 처결을 받았다.

 

그러나 몸이 원체 허약했던 권필은 매우 혹독한 곤장을 맞아 들것에 실려 도성문을 나간 뒤 장독(杖毒)이 퍼져 죽고 말았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10회

 

광해군의 센치한 시험문제~~

 

지긋지긋한 삭과 파동에 질린 탓일까.

광해군은 1616년(광해군 8년) 치러진 증광회시에서 낸 책문, 시험문제가 걸작이다.

 

‘섣달 그믐밤이 되면 서글퍼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에 대해 논하라’는 것이었다.

광해문의 책문을 한번 보자

 

“가면 반드시 돌아오니 해이고, 밝으면 반드시 어두우니 밤이로다. 그런데 섣달 그믐밤에 꼭 밤을 지새우는 까닭은 무엇인가. 세월이 흘러감을 탄식하는데 대한 그대들의 생각을 듣고 싶다.”

 

광해군의 ‘센치’한 문제에 정치·경제·사회 등 각 분야의 현안을 예상문제로 뽑아 잔뜩 외우고 공부했을 수험생이라면 몹시 당황했을 것이다.

 

혹시 ‘임숙영 삭과파동’을 떠올린 광해군이 수험생들에게 전혀 생각할 수 없는 글제를 내린 것은 아닐까.

 

주제와 상관없이 임금에게 직언을 해대는 젊은 급제자들이 딴소리 하지 못하도록 의표를 찌른 것은 아닐까.

 

임금의 글제를 받아든 급제자들의 머리가 하얗게 변했으리라.

 

그러나 광해군의 쉽지만 대답하기 까다로운 이 글제에 제대로 대답한 이가 있었다.

 

바로 당대의 시인이자 문인인 이명한(1595~1645)이다.

이명한은 당대 한문 사대가의 한사람인 아버지 이정구(1564~1635), 아들 이일상(1612~1666)과 함께 ‘대제학 3대’를 지낸 것으로 유명하다.

 

이명한은 광해군의 문제에 일단

“뜬구름 같은 인생이 어찌 이리도 쉽게 늙는다는 말이냐”고 광해군의 심중에 맞장구를 쳐준다.

 

그러나 이명한은 “인생이란 부싯돌의 불처럼 짧고 우리네 인생도 끝이 있어 늙으면 젊음이 돌아오지 않는다”면서

인생이 무상함을 지적한다.

 

이명한은 “유독 섣달 그믐날 밤을 지세우는 이유는 지나가는 세월이 안타까워서…”라 한다.

 

“밤이 새도록 자지 않는 것은 잠이 오지 않아서가 아니고, 둘러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것은 흥에 겨워서가 아닙니다. 묵은 해의 남은 빛이 아쉬워서 아침까지 앉아있는 것이요, 날이 밝아오면 더 늙는 것이 슬퍼서 술에 취해 근심을 잊는 것입니다.”

 

‘세월은 사람이 지나감을 안타까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명한의 한마디 결론은 촌철살인이다.

 

“그런 즉 사람이 세월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이지 세월이 사람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지 않습니다.(然則人能傷歲 歲不傷人)”

<백주집. ‘잡저’>

 

이명한은 광해군이 ‘섣달 그믐밤의 서글픔을 논하라’고 하자 “세월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 또한 부질없는 것”이라는 답안을 제출했다. 답안지의 말미엔 “그저 일평생 학문에 힘써 밤 늦도록 꼿꼿이 앉아 마음을 한 곳에 모으면 된다”고 했다.

 

“그렇게 사색하고 공부하게 되면 늙는 것도 모른채 때가 되면 순순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그럴 경우 무슨 유감이 남겠느냐”는 것이다. 이런 대책을 만 21살의 파릇파릇한 청년 이명한이 제출했다. 마치 세상의 이치를 꿰뚫은 성인군자 같은 답안지가 아닌가.

 

불세출의 답안을 제출한 이명한의 책문은 1등이 아니라 2등의 성적을 얻었다.

그렇다면 장원급제한 답안지는 과연 어떠했단 말인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지만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11회

 

정조의 황당한 책문, “조선을 골초의 나라로 만들 방안을 모색해보라”

 

광해군이 ‘한 해가 저물어감의 서글픔’을 글제로 냈다면, 정조는 그야말로 해괴한

책문을 제시했다.

 

정조는 37살 이하의 젊은 문신 중 정약용 등 뛰어난 이들을 선발해서 따로 관리한 이른바 초계문신 제도를 두었다.

 

정조는 수시로 초계문신들에게 책문을 내려 성적을 가렸다.

 

그런 정조가 1796년(정조 20년) 11월18일 낸 책문이 지금 기준으로는 요절복통급이다.

 

“사람에게 유익한 것은 남령초(담배)만한 것이 없다. ~

이 풀이 아니면 답답한 속을 풀지 못하고 꽉 막힌 심정을 뚫어주지 못한다. ~

담배를 백성들에게 베풀어줌으로써 그 혜택을 함께 하고자 한다.”

 

요컨대 ‘조선을 골초의 나라로 만들 대책을 올리라’는 것이었다. 기가 찰 노릇이다. 임금이 앞장서서 범 국민적인 흡연운동을 벌이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정조임금은 애주가,애연가였다

 

 

■‘담뱃대가 입을 틀어막으니 말실수가 없어진다’

 

‘조선을 골초의 나라로 만드는 방안을 모색하라’는 정조의 이상야릇한 대책에 초계문신들은 어떤 답안지를 냈을까. 최근까지 딱 두 사람의 답안이 기록에 남아있다.

 

이면승(1766~1835)과 박종순(1762~1808)의 답안이다.

 

박종순의 경우

 

담뱃대를 구리와 은으로 화려하게 만드는 사치 풍조를 지적한 답안을 써서 제출했다는 사실이 묘지명에 기록됐다. 그뿐이다. 이면승의 답안만이 전문으로 남아있다.

 

이면승은 초계문신 시절 왕명으로 쓴 시문 만을 모아 <감은편>이라는 책자를 만들었는데, 그중 은과록에 남령초 책문과 답안(대책) 전문을 실어놓았다. 물론 출제자인 정조의 의도에 ‘깔맞춤 모범답안’을 제출했다.

 

이면승은 우선 “담배가 인삼이나 술, 음식보다 월등한 공덕을 지녀 득만 있고, 실은 없다”고 주장했다.

무엇보다 “담뱃대를 물면 사람의 입을 틀어막아 말실수를 범하지 않는다”는 약간은 억지스러운 논리가 흥미롭다.

 

이면승은 또한

“담배가 도입된 이래 3면이 바다인 조선에서 병충해와 귀신, 종기가 사라졌다”면서 ‘이용후생의 방법을 통찰한 성상(정조)의 통찰력’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정조의 입맛에 맞는 모범(?) 답안이다.

 

조선시대 500년간 과거시험 합격자는 약 1만 5천명 수준이라고 한다

 

정식 시험에는 상피제가 적용되었다.

시험성적을 결정하는 시관이 자신과 친분이 있거나 친척들과 한 시험장에 들 수 없게 한 제도다.

그러니 ‘알성문과’와 같은 시험에서는 그것이 적용되지 않았다.

더구나 한번 시험에서 1만 명 정도가 응시했기 때문에 시관들도 답안을 충분히 검토할 시간도 없었다.

그래서 이런 시험에서는 갖가지 불법행위들이 난무하기 일쑤였고 많은 뜻있는 학자들로 하여금 과거를 외면하게 만들기도 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12회

 

 

과거시험의 부정과 비리

대행하여 합격 시켜주는 작업 등~~

 

만 마리 개미가 쟁투하는 과거장~~

 

앞서 정조 때(1800년 정조24년 3월) 치른 특별과거에서 21만명이 넘는 수험생이 응시해서 제출한 답안지가 7만여장이라 했다

 

응시생 중 3분의1만 답안지를 낸 셈이다.

이게 어떻게 된 걸까? 시험이 너무 어려워서 답 쓰기를 포기한 이가 14만명에 달했다는 얘기일까?

 

단원 김홍도(1745~1806?)의 풍속화를 보면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

 

미국의 개인소장가가 갖고 있다가 정병모 경주대교수의 주선으로 구입 환수하여 국내 경매를 통해 경기 안산시의 품에 안긴 그림이다

 

그림 위에

‘봄날 새벽 과거시험장(공원춘효·貢院春曉) 만 마리 개미의 싸움이 격렬하니(萬蟻戰감)…’라고 시작되는 표암 강세황(1713~1791)의 글이 적혀있어서 ‘공원춘효도’라는 제목이 붙었다고 한다

 

이상하다.

과거시험장인데 왜 만 마리의 개미가 치열한 싸움을 벌인다는 것인지.

 

단원 김홍도의 이 그림은 문자 그대로 ‘난장판’ 같은 ‘과거시험장의 풍경’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것이다.

 

강세황의 글이다

 

“어떤 이는 붓을 멈추고 골똘히 생각하며, 어떤 이는 책을 펴서 살펴보며, 어떤 이는 종이를 펼쳐 붓을 휘두르며, 어떤 이는 서로 만나 짝을 이루며 이야기하며, 어떤 이는 행담에 기대어 졸고있는데…등촉은 휘황찬란하고, 사람들은 왁자지껄하다.”

 

이게 조선 후기 과거시험장의 민낯이었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이 언급한 난장판 과거시험장의 모습도 있다고 한다

 

조선은 과거시험으로 인재를 선발했다.

 

중세 유럽의 정치권력은 세습되었다. 그러나 조선은 과거 시험으로 등용했다

 

그런데 그 과거시험에서 부정이 많았다.

 

<성종실록>과 이수광의 <지붕유설>에 따르면 과거 시험장에 대놓고 책을 갖고 들어갔다.

예상 답안지를 작성해서 갖고 들어갔다.

 

시험지 바꿔치기.채점자 매수,합격자 이름 바꿔치기.시험장 밖에서 작성한 답지 들여보내기~

 

이밖에도 이른바 커닝페이퍼를 콧구멍에 넣거나 종이로 만든 속옷에 글을 써서 입거나 아주 작은 책을 만들어 옷속에 숨겨 들어가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야말로 기상천외한 부정행위가 난무 했다.

 

이익의 <성호사설>, 박제가<북학의>. 한양의 풍물을 노래한 <한양가>에서

과거시험장은 한마디로 난장판이었다도 한다.

 

난장판이 되어 버린 과거시험장 주변은 공정성이 완전히 무너졌음을 보여 주는 용어들이 난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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