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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조선잡사(27)/받은 글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13회

 

시험장에 들어 갈 때 예상 답안지 또는 참고서를 넣고 들어가는 책행담(冊行擔).

작성된 답안지를 대신 필사해 주는 서수(書手), 몸싸움을 벌여 좋은 자리를 잡아주는 선접군(先接軍), 시험장에서 상부상조하기로 한 팀을 일컫는 접(接).좋은 자리를 선점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는 쟁접(爭接) 등이 버젓이 활동했다.

 

가장 심각한 것은 거벽(巨擘)이었다.

거벽은 과거시험 답안지를 대신 작성해 주는 일종의 대리시험 전문가다.

 

유모(乳母)라는 은어로 불리기도 했다.

<정조실록>에 따르면 서울의 고봉환, 송도의 이환룡. 호남의 이행휘. 호서의 노궁.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영남의 거벽 유광억은

이옥이 지은 <유광억전>의 주인공인데

그는 부잣집 아들의 과거 시험 답안지를 대신 작성하여 합격시켜 주고 많은 돈을 받았다.

 

‘접(接)’이 탄생한다~~

최소 3명에서 그 이상으로 이루어진 과거시험 대비 특별팀이 탄생하며

‘접’을 중심으로 한 팀 플레이로 과거시험에 대응했다.

 

왕조실록의 기사를 보자

 

“며칠전에 빈촌에 사는 한 여인이 나물을 캐다가 노끈이 땅속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잡아 당겨보니 그 노끈이 땅속을 통하여 담장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래서 재직 및 다른 관노의 무리들이 가서 보고 땅을 파해치니 노끈이 들어 있는 구멍이

제2대밑에 있었는데

한가닥의 통로가 평지에서 반자쯤 되는 땅속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 대나무 통을 묻고 바늘처럼 죽 이어 구멍을 통하게 한 뒤 다시 기와로

덮어서 20여 간을 지나 동쪽 담장 밖 벽송정가로 나와 있었습니다.“

 

<숙종 실록 31년(1705년)2월18일>

 

심지어 커닝 한번 하려고 대규모 굴착작업까지 했다

그야말로 최첨단 장치였다.

 

대나무 통을 땅에 묻고 그 안에 노끈을 연결해 시험문제와 답안지를 전달했다는 것이다.

기가 막힐 일이다

 

숙종에게 보고될 정도로 파장이 큰 문제였지만 결국 범인은 색출하지 못했다.

중국 송나라 시대 과거 응시생이 커닝을 위해 속옷에 가득 커닝 페이퍼를 적성했는데

사서삼경과 주석 등 무려 70만자를 적어놓았다고 한다.

 

홍패가 안되면 백패라도~~~

홍패와 백패는 양반과 가짜 양반을 구별하는 증명서였다.

 

홍패는

대과 최종시험에 합격한 33명에 주어진 합격증명서이고

 

백패는

소과합격자(생원.지사)에게 주어진 합격증명서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14회

 

 

불한당이 들이닥친 사연은?

 

부정과 야합,온갖 협잡이 난무했던 조선 후기 과거시험장

 

응시생들로부터 한 몫 잡아 보려는 ‘과거꾼’ 등장했다.

 

“과거철이 되면 서울과 시골에서 빈등거리며 놀고 있는 무리들이 관광핑계 되고 세력가의 수종이 되기 위해 자원을 하여 한양으로 몰려든다.”

<우하영의 천일록>

 

백수. 불한당이 과거시험장에서 힘쓰는 역할 수행하다.

 

“힘센 무인들이 들어오며 심부름 하는 노비들이 들어오고 술파는 장사치까지 들어오니 과거보는 뜰이 비좁지 않을 이치가 어디에 있으며심한 경우에는 망치로 상대를 치고 막대기로 상대를 찌르고 싸우며 문에서 횡약을 당하기도 하고 길거리에서 욕을 얻어목기도 하며.......”

 

“마당이 뒤죽박죽 되고…심한 경우에는 망치로 막대기로 상대를 때리고 찌르고 싸우며…문에서 횡액을 당하고…심지어는 남을 죽이거나 압사하는 일까지 발생한다”

<박제가(1750~1805)의 북학의>

 

1686년(숙종 12년) 4월3일 명륜당에서 실시된 과거장에 먼저 들어오겠다며 아귀다툼을 벌이던 선비 가운데 8명이나 압사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숙종실록>은 이 참극을 소개하면서

“죽은 자들뿐 아니라 위독한 사람들도 많아서 성균관 주변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난 번 방방에서 생원과 진사를 다른 사람이 하여 시험에 합격한 자가 있으니 오로지 징옥이 엄하지 못하여 시제를 누설해서 알려 주었기 때문입니다.

청컨대 극위(시험장 울터리)를 튼튼하게 설치하여 출입하는 사람을 엄하게 금하소서‘

<성종실록 18년 (1487년02월23일>

 

 

과거시험 커닝도 진화했다~~

17세기 들어 완전히 무너져버린 과거시험의 공정성

심지어 시험장 밖으로 나가 답안지를 작성하거나 시험장 안으로 책을 반입해서 베끼는 일이 횡행했을 정도다.

 

과거시험도 팀 플레이로 이루어 졌다.

개인 시험에서 조별과제 형태로 시험이 변화된 것이다.

개인 혼자 과거 초시에 합격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응시생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조별 과제를 주어 시간을 절약하고자 했던 것이다.

 

현제판과 즉일 방방

 

현제판이란

현제판을 보고 문제를 베껴 시험을 보는 방식으로 현제판에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아야 유리했다

현제판 앞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며칠전부터 선접꾼이 몸싸움을 전담하는데 영역을 표시하거나 말뚝을 박거나 양산을 들고 과장 앞에서 진을 치기 시작했고

 

시험 당일 날에는 과장 문이 열리면 산접꾼이 과장으로 먼저 달려가 자릴 차지하는 싸움이 일어난다.

심지어 이 과정에서 다치는 일을 비일비재하고 죽는 일도 발생한다.

 

6인조 입시비리단~~

 

그렇게 목숨을 걸고 시험장에 자리를 잡은 6인조는 어떻게 부정행위를 저질렀을까?.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15회

 

단원 김홍도가 그린 ‘공원춘효도’를 보면 추측 가능한 장면이 나온다고 한다

 

먼저 초롱불을 켠 새벽임을 알 수 있는데.

자리를 맡아놓은 파라솔 같은 우산(일산)과 말뚝, 쇠몽둥이, 평상, 짚자리, 책가방 등을 들고 밀고 들어온 선접과 수종, 노유 등의 모습이 보인다,

 

그렇게 자리를 잡았으니 이제 그들의 역할은 끝난 것이다. 그림 보면 이들은 쉬고 있죠.

 

이제부터 응시자(거자)와, ‘문장 전문가’인 거벽, ‘글씨 담당’인 사수의 차례다.

 

문장이 뛰어난 ‘거벽’은 출제자의 의도에 따라 답안의 내용을 전문으로 지어주는 역할이다.

‘사수’는 거벽이 지어준 문장의 글씨를 빨리, 잘 대신 써주는 사람이다.

‘거벽’이 책가방에 숨겨온 예상답안지나 참고서를 꺼내 일필휘지로 답안을 지어내면

‘사수’는 촌각의 지체없이 글씨를 써서 제출했다.

정작 시험을 치르는 수험생인 거자는 무엇을 했을까?

아무 것도 안했다.

다산도 그런 응시생들이 한심스럽다고 혀를 끌끌 찹니다.

 

“부잣집 자식은 입에 아직 비린내가 난다. 아직 ‘고무래 丁(정)’자도 몰라도 거벽의 글과 사수의 글씨를 빌려 시권(답안지)를 제출한다.”(<경세유표>)

 

1800년 두차례의 특별 과거에서 21만여명이 참여했지만 답안지 제출은 7만여장에 불과한 이유가 있었다.

 

나머지 14만명 중 상당수가 바로 입시비리단 멤버였을 것이다.

 

그래서 김홍도의 그림에서

강세황이 ‘새벽 과거시험장에서 만마리 개미가 격렬하게 싸운다’고 표현한 것이다.

이들은 우산대와 말뚝, 막대기 등을 휘두르며 달려가 우산(일산)을 펴고는 ‘내 자리요!’하고 맡아놓았다.

 

다산 정약용은 이들을 두고

“노한 눈깔이 겉으로 불거지고 주먹을 어지럽게 옆으로 휘두르고 고함을 지르고 달려든다”고 표현했다.

물론 이들이 머리에 고양이 귀같은 검은 유건(儒巾·유생들이 쓰는 관모)을 써서 수험생으로 위장했다.

 

즉일 방방이란

과거시험 결과를 당일 채접을 해서 합격자를 발표하는 방식이다.

 

수작업으로 3만명의 답안지를 채점해서 당일 합격자를 발표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 했다.

그래서 먼저 제출한 답안지 300장 안팎을 채점해서 합격시키는 방식이다.

완전히 편법이다.

 

조선시대 과거 대 제출된 답안지(시권). 적게는 수천장에서 많게는 수만장에 이르는 답안지 가운데 채점관의 눈에 들기 위해서는 빨리 제출해야 했다.

 

사수가 베껴온 문제를 거백이 대신 풀고 다시 사수가 정리해서 답안지를 완성하여 선접꾼에게 전달하고 이 선접꾼은 3백장안에 채점관에게 전달한다

 

선착순이라니 부당합니다~~

대사간 성정진이 정조임금에 상소를 했다.

 

“과장에서 시권을 일찍 올리는 페단은 시험을 관장하는 사람이 일찍 가져가기 때문입니다.

생각건대 전하께서 그 페단을 깊이 생각하시어 특별히 시각을 한정하고 호명하여 올리도록 하셨는데 금년 가을 감시의 이소에서 뽑힌 글을 보면 3백장 안에서 나왔으니 조정에서 명령을 신실하게 행하는뜻이 도데처 어디 있습니까?

<정조실록 21년(1797년)9월24일>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16회

 

 

반나절에 답안지 7만장을 채점했다.

 

아니 채점관들이 어떻게 적게는 수천장에서 많게는 7만장이 넘는 답안지를 채점했단 말일까?

 

안그래도 그것이 폐단이라는 걱정이 계속 제기되었다

 

그래서 위와같이 시험관이 선착순으로 답안지를 낸 최초 300장에서 합격자를 뽑고 나머지는 다 버렸다는 상소문이 올라온 것이다.

 

조정에서는 이런 폐단을 막으려고 시험관의 명이 있기까지 답안지를 내지 못하도록 했고 일부러 나중에 낸 답안지에서 합격자를 뽑기도 했다

 

그러나 백약이 무효였다.

과거응시자가 기하급수로 늘고, 게다가 객관식도 아닌 주관식 문제를 푼 답안지 수천~수만장을 어떻게 제대로 채점한다는 말일까?

 

초정 박제가는 이를 두고

“한유(768~824) 같은 문장가가 시험을 주관한다 해도 소동파(1037~1101)의 글을 번개처럼 던져버릴 것”이라고 개탄했고

 

“수만명의 응시자를 두고 반나절 사이에 합격자 방을 내걸어야 한다. 그 때문에 지친 시험관은 붓을 잡기에도 신물이 나서 눈을 감은 채 답안지를 내던져버린다”

<북학의>)고 했다.

 

 

 

조직적인 입시부정행위가 적발되어 이미 치른 과거시험이 취소하는 불상사도 일어났다

 

그것이 1699년(숙종 25년)의 기묘과옥과 1712년(숙종 38년)의 임진과옥이다

 

기묘과옥은 실무자인 등록관(필적 부정을 막으려고 응시자 답안을 베껴 채점관에게 넘기는 관리)과 봉미관(답안지 서명란의 봉인 담당 관리)이 청탁을 받은 답안지를 바꿔치기 하거나 고쳐써서 부정합격시켰다가 적발된 옥사다.

이 사건으로 관련자 전원이 절도에 유배되고, 34명이 최종합격한 과거 자체가 무효처리됐다.

 

임진과옥(1712년)의 관련자들은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시험관이 친구 아들과 지인에게 문제를 사전에 유출하는가 하면 답안지에 특정한 암호(앵·鶯)를 쓰게 했다. 실제 ‘천앵출유(遷鶯出幽)’와 ‘곡앵(谷鶯)’과 같은 ‘앵’자가 들어있는 답안지가 적발됐다.

 

시험이 끝난 다음 답지를 제출받아 부정 합격시킨 예도 있었다.

문제의 ‘간 큰’ 시험관은 응시생의 집을 두루 찾아다닌 사실까지 드러났습니다. 결국 과거가 전면 취소됐고, 관련자 3명은 처형당했다.

 

조선 제24때 순조임금이후 세도정치가 시행되면서 세도가들에게 뇌물을 주느냐 여부가 합격을 결정했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고 결국 1894년 갑오개혁을 거치면서 과거제도는 폐지되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17회

 

<과거 시험의 점수를 매기는 방법>

 

과거 시험 답안지를 채점하는 모습을 상상해 본 적이 있나요?

과거 시험의 점수는 어떻게 매겼을까?

 

과거 시험의 평가 기준

 

과거 시험은 고려 시대에 처음 열렸지만, 성적을 평가하는 기준이 만들어진 것은 조선 세종 임금 때였다. 평가 기준은 다음과 같다

 

* 대통 :

문제로 주어진 글의 큰 뜻뿐만 아니라 깊은 의미까지도 막힘 없이 터득한 경우. 그리하여 답을 정확하게 풀이함.

* 통 :

큰 뜻을 터득하고, 글을 해석할 때 막히거나 의심쩍은 곳이 없는 경우. 답안의 내용이 분명하면서도 정확함.

* 약통 :

큰 뜻을 대체로 이해하긴 했지만 완전히 터득하지는 못한 경우. 글짓기나 해석은 모두 잘함.

* 조통 :

뜻을 완전히 해석하지 못하고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했다고는 할수 없지만, 큰 뜻만은 어느 정도 터득한 경우.

* 불통 :

해석과 이해, 문장을 지은 것이 모두 불완전한 경우.

 

이 중 가장 낮은 '불통'을 받은 과목이 하나라도 있으면 낙방이었다.

이처럼 다섯 등급으로 평가한 것은 조선 초기였고. 얼마 뒤에 '통, 약, 조, 불'의 네 등급으로 바뀌었는데, 이 방식은 조선 말기까지 계속되었다.

 

과거 시험을 보기 전에 이름을 바꾼 사람이 있다.~~

과거 시험을 보기 전에 이름을 바꾼 이유

 

고려 중기의 문인인 이규보의 원래 이름은 이인저다.

그런데 과거 시험을 보러 가기 전 어느 날, 갑자기 이름을 '규보'로 바꾸었다.

도대체 이인저는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름을 바꾸었을까?

 

이규보는 시와 문장을 잘 짓는 고려 중기의 문인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 희한한 꿈을 꾸고 나서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그가 22세가 되던 해였다.

과거 시험을 보기 얼마 전, 꿈에 검정 옷을 입은 시골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그들은 모여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이 말하길, "우리는 하늘의 스물여덟 별자리이다."라고 했다. 28개의 별자리는 인간의 여러 운명을 각자 나누어 맡고 있었다.

 

이규보가 절을 한 뒤 이번 과거에 합격할 수 있겠냐고 묻자, 사람들이 그 중 하나를 가리키며 "저 사람이 규성인데, 그에게 물어보라."고 했답니다. '규성'은 과거를 맡고 있는 별자리였다.

 

이규보가 규성에게 다시 묻자, 규성이 말했다.

 

"그대가 이번에 장원 급제하게 되어 있으니 걱정 마라. 그리고 이것은 하늘의 비밀이니 누설하지 말라."

꿈에서 깨어난 이규보는 곧 이름을 '인저'에서 '규보'로 바꾸었답니다. '규보'는 '규성이 장원 급제할 것을 미리 통보해 주었다.'는 뜻이에요. 결국 이규보는 장원 급제를 했다.

 

박제가는 “모든 길을 막아놓고 문을 하나(과거제)만 만들어놓으면 공자님이라도 해도 그 문을 거쳐야 할 것”이라고 한탄했는가 하면

 

정약용도 “천거없이 과거시험으로만 인재를 뽑아 1000가지 병통과 100가지 폐단이 일어난다”고 개탄했다.

 

폐단의 온상으로 지탄의 대상이 된 과거제는 1894년(고종 31년) 갑오개혁으로 폐지된다.

958년(고려 광종 9년) 시작되어 936년 동안 존속해온 과거제가 역사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출처 및 참고문헌: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경향신문)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18회

 

가체장

조선 여심 사로잡은 가체…

 

초가집 수십채 가격 달해

 

“가장이 금하지 못하니, 부녀자들이 가체를 더 사치스럽게 하고 더 크게 만들지 못할까 걱정이다. 근래 어떤 집의 열세 살 난 며느리가 가체를 높고 무겁게 만들었다.

 

시아버지가 방 안에 들어오자 며느리가 갑자기 일어서다가 가체에 눌려 목뼈가 부러졌다.” (이덕무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서)

 

조선시대 패션은 화려했다. 남성은 수정을 잇댄 갓끈과 옥으로 만든 관자, 귀걸이로 꾸몄다.

 

여성은 풍성한 가체(加체)와 현란한 비녀, 노리개로 치장했다. 길고 화려한 갓끈, 높고 풍성한 가체는 요샛말로 ‘잇템’(꼭 갖고 싶은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조선은 엄숙했다.

 

귀걸이는 선조, 가체는 정조 때에 금지했다. 귀를 뚫는 일은 몸을 훼손하는 불효였고 가체는 검소한 미풍을 해치는 사치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여성들은 가체를 버리지 못했다.

정조실록에는 가체 단속을 빙자해 돈을 뜯어낸 사기꾼 일당 얘기가 나온다.

 

가체를 만드는 데는 ‘가체장(匠)’의 전문 지식과 기술이 필요했다.

 

66세 영조와 15세 정순왕후의 혼례를 기록한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에 따르면 가체를 만드는 가체장은 당주홍, 홍합사, 황밀, 송진, 주사, 마사, 홍향사, 소금, 참기름 등을 썼다.

 

다양한 성분의 분말로 만든 용액에 수거한 머리칼을 담가 곧게 펴고 탈색했다.

 

수거한 머리칼은 곱슬머리와 직모, 갈색과 검은색 등 모질과 색이 제각각이었기 때문이다. 탈색한 머리카락은 짙은 검은색으로 염색했다.

 

조선 남성은 상투를 맵시 있게 틀려고 정기적으로 정수리를 깎았다. 이를 ‘베코 친다’고 불렀다. 남성은 베코 쳐 맵시를 더했고, 여성은 그 머리카락으로 가체를 얹어 아름다움을 더했다. 가체를 만드는 데는 죄인이나 승려의 머리카락도 썼다.

 

가체는 단순히 빗으로 빗고 길게 잇대며 땋는 게 아니었다.

 

이른바 검은 구름처럼 풍성하면서 윤기 흐르는 가체를 만들려면 다양한 용액을 다루는 기술과 함께 유행에 맞춰 땋는 기술도 필요했다.

 

먼저 빗으로 가지런히 빗어 머리 타래를 만들었다. 이어 ‘말이 쓰러지는 듯’ 기운 모양새로 땋아 촛농으로 고정했다.

 

이렇게 기본 모양새를 잡은 뒤 광택을 내면 검은 구름처럼 풍성하면서도 윤기 흐르는 가체가 완성됐다.

 

가체는 체괄전(체괄廛·가발 전문매장)에서 팔거나 여쾌(女쾌·뚜쟁이), 수모(手母·미용사)가 방문 판매했다. 가체는 고가에 거래됐다. 재료가 귀했고 수준 높은 제작 기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크기 경쟁까지 더해 가격 상승을 부채질했다.

 

갈수록 높고 풍성한 가체가 유행하자 어린 신부가 가체 무게로 목이 부러질 정도였다. 커진 크기만큼 가격은 치솟았다.

 

실학자 이덕무는 ‘청장관전서’에서 장신구를 포함한 가체 가격이 7만∼8만 전(錢)에 이르렀다고 개탄했다. 이는 초가집 수십 채와 맞먹는 값이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19회

 

‘운송업자’ 차부'(車夫)

 

수레 운임, 무명 2필… 사람 치어 유배도

 

 

“용산의 한 차부가 서울 성중으로 짐을 운반하고 날이 저물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 대개 죄수가 형장으로 끌려갈 때 용산 차부가 수레로 실어가는 것이 상례였다.”

< 수훈의 이순록·二旬錄에서>

 

조선시대 사람이나 화물을 운반하는 운송업자를 차부(車夫)라 불렀다. 이들은 조선 초기 문헌부터 적지 않게 등장한다.

 

특히 용산 지역에는 일찌감치 많은 차부들이 자리를 잡았다.

예종실록에는 용산 차부들이 살인사건 현장에 있었다는 기록이 등장하고, 18세기 구수훈이 지은 ‘이순록’에는 용산 차부들이 사형수를 전문적으로 이송했다고 나온다.

 

1602년 한성부에 속한 차부는 11명이었다.

 

1698년에 편찬된 수교집록(受敎輯錄)에는 총융청과 수어청에 각각 한두 명의 차부를 정식으로 두었다고 기록돼 있다.

 

차부들은 화물을 운송하기도 했지만 정부의 토목공사에 동원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특히 한성부와 민간의 차부들은 과중한 업무에 시달렸다. 심지어 세 수레에 실을 양을 한 수레에 다 실으라고 강요받는 경우도 있었다. 고역을 참지 못한 차부들이 도망을 치기도 했다.

 

정조는 화성 성역화 공사에 차부를 대대적으로 고용했다.

 

1794년 9월 16일부터 1796년 8월 19일까지 공사에 투입된 사람들에게 음식을 주었다는 기록이 13회에 걸쳐 날짜별로 정리됐는데,

 

이 중 10회에 차부들이 등장한다. 모두 646명이 동원됐으니 회당 평균 64.6명이다. 떡, 수육, 술, 생선류가 이들에게 먹을 것으로 제공됐다.

 

승정원일기에는 차부가 수레로 옮길 수 있는 양과 운송료가 기록돼 있다.

 

수레 한 대당 실을 수 있는 짐은 쌀 10섬, 운송료는 무명 2필 정도였다.

 

차부 중에는 수레와 소를 모두 소유한 운송업자도 있었지만 관청 소유의 수레를 자신이 가진 소로 끄는 경우도 많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운송수단과 화물 종류에 따라 차부를 구분하기 시작했다.

 

일본인 정치가 아키야마 사다스케(秋山定輔)가 창간한 니로쿠(二六) 신보(新報) 1894년 11월 28일 기사에는 인력거부(人力車夫)라는 명칭이 등장한다.

 

조선의 자료 역시 이 시기 전후부터는 일관되게 우차부(牛車夫)와 인력거부를 구분해 사용했다.

 

1906년에 발표된 칙령 제81호 ‘지방세 규칙’은 운송사업 분야를 교자세(轎稅), 인력거세, 자전거세, 짐수레세(荷車稅)로 구분해 과세했다.

 

차부 중에는 인력거로 사람을 치는 교통사고를 내 유배를 가거나 단발령을 거부해 투옥된 이들도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차부는 조합을 설립하여 운송업을 조직화하고 사업 영역을 확고히 하면서 전문적인 직업으로 자리 잡았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20회

 

역관(譯官) ~

사신 보좌 무보수 직책~

대신 인삼 80근 거래權을 부여 받았다.

 

… 화포-화약 ‘위험한 거래’도

 

“저 역관(譯官)들은 자기들의 목전 이익만 탐하고 국가의 장구한 계책은 알지 못하여, 수십 년 이래 밤낮 오직 당전의 통용을 소원하고 있다. 이는 그야말로 ‘화살 가는 데 따라 과녁 세우기’나 ‘언 발에 오줌 누기’와 다를 바 없다.” (박지원 ‘연암집’에서)

 

조선은 정기적으로 청나라에 사신을 보내는 사행(使行)을 통해 외교를 이어갔다.

한 번에 보통 300명 정도가 의주에서 압록강을 넘어 요동을 거쳐 북경에 이르는 길을 다녀왔다. 역관은 사신을 보좌하며 통역을 비롯해 현지 관리와 접촉하는 실무를 맡았다.

 

그러나 정기 급료나 먼 길을 오가는 데 필요한 경비는 전혀 받지 못했다.

 

대신 나라에서는 역관에게 한 사람이 짊어지고 다닐 만한 분량인 인삼 여덟 자루(약 80근)를 거래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는데, 이것이 팔포제(八包制)다.

 

조선의 인삼은 중국과 일본에서 만병통치약으로 불릴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1682년(숙종 8년) 당시 인삼 1근이 은 25냥 정도였으니, 인삼 80근의 값어치는 은 2000냥에 달했다.

 

그러나 역관이 사행에 끼는 기회를 잡기는 쉽지 않았다. 사역원(司譯院)에 소속된 역관이 600명이 넘는 데 반해 실제 업무를 수행하는 인원은 70여 명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역관들은 인삼을 팔고 비단, 모자 등 사치품을 국내에 사들여와 되팔아서 부(富)를 쌓았다.

 

오자(誤字)가 적은 좋은 판본의 책이나 희귀한 서적도 역관이 들여왔다. 특히 중국 비단은 혼수로 인기가 높아 시골의 부녀자까지 필요로 했다.

 

이옥(1760∼1815)은 ‘동상기(東廂記)’에서 혼수로 일본산 경대와 러시아산 금갑경을 소개했는데 이 역시 역관이 들여온 물건이다.

 

중국이 수출을 금지한 화약(염초, 유황)이나 중국 지도, 화포(火砲)까지 몰래 들여오기도 했다. 발각되면 사형을 당할 수 있는 위험한 거래였다.

 

사행단은 보통 북경에서 2개월 정도 머물렀는데, 중국 상인들은 조선 사람들이 돌아갈 기일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상인들은 구매 시기를 늦추기로 담합해 인삼값을 폭락시키기도 했다. 역관들이 힘들게 가져온 인삼을 도로 조선으로 가져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줄다리기 끝에 승리한 역관들은 큰 부자가 되었고, 대를 이어 역관을 배출했다.

 

대표적인 가문으로 밀양 변씨, 인동 장씨, 천령 현씨, 해주 오씨가 있다.

 

17, 18세기 조선의 큰 부자들은 역관 가문에서 나왔다.

 

박지원의 ‘허생전’에서 허생에게 선뜻 1만 냥을 빌려준 ‘변 부자’도 역관 출신으로 한양 갑부였던 변승업의 할아버지다.

 

1680년 청과 일본이 직접 교역을 시작하고, 1707년 책문후시(柵門後市)가 열리며 역관의 수입은 점차 줄었다.

 

가난한 역관들은 자신들이 지닌 팔포(八包)의 권리를 개성이나 평양의 상단에 팔아넘기거나 아예 다른 일을 찾아 나서기도 했다.

 

19세기 들어서는 예술에 전념하거나 중국 문인과 직접 교유하며 인정받은 역관들도 나왔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21회

 

헌책 중개인 ‘책쾌’(冊쾌)

‘맹자’ 한질 현 시세로 40만∼100만원 거래

 

“‘합강(合綱)’과 같은 판본의 책이라면 경사(經史)와 제자서(諸子書), 잡기(雜記), 소설(小說)을 따지지 말고, 한 책이든 열 책이든 백 책이든 구해오기만 해주시오.” (유만주·흠영·欽英·1784년 11월 9일)

 

이덕무(1741∼1793)는 생활이 궁핍해지자 ‘맹자’ 한 질을 200전에 팔아 처자식을 먹였다. 그 소식을 들은 유득공은 ‘춘추좌전’으로 술을 사서 이덕무와 함께 마시며 서로의 처지를 위로했다.

 

책은 책쾌(冊쾌)를 통해 거래했다. 책쾌는 책의 판매자와 구매자를 연결해 주는 중개인이다. 서쾌나 책거간꾼으로도 불렸다. 가난하거나 권세를 잃어 망해 가는 집안에서 흘러나온 책을 시세의 반값에 사서 제값에 되팔았다.

 

종이가 귀해 편지도 빈 공간 없이 쓰던 시절이니 책의 귀하기는 말할 나위가 없다. 단권으로 엮인 ‘대학’이나 ‘중용’도 품질이 아주 좋은 옷감인 상면포 3∼4필을 주어야 살 수 있었다. 이는 2∼3마지기 논의 1년 소출과 맞먹었다. 이덕무가 ‘맹자’ 한 질 값으로 받은 200전(2000푼)은 지금으로 치면 40만∼100만 원 정도다.

 

이런 상황이니 책은 권력을 가진 경화사족(京華士族)들이 먼저 차지했다. 조정에서 받은 책과 연행(燕行)을 통해 수입한 책, 책쾌를 통해 구입한 책들이 그들의 개인 서고에 쌓여 갔다.

 

책쾌는 고객이 원하는 책이라면 희귀본이나 금서(禁書)라도 구할 수 있는 정보력이 필요했고, 이왕이면 많은 책을 가지고 다닐 수 있어야 했다.

 

유명한 당대의 책쾌 조신선(曺神仙)은 책의 이름만 대면 저자와 권수, 출간연도와 판본을 줄줄 읊었다. 내용도 모르는 게 없었으며, 어떤 책이 누구로부터 어디로 팔려 갔는지도 알았다고 한다.

 

조신선은 이름과 사는 곳도 알려지지 않았지만 100세가 넘도록 늙지 않아 신선으로 불렸다고 하니, 아마도 그를 닮은 자손이 책쾌의 업을 이어갔던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유만주는 조신선의 단골로 주로 중국에서 수입한 명청대 책을 샀다. ‘사변’은 200푼, ‘패문운부’는 8000푼에 샀으며, ‘정씨전사’와 ‘김씨전서’는 4만 푼에 달했다고 한다. 다산 정약용도 1776년과 1800년 두 차례 책쾌 조신선을 만난 적이 있다.

 

최한기(1803∼1877)는 책쾌가 하도 드나들어 집 문턱이 닳아 없어질 정도였다고 한다. 책을 사는 데 돈을 너무 써서 말년에는 지금의 한국은행 자리에 있던 집을 팔고 성문 밖으로 이사를 가야 했다.

 

18세기 이후 책이 활발하게 수입되고, 조선에서 인쇄된 방각본과 한글 소설도 유행하면서 책쾌의 영업은 크게 융성했다.

 

영조 때 일어난 명기집략(明紀輯略·중국에서 들여온 책으로 조선 왕을 모독하는 내용이 실림) 회수 사건은 그에 휘말려 죽은 책쾌가 100여 명에 달했다. 얼마나 많은 책쾌가 활동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조선 지식인들의 학문적 성장에는 책쾌의 노고가 있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22회

 

조총 사냥꾼 ‘산척’(山尺) ~

 

호랑이 가죽 원산서만 한 해 500장 거래

 

“변방 백성 중에 조총을 잘 쏘는 자를 봤습니다. 호랑이가 3, 4간(1간은 약 1.8m 남짓 거리)쯤에 있을 때 비로소 총을 쏘는데 명중시키지 못하는 예가 없으니 묘기라 할 수 있습니다.” <승정원일기, 1724년 10월 15일>

 

조선에서 중요하게 여긴 두 가지 야생동물이 있다.

꿩과 호랑이다.

 

꿩고기는 종묘 제례에 빠질 수 없었다. 임금 생일이나 큰 명절에도 생치(生雉·살아있는 꿩)를 30마리씩 바쳤다. 호랑이는 퇴치의 대상이었다.

 

영조 30년(1754년) 실록에는 경기도에서만 한 달 동안 120명이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다고 나온다.

 

꿩고기는 응사(鷹師)라는 매사냥꾼을 동원해 마련했고,

꿩을 산 채로 잡는 일은 망패(網牌)가 나섰다.

 

망패는 생포를 주로 하는 포획 전문 사냥꾼으로 짐승이 다니는 길목에 그물을 쳐 꿩이나 사슴을 상처 없이 잡았다.

 

민가에서 사냥을 생업으로 삼는 이들은 산척(山尺)이라 불렀다.

 

임진왜란 이후 조총이 보급되면서 산척 대부분은 활을 버리고 총을 들었다.

 

이들을 산행포수(山行砲手)라 불렀고

]이후로 ‘사냥꾼’이라고 하면 으레 산행포수를 지칭했다.

 

평안도 강계의 산행포수가 유명했다.

 

호랑이 사냥꾼을 산척 중 으뜸으로 쳤는데,

강계 지역에 호랑이를 잡는 산행포수가 많았다.

 

개항 직후 함경도 원산항에서만 한 해 호랑이 가죽 500장이 거래되었다고 하니,

산행포수들의 실력을 짐작할 만하다.

 

산척의 사격술은 외국인 눈에는 묘기로 비쳤다.

 

고종의 고문으로 일한 윌리엄 샌즈는

‘조선비망록’에서 산척을 “탁월한 숲 속의 사람”이라며

 

“화승에 불을 붙여 격발하는 구식 화승총을 들고 호랑이나 곰 가까이 다가가 단발로 급소를 저격했다”고 기록했다.

 

산간에 폭설이 내리면 짐승이나 산척이나 움직이기 어려웠다. 이때 산척은 설피(雪皮·덧신)를 신고 설마(雪馬·썰매)를 탔다.

 

설마는 스키와 똑같은 모양으로, 타면 짐승을 잽싸게 뒤쫓을 수 있었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설마는 밑바닥에 기름을 칠해 속도를 높였으며 빠르기가 나는 듯했다고 적었다.

 

산척은 사냥 규율이 엄격했다.

 

산에 들어가기 전 아내와 잠자리를 하지 않았으며,

상을 당한 집에 조문도 가지 않았다.

 

몸을 청결하게 한 뒤 입산해 짐승을 잡으면 반드시 혀나 귀 혹은 심장을 산신에게 바쳤다.

 

노루나 돼지를 잡으면 바로 귀와 혀를 잘라 잎에 싸 젓가락과 함께 높은 곳에 놓고 기도를 올렸다.

 

1907년 9월 3일 ‘총포화약류단속법’이 시행됐다.

그해 11월까지 구식 무기인 화승총, 칼과 창이 9만9747점, 신식 소총이 3766정 압수됐다. 압수한 무기 가운데 화약과 탄약이 36만4366근이나 됐다. 총류 대부분이 산척의 것이었다.

 

총을 빼앗긴 산척은 다른 생업을 찾거나 간도로 이주했다.

국경을 넘은 산척 상당수가 무장독립군에 투신했다.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홍범도 장군 역시 조선의 사냥꾼, 산척이었다